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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작품

허균(許筠) / 1. 생애와 사적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12.22|조회수554 목록 댓글 0

 

 

                         허균의 묘(경기도 용인)

 

허균(許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정치가.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수(惺叟).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뛰어난 집안이어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篈), 그리고 누이인 난설헌(蘭雪軒)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삼척부사·공주목사 등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때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학산초담 鶴山樵談〉·〈성소부부고 惺所覆藁〉 등 일부만이 남아 전한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문인으로서 그는 소설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 등은 그가 지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서는 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남다른 삶의 모습과 사상을 기술했다.

 

허균은 선조 2년인 1569년 11월 3일에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은 아버지 초당 허엽의 둘째 부인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다. 그의 부친 초당 허엽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동인의 영수가 되었던 인물로, 그의 나이 12세인 선조 13년 1580년에 부친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1585년 그의 나이 17세 때인 선조 18년 초시에 급제하고,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을 한다. 21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를 한다. 24세 때인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을 피해 피난 중이던 부인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한다. 허균은 외가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다.

1593년 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최초의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었으며, 이듬해인 1594년에는 정시을과에 급제하고, 159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를 한다. 1604년 선조 37년에 성균관 전적이 되고, 수안군수가 되었다. 1606년에 누이 허초희의 시선을 모아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되게 된다.

1607년 선조 40년 삼척부사와 공주목사를 역임하고, 《국조시산》을 편찬한다. 이듬해 1608년 광해군이 재위에 오른다.

1611년 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64권을 였었고, 1612년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1614년 광해군 6년 호조참의 천추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이듬 해인 1615년에도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라 동지겸 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1616년 광해군 8년 정2품의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 해 1617년에는 정2품 좌참찬에 오른다.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을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그의 심복들과 함께 책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1] 허균은 진보적인 종교인이어서, 천시 받던 불교는 물론 천주교회까지 신봉하였다.[2]

 

<백과사전>

 

 

                            허균의 생가(강릉 초당동) 

 

 

허균의 삶(사실적 기록) 

       / 류 주 환

 

서론

허균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에게는 그만큼 복잡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는 명문 집안에서 자유분방한 천성과 높은 학문적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 확실히 그에게는 거리낌을 모르는 천재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그는 당시의 소외 받는 자들에게 동정을 보였다. 특히 그는 후실의 아들이라 서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자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당시에 배척받았던 불교를 받들었다. 기생들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왜 서자들에게 동정적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이라 인정되고 있는 "홍길동전"은 그의 서자들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내어 주고 있으며 그의 글(遣才論)에도 명확하게 나와있다. 그의 타고난 성격과 주변의 인물들, 특히 스승이었던 시인 이달(李達), 그리고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누나 허난설헌과 형 허봉, 그리고 처의 서(庶)외삼촌이었던 심우영 등등에게서 받은 영향을 생각할 수 있지만 하여간 기득권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만하다.
그는 반역자로서 사형을 당했고 조선왕조에서는 끝까지 복권이 되지 않았다. 그는 '천지 사이의 한 괴물'로 낙인 찍혔는데, 그가 반역자라는 관점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의 사관들의 묘사가 대표적이다. 실록은 당대 왕이 물러난 후에 일종의 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제작된 것이기에 거기에 반영된 사관들의 기록은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을 실각시킨 주역들의 기록이며 그것은 곧 조선왕조의 정통적 관점이었다. 허균은 반역에 대한 신문을 받을 때 주변의 사람들이 자복을 했지만 자신만은 끝까지 부인을 했다. 그리고 주변 정황을 근거로 사형이 결정되어 갑작스레 처형되고 말았다. 당시의 상황은 아주 급박했는데, 실권을 잡고 있던 이이첨과의 관계가 특히 주목된다. 그렇게 허균 '결안(結案, 사형을 결정한 문서)도 없이' 사형을 당하였기에 반역 혐의의 내용들의 진실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점들이 많다.
허균은 진정 역성혁명까지도 꿈꾼 혁명가였을까. 아니면 그저 권세를 잡으려는 야심가였을까. 그래서 이런 것들에 실패하여 영원한 시대의 이단아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었을까. 아니면 대자연의 풍운과 함께 초연히 살아가려 애썼지만 끝내 세속의 진애(塵埃)를 떨쳐 버리지 못한 비운의 천재였을까.
허균의 생애를 시기적으로 나누어보면, 여러 관점에서 분류가 가능하겠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선조조와 광해조가 구별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고, 허균의 삶에 있어서의 중요성에 비추어서 허균이 반역혐의를 받고 사형 당하기까지의 시기가 따로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성장기: 25세까지.
    2. 선조조 환로기(宦路期): 26세(2월 문과에 급제) - 39세.
    3. 광해조 환로기: 40세(광해군 즉위) - 48세.
    4. 피주기(被誅期): 49세 1월(흉격 사건) - 50세 (8월 24일 사형)
3번과 4번 항목, 특히 4번은 아주 자세히 다루었다. 비교적 간단하고 해설이 첨가된 글은 허균의 삶과 의의에 정리했다.


1. 성장기: 25세까지

허균은 1569년 (선조 2년) 11월 3일[여기 나오는 날짜는 모두 음력임]에 허엽(許曄)과 어머니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배다른 허성과 두 누나가 있었고, 어머니 김씨에서 난 형 허봉과 누나 허난설헌이 있었다. 문장이 뛰어난 명문집안이었다. 허엽은 동인의 영수가 된 사람이고 허균이 12세때 경상감사가 되어 갔다가 객사했다. 형 허성은 균보다 무려 21세 위로서 임진왜란 전 왜국의 정세를 살피러 간 통신사의 일행으로도 다녀왔으며(그는 당파를 넘어서서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선조가 죽을 때 적자였던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긴 유교칠신(遺敎七臣) 중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선조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이다. 허성은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의창군을 사위로 맞기도 했다(1603년, 허균 35세). 그는 광해군 4년(허균 44세)에 죽었는데, 항상 허균의 든든한 '백'으로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 둘째형 봉과 누나 난설헌은 성품과 문학적 재능에서 허균과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봉은 균보다 12살이 위였는데, 꼿꼿한 성품으로서 1583년(허균 15세)에 병조판서 이이(李珥)의 정책 잘못을 탄핵했다가 이이를 총애하던 선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된 후, 2년 후에 유배가 풀렸지만 서울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금지 당해서 유랑생활을 하다 균이 20세 되던 1588년 객사한다. 6세 위인 누나 난설헌은 시적 재능이 출중한 인물이었는데 시집가서 가정적인 불화 속에 살다가 27세의 나이로 이듬해에 죽는다.
허균의 어렸을 적 모습은 어떠했을까. 9세 때 이미 시를 지었고 12세 때 글을 깨우쳤으며 무엇보다도 기억력이 비상했다. 허균은 수많은 시와 문장을 기억했고 평생 시를 지었으며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14세 때 둘째형 허봉을 찾아온 서자 시인 이달을 만나서 그에게서 시를 배웠다. 당시는 유교사회였지만 허균의 집안에는 도교와 불교의 분위기도 있었던 듯하다. 그가 소년 시절 혼자 살던 서당 선생을 기지로 한 과부와 결혼시켰다는 얘기가 있는데, 꾸며낸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은 17세(선조 18년, 1585년)에 한성부에서 치르는 초시에 급제를 했다. 그리고 당시 15세였던 안동 김씨 처녀를 맞아 결혼했다. (참고: 난설헌도 대략 15세에 결혼을 했고 그 남편도 안동 김씨였음.) 이듬해에 형 봉이 있던 백운산(白雲山)에 가서 그에게서 글을 배웠고, 봉의 친구였던 사명당을 만났으며, 유성룡에게 글을 배웠다. 1588년 9월(허균 20세)에 둘째형 봉이 금강산 부근에서 황달과 한담으로 죽고 이듬해 누나 허난설헌도 죽었다. 허균은 이들의 죽음에서 큰 슬픔을 느꼈고, 특히 누나의 죽음에 "훼벽사(毁璧辭)"를 썼다. 이 해에 허균은 생원시에 급제를 했는데, 과거 동기생으로서 9세 연상의 이이첨(1560-1623)을 알게 되어 같이 글공부를 했다. 균이 22세 때(선조 23년, 1590년) 맏형 성이 통신사를 수행해서 일본에 다녀왔다. 균은 누나의 시 210편을 정리하여 난설헌집을 엮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당쟁은 계속 심해져서 균이 23세 되던 해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더니 급기야 그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균은 어머니, 부인 김씨 등과 함께 피난길에 나섰는데, 7월에 만삭이었던 부인 김씨가 첫아들을 낳고 그만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버렸고 갓난아이도 며칠만에 따라 죽었다. 그들을 임시로 묻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허균의 가슴 아픔은 극심했다. 가을에는 강릉에 도착해서 외가인 사천 애일당(愛日堂)에 머물었다. 이때에 뒷산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교산(蛟山)이라 하였다. 이듬해까지 강릉에서 살면서 낙산사에 주로 머물며 두보의 시를 공부하고 스님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시(詩)의 평가와 시작(詩作)에 관계된 일화들을 중심으로 한 108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모은 "학산초담"을 지었다.

2. 선조조 환로기(宦路期): 26세(2월 문과에 급제) - 39세
허균은 1594년(선조 27년) 2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26세의 나이로 드디어 벼슬을 하게 된다. 그는 승문원 사관이 되었고, 요동에 다녀왔다. 이후 허균은 평생 중국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2월 정시 문과에서 합격했다. 그는 예문관검열(藝文官檢閱),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등을 역임했다. 27세 때 그는 부인 김씨 묘를 강릉으로 이장했다. 맏형 성은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이후 계속 벼슬이 높아졌다. 1597년(선조 30년, 균 29세)에는 정유재란이 발생했다. 그는 3월중에 파직 당했다가 4월에 문과 중시(重試; 일종의 보직 배치 시험)에 장원하고 벼슬이 정6품 예조좌랑으로 뛰어올랐다. 그해 7월에 원군을 청하는 사신의 수행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0월에는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그는 김효원의 딸을 맞아 재혼을 했다. (첫 번째 부인은 안동 김씨였고, 두 번째 부인은 선산 김씨였음.)
이후로 허균은 자신의 천재적 재능과 맏형 성의 배경과 선조의 신임으로 인해 계속 벼슬이 오른다. 기생들과 놀아난다는 등의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으나 계속 중용이 되었다. 30세 때 이미 중국의 장군들과 사신들을 접대하였고, 이때 특히 중국의 종군 문인 오명제에게 "조선시선"을 엮어주고 "난설헌집" 초고를 중국에 전파하게 하였다. 1601년(33세)에는 충청, 전라도 등지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이라는 직책을 받아 전라도로 내려갔는데, 그때 부안 기생 계생(매창)과 사귀었다. 이듬해 2월 중국사신을 맞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행길에 올랐다. 이 해에 정5품 병조정랑에서 정4품 성균관 사예를 거쳐 정3품 사복시정까지 승진한다. 1603년(35세)에 맏형 성의 딸이 의창군과 결혼하였는데 그 혼사와 관련하여 복제를 삼가 지키지 못했다는 무함을 받고 파직되어 관동지방 등지를 유람하고 강릉으로 갔다. 이듬해(1604)에 다시 벼슬을 받았고, 9월에는 수안 군수가 된다. 그리고 다음 해(1605)에 토호 이방원의 죄를 따지며 매를 때리다가 죽게 하여 그 일로 인하여 수안 군수에서 파직되었다.
허균은 그 뛰어난 문장 실력과 박학다식으로 인해 중국 사신으로 간다거나 중국 사신을 맞는 일에 차출되곤 했다. 역시 이번에도 바로 이듬해(1606, 38세) 중국에서 온 사신 주지번을 맞는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다시 불러들여졌다. 허균과 주지번과의 관계는 누나의 시집인 "난설헌집"으로 인해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균은 난설헌집을 그에게 주어 중국에서 편찬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해에 둘째 아들 굉(宏)을 낳았으며 맏형 허성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1607년(39세)에 정3품 벼슬에 올랐다가 삼척(三陟) 부사로 임명되어 고향 강릉을 거쳐 5월에 삼척에 도착했는데, 그만 불사(佛事)를 행한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당시 선조가 탄핵문을 보고 "문장을 좋아하는 자는 불경도 읽었으므로 허균도 그에 불과할 것"이라며 두둔했으나 여러 번 탄핵하자 파직을 허락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7월에 다시 내자시 정(內資寺 正)으로 복귀한다. 허균의 글재주는 배상해서 그 해 여름, 가을, 겨울의 아홉 달 동안의 벼슬아치의 법전 시험(고과)에서 스물 일곱 제목이 장원을 하는 놀라운 일을 달성한다. 그는 12월에 공주 목사가 되어 가서 처외삼촌 심우영을 통하여 서양갑과 사귀고, 이재영을 불러다가 도와주었다. 이들은 다 서자들이었다. 특히 이재영은 허균과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였고 그 어머니와 함께 공주로 오게 해서 돌보아 주었다. 형 허성은 예조판서가 되었다.

