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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음악의 아버지 박재훈 목사

작성자섬김|작성시간15.01.11|조회수86 목록 댓글 0

한국기독교음악의 아버지 박재훈 목사

 

“몸과 마음은 쇠하나 하나님 찬양함은 더욱 새로워집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지난 12월과 송구영신 예배 때 가장 많이 불렸을 찬송가 460장이다. 이외 ‘어서 돌아오오(317장)’ ‘산마다 불이 탄다(311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256장)’ 등을 작곡한 박재훈 목사(92세)는 한국 찬송가 역사(500여 곡의 찬송가 작곡)와 한국 동요 역사(150여 곡의 동요 작곡)의 산 증인으로서 ‘한국기독교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어머님 은혜’ ‘산골짝의 다람쥐’ ‘펄펄 눈이 옵니다’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세요’ ‘시냇물은 졸졸졸졸’ ‘눈꽃송이’ 등이 그의 곡이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연말연시를 맞아 LA 자녀 집을 방문한 박 목사를 만나 그의 삶과 음악, 신앙에 대해 들어보았다. 창문 밖에서 거실까지 비쳐 들어온 겨울 햇살이 박 목사의 얼굴을 더욱 온화하게 만들었다.       임지현 기자

음악 이야기
박재훈 목사는 1922년 강원도 김화군 김성면(북한)에서 기독교 가정의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낙이었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박 목사는 교회 선생님의 풍금 연주를 들은 것이 처음 음악을 접한 것이라고 한다. 음악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당시, 가끔 마을을 찾는 사진사가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았는데 그가 박 목사에게 악보 보는 법과 노래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음악을 배우고 열정을 키우게 되어 평양 요한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박 목사는 음악의 정의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 중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음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어가면 ‘찬양’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박 목사는 1942년 평양요한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는데 당시에는 일본 군가 외에는 가르칠 노래가 없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었지만 동요라고 해봤자 일본군가에 가사를 붙인 노래가 전부였다. 부를 노래가 없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상황이 안타까워 어린이 잡지 <소년>과 <새벗>에 소개된 동요 가사를 수집했다. 그러곤 1945년 8월 29일부터 31일 3일간 무려 50곡을 썼다. 북한이 점점 공산화가 돼가자 박 목사는 3.8선을 넘는다. 그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 바로 그가 작곡한 ‘동요집’이었다. 월남해 보니 남한에도 ‘고드름’ ‘오빠생각’ ‘푸른 하늘 은하수’ 정도의 동요밖에 없음을 알고 직접 등사한 500권의 <일맥 동요집>을 만들었는데 이틀 만에 모두 팔려나갔다. 그의 동요는 매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고 삽시간에 퍼져 나가게 된다. 이후 10년이 지나 다른 사람들도 동요를 작곡하기 전까지는 어린이들은 그의 동요를 부르며 꿈을 키웠다. 박 목사는 “어린이는 꽃, 나비, 토끼, 다람쥐 같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노래해야 합니다. 동요 속에도 예수님이 담겨 있어야 해요. 어린이가 어른 노래를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주옥같은 동요도 동요지만, 박재훈 목사를 빼고 한국 찬송가에 대해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국 곡 일색이던 시대에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긴 그의 찬송가 곡조는 듣는 이로 하여금, 부르는 이로 하여금 진실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게 한다. 그는 “찬양은 시입니다. 시는 가슴 속의 것이 표현된 것인데 시가 잘못돼 있으면 노래도 잘못된 것이 됩니다. 회개가 있는 찬양, 복음이 있는 찬양, 예수의 피가 살아 있는 찬양이 되살아나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처음 지은 곡이 ‘어서 돌아오오’였는데 가사를 보면 악상이 떠오르고 곡이 나올 때까지 들떠 살았다. 6.25 전쟁 중에 작곡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는 우리 민족의 슬픔과 처참함이 잘 들어난 시여서 감동이 왔다고 한다. ‘산마다 불이 탄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등 몇몇의 찬송가는 곡 공모에서 당선된 것이라 한다. 그렇게 시에 곡이 붙여져 나온 찬송가에 대해 “내가 뭐 한 게 없어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죠.”라고 말한다. 그의 열정은 한국기독교음악 역사상 전무후무한 <에스더>(1971년), <유관순>(2000년), <손양원>(2012)이라는 오페라를 탄생케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처음 한국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일대기를 오페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계획을 청년 같이 상기된 얼굴로 열정적으로 말하는 남편의 건강이 걱정되었던 황영숙 사모는 그의 팔을 살며시 잡고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라며 조심스레 조언해 따뜻한 미소를 자아냈다.

믿음 이야기
일찌감치 복음을 받아들인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난 박 목사는 어머니의 기도를 뿌리 삼아 믿음을 키웠다. 세 형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나는 찬송하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왔으니 하나님께서 넘어가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환갑의 나이에 목사 고시를 패스하고 안수를 받게 되어 목회를 시작하게 된다. 62세에 담임을 맡은 캐나다 토론토 큰빛장로교회는 5가정에서 시작하여 6년 동안 성도수가 150명이 되었다. 68세가 되자 교회의 성장을 위해 조기은퇴하고 교회 성가대를 섬겼다. 현재 큰빛장로교회는 교인이 2500여 명이 넘는다.
그는 “내가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해도, 기쁘지 않아도 기뻐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90이 넘는 세월을 살면서 실패도 실수도 많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속에 녹아졌지요. 그래서 내가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에요. 이곳에서뿐만 아니라 저곳(위를 가리킴)에서도 함께해 주실 테니까요. 그분은 젊었을 때도 늙었을 때도 배반했을 때도 끝까지 품어주시는 분입니다.”라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고백했다. 그는 또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음악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일을 하나님 품에 안기는 날까지 계속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현대교회음악에 대해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지만 ‘찬양해, 감사해, 예배해’라는 표현은 삼가야 합니다. ‘~드립니다’가 돼야 하는데 이런 것을 사역자들이 정확히 짚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냥 즐기려는 찬송은 그저 노래일 뿐입니다. 은혜 받은 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예배의 크라이막스입니다. 하늘나라 가면 하루 종일 해야 하는 예배를 이 땅에서도 하는 것이기에 기쁜 것이고 감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인교회에 부탁하는 말
“요즘 한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한참 잘못되어 있어요. 위안부 일은 제가 직접 눈으로 본 역사적 사실입니다. 일본에게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뭔 말이냐 하면 한국 기독교가 영적으로 더 성장해서 일본에 3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해 아름다운 이웃이 되어 예수님 안에서 형제가 되는 방법으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국교회는 한국역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다음 세대에 잘 가르는 한인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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