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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

존 웨슬리 / 감리교 창시자

작성자靑野|작성시간09.01.27|조회수1,380 목록 댓글 0

 

    1789년 웨슬리 초상화 / Romney

 

존 웨슬리

(rev.John Wesley, 1703년 ~ 1791년)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영국 성공회 신부이다.

성공회감리교에서는 그의 회심일인 5월 24일을 기념하고 있다.

 

생애

성장과정

존 웨슬리 신부는 1703년 7월 17일 링컨셔 주 에프워스(Epworth)에서 성공회 사제인 새뮤얼 웨슬리

신부(Rev.Samuel Wesley)의 아들로 태어났다.

새뮤얼 웨슬리 신부는 40년간 교구 일을 맡아 본 성실한 성직자였으며, 자녀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헬라어,라틴어, 프랑스어에 능통할만큼 빈틈없는 학문실력으로 19남매를 직접 가르쳤으며,

아이들이 규칙적인 생활과 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1]

 

신학생 시절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 Christ Church College에 입학한 존 웨슬리 신부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 노래, 신학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으며[2], 성적도 우수하였다.

 

복음주의 운동

존 웨슬리는 1725년 성공회 부제로 서품받았으며, 1726년 링컨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진로문제로 고민하던 존 웨슬리 부제는 중세 영성가 토마스 아 캠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

《거룩한 삶과 죽음》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어 하느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728년 9월 성공회 사제서품받은 존 웨슬리 신부는 1729년 옥스퍼드대학교에 돌아와서,

이미 동생 찰스 웨슬리(1707년 12월 18일생)가 결성한 Holy Club의 지도자가 되었다.

존 웨슬리 신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청중들을 감화시켰는데, 이는 신학생 시절 신학과 웅변을 성실하게

공부한 덕분이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마르틴 루터로마서 서문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회심후 그는 1739년 브리스톨에서 감리교회를 창설하였으나,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성공회 신부로 남았다.

1791년 3월 2일 존 웨슬리 신부는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존 웨슬리 신부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를 돌아다니며 직접 민중들에게 전도하였는데, 죽을때까지

40만km나 여행했다고 한다.존 웨슬리 신부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영국 성공회영국 국교회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고, 교회의 전통,예전, 성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성공회의 전통으로 존중되고 있다.

전자는 저교회파(Low Church),후자는 고교회파(High Church)로 불리기도 하였다.[3]

 

신학

존 웨슬리 신부는 개인적 회심, 철저한 신앙생활, 예전(Liturgy)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전적 신앙생활의 회복,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4], 믿음으로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稱義)론을

기독교인성령에 의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복음전파,거듭남의 은혜,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죄를 멀리 하는 거룩한 마음, 하느님의 구원

사랑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십자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각주

  1. 《기독교교육》2008년 6월호,기독교교육과 신학-복음주의 부흥운동가,요한 웨슬레.
  2. 대구성서아카데미 칼럼-신완식의 런던이야기
  3.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새로운 나,우리》/홍영선 지음/대한성공회 p.136
  4.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위키백과>

 

 

 

존 웨슬리의 월급  

 

 존 웨슬리 목사님은 신혼시절에 받던 월급이 '30'파운드 였다고 합니다.

웨슬리 목사님 자신은 28 파운드 정도면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는

2 파운드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복지금으로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에 웨슬리 목사님의 월급은 60 파운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 목사님은 역시나 28파운드만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32파운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복지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다음해엔 웨슬리 목사님의 월급이 90파운드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님은 28파운를 제외한 62파운드를 복지금으로 후원했습니다.

 

 그 다음해에도 120파운드의 수입중에 웨슬리 목사님의 몫은 28파운드였습니다.

 

수 년이 지나고 웨슬리 목사님의 저서와 그 명예로 훨씬 많은 수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월 수입은 40000파운드까지 올랐으나, 

목사님이 사용했던 돈은 28파운드였습니다.

 

그의 삶속에서 비춰지는 자연스런 그리스도적 헌신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웨슬리의 '돈 사용 원리'

 

 웨슬리는 돈 사용의 3대 원리를 설교하였다.

제1의 원리는 ‘열심히 벌어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기독교인들이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 이웃의 사업을 해치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재능을 사용하여 부지런히 돈벌기를 또한 제안한다.

제2의 원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는 것이다.

제3의 원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주어라”는 것이다.

제1원리와 제2원리는 제3원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웨슬리는 제3원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존 웨슬리의 생애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 엡워드교구 목 사 사무엘 웨슬리와

아내 수산나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친가의 독실한 종교생활 환경에서 자라나 그 믿음이

신실했다. 그의 어머니는 집안에 [가정학교]를 만들어 열아홉명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며 교수과목과 교육방침도 결정했다.



자녀교육의 제일의 목표를 [규칙생활]로 정해 아이들의 방종을 제재함으로써 착실한

종교교육을 시켰으며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놓고 개별 상담과 기도도 해주었다.  

존 웨슬리가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된 것은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일년에 한번 엡워드교구 목사의 집에서는 [알파벳잔치]라는 것이 있 었다.



이는 자녀가 다섯살이 돼 첫 공과를 배우기 시작하는 날로 첫날은 ABC를,

다음날부터는 창세기를 보며 철자법, 독법, 서법 등을 가르치며 산수, 문법, 역사, 지리도 차례로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이 6세 되던해 엡워드 목사관에 불이나 [가정학교]는 잠시 중단된다.

1707년 2월 7일, 집을 삼킬듯한 불길이 목사관을 휩싸자 식구들은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들은 형들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들을 점검해보니 한 아이가 없었다.

그때 [사람살리라] 라는 소리가 목사관2층에서 들렸다. 웨슬리가 창문에 몸을 내밀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뛰어 올라갔으나 사나운 불길에 쫓겨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 농부가 다른 사람의 목마를 타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해 내려오자 마자 목사관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이 위험한 사건을 겪은 웨슬리는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존재] 를 확실하게 믿었고 그의 80여년의 생애동안

[화재]와 [구원]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죤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

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



화재 사건 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존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 중학교)

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그는 6년만에 차터하우스의 교육과정을

마친후 옥스퍼드로 갔다.

웨슬리는 1년에 40파운드의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의 그리스도 교회대학에 입학했다.

웨슬리는 재학중 우수한 성적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논리가 뛰어나 학우들과 논쟁하면 언제나 상대를 꺾고 말았다.



1725년 22세때 그는 생애에 큰 전환기를 맞게된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한 웨슬리는 마침내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 흡잡을게 없었으나 성직을 맡기엔 부족한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영적경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작은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내마음의 성결에 대한 관념조차 갖지 못하였다. 나의 종교생활은 다만 습관에 지나지 않았고 명백한

죄를 범하면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었으며 도리어 그 죄에 만족하였다."



그가 먼훗날 그 때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

웨슬리가 사도직을 걷기로 작정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책은 토머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다.

"하나님의 인도로 나는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참된 종교는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우리의 언행뿐 아니라 우리의 사상에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슬리는 이때부터 하루에 두시간 이상을 신앙생활하는데 보냈으며 내적 성결을 위하여 힘썼고 기도도 열심히

하여 그리스도에게 몸바칠 각오로 살았다.

그리고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갖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성결에 대한 도리를 깨달았다.

웨슬리가 쓴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의 기본 사상은 아켐피스의 저서에서 영향 받은 바 크다.

또한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란 책은 그가 아켐피스에게서 얻은 신념을 더 굳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중 한없는 감동을 받았다. 나는 나의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 자신을 자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결국 악마에게 바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기는 웨슬리의 생애에 있어서 큰 전환기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중생의 경험은 이로부터 13년뒤에 얻었으나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몸바쳐

살겠다는 목적을 세우기는 이때였다.



요한 웨슬리가 집사 안수를 받은 것은 그가 22세때인 1725년 9월19일 이었다.

옥스퍼드 그리스도교회대학 교회당에 옥스퍼드감독 요한 피터에게서 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는 그로부터 3년뒤에 받았지만 가끔씩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당시 설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725년부터 2년동안 나의 설교는 실패였다. 나는 그때 청중이 신자이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개의 도리와 복음의 진수를 설교의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속에대한 신앙을 전파하지 않은 까닭으로 내 설교에는 힘이 없었고 감화력이 없었다."



1726년 3월 11일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특대학생이 되었다.

이 대학에 간지 얼마 안되어 그는 희랍어 강사직과 토론회의 심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희랍어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그의 신학 사상을 그들에게 불어 놓어주기에 힘썼다.

또한 주일을 제외한 토론회에서 학생들의 언론을 비평하고 평가해주었다.

그가 문학사의 학위를받은 것은 1727년 이었으나 당시 그는 웅변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웨슬리의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65세의 고령인데도 엡원 교구와 우릇 교구 둘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혼자서 두 교구를 맡기엔 힘이 벅차 아들 존 웨슬리를 부목사로 초빙했다.

웨슬리는 2년 3개월동안 부친 교구에 봉직한후 1729년 옥스퍼드대학 조교수로 피선돼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한편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옥스포드 그리스도교회 대학에 입학한 것은 1726년 그의 나이 20세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남달리 영리하고 비범한 재사였고 형이 오기 전부터 교내에서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종교모임을 가졌다.

서로 뜻을 같이하는 그의 동지들과 함께 매일매일의 학과 일정표를 만들고 종교적 의무를 지키며 침식 시 간을

될 수 있는대로 줄이는 등 신앙향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썼다.

그들은 이러한 규칙 생활로 동창학우로부터 "규칙장이들" (metho-dists)라는 별명 까지 듣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옥스포드로 돌아온 후 즉시 동생이 조직한 단체 [신성 구락부] (holy club) 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729년. 타락한 조국을 바로 잡고자 뜻 있는 청년 몇 사람이 조직한 [신성 구락부]는 신임회장 존 웨슬리를 맞았다.

회원 네 명중 세 명은 대학 조교수였고 나머지는 대학 재학생이었다.

웨슬리는 이들을 지도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으로 신중히 하였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일반회원들에게 항상 겸손했다. 그들은 매일 밤 모여 기도하고 희랍어 성경과 고전문학을 연구했다.

[신성구락부]의 성경연구의 첫 열매는 구제운동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방문하고 병자 위문을 하는등 여러가지 봉사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옥스포드 감독의 허가로 그들은 감옥 뿐 아니라 시내의 가난한 가정도 심방하였으며, 무산 아동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한번은 남루한 옷을 몸에 걸친 소녀 하나가 웨슬리에 구걸했다.

[너는 대단히 배가 고픈 모양이로구나. 옷은 그것밖에 없니?] 웨슬리는 그 소녀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돈이 없어 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의 서재 벽에는 훌륭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들은 마치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았다.

"나는 가련한 소녀의 배고픔을 면케 해 줄만한 돈으로 내집의 벽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아 - 내 마음엔 공의도

없고 자비도 없다. 이 그림들은 저 가련한 소녀의 피 값이 아닌가?"

이 때부터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그들의 수입 중에서 생활비를 제외한 잔액 전부를 구제비에 썼다.

웨슬리는 연수입 30파운드를 제외한 2파운드를 내놓았고 이듬해는 60 파운드의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32파운드를 구제비로 썼고, 다음 해 역시 90파운드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6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리의 부친 엡윗 교구 목사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웨슬리가 몇몇 신성구락부 회원들과 식민지 북아메리카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떠나고 남은 신성 구락부

회원들은 계속 모임을 갖다 졸업 후 목사직을 받고 각자 흩어지고 말았다.

이 단체가 해산된 이후에도 그들이 남긴 향기는 얼마간 옥스포드 학원에 머물렀다.

그들의 신앙과 생활은 처음엔 한 대학을 깨우쳤고, 그 다음엔 영국 전역에 믿음의 불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 북 아메리카 대륙과 전세계에 신앙의 불꽃을 일게 하였다.

감리교가 처음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신성구락부였다.



웨슬리는 그의 끝없이 타오르는 종교적정열로 완고한 영국교회의 안일주의와 의식에 치중한 생활을 박차고 믿음의

요람인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직하고 북아메리카로 전도여행을 떠난다.

이 전도단은 1735년 10월 18일 시몬주호를 탔는데 이 배에는 모라비 아인들과 80명의 영국이민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이 미대륙에 도착하기까진 8주나 걸렸는데 이 항해는 웨슬리에 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특히 선객들 중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제를 통해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용감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항해 도중 여러차례의 풍랑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웨슬리는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독일 모라비안 교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태연했다.



폭풍이 지난후 웨슬리는 한 모라비아교인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만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 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날 웨슬리는 그의 일기장에 [나의 일생중 가장 영광스런 날이었다.]고 기록했다.

그 영광은 웨슬리가 구원의 빛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일생 처음으로 그 구원의 빛이 존재함을 깨달은 것이다.

1736년 2월 6일. 웨슬리 일행이 탄 배는 조지아에 도착했다.

배가 도착하자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무언가 잘못돼 있음을 깨달아 모라비아교 목사 스팽겐베르크에게 신앙상담을

요청했다.



웨슬리는 조지아에 도착한 후 모리비아 교단의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신앙 체험을 한다.

[웨슬리 선생, 성령께서 친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계십니까?]

이 물음에 웨슬리는 무슨말로 대답할지 몰라 주저하였다. 이때 스팽 겐베르크목사는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웨슬리가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웨슬리는 대답했다. [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다는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팽겐베르크목사의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고 되묻는 말에 웨슬리는

[나는 ...알죠]라며 입속에서 겨우 웅얼웅얼 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영적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 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 문답이야말로 그의 항해중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하면서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 섬 광은 극히 순간적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어둠이 찼다.

그후 웨슬리는 사바나시에 도착해 첫 주일은 맞아 고린도전서 13장 을 낭독하고 [사랑]이란 주제로 설교했다.

