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李克魯, 문화어: 리극로, 1893년 - 1982년)
일제강점기때 활동한 한글학자, 교육인,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고루'.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생.
1. 생애
생애초기와 독립운동에 투신
1893년 8월 28일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서당 공부를 한 후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에 마산 창신학교에 졸업하고 1912년 중국 만주로 건너가 그곳에서 박은식,신채호 등과 같은 저명한 민족주의자들을 만나고, 후일 대종교의 교주가 된 민족주의자 윤세복을 만난다. 만주에서 지내면서 이극로는 이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후 동북지방 내도산의 독립군 부대에서 훈련도감으로 있다가 무송의 백산학교와 환인현의 동창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15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여 서구 학문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유학생활 및 독립운동 활동
이후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영수 이동휘가 고려공산당 내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데에 이동휘와 동행하였다가, 독일 베를린종합대학에 유학하게 되고 여기에서 1921년~1927년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어 베를린종합대학에 동방어학부 조선어학과를 창설하고 베를린대 조선어학 강사로 재직하면서 주경야독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1]
독일에서 귀국하기 전인 1927년 제1회 세계 약소민족대회에 조선대표로 출석하여 '조선 독립 실행을 일본 정부에 요구할 것','조선에 있어서 총독정치를 중지시킬 것','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등 세 항목의 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서 당시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던 허헌을 만나 조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귀국하는 길에 미국에 들러 서재필과 이승만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고 한다.
국내 독립운동 활동 및 한글연구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지역에 들러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선에서의 활동을 구상했던 이극로는 1929년 1월 귀국 했다. 이후 한글학자와 교육자로 많은 활동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글 연구단체인 한글학회의 전신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사전편찬 작업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 중추적인 핵심 역할을 맡았다. 조선어학회에서 꽤나 비중이 높은 활동을 했는데,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으로 이어진다),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2] 그밖에 1930년 신간회 대표로 동포구제의 목적을 띠고 만주지방을 돌아보다가 귀국했다.
조선어학회 사건 투옥
조선어학회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2년 7월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최현배,이윤재와 함께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당했다. 여기서 그는 징역 6년형 선고받았고, 같은 한글학자로 조선어학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최현배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역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던 이윤재는 수감 중 옥사했다.) 이후 함흥감옥에 갇혔다가 1945년 광복 이틀 후 8월 17일 출소했다.[3] 이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는데,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지내는 이근엽 교수가 당시 출옥당시를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이근엽 교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7일 내가 15살 때인데 조선어학회 회원인 모기윤 선생이 교회 청년 30여 명을 함흥형무소 앞으로 모이게 해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었다. 모기윤 선생이 조선인 검사에게 광복이 되었는데 왜 독립운동가들을 풀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해서 네 분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 분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님인 것을 그 뒤 알게 되었다. 그 때 한 분(이극로 선생으로 보임)은 들것에 들려나오고 세 분은 부축해 나오는데 처참한 모습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이틀이 지났지만 일제가 무서워 태극기를 들고 환영도 못했다. (하략)[4]
광복이후 활동
해방정국 이극로는 다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글연구를 다시 이끌었다. 그런데 1945년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붉어져,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김구가 이끌던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운동본부'의 위원으로 반탁운동에 참여했다.[5]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내 동시에 한글연구와 교육활동에 주력했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대두되자, 그는 좌우합작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입법기관(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서는 좌우합작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947년 초에는 조봉암과 함께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재개 조짐이 보이자, 좌우합작위원회에 가담해 '시국대책협의회'에 참가한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어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체되었다. 그 해 12월 20일, 김규식이 주도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6]
1948년 4월 김구가 주도하던 남북협상 위원으로 참가해 평양을 방문한다. 이 때, 김구는 서울로 귀환하지만 이극로는 그냥 북한에 남으면서 결과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그가 북한에 남은 이유는 남한에 있었을때 이승만과 사이가 정말 나빴고, 남쪽에서 이승만의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이에 싫증을 느꼈다고 한다.[7]
북한 정권에서의 활동
1948년 9월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1953년 12월까지 제1차내각의 무임소상(無任所相)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등을 지냈으나, 이는 명예직에 가까운 직책이어서 딱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에서 이는 숙청 바람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한글보급 운동 및 한글연구에 몰두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1966년 이후 본격화된 북한 언어 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을 주도하였다.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그 동안 언어학 연구기관들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의 소장, 위원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에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이 있다.
1982년 사망했다.
