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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방문 사절"이라는 안내문을 대문에 써 붙이고 알프스의 산간마을 몬타뇰라(Montagnola)에 칩거했던 헤세, 그러나 때론 색소폰과 재즈와 춤이 부르는 도시 한가운데의 현대인의 고독과 절망을 누구보다도 깊이 체험했던 헤세. 영원한 은둔주의자와 방랑자로 살았지만 또 "아시아적 수동성의 신봉자"로 불리며 히틀러의 독재 치하에서도 목쉰 소리로 시대의 따거운 눈총을 거스르며 진실과 정의를 외쳐대었던 헤세.
헤세는 세계의 어느 작가보다도 우리에게 친숙하고 잘 알려진 작가다. 그의 작품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바이블과 같이 많이 읽혔고 그 영향력은 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못지 않게 그의<데미안>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고 히피들은 그를 "성자 헤세"라고 불렀다. 누구보다도 양면적 고뇌 속에서 조화와 이상을 추구했던 작가, 동양과 서양, 현실과 이상, 신과 자연과 인간을 깊은 통찰력으로 꾀뚫은 심오한 그의 문학세계 - 쉬운 줄거리와 언어 속에 숨겨진 그의 문학은 늘 우리 곁에 머물러 있어 우리에게 위안과 잔잔한 기쁨을 준다.

<출처: 목원대학교도서관>
헤르만 헤세의 삶과 작품세계
이영임(연세대)
"운명과 심성은 이름이 다를 뿐이지 같은 개념이다." 헤세가 즐겨 인용했던 시인 노발리스의 말이다. 그럴 기회가 드물긴 하지만 어쩌다 주위 가까운 이들의 삶을 전체로 조망해 보면 이 말에 들어 있는 필연성에 깜짝 놀라게 된다. 삶이란 외적으로 주어진 조건에 어떤 식으로든 개인의 심성이나 기질이 반응함으로써 이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외적인 조건이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같거나 비슷한 조건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며 나름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그 심성이나 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니, 운명과 심성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노발리스가 이야기하는 이 운명과 심성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우리는 헤세의 삶과 작품 속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헤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동시에 조망하게 되면 기질 면에서 그의 삶을 굵은 선으로 관통하고 있는 몇 가지 요소를 집어낼 수 있고, 이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외부 조건들에 반응하며 나무의 나이테가 차오르듯 그의 삶과 작품 속에서 성숙해 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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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가 지닌 심성의 특징으로는 무엇보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고집과 선교사 집안의 혈통으로 전해 내려온 천성의 경건함과 그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상상력 풍부한 지적 자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그의 삶에서 일찌감치 어린 시절부터 그 윤곽을 드러낸다. 일찍이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했던 부모의 뜻에 따라 훗날 신학자나 목사가 되기 위해 어렵기로 소문난 뷔르템베르크 주의 장학생 선발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해 마울브론 수도원의 신학생이 되지만, 개성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틀에 박힌 신학교 생활을 못견뎌 거기서 도망쳐버린다. 얼른 보기에 그저 학교에서 도망친 것에 불과한 열네 살짜리 소년의 이 행동은 그러나 그의 그 후의 삶의 여정 내지 작품세계와 연계지어 살펴보게 되면, 이미 징조가 뚜렷한 하나의 싹을 내보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어린 영혼이라 해도 내심으로부터 충분히 수긍하고 동의할 수 없는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는 그것이 다수를 상대로 한 것이든, 전통을 상대로 한 것이든, 후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분연히 들고일어서는 대단한 고집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 비슷한 고집을 우리는 독일이 전쟁의 흥분과 도취로 빠져들었던 두 번의 세계대전 기간에 헤세가 취했던 단호한 태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인도주의와 평화를 주장하던 헤세는 주위의 분위기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일들을 혼자서 해나간다. 무력으로 세계 최강국이 되겠다는 욕망에 도취된 동포를 상대로 국내외의 신문, 잡지에 그래서는 안된다는 글들을 발표하고 평화를 외치다가 민족의 배반자로 낙인 찍히고, 이 일은 첫 번째 부인의 우울증으로 인한 입원과 가족의 해체 등 다른 요인들과 겹쳐 스스로 정신분석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깊은 심적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군대에서 심한 근시 때문에 후방에 배속되자 <독일포로 후생사업소>에 근무하며 외국에 잡혀 있는 독일군 포로들에게 읽을 책들을 마련해 보내주고, 그들을 위한 신문을 만들어 부치며, 독일 전쟁포로들을 위한 출판사를 설립해 1918-1919년 사이 22권의 책을 출판해 내는 것이다. 또 1930년대 초반부터는 히틀러의 집권과 나치세력의 확장, 그 전횡을 지켜보면서 20세기 문화와 정신현상 전체를 문제삼고 그 극복의 방안을 모색하는 긴 작업에 착수한다. 1차 대전 때의 아픈 체험을 거울로 삼아 투쟁의 방법을 달리한 것이다. 1932년에 시작해 10년 걸려 1942년에 탈고한, 그의 작가로서의 생을 총결산하는 작품 "유리알 유희"는 이렇게 씌어진 것이며, 그 사이 1939년부터 제 2차대전이 끝나기까지 헤세의 작품들은 독일에서 출판금지가 된다. 밖으로 드러난 이러한 행동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선교사 집안에서 자라나 그 부모가 신학자나 목사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아들이 "데미안Demian"에서 2천년 전통의 기독교 가치관을 정면으로 문제 삼고 나오는 것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쯤에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이 시인의 세 가지 두드러진 기질, 즉 그의 고집과 경건함, 매인 곳 없는 지적 자질이 어떻게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그의 인성과 작가로서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그의 기질의 세 가지 특성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한 까닭은 우선 그의 굽히지 않는 고집이 바로 그의 타고난 경건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다만 헤세의 경우 그 경건함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외부의 가치기준이나 규범에 맞추어져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로, 가장 깊은 마음의 근원으로 향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나 이데올로기에는(정치, 사회, 문화, 종교, 그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구속과 경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자연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에는 그런 제한이 있을리 없으니, 그 마음에 가장 충실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그의 지적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모든 분야가 열려 있음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렇게 볼 때, 외할아버지인 언어학자 헤르만 군데르트를 비롯해 부모가 모두 인도에서 선교생활을 한 배경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헤세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동서양의 그 막대한 정신 유산들을 섭렵하며 자신을 비롯해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헤세는 서양의 고전들은 물론이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찍부터 고대 인도와 중국의 고전들을 접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적은 글들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는 인도의 영웅서사시 "길가메쉬", Leopold Schr der가 해설한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글, Helmut v. Glasenapp이 쓴 "힌두교"라는 책에 대한 서평, 베단타 철학 "우파니샤드"와 Karl Eugen Neumann이 번역한 "부처의 말씀", Hermann Oldenberg의 불경번역 "미래의 종교"에 대한 서평 등이 1970년 Suhrkamp 출판사에서 나온 12권으로 된 전집 중 제 12권에 실려 있다. 