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 / 신문학과 친일
이광수(李光洙 1892 -1950)
호는 춘원(春園). 평북 정주에서 출생.
1902년 열 살 때 콜레라로 부모 사망, 고아로 성장, 이듬해 동학(東學)에 입도, 수학 및 종교생활.
1905년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도일(渡日), 1910년 명치학원 중학부 편입 졸업.
귀국 후 오산(五山)학교 교사.
1915년 김성수의 후원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 입학.
1917년 <청춘>에 [소년의 비애], [어린벗에게] 등 단편을 발표함.
1917년 <매일신보>에 현대적 장편 [무정]을 발표하여 한국문학사에 신기원을 이룩함.
1919년 대학 재학 중 동경 유학생 2.8 독립선언서 문안 기초,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독립신문사 사장.
1924 <조선문단>을 주재하고 <독립신문> 편집국장,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함.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으로 투옥, 반 년 만에 병보석 석방.
친일 문학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장을 역임함.
1940년 일본명 가야마 미쓰오(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하는 등 친일 행위를 함.
그의 작품 세계는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계몽적 민족 의식을 표현하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쪽으로
나타남.
6.25때 납북되어 생사 불명이었으나 최근 1950년 북한 남포병원에서 벽초 홍명희의 배려로 입원 중 사망했음이 알려짐.
대표작으로 [무정](1917), [유정](1933), [사랑](1939), [흙](1932), [단종애사](1929) 등이 있음.
춘원의 작품세계

<경기도 광릉 인근의 봉선사 앞 기념비>
애인 육바라밀(愛人 六波羅蜜)
/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임에게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布施)를 배웠노라.
임께 보이고자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持戒)를 배웠노라.
임이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忍辱)을 배웠노라.
자나깨나 쉴 새 없이 그리워하고 임 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精進)을 배웠노라.
천하고 많은 사람 중에 오직 임만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禪定)을 배웠노라.
내가 임의 품에 안길 때에 기쁨도 슬픔도 임과 나의 존
재도 잊을때, 거기서 나는
지혜(智慧)를 배웠노라
새 아이
/ 춘원 이광수
네 눈이 밝고나 액스빛 같다
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
온 가지 진리를 캐고 말란다
네가 ‘새 아이’로구나
네 손이 슬깁고 힘도 크도다
불길도 만지고 돌도 주물러
새롭은 누리를 지려는고나
네가 ‘새 아이’로구나
네 맘이 맑고나 예민도 하다
하늘과 땅 새에 미묘한 것이
거울에 더 밝게 비취는고나
네가 ‘새 아이’로구나
네 인격 높고나 정성과 사랑
네 손 발 가는 데 화평이 있고
무심한 미물도 다 믿는고나
네가 ‘새 아이’로구나
춘원 이광수 작품의 주제는 기독교적 사상이지만, 이 사상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고 고양된 정서의 감동을
통하여 깨닫도록 만들었다.
1940년에 발간된 <춘원시가집>에 실린 <새 아이>를 보자.
물론 이 시에서의 어린 아이는 겁 없이 ‘불길도 만지고 돌도 주무르는’ 순수를 표상한다. 그러나 어리다는 것에만 국한할 수
없는 ‘새’라는 접두사를 통해 낡은 것들과 옛 것들에 새로운 시야의 관점을 부여하고 있다. 그 새로운 시선을 통해서만 진리를
발견해 낼 수 있고 그 진리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 새 아이의 이미지는 어린 예수에서 온 것이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없이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음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새 아이에 의해 선포된 진리만이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으므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아이인 예수의
인격을 닮은 자만이 지극한 정성과 깊고 높은 사랑을 통해 주변을 화평케 할 수 있다.
이광수는 이 시에서 기독교적 소재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새 아이’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현실과 상반된
기독교적 이상향을 지향한 것이다.
이광수는 그의 성장기에 체험한 기독교의 영향으로 <무정>, <재생>, <흙>, <애욕의 피안>,<자서전>, <유정>, <사랑> 등 모든
작품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는 기독교의 박애사상을 민족주의와 결합해 형상화함으로서 당시 한국교회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인물들의 풍자적인 묘사와 의식의 흐름을 통한 새로운 소설기법을 시도했다.
