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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

사두 썬다 싱(Sadhu Sunda Singh) / 맨발의 성자

작성자靑野|작성시간09.02.12|조회수1,723 목록 댓글 0

 

 

 

 

 

사두 썬다 싱 / 맨발의 성자

 

사두 썬다 싱(Sadhu Sunda Singh)은  

1899년 인도 펀잡 주 람푸르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시크교 집안에서 자랐다.  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심한 반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공격했다. 1905년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으며 집을 떠나 사두(인도의 종교 수행자)가 되어 무소유의 삶과 순례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3년 동안 적어도 네 개 대륙의 스무 나라를 순례했다. 강연과 저술은 물론 많은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깊은 영향을 미친 그는 20세기 전반 동방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영적 스승이다.

 
사두 선다싱의 중요성은 지명이나 연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는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파한 것, 그리고 자신이 전파한

것을 성실하게 실천한 데 있다.

인도에서 배출된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로 마음 속에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맨발로 순회한 전도자라고 이야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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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다 싱은 14세 되던 해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시크교에 더욱 심취하면서 기독교를 저주하는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학교 선생님들은 물론 선교사들에게까지 나쁜 짓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없는 고통을 드 견디지 못하고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삼일간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데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29세 되던 1918년부터 그의 이름은 인도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감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29년 40세의 선다 싱은 티벳 설교를 위하여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다 그는 실종되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의

실종과 관련하여 구구한 억측들이 나돌았습니다. "티벳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다.", "시력이 악화되어 눈길 위에 쓰러졌다가 맹수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모두가 그럴듯한 추측이었지만 그 어떤 것도 확실한 답이 되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최후의 순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지금은 하나님 품에 안겨져 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인도에서 당대 사람들로부터 '성자'라는 칭호를 들었다는 것은 그의 삶이 어떠하였다는 것을 힘 있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한 가지 일화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네팔 지방의 한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온 여행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가는 방향이 같았음으로 그들은 동행자가 되었습니다. 살을 에이는 추위와 거친 눈보라를 맞으며 그들은 인가를

찾기 위해 계속 발걸음을 옮겼지만 인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참을 걷다가 한 노인이 눈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다 싱은 동행자에게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우리 노인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죽고 말 겁니다” 그러자 동행자는 화를 내며 거절했습니다.

“무슨 소리요? 우리도 죽을지 모르는 판국에 저런 노인네까지 끌고 간다면 우리 함께 죽게 될거요”

그러나 선다 싱은 불쌍한 노인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노인을 업고 눈보라 속을 한 걸음 한 걸음씩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행자는 혼자 잰 걸음으로 먼저 달려가고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노인을 등에 업은 선 다싱은 갈수록 힘이 들었지만

끝까지 참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노인은 점차 무거워졌고 그의 온 몸은 땀으로 젖어 갔습니다.

선다 싱의 몸이 더운 기운으로 가득하게 되자 등에 업힌 노인이 차츰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조금도 춥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마을 입구에 그들은 꽁꽁 언 채로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앞서 가던 그 동행자였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칮은 진리

 

자살 결심

 

참된 진리를 찾지 못한 썬다 싱의 마음은 더욱 분열과 충돌과 번민으로 들끓었다.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고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구하는 평화를 얻지 못하면 차라리 자살을 해서 저 세상에 가서 구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서 단호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신에게 매달리며 절박하게 간구했다.

 

“이 천지간에 신이 있거든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저에게 바른 길, 참 도를 가르쳐 주소서.
만약 당신께서 나타나 저를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침 첫 특급 열차가 지날 때 레일 위에 저의 목을 깔고 자살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신이시여, 참으로 당신이 계신다면 제게 나타나셔서
이 암흑의 공포를 거두어 주시고,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현현

 

1904년 12월 18일, 자정 무렵이 되자 그는 밖으로 나와 찬물로 온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생의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달도 어느덧 서편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얼마 후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썬다는 등에 땀을 흘리면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 30분쯤 갑자기 방안 가득히 강렬한 빛이 비쳤다.
썬다는 불이 났는가 하다가 곧 신이 응답을 보내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계속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 찬란한 광채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영광과 사랑이 넘치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욕을 가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 때 그 빛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썬다야,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너와 전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생명을 버렸단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쓰러지듯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이때까지 얻지 못했던 놀랄 만한 평안을 얻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갈망했던 행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심을 깨달았다.
썬다가 일어났을 때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썬다 싱의 마음에는 평안과 기쁨이 가득 찼고, 그 후로 언제까지나 남아있게 되었다.

