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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작품

노계 박인로(朴仁老)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12.11|조회수3,066 목록 댓글 0

 

 

 

 

노계 박인로(朴仁老 

 

1561(명종 16) 경북 영천~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밀양.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무하옹(無何翁). 9편의 가사와 70여 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정철·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으로 불린다. 아버지 석(碩)은 승의부위(承議副尉)를 지냈고 어머니는 참봉 주순신(朱舜臣)의 딸이었다. 박인로의 일생 중 전반기에 대한 기록은 소략해 학문의 연마 정도와 교우관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미비한 향반의 후예일지라도 "이 세상에 남길 만한 이름은 효도·우애·청백이며 가슴속에 간직한 것은 충과 효 두 글자"라 하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전형적 사대부의 삶을 추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좌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들어가 그의 명으로 〈태평사 太平詞〉를 지었는데, 긴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을 "들판에 쌓인 뼈는 산보다 높고 큰 도읍, 큰 고을이 여우굴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또 자신의 시대를 여전히 임금의 덕화(德化)가 두루 미치는 태평성대로 인식하고 전쟁 동안 소홀히 했던 오륜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39세 때 문과에 급제해 조라포만호(助羅浦萬戶)로 부임, 41세 때 이덕형을 향리에서 만나 〈조홍시가 早紅枾歌〉를 지었다. 45세 때 부산의 통주사(統舟師)로 부임해 〈선상탄 船上嘆〉을 지어 무인다운 기개와 자부심을 표현했다. 51세 때 용진강 사제에 은거해 있던 이덕형을 찾아가 그의 뜻을 대신해 〈사제곡 莎堤曲〉을 지었으며, 〈누항사 陋巷詞〉에서는 향촌에 묻혀 사는 자신의 궁핍한 생활을 노래해 안빈낙도하고자 하는 뜻을 밝혔다. 〈사제곡〉은 박인로가 갈망하던 사대부적 삶의 전형을 보여주며, "어리석고 못나기는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는 자조적 고백으로 시작되는 〈누항사〉는 곤궁한 현실과 그 개선의 가능성마저 무산되고 마는 갈등의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53세부터는 유가와 주자학에 몰입했다. 1630년(인조 8) 노인직(老人職)으로 용양위부호군(龍驤僞副護軍)을받았다. 75세 때는 영남의 안절사 이근원의 덕치를 찬미하는 〈영남가 嶺南歌〉를 지었다. 76세 때에는 노계에 안거할 택지를 마련하고 〈노계가 蘆溪歌〉를 지었다. 그의 생애 전반부는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에서 두드러지며, 후반부에는 향리에서 유가서를 읽으며 안빈낙도를 실천했다. 3권 2책의 〈노계선생문집〉이 전한다.

 

<백과사전> 

 

 

노계 박인로(朴人老) 작품 

 

                                                           <사진: 노계서원>

                           

 

早紅枾歌(조홍시가)

 

반중(盤中) 조홍(早紅) 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ㅣ 아니라도 품은 즉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해동가요, 노계집>

 

 

현대어 풀이

 

쟁반 가운데에 놓인 일찍 익은 감(홍시)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유자가 아니라 해도 품어 가지고 갈 마음이 있지만

감을 품어가도 반가워 해 줄 부모님이 안 계시니 그것이 서럽구나.

 

이해와 감상

 

'早紅枾歌(조홍시가)'라 이름하는 이 노래의 유래는 이렇다.

이 시를 지은이는 선조 34년 9월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찾아가 조홍시를 대접 받았을 때, 회귤(懷橘) 고사(故事)(아래 설명참조)를 생각하고 돌아가신 어버이를 슬퍼하여 지은 효도의 노래이다.

 

육적의 회귤고사(懷橘故事)

 

  " 삼국 시대 오군(吳郡) 사람 육적(陸績)이 여섯 살 때에 원술(袁術)을 찾아갔더니, 원술이 귤 세 개를 먹으라고 주었는데, 육적이 그것을 품속에 품었다가 일어설 때에 품었던 귤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원술이 그 연유를 물은즉, 어머님께 드리려고 품었다고 대답하더라는 고사인데, 회귤의 고사는 곧 효도를 뜻한다. "

 

 

 

 선상탄(船上歎) 


(서사)

늘고 병든 몸을 주사(舟師)로 보내실새

을사(乙巳) 삼하(三夏)애 진동영 나려오니

관방중지(關防重地)예 병이 깁다 안자실랴.

일장검(一長劍) 비기 차고 병선(兵船)에 구테 올나

여기진목(勵氣瞋目)하야 대마도을 구어보니

바람 조친 황운(黃雲)은 원근에 사혀 잇고

아득한 창파(창파)는 긴 하늘과 한 빗칠쇠.

(본사1)

선상(船上)에 배회하며 고금(古今)을 사억(思憶)하고

어리미친 회포(懷抱)애 헌원씨(軒轅氏)를 애다노라

대양(大洋)이 망망(茫茫)하야 천지예 둘려시니

진실로 배 아니면 풍파(風波) 만리 밧긔, 어내 사이(四夷) 엿볼넌고.

무삼 일 하려 하야 배 못기를 비롯한고?

만세천추(萬世千秋)에 가업슨 큰 폐(弊) 되야,

보천지하(普天之下)애 만민원(萬民怨) 길우나다.

(본사2)

어즈버 깨다라니 진시황의 타시로다.

배 비록 잇다 하나 왜(倭)를 아니 삼기던들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로 뷘 배 졀로 나올넌가

뉘 말을 미더 듯고,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그대도록 드려다가

해중(海中) 모든 셤에 난당적(難當賊)을 기쳐 두고

통분(痛憤)한 수욕(羞辱)이 화하(華夏)애 다 밋나다.

장생(長生) 불사약(不死藥)을 얼매나 어더 내여

만리장성 놉히 사고 몃 만년을 사도떤고,

남대로 죽어가니 유익한 줄 모라로다.

어즈버 생각하니 서불(徐市) 등(等)이 이심(已甚)하다.

인신(人臣)이 되야셔 망명(亡命)도 하는 것가

신선을 못 보거든 수이나 도라오면,

주사(酒師) 이 시럼은 전혀 업게 삼길럿다.

(본사3)

두어라, 기왕불구(旣往不咎)라 일너 무엇 하로소니

쇽졀업슨 시비(是非)를 후리쳐 더뎌 두쟈.

잠사각오(潛思覺悟)하니 내 뜻도 고집(固執)고야.

황제 작주거(黃帝作舟車)는 왼 줄도 모라로다.

장한(張翰) 강동(江東)애 추풍(秋風)을 만나신들,

편주(扁舟) 곳 아니 타면, 천청해활(天淸海闊)하다.

어내 흥이 졀로 나며, 삼공(三公)도 아니 밧골,

제일강산(第一江山)애, 부평(浮萍) 갓흔 어부생애(漁夫生涯)을,

일엽주(一葉舟) 아니면, 어듸 부쳐 단힐난고?

(본사4)

일언 닐 보건든, 배 삼긴 제도(制度)야

지묘(至妙)한 덧하다마난, 엇디한 우리 물은

나난 듯한 판옥선(板屋船)을 주야의 빗기 타고

임풍영월(臨風永月)호대 흥(興)이 전혀 업난게오?

석일(昔日) 주중(舟中)에는 배반(杯盤)이 낭자터니,

금일(今日) 주중에는 대검장창(大劍長창) 뿐이로다.

한 가지 배언마난 가진 배 다라니,

기간(其間) 우락(憂樂)이 서로 갓지 못하도다.

(본사5)

시시(時時)로 멀이 드러 북신(北辰)을 바라보며,

상시노루(傷時老淚)를 천일방(天一方)의 디이나다

오동방(吾東方) 문물(文物)이 한당송(漢唐宋)에 디랴마는

국운이 불행하야 해추흉모(海醜兇謀)애 만고수(萬古羞)을 안고 이셔,

백분(백분)에 한 가지도 못 시셔 바려거든

이 몸이 무상(無狀)한들 신자(臣子)ㅣ 되야 이셔다가,

궁달(窮達)이 길이 달라 몬 뫼압고 늘거신들

우국단심(憂國丹心)이야 어내 각(刻)애 이즐넌고?

(본사6)

강개(慷慨) 계운 장기(壯氣)는 노당익장(老當益壯)하다마는

됴고마난 이 몸이 병중에 드러시니

설분신원(雪憤伸寃)이 어려올 듯 하건마는

그러나 사제갈(死諸葛)도 생중달(生仲達)을 멀리 좃고

발 업슨 손빈(孫빈)도 방연(龐涓)을 잡아거든

하믈며 이 몸은 수족(手足)이 가자 잇고 명맥(命脈)이 이어시니,

서절구투(鼠竊狗偸)을 저그나 저흘소냐

비선(飛船)에 달려드러 선봉(先鋒)을 거치면,

구시월(九十月) 상풍(霜風)에 낙엽가치 헤치리라.

칠종칠금(七縱七擒)을 우린들 못할 것가.

(결사)

준피도이(蠢彼島夷)들아 수이 걸항(乞降) 하야스라.

항자불살(降者不殺)이니 너를 구태 섬멸하랴

오왕(吾王) 성덕(聖德)이 욕병생(欲竝生)하시니라

태평천하애 요순 군민(君民) 되야 이셔,

일월광화(日月光華)는 조부조(朝復朝)하얏거든

전선(戰船) 타던 우리 몸도 어주(漁舟)에 창만(唱晩)하고

추월춘풍(秋月春風)에 놉히 베고 누어 이셔

성대(聖代) 해불양파(海不揚波)를 다시 보려 하노라.

 

<노계집>

 

[현대어 풀이]

 

(서사)

늙고 병든 몸을 통주사(수군)로 보내시므로

을사년(선조38년) 여름에 부산진에 내려오니

변방의 중요한 요새지에서 병이 깊다고 앉아 있겠는가?

긴 칼을 비스듬히 차고 병선에 굳이 올라가서

기운을 떨치고 눈을 부릅뜨고 대마도를 굽어보니,

바람을 따르는 노란 구름은 멀고 가깝게 쌓여 있고

아득한 푸른 물결은 긴 하늘과 같은 빛일세.

