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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작품

시인 김수영 / 삶과 작품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05.10|조회수1,102 목록 댓글 0

 

   시인 김수영(金洙暎) 

 



 

 

 

 

 

 

 

 

 

 

 


 

 

 

1. 출생및 성장

 

1921년 서울 출생
연희전문 영문과 중퇴
1945년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廷)의 노래' 발표 등단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펴낸 모더니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시 2편 수록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발행
1960년 4ㆍ19혁명 적극 지지, 참여시로 시풍 변모
1968년 평론가 이어령과 ‘순수-참여 문학’ 논쟁,
    6월 교통사고로 사망
1981년 <김수영 전집> 간행
2001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2. 활동 및 작품경향

 

1945년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
1949년 김경린(金璟麟), 박인환(朴寅煥) 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 모더니스트로 각광 받음.
1950년 6.25 발발 후 피난을 못한채 북한군에 징집, 포로가 되었다,
1952년 거제도 수용소에서 석방 됨.
1954년 주간 태평양, 평화신문에서 근무, 1955년 이후 자택서 
양계(養鷄)업을 하며 시작(詩作), 번역, 평론에 전념.
 
1950년대 :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 대표작 : <헬리콥터>, <폭포>, <눈>등. 1959년 그간의 발표작을 모은 시집 <달나라의 장난> 간행 및 제1회 시협(詩協)상 수상

 

4.19혁명 : 시의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쓰기 시작. 대표작 :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푸른 하늘을> 등. 혁명과 사회변화,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열망을 드러냄. 그는 지속적으로 사랑과 자유를 주제로 하는데, 자유는 그의 시적, 정치적 이상이고, 사랑은 그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인식론적인 사랑이다.

 

5.16 이후 : 군사정권 득세 이후, 자유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적(敵)'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연민, 탄식, 풍자 등을 작품화. 대표작 : <그 방을 생각하며>, <적> 등. 이후 그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노래한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등을 썼고,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 그 외 <시여, 침을 뱉어라>등의 평론을 통해 참여시와 시의 현대성을 주장.

 

사후 : <거대한 뿌리>(1974), <시여, 침을 뱉어라>(1975)를 비롯, 몇 권의 시선집과 산문집 발행. 1981년 민음사에서 두 권의 <김수영전집>이 간행 됨.

 

 

 

 

詩의 자유정신 김수영

 


1968년 6월15일은 한국 현대문학사에 비극의 먹구름이 낀 날이다.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현대시의 전위로 평가받는 시인 김수영씨가 귀갓길에 서울 공덕동에서 버스에 치여 쓰러진 것이 이날 자정께였다. 1921년생 동갑내기인 소설가 이병주와 광화문의 한 술집에서 언쟁을 벌이다 자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길이었다. 김수영은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8시 눈을 감았다.

39주기를 한달 앞둔 지난 16일 고인의 여동생 수명(73)씨와 함께 서울 도봉산국립공원내 '김수영 시비(詩碑)'를 찾았다. 비가 부슬부슬 뿌리고 있었다. 김수영 시인이 '움직이는 비애'라고 규정한 비였다. "비가 오고 있다/여보/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비' 첫 연)

그동안 언론에 등장하길 꺼리던 수명씨가 거센 빗줄기에 우산을 받쳐 쓴 채 오빠의 시비를 둘러본 데는 그만의 '움직이는 비애'가 작용했을 터였다. "오빠는 불이었어요. 자신을 활활 태웠으니까요. 그냥 시를 쓴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시에게 제물로 바쳤지요."

김수영의 시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사진처럼, 시란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고 작정한듯 '간단한 복장'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지나칠 만큼 진실과 정직을 시어로 삼았던 그는 타계하기 두달 전인 1968년 4월13일, 부산에서 열린 문학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발제하에 이렇게 일갈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의 명령형 종결 어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오빠가 가장 증오한 것은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의식이었지만 그것을 증오하고 비판하는 자신조차 거기에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었지요. 자신의 치부까지 시에 낱낱이 공개한 것은 그런 인식에 대한 반증이지요."

김수영의 문학정신은 자기 분열의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전달 과정을 통해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치열성에 있다. 술에 취하면 "난 거지로 살고 싶다"며 가족에게 땡깡을 부리거나, "알맹이는 이북으로 튀어버리고 이남엔 흑싸리 껍데기 개좆만 남았다"고 동료 문인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야, 너 딜레탕트지?"라며 이병주에게 시비를 걸었던 김수영.

그는 흔히 자유정신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4·19혁명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작품을 통해 혁명을 소리높여 찬양했고, 감격에 찬 어조로 희망을, 역사의 승리를 노래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조용히 개굴창에 넣고/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민주주의 첫 기둥을 세우고/쓰러진 성스러운 학생의 웅장한/기념탑을 세우자/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첫 연)

하지만 4·19묘역에 장식된 4·19 기념시 조형물에 김수영의 시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모순이자 시대의 불온이 아닌가. 김수영에게 시가 천직이었다면 번역과 양계는 그의 생활이었다. 그는 속물이라고 욕을 먹어가면서도 도봉산 기슭 냇골 근처의 선산에서 닭을 키웠다.

"오빠는 마포 서강에 살때도 틈만 나면 번역거리를 보자기에 싸들고 어머니의 농장이 있는 도봉산 자락으로 왔어요. 오빠가 오면 내가 쓰던 서쪽 방을 비워주곤 했는데…. 도봉산이 훤히 보이는 증조부 산소 아래에 서재를 꾸며주려고 했는데…."

집필실 출입을 누구에게도 금하던 김수영이었지만 수명씨만은 예외였다. 오빠는 동생을 누구보다 신뢰했다. 번역을 그만두어 용돈이 궁할 때면 언제나 누이를 찾아갔다. 술 외상값을 약속한 날에도 찾아갔고 통금시간이 지나 여관에서 자고 숙비 때문에 전화를 걸었고 통금위반으로 즉결재판소에서 전화를 할 때도 있었다.

시비를 둘러보고 내려오던 길에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농장터를 찾았다. 철공소로 변한 3000평 부지가 비를 맞고 있었다. "40주기를 맞는 내년에 민음사에서 육필 시집을 낼 계획입니다. 이미 원고를 넘긴 상태지요. 200편이 채 안되는 시편이지만 육필원고가 없는 것도 있어 아쉽네요."

육필 시집은 수명씨가 신문사나 출판사 캐비닛에 먼지를 둘러쓰고 들어 있던 원고들을 일일이 찾아내 보관하고 있었기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달말에 일본에서 김수영 시 전집이 나올 예정이에요. 과거에 '달나라 장난'이라는 시집이 일어로 번역된 적은 있었으나 전집은 처음이지요. 김수영 같은 시인은 아마 나오지 않을거예요. 유일한 시인이죠."

수명씨와 헤어질 즈음,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우산을 펼 때 김수영의 시가 후두둑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풀'일부)

<글·사진=정철훈 전문기자>


 

 

김수영 작품론('풀')

 풀과 바람은 대립과 호응 이중적 관계
 '순수' 와 '참여' 시대적 이분법 넘어서  

                 - 오형엽  (문학평론가ㆍ수원대 교수)

 

김 수 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풀’은 중요한 해석적 성과들을
많이 얻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듯하다.
이에 나름의 해석 하나를 제시해 보려 한다. ‘풀’은 표면 구조와 내면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둘이 균열과 모순을 안은 채 결합되어 있다.
이 두 구조 사이의 관계는 ‘풀’ 뿐만 아니라 김수영 시 전체의 비밀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먼저, 표면 구조를 살펴보자. ‘풀’과 ‘바람’은 대립 관계이다.
구체적인 근거는 일곱 번 반복되는 ‘보다’(비교격 조사)와 두 번 등장하는 ‘더’(강세 부사)이다.
‘바람’은 가해자이고 ‘풀’은 피해자이자 극복자인 듯이 보인다.
이 관계는 ‘눕는다/일어난다’ ‘운다/웃는다’를 대립(부정/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연결된다.

‘바람’을 ‘외세’ 혹은 ‘독재자’로, ‘풀’을 ‘민중’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풀’의 속성과 운명은 시의 공간에 내면화되어 존재의 정신적 영역까지 포괄하는 확장을 보여준다.
따라서 ‘풀’은 민중이나 시인을 포함한 존재 전체, 혹은 역사적 ‘주체’를 상징하고,
‘바람’은 이 ‘주체’에 가해지는 ‘바깥의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내면 구조를 살펴보자.
‘풀’과 ‘바람’은 호응 관계이다. 숨은 구조가 은연중에 노출되는 지점은 1연의 ‘나부껴’
(고통이 아닌 즐거움을 표현하는 동사)이다.
‘비’와 ‘동풍’은 ‘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물’과 ‘운동성’을 부여한다.
‘풀’은 ‘물기’를 머금어야 잘 자라며(따라서 ‘운다’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바람’에 흔들려야 뿌리를 튼튼히 만든다(따라서 ‘눕는다’도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바람’은 은총을 베푸는 자이고 ‘풀’은 수혜자가 된다.