사후
일제강점기때부터 시작해서 오랜 기간의 교수 및 연구활동을 통하여 한국어 발전과 과학적 해명에 큰 공을 세웠다.[1] 이런 공로로 살아생전 1973년 북한 정부로부터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의 원사(1973년)이며 박사학위(1970년)를 받았다. 사후 조국통일상과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1]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월북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 관심이 멀어졌었다. 그러나, 최근 이극로가 1920년대 외국(독일)에서 유학공부했을 시절에 세계 곳곳에 한글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재조명을 받아 주목받고 있다.[8]
일화
대한민국의 안과의사인 공병우의 세벌식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 이극로가 눈병으로 공병우가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병우는 한글학자 이극로에 대한 열정에 자극을 받아 공병우는 본격적으로 한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9]
친일의혹설과 이에대한 논박
조선일보를 비롯한 과거 친일파 후손들은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발간이 있었을때, '이극로가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명단에 있었다'는등 '일제시책을 지지하는 강연을 했다.'는등 근거로 그를 '좌익계열 친일파'라고 매도하면서 당시 대서특필로 보도해 다뤘다.[10] 그러나 이극로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최현배와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된 인물이고, 실제로는 전향하지도 않고 가혹한 고문을 받은 채 1945년 8월 17일이 되서야 출옥했다. 따라서, 이극로의 이런 행보를 감안하면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측에서의 논리는 비논리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1945년 8월 17일 출옥 당시 처참한 모습으로 출옥한 것등 감안한다면 그가 전향해서 총독부에 협력했다는 것은 도저히 맞지 않는다.[11] 그리고, 이극로는 '좌익'계열 인물이 아닌 중도우파 성향의 노선을 견지했던 한글학자였다.[12]
정치노선
1948년 남북협상때 그대로 북한에 남아 '월북 인사'로 분류되어 '사회주의자','좌익계열'로 오랫동안 낙인[13]되어왔으나, 오늘날 재조명되어 민족주의 우파쪽 성향 학자로 분류된다.[14] 북한에 있으면서 그는 공직으로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의장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직등 역임해왔으나, 그 자리는 명예직에만 가까운직이었지 정치적인 직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이극로는 북한에 있으면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고, 한글연구에 몰두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에서 이는 숙청 바람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가 1948년 남북협상때 북한에 남은 이유가 당시 남한에서 이승만과 사이가 정말 나빴고, 남쪽에서 이승만의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이에 싫증을 느꼈다는것이 원인이었다고한다.[15] 이극로는 조봉암과도 같이 일할 정도[16]로 좌파라고 배척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김구,안재홍과 함께 사업을 추진하는 우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17]
논문
- 〈조선어 어음의 된소리 음리에 대한 과학적 천명〉(1928)
- 〈훈민정음의 독특한 음성 관찰〉(1932)
- 〈'·'의 음가에 대하여〉(1937)
- 〈조선말 역점연구〉(1957)
저서
-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9)
- 〈조선말 조(調) 연구〉(1966)
<출처: 위키백과>
2. 시(詩)를 통해 본 이극로의 생애와 사상
- 이승재 (미국 조지아 대학교 비교문학과 강사)
시란 글쓴이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 장르다. 소설은 서사적이고 분석적이지만, 시는 본질적으로 서정적이며 압축적이다. 형식과 운율적 언어에 대한 이해 그리고 비유에 대한 감각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수필보다는 덜 자유적이지만 그러나 그런 점들 때문에 수필보다는 좀더 예술적인 문학 장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글 독립 운동가 이극로 (1893-1978)가 남긴 글들은 대부분이 논문과 논평이지만, 평생 동안 한글을 사랑하신 만큼 언어의 예술적 사용에도 관심이 많았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적지 않게 시들과 수필 그리고 노래 가사(대종교 한얼 노래) 들을 남기셨다. 그러나 시는 대략 10여편 밖에 남기기 않았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이극로의 문학적 성과를 논의 하는것은 무리가 있겠고, 그동안 너무 딱딱한 글들로 이극로가 대중들에게 소개 되었던 감이 없지 않아 이번에는 한번 다른 관점에서 그를 소개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취지로 이글을 쓴다. 그래서 서두로서 격식을 차린 이극로의 소개는 생략한다. 그냥 여가 시간에 무심코 옆에 있는 책을 집어들고 읽듯 편안한 마음으로 이 글이 읽혀지기를 바란다. 물론 간헐적으로 씌여진 시들를 통해서 이극로의 생애를 총제적으로 일목 요연하게 소개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이극로를 아는 사람 혹은 모르는 사람 모두에게나 그가 친근한 ‘인간’ 이극로의 이미지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극로의 인생의 시작은 그야 말로 척박한 공터에서 기적처럼 피어난 꽃이라고 해야 할까? 