개인적인 좌절은 시대적 상황과의 대결구도로 진행시키고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주제는 통속적인 서사구조로 다뤄졌지만 이
때문에 독자의 정서에 더 깊이 닿는 효과를 보인다. 또한 그가 추구한 이상향은 성서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삶의
현실성이라는 소설의 본질과 형식면면으로의 기법을 통해서도 자신이 확신하는 바를 교리적으로가 아니라 감동을 통해
확산하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문학은 충분히 문학성과 기독성을 충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다시 말하면 이광수는
기독교의 교리를 작품의 사상성으로 소화하려 한 작가였다.
<송영옥 / 기독교문학세계>
<흙> / 이광수
★등장인물
* 허숭(許崇): 주인공. 농촌 계몽을 위해 헌신하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인물. 가난한 농촌태생의 고학생으로 과묵하고
듬직한 성격을 가졌으며 변호사가 되어 부자집 딸 정선과 결혼을 하였으나 부귀영화를 버리고 농촌의 개혁을 위해 헌신함.
* 윤정선: 허숭의 아내. 신교육을 받은 부자집 딸로 부러울 것 없이 곱게 자란 도시 여성. 사치·허영심에다가 행실이 좋지 않음.
자신의 영화만을 위해 살았으나 부정한 행동을 한 후 깊이 뉘우치고 자살하려다 다리를 잃고 나서 남편을 이해하고 농촌개혁에
헌신함.
* 유순: 순박한 시골 처녀. 허숭을 사랑하나 숭의 중매로 한갑에게 시집을 가게 되고 유건영의 모함에 빠진 한갑에게 오 개월
된 임산부 몸으로 죽음을 당함.
* 김갑진: 귀족 가문에서 곱게 자란, 동경 제대 출신의 인텔리. 남작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가 주색과 투기를 해 남작 예우가
정지되었으며 수재로서 법학공부를 했으나 농촌 사람을 교화 되지 않은 야만인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최고의 남자인 줄 알고
남을 무시함. 주색잡기로 세상을 살다 후에 허숭(許崇)의 영향으로 개과천선하여 농촌 개혁에 뛰어듬.
* 한민교: 교직자로 재직하면서 뜻 있는 학생들과 친분을 가지며 조선의 발전과 농촌개혁을 하는 데 힘쓰도록 이끌어 주는
지도자.
* 이건영: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왔으나 자신의 학벌을 이용하여 부자집 딸과 혼인하여 재산을 얻으려고 여러 여자를
건드리고 따라다닌다. 직업도 없이 빈둥대는 생활을 함.
* 유정근: 시골 부자집 아들로 동경 유학을 했으나 성격이 거만하고 간교한 사람으로 여자를 좋아하고 가난한 농촌사람들을
이용하여 고리대금과 장리로 많은 재산을 모음 후일 작은갑으로 인해 마음을 고쳐먹고 농촌 개혁에 동조함.
* 작은갑: 농민이며 말이 없고 침착하여 허숭이 제일 믿는 사람으로 유건영으로 인해 징역을 살고 나와 유건영이 고장 망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자신의 아내와의 간통을 빌미로 유정근을 위협하여 개과 천선하게 함.
* 서선희: 정선의 친구로 장로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죽자 삼촌 밑에서 살았고 아버지의 유산을 삼촌에게 빼앗기고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기생이 됨. 허숭을 만나 개심하여 농촌개혁에 뛰어듬.
★줄거리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다니는 허숭은 여름방학 때 고향인 살여울에 돌아가 야학을 열고 아낙네들을 가르쳤다. 그 중 유순이라는
귀여운 처녀에게 마음이 끌렸다. 서울로 돌아와 학교를 졸업하자 서울 굴지의 갑부인 윤참판이 그의 무남 독녀인 정선과
혼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변호사가 된 허숭은 마침내 정선이와 결혼했으나 농촌계몽사업에 대한 의욕과 유순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 무렵 살여울에는 유순이가 농업기수에게 뺨을 맞자 한갑이라는 청년이 그 농업기수를 두들겨 팬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을 계기로 하여 허숭은 허영과 사치를 좋아하는 데다가 행실마저 바르지 않은 정선이와 헤어지고
농촌계몽에 헌신하기 위하여 살여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가 타고 가는 기차에 투신 자살하려고 뛰어든 정선이는 다리가
절단된 뒤, 과거의 죄과를 고백하고 허숭과 함께 내려간다. 그들은 유치원을 개설하고 농민구제사업에 전념한다. 허숭은
고리대금업자 정근의 모해를 입어 투옥되었다. 그가 나올 때까지 정선이가 살여울을 지킨다.
