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원 선생님의 노자 연구를 응원합니다.
나는 60이 넘어 공자(孔子)를, 70이 넘어서 노자(老子)를 만났다.
어떤 사상이나 인물 특히 성인(聖人)으로 존경받는 인물을 만나는 것은 시절 인연(因緣)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다.
물론 만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자기본위’를 벗어나기 힘든 범인(凡人)에게는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두 분과 만난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데 엄청난 사건이었다.
젊어서 이른바 민주화 운동이나 사회개혁을 하는 동안 공자와 노자는 아주 멀리 있는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단순히 관심 밖이 아니라 우리가 넘어서야할 낡고 현실도피적인 반동적인 사상의 창시자들이었다.
개인적인 여러 경로를 거치지만, 특히 내가 50대에 무소유사회의 실험에 8년 간 동참하고, 그곳에서 ‘연찬(硏鑽)’이라고 하는 소통과 탐구 그리고 합의 방식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아직은 무소유 사회와 같은 실험이 보편화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 그곳에서 나와 새로운 시도를 하는 때가 아니었다면 나와 같이 논어를 읽어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여전히 공자는 낯설었을 것이다.
장수에 와서 인근의 젊은 벗들과 소통과 탐구 방식의 모색을 하면서 택한 책이 ‘논어’였다.
2년 동안 매주 1회 거의 쉬지 않고 ‘논어 읽기’를 했다.
나에게는 특히 ‘연찬(硏鑽)’의 경험이 논어에서 사람들이 잘 발견하지 못하는 정말로 귀한 보배들을 발견할 수게 하였다.
그것이 요즘 내가 인문운동의 도구로 ‘논어’를 주로 사용하는 배경이다.
노자(老子)에 대해서는 공자보다 더 편견이 심했다.
‘무위(無爲)’와 ‘불학(不學)’을 주장하고, 문명을 부정하는 초월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사상 조류로 오랫 동안 유교와의 대척점에서 서로 충돌해 온 사상 정도로 알고 있었다.
현대에 들어와 노자(老子)가 공자보다 더 인기를 끄는 것은 반생태적 현대문명이 인류의 위기로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노자(老子)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 인연이 장태원 선생님이었다.
장 선생님과는 내가 60이 넘어서 만나 뵙게 되었는데, 평소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 깊이 통하는 세계를 느끼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선생님께서 오랫 동안 노자를 연구하시고 그것을 자료로 정리해 놓으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자료를 컴퓨터로 받아서, 그것을 매일 1장 씩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렇게 81장을 올리면서 많은 벗들과 생각을 주고 받는 귀한 기회가 되었다.
그 중에는 오랫 동안 노자를 연구해 온 김태원 선생이 새로 귀농해서 하루 하루 일이 힘든 가운데도 매회 자신의 의견을 올렸다.
내가 아마 장 선생님의 노자를 접하지 않았다면, 공자에 대척적인 사상으로만 알게 되었다면 노자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자와의 만남에는 장태원 선생님이라는 귀중한 안내자를 뵙는 행운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장 선생님의 노자 해설을 보면서 공자의 대척점이 아니라 오히려 공자‘가 미쳐 말하지 못했거나 말할 수 없었던 점들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는 느낌이 많이 왔다.
나의 깊이가 모자라서 그냥 ‘느낌’으로 표현한다.
노자가 화광동진(和光同塵)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실제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을 한 사람은 공자로 보인다. 그는 그 당시의 현실 속에서 살았다.
논어에는 이해하기 힘든 형이상학이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까 그런 점에서 부족함을 토로하거나 인간의 본질적 요소에 취약점이 있다는 지적을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을 노자가 채워주고 있다면, 그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그런데 나에게는 장 선생님의 노자를 읽으면서 그렇게 다가왔다.
도덕경 38장에 대한 장 선생님의 해설이다.
“뛰어난 德을 지닌 사람은 德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에 德을 지니고 있다.
무슨 말인가? 이런 사람은 얼핏 보면 부덕한사람같이 보여서 시시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원래 덕이라는 것은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덕이 있다는 것을 알기 쉽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덕 부실덕 시이무덕 (下德 不失德 是以無德라)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덕이 있는 것 같이 꾸미니) 하기 때문에 덕이 없다.
덕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알아주지 않아? 한다면 덕이 있을 리가 없다.
또 큰 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사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지만 낮은 덕을 지진 사람은 매사를 의도적으로 하고, 上仁은 작위는 하지만 의도적이지는 않는 것이고, 義라는 것은 아무리 큰 것이라도 작위하고 의도적으로 하며, 禮라는 것은 아무리 높은 禮라도 상대가 응답이 없으면 팔을 걷어 부치게 된다.
禮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往來를 前提로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예를 갖추면 너도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禮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상대가 아무 응답이 없으면 당장 서운해지고 욕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禮라는것은 忠과 信이 두텁지 못한 것이어서 어지러움의 머리가 된다는 말인데 현실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남보다 뭘 좀 안다는 자는 道의 꽃이므로 어리석음의 시작이란 말은 꽃이라는 것은 드러내는 것이니 뭘 좀 안다는 사람이 그것을 자랑하는 것을 말한다.
깨달은 사람이 깨달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시작이 되므로 허례를 버리고 열매(道)를 취하라는 말이다.
道 德 仁 義 禮 를 차례로 말하면서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 章인데 유가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치는 仁, 義, 禮가 여기서는 하위 개념이다. 이로서 道家와 儒家의 다름을 말하기도 하고 옛날에 儒家가 득세하던 시기에는 이런 문장으로 해서 道家가 핍박받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내가 논어를 읽으면서 실로 안타까웠던 것은 인(仁), 의(義). 예(禮)에 대한 유교의 인식과 활용이 공자의 그것과 너무 다른데 있었다.
그 함정을 노자가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노자의 ‘무위(無爲)’는 ‘자연의 리(理)에 반(反)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경계이며, ‘불학(不學)’은 뭔가를 배우면 굳어지는 그런 배움을 경계하는 것이다.
공자의 ‘호학(好學)’은 무지의 자각에 바탕을 두고 배워도 완고해지지 않는 단정과 고정이 없는 탐구 과정이다.
스스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그를 무의(毋意)•무필(毋必)•무고(毋固)•무아(毋我)의 네가지를 끊은 사람으로 보았다.
이 둘은 바탕이 같았지만, 이른바 제자나 후계자들 그리고 권력과의 관계를 통해 점점 멀어졌다.
이제 2500여년이 지나 비로소 원래의 사상이 현실 속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살려질 수 있는 시절 인연을 만나고 있다.
21세기를 맞으며 인류가 봉착하고 있는 세계와 위기 그리고 그 해결방향을 생각한다면, 2500여년 전 동 시대의 걸출한 인물인 공자와 노자가 서로 협조하고 보완하는 대선구자로 나에게는 다가온다.
21세기 최대의 테마는 ‘자연(自然)과 인위(人爲)’의 조화인 것이다.
장 선생님의 노자 해설이 책으로 만들어진다기에 너무 기뻐서 축하의 말씀으로 변변치 않은 소견이라도 바친다.
2018. 추석
이 남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