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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작품

파블로 네루다 / 생애, 작품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09.29|조회수1,086 목록 댓글 0

 

 

         <파블로 네루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년 7월 12일~1973년 9월 23일) 칠레시인이자 정치가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

 

1904년 7월 12일 칠레의 파랄에서 출생
1923년 첫 시집 <황혼의 노래> 출간
1924년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
1927년 외교관 생활을 시작, 스페인 ·프랑스 ·멕시코 등에서 여러 작가들과 교우
1953년 스탈린평화상 수상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
1973년 9월 23일 사망
100편의 사랑 소네트, 추억,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문학세계

파블로 네루다는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시인들 중 하나로 손꼽히며, 그의 시는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그의 문체는 매우 다양한데, 성적인 표현이 많은 사랑 시들 (흰 언덕 같은)과 초현실적인 시들, 역사적인 서사시와 정치적인 선언문들이 포함된다. 콜롬비아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어떤 언어로 보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고 했다. 1971년 네루다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후에 그의 정치적인 행태 때문에 논란거리가 되었다.

1945년 7월 15일, 브라질 상 파울루의 파깸부 운동장에서 그는 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혁명가인 루이스 카를로스 프레스테스를 기념하는 낭송회를 가졌다. 노벨상 기념 강연후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초대로 에스타디오 나시오날(Estadio Nacional:국립 경기장)에서 7만 명 앞에서 낭송회를 가졌다.

 

정치 활동

네루다는 생에 많은 외교관 자리를 역임했으며, 칠레 공산당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보수적인 칠레의 대통령 곤잘레스 비델라가 공산주의를 박해했을 때, 네루다의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친구들은 몇 달동안 칠레의 항구 발파라이소의 한 집 지하에 그를 숨겼다. 그후 네루다는 산을 넘어 탈출하여 아르헨티나에 들어갔다.

반공주의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쿠데타 당시, 으로 입원한 네루다는 심장마비로 죽었다. 피노체트는 좌파시인 네루다의 장례식을 공개거행할 것을 반대했으나, 수천명의 칠레사람들은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통행금지를 어기고 공개적으로 애도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이 네루다의 장례는 칠레 군사독재정권 최초의 항거였다.

네루다라는 필명은 체코의 작가이며 시인인 얀 네루다에서 얻어졌으며, 나중에는 그의 법적인 이름이 되었다.

 

 

     <네루다의 15세 때의 모습>

 

  네루다의 생애

- 서정시보다 진한 사랑으로 싸운 시인

칠레사람 치고 그의 연애시 하나 못 외우는 사람 없다는 시인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네루다는 칠레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시인이자,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네루다의 삶은 격정의 연속이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공화파를 지지하다 외교관직을 박탈당했고, 공화파 난민들을 낡은 어선에 실어 칠레로 수송해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도피와 망명생활은 끊이지 않았고, 특히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죽음을 무릅쓴 탈출을 감행한 일은 유명하다.

그의 시집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는 칠레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애송되는 서정시집이기도 하다. 그는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가르시아 로르까) 시인이었고 “모든 언어권을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가르시아 마르께스)으로 불렸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 1920년대 산티아고 학창시절의 네루다  
   
네루다는 칠레 중부의 포도주 산지 빠랄에서 1904년 7월12일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까르멘 레예스 모랄레스와 교사인 어머니 로사 네프딸리 바소알토 오빠소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리카르도 엘리에세르 네프딸리 레예스 바소알토.

그의 시적 재능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열네 살이 된 1918년 최초로 『질주와 비상』지에 「나의 눈」을 발표하고 1920년에는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의 이름을 따 빠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첫 시집 『황혼의 노래』를 출간하고 이듬해에는 그의 대표적인 시집인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했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였다.

산티아고의 칠레대학교에서 프랑스어와 교육학을 공부한 네루다는 1927년부터 버마,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자바, 싱가포르, 부에노스아이레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명예영사로 근무하게 된다.

1936년 스페인내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있었다. 가르시아 로르까를 비롯한 스페인 시인들과 친분을 쌓던 중 발생한 스페인내란과 프랑코 군부에 의한 로르까의 처형은 그의 시세계를 양분하는 기점이 됐다.

"나는 마드리드에서 생애의 가장 중대한 시기를 보냈다. 우리들은 모두 파시즘에 저항하는 위대한 레지스탕스에 빨려들어 갔다. 그것이 스페인 전쟁이었다. 이 체험은 나에게 체험 이상의 것이었다. 스페인 전쟁이 터지기 전에 나는 많은 공화파 시인들을 알고 있었다. 공화국은 스페인에서 문화 문학 예술의 르네상스였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까는 이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정치적 세대의 상징이었다. 이들 인간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무시무시한 드라마였다. 이리하여 나의 낡은 생활은 마드리드에서 끝났다."

스페인 영사시절 공화파 지지

공화주의 운동에 동참한 네루다는 본국 정부에 의해 정치적 개입을 이유로 파면당했다. 하지만 그는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흐와 함께 '중남미 스페인 지원단'을 결성하고 프랑코 군부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다.

네루다의 시는 스페인내란을 거치면서 『지상의 거처』에서 보여준 초현실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지향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더이상 "흐르는 시간이나 물을 노래하고 창백한 죽음의 모습과 그 설움을 노래할" 수 없었다.

대신 네루다는 광부와 노동자, 어부와 기관사가 "이것은 동지의 시다"라고 말할 수 있고 "공장이나 탄광 밖에서도 대지에 뿌리를 내려 대기와 일체가 되고 학대받은 사람들의 승리와 결합(「커다란 기쁨」중)"되는 시를 쓰기로 결심했다.

1938년 칠레에서 인민전선 후보 아기레 세르다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네루다의 외교관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1939년 파리주재 영사에 이어 이듬해 멕시코 주재 총영사로 임명된 네루다는 멕시코에서 디에고 리베라 등 당시 혁명적 벽화운동을 벌이던 화가들과 우정을 쌓았다.

멕시코에서 돌아온 네루다는 국내에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45년 칠레 북부의 탄광지대에서 칠레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바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공산당 의원으로 정치활동 시작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네루다는 공산당 등 칠레 좌파진영의 지지를 받던 가브리엘 곤잘레스 비델라 후보의 선전 책임자로 일했다. 하지만 비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신을 지지한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당시 남미의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이 압력을 넣은 결과다.

이에 네루다는 1948년 1월 상원에서 '나는 고발한다(Yo acuso)'라는 제목의 연설로 비델라 대통령의 배신을 폭로했다. 결국 네루다는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검거령을 피해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를 탈출, 프랑스, 멕시코, 이탈리아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한 네루다는 소련에서의 망명생활 중 "오 칠레여 바다와 포도주와 / 눈으로 덮인 길고 가늘한 꽃잎이여 /…/아 언제 다시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아 언제 아 언제 언제」중)"라며 조국을 그리워하고 "불쌍한 공화국이여 그대는 / 비델라 도적떼들에게 채찍으로 매를 두드려 맞고 / 순경들한테 뺨을 얻어맞고 / 혼자서 으르렁대며 길을 걷는 암캐같다 / 곤잘레스화된 가련한 국민이여(「도망자」중)"라며 칠레의 운명을 안타까와했다.

안또니오 스까르메따의 소설 『불타는 인내』(국내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로 소개됐다)를 원작으로 한 마이클 레드포드의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해 검거령이 철회되자 네루다는 다시 칠레로 돌아와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 정착해 작품활동과 정치활동에 전념했다. 칠레에서 좌파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1969년 네루다는 칠레공산당의 대통령 후보에 지명됐다.

아옌데와 대선후보 단일화

   
 
하지만 사회당, 공산당을 비롯한 칠레의 좌파진영이 인민연합을 구성해 대통령선거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하자 네루다는 입후보를 철회하고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로의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이로써 1970년 칠레에서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됐다.

아옌데 집권 시절 파리주재 대사로 임명된 네루다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지병이 악화돼 대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한 네루다는 1973년 9월11일 자택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 소식을 접했다.

