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 시인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196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그 해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펴냄
196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서울신문≫ 신춘문예,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196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시조가 당선되는 등
신춘문예 5관왕의 신화를 만듬
1963년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 시, 시조 2개 부문을 수상
1964년 시「노래여 노래여」로 문화공보부예술상 문학부 특상 수상
1964년 시 동인지 <신춘시(新春詩)> 동인에 참가하는 등 60년대 시단의 새 깃발을 듬
1967 도서출판 「중앙출판공사」초대 편집장
1973년 한국시조시인협회장 역임.
1976년 <한국문학> 주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국제펜한국본부 이사역임
월간 <한국문학>발행인 겸 주간, 계간 <민족과 문학>주간을 역임
한국문학작가상, 중앙시조대상, 육당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수상.
1984년 1月~12月까지 한국일보에 장편서사시 <한강> 연재 출판함.
현재 재능대학 교수, 재능시낭송협회 고문
서울예술전문대학.추계예술대학.중앙대학교 등에서 시창작 강의중
시집으로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시조집 <동해 바닷 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장편서사시집 <한강(漢江)>,
수필집 <시가 있는 국토기행 1>, <시가 있는 국토기행 2> 등
이근배 시 작품
겨울행
1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2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당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 가지를 꺾던 눈밭의
당신의 언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바다를 가두고 사는 까닭을 안다
바람이 불면 파도로 일어서고
비가 내리면 맨살로 젖는 바다
때로 울고 때로 소리치며
때로 잠들고 때로 꿈꾸는 바다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하나씩 섬을 키우며
사는 까닭을 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눈이 내리는 섬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별빛을 닦아 창에 내걸고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반짝이고
홀로 깨어 있는 섬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꿈의 둥지를 틀고
노래를 물어 나르는 새
새가 되어 어느 날 문득
잠들지 않는 섬에 이르러
풀꽃으로 날개를 접고
내리는 까닭을 안다.
- 제3회 시와시학 작품상 수상시집 중-
잔
풀이 되었으면 싶었다
한 해에 한번쯤이라도 가슴에
꽃을 달고 싶었다.
봄, 여름,가을,겨울을
목청껏 울고 싶었다.
눈부신 빛깔로 터져 오르지는 못하면서
바람과 모래의 긴 목마름을 살고
저마다 성대(聲帶)는 없으면서
온 몸을 가시 찔리운 채 밤을 지새웠다.
무엇하러 금세기에 태어나서
빈 잔만 들고 있는가
노래를 잃은 시대의 노래를 위하여
모여서 서성대는가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것일 뿐
가슴에 남은 슬픔의 뿌리 보이지 않는다.
<출처: 시와 글벗>
북위선(北緯線)
1
서투른 병정은 가늠하고 있다.
목탄으로 그린 태양의
검은 크레파스의 꽃밭의 지도의
눈이 내리는 저녁 어귀에서
병정은 싸늘한 시간 위에 서 있다.
지금은 몇 도 선상인가.
그리고 무수히 탄우가 내리던
그 달빛의 고지는 몇 도 부근이던가.
가슴에는 뜨거운 포도주,
한줄기 눈물로 새김하는 자유의
피비린 향수에 찢긴 모자.
이슬이 맺히는 풀잎마다의 이유와
마냥 어둠의 표적을 노리는
병정의 가슴에 흐르는 빙하.
그것은 얼어붙은 눈동자와
시방 날개를 잃는 벽이었던가.
꽃이었던가.
2
한마리 후조가 울고간
외로운 분계선
산딸기의 입술이 타던 그 그늘에
녹슨 탄피가 잠들어 있다.
서로 맞댄 산과 산끼리 강과 강끼리
역한 어둠에 돌아누운 실재여.
빈 바람이 고요를 흔들어 가는
상잔의 동구 밖에 눈이 내리고
어린 사슴의 목쉰 울음이
메아리쳐 돌아간 꽃빛 노을 앞에서
반쯤 얼굴을 돌린 생명이여.
사랑보다 더한 목마름으로
바라보아도 저기 하늘찢긴 철조망.
한모금 포도주의 혈즙으로
문질러도 보는 이 의미의 땅에서
병정이여.
조국은 어디쯤 먼가.
눈먼 신화의 골짜기 나무는 나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소스라쳐 뒹굴던
뿌연 전쟁의 허리춤에서
성냥불처럼 꺼져간 외로운 자유.
그 이지러진 풍경 속에
오늘도 적멸의 눈이 내린다.
3
누가 잃어버린 것일까.
황토흙에 묻힌 군화 한 짝.
언어도 없는 비석의 돌아선 땅에서
누가 마지막 입맞춤 마지막 포옹을
묻어 두고 간 것일까.
국적도 모르고 군번도 없는 채,
버리운 전쟁의 잠꼬대여
멀리 흐느끼는 야영의 불빛은
검은 고양이의 걸음으로 벽을 오르고,
후미진 밤의 분계선근처에
병정의 음악은 차게 흐른다.
허나 돌과 나무 어느 하나도
손금처럼 따습게 매만질 수 없는
빙점의 북위선.
작고 파닥이는 소조의 가슴처럼
피가 사위는 대안이여.
세계가 귀대이는 초소에서
오늘도 전단의 눈발을 맞는 간구.
