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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 생애와 작품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01.11|조회수1,082 목록 댓글 0

 

프리드리히 니체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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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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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19세기 독일 철학자이며 음악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종교, 도덕,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고, 특유의 문체를 사용했으며 경구 - 아포리즘(aphorism) - 에 대한 자신의 기호(嗜好)를 드러내었다. 니체의 영향력은 철학과 철학을 넘어서는 다른 영역에도 실질적으로 남아있는데, 특히 실존주의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러하다.

 

니체의 문체와 진리의 대상 및 가치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질문은, 중요한 해석의 문제를 제기했고, 대륙철학(현상학)과 분석철학 모두에서 방대한 이차 문헌이 생겨나게 했다. 그의 주요한 사상이 생(生)의 긍정으로서의 해석의 비극을 포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겁회귀(eternal recurrence)는 셀 수 없는 해석으로 빠져드는 것이며, 플라톤 철학에 대한 뒤집기 - 전도(顚倒) - 이다.

 

니체는 철학으로 자신의 분야를 바꾸기 전에 이미 철학자로서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24세에 그는 바젤 대학에서 고전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지만, 살아있는 동안 계속 그를 괴롭혔던 건강상의 문제로 1879년에 그만두었다. 1889년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의 증세를 보였으며, 19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어머니와 여동생의 돌봄을 받으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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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출생과 학업 (1844 – 1869)

니체 1861년 모습
니체 1861년 모습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예전의 프로이센 (독일)의 작센 지방의 소읍인 뢱켄(Röcken)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러시아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빌헬름 4세는 니체가 태어나던 날에 나이가 49세를 넘었었다.(니체는 훗날 그의 이름에서 가운데에 있던 "빌헬름"을 빼 버렸다.[1]) 니체의 아버지인 카를 루트비히(1813-1849)는 루터교 목회자이자 전직 교사이었고, 프란치스카 욀러(1826–1897)와 1843년에 결혼하였다.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는 1846년에 태어났고, 뒤를 이어 남동생인 루드비히 요셉이 1848년에 태어났다. 니체의 아버지는 뇌 질환으로 1849년에 사망했다. 그의 어린 남동생은 1850년에 사망했다. 그 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고, 그 곳에서 니체의 할머니와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두 자매들과 함께 살았다. 니체의 할머니가 1856년에 사망하자, 가족은 그들의 집으로 이사했다.

 

1861년 니체는 소년학교에 출석했고 그 다음에는 그가 구스타브 크루크와 빌헬름 핀터와 친구가 되었던 곳인 사립학교에 다녔다. 두 친구는 모두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54년 그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돔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그의 특출난 재능은 음악언어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에 동료들처럼 입학했으며, 그 곳에서 그는 그의 학업을 1858년 부터 1864년까지 계속했다. 그는 파울 도이쎈, 칼 폰 게르도르프와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로마문학에 대해서 중요한 입문 과정을 이수 할 수 있었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신학과 고대 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동안, 그는 도이쎈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 Frankonia)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자신의 신앙도 상실하였다.[2] 그 것은 아마도 그가 1835/36년에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그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을 것이다.[3] 그 후 니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였고, 그 다음 해에 그는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에르빈 로데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철학저서의 출판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

 

1865년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알게 되었고, 그는 1866년 프리드리히 알버트 랑게의 책,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을 읽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저서 모두와 자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저서는 니체가 그의 지평을, 철학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장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학업을 지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867년 니체는 자원하여 나움부르크에서 프러시아 포병으로 한해동안 복무하였다. 그러나 1868년 3월에 그는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니체는 그의 관심을 다시 그의 학업에 둘 수 있었고, 학업을 끝낸 후 그 다음 해에 바그너와 처음으로 만났다.

 

바젤 대학교에서의 교수 생활 (1869–1879)

1869년 모습
1869년 모습

 

24살에 리츨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바젤 대학교에 들어선 이후, 그는 프로이센의 국적을 포기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었다고 한다. [4] 하지만 그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는데, 카우프만은 그가 군의관 활동 당시 매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어떤 이들은 니체가 미친 까닭이 매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바젤 대학교로 돌아오면서 그는 독일제국의 성립과 비스마르크의 등장을 보았다.

 

1871년 니체와 친구들-에르빈 로데, 칼 폰 게르도르프, 니체
1871년 니체와 친구들-에르빈 로데, 칼 폰 게르도르프, 니체

 

그는 대학교에서 취임 강의로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영어:Homer and Classical Philology) 을 연설했다. 그는 신학과 교수인 프란츠 오버베크와 어울렸으며, 그와 평생동안 친구로 지냈다. 당시 러시아 철학자였던 아프리칸 스피르[5], 니체가 자주 강의를 들었던 동료 역사학자 자콥 부르크하르트 등도 니체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이미 1868년부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기 시작했었는데, 그의 부인과 그에 매우 감탄하곤 했다. 또한 바그너는 니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니체는 1872년에 《비극의 탄생》을 썼다. 하지만 리츨과 같은 니체의 동료들은 이 책에 대해 별로 열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3년1876년 사이에는 《반시대적 고찰》을 썼는데, 총 4편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나뉘어 진다. 네 편의 에세이는 쇼펜하우어바그너가 주장하는 대로, 독일 문화의 발전 노선에 도전하는, 문화 비평의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 1873년이 시작할 무렵, 니체는 또한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철학 같이 사후에 출간된 기록을 점차로 모으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안 바그너와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니체는 말비다 폰 메이센부르크와 한스 폰 뷔로우를 만났고, 1876년에 그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비관주의를 해소시킨, 파울 리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1876년에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진부한 공연과 대중의 천박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실망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그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78년 니체는 그 특유의 경구가 가득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하였다. 또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즈음에 혼인을 하려 애쓰기도 했다. 1879년, 건강이 더욱 악화되면서 니체는 바젤 대학교이 교수직을 사임했다.(사실 그는 어릴적 부터 병이 많았는데, 가끔 두통이나 복통을 겪기도 했다. 1868년에 낙마사고와, 1870년에 걸린 병 때문에 니체의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바젤 대학교에서 휴가를 많이 갖기도 했다.)

 

독립 철학자 생활 (1879–1888)

바젤 대학교에서 나온 이후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집필생활에 몰두하였다.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로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내 그 계획을 접고 만다.(건강에 대한 문제로 여행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6]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보냈다.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그를 간병해 주었다. 하지만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 였던 그녀는 니체의 철학을 조작했다.

니체의 초기 저작은 <비극의 탄생>, 중기저작으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서광>, <즐거운 학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있으며, 정신병 발병 직전인 1888년에는 <우상의 황혼>, <반그리스도>,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으나, 사망 이후 유럽의 철학,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다.

 

철 학

프리드리히 니체 (맨 오른쪽)
프리드리히 니체 (맨 오른쪽)

 

도덕가치 비평

니체는 주인과 노예의 도덕성을 구분하였는데, 전자는 강자로서 인생의 축복에서 기원되었으며 후자는 약자로서 주인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주인의 도덕성은 '선함'과 '악함'의 차이로 요약되며 노예의 도덕성은 '선함'과 '악함'으로 나아간다. 강자의 선은 강한 의지가 기준이 되며 '선함'은 강하고 힘이 넘치며 고상한 것이고 '악함'은 나약하고 소심하며 미약한 것이다.

반면 약자의 선은 약한자의 처지가 기준이 되며 '선함'은 약한 처지를 견딜 수 있거나 개량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며 '악함'은 약한 처지의 집단을 불안하게 만드는 강한 의지, 도전, 힘 등이다. 즉, 주인의 도덕성에서의 '선함'과 노예의 도덕성에서의 '악함'은 도덕적 동등성을 지닌다.

 

힘에의 의지와 초인 사상 (Wille zur Macht und Übermensch)

니체는 의지가 자신의 존립을 위해 힘을 얻기를 의지하는 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하였다. 여기서 니체는 인간의 힘에의 의지는 일종의 '가식'으로 보았는데, 상황에 따라 일관적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숨기는 것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힘에의 의지로 보았다. 또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도 힘에의 의지로 보았는데, 이는 인간은 진리를 통해 변화무쌍한 자연을 예측가능하게 만들어 변화무쌍한 자연에 대응하고자 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에 허우적되지 말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고,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모을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런 이상적인 사람을 '초인'(Übermensch)이라고 불렀는데, 이 초인이 인류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다르게 해석하여, 히틀러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허무주의 (Nihilism)

사회는 나날이 안정적으로 변하고 문명은 더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권태로워 진다. 점점더 말초적인 쾌락을 원하고 문화는 타락해간다. 니체는 이러한 현상이 허무주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미 수명이 다한 낡은 가치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목표를 잃고 방황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허무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초인 중심의 사회였다.