(본사 1)

배 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서성이며)

옛날과 오늘날(지금)을 생각하고

어리석고 미친 마음에 배를 처음 만든 헌원씨를 원망스럽게 여기노라.

바다가 아득히 넓게 천지에 둘려 있으니,

참으로 배가 아니면 풍파가 심한 만 리 밖에서

어느 오랑캐(왜적)들이 엿볼 것인가?

(훤원씨는) 무슨 일을 하려고 배 만들기를 시작했는가?

왜 그는 천만년 후에 끝없는 폐단이 되도록

넓은 하늘 아래에 있는 온 천하에 만백성의 원한을 길렀는가.

(본사 2)

아! 깨달으니 진시황의 탓이로다.

배가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왜족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일본 대마도로부터 빈 배가 저절로 나올 것인가?

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동남동녀를 그토록 데려다가

바다의 모든 섬에 감당하기 어려운 도적을 만들어 두어,

원통하고 분한 수치와 모욕이 중국에까지 다 미치게 하였는가?

장생 불사약을 얼마나 얻어내어 만리장성을 높이 쌓고 몇 만 년을 살았던가?

남처럼 죽어 갔으니 유익한 줄 모르겠도다.

아! 생각하니 서불의 무리가 너무 심하다.

신하의 몸으로 망명도주도 하는 것인가?

신선을 만나지 못했거든 쉽게나 돌아왔으면

통주사(자신)의 이 근심은 전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본사 3)

그만 두어라. 이미 지난 일은 탓하지 않는 것이라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는 시비를 팽개쳐 던져 버리자.

깊이 생각하여 깨달으니 내 뜻도 고집스럽구나.

황제가 처음으로 배와 수레를 만든 것은 그릇된 줄도 모르겠도다.

장한이 강동으로 돌아가 가을바람을 만났다고 한들

작은 배를 타지 않으면 하늘이 맑고 바닥 넓다고 해도

어느 흥이 저절로 나겠으며, 삼공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경치가 좋은 곳에서 부평초 같은 어부의 생활을

자그마한 배가 아니면 어디에 부쳐 다니겠는가?

(본사 4)

이런 일을 보면, 배를 만든 제도야

매우 묘한 듯 하다마는, 어찌하여 우리 무리는

날듯이 빠른 판옥선을 밤낮으로 비스듬히 타고

풍월을 읊되 흥이 전혀 없는 것인가?

옛날의 배 안에는 술상이 어지럽더니

오늘날의 배 안에는 큰 칼과 긴 창뿐이로구나.

똑같은 배건마는 가진 바가 다르니

그 사이의 근심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못하도다.

(본사 5)

때때로 머리를 들어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시국을 근심하는 늙은이의 눈물을 하늘 한 모퉁이에 떨어뜨린다.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의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에 뒤떨어지랴마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의 흉악한 꾀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고서

그 백분의 일도 아직 씻어 버리지 못했거든,

이 몸이 변변치 못하지만 신하가 되어 있다가

신하와 임금의 신분이 서로 달라 못 모시고 늙었다 한들,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스런 마음이야 어느 시각인들 잊었을 것인가?

(본사 6)

강개를 못 이기는 씩씩한 기운은 늙을수록 더욱 장하다마는,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병중에 들었으니

분함을 씻고 원한을 풀어 버리기가 어려울 듯 하건마는,

그러나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의를 멀리 쫓았고,

발이 없는 손빈이 방연을 잡았는데,

하물며 이 몸은 손과 발이 온전하고 목숨이 살아 있으니

쥐나 개와 같은 왜적을 조금이나마 두려워하겠는가?

나는 듯이 빠른 배에 달려들어 선봉을 휘몰아치면

구시월 서릿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왜적을)헤치리라.

칠종칠금을 우리라고 못할 것인가?

(결사)

꾸물거리는 저 섬나라 오랑캐들아, 빨리 항복하려무나.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는 법이니, 너희들을 구태여 모두 죽이겠느냐?

우리 임금님의 성스러운 덕이 너희와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시느니라.

태평스러운 천하에 요순시대와 같은 화평한 백성이 되어

해와 달 같은 임금님의 성덕이 매일 아침마다 밝게 비치니,

전쟁하는 배를 타던 우리들도 고기잡이배에서 저녁 무렵을 노래하고,

가을 달 봄바람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성군 치하의 태평성대를 다시 보려 하노라


[작품 해제]

 

‘선상탄’은 ‘태평사’와 함께 가사 문학사상 몇 안 되는 전쟁 가사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선조

38년(1605), 박인로가 통주사로 부산에 가서 왜적의 침입을 막고 있을 때 지은 전쟁가사이다. 임진왜

란이 끝난 후이지만, 전쟁의 아픔과 왜적에 대한 적개심이 가라앉지 않은 때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직접 전란에 참여한 작자가 왜적의 침입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을 뼈저리게 되새기며, 왜적에 대한 근

심을 덜고 고향으로 돌아가 놀이 배를 타고 즐겼으면 하는 뜻과 우국충정의 의지를 함께 표현한 것이

다. 배의 유래와 무인다운 기개, 그리고 왜적의 항복으로 하루빨리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원하는 내용

도 아울러 표현되어 있다.

 

조선 전기의 가사가 현실을 관념적으로 다룬 데 반해, 이 작품은 전쟁의 시련에 처한 민족 전체의 삶

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가사가 개인적 서정이나 사상의 표출만이 아니라 집단적 의지의 표현에도 적합

한 양식임을 실증하고 있다.

 

표현상 한문 투의 수식이 많고 중국의 고사와 한시 구를 그대로 인용할 뿐 아니라, 직서적인 표현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결점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전쟁 문학이 일반적으로 범하기 쉬운 속된

감정에 흐르지 않고 적을 위압할 만한 무사의 투지를 담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

다. 또한, 작가가 타고 있는 배를 중심 소재로 내세워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도 눈여겨 볼만하다.

 

[창작 배경]

 

‘선상탄’이 창작된 시기인 1605년은 우리 민족이 참혹한 피해를 입은 전란인 임진왜란이 종료된 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로서, 악화된 대일 감정이 지속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반일과 극일은 당시 우리 민족의 일반적 정서였고, 또한 정세아(鄭世雅) 휘하의 의병으로 또

성윤문 막하의 수군으로 일본에 대항, 항전에 직접 참여했던 노계의 기본적인 정서이기도 하였다. 그

렇기에 시적 재능을 지닌 노계가 전란의 기억이 생생한 시절에 다시 통주사로 나라 수비의 임무를 맡

게 됨에 따라 반일과 극일의 정서, 나아가 우리의 자신감과 우월감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 애호의 정서

를 뚜렷이 의경화한 의론지향의 시가인 ‘선상탄’을 지은 것은 매우 시의(時宜) 적절한 시가 창작이

었다고 평가된다. 이런 작품의 창작 배경은 조선 후기의 군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상과 굴욕적 침략을 현실적으로 견딘 후에, 이를 이상적으로 초극하려는 의지와 민족의

염원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이런 문학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누항사(陋巷詞) 

 

(서사) 

어리고 우활(迂闊)할산 이내 우헤 더니 업다.

길흉 화복(吉凶禍福)을 하날긔 부쳐 두고,

누항(陋巷) 깁푼 곳의 초막(草幕)을 지어 두고,

풍조우석(風朝雨夕)에 석은 딥히 셥히 되야,

셔 홉 밥 닷 홉 죽(粥)에 연기(煙氣)도 하도 할샤.

설 데인 숙냉(熟冷)애 뷘 배 쇡일 뿐이로다.

생애 이러하다 장부(丈夫) 뜻을 옴길넌가.

안빈 일념(安貧一念)을 젹을망정 품고 이셔,

수의(隨宜)로 살려하하니 날로 조차 저어(齟齬)하다.

가을히 부족(不足)거든 봄이라 유여(有餘)하며,

주머니 뷔엿거든 병(甁)의라 담겨시랴.

빈곤(貧困)한 인생(人生)이 천지간(天地間)의 나뿐이라.

(본사) 

기한(飢寒)이 절신(切身)하다 일단심(一丹心)을 이질는가.

분의 망신(奮義忘身)하야 죽어야 말녀 너겨,

우탁 우랑(于槖于囊)의 줌줌이 모아 녀코,

병과(兵戈) 오재(五載)예 감사심(敢死心)을 가져 이셔,

이시섭혈(履尸涉血)하야 몃 백전(百戰)을 지내연고.

일신(一身)이 여가(餘暇) 잇사 일가(一家)를 도라보랴.

일노장수(一奴長鬚)는 노주분(奴主分)을 이졋거든,

고여춘급(告余春及)을 어느 사이 생각하리.

경당문노(耕當問奴)인들 눌다려 물을는고.

궁경가색(躬耕稼穡)이 내 분(分)인 줄 알리로다.

신야경수(莘野耕叟)와 농상경옹(瓏上耕翁)을 천(賤)타하리 업것마는,

아므려 갈고젼들 어느 쇼로 갈로손고.

한기태심(旱旣太甚)하야 시절(時節)이 다 느즌 졔,

서주(西疇) 놉흔 논애 잠깐 갠 녈비예

도상(道上) 무원수(無源水)를 반만끔 데혀두고,

쇼한 젹 듀마하고 엄섬이 하신 말삼

친절(親切)호라 너긴 집의 달 업슨 황혼(黃昏)의 허위허위 다라 가셔,

구디 다든 문(門) 밧긔 어득히 혼자 서셔

큰 기침 아함이를 양구(良久)토록 하온 후(後)에,

어와 긔 뉘신고 염치(廉恥) 업산 내옵노라.

초경(初更)도 거읜데 긔 엇지 와 겨신고.

연년(年年)에 이러하기 구차(苟且)한 줄 알건마는

쇼 업는 궁가(窮家)애 혜염 만하 왓삽노라.

공하니나 갑시나 주엄 즉도 하다마는,

다만 어제 밤의 거넨 집 져 사람이,

목 불근 수기치(雉)을 옥지읍(玉脂泣)게 구어내고,

간 이근 삼해주(三亥酒)을 취(醉)토록 권(勸)하거든,

이러한 은혜(恩惠)을 어이 아니 갑흘넌고.