 
3. 광해조 환로기: 40세(광해군 즉위) - 4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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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조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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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적자가 없었던 선조에게서 서자로 태어난 광해군은 총명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분조(分朝: 비상시에 조정을 두 개 세우는 일) 중 하나를 이끌었고 임진왜란을 치러내는데 큰공을 세워서 명실 상부한 세자였다. 그러나 선조는 점차 광해를 싫어하게 되었고 게다가 느지막이 적자 영창대군을 본 선조는 영창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런 와중에 1608년(허균 40세; 광해군 원년) 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이 즉위를 했다. 그 결과 영창을 밀던 소북파가 몰락하고 광해를 밀던 대북파가 득세를 하게되었다. 광해는 즉위에 문제가 있다하여 중국에서 한동안 인정을 받지 못하는 등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고 재위 동안 내내 반역 문제에 몹시 민감해서 큰 옥사가 끊이지 않았다.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유희분 등이 실권을 잡았다.
허균은 1608년 8월에 서얼들을 가까이 하는 등의 이유로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공주 목사에서 약 8개월만에 파직되었다. 그 후 부안(扶安)에 가서 은둔하면서 전답과 가택을 마련하여 거기서 살 준비를 했다. 그러다 12월에 다시 정3품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가 되었다.
광해조에 들어와서도 그의 중국 관계 일은 계속되어서 1609년(41세, 광해 1년)에도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이재영 등을 데려갔다. 5월에는 홍문관의 월과(月課)에서 잇달아 세 번 일등을 하였는데 광해의 눈에 들어 상을 받게 된다. 6월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가 되고, 또 9월에 정3품 형조참의(參議)가 되면서 죽은 아내에게도 숙부인(淑夫人)의 직첩이 내려졌다. 다음해인 1610년(42세, 광해 2년)에 중국에 천추사(중국 황태자의 생일 축하 사신)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병으로 거절하여 탄핵을 받았다. 이즈음부터 허균에 대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이 특히 두드러지지 시작한다. 허균은 이 해 10월에 '사람됨이 들뜨고 경망스러운데다 몸가짐도 근실치 못한데 괴탄한 일을 저질러 일찍이 대간으로부터 논핵을 받았으나 고칠 줄 모르고 있다'하여 탄핵을 받았다. 그 동안 광해는 허균에 대한 탄핵을 들어주지 않았으나 이때에는 허락하여 허균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며칠 후에 다시 전시(殿試)의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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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부정사건   광해 2년 가을-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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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광해 2년(1610) 10월 19일 별시 문과 전시(殿試)의 대독관(對讀官)으로 이이첨 등과 함께 임명된다. 11월 3일 합격자 방이 붙었는데, 시험 관리들의 친척들이 많이 합격한 것이었다. 아들이나 동생이 붙은 경우도 있었고, 사위와 사위의 아버지, 친구 등도 붙었다. 허균의 경우엔 형의 아들 보(寶)와 형의 사위 박홍도(朴弘道)가 뽑혔다. 사람들은 이것을 '子弟姪査頓榜'(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의 합격자 명단)이라고 비난했다. 대신 중에는 합격자 전원을 취소해야 한다는 등 강력한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광해는 허락지 않았다. 결국 허균만이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사관은 불법을 저지른 다른 대신들 중에 몇 사람(이이첨 등)이 왕의 외척들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어서 허균에게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들의 권세에 눌려서 간관(諫官)들도 왕에게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였다고 사관은 주장했다.
허균의 친구이며 저항시인이었던 권필(權 )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당시 사정을 비난했다: (실록에 나옴)
    假令科第用私情 가령 과거에 사정을 썼다 하더라도,
    子壻弟中姪最輕 아들·사위·동생보다는 생질이 그래도 죄가 덜한데,
    獨使許筠當此罪 허균만 이 죄를 받게 하다니,
    世間公道果難行 세간에서 과연 공도(公道)는 행하기 어렵구나
12월 8일에는 허균에게 형장을 가해 심문을 하라고 광해는 허락했고, 허균은 드디어 29일 전라도 함열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조카 허보의 합격 또한 취소되었다.
이 사건에서, 허균이 꼭 부정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당시엔 과거 부정이 만연해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도 허균은 그 글재주로 인하여 대신 과거시험의 답글을 써주었다는 의심을 자주 받았다.
이 과거부정으로 허균은 1611년(광해 3년, 43세) 거의 일년동안 함열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후대 사람들에게는 이 기간이 큰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허균이 유배 중에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정리해 엮어낼 여유를 찾은 때문이었다. 이것은 허균이 사형 당하기 전에 외가로 보내어 보전케 하여 지금까지 전해 온다. 허균의 문학과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문헌이다.
이듬해(1612, 44세) 2월에 허균은 부안에서 돌아왔고, 4월에는 위에 시를 지었던 권필은 풍자시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권필의 궁류시)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의 든든한 정치적인 배경이 되었던 맏형 허성이 죽었다. 12월에 허균은 왜국의 정세를 중국에 알리는 사신으로 정해졌다가 합당하지 않다는 사간원의 계(啓)에 의해 취소되었다. 그후 그는 부안에 가서 살았고 호남지방을 두루 다녔다. 이즈음 "홍길동전"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그에게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칠서의 난과 그것을 기화로 발생한 계축옥사였다. 이 사건은 폐모론을 강하게 대두시켰고 폐모론은 허균의 말년에 가장 시끄러웠으며 그 후에도 계속 조정에 큰 불씨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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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서의 亂(또는 獄), 계축옥사(광해 5년, 1613, 허균 45세), 그리고 폐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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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자들에 대한 냉대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를 비관한 서자 7명이 여주 남한강가에 토굴을 파고 거처를 마련하여 시도 짓고 술도 마시며 지내고 있었다. 이들은 거처 이름을 '무륜당(無倫堂)'이라 하고 또 스스로를 '죽림7현(竹林七賢)' 또는 '강변칠우(江邊七友)'라 불렀다.
광해 5년(1613년) 봄에 그 중 하나인 박응서가 한 은상(銀商)을 죽이고 돈을 강탈했다가 은상의 하인에게 뒤를 밟혀 모두 잡히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을 이이첨이 모략을 꾸며 박응서를 꾀어 역모로 만들었다. 이이첨은 영창대군을 몰아내어 광해의 신임을 계속 받아 세도를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그 사주를 받은 박응서는 반역을 꾀하려고 군자금을 모으느라 강도 짓을 했으며 배후에는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있다고 자백했다.
영창대군과 광해군의 악연은 선조 때부터 시작된 뿌리깊은 것이었다. 선조는 아들이 14명이나 있었지만 영창대군 하나만 두 번째 왕비인 인목대비(김제남의 딸)에게서 난 적자였고 나머지는 모두 서자였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이 급격해지자 장자 임해군(광해군의 동복(同腹) 형)을 젖히고 왕세자로 책봉이 되었다. 광해는 그만큼 총명하고 효성스러웠었다. 문제는 선조의 마음이 점차 광해에게서 멀어져 갔고 거기다 1606년, 선조 39년에 인목대비에게서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이었다. 그때 선조는 50세, 인목왕후는 19세, 그리고 광해는 28세였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고 싶었지만 1608년에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조는 허균의 형 허성을 비롯한 가장 믿는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을 지켜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즉위한 광해군은 적통 문제로 시달렸다. 중국에서도 나름대로의 내부 사정 때문에 그랬지만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광해군을 인정해 주는 것을 1년 넘게 끌었다. 그래서 광해는 자연히 정통과 반역 문제에 민감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박응서를 제외한 서자들은 모두 잡혀 죽었고, 이 '7서의 옥'은 곧 계축옥사로 변한다. 우선 영창대군과 김제남을 대역죄로 처분하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1613년 5월 22일의 실록의 사관의 주(註)에 의하면 이 즈음의 상소는 다 이이첨이 써준 것이라고 하며, 더러는 허균과 김개가 썼다고 했다. 그리고 유희분·박승종과 이이첨이 서로 영창대군을 대역죄로 몰아가는 주도권을 차지하려 다투었는데, 먼저 유희분·박승종 쪽에서 어몽렴이라는 사람을 내세워 소를 올렸으며, 이이첨은 더 나아가, 자신의 심복이자 제자인 이위경이란 사람 등을 내세워 폐모론(광해보다도 나이가 어리지만 인목대비는 광해의 어머니였는데 그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주장)을 내세웠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세 사람(유, 박, 이)은 서로 갈등을 드러내었다.
결국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사약을 받고 죽었고 그와 관계가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옥사에 끌려들었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이이첨의 사주에 의해 방에 불을 뜨겁게 때서 데워죽임(증살)을 당했다. 다만 인목대비만은 계모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임금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 처리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폐모론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폐모론은 "대론(大論)"이라고도 불렀다.
폐모론을 계속 이끌고 간 것은 이이첨을 중심으로 했던 대북파였다. 광해군 재위 초기에 권력자들은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과 그와 가까운 박승종, 그리고 이이첨이었다. 하지만 이이첨은 좀 약했고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그는 자기 딸을 박순종의 아들(박자흥)에게 시집보냈다. 즉 이이첨은 박승종과 사돈이 된 것이다. 그리고 곧 박자홍의 딸(즉 이이첨의 외손녀)이 세자빈으로 간택이 되었다. 그래서 박자홍도 이이첨도 왕실의 외척이 된 것이다. 유희분은 문창(文昌)부원군, 박승종은 밀창(密昌)부원군, 그리고 이이첨은 광창(廣昌)부원군이라는 칭호를 가졌고, 사람들은 이들을 합하여 삼창(三昌)이라 불렀다. 폐모논의는 무려 5년여를 끌었고 그것을 주도하는 이이첨은 절대 권력을 갖게 되었다. 폐모론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이첨 일파는 1617년 11월부터 전현직 관리 1000여명과 종실(왕의 일가) 170여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상소운동을 벌이고 1618년 1월에는 조정의 백관을 동원하여 폐모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것을 폐모정청 (廢母庭請) 사건이라 부른다. 이후 '서궁폄손절목(西宮貶損節目)'-대비의 칭호를 '서궁'으로 강등을 하는 것을 포함한 몇 가지 제안-이 제시되었지만 그 내용에 대한 이견들이 있어 공식화되지는 못했다. 하여간 인목대비는 서궁(西宮; 경운궁; 덕수궁)으로 유폐되었다. 광해 9년(1617년)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격문이 화살에 매어져 서궁에 떨어진 '흉격사건'이라는 것이 벌어져서 광해군의 심기를 극도로 불안하게 까지 만들었는데, 이것도 폐모론을 성사시키기 위해 허균을 사주한 이이첨 일당의 모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흉격사건은 아래에 자세하게 다루었다.
인목대비는 1618년 서궁에 유폐되어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복위되었다. 실은 폐모론에 대한 광해의 태도는 묘했다.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신하들의 요구가 빗발쳤을 때도 그는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도 그는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원했을 것 같지만 여러 해 동안 거부했다.
한편 허균은 폐모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이것은 인조반정으로 흐름이 다시 바뀐 조선왕조사에서 허균이 끝까지 배척을 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왜 허균은 폐모론에 그렇게 적극적이었을까. 우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폐모론을 주도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허균 자신이 처한 문제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실제로 서얼들과 가까웠고 그들 뒤에서 정신적인 지주로서 작용했다고 생각되는 것과 연관된다. 허균의 그간의 행동들은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7서들이 허균 이름을 입에 올리기만 했어도 허균은 반역죄로 걸려들었을 것이지만 그들이 허균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발설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허균은 허균대로 그 7서의 난의 화를 피하려고 이이첨 세력에 자신을 의탁한 것이라고 한다.
좀 다른 관점에서, 허균이 이이첨의 사주로 폐모론과 그 이후의 관련 사건들(흉격사건, 흉방사건 등)을 저질렀다고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허균이 이이첨 일당의 직접적인 수족 노릇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허균은 정치적인 계산에서 당시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이이첨 세력이 주장하는 노선을 지지했을 확률이 크다. 게다가 한 해 전에 자신의 배경이었던 허성도 죽었기에 의지할 곳이 없었다. 하여간 그는 12월에 예조참의를 제수 받는다. 하지만 '사람이 경박하고 이단을 받든다'는 사간원의 반대로 이틀 후에 파직되었다가 이듬해(1614, 광해 6년, 46세)에 곧 호조참의가 된다. 당시의 세력을 쥐고 있던 이이첨 등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 추정할 수도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 후로 허균은 어떻게든 광해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으로 독립하며 정권을 잡으려고 시도한 듯하다. 과연 그는 곧 어떤 한 사건을 통해 광해의 두툼한 신임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사건이 허균의 천재적 머리에서 나온 일종의 사기극이었을까? 그 사건은 이름하여 '변무 사건'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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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무(辨誣) 사건   광해 6년(1614) 여름 - 광해 7년(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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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참으로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다. 그만큼 그는 책을 좋아했다. 광해 6년(1614, 46세)에 허균은 호조참의(정3품)가 되었는데, 그해 여름 천추사가 되어 중국에 간다. 이때 수 천여 권의 책을 구해왔다. 허균은 후에 이 책들에서 시와 글들을 발췌하고 재정리해서 다양한 편찬서들을 펴내었다.
그런데 허균이 조정에 서장(書狀; 편지)을 보내 중국의 책 중에 우리 나라에 대해 잘못 말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고 보고해왔다. 그것은 주로 조선왕조를 폄하하고 임진왜란을 잘못 설명하고 광해군을 비방하는 등의 내용으로서 정통 문제에 신경이 항상 곤두 서 있던 광해에게 여간 민감한 일이 아니었다. 10월 8일의 실록에는 승정원에서 임금에게 허균이 이런 중대한 일은 비밀리에 계를 올려 알려야 하는데 남들이 볼 수 있는 편지로 보내왔다고 조사하라는 청을 하고 있다. 10월 10일에는 또 승정원에서 의견을 밝혀, 중국에 그것이 무고이니 밝혀서 고치도록 요청(변무)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사(正史)의 측면에서는 대개 이미 이루어져 있기에, 소설 등의 민간 기록에서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다 믿을 것도 아니며 그다지 시급한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또 허균이 미리 그런 일들을 왕에게 알리기도 전에 드러내 버렸기에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며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사신들은 중국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10월 10일의 사관의 주에는 이 일이 다음과 같은 사기극이라 주장한다. 즉 허균은 사신이 되자 서리(書吏) 현응민(玄應旻)을 데리고 갔는데, 현응민이 간교하고 재주가 많아 허균이 목숨을 바칠 심복으로 키웠다. 그들이 함께 가짜로 "임거만록(林居漫錄)"이란 책을 만들어 저자를 "오원췌(伍員萃)"라 써넣었는데, 그 내용에는 선조가 덕을 잃은 행동을 했고 왜적들과 내통하였다는 것과 광해가 임금이 된 것이 잘못이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출판(판각해서 찍어내는 일)도 못하고 손으로 쓴 초본(草本)을 연경(지금의 북경)의 시장에 팔게 했다가 즉시 사들였다. 우리 나라에 대해 잘못 기록한 것들이 중국 민간 서적에는 간혹 있었음을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는데 허균은 그것을 처음 본 듯이 알려온 것이다. 이것은 허균이 공(功)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계략이라는 것이었다. 허균은 문장이 뛰어났는데 허무맹랑한 책들을 잘 지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였다.
사실이야 어떠했건 간에, 광해는 허균이 우리 나라를 무고하는 일에 대해 알아온 것을 크게 칭찬하고 광해 7년(1615, 47세) 2월 4일과 6일에는 허균이 찾아온 책들을 가져오도록 해서 읽어본다. 이때쯤 허균 일행이 중국에서 도착한 것이 아니었을까. 2월 14일에는 허균을 승문원 부제조(예조. 정3품)로 임명했다. 5월 22일에는 동부승지로 삼았다. 6월 5일에는 책을 많이 가져왔고 변무일에 대해 알렸으며, 세종이 직접 지은 글과 글씨를 구입해서 가져왔으니 가자(加資; 품계를 올림)하라고 명한다. 그런데 이날 사헌부에서는 형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김제남(金悌男)의 문하에 출입했음을 들어 파직하라 청했다. 광해는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한 달 후쯤 허락한다. 사관의 설명에 의하면, 변무를 주청하러 가는 일에 이정귀가 상사(上使)가 되고 허균이 부사(副使)로 임영되었는데, 허균이 자신의 사기극이 폭로되지 않게 하고 공을 모두 차지하고, 또 이정귀가 글과 말재주가 자신보다 뛰어남을 꺼려서 이이첨과 함께 모의하여, 이정귀를 제거하려 사헌부를 사주한 것이라 한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결국 민형남(閔馨男)이 상사가 된다. 이날 허균('좌부승지'라 나옴)은 가선대부(종2품)로 가자되었다. 8월 15일과 16일에는 허균이 각각 '우승지'와 '좌승지'라고 나온다. 좌승지와 우승지를 역임한 것으로 생각된다.
8월 15일에 보면 정확한 연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한 역관 때문에 상사와 부딪친 듯하다. 그래서 허균은 상사를 조사하라고 청했는데, 이것이 경망스러운 행동이라 탄핵을 받았다. 다음날 허균이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8월 5일에 문전정시에서 일등을 한 결과로 종2품 가정(嘉靖)대부의 가자를 받았다. 그리고 윤8월 8일, 광해는 동지 겸 진주사 민형남(閔馨男)과 부사 허균(許筠)을 불러다 대화를 나눈다. 광해는 그들이 변무의 일을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보이며, 중국에 고쳐달라고 요청할 책들과 방법 등에 대해 상세히 의논한다. 이날 실록에 실린 중국에 보내는 주(奏)에는, 광해가 중국 왕에게 그간의 중국 문헌들의 잘못된 기록을 자세히 열거하고 정정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광해군의 정통성 문제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사신들이 직접 면대하여 전달하도록 했다. 이틀(윤8월 10일) 후쯤에 이들은 중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뒤의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허균은 변무하러 가서 가지고 있던 은(銀)을 도둑 맞았다고 하며 공금을 거금 잃어버린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허균 일당이 공금을 횡령한 것이라 암시하고 있다. 11월 4일 실록에는 아예, 은 약 5000냥을 허균이 도용(盜用)했다고 나온다.
광해 8년 1월 6일에는 북경에서 보고하기를 '국사(國史)와 야사(野史)에 있는 본국을 무고하는 내용에 대하여 (중국)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변무(卞誣)하였다'고 했다. 2월 29일까지는 그들은 이미 돌아와 있었으며, 그들이 중국 왕의 칙서를 가지고 왔는데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큰 경사라고 했다. 4월 12일에 허균은 사직제조(社稷提調)(정2품)로 승진하고 5월 11일에는 형조 판서(정2품)이 된다. 광해가 허균에게 크게 만족해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며, 5월 20일의 기록에 의하면 광해는 허균에게 더 상을 주고 싶어하고 있음이 나와있다. 5월 29일에는 민형남과 허균을 불러 녹피(鹿皮)를 하사하기까지 한다.
한편 5월초에 해주옥사([海州獄事)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소북파의 박승종 등을 제거하려고 일으킨 것이었다. 이이첨은 해주에 사는 자기의 친척인 박이빈(朴而彬) 등에게 사주하여 소북 사람들이 역모를 하고 있다고 고발하게 했다. 이들이 고변을 하러 서울로 올라가려 할 때 박이빈 형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잡아서 해주목사 최기(崔沂)에게 데려갔다. 최기는 그것이 무고라 판단하고 박이빈 등을 그 친척들에게 내어 맡겼는데, 친척들이 그들을 죽여버렸다. 이런 사실을 안 이이첨 측(한찬남, 유세증(兪世曾) 등)과 유희분 측은 서로 암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광해가 놀라고 크게 노하여 최기와 관련된 사람들을 수백 명 죽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5월 30일 광해가 직접 혐의자들을 국문하는데, 최기의 사위 유찬(柳燦)의 말 중에 허균이 장인(최기)이 쓴 원정(元情: 조서)의 말을 바꾸어 쓰면 살 길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는 말이 나왔다. 아마도 허균도 당시의 암투에 한 역할을 담당했던 듯 하다. 허균은 6월 2일과 3일에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즉 최기의 공초(供招: 범인의 진술)에 자신의 일가의 이름도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실을 알아보려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8월 10일에는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奇俊格), 그의 조카 기수발(奇秀發)이 문과에서 급제를 하였다. 그런데 실록에는 이들의 글이 모두 허균과 이재영(再榮)이 지었다고 주장되어 있다.
10월 8일에 광해는 허균이 죄인(최기)의 원정(元情)을 구해 보려 한 죄가 무거워 중하게 다스려야 하지만 그의 공(변무에 관한 것)이 크다는 이유로 파직만을 시켰다. 그러면서도 10월 26일, 광해는 허균이 구해온 책들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그리고는 그때의 사신들(민형남과 허균 등)에게 논과 노비 등을 하사한다. 여전히 허균에게 고마워하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조전랑(銓郞 = 正郞과 佐郞)에 있던 허균의 조카사위 박홍도(朴弘道)(정랑이었음; 과거부정 사건 때 급제되었음)의 사건이 있었다. 그는 이이첨의 일파에 속했다고 한다. 이조전랑은 비록 계급은 낮았지만 인사권을 갖고 있는 요직이었다. 박홍도는 윤선도 같은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의 탄핵을 받았다. 인사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자신의 입신만을 꾀하고 사류(士類)들을 해치며 볼온한 무리들과 결탁하여 상소들을 올려대고 종실들과 어울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윤(폐비론에 반대하다 1617년 축출됨)과 어울려 술 마시면서 시를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 시는 '경운궁을 생각한다'는 것으로서 대비를 그리워하며 광해에 대한 반역을 의도하는 내용이었다. 광해 9년(1617) 1월 10일, 광해는 시를 보겠다며 시를 올리라고 했다.
    '경운궁을 생각한다'
    묵직한 자물쇠가 서궁에 잠겼는데
    사자대엔 공연히 저녁바람 부누나
    임금께서 승하함에 붙잡지 못하고서
    외로운 신하 눈물을 목릉 가에 흩부리네
    [* 목릉 = 14대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묻혀 있던 능. 후에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도 이곳에 묻혔다.]
    *
    대들보감 만들려고 소나무를 심었더니
    가지가 뒤엉켜서 점대를 가리우네
    어찌하면 도끼로 가지를 모두 쳐내
    창 가득 쏟아지는 달빛을 맞이할꼬
    *
    통곡하며 애오라지 사자대에 오르니
    목릉의 송백은 저녁구름에 서글프네
    *
    흰구름 바라봄에 눈물만이 흐르누나
이날 사관은 박홍도는 시를 지을 줄 모르기에 허균이 지은 것이라 말한다. 다음 날 11일 박홍도는 자신의 시가 아니라고 변명하는 소를 올린다. 그리고 1월 16일, 허균이 상소를 해서 저 시는 박홍도의 시가 아니라 이성윤(李誠胤)의 시라고 말한다. 박홍도가 잡혀가기 전 저 시가 자신의 시라고 알려지자 허균에게 '내가 아니라 이성윤이 지은 것'이라는 말을 이이첨(예조 판서)에게 전달해 주기를 바라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결말 없이 끝난 것 같다. 다만 1월 27일 기록에 '이성윤을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울타리 치고 나오지 못하게 함)시켰다'는 구절이 나온다.
확실히 허균은 계축옥사 이후에 벼슬길에 다시 나선 후에 변무 사건에서 광해의 신임을 단단히 얻어서 벼슬이 정2품 형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변무 사건이 사관의 주장대로 허균이 책을 가짜로 지어내어 일으킨 사기극인지는 더 조사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아니면 수 많은 중국 서적 속에는 조선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쓴 기록들도 당연히 있었을 테니, 그것을 구태여 찾아내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허균에게 그 공로로 내려진 신임을 시기하여 견제하던 사람들의 모함이거나, 이미 다른 반역 사건으로 처형당한 허균을 더 나쁘게 보이게 하기 위한 후대의 모함일 수도 있다. 여하간에 광해의 아킬레스건을 잡고 있던 허균은 잠시 다른 일로 해서 형조판서에서 파직되지만 여전히 광해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곧 정2품 좌참찬으로 임명을 받는다.
그런데 잠시 후 '흉격 사건'이 벌어진다. 허균을 끝없는 구렁텅이로 몰아간 피주기(被誅期)가 열리는 신호탄이었다.

