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朴寅煥)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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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1956) 강원도 인제 출생.
* 1946년 <국제신보>에 송지영의 추천(시 '거리')으로 등단.
* 1951년 부산에 모인 김경린, 김규동, 조향, 이봉래와 함께 후반기 동인을 결성하고 약 4년간 활동.
* 1952년 경향신문사를 사직하고 대한해운공사에 입사.
* 1955년 <19일간의 아메리카>, <박인환 시선집>을 출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여 시공관에서 신협(新協)에 의해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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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
버지니아 울프와 朴寅煥
/ 박 제 천

버지니아 울프는 누구인가. 왜 시인은 한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왜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하는가. 왜 시인의 가슴은 그나마 남아 있는 희미한 의식을 붙잡은 채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가.
이 가을저녁, 『목마와 숙녀』를 되짚어 읽으며 문득문득 떠오르는 의문은 기실 중요한 것이 아니지도 모른다. 시인도 사라지고, 버지니아 울프도 우리의 곁을 떠난 지 오래이다. 다만 시인의 시만 남아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정서의 긴장감이 모자란다든가 행간의 의미가 불투명하다는 등의 분석을 가하는 일 역시 사치스러운 짓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우리도 술을 들며 시인과 버지니아 울프를 위해 건배를 하기로 하자. 버지니아 울프가 누구인가 밝히기 보다는 그 이름을 되뇌이며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이라고 우리 가슴에 새겨 두자. 설사, 그를 노을진 들녘 별의 눈처럼 반짝이며 피어 있는 들풀이라고 하여도 시의 이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 누구이든 상관이 없듯이 목마가 그 무엇을 가르키는지 우리가 밝혀야 할 까닭은 없다. 그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정체를 안다 할지라도 모른척 하기로 하자. 그저 우리는 목마가 주인을 버리고 가을 속으로 떠나버린 슬픔만을 기억해 두기로 하자. 그러나 그 가을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건배를 사양해야 한다. 그 가을을 위해 건배하는 시인이 있는 한 시인의 의식(儀式)을 지켜보는 것만이 우리가 갖춰야 할 예의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제껏 살아온 삶을 몇 개의 단편으로 나누어 떠올림으로써 그의 비극적인 입장을 고양시키고 싶어 한다. 그것을 우리가 한낱 감상으로 단정하지는 말자. 떠나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시인도 떠나가리라는 예감을 갖기 때문 만은 아니다.
시인이 떠올리는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끝없이 자라고 있다. 그 소녀는 벌써 성숙한 여인이 되고 노파가 되어 죽음의 자리로 돌아갔을 지라도 모르지만 시인의 가슴에는 영원한 소녀로 각인돼 있다. 물론 그 소녀는 현실의 소녀가 아니다. 소리쳐 소녀의 이름을 불러도 부드럽고 맑게 되돌아 오는 응답이 있을 리 없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는 것을 본 시인, 사랑의 진리마저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시인에게 있어 소녀에 대한 추억제는 떠나감을 위한 의식의 일부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인의 추억제에 있어 소녀는 한낱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마음에 뿌리내린 단어는 오직「고립(孤立)」이라는 두글자 뿐이다.
이제 추억제의 내용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가 떠나가는 이유는 오로지 「고립」을 위해서다. 모두들 외로움이 무서워 동아리를 이루는 현실이 곧 자신의 파멸을 불러오는 것으로 시인은 받아들이고 있다. 단독자로서의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히면서 시인은 술병을 들여다보며, 그 보다 먼저 그와 같은 삶을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의 얼굴과 맞딱뜨리지 앟을 수 없었고, 그 얼굴과 겹친 소녀를 연상했던 것이리라.
시인은 삶의 막다름에 이르러 자살을 탈출구로 삼았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도입부에 내세움으로써 시인의 상황 또한 절망과 허무감의 주인임을 자연스럽게 알리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시인의 두 번째로 선택한「목마」라는 단어 때문에 시인의 의도는 정확하게 전달되기 어려웠다.「지난 시대의 표상」혹은 「깨어진 꿈」등의 상징어로 택한「목마」에는 「현실에의 헤쳐감」이라는 본래의 뜻이 따로 있기 때문에 긴장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한낱 장식어로 구실할 뿐 아니라, 뒤따라 등장한 방울소리로 하여 감상적인 분위기를 돋굴 뿐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장치는 중간부분에서 빛나는 효과를 거둔다. 시인이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면서 등대를 연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시인의 분신이 되어 그의 떠나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또다시 등장한 버지니아 울프는「서러운」이라는 수식어로 하여 기능이 훨씬 약화된다.
이렇듯 버지니아 울프라는 기둥이 지탱하는 각각의 힘에는 차이가 있지만, 세 개의 기둥이 모임으로써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상승효과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구조적인 배치의 강점 때문에 전편에 흐르는 감상적인 분위기나 독백에 놀랄만한 탄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버지니아 울프는「목마와 숙녀」에 있어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환기력의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목마와 숙녀」가 인구에 회자될 뿐 아니라 시문학사에까지 거론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점에 있으리라 판단된다.
박인환(1926∼1956)은 불과 31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는 대체로 허무와 감상으로 점철된 협주곡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 때문일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그의 시가 끝없이 노래로 불려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후에 간행된 평전이 2권, 시집의 증보판이 지속적으로 간행되고 있다.
비록 드높은 시적 성취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대중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을 수 있는 행복한 시인이다.