아옌데 대통령이 모네다 대통령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네루다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고 결국 쿠데타가 일어난 지 12일 만인 9월23일 산티아고의 한 병원에서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군부의 민주주의 압살에 숨죽여 분노하던 칠레민중들이 벌인 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집회가 됐다.


당대 최고의 서정시인에서 노동자, 농민의 희망을 노래하는 혁명시인으로,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희망을 실현하는 좌파정치인으로 살다간 네루다. 그는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의 지지자였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정열적인 휴머니스트였다. 네루다는 탄생 백주년을 맞은 2004년 칠레에서 분열된 국가의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로 다시 부상했고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벌어지는 등 네루다의 삶과 작품세계가 다시 한 번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가 한 가장 힘찬 연설 중 하나였던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네루다는 시인의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민중의 일상적 노동에 바치는 자신의 헌신과 애정, 자기 몫의 참여를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인간의 손에 건네려 하는 이 끝없는 투쟁에 시인이 동참하고자 한다면, 그때 그는 땀과 빵과 포도주와 모든 인간의 꿈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내 시 한 편 한 편은 유용한 노동의 수단이 되기를 요구했으며, 나의 노래 하나하나는 서로 교차하는 두 길의 만남을 위한 표지로 내걸리기를 갈구했고, 혹은 어느 누군가가, 다른 이들이, 다음 세대에 올 사람들이 새로운 표지들을 새겨 넣을 돌 조각 하나, 나무 조각 하나가 되기를 열망해 왔습니다.”

 

<들사람문학공간>

 

 

 

  산티아고에 있는 네루다의 집

                                                           <산티아고에 있는 네루다가 살던 집>

 

 

파블로 네루다 論

          / 구광렬


 

들어가는 말


칠레의 조그마한 시골마을 테무꼬(Temuco)는 賞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이다. 소위 일류대학교에만 합격해도 마을 입구에 플레카드가 흩날릴 판에 테무꼬는 노벨상수상자를, 그것도 노벨상의 꽃인 문학부문 수상자를 무려 두 명이나 배출해냈다. 여기에 기괴할 수준의 흥미를 더하는 것은 수상자 두 사람 모두, 이 마을 중학교 출신의 스승과 제자란 사실이다.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벨상이 동네이장이 주는 것도 아닌데,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그것도 한 학교에서 선생과 그 학생이 나란히 세계최고의 상을 받다니…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외롭고 수줍음을 많이 타던 소년 네루다를 시인의 길로 인도한다. 당시 그녀는 31세, 그는 16세.

스승의 영향을 받은 네루다는 미스트랄처럼 불어선생이 되고자 했으나 그녀는 소년네루다에게 러시아문학을 소개하고, 특히 시에 눈을 뜨게 해준다. 두 사람 공히 가명을 쓰며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미스트랄은 그녀가 좋아하던 두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와 프레데리크 미스트랄로부터 각각 이름과 성을 따왔으며, 네루다는 아버지가 글 쓰는 것을 완강히 반대해 그 아버지를 속이려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이름을 찾다가 우연히 어떤 잡지에서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를 알게 되고, 그의 성 네루다와 중남미에서 가장 흔한 이름 즉, 우리의 ‘철수’에 해당하는 ‘파블로’를 붙이게 된다.


두 사람은 훗날 직업으로 외교관을 선택한다는 점도 공통이다.

중남미거장 중에는 외교관 출신이 많다.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은 이들이 자아내는 불유쾌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최소한 중남미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루벤 다리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옥타비오 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 세계적 작가들이 외교관 혹은 공무원 출신이며, 작품 못지않게 공무도 훌륭히 수행해냈다.


그들은 시대에 따라  강한 정치적 성향을 띠기도 한다.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는 대통령에 출마한 적이 있으며(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패함), 네루다는 칠레공산당의 대통령후보로 나선 적이 있다.(후에 양보하여 아옌데가 단일후보가 됨)


네루다가 1940년 멕시코시티 주재 총영사로 부임하던 날, 환영 리셉션장에서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의 하얀 와이셔츠 깃을 붙들고 토를 달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이즈음 다음 세대를 이끌 시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중남미 대륙에 촉망받는 시인이 딱 한 사람 있긴 한데 그가 바로 안타깝게도 옥타비오 파스”라고 말한다. 파스의 재능을 인정하지만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에 대해 강한 유감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실 옥타비오 파스는 파블로 네루다나 후안 헬만, 사울 이바르고옌 같은 투사적 저항시인은 아니다. 파스가 우익 부르조아 편이었다면, 나머지 후자들은 좌익 프롤레타리아 편이었다.


연애시집 두 권으로 칠레최고유명시인이 되다


젊은 날 네루다는 이성적 동물,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보다는 감성적 동물로서의 인간 즉, 미겔 데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가 말하는 살과 뼈로서의 인간이기를 좋아했다. 지극히 감성적인 첫 시집 <황혼의 일기(Crepusculario)>는 산티아고의 모든 출판사에서 거부당한다. 지나치게 선정적, 관능적이라는 것이 그 표면적이유였다. 그랬을 것이다, 당시 보수적 분위기에선 너무나 에로틱했을 것이다. 예술과 외설의 한계를 규정짓는 잣대가 지금보다 한층 엄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치 않고 1923년, 갖고 있던 가구와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팔아서 처녀시집을 출판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 나는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 아니야, 그건 목소리는 아니었어. / 말도, 침묵도 아니었어. / 하여간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어. /밤의 가지에서,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시, ‘시(詩)’ 中-


네루다는 격렬한 불길 속의 그 나이 즉, 16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약관 스무 살에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발표하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샛별이 되기에 이른다.


시인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연애하기를 좋아했다. 공식적인 결혼만 세 번에, 알려진 애인 다섯 명, 애인인지 친구인지 경계가 모호한 여인은 부지기수…


그대는 은빛 향기: 나는 그대의 눈을 빌어 봄을 그려야 하네/ 내 그대의 이름을 알지 못하나/ 여인 없이는 책이 처음에 생길 수 없었을 것: / 책들은 키스로 쓰여지는 것이니/ (그러나 지금은 조용해 주었으면 하네 빗소리를 듣고자 하니) / 두 바다 사이에 모든 내가 / 낙심한 깃발처럼 걸려 있음을 말하고자 하네/ 그리고 내 눈먼 연인을 위해 나는 죽을 수 있네/ 비록 내 죽음이 부족한 기관이나 옷장 안에 쌓인 불필요한 슬픔 때문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시간은 멀어져가며 미망인의 목소리로 부르네/ 잊혀진 숲 속에서 내가 세상을 보기 전, 그 때/ 아직 눈뜨지 않았을 때,/ 나는 이미 네 개의 눈을 가졌네:/ 내 것과 애인의 눈을:/ 내가 변했는지 묻지 말아다오:/ (시간만이 늙어가는 것):/ (그는 언제나 셔츠를 갈아입네 내가 산책 나간 사이에) /모든 사랑의 입술이 옷을 만들었네/ 내가 발가벗었을 때…


 -시, 자작나무 껍질처럼 中-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엔 그의 영원한 화두가 담겨져 있다. '사랑'이다. 그 사랑은 때론 도발적이고 관능적이지만 고독, 죽음 등 비관적 시어와 함께 애조를 띤다. 네루다 자신도 훗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써진 책이 수많은 청춘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인도했구나"라며 기실 놀라워했다.


길가에 서 있는 자두나무 가지로 만든/ 매운 칼 같은 냄새,/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 생기의 방울들,/ 달콤한 성적(性的) 과일,/ 안뜰, 건초더미, 으슥한 집들/ 속에 숨어 있는 마음 설레는 방들,/ 지난날 속에 잠자고 있는 요들,/


높은 데서, 숨겨진 창에서 바라본 야생 초록의 골짜기/ 빗속에서 뒤집어엎은 램프처럼/ 탁탁 튀며 타오르는 한창때.


-  시, 청춘 中-


단 두 권의 시집으로 유명인사가 된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자한다. 칠레 외무성은 이러한 네루다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1927년, 그를 미얀마 랭군 명예영사로 파견한다.


