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규 (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6∼1992)
*신부, 루마니아 작가. 부쿠레슈티 및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1916년 루마니아 동부 라스뵈니 넴츠에서 희랍 정교회의 신부인 아버지(콘스탄틴 게오르 규)와 어머니 마리아 게오르규 사이에서 출생.
*1939년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에카테리나 부르비아와 결혼함.
*1939년 수상(아르만드 칼리네스코)이 친파시스트의 손에 피살당하자 그를 조상(弔喪)하는 시집 <아르만드 칼리네스코>를 출판하여 당국의 통제를 받고 시집도 소각 당함.
*1940년 시집 <눈 위의 낙서>로 루마니아 왕국 시인 상 수상.
*1949년(33세)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 정착. 소설 <25시>를 쁠롱 사에서 간행하여 세계적 인 명성을 얻음.
*1974년(58세) <코리아 헤랄드>사와 <문학사상>사의 공동 초청으로 부인과 함께 한국 방 문. 서울, 부산, 광주 등지에서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음.
*1992년 타계.
게오르규 / 25시
이 소설은 게오르규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 외에도 그에게는 여남은 개의 소설이 있지만 누구나 게오르규라면 《25시》를 연상한다.
그만큼 2차대전 직후의 상황속에 《25시》가 던진 충격파는 크다고 하겠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소박한 성품의 평범한 농부이다.
판타나의 초원처럼 자연이 준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인물, 자연에 순응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착한 루마니아의 농민이다.
어느날 그는 까닭없이 징발당하여 유대인 캠프에 수용된다.
거기서는 아무도 그를 루마니아 인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헝가리로 탈출하자, 이번에는 루마니아 인이라는 이유로 고문을 당한다.
헝가리 정부에 의해 독일로 팔러가서 인종학자 뮐러 대령을 만나자 이번에는 게르만 민족의 정통파인 <영웅족>의 표본이란 판정을 받는다.
군인이 된 그가 프랑스 포로를 구출하여 미군 진영에 이르자 그들은 처음에는 연합군을 위한 영웅 대접을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적성국가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가둔다.
그리하여 무려 13년간이나 수용소에서의 수난의 날들이 계속된다. 1백여 군데의 수용소를 거친 후 어느날 그는 체포되던 때처럼 영문도 모르게 석방된다.
그러나 석방된 지 18시간만에 다시 동구인이라는 이유로 억류당한다.
이 파란만장한 모리츠의 비극은 그가 한번도 <요한 모리츠>로서 대접받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항상 유대인·루마니아인·동구인, 적성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고문당했고 강제로 노동을 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모리츠의 비극은 인간을 개인으로서 인정하지 않게 된 서구사회의 기계화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빚어진 것이다.
서구사회는 이미 인간에 의해 구성된 사회가 아니다.
기계와 인간의 교합에서 생겨난 <시민>이라는 잡종의 사회인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이 <시민>은 원시림의 맹수보다도 더 잔인한 족속들이다.
그들은 심장 대신 크로노메타를 달고 있는 기계인간이다.
그들은 인간을 피와 살과 심장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로서 보는 대신 어떤 범주의 한 부속품으로 본다.
예술까지도 숫자로 이해하려 드는 서구사회에서는 개인적 특성을 가진 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인간부재의 상황을 코루가 신부는 <25시>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것은 마지막 시간이 지나가 버린 후의 폐허의 시간, <메시아가 와도 구원해 줄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인 것이다.
자살하기 직전에 코루가 신부는 모리츠에게 안경을 벗어주면서 말한다.
'안경을 쓰고 앞으로 더 볼 것은 도시와 인류와 교회의 멸망뿐일 것이다.'
이런 절망 속에서 작가 게오르규는 이 고발의 문학을 시작했다.
그의 페시미즘은 4반세기 전인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과장된 것처럼 여겨졌다.
<시인의 신경과민> 정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흐른 오늘날도 서구문명의 시간이었던 <25시>는 전세계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설 《25시》에는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다.
그건 요한 모리츠의 인간미이며, 고난을 참을 줄 아는 노아의 슬기다.
