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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작품

민족시혼 이육사 / 생애와 작품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05.16|조회수2,232 목록 댓글 0

민족시혼 이육사(李陸史)

 

 

이육사의 생애 연보

 

 

 

1904년 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 )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 이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1964년 음력 4월 초4일 환갑을 맞아 장조카 동영(東英)이 시비 건립 운동을 펴서
신석초(申石艸)·이효상(李孝祥)·조지훈(趙芝熏) 등의 협조를 얻어

 <이육사 선생 기념비 건립 위원회>를
조직하고, 시집을 『청포도』라 개제하여 서울 범조사에서 9월 15일자로 다시 발간하다.
8월 16일 안동에서 육사 시비 건립 기념 강연회를 가지다.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안동 낙동강 가에 「육사 시비(詩碑)」가 제막되다.
그 전날 <추모의 밤>이 경안 극장에서 열리고, 또 추모 강연회(연사 : 노산 이은상)가
안동예식장에서 각각 성황을 이루다. 시비 전면에는 유시 「광야」를 새기고

비문을 조지훈(趙芝熏)이 짓다.
그리고 전면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쓰고 뒷면 글씨는 배길기(裵吉基)가 쓰다.

 

1974년 미발표 유고 「바다의 마음」과 난초 그림 두 폭이 새로이 발굴되다.
이것은 육사가 직접 신석초(申石艸)에게 준 것으로서, 그동안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다가
<나라사랑> 16집 특집을 계기로 처음으로 찾아낸 것이다.

 몇편의 한시(漢詩)도 석초가 등초해 두었던 것이다.
작품의 연대는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同人) 때로 추정된다.

 

 

 

 

 이육사 사진, 유품

 

 














 



 

<출처: 한국시연구협회 / 시인학교>
 

 

 

이원록(李源祿) 선생[1904.4.4 ~ 1944.1.16]

 

                                                                                                  

                                     .   1925.  의열단(義烈團) 가입
                                     .   1932.  한국군관학교 수료(중국 남경)
                                     .   <청포도> 등 민족시(
民族詩) 30여 편 발표
                                     .   1944. 1.  옥중(
獄中) 순국(중국 북경)
                                     .   1990.  건국훈장 애국장 추소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육사(陸史)의 시() <광야>(曠野)의 한 귀절이다. 복국의식(復國意識)과 광복(光復)의 열의(熱意)속에 점철된 삶을 영위한 선생은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항일투쟁(抗日鬪爭)으로 무려 17회에 걸쳐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민족 저항시인으로서 민족혼을 일깨웠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신의(信義)와 의리가 강한 선비로 알려지다 

  

 1904년 4월 4일(음) 경북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원촌리(遠村里) 881번지에서 아은처사(亞隱處士)인 부친 이가호(李家鎬)와 모친 선산인(善山人) 허형(許衡)의 딸 허길(許佶) 사이에서 5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
眞城)이며 본명은 원록(源祿)이나 후에 원삼(源三) 또는 활()이라 하였으며 자()는 태경(台卿), 아호는 육사(陸史)이다.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용모는 청수하고 깨끗한 선비형으로서 한번 사귀면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신의와 의리가 강하였다.

  

12살이 되던 해에 조부 이중직(李中稙)이 숙장(塾長)이었던 예안보문의숙(禮安普文義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7세가 되자 대구로 이사하여 시내에 있는 교남학교(
嶠南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듬해에 영천에 살고 있던 안일양과 혼인하였다.

  

영천에 있는 백학서원(白鶴書院)에서 학문을 연수하였으나 끊임없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여 1923년에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동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가 1925년에 귀국하였다.

  

의열단원 윤세주에 감화되어 의열단에 가입 활동중,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붙잡히다

   

그 당시 중국에서 국내에 들어와 일제(日帝) 주요기관 등을 파괴,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르던 유세주(尹世冑)의 의열투쟁에 큰 감화를 받은 선생은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가맹(加盟)하였다.
   

당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중국 길림(吉林)에서 북경(北京)으로 이동하여 의열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북경에 왕래하며 국내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軍資金)을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북의 경찰, 헌병, 관공서 직원 등을 총동원하여 과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색 검거하게 되자 선생은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이때 미결수 번호가 64번이었는데 이때 수감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하였다.
   

일경은 선생의 형을 이 사건의 지휘자로, 선생은 폭탄운반자로 그리고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나, 일본 대판(大板)에서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게 되자 2년 4개월여 간의 옥고를 끝으로 석방하였다.
출옥후 선생은 윤세주가 경영하는 『중외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지도 등에 힘썼다.
   

선생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게되어 요양하고 있을 때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북경으로 가던 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심양(瀋陽)에서 김두봉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후 다시 귀국하였다.

  

노신(魯迅)을 만나고 남경(南京) 한국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다

  

  1932년 6월초 중국 북경에 가서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 : 중국 혁명원로인 楊杏佛 장례식)에서 노신을 만나게 되어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으며, 후일 노신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뒤어들기로 결심하고 1932년 10월 22일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교장 김원봉, 남경 소재)에 입교하였다. 이 훈련반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재학당시 장개석에게 요청하여 설치한 한국 청년간부 속성 양성기관이었다.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배양에 중점을 두고 총기사용법 등 군사훈련과 정치, 경제, 철학 등 정신무장과 교양 함양을 위한 과목으로 편성하였으며 훈련기간은 전시(戰時)를 고려하여 6개월 간으로 하였다.
  
 

교관은 한국인 20여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지원부서에 약간명의 중국 군인이 파견되었다. 교생 전원은 합숙, 수용되고 교내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토록 하였다.

 

 선생은 이 학교 제1기생 정치조에 소속되어 6개월 동안 비밀통신, 선전방법, 폭동공작, 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고 1933년 4월 23일 수료한 후 상해, 안동, 신의주를 거쳐 귀국하여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 국내 민족의식 환기, 국내정세조사 등의 비밀임무를 띠고 활동중 1934년 5월 22일 서울에서 일경에게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민족시인으로서 <청포도>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이때 선생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의열단의 밀명(密命)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에서 이탈할 것인가 하는 결단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시와 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복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문인으로써 새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선생은 정치, 사회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생활을 하여 1935년 『개벽지』(開闢誌)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하였다.
  

 다음해인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 시인으로서 출발하여 <해조사>(海潮詞), <노정기>(路程記) 등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작품과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비판 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絶頂),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작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과 같은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인문평론』, 『문장』 등지에 게재하였고 이어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을 『인문평론』, 『문장』, 『냉광』 등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1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조선어말살정책을 강행하고 일본식 창씨를 강요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을 폐간시키는 등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하에서 선생의 건강은 아주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문필생활은 의연히 계속되어 <파초>(芭蕉), <독백>, <자야곡>(子夜曲) 등의 시를 지었으며, 한편 중국인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글을 발표하던 『문장』, 『인문평론』지 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1942년에는 사실상의 유고(遺稿)인 <광야>(曠野)를 발표하는 등 시를 비롯하여 수필, 평론, 번역 등 매우 광범위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이와 같은 작품 활동속에서 다시 북경으로 갔다가 모친과 백형의 소상(小祥)으로 1943년 5월에 귀국하였으나 동년 7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피체되어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북경감옥」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 고국에 돌아오다

    

무슨 영문으로 붙잡혔는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가족들은 뜻밖에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들었으며 막내 동생 원창(源昌)이 북경으로 달려 갔으나 선생의 유해는 이미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에 의해 한줌의재로 변하여 조그마한 상자에 담겨져 있었다.

  

아! 천애(天涯)의 고아와 같이 일가친척 한사람 임종을 지켜주는 이 없이 이국(異國)에서 유명(幽命)을 달리 하였으니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으리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유해를 받은 원창은 서울에 도착하여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60년 봄에는 선생의 유해가 고향 원촌으로 이장되어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서 고히 잠들게 되었다.

 

                         " 어데다 무릎을 꿇려야 하나 / 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없다."
                                                                                                                                                    <절정에서>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은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연보>에서

   

선생의 시에서 나타나듯 선생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광복의 열의와 복국의식(復國意識)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무한한 사색과 영혼 깊은 곳에서 울어난 선생의 시문은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으며 이 민족에게 한없는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였다.
   

무려 17회에 걸쳐 옥살이를 하면서도 오로지 독립을 위해 의열투쟁 대열에 앞장섰으며, 육신이 쇠약해지자 민족시인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등 암흑기에 주옥같은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이제 선생이 가신지 50주년을 맞이하지만 선생의 위대한 이름은 영생불망(永生不忘)하리라.

 

 

민족시인,저항시인  

 

       

 

 

 

육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육사는 수필 [계절(季節)의 오행(五行)]에서 " 내 동리(洞里)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洞里)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이라고 고향을 이야기한다.  육사가 살던 시절에 이 마을은 백여호가 살아가는 규모였던 모양이다.

 


육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원촌리 - 오른쪽에 낙동강이 보인다
지금 이 원촌리에 이육사문학관이 건립되었다.

 

 

 

육사가 태어난 날은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시절을 보낸다.

 


육사의 수필 [계절의 오행]에 나오는 왕모산이 멀리 보인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 손이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요. 가장 많은 독립유공포상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다. 이렇나 강직한 저항성이 퇴계 학통에서 나왔는데 , 그가 곧 퇴계의 후손이다. 그의 문학적 기질도 역시 퇴계학통의 연장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문학관 가는 길목의 퇴계 종택
 

 

 

육사의 집안은 저항성이 강한 성격을 보였다. 이곳 원촌은 하계와 함께 항일 투쟁사에 우뚝 선 마을이다.  하계 출신 예안 의병장 이만도는 일제강점에 단식으로 순국항거한다. "친일적인 행위나 태도를 인정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고와 생활자세가 돌연변이로 어느날 갑작스럽게 만들어지기 힘든 일이다. 정신적 틀, 전통적 규범이 육사를 길렀다"라고 김희곤 교수는 쓰고 있다.


 

 

맏형인 원기는 대구로 이사 후 부모를 모시고 동생을 거느리며 어려운 살림을 도맡았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펼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가난하고 힘든시절이었다.  육사의 형제들은 우애가 대단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한다.

 


육사의 여섯형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원촌리 집 -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사라지고 없다
그 집터 자리에 청포도 시비가 쓸쓸히 추모객을 맞고 있다.



 

 

마을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다. 육사는 어린시절 동리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보면서 흰 돗단배에 대한 시상(詩想)을 키웠으리라. 지금도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가로 가서 둑길을 걸으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느껴져 온다.

 

 

 

 

      이육사가 1927년 중국 베이징을 다녀온 후 독립활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대구 전체를 뒤흔든 거사가 발생하였다. `장진홍 의거'가 바로 그것이다. 1927년 10월 18일 11시 50분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중앙로)으로 신문지에 쌓인 폭탄이 배달되었다. 이것을 확인하던 직원이 놀라서 길거리에 내놓았을 때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에서 일경은 장진홍이란 인물은 물론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거짓 진범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하여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 그리고 이정기도 함께 검거되었고, 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육사 형제들은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겼다.

      그런데 애당초 육사를 비롯한 인물들이 장진홍 의거에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은 거사 후 1년 4개월이 지난 1929년 2얼 14일에 주인공 장진홍이 일본 오오사카에서 체포되면서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진홍에 대한 예심이 끝나던 그해 5월까지 장기간 미결수 생활을 하고,  12월에 가서야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그들이 이 거사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바로 그들이 석방된 판결문 내용, 즉 `(검찰이) 공판에 회부한 범죄의 혐의가 없다'는 데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결국 혹독한 고문으로 붙인 죄목에 억지로 꾸며낸 시나리오로 육사 형제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동안 육사 형제들이 장진홍 의거에 참여했다고 알려지거나 기록된 것은 잘못된 일이다   

      장진홍은 1930년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일제에 의해 욕된 죽음을 당하기보다 자결을 선택한다. 장진홍은 그해 7월 31일 자결 순국한다.

       

      억울한 감옥살이 끝내고 『朝鮮日報』(1930. 1. 3)에 발표한 첫 시

 

< 출전 : 『朝鮮日報』(1930. 1. 3) >
-김희곤 교수의 [새로쓰는 이육사 평전]에서-

 

 

 

 

육사는 이른바 '대구격문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된다.

 

이 거사는 1929년 11월에 터진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과정에서 대구에서도 1930년 1월 중순에 동맹휴학이 시도되었고, 이어서 6월에도 동맹휴학이 단행되었다. 그러다가 10월에 대구농림학교가 동맹휴학했고, 1931년 1월에는 대구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에 1930년 11월에 대구 거리에 일본을 배척하는 내용의 격문이 전봇대에 나붙고 거리에 뿌려지는 거사가 일어났다.

 

육사는 바로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동생 원일과 함께 체포되었고,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저 막연하게 전해지던 이야기가 원기의 편지로 인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육사가 억울하게 근거없이 체포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신문배달원을 시켜 격문을 거리에 붙이게 했다는 증언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육사의 형 원기가 이영우에게 1931년 1월에 육사와 원일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는 소식과 도움을 요청한 편지

-김희곤 교수의 [새로쓰는 이육사 평전]에서-

 

 

      육사는 대구 격문사건으로 2개월간 옥고를 겪은 후 1931년에 다시 중국에 가서 김두봉과 만나고, 33년 국내로 잠입하기 위해 상해에 들렀을 때, 그는 중국의 문호요 사상가인 루쉰(魯迅)과도 만났다. 이 해에 의열단에서 운영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하게 된다. 그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밀양 출신인 윤세주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윤세주를 말하려면 김원봉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고 김원봉과 윤세주를 말하려면, 그리고 이육사의 민족해방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열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의열단은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1919년 11월에 중국 길림성의 파호문 밖에서 김원봉·윤세주 등 13명이 모여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육사와 그의 처남 안병철을 포함한 20명의 1기생들은 1932년 10월 20일에 입교식을 가졌다. 나머지 6명은 뒤에 별도로 입교하여 1기생은 모두 26명이었다. 이 학교의 교관은 20여명이었고, 그중 중국인이 3명이었다.


      그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의열단에는 결코 가입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이수기간은 1932년 10월 20일부터 1933년 4월 20일까지 6개월이었고, 입교생들은 재학중에 학원(學員)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국민군 보통병사의 상위로서 견습사관의 대우를 받고 졸업 2∼3개월 후에는 소위로 임관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에 취침하기까지 교양과목과 군사학을 교육받았다. 교양과목으로는 정치학(교관:韓某), 경제학(교관: 왕현지), 사회학과 조직방법(교관:김정우), 철학(김원봉)을 배웠고 그외 군사학, 통신법, 선전법, 연락법 등을 비롯하여 탄약, 폭탄, 도화선, 뇌관 등 제조법, 그리고 투척법, 피신법, 변장법, 서류은닉법, 삐라살포법, 암살법, 무기운반법, 철로폭파법, 열차운전법 등을 교습받았다.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들의 졸업식은 1933년 4월 23일 학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졸업식에는 교장 김원봉과, 남경중국일보 사장인 캉저(康澤)과 비밀공작법을 가르친 시에중용(協中庸) 등이 참석했다.  식이 끝난 후에는 연극이 공연되었는데, 이 공연에서 육사는 <지하실>이라는 대본을 썼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졸업후 육사는 국내의 노동자 농민에게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것과 2기생 모집을 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는 귀국 후 언론활동을 통해서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의열단은 제1기생들의 재학 중에 교관이나 입학 때의 소개자를 통해 그들의 혁명의식을 확인한 후 극비밀리에 입단을 권유하고 이에 응한 사람에게는 가입맹서를 하게 했다.  제1기 졸업생들의 중요한 사명이 의열단 지부를 조직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면 혁명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모두 의열단에 가입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제1기생들이 학교를 졸업한 약 2개월 후인 1933년 6월 말, 의열단 전체회의가 남경의 혁명간부학교에서 개최되었고, 여기에 참가한 제1기 졸업생 단원 18명의 명단이 있으나 그 속에 이활의 이름은 없다.