이 관계는 ‘눕는다→일어난다’ ‘운다→웃는다’를 하나의 진행과정으로 해석하는 것과 연결된다.
‘풀’은 울어야 웃을 수 있으며, 누워야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풀’은 ‘주체’를, ‘바람’은 다른 세계에서 불어오는 ‘탈주체의 무의식적 잠재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이 다른 시 ‘절망’에서 말했듯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풀에게,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듯이
바람의 구원이 밀려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풀’은 표면 구조를 중심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내면 구조를 함께 살펴야
이 시가 주는 ‘은밀한 공감’이 해명될 수 있다.
그런데 표면 구조와 내면 구조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전자는 주로 참여시(민중시)의 관점과 관련되고, 후자는 순수시(실험시)의 관점과 관련된다.
‘참여/순수’의 이분법이 횡행하던 1960년대의 시단에서, 이 모순을 내포한 채 그것을
한 몸(시)에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한 것이 김수영의 시도였고, 이 시도가 농축되어
마지막 작품 ‘풀’에 녹아들었다.

그리하여 순수와 참여, 첨단과 정지, 해탈과 풍자 사이의 간극을 자신의 몸(시)으로
메우려 한 노력이야말로 김수영이 한국시에 남기고 간 중요한 자취이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혹은 시의 예술성과 사회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한
김수영의 시적 추구는 모순과 균열을 안은 채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교훈을 준다.

 

<황혼의 자유여행 / mckim41>

 

 

 

서랍속에 든 「불온시(不穩詩)」를 분석한다

― 김수영의「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읽고 
                / 이 어 령

 



   1. 문제의 발단

나는 지금 한 편의 시를 놓고 비평을 해야 할 입장에 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 명시들이 아직 시인의 서랍속에서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 내용들이 매우 '불온한 것'들이란 점만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지하의 이 보석들을 우리에게 귀뜸해준 것은 다름 아닌 시인 김수영 씨였다. 그는 사상계 1월호의 문화시평「지식인의 사회참여」에서 다음과 같은 고무적인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써 놓기만 하고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생각하며 고무를 받고 있다. 또한 신문사의 '신춘문예'의 응모작품 속에 끼어있던 '불온한' 내용의 시도 생각이 난다. 나의 상식으로는 내 작품이나 '불온한' 그 응모작품이 아무 거리낌없이 발표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현대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영광된 사회가 반드시 머지 않아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그는 '불온한 작품(시)들이 지금 땅을 덮고 하늘을 덮을 만큼 많으며, 그 안에 대문호(大文豪)와 대시인의 씨앗이 숨어 있다.' 는 데서 그 글의 종지부를 찍고 있다.

씨의 의견을 따른다면 오늘의 빛나는 그 한국시사(詩史)는 시인들의 서랍속에 갇쳐있고 미래의 그 희망 역시 활자화되지 않은 어느 퇴색한 원고지 위에서 동면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고 보면 비평가들의 관심과 그 발언 역시, 발표된 시작(詩作)보다는, 자연이 서랍속에서 망명중인 그 시인들의 풍토에 더 많은 악센트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이런 경우 우리가 김수영론을 쓴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고무적인 시 한편을 아무도 알 수 없는 그의 서랍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시는, 비평가도 독자도 모르는 지하도시에 있다. 우리가 발표가능한 김수영 씨의 시만을 논한다는 것은 어쩌면 바다의 표면에 나타난 빙산의 일각만을 지적하는 경우가 될지도 모른다. 손바닥만한 빙산이 실은 산덩이보다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의 말마따나 서랍속에 든 그 불온한 시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발표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현대사회'라고 할 수 있고, 그런 현대사회에서만이 비평가나 문학사가(文學史家)는 제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영광된 사회와 불온시의 관계

그러나 내가 지금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영영 햇볕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김수영 씨의 그 '서랍속의 시'가 아니다. 그 고무적인 명시보다도 몇 배나 더 알고 싶은 것은, 그리고 김수영 씨에게 더 묻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야 그 불온시들이 발표될 수 있는 현대사회가 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씨는 '그런 영광된 사회가 반드시 머지않아 올 거'라고, 뜨거운 말투로 예언하고 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봄이 오듯이, 그리고 생일날이 돌아오듯이 혹은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처럼 '영광된 사회'는 저절로 우리 곁에 강림하는 것일까? 참여의 본질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자는 것이며, 역사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처럼 만들어 가려는 데 있다. 그런데 김수영 씨의 글을 읽어보면 마치 그 영광된 사회는 타인의 프레센트처럼 시인에게 갖다주는 것으로 그려져있다. 그것이 김수영 씨를 비롯하여 최근 젊은 비평가들이 내세우고 있는 참여문학의 현주소이다.

만약에 불온한 시를 써서 책상서랍에 넣어두는 것이 시인의 사회참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골방속의 참여이며 베개 위와 잉크병 속에서의 반란이다. 참여하지 않은 것이나 타의에 의해 못한 것이나 똑같은 일이다. 독심기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가 참여를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분간할 길이 없다. 경우에 따라선 안한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더욱 나쁘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의 본질은 사회참여에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참여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 만약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러한 문학론이다. 그러나 문학을 참여라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은 조금도 역사에 참여한 일이 없다면, 그는 남과 자기를 동시에 속이는 거짓말쟁이다. 특히 참여파의 비평가들은 자기는 뒷전에서 팔짱끼고 시인이나 작가를 향해서만 참여를 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고 있다. 고양이에게 방울을 달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해놓고 자기는 뒷전에서 꼬리를 감춘 이솝우화의 그 불쌍한 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비법자(卑法者)들이다.

김수영 씨라고 핑계없는 무덤이 없으란 법은 업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변명을 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더 큰 원인으로 근대화해가는 자본주의의 고도한 위협의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고 조용한 파괴작업”이며 “유상무상의 정치권력의 탄압”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에비문화를 썼던 내 글에 대한 씨의 반론이 되는 골자이기도 하다.

김수영 씨는 「지식인의 사회참여」란 글의 전반부에선 한국의 문화인들이 본질적인 말을 못하고 외곽에서 맴도는 시평태도를 마땅치 않게 그리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의 글에서 내 글을 비판할 때는 “문화의 침묵”이 문화인 자신의 책임보다도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와 위정자들에게 있다고 한다. 이것은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씨 자신은 일간신문의 문화논설을 비판했던가? 김수영 씨의 논법대로 하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사회와 정치탓이라고 했어야 마땅하다.

결국 그 글에서 김수영 씨가 기대하고 있는 참여는 평화의 들판에서 꽃가지를 꺾자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위협이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니까 비로소 문화인의 참여가 의미 있는 것이며 비로소 강조되는 것이 아닐까? 우산은 비올 때 받으라고 있는 것이다. 탄압의 힘이 거대하고 민첩해서 옴짝달싹 못하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한 옆에서는 그 영광된 사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하기야 외부의 선물처럼 늘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그것을 믿어보자는 속셈인지는 몰라도 그렇다면 무엇을 하자고 참여론을 내세우는지 궁금하다. 참여론자는 “영광된 사회”가 와서 서랍속에 보류된 자신의 불온한 시를 해방시켜줄 것을 원하고 있는, 예술이 아니라 거꾸로 그 불온한 시가 영광된 사회를 이루도록 행사시키는 데서 그 의미를 발견하는 일종의 전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된 사회가 왔을 때는 이미 그러한 불온시는 발표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발표가 허락될 순간, 이미 발표할만한 가치를 상실해버리는 것이 바로 “참여의 운명”이기도 하다. 참여의 시가 “시공을 초월한 영원성”을 부정하는 것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땅을 덮고 하늘을 덮을 만큼' 많다는 그 지하의 시인들이 개선나팔을 불고 시의 대지에 군림할 수 있는 날, 그들은 과연 그 사회에서 행복을 누릴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해방직후나 4.19 직후의 경우처럼 쓰러진 독재자의 동상이나 끌고다니던 그런 참여론자라면 몰라도 진정한 참여시인들은, 다시 외로움속에서 또다른 “불온시”를 마련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역사와 사회이든지 완제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책상서랍안에서만 불온시를 쓸 수 있는 참여시인들은 바로 해방이 되어야 일제를 규탄하는 참여시를 쓰고, 이승만씨의 독재가 쓰러지고 난 다음에야, 독재자의 빈 의자에 돌을 던지는 자들이다. 참여시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역사의 전리품을 가로 채가는 '동물원의 사냥꾼'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 같다. 참여론자는 역사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의 입장에 서는 사람이다. 내가 신문에 「누가 그 조종을 울리는가」의 시평을 쓴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3. 시의 가치관

두 번째의 궁금증은 불온시가 과연 좋은 시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정부의 문화 검열자들만이 불온시를 경계한다고 생각해선 큰 잘못이다.