 

 

    

 

   

썬다 싱의 신앙관  

 

(1). 종교 사상

 

1. 그리스도 중심 사상

 

기독교의 뿌리가 그리스도에 있는 것 같이 크리스챤 사두의 종교사상도 그 중심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석가나 공자와 같이 역사적 과거의 성인이 아니요 그는 살아 계신 신이다. 다른 성현들 같이 그 끼친 바가

서적이나 교훈에 의하여 간접으로 그 진리를 받는 것이 아니요 그와의 영적 교통에서 직접 참 생명을 얻는 것이다. 사두의

회개는 생존하신 예수의 계시에서 나온 것이요 그의 놀랄만한 활동은 살아 계신 주님의 섭리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두에게 있어 생명의 전부요 생활의 전부이다 .

 

나는 어떠한 경우에 있든지 그이 앞에 있을 때는 말할 수 없는 평화에 충만하고 있다. 심한 핍박 중에서도 평화와 회열과

행복을 느끼고 아무도 내가 주 안에서 얻은 기쁨을 빼앗을 자는 없다. 집에 있어도 거기 있고 옥에 있어도 거기 있다.

그에게는 옥도 천당으로 변하고 십자가는 은혜의 근원이 되었다. 다만 나의 마음을 천국으로 변케한 주님만을 요구한다.

그의 무한한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을 쫓아버렸다. 많은 신자들이 이 거룩한 생명을 체험치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

머리와 성경 중에만 살아 있고 마음 가운데 살아 계시지 않은 까닭이다. 사람은 그 마음을 바치는 데서만 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왕의 왕인 임금의 보좌이다.

 

2. 평화

 

마음의 참 평화를 얻은 것은 인생의 궁극적 희망이다. 그는 인도의 종교에서 이것을 얻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본 그 순간에 생각도 못한 없는 평화를 얻었다. 그는 진리요 생명이요 평화의 샘인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임재, 이는 땅 위에 오신 天國이다. 세상이 줄 수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한없는 기쁨이 그로부터 넘쳐

흐른다. 그는 큰 바다 속과 같은 평화가 항상 마음에 충만하고 있다.

 

그 전기의 저자 스트리타 박사는 「썬다싱과 한 시간 같이 있으면 잊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의 인상을 받는다. 하나님의

평강은 그의 얼굴에서 빛나서 곁에 있는 사람까지도 감화한다. 하늘은 벌써 그의 지상 생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고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의 내재! 이것은 그 마음에 열린 天國이다 (눅 十七21).

「사두-」는 이 평화를 많은 사람에게 자각 시키고 체험케 하는 것이 그의 큰 사명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이 평화를 얻은  사람에게 향하여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고 권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이것을 받으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표현할 말이 없다 하였다.

 

「나는 이 놀랄만한 평화를 말하려고 하지만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만한 말을 발견치 못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영의

눈이 뜨일 때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일 수도 없고 숨겨진 만나다.」이것은 체험으로 알 것이요, 말로 알 것이

못된다.

 

나는 티베트에서 놀랄만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의복을 벗고 나에게 심한 상처를 보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주를 위하여

이 같은 핍박을 받았으나 그 때에 몹시 기쁘다고 아래 같은 회심담을 증거하였다.「나는 처음 순교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가 심문을 받는 그 심한 고통 중에서도 그 얼굴에 나타나는 평화의 기쁨을 볼 때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마승은 이것을 악귀의 소위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악귀가 이런 기쁨을 줄 힘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빌겠다. 이같이 생각하고 나는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그 순교자는「칼타-싱」이다.」

 

이같이 모든 신자에게 공개된 평강과 기쁨의 무한한 행복이 그 얻을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모르고

지나는 것은 마치 보배 무덤 위에서 죽은「네팔」의 거지와 같다고「사두-」는 안타깝게 말하였다. 그 평화는 十자가의

고통 속에 더 많은 축복이 숨어 있다. 예를 들면 그가「티베트」의 송장굴에 들어 갔을 때와「네팔」에서 거마리를 씌울

왠일인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한없는 평화가 심중에 솟아 올라 찬송이 입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3. 십자가

 

十자가는「사두-」의 가장 애착심을 끄는 신비한 은혜의 상징이다. 이는 자기를 괴롭게 하여 공적을 쌓으려는 고행과는

다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고「사두-」는 이를 영광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짊머진다.

그는 말하기를「十자가는 호도와 같다. 한없는 고통과 핍박에 거죽은 쓴 듯하나 그 속은 단맛이 있다. 十자가의 거죽은

못이 가득한 듯하나 그 속에는 큰 축복이 숨어 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十자가와 같은 것은 없다. 신은 이 十자가로 그 사랑을 人間에게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 우리는 땅 위의 짧은 생애 중에서 十자가를 질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이것은 땅위에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까닭이다. 나는 확신으로써 말할 수 있다. 十자가는 十자가를 진 사람을 끌어 올려 주의 앞에 까지 이르게

한다.」

 

그는 十四년 동안 人間의 당치 못할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十자가 고통의 뒤에 숨은 축복을 맛 본 경험에서 이같이 말한다.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하다 하는 거짓말로 비방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 五11) 한 주의 언약을 나는 완전히 체험 하였다.