-김희곤 교수의 [새로쓰는 이육사 평전]에서-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된다.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일본경찰의 기록에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있다.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1934년 6월 20일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된 신원카드 사진

 

 

      "배일사상, 민족자결 ,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당시 육사가 체포된 곳은 광화문 앞 본정에 자리한 경기도경찰부 경성본청이었다. 이 때 작성된 신원카드가 남아있어, 이를 통해 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신분은 상민으로 기록되어있다. 그의 키는 5척4촌5분인데 1척을 30.3cm 로 계산하면 165cm 이므로 당시의 보통 키에 해당한다.


1934년 6월 2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작성된 신원카드

 

 

      그가  베이징에서 귀국할 때 무기를 반입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계획을 세운데에는 1940년대에 들어 국내에서는 독립군적인 조직들이 나타나고 있었던 점과 걸음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943년 7월에 그는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향마을인 원촌과 안동풍산에서 일박하고 상경한 뒤,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된다. 부인 안일양은 7월에 동대문 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보았다고 전한다.  20여일동안 구금생활을 치르다가  "딸 옥비에게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딸의 볼을 얼굴에 대고,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20여일 후 베이징으로 끌려갔다.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육사와 같은 마을 출신이자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친척 이병희(여)가 육사의 마지막을 정확하게 증언해 주었다. 육사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는 연락을 듣고  이병희는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가서 관을 인수하고, 급히 빌린 돈으로 화장을 치렀다. 그 유골이 든 상자를 이귀례라는 친구집에 두었다. 순국 후 9일 지나 1944년 1월 25일에 원창에게 넘겨졌다. 유해는 국내로 옮겨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그의 고향마을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이육사 대표 시모음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출전: 『文章』(1939. 8)>

 

 

 

                      잃어진 고향 / 이육사


                          제비야
                          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
                          저노픈 재우에 힌 구름 한쪼각

                          제깃에 무드면
                          두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 않겠지

                          그야 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법하이.



 

 

 

 

  산 / 이육사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날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드려 오고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




 

 

 

 

  바다의 마음 / 이육사

 

물새 발톱은 바다를 할퀴고
바다는 바람에 입김을 분다.
여기 바다의 은총(恩寵)이 잠자고잇다.

흰 돛(白帆)은 바다를 칼질하고
바다는 하늘을 간질여 본다.
여기 바다의 아량(雅量)이 간직여 있다.

낡은 그물은 바다를 얽고
바다는 대륙(大陸)을 푸른 보로 싼다.
여기 바다의 음모(陰謀)가 서리어 있다




 

  한개의 별을 보자 / 이육사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十二星座)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꼭 한 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親)하고 그 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未來)를 꾸며 볼 동방(東方)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地球)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地球)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軍需夜業)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沙漠)의 행상대(行商隊)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火田)에 돌을 줍는 백성(百姓)들도 옥야천리(沃野里)를 차지하자

다 같이 제멋에 알맞는 풍양(豊穰)한 지구(地球)의 주재자(主宰者)로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地球) 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生産)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 보자
영속(▩粟)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찬연(餐宴)엔
예의에 끄림없는 반취(半醉)의 노래라도 불러 보자

염리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神)이란 항상 거룩합시니
새 별을 찾아가는 이민들의 그 틈엔 안 끼여 갈 테니
새로운 지구(地球)엔 단죄(罪) 없는 노래를 진주(眞珠)처럼 흩이자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의 십이성좌(十二星座) 모든 별을 노래하자

출전 - 『風林』(1936.12)>




 

 

 

  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約束)이며!

한 바다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출전 : 『自由新聞』(1945. 12. 17)



 

 

 

 

파초 / 이육사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芭蕉)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추겨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즈막 날엔
기약(期約)없이 흩어진 두낱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女人)들의 잡아 못논 소매끝엔
고은 손금조차 아즉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때마다
잊었던 계절(季節)을 몇번 눈우에 그렷느뇨

차라리 천년(千年)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비ㅅ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여지세

출전 : 『春秋』(1941. 12)




  

 



  교목 /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셔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어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내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속 깊이 거꾸러저
참아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SS에게 ----
출전 : 『人文評論』(1940. 7)>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여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자야곡 / 이육사

 

수만호 빛이래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나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잖으면 못살이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최소리

숨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듸찬 강맘에 드리느라

수만호 빛이랴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출전 : 『文章』(1941. 4)




 

 

 

 

노정기 /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여진 배쪼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틔끌만 오래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였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것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프러 올랐다.

항상 흐렸한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쌋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즌 소라 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드려다보며


출전 : 『子午線』(1937. 12)




 

 

 

 

황혼 / 이육사

 

내 골ㅅ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黃昏)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메기들 같이도
인간(人間)은 얼마나 외로운것이냐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鍾)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쎄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ㅅ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黃昏)아 내일(來日)도 또 저-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정정(情情)히 사라지긴 시내ㅅ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五月의 病床에서-

출전 : 『新朝鮮』(1935. 12)>

 

 

 

안동은 유난히 다른지방보다 포도가 많은 곳이다.

따로 특별히 포도를 제배하는 곳은 딱히 없을지라도 왠만한 가정이라면 으레

포도나무 한그루씩은 가지고 있다.

시인 육사 이원록선생처럼 고향이 안동인 필여의 고향집에도 포도나무가 세그루나 있어

매년 7월이 되면 포도가 더욱더 푸른 빛을 띠고 있다.

이러한 고향의 정겨운 모습과 그 정취를 육사선생은 청포도라는 시를 통해 그대로 잘 표현하였다.

그러나 육사 선생은 고향에 대한 향수에 의해서만 청포도라는 시를 쓰지는 않았다.

청포도라는 시에는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끈끈하고도 절대 끊어지지 않는 민족정신의 기상이

듬뿍 들어있다.

육사선생의 시들은 대부분 민족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그의 사상에서 나오는 생각들이 만들어낸 시문과 같이 그의 인생또한 빼앗긴 민족과 나라를 찾기 위해 살다간 파라만장한 인생이었다.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그는 1904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활活, 원록原祿,원삼源三 이며 자는 태경台卿이다.
육사선생은 본관이 진성으로서 조선시대 최고의 대성리학자 퇴계이황선생의 14세손이다.

아버지는 퇴계선생의 13대손 이가호李家鎬옹이었고 어머니는 김해허씨 허길許吉여사이다.

허길 여사는 구한말, 고종황제가 강제퇴위당하자 군사장으로 13도 창의군을 이끌고 의병을 봉기한

왕산 허위 선생의 종질녀이다.

왕산선생의 친족은 항일투쟁의 대표적인 집안인 고성이문 종손 석주 이상룡 선생과도 혼인관계를 이루었으니 석주 선생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가 바로 왕산선생의 종손녀이며 육사와는 이종사촌이 된다.

왕산의 집안, 석주의 집안은 모두 당대최고의 명문거족이었으나 안위와 영달을 모두 뒤로 하고서 조국광복의 대도에 그대로 일신을 바친 집안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난 육사는 퇴계선생의 혈통을 이어 받은 자손답게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대단했으며 국권을 강탈당한 시기에 태어나 나라를 되찾자는 구국운동에 대한 집념또한 대단했다.

그 일례로 그의 필명 육사가 그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때 부여받은 죄수번호가 264여서 그 264 번호를 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육사라는

필명에 담긴 뜻은 일본 역사를 찢어 없애겠다는 강력한 항일투쟁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중국자전에 따르면 육사陸史의 육은 죽일 戮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육사는 영남학파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가문의 후손으로서  22세의 나이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의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서

일본의 고관대작들을 암살하거나 관공서를 폭파하는 의거를 행하는 단체이다.

의열단의 의미는 정의正義의 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뜻인데, 적극적인 태도로 일본 왜놈들의 세력에 항거하여 조국의 광복을 성취해야겠다는 강력한 의지 또한 담겨 있었다.

특히 의열단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으며,

백범 김구선생, 단재 신채호선생, 심산김창숙선생, 우사김규식선생등이  고문으로 있었고 

초창기 단원에는 김원봉선생, 윤세주, 신철휴선생등 13명이 있었다.

육사 이원록 선생이 맹렬한 정의의 실천을 행하는 의열단에 가입할 수 있었던 배경은

모두 그의 집안이 사상적으로  남인[퇴계]학파에 소속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남인학파의 본향 안동은 예로부터 충과 의를 숭상한 지방이었으며

늘 나라가 위태로우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많은 선비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그 예로 임진왜란이 그러했으며 이는 구한말과 일본침략기시대에서 또한 이어졌다.

이것은 임진년 왜란의 시대와 일본침략기시대. 두시대가 서로 연결되어진 역사의 지속성은

바로 안동의 영남학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역사의 지류가 흘렀던 추로지향 안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본원지로서 수 많은 항일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고 그들은 모두 퇴계학파라는 한 울타리 아래 혈연과 학연으로 얽히고 설켜 있었다.

석주 이상룡선생, 일송 김동삼선생, 백하 김대락 선생, 척암 김도화선생, 동산 류인식선생, 추산 권기일선생,단주 류림 선생 등등 이루 헤아릴수 없는 수 많은 안동의 항일지사들은 조국과 고향을 뒤로 한채 해외에 나가 조국의 광복에 헌신하였다.

그 중심에 퇴계학파가 있었고 그 속에 육사선생이 있었던 것이다.

 

1926년 육사선생의 23세의 나이로 중국 북경으로 사거 북경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 육사선생이 부여받은 죄수 수인번호가 공교롭게도 육사선생의 호와 발음이 같은 64였다.

선생은 석방이 되자 다시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중국최고의 사상가이라 할수 있는

노신魯迅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열망을 불태워 나갔다.

1933년이 되자 선생은 귀국을 하였고 육사라는 필명으로 [황혼] 이라는 작품을 <신조선>에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하고 시작외에도 논문, 시나리오까지 집필하였다.

또한 친분이 있었던 중국인 노신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고 1937년에 이르러서는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불후의 명시 [청포도靑葡萄],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의 주옥같은

시를 발표하였다.

선생은 1943년 4월에 중국에 방문 하였다.

육사는 중국을  방문하기전 석초 신응식申應植에게 중국 북경행을 밝히고 당시 한글사용이 규제받자 한시漢時만 발표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으로 건너간 육사는 중국에서 국내로 무기를 반입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으며, 모친과 큰형의 소상에 참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그만 서울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고 북경으로 압송되어졌다.

그는 압송된 후 북경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 구금되었고 1944년 1월 16일 새벽....

41세의 나이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파라만장한 생을 마감하며 순국하였다.

그후 친척 이병희 여사에 의해 그의 시신이 거두어졌고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이 되었다가 1960년 고향 안동으로 이장되어졌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1년 6개월 만에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조선의 광복이 이루어졌다.

비록 외세에 의한 광복이었고 머지않아 조선은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어버린 비극적인 역사를 맞이했지만..

 

광야를 향해 백마를 타고 달리는 超人을 그린...육사 이원록..

그의 인생 그 자체는 그야말로 조국을 위해 유형과 무형을 모두 다 바친 일생이었고

오직 조국광복을 향한 일념에 가득찬 삶이었다.

그는 늘 올곧은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목가적이면서도 웅혼에 가득찬 장엄한 필치로 민족부활의 염원을 담아냈다.

늘 나라를 되찾겠다라는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육사..

그는 외로운 길을 걸으면서도 묵묵히 의로운 참선비의 도리를 다 한 전아한 영남학파의 선비였다.

더욱이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오직 나라를 되찾는 그 한길을 위해  대의를 이루는

실천을 행하며 그 올곧은 정신을 지켰던... 육사 이원록....

그가 세상을 떠난지 어언 61년이 되었고 이제 민족의 해방을 맞이한지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진정 육사를 비롯한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바라고 원하는 민족정신의 회복과 조국의 완전한 광복은 아직 진행중에 있으며 그 분들의 숭고함과 그 의미는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다.

물론 그 많은 숙제들을 완전히 해결해야 할 몫은 후세들인 우리에게 있으리라.

해방을 맞이한지 어언 60년이 흐른 지금......

 선대가 피땀 흘려 뿌린  겨레의 씨앗은 역사의 밭을 한 걸음 한걸음 일구고 있는 후세가 열매로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선대가 피땀 흘려 세상에 뿌린 그 씨앗은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겨레의 혼과 정체성을 온전히 정립할 바른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이육사(李陸史)의 시세계 


 

1904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예안 보문의숙을 거쳐 중국에서 군관학교 및 북경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고 등단했으며 「청포도」(1939) 「절정」(1940) 「자야곡」(1941)을 『문장』에 발표하였다. 신석초, 윤곤강 등과 「자오선」「시학」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무장항일단체인 의열단에 가담하여 3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지사로서의 자리도 뚜렷히 남겼다. 1944년 작고 후 『육사시집』(1946)이 간행되었다.



1. 서 문


육사 이원록은 1933년 무렵부터 시를 발표하여 한권의 시집을 남겼다. 아우 이원조(李源朝)의 말과 같이 빈궁과 투옥과 유랑의 40평생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으나, 30세 때에 비로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첫작품은「황혼」(<신조선>,1933)이다. 사후(1946) 그와 함께 '子午線(1937) 동인이었던 신석초(申石艸)등 4명'서'를 쓰고, 아우인 평론가 이원조가 '발'을 쓴 「육사시집」(서울출판사,1946)이, 이어「청포도」(범조사,1964),「광야」(형설출판사,1971)등이 간행되었다.


이육사의 시는 양적으로 얼마 되지 않지만, 많은 주목을 받고 있고 많은 연구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작품의 가치 자체에도 있지만 그 보다는 탄압이 극심했던 일제 군국주의와 중요 작가들이 친일 체제 문학 ㅈ고을 기울었던 식민지 시대 말기에, 그만은 끝까지 독립 투사로서의 지조를 지키고, 일제에 의해 수차 체포.투옥되는 수난을 겪으면서 마침내 북경 감옥에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옥사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글에서는 전기적 사실에 치중하지 않고, 작품의 자율성을 전제로 하여 그의 시집 전체의 구조분석을 통해서 정신세계의 공간적 체계와 그 시적 특성을 살펴 보고자한다.


첫째, 이글에서는 이육사 시 전체의 일관된 공간 구조를 분석하여 정신의 체계적 특성을 고찰한다. 그의 시의 일관된 공간 구조는 크게 '다원공간(복합공간)과 '단일공간'으로 구별되는데 이 두 공간 구조는 이육사의 정신세계ㅢ 체계와 상응한다.


둘째, 이육사의 공간의식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시간의식을 내포한다. 그의 공간의식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합 단계로 상승하는 과정을 갖는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그리고 이 모든 단계를 총체적으로 통합하는 단계는, 현실의 모순극복에서 이상 실현으로,현실주의에서 이상주의로 상승하는 자기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고통,슬픔,상실,절망 등에 대한 상황의 체험을 바탕으로 높은 레벨의 이데올로기적 리얼리티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육사의 공간 의식의 제1단계는 '물'의 공간이다. 이것이 제일 낮는 단계다. 제2단계는 '물'에서 한단계 상승한 물(평지)의 공간이다. 평지에 속하는 모든 사물들(고향,사막,길,나무 등)의 세계가 이 단계에 속한다. 제3단계는 평지에서 한 단계 더 상승한 '고원'이다. 평지인 현실세계의 극한 상태이면서 동시에 가장 하늘과 가까운 높은 공간이다.


제4단계는 산이나 고원에서 한단계 더 상승한 '하늘'이라는 보편적 공간이다. 한없이 높고 푸른 보편적 세계인 하늘을 비롯하여 태양,별,구름,조류 등의 세계가 여기에 속한다.