정치적 목적 때문에 불온시를 경계하는 측면과 문화적 목적 때문에 그런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또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먼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같은 탄압을 받고 있는 똑같은 피해자라 해도 불온시에 덮어놓고 월계관을 씌워줄 수는 없다. 정치적인 입장보다도 우리는 문화적 입장에서 더욱 그러한 불온시를 경계해야 될 경우가 많다. 이미 C지의 시평란에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시는 정치에 의해서 타살되는 것 못지않게 시인 스스로의 손에 의해서 자살을 당하는 위기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는 벌써 우리의 시단(詩壇)과 평단(評壇)을 휩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경향이다.

'불온시=명시'라는 도식적인 비평기준이 최근 1-2년 동안 한국평단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찬탈자들은 으레 사회참여의 군기를 앞세우고 있다. 신문지상에 발표된 시 월평란 중에는 그것이 사회의 가난을, 정치적 폭력을 그리고 민족주체성의 상실을 정면에서 고발했기 때문에 훌륭한 시라는 논법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반면에 그 시는 심미적이고 전원적이고 역사와 관계없는 것을 노래불렀기 때문에 단순한 언어의 희롱이며 이를테면 현실에 초월한 시라고 붉은 줄을 치고 있다. 이와 같이 참여론자의 횡포야말로 관의 검열자보다도 훨씬 시 그 자체를 본질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경향이다.

필요한 시가 곧 좋은 시는 아니다. 정부의 실정과 폭력을 신랄하게 비판한 야당의원들의 발언은 적어도 김수영 씨나 사회참여파 시인들의 시보다는 훨씬 더 '불온하고' 정치권력의 독재를 막는 데 '필요'한 언어들이다. 그러나 누구도 국회의 속기록을 시집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물론, 부정과 부패를 향한 항거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리고 어용시인들이 팔뚝을 걷어부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선 용기있고 양심있는, 그 참여의 목소리가 그지없이 반갑게 들린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황이 생활의 운명처럼 되어버린 그러한 시대에서는 시의 천재적 재능보다도 우직한 용기가 더 절실히 요청된다. 하지만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시가 동원되고 있다는 면에선 어용시나 참여시는 핏줄이 같은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다같이 시를 시로서 보려하지 않고 정치사회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본다.

시의 가치가 사회개량의 효과면에서만 논의될 수는 없다.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김수영 씨는 말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무식한 위정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식하다고 생각하는 진보적인 시인과 비평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은 시를 마치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써먹는 것'이고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데모대의 플랭카드에 쓰인 구호나 격문처럼 목적이 달성되면 시의 기능도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의 언어를 사회와 역사를 뜯어 고치고 개혁하는 무슨 망치나 무슨 불도우저나 무슨 다이너마이트 같은 연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좀더 어려운 말로 고쳐 말하자면 일부 참여파 시인들은 시적 진술을 산문의 진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김수영 씨가 동경하고 있는 그 불온시들이 대체로 어떠한 성질과 어떠한 형식으로 쓰인 시인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오히려 지상에 발표된 상징적인 난해시보다는 서랍속에 숨겨진 불온시의 뜻을 추측하는 편이 훨씬 더 쉬운 일이다.

오늘의 이 상황속에서 직접 발표하기를 꺼리는 시라면, 즉 검열자의 눈치를 정면에서 살펴봐야만 하는 시라면 첫째, 그것은 산문적인 형식으로 쓰여진 시라는 것과 둘째, 시사성을 띠는 것이라는 것과 셋째, 오늘의 빤하기 짝이 없는 그 문화검열자의 마음을 뒤집어 놓은 내용이라는 점이다. 즉 정치사회 시평과 가장 유사한 서술방법을 택한 시일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 시의 어휘들은 신문사설이나, 학생들의 웅변대회 원고에 사용된 그런 언어처럼 음영이 없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은 숨겨져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 언어의 지형들은 우리 눈앞에 있다. 서랍속의 불온시를 알려면 오늘날의 정치사회의 현실이라는 그 지형을 들여다보면 된다. 단 지형의 글자는 도장과 마찬가지로 반대로 새겨진 문자이므로, 불온시를 알려면 그 글자를 뒤집어서 보면 된다. 그들의 시는 독자적인 자기문법 밑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정황과 대면해 있기 때문에, 시의 지형 역시 정치와 사회문제의 그 외부에 보관되어 있다.

정치사회와 예술의 상관성이 소설이라면 또 문제가 다르다. 그러나 시는 사회의 상황을 비추는 거울로서는 만족될 수 없는 예술이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시의 언어는 기록적인 것을 피한다. 근본적으로 메타포리컬한 것이며 그 의미 역시 복합성을 띄운 것이기 때문에, 음악이나 회화에 보다 더 가깝다. 정치권력이 직접적으로 개재하기 어려운 것이 시의 언어이며, 그 본질적애(愛)인 미학이 지니고 있는 특성인 것이다.

한용운씨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쓰듯 시를 쓰지 않았다. 조국은 하나의 애인이며 상실된 조국은 이별이다. 그가 뜻하는 님은 여인이며 동시에 조국이며 조국이 동시에 생명인 그러한 '님'이다. 한용운의 '님'은 산문적 차원에서 부르는 플래트한 '님'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일본의 관헌들은 기미독립선언문의 언어를 체포할 수는 있지만, 한용운의 '님'은 감옥에 집어넣기 어려운 것이다. 시인들이 일부러 관헌들의 눈을 피할 목적으로 그런 복자(伏字)를 썼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그 증거로 만약, 한용운의 '님'을 조국이라는 직설적 표현으로 바꿔버린다면 시가 아니라 독립선언문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이 말은 시의 언어보다 독립선언문의 언어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다. 시가 아무리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시는 시의 한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역사와 사회개조를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목적이라면 시인이기를 거부해야 되고, 시의 예술성을 부정해야 된다. 그것은 각개인의 자유이다. 그러나 시를 독립선언문처럼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시의 가치관과 자유를 침해하는 폭력이다. 꾀꼬리나 금붕어도 급하면 잡아먹을 수 있다. 그러나 꾀꼬리의 가치는 우는 목소리에 있고 금붕어의 가치는 아름다운 지느러미와 그 색깔에 있다.

우리는 김수영 씨의 불온한 시를 좀더 분석하기 위해 이 상황을 일제식민지시대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나라를 잃은 그 상황에서 한국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양심은 독립이었다. 그 이외의 것을 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일본인의 식민지정책을 승인하고 돕는 행위처럼 오해될 수 있다. 정치가라면 망명을 하든가 감옥에 가야한다. 그런데 그가 시인이라면? 그리고 참여를 한다면? 독립정신을 고취해야 한다. 국민들을 일깨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그 시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애국심=명시' '독립정신=명시' '불온시=명시'의 등식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김수영 씨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직접적으로 독립을 노래부르지 않은 시들, 일본관헌 밑에서도 그대로 통과된 시들은 모두가 일제식민지역사의 옹호자라 하여 불합격의 도장들을 찍어야 하는가?

김소월은 부정되어야 한다. 이상도, 정지용도, 김기림도, 김영랑도 모두 부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최고의 평론가는 시를 검열하는 관헌이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불온하게 보이는 시일수록 상대적으로 민중에게 독립심을 일깨우는 시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시가 역사를 바꾸는 제일 강한 목소리를 가진 시이기 때문이다. 정치이데올로기로 예술을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는 스스로 자명해진다. 미국문학사엔 엉클 톰스 케이빈을 쓴 스토오부인이 왕위를 차지해야 된다는 논법과 같다.

우리는 그런 시를 존경한다. 그러나 시로써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이며 한 시민의 발언으로서 존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일수록 서랍속에 감춰졌을 때처럼 손해를 보는 것도 없으리라. 그러고 보면 서랍속의 시는 가장 무가치한 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고전이 되어 천세만세를 살기보다는 오늘 하루를 위해서 폭발할 것을 원하는 시인데도 그것이 서랍속에 들어 있다면 마치 겨울철에 다락속에 그냥 들어 있는 난로와도 같을 것이다. 시로 보나 효용면으로 보나, 다같은 낙제다. 시의 예술성이 없다해도 안도산의 창가가사(唱歌歌詞)처럼 그 시대에 불리워졌다면 그래도 존경이나 할 수 있다.

 

4. 하나의 질문지

끝으로 서랍속의 불온시론을 위하여 우리는 피차의 태도를 명백하게 밝혀야 할 것이 있다. 기초적인 이론없이 사회참여이론의 논쟁이 너무나 오래 계속되었던 까닭이다.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는다. 간섭을 하고 탄압을 한다. 그리고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하는 것을 문화의 건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은 바로 김수영 씨의 「지식인의 사회참여」란 글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러한 말은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서정주 씨라면 몰라도 사회참여를 부르짓는 시인으로서는 이상한 발언이다. “우리는 달을 읊고 사랑을 말한다. 일시적인 정치, 사회의 제도가 아니라 영원한 인간의 비전을 노래한다. 우리 시인들의 공화국은 당신의 공화국과는 다른 차원에 깃발을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정치가 문화를 간섭하는가? 당신의 영역과 우리의 영역이 그리고 그 가치관이 다른데 왜 우리를 못살게 구는가?”라고 말했다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바로 숨쉬는 이 역사를, 사회를 정치나 그 제도를 개량하는 사람임은 자처하는 사회참여론자가 그냥 내버려 달라는 말은 무엇인가? 진정한 참여론자라면 내버려둔다 하더라도 싸움을 청해야만 된다.