 

그는「네팔」의 옥중에 갇혔을 때 성경 첫 페이지에 이같이 썼다.「네팔」! 一九一四년 七월 七일! 그리스도의 임재가 나의

감옥을 변하여 축복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하물며 이 후에 하늘에 갈 때에는 그 축복이 어떠할까!」그는 십자가의

고통을   분담하는 것으로 一生의 의의를 삼았다. 간데마다 환영하고 성자라고 떠들고 존경하는 구미여행은 그의 즐겨하는

바가 아니요, 눈쌓인 「티베트」가 나의 갈 곳이라 하며 十자가를 찾아 갔다. 그러므로 그는 핍박 받고 끝까지 주를 증거

하다가 죽은 모든 순교자에 대하여 비상한 애착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 자신도 순교로서 끝마치기를 원했다.

파리에 갔을 때 무엇을 보고 싶으냐하고 물으니「이 나라의 종교와 순교자에 관한 것을 보고자 한다.」고 대답하였다.

 

「루-풀」박물관에 안내하니 그는 속히 보고 지나다가「세바스티안」이 화살에 맞아 죽고 있는 그림에 대하여는 주의를

끄는 모양이었다. 거기는 「밀레」의 만종, 기타 유명한 종교화가 있었지만 후에 이것을 「루- 풀」에 있는 최상의

그림이라고 말하였다. 여기 또 그가 큰 흥미를 가지고 늘 이야기하는 순교미담이 있다.「한 신자가 「티베트」에서

전도하였다. 그는 허다한 모욕을 받으면서 굴하지 않고 핍박에 저항하여 복음을 선전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칼을 가지고 그의 피부를 째고 그 속에 지리 화약을 넣고 그 후에 소금을 쑤시어 넣었다. 그는 그런

고통에도 깜짝 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앞서는 사단이 그 화살을 갑지고 나를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나의 상처를 고쳐주셨다, 그들의 주는 괴롬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하였다. 저들은 다시 고형을 더하려고 그의

가죽을 칼로 벗겼다.

 

그러나 그는「나는 제군에게 감사한다. 나의 낡은 가죽을 베끼면 얼마 안 되어 나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하고 그는 아직 남은 의식으로 주를 찬미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를 불 가운데 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나를 불 가운데 넣은 것을 감사한다. 불꽃은 나로 하여금 높이 곧게 하늘에 올라 가게 한다.」고 말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뻐하는 가운데 그 영을 하나님께 부탁하였다.

 

4. 三 位 一 體

 

三位一體의 사상에 대하여「사두-」는 입신의 체험으로 이같이 말하였다. 「어떤 때 나는 三位一體의 교리에 대하여

적지않은 곤난을 당한 일이 있다. 나는 三位가 다른 인격이 세 자리에 앉아 있는줄 생각하였더니 入神의 경험에서 이것을

밝히 알았다. 나는 입신으로 제 三天에 들어 간 때 이것은 바울이 이끌리어 올라 간 곳과 같은 것을 알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영광 있는 영체로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다. 언제든지 내가 그 곳에 갈 때는 항상 한가지 모양이었다.

그리스도는 늘 中心인데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붓으로 그릴 수 없는 용모이시다. 그 낯빛은 햇빛과 같이 빛난다.

그러나 보기에 눈이 부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곤란 없이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우러러 볼 수 있다.

항상 사랑이 충만하여 영광스런 미소가 넘치고 있다. 처음 내가 주를 볼 때 주와 나의 사이에는 어떤 옛적부터 있었던

관계가 있는 것을 느끼었다.」

 

그는 말하되「나는 그다. 나로 말미암아 너는 지음을 받았다.」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말로서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몹시

오랫동안 이별하였던 아버지를 만난 것과 같은 극히 강한 느낌을 가졌다. 나의 옛 사랑이 마음에 돌아 와서 나는 전부터

그의 종인 것을 알았다.「내가 처음 천계에 갔을 때 둘러 보고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곳에 있는가」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하나님은 땅 위에 있을 때와 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신은 무한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는 신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를 통하여서만 우리들이 신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한가지이다」.

 

「나는 또 빛난 물결 같은 조류가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와 평화를 주며 성도와 천사의 사이를 지나 어느 때에든지 신선한

생명을 보내는 것이 마치 여름 더운 날에 물이 모든 나무에 새로운 생기를 주는 것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성신인 것을 이해하였다.」그는 다른 데서 성신을 인격으로 인식하였다.