같은 책에 고대 중국의 고전을 소개하는 글들로 1909년 공자의 "논어"를 소개하는 글을 비롯해 노자의 "도덕경", "장자의 말씀과 비유", "여불위의 춘추", "역경", 중국 禪불교의 고전인 "벽암록"과 중국의 민간 동화와 설화 등을 소개하는 글이 실려 있고, 그 외에도 헤세의 다른 글들에는 그가 "맹자"와 "시경", 이태백과 두보의 시들과 전기, 동양문화권의 다양한 서적들을 읽었고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심성과 기질로 인해 그의 생은 이미 마울브론 신학교에서 도망쳤을 때부터 다수에 묻혀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 사회의 제도권으로부터는 일찌감치 빠져 나왔던 것이고, 자신의 힘으로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 가도록 정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헤세는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탑시계 공장의 견습공, 서점의 조수, 점원 등 엘리트 코스에 들어서 본 일이 있는 수재에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었을 과정을 겪으면서도 그는 제도권 안의 정규교육을 거친 어느 누구도 필적할 수 없으리만큼 독학으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쌓아올렸고, 치열하고 가차없는 자기 탐구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그 어느 성직자 못지않게 전세계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전통의 가치 기반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위안이자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또 그를 조국의 배반자로 몰았던 독일에게는 현대를 대표하는 세계적 지성의 한 사람으로서 그 민족의 자랑스러운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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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심성과 기질은 헤세 작품의 주인공들에게서도 그 양상이 다르지 않다. 라우셔, 카멘친트, 싱클레어, 싯다르타, 클링조어, 하리 할러, 골트문트, H. H., 크네히트, 이들은 모두 조금씩 다른 듯하면서도 한 겹 너머 그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되면 헤세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그 근저에 "놀랄만한 일관성"이 흐르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가기 다른 상황과 문제들에 처해 있다곤 해도 그들은 모두 심성이 진실하고 경건하며 무엇엔가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인물들이지만, 문제는 그들의 경건함이 그들을 어디로, 무엇에 자신을 바치도록 이끌어 갔는가 하는 점이다. 외부 세계의 요구와 내면의 부름 사이에 섰을 때 서슴없이 택하는 쪽은 언제나 내면의 목소리고, 또 그들이 하나같이 제도권 안의 인물이 아니라, 기존 가치규범의 체제 밖으로 튕겨져 나와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감으로써 궁극에는 그 기존의 체제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 그 완성을 향해 일조를 하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공통점에는 헤세가 그의 삶과 작품을 통해 평생을 두고 믿고 주장해 온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신조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현실이 완벽했던 적은 한 번도 없고, 불완전한 현실은 이상을 향해 끝없이 개선되고 개혁이 되어야 하지만, 개인이든 사회든 진정한 개혁이란 외부로부터 요구되고 주어지는 어떤 것에 맹목적으로 따라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원하는 주체의 내부로부터 절실한 것으로서 자라나왔을 때 가능한 것이니, 행동 이전에 누구든 무엇이 왜 중요한지를 먼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그러므로 우선 철저히 자기 자신을 알고, 주체적으로 그 자신이 되어야 하며, 이러한"자기 인식Selbsterkenntnis"과 "개성화 과정Individuationsproze "을 끝까지 거친 다음에라야 비로소 그가 속한 사회에도, 그 사회의 변혁에도 제대로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자가 결코 남을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무엇이 왜 중요한가를 짐작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중심도 없이 모여본들 그 집단은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무리에 불과할 뿐 참다운 일은 이루어 낼 수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데 여기서 한 가지 헤세가 지닌 경건함의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아주 일찍부터 생에는 항상 모든 대립을 넘어선 어떤 궁극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그 궁극적인 것의 무한한 조화에 대한 강한 예감을 평생토록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년에 쓴 후기 산문들 중의 하나인 '두 개의 동화가 있는 성탄 전야'에서 그는 이 예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초와 꿀향기 가득하던, 아직 행복하고 파괴로부터 안전해 보이며, 파괴의 가능성조차 믿지 않았던 그 어린 시절의 성탄 축제로부터 시대와 더불어 개인의 삶에도 덮쳐 오는 그 모든 변화와 위기, 격앙, 회고로 점철된 인생의 장을 거치는 가운데서도 우리에겐 하나의 핵심, 의미, 은총이 남아 있으니 그것은 어느 교회나 학문의 도그마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중심이다. 그것을 중심으로 위기를 맞고 어지럽혀진 삶은 언제나 새로이 정돈될 수 있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이 내면의 핵심으로부터 신에게 이를 수 있다는 믿음, 이 중심이 신의 현존과 일치한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신이 있는 곳에서는 추하고 일견 의미없어 보이는 것도 견딜 수가 있으니, 신에게는 그 어디에서도 현상과 의미가 분리되지 않고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헤세와 그의 주인공들이 현실과 작품 속에서 찾아 헤매었던 것이 결국 이 자아와 신이 만나는 자리, 모든 인간의 내부에 있다고 믿는 그 완벽한 조화의 "핵심Kern"이었고, 그러다보니 그들이 걷는 길은 항상 구도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런 자각에서 무리없이 설명이 된다. 