 

4. 피주기(被誅期): 49세 1월(흉격 사건) - 50세 (8월 24일 사형)

먼저, 자세한 사항들은 아래에 다루기로 하고, 큰 골격을 정리하면 이렇다: 1617년(광해 9년, 49세) 1월에 일어난 '흉격 사건'은 폐모론과 맞물려 있었고 당시의 영의정 기자헌과 허균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킨 단서가 된 사건이었다. 기자헌은 폐비문제에 신중해야 한다며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자연히 이이첨 세력이나 허균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기자헌은 결국 줄기찬 탄핵을 받아 12월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허균을 반역 음모를 했다하여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 허균도 이어서 그에 대항하는 상소를 올렸다. 기준격의 상소 내용이 진짜라면 허균이 반역죄로, 거짓이라면 기준격과 그 뒤에 있는 기자헌이 무고죄뿐만 아니라 상소에 쓴 구절들이 임금을 능멸하는 내용이 많아 대역죄로까지 중죄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광해는 자신의 병도 있고 해서 즉각 조사를 명하지는 않았다. 광해가 허균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흉격 사건이 일어난 거의 1년 후인 1618년(광해 10년, 50세) 1월에 잠시 '흉서 사건'이 벌어진다. 이것은 허균이 정국 타개를 위해 벌인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허균과 이이첨의 폐모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입장이 달라지면서 반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 기자헌을 구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결과 상황이 허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서 허균을 국문(鞠問: 중대한 죄인을 신문하는 것)하라는 유생들의 상소, 특히 곽영의 상소가 올라왔다. 기준격의 상소들을 그때까지 광해가 갖고 있었는데 대신들이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그것들이 볼 필요가 있다며 내려달라고 요청하자 그때서야 내려주었다(윤4/14). 그것을 본 대신들은 그 내용에 놀라서 허균을 조사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래서 허균도 기자헌·기준격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자신을 변명하는 아주 긴 상소를 올렸다(5/3). 광해는 여전히 허균과 기준격을 조사하고자 하는 대신들의 요청을 자신의 건강 등의 이유를 들어 허락지 않았고 있었다. 그러다 상황이 급물살을 탄 것은 8월 10일에 발생한 '남대문 흉방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후금의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공격해서 조선도 전쟁 분위기에 휩싸여 들어가는 와중에 발생한 것이었다. 광해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관련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때까지 해결이 나지 않은, 허균에게 의혹이 쏠리던 사항들(흉격 사건과 기준격의 상소 내용 등)이 그 남대문 흉방 사건 및 그에 선행되어 일어난 사건들(민심 소란 등)과 얽혀 모두 허균과 그 일당의 소행인 것으로 결론지어져 갔다. 이미 허균의 존재를 화근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린 이이첨과 허균을 제거하고 싶어하던 다른 대신들이 광해에게 허균을 대역죄로 처형할 것을 재촉했고, 광해는 그런 대세에 따라 허균의 처형을 허락하고 만다. 드디어 8월 24일 허균은 처형을 당했다. 허균을 처형한 과정이 절차에 합당치 않았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이이첨과 유희분이 힘겨루기를 했다. 허균이 죽은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허균과 관련되어 국문을 받는 옥사가 오랫 동안 계속되었으며, 죽어 나간 사람들도 많았고, 그가 반역을 모의했다는 진술들이 구체적으로 나왔다.
1년 반 조금 넘는 이 기간동안 아주 복잡한 일들이 일어났다. 허균의 처형에 즈음한 광해의 입장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허균은 생각과 행위는 정확히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여러 사건 중에 어디까지 허균의 소행이며 정확히 어떤 의도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허균의 입으로 밝혀진 적이 없으니 끝까지 미궁일 것이다. 그래서 한 인물을 되살린다는 작업은 창작의 수준에 이를 만큼 어려운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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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격(兇檄)사건   광해 9년(1617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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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광해 9년 1월 20일 새벽에 경운궁 뜰안에 종이가 묶인 큰 화살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그 종이에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로 구별되어 있었으며, 광해군이 서자로 왕에 오르고 아버지와 형을 죽였다는 비난과 함께, 영의정 기자헌 등을 강제로 움직이고(위협하여 강제로 일을 시키겠다는 뜻), 28일에 거사할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자는 겸사복(兼司僕) 김윤황(金胤黃)이라는 자였다. (김윤황은 허균의 일당이었으며 후일 허균과 함께 처형된다.)
당시 인목대비가 가장 웃어른이었기에 반정을 하려면 명분상 인목대비의 윤허가 필요했다. 그래서 표면상 이 사건은 그녀가 있던 서궁(경운궁)에 반정을 하겠다는 내용의 격문을 던진 것으로 보여졌다. 하지만 기자헌의 행동이나 말 그리고 실록 사관의 주(註)에 따르면, 이것은 기자헌 일당을 몰아내려는 자들, 즉 이이첨, 허균 등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기자헌은 자기 이름이 흉격에 올라있으니 정사를 볼 수 없다하며 강원도로 가버렸고, 왕은 어떻게든 나오게 해서 일을 보게 하려고 그를 자꾸 불러들였다. 기자헌은 자기를 찾아온 신하를 통해 왕에게 자기를 위협해서 몰아내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람들이 흉서의 저자를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말 중에
    多辭說, ... (허다한 사설은 단지...)
    *
    今次兇檄之人, 雖不知何人 ... (이번에 이 흉격을 쓴 사람이 비록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와 같은 말들을 넣어 그 자가 바로 허균임을 암시했다. 그러면서, 그 흉격의 내용은 허무맹랑하니 이루어질 리는 없다고 주장하고, 자신은 오래 정승을 했으니 이제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다른 몇몇 대신들은 그 사건에 관여하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하려고 애썼다. 광해는 흉서 사건을 고발하는 자에게 후한 상과 작위를 주겠다는 내용의 방을 붙이라고 명령한다.
흉격 사건의 배경에 대해, 흉격이 발견되던 날(1/20) 사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때 이이첨이 윤선도 등에게 배척을 받았는데, 왕이 비록 윤선도 등을 죄주기는 하였으나, 역시 그들의 말에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이에 이이첨이 그것을 걱정하여 주상의 뜻을 받들어 대비(大妃)를 폐하기를 청하여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다만 전에 폐론(廢論)을 굳게 숨기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키어 대신을 내쫓기까지 하면서, 모두 '대비를 폐위시키자는 설을 얽어내어 임금을 무함하고 사림을 모해하였다.'는 것으로 죄목(罪目)을 삼았은즉, 스스로 이 논의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합당치 않았다. 이에 몰래 허균을 꾀어서 이 격문을 만들게 해, 마치 큰 역적이 장차 일어나고 대비가 거기에 호응하려는 것처럼 꾸며서 다시 논의를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이것이 거짓 격문을 던져 넣은 본 뜻이다. 얼마 뒤에 허균이 한 일이 크게 드러나자 유가(柳家: 유희분)·박가(朴家: 박승종)가 또 이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이이첨이 또 속으로 두려워하였다. 이에 과원(果園)의 모임[3월 9일의 모임: 아래 참조]을 주선해 유씨와 박씨의 공격을 늦추었으며, 왕이 또 몰래 허균을 부추겨서 속히 폐론을 내어 자신의 죄를 씻게 하였다. 이에 과원의 모임이 파하고 폐모론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허균은 기자헌의 암시에 의해 자신이 한 것으로 밝혀질까 두려워했고, 다른 사람(조찬한)이 썼을 것이라 주장했다. 1월 28일은 흉격에서 대궐을 침범하겠다고 밝힌 날이었다. 광해는 대궐을 철통 같이 방비하라고 명령하여 병조판서 박승종 등 여러 장수들이 지켰고, 이이첨은 가족들에게 검을 주면서 '역적들에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결하라'고 말하는 비장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자신의 흉계를 가족들에게까지 속이기 위해 위장한 것이라고 실록은 쓰고 있다.
2월 1일에서 3일까지 격문을 지은 사람이 이재영(서자. 허균과 친분이 두터웠음)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서로 물고 물리는 상소를 계속했다. 흉격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그 전말을 밝혀 혐의를 받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상소를 한 사람들은 민인길(이재영의 처삼촌, 허균의 먼 친족), 성우길(이재영과 친척), 허균, 유희분(성우길과 사돈간), 기수발(기자헌의 조카), 이사성(李士星, 허균의 사위), 유충립(유희분의 조카, 민인길의 조카사위), 이정원(의정부 검상) 등이었다. 흉격의 저자(著者)에 관한 얘기가 누구한테선가 나와서 서로 알고 지내던 이들 사이에 말이 돌고 돈 것인 듯하다. 3일의 실록에는 허균이 흉격을 지었고 이정원, 이재영이 동참했으며, 그것을 알게된 이사성이 민인길에게 얘기했고, 민인길은 다시 유충립의 아내에게 말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광해가 '허균이 폐론(廢論; 폐모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모의를 한 것을 알고, 드디어 이 일을 폐기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2월 12일에 흉격을 유생 안신언이란 사람이 썼을지 모른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상소가 있었다. 그 말을 꺼낸 사람이 '신점'이라는 이름의 어린 사람이라고 나오는데, 그는 5월에 옥에서 갑자기 죽어버렸다. 하여간 이 일은 곧 묻혔다. 4월 13일자 실록에는 '신점의 옥사는 한찬남이 사주하여 성사시킨 것으로, 대개 허균이 격문(檄文)을 만든 자취를 숨기고자 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한편 광해 9년 3월 9일 흥미로운 모임이 벌어진다. (위에 '과원(果園)의 모임'이라고 불림.) 당대의 세도가들인 이이첨과 박승종 그리고 유희분이 모인 것이다. 폐모론을 주도하던 이이첨의 권세가 가장 컸다. 실록의 주장에 의하면 이이첨이 허균을 사주하여 화살에 묶어서 격문(檄文)을 쏘아 넣기까지 했고, 영의정 기자헌이 암시하고 민인길(閔仁佶) 등이 서로 이어서 고변(告變)하여, 광해도 허균이 한 짓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광해는 그것을 계기로 하여 대비(大妃)를 폐하는 일을 성사시키고자 해서 내버려 둔 채 불문에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승종과 유희분 등이 폐모론을 반대하여 이이첨이 자기 처지가 크게 궁색하게 되자 그들과 동맹을 맺으려 만든 자리였다. 이들은 각각 시를 지으며 화합을 맹세했고 광해도 병중에서 그 모임을 기뻐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끝내 화합하지 못한다.
광해 9년 10월 형조 판서 허균은 김계남(김제남의 친족),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냈던 김진을 역모로 고발했다. 하지만 추측에 의한 고발이었다. 10월 30일에는 광해가 서륜입기명성광렬(敍倫立紀明誠光烈)이라는 존호(尊號)를 추가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에 무고를 변론하여 해명한 것을 기린 것이었다. 허균의 덕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11월에 대비를 폐출하라[서궁(대비가 있는 곳; 대비를 지칭)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라]는 상소가 다시 시작되었다(5일). 사관의 설명에 의하면, 왕이 이이첨을 시켜 대론을 진행하라고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허균은 격문을 지은 일이 발각되면 큰 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무리들을 시켜 매일 상소하게 하였고, 그 초고는 허균이 다 직접 썼다고 한다. 폐비를 반대하는 기자헌에 대한 탄핵 상소도 있었다. 허균(행 사직)은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를 의정부에서 논의하는 자리에서(11/25) 폐비론에 대한 의견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 임금을 해치려 한 자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그런 원수에게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통분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끝까지 은혜를 온전히 하려는 것은 전하의 심정이고 대의를 내세워 폄삭을 가하려 하는 것은 신하들의 책임입니다. 재야에서 올린 여러 상소는 그 견해가 매우 정당하니 여기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이즈음 폐비를 주장하는 무수한 상소가 올라왔는데, 이이첨과 허균의 무리들이 주관한 것 같다. 11월 30일의 사관의 주에는 "이때에 관학 유생이 올린 상소는 이이첨이 주관하였고, 관학 외의 유생이 올린 상소는 허균이 주장하였는데, 그 상소를 많은 사람이 올릴 경우에는 중추부에 모여서 올렸기 때문에 중추부 유소(中樞府儒疏)라고 하였다"고 써 있다. 상소를 서로 번갈아 가며 올렸고, 적합한 사람이 없으면 이름을 위조하여 올리기까지 하였으며, 허균과 김개 등은 폐모론이 성공하면 큰상을 주겠다고 하며 무리들을 끌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12월 12일 허균은 좌참찬(정2품)이 되었다.
기자헌은 폐비 문제는 널리 의견을 수렴해야할 중대한 문제라며 반대 입장이었다. 그래서 광해 9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줄기찬 탄핵을 받는다. 광해는 안 된다며 버티다가 드디어 12/11에 기자헌을 귀양 보내라고 허락한다. (같은 입장이었던 이항복은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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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격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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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9년 12월 24일, 예조 좌랑 기준격(奇俊格)의 비밀 상소가 있었다. 기준격은 기자헌의 아들로서 허균보다 한참 연하이며 허균에게 글을 배우면서 허균의 집에 자주 왕래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를 살리려고 허균을 탄핵한 것이다. 상소의 내용은 허균이 그 동안 역모를 여러 차례나 꾸며왔다는 것이었다. 다음이 상소의 주장이다.
    1. 의창을 옹립하려함. 1609년, 허균이 의창군(이름 광; 허균의 형 허성의 사위; 선조대왕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었다는 말을 함.
    2. 영창대군(이름 의; 선조의 적자)을 옹립하려 함. 일(대군 옹립)이 성사만 되면 금방 공신이 될 것이라고 말함. 영창을 세운 뒤 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겠다고 함. 또 심지어 대비가 수렴청정하면 심이기(중국 한 고조의 부인 여후(呂后)와 정을 통하며 권력을 행사한 인물)가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함.
    3. 윤수겸, 심정세 등과 모의함. 1611년, 심정세의 딸과 윤수겸의 아들을 결혼시키려 했는데, 그것은 군사들이 윤수겸을 따르기에 그를 이용해서 혁명을 해서, 대군을 세우고 대비로 하여금 정사를 대행하게 하려 함. 이것은 김연흥[=김제남]과 허균의 계략이었음. 그러면서 광해를 비방함. 그 혼담을 기준격이 저지함.
    4. 심광세와의 관계. 허균이 공주목사로 있다가 파면 당하고 부안(扶安)으로 내려갔을 때 그곳 수령이었던 심광세(深光世)와 함께 영창대군을 세울 것을 음모. 1612년 경, 허균의 집과 심광세의 집이 가까워서 매일 만나며 역적 음모를 함.
    5. 김제남과의 관계 및 참서 건. 김제남과 공모하고 참서(讖書)를 조작하여 서울을 옮기자고 주장함.
    6. 칠서들과의 관계. 허균이 심우영, 이재영 등과 아주 가까웠음. 허균이 공주목사 시절에 데려다 대접함. 서양갑에게는 서양갑에게는 자를 석선(石仙)이라 지어주었고, 격문을 지어줌. 계축옥사도 운이 좋아 빠져나갔다고 허균 스스로 말을 함. 허실(許實)이 그 격문의 저자가 자신인 것을 알고 있음을 걱정하기도 했음.
    7.정도전 흠모론. 정도전을 흠모하여 동인시문(東人詩文)》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음.
    8. 법궁(法宮)으로의 이어(移御) 건. 1610-1611년에 광해가 법궁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천운으로 대군이 그 주인이 될 것이라고 함.
    9. 이이첨에게 의탁. 이이첨 집에 큰 뱀이 있다고 주장하더니 변란(칠서의 난과 계축옥사)이 발생하자 의탁할 곳이 없어져 이의첨에게 의탁하게 됨. 영창대군을 세워 수렴청정 하겠다고 하더니 왜 이제는 그를 제거하려느냐고 물으니 '말로(末路)를 걷는 사람은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다가 과녁을 세워야 세상을 무사히 지낼 수 있다'고 대답함.
    10. 대론을 고의로 지연시키며 기자헌에게 사적인 원수를 갚으려 함.
    11. 정협이 자복하는 날에 이원형이 허균 자신에 대해 발설할까 두려워했었음. (무슨 일로?)
그리고 기준격은 '허균은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기씨 식구들을 죽이려고 애를 써왔다. 폐비론은 허균이 아니더라도 결정될 것이니 허균의 죄를 물으라'고 덧붙였다.
26일에 기준격은 다시 다음과 같이 혐의를 추가하는 두 번째 비밀 상소를 올린다.
    1. 선조 때 기자헌이 허균과 이홍로(소북파로서 광해가 즉위해서 제거됨)를 모반했다고 귀양보내려 할 때 그들은 김공량(金公諒)의 첩을 시켜 궁중과 내통하여 선조를 현혹시켜 오히려 기자헌을 죄를 받게 함. 그리고 그들은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는데 기자헌이 방지했음. 또한 허균이 이홍로와 심정세, 김제남, 심광세, 심우영 등과 서로 가까웠음. [심광세와 심정세는 형과 아우. 이들은 심엄의 아들이었고, 이홍로는 심엄의 집과 혼인한 관계였다. 또한 심정세는 김제남의 사위였다. 그리고 심우영은 허균의 처삼촌(서자였음 = 처얼삼촌). 허균과 심우영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음.]
    2. 증거로서, 이유홍(李惟弘)·허균(許筠)·송언신(宋言愼)·조호(曺浩)·이홍로(李弘老) 등의 편지 4장을 첨부함.