 

5. 도성인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그 육체를 가지고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사두-」의 도성인신을 설명하는 중심사상이다.「사두-」는 말하기를 "생명의 말씀이 육체로   

나타난다든지 말씀이 육체 중에 들어 있다는 말에 대하여 나는 신이 육체를 쓰거나 인간의 형체를 쓸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고 종종 생각하였다. 내가 기독교신자가 되기 전에는 이 교리를 늘 비평하였다."

 

세상에는 수육의 교리를 곤난 없이 잘 믿는 신자가 여러 만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필요로 육체까지 되었는지는

대개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수시로 신을 보고자하는 깊은 요구가 일어난다. 人間은 본능적으로 신을 보고자 한다.

우리는 예배할 때 신을 보려고 하나 신은 무한한 존재이다. 나는 우상숭배자를 향하여「왜 우상을 섬기느냐」고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신은 무한이다. 그러므로 이 우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예배하는 가운데서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고 하였다,

 

우리는 사랑하는 신을 보며 신과 말하려고 원한다. 그러나 곤난한 것은 신은 무한하여 우리는 볼수 없다. 언제 우리가 무한한

자가 될 때에는 신을 볼 수 있을런지 모르나 현재 여기서 우리의 창조주인 아버지, 생명의 부여자인 신을 볼 수는 없다.

이것이 그가도성 인신하신 이유이다. 그가 제한 있는 인간의 형체를 쓰고 나옴으로 인간은 비로소 신을 볼 수 있게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十四 9)

 

「사두-」는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이를 비유로 인증하였다.「카시밀에 수백의 양을 소유한 자가 있었다. 그 종이 양을

먹이려고 들에 갔다가 저물 때 온 것을 보니 양 세 마리가 없어졌다. 그는 종을 명하여 양을 찾아 오라 하였으나 종들은

들짐승을 무서워 가기를 싫어하였다. 자기가 친히 찾아가도 양이 그 모양을 알지 못하였으로 그는 양같은 모양을 하기

위하여 양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찾아 갔다. 어떤 양은 방황하고, 어떤 양은 상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양들은

그를 자기와 같은 양인줄 알고 뒤에 따라 왔다. 집에 와서그는 양의 옷을 벗어버렸다. 지금은 양이 아니오 사람이다. 그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양이 된 것이다. 그 같이 신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구히가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타밀」에서는 아래와 같은 비유로 말하였다.」

 

「회교도의 한 박학한 대신이 있었다.「팔레스틴」에 가다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신자가 되었다. 귀국한 후 신자가

것을 선언하고 "나는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구주를 믿는다"고 세상에 발표하였다. 그 말을 들은 王은 「만일 내가 

무엇을 하려면 종에게 명령하면 다 시행한다. 만왕의 왕이신 이가 명령을 내리면 인간은 구원될 것이다. 무슨 필요로

친히 육체를 쓰고 사람이 되셨느냐?」대신은 회답하기 위하여 하루의 여유를 청하고, 정교한 목수를 불러서 금년에

만 한 살 되는 王子와 같은 인형을 만들어 내일 가져 와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 王과 대신들이 작은 배를 타고 선유하였다.

 

王은 어제의 회답을 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때 목수는 인형을 안고 언덕에 서 있었다. 王은 내 아들인줄 알고 손을 내밀어

받아 안고자 하였다. 목수는 약속 받은대로 인형의 王子를 물에 떨어 뜨렸다. 王은 王子를 건지려고 친히 물 가운데 뛰어

들어 갔다. 얼마 있다가 대신은 王을 향하여 『전하! 당신께서 친히 물에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신에게 명하시면

충분하지 않습니까?』하였다. 왕은 생각한 끝에『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다』하였다. 대신은『사랑은 그와같이 신이 크신

능력을 가지면서도 다만 말로만 아니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된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이『사두-』의 수육에 대한 해석이다.

 

6. 죄

 

죄 문제에 대하여『사두-』는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 재미 있는 비유를 가지고 여러 각도로 설명하였다.

 

1). 죄는 자유를 빼앗는다.

