불이학당 12 2017.11.17.
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느냐?”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로써 관철하고 있느니라.”
子曰(자왈) 賜也(사야)아 女以予(여이여)로 爲多學而識之者與(위다학이지지자여)아 對曰(대왈) 然(연)하니이다 非與(비여)이까 曰 (왈)非也(비야)라 予(여)는 一以貫之(일이관지)니라.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로써 관철하고 있다.’
이 말은 진정한 배움(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학(學)은 단지 지식을 습득하여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결코 경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배움의 진정한 길 위에 있을 때라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배움의 길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를 끝까지 구명(究明)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지식이 내 안에 들어와 고정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리이다’하고 고정되는 순간 학(學)의 길에서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제9편 7장에서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물어 오면 아무런 고정 관념이 없이 이 끝과 저 끝을 끝까지 들추어 밝혀 보겠다’고 한 것은 공자의 배움에 대한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진리이다’가 아니라 ‘무엇이 진리인가?’를 끝까지 탐구해 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동안 선인들이 축적해 온 지혜를 배우는 것(溫故)은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학(學)의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단지 죽은 지식에 불과하게 된다. 때로는 대단한 완고(頑固)로 되어 진리를 향한 길에 큰 방해로 되고 만다.
이러한 완고와 완고의 부딪침이 얼마나 많은 대립과 분쟁 때로는 피로써 피를 씻는 전쟁의 원인으로 되어 왔던가?
제17편 8장에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음(不好學)의 여섯 가지 폐단을 지적하신 것은 학(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께서 ‘하나로써 관철하고 있다(一以貫之)’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움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또 다른 면에서 이 일이관지(一以貫之)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목적, 방법, 마인드가 하나로 관철해야 참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폭력적인 방법이나 증오의 마인드를 넘어서지 못하면 그것은 참될 수가 없는 것이다.
상생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중심의 마인드를 넘어서지 못하면 참된 것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이윤 동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동기(動機)가 익지 않으면 참된 것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동안 여러 가지 경험들을 통해서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 그런 사회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공자의 이 일이관지(一以貫之)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②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더불어 말할 만한 사람인데도 함께 더불어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수 없는데도 함께 더불어 말을 하면 말을 잃는 것이 된다. 지자(知者)는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느니라.”
子曰(자왈) 可與言而不與之言(가여언이불여지언)이면 失人(실인)이오 不可與言而與之言(불가여언이여지언)이면 失言(실언)이니 知者(지자)는 不失人(불실인)이며 亦不失言(역불실언)이니라
*말할 때와 말하지 않을 때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는 상대에 따라서 적절하게 하라는 것인데, 사람에 대한 판단을 자의적으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 이것이 될 수가 없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사람도 말도 잃기 쉬운 것이다.
같은 가치관이나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는 것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소통을 막고 있는 것이다. 상호 간에 경쟁 의식 같은 것이 막고 있다면 아직 자신의 미숙함을 먼저 살펴 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미숙함을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이 다른데도 자신의 생각을 열심히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를 잘 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결국 말은 공허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말을 잃는 다는 것은 자신이 지향하는 그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빠져 상대를 보지 않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그 가치가 사실은 체화되지 않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지자는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다’고 할 때 지자는 어떤 사람일까.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③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다투지 않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편당하지 않느니라.”
子曰(자왈) 君子(군자)는 矜而不爭(긍이부쟁)하며 群而不黨(군이부당)이니라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군자의 사회성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군자의 긍지는 아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소인의 긍지(?)는 아집에서 나온다. 그래서 아집과 아집이 만나면 다투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당당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집이 없는 사람을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가장 당당한 사람이다.
진리를 향해서 무타협(無妥協)인 것이다. 흔히 말하는 비타협(非妥協)과는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옳다’라는 고정된 견해가 없이 ‘무엇이 진리인가’를 끝까지 구명하려 는 태도에는 타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타협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다투려 하지 않지만 상대가 다투려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도 하지만 비록 다투는 듯한 외형을 갖게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 쪽의 마음은 다투는 심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워서 말장난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옛 성현들이 사람들과 관계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어렵다는 것은 우리들의 실태가 아집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이지 그것이 불가능한 허황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인간상을 그려보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특권(?)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집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편을 가르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 사람들이 모이면 편이 갈라진다.
몇 사람만 모여도 편이 갈라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본다.
소인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파당을 만든다.
끊임없이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울리지 못하거나, 어울리면 편을 가르려고 한다.
지금은 같은 편이지만 상대편이 사라지면 같은 편 안에서 다시 편이 갈라진다.
이것이 아집의 특성이다.
작게는 개별적 삶에서 크게는 국가나 세계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런 삶이 반복되어 왔다.