그날 우참찬 허균도 이에 대항하여 비밀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유실되었다고 하지만 허균의 주장은 이듬해의 상소에 잘 나온다. 사관의 주에 "허균은 요망스런 불교(佛敎)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기자헌이 불교를 신봉하였기 때문에 서로 친밀하게 지냈다. 또 기준격으로 하여금 허균을 스승으로 섬기게 하였기 때문에 기준격은 그의 집에 마치 자식처럼 출입하였다. 허균이 이미 대론과 관련하여 의견을 달리하고 기자헌을 죽이려 하자, 기준격은 전일 그의 집에 출입할 때 얻은 서찰 중에 국사를 언급한 것과 평소에 말한 내용들을 들추어내었는데, 이것은 모두 기자헌이 술책을 부린 것이다."라고 했다. 즉 기준격이 아버지 기자헌의 계략대로 허균의 집에 다닐 때 들었다고 하며 고발한 것이었다. 허균이 제거되면 기자헌이 귀양에서 복귀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한편 허균을 옹호하는 상소들도 올라왔다. 그리고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기준격의 상소는 기자헌의 지시에서 나온 것이므로 기자헌, 기준격, 그리고 허균을 모두 국문에 처하라는 청을 올렸지만 광해는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미루었다. 결국 기준격의 상소는 광해가 오랫동안 갖고 있다가 사태가 좀더 진전된 후인 1618년 윤4월 14일에야 조사하도록 내려보냈다.
폐모 정청 사건: 광해 10년 1월 4일, 우의정 한효순이 백관을 이끌고 폐모론을 주장하는 정청이 열렸다. 사관은 이이첨, 김개, 허균 등의 작품이라고 쓰고 있다. 폐모론에 대한 광해의 본심은 어떤 것이었을까. "광해군일기"에서는 광해가 인목대비를 폐출한 후 처치하고 싶어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랬다면 벌써 목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그게 광해의 진심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날 수많은 신하들 앞에서 어머니를 폐하라는 말을 들은 광해는 절규한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어쩌면 이다지도 한결같이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신발을 벗어버리듯 인간 세상을 벗어나 팔을 내저으며 멀리 떠나서 해변가에나 가서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 나의 진심을 살펴 연민의 정을 가지고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도록 하라."
1월 7일 좌참찬 허균의 상소가 있었다. 4일 밤에 자객 두 명이 습격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기자헌 일당의 소행인 것 같다고 하며, 기자헌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이유를 밝혔다.
    1. 기자헌은 계축옥사 때 김제남 등을 두둔했음. 서양갑 등도 죽게되자 국가에 난을 끼칠 목적으로 거짓 증언을 한 것이라 주장함. 그때 대비가 궁중에서 저주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이것도 궁인들이 꾸민 것일 수도 있다고 함.
    2. 기준격은 허균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는 했지만 나이가 어리기에 다른 말은 나누지 않았음.
    3. 이병(대사헌)이 허균을 '군부(君父)를 위해하려 모의한다'면서 고발했는데, 그는 폐모론에 속으로 반대하고 있는 자이며(즉 광해군에 동조하지 않으며) 그의 주장대로 역모를 알았다면 일찍 고발하지 않은 것이 죄이고, 비밀로 상소가 올려진 허균의 역모의 고발 내용을 이병이 알고 있음은 기자헌과 계략이 있었다는 증거임.
기준격의 상소와 마찬가지로 이 상소도 광해가 오랫동안 갖고 있다가 1618년 윤4월 14일에야 조사하도록 내려보냈다.
그러던 중 1월 12일에 '흉서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원궤(元 )'라는 이름의 진사(進士)에게 보낸 것이라고 주장되는 편지에 이이첨(예조판서), 허균(좌참찬), 및 이들의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거사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제거 대상 명단으로 언급된 사람들은 물론 대신들도 사실을 밝혀줄 것을 임금에게 청하였다. 원궤가 잡아들여졌고 14일에 국문을 받았다. 실록에 이에 관한 내용은 나와있지 않고 다만 다음과 사관의 설명이 붙어있다: "허균이 윤유겸·박홍익 등과 함께 직접 흉서를 만든 뒤 큰 옥사(獄事)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참고가 될 만한 증거를 구비하지 못해 결국 옥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대체로 대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에 철저하게 알리려는 목적과 함께 ... 흉격(兇檄)의 옥사를 완화시켜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결국 허균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어 가는 정국을 타개하려 꾸민 일이라는 것이었다.
허균과 기준격을 조사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기준격과 허균이 둘 중에 하나는 대역죄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1월 17일, 유희분은 2품 이상 대신들과 함께 허균과 기준격 등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는데, 귀양살이 중에 있는 기자헌을 구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광해는 천천히 처리하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자신의 건강, 담당 대신이 임명되지 않음, 기준격이 10년 이상된 일을 고변하여 당사자들이 도주 등의 우려가 없음 등의 이유에서였다.
허균의 계략과 경박함을 암시하는 기록 하나가 2/18에 보인다. 금부에서 '강굉'이란 자를 잡아 가두었는데,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허균이 김영구(기자헌의 조카)를 역적의 잔당이라고 함정에 빠뜨려서 기자헌까지 옭아 넣으려고 상소를 만들어 강굉에게 올리게 하였다(2/13). 그런데 17일에는 스스로 잘못 판단해서 그렇게 했다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 실록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은 김영구가 거칠고 교활한 데다 담략이 있었기에, 칼을 빼 들고 강굉을 잡아끌고 곧장 허균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말하기를 '네가 강굉을 부추겨 내가 역적이라고 무함하게 하였는데, 나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먼저 너를 죽이겠다.' 하고 칼을 허균의 목에 겨누었더니, 허균이 참으로 급해져서 말하기를 '내가 해명해 주겠다.' 하고 즉시 앞의 주장을 뒤엎는 소초(疏草)를 만들어 다시 강굉으로 하여금 소를 올리게 한 것이라 한다. 강굉은 결국 무고율(誣告律)에 연좌되어 저자에 내걸렸는데,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기가 왜 죽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점점 이이첨과 허균은 정권을 주도하기 위해 반목하기 시작한다. 특히 2월 23일에 유학 최숙(崔淑)이라는 자가 이이첨의 무리인 유의남(柳義男) 등을 고발하는 일이 있었다. 사관은 최숙이 허균이 내세운 가짜 인물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점차 폐모론에 대한 이이첨과 허균의 입장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이첨은 자기가 폐모론을 강행하면 나중에 그것이 일단 성사되고나서 악명을 얻을 것과 악명을 얻으면 광해의 총애가 사라질 것을 걱정해서 먼저 주문(奏聞)한 뒤에 (즉 중국의 허락을 받은 후에) 폐출하자는 소위 선주(先奏)설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반면에 허균은 빨리 광해의 신임을 사기를 원했으므로 곧장 폐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균이 인목대비를 무력으로 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대비를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침입할 수 없도록 출입구를 모두 봉쇄하고 아침 저녁 진공(進供)마저도 구멍을 통해서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사관은 허균이 다른 흉계를 펼칠 수 없자 마침내 군대를 일으키려 하다가 자신이 거꾸로 역모에 걸려 죽었다고 설명했다.
4/8에는 의금부가 경운궁(慶運宮)에 던져 넣은 흉격(凶檄)을 주웠던 김윤황(金胤黃)에 어떤 혐의점이 밝혀졌는지 그를 잡아들여 취조할 것을 청하였다.
곽영의 상소: 윤4/6에 풍기(豊基)에 사는 진사 곽영(郭瓔)이 이이첨과 허균을 탄핵하는 긴 상소를 올렸다. 이이첨이 폐모론에 일관성이 없이 왔다갔다하는 것(즉 선주(先奏)설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임금을 팔아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하고, 또 몇 가지 예를 열거하면서 이이첨이 세도를 부리고 있음을 탄핵하였다. 그러면서 이이첨의 무리 중 하나로 허균을 지목하고 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인길(閔仁佶)과 기준격(奇俊格)의 소에 대해 듣건대, 경운궁(慶運宮)에 투서(投書)한 자도 허균이고 이경준(李耕俊)[칠서의 한 사람]의 격서(檄書)를 써 준 자도 허균이고 이홍로(李弘老)와 통하여 모의한 자도 허균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한 사람의 몸에 악(惡)이란 악이 모두 집중되어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소문을 밝히기 위해서 허균을 국문하여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날 광해는 곽영의 상소 내용 중 새로 나온, 허균이 이경준의 격서를 지었다는 주장에 대해 처리하게 하였다. 다음 날인 윤4/7, 좌참찬 허균이 상소하여 곽영과 함께 신문을 받게 해달라고 청했다. 다음 날(윤4/8), 곽영을 국문하였는데, 허균에 대해서는 허균이 흉격을 지었다는 주장에 대해 물었다. 곽영은 소문을 들은 것과 소명국(蘇鳴國)에게서 이야기들은 것들이라고 진술한다. 그래서 다음 날 또 소명국을 국문하였는데, 허균의 건에 대해서는 기준격에게 들었다고 진술한다. 윤4/14에 추국청에서 광해에게, 소명국과 곽영의 주장에 '허균이 이경준의 격문을 지어 준 일 및 경운궁(慶運宮)에 격문을 던진 일은 모두 기준격(奇俊格)의 소에 나와 있다'고 하니 원래의 기준격의 소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여 광해가 들어주어 소들을 내려준다. 그것을 본 금부 당상들은 소의 내용을 보고 놀라서 광해에게 허균이나 기준격 중 누군가에게는 잘못이 있을 것이므로 조사하게 하라고 청하고 다른 대신들도 동의한다. 게다가 기준격은 기자헌의 지시를 따른 것일 것이므로 기자헌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는 "이 일은 친국(親鞫)하여 처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병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다."고 대답하며 즉시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허균을 두둔하고 곽영을 비난하는 상소들도 올라왔다. 대간들은 서궁에 대한 '폄손 절목'(인목대비의 지위를 강등시키는 일)을 내려달라고 계속 요청하는 한편 허균을 대역죄인으로 지목하기 시작한다. 특히 윤4/29일, 대간들은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이라고 부르고 "허균이 일생 동안 해 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며 허균의 죄를 열거한다.
    - 경운궁(慶運宮)에 격서(檄書)를 던지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역모를 꾸민 정상이 이미 민인길(閔仁佶)의 고발에서 드러남.
    - 이홍로(李弘老)와 결탁하여 동궁(東宮: 왕세자 시절의 광해)을 해치려 꾀한 사실이 또 기준격(奇俊格)의 소에서 나옴.
    - 그런데도 허균은 사실을 밝혀내려고 하지 않고 대론에 의탁해서 살아보려고 함. 사류가 그의 술수에 빠졌음.
    - 강상(綱常)을 어지럽힌 더러운 행동을 보면 다시 사람이라 할 수가 없음.
    - 요망스러운 참언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기(長技)임.
    - 조사에 유리하게 하려고 유생에게 소장을 올리도록 사주하고, 또 감히 요동(遼東)에 가려고 청하기까지 함. (허균이 중국을 이용해서 상황을 회피하려 한다는 혐의.)
이때 사관은 "허균이 거느리는 무리가 소장을 올려 삼사를 뒤흔들자 삼사가 참고 견디다 못해 공론(公論)을 인하여 탄핵한 것인데, 허균이 크게 군색해지자 대비(大妃)를 모해(謀害)하려는 흉모를 더욱 급히 진행시켰다."고 주장한다. 허균을 옹호하는 측에서도 대간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한편 허균, 민인길, 기준격 등의 국문 요청을 광해는 또 미루었다.
허균의 상소: 5/3일 좌참찬 허균이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변명을 하는 기나긴 상소를 올렸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기자헌 집안에서 자기를 원망하여 꾸민 모략이었다. 허균은 "작년 대론이 일어났을 때 기자헌이 대론을 반대하는 차자(간략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아 귀양갔는데도 그 집안에서는 나를 원망하고 있다.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올린 상소에 대해 양사가 조사하기를 원했는데도 광해의 허락이 없어서 자신도 변명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변명하는 상소를 올린다."는 내용으로 시작하였고, "소의 내용을 알지 못했는데, 곽영의 일로 해서 내려온 소를 보니 순전 모함이었는데, 임금이 병석에 있고 판부사도 뽑히지 않아서 이렇게 먼저 말씀 올린다."고 하면서 상소를 하게된 배경을 우선 설명했다. 그는 먼저 자신과 기자헌 집안이 원수가 된 내력을 상술하고 무고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1] 서로 원수가 된 내력:
    허균의 형 집안에서 이홍로(李弘老)와 절혼(絶婚)하였기에, 이홍로가 허균을 무함함. (복제(服制)를 삼가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 이홍로와 허균은 서로 원수가 됨. [이 내력은 또 8/18에 나옴.]
    1601년 이홍로가 감사로 있으면서 불법을 많이 저질렀는데 기자헌이 허균을 그 증인으로 내세워서 탄핵하려 했으나 허균은 보복의 인상이 있으므로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자헌이 허균에게 유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홍로는 오히려 허균이 자신의 비리를 누설했다고 의심하였다.
    1603년 4월 허성이 사위로 의창군(이름 珖)을 맞았는데, 허성의 부인이 그 후 5일만에 죽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결혼식과 상이 겹치면 좋지 않게 여겨지기 때문이었던 듯) 그것은 기자헌의 무함이었다. 기자헌은 허성에게 '자기의 무함이라는 것은 허균이 지어낸 말이다'하고 해명했고, 허균에 대해서는 크게 성을 내었다. 기자헌은 신율(申慄)을 통해 허균을 탄핵케 하여 허균은 파직되었다. 허균 강릉으로 내려갔는데, 기자헌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고 있었고 허성은 그것이 걱정이 되어 허균에게 편지로 사과하도록 시켰다.
    1606년(병오년) 중국 사신 주지번과 만났을 때 광해가 세자로 책봉되는 것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유영경(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죽임을 당함)은 싫어하고 기자헌과 심희수(沈喜壽)는 찬성이었다. 유영경이 기자헌 등을 내어쫓고 허균도 부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했다. 같이 유영경의 배척을 받는 입장이라 기자헌은 허균을 잘 대해주는 척하게 되었다.
    1613년(계축년) 겨울 초. 허균이 기자헌에게 인목대비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을 때 동의하지 않았다. 기자헌의 자질(子姪)이 모두 서양갑(徐羊甲)과 아주 친한 사이였는데 당시에 다행히 잡혀 들어가지 않았기에 앞으로도 문제가 없게 하려고 허균을 모함하고 있는 것이다.
    1614년(갑인년) 봄에 기자헌이 정승이 되었는데(영의정이 됨) 삼사가 일제히 그를 탄핵했다. 그런데 허균에게 그 아들들이 탄핵을 막아달라고 부탁하여 친구들에게 요청해서 막아준 일이 있다. 그런데도 기자헌의 아우 기윤헌(奇允獻)이 외설스러운 일에 휩쓸렸을 때(무슨 일?) 허균을 의심하였는데, 형 자헌에게 허균을 모함하여 '허균이 탄핵을 극력 지지했다'고 말했다. 기자헌은 허균을 극히 미워하기 시작했다. 자헌은 그 후로 허균을 여러 차례 모함했고, 흉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도망가면서 허균이 지은 것처럼 암시하기까지 하였다. 허균은 심지어 기자헌이 왕이 날 것이라는 곳에 첩을 장사지낸 일과 기준격과 기수발이 서양갑과 교분을 맺었던 일이 있다고 말한다.
    [2] 기준격의 고발에 대한 변명:
    기준격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명령으로 허균에게 와서 배웠음. 하지만 일상적인 이야기는 나눈 적은 없음.
    1. 의창 옹립: 의창군이 허균 형의 사위이기에 허균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꾸며낸 이야기임.
    2. 영창 옹립: 의창군 결혼(1603) 후 허균은 바로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고, 갑진년(1604) 8월에 수안 군수(遂安郡守)를 제수받고 부임, 을사년(1605) 11월에 파직됨. 12월에 원접사 종사관으로 되었고, 병오년(1606) 3월에 의주(義州)에서 영창대군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미 광해가 있어 세자로 확정되어 있었고, 백성이 따르고 있었다. 또 허균은 광해의 어머니인 공성 왕후(恭聖王后)의 촌수에 드는 친척이라 광해를 추대하려는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컸으니, 어찌 영창대군을 세우려 했겠으며 그런 것에 대한 말을 원수인 기자헌의 집안에 했겠느냐.
    3. 윤수겸과의 혼인 건: 혼인을 권한 적이 없음. 1611년 유배지에서 사면을 받고 11월 12일에 서울에 들어와 형을 만난 뒤 24일에 도로 부안(扶安)의 장사(庄舍)로 갔다가 임자년(1612) 2월 초에 돌아옴. 그 동안 기준격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허균과 허성은 김제남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혼인을 권하는 일 때문에 제남과 함께 윤수겸(尹守謙)의 집에 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 해 겨울에는 겨우 10여 일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수겸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수겸이 지금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제남과 허균은 만날 방법도 없었다. 이런 일은 만일 기준격이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벌써 밝혔어야 할 중대한 일이다. 그런데 기준격은 허균에게 10년을 가르침을 받았고 아버지에 대한 글을 두 번이나 받아갔다.
    4. 심광세와의 관계: 그런 일이 없음. 무신년(1608)에 허균이 공주(公州) 목사에서 파직되고 나서 전사(田舍)를 구해 볼 목적으로 부안에 갔다가 산거(山居)할 만한 곳을 바닷가에서 얻은 뒤 경영하던 중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고, 그 뒤(1610년말-1611년초: 과거 부정 사건) 죄로 유배될 적에 꼭 함열(咸悅)을 원했던 것은 대체로 그곳이 부안과 가까워 석방되면 곧바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축년(1613) 봄에도 부안에 내려갔는데, 이는 노복과 전토(田土)가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심광세(沈光世)와 같이 모의할 목적으로 부안에 내려갔던 것이겠는가.
    5. 윤수겸과의 혼인 건: 자세한 정황을 말함. 신해년(1611)에 허균의 집에 윤수겸이 몇 달 동안 들어와 산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 아들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허균은 다들 대군의 일 때문에 염려하고 있으니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정확한 의미는??], 결혼을 만류하게 만듦. 기준격은 허균이 만류했다는 사실을 둘어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무고하고 있음.