참여시인과 정치가는 역사를 같은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나이프를 들고 있다. 한쪽은 권력 한쪽은 언어이다. 여기에서 상호의 불간섭을 기대한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씨는 간섭하는 편보다 무시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정치의 한복판, 사회와 역사의 한복판, 그 현실에 뛰어든 이상 가장 두려운 것은 간섭이 아니라 무시다. 그들이 무시하는 이상 어떻게 참여가 되는 것일까? 참여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다. 간섭은 부당한 것이지만, 부당한 간섭과 탄압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참여이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문학이 정치를 간섭하고 정치가 문학을 간섭하는 것이 참여의 앞마당이다. 그러므로 사회참여론자는 문학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사람과는 달리 위정자의 간섭을 탓하기보다, 그 간섭에 굴하는 자기자신에게 매질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참여론자는 사회와 정치를 아내로 맞이한 사람, 자기 예술의 런닝매이트로 선택한 사람이다. 그에 비해 순수문학론자는 정치와 사회로부터 이혼을 하고 독립주의자임을 선언한 사람이다. 이 비유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무시라도 해달라는 말은 순수문학자가 할 이야기지 결코 사회참여론자가 할 소리는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자기당착에 처해진 말인가를 참여시인들은 알아야 한다.

둘째로, 참여시인들은 참여를 부르짖기 전에 먼저 그들이 언어를 선택한 이유를 밝혀야 한다. 그것은 가장 소박한 물음이며 동시에 가장 본질적인 물음인 것이다. 즉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태도는 산문가가 다루고 있는 그것과 같은가? 사르트르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산문가의 언어는 전달을 목적으로 한 도구로서의 언어이요, 시의 언어는 대상언어, 즉 사물로 화한 오브제, 랑가쥬라고 했다. 당신들은 어느쪽인가? 도구와 같은 언어라면 당신들은 왜 산문을 쓰지 않고 시를 쓰는가? 목적이 참여에 있다면 왜 소설을 통해서, 저널리즘을 통해서, 조직을 통해서 참여하지 않고 '시'라는 장르를 통해서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참여와 어떻게 다른가?

셋째로, 문학의 독립성을 인정하는가 부정하는가 하는 문제다.

“정치나 경제의 제도 활동에는 학문이나 예술의 창조활동의 원천으로서의 고전에 해당할 만한 것이 없다. 기껏 있다면 '선례'나 '과거의 교훈'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과 정치, 경제의 제도활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모순하는 것 같지만 래디컬한 정신적 귀족주의 문화가 래디컬한 민주주의와 내면적으로 결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정치화의 시대일수록 그와는 다른 문화적 입장으로서의 발언이 요청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참여는 문학이 정치로 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문학의 입장 위에서 정치사회제도를 향해 발언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참여하기 위해선 먼저 문학자의 입장을 가져야한다는 말이 된다.

토마스 만은 “칼 마르크스가 헬다린(휄덜린)을 읽는” 세계를 말한 적이 있고 또 예술가는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라 심미적인 성질의 인간이며, 그의 근본적 행동은 유희에 있지 미덕에 있지 않다”고 한 적이 있다. 토마스 만은 문학적인 순수한 입장에서 사회참여를 한 사람이다. 당신들은 토마스 만이나 괴테의 이러한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즉 정치사회의 제도활동과 문학의 창작활동의 이원성을 인정하는가? 동일시하는가?

이 글은 김수영 씨의 '서랍속에 든 불온시'보다도, 그러한 시론에 대한 내 나름의 의문을 표명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통곡을 해도 시원찮은 어려운 상황속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원고지를 대하지 않는 문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난과 위협속에서도 왜 우리는 글을 쓰는가? 시와 그 예술의 순수한 의미를 상실한다면 우리가 지금 지불하고 있는 그 고통과 시험이 얼마나 부질없는 도로일까? 그리고 더한 입장을 상실할 때는 참여조차도 불가능해진다.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상자를 도둑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도리어 그 보석을 팔아 창과 칼을 장만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우리는 오늘의 문학인은 관의 검열자와 문학을 정치도구로 착각하여 문학자체를 부정하는 사이비시인과 비평계들의 협공을 당하고 있다. 적은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다.

나는 당분간 외전과 내전의 쓰라린 결전을 겪을 각오 밑에서 이 글을 김수영 씨에게 주는 것이다.

 

<『思想界』,1968년 3월호>

 

 

 

김수영 詩모음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공자의 생활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1945>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라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953>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1957>

 

 

 

 

그 방을 생각하며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狂氣---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殘滓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1960. 10. 30>

 

 

 

 

거대한 뿌리                                             

 

나는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 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팔·일오 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사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일팔구삼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궁리들 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는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입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삼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지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시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964. 2. 3>

 

 

 

병풍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向)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주검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龍)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1960. 6. 15>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1965. 11. 4>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 10. 5>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삼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사·일구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면상이 아닐 거다

 

<1967. 2. 15>

 

 

 

꽃 잎(一)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革命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1967. 5. 2>

 

 

 

기 도                                                     
 -사일구순국학도위령제에 부치는 노래
 

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革命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쟝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삵괭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
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革命이 성취하는 마지막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罪있는 몸의 억천만개의 털구멍에
罪라는 罪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려니


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1960. 5. 18>

 

<어둠속에갇힌불꽃 / 정중규>


 

 

김수영은 왜 우는가 - ‘명동백작’을 아는가

 

 





김수영은 왜 우는가

  
‘명동백작’을 아시는지. 1950년대 문화인들의 삶을 극화한 교육방송(EBS)의 한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나는 ‘명동백작’의 팬이었다. 주말의 늦은 밤이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명동백작’을 보곤 했다. 이 방송의 시청률이 대략 1퍼센트 전후였다고 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명동백작’의 시청자들은 나와 같은 골수팬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컬트 무비’라는 것이 있다. 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그 영화에 열광한 나머지, 영화를 보는 일이 마치 신성한 제의와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때, 그것을 컬트 무비라 일컫는다. 내게, 혹은 나와 비슷한 열정으로 ‘명동백작’을 보았던 사람들에게, 그 드라마는 그런 열광적인 관극 체험을 가능케 했었던 것 같다.

‘명동백작’ 때문에 나는 내가 존경하는 두 분과 원치 않는 뜨거운 논쟁을 한 적도 있다. 그 두 분들 역시 그 프로그램의 골수팬이었던 까닭이다.

첫 번째 논쟁은 이런 것이었다. ‘명동백작’은 1950년대 문화인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조명한 작품인데, 자연히 거기에는 당시로서는 평균적이라 할 수 없을 문화인들의 일상도 잘 조명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다방문화’라는 것이다. 1950년대라면, 한국전쟁 직후의 그야말로 ‘폐허’와도 같은 현실이 지배적이었을 터인데, 그 드라마 속의 문화인들은 기껏해야 ‘다방’에서 시가 어떠니 문학이 어떠니, 그렇게 커피나 술을 마시며 떠들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그들을 책임 있는 지식인으로 존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존경하는 사회학자인 한 선배의 항변이었다. 그 선배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당시의 평범한 시민들은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었는데 말이지!”

일리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생존의 기반 자체가 험악한 상황에서, 가령 시인 박인환 식의 ‘버지니아 울프’를 읽거나, 또는 ‘목마를 타고 간 숙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현실의 편에서 보면, 철딱서니 없는 몽상이자 현실에 대한 무책임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문화인들이 그 험악했던 ‘시민’들의 악다구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중산층의 삶을 살았냐 하면, 역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문화인들에게도 1950년대의 평균적인 궁핍은 동일한 조건이었다.

물론 가령 이승만이나 이기붕 등의 문민 독재권력에 야합하여 호가호위한 문화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개는 시인 김수영의 경우처럼 생존의 벼랑 끝에서도 오히려 ‘자유’나 ‘혁명’과 같은, 인간성의 좀더 높은 경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문화인들은 그것이 다소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이상주의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의 고통을 방기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상황의 고통을 뛰어넘어 더욱 완전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희구하는 ‘꿈꾸는 존재’로서의 본능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두 번째 논쟁은 시인 김수영에 관한 것이었다. 왜 이 드라마 속의 시인 김수영은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그려졌느냐는 것이다. 김수영 뿐인가. 화가 이중섭이 그러하고, 시인 박인환과 김관식 역시 그런 문화인으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런 질문을 내게 던졌던 존경하는 친구에게, 드라마 속의 김수영은 히스테릭한 것이 아니라 지금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치부 기자인 한 친구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도대체 김수영은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김수영의 울음은 두 차원의 대답을 준비하게 만든다. 첫 번째 차원의 대답은 1950년대라는 시대적 성격에 힌트가 있다. 시인 김수영을 보더라도, 그는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생활을 했고, 석방이 되었지만 지속적인 ‘레드 콤플렉스’로 고통 받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한국전쟁의 체험은 ‘인간’을 이념에 희생된 동물의 차원으로 하강시켰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었던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이 그 ‘한 줌의 이념’ 때문에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죽였던 전쟁의 체험은 민족 전체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김수영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두 번째 대답은 예술가가 꿈꾸는 자유의 속성이란 비타협적인 완전성에 있는데, 1950년대라는 상황 속에서 이런 꿈은 처절한 몽상에 불과했다는 점에 있다. ‘평화통일’을 외치는 일조차 용공으로 내 몰려 죽임을 당했던 것이 1950년대라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 안에서 예술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완전하고 비타협적인 예술적 자유는 질식상태에 처한 것이다. 그러니 김수영은 4.19 전후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명동백작’의 1950년대가 아니라, 21세기의 이 시간대에 김수영이 다시 살아온다면 그는 종달새처럼 명랑하게 현실을 긍정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지구화의 시대라고 많은 사람들이 떠들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의 이념 시계는 아직도 1950년대라는 과거에 멈춰 있다. 지정학적으로 대한민국은 대륙과 연결된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상상지도 속에서는 휴전선 이남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인 것이다.

