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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작품

김만중(金萬重) / 조선 문신, 소설가

작성자靑野|작성시간10.01.14|조회수796 목록 댓글 0

 

 

 

김만중(金萬重)

 

1637(인조 15) 한성~1692(숙종 18) 남해.
조선 중기의 문신.
김만중 /김만중 영정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아버지 익겸(益謙)은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이 되고 헌납(獻納)·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 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초에 시작된 예송(禮訟)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그는 많은 시문과 잡록, 〈구운몽〉·〈사씨남정기〉등 의 소설을 남기고 있다.〈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씌어진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소식의 〈동파지림 東坡志林〉을 인용하여 아이들이 〈삼국지연의〉를 들으면서는 울어도,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의 힘을 긍정하였다. 이 때문에 그 자신이〈구운몽〉·〈사씨남정기〉같은 소설을 직접 창작할 수 있었다. 이규경의 〈소설변증설〉에 전하는 바로는〈구운몽〉은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며,〈사씨남정기〉는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썼다고 한다. 창작동기를 그대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적인 효과를 의식하고 썼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서포집〉, 비평문들을 모은 〈서포만필〉 등이 있으며, 행장(行狀)에 의하면〈채상행 採桑行〉·〈비파행 琵琶行〉·〈두견제 杜鵑啼〉등의 작품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브리태니커백과>

 

 

 

 

          雨色(비가 오려나)

 

雨色映林薄(우색영임박) : 비가 오려는지 숲이 희미해지고
花枝似故園(화지사고원) : 꽃가지는 고향의 꽃과 닮았구나
遙憐北堂下(요련북당하) : 멀리 어버니 계시는 집이 그리운데
新長幾(신장기총훤) : 원추리는 몇 포기나 새로 자랐을까

 

 

   暮春(늦은 봄)

 

暮春暄氣敷(모춘훤기부)

草樹繞我廬(초수요아려)

捲簾望時景(권렴망시경)

觸目皆可娛(촉목개가오)

白雲散遙岑(백운산요잠)

初日滿平蕪(초일만평무)

竹抽嫩綠排(죽추눈록배)

桃謝殘紅鋪(도사잔홍포)

圓荷出綠波(원하출녹파)

嘉木蔭淸渠(가목음청거)

惠風從東來(혜풍종동래)

谷鶯聲相呼(곡앵성상호)

安得故人詩(안득고인시)

永日時卷舒(영일시권서)

 

 

늦은 봄날 따뜻한 기운 천지에 퍼지고
풀과 나무들 내 초가집을 둘러싸네
발을 걷고 지금의 경치를 바라보니
보이는 것 모두가 즐길 만하네
흰 구름은 아득한 산봉우리에 흩어지고
처음으로 햇볓이 들판에 가득하네
대나무는 연약한 새잎 사이를 뚫고 나오고
복숭아꽃은 남은 꽃잎 사이로 지네
둥근 연꽃은 푸른 물결 위로 솟고
아름다운 나무들 맑은 도랑에 그늘지우네
봄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골짜기에선 꾀꼬리 서로 불러대네
어찌 고인의 시를 얻어
영원히 때때로 펴보지 않으리오

 

 

五月六日小雨(오월육일소우)

欲雨天無色(욕우천무색) : 하늘엔 비가 내리려는 기색 없고
陰雲盡北飛(음운진북비) : 짙은 구름 모두 북으로 날아가버렸다
遠山初暗淡(원산초암담) : 먼 산이 맨 먼저 어둑해지고
高柳漸依微(고류점의미) : 높은 버드나무는 점점 희미해진다
肅肅凉生榻(숙숙량생탑) : 조용한 의자에 찬 기운 생기고
襜襜風捲幃(첨첨풍권위) : 너울너울 바람은 휘장을 걷어올린다
鞦韆花外女(추천화외녀) : 그네 뛰는 꽃밭 건너 처녀들
細霧濕羅衣(세무습나의) : 가는 안개에 비단옷을 적시는구나

 

 

思親詩(사친시)

 

今朝欲寫思親語 금조욕사사친어

字未成時淚己滋 자미성시누기자

幾度濡毫還復擲 기도유호환복척

集中應缺海南詩 집중응결해남시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는 말 쓰려하니

글자도 쓰기전에 눈물 이미 넘쳐나네

몇번이도 붓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 버렸으니

문집 가운데 해남시는 응당 빠지게 되네.

 

*위 시는 남해의 유배지에서 어머니 생신일에 지은 시이다.

 

 

 

貞 敬 夫 人 海 平 尹 氏 行 狀

                西  浦

 

  부인(大夫人)의 셩(姓)은 윤시(尹氏)니, 본(本)은 션산(善山) 평(海平)이라. 고조(高祖) 휘(諱) 두슈(斗壽)니, 녕의정(領議政) 원부원군(海原符院君) 시호(諡號) 문졍(文靖)이요, 증조(曾祖) 휘(諱) 방(昉)이니, 녕의졍(領議政) 시호(諡號) 문익(文翼)이니, 다 공덕(功德) 잇 어진 졍승(政丞)이라 일고, 조(祖) 휘(諱) 신지(新之)니, 션조녀(宣祖女) 졍혜옹쥬(貞惠翁主) 부마(駙馬)로 슝위(海嵩尉) 봉(奉)고, 문쟝(文章)으로셔 셰상(世上)의 일홈나고, 시호(諡號) 문목(文穆)이오, 황고(皇考) 휘(諱) 지(墀)니, 인조됴(仁祖朝) 명신(名臣)으로, 벼이 니조참판(吏曹參判)의 니고, 비(妣) 졍경부인(貞敬夫人) 남양홍시(南陽洪氏)니 감(監司) 휘(諱) 명원(命元)의 녀(女)라.

참판공(參判公)이 다 자녀(子女) 업고, 뎡혜옹(貞惠翁主) 다 손(孫子) 업셔 오직 태부인(大夫人)  사이라. 이러무로 옹쥬(翁主) 오,

“앗갑다! 그녀(女子)되미여!”

간(暫間) 라 미쳐 의복(衣服)과 음식(飮食)을 풍치(豊侈)히 아니야 ,

“다 날 한(寒上)의 안 되어 엇지 능히 이갓치 리요?”

시더라.

우리 션부군(先府君) 도라오시, 경계(警戒)야 오,

“네 집은 녜법(禮法) 집이라 혀나 부도(婦道) 어그쳐 쎠 날을 붓그럽게 말나!”

오시니, 그 훈회(訓誨)시미 이러닷 무로 태부인(大夫人) 시년(時年)이 십사셰(十四歲)녜1) 심(甚)히 부됵(夫族)의 긔림을 엇더라.

뎡츅(丁丑) 노변(虜變)의 션부군(先府君)이 강도(江都)의 슌절(殉節)오시니, 태부인(大夫人) 바야흐로 잉태(孕胎)야 이 찻지라. 홍부인(洪夫人) 우소(寓所)의 계오샤 물가의 을 어더 화(禍)를 면(免)니, 잇 션형(先兄)은 계오 오셰(五歲)요, 불쵸(不肖)  디 못얏지라. 난(亂)이 졍(定) 두 외로은 아 잇글고 도라와 부모(父母) 슬하(膝下)의 의지(依支)니, 안흐로 홍부인(洪夫人)을 도아 가(家事) 다리고, 밧그로 참판공(參判公)을 봉양(奉養), 능히 양지(養志)기 녜 효(孝子)치 셔 가(閑暇)면, 문득 시셔(詩書)을 펴 보아 스로 지고 날노 더옥 널니 니, 참판공(參判公)이 거의 아들 업 근심을 닛고, 문목(文穆)이 탄(嘆)야 오,

“양  손녀(孫女)와 더부러 말면, 문득 흉중(胸中)이 훤츌믈 라니 만일(萬一) 남(男子)런들 엇지 우리집  졔(大提學)이 안니리요?”

시더라.

우리 황조고(皇祖考)의 장(葬事) 회덕(懷德) 졍민니(貞民里)의 복쟝(卜葬)고, 션부군(先府君)이 그 뒤 부쟝(附葬)엿더니, 지(地師) 혹 니라,

“그 히 손(子孫)의 니(利)치 아니타.”

, 참판공(參判公)이 의심(疑心)야 태부인(大夫人)다려 닐너 라,

“ 힘이 능히 쳔장(遷葬)을  만니, 근지(近地)의 쳔장(遷葬야 고(孤兒)와 과부(寡婦)로 여곰 졀일(節日) 졔(祭祀)나 편안2)이 미 네 의 엇더뇨?”

(對)여 오,

“풍슈(風水)의 말이 본 망(茫昧)야 밋디 못고, 션산(先山)의 뭇치미 신니(神理)의 평안(平安) 오.  싀집 겨레 호즁(湖中)의셔 나니 만흐니, 식(子息) 라디 못 젼의 보피기 힘입을지니, 쳔장(遷葬)믈 원치 아닛이다.”

