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1. – 개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 중에 단연 으뜸을 자랑하는 만큼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보통 2-3시간 긴 줄을 서야만 한다. (물론 예약자는 별도로 들어 갈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런 고생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이곳에 들어간다면 단지 익히 알고 있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을 오리지널로 보았을 뿐이란 것 외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우피치 미술관보다 아르노 강 건너편 팔라티노 미술관을 보고나면 미술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마치 불란서 에펠탑은 내용은 잘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지만 이태리 폼페이는
아무 것도 모르고 본다면 단지 폐허만을 볼 뿐인 것과 같다.
우피치 미술관은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들어가야 비로서 진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람객들은 내용을 알고 들어가기 보다 유명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피치 미술관 입구
본래 이곳 우피치 미술관은 메디치가의 정치 사무청이었다.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가 1560년 당대 유명한 건축가 바사리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건축하였다.
현재 건물은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 궁전으로부터 아르노 강가의 폰테 베키오를 지나 피티 궁전까지
연결되었다.
우피치 궁의 본래 용도는 사무실(offices) 이었다. 그러나 나중 갤러리들이 들어서면서 offices란
이태리어 ufficio에서 Uffizi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1574년 코지모 1세가 죽은 후 토스카나의 새 대공인 프란체스코 1세가 메디치가의 소장 예술품들을 보관할 새로운 방을 만들었으며 17세기에 이르러 페르디난도 대공 2세에 의해 갤러리로 확장되었는데 1737년 메디치가의 최후의 사람으로서 우피치 미술품을 계승 소유하고 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기증하였고 이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그후 이탈리아 통일에 의해 국립 미술관으로 변신하였다.
당시 주무 관청이었고 오늘날도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베키오 궁전
베키오 궁전과 다리로 연결된 우피치 궁
우피치 궁
우피치 궁 후면(맨 오른쪽 건물)
우피치 궁은 폰테 베키오 다리 위의 바사리 통로를 통해 아르노 강 건 피티 궁까지 연결되었다.
ㄷ자 모양의 우피치 궁 건물 모습
르네상스하면 늘 빠질 수 없는 가문이 있는데 바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조차 메디치 가문 역사를 배우게 되는데 이곳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 초반 약장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날도 약이란 단어Medicina는 이 가문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축적된 돈으로 돈 장사, 즉 금융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교황청에도 막대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으며 나중엔 재력으로 3명의 교황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피렌체는 오늘날 뉴욕처럼 월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피렌체는 유럽 최고의 금융도시였다.
이 도시에 가장 큰 재력가로 자리잡은 것이 메디치 가문이었다.
그런데 실제 메디치 가문을 세운 메디치의 장남 코지모와 차남 로렌조는 문예를 사랑하였고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특히 피렌체의 군주가 된 로렌조는 당시 라파엘로의 그림 한점을 노동자 1년의 임금 액수로 사들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각 지방에서 내로라 하는 예술가들이 피렌체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태동이 된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에 왔다고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도 피렌체 사람들은 가장 예리하기로 소문나 있다. 지금도 오페라 가수가 공연중 가사가 틀리면 바로 지적해주고 음률이 조금만 이상해도 야유를 서슴치 않는다.
당시에도 피렌체인들은 아주 예리한 문예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피렌체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면 바로 작품 활동을 접어야 했다. 한 예로 당대 페루지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화가 페루지노가 이곳에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갔고 결국 그는 자신의 고향에 가서 인정을 받았다.
당시 메디치 가문을 위해 즐겁게 할 수 있는 꺼리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었다.
오페라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되었다. 오페라는 종합 예술로 극단적으로 말하면 메디치 가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개발한 최상의 상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오페라의 내용도 주로 메디치 가문과 연결된 내용들이 많았으므로 오늘날도 당시 오페라를 공부하기 위해서 그 배경인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가지 더 이태리의 유명한 본 젤라토 (Buon gelato)아이스크림도 탄생 배경은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메디치 가문의 하녀가 어느날 아이들을 위해 샤벳을 만들어 놓았는데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 창가 밖에 놓았다가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
다음 날 이를 기억한 하녀가 창가 밖에 놓았던 샤벳을 꺼내 왔을 때 그곳엔 약간의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하녀가 혹시 어떻게 되었나 맛을 보니 아삭아삭 얼음 씹히는 맛이 독특했다.
이것을 아이들에게 주자 모두들 좋아하였다.
이후 이것에 더 많은 것들을 첨가시키며 결국은 본 젤라토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 공국의 가장 유명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이 가문도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1667-1743)을 마지막으로 쇠퇴하였는데
오늘날 메디치 가문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