이 ‘정신의 섬나라 근성’을 제도적으로 강제하고,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삼대에 걸쳐 대물림하게 만드는 것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시대착오다. ‘명동백작’에서의 김수영의 눈물은 21세기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현재형이다. 이제 시계를 21세기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 김수영의 눈물이 멈출 수 있다.

이명원(문학비평가)

 

 

 

 

 

김수영 하이데거를 읊다

 

 

‘병풍(屛風)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김수영의 시 ‘병풍’)

시인 김수영(金洙映·1921~1968)의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 구절이었던 ‘병풍’(1956)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육칠옹해사’는 바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Heideg ger·1889~1976)를 지칭하는 암호와도 같은 단어였다는 해석이 나왔다. 김유중(金裕中) 항공대 교수(국문학)는 최근 낸 단행본 ‘김수영과 하이데거―김수영 문학의 존재론적 해명’(민음사)를 통해 이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육칠옹해사’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60~70 정도 나이로 바닷가에 숨어 사는 선비’ ‘병풍에 찍힌 도장에 새겨진 인명’ 정도였다. 김유중 교수는 이에 대해 ▲‘병풍’의 내용이 하이데거의 ‘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죽음에 관한 논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병풍’이 쓰여진 1956년은 하이데거가 정확히 67세가 되는 해이며 ▲하이데거의 중국어 표기가 ‘해덕격(海德格·hai de ge)’인데 셰익스피어를 ‘사옹(沙翁)’, 톨스토이를 ‘두옹(杜翁)’이라고 지칭했던 관례에 비춰볼 때 김수영이 하이데거를 ‘해사(海士)’로 표현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나아가 김수영의 문학사상이 하이데거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일상적인 삶의 세계가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반박하고 인간 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하고,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므로 인간은 항상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현재의 스스로의 삶을 끊임없이 반성하며 삶의 매 순간을 소홀히 보낼 수 없게 된다고 했는데, 이런 하이데거 죽음론(論)의 핵심이 들어있는 대표적인 시가 바로 ‘병풍’이라는 설명이다.

제1행의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는 진술은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 위협을 느끼는 현존재가 내뱉듯이 하는 말”이며, 2행의 ‘등지고 있는 얼굴’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는 모습이다.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는 행은 결국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인식’을 통해 죽음이 삶의 단절이라는 인식을 극복하고 삶의 생산적 의미를 찾는 실존적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김유중 교수는 “하이데거가 김수영 문학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 후기 문학에서만 거론됐거나 무시됐지만, 초기 작품인 ‘병풍’에서부터 이미 이 같은 사상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 철학 전공자인 구연상 박사는 “하이데거와 김수영의 관계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평론가들이 다시 쓴 김수영론

<살아있는 김수영>

 

    박성필(geulter) 기자
▲ <살아있는 김수영>의 겉표지
ⓒ2005 창비
한국문학에서 김수영의 존재는 무엇일까? 우리의 곁에 실존했던 '김수영'이란 한 인물의 활발한 창작기는 1960년대였다. 그가 살아있던 시대는 분명 1960년대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그가 세상을 등진 지도 30여 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시대는 '살아있는 김수영'의 시대다.

그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은 후 세상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 그의 전집과 평전이 간행되었고 1980년대에는 그의 이름을 내건 '김수영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후 한 차례 진지한 반성을 통해 그의 문학은 제자리를 찾았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많은 연구자들과 평론가들이 30여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그에 관한 논문과 평론들을 썼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살아있는, 그리고 도전받는 시인이다.

한 문학평론가가 "우리에게 본격적인 김수영학(學)이 시작될 필요가 있지는 않은가?"하고 반문한 것처럼 <살아있는 김수영>이란 책은 김수영학의 작은 출발을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집필한 것은 아니나 이 책에 실린 열 다섯 편의 글들은 '1990년대 이후 김수영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하는 주제에 대한 현장 비평의 증거다.

총4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는 김수영에 관한 4개의 작품론들로 엮어졌다. 정남영 교수의 <바꾸는 일, 바뀌는 일 그리고 김수영의 시>를 통해 김수영의 시를 새로움의 생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강연호 교수의 <'위대한 소재'와 사랑의 발견>은 김수영 시에서의 산문정신의 확대에 주목하고 김수영 시를 사랑의 발견과 확인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박수연 교수의 <국가, 개인, 설움, 속도>는 1950년대 김수영 시를 개인-국가라는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임홍배 교수의 <자유의 이행을 위한 시적 여행>은 4·19 이후의 김수영의 시를 자유, 역사, 사랑 등 몇몇 개념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2부는 '김수영의 시론과 산문'으로 엮어졌다. 황현산 교수의 <시의 몫, 몸의 몫>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통해 '경험과 육체를 통한 사물의 양태와 그 추이의 확인'이 김수영의 진정한 독창성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유성호 교수의 <김수영의 문학비평>은 김수영이 비평이 언어를 매개로 하는 현실과 현대성의 결합을 추구한 점에 주목한다. 김명인 문학평론가의 <급진적 자유주의의 산문적 실천>은 김수영의 산문을, 시적 실천에 견고한 삶의 논리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파악한다. 또, 김수영의 창작을 1960년대의 후진성에 대한 비판과 급진적 자유주의의 표현으로 이해한다.

3부는 '문학사적 의의'에 대한 다섯 편의 논의다. 김재용 교수의 <김수영 문학과 분단극복의 현재성>은 김수영이 민족문제 인식과 세계적 차원에서의 근대성 인식을 통일적으로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 남진우 교수의 <김수영 시의 시간의식>은 미래의 궁극적 순간을 향한 쉼없는 운동 속에 자리잡은 김수영의 시의 시간의식에 대한 탐구이다.

최하림 시인의 <김수영의 개인사의 문제들과 검토>는 일본 유학시절에서 포로수용소 시절까지 김수영 생의 단절과 서구시의 영향 등 전기적인 검토이다. 김규동 시인의 <소설 김수영>은 해방직후에서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김수영 시인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들을 복원해내고 있다.

4부는 '김수영과 그 영향관계'로 엮어졌다. 한기 교수의 <박인환과 김수영, 문학사적 짝패의 초기 동행여정>은 김수영에게서 박인환이란 인물에 대한 대타자의식이 어떠한 시적 성취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해명이다. 조현일 교수의 <김수영의 모더니티관과 파르티잔 리뷰>는 김수영의 영미 혹은 일본 모더니즘시단으로부터의 영향의 급진적 현대성의 추구라는 김수영 시의 핵심을 형성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평론가 박지영의 <번역과 김수영의 문학>은 김수영에게 번역이 현대성의 전범으로 설정된 서구이론을 받아들이는 창구이자 시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형성하고 정당화해주는 거울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유중하 교수의 <하나에서 둘로>는 신동엽 시인과 황동규 시인을 김수영의 문학적 적자로 파악하고 이들 각각의 성취와 한계에서 김수영 시인의 문학사적 지위를 파악한다.

부조리와 모순의 시대였던 1960년대 순수 참여논쟁의 정점에 서서 김수영 시인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직도 우리의 '몸'을 둘러싼 사회는 우리를 갈증나게 한다. 그의 '언어'가 그립다, 그의 '몸'이 그립다.

 

 

  

 

   영원한 자유의 시인 金洙暎?

 

    “이 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당신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글: 이재광 월간중앙 학술전문기자 / 사회학 박사

 

 

 

 

 

  1968년 6월15일 토요일 오후 3시. 김수영(金洙暎)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고료 7만원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다수 문인에게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번역이든 창작이든 경영이 어려운 출판사에서 쉽게 돈이 나올 리 만무하다. 김수영도 이미 떼인 돈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7만원이라는 거금이 생긴 것이다. 그는 당연히 술을 떠올렸다. 내노라 하는 ‘술꾼’으로 통하는 그에게 돈이 생겼으니 그냥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대낮이었지만 그는 신구문화사 편집장 신동문에게 빨리 나가자며 재촉했다.

