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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평작품(비공개)

또 다른 간세

작성자고운님|작성시간26.06.12|조회수54 목록 댓글 3

또 다른 간세

 

김명희

 

1 여행을 떠나는 것이 설레면서도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약해진 체력과 홀로 집에 있을 아픈 남편 때문이었다. 무릎과 팔꿈치의 관절이 얼마 전부터 신음을 내고 있고 오랫동안 운동하지 못했던 몸은 호흡조차 가빠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였다. 게다가 남편의 고통은 날마다 그 강도가 더 심해졌다. 그런데도 나는 떠나고 싶었다. ‘괜찮아, 괜찮아.’하면서 억지로 다독이던 일상의 마음들이 터질 날을 기다리는 휴화산처럼 밑바닥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숨을 쉬고 싶었다. 그렇게 떠날 수 없는 여건을 뒤로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2 “사흘 동안 십만 보를 걷는 것이 목표야.”

그럼 하루에 삼만 오천 보 정도를 걸어야 하는 거네,”

걷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우리 일행들이었기에 올레길 탐방을 여행 목적으로 정해두었지만, 하루에 삼만 오천 보 걷기는 하고 싶다는 설렘과 할 수 있을까 하는 근심이 함께 공존했다. 무릎만 아프지 않다면 걱정거리도 아니겠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고 중얼거려본다. 걷지도 않았는데 무릎이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듯했다. 야자수 잎과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오랜만이야 반갑다, 제주야.

3 제주올레에서 가장 먼저 열린 길. 올레길 1코스, 그곳은 오름과 바다가 이어지는 오름-바당 올레. 이정표에 따라 걷다 보면 들판도 보이고 산도 보인다. 어느 곳을 걷든 바람과 함께 하는 마음이 평온과 기쁨의 파도로 출렁인다. 갈림길에서 길을 안내해주는 간세, 앙증맞은 그 모양이 귀엽기도 하고 길 잃고 헤맬지도 모를 이방인들을 위해 나침판이 되어주는 인생의 스승 같아 고맙고 정겹다.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라는 뜻이고 너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느림의 미학을 가르쳐주는 의미이기도 하다니 더 마음에 들었다.

4 가끔 보이는 주황과 파란색의 화살 표시는 그 끝이 묘하게 생겼다. 마치 한글의 시옷처럼 생겼는데 일행 중 한 명이 혹시 올레길을 처음 만든 분의 성을 딴 것은 아닐까하고 말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제주의 푸른 바다를 상징한다는 파란색은 정방향 표시, 제주의 감귤을 상징한다는 주황색은 역방향표시다. 거친 세상 어디로 떠나든 다시 돌아오는 마음의 고향처럼 우리 삶의 이정표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올레길을 만들었던 분이 항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암 투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떠올라 더 마음이 아팠다.

나 상관하지 말고 놀다 와, 혼자 잘 있을 테니까.” 망설이는 나에게 씩씩하게 등 떠밀던 남편, 언제 시작할지 모를 항암치료를 앞두고 그는 오늘도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들의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사그라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려본다.

5 <“제주도 카페를 차렸다고 말하면 모두 똑같이 물어본다, 바다 보여? cafe 바다는 안 보여요,”> 종달리 마을에 있는 카페 주인이 문 앞에 써둔 글귀에 웃음이 나왔다. 종달리 마을은 그 아늑함이 여행자들의 마음을 녹인다. 어느 곳을 여행하든 그런 좁은 골목과 동네를 좋아한다는 일행의 말처럼 나도 웅장하고 화려한 것보다 그런 아기자기하고 올망졸망 한 곳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종달리 마을을 걷는 내내 미소와 감탄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곳에 뭐 볼 게 있어서 왔어요?” 동네 어르신이 던진 한마디에 우리는 마을이 너무 예쁘다고 합창한다. 늘 바다와 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에 무감각해지듯 그분들은 그런 곳을 좋다고 말하는 우리가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6 하루에 삼만 오천 보를 목표로 왔는데 올레 1코스의 첫날도 올레 2코스의 둘째 날도 이만 칠천 보밖에 못 걸었다. 올레 2코스는 어땠냐고? 기회가 된다면 꼭 직접 걸어보기를 바란다. “누가 올레길 어디가 좋냐고 물어보면 2코스는 반드시 걸으라고 할 거야,“ 우리의 감탄사다.

7 마지막 날은 비가 내렸다. 보슬비라 둘레길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바람이 제법 불어 우리는 올레길 탐방 계획을 변경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비가 오면 멋있다는 사려니 숲으로 향하는데 도로가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와 안개로 가득했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둘레길을 우리는 이틀 동안 너무 빨리 걸었나 보다. 자연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 우리에게 줄 마지막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느려도 괜찮아. 천천히 다가와라고 말하듯.

8 사려니 숲 입구의 삼나무는 하늘 높이 솟아 어디가 끝인지 알 길이 없고, 숲은 비와 안개에 가려 얇은 투명 커튼을 드리우고 있었다. 다가가면 한 걸음 물러서며 마치 나를 따라오라는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를 유인한다. 길 위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우리 앞에 희고 커다란 장막을 쳤다. 걷고 걸으며 뚫고 들어가는 안개 속에는 또 다른 안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 안개는 두려움보다 마음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했다. 침묵 속에서 토하듯 숨을 내쉬며 안개 속으로 나의 눌린 고통과 슬픔을 내려놓았다. 마음이 잔잔해졌다. 언뜻 보이는 숲속에 들개처럼 보인 짐승에 화들짝 놀라 자세히 보니 고라니가 풀을 뜯어 먹고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우산과 안개에 가려 신비감을 자아냈다. 내가 가져간 빨간 우산을 서로 번갈아 쓰며 안갯길을 무대로 찍은 사진은 그날의 사려니 숲의 아련한 신비를 고스란히 담았다.

9 삶은 늘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고 안개는 말해주고 있다, 좀 더 짙어지기를 좀 더 그 속에 빠져들기를 그래서 오랫동안 가슴 벅차게 그 속에 갇히기를 원했지만 무심하게도 서서히 자기 모습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자연이, 사람이 내 눈동자 속에 제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히고 비는 내리는데 마음은 빠졌던 상념을 접고 비는 온몸을 적셨다. 방수가 안 된 옷 탓에 우산도 소용없이 흠뻑 젖은 몰골이 우스웠다. 추위가 덮쳤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십만 보 걷기를 목표로 했던 우리는 이렇게 사흘 동안 칠만 보의 대장정을 마쳤다.

10 문득 생각해 본다. 너무 쉼 없이 달려왔기에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러 갔던 여행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끝없이 걷고자 했던 올레길에서 나는 또 다른 내 욕망을 심었던 것은 아닐까. 그저 빨리 그저 많이 정해진 목표의 걸음 수를 향해 내 달릴 때 놓쳐버렸던 여유와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았던가. 자연은 그만하면 됐다, 이제는 너의 길을 느릿느릿 여유롭게 걸으렴하고 말하듯 빗방울로 나의 열기를 식히고 안개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빨리 걸을 수 없었던 그 날, 또 다른 나의 간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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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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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청랑 | 작성시간 26.06.12 명희!
    글 잘 읽을게.
    수고했어.
  • 작성자한영옥 | 작성시간 26.06.12 무작정 걷고싶은 맘. 길잃어도 상관없고
    집에 못가도 상관없다. 끝없는길을걷고싶을때가 있었지요.공감많이가는 글입니다.
  • 작성자서장원 | 작성시간 26.06.18 김명희 선생님,
    가정에 병고가 있음에도 활기있는 작품 내셨으니
    그 의욕과 용기가 훌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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