박인환 깊이 알기
-그의 시는 쓸쓸한 사랑의 노래로 서글픈 민족의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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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문재 편 <박인환 깊이 읽기> | |
늦가을, 하면 늘 떠오르는 시가 있다. 낙엽이 머리와 어깨를 툭툭 치며 떨어질 때면 자신도 모르게 나직하게 읊조려지는 가을노래가 있다. 일찍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메마른 잎사귀 곳곳에 뻥뻥 뚫린 구멍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파란 서른의 나이에 훌쩍 이 세상을 떠나버린 한 시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빈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는 슬픈 시 '목마와 숙녀'... 지금도 낙엽이 질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옛 사랑을 그리워하며 쓸쓸하게 부르는 '세월이 가면'... 그리고 한국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의 도시 한 구석 목로주점에서 사랑의 비가를 서글프게 읊조리던 시인 박인환...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시인. 그리고 5년 뒤 다시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던 시인. 그 시인은 폭음 끝에 급기야 심장마비로 세월을 따라 이 세상을 버렸지만 그의 시는 지금도 이 세상에 남아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 때로는 쓸쓸한 사랑의 노래로, 때로는 서글픈 우리 민족의 자화상으로.
그래서일까. 시인 맹문재는 최근 '박인환 시인 탄생 80주년 타계 50주년 기념'으로 엮은 <박인환 깊이 읽기>(서정시학)에서 "박인환은 1950년대의 그 어떠한 시인보다 사회참여 의식이 강했다"고 말한다. 맹시인은 1950년대 박인환의 시를 조목조목 들추어내며 "그의 시는 모더니즘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리얼리즘 시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못 박는다.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서울로 황해도로 다시 서울로 옮기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시인 맹문재(안양대 국문과 교수)가 시인 박인환의 시를 리얼리즘 시로 못박는 이유는 따로 있다. 1949년, 시인 박인환이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 등과 함께 펴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실은 '열차', '지하실', '인천항' 등의 시를 곰곰이 살펴보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열차)거나 "황갈색 계단에서 내려와/ 모인 사람들은/ 도시의 지팡이와 싸우고 있다"(지하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아간다"(인천항) 등은, 서구 모더니즘을 추구한 것이라기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대항의식이 더 짙다는 것.
시인 박인환은 11살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한다. 이어 1942년 시인의 나이 열일곱 살 때 아버지의 핏줄이 있는 황해도로 따라가 명신중학교,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에 입학한다. 그리고 1945년 광복과 함께 홀로 서울로 올라와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연다. 박인환은 그때부터 서점에서 수많은 문인들과 만난다.
이듬 해 1946년 12월, 박인환은 <국제신보> 주간으로 있던 송지영의 추천에 의해 '거리'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다. 그때에는 일정한 등단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선배 문인들의 추천을 받아 지면에 시를 발표하면 공식적인 문인으로 인정했다. 그 뒤 <자유신문사> 문화부 기자, 경향신문 기자, '후반기' 동인, <주간국제> 편집장, '대한해운공사' 등에 다녔다.
박인환 시모음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얼굴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을 닮은
한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거리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 갔다
아무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 갔다
베링 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 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의 수목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세 사람의 가족
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플랫폼으로 화려한
상품의 쇼우윈도우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과 회한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확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 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빙화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를 써본다
그러나 창 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새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낙하
미끄럼판에서
나는 고독한 아킬레스처럼
불안의 깃발 날리는
땅 위에 떨어졌다
머리 위의 별을 헤아리면서
그후 20년
나는 운명의 공원 뒷담 밑으로
영속된 죄의 그림자를 따랐다
아 영원히 반복되는
미끄럼판의 승강
친근에의 증오와 또한
불행과 비참과 굴욕에의 반항도 잊고
연기 흐르는 쪽으로 달려가면
오욕의 지난날이 나를 더욱 괴롭힐 뿐
멀리선 회색사면과
불안한 밤의 전쟁
인류의 상흔과 고뇌만이 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할
망각의 이 지상에서
더욱 더욱 가라앉아 간다
처음 미끄럼판에서
내리달린 쾌감도
미지의 숲 속을
나의 청춘과 도주하던 시간도
나의 낙하하는
비극의 그늘에 있다
불행한 신
오늘 나는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한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과거는 무수한 내일에
잠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신
어디서나 나와 함께 사는
불행한 신
당신은 나와 단둘이서
얼굴을 비벼대고 비밀을 터놓고
오해나
인간의 체험이나
고절된 의식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우리는 결속되었습니다
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처럼 우리는 존재됩니다
쉴새없이 내 귀에 울려 오는 것은 불행한 신
당신이 부르시는
폭풍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천지 사이를
내가 있고 엄연히 주검이 가로놓이고
불행한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최후의 안정을 즐깁니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과 초연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의 오늘을 살아나간다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의 회화 속의 나녀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
나의 눈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행복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정사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를 외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
노인은 꿈을 꾼다
여러 친구와 술을 나누고
그들이 죽음의 길을 바라보던 전 날을
노인은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
쓰디쓴 감정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는 지금의 어떠한 순간도
증오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죽음을 원하기 전에
옛날이 더욱 영원한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와 가까이 있는 것이
멀어져 가는 것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센티멘탈 쟈니
주말 여행
엽서 --- 낙엽
낡은 유행가의 설움에 맞추어
피폐한 소설을 읽던 소녀
이태백의 달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
카프리 섬의 원정
파이프의 향기를 날려 보내라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세월은 관념
독서는 위장
그저 죽기 싫은 예술가
오늘도 가고 또 하루가 온들
도시에 분수는 시들고
어제와 지금의 사람은
천상유사를 모른다
술을 마시면 즐겁고
비가 내리면 서럽고
분별이여 구분이여
수목은 외롭다
혼자 길을 가는 여자와 같이
정다운 것은 죽고
다리 아래 강은 흐른다
지금 수목에서 떨어지는 엽서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주말여행
별말씀
그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
아 센티멘탈 쟈니
센티멘탈 쟈니
태평양에서
갈매기와 하나의 물체
고독
연월도 없고 태양도 차갑다
나는 아무 욕망도 갖지 않겠다
더욱이 낭만과 정서는
저기 부서지는 거품 속에 있어라
죽어간 자의 표정처럼
무겁고 침울한 파도 그것이 노할 때
나는 살아 있는 자라고 외칠 수 없었다
그저 의지의 믿음만을 위하여
심유한 바다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
태평양에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릴 때
검은 날개에 검은 입술을 가진
갈매기들이 나의 가까운 시야에서 나를 조롱한다
환상
나는 남아 있는 것과
잃어버린 것과의 비례를 모른다
옛날 불안을 이야기했었을 때
이 바다에선 포함이 가라앉고
수십만의 인간이 죽었다
어둠침침한 조용한 바다에서 모든 것은 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가?