허숭은 보성전문을 다니는 농촌 출신의 고학생으로 윤참판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기거하다 맏 아들이 죽자 참판의 집안 일을
맡아 보게 되고 고등 문관 시험을 통과해 변호사가 된다. 마음속에 시골처녀 유순이 있었으나 신교육을 받고 미모가 뛰어 난
참판의 딸 정선과 혼인하여 살다가 변화사 일에 염증을 느끼고 부귀영화와 개인적 향락에 눈먼 부인에게 실망하여 살여울로 가
농촌개혁에 노력하여 어느 정도 기틀을 잡는다.
살여울에 찾아온 부인에게 농촌 운동을 같이 하자고 하고 부인은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경성의 재산을 정리하여 오기로
하고 떠난다. 경성으로 간 부인은 김갑진과 간통하게 되고 정선이 마음에 았었으나 갑진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이건영은
허숭에게 편지를 한다. 편지를 받고 경성에 올라 온 허숭은 부인의 간통을 알게 된다. 감정을 억누르고 부인을 용서하려 했으나
부인의 자세에 실망하여 이혼하고 싶을 때 도장을 찍으라고 부인에게 서류를 주고 시집올 때 가져온 재산은 윤참판 앞으로
공증해 놓고 살여울로 떠난다.
경성으로 올라올 때 술집에서 만난 부인의 친구이자 기생인 선화를 기차에서 만나 같이 가다 자살하려고 뛰어든 부인 정선을
보게되고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한다. 정선이 한 다리를 잃게 되자 숭은 자신이 아내를 지켜주며 살기를 결심하고 병원에
찾아온 선화는 숭을 따라 살여울에서 유치원을 경영하며 농촌 운동을 하겠다고 한다.
살여울로 온 숭은 정선의 임신을 알게 되고 정선은 김갑진의 딸을 낳는다. 선화는 유치원 경영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 놓게
되고 숭을 받들며 따르는 유순은 숭의 권유로 듬직하고 건강하지만 성미가 불 같은 면이 있는 한갑에게 시집을 간다.
어느 날 이 마을에 고리대금과 장리로 돈을 벌다 숭 때문에 이익이 적어진 유산장의 아들 유정근의 동경유학에서 돌아온다.
유정근은 숭을 몰아낼 계획으로 전에 신문에서 보도 했던 내용(유순은 윤참판의 딸 정성을 후려 결혼 했으나 다방골 여의와
유순과 산월을 건드려 부인이 반감을 일으켜 김갑진과 간통했고 산월과 숭이 함께 타고 가는 기차에 정선이 뛰어 들었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한갑에게 숭과 유순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꼬여 임신 오개월 된 유순을 죽이게 한다. 살여울의 공기가
좋지 않아 자신의 뜻을 펼수 없음을 안 숭은 정선에게 개간 사업이 한창인 검물란에 가자고 하고 작은갑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운영권을 넘겨준다.
이때 순사가 숭과 선화를 잡아간다. 숭은 맹한갑을 이용해 유순이를 죽였으며 총독정치를 반항하는 죄목으로 선화는 독립을
위해 교육을 했고 경찰에 폭언한 죄목으로 한갑은 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한편 정선은 경성집에서 데리고 왔던 하인 몰란과 농촌일을 하며 남편이 나올때 까지 살려고 결심을 하고 농촌 일을 열심히
한다. 숭이 없는 집안을 돌보아 주던 작은갑도 잡혀가게 된다. 숭은 징역 5년 작은갑과 선화는 3년, 맹한갑은 5년 형을 받는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작은갑은 출소 하여 유정근과 아내의 간통을 알게 되고 이를 빌미로 해 유정근에게 칼을 들고가 위협하여
정근을 개과천선 시킨다. 잘못을 뉘우친 정근은 숭에세 가서 사죄를 하고 숭의 말에 따라 한민교 선생을 지도자로 모시러
서울로 간다.