참판공(參判公)이 기셰(棄世)시니, 홍부인(洪夫人)이 병(病)이 즁(重)야 능히 듕례(重禮)을 보피디 못고,  뎨(子弟) 가(家事) 간검(干檢)리 업디라. 태부인(大夫人)이 홀노 두어 시비(侍婢)로 더부러 상수(喪需) 장만하되, 의금(衣襟)과 쟤젼(祭奠)이 졍결(淨潔)고, 풍셜(豊設)야 녜절(禮節)의 맛디 아닌 거시 업니, 보 이 긔(奇)히 넉이고, 후상(後喪)의  그러더라. 일노부터 더 곤(困)야 몸소 방젹(紡績)야 쎠 됴석(朝夕)의 공급(供給)호, 샹(常) 태연(泰然)야 근심 얼골이 업고,  불쵸(不肖) 형졔(兄弟)로 알계 아니시니 개(大槪) 일작이 집안 셰무(細務)의 골몰(汨沒)야 셔(書冊)공부의 방(妨害)로올 념녀(念慮)시미라.

불쵸(不肖) 형뎨(兄弟) 어려셔 밧스승이 업셔 소(小學) 샤략(史略) 당시(唐詩)의 뉴(類) 태부인(大夫人)이 라치시니, (慈愛) 비록 과(過)시나,

“조와 학식(學識)이 남의셔 층이 더어야 계유 의 뉴의 들니라.”

시고,

“사이 실(行實) 업 자 지자며 반다시 ‘과부의 식이라’ 니, 이 말을 너희 맛당이 각골(刻骨)라.”

불쵸(不肖) 형뎨(兄弟) 허물 이시매, 반시 손조  잡고, 울며 이라시,

“네의 부친(父親)이 네의 형뎨(兄弟)로쎠 계 의탁(依託)엿거 녜 이졔 이럿 니,  지하(地下)의 가 무산 낫치 잇시리요? 문(學文)을 아니고 살미 쥭음만 갓지 못다.”

시니, 션형(先兄)이 글 됴 비록 쳔셩(天性)이시나, 그 공부의 수이 일기도 태부인(大夫人)의 격녀(激勵) 왼 힘이 만코, 만일 만즁(萬重)의 어둡고 용렬(庸劣)며 스로 리문 치시미 지극(至極)지 아니미 아니라.

잇의 난(亂)이  디나 셔(書冊)을 엇기 어려온지라. (孟子)‧즁용(中庸) 모든 을 태부인(大夫人)이 곡식(穀食)으로 밧고고, 좌젼(左傳)을   이시니, 션형(先兄)이 의 심히 랑오, 권슈(卷數) 만흐므로 갑 감히 뭇디 못니, 태부인(大夫人)이 틀 가온 명쥬(明紬) 버혀 그 갑 갑흐니, 이밧 남은 져튝(貯蓄)이 업지라.  을 인(因)야 옥당(玉堂)의 셔(史書)와 시젼언(詩傳諺解) 비러다가 손조 벗기시니, 자획(字劃)이 졍졔(整齊)야 구을  고,  구(句)이 구챠(苟且)미 업더라.

참판공(參判公)이 늑계야 측실(側室)의 아달이 잇고, 몰신 후 죵질(從侄)노쎠 계후(繼後)시, 태부인(大夫人)이 랑하시고 가라치시길 불쵸(不肖) 형뎨(兄弟)로부터 갓치 하시고, 두 아이  모친(母親)으로 셤겨 늙기의 이라, 의 간언(間言)이 업더라. 더부러 가산(家産)을 호 젼토(田土)의 쳑박(瘠薄) 쟈와 노비(奴婢)의 늙고 가한 을 갈흐여 가져 오샤,

“ 굿야 쳥념(淸廉) 일홈을 위미 아니라. 이 나의 본 두고져 라.”

겨졔(庶弟) 쥭으,  그 아들을 려다가 모든 손로 더부러 동(同學)계 니, 이 부인(夫人)이 나히 님의 늙어 계오신, 손 듕의 죠차 호나니 오히려 두어사이니 이 즐겨 고, 슈고로와 아니오시디라.

셩품(性品)이 임의 글을 조셔 늙으시 폐(廢)치 아니시고, 녁(歷代)의 치란(治亂)과 명인(名人)의 언(言行) 보기 즐겨 오시고, 잇다감 손(子孫)다려 니시고, 셔찰(書札)과 음영(吟詠)으 뉴의(留意)치 아니야 그 부여(婦女)을 치시 마시(麻枲)와 쥬쟝(酒醬)의 너모지 아니오시더라.

셰시(歲時) 뎨(祭祀) 심히 공경야 스로

“미망인(未亡人)이라.” 

일고, 죵신(終身)토록 몸의 빗난 의복(衣服)을 갓가이 아니시고, 연회(宴會)예 녜(參詣)치 아니시고, 음악(音樂)을 듣지 아니시고, 션형(先兄)이 이품(二品)의 귀(貴)  슈년(壽宴)을 쳥(請), 허(許)치 아니오시고, 오직 손(子孫)의 과거(科擧)의 잔 셜(配設)고 풍뉴(風流) 베푸믈 허(許)야 오샤,

“이 진실(眞實)노 문호(門戶)의 경(慶事)니   몸의  깃부미 아니라.”

오시더라.

계(癸巳)의 비로소 션형(先兄)이 녹(祿)으로 봉양(奉養)믈 듯고, 만즁(萬重)이 을(乙巳)의 과경(科慶)을 모쳠(冒添)고, 뎡미(丁未)의 션형(先兄)이 이품직(二品職)을  태부인(大夫人)을 졍부인(貞夫人)을 봉(封)니라.

갑인(甲寅)의 인경왕후(仁敬王后)ㅣ 쟝츄(長秋)의 졍위(定位)오시니, 션형(先兄)이 봉작(封爵)고, 태부인(大夫人)을 봉(封)야 졍경(貞敬)의 승호(陞號)다.

후(后)ㅣ 어려셔 태부인(大夫人) 길니실  반다시 발로무로쎠 치시니, 개(大槪) 후(后)ㅣ 년(年)이 십일(十一)의 이시니, 쥬션(周旋)과 응(응) 셩인(成人) 시니, 궁즁(宮中)이 열복(悅服)디 아니리 업더라.

이 후(後)의 션형(先兄)이 양 문(私門)의 셩만(盛滿)물 념녀(念慮)야 탄왈(嘆曰),

“우리 집으로 여곰 이에 니계 문 모친(母親)이라.”

더라. 잇다감 알현(謁見)오, 문득 규계(規戒)의 나와 녜 어진 후비(后妃) 일고, 일호(一毫)도 (賜澤)의 미치미 업니, 인션(仁宣)․명셩(明聖) 두 셩뫼(聖母) 경즁(敬重) 오시더라.

인경왕후(仁敬王后)ㅣ 승하(昇遐)시오니, 젼일(前日)의 쓰오시던 의(衣襨)와 긔명(器皿)을 쥬엄작 왕(王子)·공쥬(公主) 업디라. 명셩태모(明聖太母)ㅣ 궁인(宮人)다려 닐러 아샤,

“ 차마 이거 보지 못니, 이졔 다 쎠 본방(本房)으로 쥬고져 니, 그  을 젼유(傳諭)라.”

오시니, 본방(本房)은 휘비〔后妃〕의 본가(本家) 일라미라. 태부인(大夫人)이 왈,

“대(大行)이 비록 불(不行)야 속(嗣續)이 업시나 일후(日後) 국가(國家)의 종(螽斯)의 경(慶事)ㅣ 잇시면, 이 한 대(大行)의 손(子孫)이니 머무러 기다리미 가디라. 쳔샹(天上) 진완(珍玩)을 엇지 감히 인가(人家)의 두리잇가?”

궁인(宮人)이 복명(復命)온, 셩(慈聖)이 크계 일라 사,

“ 진실노 본방(本房)의 어질미 능히 이리 쥴 알괴라.”

샹(上)이 드라시고  ,

“이 군(士君子)의 실(行實)이로다.”

옵시더라.

뎡묘춘(丁卯春)의 션형(先兄)이 기리 태부인(大夫人) 슬하(膝下) 어그시니, 태부인(大夫人)이 나히 칠십(七十)이 넘엇디라. 손(子孫)이 마 최복(衰服)으로쎠 더으지 못, 태부인(大夫人)이 물,

“어이 쎠 샹복(喪服)을 짓디 아니뇨?”

답(對答)호,

“국속(國俗)의 부녜(婦女) 오작 삼연샹(三年喪)의 샹복(喪服)을 갓초고 긔복(朞服) 이하 다만 포(布帶)로쎠 셩복(成服)니, 이 한 긔복(朞服)이니이다.”

태부인(大夫人)이 샤,

“쟝(長子)의 복(服)이 읏지 다란 긔복(朞服)의 비리요?”