내일(來日)로 주마하고 큰 언약(言約)하야거든,

실약(失約)이 미편(未便)하니 사셜이 어려왜라.

실위(實爲) 그러하면 혈마 어이할고.

헌 먼덕 수기 스고 측 업슨 집신에 설피설피 물너 오니,

풍채(風採) 저근 형용(形容)애 개 즈칠 뿐이로다.

와실(蝸室)에 드러간들 잠이 와사 누어시랴.

북창(北牕)을 비겨 안자 새배를 기다리니,

무정(無情)한 대승(戴勝)은 이내 한(恨)을 도우나다.

종조(終朝) 추창(惆悵)하야 먼 들흘 바라보니,

즐기는 농가(農歌)도 흥(興) 업서 들리나다.

세정(世情) 모른 한숨은 그칠 줄을 모르는다.

아까온 져 소뷔는 볏보님도 됴흘세고.

가시 엉긘 묵은 밧도 용이(容易)케 갈련마는,

허당 반벽(虛堂半壁)에 슬데업시 걸려고야.

춘경(春耕)도 거의거다 후리쳐 더뎌 두쟈.

(결사) 

강호(江湖)애 벗을 삼아 지내언지도 오래러니,

구복(口腹)이 위루(爲累)하야 어지버 이져도다.

첨피기욱(瞻彼淇燠)혼데 녹죽(綠竹)도 하도 할샤.

유비군자(有斐君子)들아 낙대 하나 빌려스라.

노화(蘆花) 깁픈 곳애 명월 청풍(明月淸風) 벗이 되야,

님자 업슨 풍월강산(風月江山)애 절로절로 늘그리라.

무심(無心)한 백구(白鷗)야 오라 하며 말라 하랴.

다토리 업슬손 다문 너인가 너기로라.

무상(無狀)한 이 몸애 무슨 지취(志趣) 이스리마는,

두세 이렁 밧논를 다 무겨 더뎌 두고,

이시면 죽(粥)이오 업시면 굴물망졍,

남의 집 남의 거슨 전혀 부러 말렷스라.

내 빈천(貧賤) 슬히 너겨 손을 헤다 물너가며,

남의 부귀(富貴) 불리 너겨 손을 치다 나아오랴.

인간(人間) 어느 일이 명(命) 밧긔 삼겨시리.

빈이무원(貧而無怨)을 어렵다 하건마는

내 생애(生涯) 이러호니 설온 뜻은 업노왜라.

단사표음(簞食瓢飮)을 이도 족(足)히 너기로라.

평생(平生) 한 뜻이 온포(溫飽)애는 업노왜라.

태평천하(太平天下)애 충효(忠孝)를 일을 삼아

화형제(和兄弟) 신붕우(信朋友) 외다 하리 뉘 이시리.

그 밧긔 남은 일이야 삼긴대로 살렷노라.


[현대어 풀이]


(서사) 

어리석고 세상 물정에 어둡기로는 이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모든 운수를 하늘에다 맡겨 두고

누추한 깊은 곳에 초가를 지어 놓고

고르지 못한 날씨에 썩은 짚이 땔감이 되어

세 홉 밥에 다섯 홉 죽을 만드는 데 연기가 많기도 하구나.

덜 데운 숭늉을 고픈 배를 속일 뿐이로다.

살림살이가 이렇게 구차하다고 한들 대장부의 뜻을 바꿀 것인가.

안빈낙도하겠다는 한 가지 생각을 적을망정 품고 있어서

옳은 일을 좇아 살려 하니 날이 갈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다.

가을이 부족한데 봄이라고 여유가 있겠으며

주머니가 비었는데 술병에 술이 담겨 있으랴.

가난한 인생이 천지간에 나뿐이로다.

(본사) 

배고픔과 추위가 몸을 괴롭힌다 한들 일편단심을 잊을 것인가.

의에 분발하여 내 몸을 잊어서 죽어서야 말겠노라고 마음먹어

전대와 망태에 한 줌 한 줌 모아 넣고

전란 5년 동안에 죽고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 몇 백 전쟁을 치루었던가.

한 몸이 겨를이 있어서 집안을 돌보겠는가

늙은 종은 하인과 주인의 분수를 잊어버렸는데

나에게 봄이 왔다고 일러 줄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밭 가는 일은 마땅히 종에게 물어야 한다지만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몸소 농사를 짓는 것이 내 분수에 맞는 줄을 알겠도다.

들에서 밭 갈던 은나라의 이윤과 진나라의 진승을 천하다고 할 사람이 없지마는

아무리 갈려고 한들 어느 소로 갈겠는가.

가뭄이 몹시 심하여 농사철이 다 늦은 때에

서쪽 두둑 높은 논에 잠깐 갠 지나가는 비에

길 위에 흐르는 물을 반쯤 대어 놓고는

소 한 번 빌려 주마 하고 엉성하게 하는 말을 듣고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이 없는 저녁에 허우적허우적 달려가서

굳게 닫은 문 밖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

‘에헴.’ 하는 인기척을 꽤 오래도록 한 후에

‘어, 거기 누구신가?’ 묻기에 ‘염치없는 저올시다.’

‘초경도 거의 지났는데 무슨 일로 와 계신가?’

‘해마다 이러기가 구차한 줄 알지마는

소 없는 가난한 집에서 걱정이 많아 왔소이다.’

‘공것이거나 값을 치거나 간에 주었으면 좋겠지만

다만 어젯밤에 건넛집 사는 사람이

목이 붉은 수꿩을 구슬 같은 기름에 구어 내고

갓 익은 좋은 술을 취하도록 권하였는데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지 않겠는가?

내일 소를 빌려 주마 하고 굳게 약속을 하였기에

약속을 어기기가 편하지 못하니 말씀하기가 어렵구료.’

정말로 그렇다면 설마 어찌하겠는가

헌 모자를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을 신고

맥없이 물러나오니

풍채 적은 내 모습에 개가 짖을 뿐이로구나

작고 누추한 집에 들어간들 잠이 와서 누워 있겠는가.

북쪽 창문에 기대 앉아 새벽을 기다리니

무정한 오디새는 나의 한을 돕는구나.

아침이 끝날 때까지 슬퍼하며 먼 들을 바라보니

즐기는 농부들의 노래도 흥 없게 들리는구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한숨은 그칠 줄 모른다.

아까운 저 쟁기는 볏보임도 좋구나.

가시가 엉킨 묵은 밭도 쉽게 갈 수 있으련만

빈 집 벽 한가운데 쓸데없이 걸려 있구나.

봄갈이도 거의 다 지났다. 팽개쳐 던져 버리자.

(결사)

자연을 벗 삼아 살겠다는 한 꿈을 꾼 지도 오래더니

먹고 사는 것이 누가 되어 아, 슬프게도 다 잊었도다.

저 냇가를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가 많기도 하구나.

교양 있는 선비들아, 낚싯대 하나 빌리려무나.

갈대꽃 깊은 곳에서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의 벗이 되어

임자 없는 자연 속에서 절로절로 늙으리라.

무심한 갈매기야, 나더러 오라고 하며 가라고 하랴?

다툴 이가 없는 것은 다만 이것뿐인가 생각하노라.

못 생긴 이 몸이 무슨 소원이 있으리오마는

두세 이랑 되는 밭과 논을 다 묵혀 던져두고

있으면 죽이요 없으면 굶을망정

남의 집 남의 것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하노라.

나의 빈천을 싫게 여겨 손을 헤친다고 물러가며

남의 부귀를 부럽게 여겨 손을 친다고 나아오랴?

인간 세상의 어느 일이 운명 밖에 생겼겠느냐?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음이 어렵다고 하건마는

내 생활이 이러하되 서러운 뜻은 없노라.

한 사발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의 어려운 생활을 이것도 만족하게 여기노라.

평생의 한 뜻이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는 없노라.

태평스런 세상에 충성과 효도를 일을 삼아

형제간에 화목하고 벗끼리 신의 있게 사귀는 일을 그르다 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 밖의 일이야 태어난 대로 살아가려 하노라.

 

작품 해설

 이 작품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찾아와 누항(陋巷) 생활의 어려움을 묻자, 이에 답한 작품이라 전한다.

 한음이 노계의 고생스런 생활상을 물었을 때, 가난하지만 원망하지 않으며 안빈낙도하는 심회와 생활상을 읊은 작품이다. 내용은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도(道)를 즐기는 장부의 뜻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웃집에 농우를 얻으려 갔다가 뜻대로 되지 못하고 돌아와 세상 일에 대한 체념적 심회를 읊기도 하고, 속세의 물욕을 떠나 청풍명월과 벗하여 대자연과 더불어 한가롭게 살아 보자는 초월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런 작품의 내용은 사대부의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를 직시하고 현실 생활의 빈궁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조선 전기의 가사가 보여 주었던 자연 완상의 세계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누항(陋巷)’이란 ‘논어’에 나오는 말로, 가난한 삶 가운데도 학문을 닦으며 도를 추구하는 즐거움을 즐기는 공간을 말할 때 자주 사용된다.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가난하나 원망하지 않는 ‘빈이무원(貧而無怨)’의 경지나 자연을 벗삼아 ‘안빈낙도(安貧落島)’함을 알게 해 준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당대의 산림에 묻힌 선비들의 고절한 삶과 현실의 부조화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박인로의 작품 세계

박인로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작가로서, 그의 가사 작품에는 여러 가지 특징적 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수군(水軍)으로 종군해서는 ‘태평사(太平詞)’와 ‘선상탄(船上嘆)’을 지었는데 표현은 소박해도 나라를 근심하고 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자 하는 마음을 뜨겁게 나타냈다. ‘독락당(獨樂堂)’, ‘소유정가(小有亭歌)’에서는 명승지를 찾아 그 유래와 경치를 찬양했고, ‘영남가(嶺南歌)’에서는 민심을 돌보러 온 관원의 덕치(德治)를 찬양하면서 임진왜란 후 백성이 조석(朝夕)을 잇지 못하면서 부역에 시달리는 사정을 나타내었다.