제5단계는 이 모든 공간의 레벨을 하나의 총체적.우주적 상징 체계로 통합한 사계다. 이 통합 세계는 보편적 진리인 형이상적 의미가 암시되는 이상 실현의 가능성을 가장 밀도 있게 형성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2. 공간과 시적 주체 관계


1)다원공간


'다원공간'에서는 구조상의 몇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 시적 자아가 현존하면서 실제로 체험되는 공간과,체험되지 않은 공간이 공존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단일한 큰 공간 내에서 그 공간 속의 분립된 작은 공간에로의 이동 현상이 발견된다. 말하자면 큰 공간 속에 복수의 작은 공간들이 유기적으로 내제한다. 셋째, 모든 공간에서 시적 주체의 의미있는 삶의 행위들이 존재하고 있다.


공간속에서 사물들만이 현실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것 이 아니라, 그러한 사물들과 더불어 반드시 행동하는 주체가 어울려 식민지하의 암담한 상황을 암시하는 정신적 .상징적 의미의 다이너미즘을 보여준다


내 골ㅅ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받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중 략.....


제-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세멘트 장판 우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 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황혼」의 제1,제3,제4연


작품「황혼」의 공간은 '골방', 즉 큰 방의 뒤쪽에 딸린 작은 방,갇혀있는 협소하고 답답한 방이다. 골방은 추방되었거나 소외된 단독자인 시적 자아가 현존하는 장소로서, 이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12성좌의별,격리된 수도원이 있는 삼림, 수인들이 유폐되어 있는 시멘트 장판방,행상대들이 낙타를 타고 다니는 고비사막,문명을 등진 토인들이 사냥하는 아프리카의 원시 삼림지대-이러한 넓고 다양한 여러 공간들이 복합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 주체가 현존하면서 황혼을 받아들이는 공간은'골방'뿐이며, 그 밖의 나머지의 공간은 황혼의 빛의 영역이 확산되어 의미상으로 관련되는 심리적.상상적 공간일 뿐이다. 이 모든 공간이 황혼이라는 동일한 순간에 공존하며,동시에 역사적 현실과는 멀리 떨어져 고립.단절되어 있고 의지가지 없는 장소라는 공통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한 작품 속에 복합적 공간이 내재하고 있지만, 시적 주체가 현존하는 '공간'과 현존하지는 않지만 그 존재조건의 인식에 있어서 그 상황이 유사하거나 의미상으로 관련되는 다른 공간들이 같은 시간에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복수의 공간이 대등하게 공존하는 '다원공간'의 변형으로 볼수 있고,따라서'변형다원공간'이라고 명명해 두기로 한다.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 내ㅅ강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르던 노래는 강건너 갔소

강건너 하늘끝 사막도 다은 곳

내 노래는 제비같이 날러서 갔소


못 잊을 계집에나 집조차 없다가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래ㅅ불에 떨어져 타 죽겠소


사막은 끝 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먹은 별등리 조상오는 밤


-「강건너 간 노래」중 제1-3연


작품'강건너 간 노래'는 내가 노래를 부르던 '앞내 ㅅ강'의 공간과 내 노래가 건너간 강 저쪽의 사막이라는 두 공간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강 이쪽의 공간은 섣달의 밤이며 추워서 강물이 얼어붙은 동토인데 그 동토에서 시적 주체는 노래를 부른다. 아마도 그 노래는 동토의 삶,즉 식민지하의 아픔과 모순을 고발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의지와 꿈일 것이다.


그 노래는 얼어붙은 강을 건너'사막'으로 울려 퍼진다. 즉 죽음의 사막을 생명의 세계로 회복하려고 하는 상황의식을 담고 있다. 그 노래는 제비같이 날아가기는 갔지만 '어린날개'가 지쳐 어느 모랫불에 떨어져 타 죽을 것이며. 그 사막을 덮고 있는 푸른 하늘에서 슬픈 별들이 조상 오는 밤이라는 것이다. 시적 주체는 강 이쪽의 동토에 존재하지만 그가 부른 노래는 그 강을 건너 저쪽의 '사막'으로 날아가서 거기서도 그 노래의 염원이 실현되지 못하고 떨어져 타 죽는다.


회의주의 내지 비관주의의 시다. 강 건너 저쪽의 사막에는 시적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자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노래'가 상징적 으미를 지니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강건너 간 노래」는 앞의 「황혼」과는 달리 변형이 아닌 그대로 '다원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2)단일공간


한 작품이 하나의 공간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단일공간' 또는 일원적 공간이라고 한다. 이 육사의 작품에는 거의 대부분 시적 주체의 행동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그 주체의 환경 또는 배경으로서의 장소가 다 단일한 것일때, 엄밀한 의미에서 '단일공간'으로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이 복수인 다원공간과는 대조가 된다.


시 「호수」,「자야곡」,「교목」등은 모두 '단일공간'의 작품이다. 그 만큼 이미지나 의미가 흩어지지 않고 응집되어 독자에게 주는 효과도 단일.단순한 것 같다. 시적 주체가 복수로 드러나고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이 단일한 경우도 가정할 수 있느나, 이육사에게는 이런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내여 달리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 씻은 듯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로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것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어 흑흑 느끼는 밤


-「호수」중 제1,2연


「호수」는 배경이 되는 공간이면서 이 시의 의인화된 주체이다. 단일공간이면서 단일주체라고 할 수 있다. 어디든 달리고 싶은 염원이나 의지가 있지만 그리고 백조를 불러 날려보내도 하지만 '호수'는 호수라는 한계조건을 끝내 벗어날 수 없어 눈을 감고 명상이나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일 공간 속에서의 페쇄 또는 유폐의식과 그러한 구속에서 해방되고 싶은 염원의 좌절이'명상'하는 자세로 전환되고 있다.


암울하고 짓누르던 식민지 시대 상황 속에서의 소외와 좌절에서 오는 삶의 한 국면을 상징한 것이다. 이육사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거나 중립상태로 두지 않고 휴머니즘이나 역사적 상황의식의 반영이나 상징으로 표현한다.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건만

노랑나비 노잖은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자야곡」중 제1연


「자야곡」은 조국의 상실과 연결되는 고향의 황폐화,고향의 상실을 읊은 것이다. 고향이라는 단일공간이 단일대상으로 되어 있다. 고향은 하나의 마을로서 국가라는 체제와 민족 공동체라는 큰 공간의 집단으로 확대될 수 있는 작은 공동체적 상징성을 갖는다. 나비도 날지 않는 무덤과 같은 고향은 이미 고향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했고, 식민지하의 타자가 되어 버린 고향이다.


시적 주체는 그러한 고향과 동화되어 있으므로 별도의 존재로 행동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연기가 돌아가는 항구나 옛날의 들창이나 달과 강이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고향이라는 단일공간 속에 내재하는 사물이다.


작품「광야」는 광야라는 단일공간으로 형성되어 있지만 이 광활한 단일공간 속에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복합적 시간과 더불어 하늘,산맥,강물,매화 등의 여러 사물 공간들을 내포하고 있다.앞에 든「호수」나「자야곡」같은 단일공간은 폐쇄적이거나 황폐화된 현재의 비관적 모습이지만,「광야」의 공간은 그런 것을 극복한 미래의 유토피아로써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총체적으로 통합된 단일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3)공간과 시적 추체


다원공간이건 단일공간이건,그것이 절대공간이나 기하학적인 추상공간이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서의 공간,시적 주체의 삶이 현존하며,그 삶이 그 상황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이육사의 시적 공간의 특징이다. 즉 바람직한 삶이건 바람직하지 못한 삶이건 간에 이육사 시의 공간은 객관적 무기적 공간이 아니라,인간이 있는 휴머니즘적 공간,상징화된 역사가 내재하는 그 속에는 고통,수난,좌절,절망,방랑,죽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주체적 의지에 몸부림과 더불어 꿈,염원,희망,이상이 있는 세계이다. 시의 바깥에 있는 식민지화한 조국의 현실 및 역사의 모순이나 부조리와 병존하면서, 그것을 반영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육사의 시의 공간에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아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황혼」,「청포도」,「연보」,「여정기」등에 보이는 일인칭 화자인 '나'는 곧 시적 주체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 자신이라고 할 수 있고,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일제에 의한 타자화를 거부하는 '민족적 자기'인식의 주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작품속의 시적 주체를 통해서 인간 이육사 자신의 현실적인 삶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역사주의자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형식주의 일변도로만 나아갈 필요는 없다. 이육사 시의 공간에는 '나'라느 시적 주체 외에 다른 사물들 즉 동식물이 등장한다.'식물'이나 '동물'이 단지 객관적 사물에 지나지 않느냐,그렇지 않으면 시적 자아나 역사적 상황의 싱징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런데 식물이나 동물 또는 그밖에 다른 자연의 사물이 의인화되어 그 작품의 중심적인 대상으로 등장하는 경우에는 시적 자아나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의 '식물'이나'동물'또는 그 밖의 사물은 그 작품의 배경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주체의 역사적.현실적 의미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처럼 게을러 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중 제1연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교목」중 제1연


어느 사막의 나라 유폐된 후예의 넋이기에

몸과 마음도 아롱져 근심스러워라


-「반묘」중 제1연


위 시들은 모두 식물이나 동물이지만, 인격이 부여된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이 상징이 배경이 되고 그 배경 속에 시적 주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징 자체가 바로 그 작품의 내적 외적 이미지로 다시 말하면 상황 속에 인격적 주체나 다름이 없는 차원에서 행동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에서는"나는 파초다","나는 한 그루 고목이다","나는 한 마리의 반묘다"라는 명제가 묵시적으로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파초'나 '교목'이나 반묘는 시적 대상의 레벨에서 시적 주체의 레베로 다시 시인자가의 레벨로 격상될 수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3. 물과 뭍의 공간, 고원, 하늘, 통합의 공간


1)물의 공간


이육사 시의 전체를 구성하는 정신적 공간 내부의 하이어라키를 살펴볼 차례다. 거러한 계층의 가장 낮은 공간은 '물'의 레벨이다. 이육사 시에는 종교와 과련된 작품이 거의 없으므로 물(바다,호수,강)이하의 하강 공간,즉 지하나 지옥의 세계로 더 내려가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도 하강,추락,죽음,상실의 이미지들이 있지만,그러한 부정적 이미지의 하위 공간은 수면의 레벨에서 끝난다.


이 시인의 내면에 정착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엇볼 수 있다.


(A) 큰 강 목놓아 흘러

여울은 흰 돌쪽마다

소리 석양을 새기고


-「소년에게」중 3연


(B)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 냇ㅅ강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르던 노래는 강건너갔소


- 「강 건너 간 노래」중 1연


(A)의 강은 목놓아 울면서 흐르고, 그 여울은 흰 돌쪽에 '석양'을 새기고 있다.

기쁨과 희망으로 평화롭게 흐르는 에덴의 강물이 아니라,자기(또는 민족적 자기)의 삶의 아픔이나 한을 목놓아 울면서 기슭의 바위에 포말로 부서지는 좌절의 강이다.


(B)의 '강'은 대낮이 아니라 밤의 강이며, 쨍쨍 얼어붙은 동토의 상황으로서 시적주체가 이러한 동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는 강 저쪽으로 건너가 그곳의 불모지를 소생시키는 힘이 되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지게 된다.


이육사의 강은 생성과 발전을 보장하는 흐름의 연속체가 아니라 포말로 부서지는 단절의 이미지이며,재생의 노래도 강 저쪽으로 울러 퍼져서는 소멸되는, 말하자면 아픔과 죽음에 이르기위한 경계나 계기가 되어 있다. 식민지하의 역사적 현실과 상징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C)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로 밀항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호수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렀던 밤 암초를 벗어난 폭풍과 싸워가고

전설에 읽어본 호반도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이 비쳐주지도 않았다,


-「노정기」중 제2,3연


(C)의 공간은 '바다'이지만, 여기서도 '강'과 마찬가지고 삶의 긍적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젊음의 보람과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삶의 현장이 아니다. '짱크'를 카고 이역으로 밀항하고,태풍이 위협하며,남십자성마저도 비치지도 않는,방향을 잃은 도피나 고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품「독백」에도 '바다'의 공간이 보이지만 갈매기처럼 유랑하고,선창마다 푸른 막을 치고 향수의 촛불을 태우며,밤마다 무지개만 사라지게 하는 절망적인 이미지다.


(D)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참아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교목」중 제3연


(E)때로 백로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했지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어 흑흑 느끼는 밤


- 「호수」중 제2연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혹한 세월에 불타면서 성장한 교목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호수'속에 깊이 거꾸러지는 모습은 너무도 처참하다.(D)'호수'는 현실의 모든 삶이,암담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모든 염원이 좌절되어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상징이다


(E)의 '호수'는 삶에 대한 역기능의 의미만 지니고 있고,초극의 비상의 꿈꾸지만 그것도 좌절되며 삶을 등지고 돌아 누어 자주빛 안개에 싸여 흐느껴 우는 것이다.


2)뭍의 공간


이육사의 시의 공간의 제2단계는 '뭍'이다. 물의 레벨에서 한 단계 상승하면 뭍, 즉 대지나 평지의 레벨이 된다. 뭍이라고 해서 물의 레벨과 완전히 구별되는 공간이 아니라 사실상'물'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한 단계 상승한 연속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뭍에는 태어나고 성장한, 그러나 소외된 텅 빈 '고향'이 있고,지평선 너머로는 불모의 '사막'이 있으며, 고난과 비정적인 역정을 상징하는'길'이 있다.


(A)?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처럼 발목을 오여쌌다

-「여정기」중 제4연


(B)첫사랑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연보」중 제4연


?기고 지친 물의 공간에서는 그리운 것이 지평선이겠지만 그 지평선에 상륙하자 마자 더러운 물이 썩어서 고인 시궁치가 열대 식물처럼 발목을 구속한다. 발목이 오여싸이면 자유로운 보행이 안되고 활발한 삶의 행동이 저지되기 마련이다. 그리운 지평선도 결국은 역기능적인 바다의 연장에 지나지 않다. 바다 끝이 뭍에 닿는, 물과 육지의 경계 지대에 '항구'가 있다. 출발지요 기착지이며 낭만이 있지만 그 낭만도 덧없이 흘러가고 오히려 눈물이 섞인 술로 타락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뭍에는 고향이 있고, 고향은 조국이 내재된 제유다. 「자야곡」에 보이는 고향은 찬란한 '수만호의 빛'으로 번창해야 할 고장이나, 지금은 나비 한마리도 찾아들지 않는 절망적인 무덤이요, 그 위에 이끼만 푸르다. 슬픔과 그리고 자존심을 삼키는 꿈만 있고,옛날의 들창에는 짠 소금이 저려 있으며,바람과 눈보라가 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니 독주나 마시며 덧없이 돌아가는 발자국 소리만 공허하게 울리는 공간일 수밖에 없다.


(C)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 길 우에

간 ㅅ잎만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친다 해도

쇠사슬을 자아 맨 듯 무거웠다

-「연보」중 제6,7연


(D)내 골ㅅ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 드리노니

-「황혼」중 제1연


뭍에는 고난의 역정을 상징하는 '길'이 있고,죄수처럼 고립.유폐된 '골 ㅅ방'이 있다. 작품「연보」에는 어릴때 버려졌던 돌다리목,강 언덕의 마을, 텅빈 고장,그리고 혹한의 서릿길과 눈길이 있다. 소외와 고독과 허무와 고난만이 있는 공간이다.


골방은 비록 황혼을 맞아들이는 때도 있기는 하지만 갈매기처럼 외로운 곳이다. 현실로부터 격리.단절.소외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황혼을 통해서 삼림속의 수녀,세멘트 장판 우의 수인,고비 사막의 행상대,그리고 아프리카 녹음 속의 토인과는 삶의 근원적인 조건에서 서로 연결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타지화된 어두운 역사적 현실 공간과 병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3)고원의 공간


평지인 뭍에서 한 단계 높은 공간이 '고원'이다. 고원은 현실주의의 지배를 짙게 받는 평지에서 벗어나서 하늘이나 태양이나 별에 더 가까이할 수 있는 상승 세계이다. 따라서 이 레벨에서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의 극복이나 타자의 지배로부터의 초월이 가능한 형이상적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지점이다.