바람이 분다
마음대로 불어라. 나는 데키에 매달려
기념이라고 담배를 피운다
무한한 고독 저 연기는 어디로 가나
밤이여 무한한 하늘과 물과 그 사이에
나를 잠들게 해라
어린 딸에게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 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개월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와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벼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럼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용사가 누워 있었다
구름 속에 장미가 피고
비둘기는 야전병원 지붕 위에서 울었다
존엄한 죽음을 기다리는
용사가 대열을 지어
전선으로 나가는 뜨거운 구두 소리를 듣는다
아 창문을 닫으시오
고지탈환전
제트기 박겨포 수류탄
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각했다
옛날은 화려한 그림책
한 장 한 장마다 그리운 이야기
만세소리도 없이 떠나
흰 붕대에 감겨
그는 남모르는 토지에서 죽는다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서
그는 피와 청춘을
자유를 바쳤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엔
지금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검은 강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종의 노정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부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이 가득찬
생과 사의 경지에 떠난다
달은 정막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히로 이룬
자유의 성채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고향에 가서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에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의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 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가을의 유혹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물은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정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차처럼 또는
낙엽보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는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고 있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 양복과 목관 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누물 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전원
1
홀로 세우는 밤이었다 지난 시인의 걸어온 길을
나의 굼길에서 부딪혀 본다
적막한 곳엔 살 수 없고 겨울이면 눈이 쌓일 것이
걱정이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모여들고
한칸 방은 잘 자리도 없이
좁아진다
밖에는 우수수 낙엽소리에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2
?토의 냄새를 산마루에서
지킨다
내 가슴보다도 더욱 쓰라린
늙은 농촌의 황혼 언제부터 시작되고
언제 그치는 나의 슬픔인가
지금 쳐다보기도 싫은
기울어져 가는
만하 전선위에서
제비들은 바람처럼
나에게 작별한다
3
찾아든 고독 속에서
가까이 들리는 바람소리를 사랑하다
창을 부수는 듯 별들이 보였다
7월의 저무는 전원
시인이 죽고 괴로운 세월은
어디론지 떠났다
비 나리면 떠난 친구의
목소리가 강물보다도
내 귀에 서늘하게 들리고
여름의 호흡이 쉴새없이
눈앞으로 지낸다
4
절름발이 내 어머니는
삭풍에 쓰러진 고목 옆에서 나를
불렀다. 얼마 지나
부서진 추억을 안고
염소처럼 나는 울었다
마차가 넘어간 언덕에 앉아
지평에서 걸어오는
옛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생각이 타오르는 연기는 마을을 덮는다
열차
폭풍이 머문 장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욕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한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
검은 기억은 전원에 플로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를 지난다
청운의 복받침을
나의 시야에 던진채
미래에의 외접선을 눈부시게 그으며
배경은 핑크빛 향기로은 대화
깨진 유리창 밖 황폐한 도시의 잡음을 차고
율동하는 풍경으로
활주하는 열차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다음 헐벗은 수목의 집단 바람의 호흡을 안고
툰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
거기엔 우리들의 황홀한 영원의 거리가 있고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
혜성보다도
아름다운 새날보담도 밝게
남풍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찌기 외복을 빼앗긴 토민
태양 없는 말레이
너의 사랑이 백인의 고무원에서
쟈스민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쿠멜신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 와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서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은 온다
계절이 바뀌면 태풍은 온다
아시아 모든 위도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의 향기가
가난한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죽은 아포롱
- 이상 그가 떠난 날에
오늘은 3월 열 이렛날
그래서 나는 망각의 술을 마셔야 한다
여급 마유미가 없어도
오후 세시 이십오분에는
벗들과 제비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그날 당신은
동경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운명이여 얼마나 애태운 일이냐
권태와 인간의 날개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성좌를 간직하고 있다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랭보와도 같이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준
정신의 황제
무한한 수면
반역과 영광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이상이라고
박인환 시인과 인제
/ 김 경 식
가난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인간의 진솔한 삶과 사랑의 시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간 시인이 있다.
남겨진 그의 시는 노래가 되고 낭송시가 되어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며 생활 가까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시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념과 현실적인 고뇌가 있음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삭막하고 걱정많은 삶의 중압감으로 견디기 어려웠던 이 땅의 저 50년대는 희망이 없는 절망의 시대였다.
이런 고약한 시대에 살가운 그리움이 담겨진 사랑과 이별의 시적 이미지의 표현은 또한 박인환 시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먼저 ‘세월이 가면’이란 박인환시인의 시를 읽고 난후 그의 궤적을 찾아 떠나보려고 한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 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것만
- 박인환시인의 시 ‘세월이가면’ 전문
오월의 신록이 우리의 국토를 진녹색으로 물들이며 퍼져가던 날 박인환 시인의 고향마을을 향해 길을 떠난다.