그 목마른 안존 위에
떨리는 자유여. 강하여.
서투른 병정이 가늠한 두개의 판도.
검은 크레파스의 태양의, 꽃밭의,
싸늘한 시간 위에서
병정이여. 여기는
북위선 몇 도의 어둠 속인가.
눈이 내리는 찬 지경의
북위선 몇 도의 사랑 밖인가.
*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심사평
심사위원: 김종길․박남수․조지훈
저는 이 시에 대해 21세기 한국 시단의 수준으로 볼 때, 약간의 불만이 있지만, 심사위원들은 극찬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군요. 40년 전에 지어진 시임을 고려하면, 심사위원들의 찬사에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이근배시인>
이 작품의 힘은 우리의 현실―그것도 우리 민족의 가장 뼈아픈 현실을 주제로 하였다는 데서 얻고 있다. 그러나 그 주제는 심각하고 거창한 것인 만큼 또한 다루기 힘드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한 주제를 그만큼 처리해 낸 이근배의 시적 역량은 현 시단의 수준으로 보아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위선’은 그 주제의 성질상 개념으로 흐르기 쉬운 위험이 있었는데도 작자는 처음부터 시각을 현명하게 잡음으로써 이 위험을 피했고 이미지의 치밀한 전개를 통하여 事象의 하나하나에 다부진 시적인 흥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두 군데 의식적으로 모호한 논법을 사용한 것도 알맞게 떫은맛을 내는 데 성공하였다.
‘북위선’은 우리나라의 야심적인 시인들이 쓰고 싶었으면서도 만만치 않았던 주제로 다루어내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시의 성과와 제 여건을 함께 시사하는 뜻 깊은 작품이었다.
<출처: 스토리문학관>
자진한 잎
세상의 바람이 모두 몰려와
내 몸에 여덟 구멍 숭숭 뚫어 놓고
사랑소리를 내다가
슬픔소리를 내다가
이별이 아니면
저별?
산사태가 지고
해일이 오고
둥둥둥 북이다가 징이다가
꽹과리이다가 새납이다가 장고이다가
잃어버린 여자의 머리카락이다가
달빛이다가
풀잎이다가
살아서는 만나지 못하는
눈먼 돌이다가
한 밤 새우고 나면
하늘 툭 터지는
그런 울음을 우는
보수와 진보, 반미와 친미, 파업과 진압, 타협과 엄벌, 온갖 소리 시끄럽더니 아주 큰 매미가 날아 왔다. 미 동부에는 이사벨이 북상했다. 산사태가 지고 해일이 오고. 휩쓸어간 폐허에서 차라리 눈 먼 돌이 되고싶다. 사방에 흩어져 구겨져 있는 자진한 잎새들이 모두 입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자궁 속을 빠져 나온 생명마다 주어진 여덟 개의 구멍 중에서 소리내어 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입뿐이기에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저별? 크신 이의 은총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 캄캄한 밤새우고 나면 하늘 툭 터지는 그런 울음을 울고싶은 입술이다. 타는 목을 축일 수조차 없는 흙탕물에 범벅이 된 벼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들녘의 한 노인의 주름진 모습은 말 그대로 한 자진한 잎이었다. 겨울은 아닌데 몹시 사나운 바람이 우리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아는 듯 몸 속을 파고든다. 슬픈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아도 되는데.
일제 압박에서 해방을 맞은 근대 조국의 상황은 "대홍수였다"고 시인은 한마디로 말하고 있다. 울분과 기쁨조차도 속 시원하게 말못하고 마른 입술같은 자진한 잎새들이 사방에 굴러다닌 역사를 우리는 안다. 이데올르기의 거대한 담론의 거품은 전쟁과 정쟁으로 문학 밖의 세상이 슬픔과 이별 아니면 분단으로 인한 손실의 산사태와 해일을 맞고 민생은 모두 자진한 잎이 되어 있을 때, 문학의 세계 또한 시끄러워 북소리 징소리 꽹과리 장고 날라리까지 합칠 만큼 이구동성, 갑론을박 잃어버린 여자의 머리카락같이 소용없는 소용돌이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시인은 모국어의 아름다운 씨앗들을 뿌리며 사랑을 낭만을 노래하고 싶었다. 1961년 동시에 조선, 경향, 서울신문 신춘문예 입상을 한 기록을 가진 시인은 학교를 졸업 고향 당진으로 낙향 후에도 어머니께 졸라 쌀 장리를 얻어 명동으로 올라와 공초 오상순 선생님주변에서 흠뻑 문향에 젖어서야 시골로 다시 내려가곤 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이며, 시조시인으로도 빼어난 시인은 시집 「노래여 노래여」등 다수가 있다.