바이마르의 니체 도서관
바이마르의 니체 도서관

 

신의 부정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는 니체가 보기에 기독교가 힘찬 강한 자(주인)의 도덕을 망치고 순종, 겸손 등 소극적인 것을 미덕으로 하는 약한 자(노예)의 도덕을 강조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몸이 병들고 약한 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기독교는 그의 철학에 있어 적대적이었다. 게다가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약하고 저열한 것들의 기준에 맞추어 인류를 타락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기독교를 비판했으며, 강한 자의 도덕을 갖춘 초인이 인류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보았다.

 
니체의 영향
 
니체는 어떤 사람은 죽은 뒤 다시 태어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니체 없이는 20세기의 철학·신학·심리학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셸러, 카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도 마찬가지이다. 철학과 문학비평에서 일어난 실존주의와 해체주의는 그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신학자 파울 틸리히, 레프 셰스토프는 "신은 죽었다"의 신학자인 토머스 J. J. 알타이저와 마찬가지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위대한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니체가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폴란드어로 옮겼다. 니체가 자기를 그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이해했다고 말한 지크문트 프로이트, 알프레트 아들러, 카를 융 등 심리학자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앙드레 말로, 앙드레 지드, 존 가드너 등의 소설가와 조지 버나드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슈테판 게오르크,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시인·극작가도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그에 관해 글을 썼다. 분명히 니체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평 가

니체의 사상은 매우 파격적이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실제 그를 평하는데 있어서도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때도 많은데,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맹령한 비판을 하며, 어떤 철학자들은 니체를 천재적인 철학자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현대 철학사(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프로이트마르크스 등과 함께 현대 철학을 뒤흔든 철학자로 인정받는다.

흔히 니체를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의 시초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니체의 저서들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7]

또한 엘리자베스는 흩어졌던 그의 저서들을 모아 일종의 보관서까지 열었으며, 미쳐 있던 니체에게 흰 사제복을 입혀 전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히틀러에게 '니체의 초인이란 당신을 염두해 둔 것' 이라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1961년 《니체》를 출간한 이후 새롭게 해석되었으며 오늘날 니체에 대한 오해는 거의 해결되었다. 그리고 실제 니체는 오히려 자국인 독일을 매우 싫어했고 민족주의 또한 매우 혐오했다고 한다.[8]

 

저 작

  • 1872년 : 《비극의 탄생》
  • 1873년 : 《반시대적 고찰》 1부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 1874년 : 《반시대적 고찰》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3부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 1876년 : 《반시대적 고찰》 4부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 1878~9년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1881년 : 《아침놀》
  • 1882년 : 《즐거운 학문》
  • 1883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2부
  • 1884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 1885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 (비공개 출판)
  • 1886년 : 《선악의 저편》; 《비극의 탄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개정판 서문
  • 1887년 : 《즐거운 학문》 개정판 서문; 《도덕의 계보》
  • 1888년 :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니체 저작의 판본

이 부분의 본문은 니체 저작의 판본입니다.

니체가 쓰러진 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1888 ~ 89년 해가 바뀔 무렵 정신적 암흑에 빠졌다. 그의 저작들은 정본이라 할 만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부분적으로 예전 저작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판본으로 나와 있었으나, 두 저작은 — 니체가 잘못된 곳들을 지적한 가운데 — 인쇄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아울러 인쇄되지 않은 자료들이 다양한 마무리 수준 상태로 존재했다. 이 인쇄되지 않은 자료는 프란츠 오버베크(Franz Overbeck)가 하인리히 쾨젤리츠(Heinrich Köselitz)(페터 가스트(Peter Gast))와 협의하여 처음으로 수집했다. 이들은 또한 니체의 최종 출판업자인 콘스탄틴 게오르크 나우만(Constantin Georg Naumann)과 함께 계속적인 출판작업을 두고 논의했다. 그리고 1890년 말에 처음으로 파라과이에서 귀향한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Elisabeth Förster-Nietzsche)가 가족을 대표하여 논의에 참견했다. 그간에 니체 저술의 판매고가 올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1892년 초에 처음으로 전집판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 전집판은 나우만 출판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쾨젤리츠가 이를 담당했다.

1930년 저작권 보호기간의 만료

1930년, 니체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되었다.

 

<출처: 백과사전>

 

 

 
 
 


 

 

 

 니체의 작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들에게로 내려오기 위해 산에서의 은둔 생활을 그만둔다. 전도된 예언자이자 메시아인, 그는 위버멘쉬도 인간의 구원도 (산을 내려오기 전까지는) 알리지 않았다.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사자가 되는지, 마침내 사자가 어떻게 아이가 되는지를.


무거운 짐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지배하려는 참을성있고 강인한 정신에 대해. 그러한 정신은 짊어져야할 무거운 짐이 아주 많다.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 가장 무거운 짐을 지려고한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강건한 정신은 이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서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그것은 자신의 오만함을 상처주기 위해 굴복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순간에 그러한 결과를 저버리는 그러한 것이 아닌가? 혹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유령이 우리를 두렵게하려 할  때 그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그러한 것인가? 강인한 정신은 모든 무거운 짐들을 짊어진다. 그리고는 짐을 지자마자 사막으로 급히가는 낙타처럼, 그 역시 자신의 사막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가장 외로운 사막 깊숙한 곳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정신은 사자가 되어,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며, 자기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그는 그가 그 자신의 마지막 신의 적이었던 것처럼, 이 주인의 적이고자 한다. 그는 거대한 용을 이기기 위하여 싸우고자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신이라고, 주인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지않는 그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한다> 그것이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사자라도 그것은 아직 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위한 자유의 쟁취. -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 할 수 있다......


정신도 오래전에 <너는 해야한다>를 가장 신성한 자신의 선으로 사랑했었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사랑의 댓가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가장 신성한 자신의 선속에서조차, 환영과 자의를 찾아야만 한다. 이러한 유괴를 위해 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말해보라,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지를?......


아이는 순진무고요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며,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성스런 긍정이다.

그렇다. 창조의 성스런 놀이를 위해, 오 나의 형제들이여 성스런 긍정이 필요한 것이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한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기 자신의 세계를 얻길 원한다.


시간은 더 이상 인간을 넘어서는 현실세계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알 수 없는 도약이 아니다.  <신은 죽었다>:이런 단언은 복잡한 논증에 근거하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말할때에 그러한 언명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단언은 그것을 긍정하는 나의 청자에게서는 그 의미화를 끌어낼 수 있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사실상, 그것을 긍정하는 사실에 의해, 내가 나 자신의 가치의 창조자임을 내가 결정 할 때에야 의미를 갖는다. 이로서 자동적인 초월속으로 들어간다. 나를 벗어나는 사물들의 질서에 따르는 인간에 의해, 나는 창조에 있어서 가치의 완벽한 긍정인 위버멘쉬에 가까워진다.


이로서 < 차라투스트라는 가축떼들의 양치기나 개가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온 것은 가축떼들 중 많은 길 잃은 양들을 없애기 위해 온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비웃는 군중들에 의해 거부당한,  차라투스트라는 외딴 곳에서 머문다.

<나는 창조하는 자, 추수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벗하리라. 그들에게 무지개를, 그리고 위버멘쉬에 이르는 층계 하나하나를 보여주겠다.> 잠언은 인간을 넘어서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담화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의미는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일 수 없다. 그들은 자기자신의 해석에 따라 의미를 세울것이다.