 

  막 나가려는 순간 한 사내가 들어와 넙죽 인사를 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뒤늦게 문단에 데뷔했고 최근 “마술사”라는 단편으로 문단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병주였다. 김수영은 그 친구의 첫 인상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의 소설에는 관심이 갔지만 호탕한 웃음소리라든가 어딘가 으시대며 걷는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어쩐지 오만하게 보여 눈에 거슬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기분 나쁘다 해서 안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수영 · 신동문 · 이병주, 그리고 함께 있던 한 일간지 기자 등 네 사람은 곧장 청진동 곱창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수영은 그 날 밤 술이 몇 순배 돌았어도 영 기분이 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소주와 맥주를 타서 술을 마셔 댔으니 술기운이 올라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분은 여전히 별로였다. 오히려 취기는 평소보다 더 올랐다. 걸음조차 걷기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 이병주가 기분 나빴다. 여유만만하고 호방한 그가 영 꼴사나워 보였다. 시비를 붙여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저렇게 넘어가니 자신만 우스워진 꼴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11시30분. 김수영은 술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병주와 정달영이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영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뿌리치고 혼자 술집을 나왔다.

 

 그는 취한 걸음을 간신히 바로 세우며 을지로에서 버스를 타고 마포 서강 종점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아직 술이 덜 깼는지 몸은 여전히 바로 서지 않았다. 바로 이때였다. ‘부웅’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그의 뒤로 무엇인가가 달려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자신에게 닥쳐오는 거대한 물체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성한 사람도 막거나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중앙선 침범 차량을 피하려던 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한 것이다. 술에 취한 그의 나약한 팔로는 인도로 뛰어드는 버스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의 두개골은 심하게 파손됐고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는 영원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대부분의 사고에는 죽은 사람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법이다. 인간으로서는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크든 작든 죽은 사람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돌려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죽은 사람에게 아무 책임도 없는 경우다. 이때 책임은 전적으로 가해자의 몫으로 돌려진다.

 

  김수영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에게 책임이 있다면 늦은 시간 술을 많이 먹고 비틀거리며 걸었다는 정도일까. 그가 차도로 뛰어든 것도 아니요, 신호등을 무시한 채 횡단보도를 건넌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비록 취하기는 했어도 인도로 천천히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김수영은 생활에서도 아무 책임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살았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사회적 책임이 있고 또 대다수는 어느 정도 그것을 지키며 살아간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김수영은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되는 대로 술이나 마시며 되는 대로 친구들과 어울렸다. 한 가족의 장남이자 또 다른 가족의 가장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술 마시고 담배 피우기 위해 푼돈을 벌었으며 그나마 어려우면 아내에게나 동생들에게, 심지어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노모에게도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시인 김수영은 삶에서도 죽음에도 아무런 책임이 없었던 것이다.

 

 

  무책임하게 살다 무책임하게 죽은 시인

 

  그는 사회적 책임을 철저하게 거부하며 살았다. 그것은 치장이며 위선이기 이전에 그에게는 짊어지기 어려운 부담이었고 지기 싫은 부담이기도 했다. 사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사회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그가 만일 그 많은 시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 역시 손가락질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패륜아로 취급받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남아 있다. 해방 후 가장 주목받는 시인-. 그것이 바로 무책임하게 살다 무책임하게 죽어간 김수영에 대한 평가다.

 

  그가 무절제한 삶을 꾸려 나가면서도 그같은 좋은 시를 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바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는 훌륭한 많은 시를 남겼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에 주눅들어 살면서 책임지지 못했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범인들의 눈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예술가다. 생활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까지, 한량이나 룸펜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그렇게 살다 아무 책임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간 시인 김수영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정말 아무런 책임도 없이 살아간 것일까. 역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책임을 짊어지고 살았기에 사회적 책임을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국내 현대시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인식되는 한 시인의 난해한 삶은 아무래도 다음 시 한 수에서 풀어 나가야 할 것 같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울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국내 시사(詩史)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시의 역사에서 가장 난해한 시인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김수영의 변화된 시세계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수영은 ‘달나라의 장난’ 이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어(詩語)와 시의 형식을 구사했다. 이전에 보이던 한문투의 문장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시어가 줄어들고 대신 일상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등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서정시 일색이던 한국 시단에 모더니즘적인 새로운 시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와 함께 일상용어를 과감하게 시어로 차용(借用)함으로써 새로운 실험을 단행했다는 평가를 이끌어 냈다.

 

  이 시는 1953년 “자유세계” 4월호에 발표된 것이다. 통상 잡지라는 것이 표지에 붙어 있는 호수보다 한달 빨리 발행되니 실제로 발표된 시기는 같은 해 3월 경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잡지에 실리는 글은 대체로 길면 발간 한달 전쯤 입수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시가 실제로 쓰여진 시기는 대충 1952년 말에서 53년 초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김수영 연구자들이 이 시가 쓰여진 시기를 이같은 방식으로 추론까지 하면서 알고자 하는 것에서도 이 시가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대다수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이름 석자는 들어 본 적이 있지만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김수영이 쓴 단 한편의 시의 제목이나 시 구절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거의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탓할 필요는 없다. 김수영이라는 사람은 평범한 우리네 독자들이 읽기에 적당하지 않은 시만 골라 썼고 그래서 범인들의 가슴을 적셔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시인을 가리켜 비(非)대중적인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평론계나 문학계에서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현대시 분야에서 김수영만큼 문제작을 많이 쓴 시인은 없다고 말할 정도다. 한 평론가는 “해방 이후 활동을 펼친 시인 가운데 김수영만큼 주목받은 이는 없다. 그에 대한 비평적 탐사의 활기는 ‘김수영 비평의 역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현대시의 역사에서 김수영의 위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에 대한 국내 학위논문만 60여편. 물론 최대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김수영을 가리켜 ‘대중에게는 가장 비대중적인, 하지만 평론계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시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왜 유독 김수영에 대해서만큼은 평론계나 학계에서 끊임없는 도전을 하게 되는 것일까. 단순히 현대시의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그 이유를 찾기에는 어딘가 미흡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해방 이후 50여년 동안 국내 시단은 숱한 시인들을 배출했고 그 중에는 김수영에 버금가는 기라성같은 시인들이 적지 않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이 그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해석의 난해함, 그리고 다양성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 현실참여, 민중주의, 산문시, 고백시, 역사와 자유 등 어떤 종류의 시각에서도 좋은 분석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달나라의 장난’은 이같은 독보적인 시인이 시세계의 대전환점을 맞은 것이니 평론가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기회에 김수영이라는, 난해한 시인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달나라의 장난’이 쓰여진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는 아내 김현경이 쓴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당시 이들 부부는 따로 떨어져 살았다. 김수영은 부산에서 대구를 오가며 살았고 아내 김현경은 수원에서 누군가에게 의탁해 있었다. 이들이 떨어져 있었던 것은 물론 전쟁 탓이었다. 인민군에게 끌려간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김현경은 피난길에 올랐던 것이다.

 

  김현경의 생활은 아주 곤궁했다. 남편도 없이 세살짜리 아이를 등에 업은 여인으로서는 인심이 각박해진 전시 상황에서 도저히 혼자 먹고살 길이 없었다. 김현경은 이때 생계를 잇기 위해 다른 남자와 동거 생활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거나 김현경은 꿈에 그리던 남편이 살아 부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지막 남은 금시계를 팔아 무작정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으로 가기 전 그는 편지 한통을 남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라는 것이 아주 걸작이었다. 어떻게 지냈느냐는 안부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앙꼬빵 세개를 그린 그림을 같이 보낸 것이다. 이후 김현경은 산문 ‘임의 시는 강변의 불빛’에서 그 때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굶주림에 떨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서 따뜻한 유머로 위로도 하고 익살을 부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의 시가 담긴 답장을 받아 들고 곧장 부산으로 향했다. 남편의 생사가 비로소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전쟁이 터지자 우왕좌왕하다 피난을 떠나지 못했고 지옥같은 서울에 남아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문학가동맹에 참석했다가 평생을 이데올로기적 피해를 입을까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러나 이 정도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전쟁 중 그가 겪었던 행적은 말 그대로 한편의 소설감이다. 인민군이 문인들을 대거 의용군으로 끌고 갔을 때 그 안에 포함됐고 두 차례의 탈출 끝에 간신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두 차례의 탈출 모두가 또한 그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처음 의용군 부대에서 탈출했을 때는 다시 붙잡혔는데 숨겨 둔 인민복을 찾아내 입은 후 탈출병이 아닌 패잔병이라고 속인 후에야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두번째 탈출은 일단 성공이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서울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성공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더 심한 고초를 겪었다. 이번에는 서울에서 경찰의 심문에 걸려 첩자로 오인받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다. 쇠의자로 두들겨 맞아 정강이가 으깨졌으며 급기야 인천을 거쳐 그 유명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까지 밀려왔던 것이다. 이때 김수영은 깨진 정강이에서 구더기가 나올 정도로 심한 고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거제도에 도착한 것은 1951년 1월이었다. 전쟁이 한창이어서 수용소는 온갖 포로들로 미어 터졌고 그만큼 사고도 많았다. 친공(親共)과 반공(反共)으로 나뉜 포로들은 살인사건이 예사로 일어날 만큼 극심한 대립을 보였다. 그는 이 곳에서도 늘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이 와중에서 그를 살려 준 것은 영어. 일찍이 어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김수영은 영문 잡지 번역이나 영어교사 등 영어와 관련된 일을 하며 술값과 담배값을 벌었을 정도로 출중한 영어실력의 소유자였다. 이 곳에서도 통역이 필요했던 수용소는 결국 그의 탁월한 영어실력을 높이 사 통역으로 일하게 했고 그를 잘 본 고위직의 힘으로 ‘민간억류인’ 자격으로 일찍 수용소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겁 많고 소심하지만 자존심 강한 아이