또한 이 마음의 중심은 헤세의 경우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 체험하고 습득하는 모든 것을 한 곳으로 수렴시키고 있으니, 이 "핵심"이 확인되는 자리에서 우리는 거듭 저 서구 기독교문화의 "경건주의적 신비주의pietistische Mystizismus"와 동양의 불교적, 도교적, 유교적 색채가 한데 어우러진 헤세의 "양극적 단일사상Gedanke der polaren Einheit"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삶과 사물에 내재하는 이치를 깨닫고 각성하는 저 "마술적 체험das magische Erlebnis"의 순간, 그의 주인공들은 이제까지 그들을 괴롭혀 온 생의 모든 대립이 화해불능의 적대적인 것으로 보이긴 해도 그것들이 어쩔 수 없이 하나의 본질에 속한 불가분의 상대적 양면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헤세 자신은 그 스스로 믿고 체험한 이 내면의 "핵심"에서 저 마이스터 엑크하르트Meister Eckhart나 야콥 뵈메Jakob B hme의 신비주의적 언급들, 佛家에서 말하는 不二의 깨달음, 유가에서 가르치는 중용의 덕, 도가에서 말하는 도 등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하나의 중심을 돌고 있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핵심"을 향해 내면으로의 순례에 들어선 주인공이 일단 일반의 획일화된 상식으로부터 벗어나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저 "개성화 과정"의 끝에 이르러 신성한 중심에 닿게 되면, 그 다음에는 더 이상 이기적인 자기 보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화된 자신을 의미있게 실현시키기 위한 "헌신Selbstaufopferung"과 "탈개인화Entpers nlichung"로 방향을 바꾸고 자연스레 그가 이탈해 나온 사회로 복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돌아온 개인은 자신과 타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그 사회의 중심에 서게 된다. "개성화"해보지 않은 인간은 그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자아의 굴레를 벗어날 수도, 그 자아를 포기할 수도 없어 한정된 좁은 세계에 갇히게 되지만,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그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이를 통해 자신을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자아라고도 할 수 있을 타인을 통찰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헤세적 경건함의 비밀, 그 경건함이 고집스럽게 찾아내려간 "핵심"의 역설적 조화가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대립에 숨겨진 마지막 의미는 대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립된 요소들의 흐트릴 수 없는 균형과 조화에 있다는 것, 알 수 없는 우리 내부의 신적인 요소는 한쪽으로 치달아 간 꼭 그만큼의 반대급부를 요구하고 채우려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개인과 사회라는 대립의 견지에서 볼 때 한 인간의 "개성화"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며 다만 더불어 사는 삶에서의 "자기 실현Selbstverwirklichung"을 위해선 빼놓을 수 없는 전제조건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추구해야 할 개인의 목적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보존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의미있게 사용하느냐 하는 일이지만, 그 "자기 실현"이야말로 진정으로 주체화된 "개성Pers nlichkeit"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그 절정을 이루며 표현되고 있는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경우를 두고 작가는 익명의 연대기 작가인 소설의 화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인공으로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란 개인의 향기와 가치를 만들어 내는 강하고도 신선하며 놀랄 만한 충동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질과 교육에 의해 자신의 개성을 종단 계급사회에서의 그의 기능에 거의 완벽하게 동화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 뿐이다. 그리고 개인과 종단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게 되면, 우리는 이 충돌이야말로 한 인격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의 개성이 그 본질상 통일을 요구하는 집단의 획일성에 의해 말살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그 집단에 속해 필요불가결의 일원으로 완벽하게 기능해야 하며, 그 개인의 개성과 집단의 의지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는 그 갈등을 풀어내는 역량을 보고 인격의 크기를 잰다? 어려운 요구이고 주문이지만 이는 또한 우리들 모두에게 주어진 생의 과제가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삶의 그 수많은 대립되는 가치와 요구들 사이에서 그 어느 쪽도 기울지 않게, 양쪽 모두를 위해서 최선의 조화로운 결과를 유도해내느냐 하는 처세의 방정식이요 지혜로운 삶의 연주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까지의 헤세 작품들이 앞에서 말한 내면의 "핵심"을 확인하고 그 진정한 모습을 그려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후기로 갈수록 시인의 마음을 끄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 "핵심"에 지속적인 접속을 유지하며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며 그 완벽하게 균형잡힌 중심의 조화를 현실 속에 실현해내는가 하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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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현실을 벗어나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고 "아침"을 향해, "빛의 고향"으로 떠나는 "동방순례Pilgerfahrt nach dem Morgenlande"나 "초시간적인 가치와 형식들에의 빠른 회상, 정신의 여러 영역들을 꿰뚫어 나는 노련한 짧은 비행"이라고 묘사되고 있는 "유리알 유희"는 사실 작가의 온갖 상상력과 비유를 동원한 문학적 형상화의 작업을 생략하고 엄밀히 그 실체만을 보자면, 헤세 스스로가 그의 일상의 삶 속에서 행하던 사색과 성찰의 성격을 띤 "사유의 유희Gedankenspiel"였다는 것이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스위스 테씬의 산간 마을 몬타뇰라의 정원에서 낙엽을 태우고 화단에 쓸 재섞인 거름흙을 만들고 하는 시간들이 노시인에게는 자연을 접한 상태에서의 명상과 사색의 시간들이었고, 흙을 만지는 그 소박한 작업이 행해지는 동안 그의 머리 속에선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개인적, 시대적 문제들과 함께 인류 문화가 일구어 놓은 정신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추상의 유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1935년 7월에 쓴 헤세의 시 '정원에서의 시간들Stunden im Garten'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쉬면서, 그러나 전혀 무료하지 않게 땅바닥에 무릎을 고이고 앉아 두 손으로 살며시 둥글림이 아름다운 체를 먼젓번 낙엽불들에서 나온 재로 채우고 거기에 흙더미 밑에서 끌어낸 오래되고 온기있게 촉촉한, 발효하고 썩어 무르게 된 흙을 섞어 그 성긴 혼합물을 체반 밑에 아주 고운 재 같은 흙의 작은 원추가 생겨나도록 천천히 흔든다. 그리곤 뜻하지 않게 그렇게 흔드는 가운데 확실하고 고른 박자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 박자 속에서 되살아 나오는 지치지 않는 기억 하나의 음악, 나는 그것을 함께 흥얼거린다. 그 곡과 작곡자의 이름을 아직 모르는 채, 그리고 갑자기 알게 된다. 모차르트의 곡임을 오보에가 있는 사중주인가... 그리고 이제 심정 속에선 벌써 몇 년째 마음을 기울여 온 사유의 유희가 시작된다. 유리알 유희라고 불리는, 구조는 음악이고 근본은 명상인 훌륭한 착안이. 요제프 크네히트는 내가 이 멋진 상상으로 인해 덕을 입고 있는 명인. 즐거운 세월에 그것은 내게 유희이고 행복이며, 고난과 혼란의 시기에 그것은 내게 위안이고 사색이니, 여기 불가에서 체를 치며 나는 자주 연주한다 유리알 유희를, 비록 이제까지는 크네히트처럼은 아니었지만. [...]