박인환(1926~1956)시인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이다.
인제군은 강원도의 중동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서북부 지역에 속한다. 서쪽 홍천군과 경계이며 동쪽으로
한계령과 미시령을 넘기 위해 이 지방을 거쳐야 한다.
산과 강이 아름다운 절경을 소유한 곳이 인제다. 산도 보통 산인가 내설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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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인 시비 (세월이 가면) |
소양강이 시작되는 북천의 푸른 물살을 보면 인근 숲속에 텐트를 치고 며칠을 머무르고 싶어진다.
또한 아름답고 순결한 흰 물결이 흐르는 계곡길을 따라서 걷고 싶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오래전에 군인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처럼 교통이 불편한 첩첩산중이었다.
그러나 양평과 홍천을 거쳐 이어진 44번 국도는 고속도로 같다.
서울에서도 약 3시간이면 인제읍에 도착이 가능하다.
인제는 청정지역과 관광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먼저 인제군이 자랑하는 산촌민속박물관을 찾아갔다.
마침 문을 닫고 있는 중이다.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를 물었다. 매표원이 생가터까지 안내 한다.
조선족 말투인 50대 아낙은 “여깁니다” 한다. 결국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는 ‘인제산촌민속박물관’ 정원이 되어있다.
산촌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기 위해 건축한 집 옆 정원이 바로 박인환시인의 생가터다.
생가 표지판 하나가 없다. 답사 전에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윤형준 계장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좀 서운하다.
아마 윤 계장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실망했을지 모른다.
윤 계장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박인환 시인에 관해 전문가다.
사전에 그는 인제군에서 박 시인의 생가터 약 450평을 매입하여 생가 복원 혹은 기념관 건립을 준비 중이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국도 44번의 4차선 도로와 인접한 생가터는 그렇게 ‘산촌민속박물관’의 오른쪽 구석 정원이 되어 있다.
토끼풀이 무성하고 붉은 단풍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곳이 생가터다.
듬성거리게 피어난 토끼풀꽃들이 작고 하얀 꽃송이를 흔들고 있다. 하늘에는 높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를 이렇게 쉽게 찾은 것이 너무 싱겁다. 저녁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인제읍은 골목이 깔금하고 골목길이 사뭇 넓다. ‘산촉민속박물관’을 배경으로 여러장의 사진을 찍는다.
결국 이곳이 모두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생가터를 확인한 것만도 큰 위안이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잠 잘 곳을 확보해야 한다. 서
둘러 ‘합강정’에 있는 박인환시인의 ‘세월이가면’ 시비를 찾아 떠난다.
시비는 인제읍 합강 2리에 위치한 ‘합강공원’에 있다. 이곳에 서면 강물이 만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린천과 인북천이 이 지점에서 합류하여 소양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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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인 생가터
인북천은 대동여지도에는 서화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인제읍 북쪽을 흐르는 개울이란 뜻으로 인북천이라 불린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북한과 남한을 오고간다는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은 기억이 난다.
장마때는 북한지역 주민들의 생활도구들이 떠내려 올 때가 있으니 물고기들이 오고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합강정’은 인제 현감을 지낸 이세억(1675~1677)이 1675년에 세웠다.
이곳은 강원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였기에 ‘중앙단’을 조정하였다.
‘중앙단’은 조선시대에 가뭄을 비롯한 전염병 등 재난의 원인이 억울하게 죽어 원한 맺힌 신들의 행위라고
믿었기에 이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 근방은 궁벽한 산골사람들이 뗏목을 만들어 잠시
머무르며 숨을 고르던 곳 아닌가. 바람결에 이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박인환 시인의 시 ‘세월이가면’ 시비가 있기 때문이다.
생가터만 있고 아직은 기념관도 없는 인제군에 그래도 가장 번듯한 상징물은 이 시비가 아닌가?
시비는 자연석에 박인환 시인의 ‘구름’이란 시의 이미지를 살려 제작하였다. 전면에는 박인환 시비(朴寅煥詩碑)
와 뒷면에 ‘세월이가면’이 음각되었다.
처음에 군축령 및 아미산공원에 건립하였으나 98년에 도로 확장공사로 이곳에 이전 건립하였다.
뒷면에 새겨진 ‘세월이 가면’의 시비를 읽기가 수월치 않다. 자칫 시비를 읽다가
난간에 떨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제군민들의 성금과 세금으로 세운 시비가 대견해 보인다.
‘세월이 가면’을 읽으니 가수 박인희가 부른 노랫말이 되어 상념에 사로잡힌다.
그만큼 이 시는 필자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이 시와 ‘목마와 숙녀’를 암송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이곳에서 그의 고향인 인제읍을 바라보며 메모해 간 그의 시 ‘고향에 가서’를 읽는다.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 시 ‘고향에 가서’ 일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에 관해 1951년 8월22일 쓴 이 시를 읽어보면 실제처럼 묘사했음을 알게 된다.
인제읍이 제대로 조망되는 곳에 서 본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그러나 인제읍도 선명하게 보이고 신록이 푸르른 산협사이로 강이 흐른다.
이제 오늘밤 숙박할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
북천을 따라 약 5KM를 달리며 44번 국도와 46번 국도가 갈리는 한계리 삼거리다.
예전 인제군 지역은 산림이 유명했다.
조선시대에는 황장목이 벌목을 방지하기 위해 황장금표(黃長禁標)를 세웠다.