드여 녜문(예문)과 갓치 셩복(成服)다. 불쵸(不肖) 태부인(大夫人)이 샹측(喪惻)의 게오셔 조셕(朝夕)의 읍(哀泣)야 병(病)이 나오말 념녀(念慮)야 그 집의 뫼시고져 , 태부인(大夫人)이 울어 ,

“ 비록 노병(老病)야 졔(祭祀) 녜(參詣)치 못나, 조셕(朝夕)의 곡셩(哭聲)을 드면, 내 녜(參詣)과 니 네 집의 가면 무어로쎠 회포(懷抱)리요? 3)  모든 손(孫子) 보면4) 그 아비 봄 니, 만일(萬一) 네 지븨 가면, 졔 엇지 능히 루 와 날을 보리요?”

여러 번 쳥(請), 듣디 아니시니, 비록 구(哀疚)의 계셔도 녜법(禮法)의 독실(篤實)시미 이럿더라.

이  가을의 불쵸(不肖) 나의 고셔 (塞)의 원찬(遠竄)니, 대부인(大夫人)이 셩(城)밧긔 가 보여 오,

“녕(嶺海)에 (行)문 녜의 면(免)치 못 니, (行)디어다. 스로 랑고, 날로쎠 념녀(念慮)디 말나!”

이듬에 나라의 큰 경(慶事)ㅣ 이셔 은혜(恩惠)을 입어 도라와 뫼셧더니, 슈월(數月)이 못야 긔화(己巳禍)ㅣ 니러나니, 다시 국옥(鞫獄)의 나아가 이윽고 쥭기 감(減)야 남(南海)에 위리(圍籬)고, 손남(孫男) 삼인(三人)이 졀도(絶島)의 이어 분찬(奔竄)니, 태부인(大夫人)이 본 담쳔(痰喘)이 계셔 치위 만나면, 복발(復發)시더니, 션셩(先兄)을 곡(哭)신 후로부터 연(連)야 위쳑(危慽)을 만나5) 슉증(宿症)이 더으샤 겨을의 니러 샹셕(牀席)의 위독(危篤)6)시,

“집의 환난(患難)으로쎠 스로 져상(沮喪)치 말고 쓸 업다야 업(學業)을 페치 말나!”

시더라.

나온 바 물(饌物)이 잠간(暫間) 진이(珍異)하미 이시면, 문득 즐겨 안이샤 라, “우리집 음식(飮食)이 처엄의 이러치 아니더니라.”

속광젼(屬纊前) 슈일(數日)의 슌슌(詢詢) 부디런고 검박(儉朴)므로쎠 손부(子孫婦) 경계(警戒)시고, 이밧긔 오직 일(一子)와 삼손(三孫)이 쟝여지지(瘴癘之地)의 이시므로쎠 권념(眷念)오시고, 다 손(子孫)은 념녀(念慮)오시 배 업더라.

오호(嗚呼)! 통(痛哉)라! 션형(先兄)이 태부인(大夫人) 연노(年老)시므로쎠 미리 셰(百歲) 의복(衣服)을 지으니, 태부인(大夫人)이 오시고, 닐너 가사,

“뎡츅샹(丁丑喪)의 물(財物)이 업셔 시러금 극진(極盡)치 못한 일이 만흐니, 이졔 엇지 계 더미 잇시리요?”

젼후(前後) 가(家事)의 달므로쎠 답(對答), 태부인(大夫人)이 가,

“  이 어이 모라리오? 다만 동혈(同穴)야 쟝(葬事) 후박(厚薄)이 셔로 현슈(懸殊)면, 내 이 엇지 시러곰 평안(平安)리오?”

이에 이라러 졔손(諸孫)이 밧드러 렴송(殮送), 홍자(紅紫)와 화(華綵) 쓰지 아니문 유의(遺意) 조미라.

태부인(大夫人)이 만녁(萬曆) 뎡(丁巳) 구월(九月) 십이일(十二日)의 나셔, 긔(己巳) 십이월(十二月) 이십일일(二十一日)의 시니, 향년(享年)이 칠십 (七十三)이오, 손남(孫男) 진화(鎭華)와 증손(曾孫) 츈(春澤) 등이 녕구(靈柩) 밧들러 션부군묘(先府君墓)의 합장(合葬)니, 실노 경오(庚午) 이월(二月) 이십일일(二十一日)이라.

태부인(大夫人)이 인(仁慈)오시고, 졉어보미 만하7) 손(子孫)을 어만지고, 비복(婢僕)을 부리, 샹(尙) 은(恩愛) 과(過)되, 쥰결(峻潔)야 교년(皎然)이 녈장부(烈丈夫)의 풍(風)이 이며, 션형(先兄)이 일작 경긔(京畿)고을 원(員)이 되어 녹봉(祿俸)이 열위 봉양(奉養)이 부족(不足)므로쎠 탄(歎), 태부인(大夫人)이 ,

“다(多幸)이 국은(國恩)을 입어 방(房)이 덥고, 밥이 부니, 이 오히려 부죡(不足)히 넉이면, 어 죡(足)리요? 녜 능히 직(職事)의 진심(盡心)면 이 봉양(奉養)이 도라보건, 두겁지 아니랴?”

손 진귀(鎭龜)감사(監司)여실 제 영하(營下) 원(員)이 태부인(大夫人) 신(生辰)의 녜 규레(規例)을 인(因)여 폐(幣帛)을 보니, 그 이 진실(眞實)노 종가 뎨(宗家子弟)라, 사이 닐오,

“예 가히 샤양(辭讓) 일이 업다.”

,  밧지 아니시니라. 말속(末俗)이 교(巧詐)여 니역(吏役)과 시정(市丁)이 젼혀 쳥촉(請囑)을 일삼고, 벼의 거(居) 람의 존항 부녜(尊行夫女) 더옥 그 회뢰(賄賂)  죵요로온 길헐 , 불쵸(不肖) 형뎨(兄弟) 벼야 쎠 오무로부터 소록소록이 태부인(大夫人) 안젼(眼前)의 이미 잇지 아니니, 일로 가히 다 거 밀위여 알디라. 그 화(禍厄) 곤궁(困窮)의 잇셔도 셜워디 아니시며, 존귀 영광(尊貴榮光)을 당야도 교만(驕慢)치 안이시고, 긔화(奇禍) 만나 이 견지 못 로, 의(義)와 명(命)의 평안(平安)야 요탈(搖脫)며, 져샹(沮喪)치 아니문, 다만 텬품(天品)8)이 과인(過人)할  안이라, 그 넙이 보아 녜 일을 샹고(詳考) 힘은 가이 거잣거시 아니로다. 이러무로쎠 친쳑 닌당(親戚隣黨)이 보기 엄(嚴) 스승갓치 야 쎠 법(法)을 고 그 말을 발(發)며 일을 쳐치(處置)미 움작이, 의리(義理)의 합디라. 능히 휘비〔后妃〕의 덕화(德化)를 보고 빗나계 나라히 기리시믈 닙으니 이 더옥 요이 규합(閨閤)의 드믈이 듯 요, 녜 일 바 녀(女子)의 션 실(行實)이란 말이 우리 태부인(大夫人)이 진실(眞實)로 붓그러오미 업디로다.

녯글의 일라,

“젹션(積善) 집은 반닷시 남은 경(慶事)ㅣ 잇다.”

고, 젼(傳)예 로,

“가득면 해로오말 불르고, 견숀(謙遜)문 유익(有益)믈 밧다”

여시니, 우리 태부인(大夫人) 갓이 그 어진 일은 쌋고 유익(有益)믈 바들 도(道)의 합(合)디 아닐 바 업, 뎡축(丁丑)의 셩(城)이 문허디 셜우무로부터 간곤(艱困)을 갓초 격고, 갑인(甲寅)의 이라러 영화 극진(榮華極盡) 그 조심이 궁약(窮約) 의셔 심고, 오라디 안냐 셩후(聖后)ㅣ 승하(昇遐) 오시고, 우리 션시(先伯氏)의 효성(孝誠)으로쎠 능히 봉양(奉養)을 맛지 못하고, 슈년(數年) 이의 시(時事) 크계 변여 손(子孫)이 분이(分離)야 셰상(世上)의 슬허 배 되니, 이예 의 능히 쎠 보시(報施) 을 의심(疑心)미 업디 못 배라. 비록 그러 셰샹(世上)의 복녹(福祿)을 누려 종신(終身)토록 안락 부호(安樂富豪)고, 쥭 날의 사의 일라미 업산 자 이 진실(眞實)노 태부인(大夫人)의 붓그리 배라.

태부인(大夫人)이 이남(二男)을 기시니 맛은 션형(先兄)만긔(萬基)니 녕돈녕부(領敦寧府事) 광셩부원군(光城府院君)이니, 일작 병죠판셔겸뎨(兵曹判書兼大提學)을 디다 션형(先兄)이 슝현(崇顯)의 레(次例)로 벼, 태부인(大夫人)이 일작 희(喜色)9)을 두지 아니시더니, 밋 문형(文衡)을 음알 이에 탄(歎)야 ,

“  부인(夫人)으로 네희 형졔(兄弟)을 쳐 샹 고루(固陋)야 드미 업셔 션인(先人)긔 슈욕(羞辱)이 될가 저허더니, 이후의야 거의 면(免)과라.”