 그는 유자(儒者)로서의 당위와 궁핍한 현실 사이에서 깊이 고심했는데, 이런 문제 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노계가(蘆溪歌)’와 ‘누항사(陋巷詞)’이다. 이들 작품에서 박인로는 안빈낙도하는 이상적 삶을 노래하면서도 궁핍하고 누추한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로움을 핍진(逼眞)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누항사’에서는 지금까지 가사에 등장하지 않았던 일상 생활의 언어를 대폭 받아들여 생동감과 구체성을 획득하는 탁월함을 보였고 그를 통해 조선 후기 가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선국적 역할을 하였다.

 

조선 전후기 가사 비교와 ‘누항사’

 조선 전기의 가사는 주로 양반층에 의해 창작되었고 강호시가(江湖詩歌)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이 많으며 전반적으로 서정적인 경향이 강하다. 조선 후기 가사는 작자층이 다양화하면서 작품 경향이 여러 방향으로 분화되고, 생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변화가 나타났다. 박인로의 ‘누항사’는 바로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노계가사>에 대한 평가

 노계 박인로의 가사는 열정과 자구(字句)의 세련미에 있어서 송강 정철에게 일보를 양보한다 하겠거니와, 특히 그 시가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한자나 고사성어, 전고(典故)가 너무 많이 사용된 단점이 있으나, 수사나 조어(造語)의 묘는 ‘송강가사’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점이 다분히 보이며, 더욱이 초기의 작품은 풍부한 어휘에 그 필자가 웅렬(雄烈)하여, 무인다운 기상이 가득 차 있으며, 신선미와 기백이 잘 드러나 있다. 시가 문학사상 정철,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시가인으로 꼽힌다. 

 

 

 

 

 태평사(太平詞)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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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어 풀이

 

 나라가 한쪽으로 치우쳐서 해동에 버려져 있어도

 기자의 끼친 풍속 고금 없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워

 조선 건국 이후에 이백 년간 예의를 숭상하니

 우리의 모든 문화가 한(漢)․당(唐)․송(宋)과 같이 되었더니

 섬나라 오랑캐의 많은 군사가 일조(一朝)에 갑자기 쳐들어 와서

 수많은 우리 겨레가 칼빛 따라 놀란 혼백

 들판에 쌓인 뼈는 산보다 높아 있고

 큰 도읍과 큰 고을은 승냥이와 여우의 소굴이 되었거늘

 처량한 임금 행차 의주로 바삐 들어가니

 먼지가 아득하여 햇빛이 엷었더니

 무술이 빼어나신 거룩하신 천자님이 노여움 한 번 크게 내어

 평양의 모든 흉적 한칼 아래 다 베어서

 바람같이 몰아 내어 남해 바닷가에 던져 두고

 궁지에 빠진 왜구를 치지 않고 몇 해를 지냈는고.

 낙동강 동쪽 강변 일대의 외로운 우리 겨레

 우연히 때가 와서 제갈량을 다시 만나

 오덕(五德)이 밝은 장수 밑에서 앞장서서 싸우는 군사가 되었다가

 영웅과 인용들을 전하는 재상에 끼게 되었으니

 남방이 편안하고 장사 군마(軍馬) 강하더니

 왕조 하룻밤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다시 일어나니

 용 같은 빼어난 장수와 구름 같은 수많은 용사들이

 깃발은 하늘 덮고 만 리나 이어졌으니

 요란한 군마 소리 산악 흔드는 듯

 어영청 대장은 선봉을 인도하여

 적진 중에 돌격하니 모진 바람 큰비 내려 벼락이 쏟아지는 듯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 따위의 더벅머리도 손아귀에 있건마는

 하늘에서 비가 말썽을 부려 장병들이 피곤하거늘

 잠깐 동안 풀어 주어 사기를 북돋우고

 적의 무리 도망하여 흩어지니 못다 잡고 말겠는가.

 적굴(敵窟)을 굽어보니 튼튼한 듯하다마는

 패전하여 잿더미가 되니 요새지도 소용없네.

 명나라 상제와 우리 임금의 덕화(德化)가 원근에 미쳤으니

 하늘이 교활한 도적을 죽여 인과 의를 돕는도다.

 외환이 없는 태평성대야말로 지금인가 여기노라.

 못생긴 우리들도 신하가 되어 있었다가

 임금 은혜 못 갚을까 감히 죽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

 칠 년간을 쏘대다가 태평한 오늘을 보았도다.

 전쟁을 끝마치고 세류영에 돌아들 때

 태평소 드높은 음악 소리에 북과 나팔이 어우러지니

 수궁 깊은 곳의 고기떼들도 다 웃는 듯

 군기는 휘날려서 바람에 나부끼니

 오색 구름 찬란하게 반공에 떨어진 듯

 태평한 이 모양이 더욱더 반갑구나.

 활과 화살을 높이 들고 개선가를 아뢰오니

 외치는 환성(歡聲) 소리가 공중에 어리도다.

 예리한 긴 칼을 흥에 넘쳐 둘러메고

 휘파람 불면서 춤을 추며 일어서니

 보배로운 칼 빛이 두우(斗牛) 간에 쏘이도다.

 손이 춤추고 발이 뛰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저절로 즐기니

 칠덕가, 칠덕무를 그칠 줄 모르도다.

 인간에 즐거움이 이 같음이 또 있는가.

 화산이 어디메냐 이 말을 보내고 싶다.

 천산이 어디메냐 이 활을 쏘아 보고 싶다.

 이제는 해야 할 일이 충효한 일뿐이로다.

 감영(監營) 안에 일이 없어 긴 잠 들어 누웠으니

 묻노라 이 날이 어느 땐가

 옛날 중국의 복희씨 때 태평 시절을 다시 본 듯 여겨진다.

 궂은비도 멎어지고 밝은 해가 더욱 밝다.

 햇빛이 밝으니 만방이 훤하도다.

 곳곳의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늙은이가

 봄날의 제비같이 옛집을 찾아오니

 그립던 고향인데 누가 아니 반겨하겠는가?

 여기저기로 옮겨 거처하니 즐거움이 어떠한고.

 겨우 살아 남은 백성들아, 임금님의 은혜인 줄 알아라.

 거룩한 임금님의 은혜 아래 오륜(五倫)을 밝혀 보세.

 백성을 가르치면 절로 일어나서 나가지 않겠는가.

 천운이 순환함을 알겠도다, 하느님이시여.

 이 나라를 도우시어 만세무강 누리게 하소서.

 요순 같은 태평시에 삼대일월 비추소서.

 천만 년 동안에 전쟁을 없애소서.

 밭 갈고 우물 파서 격양가를 부르게 하소서.

 우리도 임금님 모시고 함께 태평 즐기리라.


 작품 해설

 이 작품은 1598년(선조 31) 노계 박인로가 지은 가사로 당시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와중에서 좌병사(左兵使) 성윤문(成允文)을 보좌할 때 병졸들을 위로하고자 지은 노래이다. 찬란한 고래의 우리 문화를 예찬하고, 왜군의 침입과 병사들의 활약․승전(勝戰)․개선(凱旋)을 읊은 다음, 다시 찾아온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구가한 내용 <노계집(蘆溪集)>의 제 3권에 실려서 전한다.

 이 작품의 이념적 기반은 우국지성에 넘치는 충효 사상이며 평화와 태평성대의 지속을 염원하는 충정이 깔려 있으며, 표현 기교가 다소 능숙하지 못하며, 한문투의 말과 고사성어가 상당히 많은 것이 흠이긴 하지만, 그 문체가 강건․웅렬․화려하고 무인다운 기상이 넘쳐흐르는 작품이다.

 또 전체의 구성이 웅장한 가운데 섬세한 용의(用意)가 숨어 있고, 조어(造語)가 치밀하고 구사된 어휘가 풍부하여, 작자의 초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가 문학사상 3대 시가인으로 꼽힐 만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다시 말해서 노계는 문장의 수사면에서 송강 정철에게 떨어질지는 모르나 치밀한 묘사나 풍부한 어휘 구사는 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내용을 3단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서사는 고대 우리의 순박한 풍속과 조선의 예의 숭상과 번화했던 문물 제도가 한(漢), 당(唐), 송(宋)과 같이 되었다면서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이 드러나 있다. 본사는 우리 나라가 불시에 왜적의 침략을 당하여 혼란에 빠지고, 많은 백성이 죽고, 임금이 피난 가기에 이르자 명나라의 도움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남방이 편안하게 되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정유재란(선조 30년. 1597년)이 일어나고 하늘의 도우심으로 전쟁이 끝나고 개선가(凱旋歌)를 부르면서 외환이 없는 태평성대(太平聖代)가 도래(到來)하였음을 노래하고 있다. 결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선비로 성현(聖賢)의 도리를 따르고 백성들에게 충효를 가르치고 임금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하늘의 섭리를 알게 하여 천만 년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리고자 염원했다.

 

 

 

노계가(盧溪歌)

 

백수에 방수심산 태만한 줄 알건마는

평생 소지를 베풀고야 말랴 여겨

적서 삼춘에 춘복을 새로 입고.

죽장 망혜로 노계 깊은 골에 행여 마침 찾아오니,

제일 강산이 임자 없이 버려 있다.

고왕 금래에 유인 처사들이 많이도 있건마는

천간 지비하여 나를 주려 남겼도다.

주저 야구타가 석양이 거읜 적에

척피 고강하여 사우로 돌아보니.

현무 주작과 좌우 용호도 그린 듯이 갖췄구나.

산맥 맺힌 아래 장풍 향양한데.

청라를 헤쳐 들어 수연 와실을

배산 임류하여 오류변에 지어 두고,

단애 천척이 가던 용이 머무는 듯

강두에 둘렸거늘 초초정 한 두 간을

구름 띈 긴 솔 아래 바위 기대 지워내니,

천태만상이 아마도 기이쿠나.

봉만은 수혀하여 부춘산이 되어 있고,

유수는 반회하여 칠리탄이 되었으며,

십리 명사는 삼월 눈이 되었도다.

이 호산 형승은 견줄 데 전혀 없네.

