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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대하여

작성자남곡|작성시간18.11.19|조회수500 목록 댓글 0

*오래 전에 썼던 글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보에 대하여(1)

 

진보는 인류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고, 수 없이 많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지만, 인류는 자유 확대의 길을 걸어 왔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자연계의 제약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물질적 자유’ ‘억압과 착취,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사회적 자유’ ‘의식을 가진 고등생명체인 인간만이 갖는 관념의 부자유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는 관념계의 자유를 포괄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인류는 진보의 길을 걸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말하는 진보의 위기보수의 위기등은 정체성이 애매한 현실 정치권력의 향배에 관한 것일 뿐이다.

진보든 보수든 그것이 위기라면 사실이 아니라 관념에 지배되는 낡은 것의 위기일 뿐이다.

 

지금은 좋든 싫든 세계화의 시대다.

자국 안의 모순이 세계의 모순과 점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간다.

전쟁, 양극화, 지구생태계의 위기 등 현상들 배경의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인간의 고도한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인 의식 사이의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 확대를 향한 진화의 길에서 인간의 지적능력은 눈부시게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자연의 법칙들을 이해하고,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적 자유를 획득하는데서, 또 사회적 모순을 이해하고 사회적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제도를 진척시키는데 있어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왔는데, 그러한 능력들이 자기중심적 의식과 결합하고 그것을 넘어서지 못함으로서 지금의 위기를 낳고 있거나 오래된 모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인류의 종()적 위기를 배수진으로 하면서 이제 관념계의 자유(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를 인간 진보의 최고 목표로 할 수 있는 지점까지 역사가 나아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능력을 뒤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의식체계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부자유의 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성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자유 욕구를 신장하는 길이어야 진정한 것이다.

즉 즐거워서 자발적으로 그 변혁을 이루어가는 것이 미래 혁명의 핵심이다.

물론 국가간 모순이나 계급모순 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모순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과거와는 전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진보적 노력과 인간의 의식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이 결합하고 상호 침투해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내가 젊어서 운동을 할 때는 조사 없이는 발언권 없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실사구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의 운동가들에게는 생활 없이는 발언권 없다라는 말을 더 보태고 싶다.

새로운 세상을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100명에 한 명 만 있어도 그것은 엄청난 것이다. 그들은 주위로부터 신뢰를 받고, 주위를 사랑하며 주위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전략도 넘어서는 최고의 혁명 전략이다. 아니 혁명 그 자체다.

요즘은 연습장이 넓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협동 생산이나 단순소박한 생태적 삶의 실천, 마을공동체 운동, 기부와 자원봉사 등은 대단히 좋은 연습장으로 되고 있다.

나는 기부와 자원봉사를 자발적인 풀어놓음으로 부르고 싶다. 풀어놓음으로서 자타가 함께 풍성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단결과 투쟁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는 연습의 장이 되어야 진실한 것이다.

노동조합 특히 대규모 노동조합이나 공공 노조가 기득권에 머무르거나 조합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 · 임금이나 연금의 격차해소 등을 통해 노동계급의 연대와 도덕성을 발현함으로서 자본과 정부로 하여금 비정규직 문제와 실업문제를 해결하도록 강하게 견인해낼 수 있어야 한다.

투쟁 따로, 새로운 사회 만들기 따로가 아니라, 이것을 큰 하나로 통합하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부자도 즐겁게 당원이 되고 싶어하는 진보정당이 출현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계속)

 

 

 

 

 완고한 진보는 형용모순이다 2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선 시대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선진화인간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화란 물신(物神)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의미와 동물계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존재로 인간이 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진화의 내용이 인간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화의 정치시장의 인간화그리고 의식문화혁명이 서로 삼투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요즘 대선 국면에서 나오는 통합, 연정, 경제민주화, 복지, 정의 등의 잇슈들은 사실 이러한 과정의 일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진보세력이 이런 테마들을 앞에서 견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의 세계와도 맞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도 맞지 않는 과거의 틀들로부터

한 쪽 발만 벗어나고, 다른 발은 과거의 틀에 묶여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을 무슨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심정이 되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을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특정의 이데올로기나 정파의 입장을 진보라고 혼동해 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진보는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기 위해 어떤 고정된 틀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한 때 어떤 이데올로기나 실천이 유효했다면 그 시대는 그것이 진보다. 그러나 시대와 사회가 바뀌었는데도 낡은 생각이나 정서에 묶여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보가 아닌 것이다.

요즘 완고한 진보라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말은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완고는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의(公義)는 완고하지 않다. 사의(私意)나 사욕(私慾)이 끼어들 때 완고하게 된다.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성숙도가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능력이나 덕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새로운 시대의 진보를 위하여 몇가지 말씀을 드려볼까 한다.

 

첫째는 폭력혁명에 대한 미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요즘 공개적으로 폭력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미련이 이념 뿐만 아니라 정서 속에 남아 있는 경우는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입장도 또 다른 단정(斷定)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새로운 세계는 지적 혁명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급격하고, 폭력적인 혁명은 아니지만, 인간의 질적 진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혁명의 주체는 지식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인은 과거 시대에 회색분자로 비아냥받던 계급으로서의 인텔리겐챠가 아닌 공인(公人)을 말한다.

세계가 즉 자연과 인간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 그리하여 독점이나 자기의 폭을 넓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싶어지는 인간’ ‘자신의 생각은 사실과는 별개라는 것, 따라서 내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이 진정한 지식인입니다.