시더라. 그 아은 곳 불쵸(不肖) 만듕(萬重)이라. 션형(先兄)은 군슈(郡守) 한유양(韓有良)의 녀(女) (娶)야 남 녀(四男三女) 두니, 남쟝(男長)은 진귀(鎭龜)요, 버거 진규(鎭圭)니 다 급졔(及第)고, 버거 진셔(鎭瑞)·진부(鎭符)니, 다 관(官) 스지 못엿고, 인경왕후(仁敬王后)ㅣ 쟈항열(姉妹行列)의 맛디 되시고, 버거 뎡형진(鄭亨晉)의계 젹(適)고, 버거 니쥬신(李舟臣)의계 뎍(適)나라. 만듕(萬重)은 판셔(判書) 니은샹(李殷相)의 녀(女) (娶)야 일남(一男) 일녀(一女)을 나흐니, 남은 진화(鎭華)니 진(進士)요, 녀(女) 급제(及第) 니이명(李頣命)의계 뎍(適)니라. 진귀(鎭龜)의 남(男)은 츈(春澤)·보(普澤)·운(雲澤)이오. 나무니 다 어리고 진화(鎭華)의 남(男)은 다 어리고, 뎡형진(鄭亨晉)․니이명(李頣命)의 나흐니 다 어리다. 만듕(萬重)이 인(人生)의 잇기 젼(前)의 오나온 일을 마히 야 나며, 엄친(嚴親)의 면목(面目)을 아지 못고 희 러디기 난니(亂離) 가온 야 구로(劬勞) 은혜(恩惠) 녜 의셔 (百倍)나  어려셔 안 거시 업고, 은(恩愛)10) 아와 승안(承顔)며 슌(順色) 바의 거습즈미 만코, 분밧긔 벼이 임의 열친(悅親)  아니요, 미치고 녀려 함졍(陷穽)의 져 쎠 우리 태부인(大夫人)의 죵신(終身)토록 셜워믈 치니, 불효(不孝)의 (罪) 우흐로 하날의 통(通), 오히여 능히 목 질라고  혜쳐 귀신(鬼神)의계 (謝罪)치 못고, (惴惴)히 쟝녀(瘴癘) 바다 위리(圍籬) 가온 기 도젹(盜賊)여시니, 오호(嗚呼)! 통의(痛矣)라! 도라보건, 호쳔(昊天)이 복디(覆地)아니야 남은 목슘이 진(盡)기 기다리니 진실노 저허건 우리 태부인(大夫人)의 아다온 말과 착 실(行實)이 졈졈(漸漸) 엄(晻昧), 나아가 쎠 법(法)을 후곤(後昆)의 드리오디 못가 야 이예 감히 셝기 억졔(抑制)고, 알품을 아 손으로 언(言行)  벌을 긔록(記錄)야 화 두어 조희예 쎠 문득 죡하 쥬되, 셩품(性品)이 본 어둡고 막히여 쎠 과 실(行實)을 잘 알아 보지 못고 더옥 졍신(精神)이 소망(銷亡)야 나흘 긔록(記錄)고 열흘 디온니, 불초(不肖)ㅣ의 죄(罪) 이예 이러 더옥 크도다. 태부인(大夫人)이 일작 근의 비명(碑銘)과 묘지(墓誌) 보 그 부덕(婦德)을 과(過)히 기리믈 병(病)되히 넉기사 라,

“규문(閨門) 안은 의 아지 못 라 부솔 잡은  다만 가쟝을 빙거 고로 그 말이 더옥 족히 밋부지 못니, 그러치 아니면 동방(東方)의 현완(賢緩)이 만흐요?”

믈 긔지(旣知)니, 이 말이 낭연(琅然)야 오히려 귀예 잇 듯디라. 이졔 덕(德)을 짓 글의 감히 자 문(文彩)로 미지 못여 하리 너모 간약(簡略) 일으랴 문,  우리 태부인(大夫人) 평셕(平昔)의 을 오랴 미니라.

경오(庚午) 팔월(八月) 일(日) 불초(不肖) 고남(孤哀男) 만듕(萬重)은 읍혈(泣血)고 가 지이다.

 

 

 

 

 

작자

   김만중(金萬重 ; 1637 ~ 1692) 인조~숙종조의 문신.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아버지 김익겸(金益兼)이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 유복자로 태어났다. 현종 6년,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함으로써 파란 많은 환로가 시작되었다. 대제학과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서인(西人)의 지반 위에서 사환길에 오른 그는 조선 왕조 일대의 거센 정쟁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끝내 최후를 적소에서 마치었다. 그는 시문(詩文)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 구투를 벗어나 의장(薏匠)을 주로 하여 감상적이었고, 몇 편 안 되는 문(文) 가운데 《정경 부인 윤씨 행장(貞敬夫人尹氏行狀)》은 매우 처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포만필(西浦漫筆)》에는 그의 탁월한 문학관이 피력되어 있다. 또 《북헌집(北軒集)》에는 그가 어머니 윤씨를 위로하고자 국문 소설을 많이 썼다고 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구운몽》과 《사씨 남정기(謝氏南征記)》뿐이다. 그의 저서로는 《서포집(西浦集)》과 수록류(隨錄類)인 《서포만필》이 있으며, 《고시선(古詩選)》이 있다.

 

서언

...

   이 작품은, 원전의 표기는 한문(漢文)으로 되었으나, 작가가 이와 함께 한글본도 만들어 이원화(二元化)의 표기 체계를 보이며, 양반 독자와 서민 독자에게 두루 익힐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사상면에서도 유불선(儒佛仙)이란 여러 동양 사상(東洋思想)을 포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사대부(士大夫) 소설의 한 전형(典型)이다.

...

 

창작 시기와 동기

   《구운몽》은 김만중이 지은 것은 확실하지만, 구제적인 창작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견해들로는 김만중이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을 때 지었으리라는 것과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지었으리라는 두 설이 있다. 그러나 1988년 '서포연보(西浦年譜)'가 일본에서 발견되어, 학계에서는 선천 유배 때의 창작물이라고는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구운몽》의 창작 동기는 주로 서포 김만중이 자기 모부인(母夫人) 윤씨(尹氏)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것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의 '여항간에 유행하는 것으로 볼 만한 것은 《구운몽》이 있을 뿐인데, 서포 김만중이 지은 것이다. 자못 뜻이 있는 것인데, 세상에 전하기는 서포가 유배되었을 때 대부인의 파한(破閑)을 위해 하룻밤만에 지었다고 한다라는 기록에서 비롯된다.

 

내용 전개

   중국 당(唐)나라 때, 남악(南嶽)의 형산(衡山) 연화봉(蓮花峯)에 서역(西域) 천축국(天竺國)으로부터 불교를 전파하러 온 육관대사(六觀大師)가 법당(法堂)을 세우고 제자를 모아 불도(佛道)를 강론(講論)하였는데, 제자 5~6백 명 가운데 계행(戒行)을 닦아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자는 30여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제자(弟子)가 성진(性眞)이었는데, 그 얼굴이 백설같고 정신이 추수(秋水) 같으며, 나이 겨우 20에 삼장경문(三藏經文)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한편 동정호(洞庭湖) 용왕(龍王)은 대사가 일찍 모든 제자로 더불어 대법(大法)을 강론할 때, 백의 노인(白衣老人)이 되어 법석(法席)에 참석하여 경문을 들었는지라.

   대사는 용왕에게 자기가 한 번도 답례치 못하였음을 미안하게 여겨, 제자 중 누가 대신 가서 회사(回謝)할 것인가를 묻자, 이때 성진이 나서서 스승을 대신해서 가겠다고 한다. 대사의 허락을 얻은 성진은 가사(袈裟)를 정제(整齊)하고 육환장(六環杖)을 이끌고 동정호로 내려간다. 수부(水府)로 들어가니 용왕은 크게 반가워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서 융숭히 대접하고 술마저 권한다. 성진은 제삼 거절하였으나, 너무나도 권하기에 술 서너 잔을 기울이고 바람을 타고 돌아온다.

   한편, 남악(南嶽) 서쪽에 살고 있는 선녀(仙女) 위부인진군(魏夫人眞君)은 팔 선녀(八仙女)를 대사에게 보내어 문안을 표한다. 절에서 나온 팔 선녀는 돌아가던 길에 남악의 아름다운 경치에 혹해 두루 관상하다가 석교(石橋)에 앉아서 쉰다.

   바로 이때 수부에서 돌아오던 성진은 마신 술기운이 얼굴에 올라 시냇가에 내려 얼굴을 씻다가 물에 풍겨오는 그윽한 향기에 취한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온 그는 뜻밖에도 팔 선녀(八仙女)와 상봉(相逢)하게 된다. 너무나도 황홀한 아름다움에 성진은 자기도 모르게 선녀들 앞에 나아가 인사하며 말을 주고받고 서로 희롱하다가, 성진은 길을 비켜 달라고 돈을 대신해서 꽃을 던져 여덟 개 구슬(명주)을 만들어 선물한다.