 

『어떤 날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문득 작은 새 한 마리가 아래로 똑똑 뛰어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서서 그것을

향하여 주의하며 보았다. 놀랜 것은 그 밑에는 뱀이 있어 그 자석과 같은 인력을 가지고 새를 제 앞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뱀의 독하고도 취하게 하는 그 눈에 이끌리어 새는 무의식적으로 뱀의 앞에 까지 가까이 오게 되었다. 뱀은 새가 도망할 수

없이 자기의 것이 된 줄 알고 나아가 잡아 먹었다. 새가 멀리 있을 때는 도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같이 사단이 달콤하고

유쾌한 길로 우리를 꾀어 이끌어 가려고 유혹한다. 이것을 면할 길은 하나가 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들리는 것이다』

 

2).  죄는 양심을 마비시킨다

 

『만일 우리가 죄를 상습적으로 범하고 산다면 마음의 눈인 양심은 소경이 되어 버린다.』나는 일찍『티베트』에 있는

한 수도승이 오랫동안 어두운 굴 속에서 살았다는 사람을 보았다. 저가 그 굴에서 나오니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눈은 화색과 황색으로 되었다

 

내가 日本에서 돌아 오는 길에 한 의사를 만났다. 그는 눈 먼 고기를 병속에 넣어 가지고 있었다. 모양은 아름다운데 눈이

없었다. 겉가죽의 흔적만 짙어 있는 것을 보니 전에는 눈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 고기는 어두운 가운데 사랑서 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히말라야에 있을 때 독 있는 풀을 먹고 사흘 동안 혀가 마비되어 아무 맛을 알지 못하였다. 그 같이 우리가 죄를

범하면 양심이 마비되어 하나님께 대한 맛을 잃는다. 언젠가 소제하는 사람이 한쪽 손에 냄새 나는 통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른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갔다. 그는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같이 세상 사람은 죄와 악이 습관이

되어서 그것을 모르고 살아 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가운데서 내가 소제부를 보는 것보다 더 강한 냄새를 맛보신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十자가 질 때 뿐인줄 아는 것을 잘못이다. 그는 三十三년동안 十자가를 진 것이다. 회개한 신자는 그 죄를

다시 생각해 내어 가지고 늘 괴로워 할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아래와 같이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죄를 사하셨는가, 사하지 않으셨가 하는데 대하여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구원은 다만 죄 사하는 것

아니요 죄를 끊어 버리고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시키무」에 폐병자가 있어 정신이상이 생겼다. 한 친구가 찾아 와서

이름을 부르니 저는 사과 깎는 칼로 그 친구의 목을 찔러 죽였다. 저는 살인죄로 어느날 오후 五시에 교형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친척들이 왕에게 가서 병든 사실을 고하고 사면을 받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저는 병으로 벌써 죽었다.

살인죄는 병이 그 원인이 되었다. 죄는 용서 받았으나 병은 낫지 못하였다. 이것이「믿지 않으면 내 죄로 죽으리라」하신

뜻이다. 신은 여러분을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죄의 근원이 되는 병이 죽이는 것이다.

 

3). 죄는 사람을 죽인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가 저를 죽인다. 하나님이 죽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 죄가 그

자신에게 형벌을 가져 온다. 유다를 보라. 저가 주를 배반할 때 빌라도가 저를 죽인 것도 아니요, 제사장이 저를 죽인 것도

 아니요, 사랑하는 주께서 죽인 것도 아니요, 동무 되는 사도들이 죽인 것도 아니요, 저를 죽인 것은 그 자신이요, 

저를 목 맨 것은 제 손이요, 즉 그 죄가 죽인 것이다. 죄 가운데 사는 것의 종말은 결국 이런 것이다.」

 

4).  죄를 죽이라

 

어느 촌에 소녀가 있어 매일 거미줄을 소제하면서 기도하였다.『주여, 내가 이방울 소제하는 것 같이 내 마음을 깨끗게

하여 주소서』. 그때 소녀는 한 소리를 들었다.『딸아, 매일 거미줄을 쓸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줄 쓰는 거미를 죽이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거미줄 소제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 아니냐 』.

그 같이 우리는 매일 죄의 용서 받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만할 것과 같이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

 

5). 주 안에 있으면 죄에서 떠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 지은 것이니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느니라.『석탄은 검다. 우리는 폰트의

비누를 가지고 씻어도 그 검은 것을 희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불 가운데 던지면 검은 것은 변하여 빛나는 광채가

난다. 우리도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성신의 불세례를 받으면 죄인된 우리가 세계 앞에 빛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한 뜻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라고 한 뜻을 나는 처음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깨달았다. 죄는

대개 쾌락을 얻고자하는 욕구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한없는 기쁨의

근원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는다. 마치 부자는 적은 삯전에 팔리지

않는 것과 같다』.

 

7). 고통은 사랑의 채찍

 

고통과 불행은 하나님의 벌이이고, 징계고, 진노하심이라는 견해에 대하여『사두-』는 반대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일면의 표시로 해석했다. 인도의 인과응보의 사상 가운데서 자라난 몸으로 이같은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저가

체험을 통해서,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의 증험에서 나온 것이다. 저가 말하기를『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미워하여 벌하시지 않는다. 병이나 재난을 신의 징벌이라고 말하는 데는 나는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랑의

채찍이다. 어떤 의사가 나에게 말하였다.

