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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작품

시인 신경림(申庚林) / 작품

작성자靑野|작성시간11.05.05|조회수839 목록 댓글 0

 

 

 

신경림(申庚林)

 

1936. 4. 6 충북 중원~.
시인.

 

주로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농민의 한(恨)과 울분을 노래했다.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1955~56년 〈문학예술〉에 시 〈낮달〉·〈갈대〉·〈석상〉 등이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곧 건강이 나빠져 고향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다시 서울로 올라와 현대문학사·휘문출판사·동화출판사 등에서 편집일을 했다. 한때 절필하기도 했으나 1965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여 〈원격지〉(동국시집, 1970. 1)·〈산읍기행〉(월간다리, 1972. 8)·〈시제 詩祭〉(월간중앙, 1972. 12) 등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초기시에서 보여준 관념적인 세계를 벗어나 막연하고 정체된 농촌이 아니라 핍박받는 농민들의 애환을 노래했다. 1973년에 펴낸 첫 시집 〈농무 農舞〉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 마땅한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시집으로 〈새재〉(1979)·〈달넘세〉(1985)·〈남한강〉(1987)·〈우리들의 북〉(1988) 등을 펴냈고, 그밖에 평론으로 〈농촌현실과 농민문학〉(창작과 비평, 1972. 6)·〈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마당, 1982. 6)·〈역사와 현실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시〉(오늘의 책, 1984. 3) 등을 발표했다. 1973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다. 1992년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출처: 브리태니커백과> 

 

 

 

신경림의 작품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갈  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문단 등단 작품 가운데 히나

 

 

 

찌그러진 작업화

새파랗게 빛나는 잎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눕시게 아름다운 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찢기고 할퀴어 흠집투성이인 가지가 보인다
벌레와 비바람에 썩고 잘려나간 밑둥이 보인다
돌과 흙에 짓눌린 뿌리가 보인다

얼어붙은 비탈길을 미끄러지는 쓰레기차가 보인다
이른 새벽 비탈길을 미끄러지는 쓰레기차가 보인다
새벽 셔터를 울리는 시퍼렇게 터진 손이 보인다
농익어 단 열매만을 뽐내는 저 큰 나무에

 


흔 적

생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피운 나무가 있다
해마다 가지가 휠 만큼 탐스런 열매를 맺은 나무도 있고,
평생 번들거리는 잎새들로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다.
가시로 서슬을 세워 끝내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은
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
햇살과 바람에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

지나간 모든 날들을 스스로 장미빛 노을로 덧칠하면서.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발자국

다 해진 신발에 배낭을 메고
길을 가면서 발자국을 남긴다
기념관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여관집 뜰에는 과꽃을 심는다
뒷골목 니나노집에 노래를 흘리고
더러는 하찮은 꿈도 뿌린다
한 삼년 지나 그 길을 더듬으면서
이번에 나는 발자국을 지운다
방명록에서 이름을 뭉개고
여관집 뜰에서 과꽃을 파 없앤다
번화가로 바뀐 뒷골목을 다니면서는
남이 볼세라 노래와 꿈을 거두고

그리고 또 한 삼년이 지나
다 해진 신발에 배낭을 지고
그 길을 가면서 다시 발자국을 만든다
뭉개고 파 없앤 일일랑 아예 잊고
심고 뿌리면서 흔적을 만든다 



막 차

모두들 서둘러 내렸다
빈 찻잔에 찌그러진 신발과 먹다 버린 깡통들
덜컹대며 차는 는개 속을 가고
멀리서 아주 멀리서 닭 우는 소리

그믐달은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
간이역에는 신호등이 없다
갯마을에서는 철적은 상여소리에 막혀
차도 머뭇머뭇 서서 같이 요령을 흔드는
물 빠져나간 스산한 갯벌
자욱한 는개 속에
그대들 버려진 꿈속에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흙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돌 하나, 꽃 한송이

꽃을 좋아해 비구 두엇과 눈속에 핀 매화에 취해도 보고
개망초 하냥 간척지 농투성이 농성에 덩달아도 보고
노래가 좋아 기성화장수 봉고에 실려 반도 횡단도 하고
버려진 광산촌에서 중로의 주모와 동무로 뒹굴기도 하고

이래서 이 세상에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
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 꿈도 꾸면서