   절에 돌아온 성진은 선녀들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여, 속세의 부귀영화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이는 벌서 대사가 간파(看破)한 바라. 그는 죄를 얻어 마침내 황건역사(黃巾力士)에게 끌려 가서 풍도옥()에 떨어지고, 다시 인간 세상에 환송(還送)하여 양소유(楊少游)가 된다.

   한편, 같은 죄로 지옥에 떨어진 팔 선녀는 여덟 여인으로 태어난다.

   진채봉(秦彩鳳 : 진어사의 딸 ; 제3부인)

   계섬월(桂蟾月 : 낙양의 명기 ; 제5부인)

   정경패(鄭瓊貝 : 정사도의 딸 ; 제1부인 본처)

   가춘운(賈春雲 : 정소저의 시녀 ; 제4부인)

   적경홍(狄驚鴻 : 하북 명기 ; 제6부인)

   이소화(李簫和 : 황제의 누이동생. 난양공주(蘭陽公主) ; 제2부인)

   심요연(沈요烟 : 동정호 용왕의 딸 ; 제8부인)

   양소유는 차례로 여덟 여인과 인연을 맺게 되고, 드디어 승상에 이르고, 두 부인(夫人), 여섯 낭자(娘子)를 거느린 화려한 인생이 전개된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은 것, 이제는 승상의 직에서 물러나 한가히 그의 여생을 즐기던 양소유는 어느 가을 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리고 뒷동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다가 어느덧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떄마침 찾아온 호승(胡僧)에게 불도에 귀의(歸依)할 뜻을 말한다. 그 호승은 쾌히 응하여, 짚고 온 지팡이로 난간을 두드리자, 갑자기 연기가 주위를 둘러싸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깜짝 놀란 양소유는 크게 소리지르나 아무 반응이 없다. 얼마 후, 연기가 걷히고 보니 호승은 간데없을 뿐만 아니라 두 부인, 여섯 낭자도 간데없고, 고대광실(高臺廣室) 그 좋은 집도 간데가 없다. 크게 놀라 주위를 살펴 보니, 손에는 백팔염주(百八念珠)가 걸려 있으며, 머리는 까칠까칠한 중의 머리, 향로(香爐)의 불은 이미 사그러졌는데, 서산(西山)에 지는 달빛은 창문을 훤히 비치고 있었다. 당황한 그는 곰곰이 생각하니, 이제까지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하룻밤의 꿈이었고, 자기는 분명히 연화도량(蓮花道場)의 성진이었다. 꿈을 꾼 성진은 급히 세수하고 대사 앞에 뛰어가 그 앞에 엎드리니, 성진이 옴을 보고 대사는 인간 재미가 과연 어떠하냐고 웃으며 묻는다.

   성진은 큰 법(法)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고, 팔 선녀도 이어 들어와 제자되기를 청하였으며, 아홉 사람은 대사 앞에서 큰 법을 드는다.

   후에 대사는 불도를 성진에게 물려 주고 천축(天竺)으로 돌아갔고, 팔선녀는 성진 앞에서 계속 불도를 닦았다.

   마침내 아홉 사람은 모두 극락 세계(極樂世界)로 왕생(往生)하였다.

<자료: footprints>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작품의 줄거리

대명(大明) 가정연간(嘉靖年間) 금릉 순천부에 유현(劉炫)이라는 명환(名宦)이 있었다. 늦게야 일자를 낳고 연수라 이름하였다. 유공의 부인 최씨는 연수를 낳아 놓고 자라는 것도 보지 못하고 졸(卒)하였다. 연수의 나이 10세에 이르매 문장재화(文章才華)가 대성하여 향시(鄕試)에 장원급제하고,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으나 연소(年少)하므로, 10년을 더 수학하고 나서 출사(出仕)하겠다고 천자에게 상소하였다. 천자는 특별히 본직(本職)을 띠고 6년 동안의 여가를 준다.

유한림(劉翰林)은 섭덕(涉德)과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씨와 결혼하였다. 금실이 좋았으나 사씨는 유씨 가문에 들어온 지 9년이 되어도 출산을 못한다. 사씨는 후일 조상의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할까 근심한 나머지 유한림을 권하여 새로이 여자를 보게 하였다. 유한림은 거절했으나 여러 번 권하매 마지못하여 교씨(喬氏)라는 처녀를 맞아들인다.

교씨는 천성이 간악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강한 여자였다. 겉으로는 사씨를 존경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증오하였다. 그러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출산하고는 자기가 정실(正室)이 되려고 마음먹고, 문객(門客) 동청(董淸)과 모의하여 남편 유한림에게 사씨를 가지가지로 참소한다. 유한림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부정한 자취를 드러내어 모략하는 데는 마음이 굳은 유한림도 미혹되어, 그 모략을 사실로 알고는 사씨를 폐출(廢黜)시키고 곧 교씨를 정실로 맞이한다.

남편 유한림에게 축출을 당한 사씨는 남으로 남으로 정처없는 방랑을 계속하면서도 온갖 풍파와 고난을 겪는 가운데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한다. 자살하려고 할 때마다 신명의 계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순제(舜帝)의 두 비(妃)인 아황, 여영의 혼령의 교시를 받고 어느 산사에 들어가서 의탁하게 된다.

정실 사씨를 축출하는데 성공한 교씨는 자기가 정실이 되었으나, 그의 간악은 그에 그치지 않고, 다시 문객 동청과 간통하면서 유한림을 귀양 보내고 유한림의 전재산을 탈취해 가지고 도망가서 살기로 약속하고는, 유한림을 천자에게 참소하여 원배(遠配)시키는 데 성공한다.

문객 동청은 유한림의 천자에 대한 불평을 고발했다는 공에 의하여 지방관이 되어 부임하게 된다. 그는 유한림의 전재산을 가지고 교씨와 같이 부임하다가, 도중에서 강도를 만나 전재산을 다 빼앗기고 궁경(窮境)에 빠진다 이 때, 조정에서는 유한림에 대한 혐의가 풀려 소환하고, 충신을 참소한 동청은 처형하기고 한다.

정배(定配)를 당한 유한림은 비로소 교씨와 동청의 간계(奸計)에 속은 줄 알고 전죄(前罪)를 대오(大悟)한다. 마침 조정에서 해배(解配)의 통지가 왔는지라,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방으로 탐문하여 사씨의 행방을 찾는다. 한편, 남편 유한림이 해배되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사씨는 산사에서 나와 남편을 찾으러 나선다. 사씨와 유한림은 도중에서 해후한다. 유한림은 사씨에게 전죄(前罪)를 사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간악한 교씨와 동청을 잡아 처벌하고 나서 사씨를 다시 정실로 맞이한다는 것이다.

 

해설

서포의 종손(從孫)인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이

“서포는 한글로 소설을 많이 지었다. 그 중 《사씨남정기》는 보통 소설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소설이란 한결같이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백성을 계몽하고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는 이 《사씨남정기》가 가장 훌륭하기 때문이다.”

라 했고, 이규경이 《오주연문》에서 《사씨남정기》를 쓴 동기를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쫓고 장희빈을 맞아들인 처사를 못마땅히 여기고 왕을 깨우쳐 뉘우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라고 풀이했다. 즉 이 작품이 일종의 '목적소설'임을 암시하는 말들이다. 이 소설이 숙종의 이후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품이 숙종의 손에 들어갔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서포의 형은 김만기인데 그의 딸이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였다. 즉 김만기는 임금의 장인(부원군)이다. 당시는 당쟁이 치열했는데, 그들은 서인당의 핵심 인물들이었으므로, 남인당과 극심히 대립하고 있었다. 인경왕후가 죽자 인현왕후(민비)가 계비로 들어왔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아들을 못 낳고, 희빈 장씨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균>으로 뒤에 <경종>이 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포는 숙종에게 '장씨가 천첩 소생이라는 말도 있으니, 너무 가까이하지 말고 수양하라'고 아뢰자 화가 난 숙종은 김만중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 보낸다. 드디어 인현왕후 폐비사건이 발생하고 <균>이 왕세자로 책봉되며, 희빈 장씨가 왕비로 승격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 유배지에서 이 작품을 완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제목을 분석해 보면, 사씨가 남쪽으로 쫓겨갔다는 뜻으로 결국 진실이 밝혀져 명예회복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혹자는 '남정(南征)'의 의미를 '남인 정벌'의 의미로 해석, 인현왕후를 편들던 서인의 거물 김만중이 자신의 정치적 복권을 노리고 썼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허구의 세계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들과를 혼동해선 안 된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현실로부터 유추된 허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일어난 사건'을 사실대로 기술할 뿐이며, 소설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숙종은 서포가 죽은 뒤 인현왕후를 실제로 복위시킨다.