그들은 살벌한 기계만능의 <시민사회>에서 능히 살아남을 저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노아의 방주처럼 오염된 문명의 홍수를 극복하여 다가올 새 세계에 <인간>의 종족을 이어줄 것이라 믿으며 신부는 미소를 머금고 죽어간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1974년에 한국에 온 게오르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수난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믿고 견디는 사람들과 생명의 의미를 찾아 안정을 박차고 나서는 서구의 젊은이들, 그리고 시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25시를 극복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중략) 이런 사람끼리 손을 마주잡을 때 기술 관료주의의 사회는 붕괴되고, 인간은 다시 사회의 주인이 될 것이다.'
구원의 길이 막힌 현대인의 절규
콘스탄트 비루질 게오르규(Constant Virgil Gheorghiu)는 1916년 루마니아 동부 몰다비아 지방에 위치한 페트로다바현의 산마을 라스뵈니 넴츠(Rasboenei Neamitz)에서 태어났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 기슭에 있는 그의 고향은 2 천 년의 역사를 통해 항상 동쪽에서 쳐들어오는 침략자들의 루우트에 위치한 때문에 루마니아에서도 많은고난을 당한 곳이다.
이 돌투성이의 (페트로다바는 '돌의 도시'라는 뜻) 산마을에서 게오루규의 조상들은 몇 백 년을 두고 무산 계급을 돌보는 성직자로서 살아왔다.
부친 콘스탄틴 게오르규도 신부였다.
게오르규는 콘스탄틴 신부의 6남매 중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 무렵의 루마니아는, 5백년녀 년에 걸친 오토만 제국의 지배에서 갓 벗어난 샌생 왕국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옹립한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때 루마니아는 역사상 최초의 독립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생활은 전과 대동소이했다.
종주국이 바뀌어도 소수 지배계급의 착취수법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영양실조로 펠라그라병에 걸리는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원래 루마니아는 가난한 나라가 아니었다.
발칸 반도의 어느 나라보다도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진 부유한 나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모두 소수의 폭군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게오르규는 가죽 채찍을 들고 백성의 피를 빠는 이 거머리 같은 족속들을 작품에서 준열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키랄레싸의 학살><가죽 채찍><살가죽 의복> 등 참조).
성직자들도 두 계급이 있어서, <거머리>들의 구구인 부르조아 성직자들과 백성들의 목자인 프롤레타리아 성직자로 양분되어 후자는 완존히 천민 취급을 당했다.
게오르규의 조상들은 후자에 속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6남매를 둔 시골 신부여서 가난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게오르규는 구두도, 먹을 것도 없는 군색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희랍정교회의 성화에 나오는 성인을 방불케하는 인물이었다.
세상에 나와 자기의 깨끗한 눈동자에 처음으로 비친 인물이 성상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었음을 그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인간이 지고지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배웠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자유롭게 살도록 만들어진 것뿐 아니라 하느님처럼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게오르규의 기본적인 바탕을 형상화하였다.
인간이 짓밟히는 사회, 짐승처럼 ,무리>로서 처단당하는 상황에 대한 작가의 고발정신 (<25시>)는 부친에게서 계승받은 인간존중 사상에 기인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항상 <개인>이다. 따라서 '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자의 죄과는 전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맞먹으며 한 인간의 생명을 구제하는 자의 공로는 전세계를 구제하는 자의 그것과 대등하다.'
(《제2의 찬스》서사)고 그는 생각한다.
이런 인간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 작가는 자기의 조국을 항상 '아름답고 사랑스러고 매우 불행한 나의 조국 루마니아'라고 표현한다)은 묘지옆에 있는 사제관에서 보낸 유년시절에 아버지를 통하여 얻은 것들이다.
그의 세계를 이루는 제삼의 특징은 어머니 마리아 게오르규에게서 받은 유산이다.
그건 미에 대한 헌신적 사랑과 시인으로서의 자질이다.
'폭풍이 불어 눈에 싸인 페트로다바의 산악들이 지옥의 하얀 불꽃에 휩싸이는 밤이면 어머니는 산속을 헤맬 길손들을 위해 창마다 환하게 불을 밝히고 그들을 위한 기도시를 썼다.
또 이른봄 꽃샘 추위에 얼어죽는 꽃망울과 새싹들을 위해서도 어머니는 늘 시를 쓰곤 했다.'고 그느 어머니를 회상한다.
그에게 <비르질>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도 어머니였다.
게오르규는 성요아힘의 날인 9월 9일에 태어났다.