유리알 유희의 정체가 이렇게 명상을 곁들인 사색과 성찰이라는 것이 드러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은 그럼 이 시인이 세계사 전체를 통해 가장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일들이 그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안 10년간이나 노년의 모든 힘을 쏟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추상적 "사유의 유희"를 실재하는 어떤 것인 양 그려냈던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헤세가 그의 소설에서 한마디로 "잡문시대das feuilletonistische Zeitalter"라고 부르고 있는 20세기의 퇴락한 정신문화 속에서 그 방향을 건강한 쪽으로 돌려놓게 위해서는 어떻게든 개개인의 삶 속에 불러일어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저 "영혼의 훈련eine seelische Zucht"내지 "정신수양의 집중된 자신감konzentriertes Selbstgef hl einer Geisteszucht"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가 평생을 믿어왔듯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거대한 개혁도 우선은 개인의 영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했으므로. 물론 이 "영혼의 훈련" 내지 "정신수양"은 저 내면의 "핵심"에, 그 완벽한 조화와 균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어느 경우든 제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그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으면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는 법이고, 목표가 분명하면 그 다음에는 인내심과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니, 유리알 유희의 정신이란 바꾸어 말하자면 그 "핵심"을 찾아가는 길, 즉 근원적인 것을 향한 삶의 자세나 마음 가누는 법을 정립하려는 것이라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 평생을 쌓아온 헤세의 노년의 지혜 그 자체이자 유리알 유희의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비로운 인물 "음악의 노대가der Altmusikmeister"는 소설 속에서 그의 제자이자 그 삶 자체가 한 편의 완벽하게 연주된 유리알 유희라고도 할 수 있는 크네히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희에 위험이 따른다는 것은 분명하지.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유희를 사랑하는 것이다. 위험이 없는 길로는 약한 자나 내보내는 법이니까. 그러나 내가 그토록 여러 번 말한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네. 우리의 운명은 대립을 옳게 인식하는 일이야. 우선은 대립으로서, 그러나 그 다음에는 단일의 양극으로서 말이지. 이 점은 유리알 유희에서도 마찬가지라네. 예술가 기질을 가진 사람은 유리알 유희를 좋아하지. 그 안에서 공상을 할 수 있으니까. 엄격한 학자들은 이 유희를 경멸하네, --음악가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은데--거기엔 개개의 학문이 도달할 수 있는 저 엄격한 규율이 빠져있기 때문이지. 자네도 이 대립을 알게 될 테고, 시간이 가면 그것이 객관적인 대립이 아니라 주관적인 대립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야. 예를 들어 공상을 즐기는 예술가가 순수 수학이나 논리학을 기피하는 것은 그가 그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말할 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다른 데로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지. 자네도 그렇게 본능적으로 격렬하게 좋고 싫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하찮은 영혼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네. 사실, 위대한 영혼이나 탁월한 정신들에는 이런한 격정이 없지. 우리는 모두 그저 인간일 뿐이고, 각자가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네. 그렇지만 그 인간은 완성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어야 해. 중심을 향해 노력해 가야지 가장자리로 빠져 나가려 해서는 안되네. 알아두게. 엄격한 논리학자나 문법학자이면서도 동시에 공상이나 음악으로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을. 음악가나 유리알 유희의 연주자이면서도 온전히 법칙과 질서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그렇게 되려 하는 인간이란 언제라도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고, 유리알 유희 속에 가장 명쾌한 논리를, 문법 속에 가장 창조적인 환상을 빛나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지.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자리에 놓이더라도 그에 저항하거나 당황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네. [...] 무엇에든 유능하고 모든 것에 공정하게 되려면 분명 정신력이나 활기, 열정에 있어서도 마이너스 아닌 플러스가 요구되지. 자네가 정열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력이 아니라 영혼과 외부세계 사이의 마찰일 뿐이야. 격정이 우세하게 되면 욕구하고 추구하는 힘에 플러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뿔뿔이 흩어진 잘못된 목표를 향해 있기 때문에 긴장과 숨막히는 분위기가 형성될 뿐이지. 욕망의 추진력을 극도로 집중시켜 중심으로, 참된 존재로, 완전으로 향하도록 해놓은 사람은 격정적인 사람보다 평온해 보이게 마련이니, 그에게선 좀처럼 열정의 불꽃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네. 예를 들어 그런 사람은 논쟁을 하더라도 소리를 지르거나 팔을 휘두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의 내면은 뜨겁게 타고 있지! [...] 진리는 분명 있지. 그러나 자네가 바라는 '가르침',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오로지 그것만으로 현명하게 되는 그런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네.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만 하네. 신성(神性)은 개념과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속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네. 싸울 각오를 하게나, 요제프 크네히트, 보아하니 투쟁은 벌써 시작되었네.
이러한 개념들이 딱딱한 설명을 넘어서서아름답고 완벽하게 연주된 한 편의 푸가 형식으로 그려진 것이 바로 요제프 크네히트의 일생이다. 그의 삶이 각 단계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생의 대립되는 요소들인 정신과 자연, 개인과 사회, 규칙과 자유, 스승과 제자, 늙음과 젊음, 봉사와 지배, 삶과 죽음 등이 서로 대비되고 어울리며 흐트러짐 없이 균형을 잡고 궁극의 조화를 향해 고른 박자로 진행되어가는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대립쌍들의 어느 것 하나도 한쪽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립되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한 쪽이 사라지면 다른 한 쪽은 자동적으로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헤세의 생애와 작품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모두 이 한 가지 주제를 끊임없이 변주하며 발전시켜 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모든 주인공들이 그렇듯, 작가 또한 평생동안 스스로를 아낌없이 바쳐 봉사하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문제는 그가 주위에 온갖 충돌과 갈등을 감수하며 그리도 고집스러운 경건함을 가지고 몰두해 갔던 대상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고, 그를 이끌고 지배한 최고의 주인은 결국 그가 모든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저 신적인 "핵심"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일생을 바쳐 그 "핵심"을 찾아 구도의 길을 갔던 노시인이 인류에게 들려 주는 마지막 지혜는 그가 "고전음악의 자세"라고 불렀던 다음과 같은 "삶의 태도" 속에 드러난다.
인간 존재의 비극을 아는 것, 인간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 용감함, 청랑함! 그것이 헨델이나 쿠페렝의 미뉴에트에 드러나는 우아함이든, 많은 이탈리아 작곡가나모차르트에게서 볼 수 있는 승화된 감각성의 사랑어린 자태이든, 또는 바하에게서 나타나는 조용하고 침착한 죽음에의 각오이든 상관없이, 거기엔 언제나 불굴의 의지, 죽음을 무릅쓴 용기, 기사도 정신, 초인적인 웃음소리와 불멸의 청랑함이 울리고 있다. 우리의 유리알 유희에도, 우리의 삶과 행위와 고뇌에도 그런 울림이 깃들어야 한다.
1945년에 쓴 '즐겨 읽는 책들'이라는 글에서 헤세는 그가 동양의 위대한 스승 공자에게서 이 같은, 세속의 자로 잴 수 없는 정신의 위대함을 읽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노자의 위대한 상대역, 체계를 세우는 사람, 도덕가, 입법가, 관습의 수호자, 고대 현자들 중 유일하게 장중한 구석이 있는 인물 공자는 이따금 이렇게 특징지어지곤 한다. "이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데도 실행에 옮기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라고. 내가 그 어느 문헌에서도 비슷한 예를 보지 못한 그 초연함과 유머, 소박함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끔 나는 이 말과 다른 구절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거나, 요 몇 년 혹은 몇 십 년 안에 세상을 바로 잡거나 완전하게 만들겠다는 말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저 위인(偉人) 공자와 마찬가지로 행동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행동 뒤에는 공자가 알고 있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가 빠져 있는 것이다.