《사씨남정기》는 양반사대부 가문인 유한림의 가정과 서로 다른 양반사대부들의 생활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지는 사정옥과 교채란 사이의 갈등을 통해 축첩제도의 불합리성을 비판하고 있으며 동시에 양반가정의 추악한 내막을 드러내고 있다. 구성은 '성혼', '요망한 첩', '간악한 문객', '가화', '남정', '가운회복' 등 제목을 단 몇 개의 장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야기줄거리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앞부분은 '성혼'부터 '가화'까지이다.

금릉 순천부의 명 가문에 한림 학사 유연수와 아내 사정옥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10년이 지났어도 둘 사이에는 가문의 대를 이어줄 자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씨는 어느 날 남편에게 첩을 맞아들일 것을 간청한다. 유한림이

“어찌 일시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여 첩을 얻겠소. 첩이 들어오면 집안이 어지러워지는 법인데, 부인은 왜 화를 자청하시오? 천부당만부당하니 그런 생각 마시오.”

라고 반대하지만 사씨는 끝내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교채란이 첩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제 스스로 늘 말하기를,

“가난한 집 선비의 아내가 되느니보다는 공후 부귀가의 첩이 되는 것이 좋다.”

고 말해온 여인이다. 이때 교씨의 나이는 이팔청춘이었으나 성품이 교활하여 유한림의 비위를 잘 맞춰주었고 사씨를 섬기는 것도 극진해 보였다. 유씨 가문엔 전에 없던 기쁨과 화기가 떠도는 듯하였다. 사씨는 두말할 것도 없고 유한림도 이제 자식을 보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피상적인 것이었다. 교씨는 유한림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노래와 탄금(彈琴)으로 그의 마음을 유혹하는 한편, 동청이라는 한량을 끌어들여 그와 함께 남몰래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갖가지 흉계를 꾸미다 마침내 자기 소생인 장지까지 죽이고 그 죄를 사씨에게 덮어씌운다. 간계에 속은 유한림은 십 년 세월 함께 살아온 사씨를

“천지간에 용납 못할 죄를 저지른 음부, 방자하고 음흉한……”

운운하면서 집에서 내쫓는다. 이때부터 서글프고 괴로운 사씨의 '남정'이 시작된다.

소설의 뒷부분은 '남정'부터 '가운회복'까지이다.

집에서 쫓겨난 사씨는 시부모 선산에서 초가집을 얻어 여생을 마치려 한다. 그러나 행방을 알아낸 교씨는 동청과 함께 또다시 흉계를 꾸며 냉진이라는 사나이를 보내어 사씨의 절개를 꺾으려 하지만 사씨가 먼저 떠났기에 실패로 돌아간다. 한편 유한림도 자신들의 죄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교씨와 동청의 모함으로 간신 엄승의 손을 빌려 '임금을 기롱한' 죄로 귀양가게 된다. 유씨가문은 마침내 파산몰락의 운명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곧 황제의 은사령으로 유한림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를 모함한 원수들의 행차와 마주친다. 이를 안 교씨와 동청은

“그놈이 죽어 타향 귀신이 될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오다니, 만일 다시 득의(得意)한다면 우리는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건장한 관졸 수십 명을 뽑아 유한림의 목을 베어오면 천금의 상을 주겠노라고 한다. 쫓기던 유한림은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쪽배 한 척을 발견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하고, 그 배에는 소복단장한 부인이 그를 맞이하는데 그녀는 바로 사씨였다. 이 무렵 조정에선 전횡을 일삼던 엄승상이 처형되고 동청과 냉진도 차례로 처단된다. 교씨는 낙양땅에 도망쳐서 창루의 창기로 타락한다. 예부상서로 복위된 유연수는 사씨부인을 데리고 서울로 가던 중에 교씨를 만나 그녀를 처단한다.

전반부는 유연수 가문 내에서의 갈등을 주로 다루었고 후반부는 조정에서의 정치적인 사건의 해결을 주로 다루었다. 임진왜란 이후 양반사대부들 내에서 첩을 맞아들이는 일이 더욱 빈번해짐에 따라서 그것이 빚어내는 악덕은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작가는 이러한 축첩제도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착한 것은 승리하고 악한 것은 망한다는 궁극적인 도덕윤리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작품 내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다양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성격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많은 시비들과 창두. 유모 그리고 배장사꾼 등이 교씨. 동청. 냉진을 '하늘 땅에 용납 못할' 사람으로 증오하고 사씨부인의 비극적 운명을 동정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민중들의 도덕관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사씨는 집에서 쫓겨났지만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승리하고 만다는 결말 처리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유연수는 가장으로서 언뜻 보기에는 학식이 있고 사리에 밝은 사람으로 조정에서는 간신 엄승상의 박해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질적으로 수신제가를 못 이룬 무능한 양반관료에 불과하다. 그는 교씨의 흉계에 속아 사씨를 내쫓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똑같은 궁한 처지에 빠진다. 눈여겨 볼만한 인물로 유한림의 고모인 두부인이 있다. 그녀는 유씨 가정의 어른으로서 오랜 생활체험을 통해 축첩제도의 불합리성을 깨달은 인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씨가 자진해서 첩을 맞아들인다고 했을 때, 속담에 이르기를 한 말에 두 안장이 없고 한 밥 그릇에 두 숟가락이 없다 하더라, 지금 시속이 예전과 다르고, 성인이 아닌 범인으로서 어찌 투기가 생기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랴. 공연히 옛날의 미명(美名)을 사모하여 화근의 씨를 뿌리지 않도록 함이 좋다고 타이른다. 이러한 인물의 설정은 작가가 축첩제도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씨남정기》는 특히 교씨. 동청. 냉진 등 부정적 인물들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에서 매우 사실주의적이다. 동청과 냉진은 전형적인 악인이다. 그들은 모두 양반가의 자손들로 주색과 사기, 모략과 아부를 일삼는 패륜아들이다. 그들은 교씨와 한 짝이 되어 음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작품에서는 이들을 간신 엄승상과 연계시켜 놓고 그들의 성격을 사회관계 속에서 밝히고 있다.

작품은 또한 까다로운 한문투의 표현을 피하고 구어체에 접근하여 속담이나 격언 등을 적절히 이용하여 우리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은 권선징악적 관념과 봉건적인 각도에서 사씨부인의 성격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묘사한 한계를 갖고 있다. 사씨는 양반가문에서 자라났고 유씨 가문에 시집온 후에도 전통적인 유교의 윤리규범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여인이다. 그녀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진해서 첩을 맞아들이는 것, 누명을 뒤집어쓰고 유씨 가문에서 쫓겨난 다음에도 남편의 선산에 가서 살려는 것 등이 다 '착하고 현숙한'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그녀의 이러한 판단과 처신은 유교적인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따르는 것으로 작가 자신의 가치관이 봉건적 도덕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한계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 작품은 후대 소설 창작의 모범이 되면서, 이후 많은 모방작들이 나타났다. 그런 의미에서 17세기 중. 후반기에 들어 본격적인 소설시대를 연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최근 이 작품과 매우 유사한 구성이나 지향, 주제의식을 보이는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을 중심으로 이러한 초기 장편소설 발생의 측면에 주목해 '규방소설'이라는 유형을 새롭게 설정하기도 한다.

서포는 작품을 통해서, 진실은 언젠간 드러나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교훈을 주려 했으며, 시대적 상황을 작가적 안목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당시 천대받던 한글로 작품을 완성한 점도 높이 평가해야 하겠다.

 

<자료: 공자의 국어사랑>

 

 

 

김만중론

아래는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저와 함께 고소설론을 공부하는 이정훈 군의 과제물입니다.
김만중은 그의 어머니 혜평 윤씨를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 초점을 둔 글입니다. 같은 공부를 하는 동학의 글을 보는 것도 의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성을 사랑한 김만중
-그의 어머니 혜평 윤씨의 영향을 중심으로-

들어가며

 

김만중(金萬重)은 1637년 2월 10일에 병자호란의 와중에 피난 가던 배 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강화도가 함락될 때 선원(仙源) 김상용과 함께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했기 때문에 그는 유복자였다. 김만중이 피난선상의 유복자였다는 것은 그와 그 어머니와의 관계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보통 사람의 모자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완강하게 결속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어머니에 대한 김만중의 효성이 평생토록 남달랐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며, 그의 소설 『구운몽』은 그가 선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어느 날 어머니를 위해 지어 바친 작품이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김만중과 그의 어머니, 그의 작품 사이에는 매우 흥미 있는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김만중의 성장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관계를 실제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김만중의 무의식에 반영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작품 속에 표현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어머니..... 그 이상의 존재, 해평 윤씨.