합강뗏목은 남한강의 영월뗏목, 압록강뗏목, 두만강뗏목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뗏목이었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 가네
우수나 경첩에 물 풀리니
합강정 뗏목이 떠내려 오네
- 인제 뗏목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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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강정
합강에서 만들어진 뗏목은 춘천 소양강까지는 하루가 걸렸다. 다시 한양까지 약 10일이 소요 되었다.
나무는 주로 겨울에 베어 넘겼다.
설산이 나무를 운반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까지 운반하는 노동 강도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노동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아리랑 가락을 부르며 달랬던 것이다.
합강정 인근은 이런 벌목꾼들이 며칠 쉬어가는 곳이었으며, 뗏목꾼들의 모임 장소 였을 것이다.
옛 주막도 있을법 한데 주막은 보이지 않고 앞에 보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고층아파트다.
무슨 생각으로 저곳에 저런 고층 아파트를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튼 바람이 심하게 부는 이곳에 서니 옛 뗏목꾼들의 노래소리가 아련하게 들린다.
내설악 인근에서 뗏목꾼들이 벌채한 나무는 인북천과 북천을 따라 내려 왔고, 가리산 방태산에서
베어진 나무들은 ‘내린천’을 따라 흘러 왔다.
이것을 이곳 ‘합강’에서 다시 뗏목을 점검하고 한양까지 갈 준비를 하였다.
이런 뗏목꾼들의 삶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리다. 비록 생계를 위한 일이었지만 뗏목에 목숨을 건 한양까지의
거칠고 사납던 기행이 위대하지 않은가.
한계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46번국도를 타고 달린다. 터널공사가 한창이다.
그렇지만 12선녀탕 근처 북천(北川)가에 조성한 ‘만해마을’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숲의 색상이 녹색이지만 모두 다르다. 여울을 끼고 휘돌아 가는 산길 봄이 절정이다.
저 계곡에 들어가 얼마간 살고 싶은 충동이 일렁인다.
이런 순간적인 충동은 내 현실적인 삶이 그 만큼 녹녹치 않다는 증거다.
인제(麟蹄)는 교통이 편리한 청정지역으로 거듭나고 삶의 질이 그 어디보다 좋아지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해가 노루꼬리 만큼 남아 있는 시간에 만해마을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우고 만해마을 정문인 정절문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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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문학박물관
정문이 사뭇 특이한 구조다. 추상적인 이 형태의 문을 만든 뜻을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다.
다만 만해마을의 정문이라 할 이 경절문을 넘어서면 마음의 평화가 올듯하다.
경절문은 선종의 대표적인 수행문이기 때문이다. 옛 휴정스님이 강조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경절문(經截門)의 글씨는 보광사 효림스님의 글씨다.
만해마을은 별천지다. 여울가 숲속에 이런 아름다운 문학의 집을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다행스럽게도 빈방이 있어 체크인하고 개울가로 나간다.
내설악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소리와 주변 숲의 녹음에 서울을 떠나오면 피로가 말끔하게 가셔진다.
만해마을을 산책한다.
녹음이 짙어지고 개구리소리 들리는 늦봄, 행복하고 설레는 날 저녁 어둠이 내리고 있다.
먼 길을 달려왔다. 세상을 등지고 이런 곳에 은둔하면서 살았던 이 땅의 지사들 생각이 절절하다.
나는 그들의 흔적과 발자취를 찾아 떠다니는 사람이다.
만해마을에서 하룻밤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꿈나라 갔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산골의 비는 삼삼하지만 고독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창문을 열고 비 그치기를 바라지만 영 그치지 않고 있다.
일층 식당에 내려가 아침밥을 먹은 후 만해마을 탐방에 나선다.
김용직 서울대교수가 ‘만해문학박물관을 쓴 반듯한 글씨 아래 한용운 시인의 흉상이 있다.
콘크리트 구조물을 그대로 둔 회색 건물이 인상적이다.
1층에는 한용운 선생의 저서와 유품들이 연대별 주제별로 선생의 일대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하는 공간이다.
2층은 기획전시실인데 벌써 퇴락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3층 세미나 실은 잠겨 있는데
창문으로 보니 책상에 먼지가 뽀얗다. 제대로 활용이 되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한용운 시인의 고택 당호가 ‘심우장’이다. 만해마을 주차장 왼쪽에
‘심우장’이란 회색의 콘크리트집이 있다. 당호를 이근배 시인이 썼다.
심우장(尋牛莊)의 뜻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이며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을 비유한다.
‘자기자신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만해마을에서 가장 큰 ‘문인의집’은 문인들을 위한 공간과 세미나실과 식당이 있다.
문인의 집 글씨는 정진규 시인의 글씨다. 입구에 들어서니 아카데미한 분위기다.
많은 문인들의 서예글씨가 걸려있다. 언제 이런 글씨를 쓰고 행사를 많이 했는지 부지런들 하다.
‘만해학교’는 청소년들의 단체 활동을 위한 숙소다. 만해학교 현판의 글씨는 신경림 시인이 썼고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라”라는 만해 한용운선생의 명언이 새겨져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조선불교유신론’을 계승하고 ‘반야경’의 무소유를 근본으로 여기는 사원 ‘서원보전’은
특이한 구조다. 건축이 일단 파격적이다.
‘서원보전’이란 글씨는 오현스님이 썼다. 간헐적으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서원보전’의 계단을 오른다. ‘
서원보전’은 적막하다. 스님도 없고 썰렁하다. 그러나 정갈한 공간과 침묵이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도울 김용옥이 쓴 만해평화지종 (卍海平和之鐘)이란 글씨를 읽는다.
민족의 통일과 만민의 평화와 평안을 갈망하는 의미에서 울리는 법전사물(法殿四物)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있는 범종루가 반긴다.