따라서 루마니아의 풍습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요아힘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정이 풍부한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미운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과 싸워가면서 끝내 아들에게 <비르질>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비르질은 로마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와 같음).
그녀는 이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이름'이라고 아들에게 설명했다. ( 《왜 나는 비르질이라 불리는가?》참조).
이에 대하여 '시인인 나의 어머니가 언어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하다'라고 게오르규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 게오르규는 그 이름 때문에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었다.
성인의 이름을 가진 아이들의 생일은 모두 축제일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너 자신이 성인이 되어라'는 말로 아들의 슬픔을 달랬다.
그 말은 그의 평생을 결정짓는 말이 되었다.
지금도 성인이 되려는 노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적을 사랑하는 일이며 수난의 가시밭길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일에 관해 그는 또 하나의 슬픈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9월 9일에 태어났는데, 공문서에는 9월 15일로 등록되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평생 가짜 생일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그녀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고통을 주면서 상처를 고쳐주는 불에 달군 쇠붙이 같은 일면이 있었다.'고 게오르규는 회고하고 있다.
관헌이 잡으러 올 때까지 아버지가 자기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말은 민감한 게오르규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과 동족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회교국인 터어키는 루마니아를 통치하면서 어떤 수단으로도 그들의 신앙을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자, 루마니아 인에게 가혹한 대상을 요구했다.
신앙 대신 자식을 국가에 바치라는 요구였다.
그래서 루마니아 인들은 신앙을 위해 자녀들을 대신 바치는 피의 조공을 치르며 5세기 동안을 살아왔다.
물론 게오르규 의 당시에는 그런 야만적인 법이 없어졌지만, 통치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아이의 탄생을 비밀로 하는 풍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이름과 생일에 얽힌 사연 이외에 유년기의 게오르규를 괴롭힌 또 하나의 사실은, 모든 신도들과 아버지를 공존시켜야 하는 아픔이었다.
그 아픔을 극복하여 아버지를 <혈연과 신앙의 이중의 아버지>로 섬기게 되기까지 그는 많은 고뇌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천상계 같은 사제관에서 보낸 행복한 유년 시절의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가 정말로 실낙원의 비극을 맛보아야 하는 날이 왔기 때문이다.
아홉 살이 되었을 대 그는 학비가 없어 신학교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으레 신부가 될 줄 알고 자라온 게오르규에게 있어서 그 사실은 낙원에서의 추방을 의미했다.
그건 하늘로부터의 거부를 뜻하였기 때문이다.
《키알레싸의 학살》에서 교사 아포스톨이 수염이 안나서 신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을 때의 절망을 그린 부분은 작가의 이러한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잘교가 된다는 조건으로 숙식과 학비를 무료로 제공하는 왕립 키시네프 중학교에 들어갔다.
섬세한 어린 시인 게오르규에게 있어 군관학교에 간다는 것은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는 고통>이었다.
키시네프 중학교에 관한 묘사는 그의 작품의 도처에 나온다. (《키알레싸의 학살》《재2의 찬스》등)
키시네프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학으로 부쿠레시티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재학시절에 그는 틈틈이 시를 써서 20세의 약관으로 이미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여기서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희랍정교회의 시관이다.
희랍정교는 그리스도교 중 헬레니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교파이다.
그리스적인 밍에 대한 열애가 종교와 융합되어 승화된 희랍정교회는 미와 신성을 동질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수도자는 미를 사랑하는 자를 뜻하며, 시인도 성인으로 추앙될 수 있다.
이 작가가 '나는 신부이며 시인이다'라고 말하면서 갈등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39년 8월에 전쟁이 일어났다.
시인이 된 그가 신문사의 기사를 써가면서 부쿠레시티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그의 아파트에 아버지가 찾아왔다.
20년을 계속 입은 누더기 같은 수단(사제복)을 걸친 아버지의 모습에 너무 가슴 아팠다.
그는 어떤 독자가 선사한 스키 구두를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유대인 행려병자를 모르고 순례시킨 죄로 파직당한 것을 호소하러 상경한 것이었다.
스키 구두를 신고 떠나는 아버지를 역에서 전송한 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상면이 되었다.