그 후 그는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자바, 싱가포르로 옮겨 다니며 5년간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외교관으로서의 화려한 생활이 아니었다. 명예영사였기에 본국 칠레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생활은 가난하고 힘든 것이었다.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여인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번째 결혼을 한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인 아내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못 했다. 언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시인이 말도 안 통하는 여인을, 그것도 영원한 동반자로 맞이하는 일. 불같은 가슴의 소유자였던 네루다류 청년만이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독은 깊어만 갔다. 여인으로 인한 고독은 또 다른 여인으로 풀 수밖에 없는가. 그는 곧이어 버마 출신 처녀, 조시 블리스와 열애에 빠진다.


너의 추억은 내가 자리하고 있는 밤에서 솟아오른다 /강물은 그 끝없는 탄식을 바다에 묶고 있고/ 동틀 녘 부두처럼 버려진 사내. /떠나야 할 시간이다, 오 버림받은 이여!/ 내 심장 위로 차가운 꽃비 내린다 / 폐허의 쓰레기 더미, 조난자들의 흉포한 동굴./ 네 위로 전쟁의 날개가 쌓여 간다 /노래하는 새들은 네게서 날개를 거두어가고 / 머나먼 무엇처럼 넌 그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바다처럼, 시간처럼, 네 안에서는 모든 것이 조난이었다!/ 침략과 입맞춤의 즐거운 시간,/ 등대처럼 타오르던 혼수상태의 시간, /항해사의 조바심, 눈 먼 잠수부의 분노, / 사랑의 혼미한 도취, 네 안에서는 모든 것이 조난이었다 / 희미한 안개의 유년 속에 날개 달고 상처 입은 나의 영혼,/ 길 잃은 탐험가, 네 안에서는 모든 것이 조난이었다! /넌 고통에 동여매인 채, 욕망에 붙들려 있고 / 슬픔은 너를 쓰러뜨린다, 네 안에서는 모든 것이 조난이었다!         


 -시, 절망의 노래 中-


미얀마에서 네루다는 스스로를 유배시켰다.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철저히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그 경험은 훗날 그에게 지금까지의 시와는 상반되는 난해한 초현실주의 시를 쓰게 하는 힘을 제공한다. 한 마디로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하기위한 혹독한 자기파괴 작업이었던 것이다.


1932년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재 칠레영사로 발령받고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분을 쌓고, 그 이듬해 친구의 나라 스페인으로 파견되어 수도 마드리드에서 또 다른 여인, 델리아 델 카릴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네루다, 드디어 투사가 되다


네루다가 스페인영사로 부임할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절친한 친구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또 다른 동료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옥사당하는 것을 목도한다. 1936년 내전 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급기야 그를 급변하게 한다. 나르시즘적 낭만적 정서에서 벗어나 냉혹한 현실세계에로 이목을 돌렸으며 그의 시 역시 급변에 급변을 거듭한다. "세계는 변했고 내 시도 변했다. 詩句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 이제 그 속에서 내 시 역시 숨 쉬게 될 것이다"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을 팽개치고 참여문학, 참여예술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시인의 본연적 자세에서 일탈하진 않았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리고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단지 비현실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니, 이것은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현실적인 시인은 모든 얼간이들까지 다 이해 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지독히 슬픈 일이다. 단순명료한 규칙이나 신이나 악마가 처방한 성분도 없지만, 이 두 중요한 신사들은 시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한 번은 첫 번째 신사가 이기고, 또 한 번은 두 번째 신사가 이기지만 시 자체는 결코 지지 않는다.”


- <추억> 중에서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네루다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멕시코는 망명객들의 낙원이며 중남미 거장들의 휴식처 겸 작업장이다. 지금도 마르께쓰, 후안 헬만, 사울 이바르고옌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멕시코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 눌러앉아, 왕성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네루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것으로 특히 독일군의 맹공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던 러시아인들의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다. 멕시코혁명을 소재로 하는 멕시코벽화도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43년, 드디어 그는 태평양 연안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편으로 멕시코로부터 칠레로 돌아온다.


귀국 즉시(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네루다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자였다. 그를 비롯한 아옌데 등 이상적공산주의자들 덕에 그래도 칠레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사회주의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네루다가 정치판에 뛰어든 이유는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그의 詩心 때문이었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리추구와 초석, 구리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네루다는 이에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가 내세운 조국부활의 공약을 믿고, 그를 위한 선거운동에 나선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비델라는 미국의 정치적 개입을 거부하기엔 역부족이었기에, 그를 지원해준 민중의 뜻과는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해나가게 되고 이에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Yo acuso)>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결국 칠레정부는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하고, 당시 5만에 이르렀던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니 네루다 역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 <모두의 노래, Canto General>를 발표한 후 이태리망명길에 오른다.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의 이태리 망명시절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 뒤 유럽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한 후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온다. 이 때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 결혼을 하고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에서 거주하게 된다. 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그의 해외여행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선거에 대비한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이다. 그러나 그는 곧 후보를 탈퇴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 후보로 내세운다. 후보 단일화가 이룩된 셈이다.


사실 네루다가 대통령이 되었다하더라도 당시 칠레의 정치적 상황에는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사주를 받은 우파 군부가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에 의해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곧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고, 극우반동세력은 정권을 전복하려 든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후원을 입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중폭파시키고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 지 2년이 되는 해였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네루다의 주치의는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시인의 지병이 악화될까 염려되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 당부한다. 하지만 네루다의 귀는 이미 라디오에 가있었고 결국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사망한 아옌데의 비보를 접하고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그로부터 며칠 후 침대에 누운 채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구술하던 중 네루다는, 창 너머 무장한 군인들이 가택을 수색하기 위해 자신의 바닷가 집으로 다가옴을 알게 된다. 부인이 받아 적던 것을 급히 감추자 장교 하나가 침실을 샅샅이 수색하겠노라 통고한다. 이에 네루다는 장교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 장교는 깜짝 놀라며 권총에다 손을 가져간다. "그게 뭡니까?" 네루다는 힘겹게 말을 잇는다. "시(詩)라네." 옥중에서 네루다의 시를 원서로 읽기 위해 스페인어를 공부한 故김남주시인이 사모했던, 네루다의 투사적 이미지가 선명히 클로즈업 되는 순간이다.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 낙원을 일구기 위해 피와 땀을 다했던 시인. 그의 시는 피노체트의 철권통치 아래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집회가 되었으며, 누군가가 먼저<인터내셔널>노래를 불렀고 이어 그 소린 커다란 메아리로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시인은 더 이상 지상에 없었지만 그의 시는 끊임없이 암송되었으며 결국 칠레 국민들은 그의 유지대로 군부 독재를 마감시킬 수 있었다.


 

파블로 네루다, 열여섯의 나이로 문단에 나와 40여권의 시집, 3500여 편의 시를 썼다. 가난한 철도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칠레 남부 테무코의 거칠고 황량한 자연 속에서 자란 그가, 사랑의 시를 저토록 눈물겹도록 낭만적으로 쓸 수 있었던 그 뮤즈는 어디로부터 연유하는 것일까. 낭만적이고 감상적, 선정적이기까지 한 연애시에서 불꽃같은 저항시를 쓸 수 있었던 초광폭 스펙트럼의 서정, 서사의 힘은 어디에서 치솟는 것일까. 이 모두 우뚝 선 마추피추만큼 불가사의해 보인다.


‘일 포스티노’의 마지막장면을 기억한다. 카메라가, 바위에 부딪쳐 흩어지는 포말을 비추며 지나가고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로 시작하는 그의 시 ‘詩’의 오버랩을…


시인이라면 한 번쯤 언제 시가 자기를 찾아왔는지, 아님 언제 자기가 시를 찾아갔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파블로 네루다, 우리의 시인은 항상 시인과 독자를 원점으로 부팅시켜준다. 이점이 모두 그를 즐겨 찾는 이유일 것이다. 


끝으로 네루다에 관한 필자의 윗글은,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그가 나치추종자들에게 피습당한 바 있는 멕시코 쿠에르나

바까 市 에르난 코르테스 궁 앞 광장벤치에서, 여름 어느 날 맥주를 마시며 첫 구절을 시작한 것이다.