 

아이가 나기 전에는 호흡이 없으나 나면 호흡이 있어야 된다. 그러므로 아이는 산성(産聲)을 내어야 된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울지 않는 일이 있다. 그 때 산파는 매섭게 친다. 그래서 울게 하지 아니하면 폐가 수축하여 죽어 버린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갓난 아이를 저렇게 때리다가는 죽겠다고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쳐서 울리고, 울어서 호흡이 시작된다.

그 같이 하나님은 때로 사랑의 채찍을 내리신다』.

 

『어느날 나는 현관에 앉았을 때 강한 바람이 불어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 왔다. 그때 한쪽에서 매가 뒤를 따라 날아 왔다.

작은 새는 어느 쪽으로 갈까 두가지 위험한 길 가운데서 내 무릎에 와서 앉았다. 작은 새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기를 좋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의 바람이 불어 오매 저는 이곳에 피난처를 찾았다. 그같이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도

고난의 폭풍에 쫓기어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오게 된다.』

 

한번은 해 저물어 길가에 보니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내를 건너는데 암소와 송아지는 오기를 싫어함으로 목자는 매우 

고민하였다. 그때 나는 목자에게 『그 송아지를 먼저 이끌라. 그러면 큰 소도 따라 가리라』. 그 목자는 내 말대로 쉽게 큰

소를 데리고 갔다.『이같이 우리가 주께 나가기를 싫어할 때 우리의 사랑하는 자를 떼어 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늘과

영혼을 사모하게 된다.』

 

8). 속죄

 

한번은 영국의 학자들이『사두-』를 향하여 묻기를,『성경에 있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니 그는 아래와 같이 비유로 대답하였다.『한 청년이 산에서 피를 많이 흘리고 죽게 되었다. 의사의 말에 의지하여 그

아버지는 많은 피를 빼어 아들에게 나눠 주고 자기는 죽고 아들은 살았다. 이같이 우리는 죄에 타락하여 영혼이 심한

상처를 받고 피 같은 속생명을 잃어 거의 죽게 되었다. 그 때 우리 구주는 그의 피를 부어 주셨다. 자기 생명을 부어 주시어

우리는 구원되었다. 누구든지 그 마음을 기뻐서 바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구원된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피는 생명을 의미하고 또한 성질에 관계된다. 그는 계시중에 받은 것이라고 또 이 같은 기묘한 예를 들었다.

 

『남인도에서 이와 같은 병자가 있었는데 고양이의 피를 혈관에 많이 부어 넣었더니 고양이와 같은 성질이 많이 나타났다.

이것은 다른 데로부터 생명을 부어 넣을 때 그의 인격과 품성이 함께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같은 계시 중에, 저들은 말하기를『그리스도 안에 접붙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선행을 하라

그러면 선인이 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그러면 선행을 할 수 있다』.

속죄나 죄를 씻는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 안에 접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의 안에, 그는 내 안에, 가지에는

쓴물이 있었으나 접붙이면 원대에서 단물이 흘러 쓴물이 달게 변한다.』

 

이 위의 몇가지 비유는 신의 생명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는 구원을 말하였고, 이 아래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대속하는 방면의 예를 말한 것이다.

 

『두 청년이 도박하다가 잡혀서 옥에 갇히었다. 부자집 청년은 五백『루삐스』의 벌금을 내고 쉽게 나왔다. 그러나

구차한 청년의 어머니는 그 아들을 구해 내려고 날마다 힘든 노동을 하였다. 하루는 일하다가 돌이 굴러 떨어지며 여자의

손을 상하여 피가 흘렀다. 철장 속에서 이것을 내다 보고 있던 그 청년은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그 손의 상처는

웬일입니까! 그 손가락에 피가 웬일입니까?"

 

어머니는 눈물 흘리며 목메인 소리로 아들을 쳐다 보며 대답하였다. "나는 너를 구하기 위하여 매일 이같이 노동하고

있단다."  이같이 하여 피값으로 五「백루삐스」를 얻어 그 아들을 옥에서 구해냈다.

그때 부자 아들이 또 찾아 와서 도박을 하자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청년은 대답하되「나는 금후 결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너는 쉽게 돈 주고 나왔으나 나는 어머니의 수고와 번민과 상해와 피를 희생한 값을 주고 구해 나왔다. 우리

어머니를 괴롭게한 그 도박을 나는 장래까지도 영원히 들어 보지도 않을 것이다 」.

