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예술)이다.
--새로운 정치를 위한 인문적 기초를 위하여
1. 새로운 정치
①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정치가 권력 쟁취와 그 유지를 위한 장(場)으로부터 조화와 타협의 기술 더 나아가 국가 권력의 힘을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기술(예술)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도 2500여년 전의 현자는 정치의 본질을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논어 안연 편 22장을 보면 번지라는 제자가 공자께 인(仁)에 대해 묻는다. 그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성현의 공통된 말씀이고, 세계 인류가 궁극적으로 진화해야 할 목표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을 알아보는 것(知人)으로 이어가고, 바른 정치에 의해 실현된다는 취지로 대답한다.
즉 ‘정치란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 기술(技術)’ 인 것이다.
<번지가 인(仁)을 묻자, 공자 말하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知)에 대해 묻자, “사람을 아는 것이다” 번지가 말 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곧은 사람을 천거하여 굽은 사람 위에 두면, 굽은 사람을 곧게 할 수 있다”
번지가 물러나와 자하에게 물었다. “아까 내가 선생님을 만나 지(知)에 대해 묻자 ‘곧은 사람을 천거하여 굽은 사람 위에 두면 굽은 사람을 곧게 할 수 있다’ 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이오?”
자하 말하기를, “원대한 말씀이요. 순(舜)이 천하를 다스릴 때, 여러 사람 중에서 고요(皐陶)를 등용하자 불인(不仁)한 자들이 멀어졌고, 탕(湯)이 천하를 다스림에도 여러 사람 중에서 이윤(伊尹)을 등용하자 불인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소.”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曰 鄕也 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 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비교적 긴 문장을 소개한 것은 근대 서구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알려진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689년, 영국 의회가 권리 장전을 통해 확립한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정치원리가 공자 당시에 이미 논어의 곳곳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H.G. 크릴이 쓴 ‘孔子 인간과 신화’라는 책을 보면, 서구 민주주의에 끼친 공자의 영향을 여러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② 나는 요즘 공자의 제자들인 논어 편찬자들이 인(仁)은 애인(愛人)이고, 애인(愛人)은 지인(知人)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톱다운 방식)의 정치로 해석하지 않았나 생각이 될 때가 있다.
공자는 요즘으로 말하면 다원주의적 정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묻기를,"선생께서는 왜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공자 말하기를, "서경에 '효도하라, 오직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 있게 하라. 그러면 네가 하는 일에 늘 정치가 있느니라.'고 일렀거늘, 바로 그것이 정치를 하는 것인데 일부러 정치를 한다고 나설 이유가 무엇이오?"
或 謂孔子曰, 子奚不爲政 子曰 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넓게 보면 모든 인간의 사회적 행위가 정치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정치를 묻자, “군군신신(君君臣臣)부부자자(父父子子)”라고 답한다.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운 것이 바로 정치의 최고 목적인 것이다!
이 때 ‘사랑’은 무엇인가?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데서 출발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부모에게 자식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고 물으면, 아마 많은 부모들이 당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나 생각을 자식에게 투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정치 행위는 가정에서 국가의 통치행위에 이르기까지 이치는 같다고 생각한다.
이해관계의 조정도 바로 상대를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갈등 증폭’의 길이냐 ‘상호 조화’의 길이냐가 결정될 것이다.
결국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인문적 토대 없이는 새로운 정치란 수사(修辭)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2500년 전 현자의 이상이 이제 현실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어야 진실하다.
이제는 성군(聖君)이 아니라, 성숙한 시민의식이 선거를 ‘정상적인 정치 변혁의 강력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 톱 다운(TOP DOWN)방식과 바텀 업(BOTTOM UP)방식의 한국적 조화
2. 덕치(德治)의 이상
*법가(法家)류(流)와의 차이
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德)으로써 정치를 한다면, 마치 북극성이 그 제자리에 있어 도 여러 별들이 이를 향하여 도는 것과 같다.” (제2편 위정)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 共之>
*인류라는 종(種)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사랑이며, 자비(慈悲)이며, 인(仁)이다.
내 삶이 아무리 혼란스러운 투쟁의 한 가운데 있더라도 놓치지 않아야할 북극성이다.
*현대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德)은 무엇일까?