강건한 정신은 낙타처럼 짊어지기에, 가능한 무게의 짐을 실어 나르면서 자신의 강건함을 입증하려고 한다. 이러한 금욕과 자기 희생의 논리는 본질적인 역설에 근거하는 금욕주의적 이상의 논리이다. 그 자체로 금욕은 흥분, 자기 안위의 고통,명예의 믿음에 이르게 한다. 자신의 논리의 반대 논리로 이르게 하는 이러한 과정의 변증법적인 과정은 여기서는 겉치레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치와 유산의 무게에 대한 순종은 가벼운 무게도 아니고 짊어지기에 쉬운 멍에가 아니다. 그것(낙타와 같은 정신)은 자기 자신에 의해 그 반대로 이끌리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뒤엎어야한다. 정신이 그런 낙타적인 정신 안에서 가치들을 실어 나른다면, 정신은 가치의 창조자일 수 없고, 정신은 그러한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없이도 있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니다. 원한다는 것은 생산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하고 싶다>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대로 될 것임을 내가 원한다는 것이다.>

의무의 복종속에서(너는 해야한다) 행해지는 의지는 반대의 형태를 갖는다. <그것이 네가 하고자 하는 것처럼 되도록 나는 원한다>  의무는 사실 신의 죽음을 긍정한 후에도 존속하는 마지막 용이다.


사자의 형상은 이로서 모든 초월의 형태를 거부하는 이러한 의지를 나타낸다. 사자의 활동은 그러나 제한되어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사자 조차도 그것은 아직 할 수 없다.>  사자의 작업은 사실 가치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에 한정된다. 그런데 부정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부정하는 것이 오랫동안 존속할때에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부정은 따라서 창조와 완전한 긍정을 나타낼 수 없다. 허무주의의 모든 형태에 고착되어있는 유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자는 아이가 되어야만 한다.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다. 아이는 자신의 무지에 의해, 선악을 넘어서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가득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이런상황은 실제적으로 자유로운, 자발적인 긍정을 할 수 있는 유일무구한 상태이다. 아이는 <자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어린 아이는 역사의 짐에 의해 짓눌리지 않는다. 기억도 없고, 과거도 없다면 후회도 없고, 향수도 없다. 아이는 두려움없이 앞으로 닥칠 후회들을 긍정한다. 아이는 그것의 결과를 기초로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지 않는다. 아이는 역사로부터 얻어야할 교훈들을 규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는 그가 한번 원했던 것을 여전히 원할 것이다. 아이는 이처럼 자유롭고 가볍다. 아이는 자신의 고유한 의지만을 원할 수 있고, 그가 주인일 수 없는 범위가 정해진 대상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출처: 방송대>

 

 

 

'니체 철학, 무엇이 문제인가'

 - 형이상학과 허무주의 이후의 철학


> 전통적 세계해석 : 형이상학적-목적론적-도덕적인 해석의 결합체

 → 인간과 세계, 인식과 실재, 존재와 당위와의 긴장관계 형성. 인간의 현실적 삶을 부정하고 인간에게 허무적 경험을 하게 하는 해석

 →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

> 니체의 과제 : ① 정신적․현실적 아나키즘 극복, ② 근본적인 긍정(디오니소스적 긍정)

 → 긍정하는 파토스 - 영원 회귀 사유 - 힘에의 의지 - 생기 존재론 - 몸/위버멘쉬

 (위버멘쉬)  몸으로서의 인간. 창조와 해석활동을 하면서 자기의 현 상태를 극복하는 인간

 (인식)  종결되지 않는 힘과 삶의 의지의 수행 현상. 자기극복과 위버멘쉬적 삶이 그 목적

⇒ 완전한 허무주의자로서의 니체는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이성 비판가


※ 살로메의 니체 철학 3단계 발전 도식

(1) 니체 철학의 낭만적 시기(~1876년 여름)

; 염세주의적 의지의 철학으로부터 영향받은 예술가-형이상학적 사유  ~ 나중에 포기

(2) 실증주의적 시기(~1882년 여름)

; 자유 정신적 존재로서 기존의 것을 파괴.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경향

(3) 후기(~1889년 초)

; 위버멘쉬, 신의 죽음, 영원 회귀, 힘에의 의지, 허무주의 극복,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 본질적인 단절이나 완전한 반동을 말할 수는 없다     ~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전통적 세계해석을 탈피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자신의 세계 안에서의 위치를 정립시킬 수 있는가


1.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

1-1. 생성의 무죄와 형이상학적 이원론

생성의 철학 : 모든 것이 지속적인 생성, 실제란 항상 생성과 변화를 겪는 실제

 → 생성의 무죄 입증 - 생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 - 디오니소스적 지혜

(생성의 무죄)  전통 형이상학의 특징인 존재/생성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도전

(이분법의 발생원인)  생성에 대한 인간의 불신과 평가 절하

 ①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들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발생원인을 가지며, 그 발생원인은 불변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존재에 있다는 형이상학의 믿음  → 존재/생성은 본질적․가치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② 인간의 행복 추구는 심적인 엉터리 발상을 촉발시켰다  →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 고통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 고통의 무의미함

 ⇒ 존재는 존재해야만 하는 것으로 요청되고, 존재의 있음은 도덕적 당위에 근거를 둔다  ~ 과도한 순진함. 이성의 자기 과대평가

   →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제 자체에 대한 직접적 파악 능력이 없다

   → 이성의 한계 설정. 인간 이성은 해석 행위의 주체일 뿐 그 인식이 실제 자체는 아님


1-2. 예술가-형이상학

현존재에 대한 예술적 정당화 : 실천적 염세주의 거부. 삶을 비도덕적으로 근거짓고자 함. ~ 예술적 능력은 인간을 삶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기쁨을 느끼게 한다

예술적 정당화 프로그램 포기 : 예술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실재에 관한 어떤 한 가지 해석을 제시하려는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어떤 마지막 근거로 상정되는 것. 가상적 구제

   → 생성으로서의 실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 가능성 제시 노력


1-3. 가치의 전도와 허무주의

가치의 전도 : 삶에 부정적인 가치체계로부터 삶에 긍정적인 가치체계로의 전도

(허무주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아무런 답변을 얻지 못하는 상태. 무Nihil를 의욕하게 함. 진리란 없다는 것, 사물의 절대적 성질이란 없다는 것, 물자체란 없다는 것

(허무주의의 원인)  허무주의의 도래는 역사적 필연성을 띤다

 ① 전통적 해석은 자신의 관점적-실용적 진리성을 절대적 진리성으로 혼동

 ② 전통적 해석이 자신의 관점적-실용적 진리성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함

 → 전통 해석은 진정한 치료제가 아닌 가상적 수단

 → 최고 가치로서 평가되던 가치의 탈가치화 초래. 다른 가치판단의 근거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병리적 중간 상태(불완전한 허무주의, 소극적 허무주의) 경험

(적극적 형식의 허무주의)  허무주의의 완성 형태. 부정하려는 의지를 실제에 대한 긍정으로, 긍정하는 생성에 대한 절대적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의지로 인간 의식의 전환!

(위버멘쉬)  해석 주체. 자신의 한계에 대한 적극적 긍정. 절대성의 포기와 상대적 진리의 유의미성 확보. 인간이 자신을 위버멘쉬로 긍정하는 데서 허무주의 극복 과정 시작


1-4. 비도덕주의

도덕 공격 : 도덕 판단의 절대성과 무조건성에 대한 공격.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에게 체화된 가치평가의 총체  → 비도덕주의. 전도된 도덕 필요

(위버멘쉬의 도덕)  자신의 극복과 자신의 발전을 위해 인간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힘에 의한 도덕, 이 힘의 지속적인 활동을 위한 도덕, 즉 인간에 내재하며 항상 활동하는 힘에의 의지를 위한 도덕


1-5. 힘에의 의지와 위버멘쉬

생기 존재론 : 존재는 자신 안에 운동의 목적과 원인을 갖는, 항상 운동하고 작용하는 힘에의 의지라는 유일 실재. 생성에 대한 절대적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

힘에의 의지 : 유일한 실재, 본질.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생성의 과정에 있을 수 있는가

 ① 항상 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 많은 힘을 얻고자 하는,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들에 내재하는 본성(자체 내에 운동의 원인을 갖는다)

 ②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지의 힘으로 충만되어 있고, 의지는 항상 작용하는 동적인 것

 ③ 한 의지에 저항하는 반대 의지들이 있어야 한다(의지의 다수성)

 ④ 생기는 끝없는 진행과정 속에 있다(명령하고-저항하는 복종) ~ 자기 극복과 상승

 ⑤ 의지의 목적은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함이다

 ⑥ 의지는 매 순간 자신의 힘의 극대화를 꾀하며 또 실제로 도달한다

 ⇒ 매 순간마다의 필연성(비이성적 필연성)

 ⇒ 생성의 과정은 끝이 없다. 힘에의 의지는 힘을 추구하는 관계적 과정 형성

~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생기의 실현이며, 힘에의 의지는 보편성을 띠는 존재론적 원리


1-6. 같은 것의 영원 회귀

영원 회귀 사유 : ‘사유 중의 사유’  

 ~ 관점적 세계 경험, 위버멘쉬, 허무주의, 힘에의 의지의 사유 복합체

 ① 생기존재론의 완성 : 영원 회귀 사유는 힘에의 의지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확보하여 생기 존재론을 보증된 존재론으로 완성시킨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자 생성이다. 힘에의 의지는 영원히 회귀한다(힘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라는 자신의 본성으로 영원히 되돌아온다)

 ② 허무주의의 극복 가능성 제시 : 영원 회귀 사유는 인간이 힘에의 의지의 한 예인 위버멘쉬적 존재임을 긍정하도록 촉발시킨다.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고 해석하는 위버멘쉬적 존재로 자각하고, 그렇게 살기를 의지하는 실존적 결단을 통해서 허무주의는 극복된다. 무(무의미)가 영원하다.