전에 이건영에게 농락을 당하고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심례의 마음을 달래 줄겸 한민교 선생은 친구 정선과 선화가 있는
살여울에 같이 가지고 심례에게 말한다. 한민교 선생과 심례가 살여울로 떠나려고 경성역에 나가자 사오십명이 환송을 나왔고
거기서 한선생은 농부의 차림으로 김갑진을 만나게 된다. 김갑진은 검불랑에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하며
명년 쯤 한번 와 달라고 한선생에게 부탁한다.
★핵심정리
* 갈래: 장편 소설, 농촌 계몽 소설.
* 배경: 시간(1930년대 초), 공간(서울, 살여울, 검불랑)
* 사상: 귀농 사상, 민족주의·계몽 사상
* 작품경향: 계몽적, 설교적, 민족적, 인도적
*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 주제 ▶피폐한 농촌의 계몽과 귀농 의식.
▶조국의 발전을 위한 젊은 인재들은 농촌 개혁운동에 참여 계몽.
▶농촌 이상향 건설
<신지식 / 이대한마디>
무정(無情, 1917년,<매일신보>)
■ 줄거리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리쬐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 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 장로의 딸 선형이가 명년에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다.
이야기의 서두는 경성 영어 학교 교사 이형식(李亨植)이 장안의 부호 김장로의 고명딸인 선형(善馨)의 영어 개인 지도를 부탁
받고 첫번 방문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본래 형식은 동경 유학을 마친 당대 일류 지식인이나 일찍이 고아가 되어 역경을 겪은
데다 내성적 성격이라 여성 교제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뛰어난 미모인 선형에게 반한다. 그리고 그 날 밤 하숙집에
돌아와서 형식은 뜻밖의 손님인 박영채(朴英彩)를 만나게 된다. 영채는 이형식이 어릴 때 고아일 적에 형식을 데려다 기르고
자식처럼 대하여 준 은사 박 진사의 딸인데 장차 형식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 정혼했었다.
그러나 박 진사의 개화 운동이 세상 사람들의 개화 문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실패하고 집안이 망하자 형식이는 영채와
이별하게 되었는데 , 7년만에 해후하여 그 뒤 영채가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도우려 기생이 되고 형식을 사모하며 수절해
왔다는 전말을 듣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형식은 눈물을 흘리는 한편, 그녀가 기생이라는 혐오감과 미인이라는 유혹의 갈등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에 형식은 선형에 대한 연정과 은사의 딸이자 지난 날 아내로 암시되었던 영채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을 겪게 된다. 또, 기생인 영채를 구해낼 돈 천 원이 없음을 한탄하는 사이에 영채는 지금까지 형식을 위해 지켜
오던 정조를 배학감(명식), 경성학교 교주의 아들인 김현수 일당에게 유린당하고 만다. 그리고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하러 평양행
기차에 오른다.
그녀의 유서를 쥐고 눈물을 뿌리며 영채를 만나려 뒤따라 평양에 간 이형식은 소득없이 돌아와서 오히려 학생들에게 기생을
따라갔다는 오해만 사고 이에 분격하여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기에 이른다. 이는 김현수가 거짓소문을 낸 까닭이었다. 이런
형식에게 뜻밖에 김장로댁 선형과의 결혼 신청이 들어오고 형식은 이를 받아 들여 약혼식을 치른 후에 함께 미국에 유학을 할
준비를 하게 된다.
한편, 자살길에 오른 영채는 차 안에서 소위 신여성인 병욱을 만나 그녀의 황주집에 한 달간 머무는 동안 봉건적 사고
방식에서 근대적 합리 주의로 정신적인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병욱의 호의로 함께 동경 유학길에 오르던 중, 기차 안에서 미국
유학을 떠나는 형식과 선형을 만나게 된다. 이리하여 형식은 새삼 애정과 의리 간에 갈등에 빠지게 되고 선형과 영채 사이에는
삼각 관계의 불협 화음이 생긴다. 기차는 삼랑진 수재 현장에 이르러 연착하게 되고 여기에서 네 젊은이는 고통을 당하는
수재민을 위해 자선 음악회등 함께 봉사활동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간의 개인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 그 대신 토론을
통해 허물어진 민족의 장래를 담당할 역군으로서 사명을 다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 인물들의 근황이 소개되고 작가의
계몽 의식이 서술된다.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도 아니요, 무정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하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弔喪)하는 '무정(無情)'을 마치자.