②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법제로서 다스리고 형벌로써 질서를 유지하면 백성들이 형벌을 피하는데 급급하여 부끄러움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덕으로 다스리고 예로써 질서를 유지하면 잘못을 부끄러워하여 바르게 될 것이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제2편 위정)
③정공이 공자께 여쭈었다. “한마디의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니,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말 한마디로 그 뜻을 나타낼 수 없거니와, 사람들이 일러오기를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고, 신하 노릇 하기도 쉽지 않다’고 하였으니, 만일 임금 되기가 어려운 줄을 안다면 이것이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정공이 말했다. “그러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 하니,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말 한마디로 그 뜻을 나타낼 수 없거니와, 사람들이 일러오기를 ‘나는 임금이 된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고, 내가 말을 하면 아무도 나를 어기지 못하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일 임금의 말이 옳기 때문에 아무도 어기지 못한다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 말이 옳지 않은데도 어기지 못한다면 이것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제13편 자로)
定公 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 而興邦乎
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 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
④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여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픙족하게 하고, 군비(軍備)를 충족하게 하며, 백성이 믿게 하는 것이다.”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부득이 셋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비를 버려야 한다.”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또 부득이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식량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사람에게는 다 죽음이 있기 마련이거니와,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하게 된다.” (제12편 안연)
子貢 問政 子曰, 足食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 不立>
⑤ 계강자의 정치에 관한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
“정치(政)란 바름(正)이니, 그대가 만일 바름으로써 통솔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季康子 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 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顔淵 第十二)
계강자가 도둑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공자께 묻자 공자는 대답한다. “진실로 그대가 탐욕하지 않는다면, 상을 준다 하더라도 백성들은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오.” 季康子患盜 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欲 雖賞之 不竊>
3. 정명(正名)
① 공자의 정치에 대한 유명한 언급이 있다.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
자로가 말씀드렸다.
“현실과는 먼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명(名)을 먼저 세운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불순해지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제13편 자로)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 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정명(正名)을 말할 때 ‘군군신신(君君臣臣)부부자자(父父子子)’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즉 각자 또는 각 집단이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요즘의 부패하고 혼란스러운 정치 현실을 보면 이 말이 실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명’이 기본적인 수준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정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저 과거의 낡은 이데올로기나 정서, 현실적인 이해관계 등에 의해 이합집산할 뿐이다.
나는 요즘 여소야대와 다당제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단순한 지역할거를 넘어 보수와 진보의 정명이 이루어지는 정계대개편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정치의 선진화는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도덕경 1장의 첫 단락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지만, 항상 그 도일 수 없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가능하나, 그 이름이 변화하는 실체를 항상 설명할 수는 없다.(항상 그 이름일 수 없다)”
인식하고 탐구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물이나 현상에 이름을 붙인다.
이것은 인간만의 탁월한 능력이다.
그러나 동시에 치명적인 함정이 있는데, 사물과 현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하는데, 관념은 고정되기 쉽다는 것이다.
공자는 정명(正名)을 이야기한다.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실체에 대해서는 공자는 무지(無知)를 자각한다.
이 자각이 탐구의 출발이다. 고정을 가장 경계한다. 그래서 탐구의 출발점을 공공(空空)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관념이 고정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의(義)’라고 이름 붙여도, 그것이 고정되는 것을 경계해서 ‘무적(無適) 무막(無莫) 의지여비(義之與比)’를 말한다.
단정하지 말고 그 시점의 의를 탐구해서 그 의를 실행하라는 것이다.
노자 식으로 표현하면, '의가의 비상의'義可義 非常義가 될까?
*도덕경이 공자 사후 1세기가 지나 나온 것이 맞다면, 공자의 '정명' 등이 고정적인 개념으로 변질하는데 대한 노자의 비판이 담긴 듯.
공자의 '무고정성'이 공자 사후 그 제자들에 의해서도 제대로 계승되지 않고 왜곡된 듯하다.
② 나는 이와 함께 ‘정명’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풀어야 할 난제가 많을수록 또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이 서로 모순되어 보일수록 먼저 ‘종합철학’을 바로 세워야 한다.
과거의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하는 고정되고 편향된 시각으로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지금까지의 관점에서 보면 모순 되게 보이는 요소들이 이제 상호보완하고 인간 진화를 위한 길에서 함께 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관점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종합철학이 아닐까. 민주화와 물질적 생산력의 향상 등은 과거에 비해 이러한 종합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만들어 왔다. 다만 사람들의 의식이 이에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의 좌우, 보수와 진보, 자본계와 노동계 등의 고정관념들이 새로운 정치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역사발전 단계로 볼 때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있는 과도기라 하겠다.
이 시기를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는 극심한 혼돈으로 느껴지겠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새로운 시대정신이 출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4. 개혁의 중심 허리--왜 ‘신중간층(新中間層)’인가?
<어떤 사람이 자산(子産)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 말하기를, “자애로운 사람이다.”
자서(子西)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그저 그런 사람이다.”
관중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훌륭한 사람이다. 백씨의 병읍 300호를 빼앗았으되,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며 살다 죽었지만 결코 관중을 원망하지 않았다.”
或 問子産. 子曰, 惠人也 問子西 曰, 彼哉彼哉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沒齒 無怨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양극화 해소가 아닐까 싶다. 근래 복지문제가 정치적 화두가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진보 진영의 이른바 ‘보편적 복지론’은 보수 진영이 우려하는 ‘재정의 위기’에 대한 대책이 함께할 때 비로소 현실성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 복지의 확대는 재정의 확대를 의미하고, 재정의 확대는 세수 확대를 말하는데, 이때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생산 주체의 의욕이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결국 가진 사람들의 실질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진보진영의 일각에서 잘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사회민주주의제도도 이런 중간층 이상의 의식이 얼마나 진화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공자가 말한 ‘관중의 인(仁)’을 생각해 보자. 자신에게 또는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에게는 불리하지만, 전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개혁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어떻게 하면 원망 없이 개혁안을 수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때 개혁 주체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큰 저항과 거부감 없이 기득권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한 개혁 주체를 어떻게 하면 형성해 낼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 진보와 인간 진화의 가장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을 하자면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불만을 줄이고 소기의 목적대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우선 개혁 주체가 공평무사하고 개혁을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개혁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이 따르게 된다. 과거에는 정권 차원에서 힘으로 저항을 잠재우려 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버려야 할 구시대의 폐습이 되었다. 이제 개혁의 성패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개혁에 동참하도록 얼마나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체의 권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싫든 좋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원활하게 개혁을 수행해 갈 수 있다.