 ③ 모든 순간의 필연성과 유의미성 보장 : 모든 순간의 필연성의 의미를 모든 순간의 영원성에 대한 것으로 설명. 영원 회귀의 영원성은 바로 순간으로부터만 파악될 수 있다.

⇒ 생성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절대적 긍정(디오니소스적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


1-7. 관점적 세계 경험(관점주의)과 이성 비판

인간 이성의 사용과 근원 및 한계에 대한 비판 : 형이상학적 이분법에서 존재 뒤에는 생기의 실재성이 숨겨져 있다. 이 생기의 실재성은 곧 힘에의 의지 작용을 의미하고, 이간의 이성 범주로는 모두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관점적 세계 해석(관점주의) : 관점성(삶 또는 생을 위한)은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한, 즉 자기 극복을 통한 자기 상승을 목적으로 하는 의지 작용의 조건. 생성하는 모든 것은 관점성을 가지고 있으며, 관점성은 힘에의 의지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속성이다.

(해석으로서의 인식)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의지가 미리 앞서서 기능한다. 관점을 설정하는 의지의 힘. 인식의 해석 각인적, 해석의 가치 각인적 성격(생기하는 세계는 해석에 의하지 않고는 인식될 수 없다. 인식 주체의 관점성 전제). 오류성과 관점성-실용성을 특징으로 한다.  →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한계로서 인정해야 한다

⇒ ① 인식 활동은 이제 삶의 실천 차원에서 이해된다

   ② 인간 인식의 다원성과 역사성에 대한 강조

   ③ 겸손한 이성 요구


1-8. 디오니소스적 긍정과 운명애

디오니소스적 긍정 : 세계와 인간 존재를 힘에의 의지의 생기 현상으로 규정하여, 그것의 필연성과 유의미성 도출. 디오니소스적 세계/인간은 거대한 모순의 집합체로, 이런 것들을 조건 없이 긍정하는 것이 디오니소스적 긍정. 고통에 대한 긍정

(운명애)  창조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며, 이렇게 결정된 우리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


2. 철학사적 위치와 평가

(1) 생기 존재론은 존재자에 대한 해명을 과제로 삼는 한, 제1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 (하이데거)  니체는 위버멘쉬라는 완성된 주체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체성의 형이상학을 완성시키며, 허무주의의 정점을 제시한다

(2) 이성의 자기 한계를 명시한다

(3) 니체 철학은 딜타이가 제기하는 삶의 철학이나 야스퍼스류의 실존철학 이상의 내용을 포함한다

(4) 니체 철학은 비가시적, 비형식적 체계를 갖는 철학이다

 ≠ (데리다)  니체 텍스트들을 체계화시키고 통일화하는 것은 하나의 해석학적 오류에 불과하다

 ⇒ 니체 철학에서 제시하는 무진리의 진리는 하나의 절대적 진리는 없지만 인간중심적-실용적 진리ㅡ 시간 제약적 진리가 있음을 제시한다

(5) 니체의 현대성 담론이 포스트모던적 사유로의 전환점을 형성한다

 → (하버마스)  이성의 타자, 반계몽적 태도 ~ 낭만주의적 메시아주의

 ⇒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 이성을 포기하지는 않는다(힘에의 의지를 이성의 타자로 상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니체 철학이 갖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 우연성 속의 필연성이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이해하고 있는가

 

 <출처; 신지식>

 

 

 

'방랑자' / F. 니체

방랑자 한 사람이 밤의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다.
정확한 발걸음으로
구부러진 골짜기와 긴 산길 ---
그는 그 길을 더듬어 간다.
밤은 아름답도다 ---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걷고 있으나,
그 길이 아직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고 있다.
밤의 어둠을 뚫고 한 마리의 새가 노래부른다.
"아, 새여, 무슨 짓을 했느뇨!
어찌하여 내 마음과 걸음을 방해하느뇨,
감미로운 가슴의 역정을
나의 귀에 울리게 하여, 나를 멈추게 하는가.
어찌하여 노래와 인사로 나를 유혹하느뇨?"

그 착한 새는 노래를 그치고 말했다.
"아니오, 방랑자여, 나는 당신을
나의 노래로서 유혹하는 것이 아니지요 ---
내가 높은 가지에서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암컷이라오 ---
당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나에게만 밤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
당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당신은 가야만 하
는데.
결코,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되지요!
어째서 아직도 서 있는 겁니까?
피리로 부는 나의 노래가 당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방랑하는 그대여?"

그 착한 새는 침묵을 지키고서 생각했다.
'피리로 부는 나의 노래가 그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어째서 그는 아직도 서 있는 것일까?
가엾은, 가엾은 방랑자여!'


방랑자 / 태학당(윤동하역)

 

   

 

 '최후의 고백' 니체

 

 

* 나의 사후 50년이 지난 뒤에 나는 하나의 신화가 될 것이고 내 별은 서구가 암흑 속에 가려질 때 창공에서 반짝이리라

 

 * 만약에 삶이 우리를 해친다면 어떤 면에서 우리가 '진리'를 해쳤기 때문이다.

 

 * 그대는 정복했도다.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는 바로 그대의 가장 위대한 원수의 마음을 정복했도다.

 

 * 내 생애의 아이러니는 내가 강한 것을 찬양하면서 약한 것에 동정하는 것이다.

 

 * 삶을 배신하지 않는 자에겐 '삶' 역시 정녕코 그를 배신하는 않는 것이니...

 

 * 나는 사랑했다. 나는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살았노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노라.

 

 * 만약에 그대가 태양이 또 다른 지평선의 숲 위로 서서히 떠올라올 동안 그대 스스로와 더불어 산길을 나란히 걸어본 적이 없다면 그대는 아직도 개인의 영혼으로서 그대의재생에 적합한 광경을 발견하지 않는 것이다.



 => 니체는 천재다... 나는 그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할 만큼 부족하다...

그의 예상대로... 그는 사후 50년이 되기 전에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그러한 신화가... 우리 크리츠챤에게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니체의 고민과... 그의 날카로운 지적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필요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실된 영혼이었다...

나는 그의 구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고민하였으며...

삶을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니체에 대한 크리스챤들의 반감은

 "신은 죽었다"라는 하나의 명제에 대한 노이로제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말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과 고민...

그리고... 기성 크리스챤 세력들의 문제들에서는 묵과한채...

신에게 대항하고 신을 모독한 존재의 대명사로만 그를 이해한다...

그리고.. 신성모독의 결과

결국 미쳐서 죽고 말았다며 우리들은 통쾌해 하지 않았던가...

왜 그가 미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나는 내 자신에게 수 많은 가식을 본다...

크리스챤이라고 이야기하는 내 자신에게서

너무도 가득찬 이기심과 무기력함을 본다..

그에 반해 비록 크리스챤은 아니지만...

진리를 향해 몸부림을 쳤던 진실한 인간 니체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 부끄러운 자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점이다...

 

<출처:푸른영혼>

 

 

 

니체, '안티크리스트'

 

우리의 경전읽기의 목적이 기독교보다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있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2천년 동안 쌓여온 기독교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을 뚫고 들어가야 되겠지요.  