이육사의 경우 평지의 연속으로서 핍박을 받아 ?기는 막다른 지점이기 때문에 극복과 초월을 위한 형이상적 노력을 시도해 보나 불가능한 지점으로 나타난다. 이육사 시의 압권이라고 볼 수 있는「절정」은 평지인 뭍에서 한 단계 더 높은 그러나 여전히 뭍의 레벨이 상징하는 삶의 고통이나 절망의 극한 상황을 제시한다.


이 절정의 고원은 극복도 초월도 불가능한 바다와 뭍의 연장선상에 있는 그 불가능의 강도가 점증하는 더 높은 레벨의 공간일 따름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미춤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끓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전문


이 "절정'의 상황은 최후의 의존처이며 형이상적 실재인 하늘도 끝나고 계절도 죽음인 혹한의 겨울이며, 사람이 살기 어려운 북방의 극지로서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고 더 이상 생존유지도 어려운 곳이다. 진퇴유곡, 절체절명의 이 공간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기도나 어떤 순응의 자세를 취해야할 텐데, 이 절박한 위기의 상황은 그런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지점을 내어 주지 않는다.


이육사의 시에서 무지개의 이미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바다에서나 뭍에서나 ?기고 혹은 도피하고 위축되는 상황 속에서도 무지개의 이미지는 긍정적인 의미를 암시한다. 비록 종교적 신앙의 밑받침은 없으나 육사의 시에 일관되는 긍정적 이미지다.


(A)무지개 같이 황홀한 삶의 영광

죄와 곁드려도 삶즉한 누리


-「아편」중 제5연


(B)그리고 새벽 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여지세


-「파초」중 제7연


(C)밤은 옛ㅅ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데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 건너 갔소


-「강 건너 간 노래」중 제5연


(A)의 무지개는 황홀한 삶의 광영과 어울릴 수 있는 긍정적 이미지다. 그리고 무지개와 같은 황홀한 삶의 광영은 죄오 동반해도 살만한 보람이 있다.


(B)의 '무지개'느 새벽 하늘 어디에 무지개가 서고 그 무지개를 밟고 이별한다면 이별도 반드시 슬프거나 절망만은 아닐 것이다.


(C)에서는 아름답고 고운 '무지개'가 비유의 한 구성부분으로 도입되어 있다. 무지개는 황홀한 광영의 삶이며, 이별조차도 기쁨으로 전환시킬 수 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것이 표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원의 공간에서 볼수 있는 무지개는 이육사의 역사적 상황속의 미래에 대한 초월적, 형이상적, 심미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4)하늘의 공간


이육사 시의 공간의 가장 높은 마지막 단계는 '하늘'이다. 하늘에는 태양, 별,달과 같은 이미지들이 있고, 갈매기나 백조와 같은 비상의 이미지들도 있다. 물에서 고원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단계의 공간은 모두 하늘 아래에 있다. 이육사의 시에 물 이하의 지하나 지옥 공간이 없는 것과 같이 하늘 위에 별도의 형이상적 천국 공간은 없다.


이육사에게 는 유교 외의 어떤 신앙이나 종교적 체험이 없었던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교적 현실주의, 인문주의에 자기의 설 자리를 설정했던 것이다.


(A)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절정」중 제2연


(B)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먹은 별들이 조상오는 밤

-「강 건너 간 노래」중 제3연


(C)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청포도」중 제2연


(D)까막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광야」중 제1연


위에 시느 모두 '하늘'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A)(B)에서의 '하늘'은 현실이나 역사의 부정적 의미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한 의미로 상징되어 있다.

(A)에서는 '하늘'이 하늘로서의 절대적,보편적 원리로 존재하지 못하고 북방의 극한 저점인 고원에서 끝나므로 한계가 있고 (B)에서는 사막을 덮고 푸른 하늘이 오히려 눈물먹은 별들을 조상하듯이 내려보내고 있으므로 구원의 원리가 결여된 하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C)(D)의 하늘은 새로운 세계의 개벽이나 창조를 암시하는 근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같이 이육사의 시에서 보여주는 '하늘'의 상징 체계는 무한과 유한,완전과 불완전의 이중 구조임을 알 수 있다.


5)통합공간


앞에서 물->물->고원->하늘로 이르는 각 레벨의 공간 상징을 단계적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한편의 작품이 물이면 물,뭍이면 뭍이라는 명백한 구획을 그은 공간 구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편의 작품 구조속에는 이 모든 레벨의 공간이 뒤섞여 공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불과 20여편 남짓밖에 안되는 이육사의 작품을 이같이 각 공간 구조의 레벨로 체계화해서 고찰한다는 것은 한편에서는 그의 작품의 흐름이나 전체 구조를 훼손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는 그의 치열하고 고매한 정신의 상징 체계를 명백하고 정연하게 질서화 하여 제시할 수 있다.


만약 한편의 작품 속에 각 공간 레벨이 다 들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이육사의모든 작품이 다 통합된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타자화로 전락된 어둔 역사적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의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상징공간만 통합된 공간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여기에 해당되는가장 중요한 작품이 "청도포""광야""꽃" 등이다. 이 세편이 이육사의 대표작이다.


(A)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ㅇ려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은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청포도」중 제3,4연


(B)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광야」중 제1연


(C)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바울 나리잖은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꽃」중 제1연


이상 3편은 모두 물-> 뭍-> 산맥 ->하늘 등 공간의 점진적 상승 레벨 전체를 통합한 세계를 보여준다. 통합공간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A)의 "청포도"에서는 '하늘'과 '바다'가 상하의 계층질서를 암시하면서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고 있다. 때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그 청포도는 마을의 전설이요, 염원하는 보편적 진리의 하늘이 꿈꾸는 풍성하게 결실된 상징이다. 시적 주체와 더불어 이 청포도의 향연에 참여할 객체는 청포를 입고 하늘 밑에서 가슴을 연 바다로 곱게 밀려오는 흰 돛단배를 타고 올 것이다.


청포도에는 가장 높은 공간 레벨인 하늘의 질서 아래 바다,고장의 공간레벨 그리고 그곳의 시적 주체와 객체 모두가 미래가 실현되는 간소한 향연의 축제에 참여하는 이상적 상징 세계가 통합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B)의 "광양"에서도 가장 높은 보편적 질서와 공간인 하늘이 맨 먼저 열리고 그 아래에 산맥과 마을과 그리고 다시 그 아래의 바다와 강물들의 여러계층의 하위 공간들이 하늬 새로운 이상적 상징 세계로러 통합적 공간을 이루고 있다.


눈이 내리나 매화 향기가 이 공간 전체에 스며 확산되고 있으므로 시적 주체는 '노래의 씨'를 뿌려야 할 계절이다.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탄 초인이 있을 것이고 그 초인이 이 광야에서 그 노래를 목 놓아 불러 장중하게 울려퍼질 이상세계는 완성될 것이다. 이러한 이육사의 통합적 공간 세계는 유구한 시간과 더불어 규모가 크고 웅장하고 광활한 민족적,우주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C)의 '꽃'에서도 가장 높는 질서와 공간인 하늘과 꽃과 뿌리를 내린 땅과 북쪽의 쓴드라,그리고 용솟음치는 바다라는 상하 계층의 여러 공간들이 통합된 하나의민족적,우주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방이 하늘이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거나 북쪽의 눈이 내리는 동토에서도 새로운 세계의 소생과 창조를 약속하는 꽃이 핀다.


기적적으로 빨간 꽃은 피어나 하늘과 땅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는 상하의 계층관계를 연결할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바다가 생명의 근원적 상징인 '꽃'을 중심으로 통합된 공간이 우주적,보편적 의미를 지니고 형성된다. 꽃은 온갖 타자들의 적대적 탄압과 폭력에도 죽지 않는,생명의 영원한 보편적 진리요 아름다움이다.


이상의 3편의 작품은 가장 높은 보편적 질서인 하늘의 공간 아래에 물 ->뭍->산맥 등의 상하 계층의 다양한 공간이 하나의 우주적 공간으로 형성되고 있다.


4. 결 말


이 글은 이육사의 시 전체를 '공간'체계의 관점에서 분석해 본 것이다. 이육사 시의 공간에는'단일공간'과 '다원공간'이 있다. 단일공간은 시적 주체와 그 배경이 단일한 것을 말한다. '다원공간'에는 시적 주체가 현존하는 공간과 시적 주체가 현존하지 않으나 그 주체의 회상이나 어떤 사물과의 관계에 의해서 연결되는 공간이 다원적 .복합적 으로 존재한다.


'변형 다원공간'이다. 시적 주체가 내부에서 이동하면서 형성된 복수의 공간이 병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순수 단원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육사 시에는 물->뭍 ->고원 ->하늘로 상승하는 4단계의 상징 공간이 있다. 이러한 단계의 레벨은 서도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속선상에서 상하 계층의 체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각 레벨의 공간은 삶의 현실,특히 군국주의와 식민지 현실이 상징적 체계로 반영되어 있고,동시에 그러한 타자화된 현실 속에서의 극심한 삶의 갈등 체험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육사의 대표적인 작품은「청포도」「광야」「꽃」이다 물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 및 시간의 레벨을 통합한 이상주의적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현재,미래의 시간까지 통합된 이 작품은, 현실의 꿈과 의지를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자아와 민족 또는 인류가 새로운 세계로 통합된 비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출처 : [기타] 도서:한국현대시인 특성론(국학자료원,2000)>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서  

 

육사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이 개관 되었다(2004. 7월)

육사문학관은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 시인 이육사(이원록:1904~1944)선생과 관련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모아 지은곳

이곳에는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 하여 놓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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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문학관(도산면 원천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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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문학기념관(건너편에 왕모산성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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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시비 :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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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문학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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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문학관 내부(청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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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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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생가터(불미골)

 

<자료: 안동고29회 / 보안관>

 

 

 

 

원촌을 찾아가는 길, 이육사 유년의 흔적

         (글/한경희-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1. 사람의 발이 낸 길, 고불고불 도산가는 길


 

한 인물이 태어나서 자라고 살았던 자리를 찾는 기행은 즐거운 일이다. 적어도 그 인물과 관련된 뭔가가 남아있거나 적어도 주위 사람들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좀 이름을 드러내서 기념할 것들이 명성을 얻어 위상을 갖추고 있다면 더욱 많은 이야기가 이미 즐비할 수도 있다. 또, 현재의 시간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물이라면 선별해서 그 인물을 회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찾아보고자하는 안동의 대표 인물 가운데 이육사는 그 흔적도, 후일담도, 그를 추억하는 고향사람들도 귀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인물이 너무 오래전 과거의 사람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인물의 특별한 삶이 오늘의 이 추억의 공백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그래서 이육사라는 한 인물을 추억해낼 수 있는 관계의 공간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를 역사 공간에서 호출해내고 그의 실존을 충분히 찾아갈 공간은 또 넉넉하다. 역사적 인물로서 부여한 의미를 호출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이육사라는 인물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풀어놓고 있지 않은가. 다만, 구체적 사실들의 부정확성에 대해 정확성을 기하는 작업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 인물을 두고 서사적인 공간에 생명성을 부여하는 일이야말로 인물의 실존을 해석할 여지를 언제나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후손으로 이어지는 선대의 기록과 삶을 통해 한 인물을 조명해내는 일을 떠나서, 단지 자연조건을 대상으로 인물의 흔적과 삶의 의미를 되짚어보기를 시도하는 일이 바로 이 글의 갈 길이다.
길을 나서는 글, 기행의 글은 문자로 쓰인 책을 떠나서 새로운 구성을 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새로운 내용으로 한 인물을 재구성한다고 하기에는 역부족이기도 하다. 이미 많은 정보를 통해 구성되어 있는 인물을 두고, 아니 그 인물의 관점에서 고향으로 불리는 공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므로 그리 낯설고 새롭게 해석된다는 보장은 사실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인물이든 고향과 특별한 심정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보이지 않는 그물망처럼 엮인 그 타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므로. 그 소중한 체험들의 세계를 짐작하는 한 방법이 바로 길을 나서서, 그 길 위에서 생각하는 방식의 글쓰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길을 나서서 쓰고자 하는 인물의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엄밀하게 길을 가면서 드는 생각의 단편과 그 단편이 고향과 만나서 어우러져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세계이다. 매우 유동적이고 열려진 세계이기 때문에 그간의 정리된 인물세계에 대한 이야기와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가질지 헤아릴 길도 없다. 완전히 새롭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존의 정리에만 연연해하지 않는 그 지점에서 길을 가는 미덕이 있다. 길이 주는 변화의 세계, 변화의 속도가 충분히 앞일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형태, 즉 변화의 속도를 짐작하면서 낯선 길이 눈에 들어와도 그것이 길이기 때문에 별로 낯설지 않을 수 있는 세계. 길 위에 서 있거나 혹은 길을 간다는 것은 바로 이 친숙한 거리감이 확보되는 지점을 즐기는 일이다.


도산으로 향하는 길은 대단히 고불고불하다. 구불구불한 길이라 하기에는 도로 폭이 많이 좁은 편이다. 그 굴곡의 규모가 고불고불하여 어린아이들의 동화로 전해지는, 꼬부랑 할머니가 살았을 거 같은, 정겨운 길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자연과 친하면서 사람에게 편안한 길은 바로 이 꼬부랑길이 아닐까. 사람의 발이 낸 길, 그 길의 역사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고갯길을 따라가 본다. 그 할머니일지, 맨 처음 어느 분의 한 발자국이 오늘날 2차선 아스팔트길로 이어진 건지 그 길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다. 번다하지 않게 생활 속에서 조용히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아마 자동차가 아니라, 실제 그 꼬부랑길을 걸어본다면 길에서 느낄 수 있는 서정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좀더 빠른 속도로 달리자고 덤비니 고불고불한 길은 불편하기만 하다. 아니 위험하다고까지 느낀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본다면, 길가의 말라붙은 산수유 열매며, 강단 있는 겨울나무며, 여러 이름 모르는 풀들이 얼마나 반갑게 보일까를 생각하면서 길을 나선다. 

 


2. 흙과 바람과 하늘 아래 서서 본 원촌


도산에 도착했다고, 예안을 지나쳤다고 나선 길이 끝나지 않는다. 저 멀리 온혜온천으로 청량산으로 보이지 않는 길은 뻗어 있었다. 저곳에 도착하면 또 강원도를 향한 이정표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길은 담담하게 그 지속된 연결망을 조용하게 안고 있을 것이다. 그리로 달려가 보는 것도 오늘 궁금해 찾아온 인물의 넓은 보폭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퇴계선생이 즐겨했다는 청량산 산행처럼 이육사 선생의 여정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육사야말로 세계인으로 경계를 넘어 길을 나서서 길 위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행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으나, 먼 대양에서, 낯선 이국에서, 중국에서, 또 어디론가 흘러 다녔던 그의 여정의 출발지는 이곳 원촌(遠村)이 아닐까.

누구나 자신의 끝없는 길에 서서 막연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막연함과 처연함을 더한 그 마음을 길 걷기에서 느끼는 걸 적당히 즐기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길을 걷는 행복론을 쓴 러셀의 삶도 이 처연함에서 길러진 힘일지도 모른다. 삶의 한 모습을 마치 길이 보여주기라도 하듯 적절하게 담담하기, 혹은 적절하게 무심하기를 알려주는 것도 길이다. 경계인이 되어 세상으로 열린 길이란 길은 다 걸을 작정으로 살았을 이육사 선생의 길도 여기 원촌에 와야 느낄 수 있다. 고향은 길을 처음 열어내는 기운이며 길을 내는 의지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 곳곳에서 그리운 대상으로 그렸던 고향, 원촌에는 도대체 무엇이 깃들어 있을까.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혹은 멀리 큰 바다를 떠돌 때도 고향을 잊지 못한 그리움의 진원지는 원촌에 있었다. 또, 어머니에게 있었고 그리운 고향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 그리움의 진실은 모두 민족으로 회귀하는 근원을 가진 것이었을까. 그리움의 깊이에는 언제나 고향을 배경으로 하는 사물과 사람들의 어울림이 묻어난다. 여기에 독립을 향한 절절한 개인의지까지 보탠다면 그리움은 공적영역까지 확대되기 마련이다. 수필에도 보이는 그 단단한 금강심의 경계를 이 원촌에서 키웠을 것이리라. 누군가 1970년대 여성지에 쓴 회고문에 보면 이육사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저 수필 어느 한 귀퉁이에 언뜻 보였던 순이를 매우 주관적으로 해석한 여지가 충분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에게 근원적 상징을 가지는 것이므로. 그 흙과 바람과 하늘 아래 서서 원촌을 보는 일을 시도해보련다.


