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료실

21세기의 마을, 논어를 통해 그려본다.

작성자남곡|작성시간18.07.18|조회수516 목록 댓글 0

21세기의 마을, 논어를 통해 그려본다.

 

요즘 가장 뜨거운 화두(話頭)의 하나가 풀뿌리민주주의와 협치(協治).

그것은 한국민주주의의 역사와 전개과정에서 당연한 요구로 나타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수입했다. 제도는 수입해서 빠른 기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의식(意識)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요즘 제도와 의식의 괴리가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과제가 되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지역 자치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내용 상으로는 의식과 문화의 민주주의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정치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나는 국회나 정부 정당을 비롯한 중앙정치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가 시대적 테마라고 생각한다.

협치는 풀뿌리 민주주의와 동전의 앞 뒷면 같은 것이다.

협치는 다방면에 걸쳐 요구된다.

중앙정부의 협치와 연정도 시대적 과제이고, 여러 사회운동 단체 사이의 협치나 이념단체의 합작요구 등도 있다.

특히 요즘 민관협치라는 말이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가장 뜨거운 잇슈로 되고 있다.

반드시 거쳐야할 민주주의의 성숙 과정이다.

우리는 민()이 관()의 동원 대상이었던 독재시대(산업화시기)와 관()이 민()의 저항 대상이었던 민주화시대를 거쳤다.

대등한 입장에서 협치(協治)를 경험하고 축적한 역사가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러나 지금 이것을 건강하게 성공시키는 것은 한국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다.

 

마을은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사회 단위다.

마을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협치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오랜 고전인 논어의 재발견을 통해 검토해보기로 한다.

 

 

子曰 里仁 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4)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을의 풍속이 인()해야 사람의 마음도 아름답게 되는 것이니, ()한 곳을 택하여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으리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이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불변의 사실이다.
 그 사회제도와 문화는 달라졌지만 마을의 풍속이 좋아야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게 된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과거 농경시대의  마을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를 비롯한 급격한 사회변동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급격하게 변화시켰고 마을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다
오늘 이농(離農)으로 텅 비어버린 고령화된 농촌 마을과 급속하게 팽창한 대도시의 고층 아파트 단지를 떠올리면 그 동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농경 시대의 공동체는 해체되어 가고 자본주의의 물결이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곳에 스며들어 농촌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어진 풍속의 마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이익을 줄 곳을 찾아 이동한다.
취업하기 좋은 곳, 자녀를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는데 유리한 곳에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된다.
교통, 통신, 대중매체의 발달로 거의 획일화된 가치관과 문화를 갖게 되기 때문에 특히 어진 풍속의 마을이라는 말은 실감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가치관과 문화 속에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산업사회 이후의 건강하고 인정이 흐르는 마을을 그리게 된다.
이제 인위적으로 마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제는 ()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가는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진 풍속의 마을이 새롭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자녀의 양육을 위해 이제 새로운 의미에서 어진 풍속의 마을을 선택하려 할 것이다.
요즘 농촌에서 일어나는 마을 만들기나 도시의 아파트 공동체 운동등이 그런 방향으로 발전해야 지난 산업화의 과정이나 민주화의 과정에서 흘린 땀과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다.

 

 

1. 소통 · 협의 · 결정 과정이 민주적으로 사이좋게 이루어지는 것이 출발점이다.

 

인간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지구 상에서 관념을 가진 유일한 존재다.

이것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인간의 우수함이다.

그런데 이 관념이 대단히 쉽게 굳어지는 특성이 있다.

그러다보니 생명체 일반이 갖는 <자기중심성>보다 훨씬 강한 경직성을 갖게 된다.

이것을 보통 아집이라고 부른다.

공자는 무아집 같은 말은 한 적이 별로 없지만, 실제로 인간 관념의 함정을 정확히 보고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관념의 정상화라고 보고 있다.

사람들과 집단들 사이의 대립· 분쟁, 종교·사상 간의 대립·분쟁 등이 이 관념의 정상화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리라.” (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다.” (2편 위정)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위의 세 문장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해석해 보겠다.

 

(인간)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이다.(무지의 자각) 그러나 누가 물어오더라도(어떤 현실문제도 외면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휠터를 거친 것으로 사실과 별개라는 자각을 유지하며(공공),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검토하여 밝혀 가겠다.

단정(斷定)이 없이 그 시점의 의()를 찾아 그에 따르겠다. 그러나 그 의()도 결코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은 당연히 공격 대상이 아니다. 오직 검토의 대상일 뿐이다

 

이상은 내가 재해석한 공자의 메시지다.

대단히 과학적이다,

중학교 과정에서 배우는 과학 지식이지만, 박사학위를 받아도 자신의 삶과 사회적 실천과는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오래된 지혜를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21세기 마을 운동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2. 돈의 지배와 각자도생의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마을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식()()()를 해결하는 것이 1차적 생존 조건으로 된다.

인간은 그 지적 능력(도구 사용능력)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는데서 다른 동물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엔 그 능력 때문에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되어, 물질에 의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특히 자본주의에 오면 물신(物神)의 지배가 모든 영역에 걸쳐 확산된다.

