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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작품

윤동주 / 작품과 생애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04.27|조회수2,996 목록 댓글 0

시인 윤동주

 

(1917. 12. 30 북간도 명동촌~1945. 2. 16 일본 후쿠오카[福岡])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 졸업당시 모습(1941년)


일제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아명은 해환(海煥).

 
 
 
 
[생애와 활동]

 
교회 장로이면서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영석(永錫)과 어머니 김룡(金龍)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으며, 중국의 관립소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모두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송몽규·문익환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 〈공상〉을 발표했다. 〈공상〉은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다.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했으며, 옌지[延吉]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에 윤동주(尹童柱)라는 필명으로 동시를 발표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뒤 2년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남다른 친교를 맺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1942년 도쿄[東京]에 있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되어 각각 2, 3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3월 10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유해는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혀 있고,
1968년에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다.
 
1985년 월간문학사에서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1997년 용정의 윤동주시비 앞에서 / 시인 김석림>

 

 

 

 

 

윤동주의 생애

 

약력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 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 등과 문예지 《새 명동》 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 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 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 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 시집,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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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출생

윤동주 시인은 당시 만주국 간도성(間島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에서 1917년 12월 20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이 파평(坡平)인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년 음력 6월 12일 출생)은 그 당시의 상당한 인텔리였다. 그는 명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한 때 소학교 교편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1920년대엔 일본에 건너가 도쿄에서 다시 유학을 하기도 했다. 시인의 어머니는 교육자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1862-1942) 선생의 누이였다. 김약연 선생은 당시 간도 주민들의 정신적 기둥으로서 이 고장 명동 소학교와 중학교 모두 그가 설립한 규암서숙이 모체가 되어 세워진 학교이다. 윤동주 시인은 원래 4남매였는데 아우 일주(一株)는 성균관대 교수로 일하다가 86년에 작고했으며 누이인 윤혜원(尹惠媛)은 월남하여 부산에서 거주하였고 아우 광주(光株)는 북에 남아 있어서 생사를 알 수 없다.

윤동주의 아명(兒名)은 해환(海煥), 아우인 일주는 달환(達煥), 그리고 막내 동생은 별환(갓난애 때 죽음)이었다. 이 아명은 모두 그의 아버지가 지은 것인데 자식들 이름 앞에 '해', '달', '별'을 차례로 붙여 지은 그의 부친의 정서적 일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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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의 배경

시인 윤동주의 '동(東)' 자는 「명동」에서 따 온 것으로 그만큼 이 고장 명동에 대한 애착은 각별하고도 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866년 그의 증조부 윤재옥이 43세 때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 이끌고 북간도 자동(紫洞)으로 옮겨 온 후, 1900년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때에는 다시 명동촌으로 이사, 자수성가하여 가세는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으며 윤동주 시인과 그의 동생들이 태어난 생가는 이 고장에서도 돋보일 만큼 큰 기와집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고장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리 만큼 그 경관이 뛰어난 것으로도 이름난 곳이었다. 이 고장에 대한 그의 부친의 애착과 집념은 특별난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후일의 윤동주의 저항시인적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이 고장 명동촌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도 결코 군더더기는 아닐 것이다. 그가 자란 명동촌의 아름다운 자연은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배경이 되어주었다. 마치 존 키츠나 워즈워스의 고향이 그들의 시와 생애에 절대적 영향을 안겨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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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운동의 고장

당시에 명동 출신이라 하면 의례 배일(排日) 운동가의 낙인이 찍힐 만큼 삼엄한 대외적 인식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었다. 평생 일본(日本)이라고 부르기가 싫어서 왈본(曰本)이라고 불렀던 지사(志士)들이 많았던 것도 그 고장의 개성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문재린(文在麟), 윤영석(윤동주의 부친), 문성린, 김석환 등이 그들이었다.

북간도에서 '동만(東滿)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 선생이 터잡고 있던 명동은 한 시인의 풍운에 찬 생애를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고장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난 윤동주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나 외숙인 김약연 선생의 가르침과 영향을 크게 받았다.

3·1만세 후에 결성된 '북간도국민회'는 상해 다음가는 임시정부 구실을 했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청산리(靑山里)대첩이 북간도국민회가 주도했으며 그 활약이 눈부셨다. 이 청산리 보복으로 일본군은 간도 지방의 우리 겨레 3만여 명을 무참히 학살한 일이 있었다.

윤동주 시인을 태어나게 하고 그가 자란 지리적 상황 배경은 바로 이런 '역사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었다. 그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그 정신적 배경에는 이토록 사무친 민족적 비애와 울분이 서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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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윤동주 시인이 명동 소학교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학과는 조선 역사와 조선어였는데 이것이 씨(種)가 되어 항일정신의 싹이 텄으며 강인한 자아추구의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요람은 운명을 결정하듯이 천성적으로 감정이 밝고 예민한 시인에게 주변의 개성적인 풍물과 인정, 산천과 현실이 안겨준 불씨는 후일에 불굴의 투혼과 장렬한 기개를 양성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다녔던 명동소학교는 네 명의 시인을 키워냈다. 자랑의 땅 간도 벌판은 그들의 시혼으로 불타고 그들이 남긴 언어의 체온 속에서 역사화된 꿈을 이루었다. 윤동주와 송몽규,《새삼스러운 하루》와《꿈을 비는 마음》등의 시집을 펴낸 문익환,《불 덩어리, 돌》,《별들의 이야기》,《돌들의 이야기》,《불의 눈》등의 시집을 펴낸 김정우 시인 등은 풍운의 명동지방이 낳은 시의 순례자들이다.

윤동주 시인의 외숙이며 이 고장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김약연 선생은 바로 김정우의 백부였다.

윤동주 시인의 나이 12살 명동 소학교 4학년 때, 그는 이미 서울에서 나오는 월간 소년잡지를 구독해서 읽었고 그의 고종사촌이며 동갑내기인 송몽규도 같은 문학소년으로서 몽규는〈어린이〉 잡지를, 동주는〈아이생활〉이란 잡지를 구독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의 세계에서 서울의 월간지를 구독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그곳 문학 소년들이 힘을 합쳐〈새 명동〉이란 잡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잡지명은 그 당시 존경의 대상이었던 한주명 목사(중앙신학교 교수)가 지어준 것이었다.

1932년에는 용정(龍井)으로 집과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용정가 제2구 1동 36호-20평 남짓한 초가집이었다. 그곳은 바로 1937년까지의 윤동주 시인의 작품 산실이기도 했다. 윤동주가 명동에서 30리나 떨어진 미션계 학교인 은진(恩眞) 중학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시대와 환경의 압박요인이 있었다. 그 무렵은 일본이 중국을 짓밟고 만주에다 괴뢰정권을 세운 때여서 안팎으로 정세가 몹시 긴박하고 어수선했으며 그 고을에서도 좌우익 싸움이 치열하여 도무지 배겨나기가 어려운 때였으므로 어차피 도시로 빠져나가야만 할 궁지에 몰려있었다. 타의 반 자의 반의 이사였다.

은진 중학 시절의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에 걸친 것으로서 축구, 농구, 웅변, 문예, 편집 등을 위시해서 그림과 디자인 방면까지 고루 취미와 소질이 안 미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라고 그의 친동생인 윤일주씨는 회고한다.

수학과 기하학에 특히 재미를 느낀 듯했고 손수 재봉틀을 돌려 기성복을 고쳐 입거나 나팔바지를 곧잘 만들어 입기도 했다.

그 당시 만주지방에 있었던 젊은이들의 소원은 고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길림(吉林)을 거쳐 북경까지 갔다 온 송몽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으로 옮겨간 문익환 등을 더할 나위 없이 부러워하던 시인 윤동주 자신도 마침내 1935년 9월 평양숭실중학으로 배움의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학과가 서로 달랐을 뿐 아니라 학기 도중에 갔었으므로 3학년 2학기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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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정신이 싹트다

그 무렵에 그는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주로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가 발표 무대였다.

1939년 가을 무렵 용정의 정안구(精安區) 제창로(濟昌路) 1의 20으로 또 한 차례의 이사를 해다. 예전 집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큰 집이었다. 캐나다 선교부의 조계지(祖界地)로써 경치가 매우 좋은 언덕바지에 세워진 집이었다. 주위 풍물이 회화적으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적도 드문 곳이어서 윤동주의 산책길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의 지은이 칸트가 규칙적인 산책을 즐긴 것으로 유명하지만 시인 윤동주의 산책 기호(嗜好)는 정녕 유다른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삼베나 옥양목으로 차려입은 한복 맵시와 더불어 손에 들린 책은 산책길의 운치와 여유를 더욱 풍겨주었다. 풍채가 훤칠한 데다가 모든 행동이 의젓해서 남을 은근히 압도하는 면이 있었으며 어떤 차림이나 그에겐 아주 잘 어울렸다. 일본 옷인 '하오리'나 '유가다'를 걸친 조선인을 보면 역겹고 구역질이 난다고 실토한 적이 있었으며 친구들이 일본어로 이야기하면 일부러 우리말로 대답하곤 했다.

그는 노래도 곧잘 불렀다.

현재명 작고인 '희망의 노래', 미국 민요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그리고 '산타루치아', '아, 목동아'... 그 중에서도 유독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애창했는데 그것은 어쩌면 애절한 흑인영가의 멜로디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진 탓이었는 지도 모른다.