출처: 2003년 9월20일 토 중앙일보-조옥동의 <시와 함께>
찔 레
창호지 문에 달 비치듯
환히 비친다 네 속살꺼정
검은 머리칼 두 눈
꼭두서니 물든 두 뺨
지금도 보인다 낱낱이 보인다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
네게 던지마 피 걸레에 싸서
희디흰 입맞춤으로 주마
내 어찌 잊었겠느냐
가시덤불에 펼쳐진 알몸
사금파리에 찔리며 너를 꺾던
새순 돋는 가시 껍질 째 씹던
나의 달디단 전율을
스무 해전쯤의 헛구역질을
<2004년>
산딸기, 싱아, 까마중, 찔레…. 어린 날 집 근처 산길에서 많이 따먹던 식물들이다. 산딸기는 복분자라 불리며 요즘은 재배도 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복분자보다 산딸기가 예쁘다. 복분자의 한자 어원 때문에 술도 복분자주라 흔히 부르지만, 나는 아무래도 산딸기술이 좋다. 까마중도 싱아도 참 맛있었다. 달콤한 군입거리에 길든 요즘 아이들의 입맛으로는 까마중 열매나 싱아 같은 풀이 맛있을 리 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잊힌 풀이름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새롭게 기억되는 데 문학은 퍽 쓸모 있는 징검다리인 것 같다.
찔레는 시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나무다. 그 이름 '찔레'만으로도 영감을 주지만 그 존재 자체가 어딘지 시와 사랑의 비유처럼 연결되는 특별한 식물 중 하나다. 이근배(68) 시인의 '찔레'도 사랑을 노래한다. 아릿하게 아픈 첫사랑의 느낌. 시는 '찔레'라는 이름의 어감과 찔레순의 씁쓰레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맛, 찔레꽃의 청신한 향기까지 절묘한 그 어떤 사랑의 그림자를 찔레덤불에 겹쳐놓는다. 청춘, 이루지 못한 사랑, 뭐 이런 것들이 그 이름 위로 지나간다. 시는 연하게 돋아난 가시껍질을 벗겨내고 먹어야 하는 찔레순의 아릿한 저항의 느낌과 떫은 듯 입 안 가득 번지는 향기 속에서 머뭇거린다. 시인은 "어찌 잊었겠느냐"며 '달디단 전율'을 떠올리지만, 찔레순의 달콤함은 어딘지 까칠하고 성마른 달콤함이다.
시인은, '찔려야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거기엔 스스로 알몸인 채 자신의 가시를 기르며 펼쳐진 찔레덤불이 있고, 너를 꺾으며 내가 꺾인 순간들의 찔레순 향기가 번져오기도 한다. 가끔은 '새순 돋는 가시 껍질째 씹던' 청춘의 캄캄함과 헛구역질이 있고,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이라는 고백을 '찔레'를 빌려서야 말하는 시인의 회한이 있다. 불혹이 되도록 사랑에 눈을 못 뜨면 인생에 이루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이라고 시인이 노래할 때 찔레 덤불 가시가 통째 아프다.
이근배 시인의 또 다른 노래가 '찔레'에 겹쳐진다. '세상의 바람이 모두 몰려와/ 내 몸에 여덟 구멍 숭숭 뚫어 놓고/ 사랑소리를 내다가/ 슬픔소리를 내다가/(…)/ 잃어버린 여자의 머리카락이다가/ 달빛이다가/ 풀잎이다가/ 살아서는 만나지 못하는/ 눈먼 돌이다가/ 한 밤 새우고 나면/ 하늘 툭 터지는/ 그런 울음을 우는'(〈자진한 잎〉 부분) 시인이 찔레덤불에 겹쳐 우는 가을이다. 가을날 봄 꽃을 추억하는 아픈 날도 가끔은 있어라.
<출처: 너에게 편지를 / 김선우·시인>
이근배 시인과의 대담
- 영원한 모국어의 세일즈맨, 이근배 시인
대담일시 : 2006.3.16 오후 3시 - 오후 6시
대담장소 : 한화 오벨리스크 1808호 신연재
대담자 : 박구하 (본지 주간)
(제1회 WBC 세계야구대회에서 일본과의 아시아존 최강자를 겨루는 시합을 보느라고 당초 잡았던 대담시간이 약간 뒤로 미루어졌다. 숙적 일본을 2대1로 누르고 아시아 최강을 확인하고 좋은 기분으로 지하철 마포역 인근에 있는 이근배 시인의 사무실로 향했다. 스무 평이 못 되는 사무실은 온통 책, 서화, 벼루 등으로 꽉 들어차 있었고 책상 위에는 읽던 책, 쓰던 글과 종이쪽지, 붓과 벼루, 인주, 전등 등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치우고 정리할 시간이 없는 건지, 그럴 생각이 없는 건지 아무렇게나 팽개쳐둔 물건들이 생물처럼 살아서 벽이며 방바닥이며 마국 활개를 치고 있었다.)
- 사천(沙泉) 선생님, 반갑습니다. 명시의 산실인 이곳 신연재(神硯齋)에서 대담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좁은 공간에 가득한 서책을 보니 작품이 어떤 산고를 거쳐 나오는지 알만 합니다. 어지러운 실내를 보니 어둠과 혼돈의 카오스에서 진선미의 코스모스를 뽑아 올리는 선생님의 의식의 원천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당호를 신연재라고 하신 뜻이 있으시니까?