시가 날 찾아온 것인지, 아님 내가 시를 찾아간 것인지, 아님 아직도 시가 날 찾아오지 않고 있는 것인지, 아님 내가 아직 시를 못 찾고 있는 것인지.....

 

<연변소설문학>

 

 

 


   <노벨문학상을 받는 파블로 네루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시

 

 

1. 여자의 육체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
  몸을 맡기는 네 모습은 이 세계를 닮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농부의 육체가 너를 파헤쳐
  땅 속 저 깊은 속에서 아이 하나 세차게 솟아나오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고독했다 새들은 도망치듯 날아가버리고
  침략처럼 밤은 그 막강한 힘으로 나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단련시켰다 무기처럼
  화살처럼 투석기의 돌처럼
 
  이제 복수의 시각은 다가오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와 이끼와 우유로 만들어진 갈증과 욕망의 육체여
  오 가슴의 두 컵이여! 오 딴전을 부리고 있는 두 눈이여!
  오 불두덩의 장미여! 오 느리고 슬픈 목소리여!
 
  나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히리라, 오 여자의 육체여
  이 목마름, 이 끝없는 욕망, 이 정처 없는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흐르고
  밑 모를 고통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이여
 
 
2. 빛이 너를 휘감는다

  빛이 그 최후의 불꽃으로 너를 감싼다
  환자처럼 창백해진 너는 어찌할 바 모르고
  그대로 선 채 너는 너를 감싸고 도는
  황혼의 낡은 프로펠러와 맞서고 있다
  
  파괴된 하루의 순수한 상속녀, 나의 처녀여
  너는 말이 없구나
  불의 생명으로 충만한 이 죽음의 시각에
  너는 너 혼자 고독의 절정을 이루고 있구나
 
  태양으로부터 포도송이 하나가 네 검은 의상에 떨어진다
  밤의 거대한 뿌리가
  돌연 네 혼에서 자라나더니
  이윽고 네가 숨기고 있었던 그 무엇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하여 네 안에서 갓 태어난 창백하고 푸른 민족은
  스스로 자양분을 얻는다
 
  아, 검은 색과 황금색의 고리에 묶인 채
  자석처럼 모든 것을 끌어안는 다산형의 장대한 여자 노예여
  고개를 들어라 손을 뻗어라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라
  그러나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그 꽃이 시들고 슬픔으로 가득차나니
 
 
3. 아, 소나무 숲의 광활함

  아, 소나무숲의 광활함이여, 부서지며 울부짖는 파도소리여,
  느릿한 빛의 유희여, 외로운 종소리여,
  네 눈 속에서 저물어가는 황혼이여, 인형이여,
  흙에 묻힌 소라고동이여, 네 안에서 대지가 노래한다!
 
  네 안에서 강이 노래하고, 나의 혼은 강물 속으로 도망친다
  네가 바라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곳으로
  네 희망의 활 위에 나의 길을 가리켜다오
  그러면 나는 쏘리라 미친 듯
  나의 모든 화살을
 
  나는 내 주위에서 네 안개의 허리를 보고
  너의 침묵은 내 고뇌의 시간을 쫓고 있다
  그러나 아침내 내 입맞춤은 투명한 돌의 팔을 가진 네 육체에
  닻을 내리고 내 젖은 욕망은 둥지를 튼다
 
  아, 일몰의 시간 속에서 사랑이 물들고 울려 퍼지는
  신비한 네 목소리여!
  나는 보았다 깊어가는 들녘의 시간에
  밀이삭이 바람의 입 속에서 고개를 떨구는 것을
 
 
4. 아침은 가득하다

  여름의 심장에
  폭풍우가 충일하는 아침이다
 
  이별의 하얀 손수건처럼 구름이 여행을 떠나고
  바람은 길손의 손을 흔들어 구름을 휘젓는다
 
  우리들, 사랑의 침묵 위에 고동치는
  셀 수 없는 바람의 심장
 
  전쟁과 노래를 가득 담은 언어처럼, 오케스트라처럼
  나무들 사이에서 신비스럽게 울려 퍼지고,
 
  바람은 날렵하게 가랑잎을 나르고
  새들을 겨냥한 화살의 행로를 바꾼다
 
  거품도 일지 않는 파도 위에 가랑잎을 떨어뜨리는 바람
  무게 없는 형체, 허리를 구부린 불
 
  입맞춤은 여름 바람의 문전을 두드리고
  산산이 부서져 가라앉고 만다
 
 
5. 그리하여 너는 나를 들을 것이다

  나의 말에 네가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나의 언어는
  가끔 해변의 갈매기 발자국처럼
  수척해진다
 
  포도알처럼 매끄러운 너의 손을 위한
  사슬, 도취한 방울
 
  나는 아주 먼 데서 나의 언어를 본다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너의 것
  그것은 담쟁이처럼 나의 옛 상처 위로 기어오른다
 
  그것은 때로 축축한 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이 잔인한 유희는 네가 져야 할 책임이다
 
  나의 어두운 동굴에서 언어가 빠져나간다
  모든 것을 너는 채운다 그 모든 것을
 
  너보다 먼저 나는 네가 점령한 고독에 내 언어의 집을 짓는다
  너보다 더 나는 슬픔에 익숙해져 있다
 
  지금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내 언어가 말했으면 한다
  내가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내 귀가 들을 수 있도록
 
  고뇌의 바람이 아직도 나의 언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꿈의 태풍이 아직도 나의 언어를 때려눕히고 있다
  너는 내 슬픈 목소리에 깃든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6. 나는 네 모습을 기억한다

  그 해 가을의 너를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
  너는 베레모였고, 가슴은 따뜻했었다
  너의 두 눈 속에서는 황혼의 불꽃들이 서로 싸우고
  네 혼의 물 속으로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넝쿨처럼 나의 팔을 휘감으며 나뭇잎들은
  나른하고 온화한 너의 목소리를 주워모았다
  그리고 방심의 모닥불 속에서 나의 갈증은 타오르고
  감미롭고 푸른 히아신스가 내 가슴 위로 기어올랐다
 
  너의 눈이 여행을 떠난 지금 가을은 멀다
  회색의 베레모, 새 소리, 집처럼 아늑한 가슴,
  그 쪽으로 나의 애틋한 동경은 이주하고
  잉걸불처럼 뜨거운 환희의 내 키스가 떨어진다
 
  배 위에서 쳐다보는 하늘,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평야
  너에 대한 나의 추억은 빛이고, 연기이고, 고요한 연못이다
  너의 눈 저편에서 황혼이 타오르고
  가을의 마른 잎이 너의 혼 속에서 선회하고 있다
 
 
7. 오후들 속으로 몸을 굽히고

  석양에 몸을 구부리고 나는 나의 슬픈 투망을 던진다
  대양과도 같은 내 눈을 향해
 
  거기, 난파선의 익사자가 
  두 팔을 휘젓듯
  나의 고독이 드높게 치솟는 모닥불 속에서 나래를 펴고 타오른다
 
  나는 공허한 네 눈 위로 빨간 신호를 보낸다
  그 눈은 등대의 가장자리에서 바다처럼 물결치고 있다
 
  너는 다만 어둠만을 주시하고 있다 저 먼 곳에 있는 나의 여자여
  이따금 너의 시선에는 공포의 해안이 떠오르곤 한다
 
  석양에 몸을 구부리고 나는 나의 슬픈 투망을 던진다
  대양과도 같은 네 눈에서 물결치는 바다를 향해
 
  밤의 새들은 제일 먼저 뜬 별들을 쪼고 있다
  내거 너를 사랑할 때 빛나던 바로 그 별들을
 
  밤이 우수의 말을 타고 내달린다
  평원에 푸른 이삭을 흩뿌리면서
 
 
8. 흰 벌

  하얀 꿀벌이여, 너는 꿀에 취해 나의 영혼 속에서 윙윙거리고
  나선형의 느릿한 연기 속에서 몸을 비튼다
 
  나는 버림받고 절망한 사내 이제 나의 말에는 반향이 없다
  전에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지금은 모든 것을 잃은 사내
 
  내 최후의 동경이 네 마지막 닻줄에서 삐그닥 소리를 낸다
  너는 폐허의 내 땅에 최후까지 남은 장미 한 송이
 
  아 그러나 너는 말이 없구나!