일반 사찰의 범종루는 전통형태의 지붕과 단청, 누각의 모습을 하는데, ‘만해평화지종 범종루’는 비만 피할 수 있는
지붕만 있고 벽이 없다. 파격적인 열린 공간이다.
이 종은 만해마을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울릴 수 있다고 한다.
이 땅에 평화를 염원하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갈구하도록 가슴을 울린다.
빗발이 그치면 다시 인제읍으로 달려가야 한다. 인제향교 답사와 ‘인제산촌민속박물관’도 탐방하여야한다.
무엇보다 인제군청 윤형준 계장을 만나 박인환시인의 기념관 설립건에 관해 인터뷰를 해야 한다.
‘만해마을’에 있는 '만해문학박물관'을 탐방하고 나니 다행스럽게 비가 그친다.
그러나 정갈한 공간과 침묵이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한용운 시인의 일대기와 문학적인 업적은 ‘한용운시인과 홍성’에서 자세하게 논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만해마을을 건너 만해마을을 떠난다. 비도 그치고 바람이 삽상하다.
승용차를 세우고 내설악에서 내려오는 맑은 북천가를 서성인다. 문학기행팀들을 위한 휴식 장소를 찾기
위해 여울가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
'12선녀탕' 근방에 좋은 장소를 눈에 넣어가지고 승용차를 몰아 북천을 따라 난 길을 따라 인제군청으로 향한다.
인제군청 문화관광과의 윤형준 계장이 반갑게 맞이한다.
그는 10년 전부터 박인환 시인을 선양하기 위해 생가복원과 가칭 “박인환시인문학기념관” 신축문제를 다루는
일선 행정기관의 책임 담당자다.
“생가가 고증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가라고 신축을 하였다가 문제가 되면 오히려
예산낭비에 따른 비난이 더 거세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가복원은 하지 않기로 하고 박인환 시인의 문학기념관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현재 이 예산이 배정된 상황이며 장소는 생가터 옆 인제산촌박물관 뒤가 되겠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산촌민속박물관을 지을 때부터 이곳에 박인환시인의 생가터를 알았습니다.
박인환 시인과 박물관을 한곳에 집중을 시킨 것입니다.”
나는 박인환 시인의 묘소가 망우리에 거의 방치된 듯 보이는 것에 관해 물었다.
“유족들과 이곳으로 박인환 시인의 묘소를 이장하는 문제를 협의중입니다.”
이곳으로 박인환 시인의 묘소를 옮겨와야 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윤 계장은 내게 인제문인협회에서 발간한 ‘ 박인환 시인 깊이읽기’ 단행본을 선물로 준다.
고맙게 받고 나와 인제읍을 걷는다.
인제의 역사는 유구하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고구려(저족현), 통일신라(회재현)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인제(麟蹄)라고 하였다.
1413년(태종13년) 인제는 비로소 현의 소재지가 되어 현감이 파견되었다.
1896년 인제가 군으로 승격하였지만 8,15광복과 더불어 일부 면이 북한지역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제읍, 남변, 북면, 기린면, 서화면, 상남면의 1읍 5개면이 인제군을 이루고 있다.
인제향교로 향한다. 인제읍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인제향교는 문이 잠겨 있다.
그런데 자세히 자물통을 보니 잠겨 지지 않은 상태다. 국기게양대에 태극기 휘날린다.
2층 누각인 운소루(雲昭樓)의 대문을 살짝 열고 향교 안으로 들어간다.
조선의 향교는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이다.
인제향교에도 대성전, 명륜당(明倫堂) 및 동재(東齋)·서재로 앉아 있어 대견하다.
조선의 지방교육 기관인 향교는 각 지방관청인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종6품의 선생과 정9품의 훈도(訓導)가 향교의 교육과 관리를 책임지도록 ‘조선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그 당시의 교육지침은 이만큼 확실했다. 이것이 조선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조정에서 학전(學田)을 제공하여 이 수세(收稅)를 가지고 향교 운영비용에 사용하였다.
향교의 학업 실적은 수령(守令)의 진급심사에 반영되었으며 매월 교육현황을 상부기관인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향교가 거의 불에 타고 서원(書院)이 생기면서 향교의 역할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조선 조정은 효종 때부터 향교안(鄕校案)에 성명이 기재되지 않은 자는 과거의 응시를 박탈할 정도로 향교의 교육을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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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향교
건립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인제향교의 건축물은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모두 불타 없어졌다.
그뒤 광해군(1610년)때 재건립 되었다. 구인기(具仁基) 인제현감(1615년) 신진하(申鎭夏)현감(1804년)
재임시 장소가 이전되기도 했다.
1930년 대홍수로 동재, 서재, 대성전, 명륜당이 침수되었다.
홍수가 나도 침수되지 않는 장소인 현재 위치에1934년 건립하였으나 6·25전쟁 때 모두 불에 타는 불운을 당한다.
필자가 이렇게 인제에 와서 향교를 상세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곳이 지방의 학교이기 때문이다.
이런 향교와 서원들이 고을마다 존재하였기에 지방의 인재들이 키워질 수 있었다.
이쯤에서 거론되지 않고 있는 박인환 시인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를 재답사를 시작한다. 생가터 풀섶에서 인제읍을 바라본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서쪽 산밑에 인제군청과 인제향교가 있다.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는
국도변이다. 앞으로 소양강이 흐른다.
박인환 시인의 고향 마을은 이제 읍이 되었고 아름다운 강마을로 재건되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인제’라는 시를 읽어보면 그가 자신의 고향인 인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된다.