며칠 안가서 페트로다바는 전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몰렸고 작전상의 이유로 군에서 전주민을 어딘가에 소개시켰기 때문이다. 그후 수십년 간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어도 부친과 그의 교구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대학시절에 게오르규는 부쿠레시티에서 명문의 딸 에카테리나 부르비아 양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국회의장의 딸로 어머니는 신문사 사장이었다.
그녀 자신은 당시의 루마니아에서는 보기드문 여자 변호사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닷새전인 1939년 8월 24일에 그들은 결혼했다.
'전쟁은 우리의 결혼선물이었다.'고 작가는 <내면의 일기>(《가죽 채찍》끝에 있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들의 결혼은 모든 면에서 이질적인 두 세계의 결합을 의미했다.
시인과 변호사인 두 남녀는 그들의 직업만큼이나 대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부인 에카테리나는 풍요한 환경에서 자란 여자이며, 논리적인 명증성을 종하하는 성격이다.
이러한 아내에 대해 게오르규는 <지상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결합은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법과 종교(혹은 시)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면이 서로를 이어주는 축대가 되었다고 에카테리나 여사는 말한다.
이들 부부는 《25시》에 나오는 트라이안 부부의 원형이다. (에카테리나 여사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고)
그들이 결혼할 때의 루마니아는 영불 양국의 민주 정권이 통치하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영불의 대독 전쟁에서 독일이 우세해지자 루마니아에서는 친파시스트인 철위단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갔다.
전쟁이 시작된 지 3주일 만에 수상 아르만드 칼리네스코가 친파시스트들의 손에 암살 당했다.
그러자 민주정권도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23세의 젊은 시인 게오르규는 파시스트들의 만행과 폭력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칼리네스코에게 바치는 저항시를 써서 출판했다.
암살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이 출판은 사실상 목숨을 건 행위였다.
반대당을 몰살하는 친파시스트 정권의 혁명이 일어나던 날 게오르규는 죽을 각오를 하고 집을 나섰다.
서점의 점주에서 칼리네스코에게 바친 자신의 시집이 아직도 꽂혀 있는 거리에서 그는 파시스트에게 어깨를 잡혔다.
다행히도 군중들이 총을 든 파시스트의 손을 잡고 늘어져 겨우 목숨은 건졌다.
경찰을 매수한 출판사 사장의 도움으로 목숨은 겨우 견졌지만 그의 책들은 모두 불살라졌다.
그리고 그는 모든 집필과 학구의 자유를 금지당했다.
그러나 1940년에는 전에 쓴 시집 《눈 위의 낙서》로 왕국시인상을 받았으며, 해외공관의 문정관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8월 루마니아에 공산정권이 세워지자 서방측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 부인과 함께 도보로 미군 점령지구를 향해 수백 킬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독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은 그가 연합국의 적성국가인 루마니아 인이라는 이유로 그들 부부를 2년간이나 감금하였다.
체포될 때처럼 자동 케이스로 석방된 후에도 그들은 주거증명이 없어 취직을 할 수 없었다.
자선단체의 구호를 받아 간신히 연명하면서 미국·캐나다·남미 등으로 이민 가려고 백방으로 주선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쓰라린 패배의 날들을 독일에서 보내다가 1948년 빠리에 정착, 1949년 5월 프랑스어로 번역된 소설 《25시》가 나오자 그는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이어 소설 《제2의 찬스》를 발표하여 세계문단에서 지위를 확보할 무렵에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즉 제 2차대전 중에 벳사라비아에서 자행된 학살사건을 규탄한 그의 작품이 발견된 것이다.
이 사건은 반파시스트파가 친독파이며 친파시스트인 철위단을 소탕한 것으로 벳사리비아 주미의 3분의 1을 희생시킨 집단학살 사건이었다.
게오르규는 그렇게 많은 인명을 학살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칼리네스코를 위해 시를 썼을 때와 마찬가지로 학살당한 벳사라비아의 주민들을 위해 《불붙는 드니에스터 강변》이라는 작품을 써서 학살자의 불의를 고발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전에 파시스트가 그의 책을 불살랐듯이 이번에는 반파시스트가 그의 책을 불살랐다.
'만약 그때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 레지스탕스 계열의 문인들의 눈으로 볼 때 그는 피시스트의 옹호자였다.