아, 박 선생은 이곳이 처음이던가요? 누추한 모습을 그리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간 여러 차례 면담약속이 어긋나 미안했는데 어서 오십시오. ‘신연재’란 ‘신이 빚은 벼루가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가 벼루수집취미가 있어 오래 모으다 보니 지금 소장품이 천여 개가 넘지요. 과거 벼루의 숫자를 가지고 ‘십연재’니 ‘백연재’니 하는 당호를 보았으나 제가 이를 받아 ‘천연재’라 할 수는 없고 양보다 질적으로 명품을 보관한다는 뜻에서 생각해 낸 겁니다. 그나저나 오늘 야구는 정말 신났습니다. 원래 야구는 일본이 우리보다 앞섰지만 오늘 우리가 이겼고, 반대로 시문(詩文)은 옛부터 우리가 일본보다 앞섰는데. 지금은 우리가 뒤져있습니다. 오늘 《시조월드》에서 오셨으니 시조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시조 하면 우선 마음이 아픕니다. 일본에서 우대 받는 정형시가 한국에서는 홀대받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시조는 우리의 모국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주는 악기입니다. 이 악기는 한민족이면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는 악기이면서 이 세상 어느 악기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시조는 다 아는 바처럼 우리 민족의 언어, 생활, 정서와 우리 민족만이 가진 독특한 리듬으로 된 시가로서 오랜 세월을 두고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 이거 바로 오늘의 주제로 이끌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문단에서 워낙 유명하시고 특이한 경력 예컨대 신춘문예 5관왕이라든지, 시협회장, 시조협회장, 지용회장 등을 역임하신데다 다양하고 화려한 수상경력을 많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은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는 빼고 몇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대담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방금 ‘시조는 우리 악기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고 보니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님은 시조를 두고 “언어로 노래하기엔 가장 이상적인 시형식”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만, 구체적으로 작품을 들고 이 말씀을 부연해 주시겠습니까?
대표적으로 박재삼 시인을 예로 들겠습니다. 우리 시대에 서정시인이 많이 있지만 박재삼 은 서정주 다음의 자리에 오를 서정시인입니다. 그런데 박재삼의 대표작으로 흔히들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라든지 ‘천년의 바람’ 등을 칩니다만 사실은 그의 대표작은 시조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적인 정서의 정수는 ‘내 사랑은’ 이라는 시조 한 편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한번 새겨보죠.
한 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대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춰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자유시가 좋다지만 이 시조는 한다하는 자유시 100편과도 아니 한 트럭과도 바꿀 수 없는 명시(시조를 포함 개념) 중의 명시입니다. 세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말이 있지만 저는 이 시조를 그 어떤 자유시와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이 시조는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토속적인 우리 시이며, 우리 민족의 원형정서인 애환을 금쪽 같은 모국어로 오묘 불가사의하게 읊은 명편입니다. 이런 작품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은 행복합니다.
- 저도 그 시조를 좋아하고 외웁니다만 그 정도인 줄 몰랐습니다. 올해는 현대시조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는데 그 100년간 나온 우리 현대시조 중에는 이 작품 말고도 좋은 작품이 많은 줄 압니다. 문제는 좋은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너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겠지요. 현대시조 100년이 되도록 아직도 일반인에게 시조의 진면목이 알려지지 않고 홀대받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올해가 현대시조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하는데 어떤 근거가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고시조는 노래였습니다. 시조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인 고려시대부터 불려졌는데 우리 문자가 없으니 구전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 글이 생긴 이후에도 문자화되지 못하고 구전되고 창가화(唱歌化)되면서 뒤늦게 김천택, 박효관 같은 가객들에 의해 수집되어 문헌으로 남았으나 갑오개혁 이후 시조는 그 대가 끊어졌지요. 그것을 우리 신문화의 기수였던 육당(六堂) 최남선이 국민문학으로 부흥시킨 것입니다. 흔히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경계로서 육당을 떠올리고 그의 시조집 『백팔번뇌』를 떠올립니다만, 현대시조의 기점을 잡는 일은 정확히 현대적 언어로 언제 활자화되었느냐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육당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14세 때인 1903년에 최초로 시조를 썼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어떤 문헌에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활자화된 것으로 제목을 갖춘 시조로는 현재로서는 1906년 7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혈죽가」(血竹歌)를 최초로 치는데 이설이 없습니다. 이 혈죽가는 1905년 11월 30일 을사늑약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정공 민영환(閔泳煥·1861∼1905)의 피 묻은 옷을 보관했던 방에서 돋아난 대나무(일명 혈죽·血竹)를 기려 지은 시조입니다. 이 혈죽 실물은 현재 고려대에 보관되어 있는데 당시 혈죽을 그린 혈죽도와 함께 작년에 공개되기도 했지요. 흔히 시조는 영원한 우리 민족의 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만 이 혈죽가라는 시조가 우리 민족의 암흑시기에 횃불을 든 최초의 문학이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 혈죽가는 ‘대구(大丘)여사’라는 분이 쓴 작품으로
슬프도다 슬프도다 우리 국민 슬프도다
사총구간 져대 보쇼 삼십삼엽 완연하이
청청한 져빗 또 잇난가 우리 국민 경계로셰
로 시작하는 3수로 된 연시조이었는데 그 뒤 1906년 8월 13일 제국신문에는 다른 사람이 10수로 지어 발표하기도 했지요.
