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함은 난세의 징조요, 사람이 인이 아님을 지나치게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다”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8-10)
‘好勇疾貧 亂也(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미워하면 난세가 된다)’의 구절에서는 진정한 용기와 가난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勇은 2장의 勇而無禮則亂의 勇을 말하는 것 같다. 조화가 없는 절제되지 않는 용과 가난을 미워함이 결합되면 어떻게 될까.
또 하나는 가난에 대한 태도인데,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공자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貧이나 富를 최고의 가치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는 좋은 것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仁이고 道이고 義인 것이다.
부를 얻을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것이다.
貧을 미워하는 것과 無禮한 勇이 결합하는 것은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 아니다.
貧을 미워하면 富를 미워하게 된다. 이 미움이 바탕이 되어서 일어나는 亂은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후 모든 변혁의 역사 속에서 성찰되어야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불인한 사람을 너무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다)’는 구절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이나 그 동안의 여러 변혁 운동들을 생각하게 한다.
잘못된 일이나 사람을 볼 때 그것을 고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잘못을 고쳐 仁義를 실현하려고 하는 마음과 그 不仁에 대한 미움이 일어나는 것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이것이야 말로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나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핵심적인 테마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미움은 인을 실현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하셨다.
인류는 오랜 동안의 역사를 통해 점차 이런 이치를 깨달아가고 있다. 증오나 분노가 바탕이 되는 변혁은 결국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뼈아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仁義를 실현하려는 에너지와 분노나 미움의 에너지를 분리할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성숙하였다고 생각한다.
절대적 가난, 공공연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던 과거에는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보통의 사람들이 자유와 행복을 위해 어떤 길을 가야할 지에 대해 과거 성현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들었던 이치를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불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는 인을 실현해 가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 그런 운동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포지티브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