사바나에서의 활동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반신도들이 사치품을 멀리하고 귀부인들도 검소한 의복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그곳에 주간학교를 설립한 후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웨슬리는 주일마다 분주했다.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열었고 11시 에는 성찬식과 설교를 했으며, 오후1시에는 프랑스인 예배에 참석하고,

2시에는 유년들을 모아 교리문답을가르쳤다.

또 3시에는 기도회를 인도하였으며 6시에는 모라비안인 교회에 나갔다.

토요일에는 사바나시 부근에 있는 2개 마을에 들러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의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평일에는 스페인

출생의 유대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서반아어를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이와같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노력하였지만 신도들을 젖으로 먹이지 않고 그들이 먹기 어려운

극단의 교회주의와 금욕주의의 굳은 음식으로 먹인 까닭에 그 비상한 활동과 노력은 아깝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몇가지 예를 들면 그는 영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찬을 허락지 않았으며, 국교도 자녀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었고, 영국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않은 자에게는 장례식 예배를 거절했다.

또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엄격한 태도 때문에 그는 일반신도들의 호감을 잃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 생긴 불행한 연애사건으로 그의 조지아 선교사업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사바나 식민지 장관의 딸 소피아 합키라는 미모의 여인과 서로 열렬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사정이 생겨 그 여자와 의 결혼을 단념했다.

어느날 웨슬리가 성만찬식을 집례하는데 이 신혼부부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웨슬리가 이 부부를 내쫓았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남편은 여러 가지 불명예스러운 구실을 만들어 웨슬리를 고소하였다.

그러나 고소의 내용은 그다지 대수로운 사건들이 아니었을뿐 아니라 동기가 웨슬리를 실각케 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돼 기각되었다.

비록 아무 근거없는 고소사건이었으나 그에게는 불명예스런 일이었고 그 때문에 신도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어 웨슬리는 조지아선교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737년 12월 2일 웨슬리는 귀국의 여정에 오른다.

사바나를 떠난 웨슬리는 천신만고 끝에 찰스타운에 도착,영국 행 범선 을 타고 1738년 2월1일 고국에 도착했다.

도착 후 그는 조지아 선교 때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나는 미국인을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다. 위험이 없는 한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외칠수 있는 신앙을 원한다.]

조지아 선교 실패로 인해 그는 지극히 낮아졌다.



웨슬리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 모라비아교단의 신도들과 신앙교제를 했다.

그들 중 페터 볼러와의 대화는 웨슬리의 신앙에 큰 교훈을 주었다.

그는 볼러로 말미암아 그의 불신앙을 깨닫게 되었다.

중생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음을 깨달은 그는 [내가 전도를 중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묻자 볼러는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선생은 믿음을 얻을 때까지 그 믿음을 얻은 후에는 그 믿은 믿음을 전하시오.]라고 대답했다.

웨슬리는 볼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이튿날 아침 옥스포드 감옥에 있는 한 사형수에게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전도했다.



다음주일 웨슬리는 퀘이커교 예배에 참석했다.

이것은 웨슬리의 부 흥운동 뿐 아니라 감리회 예배의식 발전상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나는 폭스(퀘이커교 창설자)회에 참석하였는데 내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넘처 흘러 그동안 해왔던

기도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로운 기도를 했다.]

영국교회의 의식과 기도문에 따라서만 기도했던 그는 자유기도가 더 은혜로움을 깨달았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중생의 기쁨을 체험한다.

이날 그는 런던시 올더스게이트가의 성경연구와 기도를 목적으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



한 낭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웨슬리의 마음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이상스럽게도 나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중생의 경험은 웨슬리의 성격과 전도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의식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리는 복음주의의 구원과 생명을 전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웨슬리가 중생한지 18일 후 옥스포드대학 앞뜰에서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내용은 감리회 신앙개조의 표준이 되었다.

이 설교는 그의 중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인만큼 그의 중생 이전의 이론과 그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영국국교는 웨슬리를 의식을 깨뜨리는 자로 간주,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벌써 런던에 있는 교회들도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9년에는 네 교회만 그에게 설교를 허락했다.

또 뉴케이트 감옥에 수용된 죄수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전에 해오던 방법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돼 그는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웨슬리는 영국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1739년 4월 2일부터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웨슬리는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들이나 일반회중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하여 교회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739년 4월 2일 월요일 밤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첫 노천 전도 이래 50여년간 그는 매주 열 다섯번 설교하며 3,4백리를 여행하였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 없으므로 옥외나 감리교인들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하였다.

그가 자라난 에보트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 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예의범절만 찾던 영국교회의 목사들은 제복차림으로 노천에서 전도 하는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다른 목사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지만 그날 오후4시 나는 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약 3천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웨슬리는 야외설교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의 새로운 선교방법에 대해 성도들이 걱정을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나에게 내 능력에 따라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악한 자를 바로잡고 덕이 있는 자를 견고하게

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교구에서 일하는 것을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이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쁜 구원의 소식을 듣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웨슬리 일행에게 일대 수난이 다가왔다. 찰스 스투얼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감리교도들에게 박해가 심했다.

그들이 갖는 [속회]와 [야간집회]를 교황권 운동이나 왕권 회복운동으로 오인, 교구 목사들과 지주들이 폭도를 매수해

집회를 방해했다. 이러한 폭도들의 행패는 1757년까지 계속됐다.

1742년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속회를 조직하고 첫 모임을 가졌다.

속회는 대략 12명이 한팀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간증과 성경공부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 감리교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웨슬리는 찬송에도 힘을 썼다.

영국교회의 성가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웨슬리와 그 동생 챨스 웨슬리는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챨스 웨슬리의 지은 찬송이 6천편 이상이라 한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감리교인은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여졌다.

그 노래들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

'구주여 크신 인애를 /170' 등이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들을 어떤 단체로 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었다.

옥외 전도, 즉석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업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계단이다.

이 각 계단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영국교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영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1776년 처음 발표된 총회통계를 보면 감리교엔 목사 97명, 성도 1만 9천7백61명, 순회지구 40개로 나타나 있다.

그 일년후에는 성도가 2만5천9 백11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이 커지고 양적으로 발전한 감리교는 1984년 웨슬리는 기독교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첫 사랑의 상처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려고 했으나 나이 48세때 미망인인 파질부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부인의 변태 행각과 질투로 별거하게 됐으며 얼마후 부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반면 웨슬리가 받은 복은 컸다.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분주하고 많은 많은 일을 했다.

영국 전역과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등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열었으며,

4천번 이상의 설교를 했고 일생을 통해 선교 여행한 총거리가 40 만km에 달했다.

1790년 6월 28일 87회 생일을 맞은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부터 나는 87세가 된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겠다.

그러나 신체 어느 부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물결이 멈추기까지

육체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 뿐이다.]

그해 10월 웨슬리는 수섹스주 윈첼시교회 뜰에서 마지막 야외설교를 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만날만한때 주를 찾으며 그가 가까이 계실때 부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한 열로 앓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시티 로드교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됐다.

1791년 3월 2일. 그의 작은 방에는 열 한사람이 모여 있었다.

침상 위에 누운 웨슬리 는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그의 유해는 시티 로드교회 뒤뜰에 안장되었다.



영국사회를 믿음으로 구원한 믿음의 선구자 웨슬리는 다른 여타의 유럽국가들이 유혈혁명으로 타락된 산업혁명 이후

사회에서 벗어난 것과 달리 영국에 명예혁명이라는 영광스런 사회변혁의 중심적인 사상을 제공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구원을 이뤄야 한다는 사회구원론의 효시였다.

그의 후계자인 우리도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선언한 그의 선언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선교 대상으로 삼고

그들에게 구제, 교육 등 갖가지 방법으로 선교를 펴야 할 것이다.


 

<Graced 블로그>

 

 

 

존 웨슬리 신학

  

 

 

구원론


가. 선행의 은총

 

웨슬레는 칭의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하는 은혜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칭의 받는 믿음은 사람의

노력의 산물이거나 은혜에 대한 사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같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이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생긴다. 그럼 인간은 칭의 받는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믿음이 칭의의 은혜를 주게 한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믿음을 주시지 않는가?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위의 질문에 대해 다른 대답을 내린다. 즉 믿음을 받기 위해 인간이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 믿음의 선물을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능력을 웨슬리는 선행의 은총 또는 모든 사람안에서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은총이라고 표현한다.

이 은총은 모든 능동적 응답의 근원이며 선한 욕망즉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려한는 욕망이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또한 이 선행의 은총은 받기를 기다릴 필요없이 모든 자연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응답의 능력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성취함에 있어서"라는 설교에서 하나님이 먼저 활동하시니 인간도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이유는 인간편의 책임인 것이다.

 

이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은 믿음을 주시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주시는 회개의 촉구를 받아들이고 회개의

합당한 행위를 하려고 노력한다.

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인간의 마음이 감각적이 되고, 둔감해 있던

마음이 민감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활동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는 하나님은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자연인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선행적 은총을 주어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웨슬 리가 이해하는 인간의 실존이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기에 앞서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으로 회개의 촉구를 하신다.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생기기 전에 회개를 해야 한다.

선행의 은총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왜 인간은 믿음을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회개해야 하는가?

웨슬리는 그의 인간관에서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래로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한다.

웨슬레의 구원론은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죄인으로서의 상태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인간의 상태는 세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첫째는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이고,

둘째는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이고, 셋째는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별히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에 대한 진술은 인상적이다.

웨슬레는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이라고

진술하였다. 자연인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는 다른 말로 원죄 즉 죄의 세력에 사로 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원죄로 인해서 사람은 교만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며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우선되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

자기를 사랑하여 육체의 정욕대로 움직여 세상의 것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즉 칭찬받고 싶어한다.

또한 우상 숭배(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존중하고 필요로하며 영광을 돌림)의 죄를 저지른다.

이로써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죄의 결과로 인간은 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자연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웨슬레에게 의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방치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 속에서 선행적인 은총으로 역사하여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을 율법의 심판 아래로 이끌어

들임으로서 타락의 조건을 인식하게 한다.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 들이기 시작한다. 사실 그 양심으로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선행의 은총을 양심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죄인임을 깨달음으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나. 확신의 은총


선행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게 되며 어느 정도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즉 율법으로 회개의 촉구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자각을 한 인간에게 구원은

"확신적 은총"에 의해서 수행된다.

확신적 은총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인식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자각을

일으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확신의 은총으로 인간은 스스로를 전적으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은 아담 이후로 타락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즉 아담 이후로 인간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확신의 은총으로 이제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받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확신의 은총으로 죄인임을 깨달아 인정하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기를 포기한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이렇게 죄인임을 인정하고 포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회개이다.

이 회개는 이제 선행의 은총으로 아는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믿음은 회개 이후에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죄인인 인간을 참회로 이끄시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웨슬레는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참회 또는 죄의 확신을 신앙보다 앞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레의 구원론은 초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이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초기 종교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참회는 신앙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이후에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참회에 따르는 업적의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처럼 기회가 없는 경우도 있기도하다.


이로 인하여 참회의 신앙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업적을 이루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같은 참회의 업적이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로서 의인을 위하여 간접적으로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계속적인 역사의 조건으로 참회의 신앙에 따르는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의 수준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서 그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인간의 측면에서의 참회의 신앙에 따른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으로서의 열매가 갖는 성격은 다만 하나님의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을 받을만한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로서의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앙의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된다.

도덕적 의미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인의 신앙을 용납하도록 허용한다는 인간의 입장에서의 표시에 불과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다. 칭의의 은총


확신의 은총으로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때 하나님은 복음으로 역사하신다.

그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에 있어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에 대한 동의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사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럼으로서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시어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럼으로서 하나님께 확고히 의뢰하는 믿음이다.

한마디로 고난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라. 의인이 됨


1) 의인의 조건


웨슬레에 의하면 의인, 곧 칭의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오직 `믿음' 밖에는 없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웨슬레에 의하면,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은총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죄를 인식하고 뉘우쳐

참회하게 되는데, 참회의 열매는 `믿음'을 간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제 참회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믿음'인 것이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그 사람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 따라서 의인의 조건은 오로지 믿음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은 칭의받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동시에 반드시 회개,곧 참회의 과정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웨슬레는 이때의 참회를 인간 자신의 극복할 수 없는 죄성, 무력감을 깨달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시어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럼으로서 하나님께 확고히 의뢰하는 믿음이다.


2) 의인의 내용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속죄, 곧 죄의 용서이다.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을 생명으로 옮겨놓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선포로 이루어진 구원받은 상태이다. 그럼 이 믿음으로 칭의를 받아 얻는 구원은 무엇인가?

첫째 현재의 구원이다. 둘째 모든 죄(원죄,자범죄)에서의 구원이다. 셋째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이다.

현재의 구원이란 현제 이 땅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모든 죄에서 구원이란 이제 더 이상 죄를 짓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습관적인 죄나 고의적인 죄 그리고 죄된 욕망에서부터 나온 죄를 짓지 않는다.

죄책으로의 구원은 율법으로 부터의 구원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고 정죄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죄책에 대해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인받은 사람의 실제 생활이 사실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거나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죄가 없어서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죄로 인정하시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을 유죄로 선고하시지 않는 것을 뜻한다.


마. 신생


웨슬레의 구원론에 따르면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어 일어나는 사건으로 "거듭남"이라고도 말하는 "신생"의 사건이 설명된다.

이 신생의 사건은 의인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굳이 순서를 논한다면 논리적인 순서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역사하신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이 동일한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의인이 상대적인 변화를 뜻한다면 신생은 진정한 실제적인 변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의롭다고 여기심으로서 인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시지만 인간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심으로서

인간 안에서 일하신다.

따라서 의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외적인 관계성을 변화시킴으로서 원수의 관계였던 것을 자녀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인간의 내적 영혼을 변화시킴으로서 죄인을 성자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의인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위치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의인은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신생은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상이한 것이다.