<목원대학교도서관>

<노년의 헤세> <양친과 함께> <첫번째 부인과 큰 자녀>
헤르만 헤세 작품
무상
/ 헤르만 헤세
생명의 나무에서 나뭇잎이 한잎 한잎 떨어집니다. 오! 화려하고 눈부신 세상이여 너는 얼마나 기쁘게 하고 있는가! 얼마나 기쁘고 한편으로 지치게 하는가! 얼마나 황홀하게 하는가! 오늘 뜨겁게 불타던 것이 곧 사라지고 맙니다. 풀잎이 시들어진 내 무덤 위에도 멀지 않아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어머니는 허리를 굽혀 어린 아이를 내려다봅니다. 그 어머니의 눈을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눈은 나의 별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지나가고 사라져도 좋습니다. 모든 것은 죽어가고, 죽기를 원합니다. 오로지 우리들이 태어난 영원한 어머니만 남아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허무한 하늘에 우리의 이름을 씁니다.
기도
하나님이시여 저를 절망케 하소서! 당신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나로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지나가게 하소서! 온갖 모욕을 격도록 해 주옵시고 내 스스로 지탱하는 것을 도와 주지 마옵시고 내가 발전하는 것도 돕지 마옵소서! 그러나 나의 모든 자신이 허물어 진 뒤에 그때 나에게 가르쳐 주옵소서! 하나님이신 당신이 허물어뜨리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아 주셨음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겠사오나 오직 당신의 품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이로소이다.
노을속의 백장미
/ 헤르만 헤세
슬픈 듯 너는 얼굴을 잎새에 묻는다. 때로는 죽음에 몸을 맡기고 유령과 같은 빛을 숨쉬며 창백한 꿈을 꽃피운다.
그러나 너의 맑은 향기는 아직도 밤이 지나도록 방에서 최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한 가닥 은은한 선율처럼 마음을 적신다.
너의 어린 영혼은 불안하게 이름 없는 것에 손을 편다. 그리고 내 누이인 장미여, 너의 영혼은 미소를 머금고 내 가슴에 안겨 임종의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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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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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Glu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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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행복을 추구하는 한, 그대는 행복할 만큼 아직 성숙하지 않으리. 뭇 사랑스러운 것이 그대 것일지라도.
그대가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며, 목표를 갖고 초조해 하는 한,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리.
모든 소원을 버리고 목표도 욕망도 알지 못하고, 어느 것이 행복이라고 이름붙여 부르지 않을 때,
홍수 같은 세상사가 그대 마음에서 자유로워, 그대의 영혼은 편히 쉬게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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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ng du nach dem Gluecke jagst, Bist du nicht reif zum Gluecklichsein. Und waere alles Liebste dein.
Solang du um Verlorenes klagst, Und Ziele hast und rastlos bist, Weisst du noch nicht, was Friede ist.
Erst wenn du jedem Wunsch entsagst, Nicht Ziel mehr noch Begehren kennst, Das Glueck nicht mehr mit Namen nennst.
Dann reicht dir des Geschehens Flut Nicht mehr ans Herz, und deine Seele ru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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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
Weil ich dich lie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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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이 밤 미친듯 속삭이듯 그대에게 왔노라.
그대 결코 나를 잊지 못하도록, 나 그대의 영혼을 가지고 가노라.
이제 그대 내 곁에 있고 모든 선과 악 속에서도 나의 것이니, 격렬하고 타는 듯한 나의 사랑으로부터 어떤 천사도 그대를 빼앗아 갈 수 없으리. |
Weil ich dich liebe,
bin ich des Nachts so wild und fluesternd zu dir gekommen. Und dass du mich nimmer vergessen kannst, Hab' ich deine Seele mit mir genommen.
Sie ist nun bei mir
und gehoert mir ganz im Guten und auch im Boesen,
Von meiner wilden, brennenden Liebe kann dich kein Engel erloe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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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 |
Die Schö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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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을 선물받고, 그것을 쳐다보고 안아보다 망가뜨리곤 아침이 되면 준 사람도 생각안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대는 그대에게 준 나의 마음을 마치 귀여운 장난감처럼 작은 손으로 마음대로 가지고 놀지만 내 마음이 얼마나 경련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지를 알지 못하네. |
So wie ein Kind, dem man ein Spielzeug schenkt, Das Ding beschaut und herzt und dann zerbricht, Und morgen schon des Gebers nimmer denkt, So haeltst du spielend in der kleinen Hand Mein Herz, das ich dir gab, als huebschen Tand, Und wie es zuckt und leidet, siehst du nicht. |
안개 속에서
헤세 육성 듣기
야릇하구나, 안개 속을 거닐음은!
모든 숲과 돌은 외롭고,
나무도 서로를 몰라 보며
각자는 홀로 있네.
나의 밝은 어린 시절엔
세상은 친구로 가득했는데,
안개가 깔린 지금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누나.
모든 것으로부터
조용히 자신을 떼어 놓는
어둠을 모르는 자는
진실로 어느 누구도 현명치 않으리.
야릇하구나, 안개 속을 거닐음은!
인생은 고독한 것.
어느 누구도 서로를 알지 못하고
각자는 홀로 있네.
Im Nebel
Seltsam, im Nebel zu wandern!
Einsam ist jeder Busch und Stein,
Kein Baum sieh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Voll von Freunden war mir die Welt,
Als noch mein Leben licht war;
Nun, da der Nebel faellt,
Ist keiner mehr sichtbar.
Wahrlich, keiner ist weise,
Der nicht das Dunkel kennt,
Das unentrinnbar und leise
Von allem ihn trennt.
Seltsam, im Nebel zu wandern!
Leben ist Einsamsein.
Kein Mensch kenn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봄
갓 피어난 구름이 조용히 창공을 떠가며,
아이들은 노래하며 꽃은 풀 속에서 웃고있다.
피곤한 나의 눈은
책 속에서 읽은 것을 잊으려 한다.
내가 읽은 어려운 모든 것은 흩어져 버리고
한갖 겨울환상만 남아 있다.
나의 눈은 상쾌하고 원기회복되어서
새롭게 솟구치는 피조물을 바라본다.
그러나 모든 아름다움의 무상함이
내가슴에 새겨진 것은
매 봄마다 남아있어,
어떤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 버리지 않는다.
Fru"hling
Es fahren leise junge Wolken durchs Blaue,
Kinder singen und Blumen lachen im Gras;
Meine mu"den Augen, wohin ich schaue,
Wollen vergessen, was ich in Bu"chern las.