지방에서는 동학 농민운동이 서울에서는 개화당의 세력이 커져가는 혼란의 시대인 1893년, 전형적인 시골마을인 경남 의령 지정면 두곡리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세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맏형수와 서모 밑에서 자랐다. 이런 상황을 볼때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막내로서 다섯 형님들을 잘 따르고 열심히 농사지으면 그만인 것이다. 형님들도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다니고 공부를 못했는데 막내가 감히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배울 수 없는 환경인 만큼 배우고자 하는 욕망은 더 강했으리라. 남들이 점심 먹으러 간 틈을 이용해 서당에 몰래 들어가 쓰고 남은 종이를 이용해 글을 익혔다. 그리고 8살때 시회 詩會가 열렸을때 사람들의 청에 즉석에서 ‘문文’자를 운으로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육언시六言詩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春來千山和氣 一日人人作文
(봄이 찾아와 온 산에 평화로운 기가 넘치니 날마다 사람마다 글을 짓는구나)
어깨 넘어로 익힌것을 바탕으로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행위를 연결하여 기승전결 구조로 절묘하게 육언시를 지어낸 것이다. 이듬에 열린 시회에서는 ‘방方’자를 운으로 하여 즉석에서 칠언구을 지었다.
芳草長岸詩四句 開花幽谷輿萬方
(‘길게 늘어선 언덕에 향기로운 풀’이라는 네 싯구는 깊은 산골에 만개한 꽃처럼
만방에 흥을 돋우는 구나)
믿기지는 않지만 정말 어린 나이에 자연이 주는 환희를 알았던 것일까? 언어적 감각이 타고난 시의 천재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리저리 들은 풍월을 바탕으로 조합해서 만들어낸 시겠지만 그렇다고 시작詩作을 하는데 있어서 천재가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많은 외국 시인들 중 상당수가 이미 10세 이전에 기본 시작법을 완성한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타고난 언어적 감각 없이 이런 시를 즉석에서 만들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향후 이극로가 언어 연구에 일생을 바치게 되는 이유도 그러므로 그가 어릴때 부터 글을 배우겠다는 열정과 남달리 언어적 감각이 탁월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방초장안芳草長岸’이라는 싯구의 출처는 알수 없으나 ‘방초’란 말은 풀의 향긋한 아름다움을 묘사할때 한시에서 흔히 쓰였던 문구이다. ‘장안’은 길면서 낭떠러지 같은 다소 가파른 언덕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연에 대한 상상력이 수평적이자 동시에 수직적 공간으로 확대 된 것이다. 이렇게 상상속의 확대된 공간에서 퍼지는 풀의 향기는, 지금 이곳 두곡리의 깊은 산골에 만개한 향기로운 꽃들과 대구對句를 이룬다. 이런 언어가 자극하는 상상력의 세계와 눈으로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어찌 즐거움을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듬해 봄날엔 또 거문고 ‘금琴’자를 운으로 다음과 같은 칠언구를 지었는데 이것은 정말 어린 나이에 지은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백이나 두보가 지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그런 작품이다.
十里風景生時句 百年憂樂在書琴
(십리 풍경이 시를 만들어내고 백년의 근심과 기쁨이 책과 거문고를 있게 하는구나)
자서전 「고투 40년」에서 이극로는 이 시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좌중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고 표현 했다. 이 시는 자연이 시를 있게 하고 인간의 희노애락은 책과 거문고를 있게 한다, 혹은 책은 인간이 고뇌했던 지知를 담아 내고 있고 음악은 즐거움을 노래한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풍류와 인생의 깊이를 이해하고 이런 시를 지었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책의 중요함을 벌써 이 어린 나이에 깨달았던 것은 확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이 글은 향후 이극로가 일생을 바치게 될 학문에 대한 열정의 서곡序曲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시, 학문, 예禮, 음악音樂의 조화는 공자가 논어에서 역설한 교육이념이다. 그 당시 서당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가르치지는 않았겠지만, 시와 책과 음악을 연결하는 시를 썼다는 것은 당시 이극로가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 정도는 충분히 잘 습득 하고 체화 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이극로는 배움에의 열망으로 여러번의 가출을 했고 천신만고 끝에 결국은 마산의 창신학교를 다니게 된다. 1912년 학업을 마치고 독립군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고국을 떠나 만주 서간도에 간다. 당시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방은 독립 운동가들의 집결지이자 민족교육의 중심지였다. 이극로는 이때 처음으로 백두산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감회를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뜨거운 피’로 다음과 같이 한글시로 노래 했다. 전문은 16연 58행의 긴 자유시인데 여기서는 지면상 첫 두 연과 마지막 연만 싣는다.