이 글은 니체의 <안티 크리스트>를 제가 직접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니체>에 대한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읽어보면

이 글을 통해 예수의 진면목과 제자들의 오해와 왜곡의 역사를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전제 : 삶이란 성장을 위한 본능, 지속을 위한 본능, 힘의 축적을 위한 본능, 힘을 위한 본능이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가 결여되는 곳에서 힘의 쇠퇴가 일어난다. 이런 쇠퇴의 가치, 허무의 가치가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인류의 모든 가치를 지배하고 있다. 현대는 이런 허무주의적 가치로 인해 병들어 있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적 동정보다 더 병들어 있는 것은 없다. 이 병든 현대성에 가차없이 칼을 들이대는 것이 우리의 일이며, 우리 방식의 인간애다.


․ 좋은 것 : 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힘 자체를 증대시키는 모든 것.

․ 나쁜 것 : 약함에서 유래하는 모든 것. 힘의 쇠퇴

․ 행복 : 힘이 증가된다는 느낌.

․ 약자들, 실패자들은 몰락해야 하고, 인간애로 그들의 몰락을 도와야 한다.

 (약자, 강자를 사회, 정치, 경제적 의미의 약자, 강자와 동일한 의미로 보아서는 안된다. 약자로서의 모습이 몰락하면 강자의 삶을 살 수 있다.)

․ 모든 악덕보다 더 해로운 것은 모든 실패자와 약자에 대한 동정행위. 곧 그리스도교.

․ 그리스도교를 저주하는 이유 : 실패자, 약자를 동정하기 때문. (힘의 쇠퇴)

․ 인간은 동정을 느낄 때 본능을 상실하고, 의지를 결여하고, 힘이 쇠퇴한다...

․ 동정 : 허무주의의 실천. 이러한 허무적 본능은 삶을 보존하고 삶의 가치를 드높이려 애쓰는 본능들과 충돌한다. (비참함을 보존하려 애쓴다)

․ 타락 : 어떤 짐승이나 종이나 어떤 개인이 자기의 본능을 상실하거나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선택하고 선호하는 것

․ 인간은 모든 동물 중 최고의 실패작이며 타락한 존재다 : 가장 병적이고, 자신의 본능에서 가장 위험하게 벗어나 있는 동물이다.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한 두 가지 명제

 

첫째, 그리스도교는 유대 본능에 맞서는 반대운동이 아니며, 유대 본능의 수미일관함 자체이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유대 본능의 논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결론이다.(그리스도교인은 스스로가 유대인의 궁극적인 귀결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온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은 사제적 삶 또는 사제적 심리 전체를 포함한다. 신개념의 탈자연화(신명기적 역사해석 → 도덕적 세계질서를 창조)

=> 도덕적 세계질서란 인간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영원한 신의 뜻이 존재한다는 것, 한 민족의 가치와 한 개인의 가치는 얼마만큼 신의 뜻에 복종했는지에 의해 측정된다는 것, 한 민족과 한 개인의 운명은 신이 그들을 처벌하고 보상하면서 입증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덕적 세계질서는 모든 행복을 보상으로, 모든 불행을 신에 대한 불복종의 벌로, 죄에 대한 벌로 해석,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 개념을 뒤집어버린 가장 기만적인 해석방식이다.

=> 자연적 삶의 부정으로 인해 새로운 어떤 가치를 창조해내고 또 가치를 부여하는 하나의 권력이 필요하게 된다. 사제가 자연을 탈가치화하고 탈신성화시킨다. 이런 대가를 치르고서야 사제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불복종, 곧 사제에 대한 불복종, 법에 대한 불복종은 이제 ‘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신과 화해하는 수단들은 사제들에 대한 복종을 훨씬 더 철저하게 보장하는 바로 그 수단일 게 뻔하다. 따라서 오직 사제만이 구원한다.

=> 그 조직상 사제사회인 곳은 어디서나 죄가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이 진정 권력을 부리는 것이며, 사제는 죄에 의존해 생존한다. 사제에게는 누군가 죄를 범하는 것이 필요하다. 죄인이 필요하게 된다. 신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한다..... 사제에게 복종하는 자를...

=> 예수가 주모자로 이해되거나 또는 주모자로 오해되었던 그 봉기는 유대교회, 곧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로서의 교회에 대항하는 봉기였다. 그것은 선한 자와 정의로운 자에 대한 봉기였고, 이스라엘의 성자들에 대한 봉기였으며, 사회의 위계질서(사제사회)에 대한 봉기였다. 그것들의 부패에 대한 봉기가 아니라 그것들 자체의 토대인 계급과 특권으로 이루어진 기존 질서에 대한 봉기였다. 그러나 예수가 문제 삼은 위계제도는 홍수 속에서 유대 민족을 살아남게 한 수상가옥이고 방주였으며, 살아남기 위해 힘들게 얻은 마지막 가능성이자 그들의 독특한 정치적인 삶의 처지의 잔재였다. 이런 위계질서에 대한 공격은 가장 심층적인 민족 본능에 대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질겼던 민족-생존-의지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처럼 예수라는 성스러운 아나키스트는 하층민과 배제된 자와 죄인과 유대교 내부의 찬달라에게 지배 질서에 대한 저항을 호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범이었다. 터무니없이 비정치적인 사회에서 가능한 그런 형태의 정치범이었다. 이 점이 그를 십자가로 몰고 간 것이다. 십자가에 붙어 있는 명패만큼 확실한 증거가 있겠는가?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 비록 그가 다른 이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자주 주장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다.


둘째, 갈릴리인(예수)의 심리적 유형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여전히 알아볼 수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낯선 특성으로 인해 완전히 훼손되고 변질되어서야 비로소 인류의 구원자 유형이라는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다. (니체 왈, 내 인생에 복음서만큼 읽기 어려웠던 책은 몇 권 안된다)

=> 다른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 학문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자의 심리형이다. 복음서가 아무리 훼손되고 낯선 특성들로 덧칠되어 있다 하더라도 분명 그것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관건이 되는 질문은 그가 행했던 것이나 그가 말했던 것이나 그가 정말 어떻게 죽었던가 하는 사실 여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라는 구세주 유형이 도대체 생각 가능한가? 그가 ‘전승’된 것인가의 여부이다.

=> 곧 이런 의문은 예수라는 구세주 유형이 강하게 왜곡된 채로 유지되고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진기한 인물이 활동했던 환경이 그에게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리 없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와 운명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소개하는 진기하고도 병든 세계는 어떤 경우에든 그 유형을 조야하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특히 첫 사도들은 온통 상징과 불가해성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 존재에 관해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그네들의 조잡성으로 그를 번역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에게 예수라는 유형은 좀더 잘 알려져 있는 형식으로 변형된 후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선지자, 구세주, 미래의 판관, 도덕의 설교자, 기적을 행하는 자, 세례자 요한 등.... 그 유형을 오해할 계기는 이처럼 많았다. 거기다 가장 큰 특징적 계기인 종파적 숭배의 문제 역시 경시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숭배되는 존재가 갖은 독창적이고, 종종 불쾌감을 주는 낯선 특징들과 특이 성질들을 지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라는 유형이 사람들이 숭배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여러 다양성과 모순을 지닌 유형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격앙된 생각들이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스승 유형 안으로 흘러들어갔음을 의심치 않는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른 신학자들과 대항하기 위해 판결하고 다투고 분노하며 사악하고 궤변을 늘어놓는 신학자가 한 사람 필요했고, 그래서 자기들의 신을 창조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의 입에 완전히 비복음적인 개념들, 곧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온갖 종류의 이 세상의 기대와 약속을 아무 주저 없이 주워 담았던 것이다.

 

=> 복음의 심리 전체에는 ‘죄와 벌’의 개념이 없다. ‘보상’이라는 개념도 없다.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죄’가 없어졌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지복은 약속되지 않으며, 어떤 조건들에 묶여 있지도 않다. 이것이 유일한 사실이다.

그런 상태의 결과가 하나의 새로운 실천으로, 진짜 복음적 실천으로 투영된다. 신앙이 그리스도교인을 구별 짓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인은 행동하고, 행동이 달라서 구별된다.

그에게 못되게 구는 자에게 말로도 마음으로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 이방인과 토착민,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고, 누구도 멸시하지 않는다는 것, 법정에 나서지도 않고, 나서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 어떤 경우라도, 아내의 부정이 입증된 경우라도 이혼하지 않는다는 것.....