객창에서 바람소리를 듣다

황량한 어린 날의 휘파람으로
바람 찬 강촌의 여울 물소리로

뉘우침이 되어서
아픔이 되어서
먼저 간 친구의 속삭임이 되어서

나뭇잎들을 데리고
모든 떨어지는 것들을 데리고

밤새 갯벌을 헤매다가
도심의 휘황한 불빛 속을 누비다가
어두운 골목을 서성이다가

미루나무 가지에 걸려 울다가
기웃이 불꺼진 창문을 들여다보다가
달빛에 몸을 드러냈다가

꿈이 되어서
속삭임이 되어서
하늘에 훨훨 새가 되어서

나뭇잎들을 데리고
더 많은 사라지는 것들을 데리고



귀성 열차

눈 위에 주름 귀 밑에 물사마귀
다들 한결같이 낯설지가 않다
아저씨 워데까지 가신대유
한강만 넘으면 초면끼리 주고받는
맥주보다 달빛에 먼저 취한다
그 저수지에서 불거지 참 많이 잡혔지유
찻간에 가득한 고향의 풀냄새
달빛에서는 귀뚜라미 울음도 들린다
아직 대목장이 제법 크게 슨대면서유
쫓기고 시달린 삶이 꼭 꿈결 같아
터진 손이 조금도 쓰리지 않고
감도 꽤 붉었겠지유 인제
이 하루의 행복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도 적지 않으리
여봐유 방앗간집 할머니 아니슈
돌려 세우면 처음 보는 시골 늙은 아낙
선물 보따리가 달빛 속을 달려가고
너무 똑같아 실례했슈
모두들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낯선 데가 하나도 없는 귀성열차



아버지의 그늘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부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할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낮 달

주문을 받은 주인은 가슴에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산다
중년을 넘긴 아낙은 얼굴에
쌍꺼풀 수술 자국을
지니고 산다

상 위에 날려와 놓이는 보리밥에는
언덕에 피어 있던 달착지근한
찔레꽃이 묻어 있다
앞동산 애총의 황토가 섞여 있다
뚱뚱한 본처의 앙칼진 강짜가
씁쓸한 맛으로 끼여 있다
이것들에다

된장에 고추장에 산나물을 섞어
진한 화냥기까지 두루 섞여
썩썩 비비는 아낙의 손에는
낮달처럼 바랜 지난날의
얘기가 묻어 있다



마주치면 손톱을 세우고 이빨을 갈다가도

큰 몽둥이 하나 끌고 쇠전에서 설치던
가마니 잘 짜던 내 족숙은 거적때기에 말리고
그 족숙 미워 시향도 피하던 다른 족형
칼빈총 멘 채 등에 칼 꽂고 금점굴에 처박히고
그놈의 높새바람 사납기도 하더니
참나무고 홰나무고 남아날 것 같지 않더니

이젠 족숙모 잡화전 모퉁이에서 국수틀을 돌리고
족형수 길 건너 노점에서 시루편을 팔고
마주치면 더러 입에 게거품을 물다가도
허허거리고 얻어온 시향떡도 나누고
그놈의 마파람 모질기도 하더니
진달래고 개나리고 다시 필 것 같지 않더니

마주치면 손톱을 세우고 이빨을 갈다가도





민들레 꽃다지 앉은뱅이 사이에서
눈서리에 팔다리 뒤틀리기도 하고
아침 이슬에 활짝 되살아나기도 하고

아름다운 꽃 한송이 피우지 못하고
꽃씨 한알 높이 날려 올리지 못하면서
장터 상밥집 널마루를 뒹굴며

땀내 지린내 비린내에 절어
뜨거운 틀국수로 삼복에 어깃장도 놓고
속 빈 웃음으로 초승달 벗도 하고

산 넘어 강 건너기를 그리워하면서
골짜기를 휩쓰는 비바람에 두려워 떨면서
물총새 노랑턱멧새 개고마리에 뒤섞여

이 터에 사는 일이 행복한 건지
이 터에 사는 일이 불행한 건지
산 넘어 강 건너를 두려워하면서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 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 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나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꽂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동해바다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하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는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말과 별                                           

 

나는 어려서 우리들이 하는 말이

별이 되는 꿈을 꾼 일이 있다.

들판에서 교실에서 장터거리에서

벌떼처럼 잉잉대는 우리들의 말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는 꿈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같은

찬란한 별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릴 때의 그 꿈이 얼마나 허황했던가고.

 

아무렇게나 배앝는

쓰레기같은 말들이 휴지조각같은 말들이

욕심과 거짓으로 얼룩진 말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별들이 되겠는가.

 

하지만 다시 생각한다.

역시 그 꿈은 옳았다고.

 

착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이

망설이고 겁먹고 비틀대면서 내놓는 말들이

괴로움 속에서 고통 속에서 내놓는 말들이

어찌 아름다운 별들이 안되겠는가.

 

아무래도 오늘밤에는 꿈을 꿀 것 같다.

 

내 귀에 가슴에 마음 속에

아름다운 별이 된

차고 단단한 말들만을 가득

주워담는 꿈을.