    6. 참서(讖書) 건: 이미 있는 얘기를 갖고 기준격이 꾸며낸 것임. 참서를 집에 두는 것은 죽을죄이기 때문에 갖고 있었을 리가 없고, 또 참서에 대한 얘기를 기준격(원수의 집안 아들)에게 할 리도 없다. 또 언급된 참설(讖說)은 20여년 전부터 있었고 천도에 관한 설은 임자년(1612)년에 이미 나온 것임.
    7. 심우영과의 관계: 처음엔 심우영이 문재(文才)가 있었고 친척이었기에 친하게 지냈으나, 교만하고 적자를 멸시하며 나라를 심하게 원망하기에 관계에 주의하고 있었음.
    8. 박응서(朴應犀)와의 관계: (기준격 상소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항임; 7서와 관계가 없었음을 밝히고자 한 것인 듯.) 박응서가 자신과 원한을 맺을 일이 있었음. 허균은 그가 위험한 사람임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고 그래서 박응서가 은상 강도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곧 모역이 있음을 알 수 있었음. 허균은 자신이 아무리 못났어도 서자들의 친구라는 말은 맞지 않다고 함.
    9. 정도전 흠모: 국초(國初)의 인물이었기에 시집의 앞에 온 것일 뿐. 허균은 정도전을 배척하는 시도 지은 적이 있고, 정도전과 권근을 배척하는 글을 짖기도 했음.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 삼군부 앞에 무기 벌여놓고는 / 임금 잊고 적자 바꿔 강상(綱常)을 어긴 일을. /
      계책을 세우자 마자 도전이 죽었으니 / 다리에서 폭사한 것 사람의 재앙 아니라오
      [君不見 / 三軍府前羅劍 / 忘君易嫡違天常 /
      締訖道傳死 / 中橋暴屍非人殃].
    10. 서양갑과의 관계: 그의 자(字)가 석선(石仙)인 것은 지금 처음으로 알았음. 서자들의 자는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법인데, 기준격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가 서양갑과 가까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임.
    11. 이경준(李耕俊)이 지은 흉격(兇檄): (이것도 기준격의 소에 나와 있지 않음) 이미 밝혀진 일인데도, 기준격이 꾸며서 모함하고 있는 것임.
    12. 법궁(法宮) 이어(移御): 법궁을 지었을 때 모두들 광해가 이어하기를 바랬고 걱정할 운세는 없었는데 기준격이 현혹시키고 있는 것임.
    13. 이이첨과의 관계: 이이첨의 집에 큰 뱀이 있다는 말 역시 무근이고, 이이첨과는 30년을 가까이 지내왔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그에게 의탁했다는 말은 말도 안 된다. 수렴청정 주장 등은 들었다면 바로 고발해야 할 중대한 일이므로 무고임이 분명함. 또한 기자헌은 허균을 없애려고 해왔으므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즉시 고발했을 것임.
    14. 변무와 대사(大事)의 지체 건: 이에 대해서도 기자헌은 반대를 했는데, 허균이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죄를 받을까 두려워했음. 그런데 변무까지 언급했으니 가소로움. 대사가 지체되는 것은 광해가 주저하고 있고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그렇게 된 것인데 사적인 보복을 위해서 허균이 지체하고 있다고 억지를 부렸음.
    15. 정협(鄭浹)과 이원형(李元亨) 건: 정협이 허균에게 원한을 가져 자신을 허위로 끌어들이지 않을까 걱정한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은 태연했음. 그리고 이원형은 당시 광주(廣州)에 있었음.
    16. 심이기(審食其)에 대한 말: 너무나 흉악한 무고.
    허균은 기자헌 집안이 근거 없는 일들로 자신을 모함하고 있고 있는 것이라 결론을 맺고는, 나아가서, 만일 기자헌과 기준격이 그런 것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면 역적죄를 짓는 것이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간들의 탄핵 내용에 대한 변명을 덧붙인다.
    [3] 대간의 탄핵에 대한 변명:
    탄핵하는 것에 대해 죄인으로 지목되는 자가 함부로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몇 가지 해명을 하고자 함.
    1. 사류 선동 모함. 허균이 박식하여 대론에 대해 일찍부터 사람들이 의논해왔지만 사람들을 선동하지는 않았음. 나라에 충성하는 사류들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님.
    2. 격서(檄書) 건. 민인길의 상소에 허균이 격서를 지었다는 얘기가 없고, 또 이홍로와 허균이 원수를 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도 대간들이 그런 무고들을 탄핵문에 넣은 것은 잘못임.
    3. 큰 소리 치며 다닌다는 주장. 그렇지 않음. 거의 나다니지도 않음.
    4. 상황을 피하려 요동으로 가고자 한다는 주장. 허균은 지금 아주 심한 병에 걸려 있는데, 그럴 수 있겠는가. (민인길이 상소한 지 17개월, 기준격이 상소한지 반년이 넘었음. 대간들은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음.)
    5. 공을 세워 상황을 피하려 한다는 주장. 허균이 광해를 지지한 것이 선조 때부터였고 영창대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임자년(1612)이었고 대론을 수립한 것이 계축년(1613)인데, 유생들의 상소는 11월이었고 기준격의 상소는 12월이었으므로 말도 안 되는 말임.
마지막으로 허균은 "양사가 허균을 '해명하려고 하지도 않고 있다'고 비난했기에 병중인 광해를 귀찮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광해의 양해를 구한다. 광해는 이것을 추국청에 내렸다. (이상 광해 10년 5/3) 그러나 5/22에도 양사에서 기준격·민인길·허균을 나국(잡아들여 심문함)하기를 청하지만, 광해는 자신의 건강과 담당 대신이 없음을 들어 여전히 허락지 않았다.
이즈음은 특히 서쪽 변방의 일로 시끄러운 시기였다. 그것은 그 동안 세력이 강해진 후금의 누루하치(노추 老酋)가 드디어 윤4월에 명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명은 조선에 원병을 뽑아 대기하라고 요구했다. 광해는 세력이 강해진 후금(여진이 세운 나라, 후에 청나라)을 공격하기도 부담스러워 군대를 국경지대인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위협을 가하는 정도로 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전쟁 소문이 돌면서 나라는 시끄러워져갔다. 징병, 군량준비, 무과시험 확대실시, 무기 제작, 전선(戰船) 건조 등의 전쟁 준비가 진행되었고 유언비어가 나돌아 피난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광해는 계속 백성들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런지 6월과 7월 동안, 잠시 기준격과 허균에 대한 공방은 잠시 사그라졌다. 이즈음 유성과 혜성이 하늘에 자주 나타났으며 광해가 왕권 회복을 위해 짓고 있던 인경궁과 경덕궁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서궁 폐출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광해는 항상 그래왔듯이 병 등을 핑계로 미루었다. 세자궁 소훈(昭訓: 종5품) 간택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허균의 딸이 유력한 대상자 중 하나였다. (허균의 사형으로 선발되지 못했다. 11/21일에도 아직 소훈 간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누루하치는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어본 광해에게는 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남대문 흉방 사건이 발생한다. 허균의 최후로 이끈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발생된 지 2주만에 허균이 처형되는데 기준격의 고발 내용에 대한 것은 진위가 밝혀지지 않았고 반면에 흉격 사건과 남대문 흉방 사건 등이 허균의 소행이라고 다른 사람들의 자복한 것이 대역죄를 성립시켰다. 전쟁의 위기에 직면한 광해의 심리와 이이첨 일당의 허균 제거 의도가 맞물려 허균은 재빨리 처형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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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흉방 사건 [괘방(掛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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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8월 10일에 발생했다. 남대문에 흉방이 붙었다. 남대문 별장들이 군사를 시켜 파기하려 했는데, 다른 관원[김애천(金愛天)]이 갖다 바쳤다. 하인준(河仁浚)은 장령 한명욱에게 그 흉서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 흉서를 누가 붙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별장들은 처리를 잘못한 죄로 잡혔다. 또한 즉시 하인준을 잡아 국문했다. 하인준의 말에 의하면, 대론(폐모론)에 관한 상소의 일로 소청(疏廳)에 있다가 아침 전에 남대문을 말을 타고 나가는데 행인들이 남대문에 모여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보니 대장(大將)이라고 쓴 글 아래에 서명을 하였고 '조선'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내용이 무척 흉악한 것이었다. 하인준은 방을 보았을 때가 진시(7-9시) 말엽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방은 서궁에 던져 넣은 격문과 비슷했는데, 끝에 "백성을 조문하고 죄를 벌하러 하남 대장군(河南大將軍)이 장차 이를 것이다." 고 되어 있었다. 광해는 큰상을 걸고라도 흉서를 붙인 자를 잡아들이라고 명한다.
14일, 한명욱은 하인준을 만났을 때가 아침해가 아직 나오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인준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는데 구태여 자기에게 흉방이 붙어있다는 말을 한 것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말했다. 광해는 이 일을 신속히 처리하라고 명한다. 대신들은 시간에 대한 주장이 다른 것을 보면 하인준이 의심스럽다는 의견과 인준이 스스로 보고한 것을 보면 흉방을 자신이 만든 것일 리가 없고 남들은 보고도 못본 체 했는데 보고한 것은 잘한 일이기 때문에 왜 말이 다른지에 대한 조사만 하면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편 우경방(禹慶邦)[훈련원 정]은 대론을 성사시키려는 상소들을 허균의 도움을 받아 올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곡절은 알지 못하겠지만 임금의 도장(인신, 印信)을 위조하였다는 혐의로 대역죄로 잡혀 있었다. (아마 사람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으려고 그런 듯.) 8/16에 유학(幼學) 한보길(韓輔吉) 등이 포도청에 우경방을 풀어달라는 글을 올렸고, 허균도 편지를 보내어 그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우경방이 자기의 이목(耳目)이 되어 대론에 대한 소장을 올리는 데 힘을 다했기에 공이 있는 자이고 인신을 위조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함을 받은 것인데 형벌이 가혹해서 거짓 자복을 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21일 현응민의 공초에는 우경방이 중이었다가 환속한 자라고 나온다.)
16일에 갑자기 광해는 기준격(奇俊格)과 허균(許筠) 등의 소를 추국청에 내려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였다. 남대문 흉방 사건에 허균이 관여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날인 17일, 드디어 허균과 기준격은 잡혀 의금부에 수감된다. 이날 '원종'이라는 사람이 허균을 구해내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소란을 피운 듯하다.
그리고 18일, 기준격과 허균은 정국을 당한다. 기준격은 이전 상소의 내용을 되풀이 진술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런 흉모를 즉시 고발하지 못한 것은, 당시에는 닥친 문제만을 해결해서 화를 받지 않으려고 생각했고, 나이도 어렸고, 자기 집안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조정에 많았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였다. 허균도 이전 5/3일의 상소와 같은 내용의 발언을 했고, 이홍로[기준격은 선조 때 허균과 이홍로가 조정 권세를 장악하려고 획책했다고 주장했음.]와 사이가 멀어진 내력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런 사람과 뜻을 함께 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대신들은 두 사람의 말의 진위 여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지만, 기준격이 두 번째 상소 끝에 첨부한 네 통의 서찰 중에 허균의 필적이 분명한 것이 있어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신문하고 또 그 동안 언급된 사람들을 조사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광해는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하인준을 다시 엄히 국문해서 흉서를 쓴 사람, 붙인 사람, 그리고 그 연유 등을 모두 알아내라고 지시한다. 21일, 허균에 대한 국청이 이어지고 있었다. 허균이 국청을 받고 하옥될 때 사람들이 칼과 수갑을 풀어주었는데 압송해 가는 도사['김개']가 방치했다고 하여 그가 잡혀 들어갔다. 그리고 허균의 처첩의 집에서 문서를 수색해 왔다.
21일자 사관의 주는 흥미롭다.
    "이 때에 허균이 무사를 많이 모으고 은밀히 승군을 청해서는 곧바로 대비궁을 범하여 일을 먼저 일으키고 나중에 아뢰려고 하였는데 왕도 이미 허락하였다. 그런데 삼창(三昌)[이이첨, 유희분, 박승종]의 집에서 그 반란의 상황을 염탐해 알아내고는 허균이 대론을 가탁하여 남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한다고 밀계를 올리니 왕이 크게 놀라 마침내 기준격 등의 소를 내려서 마치 전의 일을 캐묻는 것처럼 한 것이다. 그러자 삼사에서는 또 허균이 반역을 도모한 정상을 아뢰고 아울러 소를 올린 유생을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므로 이에 사방으로 체포하러 나간 것이다. 대개 허균이 이미 이이첨과 대론(大論)의 주도권을 다투었는 데다가 이첨은 또 허균이 필경은 불궤를 꾀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마침내 유(柳)·박(朴)과 함께 같은 내용으로 고변을 하여 그 입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왕도 대비를 축출하는 일을 묵인하고 있었는데, 허균이 더 큰일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이첨 등을 통해서 알고는 허균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라는 말이다. 허균의 그 더 큰일, 즉 여기서 말한 불궤(不軌)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광해를 그대로 두고 그의 신임을 확실하게 얻어서 권력을 잡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는 아예 광해를 내쫓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혁명, 또는 심지어 자신이 왕이 되려는 역성 혁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광해군일기"는 허균 처형 후에 진술한 허균 일당의 진술을 통해 둘째 번임을 주장한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허균은 삭탈관직되었고, 딸이 동궁의 소훈(昭訓)으로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었는데 금지가 되었다. 지난 흉격 사건에서 흉격을 처음 발견했던 김윤황도 국문에 처해졌다. 그리고 흉격 사건에 당시에는 현응민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었는데, 이때에는 그 사건에 대해 현응민을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허균이 우경방을 풀어주라는 편지를 포도 대장에게 보낸 것도 조사하고 우경방도 의금부에 수감하고 현응민과 함께 국문에 처하라고 하였다. 허균은 우경방을 위해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 전과 같은 내용의 진술을 했다.
드디어 허균과 기준격을 면질시켰다. 준격이 말한다.
“비록 이것이 오래 전의 일이긴 하나, 이미 고변을 한 이상 다만 일의 사실 여부만을 살필 뿐이니, 늦게 고했다는 것으로 죄를 얻었다는 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허균은 성격이 원숭이처럼 경박하여 묻지도 않은 말을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는 말을 날조하여 답하니 만약 국문을 한다면 그의 성격이 경박하므로 한 차례도 안되어 반드시 승복할 것입니다.”
이에 허균이 대답한다.
“이렇게 흉역한 말을 원수의 집이라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어내다니 더욱 사리에 닿지 않습니다. 아무리 날조해서 말한다고 하더라도 수겸 등이 모두 살아 있으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 국문하시는 것을 저가 어찌 감히 지휘한단 말입니까. 신이 하지 않은 일은 비록 사지를 자르고 가죽을 벗긴다 하더라도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준격의 말이 이어진다.
“허균이 말하기를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을 통해 궁중의 일을 들으니 선조(先朝)께서 승하할 적에 자못 수상한 말이 있었다고 하더라.' 하였는데, 신은 그 말을 듣고 나자 온 몸이 써늘해지는 듯하였습니다. 기운을 안정시키고 천천히 묻기를 '우리 집안도 외척의 족속이나 평소에 듣지 못한 말이다. 어찌하여 이에 이러한 말을 발설하는가?' 하자, 허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 말의 허실이 무슨 상관인가. 다만 죄를 삼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그는 본래 모든 악을 다 갖추고 있어서 세상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흉역의 말을 거리낌없이 말한 것이니 참으로 가슴 아픕니다.”
허균이 대답한다.
“고금 천하에 난신 적자가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마는 군상을 심하게 무함하는 말이 이처럼 참혹했던 자는 없었습니다. 그가 비록 나이가 어렸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말을 들었다면 어째서 그때 즉시 고하지 않고 이에 자기 아비가 죄를 얻은 후에야 허위를 날조하여 무고한단 말입니까. 그의 마음이 역적질을 하는 데 태연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말을 뱉어낼 수 있겠습니까. 선왕께서 승하하시던 날에는 양궁이 각각 처해 있었고 그간에는 허다한 비빈들과 모든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어 가릴 수 없었습니다. 준격이 근거도 없는 말을 지어내어 신을 죄에 빠뜨리고 성상을 무함하고자 하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준격은 말한다.
“유편사석(有扁斯石)의 설은 그의 집안의 의논이었으니 본래 패려궂은 집안입니다. 그는, 신의 집안이 그의 정상을 환하게 알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에 허균이 답한다.
“유편사석의 설은 신의 형이 늙고 병들었을 때 심희수의 사주를 받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때 신이 극력 저지하였으나 할 수 없어서 승지 홍경신에게 통하여 그로 하여금 상소를 되돌려 주라고까지 하였는데 심희수가 재차 권하여 했던 것이나, 이것 또한 신이 알고 있습니다.”
준격이 또 주장하였다.
“허균이 이홍로, 김공량의 첩과 한 짓들은 조호(曺浩)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허균은 이에 대해,