어떤 화석이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원촌으로 간다. 이육사의 고향, 원촌으로 가자면 언제나 도산서원을 지나가야 한다. 이제는 좀 질러가는 길이 닦여 큰 도로로 가지 않고, 도산서원 길로 들어와서 고개로 넘어가게 되면 원촌과 도산의 물굽이가 하나로 만나서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유장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이육사 이전의 역사도 그 이후의 역사도 다 보았을 것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묵묵하게 흐르거나 얼어붙어 있었다. 낙동강 상류 물이 돌아드는 이 풍경이 결국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은 장면이었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어린 이육사에게도 돌아드는 물굽이의 유장함은 특별한 체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 새로 닦인 고개를 넘으면 바로 퇴계종택이 나타난다. 주위에는 인가가 전혀 없고 오롯하게 고즈넉하게 작은 도랑을 마주하고 서 있는 우뚝한 퇴계종가를 지나서 다시 언덕을 올라간다. 안동 인근의 시골길이 다 고불고불하지만 이 원촌길도 만만치 않은 굽이굽이 돌아드는 길이다. 이 언덕길을 내려가면 바로, 이육사문학관이 나타나는데 그 오른쪽으로 당집이 보인다. 원촌 마을 사람들은 이 고갯길을 들고 날 때 이곳에다가 짐을 부려놓고 염(念)을 담아두고 그랬을 것이다. 아주 키 낮은 당집은 자물쇠가 문고리에 그저 걸려 있고 잠겨있지는 않았으나 감히 그 당집 문을 열 용기는 없었다. 낙엽이 쌓인 길을 밟으며 그 앞에 서 봤지만 감히 어느 곳에도 직접 손을 대보지는 못했다. 무릎을 굽혀서 당집 안을 기웃거렸지만 틈새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당집에서 굽어본 원촌의 들판은 한겨울 풍경에도 넉넉하였다. 굽이굽이 돌아들어온 시골마을에 환하게 지평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3. 세속의 번잡함을 멀리해서 ‘먼 데’


원촌마을에 들어서서 넓은 들을 한참 쳐다봤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원촌을 “먼 데”라고 부른다는데. 저 멀리 들어오는 왕모산이나, 넓은 들녘이나 크게 멀어보이지는 않는데 이 동리 이름은 도대체 어떤 연고로 “먼 데”라고 불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생가 터에 보니 동리이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퇴계 선생 5대손 이구라는 분이 이 마을을 개척하고나서, 세속적인 출세, 현실적인 경제력 등을 멀리하고 한가한 시골에 은거하면서 마을 이름을 원촌으로 불렀다고 한다. 결국 멀리한 것이 세속의 번다한 명리에 있었고, 그 뜻을 새겨두기 위해 마을이름을 원촌으로 불렀던 모양이다. 군자에게나 가능한 ‘항산과 항심’(恒産, 恒心)을 체득했을 유유한 인물을 헤아려 볼만 하다.

2004년에 개관한 이육사문학관이 있는 곳에서 뒤쪽으로는 이육사 묘소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는 이육사 선생의 원래 생가터가 있던 자리이고, 그 앞으로는 넓게 밭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병풍처럼 둘러쳐진 왕모산 산줄기에 칼선대가 우뚝 서 있다. 이제는 도산청소년수련원이 된 폐교된 학교까지 가보면 낙동강 상류가 흐르고 그 위에 원촌교가 놓여 있다. 이 물줄기의 흐름은 도산서원 앞으로 굽이굽이 흘러갈 그 물임을 쉽게 연결시킬 수 있다. 원촌교 다리 위에 서면 강물이 산쪽으로는 얼어붙고, 강 중심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산 그림자에 묶인 강물은 하얗게 얼어있고, 산그늘에서 떨어진 강의 중심은 그 흐름에 힘이 서려있었다. 멀리 시야로 이육사문학관도 생가터도 눈에 들어왔다.


원촌마을의 겨울 풍경은 조용하고 한적하였으나 이육사 선생의 집터로 가는 길가 대나무는 푸른 기운을 품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바람이 불어와 그 댓잎들이 서로 부비며 내는 사각사각거리는 소리는 아주 듣기 좋았다. 푸른 기운이 묻어나는 소리를 듣는 일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손님이 아니라서 더욱 기쁘게 들었다. 새로 훤하게 뚫린 도로는 이육사 선생의 생가 터와는 거리를 두고 나서 이 집터는 훨씬 아늑해져 있었다. 그곳의 청포도시비, 육형제를 기리는 기념비, 원촌마을을 알리는 소개의 글은 세월을 건너뛰어 오늘의 우리들에게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퇴계선생의 14대손인 이육사의 형제는 육형제이다. 어머니 허씨 등 기념비에는 육형제의 이름이 지목되고 괄목할 업적을 정리해두었다. 이육사의 맏형인 일하공이 육형제의 우애를 기려 당호를 육우당(六友堂)으로 지었다고 한다. 댐 수몰로 육형제의 생가는 태화동으로 이전되었다. 시비 뒷면으로 돌아가 보면 김종길 시인이 지은 비문 내용이 나온다. 출생지인 원촌에 시비를 세워 선생의 짧은 생애를 아쉬워하는 간략한 이육사 선생의 일대기가 있다.


생가 터에는 청포도 시비 전문이 돌에 새겨져 있다. 시 청포도에는 중의적인 청포(靑葡/靑袍)가 있다. 시를 보면 음력 칠월, 한여름 청포도가 달고 맛있게 익어갈 무렵, 먹음직스런 포도를 아주 곡진한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시인은 지치고 힘든 몸이더라도 청포를 입고 자신을 찾아온다던 손님의 약속을 떠올린다. 손님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시인은 은쟁반의 정갈함과 모시수건의 살뜰한 배려를 통해 만나고 싶은 마음을 아껴가며 드러낸다. 청포 입은 손님을 향한 세심한 배려와 그리운 마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시적 표현이다. 얼마나 절묘하게 그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지 시인은 은유의 세계에 살다가 그 세계에서 스스로 몸을 녹이는 장인이라고 할만하다. 마을의 전설을 먹고 자란 포도의 영근 알알은 먼 바다로부터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는 대상이다. 간절히 기다리는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다소곳하게 드러난다. 이 시를 두고 포항 사람들은 송도로 요양 갔던 사실에 주목, 시비를 만들어뒀다고도 한다. 기다림은 ‘은쟁반의 모시수건’ 같아야 하거늘 포항사람들의 마음은 간절한 것이었을까, 긴요한 것이었을까.


집터였던 자리에서 사진을 찍으며, 잔디를 밟아보고, 여름 한철 짙은 그늘을 드리울 덩굴을 쳐다보았다. 겨울은 온몸을 도사리며 새로운 생명의 시간을 준비하는 시간인 것 같다. 사철 푸른 상록수들도 봄철, 여름철의 몸과는 온통 다르다. 당연하지만 몸이 품는 색과 기상이 다르다. 또, 겨울나무들은 얼마나 우둘투둘한 몸으로 찬 바람을 견디는가. 마치 강인한 지사의 정신은 이 겨울을 통해 길러지는 거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쥐똥인지, 새똥인지 기념비에 찍어놓은 그들의 발자국에 웃음을 던지고, 포도알처럼 보이는 조각물을 들여다보며 그리움의 단편 단편을 찍어 보았다.

4. 고향의 풀, 나무, 물, 흙이 빚어낸 이육사


문학의 이름으로 혹은 역사의 이름으로 한 개인을 불러내서 기념하는 일이 어쨌든 한 인물의 소중한 삶에 대한 후대인들의 당연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의미를 짓고 있는 이 모든 이름의 중심에는 인간을 향해 있는 덕목이 있음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국가의 이름으로, 유교이념의 이름으로, 개인의 사명감으로 한 개인이 견고하게 걸었을 길을 제대로 상상해내기에 벅차다는 생각까지. 힘들다, 상상적인 구성이야 겨우, 이 고향이란 공간에 머물며 자연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 흙과 바람과 산과 들판이 주는 무한한 상상력이 원촌이란 이육사의 고향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진지하게 기념의 의미를 떠올리는 와중에 너무나 반가워하는 강아지를 만났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고 허리까지 뛰어오르는 것이다. 사진 찍기에 방해를 받을 정도로 강아지는 사람구경을 오랜만에 하는 것처럼 살갑게 군다. 몸집이 작은 강아지라면 적당히 어를 수 있었으나 덩치가 제법 되는 녀석의 계속되는 반가운 인사가 언제 맹수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변할지 몰라 두렵기만 하였다. 빈 집을 지키는 강아지는 목이 풀려 있어서 마음대로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었고, 어미 개는 새끼가 걱정스러운지 계속 짖었다. 강아지가 반갑게 다가올수록 어미 개는 더욱 소리 높여 짖었다. 그 까닭은 아무래도 나를 불안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강아지가 두렵고, 어미 개는 내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들의 고요한 정적을 깬 것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원촌 너른 들판에는 이제 농사지을 채비를 하느라 밭에는 더러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 밭에는 뽑혀지지 않은 배추가 그대로 얼어 있었는데. 작년 배추값이 얼마나 하잘 것 없었는가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었다. 어디를 가나 먹고사는 일은 힘들다는 걸 실감하는데, 농사짓는 시골로 가면 우리의 농정(農政)이란 게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흉년이 들면 당연히 수확량이 적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풍년이 들면 저렇게 밭에다 그대로 세워두고 버려야하는 일을 겪어야한다니. 참 이해가 안된다. 아마도 저 얼어붙은 배추들은 거름으로나마 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시절을 돌아보면 모든 세계는 가족으로 통했다. 가족 안에는 막강한 가부장 아버지가 계시고, 그 많은 가부장의 소문을 잘 정리하는 따뜻한 어머니가 계신다. 그 분들의 혼과 정으로 태어난 몇몇의 아이들. 어린시절은 이 아이들과의 한판의 투쟁과정이다. 자신은 어떤 아이이며, 대체로 가족 안에서 어떤 아이들이 자라며, 동네는 어떤 아이들이 목소리가 컸으며 등. 그중 대화가 제대로 통하던 유독, 특별한 어떤 아이. 그 아이와의 관계들. 그곳이 아이에게는 최초의 사회이자, 최초의 학교였다. 이 아이였을 시절의 추억과 기억이 어울려 고향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고향이 주는 의미는 자연적인 풍경과 그 풍경 속에 많은 이야기를, 그것도 관계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에 있다. 누구나 그 한두 가지 이상의 이야기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한 고향이 있을 것이다. 꼭, 강과 산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 아니라도, 야산에 그치는 순한 마을이든, 고작 봇도랑이 지나는 야트막한 동네이든 상관없이 고향이 된다. 심지어 아스팔트 거리에서 바람처럼 흩어져 사는 도시태생 사람들에게도 그곳 어딘가가 자라난 곳이라면 그곳이 특별한 공간이 된다. 신화에 닿을 것도 없이 매우 개인적이면서 소중한 기억을 가지는 법이다. 그래서 다들, 고향에 대해 정서적인 유대감을 지니는 있는 것이다.


고향에 특별한 애착이 있는 사람일수록 가족 구성원 자체에 매이지 않고 가족을 포함하는 친구범위로 무대가 확대된다. 그 무대는 방을 나와서 마당을 지나 담을 넘고, 다른 집으로 이동하고 친구를 불러내서 그 둘 모두에게 익숙한 공간으로 이동한다. 이 친숙한 나눔을 오랜 시간 지속한 추억은 유년을 지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가치는 거기에 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얼마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함께 누렸던 시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고향은 각별할 것이다. 이 뭐라 이름 짓지 못할 아이들의 연대를 아이들은 아이들의 추억시간으로 기억하고 재생하고 장년이 되어서도 추억하는 일을 빼먹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가족을 둘러싼 동네, 고향이란 것이 언제나 현재적인 의미를 생산하고 있다. 비록 현재적이긴 하나 실제 영향력을 미치거나 직접 관계성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추억 속 현실을 필요할 때마다 불러내서 그 현실을 즐겨 생각해보는 정도의 현실에 불과하다. 그 의미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것은 두 번째 문제일 뿐이다. 그렇게 유년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계의 최초의 출발지이다. 이 주어진 유년의 공간과 시간은 유년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그 아름다움은 청년, 장년이 되어서도 노년으로 접어들어도 절대 잊지 못하는 소중한 자신의 보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장황한 고향이야기를 풀어본 까닭은 어린날 이활은 그러니까 이육사란 이름을 얻기 전 유년시절에 원촌 동네를 굽이쳐서 흐르는 낙동강물이나 강변을 거닐면서 참 여러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의 수필에 스케치하듯 써놓은 글을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념이 남다르면서도 강한 집념을 키워낸 바탕도 이 강변이었을 터이니. 고향의 풀, 나무, 물, 흙, 바람 이것들이 한 사람이 성장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굳이, 유명한 정치인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이 필요하다는 책을 내놓은 적이 있다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을 지경이다.


5. ‘먼 데’를 나서며


작가들의 작품을 벗어나서 그 작가로만 묶어두지도 않고, 그저 한 사람으로 바라보기를 시도했다. 길을 걸었던 덕분으로 그나마 특정 작품에 머물지 않은 한 사람을 떠올려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길은 항상 새로운 세계로 누구든지 안내하는 친절한 안내자이다. 길 위에서 넉넉하게 한 인물을 이해해보고, 그 인물이 걸었을 길을 따라 걸어보고, 그 인물이 대단하게 여겼을 가치들까지 짐작해 보았다. 전집에 묶이지 않는다는 것, 그 동안의 평가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유치한 치기일지 모른다. 이미 주목받는 한 사람이므로 그 사람을 향한 길 나서기였다는 그 한계도 인정한다. 그래도 좀더 살아있는 사람으로 다가가는 길은 아니었을까 위로하면서.
우리가 짐작할 수밖에 없는 이육사 유년의 공간 고향, 원촌으로 가서 그 들판과 왕모산과 바람과 햇살을 느끼는 정도에 머무는 글을 써봤다. 글이라기보다는 생각을 멈추고 길을 가는 정도로 맺힌 데 없이 슬슬 다 풀어진 실타래가 되었다. 실몽당이에서 실이 풀릴 때는 옷을 짤 때이다. 길의 이름을 구실삼아 옷은커녕 소매도 허리단도 없는 펀펀하고 넓적한 뜨개질 수준이 되고 말았다. 길을 나서긴 했으나 제대로 접어들지 못하고 멈춘 여정 탓이다. 옷의 윤곽을 잡아가는 뜨개질처럼 길을 나서는 일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안동>

 

 

 

민족의 시혼(詩魂) 이육사의 삶과 문학

                      / 김 천 우  


세상의 밝은 빛이 우주 속에 자리를 잡아가고 신정과 구정의 정점에서 우리는 끝없이 높은 고지를 향하여 달리는 명마의 말발굽 소리와도 같이 새해의 더 높은 깃발은 저 푸른 정상을 향하여 펄럭이고 있다.
새해 문턱에서 가슴 밝히는 애환이 있다면 민족저항시인 이육사의 발자취가 아닐까 한다.

어쩌면 우리들에게 이미 잊혀진 청포도의 상흔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가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1930년대 후반기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친일로 기울어지거나, 아니면 아예 붓을 꺾고 침묵해 버렸다.

일본어가 아니고는 발표조차 할 수 없었던 극한 상황 속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절박한 민족문학의 위기였다.