 

 

 

나무                                                      

 

나무를 길러 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돌아가길 단념하고 낯선 길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
들리는 말 뜻 몰라 얼마나 자유스러우냐
지나는 행인에게 두 손 벌려 구걸도 하고
동전 몇닢 떨어질 검은 손바닥

 

그 손바닥에 그어진 굵은 손금
그 뜻을 모른들 무슨 소용이랴

 

 

 

 파장(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말골분교 김성구 교사                                

 

북한강가 작은 마을 말골분교 김성구 교사는

종일 남에게서 배우는 것이 업이다

오십 명이 좀 넘는 아이들한테서 배우고

밭매는 그애들 어머니들한테서 배운다

뱃사공한테 배우고 고기잡이한테 배운다

산한테 들한테 물한테 배운다.

제 아내한테도 배우고 자식한테도 배운다

남들이 그를 선생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이렇게 배운 것들을

아무한테도 되돌려준다고 말하지 않는대서다

그는 늘 배우기만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질문에서 배우고 또

아이들의 장난과 다툼에서 배운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모르랴

배우기만 한다는 그한테서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똑같이 배우고 있다는 것을

더불어 살면서 서로 배우고 가르친다는

평범한 진실마저 모르는 잘난 사람들이

자기만이 가르치고 이끌겠다고 설쳐대어

세상이 온통 시끄러운 서울에서

백리도 안 떨어진 북한강가 작은 마을 말골에서 


 

 

산 1번지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바람이 찾아 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얹는다.

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붙어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지리산 노고단 아래                                  

- 황매천의 사당 앞에서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높은 목소리만이 들리고

사방이 어두울수록

큰 몸짓만이 보인다

목소리 높을수록

빈 곳이 많고

몸짓 클수록 거기

거짓 쉽게 섞인다는 것

모르지 않으면서

자꾸 그리로만 귀가 쏠리고

눈이 가는 것은

웬일일까

 

대나무 깎아 그 끝에

먹물 묻혀

살갗 아래 글자 새기듯

살다 가는 일은

서러운 일이다

낮은 목소리 작은 몸짓으로

살갗 아래

분노를 감추고

살다 가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아침 저녁

짙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노고단을 우러르면서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 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서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 申庚林 (1936. 4. 6 -  )                                                              

 
■ 작가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의 흙냄새, 땀냄새


신경림의 대표시 '농무(農舞)'가 던져준 신선한 충격을 기억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의 흙냄새 물신 풍기는 진솔한 삶과 그들 생활의 땀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급기야는 한바탕 신명나는 춤으로 승화된 그 잊지 못할 장면을 잊었는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며 징을 울리고 꽹과리를 치며 억눌렸던 한을 한바탕 춤사위로 풀어내던 민초들의 노래.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어 대는 농민들의 거친 숨결이 아직도 우리 귓전에 생생하다.


이처럼 신경림은 근대화 ·도시화란 이름으로 부르는 근자의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잃어 버린 우리의 근원 정서를 간결하고 담백한 시행에 담아 되살려 낸다. 빨리 잊고 싶은, 한낱 부끄러운 전사(前史)로만 홀대했던 우리 민족의 옛풍경과 농민의 진솔한 목소리를 동시나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과 리듬으로 담아 내고 있는 시인이다. 이처럼 신경림의 시가 다루는 것은 가난한 고향 사람들의 설움과 비애이다. 그의 시가 아니었다면 그 한 맺힌 절절한 목소리를 찾지 못했을 많은 사람들의 설움과 노여움과 정한에 목청을 틔워주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신경림의 '토종의 미학'은 빛을 발한다. 많은 평자들이 그에게 '고향의 터주노래꾼'이란 표찰을 달아 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을 터이다.

 

그의 시가 지닌 또 다른 미덕으로서 간결직절한 서술과 경제적인 감정처리를 손꼽을 수 있다. 그의 시는 실험과 충격보다는 리얼리즘적 감동과 정서적 소구력(訴求力)에 호소한다. 실질 없는 수사에 집착하여, 읽을 때는 뻔지르르한데 몇 번을 읽어도 돌아서면 좀처럼 여운을 남기지 않는 시들과 비견해, 신경림의 시는 거푸 읽을수록 시에 내재된 옹근 의미가 오롯해진다. 어느덧 시력(詩歷) 30년을 훌쩍 넘긴 시인의 연륜과 달관은 최근에 발표한 시에도 여실히 배어 있다.

 

그는 특급 열차를 타고 가다가도 이렇게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 예순에 더 몇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지금, 그는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벗삼아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있을까. 계속되는 그의 시적 행보가 어디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류신/문학평론가)

 

 

 

          <출처: 물금 동아중학교 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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