 

  수용소를 나와 밥벌이를 한 것 역시 통역이었다. 김수영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지인의 소개로 미8군 수송관의 통역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 이 자리는 막대한 이권이 개입돼 있었다. 군수물자 수송 부대였던 만큼 화물차 배정에서 각종 물자의 선적까지 관장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전시에 비싼 값의 미제 물자들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김수영이 그런 것에 연연할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미군들의 천박한 행동이 싫었고 이유없는 우월감이 싫었다. 게다가 같이 일하는 한국인들이 그들의 우월적인 언행을 인정해 주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당장 굶어도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는 자신의 속물근성에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바로 이때 그는 아내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앙꼬빵 세 개가 그려진 그림과 함께. 이때 그의 심경이 담겨 있는 시가 바로 ‘달나라의 장난’이다. ‘도시 안에서 쫓겨 다니듯 사는, 어느 소설보다 신기로운 나의 생활을 내던지고’ 가만히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팽이는 참으로 무심하게 방안을 돌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이 있고 그래서 한사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데 생활에 쫓겨 그 사명과 운명을 다하지 못하니 팽이는 나를 비웃듯 돌고 있다…. 그의 심경은 참으로 괴로웠던 것이다.

 

  아내는 훗날 시를 읽고는 무던히도 후회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남편의 어두운 고뇌를 괜히 자극만 한 셈이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남편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 역시 결과적으로는 후회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심한 말다툼 끝에 아내는 다시 그가 있던 수원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말다툼 끝에 “통역이란 더러운 직업이며 오늘로 그만두겠다”는 얘기만 나왔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겪고 굶주림에 지쳐 있는 가족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남편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만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아무리 생활에 눈이 어둡고 당장 굶는 것보다 귀족같은 자존심을 더 찾는 남편이기는 했지만, 때가 때이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내로서는 원망스럽기가 그지없었다.

 

  김수영은 자기 말대로 그 ‘더러운 통역일’을 때려치우고 만다. 남들의 눈으로 보면 여간 아까운 자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장 부산 동생집으로 내려갔다. 동생의 ‘집’이래 봐야 뻔했다. 별반 직업이 없는 피난민이 살던 곳이었다. 기껏 한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는 토담집에 불과했다. 이 곳에서 김수영은 동생 수성과 함께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잘 잤느냐는 한마디, 그리고 동생이 돈 벌러 나가면 멍하니 있다가 시내를 어슬렁거리는 룸펜 생활을 꾸려 나갔다. 당시를 회고하며 동생은 “담배값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룸펜-. 김수영의 일대기를 보노라면 이 단어만큼 그의 생을 잘 말해 주는 것은 없다. 그는 딱히 가족의 생계를 책임 져 본 적도 없고 자기 입 하나 간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돈벌이에 나서 본 적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그 주변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모두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피난민 시절에도 그는 별다른 점이 없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귀족과도 같은 자존심을 지켰고 주변에서도 그런 그를 이해했다. 본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단지 환경이 더욱 어렵다 보니 자신의 생활패턴을 유지하기 위한 갈등이 심화됐을 뿐이다.

 

  1953년이면 그의 나이 31세. 사회적으로는 한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아내과 노모 그리고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번도 그같은 역할을 담당해 본 적이 없다. 늘 놀고먹었으며 늘 시인이나 화가·소설가 등 예술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에 찌들어 살았다. 그는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은 만나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술 예찬론자였다. 술과 함께 살고 술과 함께 대화하고 술과 함께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느지막이 일어나 과음으로 답답해진 가슴과 쓰린 속을 다독거리며 시를 썼다. 고통스러운 심신을 더욱 쥐어짜야 시어가 나오는, 그런 시인이었다. 가족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고 안스러워했으며 그의 그런 삶을 인정했다.

 

  가족의 뒤치닥거리로 힘들었던 어머니조차 장남 김수영을 위해 식당을 경영하며 술과 안주를 대줬을 정도다. 30년 가까운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가족들의 그같은 태도에도 이해가 간다. 그는 1921년 생이다. 일본의 경제공황의 여파가 한국에도 밀려오던 시기에 태어나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고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 곳 저 곳으로 도망 다녀야 했다. 간신히 전쟁의 포탄을 피한 사이 피끓는 24세의 나이에 해방을 맞았다. 그래도 안정은 찾아오지 않았다. 내부 혼란은 극에 달했고 그래도 간신히 시작(詩作)을 개시할 무렵 전쟁이 터져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일제 말기에는 어떻게 총알받이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호된 시련을 겪은 것이다. 그는 인민군의 의용군이 됐다가 간신히 탈출하자 국군에게 첩자로 오인받아 포로수용소 생활까지 해야 했다.

 

  4·19를 거치며 그는 겨우 언론의 자유를 얻어 ‘자유’를 주창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봤지만 그것도 잠시, 5·16 군사 쿠데타와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시(詩) 창작에 전념하여 겨우 이름을 얻게 되고 생활도 안정되어 가던 1968년 그는 47세의 나이에 ‘재수 없는 사고’로 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술을 한잔 걸치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걷다가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여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그것은 생활에서의 책임이 없었던 것과도 같다. 그저 자유롭게 살다가 자신이 책임질 것이 전혀 없는 죽음을 맞은 것이다. 
 


  거치고 앙상하게 드러나는 김수영의 비극성

 

  그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을지도 모른다. 주변인들은 그에게 뭔가를 하기를 기대하기보다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셋째이자 장남’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하다. 셋째로 태어났지만 첫 아이와 둘째 아이가 낳자마자 죽어버렸으니 장남이 됐다는 뜻이다.

 

  그는 첫돌을 지날 때까지 집안 어른들을 조바심 나게 했다. 설사에 감기에 잠시도 쉴 틈 없이 아파하더니 급기야 폐렴에 걸려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살아났다. 집안 사람들의 정성 어린 보호 때문이었다. 하지만 건강은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이기도 했다. 병약한 그의 체질로 인해 병마는 오래지 않아 다시 그를 찾았고 두고두고 그의 삶을 괴롭히는 결정적인 일을 저지르고 만다. 초등학교 시절 급성 장질부사에 걸린 김수영은 거의 죽다 살아났지만 그로 인해 중학교 입시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깟 중학교 입시 때문에’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소심한 아이들에게는 얘기가 다르다. 김수영이 꼭 그랬다.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부는 아주 잘했지만 겁이 많고 소심하고 말이 없고 여리고 자존심이 강한 아이”로 그를 기억한다. 그것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특성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중학교에 떨어졌으니 상처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몸이 아파 다시 입시를 준비할 수도 없었던 그로서는 2차로 선린상고 전수과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전수과는 현재 야간고등학교나 매한가지로 돈이 없어 낮에 직장에 다녀야 했거나 주간 학교에 갈 능력이 안되는 아이들이 다니던 곳이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일본으로 갔다. “그저 좋아하던 여자가 도쿄로 갔기 때문”이라며 그는 도쿄행을 여자 탓으로 돌렸다. 그래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관련돼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차지했다는 자존심이었다. 비록 몸이 아파 중학교를 잘못 갔지만 대학만큼은 식민 모국 일본의 최고학부를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도쿄에서 예비학교를 다니며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좌절을 겪는다. 예비학교를 다니며 도저히 일본의 엘리트 학생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일본연극학교에 진학하며 그의 생애 처음으로 연기와 시 창작을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은 이때부터였다. 사실 그의 할아버지대 까지만 해도 김수영은 부유한 집안에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종로 국일관 근처 육간대청의 집에서 살며 매년 500석이 넘는 땅을 갖고 있는 지주였다. 매년 추수 때면 곡식이 줄을 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이재(理財)와는 거리가 멀었다. 돈을 벌 생각보다 쓸 생각을 먼저 했고 어쩌다 돈을 벌겠다고 나서면 벌기는 커녕 까먹기 일쑤였다. 조금씩 가세가 기울던 그의 집안은 194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그의 학비나 생활비를 대기 어려운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 역시 김수영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돈을 보내 주면 썼고 안 보내 주면 스스럼없이 친구에게 얹혀 사는 사람이 그였다.