 

김만중의 어머니 해평 윤씨는 선조의 딸 정혜옹주의 손녀요, 예조참판 지(墀)의 무남독녀였다. 정혜옹주에게는 그녀가 유일한 손자였기 때문에 친히 안아서 기르고 소학을 입으로 외워서 가르쳤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한 번만 가르쳐도 깨우쳐 정혜옹주는 그녀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슬기로운 부인이었다. 성품이 글을 좋아해서 늙어서도 그만 두지 않았는데 치란(治亂)과 명신(名臣)의 언행 보기를 즐겨했다. 또한 자칭 미망인이라 하여 종신토록 빛나는 옷을 입지도 않고, 연회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음악을 듣지 않았다.
전란 중에 남편을 잃은 후 윤 부인은 자신의 친정에 가서 생활했는데, 그의 아버지 참판공 윤지(尹墀)가 죽고 난 후 생활이 어려워져 베짜고 수놓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갔으나 학업에 방해가 될 까 걱정하여 어린 자식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고, 소학 ,사략, 당시(唐詩) 등은 딱히 스승을 두지 않고 윤씨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그녀의 성품과 자식들의 학업에 대한 열정은 어머니에 대해서 쓴 「선비정경부인행장」에 잘 나타나 있다.

“맹자 중용 같은 모든 책은 다 대부인께서 곡식으로 바꾸셨다. 좌전을 파는 자가 있었는데 선형이 뜻에 심히 사랑하되 권수가 많았으므로 값을 감히 묻지 못하매, 대부인이 베틀 가운데 명주를 베어 그 값을 갚으셨다. 이 밖에 남은 저축이라고는 없었는지라, 또 옥당의 관리로 있는 이웃사람으로부터 사서와 시경언해를 빌어다가 손수 베끼시니 자체(字體)가 정세(精細)하여 구슬을 꿴 듯하고 한 획도 구차함이 없으셨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에게 견줄게 아니니, 반드시 다른 날에 재주와 학문이 남보다 한 등급은 뛰어나야 겨우 남과 나란히 설 수 있느니라, 사람들이 행실 없는 이를 꾸짖을 적에 반드시 ‘과부의 자식이라’ 하나니, 이 말을 너희들은 마땅히 뼈에 새길지어다.”

김만중의 어머니는 실로 절행(節行)과 학식과 교육열에 있어서 대단한 여인이었다. 따라서 김만중은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김만중의 전 생애를 통해 언제나 은은한 후광처럼 그의 내면 생활을 지배하던 것은 그의 어머니의 존재였다. 어머니를 향한 김만중의 사친지념(思親之念)은 그의 의식의 저변을 관통하는 한줄기 빛과 같아서, 드디어는 그의 무의식의 심연에 신비스러운 ‘모성상(母性像)’이 형성하였다.

2. 사료 속에 기록된 김만중의 효심

 

그렇다면 김만중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윤씨 부인에 대한 김만중의 효심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지금부터 300여 년 전(숙종 18.1692년)에 김만중이 남해 적소에서 타계하던 날 (음력 4월 30일)을 『서포연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4월에 적사(謫舍)에서 고복(皐復)하다.
부군이 평소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느라 지나치게 마음 상하여 병이 되었다. 게다가 남녘땅이 찌는 듯 덥고 습해서 부습(浮濕)과 해수(咳嗽)와 혈담(血痰) 등 증세가 해가 갈수록 차차로 심해졌다. 또 귀양살이하고 있는 여러 공(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잇달아 듣게 되자 3월에 육화공(六化公)【종형 萬增】에게 답장을 하는 편지에서는, “신상의 여러 증세들은 진실로 끝내 지탱해 낼 도리가 없고, 같은 시기에 쫓겨난 신하달은 모두 세상을 떠나 거의 없으니, 인생은 진실로 한바탕 꿈인가 합니다. 지난 가을 걸상을 마주하고 앉았던 일이 더욱 마음속에 또렷이 빛남을 깨닫습니다.” 하였으니 아마도 일어나지 못할 줄을 스스로 짐작했던 것 같았다. 병이 심해져서 모시고 있던 사람이 약을 바치면 물리치며 말했다. “내 병이 어찌 약을 쓸 병이겠는가?” 마침내 이 날 고복하였다. 목사공(牧使公)【아들 鎭華】은 이부인(李夫人)을 뵈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었고, 단지 동복 두어 사람만 곁에 있었다. 섬에 함게 유배 온 이가 안타깝게 여기어 염습을 해 죽었다.

다음은 『숙종대왕실록』에 기록된 그의 사후 평가이다. 다만 <갑론>은 긍정적 시각을, <을론>은 부정적 시각을 보여준다.

<갑> 전 판서 김만중이 남해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쉰 여섯이었다. 만중의 자는 중숙(重叔)이니 만기(萬基)의 아우이다. 사람됨이 결백 온화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도타웠다. 조정에 벼슬을 하여서는 논의가 강직하였으니 영고성쇠의 갈림길에서 더욱 곧음을 드러내었다. 청렴결백함은 아무도 따를 수 없었으니, 지위가 높은 벼슬에 이르러서도 청빈함이 유생(儒生)과 같았다. 왕비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였다. 권세 있는 요직을 피하고 멀리하여 이조(吏曹) 및 병조(兵曹)의 판서와 대제학(大提學)을 굳이 사양하고 제수받지 아니하니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문사(文詞)가 뛰어났으며 시(詩)가 더욱 고아(古雅)하여 근세의 조속한 말을 쓰지 아니하였으나, 또한 감추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천품(天稟)이 도(道)에 가까운데도 능히 학문에 힘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귀양 가 있을 적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분상(奔喪)하지 못하고 울부짖다가 병이 되어 세상을 떠나니 당시의 사람들이 슬퍼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숙종대왕실록』권지 24 14장 乙 면, 숙종 18년 4월 己酉일.

<을> 전 판서 김만중이 남해의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만중은 문사에 능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도타웠으니, 어머니 잘 섬긴다고 칭찬들을 하였다. 그러나 전혀 식견이 없었으니, 왕실의 가까운 친족으로 있으면서 지론(持論)이 지극히 준혹(峻酷)하여 훈신(勳臣)과 귀족에게 들러붙어서 청의(淸議)를 공격하기에 매우 힘썼다.
이사명(李師命)의 종용(慫慂)을 받고 거짓되고 패려(悖戾)한 말을 경솔하게도 상감께 말씀드리어 사화(士禍)의 계책을 꾸미다가 부자(父子)가 형(刑)을 받아 섬으로 귀양을 갔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분상하지도 못하고 이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뒤에 다시 또 흉악한 역모가 발생하여 집안 전체가 도륙을 당하니 세상에서는 만중이 당론을 준혹하게 한 응보라고들 하였다. 『숙종대왕실록 보궐정오』권지 24 1장 甲면, 숙종 19년 4월 己酉일.

<갑>은 김만중이 속한 노론의 시각이고 <을>은 반대 당파였던 남인의 시각에서 서술된 것이다. 소속 당파에서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반대 당이었던 남인의 시각에서도 김만중은 매우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서술될 정도였다. 윤씨 부인이 김만중에게 어느 정도의 존재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3. 한시 속에 표현된 김만중의 여성상

 

김만중은 2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정시(庭試)에서 장원급제하여 관직을 제수받게 되는데 그가 예조좌랑으로서 처음으로 행한 정치적 행적은 바로 시골 관기의 절개를 표창하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단천의 관기를 위해 그 이야기를 「단천절부시」라는 212구나 되는 장편 서사시로 엮기도 하였다.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보면, 단천의 관기 일선(逸仙)이 단천 부사의 아들 진사 기인과 사랑하고, 마운령 고갯마루에서 이별을 하게 된다. 이 때 일선은 혈서로 불망기(不忘記)를 쓰고 상사 낭군은 머리털을 매듭지어 신표로 잘라 준다. 그 후 단천에는 안사(按使)가 오는데 안사는 공사(公事)엔 관심이 없고 오직 일선을 수청들게 하는 것이 관심이다. 그러나 일선은 수청을 거부하고 우물에 투신하는데 이웃사람들에게 구출되고 여론이 비등한다. 이후로 일선은 화장도 몸치장도 포기한 채 낭군이 남기고 간 상자 속의 머리털만 열어보며 그리워한다. 하루는 그 머리털이 저절로 퇴색하더니 서울로부터 상사의 부고(訃告)가 온다. 일선은 상복을 입고 분상차 서울로 달려간다. 상사댁의 온갖 구박과 멸시를 감내하면서 물 긷고 방아 찧는 노고를 다하니 드디어 본부인과 시어머니가 감동하여 일선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로써 일선의 수절하려는 입지는 관철된다.