인제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 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른 산간벽촌에
나는 자라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
부질없고나
그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
하늘에 구름도 없고
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어느 곳에 태어났으며
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
눈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준
눈이여
나에게도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 박인환시인의 시 ‘인제’ 전문
1956년 3월11일 박인환 시인이 영면에 들기 10일전에 조선일보에 발표한 이 시를 읽다보면 고향에
관한 그리움이 스며있다.
인제는 6,25의 격전장이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자신이 태어나 태를 묻은 땅은 자신의 죽음 직전에 어머니와 함께 가장 그리워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고 쓴 것이 아니지만 필자가 ‘박인환시인과 인제’라는 제목으로 문학기행을
기획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시가 이 ‘인제’라는 시를 읽고 부터다.
오래도록 시인들을 연구하면서도 필자 스스로도 박인환 시인을 그저 통속적이며 허무주의자로
알았으며 그 넓이와 깊이의 앎을 포기하였다.
그저 유행가 가사를 작사한 시인으로 알고 슬그머니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의 도회지적 이미지에
손상을 입일 수도 있는 자기고백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도 모른 산간벽촌에
나는 자라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
부질없고나
‘인제문인협회’에서 펴낸 ‘박인환 깊이읽기’를 읽고 그의 짧았던 삶을 약술해 본다.
박인환 시인은 1926년 8월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부친 박광선과 어머니 함숙형 여사의 4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인제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의 덕수공립학교로 전학했다. 우등생으로
졸업하여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지만 학업보다는 영화와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결국 경기중학교 3학년 때 자퇴를 하고 아버지의 친척이 있던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고 졸업한다.
1944년 박인환 시인의 나이 18세 때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에 입학한다.
이듬해 해방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와 아버지를 설득하여 3만원,
작은 이모에게 2만원을 얻어 종로3가 2번지 현 탑골공원근방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개업한다.
이국적인 이미지의 서점으로 화제가 될 수 있었던 분위기에 일조를 한사람은 화가 박일영의 도움이 있었다.
특별한 등단제도가 없었기에 1946년 ‘국제신보’ 주간으로 근무하던 송지영의 추천으로 이 신문에 ‘거리’를 발표한다.
1948년 ‘마리서사’를 폐업하고 김규동, 김수영, 양병식 ‘신시론’를 내고 이해 5월 덕수궁에서 이정숙과 결혼한다.
신혼집은 광화문135번지 지금의 교보문고 근방에 있던 처갓집이었으며, 이 집에서 장남 세형이 출생한다.
1949년(24세)때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지만
이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되기도 한다.
1950년 9,28 수복때까지 숨어 지내며 9월25일 딸 세화 출생한다.
12월8일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종군기자로 활동한다.
1951년 5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 부산광복동 골목에 두 평짜리 방을 얻어 피난생활 하였다.
1953년(28세) 동인들과 함께 ‘이상 추모의 밤’ 열고 시낭송회를 가졌으며, 5월31일 차남 세곤 이 출생한다.
7월 휴전협정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1955년(30세)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를 타고 미국 여행, 3월5일 부산항 출발한 후 약 19일간의
아메리카 여행을하고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의 기행문을 기고한다.
아시아 재단에서 제정한 ‘자유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서정주 박목월시인에게 1표 차이로 떨어진다.
1956년(31세) 3월17일 ‘이상추모의 밤’ 개최 이후 폭음으로 오후 9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9월19일 문우들이 힘을 모아 망우리 묘소에 작고 초라한
비가 세워진다.
박인환 시인의 일생은 짧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불꽃처럼 살았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6,25동란이라는 격동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철저하게 주관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결혼한 가장으로
그 자신 얼마나 걱정과 고민이 많았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 주변은 이제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은 아직은 인제군에서는 만해마을과 더불어 가장 크고 번듯한 건축물 로 보인다.
결국 이 터에서 태어난 박인환 시인과 비록 홍성에서 태어났지만 백담사에서 수도한 한용운
시인이 인제가 아끼고 선양해야 할 인물인 것이다.
인제군 싸이트에 접속하고 인제군의 인물을 클릭하면, 이 두 분이 인제군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인물로 올라와 있다.
이 박물관은 인제군이 사라지는 민속문화를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산촌민속 전문 박물관으로 2003년 개관하였다. 산촌 사람들의 신앙 생업 음식 놀이를 모티브로 춘하추동의 계절별 산골살림들이 오롯하다.
궁벽한 농촌생활과 깡촌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옛 추억이 가슴으로 스며들 것이다.
인제군이 이곳에 박물관을 세운 것은 박인환 시인의 문학관과 연계하기 위함이라고 윤형준 계장이 일러 주었다.
먼곳에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집중탐방이 가능하게 배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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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산촌민속박물관
이곳을 서성이다 보면 이곳이 곧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가 된다.
생가터 풀섶을 거닐면서 나는 큰 궁금중이 생겼다. 그는 왜 슬픈 애가를 가진 나약한 시인으로만 존재하는가.
그의 참여시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왜 사람들은 그의 참여시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목마와 숙녀’, ‘세월이가면’ 만을 강조하고 있단 말인가.
이번 문학기행은 그의 참여시들에게 관해서 새롭게 조명하는 게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인환시인은 리얼리즘의 작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낭만과 모더니즘 작가로 알고 있다.
박인환 시인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로 등단 이후 6,25 전까지 쓴 대부분의 시들은 현실 참여시다.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핏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 열차 부분
스티븐 스펜터를 흠모하여 그의 시 ‘급행열차(The express)’ 한 줄을 인용까지 한 이 시다.
스펜더가 1955년 선시집을 출간하자 박인환시인도 선시집을 발행한다.
앙코르와트의 나라
월남 인민군
멀리 이 땅에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이 분다.