  이제 너의 그 깊은 눈을 감아다오. 그 눈에 밤이 나래를 펴리니
  아, 무서움에 떨고 있는 육체의 나상(裸像)이여
 
  그 깊은 눈에 밤이 나래를 펴고
  너는 싱싱한 꽃의 팔과 장미의 무릎을 갖고 있따
 
  너의 유방은 하얀 달팽이를 닮았고
  그림자처럼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너의 배 위에서 잠을 자고는 했지
 
  아ㅡ 그러나 너는 말이 없구나
 
  네가 없는 이 곳에서 나는 외롭다
  비가 온다 바닷바람이 길 잃은 갈매기를 쫓고 있다
 
  비가 맨발로 축축하게 젖은 거리를 걷고 있다
  저쪽 나무에서는 이파리들이 병자처럼 한숨을 쉬고 있고
 
  하얀 꿀벌이여, 너는 내 곁에 없지만 너의 목소리는 내 영혼  속에 깃들어 있나니
  야위고 말이 없는 너는 다시 살아나리라
 
  아, 말이 없는 나의 처녀여
 
 
9. 소나무에 취해

  송진과 긴 입맞춤에 취해
  나는 광란의 여름 바다 위로
  장미의 돛단배를 띄운다
  쇠잔해가는 하루의 종말을 향해
 
  나는 창백하고 탐욕스런 바다를 가르며
  황량한 대기의 가혹한 향기

  속을 항해한다
  아직도 쓰라린 과거의 음향과
  버림받은 물거품의 슬픈 장식이 달린 회색의 의상을 걸치고
 
  정열의 포로가 된 나는 하나뿐인 파도를 타고
  달처럼 해처럼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가
  갑자기 또 싱싱한 허리처럼 하얗고 쾌적해졌다가
  행운의 섬과 섬 사이에서 잠이 든다
 
  축축한 밤, 입맞춤의 나의 의상은
  전류에라도 감전된 양 미친 듯 떨며
  기세 좋게 꿈속을 파고들고
  도취한 장미는 내 안에서 그 꽃잎을 편다
 
  솟구치는 파도와 파도 한가운데에
  평행으로 드러누운 너는 나의 팔에 몸을 맡기고
  물고기처럼 한없이 나의 영혼에 달려든다
  하늘 밑 에네르기에 싸여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10. 우리는 잃어버렸다

  오늘도 우리는 황혼을 헛되이 보냈다
  푸른 밤이 대지에 내리기 시작하는 초저녁에
  우리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저 멀리 언덕 위에서
  서쪽으로 지는 낙일의 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태양의 파편이
  나의 두 손 사이에서 은화처럼 타오르고,
  
  나는 떠올렸다 너를 고통스런 마음으로
  너도 알고 있을 그때의 슬픔에 젖어
 
  어디에 있었지 너는 그때?
  누구와 함께
  무슨 말을 주고받았지?
  슬픔에 잠겨 멀리서 너를 느낄 때면
  어쩌자고 사랑은 이다지도 갑자기 한꺼번에 밀어닥치는가?
 
  황혼녘이면 항상 쥐고 있는 책은 내 손에서 떨어지고
  상처 받은 개처럼 망토가 내 발에 감긴다
 
  아, 날이 저물면 언제고 언제고 너는 멀어져간다
  황혼이 입상을 지우며 사라져가는 쪽으로
 
 
11. 거의 하늘을 떠나

  금방이라도 하늘 밖으로 나올 듯한 반달이
  두 개의 산 사이에 닻을 내린다
  선회하며 배회하는 밤, 눈의
  보아다오, 얼마나 많은 별들이 웅덩이 속에서 부서지는가를
  밤은 눈썹 사이에 죽음의 십자가를 만들고 달아난다
  푸른 용광로 서로 싸우는 침묵의 밤
  나의 심장은 정신나간 바퀴처럼 회전하기 시작한다
 
  먼 데서 온, 멀고 먼 데서 데리고 온 소녀여
  하늘 아래서 너의 눈은 가끔 반짝반짝 빛난다
  쉴 새 없이 내 가슴 위를 횡단한다
  묘지에서 불어닥친 바람이
  너의 꿈을 뿌리째 뽑아 산지사방으로 흩어버린다
 
  맞은편의 거대한 나무들도 송두리째 뿌리가 뽑혀 있었다
  그러나 해맑은 소녀여·연기의 질문이여·밀이삭이여
  너는 반짝이는 나뭇잎으로 바람을 만들고 있다
 
  밤의 산 뒤에서 활활 타오르는 하얀 백합이여
  만물이 너를 창조했나니 내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칼이 내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이 불안
  지금은 그녀의 미소가 보이지 않는 다른 길을 가야 할 때다
 
  종을 매장한 폭풍우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의 소용돌이
  무엇 때문에 지금 내가 그녀를 붙잡고 슬픔에 떨게 하랴
 
  아 모든 것으로부터 절연되어
  고뇌도·죽음도 겨울도 없는 그 길을 가자
  이슬 속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12. 네 가슴으로 충분하다

  나의 마음은 너의 가슴으로 넉넉하고
  너의 자유는 나의 날개로 충분하다
  너의 혼 위에 잠들어 있는 나의 육체는
  나의 입에서 하늘까지 오를 것이다
 
  그날그날의 환상은 네 안에서 살고
  너는 이슬처럼 꽃부리에 내린다
  너는 너의 부재로 지평선을 판다
  파도처럼 영원히 도망치면서
  나는 말했다.

  바람 속에서 너는
  소나무숲처럼 돛대처럼 노래하고 있었다고
  소나무와 돛대처럼 키가크고 말이 없는 너는
  여행처럼 갑자기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그 옛날의 길처럼 다정다감한 여자여
  네 마음 속에는 메아리와 향수 어린 목소리가 깃들어 있나니
  내가 눈을 뜨면 너의 혼 속에서 잠든 새들이
  보금자리를 바꾸려고 날개를 편다
 
 
13. 나는 표하는 데 열중했다

  나는 불의 십자가로
  네 육체의 하얀 지도 위에 낙인을 찍었다
  은신처를 탐색하는 거미처럼 나의 입술은
  공포와 갈증에 떨면서 네 안에서, 네 뒤에서 기어다녔다
 
  슬프도록 감미로운 인형이여, 나는 네 슬픔을 달래기 위해
  황혼의 바닷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었다
  백조, 나무, 아득하고 즐거운 그 무엇,
  포도의 계절, 무르익은 결실의 계절 등에 관한
 
  나의 거처 항구에서 나는 너를 연모했다
  꿈과 침묵을 넘나들었던 나의 고독은
  바다와 슬픔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정박한 두 곤돌라의 선두 사이에서 의식을 잃고 입을 열지 못했다
 
  입술과 목소리 사이에서 뭔가 죽어간다
  그것은 새의 날개 같기도 하고 고뇌와 망각 같기도 하다

  그물이 물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나의 인형이여, 한두 방울 남아 있는 물방울이 떨고 있다
  그럼에도 그 무엇이 덧없는 이들 언어 사이에서 노래한다
  그 무엇이 노래한다 갈증의 내 입까지 차오른 그 무엇이
  오, 환희의 모든 언어로 너를 찬미할 수 있나니
  광인의 손에 든 종루처럼 노래하고, 타오르고 달아나라
 
  나의 슬픈 사랑이여, 갑자기 무슨 일이 너에게 일어났는가?
  몹시도 추운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나의 가슴은 밤에 피는 꽃처럼 문을 잠근다
 
 
14. 매일 너는 논다

  날마다 너는 우주의 빛과 놀고 있다
  다정한 손님이여 너는 꽃 속으로도 오고 물 속으로도 온다
  너는 매일 내가 꽃송이처럼
  두 손으로 감싸는 이 하얀 머리……
 
  내가 너를 사랑한 이후 아무도 너를 닮은 사람은 없다
  노란 화환 사이에 너를 길게 펼쳐다오
  남쪽 하늘의 별 사이에 구름의 문자로 너의 이름을 쓰고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로 하여금 상상케 해다오, 존재 이전의 네 모습을
 