Wahrlich alles Schwere, das ich gelesen,
Sta"ubt hinweg und war nur ein Winterwahn,
Meine Augen schauen erfrischt und genesen
Eine neue, erquellende Scho"pfung an.
Aber was mir im eigenen herzen geschrieben
Von der Verga"nglichkeit aller Scho"ne steht,
Ist von Fru"hling zu Fru"hling stehen geblieben,
Wird von keinem Winde mehr weggeweht.
늦 가을의 산책
가을비가 회색 숲에 흩뿌리고,
아침바람에 골짜기는 추워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툭툭 떨어져
입을 벌리고 촉촉히 젖어 갈색을 띠고 웃는다.
내 인생에도 가을이 찾아와
바람은 찢어져 나간 나뭇잎을 딩굴게 하고
가지마다 흔들어댄다 - 열매는 어디에 있나?
나는 사랑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괴로움이었다.
나는 믿음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미움이었다.
바람은 나의 앙상한 가지를 쥐어 뜯는다.
나는 바람을 비웃고 폭풍우를 견디어 본다.
나에게 있어서 열매란 무엇인가? 목표란 무엇이란 말인가!
피어나려 했었고, 그것이 나의 목표다. 그런데 나는 시들어 가고,
시드는 것이 목표이며, 그 외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에 간직하는 목표는 순간적이 것이다.
신은 내 안에 살고, 내 안에서 죽고,
내 가슴 속에서 괴로워 한다. 이것이 내 목표로 충분하다.
제대로 가는 길이든 헤매는 길이든, 만발한 꽃이든 열매이든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이름에 불과하다.
아침바람에 골짜기가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져,
힘있고 환하게 웃는다. 나도 함께 웃는다.
Gang im Spa"therbst
Herbstregen hat im grauen Wald gewu"hlt,
Im Morgenwind aufschauert kalt das Tal,
Hart fallen Fru"chte vom Kastanienbaum
Und bersten auf und lachen feucht und braun.
In meinem Leben hat der Herbst gewu"hlt,
Zerfetzte Bla"tter zerrt der Wind davon
Und ru"ttelt Ast um Ast - wo ist die Frucht?
Ich blu"hte Liebe, und die Frucht war Leid.
Ich blu"hte Glaube, und die Frucht war Hass.
An meinen du"rren A"sten reisst der Wind,
Ich lache ihn aus, noch halt ich Stu"rmen stand.
Was ist mir Frucht? Was ist mir Ziel! - Ich blu"hte,
Und blu"hen war mein Ziel. Nun welk ich,
Und Welken ist mein Ziel, nichts andres,
Kurz sind die Ziele, die das Herz sich steckt.
Gott lebt in mir, Gott stirbt in mir, Gott leidet
In meiner Brust, das ist mir Ziel genug.
Weg oder Irrweg, Blu"ht oder Frucht,
Ist alles eins, sind alles Namen nur.
Im Morgenwind aufschauert kalt das Tal,
Hart fallen Fru"hte vom Kastanienbaum
Und lachen hart und hell. Ich lache mit.
생의 계단
만발한 꽃은 시들고
청춘은 늙음에 굴복하듯이
인생의 각 계단도 지혜도 덕도 모두
그 때마다 꽃이 필 뿐 영속은 허용되지 않는다.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용감하게 그러나 슬퍼하지 말고
새로운 단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만 한다.
무릇 생의 단계의 시초에는
우리를 지켜주고 살아가게하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이어지는 생의 공간을 명랑하게 지나가야 하나니
어느 곳에도 고향같이 집착해서는 안되며,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계단씩 높이고 넓히려 한다.
우리가 어떤 생활권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 편히 살게 되면 무기력해지기 쉽나니,
새로운 출발과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우리를 마비시키는 습관에서 벗어나리라.
아마 임종의 시간마져도
우리를 새 공간으로 젊게 보낼지 모르나니
우리를 부르는 삶의 소리는 멈춤이 없으리...
자, 마음이여 이별을 고하고 건강하거라.
Stufen
Wie jede Bluete welkt und jede Jugend
Dem Alter weicht,blueht jede Lebensstufe,
Blueht jede Weisheit auch und jede Tugend
Zu ihrer Zeit und darf nicht ewig dauern.
Es muss das Herz bei jedem Lebensrufe
Bereit zum Abschied sein und Neubeginne,
Um sich in Tapferkeit und ohne Trauern
In andre, neue Bindungen zu geben.
Und jedem Anfang wohnt ein Zauber inne,
Der uns beschuetzt und der uns hilft,zu leben.
Wir sollen heiter Raum um Raum durchschreiten.
An keinem wie an einer Heimat haengen,
Der Weltgeist will nicht fesseln uns und engen,
Er will uns Stuf' um Stufe heben, weiten.
Kaum sind wir heimisch einem Lebenskreise
Und traulich eingewohnt, so droht Erschlaffen,
Nur wer bereit zu Aufbruch ist und Reise,
Mag laehmender Gewoehnung sich entfernen.
Es wird vielleicht auch noch die Todesstunde
Uns neuen Raeumen jung entgegensenden,
Des Lebens Ruf an uns wird niemals enden...
Wohlan denn, Herz, nimm Abschied und gesunde!
흰 구름
오, 보아라,
잊혀진 아름다운 노래의
조용한 멜로디처럼
푸른 하늘 가를 계속 떠도는 흰 구름을.
긴 여행 속에
방랑의 슬픔과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흰 구름을 이해할 수 없으리.
나는 태양이나 바다나 바람을 사랑하듯,
정처 없이 떠도는 흰 구름을 사랑한다.
고향이 없는 자에게 그 것은
누이이며 천사이기에.
Weisse Wolken
O schau, sie schweben wieder
Wie leise Melodien
Vergessener scho"ner Lieder
Am blauen Himmel hin!
Kein Herz kann sie verstehen,
Dem nicht auf langer Fahrt
Ein Wissen von allen Wehen
Und Freuden des Wanderns ward.
Ich liebe die Weissen, Losen
Wie Sonne, Meer und Wind,
Weil sie der Heimatlosen
Schwestern und Engel sind.