영국의 호반이 워즈워스를, 움부리아 숲이 성(聖) 프란시스를 태어나게 하였듯이 간도는 시인 윤동주의 성장배경이었다 특히 용정마을은 민족문화의 중심지요 한교(韓僑) 사회의 경제적 종교적 구심점을 이루었다. 당시 약 2만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는데 학교를 세워 구국이념과 애국사상을 고취시켰다. 3·1절이 되면 단군 임금의 초상화를 정면에 걸고 그 옆에 태극기를 내어 걸고 애국가를 부르며 조국광복의 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하곤 했다. 윤동주 시인의 성장 환경이 이만큼 치열한 생존 여건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피나는 환경적 분위기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이미 그의 가슴 속에는 곧은 신념과 대의를 위한 십자가의 개념이 차분히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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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학교 시절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그 해 연희전문 학교에 입학했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할할 때 그의 아버지 윤영석은 여러 가지로 많이 망설였던 모양이다. 이 험난하고도 어려운 시대에는 의학을 해야만 무난히 살아갈 수 있지 사상적인 운동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의학을 한다면 공부를 시키고 싶으나 그렇지 않으면 공부를 시키고 싶지 않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나중에 그의 조부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권함에 못 이겨 본인의 생각대로 할 것을 결정하고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시키기로 결정이 되었다.

현실 인식의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 그의 내면과 고통은 차츰 시에 대한 집념의 확산으로 승화시키게 되었다. 밖으로 중일(中日) 전쟁이 확대되어 갔으며 안으로는 한국인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고 특히 지식인에 대한 증오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언더우드 일가가 창립자가 되고 선교사 측의 정신적인 뒷받침과 국제적인 관심도가 높은 연희전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으려니와 매우 자랑스러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걸핏하면 연전 교수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곤 했던 시기였다.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일정한 법이 없는 세상이었다.

이따금 윤동주 시인은 누이 혜원과 동생 일주에게 태극기의 모양과 무궁화, 애국가, 기미 독립 만세, 광주 학생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는 민족주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한 묵시적 동조를 꾀한 것으로 여겨진다.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정직하고 맘씨가 깨끗할 뿐 아니라 폭넓은 인간애로 가득 차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바로 그것은 성장시의 가정환경이나 곧은 인품에서 나온 것으로서 순수한 열정의 솟아남이었다.

시인 윤동주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도 말한다. 소설가 장덕순씨는 "동주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도 자기는 회의와 일종의 혐오로 자신을 부정하는 휴머니스트다. 남에 대한 애정은 곧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시작에도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전문학교에 입학시험 보러 상경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때 그 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시인 동주는 나를 위해 하숙방을 얻어 놓고 역까지 마중나왔다. 저녁 늦게까지 내 하숙방에서 이야기하다가 동주는 기숙사로 돌아간다고 나갔다. 아마 자정도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여독을 풀자고 자리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다. 밖에서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깼다. 동주가 다시 온 것이었다.

방에서 냇내가 나니 창을 좀 열고 자라고 이르는 것이다. 내가 들창문을 좀 열어 놓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자정이 넘은 어두운 신촌 굴길을 타박거리고 더듬어 갔다. 뒤에 들으니 동주는 가깝지 않은 기숙사까지 다 갔다가 걱정이 되어서 다시 왔더라는 것이었다. 그 방에는 학생 하나가 냇내에 중독이 되어서 쓰러진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주가 '너는 아늑한 호수에', '나는 험준한 산맥'에 있겠다는 그 시심(詩心)과도 같은 일화이다.

외유내강,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이렇게 표현하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인관계에서 모가 나는 일이 없었고 누구도 그를 지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였다. 그는 자신을 변명하는 일이 없었다.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변명하는 데는 너그러웠지만 스스로 용서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일제의 분노나, 울분, 비애와 절망 등을 조용히 안으로 깊이 삭이면서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는 온유한 성품이었다. 그는 행동파이기보다는 사색형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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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관계

연전 시절의 그의 교우관계를 보면 동요나 동화 등으로 활약했던 엄달호, 판소리의 김삼불과 풍류객 김운용, 영어에 능통한 한혁동, 강처중, 한글 학자 허웅, 영문학의 이순복 등을 꼽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는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이라는 강의를 특히 좋아했으며 민족주의의 사상을 고취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강의이기도 했다.

윤동주의 연전시절 이야기를 연전 2년 후배이며 윤동주의 자필 시고 3부 중의 한 부를 극적으로 보관했다가 해방 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상제(上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정병욱씨의 회고담을 통해 시인의 면모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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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씨의 회고

내가 동주를 알게 된 것은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오똑하게 쪽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자로 굳게 다운 입술,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다고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라 천성으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눈 비가 내려도 태산처럼 요동하지 않는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주 단정하고 결백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이 없었고 CCC라는 글자가 새겨진 교복의 단추를 모로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의 두 반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으로 따랐다. <중략>

우리가 다니던 교회는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진 협성교회로서 이화여전 음악관에 있는 소강당을 교회 당으로 쓰고 있었다. 거기서 예배가 끝나면 곧이어서 케이블 목사 부인이 지도하는 영어 성서반에도 참석하곤 했었다.

오늘의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된 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동주가 심어준 씨앗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도 도주가 내 곁에 있는 것을 느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곧잘 달이 밝으면 내 방문을 두들기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나를 이끌어 내었다.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 그 두어 시간 동안 그는 별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이지만, 가끔 입을 열면 고작 "정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어요."하는 정도의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에 나는 무엇이라 대답했는지 뚜렷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그는 "그 책은 그저 그렇게 읽는 거예요."
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 책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라 무척 고생하면서 읽어도 잘 알 수 없는 책입니다." 이렇게 일러주기도 했다. 그만큼 독서의 범위가 넓었다. 문학, 역사, 철학 이런 책들을 그는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정독했었다. 꼭 다문 입술을 팽팽히 조인 채 눈에서는 불덩이가 튀는 듯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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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준 분들

그가 연희전문에 다닐 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분은 외솔 최현배(崔鉉培), 이양하(李敭河), 김윤경(金允經) 세 분 선생이었다. 아마도 한글에 깊은 애정과 매력을 느끼고 시를 쓰게 된 동기도 결정적으로 이분들의 영향이라고 믿어진다.

윤동주의 한글에 대한 애착과 흠모의 정은 대단했다. 방학 때마다 고향에 돌아가면 연전 자랑을 하는 가운데 특히 한글을 배울 수 있어 기쁘다는 말을 누구에게나 떳떳이 말하곤 했다.

윤동주는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주변에 술친구도 없었다. 가끔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중국집에서 외식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때 더러 배갈을 청해 마시는 그런 정도였다. 술기운이 돌아도 자세는 별반 흐트러짐이 없었다. 평소보다 말수가 조금 늘어난 정도였을 뿐, 도무지 횡설수설이란 게 없었다. 결국, 술은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의 장점은 남을 헐뜯는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시종여일 입을 다문 채 함부로 게걸게절 혀끝을 놀리는 일이 없었다.

옛말에도 술을 주어보면 그의 덕을 안다고 했거니와 그만한 혈기방장한 나이에 술에 기대어 남을 욕하거나 빈정거리고 허세를 부리는 일은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

'술과 여자와 노래……이 세 가지 것들이 우리 인생을 장식한다'는 영시(英詩) 구절이 있지만 적어도 윤동주에게는 무관한 얘기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정신적인 청교도주의로 일관했을지언정 그는 결코 의식적으로 세속을 멀리하거나 도덕군자로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선비로서의 정제된 자세와 정신적 품격이 그로 하여금 늘 행동보다는 사색, 타협보다는 저항 쪽에 서게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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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연전을 마친 뒤 고종 사촌인 송몽규는 교토제대 철학과에, 동주는 도오지샤대학 영문과에 전학했다. 이를 계기로 짧고 분방했던 일본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안하고 비우호적인 정세 속에서나마 그들은 역시 젊은이답게 이국의 하늘 밑에서 맘껏 견문을 넓히고 감성을 다듬을 수가 있었다.

우에노 공원과 니혼바시 근처를 쏘다니며 이국의 낯선 풍물들을 익히고 하꼬네나 비와호 등지를 바람 같이 구름같이 휘돌아 오기도 했다. 그때 이미 동주는 사고 면에서 어엿한 철학적 체계를 갖춘 인테리로서의 풍모를 엿보이게 해줬을 뿐 아니라 굳건한 항일 레지스탕스로서의 행동 윤리를 몸에 익히고 있는 듯했다. 그의 족속되는 윤영춘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 해(1942년) 겨울 섣달 그믐날, 귀가 도중에 나는 교토에 들렸다. 밤늦게 거리에 나가서 야시장의 노점에서 파는 어묵과 삶아 놓고 파는 돼지고기와 두부, 참새고기를 실컷 먹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이 깊도록 시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했다.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진 것을 나는 퍽이나 염려했다.

6조 다다미 방에서 추운 줄 모르고 새벽 두 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하고……이것이 거의 그날 그날의 과제인 모양이었다.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프랑스 시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와 프랑시스 잠의 시는 구수해서 좋고 신경질적인 쟝콕토의 시는 염증이 나다가도 그 날신날신한 맛이 도리어 매력을 갖게 해서 좋고 나이두의 시는 조국애에 불타는 열성이 좋다고 하면서 어떤 때는 흥에 겨워 무릎을 치기도 했다.