물질을 생존을 위한 1차적 조건으로 보면서, 항상 그 물질을 수단 이상의 가치로 보지 않는 공자의 태도 또한 현대의 삶 속에서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잘 보여준다.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쳐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 富之 , 旣富矣 又何加焉 , 敎之 (子路 第十三)>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자공이 여쭈었다.

시경에서 말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란 바로 이를 말하는 건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비로소 함께 시를 논할 만하구나. 하나를 말하면 그 다음을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學而 第一)>

 

현대적인 용어로 재해석해보겠다.

 

사람들이 모여 사회(마을)을 이루면 가장 먼저 그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특수한 사람을 제외하면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야 정신이 성숙할 수 있다.

물질적 수요의 충족()은 행복의 필요조건이다.

그 다음 이것이 정신적 성숙()으로 이어져야 행복하게 된다.

정신적 성숙()의 목표는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貧而無諂),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는(富而無驕) 정도를 넘어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貧而樂),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富而好禮)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빈이락(貧而樂)은 가난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다. 불가피한 가난은 받아들이되, 정신적 예술적 가치를 즐기라는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열등감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특히 현대의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삶을 의무나 사명감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부이호례(富而好禮)는 부유한 사람은 나누고 풀어놓는 것()를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우월감이나 비교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좋아하는것이다.

()’를 이렇게 해석하는데 의아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장 오해된 것이 공자의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뒤에 따로 이 것을 부연한다.

이런 바탕에서 공자의 다음 말을 덧붙인다.

나라가 있고 가문을 가지고 있는 자는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않음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한다. 대체로 고르면 가난함이 없고, 화합하면 부족함이 없고, 안정되면 기울어지지 않는다.”

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16편 계씨)

 

3. 삶이 즐거워야 진짜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 있다.

사실 즐겁지 않으면 아무리 무슨 성과를 거둔다고 그것이 행복은 아니다.

경쟁은 생산력은 높일지 모르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무감이나 사명감으로 하는 것도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있다.

14세기의 에크하르트라는 신학자는 거룩함을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자발성과 전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기쁨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충()의 상태이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최고의 덕목으로 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증자가 말했다.

, 그러합니다.”

공자가 나가시자 제자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따름이니라.”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里仁 第四)>

현대적인 말로 해석해 본다.

공자의 도는 서()와 충()으로 일관되어 있다. ()는 상대방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15편에서 한마디 말로 평생 실현할만한 것을 자공이 물었을 때 공자는 ()’를 말하고 그것은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말라)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함께 살아갈 때, 이것이 안 되면 자기 일에 기쁘게 전념()할 수 없다.

또 반대로 자기 일에 기쁘게 전념할 수 있을 때,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일관된 공자의 입장이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다는 당연한 것이다

 

4. 이상적인 질서, ()

 

제자가 10(300) 후의 일을 알 수 있냐는 질문에 하()ᆞ은()ᆞ주()'()'가 이어진다면 100(3000) 후도 알 수 있다고 답한다.
10년 후도 예측하기 어려운 지금 생각하면, 당시 사회의 단순함도 그 배경이 될 것이다.
그런 측면도 있지만,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세 왕조의 특징은 ''에 의한 질서였다.
그가 생각한 '''' '' '' '' 등으로 표현된 마음을 바탕으로 자율적 질서를 의미하고 있다.
법치가 필요조건이라면 이상적인 질서를 완성하는 것은 ''에 의한 질서로 본 것이다.
100세 후는 거의 지금에 해당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미래의 세상은 역시 공자가 그리는 그런 세상을 현실화ᆞ·보편화 하는 것이 아닐까?

 

*유자(有子) 말하기를, “예를 운용함에는 화()가 중요하다. 선왕의 도가 아름답다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이 다 이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 좋은 줄만 알고 예로써 절제할 줄 모르면 행해지지 않는다.”(1-12)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공자 말하기를, “법제로 다스리고 형벌로 질서를 유지하면 백성들은 형벌을 면하려고만하지 부끄러움을 모를 것이다. 덕으로 다스리고 예로서 질서를 유지하면 부끄러움을 알고 바르게 될 것이다”(2-3)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 자장이 십세 이후의 일을 알 수 있습니까?”고 묻자 공자 말하기를,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따랐으니 거기에 가감했음을 알겠고,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따랐으니 거기에 가감했음을 알겠다. 혹시 주나라를 있는 나라라면 비록 백세라도 알 수 있다”(2-23)

子張問 十世可知也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可之也

 

* 공자 말하기를, “사람이 불인하면 예는 무엇할 것이며, 사람이 불인하면 악()은 무얼할 것인가?”(3-3)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 공자 말하기를, “예와 양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예와 양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예는 있어 무엇하겠는가?”(4-13)

子曰 能以禮讓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爲國 如禮 何

 

현대에 있어서도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은 법이고, 그것은 국가형벌권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사회질서와는 거리가 있다. 우리가 만드려는 21세기의 이상적인 질서는 서로 양보()하는 마음에 바탕을 둔 자율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허례허식(虛禮虛飾)은 공자가 가장 경계한 것이고, 마치 공자가 그것을 조장했다는 해석은 그야말로 공자를 죽이는 것이다.

공자를 제대로 살려야 하는 것이 현대의 과제를 푸는 열쇠의 하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