하지만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항거하면서 겨레의 얼을 지킨 시인이 있었다.

겨레의 사상적인 지표가 흔들리고 단절되려는 시기에 이육사는 목숨으로 일제의 폭정에 항거한 마지막 시인이었다.

이육사, 그는 40세의 짧은 생애를 조국에 바쳐 열열이 살아간 민족의 풍운아였다.

그의 겸허한 얼굴은 언제나 폭풍우 속의 정적과 같은 고요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생애는 혼의 불꽃을 시로 불태우고 시로 승화시키는 처절한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광야>는 그에게 있어 절명사의 느낌을 주었다.

육사라는 아호는 그가 스물 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 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진다.

육사는 투쟁론의 입장 - 글이나 쓰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서 독립 운동을 한 운동가이다.

그러나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이기도 하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 등단하였으나 작품수가 많지 않고 문단 활동도 별로 없었다.

그의 삶 대부분은 만주와 중국 조선을 오가며 살았다.

시대의 질곡(일본의 식민정치)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 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유고 시집으로 『육사시집』(1946년)이 있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다. 육사는 문단의 어느 유파나 동인에 가담하여 작품 활동을 한 자취를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짧은 전 생애를 통해서 오직 독립 투쟁에 바쳐 왔다는 사실은 그가 문단 생활에 전념할 만큼의 정신적 겨를이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시작(詩作)을 위시한 일련의 작품들은 대륙을 내왕하면서 품었던 조국에 대한 무한한 향수, 아니면 조국 광복에 대한 애타는 정의의 재현일 것이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를 생각한다.

그가 남긴 계절을 생각하고 광야를 생각하고 죄수번호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를 지금 다시 만난다.

현재 알려져 있는 34편의 이육사 작품 가운데 대부분의 시에는 일본 제국주의자에 대한 울분과 한으로 응결되어 있다.

1944년에 옥사하기까지 편안할 날이 없이 쫓겨다녀야만 했던 그로서는 34편이 결코 과작(寡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타협을 할줄 모르는 대쪽 같은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짧은 생애를 조국의 광복을 위해 살다가 갔다.

그는 열일곱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1943년 6월에 동대문 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압송되었다가, 그 이듬해 그 곳 감옥에서 조국의 옹글음과 자유를 갈구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 채 아깝게도 숨을 거두었다.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개의 별을
십이성좌(十二星座)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꼭 한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親)하고 그 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 볼 동방의 큰 별을 가지자


한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 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 안에 핏대를 올려 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의 행상대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에 돌을 줍는 백성들도 옥야천리를 차지하자


다 같이 제멋에 알맞은 풍양(豊穰)한 지구의 주재자로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개의 지구 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 보자
앵속(罌粟)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찬연엔
예의에 끄림없는 반취의 노래라도 불러 보자


염리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神)이란 항상 거룩합시니
새 별을 찾아가는 이민들의 그 틈엔 안 끼어 갈테니
새로운 지구에단 죄(罪) 노래를 진주처럼 훗치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 십이성좌 모든 별을 노래하자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흰돌맑음 / 섬하나>

 

 

 

 

 

시인 李陸史 탄생 100주년

                  … 외동딸 沃非씨 단독 인터뷰

아버지를 가장 느끼게 해주는 詩 ‘꽃’을 좋아해
간디처럼 욕심없이 살라고 ‘沃非’라 이름 지어줘

안동=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kikim@chosun.com

입력 : 2004.08.01 18:21 16' / 수정 : 2004.08.01 18:45 03'

▲ 이육사의 외동딸 이옥비씨는 아버지에 대한‘긍지’와 제 자신의‘부끄러움’이란 말과 함께 어머니를 통해 들은 기억들을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안동=이재우기자 jw-lee@chosun.com
- 조선銀 폭탄사건 연루… 陸史 6형제는 독립투사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44)는 강직한 성격에 작은 체구였는데, 외동딸 이옥비(李沃非·63)씨도 아담한 모습이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딸은 내내 “아버지를 빼닮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감옥을 열일곱 번이나 드나들고, 수인 번호 264를 이름 삼을 만큼 강직했던 아버지는 엄동설한의 이국(異國) 북경 감옥에서 광복을 미처 보지 못하고 스러졌지만, 어린 딸은 ‘육사의 딸’로 한평생을 살고 있다. 3년 전부터 일본에 있는 한국 공관 관저에서 요리와 꽃꽂이를 맡아 해주며 지낸 그녀는 육사 탄생 100년 기념행사 ‘광야에서 부르리라’에 참여하러 잠시 귀국했다. “부담스럽다”며 인터뷰를 사양하는 그녀를 온통 ‘육사’에 묻혀 있는 경북 안동에서 만났다.

―‘육사의 딸’로 살아온 육십여년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긍지도 있지만 부담도 많았어요. 국어 시간에 저에게 아버지 시에 대해 묻는 것도 싫었고… 글을 쓰고 싶어도, 학교에서 백일장 같은 게 열려도 피해 갔어요. 전 아버지 시(詩)중 ‘꽃’이 제일 좋았어요. 지금은 아버지가 정말 강인하고 독립투사로서 어려운 삶을 사셨구나 생각해요. 어머니가 참 쓸쓸했겠다, 그런 생각도 갖게 되고요. 이번 축제를 보니 기뻐요. 내가 아버님께 덕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구나 하는 부끄러움도 있고요.”

―어머니가 홀로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집안이 좋았지요. 삼촌들 말씀이 ‘형수님은 교육 걱정 하지 말아라. 우리가 다 시켜서 형님 앞으로 세우겠다’고들 하셨지요. 그런데 6·25 때 작은아버지 이원조씨 등이 많이들 월북하시고, 다섯째 삼촌은 잠시 나갔다 오마 했다가 행방불명됐지요. 어머니는 가문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고 저한테 매우 엄격하셨어요. 저는 결혼하기 얼마 전까지도 매 맞고 컸어요. 딸이 하나니까 혹시나 삐뚜로 나갈까 봐. 돌아가신 지 이제 10년 가까이 되네요. 하숙도 치셨고…, 밥 못 먹은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가 고생 많으셨어요.”

―육사는 여섯형제 간의 우의가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형 있는 데 아우 있고, 아우 있는 데 형 있다고 하더군요.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 났을 때도 4형제가 다 잡혔지요. 큰아버님(원기), 아버지, 원일, 원조, 두 작은아버님 모두요.”

―그 여섯 형제 중 육사 포함해서 세 분이 조선일보 기자를 지내셨지요? 외숙뻘 되시는 이병각 선생까지 하면 모두 네 분이네요.

“어머니도 생전에 그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첫 시 ‘말’을 30년 조선일보에 실으면서 문단 데뷔하셨고 31, 34년에는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기사를 쓰기도 하셨어요. 원조 작은아버지는 35년부터 39년까지 기자로 일하셨다고 해요. 막내 원창 작은아버님은 조선일보 40년 8월 11일자 폐간호에 조선일보 인천 주재기자로 등장한 것을 이번에 여러 자료에서 받았습니다.”

―기자 시절의 아버지는 아주 멋쟁이였다고 합니다. 양복에 나비타이를 늘 하셨다고요?

“아이보리 색깔이었어요. 내가 그게 기억이 나서 어머니에게 맞냐고 물어보았는데 맞다고 하시데요. 서울 시구문 밖 문화촌(현재의 신당5동) 살 땐데, 지금은 그 양옥 집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술을 많이 드시고 늦게 들어오셔도 이불 밑에다 양복을 깔아야 주무셨대요.”

―아버지가 이옥비 여사를 낳을 때는 나이가 드셨을 때죠. 결혼한 지 20년 가까이 되던 해였지요?

“아버지가 열여덟, 어머니가 열여섯에 결혼하셨고 저를 늦게 낳았어요. 두 분이 당최 만나지를 못했으니까요.(웃음)

―육사는 일제 때 감옥을 17번이나 가면서 온몸을 불태워 조국에 바쳤고, 광복 이후엔 여러 정권이 훈장을 추서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 도움은 없었습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아무 것도 없었고…, 3·1절에 은수저 한 벌이 고작이었지요. 박정희 대통령 후반기에 어머니 앞으로 연금이 나왔어요.”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일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이원조씨의 친형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이시죠. 아버지를 기리는 기념 사업에 대한 사명감은 안 가지셨는지요?

“딸이니까 생각을 못했어요. 진성 이씨 우리 가문이 여자들이 나서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사실 내가 컸다면 아버지 관련 자료 같은 것을 많이 보관할 수 있었을 텐데….”

―통일되면 이원조 선생이 가지고 가신 자료도 찾을 수 있겠네요?

“있겠지요. 그분도 그쪽에서 삼 남매를 두셨다는데 사촌들이 제법 갖고 있겠지요.”

―옥비(沃非)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아버님요. 제 백일날 그 이름을 발표하셨데요.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것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기름질 옥, 아닐 비인데, 간디 같은 욕심없는 사람 되라는 뜻이래요.”

 

 

 

 

 광야에서 통곡하기
- 이육사의 저항시 속의 서정성 찾기 -

1. 저항성과 서정성

    사회 비판시나 혁명시들은 대개 직절한 호소와 즉흥성과 격렬성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마야코프스키나 브레히트, 네루다가 그랬듯이 우리 시문학사에서도 카프 시인들 거의가 이런 선동성에 리얼리즘적 창작방법론의 기반을 두었다. 당대적인 급박한 역사 상황과 민중들의 미학적 감수성을 고려하면 성공한 혁명시는 선전 선동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초보적인 기법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특정한 역사적인 정황 아래서는 오히려 선동성이 약한 시는 오히려 서정성의 과잉으로 비판의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일제의 가렴주구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에 박목월의 <나그네>가 무슨 수작이냐고 추궁하는 분노한 목소리는 너무 익히 들어온 터인데, 그럼 이육사의 <청포도>는 이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반문이 나올 법하지 않는가. 임화를 비롯한 열렬한 투사 시인들이 열심히 투쟁가를 부르고 있던 한켠에서 <성불사의 밤>이 나왔는가 하면 <귀촉도>같은 신음에다 <기상도>같은 세련된 작품도 나왔는데, 이런 작품들을 분석 평가할 때 그 시대적인 배경을 도외시해 버리면 엄청난 오류를 빚을 것이다.
당연히 작품에 대한 정확한 객관적인 접근은 시대상과 작가의 생애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해야 되며, 그런 의미에서 <나그네>와 <청포도>는 엄연히 다르며, 작품의 기개 또한 현격하게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터이다.
다만 여기서 따지고 싶은 건 투쟁시 지상주의적인 평가에 대하여 이육사와 같은 서정주의 시가 어떻게 해석 평가되어야 하는가란 문제이다. 근대 시문학사에서 이미 정설처럼 굳어진 민족시인인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5명의 경우, 이들은 당대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고발 비판하는 기능으로만 보면 카프 시인들에게 분명히 뒤지고 있다. 고작해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정도가 그 직정적인 선동성으로 삭제 처분을 받았는데, 대개의 경우에는 이 위대한 민족시인들이 서정시의 범주에 머물렀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물론 이들은 조금씩 그 삶과 투쟁 양식이 다르다. 김소월이 민족적 정한을 표출하는 순수시인의 생애였다면, 만해는 독립운동가와 승려의 신분이었으며, 이상화는 울분과 회한의 일생이었고, 윤동주는 끊임없는 진리 탐구의 구도적 자세로 일관했다. 그런데 이 다섯 중 독립운동사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시인은 이육사였는데, 희한하게도 시에서는 가장 민족의식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쪽이었다는 게 매력을 더한다.
육사는 지하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던 신분이면서도 문학활동에서는 전혀 그런 낌새는커녕 당대의 시인들 시선으로는 그야말로 순수 중의 순수시인이라 홀대받을 소지도 있는 작품만을 남겼다.
이육사는 세계문학사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위대한 저항시인이야말로 위대한 순수시인이다'는 명제를 입증해준다. 흔히들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란 시가 사치스러운 감상벽으로 평가 절하하기도 하는데, 실은 당시 이 시인은 추방당한 고난의 연속 속에서 변혁을 열망했던 시기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텍트주의자들로서는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문학의 향기다. 푸시킨이 이 시에서 삶에 속는다는 것은 소시민적인 사랑의 배신이나 명예, 진급, 가난 따위가 아니라 역사와 조국과 자유와 평등으로부터 팽개쳐진 민중적 고통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맥만으로 본다면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즐기는 나그네가 은쟁반에 모시수건을 걸어두고 청포도를 먹는 풍경이 더 타매해야 될 시인일 수도 있으나, 박목월이 소시민적인 서정적 주체에 섰다면 육사는 민족해방투쟁의 기개와 이상을 품은 서정적 주체였다는 점에서 현격한 변별성을 드러낸다. 물론 이런 전기적인 요인 말고도 각 시인들이 지닌 시세계 전체가 지닌 이미지와 주제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요컨대 저항시는 서정성이 약하다는 명제에 대한 반론으로 이육사의 시를 거론하고 싶은 것이다. 서정시야말로 가장 저항성이 강한 투쟁시가 될 수도 있다는 명제를 입증해준 게 이육사로, 그는 민족시인 5명 중에서도 가장 민족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기개와 절조로 민족적 기상을 기품 있게 강조했던 것이다.

2. 고향 상실, 그리고 별 찾기

    우리 시문학이 고전시에서 근대시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가 자연에 빙자한 인생무상을 노래하던 풍조에서 '향토의 시'로의 변모라고 이우성은 지적했다. 근대시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관념적인 자연이 구체적인 향토로 변모하는 에는 많은데, 이게 다시 더 구체적인 고향의식, 향수로 대체되는 것이 이른바 근대의 표징이라는 진단이다(이우성 <고대시와 현대시의 교차점>).
그런데 여기서 한 발 자욱 더 나아간 것이 국토와 고향 상실과 그로 말미암은 절절한 향수이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향수를 노래한 시가 많은 것은 이런 시대적인 특징인데, 이를 이육사는 특정한 자신의 고향의식이 아닌 민족적 삶의 터전으로서의 국토의 개념으로 고향을 설정한다.
육사의 시를 거론하면 가장 먼저 제기하기 마련인 <청포도>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의 고향 어디에 바다가 있느냐, 그러기에 이 시는 바다가 있는 어디라는 식의 초등학생 문법시간 수준의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그는 고향을 '고장' '마을'이란 술어로 많이 쓴다. 고향 혹은 고장 등의 개념으로 쓴 시는 유명한 <청포도> 말고도 <연보(年譜)>, <자야곡(子夜曲)>, <파초>, <반묘(班猫)>, <해후(邂逅)>, <초가>, <서풍> 등등이 있다.