이 무렵이 시인 동주에겐 가장 행복한 시기였던 것 같다. 굳이 행복의 절정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을 지 몰라도 그 나름의 불안의식 속에서나마 자유로운 시적 상상과 오묘한 영성의 자극이 부단히 꽃을 피운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시인의 행복이란 어쩌면 절대적 고독과 끊임없는 불안의 늪, 창백한 지적 방랑과 마음의 열기 속에서 찾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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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을 앞둔 일본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1941. 9)>

이 시에는 그 당시 쫓기는 자의 심정과 위치에서 일종의 세찬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그의 정신의 세계가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나 있다.

아마도 이상(李箱)의 <오감도(烏敢圖)>를 방불케 하는 시심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싶다. 무엇에 의지하거나 호소하지 않고선 정신의 안정과 균형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내공해 들어오는 갈등과 번민에서 스스로 풀려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투철한 선비 기질과 청교도적인 양심의 세계는 그로 하여금 외부와의 일체의 비타협과 단절 쪽으로 몰고 나가서 팽팽히 긴장된 디아노이아(사상) 세계를 지탱하도록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참고로 그 당시의 주변 상황을 살펴본다면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날만 새면 전선으로 글려나가는 출정군인과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는 병사와 백골로 돌아오는 전몰군인의 행렬을 쉽사리 대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한국인 학도병들의 유골 행렬, 무언의 귀환을 대할 때마다 거꾸로 피가 끓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을 뿐 아니라 허무주의적인 의식 속에 빨려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제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의식분자로서는 도저히 평범하게 보아넘길 수 없는 세찬 민족 감정과 분노와 허무를 동시에 느꼈을 법하다.

앞에 쓴 <또 다른 고향>만 하더라도 그러한 그의 의식 세계와 이미지가 자기 자신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작품이라도 할만 하다. 일제는 패전이 임박해오자 난무하는 유언비어 속에서 더욱 서슬이 퍼렇게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사찰의 눈초리는 갈수록 날카로워져 갔다.

워싱턴에 있는 일본 대사관에 태극기가 내걸렸다드니, 한국 학생 대표가 독립의 소청을 위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중국 장개석 총통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체포되었다느니 해서 인심이 극히 뒤숭숭한 판이었다.

이는 숫제 일본인들의 조작한 거짓말이었다. 1929년 관동대진재 때도 무고한 조선인을 학살하기 위한 유언비어의 날조극을 연출하더니 똑같은 수법으로 그들은 다시 한국 청년들을 때려잡기 위하여 별의별 억지와 허언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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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는 시인 윤동주

날마다 불길하고 우울한 소식만이 전해졌다. 전황도 급박하고 불리했지만 반사적으로 한국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의 강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무차별 체포, 구급이 자행되고 있었다. 근대사의 암흑기 절정이었다. 윤동주도 우울했다. 벽에 부딪힌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더욱더 말수가 적어지고 쫓기는 자의 심정이 되어갔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귀향길에 오른 그를 사상범으로 몰아세운 일경의 명분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사상이 불온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비국민(일본 신민이 아니라는 뜻), 서구 사상이 농후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송몽규와 함께 교토 경찰서에 검거되었다. 확실한 행동의 명세는 없지만 그의 죄명은 역시 '독립운동'이었다.

윤동주가 저항시인이고 시가 저항시로서 성립되기 위해선 먼저 그 해답이 의식사의 맥락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시사적 통념처럼 그를 저항시인 쪽에 비중을 두고 생각해 온 이론적 근거는 다름 아닌 투옥의 명분인 '독립운동'이란 면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만약에 이 대명제가 뒤집어지는 날에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친지들의 증언을 종합한다면 그의 피체(彼逮)는 실제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가 아니라 평소 그가 지닌 항일적 색채의 민족의식을 구실로 삼은 일제의 과잉 단속 행위였다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논리적으로는 투옥과 옥사로 이어지는 그 생애의 종말을 저항으로 인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평론가들의 구구한 이론 전개에도 수긍되는 점이 없지는 않다.

다만, 여기서는 그의 말년의 물리적인 상황만을 충실히 더듬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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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몰고가는 잔악한 고문

그가 구금된 후에 교토 경찰서에서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던 것도 틀림없는 일이다. 그리고 취조의 양상이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해졌던 것과 똑같이 혹독하고 끈질긴 것이었음도 몇몇 방문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된 바 있었다.

취조 형사는 그가 쓴 조선어로 된 시와 산문들을 모조리 일본어로 번역을 시켰다. 윤영춘씨가 경찰서 취조실에서 잠깐 그를 만났을 때 어깨너머로 본 원고 뭉치는 꽤 부피가 큰 것이었다. 어쩌면 몸이 축나기 전에 써둔 원고까지도 합쳐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니 그 푸짐한 분량을 짐작기 어렵지 않다.

그때 취조실에 놓여 있던 그 원고들이 지금 전해진 유고로 다 수렴됐는지 여부는 미심쩍은 일이다. 아마 많이 산실됐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경황 중에 어찌 그 원고가 온전히 간수되었으랴 싶으면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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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옥사

동주는 2년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석방 운동은 엄두조차 낼 형편이 못되었다. 일제의 일방적인 올가미 속에 완전 방치된 셈이었다. 그 무렵의 처절한 상황과 그의 심경이야 일일이 설명할 길이 없다.

가뜩이나 예민한 감성과 정서적인 온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역경이요, 피나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주로 역사주의적인 입장을 택한 평자들은 그의 투옥―옥사의 과정에다 비중을 두었다. 충분한 타당성이 인정되는 대목이다.

그 경위나 내막은 어떻든 간에 한 인간의 생애가 투쟁과 옥사로서 마감됐다고 하는 것 자체가 비장미를 나타내고 저항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동주가 죽은 것은 1945년 2월 16일. 조국이 광복되기 꼭 반년 전의 일이었다. 동주의 부음을 듣고 부친 윤영석과 족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를 방문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송몽규는 살아있었다. 산 사람부터 먼저 찾기로 했다.

면회 절차 수속을 밟으며 뒤적거리는 놈들의 서류를 보아 한즉 '독립운동'이라는 글자가 한자(漢字)로 판 박혀 있는 것이었다. 옥문을 열고 들어서자 간수는 우리더러 송몽규와 이야기 할 때는 일본어로 말할 것, 너무나도 흥분된 빛을 본인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주었다.

시국에 관한 말은 일체 금지라는 주의를 받고 복도에 들어서자 푸른 죄수복을 입은 20대의 한국 청년 50여 명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쭉 늘어선 것이 보였다.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왔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 왔느냐고 묻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꿈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다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하고 말을 흐렸다. 물론 이때는 우리말로 주고받은 것이었다.

또다시 내 손목을 붙잡는 몽규의 손길은 뜨거웠다.


윤영춘씨의 회고담은 자못 처절하기까지 하다. 전개되는 이야기의 리얼리티 때문일까. 대단원에 가까워질수록 그 기록성은 더욱 생생하고 비감을 자아낸다. 송몽규는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에 사망했다.

관 뚜껑을 열었을 때 동주의 시신은 원형 그대로 나타났다. 부친 윤영석은 기가 막힌 나머지 "동주야¨"만을 소리쳤을 뿐 한동안 울지도 못했다.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망한 지 열흘이 지났으나 규슈제대에서 시신에 방부처리를 한 덕분에 전혀 훼손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더 가증스럽고 원통한 일이기도 했다.

임종시 뜻을 알 수 없는 격렬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면서 담당 간수 한 사람이 동정을 표시했다.

그토록 애타게 염원하고 기다렸던 조국 광복을 반년 남겨 놓고 그는 한 많은 이역 하늘 아래에서 숨을 거두었다.

짧지만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몸으로 살고 간 시인이었다.

그 삶 자체가 하나의 불길이요, 별이요, 신앙이었던 시인의 생애는 세월이 흐를수록 영롱한 광채를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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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한 생체실험의 모르모트

전쟁 말기의 일제의 단말마(斷末魔)적 현상의 하나로 생체실험을 꼽을 수가 있는데 윤동주의 사인도 계속된 식염수 주사에 있다는 주장이 나와 이목을 끌었다.

동국대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한 일본인 유학생 코노에씨가 제출한 논문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가 그것이다. 매우 충격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짐작의 불확실성을 넘어 정확한 논리와 고증으로 가려낸 '시인의 사인'은 퍽 생산적인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있는 인간을 그 어떤 이유나 목적에서였건 간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생체실험'의 제물로 삼는다는 것은 일제의 잔인성을 다시 한번 온 세상에 폭로해 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생체 실험의 모르모토'- 그 사실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그가 겪어야 했던 절망적인 말년의 상황이 한 번 더 후세의 독자들을 울리고도 남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결백, 이 순수, 이 열정의 기도가 허무하게 무너지던 날…… 시인의 눈은 차마 감기지가 않았을 것이다.

윤동주의 무덤은 북간도 뒷동산에 있다. (용정 동산) 세월이 흘러도 말이 없는 고독한 비목(碑木)―이제는 갈래야 갈 수조차 없는 금단의 지역이 된 그곳, 시인의 별은 북녘 하늘에 홀로 빛나고 있다.