 

  그가 일본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은 전적으로 징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극을 향해 달려갈 무렵 그는 징병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에게 넉넉한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무렵 그는 이미 거지가 돼 있었다. 가족들은 이미 서울에 없었다. 생활을 책임 져야 했던 그의 어머니가 중국 지린(吉林)성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다 아예 지린성에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을 따라 지린성으로 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여전히 무기력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병든 아버지를 포함해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려 분주하게 다녔고 김수영은 지린성으로 모여든 젊은이들과 연극판에서 어울렸다.

 

  그가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것은 해방 직후였다. 일제 치하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그의 생활에 큰 변화는 없었다. 명동 부근에 박상진이 설립한 ‘청포도극단’을 찾아 연극쟁이들과 어울렸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정식으로 등단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46년 “예술부락”이 ‘묘정(廟庭)의 노래’‘공자(孔子)의 생활난’‘거리’‘꽃’ 등을 추천해 줬던 것이다. 시인이 됐다고 해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다. 심심하면 통역을 했고 극장에 간판을 그리겠다고 돌아다녔고 폭음한 후 식구들에게 난폭한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의 가족들은 그를 내버려 뒀다.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형제들과 혹 불화가 있을 때면 그의 어머니는 “수영이는 본래 그렇게 살아야 한다”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생계의 책임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대가족을 꾸려 간 것은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을 김수영은 놀기 위해 찾아갔다. 친구들과 함께 밤새 술을 퍼 마시고는 했다.

 

  전쟁을 겪었다고 해서 그가 변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저 현실의 냉혹함을 깨달았을 뿐이다. 이전까지는 놀고먹어도 별 문제가 없었다. 어머니나 동생이 담배값을 줬고 술을 대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굶주리는 상황이었다. 그는 스스로 담배값과 술값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자존심을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그는 심지어 아내와 별거 중 여의사와의 혼담건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누군가 그의 생활을 안정시켜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강했던 것이다. 그는 학교도 나가 보고, 신문사나 잡지사에서도 근무해봤지만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통역이란 더러운 직업, 때려치우겠다”

 

  그런데 바로 아내가 그 일을 해줬다. 1954년 김수영 부부는 과거를 뒤로 한 채 새로 합쳤다. 아이의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는 한 김현경도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계를 책임질 위인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아내는 그 일을 자신이 지지 않는 한 남편과의 재결합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김현경은 아예 직업전선으로 나섰다. 무허가이기는 하지만 마포 서강에 500평짜리 집을 얻어 양계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김수영도 이 일만큼은 재미있어 했던 것 같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닭이 되어 다시 알을 낳는 모습에서 생명력을 봤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 산문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직업을 가진 것 같은 자홀감을 가졌다’고 썼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생활의 주역이 아닌 조연에 불과했다. 스스로 인정하듯 양계사업에서 김수영은 아내의 조수로 만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책임한 시인에 불과했던 것일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말인가. ‘달나라의 장난’을 읽어 보면 그에게도 뭔가 자신이 생각하는 ‘사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라고 쓰고 있다.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는 왜 그토록 자학하는 시인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을까. 그에 대한 추도시 한 구절은 그가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김수영에게는 비극성이 거칠고 앙상하게 드러나는 듯했다. 그 거칠고 앙상함은 뒤에 생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자유가 가용공간을 거느리지 못한 데서 오는 것으로 보였다. 콩코드 광장과 같은 넓이와 크기를 그의 자유가 가질 수 있었다면, 그런 광장의 공기를 그의 자유가 가슴깊이 들이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싸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런 광장을 갖지 못한 그의 자유는 그리하여 마침내 지치고 메마르게 되어 꺾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김수영의 시세계의 화두를 ‘자유’로 꼽는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받기 싫어하는 예술인들의 자유다. 그는 이 자유를 얻기 위해 무던히도 생활의 구속을 벗어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이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에서 자유롭게 되고 싶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곤궁함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그를 사로잡는 악귀였음이 분명했다.

 

  양계사업으로 생활이 안정되고 둘째 아들 우가 태어나자 그는 더욱 생활의 기쁨을 누리게 됐다. 생활에 자유를 얻었던 탓일까. 그는 1958년 ‘눈’‘폭포’‘여름밤’ 등이 시단의 주목을 받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까지 받았다. 서서히 자기 목소리를 낼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1960년 4월19일 부패한 권력을 쓸어버리겠다며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그는 비로소 자유를 화두로 꺼냈다. 개인적으로나 정치·사회적으로나 처음 가져 보는 자유였다. 그가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이처럼 흥분한 적은 없었다. 4·19는 그의 시세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이다. 그는 4·19 이전의 권위주의와 부패를 가리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 밑씻개로 하자’는 표현까지 동원하고 있다.

 

  그러니 5·16 군사 쿠데타가 그에게 줬던 충격을 이해할 만하다. 시내 곳곳을 무장한 채 돌아다니는 군인들은 15년 전 전시(戰時)의 악몽을 되살려 줬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수영은 군인들에 대해 공포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군인, 전쟁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고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를 근본적으로 말살시키는 흉물로 여겼던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사그러 들었고 그의 눈길은 다시 내부로 향했다. 시나 산문을 쓰고 번역을 해 푼돈을 벌었고 아내가 경영하는 양계장의 조수로 생계를 꾸려 갔다. 아이들이 커가니 원고료도 함부로 쓰지 못하게 돼 아예 돈 일부를 술값으로 할당해 두거나 아예 얻어 먹거나 했다. 주변 사람들은 아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5·16 이후의 시기를 그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 한번 맛본 자유와 사회참여에 대한 의지는, 비록 현실에서는 드러나지 못했지만 시세계에서는 훨씬 발전된 모습으로 구현됐다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개념 역시 막연한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의지를 더욱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여름뜰’의 시 구절을 보자.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뜰이여
  나의 눈만이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이 있다 굴곡이 있다

 

  예의 그 난해함은 전혀 가시지 않았지만 자유를 향한 보다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평론가는 노장사상과 그의 자유관을 빗대어 보기도 한다.


 (이 글은 다음 책들을 참고했음· 최하림 지음, “김수영”(문학세계사, 1993)/김혜순 지음, “김수영”(건대출판부, 1995)/최성침 지음, “물의 모험”(아세아문화사, 2000)/김승희 외 지음, “김수영 다시 읽기”(프레스21, 2000))

 


  문학의 죽음… 자살인가, 타살인가


  이전투구로 끝났던 60년대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

 

  1968년 “사상계” 1월호는 연초부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60년대말 경제성장이라는 사회적 담론이 끌고 가는 폐해를 조목조목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의 펜끝은 권력층과 세도층, 그리고 그들의 논리를 만들어 주는 지식인을 향해 있었다.


‘주장은 독재를 욕하고 독재는 주장을 보고 욕을 한다. 그러다가 힘이 약한 주장이 명령을 넘어서서 어쩌다 행동으로 나올 때 독재가 어떤 수단을 쓰는가에 대해 최근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누구나 다 아는 6·8 총선거의 뒤처리 같은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문다운 신문이 없다는 것과 잡지다. 공정한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당신네 신문이 지난 1년을 통해서 언론의 자유의 긴급한 과제를 얼마나 주장하고 얼마나 실천했는지를 반문하고 싶고….’


  술자리라면 모를까,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토록 강하게 정권과 신문에 칼을 들이댄 것은 소심하고 겁 많은 김수영으로서는 의외였다. 나아가 ‘동백림사건’까지 거론하며 “문화와 예술의 자유의 원칙을 인정한다면 학문이나 작품의 독립성은 여하한 심판에도 굴할 수 없고 굴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논쟁의 발단은 김수영이 이 글에서 이어령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언론과 문학의 양면성 또는 이중성을 문제 삼았다는 점이다.


  이어령은 한국문화의 한 단편을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로 규정했다. 아이들은 ‘에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울음을 그치는데 이 아이들이 갖게 되는 두려움과 불안은 가상적인 것이며 국내 문화인들 역시 정체불명의 공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김수영은 이같은 이어령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그는 이때의 ‘에비’는 가상적인 금제의 힘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억압으로 한국문화의 퇴영성은 문화인의 허약성과 비겁성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문화인들을 그렇게 만든 유무형의 정치권력의 탄압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어령은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문화의 위기는 억압된 정치상황에서보다 자유 속에 내던져졌을 때 더 컸다는 것이다. 그는 8·15와 4·19의 예를 들며 문화의 죽음은 정치권력에 의한 타살보다 자유로 인한 자살의 경우가 더 많았다고 주장했다. 4·19 예찬자였던 김수영은 충격을 받은 듯 4·19와 문학이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밑줄까지 쳐가며 이어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의 문학이 정치 삐라의 남발 같은 인상을 줬다고 해서 그 책임이 당시의 정치적 자율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소아적인 단견이라고까지 말했다.


  이 논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점차 인신공격적이고 말꼬리잡기식이 되어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김수영의 분노는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논쟁 직후 부산 세미나에서 강연할 때도 그는 논쟁을 의식했다.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주제로 연단에 선 김수영은 이렇게 외쳤다.


  “치열한 자유는 아무런 원군도 없는, 원군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그가 죽기 2개월 전, 그는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있었던,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토해냈다. 지인들은 그 날 밤 김수영이 술을 먹고 몹시 슬프게 울었다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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