(1) 나는 진정 강 언덕 그 마을에 / 벌어진 문바지였는지 몰라(<연보>)
고향을 그린 묵화 한 폭 좀이 쳐(<초가>)

(2)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자야곡>)

(3) 고향의 황혼을 간직해 서럽지 안뇨(<반묘>)
지금 놀이 나려 선창에 고향의 하늘보다 둥글거늘(<해후>)

(1)은 육사의 실제 고향을 노래한 대목이며, (2)는 유서 깊은 자신의 가문과 마을 전체를 빗대어 민족적 기개를 상징하고자는 의도가 있다. (3)은 방랑길 어디서든 아니면 어떤 대상을 만나서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이런 여러 형태의 고향을 노래한 항목 속에다 <청포도>를 대입시키면 도시 안 어울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육사가 자신의 고향을 특정적인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식민지적 수탈의 대상인 국토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는 게 오히려 그의 시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사에게 고향은 민족에게 국토와 같은 정착할 대지인지라 그걸 빼앗긴 상태에서 그는 유랑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린다. 그의 시에는 유랑하거나 아니면 유랑 중인 대상을 기다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바로 이런 정황을 형상화한 것이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닲은 몸으로 / 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청포도>)는 유명한 구절이나, "다시 千古의 뒤에 / 白馬타고 오는 超人이 잇어"(<광야>), "한 밤에 찾아올 귀여운 손님을 맞이하자"(<海潮音>) 등의 이미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형국인데, 이건 고향 상실과 함께 사라진 민족 구성원의 상징이다. 즉 국토만 빼앗긴 게 아니라 민족조차도 빼앗긴 실향민 의식이 이런 구절에 절절히 스민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실제의 고향 회상기는 오히려 시에서 보다는 수필 <계절의 5행>이나 <전조기(剪爪記)>, <산사기>, <연륜>, <은하수> 등에 훨씬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유랑하면서 시인이 절절하게 추구한 대상은 주로 하늘과 별이었다. 하늘이란 육사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해외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 서울의 자랑을 무척도 하였겠지마는 오늘의 서울은 아주 그 모습을 볼 숫가 없는 것이오, 거리를 나서면 어느 집이라도 으레 지금(地金)을 판다거나 산다거나 금광을 어쩐다는 간판들이 죽 내리 붙어서 이것은 세계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서울과 알라스카의 위치를 의심쩍게 할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사실인즉 내 마음에 간직해온 서울의 자랑도 이제는 그 밑천을 잃어버린 셈이오. 그러나 아직 얼마동안 저 하늘만은 잃어버릴 염려는 없는 것이오. 그러기에 나는 서울의 하늘을 사랑하고 그 밑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들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가 때로는 그 기억에 먼지를 털어 두는 일이 있소.
<계절의 5행>

왜 육사가 하늘을 향수와 일치 시켰던지 밝혀진 셈이다. 땅은 빼앗겨도 하늘은 아직도 우리 것이라는 그 암담한 자부심이 시인으로 하여금 어딜 가나 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고향처럼 여겼다.
특히 별은 육사에게 고향의 상징이자 희망이며 위로요 투지의 깃발이었다.

먼 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 때마다 / 잊었던 季節을 몇 번 눈 우에 그렷느뇨(<파초>)

그래 가락은 흔들리고 / 별들 춥다 얼어붙고 /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소년에게>)

船窓마다 푸른막 치고 / 초ㅅ불 鄕愁에 찌르르 타면 / 運河는 밤마다 무지개 지네(<독백>)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 十二星座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
꼭 한 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 우리들과 아-주 親하고 그 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 아름다운 未來를 꾸며 볼 東方의 큰 별을 가지자 //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地球를 갖는 것 /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 한 개의 새로운 地球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 목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이밖에도 하늘과 별은 더 많이 등장하는데, 유독 힘이 주어지는 성좌는 '동방의 별'임은 말 할 나이도 없다. "한 성좌의 명칭이라든지 그 별 한 개 한 개에 대한 전설들을 동년(童年)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지나간 날을 회상"(<수필 <은하수>)해 본다는 대목은 별과 향수의 관계를 분명히 일러준다. 유랑 속에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각성제는 언제나 닭 우는 소리로 표현된다. 닭 우는 소리는 육사에게 별을 바라보는 마음이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투지와 사랑을 다지는 자세의 바로잡음으로 상징된다.
여기까지를 정리하면 이육사의 시는 전체가 하나의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그 줄거리는 고향(국토)를 쫓겨난 유랑의 무리(혹은 방랑자)가 강가나 바닷가 혹은 광야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별에서 새로운 투지를 다지는데 닭 우는 소리, 곧 새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계시가 내리는 가운데 그때에 올 손님을 기다리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마치 만해의 시가 애인과 강제 이별을 당해 기어이 만나야겠다는 투지로 일관하듯이 육사도 강제 추방 당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별로 향수를 달래는 고통 속에서도 투지를 더 강하게 다지는 새 시대의 예언(손님의 등장)으로 이뤄져 있다 하겠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 시가 바로 육사의 대표적인 <절정>과 <광야>이다.

3. 서정성의 근원 찾기

    육사의 시에도 현실적인 비판의식이 매우 강한 작품이 있다. <실제(失題)>는 육사 시 중에서 가장 암담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고발한 작품이며, <편복(  )>은 민족의 운명을 박쥐에 의탁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직설적인 현실 비판시보다 육사의 위대성은 오히려 <절정>이나 <광야>같은 서정성에 있는데, 어째서 그는 이런 투쟁시의 최고 단계로서의 서정적 리얼리즘 미학을 얻었을까.
그 원인으로는 우선 이육사의 집안이 지닌 전통적인 선비상으로서의 절조를 들 수 있다. 그는 고전문학의 풍부한 교양 위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한 절도 높은 선비형 인간상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무엇보다 이런 요인이 그로 하여금 몸은 투쟁의 대열 속에 담고 있으면서도 문학은 고매한 서정성의 원칙을 지키도록 훈련시킨 것이리라.
투쟁의 시인들은 대개 시만으로 투쟁을 하는 경우와, 행동과 시 둘 다 투쟁하는 경우, 그리고 투쟁은 하되 시는 전혀 투지를 안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임화의 경우가 둘째라면 셋째는 이육사의 경우로 세계 레지스탕스문학사에서도 극히 드문 현상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문인들은 저항활동을 하면 예외 없이 저항적인 작품을 썼으며, 한국 근대 식민지 시기나 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임화와 같은 경우에는 카프와 각종 사회운동 단체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하면서도 투쟁시를 썼는데 이게 저항문학인의 정통적인 한 유형이라 하겠다.
시적 재능으로 본다면 충분히 더 투쟁적인 시를 쓸 수도 있었는데 왜 육사는 서정시에만 몰두했던가에 대한 의문은 그만큼 지하활동의 위험성이 높았다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뮤즈>나 <강 건너 간 노래>에서 고백하듯이 "내가 부르던 노래는 강 건너 갔소"에 해당하는, 말하자면 자신의 절조를 다지는 자기 성찰적인 시작품으로 쓸 뿐이었던 것이다.
육사은 어렸을 때 한시 짓기(수필 <은하수>참고)를 했는데, 이게 오히려 신시를 통한 문학수업보다 더 본격적인 시창작 수업에 도움이 된 듯하다. 성장하면서 육사는 문학서적보다 영웅전과 사회과학에 더 심취했는데, 이런 요인도 그이 시 세계 형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며, 특히 일본이 아닌 중국에서의 유학과 무장투쟁의 훈련이 서릿발같은 기개를 꺾이지 않도록 만들어 겨울 날 강철로 된 무지개 같은 시를 남길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시 <절정>이나 <광야>에 나타난 극한의식을 이해하기 이해서는 반드시 수필 <계절의 5행>을 일거야 할 것이다.
그 처절한 극한의식을 낳은 의식의 저변은 답답한 속을 달래려고 피우던 담배가 늘어서 골통대로 변했는데, 그걸 태우면서 슬그머니 머릿속은 로마를 방화한 네로에게로 전개된다. 누구나 폭군이란 딱지를 부친 네로, 그의 로마 방화를 시인은 은근히 부추기면서 자신도 네로와 같은 방화범이 된고 만다.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의 한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까? (중략)
초가삼간이 다 타도 그놈 빈대 죽는 맛이 좋다고 하는 사람의 마음과 같이 통쾌하지 않았을까요!
지금 내 머릿속에 타고 있는 내 집은 그 속에 은촛대도 있고 훌륭한 현액(縣額)도 있기는 하나 너무도 고가(古家)라 빈대가 많기로 유명한 집이었나이다.
이 집은 그나마 한쪽이 기울어서 어느 때 어떻게 쓰러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나폴fp옹이 우리 집을 쳐들어 오면 나는 그것을 모스코 같이 불을 지를 집이어늘, 그놈의 빈대한 흡혈귀를 전멸한다면 나는 내 집에 불을 싸지르고 로마를 태워 버린 네로가 되오리다.
<계절의 5행>

이 처절성, 빈대 때문에 온갖 보물도 아까워하지 않고 방화를 자행하겠다는 투지는 빈대가 누구였겠는가란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이 통쾌 무비한 이육사 다운 발상인데, 시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어서 한 친구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하향한 한 친구가 산 속에서 채벌하여 숯을 굽는데, "숯가마에 불을 싸지르고 그놈이 타오르는 것을 보기만 해도 이때까지 아무에게나 호소할 곳 없던 내 가슴 속 아앙한 울분이 한 반은 풀리는 듯하고, 복수를 한 때와도 같고..."라고 쓴다.
이 처절성은 어디서 왔을까? 이것은 분명 루쉰(魯迅)의 문학적 영향이다. 루쉰의 <약>이나 <주검(鑄劍)>에서 느끼는 극대화된 분노와 보복심을 그린 대목이 곧 이런 네로의 범죄조차도 미화될 수 있는 지경으로 몰아간 것이다.
기실 루쉰은 이육사에게 영원한 큰 스승이었지 않는가. 루쉰은 한때 젊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문학인들로부터 부르주아적이라는 심한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정작 루신을 비난했던 인사는 변절했거나 숙청 당했는데, 루쉰은 영원한 혁명문학인으로 추앙받지 않는가. 루쉰의 소설 역시 직접 당대의 사회적 혁명의식을 고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혁명을 수행 할 수 있는 투혼을 가지도록 그 영혼을 단련하는 작품을 썼다.
루쉰과 마찬가지로 이육사도 직접 혁명의 노래를 쓴 게 아니라 그런 노래를 쓸 수 있는 영혼, 그런 혁명에 투신할 수 있는 영혼을 개조하는 기개 높은 시를 쓴 것이다.
이 시인은 1930년대의 혼란을 극한 중국 현대사를 너무나 정확하게 꿰뚫어보면서 당시 일제 통치 아래서 얼핏 빠지기 쉬웠던 장지에스(蔣介石)노선을 맹종하지 않은 채 시종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부정부패성을 부각시킨 안목은 가히 국제시사 평론가 급이라 할만 하다. 중국에 관한 육사의 글을 읽노라면 뭔가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다 털어놓지 못하고 검열의 필화에 걸려들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읽노라면 진상을 짐작케 하는 명문이란 느낌이 든다.
시나 산문도 마찬가지다. 찬찬히 뜯어보노라면 이 시인이 얼마나 할 말을 참아가며 서정성을 가미해 노래했던가를 절절히 깨닫게 된다. 투쟁시보다 더 훌륭한 투쟁시라는 평가가 이래서 가능한 것이다. 그는 저항의 통곡을 했으되 아무도 그 울음을 들을 수 없도록 저 광야에서 홀로 목 놓아 울었던 위대한 투사였다.

(이육사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 발제문)

 

<사계동인회 / 떠다니는섬>

 

 

 

 

이육사 작품 분석

-<광야>를 중심으로, 윤동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광 야
   / 이 육 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시집(陸史詩集), 서울출판사, 1946>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배경의 웅대함으로 처음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아득하게 넓은 평야, 시간적 배경은 천지가 처음 열리는 까마득한 태초에서부터 머나먼 미래에로 이어지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크게 나누어 보면, 제1∼3연이 과거를, 제4연이 현재를, 제5연이 미래를 각각 노래하고 있다.
제3연까지의 부분에서는 광야의 원시적 순수성에서부터 무수한 세월이 흘러 강물이 길을 열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제2연은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산맥들의 모습을 살아 있는 동물의 움직임처럼 인식하면서, 그것들이 차마 침범하지 못한 광야의 광활함을 노래하였다. 이처럼 웅장한 터전에 마치 꽃이 피고 지듯 무수한 계절이 지나간 뒤 비로소 강물이 흐르고 길이 열렸다.
만물이 눈에 덮여 있는 가운데 이 넓은 광야에 매화의 향기가 그윽하고 은은하게 풍겨 온다. 이 분위기는 앞 부분에서 전개되어 온 광야의 모습을 좀더 숭고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면서 그 안에 선 인물의 외로움을 암시하여 준다. 그는 아무도 없는 광야, 더욱이 눈 덮인 겨울의 광야에 서서 무한한 과거의 시간과 먼 미래의 시간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고독한 것이면서 그의 강인한 의지를 더욱 곧게 세우도록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고독감과 긴장된 의지의 경지가 `매화 향기"라는 사물을 통해 암시된다.
강인한 의지로 외로움과 추위를 이기며 서 있는 이 자리에 `나"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 일체의 생명이 용납되지 않는 냉혹한 시련의 상황에서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혼자서 뿌리는 씨앗이기에, 더욱이 견디기 어려운 추위(가혹한 현실 상황)를 무릅쓰고 뿌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가난한 노래의 씨앗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광막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억센 의지로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연한 결의가 담기어 있다.
그러면 그가 뿌린 외로운 노래의 씨앗은 누가 거둘 것인가? 그것은 대체 싹이나 틀 수 있는가? 이런 물음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냉혹한 시련만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로 모든 고통을 이기며 싸워야 했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성패(成敗) 여부가 아니라 달리 선택할 길이 없는 그 필연성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연에서 노래한다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라고. [해설: 김흥규]

윤동주와 함께 일제 암흑기의 2대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육사는 1935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1937년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는 등,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성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시작 발표는 주로 『조광(朝光)』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 활동 못지 않게 독립 투쟁에도 헌신,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으며, 40세에 북경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1935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 중에 씌어졌는데, 이때는 그가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던 때인 만큼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 침울한 북방의 정조(情調)와 함께 전통적인 민족 정서가 작품에 깃들어 있다. 대표작인 <광야>에서 보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비운(悲運)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꺼지지 않는 민족 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 시는 육사의 확고한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 극복 의지가 예술성과 탁월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자기 극복의 치열성에 바탕을 둔 초인 정신과 투철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는 지사(志士) 의식, 그리고 순환의 역사관에 뿌리를 둔 미래 지향의 역사 의식 등이 종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15행의 5연시로 과거(1∼3연), 현재(4연), 미래(5연)의 시간적 추이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데, "까마득한 날"에서 "다시 천고의 뒤"까지의 시간의 흐름은 조국의 현실을 "광야"로 상징한 역사 의식의 표출이다.

1연에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태초의 상황을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는 부정적 설의법을 이용하여 광야의 원시성과 신성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2연에서는 활유법을 구사하여 광야의 광활하고 장엄한 모습을 역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3연에서는 신성한 공간인 광야에서 태동한 우리 민족사의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라는 동적 이미지로써 보여 주는 한편,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에서는 시간적 개념인 "계절"을 "피어선 지고"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감각화하고 있다. 4연에서는 일제의 압제를 상징하는 "눈"과 조국 광복의 기운이자 온갖 폭압에 맞서 싸우는 절조(節操)인 "매화 향기"를 대립시킨 가운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는 미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의 "아득하니"는 "멀다"의 뜻이 아니라, "그윽하고 은은하다"의 의미이며, "노래의 씨"는 가혹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생명의 의지로, "씨"에 함축되어 있는 자기 희생적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극복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한편, "가난한"이라는 수식어는 자기 겸손의 표현이기보다는 냉혹한 현실 상황에서 홀로 행하는 행동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 5연에서는 새 역사에 대한 소망이자 조국 광복에 대한 굳은 확신을 통하여 미래 지향의 확고한 역사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암담한 현실 상황에 화자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를 수확하여 "목놓아" 노래 부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바로 불행했던 역사를 몰아내고 온갖 질곡과 고통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하여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 피울 인물이다. 그런데 그 "초인"의 도래는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꽃>에서의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과 같은 확고한 믿음임을 "초인이 있어"에서의 "있어"를 통해 알게 해 준다.

따라서 이 시는 "광야의 원시성,신성성" → "광야의 광막성" → "민족사의 태동과 개척" → "현실 인식과 선구자 의식" → "초인 정신과 예언자적 역사 의식"의 구조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육사의 투철한 역사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지사적·예언자적 기품과 단호하고 강인한 남성적 어조로써 신념에 찬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 민족시의 정화(精華)라고 할 것이다.