끊임없이 편을 가르고 끊임없이 다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실제로 자신은 그 길과는 반대로 가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조건이나 환경 탓을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어 왔지만 그런 상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일까에 대해 공자의 이 말씀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긍이부쟁(矜而不爭) 군이부당(群而不黨)하는 사람으로 되어 편가르기와 다툼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④ 자공이 묻기를, ‘한마디로써 종신토록 지켜 행할 만한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 것이니라.”
子貢(자공)이 問曰(문왈)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유일언이가이종신행지자호)아 子曰(자왈) 其恕乎(기서호)인저 己所不欲勿施於人(기소불욕물시어인)이니라
* ‘한 마디로써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을 묻자 공자께서는 서슴없이(?) 서(恕)라고 말씀하신다.
이 때 서(恕)란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성을 갖는다.
이 점에서는 다른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 욕구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다른 생명체와 구별된다.
이것이 인간을 진화된 존재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유 욕구와 지적 능력은 동물계와 다른 인간의 세계를 만들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 욕구와 능력은 생명 일반이 갖고 있는 속성인 자기중심성과 모순을 일으킨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더욱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자연과의 관계에서나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기중심성에 갇혀 있는 한, 사람은 근원적인 부자유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물질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게 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자각하게 된다.
공자와 같은 성현은 사회적 물질적 조건과 관계없이 이것을 일찍이 설파하고 계신다.
그것을 서(恕)라고 표현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서(恕)라고 하면 용서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흔히 용서라는 말을 할 때는 자기가 중심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진정한 서(恕)와는 다르지 않을까.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임’ 쪽이 본의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대의 마음이 되어 보는 것’이 아닐까.
서(恕)의 실천적 테마로써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을 제시하는 것이다.
21세기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할 때 상극(相剋)의 문명에서 상생(相生)의 문명에로의 전환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끼리의 상생만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의 상생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 때 상생의 기본은 ‘받아들임’인 것이다.
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일찍이 온종일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고 사색하였으나 아무 유익함이 없었고, 배우는 것만 못하였느니라.”
子曰(자왈) 吾嘗終日不食(오상종일불식)하며 終夜不寢(종야불침)하야 以思(이사)하니 無益(무익)이라 不如學也(불여학야)로다
*여기서 말하는 사(思)와 학(學)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백 번을 생각해도 내가 옳다’는 생각이 들 때는 생각하면 할수록 더 화가 나고, 더 억울한 생각이 든다.
생각할수록 풀어나갈 길이 안 보여 막막해 진다. 더 우울해지고 더 절망적이 된다.
지난 뒤에 보면 별일이 아니었는데 당시는 그것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모르는 그런 경험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사(思)가 아닐까?
자기 안에 갇힌 생각이다. 주관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아집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럴 때는 그 생각을 쉬고 밖에 나와 일을 하거나 산책이나 운동을 하는 것이 생각에 전환을 일으킨다.
기분이 전환되면 항상 가까이 놓아두는 책을 펴는 것이 좋다.
그것이 성경이건 불경이건 논어건 좋다. 성현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생각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준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해준다.
학(學)은 아집에서 벗어나 진리를 향해 자신을 열어 가는 길이다.
평생 머리 맡에 두고 볼 수 있는 책을 갖는 것은 인간의 행복조건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성현과의 교류일 때 이 행복은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갖게 될 것이다.
다만 학(學)이나 사(思)의 의미를 경우마다 다르게 썼다는 것을 이해해야 공자를 오해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처럼 사(思)의 진취성(知新)으로 보고 있기도 하고, 학(學)이 온고(溫故)가 아니라 고루함에 빠지는 것을 가장 경계하기도 한다.
인(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경우마다 묻는 사람마다 다르게 답한다.
이것이 읽는 사람들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다보면 공자의 뜻에서 멀리 벗어나기 쉽다.
제 16편 계씨(季氏)
⑥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유익한 즐거움이 세 가지 있고, 해로운 즐거움이 세 가지 있느니라. 예악으로 절제함을 즐기고, 남의 좋은 점 말하기를 즐거워하고, 좋은 벗 많이 갖기를 즐거워하면 유익하니라. 교만함에서 오는 낙을 즐거워하고,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주색의 향락을 즐거워하면 해로우니라.”