소허도 아닌 몸이 어느 절의 알리마는

우연 시래에 이 명구 임자 되어

청산 유수와 명월 청풍도 말 없이 절로절로

저익 같던 묵은 반과 엄자흥의 조개도 값 없이 절로절로

산중 백물이 다 절로 기물되니,

자릉이 둘이요, 저익이 셋이로다.

아아! 이 몸이 아마도 괴이쿠나.

입산 당년에 은군자 되었는가?

천고 방명을 이 한몸에 전하는군.

인간의 이 이름이 인력으로 이룰소냐?

산천이 영이하여 도와냈나 여기노라.

중심이 형연하여 세려 절로 그쳐지니,

광풍 제월이 강자리에 품었는 듯

호연 진취 날로 새로워지노라.

비금 주수는 육축이 되었거늘

달 아래 고기 낚고, 구름 속에 밭을 갈아

먹고 못 남아도 그칠 적은 없도다.

무진한 강산과 허다한 한전은 분급자손 하려니와

명월 청풍은 나눠주기 어려우매

재여 부재예 양지하는 아들 하나

태백연명 증필에 영영별급 하였노라.

나의 이 말이 우활한 듯하건마는

위자 손계는 다만인가 여기노라.

또 어리석은 이 몸은 인자도 아니요, 지자도 아니로되,

산수에 벽이 일어 늙을수록 더욱 하니,

저 귀한 삼공과 이 강산을 바꿀소냐?

어리석고 미친 이 말을 웃을 이도 많건마는

아무리 웃어도 나는 좋게 여기노라.

하물며 명시에 버린 몸이 할 일이 아주 없어

세간 명리란 뜬구름 본 듯하고,

무사 무려하여 물외심만 품고 있어

이내 생애를 산숙산에 붙여두고

춘일이 긴 때에 낚싯대 비껴 쥐고,

갈건 포의로 조대에 건너오니,

산우는 잠깐 개고, 태양이 쪼이는데,

맑은 바람 더디 오니, 경면이 더욱 밝다.

검은 돌이 다 보이니, 고기 수를 알겠도다.

고기도 낯이 익어 놀랠 줄 모르거든 차마 어찌 낚을건가?

파조 배회하며, 파심을 굽어보니,

운영 천광은 어리어 잠겼는데,

어약우연을 구름 위에 보았구나.

크게 문득 경괴하여 부찰 양관하니, 상하천이 완연하다.

일진 동풍에 그 어떤 어적이 높이 불어 보내는가?

강천이 요적한데 반갑게도 들리도다.

임풍 의장하여 좌우로 돌아보니,

대중 청경이 아마도 소쇄쿠나.

물도 하늘 같고, 하늘도 물 같으니,

벽수 장천은 한 빝이 되었는데,

물가에 백구는 오는 듯 가는 듯 그칠 줄을 모르도다.

암반 산화는 금수병이 되어 있고,

간변 수양은 초록 장이 되었는데,

양신 가경은 내 혼자 거느리고,

정치 화시를 허도치 말라 여겨 아이 불러 하는 말씀,

이 심산 궁곡에 해착이야 보겠는가?

살진 고사리 춘기한 당귀초를

저포녹포 상간하여 크나큰 세류사에

흡족히 담아 두고 붕어회 초미에

눌어 생치 섞어 구워 갖가지 들이거든

와준에 백주를 박잔에 가득 부어

한 잔 또 한 잔 취토록 먹은 후에

도화는 홍우되어 취면에 뿌리는데

태기 넓은 돌에 높이 베고 누웠으니

무회씨 적 사람인가? 갈천씨 때 백성인가?

희황 성시를 다시 본가 여기노라.

이 힘이 뉘 힘인가? 성은이 아니신가?

강호에 물렀은들 우군 일념이야 어느 각에 잊겠는가?

시시로 머리 들어 북신을 바라보고

남 모르는 눈물을 천일방에 지우누나.

일생에 품은 뜻을 비옵니다. 하느님이여!

산평 해갈토록 우리 성주 만세소서.

희호 세계에 삼대 일월 비치소서.

오천 만년에 병혁을 쉬게 하소서

경전 착정에 격약가를 불리소서.

이 몸은 이 강산풍월에 늙을 줄을 모르리라.


[시어 풀이]


* 방수심산 : 물을 찾고 산을 찾아감.

* 태만 : 너무 늦음.

* 벱고야 : 베풀고야. 이루고야.

* 적서 삼촌 : 병자년 음력 3월 봄.

* 유인 처사 : 그윽한 곳에 머물러 사는 은일지사.

* 천간 지비 : 하늘이 숨겨 놓고, 땅이 감추어 둠.

* 주저 양구 : 나아가지 아니하고 머뭇거리기를 꽤 오래함,

* 척피 거강 : 저쪽 높은 언덕에 오름

* 현무 주작 : 현무는 북방을 지키는 상징 신이고, 주작은 남쪽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모두 새들로 형용 됨.

   여기서는 산줄기의 형세를 가리킴.

* 좌우 용호 : 동방신인 청룡과 서방신인 백호. 여기서는 산세의 형상을 가리킴.

* 장풍향양 : 바람이 가려지고 양지 바른 쪽을 향함.

* 청라 : 푸른 덩굴.

* 수연 와실 : 두어 서까래를 이은 달팽이 껍질만한 개구리 집. 곧 규모가 아주 작은 집.

* 배산임수 : 집 뒤로는 산을 지고 앞으로는 흐르는 냇물을 임함.

* 오류변 :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 가장자리. 중국 진나라 은사 도연명의 오류선생이라는 호를 모방한 것임.

* 봉만 : 산봉우리들.

* 부춘산 : 후한광무제 때 은사 엄광이 낚시하며 숨어 살던 곳. 부춘저라고도 함.

* 반회 : 서리어 빙빙 돎.

* 칠리탄 : 부춘산에 흐르는 긴 여울, 부춘저와 같은 곳.

* 소허 : 요임금 때 은사 소부와 허유.

* 미록 : 고라니와 사슴.

* 저익 : 춘추시대 은사인 장저와 겉닉.

* 엄자릉 : 후한 광무제 때 은사로 이름은 광.

* 형연 : 아름다운 모양.

* 세려 : 세상사에 관한 근심.

* 광풍제월 : 비 온 뒤에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 여기서는 마음에 근심과 집착이 없고 명랑 상쾌함.

* 강자리 : 마음 속.

* 호연 진취 : 마음이 넓고 뜻이 큰 모양과 참된 취의.

* 비금주수 : 날아다니는 새들과 기어 달리는 짐승들.

* 재여 부재 :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 양지 : 부모의 뜻을 받들어 섬김.

* 태백 연명 : 이태백과 도연명.

* 영영 별급 : 길이길이 재산 따위를 따로 떼어 나누어 줌.

* 위자손계 : 자손을 위한 계획.

* 삼공 : 조정에서 제일 높은 세 벼슬. 조선 때에는 삼정승.

* 차조 배회 : 낚시질을 마치고 목적 없이 이리저리 거닐음.

* 어약우연 : 물고기들이 못에서 뛰어 놀음.

* 부찰 양관 : 굽어 살피고, 우러러 쳐다 봄.

* 어적 : 고기잡이배의 고동소리.

* 요적 : 고요하고 쓸쓸함.

* 임풍 의장 : 바람이 불어서 지팡이에 의지함.

* 암반 산화 : 바위 가장자리에 핀 산꽃.

* 금수병 : 수를 놓은 비단 병풍.

* 간변수양 : 물가에 서 있는 늘어진 버들.

* 정치 화시 : 바로 꽃이 한참 필 때.

* 허도 : 헛되이 보냄.

* 해착 : 바다에서 나는 먹을 수 있는 것들.

* 당귀초 : 승검초. 한의에서 보혈제로 씀.

* 저포 녹포 상간 : 돼지고기 말린 포와 사슴고기를 말린 포의 사이사이에 섞음.

* 눌어 생치 : 누치라는 물고기와 익히지 않은 날 꿩.

* 와준 : 질그릇으로 된 술항아리.

* 백주 : 중국의 배갈이 아닌 우리나라 막걸리.

* 박잔 : 가가지로 된 술잔.

* 태기 : 이끼가 낀 물속의 자갈돌들. 여기서는 이끼 낀 낚시터의 넓은 바윗돌.

* 무회씨 : 중국 상고시대의 제왕으로 태평성대의 상징적 치자.

* 희황 성시 : 복희씨가 다스리던 태평한 시절.

* 신평 해갈 :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닷물이 말라 없어짐.

* 회호 : 백성들이 화락한 모습.

* 삼대 일월 : 중국의 하, 은, 주 세 나라 시대의 해와 달.

* 경적 착정 : 밭을 갈고 우물을 팜.

* 격양가 : 괭이로 땅을 두드리며 세월이 태평함을 노래한 중국 고대 민요.

 

[작품해제]


박인로가 남긴 7편의 가사 가운데 최후의 작품으로 '노계집'에 수록되어 있다. 형식은 4음 4보격 무한 연속체라는 가사의 율격을 대체로 지켰으나, 2음보를 추가하여 6음보로 늘어난 행 이 상당수 보인다.

서술양식은 1인칭 독백체로 작자의 주관적 감회와 체험을 노래하는 서정적 양식을 취하였으나 끝 대목 에 이르러 "일생에 품은 뜻을 비옵니다 하나님아"로  진술함으로써 하나님을 청자로 설정하여 작자가 청자에게 자신의 강렬한 염원을 제시하는 주제적 양식을 취하였다.

즉, 작자의 감흥과 체험만을 노래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작자가 염원하는 바의 이상 세계를 제시하였는데, 그의 이상세계란 "오천만년에 병혁을 쉬우소셔, 경전착정에 격양가를 불리소셔"라고 하여 밭 갈고 우물 파서 생활의 기본적인 것을 해결하면 더 바랄 것이 없으니 평화와 만족을 구가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세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작품은 작자의 은거지인 노계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곳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자연에 몰입하는 주관적인 심회를 읊은 것이 중심 내용을 이루지만,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한 작자의 평화에 대한 염원이 아울러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작품의 서두는 늙은 몸이 되어 평생소원이던 산수를 찾아드는 감회로 시작 된다.

이어서 노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고 그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삶의 흥취와 의미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는 강호 자연에 묻혀 태평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것은 우국일념을 잊지 않는 충정을 말하였다. 