- 나라를 빼앗긴 울분으로 자결한 민충정공의 기상이 ‘피의 대’로 부활한 것도 묘하지만 더욱 묘한 것은 자칫 대(代)가 끊긴 줄 알았던 우리 시조가 이 피 묻은 대(竹)의 출현으로 다시 부활한 것도 예사롭지 않군요. 무슨 계시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옛날에도 정몽주가 피 흘리며 쓰러진 선죽교에서 혈죽이 돋아났다고 하는데 그리고 보면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통틀어 시조는 우리 민족의 기상과 관계가 많은가 봅니다. 오늘날 현대시조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 ‘혈죽가’라는 것이 시조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자랑스럽군요. 올해 100주년을 맞아 시조단에서 어떤 행사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지금 현대시조 100주년 행사는 전국적으로 각지방별로 자체 계획을 수립하여 진행되고 있고 그와 별도로 또는 병행하여 중앙에서 현대시조 100주년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범시조시인행사로 진행하고자 기획하고 있습니다. 우선 금년에 ‘시조의 날’을 선포할까 합니다. 시조가 모국어로 탄주할 수 있는 최고의 악기요, 모국의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인 점을 널리 알리는 의미에서 ‘시조의 날’ 지정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작년에 만해축전(万海祝典)에서 시행한 세계시인대회 같은 행사를 본따서 이번에는 우리 시조단에서 세계민족시인대회를 개최할 생각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자기나라 고유의 민족시를 가지고 있는 나라 예컨대, 아일랜드, 일본, 대만, 중국, 이태리, 영국 등의 시인을 초청하여 민족시 경연과 함께 우리 시조의 존재가치를 만천하에 알릴 생각입니다. 또 시조시인의 잔치로서 대표시인들의 대표작을 기념출판하고 신인들의 시낭송 대회, 시조 100년사 자료집 발굴 및 발간, 순회강연회 및 전시회, 학생 및 일반인 백일장개최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만시지탄이 있습니다만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군요. 이 말씀을 들으니 지난 해 프랑크푸르크 국제도서전에서 우리 시조가 다른 문학장르로부터 당한 박해가 생각납니다. 그때 엄청난 정부예산을 타내서 한국의 대표서적 100권을 선정․번역하면서 시조관련서적은 하나도 넣지 않고 60여명의 한국대표문인들 명단에 시조시인은 단 한 사람도 넣어 주지 않은 작태를 보고 제가 서울신문 논설에서 “한국문학을 소개하는데 우리 시조문학을 빼고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느냐”는 항의성 비판의 글을 실었습니다만 역시 계란으로 바위치기여서 아무 효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조 100주년’ 행사는 우리 시조단에서 합심단결하여 우리 시조의 정수를 보여주고 일반의 인식을 전환시키는 계기로 삼아??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선 대내적으로 가능한 일부터 우리 모두 협력해 나가야 합니다. 무슨 행사를 위한 1회성 전시행사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시조중흥이라는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국민과 더불어 함께 하는 문학으로서 시조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기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흩어진 자료를 수집하고 시조짓기를 생활화하도록 국민들의 피부에 닿는 행사가 되도록 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조시인은 각각 작품을 발표하는 의무 외에 시조세일즈맨이 되어야 합니다.
박구하 시인도 잘 아시겠지만 재능교육에서 전국재능시낭송회를 만들어 매년 1억 원 이상의 돈을 들여 전국 각 지방에서 시낭송회를 개최하고 연말에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결선을 통한 시낭송가를 탄생시켜 시보급운동을 10년 이상 해오고 있잖아요? 그런데 거기 낭송하는 시들이 전부 자유시 일색입니다. 사실 낭송에 적합한 시가 오히려 시조에 더 많은데 이것을 일반이 잘 모르기 때문에 낭송에 적합치 않은 긴 시, 산문화된 시를 낭송하는 겁니다. 시조를 알려 시조를 낭송케 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시조 세일즈 활동입니다. 외국대사관 부인들에게 시조강좌를 하거나 외국인 웅변대회나 장기자랑대회에도 시조를 참여시킬 수도 있습니다.
- 맞습니다. 지금 일본을 보면 그들의 정형시로 세계에 자랑하는 하이쿠는 이미 국민문학이 되어 있고 하이쿠 인구도 수벡만 명에 이른답니다.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 신문방송 등 매체의 도움이 큽니다. NHK 방송은 매주 토요일 ‘하이쿠 왕국’ 코너를 방영하고 연말에는 각 지방별로 마치 스포츠 중계하듯 백일장을 열어 즉석심사를 하여 우수작품을 시상합니다. 우리의 KBS에서 전통 씨름을 민족스포츠로 만든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지금 신문에서 유일하게 중앙일보에서 시조 지상백일장을 십여 년 이어오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방송에서도 ‘시조 민국’ 같은 코너도 만들어 우리 시조보급에 관심을 촉구해야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조를 홀대하고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국정교과서에 시조의 비중이 줄고 있고 예술원회원에 우리 시조출신으로는 노산 이은상 선생 이래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시조행사에도 고위인사는 거의 참석하지 않습니다. 일본은 당까․하이쿠 행사에 문화청장관이 꼭 참석하고 천황 어전 행사에도 전통시인을 꼭 불러 격려하고 일반인들의 기초교양으로 민족시를 배우게 합니다. 작고하신 구상시인은 자유시인이지만 “공무원시험에 시조를 반영해야한다.”고 주장하셨고 만년에는 시조를 주로 쓰셨지요.