孔子曰(공자왈) 益者三樂(익자삼요)오 損者三樂(손자삼요)니 樂節禮樂(요절예악)하며 樂道人之善요도인지선)하며 樂多賢友(요다현우)면 益矣(익의)오 樂驕樂(요교락)하며 樂佚遊(요일유)하며 樂宴樂(요연락)이면 損矣(손의)니라
*유익하다 함은 자신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자신에게는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일은 없다. 지금의 세상에는 많은 경우에 착각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일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해롭게 돌아오고 만다.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말씀하시는 유익한 즐거움이란 마이너스 부담이 없는 절대의 즐거움이다. 어느 누구도 힘들게 하지 않는 즐거움인 것이다. 반대로 해로운 즐거움이란 항상 괴로움을 수반하는 일시적 상대적 즐거움이다.
절제함을 즐긴다는 것이 마음에 와 닿는다. 참으로 어려운 경지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절제라 하면 즐기는 상태라기 보다는 즐겁게 느껴지는 상태를 억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고는 싶은데, 남의 눈이 무서워, 도덕적이지 않아서’ 참는 것이다. 이것은 즐기는 것이 아니다.
예(禮)에 묶이지도 않고, 악(樂)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예악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만끽(滿喫)하는 삶이 아닐까.
남의 좋은 점 말하기를 즐긴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것 같다.
보통의 경우 알게 모르게 남의 흉 보는 것에 마음이 끌린다. 비교감을 바탕으로 남을 낮춰 자신을 높이려는 아집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결국 자신의 아집만을 일시적으로 만족시킬 지는 몰라도 궁극적인 행복과는 점점 멀어지고 만다.
그러니까 다소 노력을 해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것만 해도 좀 나은 것이지만 즐기는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진짜는 그것을 즐기는 상태인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즐겁게 되고 주위의 공기가 바뀌게 된다.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좋은 벗을 많이 갖기를 즐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앞에서도 자기보다 나은 벗을 사귀라는 말이 있었지만 아집이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편한 상대나 이익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을 벗으로 하려는 경우가 더 많다. 결국 자신의 아집을 확대할 뿐 궁극적 자유나 행복의 길은 아니다.
그래서 다소 불편해도 자기보다 나은 벗, 좋은 벗을 사귀려고 한다. 그것만 해도 좋은 일이지만 좋은 벗 사귐을 즐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즐거움은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 비교나 상대의 불완전한 즐거움이 아니라 절대의 무한한 즐거움인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의 샘(泉)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아집에 가려 있을 뿐이지 않을까. 죽기 전에 이 샘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세 가지 해로운 즐거움이란 일시적 상대적 만족감을 줄지는 몰라도 항상 보다 큰 괴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다. 비교우월감에서 교만을 즐기는 사람은 바로 그 비교열등감 때문에 항상 전전긍긍하게 된다.
요즘 ‘게으르게 살고 싶다’ ‘본능대로 살고 싶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어떻게 보면 먹고 살기 위해 정신 없이 뛰어야 했던 지난 날이나 규범이나 인습에 억매여 ‘하고 싶은 욕구’를 억제해야만 했던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은 자유욕구를 특징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대한 반작용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유욕구를 진정으로 만족시키는 길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 올바른 길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인정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지나치게 극단으로 가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인간의 자유욕구는 인간의 지적 능력과 올바르게 결합할 때만 진실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게으르고 쾌락에 몸을 맡기는 것은 결코 자유의 길이 아니다.
다만 누구도 과거처럼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국가도 부모도 도덕의 이름으로도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자각에 의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제17편 양화(陽貨)
⑦ 자장이 공자께 인(仁)에 대하여 여쭈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섯 가지를 천하에 행할 수 있는 것이 인이니라."
자장이 그 다섯 가지에 대하여 듣기를 청하자 말씀하시기를, "공손·관대·신의·민첩·은혜이니라. 공손하면 모욕을 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여러 사람의 지지를 받고, 신의가 있으면 남이 일을 맡기고, 민첩하면 공적을 올리게 되고, 은혜로우면 사람을 부릴 수 있게 되느니라."
子張(자장)이 問仁於孔子(문어인공자)한대 孔子曰(공자왈) 能行五者於天下(능행오자어천하)면 爲仁矣(위인의)니라 請問之(청문지)한대 曰(왈) 恭寬信敏惠(공관신민혜)니라 恭則不侮공즉불모)하고 寬則得衆(관즉득중)하고 信則人任焉(신즉인임언)하고 敏則有功(민즉유공)하고 惠則足以使人(혜즉족이사인)이니라
*인(仁)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인을 추상적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무르기 쉬운 우리들에게는 그 실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다.
인은 다섯 가지 덕목이 조화된 인격에 의해서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 가지 덕목 가운데 한 두 가지는 가질 수 있으나 이 다섯 가지를 모두 한 인격 안에서 조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공손하고 관대하기는 하지만 민첩하지는 못하는 경우도 많고, 신의가 있고 민첩하지만 공손하거나 관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공손하면 무시당하거나 모욕당하기 쉽다고 해서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로부터의 반응을 의식하는 공손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절대의 공손은 결코 모욕당할 수 없는 것이다.