<양승준, 양승국 공저 :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항일 저항시의 해석

구체적으로 이 작품에서 자기 희생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출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 개념인 동시에 절대적 심상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육사 자신으로서는 소중하기 그지없는 한 몸의 희생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개념으로 그에게 절대를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육사가 외곬으로 믿고 섬긴 조국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이 부분이 단순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조국 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차원을 아득히 넘어선 절대의 국면이 백마 타고 오는 초인과 일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이육사의 「광야」는 항일 저항시의 압권인 동시에 그 언어의 밀도로 보아도 단연 다른 작품의 추종이 허락되지 않을 정도의 수작임을 알 수 있다. 이러 사실 하나만으로도 육사는 한국 현대시사를 장식한 빛나는 성좌로 평가되어야 한다. (출처 : 김용직, 「변혁기의 시와 문화」,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92)에서)


이 시에 나타난 비극적 자기 확인

「광야」는 웅장한 목소리와 비전으로 때묻지 않은 역사의 신성한 미래를 노래한다. 주목되는 것은 여기서 육사가 보여주는 고절(孤絶)의 의식 ― 시간적으로는 장구한 과거의 천고(千古)와 미래 사이, 공간적으로는 만물이 눈 덮인 광야 위에 홀로 선 자기의 인식이다. 이 고절의 자리 ― 어쩌면 절절한 고독감으로 그를 절망케 할 수도 있었을 자리에서 육사에게 행동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리하여 그를 구제하는 것이 장엄한 미래에의 기대이다. 이 때문에 극한적 상황의 압박에서 정신의 의연함이 획득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해명하는 핵심은 넷째 연에서 드러난다. 즉, 그는 자신을 아득한 과거와 미래의 연속을 매개하는 창조의 계기로 자임(自任)하는 것이다. 허심탄회하게 `가난한 노래의 씨"라고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명(言明) 속에는 거대한 역사의 중력(重力)을 감히 지탱하겠다는 오연한 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육사가 「광야」에서 기도했던 것은 타인에게 향한 발언이기보다 자기 스스로에게의 다짐이라고 여겨진다. 즉, 역사적·문화적 혼돈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삶에 절대한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세계 내적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결의는 번민의 음울함도 절망적 침통함도 넘어섰지만 `기다림"의 의미 때문에 여전히 비극적인 자기 확인이다. (출처 : 김흥규, 「육사의 시와 세계 인식」)

육사의 시 중에 "광야"외에 속죄양 모티프가 나타난 시

속죄양 모티프는 "희생정신"과 상통하는 정신이라 볼 수 있겠다.「꽃」에서 "꽃"이 개화되는 것도 시련을 이겨낸 의지의 표상이요,「청포도」에서 "고달 픈 몸으로 오는 손님"의 모습,「절정」에서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교목」에서 "호수 속에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지 못 해라"는 굳센 의지의 모습 등은 암울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희생정신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육사 시에 나타난 저항 의식

가. 이육사의 삶과 역사 인식

육사 이원록(또는 이활)은 1904년 경북 안동의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엄격한 양반 교육과 함께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시대적인 추세와 함께 개화한 조부는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는 등 일찍이 반봉건 인간 해방의 실천적 삶을 육사에게 보여 주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육사는 항일 의식이 강한 외가, 친가의 영향을 받아 1925년(22세), 항일 무장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후 북경,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후 반일제·반봉건·민족 해방·인간 해방의 선봉에 서서 17회의 옥고를 치르며 머나먼 이국땅 북경에서 옥사하면서까지도 일제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조선 남아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1930년대는 예술지상주의, 주지주의, 풍자, 전원 문학 등 주로 현실 도피적인 작품이 많이 창작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육사는 반 민족적이고 비인간적이게 하는 식민지 현실을 직시하고 온 겨레의 살 길인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갖고 수십 차례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독립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고, 민족 해방과 인간 해방에 대한 믿음과 전망을 제시하고자 함에 노력하였다.

나. 이육사 시 속에 나타난 저항 의식

민족 해방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미래 지향적인 육사의 역사 의식은 친일하지 않으면 절필해야 했던 암울한 문학적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제에 대한 문학적 아부를 일절 거부한 채, 오로지 민족 현실에 대한 염려, 이를 어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질책(방황), 더 나아가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과 결연한 의지 등으로 시 속에서 발전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는 독립 운동가로서의 자신을 단련시키고 절망하고 있는 민족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어 식민지적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힘이 되게 하는 것으로서 이를 우리는 민족 해방을 가로막는 일제에 대한 적극적 저항 의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윤동주 시에 나타난 저항 의식

가. 윤동주의 삶과 역사 인식

윤동주는 1917년 배일 의식이 강한 간도 명동촌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고 개화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가정, 지역적으로 민족 해방에 대한 자기 분열의 경험이 그리 크지 않았음에 반해, 서울, 일본등지에서의 학창 시절에는 식민지적인 상황이 주는 고통에 몹시도 괴로워한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교육의 영향으로 평생 자신을 반성하고 내적으로 승화하고자 하는 자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1943년(27세) 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꽃다운 나이로 옥사하기 전까지 그의 생애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창 시절 동안 동주가 독립 운동을 참여했다는 기록이나 행적은 없다. 다만 그가 죽은 뒤 발표된 많은 시작품들을 통해서 그가 식민지적 상황속에서 남다른 번민과 고통의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육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동주는 육사처럼 역사 발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없었으나 자기 성찰로 자신의 역할을 찾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민족 해방을 가로막는 조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적이고도 적극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기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동주의 역사 인식은 미래 지향적이되 자기 속으로 침잠해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고자 함으로써 억압의 역사를 해방시키기에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나. 윤동주 시 속에 나타난 저항 의식

민족성조차 말살시키고자 했던 식민지적 억압 속에서 동주 또한 일제의 아부함을 거부한 채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자기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자신의 역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부끄러워하며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갖기도 하나 힘찬 소리로 이어지지 못한 채 혼자의 고민에 그친 소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육사, 윤동주 시에 나타난 저항 의식 비교 및 평가

역사는 보다 완전한 것으로 진보 발전한다는 과학적 인식하에서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갖고 온몸으로 실천한 혁명가의 삶을 살면서 이를 시 속에 반영시킨 육사에 비해서 동주가 자신의 역할을 바로 자리 매김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방향성 찾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적 인식의 차이 외에 두 사람의 성장 환경, 성격의 차이 등과도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형제들 모두 독립 운동에 참가한 항일 의식이 강한 선비 집안에서 대쪽같은 성격으로 자란 육사와 일찍이 개화된 기독교 집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란 내성적인 성격의 동주가 선택한 삶과 시의 표현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누가 잘났고 못났고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표현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만 역사가 깨어있는 지식인들에게 무엇인가 분명한 역할을 요구할 때에 육사보다 동주에게서 미흡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동주 시(삶)에서는 육사 시(삶)에서보다 시대적, 민족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족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두 시인의 궁극적인 믿음과 이 믿음의 실천을 위한 자기나 세계와의 싸움은 1940년대를 돌아보는 우리에게 한 줄기 빛임을 우리는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하 저항시의 개념과 범주

일제 강점하의 개념은 단순히 시대, 역사적 현실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기보다는 시인의 현실적 삶과 작품에서의 태도의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즉 이상화의 경우는 낭만적인 울분과 토로로, 한용운의 경우는 형이상학적 소망의 구현으로, 이육사의 경우는 혁명적, 지사적 의지의 표출로, 윤동주의 경우는 내면적 갈등과 의지의 성찰로서 저항의 의미를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파워봉 / 담임박길환>

 

 

 

 

서정주와 이육사의 생애 비교

 

시인 서정주의 생애

서정주의 삶
전북고창에서 태어났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같은 해에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주재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첫 번째 '화사집'을 발간,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으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한국의 보들레르'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해방 후 두 번째 시집 '귀촉도'를 발간, 이시기부터
그의 경향은 초기의 악마주의적인 생리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사상으로 접근하여 심화된 정서와 세련된 시풍으로
민족적 정조와 그 선율을 읊었다. '신라초' 이후부터는 불교 사상을 기조로 한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본격적인 진리의 세계인 영원주의의의 이념과 선적인 정서를 부활시켰으며, 유치환과 더불어
'생명파' 시인으로 불리어졌다. 그의 사상적 기조는 영원주의, 영생주의이며, 문화사조상의 배경은
주정적 낭만주의, 예술관은 심미주의적 입장이다. '신라초' 이후에 더욱 진경을 보인 작품 50여편을 모아
시집 '동천'을 발간, 신라와 불교의 세계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그를 종합적으로 대표하는
작품 '국화옆에서'는 한국 시사를 장식하는 걸작으로 평가되며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고 있다.
시론의 분야에서도 활동하여 '시창작교실' '시문학개론' '한국의 현대시' 등의 저작이 있다.
1972년 서정주 문학전집 전 5권이 발간되었고 세계기행시집 '서으로가는 달처럼'이 있다. <한국문예사전>

서정주의 문학세계
서정주(徐廷柱, 81)시인이 시력(詩歷) 60년을 맞았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돼
나온 徐씨의 문단생활 60년을 맞아 최근 출간된 [시와 시학] 가을호는 특집으로 "미당문학 60년"을 꾸몄다.
이 특집에서 徐씨는 "나의 문학인생 7장"이란 장문의 글(2백자 원고지 60장)을 통해 시라는
한송이의 국화꽂을 피우기 위해 가슴 조였던 젊음의 뒤안길, 그 사상적 편력을 진솔하게 밝혀놓았다.

徐씨는 10대 중반의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다. "가난하고 불행한 이때
이 나라의 많은 민중들의 처참한 꼴을 보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제적 균배(均配)주장이
좋은 해결책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가죽구두도 벗어던지고 노동자들의 "지까다비"를 신고 다녔으며
하숙도 학교 근처의 좋은 집에서 빈민촌으로 옮겨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다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사선(死線)까지 돌파했다. 1930년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에는 중앙고보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투옥됐다.
그러다 16살때 읽은 톨스토이의 "물질적 균배로서 인생의 행복을 두루 좌우하다니 그 무슨 엉터리 소리냐"는 외침에
감명받아 자유사상의 넓은 벌판으로 나아갔다." 넓다면 한정없이 넓고 깊다면 또 한정없이 깊은 인생에서
경제적인 균배만으로 그 해결책을 삼는 사회주의의 좁은 이해력"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18살 때는 니체의 사람과 신을 일치시키는 인신(人神)이라는 초인격과 모든 비극의 철저한 극복의지에 빠져들었다.
또 니체의 "그냥 지나쳐 가기"가 "천하고 저속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동화하지 않고 인생의 순수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아주 필요한 일"로 생각됐다고 밝히고 있다. 20대 후반인 일제말기에는 "거북이처럼 끈질기고
유유하게 이 난세의 물결을 헤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인생관을 갖게 됐다. 그와함께 이조백자를 바라보며
한정없는 체념 속의 달관을 깨우치고 동양사상으로 회귀했다고 밝히고 있다. 徐씨는 또 "친일적이라는
시 몇 편이 있지만 그것은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국민 총동원연맹의 강제명령에 따라 어쩔수 없이
쓴 것들이니 이 점은 또 이만큼 이해해 주셨으면 고맙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한국 현대시의 최고봉임을 누구나 시인하는 徐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역사성, 탈현실성을 공격받는
徐씨에게도 역사와 현실에 괴로 워하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은 있었다는 것이다



시인 이육사의 생애

정렬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꿰뚫는 듯한 육사 이활의 시는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수난을 겪는 민족을 위한 광명에의 염원과
그 예언으로 시종일관한다. 그는 북경의 싸늘한 감방에서 40평생의 짤막한 생을 닫을 때까지 그 태반을 일본제국주의의 질곡에
끌려 다녔음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었던 사상적, 행동적 투사였다.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 한 편에 있는 것입니다. }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이까?" 1938년 세상을 떠나기 6년 앞서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이렇게 썼던 그는
언제든지 죽음을 곁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은 현실의 행동배경에서 승화하여 폭넓은 서정시의 감동을 자아낸다.
1930년대 후반 모더니즘의 유행에서 벗어나 한국의 고유성 회복과 고전적 전통에의 복귀로 향한 그의 노력은 후대를 위한 문학사적 가교를 이룩했다.

교동의 어린 시절
육사는 1904년 음력 4월 4일 이 마을에서 아은 이가호를 아버지로 범산공 허형의 딸 김해 허씨를 어머니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한말 의병장 허위는 육사의 어머니의 숙부가 된다. 그는 부계의 한학과 모계의 기개를 받음으로써
후일 그의 문학과 항일의 행동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이육사는 어려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 육사에 대한 어머님의 가르침이었다.
이육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생활태도를 입증하듯이
원천마을에 살고 있는 당숙 이훈호는 이렇게 회고했다. "성격이 대쪽 같아서 어른이 야단쳐도 자신은 잘못했다 항복하지 않았다.
그가 한 행동은 나름대로 옳게 판단한 뒤에 실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부 치헌 이중직은 일찍이 개화하여 노비를 풀어주고
그들에게 땅을 떼어 나누어 준 사람이다. 육사는 이처럼 변해가는 집안의 정황을 보았고 이것을 실천했던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가 결혼한 것은 17세 때였다. 배우자는 순흥 안씨 일양이었다 1922년 육사이 일가족이 대구로 나왔다.
그는 그로부터 항일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의열단 3형제
육사의 다섯 형제는 모두 인물됨이 출중한 사람들로 그 이름은 원기, 원록, 원유, 원조, 원창이었고
육사는 본명 원록, 원삼, 개명인 활을 썼다. 뒤에 원기는 한학으로 원유는 서예로 원조는 문학평론으로
원창은 언론인으로 그 재주를 보였다. 육사는 1925년 21세 때 홀연히 일본으로 떠났다. 동경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플루타르크 시이저 나플레웅 등의 영웅전을 읽었다. 그리고 6개월만에 돌아왔다.
그해 9월 독립운동 집단인 의열단에 가입한 육사는 밀명을 받고 중국을 다녀온다. 그러나 1927년 육사는
장진홍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폭탄 반입자로 연좌되어 체포 3년형 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원기,
원유와 함께 투옥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수인번호 64번이 아호가 되었다는 얘기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가 풀려난 것은 1929년의 일이다. 그해 아들 동윤을 보았으나 일가의 안녕과 행복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의 의지는 꺼질 줄 모르는 불꽃처럼 타 올라 다시 북경행, 그리하여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든 것은 1930년의 일이다.
1933년 가을에 그는 다시 고국에 돌아왔다. 그 시기부터 육사 또는 활을 사용하며 세상에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육사의 최후
육사는 형제 가운데서도 인품이 무겁고 점잖은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한시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친구에게 경제적인 무리를 시키더라도 장안에서 가장 잘하는 양복점을 찾아가서 옷을 맞추어 입었다.
시대적 환경이 좋았다면 유명한 멋쟁이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인상은 독립 운동하는 사람답지 않게 얼굴이 가을하늘 달덩이 같았고
넥타이 한번 구기는 일이 없었고 단정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시 읊기를 잘하고 술을 굉장히 많이 마시는 편이었다.
갑갑하면 양말을 벗는 버릇이 있었으나 술 주정은 하지 않았고 원조처럼 수다스럽지도 않은 공손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단적으로 외유내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34년 이래 서울에 살면서 작품을 발표했다.
유작으로 발표된 '광야'는 그가 1940년을 전후하여 썼던 작품들 중의 걸작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 곳은 범(汎)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梅花) 향기(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본경찰의 철퇴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관할 줄 몰랐다. 겨레에 비칠 서광에 대한 희원으로 백마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그 초인을 불러오고 싶었던 것일까 1943년 초 아직 적설이 하얗던 어느 날 육사는 또 북경행에 나섰다.
그리고 4월에 돌아와서 고향에 내려가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신분증명서를 몸에 품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북경을 오고 갔음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동대문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명륜동 집에 들이닥친 것이 6월이었다. 그리고 체포된 지 6일만에 북경에서 그를 압송할 사나이들이 왔다.
부인 안씨가 죽을 끓여다 들여민 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육사 이활은 1944년 1월 16일 북경 옥사에서 4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으니
그의 유해가 돌아온 것은 그 15일 뒤이다.
그는 지금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던 그 원천 뒷산 낙동강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다.

 

<죽계구곡 / 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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