백두산! 백두산! 백두산이라!
하늘 위냐? 하늘 밑이냐?
하늘에 오르는 사닥다리로구나!
진세塵世의 더러운 기운
발밑인들 어찌 미치리
그는 세상을 내려 살피고
세상은 그를 우러러 본다
세상은 만민이요 그는 제왕이구나!
. . .
우뚝 선 보탑寶塔 이로다
영원히 조선 겨례의 보탑이로구나
전체적으로 거칠게 읽히는 이 시는 절제되지 않은 리듬과 불규칙한 감정의 토로 그리고 투박한 은유의 구사로 미학적으로 뛰어난 시는 아니나, 이극로의 시들 중 가장 이극로 다운 기백이 넘치는 시다. ‘진세’와 ‘보탑’은 불교 용어로 각각 속세와 보배로운 탑이란 뜻이다. 나라 잃은 슬픔으로 점철된 더러운 세상속에서 꿋꿋이 위용있게 서있는 저 ‘제왕’같이 드높은 백두산을 보며 이극로는 한민족의 불멸의 혼을 느끼고 있다. 민족의 독립은 시 속에서 신격화된 존재인 백두산의 가호 속에서 당연히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하늘의 뜻이다. 대자연의 존엄속에서 어서 빨리 나라를 되찾아야 겠다는 ‘뜨거운 피’를 느끼며 이극로는 다시금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진다. 그는 믿는다 백두산은 민족의 보배로운 탑으로서 영원히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라고.
유학을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가는 중에 1921년 이극로는 이집트, 이탈리아, 스위스를 거치게 되고 그곳에서 이집트 문명과 서양 문명을 토대가 됐던 기독교 문화를 유심히 관찰한다. 그는 시대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당시 먹고 살기도 힘든 식민지 조선에서 누가 유학이라는 것을 감히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갇힌 세상과 시야 속에서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 유학을 결심하게 된것도 국제적 흐름과 열린 시야속에서 조선의 상황을 이해 할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극로의 애국주의는 감정적, 지엽적, 국수적 애국주의가 아닌 세계적인 시야와 역사적 감각 속에서 나온 애국주의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한국 최초의 코즈모 폴리턴 애국주의자 cosmopolitan patriot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명이자 가장 찬란했던 문명을 이끌었던 이집트를 방문한 이극로는 자신의 나그네 신세와 비교하여 끊임없이 흐르는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몸소 느낀다. 이런 비교적인 관점으로 그는 아마 고대 시대 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우리 나라의 역사를 생각했을 것이고,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 곧 올 것임을 느꼈을 것이고, 우리가 문화 (한글)를 지키지 못하면 언젠가는 또 어느 나라의 식민지가 될 것임을 느꼈을 것이다.
금자탑은 높이 하늘을 뚫고 섰구나
애급 문화를 여기에서 본다
나일강은 흘러 쉬지 않고
사하라 사막 바람은 불고 있다
헤홉 왕의 넋은 아직도 살아 있어
북쪽으로 카이로를 바라보고 운다
예나 이제나 구경 다니는 동서양 나그네
나라의 흥망이 덧없음을 새로 느낀다.