“의창군(義昌君)과 성혼을 한 뒤부터 신은 늘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공량(公亮)과는 서로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신의 첩과 공량의 첩이 서로 교제한 자취는 공량과 그의 첩이 아직도 살아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기자헌과는 의논이 맞지 않았는데 대론이 한번 발동된 뒤에 자헌이 먼저 흉한 차자를 올려 죄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감히 상을 원망하지는 못하고 신에게 허물을 돌리려고 어린 자식을 사주하여 죄를 얽어대어 신을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하고 답한다. 준격은
“허균은 인사(人事)를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나 다름이 없으며 전도되고 요망스럽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신을 어린아이로 여겼기 때문에 흉역스러운 말을 무수히 발설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 굳게 숨기고 마음속으로 대질하기를 꺼려 중국으로 가서 죄를 면해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의 정상이 어찌 뚜렷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는 공론을 빙자하여 개인적인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와 더불어 한 칼에 같이 죽을지언정 그의 정상을 남김없이 진달하겠습니다."
하고 주장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대론이라는 것은 조정의 대론인데 어찌 저 역적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조정의 의논을 훔쳐서 자신의 죄를 면해보려고 한 것이니 한편으로는 가소롭습니다. 그는 본래 청현직(淸顯職)을 평소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매양 갑자기 부귀해지기를 바라 감히 이와 같은 흉모를 꾸민 것입니다. 그는 또 성품이 경솔하고 위엄이 없어 비록 미천한 자라도 자기와 대등한 자처럼 대우하였습니다. 그는 또 화란(禍亂)을 즐기는 자로서 종당에는 반드시 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가 답한 말은 모두 억지를 써서 쟁변한 것으로 결국은 명백하게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허균이 대답한다.
“준격의 온갖 말은 모두 회피하며 꾸며댄 말입니다. 이제 이 흉언을 즉시 고발하지 않았다면 이미 신자로서의 의리를 잃은 것입니다. 더구나 증거도 없는 말로 죄를 얽어댈 계획을 꾸몄으니 그 계획은 흉악하고 그 마음은 어리석습니다. 하늘이 밝게 살펴보고 있는데 그가 어찌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우경방(禹慶邦)은 국문 중에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즉 자신이 몇 사람과 함께 상소를 올리려 할 때 허균이 간접적으로 도와준 적은 있지만, 그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현응민과의 교제도 없었다. 허균이 어떤 뜻으로 자기의 이목이라 주장했는지 모르겠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은 대역죄 혐의를 받고 있어서 서로 관계를 부정하는 심리가 작용해서 나온 것들로 볼 수도 있다.
현응민(玄應旻)을 국문하였다. 그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나는 허균의 외가 얼족인데 허균의 집에 붙어살고 있어 집안 일을 잘 알고 있다. 유생들이 허균의 집에 출입하면서 대론을 논의하고 허균이 그들의 소의 초안을 써주는 일이 많았다. 허균에게 이들이 누구냐고 하니, 중이었다가 환속한 우경방이 데려온 무리라 하였다.
    하인준(河仁浚)은 나라를 위해 대론에만 전념한 사람이다. 그리고 경운궁 흉격 사건은 여러 명이 상소를 올렸기에 내용을 알았지만, 남대문의 참언을 적은 방문과 금호문(金虎門)의 투서, 남대문의 괘방(掛榜) 사건은 이른바 익명서이니 내용을 알 리가 없다.
    우경방은 금년에 허균의 집을 드나들어서 잠시 서로 알고 지내기는 했지만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갇힌 허균을 보러 금부에 갔던 것은, 신이 허균에게 의식(衣食)을 의지해서 살아왔는데 허균이 갇혔으니 인정상 가본 것이다.
같은 날(8/21) 계속해서 민인길을 국문했다. 그는 전년도 1월에 흉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들은 얘기를 상소했었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의 상소 내용을 반복해서 진술했다. 그렇게 기나긴 하루가 저물어갔다. 광해는 처음에 허균이 하옥될 때의 소란을 의식해서인지 허균을 날이 저물기 전에 먼저 하옥시키라고 명한다.
다음 날(22일)이 밝았다. 대신들의 말에 의하면, 그 동안 중들이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한 사실이 있고, 괴한들이 밤에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질러 백성들을 협박해서 소란을 유도하고, 원수를 갚으려는 유구(琉球)의 군대가 와서 섬 속에 숨어 있다는 설이 유포되었었다고 한다. 이것들이 모두 허균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다. 허균이 서궁을 치려고 분위기를 만드느라 그랬다고 주장되었다.
이 날은 고문과 취조가 계속된 날이다. 당시의 고문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극심한 것이었다. 흉격을 처음 발견한 김윤황(金胤黃)과 남대문 방을 보았다고 말한 하인준(河仁浚)은 압슬형을 받았고, 하인준과 허균의 면질이 있었고, 허균이 갇힐 때 소란을 피웠다는 원종(元悰), 사간(司諫)으로서 허균의 일파로 지목된 신광업(辛光業), 흉격 사건 때 이름이 언급되었던 이원형(李元亨), 허균의 사위 이사성 등에 대한 국문이 있었다. 대역의 혐의를 피하고 목숨을 부지하려 허균과의 관계를 멀리 이야기한 경우가 많다.
하인준은 지난밤에 허균이 같은 옥중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우경방, 민인길, 현응민이 갇혀 있는데 응민은 반드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성도 필연적으로 수감될 터인데 사성은 반드시 장차 말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털어놓는다. 이 말을 확인하려 허균과 면질을 시켰는데, 하인준은 다음과 같이 다시 설명했다.
    "이번 달 10일에 한명욱의 집에 가다가 지나가는 길에 흉방을 보았는데 참혹하여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균의 집에 들러 흉방에 대해 말하였더니, 허균이 말하기를 '우리들에게는 다행이다.' 하였습니다. 전날 갇혔을 때 허균과 같은 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이 민인길·우경방·현응민 등이 갇혔다는 말을 듣고는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말하기를 '기가(奇家)와의 면질은 변론하기가 어렵지 않으나 우경방 등의 일은 매우 걱정된다. 민인길이 갇히면 반드시 이사성의 흉격에 대한 일을 고할 것이다. 현응민은 죽어도 잡소리는 안하겠지만 이사성·우경방은 반드시 굳게 견디지 못할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는가.' 하였습니다. 이른바 흉방에 대해 '우리 무리에게는 다행이다.' 라고 한 것은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원종은 허균과는 젊어서부터 알고 지내서 절친하지만, 허균이 체포되어 국청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멀리서 바라봤을 뿐 옥문을 부수고 허균을 탈취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했다. 신광업은 현응민이 찾아와서 허균 일을 잘 봐달라고 부탁해서 허균이 두려워서 말을 적당히 받은 일이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원형은 지난 흉격 사건에 대해 그 즈음의 상소들에 나왔던 내용과 유사한 발언을 했다. 이사성은 흉격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민인길에게 전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민인길과 친분이 없어서 그에게 흉격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리 없다고 진술했다. 다만 그는 당시 기정승(기자헌)의 차자(임금께 올리는 간략한 상소)에서 장인(허균)을 암시한 것을 보고 허균에 처사에 대해 탄식을 하고 다녔는데, 그것을 듣고 민인길이 말을 꾸며낸 것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고 허균이 비록 장인이지만 사람됨이 문제가 있어 가까이 지내지 않았었다고 진술했다.
23일에 광해는 허균에 대해 대신들이 논의하여 결론을 빨리 내라고 재촉한다. 이 날은 김윤황에게 고문을 가하였고, 하인준이 다시 압슬형을 받았다. 그리고 허균의 무리로 지목된 황정필(黃廷弼)을 국문했다. 그리고 허균의 일당으로 지목된 사람들, 즉 윤유겸, 황정필, 무사 김시량, 허균의 종 돌한, 전 부정 홍연기 등을 잡아 가두었다.
우선 김윤황이 고문을 받고 자복했다. 작년 1월 18일 초저녁에 허균이 흉격을 주며 경운궁 안에 던져 넣으라 하여 19일 입번하던 날 던져 넣고 20일에 주워서 보고했다고 했다. 무슨 내용의 일인지는 허균이 설명해 주지 않아서 내용을 모르고 한 일이라고 변명했다.
하인준 역시 이 날의 압슬형을 받고 자복하였다. 그는 계속된 압슬형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흉서를 만들거나 붙이는 것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대신 그와 비슷한 내용의 익명 언서(諺書)를 올해 1월에 허균의 심복인 황정필이 갖고 있는 것을 보았었다고 진술했다.
    "반 폭짜리 백지에 주홍색으로 쓴 그 글의 내용은 대략 '이이첨·김개·허균 등이 반역을 모의하여 사람을 많이 죽이고 주상으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하게 하니, 이제 신병(新兵)이 크게 일어나 이이첨 이하 하인준·민심·황정필 등을 죽일 것이다. 앞으로라도 조금 대론을 늦추면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에 '신장(神將)'이라고 쓰고 그 아래에 서명을 하였으니 일이 남대문 흉서와 어찌 같지 않습니까. 그때 이 흉서를 함께 본 자는 임징지(任徵之)·민심(閔)·이훤(李萱)이었습니다."
그리고 남대문 흉방을 본 사람들이 자기뿐만이 아니며, 허균과 황정필이 흉방에 자기 이름을 넣은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 소행으로 의심하지 못하도록 그런 것이며, 흉방은 허균이 만들었고, 쓰기는 현응민이 썼을 것이며, 방을 붙인 것은 현응민이나 황정필 중 한 사람이라고 추측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균이 황정필을 위해 과거에서 글을 써 주었다고 부언했다.
이런 하인준의 발언에 대해 황정필을 국문하였다. 황정필은 하인준이 자신에게 업무 관련하여 욕을 본 적이 있어서 자기를 미워하여 무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월의 익명 언서는 자기도 본 적으며 거기에는 '너희들이 유생들을 몰아다가 위협하여 대론에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는데 계속하면 해를 끼치겠다'는 내용의 협박이 들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대문의 흉방과 허균의 흉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진술하였다.
대신들은 김윤황과 하인준의 진술만으로 허균을 처형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결안(結案: 사형집행 확정 절차 또는 문서)을 받아 처형하기를 주장했다. 광해는 김윤황과 하인준의 자복에 의거해서만 결안을 받는다면 흉격 등의 혐의로만 처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준격의 상소에 나온 역모 혐의 등을 밝히기를 원했다. 광해는 김윤황과 하인준의 자복 내용들도 다시 확인할 것과 미심쩍은 부분들을 상세히 알아낼 것을 분부하고, 특히 허균에게서 밝혀내야 할 사항들이 많으니 섣불리 사형에 처하지(正刑) 말 것을 분부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오늘 김윤황과 하인준에게 허균에 관한 사항들을 일일이 다시 물으면 사형 당할 것이 확실해졌다고 포기하고 밤에 자살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내일 조사하라고 청하였다. 이런 행위들은 김윤황과 하인준이 대충 자복은 했지만 서로 떠넘기는 것도 많고 해서 자세한 전말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허균을 죽이려고 안달이 난 이이첨의 의도가 작용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이이첨이 자신의 관련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해서) 이후 고문을 받은 사람들은 심한 고문에 줄줄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의 24일. 이이첨의 무리를 중심으로 한 대신들은 어떻게든 옥사를 빨리 완결하려고 허균을 사형시키라고 광해에게 거듭 거듭 강요한다. 광해는 친국을 할 것이니 그때 정하겠다고 맞섰다. 광해는 이렇게 말했다.
    “근일에 국청에서 신문하는 것이 자못 허술한 일이 많다. 김윤황(金胤黃)과 하인준(河仁浚)이 공초한 일 중에 다시 신문할 만한 단서가 있는 데도 상세하게 캐묻지 않고 먼저 역적의 괴수를 정형할 것을 청하니 극히 타당하지 못하다. 금후로는 죄인이 공초한 일에 대해서는 다시 더 반복하여 상세하게 물으라. 또 역적 허균이 저지른 짓이 단지 흉격과 흉서에만 그친다 하더라도 당연히 반복하여 끝까지 물어서 그 실정을 다 알아낸 연후에 나라의 형으로 바루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근래에 역모를 꾀하여 당을 모은 일과 산에 올라가 밤에 소리쳐서 도성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치 바로 뒤에 있는 불길이나 맹수를 피하듯이 무너져 도망하게 한 것은 진실로 만고에 없던 큰 변고이다. 이 일은 옥당이 차자로 논했을 뿐만이 아니라 나라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서궁을 빙자하여 의탁해서 중외의 무뢰한 흉도들을 불러모았고, 날짜를 정해 거사하려고 재삼 중들을 먹여주는 등 정적이 매우 수상하다는 상황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들은 지 오래이다. 그런데 한 사람도 상변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근래에 매양 고변한 자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역적 허균이 저지른 각 항목을 일일이 엄히 국문한 후에 통쾌하게 왕법을 시행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다만 양사의 계사가 이와 같으니 다시 더 상세하게 의논하여 처치하라.”
그러나 역시 광해도 대신들의 강경한 요청을 전적으로 물리칠 수 없어 마지막 말에 말미를 둔 것이었다. 드디어 광해가 우의정 박홍구(朴弘耉), 의금부 당상 이이첨(李爾瞻) 이하 많은 대신들을 이끌고 인정전으로 나아가 친국을 했다. 우경방과 현응민이 승복하였고, 특히 현응민은 "흉서는 모두 신이 한 짓으로 허균은 모르는 일입니다. 단지 신만을 정형하소서. 허균이 죽는 것은 억울합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에게로 죄를 돌렸다. 광해가 흉격의 일을 꾸민 의도를 물으니, 현응민은 "이것은 현란시키려는 계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찌 진짜로 이러한 사실이 있었겠습니까."하고 진술했다.
그리고 대신들과 광해 사이의 힘겨루기가 있었다. 먼저 박홍구, 이이첨 등의 대신들은 허균의 죄상이 이미 우경방, 김윤황 등에게서 드러났으므로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빨리 정형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는 정형을 속히 해야 하기는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을 물어본 뒤에 정형을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는가 하고 반문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당장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허균이 도당을 끌어 모았으니 대론을 거짓으로 주장하며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컨대 '승도들을 꾀어 모으고 산에 올라가 밤에 소리쳐서 서울의 인심을 흉흉하게 만든 것' 등은 확실하게 알아내지 않아도 되는 하찮은 일일뿐이며, 대역죄는 빨리 처형해야 백성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압력을 가했다. 광해는 다시 "오늘 정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문한 뒤에 정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고 자기 뜻을 보였지만 이이첨 등은 다시 "지금 만약 다시 묻는다면 그는 반드시 잠깐 사이에 살아날 계책을 꾸며 다시 함부로 말을 낼 것이니 도성의 백성들을 진정시킬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광해는 허락을 했다.
여기서 실록에는 "왕이 끝내 군신들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라고 되어 있다. 실록은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들이 그렇게 강경하게 나왔던 것은 허균과 김개(허균의 심복으로 지목되어 신문 받다가 죽음)가 다시 국문을 받으면 자신들이 그간의 사건에 관여한 정상이 다 밝혀져 자기들도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서 그랬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허균과 김개에게 심복들을 보내 잠깐만 참으면 벗어날 것이라는 말을 전하게 하고, 또 허균의 딸이 세자궁에 후궁으로 뽑혀 들어갈 것이므로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등,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해 왔었다. 광해가 친국할 때 자세히 물어보려 하자 당황한 이이첨의 무리들은 왕을 협박하다시피 바로 끌고 나가 사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허균은 나오라는 재촉을 받았고, 그때서야 사형 받을 것을 깨닫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크게 소리쳤다. 대신들이 모두 못들은 척하였고, 왕도 어쩔 수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
허균(許筠)·하인준(河仁浚)·현응민(玄應旻)·우경방(禹慶邦)·김윤황(金胤黃)을 서쪽 저자거리에서 정형하였는데, 그때 백관에게 명하여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 실록에 기록된 죄상은 다음과 같다.
    ○ 허균은 왕을 협박하여 공초를 받지 못하게 하고, 단지 기준격의 전후 소 중에 나타난 흉모의 곡절과, 김윤황을 사주하여 흉격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과, 남대문의 흉방에 대해서 하인준이 허균이 했다고 이른 것, 몰래 승도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한 것, 산에 올라가 밤에 소리쳐서 도성의 백성들을 협박하여 나가게 한 것, 유구(琉球)의 군대가 원수를 갚으러 와서 섬에 숨어있다고 한 설 등이 모두 허균이 한 것이라고 전후의 흉모에 대해 윤황과 하인준이 일일이 승복한 죄인데, 허균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케 하였다.
    ○ 하인준은 흉방에 동참한 죄이다.
    ○ 현응민은 역적 균의 이목과 복심이 되어 밤낮으로 함께 거처하면서 무릇 그가 행하는 일은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과 남대문의 흉방을 응민이 썼고 산에 올라 밤에 소리친 것을 응민이 하였다는 설이 허균의 첩인 추섬(秋蟾)의 공초에서 나온 죄이다.
    ○ 우경방은 군목에 같은 당인의 성명을 나열해 쓰고 또 결사 맹문(結死盟文)을 지어 한보길 등과 죽음을 각오한 교유를 맺었다는 것과, 은밀히 흉계를 꾸밈에 있어 적 허균의 지휘를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 또 더욱 흉참한 갑자(甲子)를 나무에 새기는 등 역모에 동참한 죄이다.
    ○ 김윤황은 허균의 지시와 사주를 듣고 흉계를 이루려고 흉격을 화살에 싸서 경운궁 안에 던져 넣은 죄이다.
그리고 연좌와 적몰, 집을 부수고 못을 파는 일, 그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는 일, 그 읍호를 강등하는 일 등을 모두 율문에 따라 시행하였다.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고 했다고 한다.