-시조의 현상유지나 당대 시인들의 위상제고를 기하는 활동도 중요하지만 시조의 내일을 위해 우리는 너무 투자를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교과서 시조문제만 해도 늘 나오는 얘기지만 하등의 진척이 없습니다. 더 이상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발로 뛰어야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조월드》는 ‘오늘의 시조’ 보다 ‘내일의 시조’ 쪽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시조․동시조를 위한 계획은 없습니까?
시조의 내일은 참으로 중요하지요. 80년대 제가 충남도 교육청에서 산발적이긴 합니다만 어린이시조를 지도한 적도 있습니다. 시조 카드놀이 같은 것도 되살렸으면 해요. 《시조월드》사가 국내외에서 어린이에 주목하여 활동하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 참 좋습니다. 지금 행사계획이 수립․조정단계에 있으니까 금년 행사에도 반영될 겁니다.
- 100주년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잠시 고시조와 현대시조, 시와 시조의 차이랄까 간단한 선생님의 시론을 듣고 싶습니다.
시조니 시니 크게 보면 다 같은 장르의 문학이지만 고시조가 메시지 전달 중심의 시라면 현대시조는 이미지 묘사 위주의 시입니다. 시조는 원래 노래되어지는 시로 음악의 영역에 속하던 것이 현대시조에 와서 사고의 영역으로 이행된 것이지만 ‘시조’라는 말 자체에는 이미 ‘한국고유의 시’라는 뜻이 함의되어 있어요. 육당은 “조선 시의 원조와 본류는 시조다.” 라고 갈파했지요. 이 말은 모든 한국시는 시조가락을 함유하고 있으며 시조의 가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시가 시인의 정신노작이요 정서표출인 이상 그 기반인 한국정서와 모국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보세요. 소월이나 목월, 지훈, 지용, 미당 등 우리 시 중에서 언필칭 명시라는 시를 보면 어느 하나 시조가락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참으로 그렇습니다만, 일찍이 조연현 선생은 “시조는 이미 현대시에 녹아 있으므로 굳이 다시 시조로 환원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이와는 좀 다른 얘기지만 지금 우리 시조의 지평을 넓히려면 시조의 변형을 시도해야 하고 현대처럼 모든 분야의 경계가 무너지는 다양한 사회에서 정형을 지키는 것은 넌센스라느니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습니까? 시조는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모호하거나 표현의 한계가 있는 겁니까?
그 질문에 대한 제 답은 분명한 “No"입니다. 시조는 앞에 말했지만 우리 모국어로 가장 잘 탄주할 수 있는 악기이자 입맛에 맞는 그릇으로 우리 민족 정서의 주파수가 녹아 있는 우리 시입니다. 자유시와는 정서의 진동수도 언어의 주파수도 다릅니다. 저도 자유시를 쓰지만 자유시는 아무래도 산만해지기 쉽고 언어적 리듬도 다르다고 느낍니다. 자유시는 자칫하면 산문화 될 수 있지만 또 산문화 된 시 즉 산문시도 있지만 시조는 절대로 산문화 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요. 즉 서정시의 최후의 보루 같은 것입니다. 현대시조는 시의 본령을 지키면서 현대성을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장르입니다.
- 그렇군요. 가장 오래된 정형시인 시조에서 오히려 미래시의 첨단성을 볼 수 있다니 신기합니다. 방금 하신 말씀은 고무적이긴 하지만 근거가 있으신지요?
그것은 시조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발표된 작품들이 증명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박재삼의 “내 사랑은” 이나 조운의 “구룡폭포” 같은 것이 이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얻은 책 중에 「윤곤강전집」이 있는데 거기 이런 말이 나와요. 그는 조운을 낡은 시가형태인 시조를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현대화한 공이 크다고 하면서 “조운은 창작의 양에 있어서 노산이나 가람보다 적을지 모르나 질에 있어서는 가장 으뜸이다. 예로부터 시조가 즐겨 그 제재로 삼는 자연묘사의 시조를 놓고 볼지라도 위당의 「근화가」, 노산의 「금강산」, 박연이나 최남선의 「단군굴에서」, 월탄의 「비로봉」, 가람의 「만폭동」, 수주의 「백두산 갔던 길에」, 지용의 「백록담」-이는 시조가 아니라 시지만- 등 그 어떤 작품을 갖다대어도 조운의 「구룡폭포」한 편과 어깨를 겨룰 작품은 보지 못했다.” 윤곤강 시인 같은 자유시인이 자기 입으로 시조를 두고 시조의 절대성은 물론 이처럼 상대적 평가를 한 일은 드문 일입니다.