그의 뜨거웠던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참뜻을 모르는 이에게까지도 그 무덤은 살아서 속삭이고 그의 시는 영원히 향수처럼 나부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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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오기까지

해방 후 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단짝 친구였던 정병욱 덕분이었다.

1947년 2월 16일, 그의 유족과 친지들이 모여 첫 추도회를 했었다. 1948년 정음사 최영해 사장의 호의로 첫 시집이 상재되었다. 1955년 그의 10주기를 맞아 시집의 증보판을 간행했었다. 1967년 제3판 시집이 햇빛을 보게 되자 세상은 그에 대한 시각과 평가를 완전히 달리했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 ― 이것은 시집 초판(1948년)의 서문에서 정지용이 내뱉은 경탄이었다.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내가 한국 신문학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일제 말기의 한 대목 즉 1941년 이후 5년간을 <암흑기>라고 부른 데 대하여, 어느 젊은 작가가 불만을 표시한 일이 있었다.

시인 윤동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레지스탕스의 시기라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내용을 대화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충고를 솔직하게 받아들였고 다음번엔 개정판을 낼 때에는 기어이 그런 의사를 반영시켜서 제목을 바꾸리라고 마음먹었다. ……<중략> 그 뒤 이 시인의 가치가 날로 밝혀져 가는데 따라서 기성의 문학사의 내용을 새로 써야 하게 될 만큼 그 존재는 뚜렷해지고 있다.'

이것은 윤동주의 시집 증보판(1967년) 부록에 실린 평론가 백철 박사의 글이다.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은 윤동주의 시집이 엮어져 나오기까지의 과정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는 3부로 정리되었는데 그 하나는 윤동주 자신이 가졌고 다른 한 부는 이양하 선생이, 남은 한 부는 정병욱씨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선 시집에 실린 19편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쓴 시가 <별 헤는 밤>이었다. 1941년 11월 5일자,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자로 되어 있다.

짐작건대 <별 헤는 밤>을 쓰고 난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하고 그 가운데서 한 부를 정병욱씨에게 건네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었다.

처음엔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 했던 모양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환자들은 병원을 찾아가야 병을 고친다. 병원은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있는 곳이다. 그래서 '병원'을 선택하려 했었다는 그의 설명은 꽤 명분과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처음에 이양하 선생은 출판을 만류했었다.

작품 가운데 <십자가><슬픈 족속><또 다른 고향> 등이 일제 관헌의 검열에 걸릴 것을 염려했을 뿐 아니라 동주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미리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극한 사제간의 정리(情理)와 사랑이 빚은 충고였다. 동주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실망의 빛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게도 세상을 내다보는 눈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위안을 자신의 안에서 찾았다. <간>도 그 무렵에 쓴 작품이었다.

시인의 치열한 정신의 내공은 언어 이전의 분노와 달관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참회록>을 쓴 것이 1942년 1월 24일자. 어쩌면 이 작품이 그가 도일하기 전, 고국에서 마지막 쓴 작품인지도 모른다.

그 뒤 모든 사태는 뒤바뀌고 사물의 원형은 산산조각이 났다.

동주가 맡긴 시고 가운데서 정병욱씨에게 건넨 작품만이 살아남아 1948년 정음사에서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정병욱씨는 동주가 검거된 지 반 년 후에 학병으로 끌려 나갔다. 그는 동주의 시고를 그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동주가 살아 올 때까지 소중히 지켜 주기를 당부했었다.

만약에 동주나 자기가 죽어서 돌아올 수 없게 되거나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을 때는 그 시고를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서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듯 하며 떠났던 것이었다. 해방이 되고 다행히 그는 살아서 무사히 귀가하였다. 그때 어미니는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한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럽게 내놓으셨다.

이것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밝은 햇빛을 보게 되기까지의 경위이다.

동주의 시들이 일본에서 정병욱 등 친구와 가족에게 발송되고 또 아슬아슬하게 보관되어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방 후 <플라워> 다방(?)에서 윤동주의 추도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정병욱은 그의 필적을 고스란히 복사하여 참석자들에게 나눠주었고 김삼불은 윤동주의 시를 세밀히 분석 비판했다. 심지어 품사별로 풍계를 내고 김소월 시보다 한결 우수하다는 쪽으로 이론을 폈다. 이때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시인 정지용이 각도를 달리한 비평을 해서 이채를 띄었다. 즉 민족의 얼을 시에 담고 순교로 겨레 앞에 쓰러진 시인의 아름답고 귀한 시를 자로 재고 칼로 썰고 잘라내어 이리저리 까발리고 난도질하는 것은 더 가혹한 일이 아니냐고 반론을 펴면서 그 나름의 총괄적인 찬사를 보냈었다.

윤동주의 시를 '민족시의 별'로 인식시키고 암흑기를 저항시로 승화시킨 데 있어서 정지용의 후견이 크게 이바지했음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윤동주는 명동촌이 낳은, 우리 한국인의 마음에 빛을 보내는, 꺼지지 않는 별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어둠을 거부하면서 설정된 어둠의 상황 속에서 살았다.

그는 '마음'으로 한 시대와 양심을 노래했다. 비록 짧은 생애요, 어둠으로 점철된 공간이긴 했어도…….

 

- 시인 김윤식

 

<윤동주 팬페이지>

 
 
 
 
[문학세계]

 
중학시절 동시 〈병아리〉·〈빗자루〉·〈오줌싸개 지도〉·〈무얼 먹구 사나〉 등을 발표했고, 연희전문학교 시절 〈조선일보〉에 산문 〈달을 쏘다〉와 교지 〈문우〉에 시 〈자화상〉·〈새로운 길〉 등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대부분 현실세계의 모순과 그 모순을 초월하려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지만, 초기의 시 몇 편은 예외적이다.
 
초기에는 평화롭고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주로 읊었는데, 행복한 유년시절을 노래한 동시 〈햇비〉와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심(童心)을 노래한 시 〈반딧불〉·〈굴뚝〉·〈병아리〉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그러한 사춘기의 낙관적인 생각은 시 〈눈〉에 와서 어느 정도 걸러지고 1937~38년에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읊었다.
 
그뒤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갈등을 나타낸 좀더 성숙해진 시를 썼는데 이때의 시의식은 때로 자전적 성격에서 출발하거나 종교적 의식의 천착(穿鑿)으로 이어지고, 때로 민족의식과 시대의식으로 발전하거나 고향지향성으로 나타났다.
 
대표시 〈자화상〉(1939)은 자전적 시로 실존적 의식세계의 출발점이 되며, 〈별 헤는 밤〉(1941)·〈참회록〉(1942) 등에 나타나는 자아성찰과 미래를 향한 낙관적 의지, 실존적 윤리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달밤〉(1937)·〈유언〉(1937)·〈아우의 인상화〉(1938) 등에는 고독과 비애를 실감나게 담아냈다.
이러한 자전적 성격은 대표시 〈별 헤는 밤〉의 결구에 집약되어 있는데, 그것은 부끄러움과 절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자신의 지나간 삶을 토대로 자랑스러운 밝은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의 목소리였다. 또한 〈사랑의 전당〉(1938)에서 보이는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은 〈십자가〉(1941)에 이르면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바탕을 둔 비장미로 바뀌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아의 갈등을 극복하려는 결의를 실존적인 성실성에서 찾은 것이다.
그것은 자기자신의 희생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나며 신앙인으로서의 실천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밖에 이러한 자기 희생과는 또다른 그리스도교적 세계인식을 보여준 시로 1941년에 발표한 〈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새벽이 올 때까지〉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부조리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적인 예언을 담고 있다.

 
그는 일제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의 현실에 정서적 연원을 둔 작품을 많이 썼다.
〈십자가〉를 비롯하여 〈무서운 시간〉(1941)·〈또다른 고향〉(1941)·〈간 肝〉(1941)·〈쉽게 씌어진 시〉(1942) 등이 그 예인데, 〈무서운 시간〉에서는 행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히려 행동을 요구하는 상황이 나온다는 아이러니를 제시했는가 하면, 〈또다른 고향〉에서는 상황의식에 따른 자아성찰과 행동을 위한 결단을 내비치고 있다.
〈간〉에서는 구토지설(龜兎之說)과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연결시켜 고통스러운 현실과 맞서 유혹과 억압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일본 유학중에 쓴 〈쉽게 씌어진 시〉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고독을 토로하고 시대의 어둠에 대해 시로 대응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또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되는 〈서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시로서, 특히 '하늘·바람·별'의 이미지가 서로 대응되어 그의 생애와 시의 전모를 단적으로 암시해준다.
 
그는 자전적이고 내성적인 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에 성실했던 민족의식을 나타낸 시를 썼으며, 이러한 주제를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기법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정병욱이 그의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소중히 간직해두었다가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한 이후, 시집으로 〈별 헤는 밤〉(1977)·〈윤동주시집〉(1984) 등이 나왔다.