  갑자기 바람이 울부짖으며 닫혀진 나의 창을 두드린다
  하늘은 검은 고기로 가득찬 그물이다
  모든 것을 풀어놓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이 사방팔방으로부터 불어온다

  비가 옷을 벗는다
  새들이 도망치듯 날아간다
  바람 바람
  인간의 폭력, 이것만이 내 싸움의 대상이다
  폭풍이 검은 잎사귀들을 휘감고
  지난 밤 하늘에 매놓았던 모든 선박 풀어놓았다
 
  너는 여기 있다. 아 너는 달아나지 않는다
  너는 내가 지르는 최후의 절규도 들어줄 것이다
  불안에 떠는 사람처럼 내 곁에 있어다오
  그러나 어떤 때는 불가사의한 그림자가 네 눈을 지나간다
 
  지금도 지금도 여전히, 귀여운 처녀여,
  너는 나에게 인동넝쿨을 가져다주고,
  아직도 너의 유방에는 향기가 감돌고 있다
  슬픈 바람이 나비들을 죽이며 질주하는 사이에
  나는 너를 사랑하고 나의 환희는 자두빛 너의 입술을 깨문다
 
  너는 어쩌면 나 때문에 상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외롭고 거친 나의 혼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나의 이름 때문에
  우리는 자주 보고는 했다 샛별이 타오르며
  우리들의 눈에 헤일 수 없이 입을 맞추고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황혼이 선회하며 부챗살을 펴는 것을
  나의 언어가 너를 애무하면서 네 위에 비가 되어 내린다
  햇살을 받은 진주조개와 같은 네 육체를 나는 오래 전부터 사랑했다
  나는 네가 우주의 주인일 거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나는 네게 가져다줄 것이다 산에 핀 꽃과 코피유를
  검은 개암나무와 키스로 가득 찬 바구니를
  봄이 벚나무를 키우는 것처럼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우고 싶다
 
 
15. 나는 네가 조용하기를 바란다

  잠자코 있을 때의 네가 나는 좋다 네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에
  너는 듣고 있다 아주 먼 데서 그러나 나의 목소리는 네 귀에 닿지 않는다
  네 눈은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만 같고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네 입술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다
 
  삼라만상이 나의 혼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만물 가운데서 으뜸가는 너는 나의 혼으로 가득 차 있다
  꿈의 나비여, 너는 나의 혼을 닮았구나
  뿐만 아니고 너는 우수의 언어와도 같구나
 
  잠자코 있을 때의 네가 나는 좋다 아주 멀리 네가 있는 것 같기에
  너는 마치 탄식하고 있는 것 같다 뭔가 속삭이고 있는 나비여
  너는 듣고 있다 아주 먼 데서 그러나 나의 목소리는 네 귀에 닿지 않는다
  너의 침묵으로 나를 잠자코 있게 해다오
 
  등불처럼 밝고 반지처럼 단순한 그 침묵으로
  나 또한 너에게 말을 걸도록 해 다오
  침묵 속에서 빛나는 별, 너는 흡사 밤이다
  너의 침묵은
  저 멀리서 빛나는 순박한 별의 침묵이다
 
  잠자코 있을 때의 네가 나는 좋다 네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처럼 너는 먼 데서 괴로워하고 있다
  나는 그런 때, 말 한 마디, 미소 하나,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면 나는 기쁘다 나도 모르게 기쁘기만 하다
 
 
16. 해 질 녘 내 하늘에서

  황혼의 내 하늘에서 너는 한 조각 구름
  너는 내가 좋아하는 몸매와 색깔을 가지고 있다
  너는 나의 것 너는 나의 것 달콤한 입술의 처녀여
  너의 생명 속에 무한한 나의 꿈이 살고 있다
 
  내 영혼의 등불이 너의 두 발을 방밋빛으로 물들이고
  쓰디쓴 나의 포도주는 네 입술에서 더욱 달콤해진다
  오, 내 황혼의 노래를 거둬들이는 처녀여,
  어쩌자고 나의 외로운 꿈은 너를 나의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가!
 
  너는 나의 것 나의 것이라고 석양의 미풍을 향해 외치면서 나는 걷는다
  그러면 바람이 와서 홍라비 같은 나의 목소리를 질질 끌고 가버린다
  나의 눈 깊은 곳에서 사냥을 즐기는 소녀여, 너의 약탈은
  물의 흐름을 막기라도 하듯 밤의 시선을 차단한다
 
  사랑하는 소녀여, 너는 내 음악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고,
  내 음악의 그물은 하늘처럼 넓다
  나의 혼은 비탄으로 가득 찬 네 눈의 물가에서 태어났고,
  그 비애의 눈동자 속에서 내 꿈의 영토는 시작된다
----------------------------
  이 시는 라빈드라니드 타코르의 시 <가정>을 패러디한 것이다.

 
 
17. 생각하고 뒤엉키는 그림자들

  생각에 잠겨 깊은 고독 속에서 그물로 그림자들을 잡아올린다
  너 역시 먼 데, 아 누구보다도 더 먼 데 있다
  생각에 잠겨 새들을 놓아주고, 오만가지 상념들을 지우고,
  등불을 매장한다
  안개 속의 종루여, 너는 저 멀리 높은 곳에 있구나!
  압살당한 비애, 분쇄된 암울한 희망,
  말수가 적은 방앗간 주인,
  저 멀리 도시에서 밤이 고개를 숙이고 네게로 다가온다
 
  내 앞에 나타난 이방인, 너는 그 어떤 사물처럼 낯설기만 하다
  나는 길을 걸으며 골똘히 생각해본다, 네 앞에 놓인 나의 삶을
  누구의 앞에도 서본 적이 없는 삶, 가혹한 나의 삶을
  돌과 돌 사이에서 바다를 향해 울부짖는 나의 절규가
  바다 안개 속으로 미친 듯 마구 질주한다
  슬픈 분노, 절규, 바다의 고독
  나는 미친 듯 격렬하게 하늘을 향해 팔을 내뻗는다
  너, 여자여, 그 곳에서 너는 무엇이었지! 이 거대한 부채의
  어떤 선, 어떤 살이었지? 너는 지금도 여전히 멀리 있다

  숲속의 불이여! 타올라라 푸른 십자가로
  타올라라, 타올라라, 빛의 나무들 속에서 활활 타올라라
  타닥 타닥 소리내면서 무너지면서 불길이여 타올라라, 타올라라
  그러면 불티에 화상을 입은 나의 혼은 춤을 추리라
 
  누가 부르고 있을까? 침묵일까, 산울림 속에 깃든?
  향수의 시간, 기끔의 시간, 고독의 시간,
  그 모든 시간 속의 나의 시간이여!
  바람이 노래하며 소라고동 속을 뚫고 지나간다
  나의 육체에 ㅁ힌 눈물의 정열이여
 
  격렬하게 흔들리는 뿌리,
  걷잡을 수 없는 파도의 습격!
  나의 혼은 간단 없는 슬픔과 기쁨의 혼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생각에 잠겨, 나는 깊은 고독 속에 등불을 매장한다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18. 여기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여기서 너를 사랑한다
  검은 소나무숲을 헤집고 바람이 지나간다
  달은 표류하는 수면에 그 빛을 발산한다
  하루가 하루의 뒤를 추격한다
 
  춤추는 무용가처럼 안개가 풀어진다
  한 마리 은빛 갈매기가 낙일의 하늘을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때로는 배의 돛이 하늘의 별들이
  어떤 때는 또 배의 검은 십자가가

  홀로
  나는 때때로 아침을 맞이한다 그럴 때면 나의 혼까지 축축하다
  멀리서 바다가 운다
  이 곳은 항구
  나는 여기서 너를 사랑한다
 
  나는 여기서 너를 사랑한다 수평선이 너를 헛되이 숨기려고 한다
  이 차가운 사물들 속에서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
  가끔 나의 키스는 무거운 배를 타고
  닿을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바다를 달린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낡은 닻처럼 잊혀진 존재라는 것을
  황혼이 깃들 때 부두는 더욱 슬프다
  쓰잘데없이 허기졌던 나의 삶은 이제 지쳤다
  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사랑한다 너는 너무 멀리 있다
 