허균이 처형된 날(24일)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관련자들의 국문이 이어졌다. 실록에는 큰 신문은 대략 11월까지 기록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았고,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죽은 사람도 여럿이었다.
혐의가 있다고 이름이 언급된 자들은 무척 많은데, 허균의 가족, 하인, 일가 사람들도 포함된다. 가족으로는 허균의 첩 추섬(秋蟾), 성옥(成玉), 옥매(玉梅)가 나오고 일가로는 허실(許實)·허부(許)·허채(許寀), 허친, 허보(許寶) (허균의 조카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첩 성옥의 아버지 송취대(宋就大)가 나온다. 그는 허균과 절친했으며, 사건이 터지자 호남으로 (아마 딸과 함께) 달아났다가 잡혀 국문을 받았다(10/3).
허균의 역모와 관련되어 다음과 같은 많은 인물들이 언급된다:
강호여(康?如), 김경(金璥), 김내용(金乃鎔), 김대하(金大河), 김상립(金尙立), 김상하(金尙夏), 김용강(金用剛), 김윤휘(金胤輝), 김정량(金廷亮), 김홍무(金弘武), 김홍원(金弘愿), 김효남(金孝男), 문홍경(文弘慶), 박린(朴麟), 박몽준(朴夢俊), 박시준(朴時俊), 박충남, 박홍익(朴弘益), 배득길(裵得吉), 백대진(白大璡), 변열(邊說), 설경인(薛景仁), 설구인(薛求仁), 송효남(宋孝男), 신보(申溥), 신천룡(愼天龍), 안억주(安億柱), 양덕윤(梁德潤), 양홍(梁泓), 오대인(吳大仁), 오언경(吳彦卿), 우경방, 우민(禹民), 윤유겸(尹惟謙), 이강, 이거(李渠), 이건원(李乾元), 이구(李?), 이국광(李國光), 이국량(李國亮), 이국헌(李國獻), 이송수(李松壽), 이승길(李承吉), 이훤(李萱), 이희직(李希直), 임경후(任慶後), 임국신(任國信), 임급(任扱), 임덕후(任德後), 임원(任援), 장응기(張應麒), 장의범(張懿範), 장호녕(張好寧), 전응민(田應民), 정유준(丁有浚), 정유후(丁有後), 정주한(鄭周翰), 정지문(鄭之問), 정흔(鄭昕), 최광필(崔光弼), 최상질(崔尙質), 하인준(河仁浚), 한보길(韓輔吉), 한의형(韓義亨), 한천정(韓天挺), 홍연기(洪衍箕), 홍인백(洪仁伯), 황정필(黃廷弼).
유생 서의중(徐義中), 이해(李垓), 참봉 양홍(梁泓).
상민: 김귀형(金貴亨), 김업량(金業良), 김은국(金銀國), 차극룡(車克龍).
천민: 허균의 종 돌동[石乙同], 종남(終男), 돌이.
기타: 현응민의 처 순가시(順加屎), 우경방의 처 무옥(戊玉), 등등.
* 차극룡(車克龍): 허균의 심복으로서 경운궁의 흉격에 참여하였다는 혐의.
* 박충남: 서리로서, 허균이 효수된 뒤에 그의 머리를 가져가려고 했고, 수직 군사를 마구 때렸다는 혐의.
* 송효남: 허균의 무리이고, 허균이 참서(懺書)를 가감하고 효남은 그 글을 썼다는 혐의를 받음.
* 전응민(田應民): 서리(書吏)로서, 허균의 심복이 되어 김업량(金業良)과 더불어 재산을 풀어 뇌물을 썼다는 혐의.
* 박홍익(朴弘益): 이건원(李乾元)을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렸는데도 자기 집에 숨겨 두고 도망시킬 계책을 세운 혐의.
* 김은국(金銀國)·김귀형(金貴亨): 수철장(水鐵匠). 우경방의 군목(軍目)에 이름이 들어 있었음.
* 박린(朴麟): 별시위(別侍衛)로서, 우경방의 군목(軍目)에 이름이 들어 있었음.
* 김용강(金用剛): 김상립(金尙立) 등과 더불어 상소하여 하인준(河仁俊)을 구원함.
* 이해(李垓)와 서의중(徐義中): 호남의 유생으로 허균의 심복이었다. 대론(大論)에 가탁해서 무뢰배와 산승(山僧)들과 결탁하였는데 그 자취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전파되어 있었다.
* 장의범(張懿範): 김상립의 상소에 참여하여 역적을 구원했다.
* 백대진(白大璡): 선전관으러서, 허균이 원정(元情: 조서)하던 날, 허균이 죄가 없다고 외쳐대었음. 파직됨. (9/18)
* 이국량, 종남, 이국헌은 모두 고문 받아 죽었다. (9/21)
특히 김개, 원종(元悰), 김우성(金佑成)의 이름이 거론된다. 김개는 허균이 하옥될 때 형구를 풀어주었는데 허균과의 관계로부터 그 이상의 죄가 있다고 대신들이 주장했다. 그리고 김우성은 역모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들에 대한 처리는 미루어지다가 김개와 김우성은 고문으로 매를 맞다가 죽었다고 나온다. 대략 11월쯤이 아닐까 한다. 남은 원종에 대한 처벌은 줄기차게 요구되었으나 광해는 2년 후인 광해 12년(1620) 7/15에야 귀양을 보낸다. 원종은 광해조에서는 살아남았고, 인조반정 초에 죽음을 당했다(인조 1년 5/4).
허균의 첩 추섬(8/24)과 황정필(8/25), 그리고 설구인(10/4) 등은 고문을 받고 허균이 역모를 꾸민 일들을 자복한다. 이들의 자복을 중심으로 한 반역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경운궁의 경운궁의 흉격과 남대문의 흉방은 모두 허균이 한 일이다. 방을 붙인 것은 하인준이나 현응민이었을 것이다.
    반역 계획은 3년 전부터 일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왕으로서 의창군을 추대(혁명)하려고도 했고 허균이 직접 추대(역성혁명)를 받으려고도 했다. 허균이 경망스러워 의창군을 추대하려는 의견도 있었고, 허균이 모르는 것이 없고 문장에 뛰어난 인물이기에 그를 추대하려는 의견도 있었다.
    대개 우선은 대론을 성사시키는 것, 즉 인목대비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 듯하다. 우경방이 금년 1월에 허균, 현응민, 하인준, 황정필, 김윤황, 배득길, 장호령, 설구인 등과 함께 대론을 성사시키기 위해 결사맹문(結死盟文)을 만들었다. 뒤에 허균이 그것을 더 발전시켜 흉모를 제안했다.
    우선 7, 8월 사이에 인목대비를 제거하는 거사를 일으켜 보고 그것이 성공하면 허균이 스스로 이조 판서 겸 대제학이 되어서 가담한 유생들에게 급제 및 벼슬을 주는 방법을 동원하여 일단 민심을 수습한 후에 실권을 잡아 천하를 지배하려는 계획도 언급되었다. 만일 그것이 성사되지 않으면 반역을 하겠다고 하였다.
    6월에도 흉모를 의논했는데, 한보길, 한천정, 박몽준, 김대하, 우경방, 설구인 등이 참여를 했다. 전쟁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피난 가게 만든 후에 거사하려 한 듯하다. 당시는 후금의 누루하치 때문에 곧 전쟁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실제 정묘호란은 1627년, 인조 때 일어남.) 군사들이 평안도로 이동하면 도성이 비게 되는 틈을 타서 쉽게 거사하려 한 것이었다.
    승군(僧軍)과 포수(砲手)들을 동원할 계획도 있었다. 배득길이 승군을 이끌고 왕이 궁을 나왔을 때 거사하여 왕과 왕세자를 치려는 계획이 제시되었다. 반역의 명분은 왕이 그 동안 옥사를 많이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고, 또 궁궐을 짓는 일로 백성들을 학대한다는 것이었다. 이 일에는 이국량, 이국광, 이건원, 양홍, 황정필, 윤유겸, 이국헌 등이 적극적이었고, 우경방의 심복으로는 김효남, 김내용, 봉학, 김응진, 임국신 등이 있었다. 전라도 나주의 군병은 그쪽에 관련이 있는 김대하가 일으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무에 갑자(甲子)를 새겨 두었다(신표). 그리고 미리 요직에 앉힐 인물들을 다 정해서 기록해 놓았다. 예를 들어 허균은 한찬남이 쓸만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경방은 평안·황해도의 군병을 담당하고, 김업량은 은화를 관리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제거할 인물들도 정해 놓았는데, 허균은 자기가 힘을 써서 급제시켜주었지만 동조하지 않는 기준격과 기수발(奇秀發), 그리고 허균의 정적 황덕부(黃德符)와 판의금 이이첨, 그리고 유희분, 박자홍 등을 죽이려 계획했다. 거사일은 8월 15일 정도를 목표로 했고, 늦어도 9월 20일까지는 성사시키려 하였다.
황정필은 모진 고문을 받고 25일에 자복했기에 결안을 받았다. 밤새 자결할 가능성도 있어 잘 지켰다고 했는데, 다음 날 죽었다고 해서 시체에다가 정형을 가했다. 그런데 실은 죽지 않고 살아있어 사형시키기 위해 수레에 실을 때 아내를 불렀다고 한다. 이이첨 일당이 빨리 입을 막기 위해 죽였다는 말이 돌았다.
허균의 처형 절차상 문제를 둘러싼 유희분(柳希奮)과 이이첨의 첨예한 힘겨루기가 있었다. 유희분은 자세한 정황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허균을 처형한 것이 잘못되었고 또 다른 인물들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이이첨 일파가 숨기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이첨은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이이첨은 김개와 원종 등이 아직 처형되지 않아 자신의 거취가 탄로날 것을 염려하여 죽이기를 청했고, 또 역적들이 '어차피 죽을 테니 무함하여 보복이나 하자'고 하여 아무나 끌어넣는다는 주장을 하여 혹시 그들 입에 자신들의 이름이 오르더라도 살아날 수 있는 계책을 부렸다.
한편 기준격은 허균의 역모를 늦게 고발하였다는 죄상으로 장배(杖配) 3년에 처해졌다. 기윤헌(奇允獻)도 국문을 받았는데(8/27) 잡혀있는 기준격을 향해, "나와 제 어미의 말을 듣지 않더니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 진의를 조사하고, 또 그가 소명국(蘇鳴國)·김대하(金大河)와 가까웠다는 혐의를 받아서였다.
허균의 형인 허성의 사위이며, 광해의 14살 연하 이복동생인 의창군 이광(義昌君李珖)이 허균의 사건과 연루되어 추대를 받았다는 이유로 대신들은 끊임없이 제거할 것을 청했다. 의창군은 위리 안치의 명을 받기도 했으나(9/24) 무사했고 대신들의 요청을 광해는 끝까지 듣지 않았다.
허채와 허친은 허봉의 아들들, 즉 허균의 조카들인데, 허균과 사이가 떴었다고 변명한다. 게다가 허균의 첩 추섬이 현응민 등과 간통해서 그 사실을 전해들어 이야기한 자신들을 원망하였기에 모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허부도 허균의 조카인데, 역시 허균과 거의 원수처럼 지내왔다고 변명했다. 송효남도 혀균이 1614년 변무 사건 당시 중국에 천추사로 갔을 때 사자관(寫字官)으로 따라 간 적이 있었는데, 허균이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대립되어서 서로 앙숙이 되었으니 같은 무리일 리가 없고, 참서 또한 쓰지 않았다 진술했다. 허실(許實)은 고문까지 받았는데, 정직한 사람이었고, 추섬의 더러운 행실을 허균에게 고하였다가 추섬의 원망을 사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을 맞아 추섬의 무함을 당하였다고 한다.
기타 사건 조사 참고인들:
* 소명국: 곽영의 상소(윤4/6)가 올라왔을 때 조사하니, 곽영은 허균이 흉격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소명국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당시에 소명국은 그 내용을 기준격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참고 진술을 받은 것임.
* 흉서를 보았던 관원들.
* 박춤남이 허균의 머리를 훔치려 했다는 것을 본 사람들.
* 황정필이 죽음에 관해 증언한 관원들과 의원들. 등등.
9/6 광해는 허균의 역모가 해결된 것을 기념하여 인정전에 거동하여 백관에게서 진하를 받았다. 백관들에게 상을 내리고, 사면령을 내리고 교서를 반포하였다. 이이첨이 지었다는 교서에는 허균의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이 천명되었다.
    “어지러운 도적들이 흉악한 생각을 품어 화가 바야흐로 얼마 안 가 일어날 판이었는데, 그들이 형벌을 받아 죽게 되자 맑은 조정에 모두 다투어 나와 진하하였다. 이에 죄수를 풀어주는 사면령을 크게 반포하여, 닭을 그린 깃발을 내거는 법을 시행하는 바이다.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전연 없었으며, 윤기를 멸시하고 상례(喪禮)를 폐지하여 스스로 자식의 도리를 끊었다. 붓을 놀리는 자그마한 기예로 출세하여 등급을 건너뛰어 외람되이 작위를 차지하여 녹을 훔쳤다.
    홍로(弘老)와 체결하여 동저(東邸)를 위태롭게 하고자 도모했으며, 김제남(金悌男)을 지휘하여 서궁(西宮)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고자 하였다. 이의(李)를 옹립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나 수렴 청정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이광(李珖)을 추대하려는 계책이 또 같은 무리들에게서 나왔다. 선왕이 승하하신 틈을 타 감히 어린 왕자를 무함했으며, 중국에 들어가 상변(上變)하면서 만금의 뇌물을 쓰려고 했다. 비기(秘記)에 의탁해서 참언을 지어내 몰래 천도의 설을 퍼뜨렸으며, 경운궁(慶運宮)을 그리는 시를 지어 몰래 내부적 화란을 재촉하였다.
    군기교(軍器橋) 머리에서 김윤황(金胤黃)에게 화살과 격문을 전달하였으며, 숭례문 밖에서 하인준(河仁浚)에게 방문을 붙이게 하였다. 대론에 가탁해서 조정의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돕는 것처럼 하였으며, 잡다한 무리들을 꼬이고 위협해서 늪지에 숨어 도적들을 규합하는 계책을 이루고자 했다. 밤낮으로 은밀하게 의논해서 역모가 더욱 진행되어 화가 조만간 일어나게 되었다.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질러 서울을 놀라게 하였으며, 불을 들고 호응하여 사람들을 모두 도망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미를 밝게 비추고 있었으니, 어찌 그림자를 살피는 선견지명이 부족했겠는가. 묵묵히 도우시는 영령의 도움으로 다행히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면하게 되었다. 신령스런 거울을 높게 매달아 높아 도깨비같은 자들을 달아날 수 없게 만들었으며, 하늘의 그물을 넓게 펴놓아 여우같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현응민(玄應旻)의 정확한 공초에 간악한 본정은 숨기기 어렵게 되었으며, 황정필(黃廷弼)의 정직한 공초에 흉악한 정상은 모조리 탄로났다. 3일을 옥에 가두어 두자 거짓말이 이미 곤궁하게 되었으니, 9월에 논공하자던 교활한 계책이 어찌 시행될 수 있었겠는가.
    8월 24일에는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과 역적의 도당 하인준(河仁浚), 김윤황(金胤黃), 우경방(禹慶邦), 현응민(玄應旻)을, 같은 달 26일에는 황정필 등을 모두 능지 처참해 죽였으며, 가산을 적모하고 파가 저택(破家澤)하는 일을 일체 법률대로 시행하였다.
    아, 죄인을 잡아서 이미 동쪽의 저자에서 죽이는 주벌을 가하였으므로, 다시 아름답게 명해 죄를 용서해 주는 사면을 반포한다.”
광해는 허균이 죽은 2년 후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존호를 받았다. 곧 허균(許筠)을 토평(討平)한 일로, ‘예철장경 장헌순정(睿哲莊敬章憲順靖)’의 8자를 더 올렸다.