■ 등장인물
* 이형식 - 진취적 기상을 지닌 주인공. 개화기의 전형적인 지식인. 신교육을 받았고, 지극히 도덕적인 면을 지니고 있으며
현실적 이익을 결국 받아 들이나 인정적 의리 때문에 방황하는 여린 마음도 지니고 있다. 개인과 민족, 현실과 이상의 갈등
속에 고뇌하는 인물
* 김선형 - 김장로의 딸로 기독교 집안의 개화된 신여성. 부자이고 양반이며 신사상을 본받으려는 집안 상황 속에서 신교육을
받았으나 구습을 완전히 벗지는 못함. 형식과 결혼함.
* 박영채 - 유교 교육을 받은 순종적인 여인. 구봉건 세대의 인습에 희생당함. 양반의 집에서 태어나 유교 교육을 받았지만
집안의 몰락으로 기생이 되었고, 구습적인 도덕성 속에 살다가 병욱을 만나 신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녀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함.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지니다가 교육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고자하는 입체적 인물(성격변화함)
* 신우선 - 신문 기자.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 구습으로 인한 결혼으로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였고 기생집을 자주
다녔으나 마음을 잡고 문명(文名)을 날림.
* 김병욱 - 반봉건적, 자유 분방한 성격을 지닌 진취적인 전형적인 신여성. 불쌍한 영채를 도와 유학까지 시켜줌.
* 김장로 - 양반이고 부자인 기독교 장로. 과거 관료로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 발달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려
노력함.
■ 핵심정리
- 주제 : 자유 연애와 민족의식의 고취, 세속적 사랑의 계몽적 민족주의로의 승화, 민족적 현실의 자각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
- 의의 :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장편 소설
- 문체 : 구어체(언문 일치), 산문적 묘사체
- 성격 : 민족적, 계몽적, 설득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작가 개입이 많다.
- 배경 : 시대적-일제 감점기하의 개화기 / 공간적-서울, 평양, 삼랑진 종교적-기독교와 유교, 계몽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
- 갈래 : 장편소설, 현대소설, 계몽소설, 126회의 연장체(連章體) 소설.
- 갈등 : 삼각의 애정 관계에서 오는 개인간의 갈등을 윤리관의 저울에 올려 놓고, '나'라는 '개인'보다는 '민족'이라는 커다란
이상으로 승화시킴으로 갈등을 해소해 나감. (개인 간의 갈등과 민족애로 승화, ‘우리’라는 표현에서 확인됨)
- 표현론적 관점 : 이광수는 민중교화와 인습타파를 위해 소설을 씀. 따라서 그의 소설은 계몽적, 교훈적 성격이 강함.
- 반영론적 관점 : 개화문명에 관심이 많은 당대 사회 반영
- 구성 : 사건의 우연성이 두드러짐.(열차 안에서 상봉하는 세 사람)
▷ 발단 : 형식의 선영 영어지도/선영의 외모에 반하게 됨, 이형식과 박영채의 재회. 사랑을 고백하는 영채
▷ 전개 : 기생이 된 영채와 선형 사이에서 방황하는 형식의 심리적 갈등
▷ 위기 : 교주의 아들 및 배학감으로 인해 정조를 유린당하는 영채, 자살을 기도하는 영채. 그녀를 찾으려는 형식, 우연히
병욱을 만나 의식의 자각, 일본 유학 결심.
▷ 절정 : 형식과 선형의 약혼. 영채, 병욱, 우선 등과의 상봉, 수재민 구호. 유학을 떠남.
▷ 결말 : 등장 인물들의 근황
<출처: 국민영재학원>
이광수 친일 작품
조선의 학도여
/ 이 광 수
그대는 벌써 지원하였는가,
- 특별지원병을 -
내일 지원하려는가
- 특별지원병을 -
공부야 언제나 못하리
다른 일이야 이따가도 하지마는
전쟁은 당장이로세
만사는 승리를 얻은 다음날 일.
승패의 결정은 지금으로부터.
시각이 바쁜지라 학교도 쉬네.
한 사람도 아쉬운지라 그대도 부르시네.
1억이 모조리 전투배치에 서랍시는 오늘.
