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로 부터 섬김 받는 피조물의 자리
교만은 생사 복화를 주관하며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주신 조물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기준 삼지 않고 자신을 기준 삼아 스스로 지키려 함입니다.
즉 하나님 기준에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 호흡하며 기생하는 티끌 같은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없어도 내가 기준되어 주인으로 살아가는 생각이 교만입니다.
나는 아무것이 아닌 하나의 티끌 같은 존재됨을 깨닫고 모든 것을 하나님 관점에서 보는 지혜가 은혜를 입을수 있는 겸손의 시작입니다.(=은혜 입는 새로운 피조물의 자리)
그러므로 말씀도 내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 관점에서 보아야 그분이 나를 향한 극진한 사랑을 만지며 호흡할수 있습니다.
광야 이땅에서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여 미워하지 아니하여 하나되어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는 소경과 같은 인생들에게 죄를 깨달아 멸망 길에서 돌이키기 위한 그분의 깊으신 사랑으로
율법을 내려 주셨습니다.(롬3:20)
섬김받는 피조물의 낮은 자리를 망각하고 스스로 선한 모양을 내어 조물주를 섬기려는 그 생각 자체가 죄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제일 큰 계명을 주셨습니다.(눅10:27/마22:37/눅12:30)
조물주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라 아무것에도 사랑의 섬김을 받지않고 스스로 자신을 섬기십니다. (=하나님 성령이 스스로 섬기는 사랑)
예수 안에 강림하여 이땅에 오신 창조주 하나님은 사단의 권세에서 피조물들이 멸망 당하지 아니 하도록 섬기라 오셨지 피조물들에게 섬김을 받으라 오신 것이 아닙니다.(마20:28)
피조물들은 섬김의 사랑 자체가 없고
조물주 한분 하나님 만이 섬김의 사랑이
있습니다.(마19:17/막10:18/눅18:19)
그분을 스스로 섬기며 사랑하려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그분의 섬기는 사랑을 입을수 없으며 오직 낮은 피조물 자리로 내려와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그분의 섬기는 사랑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조물주를 섬기려는 그 생각 자체가 교만이며 사단 마귀가 사망에 끌어 가기위한 수단으로 넣은 것입니다.
피조물인 베드로가 섬기려는 생각으로 "그리 마옵소서"하니 예수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거라 하였습니다.
그는 섬기며 지켜 주려는 생각에 칼을 들었고 십자가 형장까지 따라 같지만
피조물 자체는 두려움이 있기에 결국
세번씩이나 부인하며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하나님이 베드로 안에 강림하니 두려운 생각이 제거되고 그는 담대할수 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자신 스스로를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지 피조물 베드로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의 하나님이 섬긴 그 사랑의 행함은 베드로에게 값없이 주는 하늘 나라 상급이 되었습니다.
마귀 사단에게 속아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떠나는 자체가 죄입니다.
이러한 죄를 깨달으라고 율법의 첫
계명을 주셨습니다.
또한 섬김 받는 피조물의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을 찾거나 구하지 아니하면 그분의 섬김의 은혜를 입지 못하기 때문에 둘째 계명을 주셨습니다.
마귀 사단은 피조물 자신 속에 선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죄)을 넣어 하나님의 선한 사랑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못하도록 합니다.
내 안에 선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은 선한 하나님 사랑을 알수 없는 소경이 되고 그 사랑을 감각하지 못하는 문둥병자가 됩니다.(=선한 생각에 포로된 부자 청년)
율법 둘째 계명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내 안에 선한 사랑이 없는 나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의 선한
사랑을 찾아 갈수 있도록 돕는 몽학 선생과 같습니다.(롬7:18=선한 사랑이 없다)
피조물이 하나도 멸망 당하지 아니 하도록 그분의 사랑으로 주신 새 율법을 통해 멸망 길에서 돌이켜 그분의 섬김 받는 사랑의 자리로 내려 오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영원한 제사로 스스로를 섬겨 주었습니다.
이와같이 자신을 드림으로 피조물인 사람이 조물주 하나님을 섬기려는 모든 행위의 죄를 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피조물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첫것을 폐하고 하나님 스스로 섬기는 둘째 것을 세우셨습니다.
(히10:9)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영원한 제사를 보고 이뜻을 인정하여 수용하는 자들이 죄에서 거룩함을 얻습니다.(히10:10)
그러므로 오직 낮은 피조물 자리가 은혜를 입는 겸손한 자리며 섬김 받는 어린아이 자리며 행복한 말석입니다.
행복한 그 자리는 사람의 어떤 의지나 노력으로 이룰수 없고 오직 예수 안에 있는 변치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따르는 유일한 길 밖에 없습니다.(=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세상에 돈이 잠시 행복을 이루어 주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 근심과 불안을 만들어 내지만 이땅에 섬겨 주는 변치 않는 그분의 사랑 만이 영원한 행복을 이루어 줍니다.
마귀 사단은 나를 스스로 지키면 행복할 것 같은 생각을 주지만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돌보심을 받는 것이 피조물들의 진정한 행복의 시작입니다.
광야와 같은 이세상에서 우리가 오늘날 존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그분이 아무것도 아닌 나를 향한 그 뜨거운 섬기는 사랑을 만지며 호흡함이 되어지길 바랍니다.(=행복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