『데미안』 - 에밀 싱클레어의 소년 시대 이야기
1. 줄거리
(1) 작품 전체의 구성과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① 프롤로그 ② 제1장 두 세계 ③ 제2장 카인 ④ 제3장 고독 ⑤ 제4장 베아트리체 ⑥ 제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⑦ 제6장 야곱의 싸움 ⑧ 제7장 에바 부인 ⑨ 제8장 종말의 시작
(2) 고향에서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10살 때로부터 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때 나의 생활 속에는 희망의 길로 이끌어 주는 밝은 세계와 악으로 통하는 어두운 세계가 공존해 있었다. 희망의 길로 이끌어 주는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곳은 아주 좁은 세계였지만 미래로 통하는 곳, 선이 길이 있었다. 악으로 통하는 어두운 세계는 하녀와 견습 직공의 세계였다. 여기에는 장래를 내다볼 보는 눈과 욕구가 다른, 추악한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 어두운 세계에 끌려 프란츠 크로마와 만나게 되었고 그의 명령에 따라 집안의 돈을 훔쳐내기도 했다. 나는 여러 번 악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구원자로서의 데미안이 내게 나타났고 그는 나의 고민을 알고 나를 어둠의 세계로부터 구원해 주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데미안과 헤어져 상급 학교에 진학하였는데 그 때 나는 어둠의 세계에 다시 빠지게 되었다. 데미안의 편지가 와 나 자신을 다시 생각하게 했고 대학에 진학한 후 다시 데미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나고 데미안과 나는 전쟁에 참여하여 부상을 당했다. 데미안은 죽었지만 내 마음의 내부에는 언제나 데미안의 모습을 닮은 나 자신을 볼 수 있다.
2. 등장인물 분석
(1) 싱클레어 -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독심술(讀心術)에 빠져 인간의 영혼에 대해 회의를 품고 방황하는 소년이다. 소년 시절을 밝고 어두운 두 세계의 영향 밑에서 자라면서 자기 형성에 힘쓴다. 라틴어 학교 재학 시절에 불량 소년 프란츠 크로마의 유혹에 빠져 정신적인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비스런 학우 막스 데미안의 도움으로 그것을 벗어난다.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 음악가 피스토리우스의 영향으로 차차 확고한 자아(自我)의 길을 걷게 된다.
(2) 막스 데미안 - 에바 부인의 아들로 개성이 강하고 성숙하여 싱클레어에게 큰 영향을 주는 인물이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순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이상적 인간상이다. 매사에 신비스런 인력(引力)과 명철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으며 유혹에 빠진 싱클레어를 도와주고 그에게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 자아의 발견 등을 제시해 주어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에바 부인 - 데미안의 어머니로 한 여인의 몸으로 여성적인 매력과 원초적인 모성의 힘을 아울러 갖춘 신비의 여인이다. 이성에 눈뜬 싱클레어의 연모의 대상이 되나, 깊은 정신적인 예지를 발휘해서 잘못 빠지기 쉬운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4) 프란츠 크로마 - 하층 계급인 양복점 주인 아들로 태어난 불량소년으로, 성격이 거칠고 악의 상징 같은 소년이다. 어린 싱클레어를 유혹하여 악의 길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의 위협은 데미안의 출현으로 방해를 받는다.
(5) 피스토리우스 -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목사 집안에 태어난 청년이나, 일찍부터 신비적인 사상을 체득하여 싱클레어의 친구가 된다. 싱클레어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6) 크라우어 - 싱클레어의 동급생으로 섹스와 금욕에 고민하다가 자살 미수까지 저지르는 인물이다.
(7) 주제 : 자기 발견을 통하여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
3. 작품 해설
(1) [데미안]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재출발을 다짐한 헤세의 제2의 처녀작이다. 그래서 헤세는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싱클레어라는 익명을 썼다. 지금까지의 그의 명성에 기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결의에서 낸 이 작품은 토마스 만이 말한 것처럼 "우뢰와 같은 강한 감명을 주고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아, 무명 작가 싱클레어는 일약 베를린의 신인 문학상인 폰타네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헤세가 그 작가라는 것이 평론가 코로디에 의해 밝혀져 다음 해부터는 헤세의 작품으로 바뀌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싱클레어라는 이름은 헤세와 동향인인 광기의 천재 시인 휠더린의 친구로 독일에서 공부한 스코틀랜드계의 동명의 작가에게서 따온 것이다. 한편, "데미안"은 악령에 붙잡힌 것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마력을 지닌 데미안의 인도로 싱클레어 소년은 운명을 개척하고자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걸어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신을 비롯해서 기성의 여러 가지 것, 특히 혼을 잃은 유럽 문명이 철저하게 비판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데미안]은 헤세 자신과 함께 유럽 문화가 거듭 나기 위해서 앓지 않을 수 없었던 진통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 작품은 1919년 '싱클레어 어느 소년 시절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장편 소설이다. 데미안에 의해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구축해 가는 과정의 상징적이다. 이 작품은 일종의 교양소설(敎養小說)로, 한 인간의 자기 발견과정을 추구한 것으로 한 소년이 청년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내부에 두 개의 상반된 세계 속에서 괴로워한다. 신앙심이 깊고 예의 바른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은 선의 세계와 하녀·장인들의 입을 통해 듣는 부랑자·주정뱅이·강도 등의 악의 세계가 내면에서 대립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내면에 상반된 두 개의 혼이 위태로운 방황을 계속하지만 데미안으로부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라는 메세지를 받고 자기 인식의 눈을 뜨게 된다.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운명의 목소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3) 아프락사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술을 부리는 악마의 이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관례를 지니는 일종의 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포괄하는 이 신은 끊임없이 변화와 자연의 반항 속에서 창조적이고 지속적인 세계원칙으로서 군림하는 전우주적 존재로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신을 의미한다.
(4) 성장소설에 대한 간단한 풀이
① 성장소설 - 유년기에서 소년기를 거쳐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겪는 내면적 갈등과 정신적 성장,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각성의 과정을 주로 담고 있는 작품을 가리킨다. 지적·도덕적·정신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는 어린 아이 혹은 소년의 갈등이 중심을 이루며 그가 자아의 미숙함을 닫고 일어서 자신의 고요한 존재 가치와 세계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깨달음의 과정을 문화 인류학자들은 통과제의·통과의례·성인 입문식 등의 용어로 표현한다. 그 대표적 작품이 헤세의 <데미안>인 것이다.
②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소설 - 자아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거나 미성숙기의 주인공이 일련의 경험과 시련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이니시에이션 소설에서는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젊은 주인공이 성숙한 세계에 도달하도록 상반된 세계가 흔히 전제된다. 신화적 낙원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순진함과 성숙, 어둠과 밝음의 세계가 대립되며 선 - 악, 미 - 추, 삶 - 죽음 등이 중심이 된다.
③ 교양 소설 - 주인공이 유년기로부터 여러 가지 경험을 거쳐, 흔히 하나의 정신적 위기를 거쳐 성숙과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동일성과 역할에 대한 인식에 이르는 동안에 보이는 주인공의 정신과 성격의 발달을 다루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흔히 교양 소설은 교육 소설과 비슷한 용어로 사용된다.
4. 작품 <데미안>의 특징
(1) 내용의 측면 - 싱클레어는 10세 때 선과 악의 세계 속의 혼란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다. 이 때 구원자로서 데미안이 나타났고 그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과거를 깨고 보다 발전된 삶으로 각성하게 된다.