그대는 벌써 뜻이 정하였으리,
- 나가리이다, 나가 싸우리이다 -
- 싸워서 이기리이다 -
- 미영(米英)을 격멸하고 돌아오리이다 -
조국의 흥망이 달린 이 결전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마루판
단판일세, 다시 해볼 수 없는 끝판
그대가 나가서 막을 마루판싸움
아세아 10억 -
칠 같은 머리
흑보석 같은 눈
황금색 살빛
자비와 인과 맑은 마음과
충과 효와 정렬(貞烈)과
예의와 겸손과
근면과 화평과,
이러한 정신,
이러한 문화,
온유하고 순후한
10억의 운명이 달린 결전.
거룩한 우리 향토
아세아의 성역을
짓밟아 더럽히던,
적을 쫓으라 - 하옵신 결전.
이 싸움 이기고 나서
아세아 사람의 아세아로
천년의 태평이 있을 때
그 어떤 문화가 필 것인가.
아세아는 세계의 성전
세계의 낙원, 이상향
신앙과 윤리와 예술의 원천
그러한 아세아를 세우려고
맹수 독충을 몰아내는 성전(聖戰)
일본 남아의 끓는 피로
아세아의 해(海)와 육(陸)을
깨끗이 씻어내는 성전
- 이 성전의 용사로
부름받은 그대 - 조선의 학도여
- 지원하였는가, 하였는가
- 특별지원병을 -
그대,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부모 때문인가
충 없는 효 어디 있으리,
그대 처자를 돌아보는가
이 싸움 안 이기고 어디 있으리
부모길래, 처자길래, 가라, 그대여,
병역의 의무 없이도
가는 그대의 의기(義氣) -
그러므로 나라에서
특별지원병이라 부르시도다.
의무의 유무(有無)를 논하리,
이 사정 저 형편 궁리하리,
제만사(除萬事) 제잡담(除雜談)하고
나서라 조선의 학도여
그대들의 나섬은
그대들의 충의(忠義), 가문의 영예,
삼천만 조선인의 생광(生光)이오, 생로(生路),
1억 국민의 기쁨과 감사.
남아 한번 세상 나,
이런 호기(好氣) 또 있던가,
일생일사(一生一死)는 저마다 다 있는 것,
위국충절은 그대만의 행운
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
삼천만 동향인(同鄕人)의 앞잡이 되라,
총후(銃後)의 국민의 큰 기탁(寄託)과
누이들의 만인침(萬人針)을 받아 띠고 가라
- 11월 2일 새벽 네시 / 매일신보. 1943.11.4
<해설>
친일시의 한 전형.
“대체 내선일체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재래의 조선적인 것을 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일언이폐문하면 이것이다.
그리하여서 조선 2천 3백만이 모두 호적을 떠들추어보기 전에는 내지인인지 조선인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최후의
이상이다. 그러므로 내선일체가 되고 아니되는 것은 오직 나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조일석에 될 것은
아니지마는 우선 일본국민이기에 필요한 것은 성화같이 습득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니 이것이 빨리 되면 빨리 조선인에게
행복이 오고 더디게 오면 더디게 행복이 오고 만일 조선인이 이 공부에 게으르면 마침내 올 것이 아니 오고 말 것이다.”
그러면 시급한 것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첫째가 황실에 대한 충성의 정조의 함양이다. 일본인의 황실에 대한 감정은 실로
독특한 것이어서 조선인으로서 그 정도에 달하자면 깊고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항용 우리 조상네가 충군애국이라던
그러한 충이 아니다.
일본인의 충에 대한 감정은 한자의 충(忠)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 도리어 유태인의 여호와에 대한 충에 접할 것이다.
일본인은 내가 향유한 모든 행복을 천황께서 받잡은 것으로 생각한다. 내 토지도 천황의 것이오, 내 가옥도 천황의 것이오,
내 자녀도 천황의 것이오, 내 몸도 생명도 천황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황께로부터 받자온 몸이길래 천황이 부르시면 언제나
부탕도화라도 한다는 것이오, 자녀도 재산도 천황께서 받자온 것이매 천황께서 부르시면 고맙게 바친다는 것이다. 천황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때문이다. 이것이 지나나 구주의 군주애 신민관계와 판이한 점이다.
조선인은 이 점을 바로 파악하여야 한다. 그 순간부터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 천황께서 주신 것으로 따라서 언제든지 천황께
바칠 것으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마음의 신체제의 초석이다.