 

 

 

 

  윤동주 시인의 문학사적 의의

- 화해와 융화의 세계를 열어준 윤동주

 


한국 현대 시인 중에서 특히 윤동주(1917-1945)의 생애는 우리에게 한 시인의 심성, 시인과 사회적 배경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들어 있는 전편의 시들은 한 시인의 순결한 젊은 영혼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눈부신 순수의 빛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맑고 밝아서 투명한 소리가 날 것 같은 색깔, 어디서 우는지 몸은 보이지 않은 채 소리만 들리는 뻐꾸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흐르는 산 속의 샘물처럼 우리의 영혼을 씻어 내린다. 그와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친구인 문익환 씨의 회고에 따르면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가 보여 주고 있는 전기적 요소와 시적 사유의 결합은 자의식의 흐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시]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근원적 질서 속에서 그의 본질은 스스로를 응시하며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우주 속에서 느끼는 세월과 그 흐름이 가져다주는 변화, 그 모든 것은 생명과 죽음, 존재와 소멸의 내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괴로움은 어둡고 부정적인 인간의 실존이 지니는 보편적 상황과 함께 어두운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괴로움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분리되어 있는 자아를 직시하는 자기 성찰의 과정에서 그의 부끄러움의 시어가 탄생한다. 그의 부끄러움은 대부분 진실을 추구하는 의식 세계와 현실적 삶 사이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대적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응시하며 자신에 대한 물음 던져

윤동주는 유별나다고 할만큼 시대적 현실을 포함한 세계를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감지했다. 그의 예민한 촉수는 늘 세계를 향해 곤두서 있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 [쉽게 쓰여진 시] 전문

그의 최후의 시로 알려진 [쉽게 쓰여진 시]에는 손을 내미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대립이 있다. 이것은 작품 외적으로는 식민지의 청년 윤동주와 지배국인 일본으로 건너온 유학생인 자신과의 대립이며, 또한 일상적 인간과 시인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밤과 아침의 대립이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제 대립되는 세계 사이에서 좌초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신을 악수시킨다. 따뜻한 체온의 나눔이 감지되는 이 악수의 이미지는 먼길을 돌아온 시인의 또다른 자기 응시가 되는 것이다.
'우물'이나 '거울'의 이미지가 동적으로 변화해 자기 성찰과 수련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길'의 공간이다. [서시]의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운명적 목소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윤동주 시의 곳곳에서 여기저기로 뻗어 있는 '길'들과, '길 모퉁이', '뒷골목', '어느 낯선 거리'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길]의 일부

[길]의 공간성은 언제나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길은 바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길이며,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정신적 세계로서의 길이다. 시인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부정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참함을 넘어서 끊임없이 가야 하는데, 이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이 여전히 담 저쪽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곳에 남아 있는 자아가 화자가 잃어버린 참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관을 넘어서 존재의 본질, 현재 잊고 있는 존재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먼 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의 길을 가는 것이며, 고통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길의 선택을 계속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이며, 이러한 결의나 다짐의 태도는 윤동주 시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결국 윤동주의 시와 그의 생애가 모색되어 있는 초점은 따뜻한 화해의 세계로 모아진다. 어둠과 빛, 자기 부정과 긍정, 환자와 건강인, 그리고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극복하게 하는 사랑과 정다움 등 의미의 대응 관계를 이루는 두 세계를 하나로 묶는 융화의 세계인 것이다. 그 균형과 조화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떠나며, 자아의 탐구와 실천 사이의 끊임없는 상충 속에서 요동하는 괴로움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예리한 현실적 상황과 이상적 가능성의 부딪침 사이에서 윤동주의 감수성은 공존을 시도한다. 그 감수성은 모순된 명제를 동시에 포용하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나와 타인을 결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해, 공존, 융화의 세계 보여 주어 대립적인 것을 조화시켜

따라서 윤동주의 모든 시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을 긍정적 깨달음에로 이끌어 주는 의미 체계를 구성한다. 그 두 대립되는 세계를 이어 주는 매개항은 어린 날의 추억이나 친구들, 어머니와 순이, 때로는 이웃 사람들로 표상 되고 있다. '노여움, 억울함, 아까움 같은 것을 마음속에 조용히 새기고는 늘 변함없는 미소로 사람을 대하던' 그의 성품은 밤비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열쇠를 사람들 사이의 연대 의식으로 융화하려는 시 정신과 일치된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부정적인 현실의 나를 극복하여 시적 초월로 자기 존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모색의 과정을 보여 준다. 대상을 주관화시키는 이미지의 처리법, 자기가 또 하나의 자기에게 다짐하는 미래 지향적 시제, 흐르듯 이어지는 시어의 연속적 흐름, 산문적 형식 등 그의 시를 특징짓는 모든 경향들은 이러한 그의 내면적 요구와의 연관에서 해명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를 쓰는 행위는 괴로워하는 자기가 희망을 가지라고 부추기는 또 다른 자기에게 내미는 악수였고, 나와 타자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연결의 통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들은 이웃과의 연대 의식을 우리 모두에게 깨우치는 따뜻한 화해의 시학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異邦人 / 자유스케치>

 

 

 윤동주 시모음 / 사진자료

 

 

 

 

 

편 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쉽게 씌어진 시(詩)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이십사년일개월(滿二十四年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프랑시스 잠',‘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또 다른 고향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

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

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

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 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

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

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

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

의 얼굴은 어린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고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걸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오줌싸개지도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못 자는 밤                                              

 

하나,둘,셋,넷
.................

밤은

많기도 하다.

 

 


 
 

윤동주 尹東柱 (1917. 12. 30 - 1945. 2. 16)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북간도 독립투사들의 삶과 독립운동

 

윤동주 장례식 ...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살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1945년 3월 6일 용정 자택).








은진학교 봄 소풍...



대포산은 산의 모양새가 대포와 닮아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일제는 대포산의 ‘대포’가 일본 영사관을 향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 산을 훼손했다.(1939년 5월 6일)




명동학교 시절의 나운규 ...




영화배우이자 감독이었던 그는 영화 '아리랑'과 '풍운아'를 만들어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명신여학교 음악반 ...




1930년대 명신학교 음악반 학생들의 연주 모습.



숭실학교 시절의 윤동주와 문익환 ...




1930년대 숭실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뒷줄 맨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



김약연과 명동교회 교인들 ...



1910년대 명동교회 모습. 명동서숙을 설립한 김약연이 1909년에 세웠다.



명동학교 졸업식 ...



1931년에 졸업한 명동학교 소학부 제17회 졸업생(1931년 3월 21일).



명신여학교 운동회 ...


1940년대 명신여학교 학생들의 운동회. 뒤편에 보이는 건물이 현대식 교사(校舍)다.



거룻배를 탄 구례선 목사 일행 ...



1910년대 선교활동을 위해 거룻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는 구례선 목사 부부.



규암 김약연의 장례식 ...

 



명동촌의 주역인 김약연의 장례식. 기독교식으로 치러지는 모습이 눈에 띈다.(1942년 10월)


오층대건물 ...



받은 중국 관원이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한 오층대 건물의 옛 모습이다.


명동학교 동문회 ...


해방 뒤 명동촌 출신 인사들이 동국대학교에 모였다.
정재면, 문재린, 문익환, 김기섭, 윤영춘, 윤영규 등이 보인다.



윤동주 생가 기와 ...


윤동주 시인 생가의 기와.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보인다.(1920년대)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 졸업당시 모습(1941년)
 

*1941년 11월 20일에  쓴 친필 원고지(윤인석 씨 소장)

서시(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친구(정병욱 교수)에 의해 숨겨져 오다가 

      정음사에서 1948에 출간 -

 



*윤동주가 재학했던 일본 쿄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 교정의 시비 <序詩>

 

序詩

死ぬ日まで天を仰ぎ

一点の恥もないことを

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を痛めた。

星をうたう心で

すべての死んでい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えられた道を

步んでい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



(*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윤동주의 일본어 번역 序詩 /일본 기독교 출판국 발간)

*윤동주 시비 뒷면 (同志社 大學 교정 /2007. 6. 27)


* 위 윤동주 시비의 옆 모습


*윤동주의 詩碑(좌측)가 있는 곳에 윤동주의 선배 정지용의 詩碑(우측)가 

2005년 10월 30일에 충북 옥천군과 정지용기념사업회에 의하여 건립 되었다.

 


*鄭芝溶의 詩碑 (충북 玉川출신인 정지용은 1923년에서 1929년까지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서 修學 하였다. 


*윤동주의 詩碑 (序詩가 한글과 일본어 번역이 음각되어 있다


*이부키 고(伊吹郷 )라는 자가 일본어로 번역한 윤동주의 서시:

  왜곡된 번역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윤동주의 시비에도 '이부키 고'의 번역시가 각인되었음)


* 도시샤 대학 기획홍보과에서 발행한 윤동주의 시비에 대한 안내 책자(2005년)

 

*위 안내 책자 뒷면 표지 ( 대학동기생들과  宇治川에  놀러 갔을때의 모습/1943)

* 도시샤  대학의 교정(일본에서는 자전거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 (2007. 6. 27 )


*도시샤 대학의 교문 (2007. 6. 27)

 

* 도시샤 대학의 교정(2007. 6. 27)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있어서 일까

 

* 天과 空의 개념의 차이는 무엇인가?

  <天と風と星と詩>과 <空と風と星と詩>...

   우리가 바라보는 단지 푸른 하늘(空/소라)일까, 아니면

   天/뎬 일까?

 

* "모든 죽어가는 것(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을 사랑해야지"를

  왜?  '모든 살아 있는 것(生きとし生けるもの)을 사랑해야지'

  라고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번역 하였을까?