 

「부자 청년 같이 죄에서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죄를 버리는 힘이 약하다. 그러나 우리 죄를

구하기 위하여 신이 친히 육체를 쓰고 그 피까지 흘리신 것을 믿는 자에게는 이같은 고통을 신께 끼치는 죄를 범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또 형이 그 목숨을 바쳐 동생을 악에서 구해 낸 예를 들였다.」

 

「악한 동생은 제 집을 버리고 산중에 들어가 강도의 두목이 되었다. 그 아비는 이제라도 회개하고 돌아 오면 그 죄를

용서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산림 속의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 가서 이 소식을 전할 사람은 없었다.

동생을 사랑하는 형은 어느 날 용감히 길을 떠났다. 아버지는 도망 간 아들을 사랑하는 증거로 귀한 선물을 보내었다.

그가 山중에 들어 서자 귀중품을 강도들에게 빼앗기고 큰 상해를 받았다.

 

「나는 보물을 다 빼앗겨도 관계치 않다. 다만 나를 너의 두목에게 데려다 주기를 바란다」하였다. 강도들은 저를

데리고 두목에게 갔다. 두목은 그 소리를 듣고 제 형님인줄 알고, 그 무서운 상처를 보고 놀래며 마음이 아팠다.」

형이 말하기를,「나는 아버지가 너에게 전하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는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변치 않는다. 만약 네가 지금이라고 집으로 돌아 오면 아버지는 너를 용서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기 온

목적이다. 이 말이 끝나고 저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이같이 형은 동생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두목은 형의 죽은 시체를 붙잡고 통곡하고는 후회하고 집으로 돌아 갔다.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형을 생각하고

항상 탄식하였다.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이해한다면

어찌하여 제군의 마음이 아직까지 그로부터 멀리 떠날 수 있겠느냐.

또 바울이 말한바 막힌 담에 대하여 이같이 비유하였다.

 

「나는 얼마 전 히말라야 산중에서 높은 산벽으로 사이가 막힌 두 동리를 보았다. 두 동리의 직선거리는 심히

가까우나 돌아서 가면 일주일이 걸렸다. 한 사람이 이 길을 뚫으려고 계획하였다. 이 일을 위하여 생명까지라도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착수하였으나 애통하게도 그는 일이 완성되기 전에 살해 되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죄인의 장벽이란

것을 생각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생명을 버려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길을 통하였다.」(엡 2장 13-14)   

 

9). 최후의 심판

 

최후의 삼판에 대하여「사두-」는 입신 중의 체험에서 얻은바 즉, 하늘 위에서 天使들과 문답한 지식에 의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천계에 들어 갔을 때「죽는 자는 다 한 곳에 서서 심판을 받느냐?」고 물었다. 그 때 천사가 대답하기를」 

「아니다. 육체를 버리면 영은 그 지나간 일을 다 기억하고 똑똑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영광된 빛은 그들 자신의 행한 일을 다 나타냄으로 그들은 즉시 성도와 천사들이 사는 하늘에서 살지 못할

안다. 그 곳은 모든 것이 그 자신에 맞지 않고 부적합함으로 하늘에서 떠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몰아 보내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벽도 없다. 또 들어 가는데 입장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입장권과 여행권은 그 사람이 가지고 온

과거 생애가 그것이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천국이 살기에 좋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살기에 합당치 못하게 된다. 이것이 신이 자기와 인간 

사이에 장벽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마음으로 생기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이란 것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모든

창조물 앞에서 높이 들리는 것으로 인하여 최후의 결과를 발표하여 드러내는때의 일인 것이다. 또 나는 들었다.

육체의 내면은 영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를 범할 때에 마치 복사지에 글을 쓰면 윗장은 잘 보이지 않으나 밀장은

똑똑히 나타나는 것과 같이 죽은 뒤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 나오면 상처 받은 영의 형상이 밝히 나타난다.

이것이 삼판의 대부분이다.」

 

10). 육체의 부활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 배운 일이 있느냐고「사두-」에게 물으니「천사는 나에게 이같이 말하였다. "신자는 육체를 뒤에

두고 육체는 매장된다. 그러나 속의 영체는 자유로 나와서 제 二,  제 三 天을 차례로 그 발달된 정도에 따라 올라간다.