전후의 프랑스에서의 파시스트의 의미를 생각하면, 파시스트로 몰린 게오르규가 빠리에서 겪은 박해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아라공이 편집하던 <레 레뜨르 프랑세즈>지가 이 사실을 폭로하자 전국의 매스콤이 그를 향하여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비난하는 편지가 수북히 쌓이고 거리에 나다니는 것조차 위험한 굴욕의 날들이었다.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것은 그가 전에 겪은 어느 고통보다 더 참혹한 것이었다고 10년 후에 작가는 고백하고 있다.
차라리 파시스트의 나라로 가 버리자는 아내에게, 그는 이런 수난이 파시스트냐 반파시스트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런 것은 모두 구실에 불과하다.
시인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인간이다.
민중이 시인을 용사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중략)
누에가 약간의 명주실을 만들기 위해 전존재를 투입하듯 시인은 작품을 쓰기 위해 목숩을 바치는 자이다.
화학 섬유가 범람하여 누에의 존재가치가 희박해져가듯, 앞으로 시인이 필요없는 사회가 올 것이다.
어쩌면 당신과 나는 박해받는 마지막 시인일지도 모른다.
'(<내면의 일기>)는 그의 말은 '나는 남들이 내 버린 라틴어를 주워모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라는 고백과 상통한다.
획일주의와 기계문명이 지배하는 물질만능의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부르짖고, 개인의 유일성을 역설하며 정신의 우위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그의 자세는 라틴어를 소중히 간직하는 행위와 흡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는 자신의 말대로 수난받는 마지막 시인인지도 모른다.
그가 시인이면서 소설만, 그것도 정치소설만 쓰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현대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정치로써 재단하는 사회이다.
폭력에 대한 게오르규의 순수한 항의가 때로는 파시스트로, 때로는 반파시스트로 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억울하게 처단되는 인간들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사건 이후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려고 《혼자 떠도는 사내》를 썼다.
그리고 잠시 미국에 가 있다가 다시 빠리로 돌아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이상의 세 작품 외에도 그는 계속하여 소설 《다뉴브강의 희생자들》《기적의 구걸자들》《페라힘》《페트로다바의 집》《아가피아의 불사의 인간들》《키랄레싸의 학살》《라 콘도티에라》《여간첩》《가죽채찍》《살가죽 의복》등을 썼다.
그의 소설을 크게 대별하면 <카르파티아의 목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일련의 작품들과 구사회의 획일주의와 기계만능 사상을 고발하는 계열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 번역한 《25시》는 물론 후자에 속한다.
그는 오직 하나의 이상만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는 작가이다. 그의 이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그는 시인이며 망명자이다.
'시인은 산이나 들과 같이 조국 강토의 일부분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4반세기에 걸친 망명생활은 루마니아의 산이나 강의 빠리의 샴가에 와 있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상태였다.
그가 끊임없이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쓰는 이유는 조국이라서만이 아니라 루마니아 인들이 수난당하는 <욥>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국민에게 표시한 애정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망명생활이 끝난다고 해도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폭력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그의 시가 있을 것이다.
그는 불의를 심판하는 정의의 실현자이기 때문이다.
1963년 5월 23일, 그는 빠리에서 희랍정교회의 신부의 서품을 받았고 1966년년 6월에 부쿠레시티 성무원에서 성직자에게 최고의 영예가 되는 외코노므 스트라브로포르 위원에 선정되었고, 197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전세계 공의회의 고위성작자로 추대되기도 했다.
상기한 소설 외에 자전적 에세이 《25시에서 영원의 시간으로》(1965년)와 루마니아에 관한 에세이, 그리고 종교적 인물들의 전기를 다룬 에세이가 4,5편이 있다.
소설과 에세이 등 그의 작품은 모두 빠리의 쁠롱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대부분이 루마니아 어에서 번역한 것들이지만 신부가 된 후로는 불어로 집필하기 시작하여 《25시에서 영원의 시간으로》를 위시한 최근의 작품들은 직접 불어로 쓴 것이 많다.
현재 빠리의 라틴 구역에 있는 쟝 드 베베가의 성당에 봉직하고 있으며, 16구에 있는 샴가 16번지의 아파트에서 부인 에카테리나와 함께 살고 있다. 자녀가 없는 노부부의 쓸쓸한 생활이다.
<코리아 헤랄드>와 ,<문학사상> 사의 초청으로 1974년 3월 20일에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11일간 체재한 일이 있다.
<출처: 삼성출판 / 눈높이님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