- 남풍 부분 1947년
제국주의의 야만적 제재는
너희들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
힘 있는대로 영웅되어 싸워라
자유와 자기 보존을 위해서만 아니고
야욕과 폭압과 비민주적인
식민정책을
지구에서 부숴내기 위해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부분 1947년 7월26일 씀
장시11개 연 78행의 장시를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분노를 참으며 이 시를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네델란드의 식민지 인도네시아와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독립을 격려하였다.
그가 1955년 자비 출판한 ‘박인환 선시집’에도 ‘남풍’과 ‘거리’가 제외되었다.
이 책 제목도 본래 ‘검은 준열의 시대’라고 했다.
이 시집 후기에는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의지 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도 사회와 싸웠다” 라는 현실 참여적인 발언을 하였다.
6,25 전쟁 전에 그의 시는 반제국, 반자본주의, 반식민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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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인 기념비
당시 그는 스페인내전에서 반파쇼적인 인민전선에 참전하는 것을 자랑했던 일부 유럽 시인들 예컨대 오든, 스펜드, 루이스등 뉴컨트리 작가들을 흠모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과 다르게 시대가 절망적이며 시인은 ‘두 개의 세계를 살아가야한다“는 ’C,D 루이스‘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철저하게 관념적인 감상주의와 모더니스트로 가두어 놓은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극명하게 부조리한 사회현실과 스스로 싸웠다고 그는 시인하고 있다. 이런 박인환 시인을 두고 아직도
절망적으로 명동에서 술이나 마시고 멋이나 부리다가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간 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오늘의 박인환시인을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1976년 ‘목마와 숙녀’에는 몇 편의 이념적인 시들이 제외되었다.
이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당시의 시대사적인 보수적인 이념에서 발간이 부적절한 이유기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인천항’, ‘남풍’, ‘열차’, ‘자본가에게’ 사회주의적인 이념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존의 문단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시를 추구했다. 사회과학적인 현실인식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진입이 우리만의 자주국가 건설이 불가능한 상황을 다른 아시아 국가로 눈을
돌려 말하고 있다.
그의 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을 읽는다.
전쟁 때문에 나의 재산과 친우가 떠났다.
인간의 이지를 위한 서적 그것은 잿더미가 되고
지난날의 영광도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다정했던 친우도 서로 갈라지고
간혹 이름을 불러도 울림조차 없다.
오늘도 비행기의 폭음이 귀에 잠겨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부분
서울에 피의 비와
눈사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볕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어린 딸에게 부분
해방정국의 극심한 이념대립과 6,25의 동족상쟁의 엄청난 폭력 앞에 그는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겠는가.
시(詩)라기 보다 일기 같은 글을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6,25의 충격이 휩싸여 있는지 알 수 있다.
가족이 죽고 문단의 선후배들이 각기 이념의 칼날아래 적이 되어 서로를 죽이는 현장에 시인은 벌거벗고 노출되어있다.
그 감성 많고 정 많던 시인이 미치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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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인 묘소(망우리공동묘지)
박인환의 시는 개인적인 속좁은 소재가 아니라 현실적이며 이 땅의 역사적인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전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잃고 친우를 잃어버린 역사의 현장에 서있는 것이다. 자신의 고향에 어서 봄이 오길 기다렸던 시인이 떠난 지 수십 년,
문화 관광으로 인제군은 이제 활기 있게 발전을 하고 있다.
박인환 시인은 내설악을 타고 내려온 맑은 강물을 보면서 유년을 보냈다. 그의 시심은 도시에서 자란 것이 결코 아니다.
이곳의 산과 들 강들이 그를 키워서 도회지로 내 보낸 것이다. 연어의 회귀본능이 아니더라도 그의 생명이 더 길었더라면 고향시를 많이 썼을 것이다.
박인환 시인의 무덤을 찾기 위해 풀섶의 찔레꽃 향기가 진동하고 개망초꽃이 무성한 망우리 공동묘지를 찾아 그의 소식을 전하리라.
그의 시는 이 땅에서 아름답고 순결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살아남는 시가 되리라. 비록 그의 무덤이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지만 때가 되면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찾게 될 것이다. 낭만과 고독과 사랑이 깃든 시 “세월이 가면‘을 노래로 부르며 인제읍을 떠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 하지...”
<양재클럽 / choiclon>
박인환 연구
1956년 이른 봄.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어느 정도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는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경상도집 」에 몇 명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羅愛心(나애심)도 함께 있었는데,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러나 나애심은 노래를 하지 않았다.
朴寅換(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그것을 넘겨다보고
있던 李眞燮(이진섭)이 그 시를 받아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그 악보를 들고 나 애심이 노래를
불렀는데,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한 시간쯤 지나 宋志英(송지영)과 나 애심이 자리를 뜨고,테너 林萬燮(임만섭)과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李鳳九(이봉구)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그 노래소리를 듣고 명동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술집 문앞으로 몰려 들었다.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노래 - 박인희
목마와 숙녀 (낭송 박인희)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 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출전: <시작(詩作>, 1955.10
李箱(이상)을 좋아했던 그는 이상의 기일인 3월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했다(그러나,이상이 실제로 죽은 것은 1937년 4월17일 새벽 4시경이었다). 그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간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 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메모지를 건네며,무슨 예감이라도 했던 사람처럼 박인환은 씩 웃었다.20일밤 만취상태로 세종로에 있던 집에 돌아온 그는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956년 3월20일 오후 9시였다. 그는 「잡지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의 갑작 스런 부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꼿꼿이 누워 천장을 향해 눈을 치뜨고 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송지영이 감겨주었고, 또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게 조니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그의 지인들은 그가 좋아 했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도 함께 묻어 주었다.
<할렐루야찬양 /김병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