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마 제국과 유대

작성자로마장로교회|작성시간15.01.29|조회수74 목록 댓글 0

 

로마 제국과 유대 (헤롯대왕)

 

 기원전 63년 당대 로마 최고 사령관 폼페이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유대왕국은 하스모니아 왕조의 땅을 놓고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 형제간의 권력 다툼에서 서로 당대 신흥 강대국인 로마의 폼페이 도움을 받으려 하였는데 로마가 힐카누스 편을 들자 아리스토불루스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반기를 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3개월간 로마 군대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패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폼페이는 유대인들 마음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사건을 하나 남겼다. 그것은 그가 대제사장들만 들어 갈 수 있는 지성소에 들어간 일이었다. 폼페이는 유대인 성전에 대하여 수차례 이야기를 들었다. 호기심에 가득찬 폼페이는 부하들과 성전에 들어갔고 심지어 야훼의 신이 거하시는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성전 기물에 손대지 않았지만 (사실 손댈 만한 물건이 전혀 없었다) 유대인들은 폼페이를 용서할 수 없었고 그의 신성모독을 영원히 잊지 않았다.

 

당시 로마제국은 폼페이, 크라수스 그리고 율리우스 시이저등 삼두 정치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시이저는 북 이탈리아 지역을, 폼페이는 스페인을 차지 하였고, 크라수스는 시리아 총독이 되었다.  유대는 시리아에 속해 있었고 크라수스는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의 보물을 많이 훔쳤는데 나중 유대인들은 그가 전쟁에 패하고 죽은 것이 하나님의 보복으로 여겼다.

 

크라수스가 죽고 남은 폼페이와 시이저의 권력 다툼 당시 유대 왕 힐카누스의 측근 안티파테르는 시이저를 지지했다나중 시이저가 권력을 잡은 후 감사의 표시로 시이저는 힐카누스를 유대 왕의 위치로 복귀시켰고 안티파테르는 행정장관이 되었다. 안티파테르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파사엘은 예루살렘 총독이 되었고 25세의 헤롯은 갈릴리 지휘관이 되었다이 사람이 바로 나중에 유명해진 헤롯대왕이며 예수님 탄생 당시 2살 미만 어린아이를 살해했던 장본인이다.

 

기원전 44년 시이저가 암살 당하면서 로마는 또 한번의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시이저의 암살 주동자인 부르투스와 카우시스가 동방 패권을 잡았다. 안티파테르는 입장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새로운 주권자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동맹자 인가를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로마가 혼란한 틈을 타고 유대 내부 정적들이 일어나 안티파테르가 살해되고 아리스토불루스(반란을 일으켰다가 폼페이에게 패망한 힐카누스의 형)의 아들인 안티고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상황을 타개하게 위해 힐카누스는 헤롯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헤롯은 성공적으로 이들을 제거하였다. 그 공로로 헤롯은 아내 도리스와 이혼하고 힐카누스의 손녀 미리암과 결혼 하였다.

 

 헤롯에게 유리한 상황이 벌어질 무렵 그는 자신의 지지자 부루투스와 카시우스가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나중 로마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새로운 주권자와 평화를 맺기 위하여 돈을 가지고 안토니우스에 나가 굽실거려야만 했다.

이로 힐카누스의 자리는 견고해졌고 헤롯과 그의 아들 파사엘은 유대의 분봉왕 지위를 부여 받았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의 품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 때를 이용해 바대인들의 유대 공격이 감행되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어 헤롯의 장자 파사엘은 자살 하였고 유대 왕 힐카누스는 목숨은 건졌으나 귀를 잘리는(신체적 결함이 있으면 유대 율법에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결국 왕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굴욕을 당했다. 

헤롯은 이미 이집트로 피신 하였고 그곳에서 안토니우스을 따라 로마로 가서 막대한 뇌물과 아첨으로 옥타비아누스와 원로원을 설득하여 유대의 왕으로 지명을 받아내었다.

 

헤롯과 함께 온 로마 연합군은 기원전 38년 바대인들을 결정적으로 격퇴시켰고 그 해 봄 예루살렘 공격을 시작하였다. 8주 동안 방어에도 불구하고(유대 고대사는 5개월 항쟁 했다고 기록됨) 예루살렘은 처참히 파괴되었다. 헤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스릴 왕국이지 폐허가 아니다란 항의에 그나마 완전한 파괴를 막을 수 있었다. 반란자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보내져 처형되었고 이로 유대 독립국가였던 하스모니아 왕조는 막을 내리고 기원전 37년 헤롯이 피로 얼룩진 왕위에 올랐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바벨론 포로기 후 기원전 167년 마카비 형제에 의해 이루었던 독립 유대 국가의 왕조로 겨우 130여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주권을 잃고 로마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이후 유대인들이 다시금 독립 국가를 갖기 까지는 1948년 이스라엘이 서기까지 2000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 로마 제국 동방 영토

 

            피난 길에 오른 예루살렘 시민들

 

 

                                로마군의 예루살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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