이어서 결론으로 작자의 소망을 하늘에 기원하고 강호 생활과 더불어 늙을 줄을 모르는 자신의 현재적 삶을 노래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이로 보아 이 작품의 사상적 기반은 산수 명승을 즐기는 자연애사상과 우국지성에 넘치는 충효사상이 중심을 이루었다 하겠다.

전체의 구상이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섬세한 필치가 숨어 있으며,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여 사대부의 가사문학을 완성한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미에 대한 예찬이나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하고 평화를 희구하는 사상을 담아 참신한 주제라고는 볼 수 없다.

출전은《노계집》제3권이며《독락당(獨樂堂)》다음 가는 장편으로 그가 남긴 7편의 가사 가운데 최후의 작품이다.

 

 

 

 

독락당(獨樂堂) 


 

자욱한 명승지에 독락당이 소쇄함을 들은 지 오래로되

이 몸이 무부로서 해변사가 공극거늘

일편단심 분의를 못내하여

금창철마로 여가없이 분주타가

중심 경앙이 백수에 더욱 깊어                

죽장망혜로 오늘사 찾아오니

봉만은 수려하여 무이산이 되어있고

유수는 반회하여 후이천이 되었나다

이러한 명구에 임자 어이 없돗던고

일쳔년 신라와 오백재 고려에

현인군자들이 많이도 지냈마는

천간지비하여 야선생께 기치도다

물각유주이여든 다툴 이 있을소냐


청라를 헤혀 들어 독락당을 열어 내니

유한 경치는 견할 데 뇌야 없네

천간 수죽은 벽계 좇아 둘러 있고

만권 서책은 사벽에 쌓였으니

안증이 재좌하고 유하는 재우할 듯

상우천고하며 음영을 일을 삼아

한중정리에 잠사자득 하여 혼자 즐겨 하시었다

독락 이 이름 칭정한 줄 긔 뉘 알리

사마온공 독락원이 아무려 좋다 한들

그간 진락이야 이 독락에 더로손가


심진을 못내 하여 양진암에 놀아 들어

임풍정간하니 내 뜻도 형연하다

퇴계선생 수필이 진득인줄 알리로다

관어대 나려 오니 깔온 듯한 반석에 장구혼이 보이는 듯

수재장송은 옛 빛을 띠었으니

의연이 물색이 긔 더욱 반가울사

신청기상하여 지란실에 든 듯하다


다소 고적을 보며 문득 생각하니

층간절벽은 운모병이 절로 되어

용면 묘수로 그린 듯이 벌여 있고

백척 장담에 천광 운영이 어리어 잠겼으니

광풍제월이 부는 듯 바새는 듯

연비어약을 말 없은 벗을 삼아

침잔완색하여 성현 사업 하시덧다

청계를 비끼 건너 조기도 완연할사

묻노라 백구들아 옛일을 아니산다

엄자릉이 어느 해에 한실로 가단 말고

태심기상에 모연만 잠겼어라


춘복을 새로 입고 영귀대에 올라 오니

여경은 고금 없어 청홍만 절로 하니

풍호영이귀를 오늘 다시 본 듯하다

대하 연당에 세우 잠간 지나가니

벽옥 같은 넓은 잎에 흩채나니 명주로다

이러한 청경을 보암 즉도 하다마는

염계 가신 후에 몇몇해를 지낸 게오

의구청향이 다만 혼자 남았고야

자연이 비낀 아래 폭포를 멀리 보니

단애 높은 끝에 긴 내히 걸렸는듯

향로봉 긔 어디오 여산이 예로던가

징심대 구어보니 비린턴 흉금이 새로온 닷하다마는

적막공대에 외로이 앉았으니

풍청경면에 산영만 잠겨 있고

녹수음중에 왼갓 새 슬피 운다

배회사억하며 진적을 다 찾으니

탁영대 연천은 고금 없이 맑다마는

말로흥진에 사람마다 분경커든

이리 조한 청담에 탁영한 줄 긔 뉘 알리
사자암 높이 올라 도덕산을 바라보니

옥온함휘는 어제론 듯 하다마는

봉거산공하니 두견만 나죄 운다

도화동 나린 물이 불사주야하여 낙화조차 흘러오니

천태인가 무릉인가 이 땅이 어딘게오

선종이 아득하니 아무덴 줄 몰라로다

인자도 아닌 몸이 무슨 이들 알리마는

요산망귀하여 기암을 다시 비겨

천원 원근에 경치를 살펴보니

만자천홍은 비단 빛이 되어 있고

중훼군방은 곡풍에 날려 오고

산사 종성은 구름 밖에 들리나다

이러한 형승을 범회문의 문필인들 다 써내기 쉬울런가

만안풍경이 객흥을 도우는 듯

임의 소요하여 짐즉 더디 돌아오니

거목서잠에 석양이 거의로다


독락당 고쳐 올라 좌우들 살펴보니

선생 풍채들 친히 만나 뵈옵는 듯

갱장에 엄연하여 부앙 탄식하며

당시 하시던 일 다시금 사상하니

명창정궤에 세려를 잊으시고

성현서에 착의하여 공효들 일워내어

계황개래하여 오도를 밝히시니

오동방 악지군자는 다만 인가 여기로다

하물려 효제를 본을 삼고 충성을 벱허내어

성조에 나아 들러 직설의 몸이 되어

당우성시를 이룰까 바라더가

시운이 불행하여 충현을 원척하니

듯는 이 보는 이 심산궁곡엔들 뉘 아니 비감하리

칠년 장사에 불견천일하고

폐문심성하사 도덕만 닦으시니

사불승정이라 공론도 절로 일어

존숭도덕을 사람마다 할 줄 알아

강계는 적소로대 교화를 못내 잊어

궁항절역에 사우조차 세워시니

사림추앙이야 더욱 일러 무삼하리

자옥 천석 위에 서원을 지어 두고

제제청금이 현송성을 이었으니

염락군현이 이 따에 뫼왔는 듯


구인당 돌아 올라 체인묘도 엄숙할사

천추혈식이 우연 아닌 일이로다

추숭존경을 할수록 못내 하여

문묘종향이 긔 더욱 성사로다

오동방 문헌이 한당송에 비기로세

자양 운곡도 어즈버 여기로다

세심대 나린 물에 덕택이 이어 흘러

용추 깊은 곳에 신물조차 잠겼으니

천공조화가 긔 더욱 기이코야


무변진경을 다 찾기 어려울 새

낙이망반하여 순월을 엄류하며

고루한 이 몸에 성경을 널리하여

선생 문집을 자세히 살펴보니

천언만어 다 성현의 말씀이라

도맥공정이 일월같이 밝았으니

어두운 밤길에 명촉 잡고 옌 듯하다


진실로 이 유훈을 강자리에 가득 담아

성의정심하여 수성을 넓게 하면

언충행독하여 사람마다 어질로다

선생 유화 지극함이 어떠하뇨

차재 후생들아 추앙을 더욱 높여

만세 천추에 산두 같이 바래사라

천고지후도 유시진 하려니와

독락당 청풍은 가없을까 하노라.



[시어 풀이]


* 자옥산 : 현재 경주 시내에 있는 산 이름

* 독락당 : 회재 이언적이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집채 이름

* 소쇄 : 맑고 깨끗하여 속된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함

* 공극 : 대단히 급박함

* 분의 : 충의를 떨침

* 금창 철마 : 금으로 만든 창과 무쇠로 만든 말. 곧 좋은 무기

* 중심 경앙 : 마음속으로 사모함

* 죽장 망혜 :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

* 무이산 :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살던 고장의 산 이름

* 반회 : 휘감아 돎

* 후이천 : 중국 송나라 유학자 정이가 이천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호를 이천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는 회재가 우리나라의 큰 학자이므로 회재 이언적이 살던 이곳의 시내를 후이천아라 한 것임.

* 없돗던고 : 없었는가

* 천간지비 :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김

* 물각유주 : 사물은 저마다 주인이 있음

* 청라 : 푸른 댕댕이 덩굴

* 천간수죽 : 몹시 무성하게 우거진 긴 대나무 숲

* 안증 : 공자의 제자인 안회와 증삼

* 유하 : 공자의 제자인 자유와 자하

* 상우천고 : 천 년 전의 옛 벗을 숭상함. 곧 유학경전들

* 한중정리 : 한가하고 고요한 가운데

* 잠사자득 :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깨달아 이해함

* 사마온공 : 북송의 명재상이었던 사마광

* 심진 : 진리를 찾음. 여기서는 신선세계를 찾음

* 양진암 : 회재가 후학들을 가르치던 집채 이름

* 임풍정간 : 경치를 고요히 바라봄

* 형연 : 맑고 아름다운 모양

* 관어대 : ‘물고기를 구경할 수 있는 높은 언덕’이라는 뜻의 언덕 이름

* 장수혼 : 지팡이와 신발자국

* 수재장송 : 손수 심은 큰 소나무

* 의연몰색 : 옛날과 다름이 없는 경직

* 신청기상 : 정신이 맑고 속이 시원함

* 지란실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가 길러지는 땅. 곧 선량한 사람들이 거처하는 땅

* 다소고적 : 수많은 옛 자취

* 운모병 : 운모석으로 뒨 바위 병풍. 곧 운모 바위 벼랑.

* 용면묘수 : 송 나라 명화가인 용면거사 이공린의 뛰어난 그림 솜씨.

* 백척장담 : 매우 깊고 맑은 물이 가득한 못.

* 천광운영 : 맑게 갠 하늘: 비 온 뒤에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 곧 마음에 근심이 없고 쾌활함

* 연비어약 :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놂

* 침잠완색 :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여 얻고자 하는 것을 찾음. 곧 정성을 다해 열심히 책을 읽음.

* 성현사업 : 성인과 현인이 하는 일. 곧 도덕과 삶을 실천하며 학문하는 일.

* 조기 : 낚시터.

* 엄자룡 : 중국 후한 때 은사였던 엄광. 자롱은 그의 자(字).

* 태심기상 : 이끼가 많이 자란 깊은 물가 모래톱 위.

* 모연 : 해 질 무렵의 저녁연기.