  권태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과 싸우느라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밤이 내려와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달은 꿈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가장 크낙한 별이 너의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내가 너를 사랑할 때처럼 바람 속의 소나무들이
  철사처럼 가는 이파리들로 나의 이름을 노래하고 싶어한다
 
 
19. 나긋나긋한 황갈색 여자

  갈색의 날렵한 소녀여 과일을 익게 하고
  밀을 여물게 하고 해초를 꼬이게 하는 태양이
  해맑은 너의 육체와 빛나는 너의 눈과
  물의 미소를 머금은 내 입을 만들었다
 
  네가 두 팔을 뻗칠 때면 검은 태양이
  검은 머리끄덩이로 안타깝게 너를 휘감는다
  개여울과 장난치듯 너는 태양과 장난을 친다
  그러면 태양이 네 눈에 두 개의 검은 웅덩이를 남긴다
 
  갈색의 날렵한 소녀여 나를 네게 접근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너와 나를 멀리 갈라놓는다 마치 정오의 태양처럼
  너는 넋 잃은 나비의 청춘이고
  파도의 도취이고 강력한 이삭의 힘이다
 
  하지만 나의 우울한 마음은 너를 찾고,
  나는 사랑한다 너의 해맑은 육체를 매끈하고 가냘픈 네 목소리를
  밀밭과 태양처럼 양귀비꽃과 물처럼
  아름답고 변치 않는 갈색의 소녀여
 
 
20.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써야지
 
  이를테면 이렇게 써야지 '밤은 부서지고
  저 멀리서 별들은 파랗게 떨고 있다'고
 
  밤바람은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노래하고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써야지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가끔 나를 사랑했다
 
  오늘 밤과 같은 밤에 나는 그녀를 가슴에 품고
  가없는 하늘 아래서 수없이 그녀와 입을 맞추곤 했지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나 역시 그녀를 사랑했지
  깊고 커다란 그녀의 눈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지
 
  정말이지 나는 오늘 밤 가장 슬픈 시를 써야겠다
  그녀는 내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잃었다고 느끼면서
 
  거대한 밤에 귀를 대고 있노라면 그녀가 없는 이 밤은 더욱 거대하다
  그리고 목장에 이슬이 내리듯 내 영혼에 시가 내린다
 
  내 사랑이 그녀를 붙들지 못했대서 무슨 대수랴
  밤은 부서지고 그녀는 내 곁에 없다
 
  이게 전부다 먼 데서 누가 노래하고 있다 아주 먼 데서
  그녀를 잃은 내 영원은 공허하다
 
  그녀 곁으로 가기라도 하려는 듯 나의 눈길은 그녀를 찾고 있다
  내 마음도 그녀를 찾고 그러나 그녀는 내 곁에 없다
 
  그때와 똑같은 밤이 그때와 똑같은 나무를 하얗게 드러내는데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은 그때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단연코 나는 지금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 그러나 나는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던가
  나의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닿기 위해 바람 속을 헤매고 있다
 
  딴 남자의 딴 남자의 것이 되어 있겠지 지난 날 나의 키스도
  그 목소리도 해맑은 그 육체도 무한한 그 눈도
 
  단연코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
  사랑은 이다지도 짧고 망각은 이다지도 긴 것인가
  오늘 밤과 같은 밤에 나는 그녀를 가슴에 안고는 했다
  그너나 그녀를 잃은 나의 영혼은 공허하다
 
  그녀가 내게 남긴 이 아픔이 부디 마지막 아픔이 되기를
  그녀에게 쓰고 있는 이 시가 부디 최후의 시가 되기를
  
 

 

절망의 노래

  그대 그날 밤을 기억하는가, 그곳에 나와 함께 있던 그날 밤을?
  강은 이미 고질이 된 탄식을 바다로 잇고 있었다.
 
  새벽의 부두처럼 나는 버림받았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 오, 나는 버림받았다!
 
  나의 마음 위로 싸늘한 화관(花冠)들이 떨어진다.
  오, 쓰레기의 소굴, 난파된 자들의 잔인한 동굴!
 
  전쟁과 비행(飛行)을 축적하는 그대
  그대는 노래하는 새들의 날개를 펼쳐든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바다처럼, 시간처럼, 그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파멸일 뿐!

  공격과 입맞춤의 시간은 즐거운 것
  그것은 등대처럼 타오르는 도취의 시간
 
  파일럿의 열망도, 눈 먼 잠수부의 분노도,
  사랑에 취한 자의 당혹도, 그 모두가 그대 앞에서는 파멸일 뿐!
 
  안개의 유아기에서 떠도는 나의 날개달린, 상처받은 영혼
  타락한 탐험가, 그 모두가 그대 앞에서는 파멸일 뿐!
 
  그대는 고통과 결합하였고, 욕망과 결속하였다.
  슬픔은 그대를 쓰러뜨렸으니 모든 것이 그대 앞에서는 파멸일 뿐!
 
  나는 성벽의 그늘을 물러가게 했다.
  욕망과 행동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걸어갔다.
 
  사랑하다 잃어버린 여인, 오, 그대는 육욕, 나의 육욕의 대상이었고,
  이 습기찬 시간에 나는 그대를 상기하며 노래부른다.
 
  잔처럼 그대는 무한한 애정을 거두어들였고,
  무한한 망각을 잔처럼 산산조각냈다.
 
  그것은 섬의 검디검은 고독,
  그곳에서 사랑의 여인은 팔을 벌려 나를 맞아주었다.
 
  갈증과 굶주림은 있었지만 그대 자신이 과일이었다.
  비탄과 폐허가 있었지만 그대 자신이 기적이었다.
 
  아 여인이여, 그대의 영혼의 세계에서 그대의 품 속에서
  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건 나도 모르는 일!
 
  그대에 대한 나의 욕망은 비록 짧았지만 가장 지독했던 것,
  비록 취하게 했지만 가장 대담했던 것, 탐욕스러웠지만 가장 야무졌던 것
 
  입맞춤이 난무하는 공동묘지, 그대의 무덤에는 아직도 열기가 남았고,
  새들이 쪼아먹은 포도송이는 여전히 타고 있었다.
 
  오, 깨물린 입이여, 온 몸에 찍힌 입맞춤 자국이여,
  오, 굶주린 이빨이여, 휘감긴 육체여.
 
  오, 희망과 노력이 맺은 광란의 교접에서
  우리는 결합했고 절망했다.
 
  부드러움은 물과 가루처럼 가벼웠다.
  말은 입술에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나의 운명, 그 속에서 나의 열망은 여행하였고
  그 속에서 나의 열망은 쓰러졌으니 그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파멸일 뿐!
 
  오, 쓰레기의 소굴, 그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쓰러지니
  어떤 고통도 그대를 당하지 못했고 어떤 파도도 그대를 익사시키지 못했다.
 
  끊임없이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대는 온몸을 불태웠고 노래불렀으며
  언제나 뱃머리의 선원처럼 서 있었다.
 
  아직도 그대는 노래의 꽃을 피우는가, 아직도 조류와 싸우는가.
  오, 쓰레기의 소굴, 거침없이 괴로움을 퍼내는 우물.
 
  창백한 눈먼 잠수부, 불운한 투석병(投石兵),
  타락한 탐험가, 그 모두가 그대 앞에서는 파멸일 뿐!
 
  떠나야 할 시간, 밤의 시간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시간이었다.
 
  바다의 소란스런 허리띠는 해안을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싸늘한 별들이 솟아나면 검은 철새들은 먼 길을 떠났다.
 
  새벽의 부두처럼 나는 버림받았다.
  떨리는 그림자만이 나의 손아귀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아, 무엇보다 먼저 그 무엇보다 먼저
  떠나야 할 시간, 오, 나는 버림받았다!

 

 

 

  <네루다의 파리 생활 시절>

 

 

네루다 시모음

 

 

100편의 사랑 소네트

    - 17번째

 

I don't love you as if you were the salt-rose, topaz
or arrow of carnations that propagate fire:
I love you as certain dark things are loved,
secretly, between the shadow and the soul.