구세주의 삶은 이러한 실천일 뿐이었다. 그의 죽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과 통교하기 위해 어떤 공식도 어떤 의식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신적이고, 복되며, 복음적이고, 언제나 신의 자식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 어째서 삶의 실천인지를 알고 있었다. 신에게 향하는 길은 회개도 아니고 용서의 기도도 아니다. 오로지 복음적 실천만이 신에게 인도하며, 복음의 실천이 바로 ‘신’이다. 복음과 함께 없어진 것, 그것은 ‘죄’‘죄의 사함’‘신앙’‘신앙을 통한 구원’개념을 갖고 있는 유대교였다. 이런 유대 교회의 교설 전체가 ‘기쁜 소식’에서는 부정되었다.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는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심층적 본능, 오로지 이것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의 유일한 심리적 사실이다. 예수라는 구세주 유형은 하나의 새로운 ‘변화’를 원했지, 새로운 ‘신앙’을 원한 것이 아니다.

 

=> 이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아왔고, 그가 가르쳤던 대로 죽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겨놓은 것은 바로 실천이었다. 재판관과 호위병과 고발자와 온갖 종류의 비방과 조소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였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고,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 않았고,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사태를 도발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간구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도적에게 그가 한 말은 복음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신적인 사람이구나. ‘신의 자식’이구나”라는 그 도적의 말에 “네가 그것을 느낀다면 너는 이미 낙원에 있는 것이다. 너 역시 신의 자식인 것이다.”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노하지 말라. 책임 지우지 말라. 또한 악한 자에게도 저항하지 말고, 그를 사랑하라!

 

=> 이제 비로소 자유로워진 우리는 19세기 동안 오해되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성스러운 거짓말에 맞서 싸우는 정직성이라는, 전제 조건을 갖게 되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파렴치한 사욕에 의해 복음에서 자기들의 이익만을 원했고, 복음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기초로 해서 교회를 세웠다. 누군가 세계의 장엄한 유희의 배후에 아이러니컬한 신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표시를 찾는다면, 그는 그 단초를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의 거대한 의문부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인류는 복음의 근원이고 의미이며 권능이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 앞에 무릎을 꿇고,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가 자신이 폐기처분시켜버렸다고 여겼던 것을 다시 ‘교회’라는 개념 안에서 신성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엄청난 형식의 세계사적 아이러니가 또 있으리오.

 

그리스도교의 진짜 역사

 

- 그리스도교라는 말 자체가 벌써 오해이며, 근본적으로는 오직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인이 존재했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복음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렸다. 그 순간부터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미 그 유일한 그리스도교인이 체험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신앙에서, 곧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그리스도교인의 표지를 찾는 일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오로지 그리스도교적 실천만이, 즉 십자가에서 죽었던 그가 살았던 것처럼 사는 것만이 그리스도교적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그런 삶은 가능하며, 진정한 그리스도교, 근원적인 그리스도교는 어느 시대에나 가능하다.

 

- 이처럼 복음의 운명은 죽음과 함께 결정되었다. 바로 그 죽음, 그 예기치 않았던 치욕적인 죽음, 바로 이 가장 끔찍한 역설이 사도들을 진정한 수수께끼에 맞닥뜨리게 했다. “그 사람은 누구였던가? 저 사건은 무엇이었던가?” 동요되고 마음속 깊이 모욕당한 느낌, 그런 죽음이야말로 그의 행적에 대한 반박일 거라는 의심. “왜 그러했던가?”라는 섬뜩한 의문부호. 거기서 모든 것은 필연적이어야만 했고, 의미를 가져야만 했으며, 합리적이어야, 최대한 합리적이어야만 했다. “누가 그를 죽였나?” “누가 그의 당연한 원수인가?” 이런 물음이 떠올랐던 것이다.

 

- 지배하던 유대민족, 유대 민족의 제1계층. 이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이 질서에 거스르는 봉기를 일으키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는 예수를 질서에 거스르는 봉기를 일으키는 자로 이해했다. 이때까지 예수의 모습에 그런 호전적인 특징이 없었다. 더구나 이런 특징은 그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명백히 그 작은 집단은 그런 방식의 죽임 보여준 모범을, 모든 원한 감정을 넘어서는 자유와 능가라는 모범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점이 그들이 얼마만큼 그를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인 것이다. 예수 자신은 자기의 죽음을 통해 자기의 가르침을 입증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도들은 이런 죽음을 용서해주는 데에서 멀리 있었다. 바로 가장 비복음적인 감정인 복수심이 일어났다. 그 죽음을 그대로 끝내버릴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보복과 심판을 필요로 했다. 다시한번 메시아에 대한 대중적인 기대가 전면에 나섰다. 어떤 역사적 순간이 주목되었다. 신의 나라가 자기의 적을 심판하러 오는 순간이... 하지만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오해되어버렸다. 신의 나라가 마지막 장이요, 약속이라니! 복음은 그런 나라가 현존하고, 이루어졌으며,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그런 죽음이야말로 바로 이런 신의 나라였던 것이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이런 영혼들의 광포해진 숭배심은 만인이 신의 자식이라는 예수가 가르쳤던 복음적 평등권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의 복수는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예수를 치켜세우고, 그들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예전에 유대인이 자기네 적에 복수하기 위해 자기네들의 신을 자신들로부터 분리시켜 높이 치켜세웠듯이. 단 하나의 신과 단 하나의 신의 아들... 이 두 가지가 다 원한의 산물이다.

 

- 그리고는 신이 어떻게 그런 죽음을 허용할 수 있었단 말인가? 하는 터무니없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 작은 집단의 교란된 이성은 끔찍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답변을 찾아냈다. 신이 죄의 사함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물로 주었다는 답변을. 복음이 단 한순간에 그렇게 끝장나버리다니. 죄의 희생양이라니! 죄 개념 자체를 없애버린 죄없는 예수가 죄 지은 자의 죄를 위해 희생되다니! 그는 신과 인간 사이의 일체의 간격을 부정하며, 신과의 일치를 기쁜소식으로 삼고 살았다. 자신만의 특권으로서가 아닌. 이때부터 구원자 유형 안으로 심판과 재림에 대한 교리, 희생적 죽음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교리, 부활에 대한 교리가 단계적으로 들어왔다. 이 부활에 대한 교리를 통해 지복 개념 전체가, 복음 전체의 사실이자 유일한 사실이 요술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이 죽은 다음의 상태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라는 바울의 선언으로 단한순간에 복음은 실현될 수 없는 모든 약속 중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약속, 즉 개인의 불멸에 대한 파렴치한 교설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바울은 삶 전체의 중심을 간단히 이 세계적인 삶의 배후로, 부활한 예수에 대한 거짓말 안으로 옮겨버렸다. 바울에게 필요했던 것은 구세주의 삶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삶의 중심을 삶에 두지 않고, 오히려 피안으로 옮겨버린다면, 진정 삶에서 중심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불멸에 대한 엄청난 거짓말은 모든 이성과 본능의 자연성 전부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사족)

- 천오백년을 넘게 이어온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대항한 거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문제제기는 르네상스의 그것이다.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전도이자 모든 수단과 본능과 천재들을 가지고 수행되었으며, 그 반대되는 가치인 고귀한 가치를 승리하게끔 했던 시도였다. 이 위대한 싸움의 수확물을 빼앗아버린 것은 독일인의 수치였다. 독일의 수도승인 루터는 로마에서 르네상스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났다. 그리스도교를 그 본거지에서 극복하려는 거대한 사건을 이해하는 대신 루터가 본 것은 교황청의 부패였다. 그리고 루터는 교회를 공격하면서 교회를 재건했다.  르네상스가 의미없는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유럽을 병들게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불결한 유형의 그리스도교에, 가장 치유하기 어렵고,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유형의 그리스도교에, 즉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책임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끝장내버리지 못한다면, 독일인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이것으로 그리스도교에 유죄판결을 내리고, 그리스도교 교회를 가장 혹독하게 탄핵한다. 그리스도교를 단 하나의 엄청난 저주, 단 하나의 엄청난, 가장 내면적인 타락, 단 하나의 엄청난 복수 본능, 인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이라고 부른다.
 

<출처: 생명 평화>

 

 

 

프리드리히 니체: <바보여, 시인이여>

 

                                                  김재혁 옮김·해설

 

바보여! 시인이여!