더구나 조선민중은 과거에는 황은을 편파하여 왔거니와 앞으로 의지하고 안길 곳이 진실로 황은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인은
앞으로 내지인보다도 더욱 많은 황은에 답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처지에 있느니 따라서 더욱 많이 천황께 대해 감사와 충성을
바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말씀하기 황송한 일이기 때문에 말로 다하기 어려운 것이니 오직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자는 다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이광수, 매일신보 1940.9.5~12일>
<출처: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춘원은 한국 문학사엔 신문학 개척의 선구자로 영롱히 빛나고 있으나 민족사에는 친일파로 얼룩져 있다. 춘원은 1892년
평안북도 定州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살 되던 해 부모를 잃었다. 고아가 된 어린 춘원은 東學에 입교, 서기가
되었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12세 되던 해 한양으로 옮겼다. 춘원은 1905년 친일 단체 一進會의 추천으로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明治) 學院에 편입, 1910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다시 도일하여 와세다(早稻田)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1917년 1월부터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무정>을 <每日新報>에 연재하기 시작, 소설 문학의
신경지를 열었다. 1919년 2월 宋繼白, 白寬洙, 崔八鏞 등과 '抗日朝鮮靑年獨立團'을 결성하였고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춘원은 모국의 기미년 3·1만세 선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기초 혐의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으며
上海로 건너가 한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여기서 그는 <獨立新聞>의 주필겸 임정 사료 편찬주임으로 활동하였고 1921년
4월 다시 귀국하였다. 그로부터 1년 1개월 만인 22년 5월 발표한 논문이 다름 아닌 <開闢>의 '민족개조론'이다.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그의 나이 30세에 쓰여진 것으로서 도쿄의 2·8독립선언과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 주필로 항일
독립정신이 한창 들끓던 때 착상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춘원이 친일 언행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
였다. 그는 1923년 민족주의 정신을 일깨워 주던 <東亞日報>에 입사, 편집국장을 지냈다. 33년에는 <朝鮮日報> 부사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춘원은 '민족개조론'을 발표했던 바로 그 해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修養同盟會를 金允經 등과
조직, 항일 투혼을 불살랐다. 이 동맹회는 똑같은 이념으로 결성된 평양의 同友俱樂部와 통합하여 修養同友會로 1926년 재편
되었다. 이어 1929년 수양동우회는 독립운동 단체인 興土團과 통합, 同友會로 개칭되었다. 동우회는 당시 국내 민족주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었고 기관지로서 <東光>을 발행,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나섰다. 결국 수양 동우회의 반일 독립운동을
경계했던 일본 경찰은 춘원을 비롯 朱燿翰 등 관련자들을 무더기로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인 38년 신병으로 보석되었다. 이처럼 춘원은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의해 체포 구속된 데서 실증
되었듯이 1937년도까지 열렬한 항일 독립운동가였으며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이 사건으로 15년전 上海의 독립신문 주필을
하던 중 귀국하여 쓴 '민족개조론'은 결코 친일논리일 수는 없고 명백히 민족개조의 진솔한 호소요, 외침이었다.
춘원이 친일언동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일탈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뒤부터였다. 1938년
무렵이었다. 따라서 그 이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로 도망쳐 독립신문의
주필로서 민족의 자주적 독립을 절규하던 중 귀국하여 집필한 '민족개조론'은 정녕 친일 논리가 아니오, 극일을 위해 토해 낸
한맺힌 민족반성의 절규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음으로 춘원의 '민족개조론'이 극일을 위한 민족의 자아반성 촉구였고 의식개혁을 위한 민족적 호소였다는 사실은 이 글의
내용을 통해 역력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開闢> 5월호에 실린 것으로서 무려 54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논문이다. 2백자
원고지 2백 50여 매에 해당된다.
'李春園'이란 필명으로 나온 '민족개조론'은 머릿말에서
'나는 많은 희망과 끓는 精誠으로, 이 글을 조선민족의 장래가 어찌할까, 어찌하면 이 민족을 현대의 쇠퇴에서 건져 행복과
번영의 장래에 인도할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형제와 자매에게 들입니다'
고 밝혔다. 그가 '민족개조론'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대목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춘원은 이 논문에서 조선 민족의 쇠퇴 원인은 도덕적 타락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조선 민족을 도덕적으로 개조하고 민족적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徐載弼, 安昌浩, 李承晩 등 당대에 독립정신을 외쳤던 선각자들을 민족개조운동의 '첫소리'
였다고 강조하였다. 춘원이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등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들을 민족개조운동의 선구자로
표출시켰다는 것은 '민족개조론'이 극일을 위한 의식개혁 논리였음을 쉽게 인지케 한다.