일본 제국주의가 그 마지막 기세를 떨치던 어두운 시절, 당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 다니던 청년 시인 윤동주가 차디찬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다행히 그의 유고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그의 친구(정병욱 교수)의 정성으로 마루 밑에 숨겨져 있다가 이후 출간되지 않았다면, 이 아름다운 민족시인 윤동주의 이름 석자는 세월 속에 그냥 묻혀 잊혀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그의 시 가운데서도 특별히 '서시(序詩)'가 한국인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가 다녔던 모교, 연세대와 일본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캠퍼스 내에 시비로 각인돼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음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 교토조형예술대학의 새로운 시비
ⓒ2006 홍이표



게다가 최근에는 윤동주가 마지막까지 살던 아파트가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에도 그의 시비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한국일보>, 6월 27일자). 최근 나는 처가집이 있는 고베를 방문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그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도시샤 대학에 이미 세워졌고, 이번에 또 다시 세워진 시비에는 터무니없는 오역이 연속해서 새겨졌음을 발견하니 그 기쁨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세워진 두 개의 시비는 윤동주와 그의 시를 오히려 왜곡하는 결과를 빚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문제의 주인공은 1984년 윤동주의 번역 시집을 출간한 이부키 고(伊吹 郷)씨이다. 그가 번역한 윤동주의 '서시'는 현재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인 <신편 현대문>에 실린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에세이 '윤동주'에 전문 번역본이 인용돼 있다.

또한 윤동주가 다닌 도시샤 대학과 최근의 교토조형예술대학에도 그 시가 새겨져 있으며, 최근 소설가 공지영씨와 일본인 작가 츠지 히토나리가 함께 쓴 한일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도 그의 번역이 원용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부키씨의 윤동주 시 번역은 지금 거의 다 일본어역의 정본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晒らされる。

(이부키 고, 伊吹郷 訳) 

이부키씨의 '서시' 번역... 의도적으로 윤색된 오역

 
▲ 1996년 2월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지기 직전 일본 기독교 출판사에서는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윤동주 시집과 평전을 출간했다. 이부키씨가 번역한 시집의 제목은 <空と風と星と詩>라고 되어 있다.
ⓒ2006 일본 기독교 출판국

하지만 이부키씨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신념이 깊게 배어있는 윤동주 시의 양 축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왜곡하기까지 하였다.

'서시'의 첫 줄부터 살펴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에서 윤동주 시인은 물리적 개념의 하늘(Sky)을 막연히 바라봤던 것이 아니다. 거기서 '하늘'은 그의 맘 속에 뿌리내린 깊은 신앙의 고향을 의미한다.

이부키씨가 이것을 '소라(空)'라고 번역했으니 마땅히 일본의 기독교회가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주기도문의 하늘, '덴(天)'으로 표현해야 한다. 또한 영어의 경우에도 '스카이(Sky)'가 아닌 '헤븐(Heaven)'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 한글에서는 '하늘'에다 '님'을 붙여 '하늘님' 혹은 '하느님'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다.

그렇듯 우리 말 '하늘'은 그 자체로서 깊은 종교성을 함축하고 있지만, 일본어의 경우, '소라(空)'에 님(사마, 樣)을 붙이면 '소라사마(空樣)'인데 그런 말은 없어서 매우 어색해진다. 따라서 일본 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 소라(空) 대신 "'하늘(天)'에 계시는"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윤동주는 어떤 사람인가? 한국의
갈릴리 땅 같았던 만주 용정에 나고 자란 그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이 조화된 풍토 속에서 성장했다. 윤동주의 생가에 가면 직접 구운 기왓장 하나에도 십자가와 석삼자(삼위일체), 그리고 태극문양을 함께 새겨 넣었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사랑은 그의 뿌리였으며 그 중심에는 공허한 하늘이 아닌 신앙으로서의 하늘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소라(空)' 대신 '덴(天)'을 써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오역은 더욱 치명적이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다짐을 "한 점 치욕(恥辱)이 없기를"이라고 옮긴 것이다. 여기서 윤동주 시의 신앙적, 민족적 지조와 양심을 완전히 훼손하고 있다.

이국(異國) 혹은, 이민족(異民族)으로 인해 어떤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결코 하나님과 민족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이 다짐이, 마치 압제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안 생기게 해달라고 빌기라도 하듯이 번역한 것이다.

이로써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무사안일을 소망하는 구차한 시처럼 바뀌고 말았다. 만약 시인이 그러한 옹졸한 자세로 살았다면, 27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그의 마지막 삶의 행적은 쉽게 설명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동주 시인은 "모든 죽어가는 것(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을 사랑해야지"라며 읊고 있다. 그는 점점 더 가혹해지는 민족과 세계민중의 기막힌 수난을 자신의 실존적인 아픔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목도 이부키씨의 번역에는 문제가 많다. 그는 이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生きとし生けるもの)을 사랑해야지' 라며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문학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교수도 '서시'의 이부키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윤동주가 서시를 쓴 당시 일본
군국주의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고, 조선인의 말과 민족 옷, 생활풍습, 이름 등 민족문화의 모든 것이 '죽어가는' 시대였다.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외친 그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당연히 심히 증오했을 것이다. 이부키의 번역은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도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이 돼버리지 않을까?"(<한겨레신문> 6월 16일자)

또 연세대의 정현기 교수는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면서 그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제3자에 의해 윤색된 1차 사료(일기, 편지 등)는 신뢰하지 않으며 연구에 가급적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듯 의도적으로 윤색된 오역은 외면 받는 역사 사료와 그 무엇이 다를까?

▲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일제의 고문에 의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 광경(1945년 3월 6일 용정 자택)
ⓒ2006 독립기념관

'서시'의 잘못된 번역... 오해와 대립만 심화시켜

최근 재일교포학자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는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한 일본인 문학가의 개인적 정서로 인해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번역이라는 행위가 타자간의 상호이해를 증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오해와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실례가 바로 이부키의 번역에 있다"(<한겨레신문> 7월 14일자 '모어'라는 감옥)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새롭게 세워진 윤동주 시비 위의 이부키 역 '서시'들 또한 계속해서 오해의 또 다른 실타래로 이어져 갈까봐 걱정하게 된다.

이 문제의 한가운데는 윤동주의 '저항시인으로서의 면모'와 '보편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사랑'이라는 두 시각이 충돌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윤동주의 서시는 이미 기독교 신앙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민족에 대한 애환이라는 특수한 가치가 동시에 내재되어 융합된 역설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만 강조할 수도, 누락시킬 수도 없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 시의 원문이 왜곡됐는지의 여부인데, 심각한 오역이 일본에서 정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렇듯 윤동주의 시를 바로 옮겨 쓰기 위해서는 그의 시 세계의 두 가지 체험과 가치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즉 식민지 수난의 민족 일원으로서의 실존적인 고통 체험과 거기에 저항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하고 결단할 수 있게 뒷받침해주었던 기독교 신앙의 체험이다.

물론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며 그 폭을 확대시키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겠으나, 한 일본인 문인의 옹졸한 의도는 시인 윤동주의 신앙과 정신세계를 적잖이 왜곡시키고, 교묘한 은폐의 의도로 얼룩진 윤동주의 '서시'를 일본인들에게 전파하고 말았다.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생애 흔적

1942년 6월 3일, 일본 도쿄에서, 마지막 작품 '쉽게 씌여진 시'를 씀

19942년 7월, 간도 용정 고향집을 마지막으로 방문.

1942년 10월 1일, 교토로 옮겨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편입.

1943년 7월, 일경에 의해 체포됨.

1945년 2월 16일, 의문의 주사를 맞던 중, 옥사함.

1946년 7월, <경향신문>에 유작 <쉽게 씌여진 시>가 발표.

이번에 시비가 새롭게 세워진 곳은 시인의 도시샤 대학 유학시절 자취방이었던 다케다(武田) 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창작의 열정을 꽃피웠던 마지막 처소였다. 시인은 이곳에서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의 굴레가 씌워져 1943년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5년 2월 알 수 없는 이유로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당시 함께 체포돼 역시 옥사한 시인의 고종 사촌 송몽규를 면회한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매일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았다고 증언한 것으로 밝힌 바 있어 일제의 악랄한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설도 있다.

그가 마지막 삶을 살았던 일본 교토의 한 변두리에 그를 기념하는 시비가 또다시 세워진다는 것은 정말 반갑고 기쁜 일이다. 그래서 나도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잰걸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하지만 시비를 지켜보던 중, "윤동주가 점점 상업화 되어가는 것 같다"며 무심코 내뱉은 아내 미나꼬의 한 마디는 내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다.

윤동주는 어느새 교토지역의 관광자원으로 인식되고, 도시샤, 교토조형예술대학 등의 학교 홍보용 소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최근에는 인근 리츠메이칸 대학의 교수도 새로운 시비 건립 계획을 발표해 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는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신앙,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전제되었다 기 보다는 무조건 시비만 세우고 보자는 식의 성급한 도구적 논리가 앞선 것 같다.

이미 1995년, 구라타 마사히코, 한석희 선생 등, 일본 기독교 문인들이 뜻을 모아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시집을 새롭게 펴내어 이부키씨의 시집 <空と風と星と詩>에 반박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오역들이 모두 고쳐져 새롭게 세상에 나온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부키씨의 번역이 새 시비 위에 버젓이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씁쓸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序詩

死ぬ日まで天を仰ぎ

一点の恥もないことを

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を痛めた。

星をうたう心で

すべての死んでい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えられた道を

歩んでい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

(일본 기독교 출판국. 日本キリスト敎出版局)

나는 교토 변두리에 세워진 새로운 시비 앞에서, 60여 년 전 조국의 하늘을 그리워했을 윤동주 시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세워진 시비 위에 그의 마지막 유작 <쉽게 씌여진 시(詩)>가 새겨졌어야 한다는 깊은 아쉬움을 지금까지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쉽게 씌어진 詩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握手).