 

맑은 대기 속

이슬의 위안이 벌써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위안자인양

이슬은 고요한 신발을 신고 있어――

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게

땅으로 졸졸 떨어질 때,

그대 뜨거운 심장이여, 그대는

지난날 하늘의 눈물과

꼭 필요한 이슬방울을

햇빛에 그을리고 피곤한 모습으로

애타게 목말라하던 일을 기억하는가,

그대는 기억하는가, 누렇게 물든 풀길에

심술궂은 저녁 햇살의 눈길이

검은 나무들 사이로 뛰어와 그대를 에워싸던 일을,

눈부신 태양의 타는 눈길이, 음흉한 눈길이.

진리의 청혼자인가, 그대는? 그렇게 그들은 놀렸다

아니다! 그저 시인일 뿐이다!

간교하고 약탈을 일삼는 잠행성 짐승이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알면서 고의로 속여야 하는

노획을 노리는 한마리 짐승이다.

온갖 색깔로 위장하고

스스로 가면이 되기도 하고,

스스로 노획물이 되기도 하는

짐승, 그대가 진리의 청혼자인가?……

바보요! 시인일 뿐이다!

색색가지를 이야기하면서,

바보의 가면을 쓰고 마구 지껄이면서,

거짓말의 다리를 타고 오르면서,

거짓말의 무지개 위,

그릇된 하늘들 사이를

거닐면서, 기어다니면서――

바보여! 시인이여!

그대가――진리의 청혼자인가?

 

조용히, 가만히, 매끄럽게, 차갑게

형상이 되지 않고,

신의 기둥이 되지 않고,

神殿 앞에 세워진

신의 문지기도 아니다.

그렇다! 그러한 미덕의 입상을 증오하며,

사원보다는 거친 황야에서 더 안락감을 느끼며,

고양이와 같은 방종으로 가득 차,

모든 창문으로 뛰어들며,

휙! 모든 우연 속으로,

모든 원초의 숲의 냄새를 맡으며,

원초의 숲 속에서

얼룩덜룩한 맹수들 사이에서

죄지어 건강하고, 멋지게, 다채롭게 뛰어다니며,

탐욕적인 입술을 하고,

복되이――조롱하며, 복되이――지옥 같으며, 복되이 피를 탐하며

빼앗고, 잠행하며, 속이며 뛰어다녔다……

 

혹은 참으로 오랫동안 뚫어지게 계곡을

자신의 계곡을

응시하는 독수리처럼……

――오 그 양들이 여기 아래로,

아래로, 이 속으로,

이 점점 더 깊어가는 계곡으로 둥글게 모인다!

그 다음,

갑자기,

곧장 날개를 펼쳐

단숨에

어린 양들을 덮친다,

잽싸게 내려와, 굶주림에 불타,

어린 양들을 탐하며,

모든 양의 영혼에 원한이 되고,

또 도덕적이고, 양과 같고, 곱슬곱슬한 양털 같고,

어리석고, 양의 젖처럼 호의롭게 보이는

모든 것에 잔인하게 원한이 된다……

그러므로

그대 시인의 동경은

독수리 같고, 표범 같고,

그대의 동경은 수천의 탈을 쓰고 있다,

그대 바보여! 그대 시인이여!……

 

그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양 같은 신을 바라다본다――,

사람들의 가슴속의 신을,

사람들의 가슴속의 양을 찢는다,

찢으며 웃는다――

 

그것, 그것이 그대의 지복이다,

표범의 지복이요 독수리의 지복이다,

시인과 바보의 지복이다!……

 

맑은 대기 속,

낫 모양의 달이

진홍빛 노을 사이를 푸른 빛으로,

시기하며 서서히 흘러갈 때,

――낮에 적대심을 품고

발자국마다 소리를 죽여

장미――그물침대 곁을 살그머니 지나,

완전히 떨어질 때,

밤을 향해 창백하게 떨어질 때,

나도 언젠가 함께 떨어졌다,

나의 진리의 광기로부터,

나의 낮의 동경으로부터,

낮에 지치고, 빛에 병들어,

아래로, 저녁을 향해, 그림자를 향해 떨어졌다,

하나의 진리로

애타게 목이 탔다:

――그대는 아직도 기억하는가, 뜨거운 심장이여,

그때 그대가 목말라 하던 일을?

내가 모든 진리로부터

추방당한 일을!

바보여! 시인이여!……

 

니체(1844~1900)가 독일시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말하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철학적인 사상에 찬란하게 시적인 형상의 옷을 입힌 철학자라는 부정적인 판단을 내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시인으로서의 니체의 전체적인 측면을 말하지는 못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그 자체로서 충분히 논의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개성있는 문체를 구사하는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그를 고찰할 때에도 그렇지만――니체가 사용한 상징과 이미지들은 독일시문학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으로 그 이후로 많은 시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시적인 테마와 관련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가 주창하는 시적인 테마의 요체는 어디에 있는가?

니체는 이 시에서 단호하게 <바보여, 시인이여>라고 외친다. 이때의 그의 어조는 온통 의문부호와 조롱, 재치 그리고 과감성 등으로 휩싸여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어조에서 장난이나 객기가 아닌 진지함을 읽는다. 일찍이 독일의 종교적 감상주의 시인 클롭슈토크(1724~1803)는 시인을 영감에 찬 예언자로 노래하였거니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에 걸쳐서 살다간 횔덜린(1770~1843)은 시인의 존재를,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주변세계를 향해 예언의 말을 이끌어내는 선각적인 존재로 정의하고서 몸소 이러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총 아홉 편으로 이루어진 『디오니소스 찬가』(1888년 완성)의 첫번째 시작품인 「바보여, 시인이여」는 이미 그 제목에서부터 그러한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니체가 정신병의 문턱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쓰여진 이 시는 시인의 존재에 대한 니체의 견해를 잘 드러내주는 시론적인 시로 평가된다. 시인을 무엇보다도 익살꾼, 거짓말쟁이, 어릿광대, 바보로 묘사하는 것은, 신의 부름에 따라 받아쓰기를 하는 예언자적 시인에 대한 조롱이요 나아가서 그러한 신적 존재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시인을 예언자로 보던 낭만주의자들의 견해와 달리 시인이란 <바보>요 <어릿광대>라는 생각은 독일시문학사 상에서 그 전례를 낭만주의와 조국 독일의 고루함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고 나선 청년독일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의 정신사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거짓말을 하는 시인의 이야기는 그리스의 플라톤에게서 발견된다. 플라톤은 시인을 그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해야 할 존재로 묘사한 바 있다. 시인이 이상국가로부터 추방되어야 하는 이유는 현상계는 이념의 모사에 불과하고 예술은 이 현상계를 모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을 주업으로 삼는 예술가 역시 진리가 아닌 <가상>만을 모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니체 역시 이 시에서 시인의 존재에 대해 플라톤과 거의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일단은 예술가의 존재를 의심에 찬 눈으로 비판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니체는 무조건 플라톤의 견해에 따르고 있지는 않다. 1884년 가을에 쓴 그의 미완성 시작품을 보자.

 

알면서도 고의로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시인,

그만이 진리를 말할 수 있다.

 

니체의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인식하고 감지하는 존재의 조건으로서의 광기와 망상에 대한 긍정적인 통찰이 자리잡고 있다. <가상>을 향한 예술의 <훌륭한 의지>를 니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니체는 예술이 갖는 중요한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니체가 예술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예술이 현실의 데카당스에 대항해서 삶을 삶으로서 가치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증오하는 예술은 이러한 데카당스를 조장하는 예술이다. 한때 가까웠다가 그 후로 멀어진 작곡가 바그너와의 관계에서 이 면은 잘 드러난다.