1) 신생의 본질


사람을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신생은 자연적인 출생과 흡사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고,

그래서 은총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2) 신생의 증거


신생은 신생하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영혼을 살리실 때, 혹은 인간의 영혼을 죄로 인한 죽음의 상태에서 義의 생명의 삶으로 일으키실 때에 인간의

속에서 역사하여 외양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한 신생의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는 "화평"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그의 마음을 주장(골3:15)"하는 것이며 "흑암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이 상태는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세력에 의해서도 칭의의 상태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이다.

 

둘째는 `소망'이다. 이것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빌1:23)"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는 죽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희망은 "빛나는 형상" 즉 마지막 심판주로 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이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완전히

새로워지는 일" 즉 신령한 것으로 다시 지음 받은 몸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영생을 받는 것이다.

희망은 "영광의 면류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분깃"을 기다리는 것이다

 

셋째는 `기쁨'이다.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 죄과의 용서를 받아서 기뻐한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영과 함께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해 주시는 것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희망을 가지고(롬5:2) 크게 기뻐한다"

 

네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롬5:5)"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들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가 보고자 하는 대상이었고 마음의 기쁨이었으며 시간과

영원에서의 그의 분깃(영생)"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확신시키시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현제 믿는 바의 구원을 하나님이 구속하실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


바. 믿는 자의 회개


신생한 사람에게도 죄가 있는가? 아니면 이들에게는 죄가 전혀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웨슬레는 바울의 주장을 따라서 육체의 정욕에 의한 악한 성질이 신생한 자에게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그의 `신자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그는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둘이 서로 대적하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믿는 자도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함을 말한다.

그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성서의 말은 무엇인가?

신자안에 아직 싸워야 할 죄의 세력이 남아 있다면 신자는 부분적으로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바울의 말을 우리는 분명히 해석해야 한다.

이 말은 믿음으로 신자는 과거의 죄책에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즉 과거의 죄책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웨슬리는 이렇게 이 악한 정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는 세력으로 신생한 자의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신자가 성령을 따를 때에는 항상 우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웨슬레의 생각은 신자에게는 죄가 없고, 육체에 속한 정욕도 없고, 타락의 경향성도 없다는 생각과는

반대되는 생각이다.

따라서 신생한 자도 그 마음 속에 남아있는 죄성 곧 교만,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우상숭배, 불신 등을

항상 느끼며 산다면 신자가 칭의와 신생함을 받은 후에도 회개가 계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신자안에 남아 있는 죄는 무엇인가?

고집이다.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원하는 것을 가지려는 의지를 더 중요시한다.

자만이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구원이 자신이 책임지려고 한다.

또한 세상을 사랑한다. 이것으로 인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생긴다.

분노와 탐심도 신자안에 있는 죄이다.

그래서 계속하여 깨어 있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때때로 자만,고집,분노를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기도 하고 안락을 더 사랑하고 세상의 명예와 향락을 좇게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태만도 죄이다. 죄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지 않는 것도 죄이다.

태만은 내적으로 선한 생각을 품으려 하지 않고 외적으로 사랑과 경외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해서 말하는데, 웨슬레가 이 때 말하는 회개는 신생한 자의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고집과 우상숭배의 경향성, 곧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과거의 죄책으로 죽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마지막으로 우리 스스로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신자와 신생한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웨슬리는 신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에 비하여 신생한 자는 죄에 순종하여 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신생한 사람은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에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신생한 자도 죄의 세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에 있지는 않다. 그래서 죄의 세력과 맞서서 있는데, 그 맞선 상태는 대항해서 싸우는 상태인 것이다.


사. 성령충만과 성화


1) 성화의 기준으로서의 십계명


신생한 자는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모든 성품" 즉 "격정과 교만, 육욕과 허영, 야심과 탐욕"에서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에서 초연하다(요일2:16)"고 한다.

신생한 자는 삶에서 말로서 죄짓는 일들 즉 "거짓말, 허위, 사기, 궤사, 정의나 자비에 어긋나는 말, 비방"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의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행위는 십계명에서 지적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런 자는 성화된 자이다.


2) 성령충만과 은혜의 수단


우리의 칭의와 성화가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물주심"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물주심"은 성령충만이다.

이것을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정하신 모든 의식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정해진 수로를 계속 지키는 것"

즉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살 때에 성령충만을 받는다.

웨슬레는 구체적으로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종교의미로는 예배와 찬송 ,기도이며 도덕적 의미로는 선행, 구제 등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초대기독교의 구원받은 개인들은 "단순히 악을 행하는 일을 구만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초대기독교들의 영혼은 "선을 행하는 일을 갈망"했다.

"단순히 악을 행하는 일을 구만둔 것"은 소극적인 것 겸손, 인내 등이다.

"선을 행하는 일을 갈망"은 적극적인 것으로 구제하는 것등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행위인 예배도 적극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3) 점진적이며 순간적인 성화


웨슬레의 이 성화론은 몇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칭의를 포함하는 초기의 성화의 단계로부터 완전한 성화의 단계로 점차 성장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난 이후에도 그 사람의 신앙은 계속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점진적인 발전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 성화의 시작은 신생이었다.

신생의 순간적인 경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내적인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부은 바 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초기의 성화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육의 악한 성질,악한 생각과 싸우면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성화의 발전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는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둘째 특징은 성화의 이 점진적인 과정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인하여 어느 순간에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려 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성화의 과정에서의 순간적인 발전의 단계가 있다고 보았던 것은 `성화'는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그 자신의 이해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것은 특별히 그 자신의 올더스케이드街에서의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결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4) 웨슬레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의 특징


첫째,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기독교의 진수였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웨슬레는 이 목표로서의 기독교인들의 완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것은 의도의 순수성이요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더러움과 모든 내적.외적 불결을 탈피하는 마음의 할례이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두번째의 특징은 동기와 사랑 안에서의 완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할때에 그것은 인간 자신의 무지나 실수 등의 제약성을 탈피하는 자유를 얻게 된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이와같은 제약성으로부터 벋어나는 자유는 "영화"의 순간으로 미룬다.

그렇다고 이와같은 제약성을 죄로 여긴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마음 속에 죄가 있는 상태와는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기가 되는 문제로 보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문제도 그 동기의 순수성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한계성을 가진 그대로의 완전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사랑 안에서 완전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에는 사랑과 반대되는 그릇된 性情이 전혀없고 생각과 행동의 전부가 순수한 사랑에 의하여 지배되는

상태의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완전한 사람들의 생활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된다.


세번째의 특징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 유지되는 완전이었다.

이것은 웨슬레의 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특징이다. 웨슬레는 죄를 이중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는 율법을 의식적으로 범하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을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였다.

그리고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가운데에서 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는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연약성으로 인하여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순간 순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은 순간 순간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가능한 완전인 것이다.


네번째의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전도와 봉사의 원동력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결은 윤리적 또는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웨슬레에 의하면 사랑의 행동이 나타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은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해야 되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도 이와같은 사랑이어야 한다. 즉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의 생활로 이루어지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어두운 세상을 밝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이와같이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론은 복음 전파와 사회 봉사의 동기와 기초를 제공하는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씀의 시냇가>

 

 

존 웨슬리의 성서론

          - 출처 : 김영봉 교수(협성대)

[이 논문은 존 웨슬리의 성서 이해를 다루고 있다.

존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서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그의 성서 이해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웨슬리의 성서관과 해석 방법에 집중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웨슬리의 신학이나 설교가 얼마나 철저히 성서신학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언급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필자는 웨슬리의 설교를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성서 신학적으로 바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거듭 확인하고 있다.

이 과제를 독자에게 맡긴다.]

모든 종교인이 다 그렇듯이, 그 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경전으로 삼았던 문서에 대한 그의

이해와 사용 방식은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그 사람이 종교적인 면에 대하여 진지한 사람이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진지한 종교인에게 있어서 경전은 가장 권위 있는 가르침이며 믿을만한 지침이다.

따라서 그 경전의 내용은 (그가 이해한 방식대로) 그의 생애와 사상을 크게 결정짓게 되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존 웨슬리는 스스로를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라고 말할 정도로 성서를 귀중하게

생각하였다:
바로 이것이, 내가 1725년부터 줄곧, 그리고 좀 더 결정적으로는 1730년부터 계속하여 지향해 왔던 요점이다.

그 때, 나는 homo unius libri, 즉 "한 책의 사람"이 되기 시작하였다.

성서 이외에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다른 것을 보 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그가 성서 이외에는 아무 책도 읽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위의 인용구에서 "상대적으로 말해서"(comparatively)라는 어구가 암시하듯이, "한 책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우선

순위를 말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제임스 조이(James K. Joy)가 웨슬리를 "천 권의 책의 사람인 동시에 한 책의 사람"이라고 불렀듯이, 그는 보기 드문

다독가(多讀家)였다. 그 많은 도서 목록 중에서 성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 작업에 있어서, 성서에 대한 그의 이해를 살피는 일은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근거에서 필자는 본 소고에서, 성서의 성격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와 웨슬리적 해석 방식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오늘의 신자들에게 주는 의미에 대하여 논의할 것이다.

1. 18세기 영국 교회의 성서 이해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살던 당시의 시대적 사조를 완전히 벗어나서 살수는 없다.

우리의 관심인 존 웨슬리도 역시 "그 시대의 아들"(a son of his age)이었다.

따라서, 그가 신학 수업을 하고 또한 저술 작업을 하던 18세기의 영국의 전반적인 신학 사조에 대하여 묻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특히, 이 논문의 주제를 위해서 우리는, "18세기의 영국 신학계는 성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이 특히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시기에 유럽 대륙, 특히 독일에서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하에 성서에 대한 비평적인 연구가 줄을 이어 출판되던 때였기 때문이다.

철학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나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의 공헌에 비견될 만큼, 이 시기의 성서학

연구에도 크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미 17세기말에 리차드 시몽(Richard Simon)은 신약 문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시도하였으며(Histoire Critique du Vieux Testament, 1678), 레씽(Gotthold Ephraim Lessing)이 그의 선생

허만 라이마루스(Herman Samuel Reimarus)의 유고집 Wolfenbuettel Fragmente(1778)를 출판하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던 때가, 바로 웨슬리가 영국에서 부흥운동과 저술운동에 열중하고 있던 같은 시기였다.

라이마루스의 이 유작집에 있었던 소 논문 "Von dem Zwecke Jesu und seiner Juenger"는 복음서 연구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역사에 있어서 한 분수령으로 작용하였다.

미카엘리스(J. D. Michaelis)가 신약성서 개론을 펴낸 것도 이 시기이며(1750), 제믈러(J. S. Semler)가 정경의 역사적

기원을 비평적으로 연구한 것도 이 시기이다(1771-75).

얼마 후에는 아이히혼(J. G. Eichhorn)에 의해서 구약성서 개론도 출판되었다(1780-83).

이러한 역사는 18세기 후반의 독일의 성서학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도버해협 동편에서는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의 관심은, 과연 이러한 새로운 사상적 변화를 웨슬리가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얼마나 받아들였는가에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우선 지적해야 할 점은, 영국 전체가 독일의 비평적 분위기에 대하여 상당히 늦게서야 알게 되었으며,

알고 나서도 한 동안의 저항기를 거쳐서 19세기 후반에서야 보편화되었다는 점이다.

1807년에 가서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수인 허버트 마쉬(Herbert Marsh)가 미카엘리스의 신약개론을 영어로 번역을

하였으나, 이 책은 곧 정죄를 받았다.

이 정도로, 성서에 대한 비평 정신에 관한 한, 영국은 반세기 이상 늦게 독일을 뒤좇고 있었다.

따라서 웨슬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독일의 비평학은 영국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서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는 오히려 전통적인 보수적 이해를 수용한 것이었고, 뒤에서 보겠지만 독일의 경건주의의

경향에 가까왔다.

이 사실은 아래에서 보게 될 그의 성서관에서 드러나며, 또한 독일 경건주의 신학자 요한 벵겔(Johann Bengel)의

주석을 극찬한 데서도 드러난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18세기에 일어나고 있던 새로운 비평학의 경향을 배격하면서 전통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웨슬리의 이러한 경향을 비추어 보면, 만일 그가 독일의 비평적 경향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개연성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웨슬리의 육신은 비평 시대의 초기에 살았으나, 그의 정신은 비평 이전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 말이, 웨슬리는 맹목적인 문자주의자(blind biblist)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는 앞에서 말했듯이 18세기 영국의 아들이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기를 바랄 뿐이다.

2. 웨슬리의 성서관: 성서는 어떤 책인가?

웨슬리는 전통적인 교회의 믿음인 "성서의 영감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감리교인의 특징"(The Character of a Methodist)이라는 글의 한 구절에서 확실히 표현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바 로 이 점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나 터어키인이나 불신자들과 구별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행의 유일하고도 충분한 기준 (the only and sufficient rule)

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우 리는 로마 교회의 교인들과 구별된다.

성서는 영감되었기 때문에 신앙과 실행의 "유일하고도 충분한" 표준이 된다.

영감에 대한 이 믿음은 그의 설교와 성서 주석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25에서 바울은,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웨슬리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특별 계시가 없으되." 그가 그것[직접 계시]을 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신적으로 영감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는 있다 -- 어떤 경우에는 특 별한 계시 그리고 특별한 명령을 가지고 썼으나, 또 다른 경우에는

그들에게 함께 했던 신적인 빛 즉 하나님의 영이 주는 영원한 보화의 힘을 빌어 썼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그들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신앙과 실행에 대한 신 적인 지침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표현된 견해에 따르면, 성서 저자들은 두 가지 유형의 영감에 의해 성서를 썼다.

하나는 명시적인 "특별 계시"요, 다른 하나는 암시적인 "영감"이다.

인간 저자의 소리가 표면적으로 크게 들리는 곳에서는 두 번째 유형의 영감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고, 화자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 혹은 성령으로 되어 있는 본문들은 첫 번째 유형의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웨슬리는, "거룩한 성서에 대한 신적 영감에 대한 분명하고도 간결한 증명"

(Clear and Concise Demonstration of the Divine Inspiration of the Holy Scriptures)이라는 한 페이지짜리의 논문에서

독특한 영감론을 피력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네 가지의 중요하고도 강력한 증거가 있다:

신적인 능력에서 온 기적(miracles), 신적인 이해에서 온 예언(prophecies), 신적인 우수성(divine goodness)에서 온

가르침의 우수성(goodness), 그리고 신적인 거룩성에서 온 인간 저자의 도덕적 품성. 이 네 가지의 증거들은 성서가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해 준다는 것이다.