- 「애급埃及 금자탑 위에서 읊음」
‘애급’은 성경에 있는 ‘애굽’과 같은 말로 이집트를 가리키고 ‘금자탑’은 지금 말로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 모양이 ‘금金’자와 비슷하기 때문에 옛날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헤홉왕’은 쿠푸왕을 가리킨다. 이극로는 지금 이집트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인 지금도 이집트 여행의 필수 코스라 할 수 있는 대大 피라미드, 즉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찬란했던 이집트 문화의 상징인 피라미드는 지금은 외로이 관광객들만 맞이하고 있지만 이극로는 그 문화의 넋은 자연이 변치 않고 있는 것처럼 아직 살아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넋은 살아 있지만 헤홉왕은 ‘카이로를 바라보고 운다’라고 함으로써 이 시는 반전反轉을 만들어고 역사의 페이소스를 자극 시킨다. 모든게 다 지난날의 추억일 뿐이다. 이 시는 인간사의 ‘덧없음’ 이라는 우수憂愁에 찬 심상으로 끝난다. 아마 이극로의 우리 나라에 대한 심정은 저 헤홉왕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화려했던 오천년의 역사가 일제에 의해 단절되었으니 헤홉왕 처럼 그는 지금 조선을 바라보고 울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는 애급의 넋이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조선의 넋도 아직도 죽지 않았음을 확신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이후 로마에 가서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찬란했던 로마 문화의 위용과 지금은 카톨릭 교회의 중심으로 세계를 이끄는 로마 교황청을 본 감회를 다음과 같이 시로 표현한다. 동양인으로서의 서양 역사에 대한 비판과 편견 보다는 역사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열린 마음으로 관조하고 있다.
로마 문명이 일어난 이 땅은
찾는 곳마다 절로 절하고 싶다
이태리 사람은 전통적으로 예술의 생활
나날이 하는 노래와 춤은 옛날 전례를 쫓누나
- 「로마를 읊음」
온 세상을 다스리고자 함은 영웅의 꿈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일을 성취함을 보지 못했다
오직 로마 교황의 권세만은
그 천하를 거느리고 이 성에 있다.
- 「로마 교황청을 읊음」
서양 기독교 문화를 접해본 이극로를 감동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갖는 보편성과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의 이런 종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이해는 옳은 것이다. 어느 한 나라가 종교가 없을 때 쉽게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과거의 세계 역사를 통해 수도 없이 보았다. 이극로는 우리나라의 종교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것이 있는데 굳이 서양의 기독교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훗날 귀국해서 그가 민족 종교인 대종교에 관심을 두고 당시 대종교 교주인 윤세복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고 활동하게 된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1927년 베를린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벨기에, 영국, 미국을 거쳐 1929년 드디어 이극로는 고국땅을 밟는다. 이후 조선어학회를 설립하고 사전편찬, 표준말 제정, 맞춤법 통일, 한글 보급에 전력을 다한다. 시인 정지용은 ‘언어 예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 라고 말했는데, 물론 바쁜 활동으로 시를 쓰지는 못했지만 이것을 몸소 뛰어다니면서 가장 확실하고도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보여주고 실천한 사람은 아마 이극로가 아닌가 싶다. 사실 이 기간 동안 이극로는 가장 많은 글을 썼으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한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것은 정말 상상 하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1939년 이극로는 고향땅을 다시 밟고 낙동강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1.
낙동강 칠백 리 흘러간 저 물이
태평양 위에서 태평가를 부르네
2.
진주 앞 흘러온 저 맑은 남강물
합강된 거룽강 경치도 좋구나
3.
강녁은 열러서 너른 들 많은데
곡식이 익어서 황금밭 됐구나
4.
김유신 칼 갈고 솔거가 붓씻어
신라를 빛내던 낙동강이로구나
- 「낙동강」
1939년이면 이극로가 가장 바빴던 시기였겠지만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 그가 자연의 풍류를 즐기는 여유를 잊지 않았음을 본다. 사실 낙동강은 강원도에서 시작하여 남해로 흐르는 긴 강으로 족히 천 이백리는 된다. 그래서 ‘낙동강 칠백리’는 엄밀하게 보면 틀린 표현인데 그렇지만 낙동강의 주류가 사실 경북 상주에서 시작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것은 맞는 표현이다. 지금도 우리는 흔히 ‘낙동강 칠백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낙동강은 태평하게 노래를 부르며 한가로이 태평양으로 흐른다. 저 무한한 바다로 저멀리 미국으로 혹은 세계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남강’은 낙동강의 한 지류로서 진주에서 흘러나와 의령군과 함안군의 경계를 만든다. ‘거룽강’은 지금의 ‘거릉강’을 말할진대 남강의 한 작은 지류로서 이것은 의령군 지정면으로 흐른다. 이극로는 지금 낙동강을 따라 고향땅으로 걸어가면서 경치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다다른 고향땅은 강녁이 훤히 열려 있고 곡식이 황금빛을 발하는 추수를 앞둔 풍요로운 가을 이다. 이 풍요의 공간은 다시 낙동강의 찬란한 역사를 생각케 해준다. 이곳은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 통일을 이룩했던 김유신 장군이 칼을 씻던 곳이고 통일 신라 시대에 황룡사 벽에 새들이 앉으려 했다가 부딪혀 떨어져 죽었다던 그림을 그렸던 솔거가 붓을 씼던 곳이다. 이극로가 김유신 장군과 솔거를 떠올린 것은 그가 짊어진 막중한 역사적 의무와 그가 바라는 세상, 즉 자주 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 그리고 아름다운 문화가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쉽고 읽은 만한 작품으로 이극로의 풍류와 나라 사랑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이 정겹고도 깔끔하게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이런 좋은 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서 많은 어린 학생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1941년 이극로는 강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낭만적인 도가풍의 시를 썼다. 이 시는 여러 측면을 고려 해 봤을 때 이극로의 모든 시들 중에서 가장 잘 씌여진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1.