내가 ‘합작과 연정’ 그리고 좌도우기(左道右器)를 말하는 것도 그런 개혁의 권위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 시대의 개혁의 성패는 중간층의 지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것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양’을 갖춘 신중간층의 지지가 절대 조건이다.
5. 공자와 민주주의
* H.G.크릴의 <공자>에서
매리앰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①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 차별보다는 우애 원칙에 근거한 개성의 보호 및 함양의 중요성, 근거도 없이 또는 과도하게 인간 차별을 강조하는데서 비롯된 특권의 폐지.
② 인류의 완벽성을 부단히 지향하는 것에 대한 확신.
③ 국가의 수익은 본래 집단적인 수익이므로 크게 지연되거나 지나친 차별 없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전사회에 분배되어야 한다는 가정.
④ 사회의 방향과 정책의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 최후 결정을 대중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결정을 표현하기 위한 절차를 인정하고 그 결정이 정책으로 반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⑤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합의 과정을 거쳐 의식적인 사회 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
이 가운데 ④를 제외한 4개의 항목은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 분명하고 어떤 것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도 있다. 투표와 관련된 나머지 한 항목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공자가 대중이 정치를 좌우할 수 있다는 어떤 방법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 민주정치를 향한 공자의 출발은 괄목할만한 것이었지만, 그 후 그가 제시한 원리에 추가된 것도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원리 자체도 충분치 못하였다. 민주정치가 효과적으로 구현되려면 일반 백성들이 군주를 선택하는데 효과적인 발언권을 가져야 하며, 이 목적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창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것이 발전되지 못하였으며, 다른 곳에서 이것이 성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이와 관련하여 흥미 있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공자가 체계적으로 제시한 적은 결코 없는 것 같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같다.
<정부의 고유한 목적은 전체 백성의 복리와 행복이다.
이 목적은 정치에 가장 유능한 사람이 국정을 담당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위정자의 능력은 가문, 재산 또는 지위와 필연적인 관련성이 없으며, 오직 인격과 지식에 달려 있다.
인격과 지식은 적절한 교육의 산물이다.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교육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따라서 적절한 교육을 받은 결과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사람을 전체 국민 가운데에서 선발하여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
* 새로운 정당--잘 준비된 것은 반드시 실현된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요구는 광범하고 절실하다.
권력의 쟁취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를 원하고 있다.
새로운 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새로운 정당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1)정명(正名)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종합철학을 토대로, 구체적인 정강 정책이 합목적적으로 정합성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진보당이든 보수당이든 새로운 문명을 추구하는 당이든 우선 자기 당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고, 다른 당과의 합작과 연정을 할 수 있는 개방성을 갖는다.
진정한 이념(理念)을 찾아서 실현하려는 정당 간에 경쟁하고 연대하며 협력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으로 될 것이다.
흔히 이념(理念)의 시대는 가고, 실용(實用)의 시대가 되었다는 말을 많이 한다.
20세기 후반에 세계적 범위에서 많이 이야기 된 것이 탈이념(脫理念)이었다.
여기서 이념이라는 말은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의미로 쓰여 왔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대부분의 이데올로기들은 현실과 유리된 완고한 관념으로 되었다.
과연 ‘이념의 시대’는 간 것일까?
이념(理念)을 ‘우주 자연의 리(理)에 부합하는 인간의 관념(觀念)’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런 이념의 시대는 온 적이 없다.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적 사회적 조건이 발달했음에도 더욱 심각한 새로운 위기나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이념(理念)을 찾아 실현해야 하는 시대로 되고 있다고 본다.
2) 새로운 사람- 당원
일상의 삶과 정치행위의 바탕으로 되는 다음의 의식(意識)이 당원의 제1 자격이 되지 않을까.
<“단정하거나 고정하지 않고 오직 의를 추구한다.”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사람들과 두루 잘 어울리되, 편가르기를 하지 않는다” 群而不黨
“이익을 만나면, 옳음을 생각한다.” 見利思義>
3) 당내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
직접민주주의를 대폭 도입한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정당의 여러 층위에서 다수결이 아니라 전원일치로 의사를 결정한다.
이를 위해서는 토론과 회의 문화가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연찬(硏鑽) 방식의 보편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위에 말한 당원 자격이라면 이것이 가능하다.
위에 말한 것들은 대단히 이상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앞으로의 시대는 이런 정당을 바라고 있다고 본다.
또한 오랜 역사를 통해 간직해온 우리 공동체의 비원(悲願)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도라고 생각한다.
질(質)이 양(量)을 창출할 수 있다.
잘 준비된 것은 반드시 실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