이토록 위대한 성서를 누가 썼을까? 웨슬리에 의하면, 세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1) 선한 사람이나 천사에 의해 쓰였거나, 2) 악한 사람이나 악마에 의해서 쓰였거나, 3) 하나님에 의해 쓰였거나,

셋 중의 하나이다. 선한 사람이나 천사가 자신의 말을 쓰면서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속일 수 없을 터이고, 악한 사람이나

악마가 썼다면 그 내용이 이렇게 훌륭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이다.

따라서 남는 가능성은 "하나님" 뿐이다.

이렇게, 웨슬리는 성서의 영감성에 대하여 확신하였고, 또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였다

 

<정인경의 블로그>

 

  

웨슬리의 성령론

 

진리의 성령님은 우리가 구원 받는 과정에서 모든 도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제자들에게서 떠나시면서 성령을 주시기를 약속하셨고, 성령은 오순절 이 후 초대 교회에 강하게
작용해 방언, 예언, 말씀, 병 고침, 감동 감화 등으로 복음 전파에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중세 시대에 성령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웨슬리를 비롯한 근대 부흥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 조지아 주의 선교에 실패한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적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힘이 없이 형식적이고
경직된 자신이 신앙이 문제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1738년 회심을 계기로 성령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복음을 중심으로 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영적인 무지로 죄악의 길로 가는 사회를 선도하고 잠자는 신앙을 일깨우기 위해 성령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a) 성령의 본질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구분되면서도 일체함이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자 내 안에 거하는 하나님입니다.
성령은 창세 전부터 계셨고, 신격과 인격을 갖추셨으며, 우리를 구원과 성화로 이끄십니다.
성령은 거듭남으로 우리 영을 탄생시키고, 양육시키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합니다.
웨슬리는 인간의 회개, 믿음, 거듭남 등 구원의 전 과정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웨슬리는 우리를 진리와 성결로 이끄는 것은 성령이라고 했으며, 성령의 역사를 철저히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결은 모든 죄가 씻김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영적으로 순결한 상태입니다.
살후 2/3에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디도서 3/5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볼 때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성결의 집행자라 볼 수 있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끊임 없는 성령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은 믿음, 사랑, 기쁨, 감사, 평화 등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성을 극복하고 새롭게 변화되 성화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또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생명력 있는 설교를 가능하게 합니다.

요한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살전 5/19~20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갈라디아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님의 가장 큰 사역은 우리를 진리가운데 인도하셔서 옳은 길로 인도하시고 많은 깨달음을 주십니다.
또한 항상 성령의 불이 내 안에서 꺼지지 않도록 기도와 찬양에 힘써야 합니다.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도 멸시치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9가지 열매라는 다양한 성품을 주십니다.

일부 은사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를 중심하지 않고 은사에만 치우쳐 마귀의 주관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과 교리 공부를 등안시 하고 이교도적인 방언과 귀신 쫓음, 병고침, 이상한 입신 현상 등에 치중합니다.
그러나 은사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은사는 구원 받은 성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영 분별, 예언, 병고침. 방언 등의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령해지면 자신에게 미치는 나쁜 영의 파장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또한 귀신이나 마귀들린 자의 악을 영을 쫓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좌우(진리와 은혜)로 치우치지 않고 진리를 중심하면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b) 성령의 인격성과 신격성

1. 성령의 인격성

성령이 불, 바람, 물, 기름 비둘기 등의 상징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성령이 무생물이나 비인격적인 존재(힘, 능력,
에너지)로 오해되곤 했습니다.
성령을 의미하는 헬라어 '프뉴마'는 '호흡하는 기운'이라는 뜻으로 비 물질적인 강력한 실체를 가르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6/13,14절에 성령을 대명사 그(he)로 가르키는 것으로 보아 남성 인격성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는 존엄성과 품위를 갖춘 인격체로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성령의 인격적인 속성으로는 모든 것을 아시는 '지성'(고전 2/10),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진 '감성'(에베소서 4/30),
'의지의 속성'(고전 12/11, 롬 15/30)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님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보혜사(Comforter(위로자), helper(조력자))로
성령님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자 목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2. 성령의 신격성

초대 교회의 '아리안'(Arians)이나 '사벨리안'(Sabellian)과 같은 이단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힘으로만
간주해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격성과 신격성은 사도행전 5/3~4에서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다는 점에서 '인격성'이 증명되고,
성령을 속인 것이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이란 점에서 '신격성'이 증명됩니다.

사도행전 5/3~4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웨슬리는 구원과 성화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성령의 신성을 명백히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철저히 믿었으며, 진정한 기독교인은 삼위일체론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자(Arianism)에 반대해 성령은 그 본질에 있어서
성부와 같고, 성부와 성자가 역사할 때 성령도 동참한다고 보았습니다.

웨슬리도 성령의 신성이 성부와 성자의 신성과 동일하지 않다는 유니테리아니즘(unitarianism)에 반대해 성령의
신성과 동격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는 성령이 창조 사역에 관여했고, 구약 역사에도 참여했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모든 구원 역사에 참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존맥커리에(Jhon Macquarrie)는 성부를 '근원적 존재'(primodial being), 성자를 '표현적 존재'
(expressive being), 성령을 통합적 존재(unitive being)이라 하여 삼위일체론을 설명하였습니다.
요한 15/26의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내실 보혜사'란 구절을 통해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보내신 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벧전 1/11에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른 점을 토대로 성령이 아버지부터로 뿐만 아니라
아들로부터로도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 사역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임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웨슬리의 실천신학


 1. 웨슬리와 전도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단 없는 사명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장 19-20절).

감리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88세를 살며, 5천마일(지구전체 길이의 4분의 1)을 50년 넘도록 전도를 위해 다녔고,

135,000명을 전도하여 결신시켰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명을 충성스럽게 실천한 주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웨슬리로 하여금 열정적으로 전도하게 하고, 전도의 결실을 낳게 한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로, 웨슬리는 “성령의 확신”을 믿었다.

성령께서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 예수님의 사랑하심, 죄사함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됨을 증거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웨슬리와 함께 하심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평생 전도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웨슬리는 전도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는 조직이 전도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미국 선교지에서 안수 받은 목사의 요청에 따라, 콕 목사를 미국 선교지로 파송하고, 애즈베리를 안수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국 성공회에서는 반대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전도를 위해 조직 운영에 있어 개방적이며 신축성 있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셋째로, 웨슬리는 전도와 신앙 교육을 항상 병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 밖으로 나가는 선교”와 함께 “교회 안에서의 신앙교육”을 함께 강조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전도와 신앙교육을 통해 교회의 질적이며 양적인 부흥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웨슬리가 강조한 감리회의 전도 운동은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여, 불신자를 성경의 사람으로 교육하여, 그들을 통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사회개혁의 의지라 할 수 있다.

  

 넷째로,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속회 운동”의 결정판이다.

감리회의 신앙 운동에서 속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속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신도의 역할이다.

웨슬리는 말씀의 교육과 실천을 위해 속회를 조직하였다.

책임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전도를 통해 속회를 부흥시켰고, 속회의 부흥은 새로운 속회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감리회가 건강하게 부흥하기 위해, 속회의 부흥은 필수적인 것이다.

 

  다섯째, 웨슬리는 전도에 있어 매우 포용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자는 “가난한 자, 병든 자, 감옥에 있는 자 등, 모든 소외계층”을 포괄하였다.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당시 영국 사회에 매우 큰 파장이 되었다.

사회가 돌보지 않는 이들을 웨슬리는 주님의 품에서 양육하였던 것이다.

  전도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주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이다.

전도는 교회의 부흥은 물론,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사회개혁운동이다.

웨슬리의 전도운동이 당시 영국을 변화시킨 역사적 유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오늘 우리나라의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 부흥과 사회 혁신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2. 웨슬리의 재물관


    존 웨슬리는 그의 평생 설교와 저술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연간 수입이 1,400파운드를 넘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을 위한 사용에는 연간 28파운드만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구제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나의 모든 돈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었다.

웨슬리는 신자들은 소득의 100퍼센트를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돈에 대한 웨슬리의 실제적인 지침은 첫째, “벌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벌어라”이다.

둘째, “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 저축하라”이다.

셋째, “줄 수 있다면 , 최선을 다해 나누어줘라”이다.

웨슬리는 헌금 생활은 십일조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신의 마음을 황금에 두고 있다”고 말하였다.

크리스천의 헌금은 십일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기본이고 십의 구조가 더 중요하다.

 

  웨슬리는 재물 사용에 대한 네 가지 성서적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는 “당신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딤전 5:8)고 하였다.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은 가난한 교회의 목사였다. 어린 시절에 웨슬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게 사는 것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둘째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딤전 6:8)고 했다.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족함은 감사의 생활로부터 비롯된다. 감사할 때, 돈이 주는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다.

셋째는 “정직하게 거래하고 빚을 지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넷째는 “잉여 자금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라”고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첫째, 이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이 이 돈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돈을 맡은

청지기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둘째, 하나님께서는 의의 부활 때에 내가 쓰는 이 돈으로 인해 나에게 상을 주실 것인가?

  1791년에 그가 임종할 때, 그의 유서에 언급되어 있는 돈은 그의 주머니와 옷장 서랍에 남겨져 있는 동전들 뿐 이었다.

웨슬리는 평생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돈으로 자신만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살았다.

웨슬리는 돈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돈을 지배하며 살 수 있는 신앙의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다.

돈의 소유는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돈을 관리하는 주님의 청지기일 뿐이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이 돈으로 하늘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상으로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과 사상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그는 구원 체험을 바탕으로 성령 충만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성화된 삶을 촉구했고 이 시대에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러나 현재 감리 교회가 존 웨슬리의 가르침과는 동 떨어지게 부정 부패 사건이 일어나고, 성경을 이성적으로
해석하는 자유주의에 물들고, 배교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을 주도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감리교 계열의 기독교 신문을 보면 그리스도의 심판과 재림이 없다고 하고, 사회적인 개혁을 통해 지상 천국을
만들자고 하며, 에큐메니컬 운동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부디 감리교회가 하루 속히 건전한 교리의 근본적 신앙을 회복하고,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오직 성경 중심으로
진리 신앙 하기를 부족하나마 간절히 바랍니다.
 

 

* 참고 도서: 존 웨슬리와 감리교 신학 (김영선, 대한 기독교 서회) 

 

<빛과 흑암의 역사>

  

 

 

 

 

  

존 웨슬리의 회심일기  

 

1738년 5월 24일(수요일)

".....오늘 아침 5시쯤이라고 생각되는 때에 나는 성경을 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벨후 1:4) 라는 구절을 읽었다.

밖으로 나가서 또 성경을 폈을 때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 " 라는 말씀을 읽게 되었다.

오후엔 성 바울교회 청함을 받았다.

그곳에서 찬미는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편 30:1-4,7-8)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케잇 거리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아홉시 15분전 경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strangely warmed)을 느꼈다.

구원을 위해 내가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였다고 나는 느꼈으며  주께서 나의 죄를 , 심지어 나까지도 다

거두어 가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나는 전력을 다하여 유별나게 나를 모욕의 대상으로 삼고 또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나는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방금 내가 처음으로 내 마음속에 느낀 바를 간증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원수는 내 마음에 속삭이기를 "이것은 믿음일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엔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 그 기쁨이 있느냐 ?" 라고 하였다.

그때 나는 평강과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 구원의 대장(the Captain of our salvation)을 믿는 믿음의 근본적인 요소이지만,

거듭남의 초기에 보통 나타나는 희락, 특히 깊이 슬퍼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희락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어떤

때는 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보류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 나는 많은 시험을 받아 싸웠으나 나는 울부짖었으며 모든 시험은 물러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몇 번이고 되돌아 왔다.

나는 자주 내 눈을 위로 들었으며 주께서는 "그의 거룩하신 곳으로부터 도움을 주시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지금과 과거의 상태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게 되었다

나는 애쓰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울법하에서와 같이 은혜 아래서도 나의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나는 자주는 아니라 할지라도 때때로 정복당하였으나 ,이제 나는 항상 정복자(always conqueror)이다.

 

5월 25일 목요일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

주 예수여! 라는 말씀이 나의 마음에 그리고 입에도 꽉차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힘이 내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는데 쓰여지고 있음과 나의 영혼이 끊임없이 그를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후에 성 바울 교회에 다시 출석하여 찬미속에서 ' 나의 노래는 언제나 주님의 사랑스러운 친절에서 오며, 그러기에

나는 나의 입으로 당신의 진리를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 전하리이다 ' 라는 좋은 말씀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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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슬리와 카리스마타

- 성령 체험에 대한 웨슬레의 견해 -

 

 

I. 들어가는 말


최근에 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운동과 연관하여, 많은 질문을 받는다.

성령의 역사에 동반하는 표적들 - 가슴이 뜨거워진다, 사람이 넘어진다 등등. 이런 현상이 성령의 역사의

외적 증거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지? 이런 현상이 없다면 성령의 역사가 없다는 것인가?

 

교회 역사에서 위대한 일을 행한 지도자들에게도 이런 문제가 늘 제기되었던 것 같다.

이에 우리는 18세기 영국의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한 위대한 전도자요, 신학자인 요한 웨슬레의 경험과

견해를 살펴봄으로 참고를 삼고자 한다.

 

II. 웨슬레가 경험한 성령의 역사

 

2.1. 웨슬레는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청교도적인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교회의 모든 규율을 엄격히 지키면서 자라났다.

그런 경건과 신앙생활은 그의 옥스 퍼드(Oxford) 대학시절, 신성클럽 활동으로 연결되었다.