특히 춘원은 일본인이 정의한 한민족 쇠퇴의 원인을 거부했다. 그는 '민족개조론'에서 일본인이 한민족 쇠퇴의 원인으로
'李朝의 약정'을 들고 있지만, 실은 조선인 모두의 도덕적 쇠퇴에 연유한다고 반론하면서 의식개혁의 절대성을 주장했다.
춘원은 민속 쇠퇴의 책임이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오, 일반 민중에게도 적지 않다고 강조하였다. 일반 민중이
악정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을 고치지 못한 연유는 세 가지라고 요약했다.
첫째는 일반 민중이 나태하여 실행할 정신이 없었고, 둘째는 비겁하여 감행할 용기가 없었으며, 셋째는 신의와 사회성의
결핍으로 동지의 견고한 단결을 얻어내지 못한데 기인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민족의식 개조의 요체를 8개 조목으로
집약하였다. 의식개혁 8개 항목인 셈이다.
첫째는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도록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空想과 空論을 버리고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의무'라고 간주, 즉각 실행해야 한다.
셋째는 '표리부동'함이 없이 의리를 지켜 가야 한다.
넷째는 '怯懦를 버리고 옳은 일, 작정한 일이거든 만 난을 무릅쓰고 나가는 자'가 되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사회적 공공 의식과 봉사정신의 함양을 강조하였다.
여섯째는 1인1기의 전문기술 습득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일곱째는 근검절약 정신의 함양이다.
여덟째는 생활환경의 청결이었다.
저와 같은 춘원의 폐부를 찌르는 듯 들춰낸 한민족의 치부는 이 민족을 일본의 식민통치로 전락케 한 도덕적 타락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지적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자학적이었다는 데서 그는 한민족의 열등성을 떠올려 일본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합리화했다는 비판도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춘원이 지적해 낸 한민족의 도덕적 타락상은 있는 그대로였고 그것들을 고치지
않는 한 떳떳한 민족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진실 그것의 토로였을 뿐이다.
그로부터 7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는 '민족개조론'의 개조 대상들은 대부분 극복되지 않으면 안될 요목으로 상존하고
있다. 김영삼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의식개혁운동'도 '민족개조론'의 연장선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한민족의 도덕성 회복과 의식개혁 없이 민족적 중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간절한 호소였고 절규였다.
거기에는 그가 1930년대 후반부터 드러내기 시작했던 친일적 색깔은 결코 덧씌워져 있지 않았다. 오직 한민족의 정신적
타락상에 분노를 터뜨리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전을 제시한 옥고였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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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고야마(이광수)는 경기도 사능리 라는 시골에 있으면서 일본패전 이튿날에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는다. 춘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으나 이내 서울로부터 친일파 처단이라는'불길'한 소식이 전해온다. 피신을 권유하는 허영숙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시골에 그대로 머물며 그는 [나의 고백], [돌베개]를 비롯한 몇몇 글을 썼는데, 그 주조는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춘원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해 투옥된 것은 1949년 2월 7일 효자동 자택에서였다. 그러나 아들의 혈서가 담긴 탄원서와 건강의 악화로 그는 3월 4일 출옥하게 되고, 그의 작품은 조금의 훼손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분단 한국에서 전해지게 되었다. 전해진다.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 가까이에서 58세로 최후를 마쳤다.
사진설명
춘원 이광수 기념비다. 겨울을 (광능내) 봉선사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당시 주지스님이 그의 4촌 동생인 운허스님이라 그런 인연을 맺은 것이다.
주택으로 들어서기전 우측 풀속에 기념비 / 윗사진은 우측편 아래사진은 좌측편에 위치하고 있음
기념비 있는곳에서 바라본 고택 / 좌측 건물은 이미 거의 파손된 상태
하우스 앞 우측에 쌓아놓은 목재 뒤에 기념비 두 개가 있음 (정면 좌측의 흰 건물은 이사짐 센타 사무실임)
<사진출처: 진건청마봉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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