한강은 조선에서 이름 높은 강
멀리도 태백산의 근원이로다
동에서 흘러나와 서해로 갈때
강화도 마니산이 맞이하는구나
2.
강역은 한폭 그림 산과 들인데
초부의 도끼소리 멀리 들린다
점심밥 이고가는 농촌 아가씨
걸음이 바쁘구나 땀이 나누나
3.
한양성 싸고 도는 저 물굽이에
배 뛰운 영웅호걸 몇몇이더냐?
강천에 훨훨 나는 백구들이나
아마도 틀림없이 알까 합니다
4.
산 넘어 물 건너서 저기 저 마을
우리의 부모처자 사는 곳일세
떼배에 한가하게 앉는 사공들
기뻐서 이 강산을 노래합니다
- 「한강의 노래」
이 시는 김소월의 민요시가 바탕을 둔 7·5조의 율격을 엄격히 따른 시로 그만큼 리듬감 있고 정감있게 읽힌다. 첫 연은「낙동강」처럼 지리적인 관찰로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한강을 수도로 전개 됐기 때문에 ‘가장 이름 높은 강’이다. 한강의 발원은 태백산맥이고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서울을 거쳐 마니산을 지나 서해로 들어간다. 정확한 지리적 정보의 서술은 다소 딱딱한 느낌을 줄 수 있었으나 1연 끝의 ‘-누나’라는 감탄적 어미가 분위기를 살리면서 다음 연을 준비하게 해준다. ‘-누나’라는 어미는 2연에서도 반복된다. 이극로는 이제 강둑에 서서 아름다운 한강의 산과 들을 한 눈에 바라본다. 이때 멀리서 ‘초부’ 즉 나무꾼이 나무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강녁에서 배를 만드는 사람의 소리라고 해석해도 될 것이다. 이어 땀을 흘리면서 점심밥을 이고 가는 명랑한 ‘농촌 아가씨’의 모습이 정겹게 그려진다. 다음 연에서는 역사적 공간으로 넘어간다. ‘한양성’은 서울의 중심 4대문 안을 가리키는데 지금 이극로는 지금 그곳을 바라보며 한양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수많은 의로운 영웅들을 생각한다. 알려진 영웅들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영웅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 영웅들이 없었다면 이 나라의 중심인 한양성은 그런 오랜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 나온다. 강위를 날고 있는 ‘백구’들 즉, 갈매기들은 그것을 알고 있지 않을까라고 이극로는 상상한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자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반복된다. 우리들의 기록의 역사에서 사라진 영웅들이라 해도 ‘백구’로 대표되는 자연의 불멸성은 그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이극로의 상상력의 영역은 더욱 더 확대된다. ‘산 넘고 물 건너서 저기 저 마을’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마을이라기 보다는 그냥 막연한 ‘저기 저 마을’로서 남쪽 전체를 가리킨다. 이 막연한 심상을 주는 ‘저기 저’가 이 시의 낭만성과 신비감을 더한다. ‘떼배’라는 것은 지금은 전시관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뗏목 몇 개를 엮고 돛을 달아 만든 원시적 형태의 작은 배인데 가까운 연안에서의 해초 채취와 간단한 자리잡이, 낚시에 쓰였었다. 한강 유역에서는 사용되지 않았고 주로 남해안 일대나 울릉도, 제주도에서 사용되었다. 이 ‘떼배’라는 배의 이미지는 얼마나 낭만적 향수를 자극하는가! 이극로는 지금 서울에서 ‘저 멀리’ 남쪽에 있을 우리의 부모처자들을 떠올리고 있으며 그의 귀는 떼배위에서 한가로이 노를 젖고 있는 사공들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있다. 떼배라는 것이 바다를 업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고달픈 채취 즉 우리 민족의 고난을 상징할 수 도 있겠지만 그러나 여기에서는 낭만과 환희로 승화되어 온 ‘강산’에 울려 퍼지는 행복과 평화의 노래가 나오는 곳으로서의 상징이 된다.