 

총망을 받는 목사요 옥스퍼드의 강사로서, 미국 죠지아에 선교사까지 갔다왔다.

그러나 그는 명목적인 신자로 활기가 없는 목사였다.

 

그러던 중, 1738년 5월 24일 올더tm게이트에서 있었던 집회에서,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지 면서 그는

자기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는 그가 체험한 성령의 증거(역사)였다.

이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웨슬레는 지금까지의 지식적인 믿음이 확실한 자기 자신의 믿음 (his own)이

된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주일 뿐아니라, 바로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도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까지도 사하셨도다. 진실로 그리스도만이 구주이시다" 라고 확신하게 된것이다.

그는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738년 5월 24 (수)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이는 집회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참석했다.

그 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오후 9시 15분 전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변화를

말하고 있을 때 나는 내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심을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나 같은 죄인의

죄까지도 가져가 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 후에 나는 나를 악의에 차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모욕하고 핍박하던 자를(마 5:44)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새로이 얻은 내심의 체험을 공개적으로 증거 했 다....

 

집에 돌아온 후 여러 가지 유혹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서 소리를 치니까 모두 달아났다.

그러나 유혹들은 찾아오고 또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다 본즉 하나님은 그의 성소로부터 도움을 보내주셨다.

여기서 나는 나의 현재상태와 나의 과거 상태가 서로 다름을 발견했다.

과거에는 은혜 아래 있고, 또한 율법에게 속하였으므로 비록 전력을 다해 싸웠는데도 패한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항상 승리하는 자다.

 

웨슬레는 이런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참 믿음 (saving faith)를 갖게 되며, 확신(assurance) 을 갖게

될 뿐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된 것이다.

스타키(Starkey) 는 이런 성령의 증거(역사)가 웨슬레의 신앙생활에 능력과 목적을 부여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부터 웨슬레는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성서적 그리스도인, 성서적 기독교를 재긍정하는 메소티스트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웨슬리도 그러했듯이 신자는 이런 성령의 증거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참 신자가 될수 없는 것이다.

 

2.2. 웨슬레의 전도 사역은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에 힘입어서 힘차게 전개되어 나갔다.

그는 자기의 설교 사역이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체험 후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 고 있다.

 

1725년부터 나는 설교를 많이 하였으나, 그 수고에 대한 열매를 거의 못 얻었다. 그러나 1738년 이후,

곧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신앙 체험 후, 나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였으며, 나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덤불 속의 불처럼 역사하였다.”

청중은 모두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하는 것이었다.

 

웨슬리의 이런 선교 사역은 마침내 18세기 영국에서 놀라운 교회의 부흥, 개인과 사회의 갱신을 가져왔다 .

 

그러나 우리는 이런 놀라운 사역을 함에 있어, 웨슬리 자신이 성령의 강한 역사를 체험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웨슬레가 그의 일기에 기록한 그의 체험을 들어보자.

 

1739년 1월 1일 (월)

 

“웨스트리 홀 목사(웨슬리의 매부), 챨즈 킨친 목사, 인감 목사, 조지 휫필드 목사, 허칭 즈 목사,

내 동생 찰즈 목사가 60여명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페터 래인에서 갖게 된 애찬식에 참석했다.

세벽 3시 경이었다. 우리가 계속 갈급하게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위에 매우 강하게

임재하셨다. 그 권능 아래 많은 사람들은 넘쳐흐르는 기쁨으로 울부짖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의 현존 앞에서 그 위엄과 놀라움에서 약간 깨어나자마자, 우리는 한

목소리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를 불렀다.”

 

웨슬레는 1744년 12월 23일과 25일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744년 12월 23일(주일) ... 나는 이상하게(unusually)생기가 없었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 다음날,

나는 아직도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러나 저녁에 내가 스노우필드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

내 기억으로는 이 전에 본 적이 없는 빛과 능력을 발견했다. ...

 

25일(화) ...나는 아침에, 하나님의 은혜로, 어제와 같은 영적 상태에서, 일어났다. 아마도 8시경,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두 세 사람과 함께 있었는데, 그 때 나는 하나님 면전에서 심한 두려움(awe)과

평안함(tender sense)을 느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온종일 하나님의

면전에서 지냈다....

 

많은 웨슬리학자들은 이런 사건이 웨슬레가 강조하던 온전한 성결 또는 성령충만의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웨슬리의 사역이 보다 힘있게 전개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2.3. 성령의 강한 역사는 그 후 웨슬리의 전도 사역에서도 거듭 거듭 일어났다. 이런 역사를 통하여

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를 영접하게 되며,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실의에 빠졌던 신자가 새로운 힘과 기쁨을 회복하며, 마음의 평강을 얻으며, 주를 찬양 하게 되었다.

또는 병든 자가 치유를 받았으며, 사귀들린 자가 고침을 받는 일들이 일어났다.

 

명실공이, 웨슬레의 사역은 초대교회에서 보듯이 말씀의 전파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는 놀라운 외적 표적도 동반했다 어떤 때는, 말씀을 듣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넘어진다든가, 몸을 떤다든가, 소리를 지르곤 했다. 웨슬리가 친히 기록한 몇 개의 예를 보기로 하자.

 

기이한 현상이 나타남

 

1739년 6월 15 일(금)

 

저녁에 나는 피곤한 몸과 지친 마음으로 왑핑(Wapping) 집회에 갔다. 로마서 3:19에 관해 말씀 선포를

하려 했으나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를 몰랐다. 우리는 계속 찬송을 불렀다. 나의 마음은 어딘지는

모르나 공동 서신과 히브리서의 많은 귀절 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직접 지시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을 열었더니 히브리서 10:19-2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사람들에게 “새롭고 산 길(a new and living way)”을 통해서 가장 거룩한 “성소'에 들어오라고

열심히 죄인들을 초청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과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푹 쓰러져서 그 자리에서 몸에 힘이 빠진 상태로 누워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몹시 떨고

진동을 했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비탄에 젖은 나머지 육체의 모든 부분에 일종의 격동적인 동작을

보였으므로 4-5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했다. 나는 많은 히스테리 환자와 간질병 환자들의

발작 증세를 보아 왔으나,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증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즉시 하나님께

믿음이 약한 자들이 마음에 상처받지 않도록 기도했다.

 

신유의 역사가 일어남

 

웨슬리는 야고보서 5:14-15을 주해하면서, 신유의 기적은 항상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유의

기도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뿐 아니라, 즉 장로들도 병 낳기를 위하여 기도하면 된다고 이해했다.

웨슬리의 이런 신앙과 가르침은 그의 사역에서 여러 번 나타나고 있다.

 

1741년 5월 10일 (월요일)

 

나는 죄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 동안 별로 피곤을 몰랐다. 그러나 그후 이어진 애찬식때, 나는

허리와 머리가 아플뿐 아니라 몸에 열이 계속해서 있었다. 기도를 하려고 하니, 기침이 몹시 나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나에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적이 따르리라(막16:17)”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주여 나의 믿음을 도우셔서 (increase my faith), 당신의 은총의 말씀을

입증하소서하고 주님께 구했다. 내가 그렇게 말 하는 동안에, 나의 아픔을 사라졌고, 열도 떨어져서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그후 나는 오랫동안(for many weeks) 아픔과 약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 주님,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1746년 11월 12일(수요일)

 

저녁 예배 시간에, 나는 심한 치통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피어씨가 말하기를, 자기도

치아가 부서져서 여러 해동안 고생을 했는데, 많은 의사들은 고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순간적으로 완전히 치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를 드렸다.

 

1756년 4월 6일(화요일)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주 어두운 밤이었다. 나는 나무 조각에 발이 부딛쳐 아파서 넘어졌다.

‘아- 나는 지금부터 여러 주 동안 말씀을 듣지도 설교하지도 못하겠구나'생각했다. 그 순간 나의

가슴에 와닫는 말씀이 있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라, 그리하면 너는 일어서리라.” 그래서 나는

뛰어 일어나며, 내 발을 뻗치면서 외쳤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오니,

나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시옵소서.” 그 순간, 통증이 멈추고, 나는 일어섰다.

그후 나의 발은 전처럼 아주 튼튼해졌다.

 

1767년 5월2일

 

토마스 B___라는 사람이, 3 마일 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심한 파상을 입고 죽을 뻔 했다.

그러나 우리 교회(societies)에서 성도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순간적으로(at once) 고침을 받아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함

 

1739년 10월 23일 (화)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부득이 킹스우드(Kingswood)에 있는 한 젊은 부인

(Sally Jones란 여인임)에게 다시 가야만 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테니 각자가 판단하시기 바람) 그녀는 19-20세 정도 였으나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2-3명이 그녀를 잡고 있었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망과 공포와 고뇌가 그녀의 창백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온몸이 수천번 비틀어지는 것으로 보아 지옥의 개들이 그녀의 심장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을 나타내었다.

견딜수 없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돌처럼 굳어버린 두 눈은 울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입을 열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저주를 받았단 말이예요, 저주를. 영원히 파멸되었어요.

엿세 전에만 왔어도 나를 도울 수 있었을텐데. 이젠 늦었어요. 이제 나는 마귀의 자식이예요. 나를

마귀에게 주어 버렸어요. 나는 마귀의 것이니 마귀를 섬겨야해요.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가야해요.

나는 마귀의 것이고, 그를 섬겨야 해요. 그와 함께 지옥에 갈거예요. 나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구원을 받지도 않을 거예요. 나는 저주받아야만하고 받을거예요."

그리고서 그녀는 악마에게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는 “주님의 군사여, 일어나라, 일어나라”(챨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라는 찬송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잠자듯이 푹 쓰러졌다. 그러나 우리가 떠나자 마자, 말할 수 없이 격렬하게 다시

소란을 피웠다. “돌 심장이여, 터져버려라....” 그리고 그녀는 두 눈을 천정의 구석을 향해

고정시키고는, “아, 그가 저기 있어요. 좋은 악마여, 와서 나를 데리고 가렴. 네놈이 나의 골통을

부셔버리겠다고 했잖아. 와서, 빨리 하란 말이야. 난 너의 것이고, 너의 것이 될 것이란 말이야.

나를 데리고 가다오.”

 

우리는 다시 그녀에게로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녀는 전처럼 또한번 푹 쓰러졌다.

그런데 또 다른 여인(Betty Somers로 판명됨)이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9시 경 내 동생 찰스가 왔다. 우리는 함께 11시까지 계속 기도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첫번째 여인과 두번째 여인의 영혼 속에 한순간 평화의 말씀을 주시니, 그들 두 여인은 원수와

복수자(시 44:16)를 잠잠케하신 주님을 함께 찬양하였다.

 

1740년 5월21일(수)

 

저녁에, 웃는 귀신들린 여자가(a spirit of laughter)나타나 모두가 어려움을 겪었다.

모든 사람의 주의가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외식을 부리는 사람이 아닌것을 모두가 아는 바다.

그렇게 포악하게 악령에 사로잡혀 날뛰는 것을 일찍이 본적이 없다. 그녀는 가끔 가끔 웃는다.

그리고서는 거의 까무러친다. 그러다가는 큰 소리로 저주를 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

그렇게 하다가, 발을 구르며 야단을 한다.

그때 그녀의 힘이 어찌 강한지, 사 오명의 사람이 달려들어도 그녀를 억압하기가 힘들었다.

말할 수 없이 강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가 그리스도를 부르며 도와달라고 하자,

그녀를 괴롭히던 난폭함은 사라졌다.

 

이런 치유의 사건은 그 후도 가끔 있었다. 웨슬레는 구로우세느터의 감독 와버튼

(William Warburton, Bishop of Gloucester 1759-79)이 쓴 책, 성령의 직무와 역사

(The Office and Operations of the Holy Spirit Vindicated from the Insults of Infidelity and the

Abuses of Fanaticism)에서 웨슬레를 비판하며 성령의 기사이적을 부정적으로 설명한데 대한 논평으로

1760년 11월 26일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증언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말(horse)이 다리를 몹시 절었다.

그리고 나는 심한 두통이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짐승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치유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각적으로 나의 피로와 두통은 멈추고, 내 말은 같은 순간 다리를 절지 않았다.

그렇다. 진실하게 믿는 (수천명에 달하는)많은 성도들은 이와 같이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체험했다고

나는 믿는다.

 

R---A---씨는 자연법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광견병(distemper)에 걸렸었는데, 인간적인 수단을

쓰지 않고 순간적으로 치유를 받았다......

 

저녁에 나는 안 카루캇트를 방문했다. 그녀는 얼마동안 말을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자 마자, 하나님께서 그녀를 치유하시어 그녀는 말을 했다. ...

 

젊은 두 여자가 사귀가 들려 이상한 모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몇 친구가 나와 내 동생이 와서

기도해 달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위하여 기도했다. 그들은 고침을 받았다.

로마 시람들이 사용하는 마술을 사용했냐구요? 나는 그런 마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마술을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2.4. 이런 사역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웨슬레의 복음 증거는 권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 른 한편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열광 주의자' 라고 비난도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영국교회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나 성령의 기사 이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명한 정통주의 신학자요 부리스톨의 감독인 버틀러(Bishop Butler)는 웨슬레에게,

“당신이 집회에서 사람들이 발작을 하고, 그러면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들었는데 ...

성령의 기적적인(특수한, 일시적인, exordinary)계시나 은사들이 있는 것처럼 행하는 것은 무서운 일,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당신은 이 지역에서 설교하지 말고 떠나라"고 충고했다.

 

이런 반대자는 버틀러 감독뿐 만이 아니였다. 릿치필드의 감독은 출판물까지 발행하여 웨슬레의 주장은

열광주의자들의 교리며, 무용한 것(futile)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성령이 신자 안에 내주하며, 내적 증거를 한다고 주장한다던가, 또는 성령에 의하여 기도하고

설교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성령의 기적적인(비정상적인) 은사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인데, 이런 사역은

사도시대와 초대교회에만 속한 것이다. 따라서 말세(오늘날)에서 그런 일이 일어 나는 것처럼 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이는 열광주의자들의 교리이다.”