예술에서 나타나는 진리와 가상에 대한 성찰은 『즐거운 지식』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된 부분을 차지한다. 사실, <시인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말하는 장본인인 차라투스트라――여기서 우리는 니체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역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니체는 예술가는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변호하는 것과 그것을 비판하는 사이에서 일종의 균형 같은 것을 취하고자 한다. 우리 인간이 아는 것이 너무나 적기 때문에 시인들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시 니체는 <나는 옛날의 시인들 뿐만 아니라 근세의 시인들에게도 넌덜머리가 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너무 표피적이고 얕은 바닷물 같다>, <시인들은 가짜 포도주를 만든다>고 비판을 가한다. 이 대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시인 전체에 대한 비판을 니체의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시인의 지위에 대한 자기 비하는 전통적인 시인의 이미지와 관련된 일체의 광휘를 부수고 일거에 벗겨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에서 우리는 시적 주체를 표현하기 위해 니체가 끌어다 쓰고 있는 일련의 비유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맹수와 가면 메타포 그리고 부정적인 무지개 형상 등 종래의 시에서 보지 못한 화려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이제 더 이상 신의 신전을 지키는 문지기가 아니라 기존의 기독교적 입장에 대한 무자비한 적이며, 서구의 문화로부터 멀리 떨어진 원시림 속에 사는 죄의 냄새를 풍기는 맹수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서 이야기했던 시인에 대한 비판과 옹호의 모순되는 측면이 동일한 텍스트 부분에서 거의 병렬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알면서 거짓말을 하지만, 사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으며, 노획물을 노리는 맹수이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먹이가 되고,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서 가면을 쓰는 존재이다. <바보>로서 거짓된 하늘 밑의 <거짓말―무지개> 위를 거닐면서 인간의 가슴속의 신을, 그리고 인간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양을 찢어내며, 찢어내며 웃는 시인의 모습은 니체가 가슴속에 지닌 정신적 갈등과 오만의 일단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니체의 개념대로 역할과 가면, 즉 <가상>에 대한 내적인 욕구로 수렴된다. 이것은 모든 것에 자유자재로 적응할 수 있는 예술가의 본능을 뜻한다. <가면>과 여러 가지로 다채롭게 변하는 시인의 모습은 정신의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는 어릿광대가 <가면>을 쓰고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동경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쓰인 시어들과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분위기는 얼핏보기에 진지한 것과 사뭇 다른 장난스러움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데, 이것 역시 정신의 자유로움을 구가하는 니체 특유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면>을 쓰고 시인이 하는 거짓말의 의도에 대하여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이 니체의 말대로 <좋은 뜻에서 하는 거짓말>일 경우 시인의 거짓말은 결코 사회에 악이 되지 않는다. 시인은 거짓말을 하는 존재로서 부정적인 면을 지니나 그의 거짓말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는 것이라 또한 긍정적인 면도 갖는다. 그렇게 볼 때 니체가 추구하는 것은 거짓말, 그의 말로 표현하여 <가상>과 <진리> 사이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예술은 장난기가 아닌 인간 본연의 형이상학적 행동으로서 세계를 미학적으로 해석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상상적이고 신화적이고 불확실한 것에 대한 선호가 예술가의 기본적인 특징이 된다. 여기서 본질적으로 니체의 <가상>에 대한 논의가 파생되어 나온다.

<가상>에 대한 논의는 헤겔의 견해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견해를 이끌어낸다. <예술이란 가상이다>라는 말은 이들의 경우 곧 예술의 자율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이 죽은 뒤에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 예술의 독자적인 지위, 그것을 니체는 <가상의 올림포스산>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도덕적 가치 뿐만 아니라 모든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세계, 그것이 곧 니체가 추구하는 숭고한 미학적 세계이다. 모든 목적에서 벗어난 세계를 구가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그 문제는 곧 니체가 왜 여기 이 시에 <디오니소스 찬가 Dithyrambos>라는 명칭을 붙였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원래 디티람보스 즉 디오니소스 찬가는 고대 그리스에서 酒神 디오니소스를 향해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데 쓰였던 확고한 형태의 연형식이었다. 니체가 풍요와 생산의 신인 디오니소스라는 인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한마디로 모든 사상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이와 같은 자유로움을 막는 것이 소크라테스로부터 유래하는 학문의 편협한 자기합리화이다. 니체는 반소크라테스적인 사고방식을 통하여――바그너와의 친교 당시 그는 이것을 음악의 정신에서 찾았다――서구의 논증적 사고방식을 해체하고자 한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절대 타당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듯이 초월적 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 역시 그에게는 소크라테스적 정신의 변형된 소산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거부의 몸짓 이후에 남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자아 뿐이다. 삶을 해방시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인간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도록 인간은

지금도 제 마음속에 혼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가 그리는 삶은 조용히 흘러가는, 즉 사회적 가치와 도덕률의 궤도에 따르는 그렇고 그런 삶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이고 파토스적이고 카오스적인 삶이다. 디오니소스적인 삶에 대한 그의 욕구는 <영원회귀>를 향한 몸부림으로 이어진다. 이 시의 화자는 잔인한 맹수로 등장한다. <독수리>나 <표범>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삶의 양식에서, 그들의 고독한 존재 양식에서 진정한 삶을 위한 창의력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조야하고 동물 같은 삶을 살라고 사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은 건강하고 인간다운 본래의 삶을 향한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들은 모든 기성적인 가치들이다. 그것도 감히 부정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서구 문화의 최고의 가치들이다. 그 결과 시인이 의지할 수 있는 확고한 지반이 이제는 없다. 그러한 부정의 현실 속에서 시인은 니힐리즘 쪽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까지도 이끌어내야 한다. 『디오니소스 찬가』 중의 하나인 「아리아드네의 비탄」에서 이러한 측면은 잘 나타난다. 아리아드네는 애인 디오니소스를 향해 자신을 찢어달라고 다음과 같은 절규를 퍼붓는다:

 

이렇게 나는 누워 있어요,

그 많은 영원한 고문에

괴롭힘을 당해

몸을 구부리고, 몸부림치며,

그대 앞에서, 그대 잔인한 사냥꾼이여,

그대 미지의 신이여!……

나를 더 심하게 찔러주세요!

다시 한번 찔러주세요!

나의 이 심장을 마구 찌르고, 부수어주세요!

이빨처럼 무딘 화살로

고문하면 무슨 소용인가요?

그대는 왜 또 다시

인간의 고통에 조금도 지치지 않은 채

심술궂은 신들의 번개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가요?

그대는 죽이기를 원치 않는가요?

계속해서 고문만 할 건가요?

무엇 때문에――나를 고문하는가요?

그대 심술궂은 미지의 신이여.

 

기성의 모든 가치와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겨내 파괴한 다음에야 오는 창조, 그것이야말로 니체가 추구해간 진정한 예술가적 존재의 기본 모습이 아닐까. <<십자가에 매달린 자> 대 디오니소스>라는 극명한 대립을 통하여 니체는 <갈가리 찢긴 디오니소스는 삶의 약속이다. 삶은 파괴로부터 재생되어 영원히 반복된다.>라고 천명한다. 시인은 거짓과 절망의 강바닥을 훑다가 문득 진리의 물고기를 손에 움켜쥐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출처: 부천여성문학회 /  고경숙>

 

 


책소개 : 니체가 눈물 흘릴 때 
- 철학자 니체와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브로이어와의 화려한 지적 공방! 

서구 사상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19세기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에 지적인 상상력을 더한 
어빈 얄롬의 장편소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브로이어가 '대화 요법'을 이용해 음울하고 
고독한 삶을 살다간 천재 철학자 니체의 '절망'을 치료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평새을 극심한 편두통과 발작증상으로 고생해온 니체는 루 살로메로부터 실연을 당한 후, 
지나친 애증을 감당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에 걸린다. 브로이어는 그의 환자인 안나O에 대한 
절망적인 사랑으로 인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각자 극심한 내면의 고통을 지닌 두 사람은 
환자와 의사로 만나고, 서로의 갈망과 고통을 치유해준다는 은밀한 계약을 맺게 되는데…. 

브로이어는 니체로 상징되는 철학을 정신분석하고, 니체는 브로이어로 상징되는 정신분석학을 
철학화하는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심리적 공격과 이성적 방어를 되풀이하게 된다.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던 둘은 서로의 역할을 바꾸면서까지 아슬아슬한 진실 
게임을 계속 이어나가며, 스스로의 내적 진실에 다가서고, 점점 치유되어 간다.


목차1. 베니스의 특별한 아침식사 
2. 불경한 삼위일체 
3. 40피트의 꿈 
4, 니체 교수의 방문 
5. 혼란스러운 환자 
6. 세 가지 질문 
7. 두 질의 사본 
8. 스트레스 논쟁 
9. 망가진 심리치료 
10. 성적 상상과 죄의식 
11. 발작에도 굴하지 않는 사나이 
12. 이상한 거래 
13. 올가미 전략 짜기 
14. 먼저 발가벗기 전략 
15. 물구나무선 관계 
16.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소년 
17. 베르타와 불타는 집 환상 
18. 3일간의 심리 운동 
19. 위험한 탈주 
20. 묘지에서 풀린 수수께끼 
21. 가지 않은 길 
22. 초인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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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눈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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