1942년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함께 구속되어 함흥 형무소에 수감된다. 일제는 이극로가 주모자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따로 독방에 수감해서 가장 혹독한 감시와 고문을 그에게 가했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고 할 만큼 석방 이후에도 만신창이된 몸을 치료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다음의 시는 그가 함흥 형무소에 있었을 때 썼던 시로 그가 그곳에서 느낀 감회의 생생한 증언이다. 먼저 첫 두연을 보자.
1.
본디 닥치는 대로 사는 이가
어찌 감옥살인들 피할 사람인가
몇 번이나 죽을 뻔하였는데
하느님이 도와서 살아난 사람이다
나와 같이 복을 받은 사람도
어찌 이 세상사람에 그리 많겠는가
오직 신께 이미 받은 은혜를 감사할 뿐이요
장래 일은 하느님의 뜻에 맡긴 사람이다
2.
그 사람의 죽음은 한때 일이나
진리와 정의만은 영원히 산다
한 부분 혈구가 희생을 당하여
귀중한 몸의 전체가 산다
천지 사이 만물 가운데
사람만이 영원히 전체로 산다
맘과 몸이 튼튼한 복을 구하려거든
일이 많아서 생사를 잊어버려라
여기서는 혹독한 고문이나 감옥 생활에도 굴하지 않는 이극로의 강인한 정신을 볼 수 있다. 그는 생각한다 결심한 바가 있으면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기에 ‘물불’이라는 호를 가지기도 했는데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굴할 순 없지 않은가. ‘하느님의 뜻’이란 기독교의 신이냐 대종교의 단군檀君이냐를 떠나서 그냥 천의天意을 가리킨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미 이극로는 당시 국제 정세를 관망하고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하늘의 뜻이 그러하고 자기는 그 뜻에 사는 사람인데 뭐가 두려울 쏘냐. 그리고 죽음이란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진리와 정의’는 불멸하므로 혹시 내가 죽어도 내가 행한 진리와 정의는 남아서 ‘몸의 전체’ 즉 나라 전체의 토대가 된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희생을 두려워 하지 않는 정신이다. ‘사람만이 영원히 전체로 산다’는 육체는 죽어도 그 사람의 정신은 죽을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전체’는 여기서 ‘전생全生’을 의미하는데 한 평생이란 뜻으로 보기보단 ‘생명을 보전保全’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3.
어려움을 참고 사전을 만듦은
선비의 도리에 의무를 다함이다
이런 일이 또한 죄가 되어서
마침내 진시황의 솜씨를 만났다
가슴을 치며 울고 싶으나
어찌 하느냐, 이것도 자유가 없다
김은 밤 감옥 방 안에서
홀로 누워 눈물만 흘린다
이극로의 분한 마음과 처절했던 삶의 순간이 생생이 느껴진다. 일제의 문화적 탄압을 진시황제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비유한다. 한글 연구가 선비된 도리로서 학문적 열망을 가지고 하는 당연하고도 순수한 일인데 가차 없는 탄압을 당했다. 너무 분해서 울고 싶으나 독방에서 24시간 감시를 당하니 약한 모습 보여서는 안 되겠기에 눈물을 흘릴 수 도 없다. 어두워지면 홀로 누워 몰래 분한 마음을 삵힐 뿐이다.
4.
새 가을 한밤중에 벌레소리가 시끄러워
옥 안에 갇힌 사람이 잠들지 목한다
어린 자식과 약한 아내는 요 사이 어떤가
책임을 느끼매 마음 편하지 못하다
한 밤중에 귀뚜라미 소리에 깨어 우수憂愁에 젖는다. 바쁘게 사느라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 하지도 못하고 살아 왔는데 이 한 밤중에 무력하게 형무소에 혼자 있으려니까 집안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귀뚜라미 소리는 마치 아내와 아이의 울음 소리 처럼 들리는데 그렇다고 집안 소식을 알 방법도 없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 하면서 끝나는 이 시는 이극로의 시들 중 가장 슬픈 시이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가장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시다. 전체적으로 보면 앞의 두 연의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의 ‘물불’ 이극로와 나머지 두 연의 섬세한 인간적인 모습의 ‘인간’ 이극로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미학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해방 후 이극로는 한 편의 시를 남겼는데 이것이 그가 남한에서의 활동에서 남긴 마지막 시다. 이 시는 그가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독립 투사들에게 바치는 송가頌歌 이다.