관대함도 사람을 얻는 수단으로서 하는 경우는 얼마 안 가서 그 밑천이 들어 나고 만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길러져야 하는데, 이 힘은 무아집의 힘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림 없다.'라는 생각이 강한 사람은 결코 관대할 수 없는 것이다.
신용이 있으면 남이 일을 맡기고, 민첩하면 공적을 올린다는 말은 인(仁)의 실천이 결코 어진 성품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해준다.
인의 중요한 덕목의 하나가 그 실제적 능력이라는 것은 논어의 여러 장들에서 이야기 되고 있다.
이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공손하고 관대하며 베푸는(惠) 태도와 실무적 능력을 함께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한 것도 이런 바탕에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민첩하고 약속을 잘 지키나 관대하지 못하거나, 공손하고 관대하긴 하지만 실무적 능력이 없거나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은 공자가 말씀하시는 인(仁)의 실천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⑧ 필힐이 부르니 공자께서 가시려 하자 자로가 말하기를, "전에 저는 선생님께서 '직접 그 자신이 악한 짓을 한 사람의 집에 군자는 들어가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필힐이 중모읍에서 반기를 들었는데도 선생님께서 가시려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느니라. 갈아도 엷어지지 않는다면 굳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면 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 어찌 박이나 외이겠느냐? 어찌 매달려 있기만 하고 먹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佛힐(필일)이 召(소)어늘 子欲往(자욕왕)이러시니 子路曰(자로왈) 昔者(석자)에 由也聞諸夫子(유야문저부자)호니 曰(왈) 親於其身爲不善者(친어기신위불선자)어든 君子不入也(군자불입야)라 하시니 佛힐(필힐)이 以中牟畔(이중모반)이어늘 子之往也(자지왕야)는 如之何(여지하)잇고 子曰(자왈) 然(연)하다 有是言也(유시언야)니라 不曰堅乎(불왈견호)아 磨而不磷(마이불린)이니라 不曰白乎(불왈백호)아 涅而不緇(날아불치)니라 吾(오) 豈匏瓜也哉(기포과애재)라 焉能繫而不食(언능계이불식)이꼬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과 '갈아도 엷어지지 않고,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삶'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공자의 인격 안에서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고고(孤高)하여 세상과 담을 싸는 것이나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부류와는 다른 것이다.
이런 인격은 바탕이 무아집이 될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마음의 바탕에는 불선(不善)한 곳에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인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⑨ 공자께서 자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유야, 너는 육언육폐를 들었느냐?"
"아직 듣지 못했나이다."
"앉거라. 내 너에게 말하여 주리라. 인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어지고, 지혜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허황하여지고, 신의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의를 해치게 되고, 정직함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가혹하여지고, 용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폭하여지고, 굳세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무모해지느니라."
子曰(자왈) 由也(유야)아 女(여) 聞六言六蔽矣乎(문육온육폐의호)아 對曰(대왈)未也(미야)로이다 居(거)하라 吾語女(오어여)하리라 好仁不好學(호인불호학)이면 其蔽也愚(기폐야우)오 好知不好學(호지불호학)이면 其蔽也蕩(기폐야탕)이오 好信不好學(호신불호학)이면 其蔽也賊(기폐야적)이오 好直不好學(호직불호학)이면 其蔽也絞(기폐야교)오 好勇不好學(호용불호학)이면 其蔽也亂(기폐야란)이노 好剛不好學호강불호학)이면 其蔽也狂(기폐야광)이니라
* 인(仁)·지(知)·신(信)·직(直)·용(勇)·강(剛)은 군자의 육덕(六德)이다.
그런데 이 육덕을 좋아하면서도 육폐(六蔽)로 될 수 있음을 말하고 계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정으로 좋아한다기 보다는 자기류로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육덕과 육폐의 갈림은 호학(好學)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호학이란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은 무고정 무아집을 지향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다' '내 생각은 틀림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배움은 이루어지질 않는 것이다.
자기 주장을 더욱 강하게 고착시키려는 경향의 공부나 학문의 길은 진정한 배움의 길이 아닌 것이다. 단정이나 고정이 없이 '진리란 무엇인가'를 끝까지 물어가는 태도가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이 호학(好學)이다.
공자는 무아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구체적으로 무아에 이르는 실천을 대단히 중시하고 계신다. 논어의 첫 머리에 이 호학(好學)의 기쁨(學而時習之不亦說乎)을 말씀하시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라고 생각한다.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즉 자기류(自己流)로 고정된 덕은 아무리 교묘하게 치장한다 하더라도 그 폐단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