나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나 계급 · 민족 속에서 이런 지식인 즉 새로운 시대의 혁명 주체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아마도 이런 주체들이 그 생산과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제도나 시스템을 바꾸거나 새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있는 현상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둘째는 민주집중제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부르죠아 민주주의의 위선과 기만에 반대해서, 실질적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위해서 민주집중제가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었던 때도 있었고, 아직도 이념이나 정서 속에 또는 습관이나 관행 속에 남아 있는 것도 같다.

민주집중제는 민주보다는 집중에 방점이 찍히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것이다. 즉 독재를 낳게 되어 있다.

부르죠아 민주주의가 가진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달성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대단히 높은 성과다. 이것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진보적 입장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시대였다면, 이런 말은 대단히 반동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계속)

 

새로운 진보정당 3.

 

더 나아가 지금과 같은 누가 옳은가하고 토론해서 결국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런 방식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진보가 선두에 서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연찬해서 가급적 전체가 일치한 견해에 도달하는 방식의 연찬민주주의’(적절한 명칭이 없어서 제 임의로 사용합니다. 화백민주주의라고 하면 그 내용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우선 진보적인 정당 안에서 이런 시도를 하고 이것이 문화로 자리잡으면, 이것은 민주주의 역사에 획기적인 일로 될 것이다.

이것은 우성(優性) 인자이기 때문에 이런 정당이라면 처음에는 비록 소수당일지 몰라도 정치를 권력쟁탈의 장으로부터 사람의 자유를 확대하는 조화의 예술로바꾸게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요즘 아무리 통합상생을 이야기해도 이런 내용이 없으면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비록 소수당이라도 조화의 정치를 선도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당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약자가 무슨 조화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굴종이나 예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비록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변하지만, 미래 사회의 주체라는 주인의식으로 약자의식이나 피해자의식을 넘어서는 것이 진보정당의 도덕적 힘이 되어야한다. 비록 현실적으로 억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그러다보면 어느덧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정당으로 될 것이다.

 

셋째 계급투쟁론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나야 한다.

계급 발생을 비롯한 계급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원시공동체 사회를 지나면서 계급제 사회로 되고,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그 투쟁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되어서 역사가 진보해 온 것도 사실의 한 면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것을 자본주의의 초기에 역사발전의 일반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이 마르크스다.

그 이후 유물사관과 그에 바탕을 둔 계급투쟁론이 사회진보의 이론적 실천적 지침으로 되어 왔다. 물론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의 사상이론이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 근본 이론은 오랫동안 사회변혁의 이론적 실천적 기둥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계급이 있고, 투쟁이 있다. 또 그 사회의 계급구조나 제도가 사람들의 의식(意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이라거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단정(斷定)하는 것으로 과학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사회의 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기 특히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나 그것이 사회변혁의 주된 요인으로 되는 시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다수 민중이 포섭되어 진정한 자주성과 자유로운 정신이 사회구조에 의해 막혀 있을 때는 그것을 투쟁에 의해서 전복하는 것이 진보의 목표가 되고, 실제로 그런 시기도 거쳤다.

그러나 마지막 계급투쟁으로 계급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한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하면서 나는 그러한 사상이론들이 검증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으로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옳지도 않고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이루고 싶어하는 진보주의자들이라면, 낡은 사상이론의 주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내가 주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단순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는 여러 가지 정서나 욕망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보편화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나 자본가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세계 인류의 지금의 보편적 의식이나 보편적 욕구에 부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현실에 맞지 않을까?

따라서 지금의 세계 변혁을 위해서는 의식(意識)의 선도성(先導性)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목표를 자본의 지배로부터 노동계급의 해방에서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으로 높여 잡아야 한다.

물론 자본의 지배로부터 노동을 해방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이긴 하지만, 그것은 물신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목표에 부분으로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은 그 자체로 사회적 균형을 잡아간다는 점에서 진보적이지만, 물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동력으로는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만 해도 자영업자의 수가 600만에 가깝다고 듣고 있다.

계급투쟁이 곧 진보다라고 하는 인식이나 정서에서 벗어날 때, 사실의 세계가 보여 오지 않을까. 그럴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보운동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계급조화론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맞다고 본다.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실 분들도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는 계급적 모순을 호도하여 투쟁을 약화시키고 지배계급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음모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라면 자본가까지도 견인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과 도덕적 힘을 가지고 계급조화론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보가 목표로 할 수 있는 사회가 현실적으로 무계급사회가 아니고 계급조화사회이기 때문이다. 끌려가는 조화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조화인 것이다. 조화라고 해서 투쟁을 배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 계급 특히 대기업의 탐욕과 독점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고 변화를 유도하는 입법과 제도적 장치를 위해서 투쟁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계급조화론은 우리 시대의 경제정의(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바탕에 설 때 진보적인 것이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는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새로운 사회의 비전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계급조화론을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 이니시어티브를 가지고, 또 철학적 바탕을 가지고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길이 무계급사회, 무소유사회라고 하는 인류의 이상향을 향한 현실적 도정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궤변이라고 또는 백일몽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나 자신의 부족한 경험과 사색이지만 가장 진지한 자세로, 또 한국의 진보운동에 대한 충심으로 되는 애정을 가지고 이런 말씀을 드린다.

내가 옳다는 생각은 없지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의 지평을 열어가시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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