 

타이어맨에 의하면, 이런 반대는 기브손 감독(Bishop Gibson), 와버튼 감독(Bishop Warburton) 등

여러 지도자들로 부터도 받았다.

 

2.5. 이런 반대는 불신하는 일반 신자들로 부터도 왔다.

웨슬레는 1739년 5월 20일(주일)의 일 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739년 5월 20일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눈으로 보지 않고 그리고 귀로 듣지 않고는 어떤 사실도 받아 들이려

하지 않은다...그러나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요4:48)를 보고도 믿으려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은 사실들(표적과 기사)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실들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은 순전히 자연적인 현상이란 말이야. 사람들은 밀패된 방에서 열때문에

쓰러지는 것이야”라고 설명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속임수야...왜 자기네들 개인 집회에서만

그런일들(표적과 기사)이 발생 한단 말이야? 왜 태양아래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단 말이야?”

라고 빈정댔다...

 

오늘 21일 월요일 우리 주님께서 직접 응답해 주셨다.

내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46:10)의 말씀을 강조하며 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밀패된 방이나 개인 집회에서가 아니라 야외(브릭크야드 옥외집회)에서 2000명 이상의

증인들 앞에서 권능을 보여주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사람 계속해서

땅바닥에 꼬꾸라짐을 당하여, 하나님의 권능의 현존 앞에서 몹시 떨었다.

다른 사람들은 고뇌에 찬 큰 소리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라고 울부짖었다.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그들 중에는 내가 처음보는 일곱 사람이 기쁨이 충만하여 찬송을 부르면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데 대하여 하나님께 온갖 힘을 다하여 감사하고 있었다.

 

저녁에 니코라스 거리에서의 집회때 내가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자 마자, 한 사람이 ‘마음에 찔려’(행2:37)

용서와 평화를 간구하여 몹시 괴로워 하는 울부짖는 소리에 예배의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벌써 이루어 주신 일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라는 중요한 진리를 증거로 내세웠다.

또 다른 사람이 푹 쓰러졌는데, 그 옆에는 반대 이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한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서 있는 동안에, 가까이 있던 어린 소년도 똑같은 현상으로 쓰러졌다.

뒤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서 있던 한 청년 이 죽은 사람처럼 푹 꼬꾸라지더니,

곧 땅을 치면서 소리내어 울부짖기 시작했다. 여섯명의 장정이 그 사람을 저지하기가 힘겨웠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멕스필드였다

(Thomas Maxfield: 그 후 웨슬리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고 훗날 목사가 됨).

 

웨슬레는 비판을 받을 때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변호했다.

이런 계기는, 동시에 웨슬리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 특히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에 대한 신학을 개진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면 웨슬리의 성령, 특히 성령의 증거에 대한 교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III. 성령의 내적사역과 외적 표적

 

3.1. 그런 논란속에서 웨슬레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었다.

그는 1739년 7월 7일의 일지에서, 동료목사와 상의한 것을 볼 수 있다.

 

1739년 7월 7일 (토)

 

나는 휫필드 목사와 하나님의 내적인 역사와 동반되는 외적인 표적(쓰러지는 일)에 관하여 의논할

기회를 갖게되었다. 나는 그가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주로 사실과는 다른 엄청난 거짓된 소문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분자신이 보다 더 잘 알게 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휫필드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는 모든 죄인들을 연단 앞으로 초청 했을 때,

그분 가까이에 있던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쓰러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들 중의 한사람은 움직이지도 않고 의식도 없이 누워 있었고, 두번째 사람은 몹시 덜덜 떨었고,

세번째 사람은 소리는 내지 않고 끙끙 앓으면서 온 몸에 강한 발작적인 움직임(진동)을 보였으며,

네번째 사람은 똑같은 발작적인 동작을 하면서 눈물과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때부터 우리는(웨슬레와 휫필드) 모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수용하기로 하였다.

 

3.2. 웨슬레는 그의 표준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웨슬레는 그의 표준 설교집을 감리회의 교리 표준으로 삼았듯이, 교인들의 양육을 위하여 설교집을

출판했던 것이다. 그는 설교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가 성서 속에서 발견한 하늘로 가는 길에 관하여 이 설교에 적절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구원의 길과 인간이 꾸며낸 길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 주었다.

나는 참되고, 성서적이면서 경험적인 신앙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 설명에 있어서 신앙의 참된

부분은 조금도 삭제하지 않고, 또 거짓된 것을 덧부치지도 않으려 했다.

이렇게 하면서 내가 특별히 바라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첫째, 이제 방금 천국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역사를 잘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천국가는 길에서 돌이키게 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을 형식주의와 단순한

외적 종교(mere outside religion)에서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외적 종교는 마음의 종교 (heart religion)를 세상 밖으로 축출시켜 왔다.

 

그리고 둘째, 마음의 종교,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the faith which worked by love) 을 가진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율법(the law through faith)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여 악마의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웨슬리는 냉냉한 형식주의와 무분별한 열광주의를 경계하며, 성서적 경험적 기독교를

긍정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웨슬레의 관심은 주로 성령의 역사와 연관된 일이었다.

 

3.3. 정통신학자들에게 대한 충고:

 

첫째, 당시의 소위 정통신학자들에게 답하면서, 웨슬레는 지금도 복음이 권능으로 전파되며,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살고 있다면, 성령은 비상적인 극적인 은사 곧 카리스마타 (charismata)를

나타낸다고 믿었다.

 

3.3.1. 또한 그런 성령의 역사가 초대교회, 곧 성서시대에 성행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이 사도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런 역사가 현재 나타나지 않는

것은 (disappearance) 교회가 콘스탄틴 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세속적인 로마인들이 교인이 되어,

신앙에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웨슬리에 의하면, 이는 성령이 후퇴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식어져 있는 즉 그저 죽은 형태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성령께서는 역사하시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웨슬리는 말하기를, 이런 기사이적들이 정지되고 있음은 교회가 평온과 안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안위와 명예롭게 믿고자하기 때문이다.

 

3.3.2. 쉬지않고 오는 비난과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레는 성령의 감동 (Inspiration)과

증거(Witness)는 필요한 것이며 늘상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성령의 감동이라함은, 성령께서 내적으로 도우시는 역사로써, 이를 통하여 사람의 이해와

의지를 깨우쳐 주며, 사람의 연약함을 도우며, 신자를 위로하며, 정결케하며, 성결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결국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역사(operate)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이 회개하거나, 믿음으로 거듭나는 일이나, 성화와 성장,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웨슬레는 믿음의 생활을 계속적인 “나와 너(I-Thou)”의 영적관게에서 이해한 것이다.

 

이런 성령의 증거는, 웨슬리에 의하면, 직접적이며(immediacy), 사람이 인식할 수 있도록 체험되는

것이로되(perceptible),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3.3.3. 신자에게 역사하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지만, 성령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여러가지 모양으로

역사하신다. 어떤 때에는 강한 능력으로, 또 어떤 때는 조용히,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

웨슬리는 말한다. “성령으로 하여금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시게 하시오. 성령은 당신보다 더 현명하시며,

그 분은 모든 일을 잘 행하실 것이다.”

 

이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가 다양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적으로 이루워진 사역의 내용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후자가 본질적인 것이라면, 전자는 우연적인 것(accidental)으로 그 표적이 다양하다.

본질적인 것이 없는 현상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본질적인 내용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야 한다.

여기에 웨슬리는 열광주의자들을 경계하기에 이른다.

 

3.4.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경계:

 

3.4.1. 당시의 열광주의자들은 나타나는 현상과 표적에 치중하여, 은혜의

수단(교회출석, 성례전(세레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 또한 성경을 읽고 상고하는 일들)을 무시했다.

때로는 입신함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워졌다고 간주하며 정숙주의(Quietism)에 빠졌다.

 

이에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 이라는 설교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그릇됨을 지적하면서 시정하려고 했다.

또한 “신자 안의 죄”라는 설교를 하면서 그들의 그릇된 구원관을 시정하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타레인 집회를 주도하고 있던 모라비안 교도들이 웨슬레의 충고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1739년 말에 마침내 모라비안 교도와 결별하고

메소티스트 연합회 (United Methodist Society)를 발족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많은 교회사가들은 이 사건이 웨슬레의 메소티스트를 기독교 주류에 선

복음적 운동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본다.

 

3.4.2. 더욱이, 웨슬레는 때로는 마귀의 역사로 흡사한 기적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웨슬레는 그의 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1741년 1월 11일 (주일)

 

나는 마귀의 권능도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경우를 경험했다. 우리가 룸(the Room) 에 있는 동안

되어진 일이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던 죤즈 부인(부리스톨 집회소의 회원) 이 성경을 읽기위해

성경을 잡더니, 갑자기 성경을 던져버리고는, 말하기를

“나는 충분히 착하단 말이에요. 난 더이상 절대로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지 않을거야”라고 했다.

내가 왔을때에도, 그녀는 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난 항상 죄로 가득찬 사람으로 내가 하는 모 든 일에 죄를 짓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제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내가 선량한 기독교인이란 것 말이에요. 나는 내 일생에 남에게 해되는

일은 한적이 없단 말이야. 지금 보다 더 착해질려고 바랄 것도 없단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같은 소리를 수없이 말하면서, 오만과 거짓의 악령이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다음날 12일(월)에 나는 “치유받기 원합니까?”라고 물었다.

죤즈 부인은 “나는 온전한 사람이에요”라고 했다.

나는 “그러나 구원받기 원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나는 구원 받았어요. 고민할 거리가 없단 말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죤즈 부인이 몸과 마음이 가장 격렬한 고뇌 속에 빠져있음을 식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몹시 땀을 흘리면서도, 몹시 냉담한 태도로 조금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자, 죤즈 부인은 못봐줄 정도로 노발대발 하더니, 곧 죽은 사람처럼 푹 쓰러졌다.

몇분이 지나 그녀는 다시 소생하여 우리와 함께 기도했다.

우리는 그녀를 당분간은 조용히 놓아두고 떠났다.

 

12일(월)에 죤즈 부인은 종일 격렬한 고뇌 가운데 사로잡혀 있었다....

화요일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려고 찾아왔다.

그녀는 찾아온 사람마다 그들이 실제로 지은 죄나 마음으로 지은 죄를 다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죄지은 내용을 너무나 면밀히 잘 알아 맞추니까, 몇몇 방문객들은 올 때보다 더 빨리 도망가버렸다.

 

오후에 남편인 죤즈씨가 킹스우드로 사람을 보내어 나를 불러오게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웨슬리 목사님은 오늘밤에 오시지 못하시고 내일 아침에 오실거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니, 하나님 스스로가 역사해주실거에요.

내일 아침 6시 이전에 저는 치유받을 거에요”라고 했다.

 

죤즈 부인은 가만히 누워 있더니 아침 6시 15분경 쯤,

그녀는 입을 열고 “당신(남편)이 평안할지어다.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눅 10:5). 하나님의 평화가

나의 영혼에 오셨도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욥 19:25) 나는 안다”라고 말했다.

그후 몇일동안 그녀의 입은 주님의 찬양으로 가득차고, 그녀의 말은 주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에 관한

것 뿐이었다.

 

3.4.3. 이런 일이 있은 후, 웨슬레는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한 바가 있다.

 

1743년 3월 12일 (토)

 

나는 두번째 전도 여행을 끝마쳤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두 가지 문제를 특별히 조사했다.

첫째, 지난주 거의 매일 밤마다 설교하는 동안 큰소리로 부르짖는 사람들의 경우에 관한 문제이고,

둘째, 우리를 떠나가버린 사람들의 수(數)와, 떠나간 이유와 원인에 관한 문제이다.

 

전자의 경우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1) 그들 모두는 (내 생각에는 예외없이) 완전히 건강한 사람들로서, 한번도 발작을 해본적이 없었으나,

마침내 이러한(넘어지는) 현상을 체험한다는 사실.

 

2)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든지, 혹은 들은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에, 이러한 현상은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사람들 각자에게 순간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

 

(3) 사람들은 쓰러지는 순간에, 몸에 힘은 완전히 빠지고, 격렬한 고통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사실.

사람들은 (3)째 현상이 일어날 때 그 현상을 각자 다른 방법으로 표현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칼로

그들의 내부를 찌르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마치 아주 무거운 짐이 그들 위로 내려

누르고 짜서 땅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심히 목이 졸려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가슴이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으며, 또 다른 사람은 마치 심장이, 모든 내부가, 몸 전체가 조각조각으로 찢어져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3)의 징후를 나는 어떤 자연적인 원인으로 돌릴 수도 없고, 또한 하나님의 영(성령)의 영향으로

돌릴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올 때에, 사단이 그들을 찢어 버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단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탄식을 발하게 함으로써, 공포에 싸인 사람들을 놀라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하려고 회책하는 것같다.

 

(4) 사람들은 육체 뿐아니라 마음도 여러 모양으로 영향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왜 이러한 영향을 받게되는지 그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것 또한 교활한 악령의 짓이라고 본다.

이 악령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어리둥절하게하고 혼동하게 함으로써 악령의 계획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한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분명하고도 특별한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souls)을 찔러서, 그들의 외적인 죄와 마찬가지로 내적인

죄가 무엇인가를 확신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치는 하나님의 진노 하심을 느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비난자인 사단이 큰 권능을 가지고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희망이 없다라고 말하며

또한 영원히 파멸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때에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사로잡게 되는 여러가지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크고 비참한 소리를 지르도록 한다.

 

3.4.4. 우리는 위의 (1) - (4)항목까지 본대로, 웨슬리는 넘어지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려는 사단의 역사로 되어지는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한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759년 11월 25일 (주일)

 

오후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함께하셨다. 그런데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려는 것보다는 위로함을

주시기 위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는 방법이 전에 내가 이곳을 다녀 갔을 때와는

현저하게 다름을 보았다. 이제는 입신하는 사람도, 울부짖는 사람도, 넘어지는 사람도, 진동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몇 사람만이 몹시 떨었으며,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만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풍부한 화평”(시 37:11)으로 생기가 넘치게 되었다.