(2) 구성의 측면 - 서장(序章)과 8장으로 되어 있다. 제1, 2장에서는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소박하고 감상적으로 그려 먼 훗날의 인생의 흐름과 함축성 있게 암시하고 있고 제3장에서부터 독심술(讀心術)의 꿈의 해석이 수시로 인용되고 신비로운 환상적 여운이 전편에 흐른다.
(3) 표현의 측면 - 작가의 젊은 시절의 초상이라고 할만큼 영혼의 성숙과정을 자전적(自傳的)으로 그려냈다. 신비주의적 동양 정신이 엿보인다.
<자료: 문병철>
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
1. 작품의 줄거리
1900년경, 남부 독일의 작은 동네 슈바르츠발트(검은 숲이라는 뜻)에서 중개업자인 요제프에게는 재능있는 아들 한스 기벤라트가 있다. 이런 시골에 재능있는 아들이 태어나면 으레 그 장래는 정해져 있다. 매년 시행되는 주(州)의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든지, 아니면 국비(國費)로 교사가 되는 길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소년다운 놀이를 즐길 여유가 없었고 오로지 공부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소년 한스도 예외가 아니어서 숨돌릴 틈도 없이 공부에만 쫓기고 있었다. 이 머리 좋은 소년을 엘리트 코스로 보내는 것이 그의 부모는 물론, 목사님과 학교 선생님들의 희망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관문인 주시험에 그는 2등으로 합격한다. 드디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진학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에 대한 대가로 여름방학 첫날 그는 낚싯대를 메고 강으로 가서 수영도 하고 낮잠도 잘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한스는 소년시절로 돌아가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이틀을 가지 못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따기 위해 방학동안에도 밤늦게까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공부하여야만 했다.
기숙사 제도로 운영되는 신학교 생활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시인 기질이 있는 주인공 한스는 권위를 싫어하는 천재적인 소년 헤르만 하이르너와 친밀한 우정을 나눈다. 하이르너는 비정스러운 교육의 수레바퀴에 힘껏 반항했지만 한스는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해 하이르너를 배반하고 만다. 얼마 뒤 하이르너는 신학교의 속박에 대한 반항심에서 탈출해버리고 만다.
친구의 탈출을 본 한스의 영혼은 고뇌로 가득 차게 된다. 주의력은 흩어져 산만해지고 신경쇠약의 증세를 일으켜 거의 폐인이 된다. '갸름한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멋적은 미소의 그늘 속에 메말라 가는 한 영혼이 고뇌하고 무서움에 떨며 절망적으로 주위를 살피는 모습'을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고, 심지어 신학교 선생님들조차 무관심하다. 결국 의사와 교장의 편지를 간직하고 실망에 빠진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너무 큰 상처를 받은 두뇌는 집에 갔어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 빈둥빈둥 지낸다.
과실주를 담그는 가을 날, 그는 처음으로 엠마라는 연상의 여인에게서 매력을 느끼게 되고 몇 차례 짜릿한 키스의 경험을 한다. 그러나 엠마는 갑자기 한스의 곁을 떠난다. 엠마에게는 진실한 사랑이 아닌 장난기 어린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실의에 빠진 한스는 부친의 권고에 따라 기계공이 되기 위해 대장간 견습공이 된다. 지금까지의 괴로움도 희망도 버리고 그는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채 일터에 나갔다. 그는 노동의 기쁨과 괴로움을 그제서야 터득했다.
어느 일요일 날 한스는 학교동창이며 이제는 어엿한 기계공이 된 아우구스트와 함께 들놀이를 갔다. 한스는 처음으로 맛보는 맥주에 취해 곤드레 만드레가 되었다. 그 놀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스는 죽음의 그림자에 이끌려 나골토 강에 몸을 던진다. 장례식 날 옆집 구둣방 주인은 선생들을 가리키며 "저기 가는 놈들도 한스를 이런 지경으로 만드는 데 조력한 거여"라고 말한다.
다만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아니면 사고사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2. 비인간적인 교육제도에 경종(警鐘)
(1)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학창시절의 경험을 집요하게 되새기면서 편협한 학교제도야말로 재능있는 젊은이를 좌절케하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위축시킴으로써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한되며, 자아의 붕괴를 가져오는 그런 명령과 규범, 의무와 학습내용에 질식해버리고 만다.
학생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나 교사들에 의해 강요된 교육이라면 결국 바퀴 밑에 깔린 것처럼 그들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테마인 이 소설은 출간 즉시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그때까지 가정과 학교에 팽배해온 현대의 교육관과 교육제도에 경종(警鐘)을 울려주었다. 대학입시만을 강요하고 학생들의 창조적 능력개발을 소홀히 하는 현대의 비인간적 교육 행태 때문에 이 작품은 여전히 교육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작품은 그 자신이 걸어갔던 삶의 과정의 반영이다. 그 과정이란 어린이의 순수함과 평화로움에서 성년의 방황과 절망에 이르는 길고 긴 도정(道程)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헤세만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걸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순탄하지만은 않은 인생 길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차츰 좌절을 경험하게 되며, 이 세계의 윤리와 가치에 회의를 지닌 채 미망(迷妄)의 길로 빠져든다.
헤세의 경건하고도 매우 비판적인 정신은 소위 20세기의 잡문 문화시대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전 우주와 자아가 합일되는 것을 느끼며, 밝고 어두운 세계 등 부조리한 인생의 수많은 대립을 모두 긍정하는 전일적 인생론을 설교한 헤세는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많은 구원의 책을 선사하여 큰 기쁨과 위안을 주고 있다.
(2) 이 작품은 학교와 사회의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하다 결국에는 서서히 죽어가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학교제도의 불합리성을 질타하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에 나타난 당시의 경직화된 학교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육의 현실에 하나의 좋은 시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천진하기만 한 자연아 한스, 시험이 끝나면 메뚜기를 쫓아 풀밭과 들에서 딩구는 이 소년을, 주입식 교육이라는 수레바퀴 밑에 넣어 무참하게 깔아뭉개는 교사, 이것이야말로 헤세가 겪었던 비통한 체험인 것이다. 어머니가 없는 작품 속의 한스는 끝내 자멸하고 말지만, 이 작품을 쓴 헤세는 어머니의 힘으로 간신히 그런 위기를 극복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하며, 주입식 교육에 저항하는 하이르너도 역시 소년 헤세의 분신이다. 신학교를 도망친 하이르너는 바로 헤세의 소년 시절을 그대로 재연해 보이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수레바퀴 아래서]는 상당히 자전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작품이다.
<자료: 문병철>
「수레바퀴 밑에서」만난
헤르만 헤세의 고향, 독일 칼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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