* 영귀대 : 시문을 외며 즐기는 언덕.

* 풍호영이귀 :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옴.

* 대하 연당 : 높은 언덕 아래 있는 연못.

* 염계 : 중국 송나라 유학자인 주돈이의 호

* 의구 청향 : 옛날과 다름없는 맑은 향내.

* 저연 : 자줏빛 연기. 곧 햇빛에 비치어 볼그레한 안개.

* 여산 : 중국 장시 성 구강부에 있는 명산.

* 징심대 : 마음을 맑게 하는 높은 언덕.

* 비린턴 흉금 : 더럽고 인색하던 가슴 속.

* 적막 공대 : 조용한 빈 언덕

* 풍청경면 : 바람이 없어 맑은 물이 거울 낯과 같이 잔잔함.

* 배화 사익 : 어슬렁거리며 생각함.

* 탁영대 : 갓끈을 씻는 물가 언덕.

* 말로홍진 : 말세의 티끌 새상.

* 분경 : 어지럽게 싸움.

* 옥은함휘 : 구슬이 싸였으나 밝은 빛을 머금고 있음. 여기서는 회재 선생의 학덕.

* 봉거산공 : 봉황새가 날아가 버려 산이 비어있음. 여기서는 회재는 죽고 없으나 그가 살던 곳은 그대로 

  있음을 뜻함.

* 천태 : 중국 절강성의 산 이름.

* 무릉 : 중국 후난 성에 있는 선경(仙境).

* 선종 : 신선들이 놀던 자취.

* 요산망귀 : 산을 좋아하여 돌아갈 줄을 모름.

* 천원 원근 : 시내와 들판의 멀고 가까운 곳.

* 만자천홍 : 천자만홍. 갖가지 빛깔의 아름다운 꽃들.

* 중훼군방 : 수없이 많은 꽃들의 향기.

* 범희문 : 송나라 문필가인 범중엄의 자(字).

* 만안풍경 : 눈에 가득 차는 아름다운 경치.

* 거목서잠 : 눈을 들어 서쪽 산 고개를 바라봄.

* 갱장 : 자나 깨나 눈에 선함.

* 부앙탄식 : 높은 곳을 우러러 보기도 하고 늦은 곳을 굽어보기도 하면서 탄식함.

* 명창정궤 : 밝은 창과 고요한 책상.

* 세려 : 세상일에 관한 근심.

* 공효 : 공을 들인 보람.

* 계왕개래 : 지나간 전통을 잇기도 하고 앞으로 올 일을 개척해 나가기도 함.

* 오도 : 우리들의 도. 여기서는 유학(儒學).

* 오동방 낙지군자 : 우리나라의 훌륭한 지성인들.

* 상조 : 성군이 다스리는 조정.

* 직설 : 순 임금 때 명신 두 사람. ‘직’은 주나라 왕실의 선조이며, ‘설’은 은나라 왕실의 조상.

* 당우성시 : 요순의 태평시대.

* 원척 : 멀리 내쫓음.

* 칠년 장사 : 중국 한 나라 충신 가의가 곧은 말을 했다가 장사 땅에 귀양 가 7년을 살았다는 고사.

  여기서는 회재가 을사사화에 연좌되어 강계로 귀양 가 7년을 살았던 일을 가리킴.

* 불견천일 : 하늘의 밝은 태양을 보지 아니함.

* 폐문심성 : 문을 닫고 들어앉아 깊이 반성함.

* 사불승정 : 바르지 않은 것이 바른 것을 이기지 못함.

* 존승도덕 : 도덕을 높이 받들어 숭배함.

* 강계 : 평안북도에 있는 지명.

* 적소 : 귀양살이하는 곳.

* 유화 : 끼쳐놓은 교화.

* 궁항절역 : 궁벽한 시골 외딴 고장.

* 사우 : 사당 집채. 여기서는 경현 서원.

* 사림 추앙 : 선비들이 나아가서 높이 받들어 우러름

* 자옥천석 : 자옥산의 자연 경치.

* 제제 청금 : 재주가 많은 선비들.

* 현송정 : 거문고 타는 소뢰와 글 읽는 소리.

* 염락군현 :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살며 제자들을 가르친 염계와 정자 형제가 살며 후학들을 

  갈러낸 낙양에서 공부하던 여러 어진 선비들.

* 구인당 : 옥산서원에 있는 집채 이름.

* 체인묘 : 옥산서원에 있는 사당 집채 이름.

* 천추 혈식 : 영원히 끊이지 않고 지내는 춘추제향.

* 추승 존경 : 세월이 흐를수록 우러러 높이고 모심.

* 문묘 종향 : 서울의 성균관 안에 있는 문선왕 공자의 신위를 모신 문묘에 배향함.

* 문헌 : 문화.

* 자양 운곡 :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머물며 공부하던 곳.

* 용추 : 폭포 물이 떨어지는 바로 밑의 깊은 웅덩이. 용이 잠겨있는 듯한 깊은 못.

* 신물 : 신령스러운 물건. 곧 용.

* 천공조화 : 자연의 오묘한 능력.

* 무변 진경 : 끝없이 훌륭한 경치.

* 낙이망반 : 즐기느라 돌아가기를 잊음.

* 순월 : 열흘이나 또는 한 달.

* 엄유 : 오래 머뭄

* 고루 : 견문이 좁고 고집이 셈.

* 도맥 공정 : 유도의 연맥과 공부의 과정

* 언충 행독 : 말은 진실 되게 하고 행실은 도탑게 함.

* 차재 : 아아 !

* 산두 : 태산북두(泰山北斗).

* 바래사라 : 바라뵈노라.

* 천고지후 : 하늘은 높고 땅은 두터움.

* 유시진 : 다할 때가 있음.


[작품 해제]


이 작품은 노계 박인로(1561∼1642)가 만년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살던 경주 옥산의 독락당을 찾아갔을 때인 광해 11년(1619)에 지은 모현 가사이다.

내용은 늙은 몸으로 독락당에 찾아가서 회재 선생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곳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경치를 중국의 사적들과 견주어 가며 노래하고, 회재선생의 유훈을 길이 받들 것을 권면하고 있다.

분량은 2율각 1구로 헤아려 모두 255구인데, 그 자수를 형식은 3·4조가 주조이고 4·4조가 부주조이며, 결사 장은 단형시조의 종장체가 파괴된 형태로 '노계집'권3에 실려 있다.

3음보 혹은 4음보를 1행으로 하여 총 123행으로, 박인로가 지은 가사 가운데 최장편이다.

주제는 작자가 이언적의 유적인 경주 옥산서원의 독락당을 찾아가 이언적을 사모하는 심회와 주변경치를 읊은 것이다.

 

이 작품은 내용상 크게 9단락으로 구분된다.

첫째 단락에서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무부(武夫)로서 여가 없이 분주하다가, 늙어서 비로소 들른 지가 오랜 독락당을 찾으니 산봉우리는 빼어나 주자(朱子)가 살던 무이산과 같고, 흐르는 물은 감돌아 정이가 살던 이천(伊川)과 같다고 하였다.

둘째 단락에서는 신라 천년, 고려 오백년 사이에도 성현군자는 많았는데, 이러한 명승지를 하늘이 감추어서 이언적에게 준 것은 물각유주(物各有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셋째 단락에서는 독락당의 유한한 경치와, 한가하고 고요한 가운데 잠겨 생각하고 깨닫던 이언적의 모습을 안증(顔曾)과 유하(游夏)를 좌우에 거느린 공자에 비유하였다.

넷째 단락에서는 이황의 친필이 담긴 양진암과 관어대 반석위에 남은 이언적의 지팡이와 신발자국, 손수 심은 큰 소나무를 대하니 마치 지란실(芝蘭室)에 들어간 듯 하다고 읊었다.

다섯째 단락에서는 병풍 같은 층암절벽, 하늘과 구름이 비친 백척징담(百尺澄潭), 저녁 안개에 잠긴 청계조기(淸溪釣磯)의 묘사를 통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던 이언적의 자취를 더듬었다. 

여섯째 단락에서는 영귀대의 아름다운 경치에 풍영이귀(風詠而歸)한 증석의 옛 일을 생각하고, 자연(紫烟) 비낀 폭포를 보며 여산에 비기고, 징심대 맑은 물에 가슴속이 새로워짐을 느꼈다. 탁영대를 보고는 속세에서 부귀공명을 어지럽게 다투는 속인들을 생각하고 개탄하고 있다.

일곱째 단락에서는 사자암에 올라 도덕산을 바라보며, 이언적의 덕망이 구슬이 쌓여 빛을 머금고 있는 듯 하다고 추앙하고, 이백의 시를 빌려 이언적을 봉(鳳)에 비겨 봉새 날아간 빈산에 두견새만 저녁에 운다고 하여, 그가 가고 없는 쓸쓸함을 노래하였다. 또한 선생의 자취를 천태산과 무릉도원에 비겨 신선으로 받들면서 해질 무렵까지 돌아갈 줄 모르는 간절한 사모의 정을 그렸다.

여덟째 단락에서는 독락당에 다시 올라 이언적의 풍채와 덕행을 다시금 추앙하고 독서소리가 이어졌던 서원의 번성함을 읊었다. 동방의 군자인 그가 직설(稷楔)과 같은 충성으로 당우의 성시를 이루려 하였는데 시운이 불행하여 을사사화에 강계로 귀양 가게 되었음을 슬퍼하고, 적소에서도 끼쳐놓은 감회가 깊어 선비들의 추앙을 받고 사당까지 세우게 되었음을 말하였다.

아홉째 단락에서는 구인당에 올라가 체인묘의 엄숙함을 보고 동방의 문물을 한.당.송에 비유하여 주자가 살던 자양운곡이 바로 여기라고 감탄하였다. 세심대 내린 물에는 덕택이 지금도 이어 흐르는 듯하고, 용추 깊은 곳에는 신물조차 잠겨 있는 듯, 그의 무궁한 덕화력은 기이한 하늘의 조화와 함께 어울린 듯하다는 느낌을 말하였다. 달포를 머물면서 그의 문집을 살펴보고, 그것이 모두 성현의 말이어서 일월같이 밝으므로 밤길에 촛불 잡고 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끝으로 이언적의 유훈을 가슴깊이 새겨 그를 오래도록 태산북두처럼 추양하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박인로의 가사에는 성현의 치세에 대한 동경이 나타나는 것과, 현실과 이상이 합치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작자의 고민이 함께 표출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선현을 사모하고 추양하는 마음을 밀도 있게 표현하였다.