 

<출처: 블로그-재질이가장좋은오동나무> 

 

 

 

 

허균의 묘역  

 

유형원선생 묘를 어렵게 찾았던 기쁨을 뒤로하고 허균선생 묘를 찾았습니다. 허균선생 묘는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청운당이 경기도 용인시에서 보내 주었다는 지도에는 가까운 곳에 허균선생 묘가 있었습니다.

소재지 주소도 모르고 어떻게 갔는지도 잘 모릅니다. 묘역이 표시된 용인시 지도를 보면서 물어 물어 찾아갔습니다. 어느 좁은 시골길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 양천허씨 허초당공 종중 묘역 입구 전경 및 천봉비  ▲ 신도비

저는 묘역의 석물을 주로 사진에 담고 있으나, 청운당은 역사적인 인물을 보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망자를 만나서 무슨 교감을 나누는 지는 모르겠으나, 청운당과 다니다 보면 인물에 대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 주어서 심심치 않고 아주 재미 있습니다.

길 옆의 묘역 입구 우측에는 묘역을 이장했다는 천봉기념비가 서 있으며, 측면에는 1968년에 비를 세웠다고 쓰여 있습니다. 20여 미터 안쪽 우측에는 허초당의 신도비가 서 있으며, 비문은 노수신이 짓고 한석봉이 썼다고 합니다.

 ▲ 허난설헌의 시비  ▲ 허난설헌의 필체  ▲ 양천허씨시조공암촌주 선문공단

신도비 바로 뒤에는 蘭雪軒許楚姬詩碑(난설헌허초희시비)라고 새겨진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 시비가 있고, 시비의 위편 좌측에는 허난설헌의 필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건너편, 묘역 좌측 끝에는 陽川許氏始祖孔巖村主 宣文公壇(양천허씨시조공암촌주 선문공단)이라 쓰인 비가 서 있습니다.

 ▲ 허성의 묘  ▲ 허봉의 묘

묘역 정면에서 보면 묘역은 반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에 허균의 형제 묘들이 있고, 그 위편 언덕에는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許曄)의 묘가 있습니다. 묘역 정면 좌측부터 우측으로 허균의 형들인 허성(許筬), 허봉(許封 - 자 갓머리에 대죽(竹)자가 들어가는데 자판에 있는 한자에는 안나오는군요)의 묘 그리고 우측에는 허균(許筠)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 허균의 묘  ▲ 허균 묘역 앞 무너져 내린 부분

이 곳 허균 선생의 묘에는 시신이 없다고 하지요... 묘비 받침돌은 옛것이나 비는 새로 세운 것 같습니다. 선생의 묘역 앞에는 토사가 조금 무너져 내렸더군요. 묘역 전체가 이장되어 새로 만든 묘역이라서 그런지 아직 잔디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묘역에는 특이할 만한 석물들은 없습니다.

 ▲ 허균 형제 묘역 전경(사진 맨 앞이 허균 선생의 묘)  ▲ 허초당 묘소(우측은 부인인 강릉김씨 묘비)

허균선생 묘 위치도

소재지 : 경기 용인시 원삼면 맹리

원삼면 맹리로 들어가서 마을 회관에서 정확한 위치를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빨간 압정이 있는 부근 길 옆에 허균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출처: 한국의 능원묘>

 

 

 

허균의 생가 (강릉 초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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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의 입구에도 가을이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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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그분들이 태어난 곳임을 알려주는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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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이 머물며 시를 읊었을 안채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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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텅 비어있는 주방(정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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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에 솟아있는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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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간에는 디딜방아가 벼를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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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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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로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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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시비 앞에는 지금도 서성이는 발길이 머물고 있다.

 

<사진출처: 파인트리 아래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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