 

위험한 것은 울부짖음, 진동, 환상, 입신 등과 같은 현상이 우리의 내적인 역사(변화)에 필수적인

것이라하여, 이러한 현상 없이는 안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특수한 현상을 너무 강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위험은 아마도 이러한 특별한 현상을 너무 과소 평가하든지, 전적으로 정죄하든지,

또한 하나님의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가 된다고 상상하는 것 이다.

 

이 문제에 관한 진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급작스럽고 강하게 역사하셔서 그들이 죽어야 마땅한 죄인들임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는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울부짖거나, 강하게

육체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다.

 

(2) 믿는 자들을 강건하게 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다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입신과 환상으로 은총을 내리시는 것이 다.

 

(3) 위에 나타난 일에 있어서도 어떤 경우에는,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그저 일어난 것인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일어난 것인지를 혼돈하곤 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워졌다는 것을 잊곤하다).

 

(4) 사탄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이러한 현상을 모방하여 흉내를 내는데, 사탄의 의도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the whole work)를 불신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사탄이 흉내를 낸다고 해서 하나님 역사의 전부를 포기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며,

또한 동시에 하나님 역사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도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처음에 이러한 역사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임을 확실히 믿었다.

오늘날에는 부분적으로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역사가 어느정도 순수한가를

식별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며, 그리고 그 역사가 불순한 점이 섞였는지, 또한 타락한 것인지 식별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가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정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실제로 그렇지도 않은 일을 보고 느낀 것처럼 가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한 하나님의

영(성령)의 권능에 진정으로 압도된 사람들의 부르짖음이나 진동하는 동작을 흉내내는 사람도 있음을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진정한 역사를 경시하거나, 혹은 부인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림자가 본질을 멸시할 수 없는 것은, 위조품이 진짜 다이아몬드를 멸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사탄이 우리가 보게된 환상을 역이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만의 죄를 짖게하는 호재(好材)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오로지 자만하지 않도록 경계해야하고, 겸손한 사랑 외에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스스로 작은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해도, 환상을 일반적으로 경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요 비기독교도적이다.

 

위에서 본 웨슬리의 글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은혜를 과장하거나, 영적인 무지로 인간의

감성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영적 흥분과 환상에 빠지는 신신비주의 (Neo-mysticism)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3.4.5. 여기에 웨슬리는 나타나는 영적 현상과 표적이 하나님께로 오는 것인지, 마귀에서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성령의 증거 (I)과 성령의 증 거(II), 그리고 “우리 영의 증거”라는 설교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 설교에서 그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증거 없이는 신자생활에 활역소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는 모든 신자가 누릴 특권이다.

이점에서, 위에서 보았듯이, 웨슬리는 정통적인 신학자, 냉냉한 형식주의자들의 무감각함을 비판하였다.

 

웨슬레가 말하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란, 우리 영혼에 나타나는 하나의 내적 인상

(inward impression on the soul)으로써, 신자는 이를 통하여 성령의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내적 증거에 동반하는 외적 표적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 직접적인 증거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인지를 분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때로는 마귀도 기이한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웨슬리는 객관적인 뒷받침이 필요한 것을 말한다. 곧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점에서 웨슬레는 분명히 열광주의자들과 구분되며, 동시에 신자들 이 무분별한 열광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로 웨슬레는 성서의 말씀을 들고 있다.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성경에서 이탈한다면, 아니 성경 본문의 의미를 그 문맥에 나타난 대로의 분명한

문자적 의미에서 이탈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때나 열광주의에 빠질 위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성경은 우리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권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사는 기독론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성령에 의하여 행동 하셨다면, 성령의 역사, 증거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 부합하는 것이랴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739년 6월 22일(금)

 

오후에 나는 피쉬폰즈(Fishponds)에서 설교를 했으나, 내 안에 생명도 활기도 없었기에,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제쳐두고 다른 일꾼들을 추수때 보내시지 않나 하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나는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집회에 참석하여 연약한 상태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한일서 4:1)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청중들에게 모양으로나, 소문으로나, 자신들의 느낌으로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성령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그들이 본 것 같은 꿈이나, 환상이나, 계시로도 성령을 판단치 말며, 또한 그들의

몸에 나타나는 어떤 현상이나 비탄의 모양으로도 판단치 말라고 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가 애매하고 논란의 대상이 된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되어진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단순하게 믿을 수도 없으며 비난 받을 수도 없으나 다만 “율법과 증거의 말씀”(사8:20)에 따라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참 영의 역사와 증거는 회개와 하나님깨로부터 거듭나는 일에 따라야 한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성령의 증거에는 겸손과 기쁨, 평강,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사, 증거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선한 양심과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성령의 증거가 타당한 확신으로 받아드리는 데 있어서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와 간접적인

증거가 공히 있어야 한다고 웨슬리는 강조한다.

 

IV. 요약과 결론 - 관용의 정신

 

4.1. 웨슬리는 성령의 역사를 중요시하고 강조했다.

그는 올더스게이트에서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확신 있는 신자가 되었으며,

그의 사역에 능력과 목적을 갖게 되었다. 그가 이끈 18세기 영국교회에서의 부흥운동, 아니 전 세기에

걸친 복음적 부흥운동은 분명한 성령의 역사였다.

 

웨슬레는 성령의 강한 역사를 체험했다. 이런 성령의 내적역사는 기사 이적과 같은 기이한 현상도 동반했다.

그러므로 한편 웨슬레는 오해와 비판도 받았다. 특히 성령의 기사 이적은 사도시대로 종료되었고,

현재는 없다고 생각하는 당시의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영국교회 신학자들로 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열광주의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4.2. 이에 대하여 웨슬레는 성서가 인정하는 성령의 기사 이적은 현재도 있다는 것을 교부들의 글과

자신의 경험을 들면서 변호했다.

특히 그가 그로우세스터의 감독, 와버튼(Warburton) 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체적으로 변증했다.

웨슬레는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듯이, 복음이 능력으로 전파되며 진실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지금도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 곧 카리스마 타(charismata)는 나타난다고 믿었다.

 

오늘날 이런 표적들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교회의 신앙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웨슬리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가 멈춘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사랑이 차디차게 식었고, 신앙이 죽은 상태로 남아 있는 신자들 안에서는 그런 역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참 믿음이 있는 곳에는 지금도 그런 은사로 역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오늘의 신학자들이 받아드려야 할 충고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웨슬리가 체험했고, 역사에서 입증되었듯이,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 없이는 신앙의 확신과

박력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와 철학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

철학에는 힘이 없다. 종교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은 확신에서 오는 것이다.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 없이는 하나님과의 산 관계가 이루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적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에서 나타난다.

 

4.3. 이와 같은 각성은 세계복음화를 위한 로잔운동에서 메아리치고 있음을 본다.

로잔운동은 함께 모여 세계선교의 대과제를 인식하며, 성서의 빛 아래서 신학적입장을 정립하며,

오늘의 시대에 적응성 있는 선교방법을 모색하고, 온 교회가 협력하여 세계복음화에 헌신하자고

다짐하는데서 시작된 운동이다.

이 대회는 여러 교회가 함께 협력하는 기초로서 유명한 로잔언약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9년에 마닐라에서 제2차 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에는 170국에서 약 3,000명의 지도자가 참석했다.

그리고 로잔언약을 보완하는 마닐라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의 선포에는 기사이적이 동반함을 인지했다.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며, 이는 사탄에게서의 해방, 곧 하나님 능력의

나타냄을 부분적으로나마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체험한 진실한 신자는 모두가 긍정하는 바일 것이다.

 

최근에 미국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 왈래스 박사(Daniel B. Wallace)의 간증을 소개하고자 한다.

 

왈래스 박사는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이기에 당연히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를 믿는 신학자이다.

물론 카리스마적인 신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청년시절에 방언도 하고 싶었고, 카리스마적인 체험도 하고 싶어, 은사집회에도 참석했었다.

그 집회에서 자기가 방언을 못하니까, 인도자가 말하기를 ‘너는 아직도 구원을 못받았다”고 하기에,

너무 실망하여 그런 그룹과의 사귐을 끊고 말았다.

그 후 공부를 하여, 달라스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성서도 잘알고, 주석도 잘하는 학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께서는 초대시대처럼 역사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세세션니스트(cessationist)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런데 3년전에 8살 난 아들이 중병에 걸려서 수술을 받았다.

아이의 체중은 85파운드에서 45파운드로 줄어들어 몸이 말라갔다.

너무 약해져서 화장실 출입도 혼자 못했고, 이런 처지에서 그는 ‘연구의 대생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인격적으로 친히 만나, 자기의 친구요, 지도자요, 위로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그는 자기의 신앙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께 가까히 가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가 늘상하고 있는 신학적 방법(성경주석, 신학적 추리)으로는 그런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 가운데 그는 세세션니스트적인 분위기가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투쟁 끝에, 그는 마침내 자기 가슴 속에서 성령을 체험하였다.

그리면서 그는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 지금도 신유와 기사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성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보다 지식에 우위성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성령의 신유, 기사이적을 부인함으로 하나님의 능력(God's ability)을 부정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4.4. 그러나 웨슬리는 위에서 살핀대로, 또 다른 한편, 은혜의 수단(The means of Grace)을 부정하는

열광주의자, 정숙주의자들을 경계하며, 신자는 성령의 정상적인 은사 곧 사랑의 은사를 힘써 구하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웨슬리는,냉냉한 신앙을 갖고 있는 형식주의자들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한편, 지나친

열광주의자들을 경계하였다.

 

성령의 역사가 기적과 같은 외적인 현상을 동반하지 않을 때도 있을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또한 다양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은 내적 역사이며, 외적 현상은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4.5. 웨슬레는 은혜의 경험도 강조했지만, 그의 신학의 최고 권위는 성서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말하기를, “나의 근거는 성서이다. 그렇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것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성서를 따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체험, 곧 성령의 내적 증거도 모두 성서에 의하여 시험하여야 한다.

 

“성서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계시가 참 하나님의 계시인지 아니면 그저 사람이 짐작한 계시인지를

가려내는 시금석인 것이다.

사람들이 율법에 호소하든 체험에 호소하든 모든 영(spirit)을 성서에 의하여 시험해보아야 한다.”

 

4.6. 이 문제와 연관하여, 한가지를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는 웨슬리가 각자 다르게 체험을 하는 신자들에 대하는 관용의 태도이다.

 

웨슬레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본질적인 것 (essential. substance of the doctrine)과

비본질 적인 것(non-essential. circumstance of the doctrine)을 구분할 줄 알았다.

그 근본적이며, 본 질적인 것을 고수했으나, 비본질적인 것, 곧 의견(opinion)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것 으로 동의’하고 관용의 정신을 발휘했다.

 

웨슬리는 은총론에서 그렇게 대립되었던 죠지 휘트필드의 서거에 즈음하여 행한 설교에서 이를

잘 들어내고 있다.

 

그가 각 곳에서 외친 그 위대한 성서적 교리들을 고수한다.

그러나 교리들 가운데에는 보다 덜 본질적인 교리들도 있다. 이 본질적이 아닌 교리들에 있어서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들도 여러 세대 동안 의견이 분열되어 왔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그렇게 의견을 달리하는 것으로 합의 하도록(agree to disagree) 생각해도 좋다.

아니 그렇게 생각을 하라.

그러나 한편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중요한 교리들을 굳건히 붙들자.

 

4.7. 이런 관용적인 정신은 성령체험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과 태도에서도 잘 들어나고 있다.

그 당시의 영국교회 지도자들은 성령체험,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 또는 신유, 기사이적을 말하면,

도매급으로 열광주의자, 또는 마술사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웨슬레는, 열광 주의(Enthusiasm)의 성격이 어떤 것이며, 진실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기사 이적,

신유의 역사들을 열광주의에서 오는 것이라고 혼돈하지 말라고 설명한다.

 

웨슬리는‘열광주의의 성격 (The Nature of Enthusiasm)’이라는 설교를 출판했다.

이를 1749년에 출판했고, 이어서 1755년, 1778년, 1789년에는 소책자로 재출판했다.

또 그는 ‘편엽된 생각을 조심하라 (A Caution Against Bigotry), ‘관용의 정신(Catholic Spirit)*

이라는 설교를 출판했다.

 

여기에서 웨슬레는 우리가 배격해야 할 열광주의자는, 일반적으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영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상상이나 환상에 의존하여 광열(religious madness)에 빠지거나,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 것을 하나님에게 들켜 씨우는 그릇된 자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진실하지만, 실수를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사람의 상상이나 꿈을 따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상상이나 환상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가져다 맞추는 과오를 번번히 범한다.

그러면서 또한 교회에 주어진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지 않는 과오를 범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서도 기적적인 능력과 표적이 따르는 것을 부정하지 말라고 했다.

따라서 이런 역사가, (1)성경의 증거와 어긋나는가, (2) 그런 역사의 열매가 어떤 것인가, (3) 이런

역사를 들은 사람들의 나타내는 열매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면서 평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런 헤아림이 없이 무턱되고 기사이적을 따르거나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를 열광주의로 보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는 바로 웨슬레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한 변호이기도 했다.

 

4.8. 오늘날에도 이성주의와 유물론적 사고에 빠진 신학자들은, 자기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모두 신비주의적이요, 열광주의라고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초월적인 하나님의 성령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이성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신비적인 요소’가 있음이 당연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서 웨슬레가 말하는 대로 헤아림없이 ‘기적적인 것’은 무조건 신비주의나

열광주의자들의 소행이요, 마술을 쓴다고 하는 평가는 경솔한 일이다.

이에, 웨슬레는 그의 설교에서, 참 열광주의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알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지 말며, 일반적으로 들은 소문을 가지고, 사람을 열광주의자라고 판단하지 말라.