당신이 소금장미나 황옥이었다면, 또는 불이 뿜어내는 카네이션의 화살이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겁니다
나는 그늘과 영혼사이에 은밀히 숨겨진 것들까지도
사랑받을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I love you as the plant that doesn't bloom and carries
hidden within itself the light of those flowers,
and thanks to your love, darkly in my body
lives the dense fragrance that rises from the earth.


꽃은 피지 않지만, 꽃의 아름다움이 그 속에 숨겨진 것처럼
당신을 사랑합니다.
땅에서 올라와 내 몸에 은밀히 살고 있는 순수한 향기,
당신의 사랑이 고맙습니다.

I love you without knowing how, or when, or from where,
I love you simply, without problems or pride;
I love you in this way because I don't know any other way of loving


어떻게, 언제, 어디선지 몰라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복잡함과 자만없이 솔직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바로 이렇게 사랑합니다.

but this, in which there is no I or you,
so intimate that your hand upon my chest is my hand,
so intimate that when I fall asleep it is your eyes that close.

내가 없는 곳에 당신도 없고
내 가슴에 얹은 당신의 손이 바로 내 손이며
내가 잠들 때 당신의 눈도 감깁니다.

 

 

 

해방자

 

여기 나무가 온다. 폭풍의
나무, 민중의 나무.
나뭇잎이 수액을 타고 오르듯
영웅들은 대지로부터 솟구쳐 오른다.
바람은 무성한 나무숲에
부딪쳐 아우성이 되고,
마침내 빵의 씨앗이 또다시
대지에 떨어진다.

여기 나무가 온다. 알몸뚱이
주검을, 매질 당해 만신창이 된 주검을
먹고자란 나무.
창에 찔려 죽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재가 되고
도끼에 목이 잘리고,
말에 무낑 채 갈가리 찢기고,
교회의 십자가에 못박힌
처참한 몰골의 주검을 먹고 자란 나무.

여기 나무가 온다, 뿌리가
살아 숨쉬는 나무,
순교자들의 주검에서 초석을 뽑아내고,
그 뿌리로 피를 마셨던 나무,
땅바닥에서 눈물을 뽑아내,
우듬지까지 끌어올리고,
그것을 자신의 몸 구석구석 나누어 주었던 나무,
보이지 않는 꽃이었고,
때로는, 땅 속에 묻힌 꽃이었으며,
또 때로는 떠돌이 별처럼,
꽃잎을 밝게 비췄다.

사람들은 가지에서
단단해진 꽃부리를 따모아,
목련이나 석류처럼
손에서 손으로 건넸다.
그러자 갑자기 꽃부리는 대지를 열고,
별에 닿을 만큼 커졌다.

이것은 해방된 자들의 나무
대지의 나무, 구름의 나무,
빵의 나무, 불꽃의 나무,
암울한 우리 시대의
격랑이 집어삼키려 날뛰지만,
그 둘은 꿈쩍않고
힘의 균형을 잡는다.

때로는 가지들이 분노를 꺾여 다시 떨어지고
불길한 재가
고래의 위엄을 뒤덮는다.
이렇게 모진 세월을 넘고,
이렇게 고통에서 벗어났으며
마침내 은일한 손이,
무수한 딸들이,
민중이, 부서진 파편들을 지켜냈고,
변치 않는 나무동체를 숨겼다.
민중의 입술은 뿌리와
한길을 가며 사방으로
뻗치고, 갈려나간 거대한
나무의 잎이었다.
이것은 나무, 민중의
나무, 해방된 모든 민중의 나무, 투쟁의 나무

그 머리칼을 들여다 보라.
새롭게 태어난 그 빛을 만져보라.
고동치는 그 열매가
매일매일 빛을 퍼뜨리는
공장에 손을 깊숙이 넣어 보라,
그대의 손으로 이 대지를 높이 세워 보라.
이 찬란함에 동참하라,
그대의 빵과 그대의 사과를,
그대의 가슴과 그대의 말을 움켜 잡아라.
경계에서 보초 서라.

그 꽃부리의 끝을 지켜라,
적의를 품은 밤을 함께 지새워라.
신 새벽의 순환을 지켜라.
별이 쏟아지는 산정을 호흡하라.
나무를, 대지 한복판에서 자라는
나무를 떠받쳐라.

 

 

 

시(詩)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날 찾아왔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이었는지

언제 어떻게 인지

난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에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예를 들면, "밤은 별이 많다. 별들은 파랗게

떨고 있다, 멀리서, 파랗게."라고 쓸까?


밤하늘은 하늘에서 돌며 노래하는데,

나는 이 밤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난 그녀를 사랑했었지. 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었어.


오늘 같은 밤이면 그녀는 내 품에 있었지.

끝없는 하늘 아래서 난 몇 번이고 그녀에게 입 맞추었지.


그녀는 나를 사랑했었지. 때로 나도 그녀를 사랑했었어.

그녀의 그 커다랗게 응시하는 눈망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문득 그녀가 없다는 생각. 문득 그녀를 잃었다는 느낌.


황량한 밤을 들으며, 그녀 없이 더욱 황량한 밤.

풀잎에 이슬이 지듯 시구 하나 영혼에 떨어진다.


무슨 상관이랴. 내 사랑이 그녀를 붙잡아 두지 못한 걸!

밤은 별이 많고 그리고 그녀는 내 곁에 없다.


그게 전부다. 멀리서 누군가 노래한다. 멀리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어버린 것만으로 가만있지 못하는가.


그녀를 더위잡으려는 듯이 내 눈길이 그녀를 찾는다.

내 마음이 그녀를 찾는다. 그러나 그녀는 내 곁에 없다.


이 많은 나무들을 하얗게 깨어나게 하던 그 밤, 그 똑같은 밤.

우리는, 그 때의 우리는 이제 똑같은 우리가 아니다.


이제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사실이지. 하지만, 참 사랑했었지.

내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이를 바람을 찾곤 했었지.


남의 사람이 되었겠지. 남의 여자, 내 입맞춤의 이전처럼.

그 목소리. 그 맑은 몸매. 그 끝없는 눈길.


이제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사실이야. 하지만, 참 사랑했었지.

사랑은 그토록 짧은데 망각은 이토록 길담…….


오늘 같은 밤에는 그녀가 내 품에 있기 때문이야.

내 마음이 그녀를 잃어버린 것만으로 가만있지 않기 때문이야.


비록 이것이 그녀가 주는 마지막 고통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그녀에게 바치는 마지막 시라고 할지라도.


 


시인 


옛날에 나는 비극적인 사랑에 붙잡혀

인생을 살았고, 어린 잎 모양의 석영(石英)조각을

소중히 보살폈으며

눈으로 삶을 고정시켰다.

너그러움을 사러 나갔고, 탐욕의 시장을

걸어다녔다. 아주 은밀한 시샘의 냄새를

맡으며, 가면들과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적대감을 들이마시며,

나는 저습지들의 세계를 살았다.

그 돌연한 꽃, 흰 나라가

그 떨리는 거품 속에 나를 삼키고

발을 옮길 때마다 내 영혼이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빠져드는 곳,

내 시는 이렇게 태어났다 - 어려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형벌처럼

고독에서 벗어나면서,

또는 놋쇠빛 정원에서 그건 어떻게

그 참으로 신비한 꽃을 흩었던가, 마치 그걸 묻듯이,

이렇게 깊은 수로에서 사는

검은 물처럼 갇혀서

나는 뛰었다. 모든 존재의 고독을,

나날의 증오를 탐색하며,

나는 그들의 반인간(半人間)의 삶을 물고기처럼

나주 낯선 바다에 잠금으로써

변성했음을 안다. 그리고 광대한 바다의

거대함 속에서 나는 죽음을 만났다.

문들과 길들을 여는 죽음.

벽 위로 미끄러지는 죽음.

 

 

 

가을의 유서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 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눈꺼풀 위에
혼이 빠져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루 밤새 하얗게 들어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은 바닷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 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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