또한 서포집에는 모두 366수의 한시 작품이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미인을 제재로 한 시는 51수가 되어 약 14% 정도이다. 그 양적 비중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대게 이것들은 고시나 악부체의 장편들이어서 실제 그 문집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다른 제재의 작품들보다 막대한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을 소재로 한 그의 한시들을 통해서 김만중이 구현한 여성상(女性像)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시에서 형상화한 여인들을 분류해 보면 ①버림받은 궁녀, ②인고의 여인, ③춘몽같은 미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흔히 ①버림받은 궁녀나 ②인고의 여인은 군신관계 또는 정치적 상황을 우의적으로 표현할 때 많이 사용되는 제재이며 ③춘몽같은 미녀는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할 때 많이 사용되는 제재이다. 그러나 김만중의 ②인고의 여인에 관련된 한시 중에는 군신관계를 가탁한 것인지 아닌지 그 낌새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

옛것을 본떠서 지은 시 김병국,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pp.132~133

평평한 들판은 아득히 넓고
산엣 나무들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네.
서릿바람이 찌는 더위를 쓸어가니
병든 잎이 날로 쌓이네.
해와 달이 번갈아 광명 되나니
음과 양은 잘도 바뀌네.
갈대를 보고 저 사람 생각하고
북풍에 수레를 함께 타기 읊조리네.
인생은 뜻에 맞음이 귀하거니
어찌 옛 터에 연연해 하겠는가.
아름다운 사람이 빈 골짜기에 있으니
용모가 어여쁘기 꽃봉오리 같네.
긴 옷자락에 명주를 차고
하얀 이빨은 맑은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네.
가락의 고상함은 세상에 드문 것이니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어찌 많으랴.
매양 생각하되 좇아 놀아서
죽음에 이르러도 맹세코 다른 맘 없을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절행의 여인과 지조의 선비가 겹쳐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갈대를 보고 저 사람 생각하고 북풍에 수레를 함께 타기 읊조리네. 인생은 뜻에 맞음이 귀하거니 어찌 옛 터에 연연해 하겠는가”를 보아 이 작품은 지조 있는 선비와 함께 하기를 노래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지조 있는 선비의 모습은, “아름다운 사람이 빈 골짜기에 있으니 용모가 어여쁘기 꽃봉오리 같네. 긴 옷자락에 명주를 차고 하얀 이빨은 맑은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네” 에서와 같이, 절행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김만중은 절행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지조 있는 고상한 선비의 한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김만중이 이렇게 절행의 여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칭송해 마지않는 것은 그것이 단지 여인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고 그가 지향하고 있는바 가장 소망스러운 인간상, 즉 그의 어머니 윤씨 부인의 형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김만중 작가론4. 소설을 통해 살펴본 김만중의 여성상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통해서도 여성에 대한 그의 인식과 여성상을 이해할 수가 있다. 『구운몽』은 창작 의도 자체가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각양각색의 8명의 여성이 핵심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즉 여성을 단순히 부수적인 인물이 아니라 중요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김만중이 여성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가 있다. 『사씨남정기』 또한 비록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목적소설이지만 교활한 첩과 현덕한 본처의 대립을 내세워 그가 바라는 여성상을 표현하고 있으며 주인공 사씨의 성품은 그의 어머니 윤씨의 성품과 유사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운몽(九雲夢)
『구운몽(九雲夢)』을 글자 그대로 풀어 보면 '구운(九雲)'의 꿈이라는 뜻이다. 전체적인 『구운몽』의 내용은 양소유가 입신양명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8명의 여인을 만나 사랑하는 내용이 주가 된다. 따라서 이 글의 제목을 성진과 8선녀를 구운(九雲)이라 하고, 이들 아홉 사람을 동등한 위치에 세움으로써 소설의 주인공 양소유뿐만 아니라 8선녀 또한 그 비중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로 설정하고자 했던 김만중의 의도를 알 수가 있다.
팔선녀는 성진의 꿈속에서 양소유가 만나게 되는 8명의 여성으로서 등장하는데 그 여성들은 매우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며 동시에 다재다능한 인물들이다. 진채봉은 신의를 가진 인물로, 가춘운, 계섬월, 적경홍은 빼어난 자색과 가무 솜씨가 뛰어난 인물로, 심요연과 백능파는 뛰어난 무술 솜씨와 용기를 가진 인물로, 정 소저와 난양 공주는 어진 덕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김만중은 등장하는 모든 여성을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로 그리는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정경패 : 정 사도의 딸. 거문고가 인연이 되어 만났다. 후에 황태후의 양녀로 들어가 영양 공주로 불린다. 소유의 제 1부인.
· 이소화 : 난양 공주. 천자의 친동생이다. 제 2부인
· 진채봉 : 어사의 딸. 양소유가 과거를 보러 가다가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여 서로 인연을 맺었다. 소유의 제 3부인.
· 가춘운 : 정경패의 시비(侍婢). 소유의 제 4부인.
· 계섬월 : 낙양의 기녀. 천진교 주루에서 처음 만나고 후에 양소유가 연왕을 항복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나 인연을 맺음. 소유의 제 5부인.
· 적경홍 : 북방 궁벽한 시골의 천한 집의 딸. 양소유가 벼슬길에 오른 후 연왕을 항복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만나 인연을 맺었다. 소유의 제 6부인.
· 심요연 : 변방에서 검술과 칼춤을 배우며 자랐다. 양소유가 토번과의 전쟁에 참가했을 때 적진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제 7부인.
· 백능파 : 용왕의 딸. 토번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꿈 속에서 처음 만났다. 제 8부인.

여기서 특기할 것은 심지어 8명의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양소유에게서도 여성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소유는 그 기질이 청수하고 용모가 옥 같은 선비로서 아무래도 여성적인 남성, 즉 미소년이다. 『구운몽』 전편을 통해 양소유가 환기하는 이미지는 이른바 출장입상하는 영웅으로서의 남성상이 아니라, 항상 그 타고난 미모와 시재로 여인을 유혹하는 호색한이며, 그 호색한으로서의 이미지는 여성적 기질과 표리(表裏)의 관계에 있다. 사실, 그에 대한 인물묘사는 ‘얼굴은 옥으로 다스린 듯하고 눈은 새벽 별 같다.’든가, ‘기질이 청수하고 하고 지혜 너그러워 엄연한 대인군자’라든가 하여, 여성적 미모와 선비로서의 청수함을 함께 갖추고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한시에서 나타난 그의 여성관과도 일치한다.

김만중에게 있어서 자아를 넘어서는 심리 세계의 원형상이 그의 어머니이고 이의 문학적 현현(顯現)이 곧 『구운몽』의 여인들이다. 그러므로 양소유의 두 부인과 여섯 낭자는, 그들의 사회적 계층이 각기 아무리 달랐다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과 슬기로움과 어짊에 있어서만은 인간의 상상력이 창조해 낼 수 있는 최상의 여성성으로 김만중이 드러내고자 했던 어머니의 형상과 동일시 될 수 있다.

-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사씨남정기』에도 다양한 성격을 가진 여성들이 등장한다. 현덕(賢德)한 사씨와 대비되는 교활한 교씨, 사리판별자로서의 숙모 두부, 유한림과 사씨를 연결시켜주는 여승 등이다. 작가 김만중이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는 일반적으로 처첩간의 갈등으로 보고 있으나, 오히려 여성의 덕(德)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성혼 과정에서 매파가 사소저의 미색을 칭찬하자 유현은 덕을 강조하여 말했고, 또 사부인이 남편 유한림에게 소실을 얻도록 주선해주는 것은 부덕(婦德)의 소치이다. 그리고 교씨의 간교로 인해 시가에서 쫓겨난 사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부모의 산소에서 지내는 것은 끝까지 덕을 실행 해보려는 강인한 의지의 발로라고 하겠다.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의 주인공 사씨 역시 김만중의 어머니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현덕하며 인고하는 사씨의 모습이 바로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며 또한 그것이 김만중이 추구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형상화된 여성상의 모습인 것이다.

결론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났기에 살부(殺父)의식의 대상이 없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도 아니고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한 페미니스트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러한 어머니를 통해 형상화된 여성을 사랑했고 여성들을 자신의 작품들에 투영시켰다.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그는 여성을 사랑했지만 ‘sex’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gender’로서의 여성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 것을 뒷받침하는 예로 그의 종손 북헌 김춘택(金春澤)의 말을 옮기며 글을 마친다.

사람은 여색에 있어서는 정자가 말한 금수의 경계를 지킬 수 있는 이가 드무니, 만약 할 수 있는 이가 있다하더라도 흔히는 억지로 애써서 지키는 것이다. 선생은 젊어 이동리(李東里) 동리 이은상(李殷相). 김만중의 장인,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름.의 집에서 데릴사위로 살았다.
김만중 작가론동리가 평소 노래하는 기생을 자못 좋아했는데 선생은 그런 환경에 살면서 특별히 잘난 체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했다. 뒤에 관찰사가 되어 외방(外方)에 나가 있을 적에 전례를 따른 기생 공봉(供奉)을 처음부터 또한 물리치는 일이 없었고, 거문고를 듣거나 춤을 감상하며 이를 시사(詩詞)로 나타내기까지 했으나, 그 속마음은 덤덤해서 마치 오래된 우물이 물결이 일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것이 억지로 애써서 지키는 것에 비해 어찌 더욱 어렵지 않은 일이겠는가. 김춘택, 「서포유사별록(西浦遺事別錄)」, 『북헌집(北軒集)』권 16.

【참고문헌】
김병국,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설성경, 『구운몽 연구』, 국학자료원, 1999.
김일렬, 『고전소설신론』, 새문사, 2001.
정규복, 『김만중문학연구』, 국학자료원, 1993.
설성경, 『서포소설의 선과 관음』, 장경각, 1999.
이복규, 『우리 고소설 연구』, 역락, 2004.

 

<자료: 한국문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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