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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운동가들에게 드리는 덕담

작성자남곡|작성시간18.03.05|조회수569 목록 댓글 0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을의 풍속이 어질어야 사람의 마음도 아름답게 되는 것이니, 어진 곳을 택하여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으리요!”
(子曰 里仁 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논어 41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이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불변의 사실이다.
 그 사회제도와 문화는 달라졌지만 마을의 풍속이 어질어야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게 된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과거 농경시대의  마을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를 비롯한 급격한 사회변동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급격하게 변화시켰고 마을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다
오늘 이농(離農)으로 텅 비어버린 고령화된 농촌 마을과 급속하게 팽창한 대도시의 고층 아파트 단지를 떠올리면 그 동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농경 시대의 공동체는 해체되어 가고 자본주의의 물결이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곳에 스며들어 농촌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어진 풍속의 마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이익을 줄 곳을 찾아 이동한다.
취업하기 좋은 곳, 자녀를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는데 유리한 곳에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된다.
교통, 통신, 대중매체의 발달로 거의 획일화된 가치관과 문화를 갖게 되기 때문에 특히 어진 풍속의 마을이라는 말은 실감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가치관과 문화 속에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산업사회 이후의 어진 풍속의 마을을 그리게 된다.
이제 인위적으로 마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제는 ()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가는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진 풍속의 마을이 새롭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자녀의 양육을 위해 이제 새로운 의미에서 어진 풍속의 마을을 선택하려 할 것이다.
요즘 마을 만들기나 도시의 공동체 운동등이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원효(元曉)의 말이다.

"펼침과 합함이 자재하고(開合自在) 주장하고 반대함이 걸림이 없으며(立破無碍), 펼쳐도 번잡하지 아니하고 합하여도 좁지 아니하며 주장하여도 걸림이 없고 반대하여도 잃음이 없다."

(開合自在 立破無碍 開以不繁 合以不狹 立以無碍 破以無失)

 

산개(散開)하면 개인이고, 보합(補合)하면 공동체다. 지금은 산개하여 개인이 해방되는 시기이지만 무질서와 혼란으로 번잡하지 않고開以不繁, 보합하면 공동체이지만 서로 침범하고 간섭하는 좁은 세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合以不狹. 무엇을 세우거나() 무엇을 파기하여도() 걸림이 없는 마을(공동체)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1. ‘사이좋아지는연습이다.

사실 멀리 있는 사람과는 별 문제가 안 생긴다. 늘 가까이 있는 사람이 문제다.

그 원인을 잘 보면 바탕에 내가 옳다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집이라고도 하고, 에고라고도 하는 것 같다. 사람들과 사이좋아지려면 자신이 이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해야한다. 이런 연습을 한다면, 부부가 사이좋아지고, 부모자식 간에 소통이 잘되고, 이웃끼리 화목하게 살 수가 있게 된다.

 

논어의 다음 구절들은 참된 소통과 탐구 그리고 사이좋음의 길을 잘 보여준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공자 말하기를, “이단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다.” (2편 위정)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공자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두들겨 끝까지 밝혀 가보겠다.” (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사실 그 자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물어오더라도 불가지(不可知)라고 회피하지 않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단정이 없이, 즉 내가 인식하는 것은 나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휠터를 통과한 것이라는 자각을 견지하면서, 그러나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그 양 끝을 두들겨 끝까지 탐구해 보겠다.”

 

2. ‘이익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으로 매개되는 인간관계를 넘어서는 연습이다.

사실 말로는 쉽지만, 참 어렵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데 주위 모두가 에 매여 사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고 생각하기 쉽게 되어 있다. 그렇다. 혼자서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마을(공동체)운동은 이런 연습, 즉 돈이 아니라 인정으로 맺어지는 관계를 연습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또 그렇게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사실 지금 하시려고 하는 일들도 그런 방향의 일들을 하고 계신 것이다.

 

논어의 구절을 소개한다.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쳐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 富之 , 旣富矣 又何加焉 , 敎之 (子路 第十三)>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學而 第一)>

 

3. ‘즐겁게 사는연습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 있다.

사실 즐겁지 않으면 아무리 무슨 성과를 거둔다고 그것이 행복은 아니다.

경쟁은 생산력은 높일지 모르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무감이나 사명감으로 하는 것도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있다.

14세기의 에크하르트라는 신학자는 거룩함을 세가지로 이야기한다.

자발성과 전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기쁨입니다.

그 일이 즐거워야 진짜인 것입니다.

이 진짜를 연습하는 장()이 마을(공동체)운동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우선 좋아하는 일을 같이 해보는 동아리 같은 활동도 좋을 것 같다.

요리를 좋아하는 분들이 모여서 지역사회의 어려운 분들과 나누는 일이라던가,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를 해서 지역의 문화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은 어떨까?

오케스트라하니까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우선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악기 몇 개 가지고 출발하면 오케스트라 아닌가?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이 합창단을 만들고, 다양한 형태의 독서회도 해볼만하다. 아마도 이미 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마을운동을 즐기면서 하신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속의 보물을 발견하는 길이 아닐까?

 

논어의 다음 구절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증자가 말했다.

, 그러합니다.”

공자가 나가시자 제자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따름이니라.”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里仁 第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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