윤동주 육필원고 갖고 월남한 여동생

"당시엔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죠"

6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많이 잊힌 상태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압정은 간교하고 잔혹했다. 모국어(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급기야 죽음까지 당한 윤동주 시인. 지난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다.

그는 정확하게 27년 2개월 동안 살았다. 그것도 죽기 2년 동안 감옥에 갇혔으니,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윤동주의 시는 전부 25살 이전에 쓰인 시들이다. 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고, 그가 쓴 <서시(序詩)>는 가장 애송하는 시다.

남의 나라 땅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가 2살 되던 해(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3·1만세운동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북간도에서도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윤동주의 형제 3남1녀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윤혜원(84)씨가 20여 년 동안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3·1만세운동 88주년을 맞아, 여동생의 증언을 윤동주의 생애를 중심으로 3회에 걸쳐 들어본다. <편집자 주>
▲ 윤동주의 연희전문 졸업사진
시인들은 말한다. '시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시인의 모국어다.

그렇다. 시인은 모국어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시를 쓴다. 모국어와 함께 태어나서 한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 시인에게 모국어는 '또 하나의 목숨'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모국어(한글)로 시를 쓰면 죄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죄로 감옥에 가고, 급기야 죽음까지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일본 유학 중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한 윤동주 시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주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였다.

죽은 다음에 시인으로 불린 윤동주

1945년 2월,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조선 출신의 한 젊은이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소리를 지른 후에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 시인이었다. 정확하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였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 시인' 윤동주로 한국인의 가슴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할 당시엔 아무도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문 고등학생 교복차림으로, 학사모를 쓴 대학생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윤동주가 시인의 호칭을 얻은 것은 옥사하여 무덤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그의 묘비에 '시인 윤동주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새겨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8)이 "내 손자, 동주의 일생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삶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런 묘비를 만든 것이다.

이렇듯 윤동주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비극적인 생애는 그의 고고한 시편들과 함께 윤동주를 순교자적인 이미지로 깊게 각인시켰다. 그가 시인으로 데뷔한 일도 없고 시집 한 권 남기지 않았지만 한국현대시 100년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명이 됐다. 또한 그의 시비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세워질 정도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됐다.

윤동주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려고 시도했던 적은 있다. 본격적인 유학생활이었던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다.

그러나 은사인 이양하 교수 등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자 자진해서 시집출간을 포기했다. 대신 원고지에 펜으로 써서 3부를 묶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바로 그 시 묶음의 서문 격으로 쓴 시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의 애송시가 된 <서시(序詩)>다.

▲ 윤동주의 <서시> 육필 원고
윤동주의 이미지는 왜 순결할까?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그의 순결한 이미지가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가 일본경찰에 체포될 당시까지 세상사에 물들지 않은 학생신분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윤동주 시인의 순절(殉節)한 이미지를 오랫동안 명토 박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있는 여동생 윤혜원(84, 시드니우리교회 권사)씨한테 있다.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짧은 기간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해방공간의 혼란스런 시기에 북간도에서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기와 중기의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되고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가 더욱 풍성해지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주오빠 방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대학노트 3권을 아버지의 권유로 가져왔는데, 그 당시엔 그 노트에 담긴 시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고 윤씨는 회상한다.

그 대학노트에 담긴 윤동주의 걸작들이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1948년 초간본 31편에 들어있지 않은 시편들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절반 이상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겨 월남했던 것이다.

이렇듯 큰일을 한 윤혜원씨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피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 "동주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게 일관된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윤혜원씨는 동갑내기남편 오형범(84.시드니우리교회 장로)씨와 함께 서울에서 부산-필리핀-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그들이 피했던 대상은 언론뿐만 아니라 수많은 윤동주 연구가들도 포함된다. 1986년, 시드니에 정착해서 21년째 살고 있는 윤씨는 호주에서조차 은둔생활을 계속했다.

침통한 표정의 윤동주 "그 분이 글쎄..."

▲ 은진중학 시절. 뒷줄 맨왼쪽이 윤동주, 가운데가 문익환 목사.
윤혜원씨는 1924년 생으로 동주오빠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모습은 동주 오빠랑 문익환 오빠, 고종사촌인 송몽규 오빠 등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다. 다음은 윤혜원씨의 회고다.

나중에 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서 젖이 부족하자 같은 해에 출생한 동주 오빠와 문익환 오빠가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나중에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를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이건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인데, 동주오빠는 11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서울로부터 정기구독 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의 단짝이었던 문익환 오빠는 광명학교 시절 명동교회의 유년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당시 유년주일학교 학생이어서 문익환 오빠의 지도로 성경이야기도 듣고 찬송가도 배웠다.

또한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가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하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교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의 송별회 사진. 사진속 도시샤대학 동창들은 윤동주를 꿈 많고 수줍음타는 청년으로 회고했다.
윤동주가 부른 마지막 노래는 '아리랑'

2006년 10월 어느 날, 기자는 윤혜원씨의 남편 오형범씨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가 "윤동주 시인의 최후의 사진이 공개됐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현대문학> 9월호에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 재학시절에 찍은 윤동주 사진과 사진설명을 쓴 일본여성의 기고문이 함께 실렸다"고 전해주었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우지강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오형범씨와 함께 기사를 읽어보니,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앞에서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대 영문과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윤혜원씨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랑이 오빠가 부른 마지막 노래일 것 같다. 그 후엔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었으니..."라며 윤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은 사진에 대해서 설명한 기타지마 마리코(83)의 글이다.

'사진은 1943년 초여름, 교토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함께 도시샤대학에 다니던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이 담긴 기념사진이다. 그 중에 수줍은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이 있다. 이 남학생이 한국에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윤동주 시인이다.

강변에서 식사를 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 한 곡 불러주지 않겠어?'라는 급우의 부탁에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윤동주가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급우 전원이 자신의 송별회에 참석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약 한 달 뒤인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2년 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의 사망원인은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그해 같은 혐의로 같은 형무소에서 고종사촌형인 송몽규(교토제대 재학 중 윤동주와 비슷한 시점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10일 사망)도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사했다.

죽기 직전 친척들에게 전한 송몽규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 모두 매일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윤동주의 유해는 북간도에서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의해 화장되었다. 유골함에 다 담지 못한 윤동주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일해협에 뿌려졌다고 한다.

▲ 윤동주의 고향 룽징에서의 장례식 장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윤동주의 시들

윤혜원씨에게 "오빠의 시 중에서 어떤 시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망설임 없이 <서시(序詩)>를 꼽는다. "나라를 잃은 젊은이의 깊은 고뇌와 성찰이 순수한 모국어로 담겼고, 거기에다 시인의 결연한 의지가 읽혀서 늘 숙연해진다"고 말한다.

윤씨는 이어서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생활했던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는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면서 좀처럼 하지 않는 윤동주 시에 대한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광명학교 시절, 윤동주 시인과 2년 동안 한 방에서 기거했던 김태균(전 경기대 교수, 현재 캐나다 거주)씨의 다음과 같은 언급도 윤혜원씨의 소견과 일맥상통한다.

"윤동주의 시 전반을 걸쳐서 볼 때 그는 '조선독립운동'이라는 죄명으로 죽었지만 그의 시에는 육사에게서 볼 수 있는 칼날 같은 투지라든가, 만해에게서 볼 수 있는 강철 같은 주의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는 그것이 곧 그의 생활이고, 그리고 그것들의 바탕은 서정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랑이 생기고, 눈물 나는 참회가 생기고,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 생긴다. 그의 시어는 대단히 평이하지만 그의 시심에 한 발짝 접근하면 우리는 옷깃을 여미게 된다."

 

 

 

"평생 날 귀찮게 하는 오빠가 가끔은 미워요"

 

 

[3.1절 특집]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 윤혜원씨와의 13년에 걸친 인터뷰 ②

 

     윤여문(sydyoon) 기자   
▲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 할머니가 지난달 중순 중국 방문을 앞두고 남편 오형범씨와 함께 찍은 사진.
ⓒ 윤여문
시베리아 동쪽 아무르 강 주변에서 호주 동부해안을 오고가는 철새, 도요새는 몸집이 작다. 멀리 날아야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북반구와 남반부를 횡단하는 도요새는 한국 서해안에 잠깐 들려서 지친 날개를 쉬게 한다. 또한 1만㎞ 이상을 날아야 하는 긴 여정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가꾼다. 혼자 날아야하기 때문이다.

지구남반부의 대표적인 철새도래지인 호주 동부해안에 도요새만큼이나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살고 있다. 철새발원지인 아무르 강 저 아래쪽에 위치한 북간도를 출발하여, 할머니는 60여년의 긴 여정 끝에 아름다운 물항(港) 시드니에 정착했다.