- 그 말씀을 들으니 조지훈(芝薰) 선생이 1948년도에 하신 말이 생각나네요. 즉 그 전 해에 나온 모든 책들 중에서 두 권을 고르라면 선생은 망설이지 않고 양주동의 ‘고가연구(古歌硏究)’와 김상옥의 ‘초적’을 꼽겠다고 일간지에 공표한 일이 있었지요, 조지훈이 청록파 시인으로 그 시적 위상이 대단하셨던 분이 초정의 시조를 높이 평가한 것도 놀랍거니와 윤곤강 시인은 「카프」 시인으로 그 반대편에 서 있던 국민문학파에서 부흥시키자고 한 시조를 두고 그런 평가를 한 것은 의외이군요. 이처럼 시조라는 악기도 좋고 연주하는 시인도, 작품도 다 좋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시조가 일반에 외면 당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시조단에는 의외로 좋은 시인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생산해 내는 작품 중에는 좋은 작품도 많아요. 좋은 시인과 좋은 작품은 있으나 이를 알아보는 눈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평론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평론가는 많으나 시조를 전문으로 평론하는 평론가가 부족합니다. 오죽하면 시와 시조를 분간 못하는 평론가가 평필을 잡고 있겠습니까? 윤곤강 시인처럼 비교 평가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 하나 신문이나 문학지들이 시조를 잘 다루지 않아요. 자유시는 조금만 일이 있어도 대서특필해 주는 반면 시조는 아무리 큰 사건이나 행사가 있어도 특별히 부탁하지 않으면 기사화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일반인의 인식은 고시조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요. 시조는 한물간 문학이라 치부하는 거죠. 좋은 시조는 좋은 시 못지 않게 불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좋은 시조를 아무리 써봐야 알아주지 않으니 시조는 발전할 수 없는 겁니다.
- 그나마 이 세대들이 가고 나면 자라나는 세대들은 시조를 배우지 못했으니 더욱 한심해 질 겁니다. 사회적 분위기를 전환하지 않으면 안되겠는데 그게 요원한 일 같아 생각할수록 아득해집니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은 시조 3관왕으로 시보다 더 많은 상을 받고 등단하시고도 시조보다 시를 더 많이 쓰고 계시는데 시조 사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요?
제가 태어나 최초로 접하고 외운 것이 정몽주 선생의 시조 단심가입니다. 소월보다 먼저 안 것이 시조입니다. 한학자 집안 분위기도 작용하여 시조가 좋았지만 시도 많이 썼어요. 충청도내 각종 백일장에서 늘 장원을 했는데 시와 시조를 같이 썼죠. 저의 고교시절에는 주변에 시조집이 거의 없어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데 당시 부산에서 김민부, 포항에서 박경용이 고교생으로서 중앙지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한 것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지요. 대학시절 서울에서 첫 시집을 내고 1961년에 시조로 경향, 서울, 조선일보 등 3개 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시로서는 1963년 문공부 신인상, 이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니 시보다 시조로 먼저 데뷔했지만 시를 ?뮌? 쓰지 않았으면 시조로도 등단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시조는 사실 어려워요. 그 당시에는 박재삼과 같이 시조와 시를 겸전하는 시인이 많았고 시와 시조를 계급으로 말하면 시인이 일등상사라면 시조시인은 특등상사로 불렸어요. 박재삼 같은 역량 있는 시인들이 “시조는 시보다 어렵고 시보다 한 수 위”라고 말했는데 그들이 그런 말을 하니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던 겁니다. 시조는 들어가기는 쉬워도 들어갈수록 어렵습니다. 시조는 아시다시피 한발을 묶고 뛰는 경주 같은 건데 발을 묶고 뛰고도 자유시와 어깨를 견줄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어렵겠어요? 제한된 언어로 제약된 범위 내에서 시어를 구사해야 하고 매수마다 기승전결이 있어 의미의 꼭지를 짚고 나아가되 행운유수처럼 유려하면서도 매듭을 짓고 마무리를 해 나가야 하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시조집은 지금까지 한 권밖에 못 내었지만 시조는 계속 쓸 것이고 시조집도 잇달아 낼 겁니다.
- 사천 선생님은 시보다 시조를 먼저 하셨다고 하셨는데 작품은 시조가 더 적은 점이 평소 의아하였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겠군요. 그래도 과작이긴 하지만 뛰어난 작품이 많아 후진들에게 교범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창작의 비법이랄까, 작시법을 공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시론에 의하면 포시법(捕詩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좋은 시(시조)란 시가 잘 다니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를 낚아챈다는 말인데 과연 그런가요?
아닙니다. 저는 그리 생각지 않습니다. 시란 사고의 산업으로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거나 어떤 길목을 지켜 낚는 것이 아니며 우연히 오는 것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머리 속을 굴려서 생성해야 합니다. 목수가 좋은 목재를 찾아 온 산을 헤매듯이 글감을 찾아 창칼을 들고 hunting에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말라르메가 말했듯이 시는 체험과 상상력의 영역이요 사고의 영역이므로 글감을 찾는 것이 체험과 상상력이요 찾은 글감은 바로 표현되는 것보다 오래 천착하면서 끝없이 머리를 회전시켜 깊은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겁니다. 글감을 찾아내고 요리까지 정갈하게 해내야 하는 게 시업(詩業)인데 시조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어떤 플롯(plot)이 있어야 합니다. 시조의 3장은 자유시의 3행과 다릅니다. 5수 연시조가 15행이라고 해서 이를 자유시 15행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조는 매수마다 마무리 즉 결론을 내고 넘어가야 하며 그러한 연결이 수미상관하면서 독립적으로 시상을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이런 것은 일반적인 시조작법이므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요컨대 시조를 잘 쓰고자 하는 사람은 시조의 원리를 충실히 지키되 좋은 작품을 많이 읽고 내 것으로 소화하여 스스로의 시세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 듣고 보니 제가 백수선생님의 포시법을 잘못 인용한 것 같군요. 백수선생님의 포시법도 우연히 낚이는 게 시라는 말씀은 아니고 실상은 방금 사천선생님이 하시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다만 글감 사냥에 있어서 무작정 헤매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나 토끼가 잘 다니는 곳을 시인의 체험이나 상상력으로 추측하고 미리 찾아가서 끈질기게 기다린다는 뜻이지요.