당신은 남을 판단하는 은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 또 하나의 열광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늘 말과 행동을 항상 조심과 두려움으로 하여야 한다.

 

4.9. 그러나 웨슬레는 동시에 비성서적인 열광주의에 빠져, 자만의 죄를 짖는 것을 경계하는 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웨슬레는 양자간의 노쟁에서 신자들의 고집과 편협함을 경계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제자가 주님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신 말씀을 풀이하면서,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이 나의 교회에 속하지 않았거나,

내 편이 아니며, 내 의견과 다르다고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며,

일방적인 비방을 삼가라고 했다.

 

성도는 더욱 기도하며, 경성하여 일하면서, 피차간에 더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웨슬레의 ‘관용의 정신’을 반영하는 태도이다.

그는 중요한 교리에서는 양보가 없지 만, 여러 의견(opinions)에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것으로 동의하고’

주님의 일에 협력하는 정신을 주장했다.

 

4.10. 이 글을 마치면서, 웨슬레가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에 대한 논증의 마지막에 기록한 귀절을

인용하고저 한다.

 

나는 성경이 약속한 것들을 기쁨으로 받아 행한다(I enjoy). 기독교에 행해온 것을 와서 보라.

이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나는 이런 옛 그리스도인들 (그들이 실족함이 있 었다해도)을 더

존경한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순수한 기독교에 대한 것을 별로 보거나,

쓴 글을 읽거나,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소위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하면서도, 이에 대한

깊은 선입주견을 갖고, 그는 열광주의라고 하면서, 반대한다. 무엇 때문인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이나 나 자신을 초대 교부들과 같은 그리스도인들로 만드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김남석 블로그> 

 

 

 

 

웨슬리의 생가 - 올드 랙토리   

 

 

1789년 초상화 (Romney)

 

존 웨슬리 (1703-1791)

 

 

1. 존 웨슬리의 고향 올드 랙토리

 

 

올드 랙토리 정문        출처- 감리교 기독교타임즈

 

존 웨슬리 가족이 살았던 올드 랙토리(Old Rectory)를 좌측 정원에서 촬영

 

존 웨슬리 생가 올드 렉토리 (웹워쓰)


영문으로 'Epworth'라고 쓰는 이 지명이 읽으면 읽을수록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왤까? 

초기한국감리교회사에 종종 등장하는 발음하기도 뻑뻑한 '엡웟청년회'때문이었을까. 선교사들의 권유로 탄생한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현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회)의 ‘엡웟’(Epworth)은 존 웨슬리의 출생지인 바로 이곳의

지명을 딴 것이 맞다.  그 뜻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남"이라하니 청년회의 이름으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엡워쓰에는 존 웨슬리의 생가이며, 아버지인 사무엘이 죽던 1735년까지 가족들이 살았던 올드 랙토리(Old Rectory)로

불리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다락방포함)의 목사관이 있다.  물론 지금은 웨슬리의 숨결을 찾는 방문객들을 맞는

박물관으로 바뀌어있다. 정문을 지나 1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웨슬리의 사진, 괘종시계, 부모의 초상화, 열쇠 등이

전시된 거실이 있다.  오른편으로 연결된 방은 현재 기념품 판매소로 쓰이고 있는데, 당시에는 어머니인 수산나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공부방이었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다보면 복도에 걸려있는 팔 벌려 한 폭은 됨직한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1907년 올드 랙토리를 전소시켰던 대형화재사건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첫 기억이 개인의 생애유형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리는 그 그림에서 웨슬리의 첫 기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존 웨슬리가 평생 스스로를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라고 여겼던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인생의 출발점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2. 웹워쓰 목사관 화재사건

 

웹워쓰 목사관 화재사건을 그린 그림. 생가 2층 계단 복도에 걸려있는 그림이다 

 

1907년 2월 9일 수요일,  깊은 밤,  다섯 살 된  존 웨슬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자욱한 연기는 방안을 이미 독한 냄새로 채워가고 있었다. 목사관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불이야!”라는 소리에 놀라 일어난 그는 황급히 아내와 딸을 깨웠다. 하녀도 급히 육아실로 달려가

아이들을 집밖으로 대피시켰다. 그러나 웨슬리 가족은 아무도 존 웨슬리가 집안에 남겨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존 웨슬리는  “살려달라”  울부짖기 시작했고 이 외침은 사무엘에게 들렸다. 사무엘은 목사관으로 들어가려 시도했지만,

이미 불계단으로 변해있었다. 사무엘은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존 웨슬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존 웨슬리는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살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 있던 테이블(혹자는 궤짝)을 창가로

밀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밖에서 서성이던 한 사람이 웨슬리를 발견한다.

인간사다리를 만들자는 제안에 인간사다리를 만든 뒤 창문을 통해 존 웨슬리는 구출 되었고 그 순간 목사관 지붕은 폭삭

내려 않았다. 

1753년, 웨슬리 나이 50세 때, 그는 의사로부터 죽음을 준비하라는 통보를 들을 정도로 깊은 병이 들었다.  존 웨슬리는

미리 자신의 비문을 준비하는데, 자신의 이름 다음에 ‘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로

뒷 말을 이어간다.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 존 웨슬리. 그에게 이 화재 사건이 어떤 의미 다가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화재 당시의 나무조각

 

3. 자녀 양육의 장(場) 식당

 

올드 랙토리 1층에 있는 공부방 역할을 했던 식당

 

처음 올드 랙토리(Old Rectory) 앞에 섰을 때, 목사관치곤 예상보다 큰 게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웨슬리 가족이 자녀만 열아홉(이중 아홉 사망)의 대가족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 규모는 되었어야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수산나는 1690년 첫 자녀 사무엘(주니어)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출산했다. 그리고 이 자녀들 가운데서 요한

웨슬리(15번째)와 찰스 웨슬리(18번째)같은 세계적인 인물이 배출됐다. 

수산나는 이 많은 자녀들을 바로 식당에서 훈련 시켰다. 7~8평쯤 돼 보이는 식당 이곳이 수산나의 자녀 양육의

장(場)이었다. 정갈한 베이지색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주전자가 걸려있는 벽난로가 보이고, 벽난로

양 옆으로는 채광이 잘되는 창문이 바깥 경치를 담아내고 있었다.

식당 한복판에 자리 잡은 식탁 위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금속제 접시와 주전자, 컵, 양념통, 포크와 나이프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좌측 먼 구석 쪽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와 밤색 장판으로 덮인 계단이 보였다. 이 장소는 단순히

식사만 했던 부엌이 아니었다. 잿더미가 된 사제관은 당시 4백 파운드의 공사비를 들여 1년 동안 재건축됐는데, 특히

수산나의 활동공간이었던 부엌은 식당뿐만 아니라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절반을 막아 기념품 판매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바로 이곳에서 수산나는 하루 6시간씩 규칙적으로 자녀들을 철저히 교육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이때 받은 교육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는 1732년 어머니에게  자신에게 사용했던

교육방법을 알려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수산나의 교육은 자녀 대에서 끝나지 않고, 홀리클럽, 나아가

존 웨슬리를 따르는 회원들의 규칙 속에 면면히 반영되어 흐르게 된다 

 

4. 수산나의 교육방법과 내용

 

수산나웨슬리 (출처- 웨슬리 스토리)

 

수산나는 엄격한 규율과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철저히 자녀를 양육했다. 아이가 태어 난지 석 달만 지나면

어김없이 그녀는 정한 시간에 요람을 흔들어 아기를 재우고, 깨우면서 규칙적으로 잠을 자도록 훈련했다.

말문이 트인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와 밤에 잠잘 때 꼭 주기도문을 외워야 했다.

또 주일이 보통 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도록 가르쳤다.

일 년에 한번씩  목사관에는 “알파벳잔캄” 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다섯 살을 맞은 자녀가 알파벳을 처음

배우는 날이었다. 이때부터 자녀들은 오전 9~12시, 오후 2~5시까지 매일 여섯 시간 이상 공부방인 주방에

모여 공부했다. 하루 만에 알파벳을 배운 자녀는 다음날부터 창세기를 보면서 철자법, 독법, 서법 등을 배우고,

산수, 문법, 역사, 지리도 차례로 익혀나갔다.

수산나의 교육방법 중 특별한것은 일주일을 단위로 매일 순서를 정해 아이들과 한 시간씩 대화를 나누는 개별상담이다.

그녀는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 놓고 요일별로 돌아가며 모든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상담하고 기도해 주는 신앙의

어머니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에 면담시간을 가졌는데, 이 은밀한 시간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경건의 훈련을 받았다.

수산나는 자녀들이 꼭 지켜야 할 여덟 가지 원칙 세칙을 정했는데 첫째, 잘못을 범했더라도 누구든지 솔직하게 자백하고

고칠 것을 약속하면 매를 맞지 않도록 한다. 둘째, 거짓말, 좀도둑질, 교회에서 또는 주일에 장난치는 일, 불순종, 말다툼

등의 죄 된 행위는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 넷째, 순종하는 행위의 표시는 모두 칭찬하고 그 동기의 공로에 따라 자주

상을 준다.... 일곱째,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수산나는 매를 통한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의지를 꺾는 순종의 소중함, 규칙생활을  자녀들에게 심어주려

노력했다.

 

 

수산나웨슬리

 

수산나웨슬리 묘지, 런던 번힐 필드

 

번힐 필드 무덤은 수잔나 웨슬리가 묻혀있어 중요한 무덤이 되었다. 이 무덤은 성공회 신자가 아닌 비국교도의

무덤으로 수잔나의 남편은 성공회 사제였으나 존 웨슬리와 촬스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번힐 필드에 묻히게 되었다.

수잔나의 비석은 1828년에 세워졌으며 미국 메릴랜드 프레드릭에 있는 수잔나 주일학교에서 도움을 주어서

1978년 다시 복구되었다. 이곳에는 존 번연, 다니엘 디포우 등이 묻혀있다. (출처- 웨슬리 스토리)

 

런던 번힐 필드

 

 

5. 올드 랙토리 1층 기념품 판매소

 

 

올드 랙토리 1층에는 웹워쓰 관련 기념품 판매소

 

과거엔 식당이었지만 지금은 벽으로 분리돼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는 백발의

자원봉사자들이 ‘웹워쓰’관련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엽서, 액자, 책갈피, 올드 랙토리 정원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십자가 같은 소품들, 각종 서적과 CD등이다.

진열된 서적중에는 플라스틱 링으로 제본한 B5 9쪽 분량의 ‘Educating the Family'라는 수산나의

교육을 소개한 소책자도 있다

 

2층 웨슬리 부모  침실

 

전시물

 

내부 그림

 

내부 웨슬리상과 초상화

 

내부 웨슬리상과 초상화

 

내부 웨슬리상과 초상화

 

웨슬리 책상

 

웨슬리 부모

 

사무엘 웨슬리  

 

사무엘 웨슬리 저서

 

6. 3층 다락방과 유령사건

 

 

방바닥 한 쪽에 사각형으로 구멍을 뚫어 대들보를 직접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유령사건


3층으로 난 계단을 올랐다.  ' To Old Jeffery's Chamber '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서자 정적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면에 난 창은 방 전체를 밝히기엔 턱없이 작았지만,  조명과 진열장에서 스며 나오는 빛이

포근하게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방 우측에는 누이들이 어린 시절에 입었던 옷가지와 도자기 류 생활용품이,  뒤편에는

웨슬리 흉상과 소품이 가지런히 진열돼있었다. 특이하게 방 앞쪽 바닥을 가로세로 30센티 정도로 걷어내고 유리를 씌워

방문객이 대들보를 직접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아마 1709년에 있었던 대화재 사건 이후 집을 재건축할 때 사용했던

자재가 당시 파선된 배에서 나온 목재였음을 보여주기 위함인듯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웨슬리가의 사정을 짐작케

한다.

목사관의 유령 출몰이 과연 사실일까?  유령에 대한 보고는 마샬이라는 하녀가 남자가 죽어가며 내는 신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어 에밀리(23세)도 병이 깨지는 소리와 석탄덩어리가 부엌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으나 어떤 증거물도 없었다고 한다. 반신반의했던 사무엘 부부도 며칠이 못돼 유령의 소리를 직접 듣게

된다. 어떤 밤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상황도 겪게 된다.  저녁식사 중 사무엘의 접시가 식탁 위에서 춤을

추는가 하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밀침을 당하기도 한다.  일의 심각성을 느낀 사무엘은 급기야 축사(exorcism)의

은사를 가진 동료 사제 조셉 훌을 초청해 유령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유령의 잦은 출몰로 사무엘의 딸들은 오히려

유령소동을 즐기는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한번은 세 자매가 육아실에 있을 때 침대가 공중에 뜨자 앤니가 침대 위에

올라타 놀았을 정도였다니 필자의 상상력이 바닥을 드러낸다. 에밀리는 이 유령에게 제프리(Old Jeffrey)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제프리는 이전에 올드 랙토리에 살았던 정원사였다고 한다. 이런 유령소동은

1715년 12월 초에 시작되고, 이듬해 2월초까지 지속되다가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유령출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유령사건의 전모를 알려주는 웨슬리가의 서신을 소장하고 있는 조셉

프리스틀리 박사는 집안 하인들이 외부인과 짜고 저지른 일일 것이라는 합리성에 바탕을 둔 설명을 한다. 

딸 중 가장 용모가 빼어난 19세의 헤티에게 구애하는 마을 청년들의 장난이었을 것이라는 또 다른 추측도 있다.

하지만 당시 고향을 떠나 런던에 유학 중이었던 존 웨슬리는 자신이 유령소동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자매들의 편지로 상세히 유령소동을 접하고는 이 사건이 환각이나 환청, 사람에 의한 조작이 아닌,  유령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합리성이 고개를 드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웨슬리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의 기독교 신앙의

이해가 보이는 것 너머의 것도 포괄하는 균형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출처: 감리교 기독교타임즈 / 곽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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