나라를 잃은 유민들이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면서 고단한 삶을 꾸렸던 북간도. 북간도가 낳은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가 뜬금없이 시드니로 온 까닭이 도요새를 닮은 그 할머니에게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윤동주 시인 만큼이나 정갈하게 한 평생을 살아오신 할머니가 2005년부터 아프시다. 심장수술과 뇌수술을 몇 차례씩 할 정도로 많이 아프시다. 그런 할머니가 지난 2월 중순 중국 길림성 룽징(龍井)으로 떠났다. 떠나면서 "이번이 마지막 중국여행일 것 같다"고 쓸쓸하게 말했다.

윤동주 시인의 무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8회째를 맞고 있는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10여 년 동안 윤동주 무덤의 봉분을 새로 단장하고, 남편과 함께 <윤동주문학상>을 손수 제정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할머니가 거주하는 시드니가 윤동주 연구의 중심지(?)가 된 느낌이다. 1995년에 열린 윤동주 50주기를 비롯하여, 2005년의 60주기 추모행사가 가장 큰 규모로 열린 곳도 시드니였다. 또한 윤동주에 관한 각종 소식이 전 세계로부터 시드니로 전해진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84. 시드니우리교회 권사)씨가 바로 그 할머니다. 윤씨는 윤동주의 형제 3남1녀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혈육이다. 일곱 살 터울이지만 바로 밑의 동생이어서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오빠의 짧은 생애를 곁에서 지켜본 장본인이기도 하다.

윤혜원씨한테 지난 13년 동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를 들어왔다. 가끔은 입을 꼭 다문 대학생, 흑백사진 속의 윤동주가 끼어들어 자기가 쓴 시를 읽어주기도 했다. 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날.

지난 2월 16일은 그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옥사한 62주기였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던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간 윤동주, 그가 '영원한 청년시인'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 경향신문에 발표된 <쉽게 쓰여진 시>.
2월 16일 밤, 시드니에 거주하는 몇몇 한인동포 문인들이 스트라스필드의 한 카페에 모여서 윤동주를 추모하면서 그의 시를 낭송했다. 낭송된 시 중에는 그의 마지막 작품 '쉽게 쓰여진 시'도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시를 낭송하다보니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구절이 목에 걸렸다. 시대를 뛰어넘는 고뇌이기 때문이다. 카페의 뜰로 나가서 지구남반부의 별들이 총총하게 박혀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고뇌를 되뇌어보았다.

60여 년 전, 그 당시의 민족적 절망과 뿌리 뽑힌 조선백성의 고단한 삶이 흑백영화 장면들처럼 스쳤다. 장장 13년 동안 들어왔던 얘기들이 영화장면처럼 되살아난 것. 그럼, 지금부터 6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증언해준 윤혜원씨를 소개한다.

철들지 않는 84세의 '윤少女'

"마음에 티끌 하나 없는 만년 소녀다." 윤혜원(84)씨를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하물며 6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남편 오형범(84. 시드니우리교회 장로)씨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도무지 철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윤혜원씨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항상 똑 같은 말로 자신을 소개한다. "윤동주 시인 동생이고요, 나이는 열여덟 살!"하면서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을 웃는다.

그래서 "나이 드는 게 싫으시냐?"고 물어보면 "동주 오빠가 나이 먹는 걸 스톱 했으니까 나도 덩달아서 중단시켜버린 거야. 동생이 오빠보다 더 늙으면 안 되잖아. 난 늙으면 안돼!"

기자는 같은 파평 윤씨라는 이유로 윤혜원씨 가족들과 가까운 친척처럼 지낸다. 윤씨의 80세 생일날, 기자는 '윤소녀(尹少女)'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윤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별명 값으로 한 턱 내겠다"며 북간도식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거의 소금수준인 짜디짠 달걀찜(뒷맛이 아주 고소하다)과 국물이 거의 없는 된장찌개, 하얀 무김치와 옥수수 등이 식탁에 올랐다. "음식이 짜다"고 했더니, "일제 강점기의 북간도 음식이니 그냥 참고 먹어 달라"면서 "우린 평생 이렇게 먹었다"고 말했다.

부엌 쪽으로 식탁이 놓여있는 거실의 벽에는 윤동주 관련 사진들이 걸려있다. 그 유명한 학사모 사진 주변에는 해마다 중국 연길에서 열리는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 문학상> 행사사진이 여러 장 걸려있다.

지난 2005년 12월 박철 시인이 한국에서 방문했을 때, 그에게 고구마와 옥수수를 삶아주면서 "마치 오빠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면서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오누이처럼 도란거렸다. 박철 시인의 '고요한 분위기'가 오빠의 생전모습으로 오버랩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항상 윤동주 분위기에 묻혀서 지내는 탓인지, 윤혜원씨는 오빠에 대해서 얘기할 때 마치 오빠 옆에 앉아서 얘기하듯 한다. "항상 골똘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어, 그러다가 나를 만나면 장난을 걸어오고... 그러니 나한테는 그냥 오빠이지 뭐!" 이런 식이다.

13년 동안 진행된 인터뷰

윤혜원씨와의 인터뷰는 주로 윤씨가 윤동주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이나 중국, 일본을 다녀온 다음이나 윤동주에 관한 새로운 뉴스가 전해졌을 때 이루어졌다. 만나는 장소는 대부분 윤씨의 집이나 윤씨가 출석하는 교회, 그리고 호주한인동포 문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철마다 한두 차례 만났으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는 거의 다 들은 셈이다. 그래서일까? 윤씨는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쯤이면 "우리 윤동주 얘기 그만하자!"면서 화제를 바꾸곤 했다. 대개는 가슴 아픈 대목으로 넘어가면서.

사실 윤동주 스토리는 여러 권의 <윤동주 평전>과 관련기사 등으로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하여, 오늘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 그중에서도 답변하기 껄끄러운 내용 중심으로 13년 동안 이어져온 인터뷰를 1문1답 형식으로 재구성 해본다. 인터뷰엔 꼭 남편 오형범씨가 동석했다. 그의 답변도 함께 담았다.

▲ 작년 연변에서 열린 제7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 장면.
-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지금까지 오빠가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아요. 동주오빠는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늘 무슨 생각인가에 골똘히 빠져있고 밤새워 책을 읽고 뭔가를 대학노트에 쓰던 사람이었으니 삶의 모습이 바뀐들 얼마나 바뀌었겠어요. 다만 교사나 목사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시를 쓰는 조용한 모습의 교사나 목사말예요. 단짝이었던 문익환 목사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한국의 한 시인단체가 매년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20년 가까이 윤동주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서시(序詩)'가 가장 애송되는 시로 선정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싶지만, 한동안은 잘 믿기지 않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오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빠의 고결한 성품이나,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가 읽히는 <서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일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과대평가 됐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윤혜원) "나는 문학의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지만 그런 평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게 평가하면 그게 어디 문학작품인가요? 종교의 경전쯤 되겠지요. 또한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오형범) "그렇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이 세상에 머문 기간은 정확하게 27년 2개월입니다. 1943년 7월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 '쉽게 쓰여진 시'인데 그 시를 1942년 6월 3일에 썼습니다. 정확하게 25살 때였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시가 모두 25살 이전에 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대평가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동주오빠가 미워져요"

-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뚜렷한 항일활동의 흔적이 없는데.
(윤혜원)"당시의 북간도는 항일운동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난 어리고 여자라서(?) 잘 몰랐지만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40년 이후엔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됐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오빠라고 해서 뭐가 달랐겠습니까. 나는 지금도 오빠의 꼭 다문 입술과 고뇌에 찬 표정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다만 오빠가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소극적인 성격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오형범)"적극적인 항일활동은 아니었지만 삼엄한 분위기의 일본에서 계속해서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것은 윤동주 항일정신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아닐까요? 특히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고종사촌 송몽규와는 운명적인 삶을 공유했기 때문에(동갑내기로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같은 감옥에서 사망함) 항일에 대한 많은 교감이 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는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사람입니다."

-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가 모두 시인인데 왜 시를 쓰지 않는지요?
"그게 참 속상해요. 남자들은 다 똑똑하고 잘 생겼는데, 왜 나만 시도 못 쓰고 못난이로 태어났는지.(웃음) 그런데 동주오빠가 나에게 아동 문학지를 읽게 하고 동화를 들려준 것은 나의 글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 재작년 연길의 동포학생들이 연 윤동주 시인 60주기 행사.
- 그동안 1942년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졌다가 1942년 6월 3일 쓴 '쉽게 쓰여진 시'가 마지막 작품으로 정정됐는데.
(윤혜원)"'쉽게 쓰여진 시'가 오빠의 마지막 작품이라기보다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오빠는 그 시를 쓴 후에 바로 체포되어서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비록 감옥이지만 오빠가 2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을 리 만무입니다."

(오형범)"우리 부부가 1947년에 남쪽으로 내려오던중 청진에 머물다가 윤동주의 일본유학생 친구들인 박춘애와 김윤립을 만났는데, 그들이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시 한 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해방공간의 혼란이라서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시를 전해 받았다면 그게 마지막 작품이 됐을 텐데."

- 오빠가 가끔 미워진다고 말씀하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해준 것도 없이 나를 평생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웃음)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미워요. 눈치껏 일본경찰을 피해서 좀 더 일찍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를 썼겠습니까."

- 오빠의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빠도 자신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린다면, 오빠의 시를 읽으면서 문학의 향기에 젖어보기도 하고, 너나없이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빠의 동시를 많이 사랑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Y-Club / choic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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