 

 

 

 

노계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383

노계서원 (노계.박인로) :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68호

 

이 서원은 조선조 선조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선구자이며 효자로, 임진왜란 때는 수군으로 종군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해안 지방의 만호(萬戶)까지 역임한 노계(蘆溪) 박인로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드리는 곳이다.

이 서원에는 노계 선생의 문집을 인쇄한 목판각인 박노계집판목(朴蘆溪集板木, 유형문화재68호)이 보관되어 있다.

선생은 조선 명종 16년(1561년)에 영천군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나셨다. 나면서도 총명하여 배우지 않아도 글을 알고

남이 글을 읽는 것을 들으면, 모두 기억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 글재주는 임진왜란 때 태평사(太平詞)를 지어

사졸들을 위로한 것을 비롯하여, 선상탄(船上嘆),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독락당(獨樂堂), 영남가(嶺南歌),

노계가(蘆溪歌) 등 여러 가사에 잘 나타나있다.

 

더군다나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부모상에 다같이 3년 씩 여묘(廬墓)를 살았다. 선생의 효심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선생이 지으신 시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홍시가(早紅枾歌)와 부자유친가 (父子有親歌)를 읽으면 남의 자식된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나 부모님을 사모하고 효도할 것을 맹세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교훈의 시가가 아닐 수 없다.

 

선생은 벼슬을 지내고 나서 훗날 이곳에 은거하여 저술활동에 진력하였다. 뒷날에 노계선생의 학덕과 충효사상을

경모(敬慕)하여 사림(士林)이 도계서원을 세워 해마다 춘추로 향사를 받들어 오늘날에도 계속해오고 있다.

 

 

 

  도계서원 전경
 
이 곳 道溪書院(도계서원)은 조선조 선조시대 歌辭文學(가사문학)의 선구자이며 효자로,
임진왜란 때는 수군으로 종군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해안 지방의 萬戶(만호)까지
역임한 蘆溪(노계) 朴仁老(박인로, 1561∼1642)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드리는곳이다. 

 

 

 원모재(遠慕齋)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배우지 않아도 글을 알고 남이 글을 읽는 것을 들으면,
모두 기억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한다.
 
그 글재주는 임진왜란 때 太平詞(태평사)를 지어 사졸들을 위로한 것을 비롯하여,
船上嘆(선상탄), 莎堤曲(사제곡), 陋巷詞(누항사), 獨樂堂(독락당), 嶺南歌(영남가),
蘆溪歌(노계가) 등 여러 가사에 잘 나타나있다.
 
더군다나 천성이 至孝(지효)하여 부모상에 다같이 3년 씩 廬墓(여묘)를 살았다.
선생의 효심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선생이 지으신 시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早紅枾歌(조홍시가)와 父子有親歌(부자유친가)를 읽으면 남의 자식된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나 부모님을 사모하고 효도할 것을 맹세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교훈적인 시가이다.

 


▲ 蘆溪詩碑(노계시비) 앞면     © 박태선기자

선생은 벼슬을 지내고 나서 훗날 이곳에 은거하여 저술활동에 진력하였다.
뒷날에 노계선생의 학덕과 충효사상을 敬慕(경모)하여 士林(사림)이 도계서원을 세워
해마다 춘추로 향사를 받들어 오늘날에도 계속해오고 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淸德善정碑(청덕선정비)가 있다. 

 


  ▲ 蘆溪詩碑(노계시비) 뒷면     © 박태선기자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柚子(유자) 아니라도 품음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없을새 글로 설워 하노라
.
 
위의 반중시가는 노계선생 41세(선조34년,1601)에 지은 시조로 漢陰(한음) 李德馨(이덕형)을
찾았을 때 선생께 대접하기 위해 내놓은 홍시을 보자,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다하지 못한 효성이 생각나서 쓴 작품이다.

 


사당     © 박태선기자
 
'백수에 대지팡이와 짚신을 신고 노계 깊은 골로 찾아드니 
임자 없는 제일강산이 나에게 남겨졌다로...'
 
시작하는 위의 '蘆溪歌(노계가)'노계선생 76세때 지금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노계곡의 산수를

찾아 자연을 벗삼아 여생을 보내면서 쓴작품 으로 1980년 전국 국어국문학회 시가비건립

동호회에서 세운 시비가 사당앞에 세워져 있다. 

 

 
▲ 八德廟(팔덕묘)     © 박태선기자
 
노계 선생의 문집을 인쇄한 목판각인 朴蘆溪集板木(박노계집판목, 유형문화재68호)이
이 곳 노계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노계집은 한시문과 가사, 시조를 수록한 3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판목분량은 99매이다.

그가 시조를 즐겨 지었으나 국문학사에 있어서 그의 위치는 가사문학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 道溪書院(도계서원) 전경     © 박태선기자

 
노계 선생의 본관은 밀양, 조선 명종 16년 서기 1561년에 경북 영천군 북안면 도천리에서
승의부위 碩(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 德翁(덕옹). 호 蘆溪(노계), 無何翁(무하옹)이며, 도계서원 앞 솔숲에는 선생의 묘소도 있다.

 


▲ 道溪書院(도계서원)에서 바라본 안산     © 박태선기자
 
莎堤曲(사제곡), 陋巷詞(누항사), 조홍시가 등은 한음상공의 거처인
용진사제(남양주군 송촌리)에서 지었으며, 한음별세(1613년)후에 한음의 큰 아들
如圭(여규) 尙州牧使(상주목사), 셋째 아들 如璜(여황)이 善山府使(선산부사)를 지내면서
이웃 마을 永川(영천)에 계시는 아버지 친구 박인로를 가끔 초대해 접대했는데 이 때
큰 아들에게는 相思曲(상사곡)을, 셋째 아들에게는 勸酒歌(권주가)를 지어주었으니
노계 작품의 많은 부분이 한음 부자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如璜(여황)의 손자 允文(윤문)이 1690년 永川郡守(영천군수)로 부임하자
박인로의 손자 朴進善, 박진선)을 불러 노계시문집 중에서 한음 부자에게 지어준 부분만
따로 골라 판각하여 永陽歷贈(영양역증)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그 초간본이 2004년
경북 구미의 인동장씨 문중에서 발견되어 경북문화재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 道溪書院(도계서원) 전경     © 박태선기자
 
정철과 윤선도처럼 중앙 정계에 나아가 왕을 가까이 모신 적도 없으며, 士林(사림)에
속하지도 않았으며, 당대의 주류 문화에서 벗어난 군인으로 나라의 녹을 얼마간 먹었고,
가문과 학연으로 얽힌 조선 사회에서, 집안도 학맥도 훌륭한 스승을 받들지도, 똑똑한 제자를
두지도 못했으며, 스스로 문집을 엮지도 않았으니, 당대에 문장으로 명성을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무하옹이 국문학사에 우뚝 솟아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잊지 않은 후손과 지방 유림의
공덕이기도 하며, 또한 지역 유림이 주축이 되어 도계서원의 전신인 道溪祀(도계사)가 1707년에

세워졌으며, 그리고 오늘날 전해오는 3권 2책의 노계문집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1762~1840)의 손을 거쳐서 1832년에 편찬되었다. 

 


▲ 선생의 묘소 가는 돌계단     © 박태선기자

1800년 초에 출간되어 현재의 박인로 시가집 원본이 되었던
朴蘆溪集板刻本(박노계집판각본)보다 100 여년 전인 1690년에 만들어진 영양역증은,
지금까지 알려진 박인로 시가집의 내용과 차이가 많은데, 학자들의 연구 결과 영양역증에
기록된 내용이 오히려 박인로의 원작 가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 朴仁老(박인로)선생 묘소     © 박태선기자
 
세상 물정에 어두워 무엇을 할 줄 모르는 늙은이라는 뜻을 가진 무하옹 박인로 선생은
정철,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詩歌(시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많은 9편의 歌詞(가사)와 시조 67수, 한시 110수를 남기셨다.

하지만 선생은 평생 찢어진 삿갓을 쓰고 농사를 지으며 한 세상을 보냈다. 

 


▲ 墓碑(묘비)     © 박태선기자
 
특히 노계 선생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누항사'의 한 구절을 살펴보면

헌 갓을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에 설피설피 물러나오니,
풍채 작은 형용에 개가 짖을 뿐이로다'
 
라고 표현한 이 시조를 읽다 보면 가슴속에서 울컥 슬픔이 치민다.
농사 지을 소가 없어 소를 빌리러 이웃에 갔다가 소도 빌리지 못한 채 짚으로 만든
멍덕(벌통 위를 덮는 뚜껑)을 깊숙이 덮어쓰고 굽도 없는 짚신을 끌며 맥없이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골목길에서 개까지 자신을 보고 짖어대고 있으니,
그때 노계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 옆에서 본 선생의 묘     © 박태선기자
 
이미 무하옹의 호에서 잘 드러나지만, 실제로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찢어진 삿갓을 쓰고
낡은 말안장에 걸터앉아 집에 돌아와서 한가로운 생을 보냈다.
漢詩(한시) '安分吟(안분음)'에 그 시절이 그려져 있다.
 
내 몸에 걸친 옷이 어떤가 하니, 백 군데나 기워서 누더기 옷이로다.
비록 해어졌을 망정 무엇이 걱정이랴? 다만 오래도록 추구할 일을 바랄 뿐이네. …
한 그릇 밥 한 쪽박 물도 자주 떨어지는데, 그 즐거움은 변하지 않을 뿐이로다.
만약 여우나 노루에 견준다면, 태연히 부끄러움 없을 뿐이로다. 
  

 


▲ 묘뒤에서 안산을 바라보며     © 박태선기자
 
묘소에서 바라본 이곳 도천마을 앞들입니다. 
 
<사진: 저작권자ⓒ문화저널21 & www.mhj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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