저는 시를 작법 상 두 가지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즉 ‘만들어지는 시’와 ‘우러나오는 시’가 그것입니다. 만들어지는 시는 많이 쓸 수 있어요. 전자는 마치 수돗물과 같아서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그러나 후자는 우물물과 같은 것입니다. 억지로 아무데나 판다고 물은 솟지 않지요. 좋은 목을 골라 나올 때까지 파야 합니다. 저는 시를 제 안에서 절실한 무엇인가가 넘쳐날 때 씁니다. 지하수가 생성되는 과정은 아까 조운의 ‘구룡폭포’에서처럼 풀잎 끝의 이슬이 강으로 바다로 흘러 다시 비가 되어 지상에 스며들어 지표로 표출되기까지 100년이 걸린다는데 그 생명수를 파내는 게 시의 창작입니다. 절실치도 않은, 단지 시나 시조 그 자체를 위한 창작은 제게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시나 시조는 얼마나 많이 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절실한 작품을 썼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실 명시를 쓴 이름 있는 시인의 작품은 역사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말라르메도 일생 40편밖에 시를 쓰지 않았고, 미당(未堂)의 화사집도 24편, 육사의 첫 시집도 23편, 만해, 윤동주, 이상화 등도 시집 1권이 고작입니다. 소월도 100편 정도지요. 우리 고시조는 황진이가 단 6편, 매창은 단 1편의 시조를 남겼지만 그들이 시인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이들은 만들어지는 시가 아니라 우러나는 시를 썼기에 그런 겁니다.
- 끝으로 오늘도 그렇지만, 선생님의 글을 읽거나 강연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모국어’라는 말을 유난히 많이 쓰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 민족 치고 모국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선생님의 모국어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신 것 같은데 그런 연유라도 있으십니까?
모국어는 ‘어머니의 나라 말’이라는 뜻인데 줄여서 ‘어머니의 말’이라고 합니다. ‘조국’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단군 할아버지나 이순신, 안중근 같은 분들의 이름과 함께 총칼로 나라를 지키고 연장을 들고 생업을 이어온 남성위주의 줄기찬 역사가 있이요. 그런데 우리가 말을 배우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듣던 소리가 바로 모국어가 아닙니까. 어머니라고 하는 말속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젖줄, 부드러움, 눈물 등이 복합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은 늘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에는 여성적인 정서가 많아요. 옛날 「찬기파랑가」, 「제망매가」 등의 향가(鄕歌)에서부터 고려가요나 속요 등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손으로 이루어진 노래들이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김영랑의 '나는 기두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또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같은 절창들도 지극히 여성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도 여성적인 정조에 바탕하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에 한결같이 여성적인 정서가 넘치는 것은 어머니의 말을 갖고 쓰기 때문입니다. 뿐 아니라 헌헌장부의 시에도 여성적인 대목이 많습니다. 고려 5백년 왕실을 지탱하려던 정몽주 선생의 시조에서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노래했는데, 이 말은 춘향이가 변학도 앞에서 해도 그만인 노래가 아닙니까. 다 이게 여성적입니다. 이렇듯 우리 시가는 모두 여성적인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모국어를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은 이런 여성적인 말 때문만은 아니고 모국어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우리 정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당의 시에 「수대동시」라는 게 있는데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는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가 목화를 따서 명을 자아, 베틀에다 무명을 짠 옷을 입고 자랐습니다. 요새와 달리 그때는 옷이라면 명절 때나 한 벌 얻어 입는 설빔이나 추석빔 같은 것 아닙니까? 우리의 시어, 모국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을 서양말로 옮겨 놓으면 그 뜻이 전혀 통하지 않겠지요. 이처럼 미당의 시를 영어나 불어로 번역하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옷을 갈아입은 게 어떻단 말이냐 하겠지만, 미당은 당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나 할머니가 새로 지어주신 흰 무명옷을 갈아입었을 때의 그 마음, 백화점에서 산 게 아니라 어머니, 할머니가 손수 짜고 손바느질된 것을 입었을 때의 기쁨과 편안함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당은 우리 모국어의 최대 수혜자요 최다 애용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모국어를 사랑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 모국어라는 말 한마디에도 그런 깊은 고찰과 내력이 있었군요. 왜 모국어가 소중한 줄 다시 알겠습니다. 오랜 시간 열정적인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면담 끝에 이근배 시인이 수집 보관하고 있는 중국 건륭제 휘호가 새겨진 명품벼루 외 우리 나라의 최고걸작으로 치는 ‘위연화초연’ 등을 보여 주며 수집일화와 벼루에 대한 일반론에 대한 수준급 설명을 들었으나 본 주제와 무관하여 생락한다.)
*시조월드 제12호(2006.5)에서 전재함.
<출처: 비슬산과 시를 좋아하는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