1.
역사 오랜 조선나라 멸망 당하니
충렬사는 의분으로 일어섰구나
만주들을 쓸고 오는 시베리아 바람
두만 압록 맑은 강물 얼어붙었다
서릿발이 나는 칼날 번쩍거리니
적의 목은 낙엽같이 떨어지누나
마주 오는 적의 탄알 가슴 뚫으니
거룩한 피 새론 역사 이뤄주었다
2.
조상나라 위한 몸이 목숨 바치니
그 정신이 멀리 뻗쳐 교훈 되구나
몸은 죽고 혼은 남아 영원 무궁히
자자손손 우리들과 함께 살도다
두견새가 슬피 우는 저문 봄날에
적국 일본 사쿠라도 떨어졌구나
충렬사여 두 눈만은 감아주소서
우리들은 새 나라를 세우오리다
- 「진혼곡」
일제에 나라는 빼앗겼지만 충렬사로 대표되는 열사와 충신의 정신은 살아서 독립 투사들을 이끌었다. 그들은 만주의 혹한 속에서도 절대 포기 하기 않고 끝까지 싸웠다. 그들은 그렇게 죽어 갔지만 그들의 ‘거룩한 피’는 새 역사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결코 헛되지 않다. 그리고 그 불굴의 정신은 우리 모두가 그리고 자자손손 모두가 새겨야 할 ‘교훈’이 된다. ‘저문 봄날에 적국 일본 사쿠라도 떨어졌구나’는 8월 15일 광복절과 연관시키지 말고 상징적인 구절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는 곳 봄날 화려하게 피는 듯 했지만 한순간에 지는 벚꽃처럼 몰락한 일제의 군국주의를 상징한다. 마지막 두 행에서 이극로는 충렬사 애국 지사들에게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셔도 됩니다라는 마지막 위령 慰靈을 드리는데 이것은 그의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 결의였는지 명백히 보여준다.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극로의 당찬 결의는 그러나 그가 가장 바라지 않던 방향으로 전개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것은 이극로 개인의 비극이자 한국 역사의 비극이다. 민족 분단만은 어떻게 든 막아 볼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역사는 외면했다. 그가 이루지 못한 역사는 현재에도 진행 중인 역사다. 그는1948년 평양에서 개최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건민회 대표로 참석한 후 방언 연구차 그곳에 더 체류하게 되면서 결국 북한에 잔류하게 된다. 그 이후 그곳에서 한글 학자로서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저간의 사정이 어떠했으며 또 월북 이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나중에 통일이 되서 그에 관한 모든 자료가 공개 되지 않는 한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우리가 그가 남긴 업적을 아직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우리는 그가 가장 원치 않았던 역사를 살고 있다는 현실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가장 원치 않았던 역사였다. 하지만 편리한 세상에 길들여져 통일에 대한 인식과 중요성이 점점 사그러들어가는 이 시점에 분단의 비극이라는 사실에 무감각해져서 분단이 자연스런 역사로 무심코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한반도의 분단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의 자명한 이치다. 위의 시에서 이극로는 육체는 죽어도 정신은 영원히 산다고 했는데 그가 우리에게 남긴 업적과 정신은 곧 아니면 언젠가는 역사에 의해 다시 살아남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완성의 인생을 살다간 이극로, 한반도의 비극속에서 그도 죽는 날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고향 산천에 황금빛 들판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도 분명히 한강을 낙동강을 고향 산천과 떼배에 탄 사공의 노랫소리를 사무치게 그리워 했을 것이다. 시 몇 편으로 이극로의 전 생애와 사상을 개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글이 이극로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친근한 소개서로서 그 기능을 했다면 또한 이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극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면 필자는 보람을 느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상황상 자료 부족으로 「고투 40년」에만 의존하여 이 글을 썼는데 혹시 중요치 않은 것을 강조하고 중요한 것을 누락하지 않았는지 잘못된 정보가 있지는 않았는지 심히 걱정된다. 다음 번에 또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그 때는 수필을 통해 또 한번 ‘인간’ 이극로를 얘기하고 싶다.
<출처: 블로그 토요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