적어도 기독신자의 대다수에 대하여서는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영적생활에 대한 계단이 있다. 그리스도와 극히 밀접한

생활을 한 약간의 사람들은 육체가 고요히 변화하여 하늘에 끌려 올라 간다. 혈육은 영원한 생명을 이을 수 없으므로

이것은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이것은 같은 육의 형상이 전혀 변화된 것이다." "그것은 육신으로 승천한 에녹과 엘리아와   

같은 사람이냐?" 고 물으니 "그렇다." 대답했다. 또 모세에게도 적용하여 하늘에 있는 모세와 엘리아를 가리키면서

변화산에서 동일한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나도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성화한 것이 한가지였다.  왜 그러냐 하면 하늘에서는 그 모양이 변치 않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묻었다. 그러나 신의 묻는 방법은 인간과 다르다. 그것은 영체로써 싸는 것이다. 누구나 육체로 하늘에   

들어 갈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몇 사람에게 대하여는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보통 신자의 대부분은    

육체는 땅에 두고 영체로써 곧게 中간  즉, 제 二天에 간다. 거기서 어떤 자는 몇 주일, 혹은 몇 개월, 혹은 더 오래 머물러  

준비가 되면 제 三天으로 오른다. 특별한 사람을 예로 든다면「아씨시」의「프린시쓰」나「기독의 모방」의 저자  

「아켐비쓰」같은 사람은 영적으로 비상히 진보하였음으로 곧게 제 二天을 지나 제 三天에 간다.」  

 

11). 두뇌와 마음

 

종교는 심정으로 체험할 것이요 지식으로 알 것은 못 된다. 세상에는 종교적 지식에 대하여 아는 자는 많을 터이나

반드시 그들이 신을 체험한 자는 아니다. 박학한 지식으로 신을 찾는 것보다 무식한 사람이 마음을 바쳐 믿는 것이 신을

받고 아는 점에 있어도 더 완전한 것이다.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나는 진리라 함은

이것을 말하였다.  

 

「사두-」는 이 점에 대하여 강조한다. 마치 바울이 유대종교 율법구원에 대하여 신앙 구원을 전한 것 같이

「사두-」는   인도철학의 주지주의에 대하여 심정의 종교를 역설한다. 그가 말하기를,「종교는 마음의 문제다. 만일

우리가 마음을 바치면 진리를 알 수 있다. 육안이나 지식으로 알 것이 아니요 마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다른 종교는

서적을 통하여 배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서적의 지식으로는 얻을 수 없다. 다만 그 마음을 바침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생명의 만족을 구하는 것이다. 참 평화와 영혼의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무용이다.

그런데 지식을  통하여서는 이것을 얻지 못한다. 나는 지식이 종교에 필요하다는 인도 종교가의 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말하였다.

「갈한 사람에게는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 필요하고 수소와 산소로 물이 된다는 지식이 필요치 않다」.  

 

한 어떤 인도 종교가들은 비상히 박학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세상에는 박학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가장 중요한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는 소경이다. 그러한 지식은 자신을 복되게 하기보다 불행하게

되는 일이 많다.

나는 인도의 하층사회 사람들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학식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데 우리 같은 무식자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느냐」고.  나는 이같이 대답하였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더욱 미련한 일이다. 그들은 세상 생활을 표준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대가다. 그 의견은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 사건에 대하여는 어린애와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기도하는 사람이라야 그 종교에

대한 의견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영적 경험이 없는 과학자의 의견을 받아 가지고 종교의 문제를 결정코자 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학식 있는 사람은 언제   

일식이 되는 것은 알는지 모르겠으나 죄에 대한 일은 조금도 모른다. 두뇌로 얻은 종교는 그 표면은 알아도 내면의

진수에는 이르지 못한다. 심정은 영혼의 가장 내적인 부분이다. 이것으로 무선전신과 같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오는

육신을 받는다. 두뇌는 유행의 사건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실재자의 심정을 보거나 깨닫는 것은 심정이다. 나의

두뇌는 마음으로 본데 대하여 감심(感心)으로 복종한다. 만일 처음 심정으로 보지 못하였으면 두뇌로 알지 못한다. 마음은  

두뇌를 초월하고 있다. 두뇌로 얻은 지식은 목구멍 아래로 내려가지 못한다.

 

나는 한번 못 가운데 있는 돌을 주어 깨트려 보았다. 六七촌까지는 젖었는데 속과 안은 전혀 말라 있었다. 그 돌은 물  

가운데 있었으나 물은 돌 속에 없었다. 사람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교회 안에 사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대단히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심중은 마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지 않다.

 

인도에는 영혼의 구원을 얻은 사람이 많다. 그 중에는 극히 무식한 자도 있다.「한 사람은 전혀 일자무식이지만 훌륭한  

신자로서 큰 증거를 세우고 있다. 그는 항상 말하되, "나는 소제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들이 되었다. 나는 그를    

안다. 그는 내 마음 속에 계시다. 여러분도 마음을 그에게 바치면 또한 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고 하였다.」

 

 

 

 

(2) . 종교생활

 

1. 선다의 신비관

 

「썬다싱」은 기독교 역사상 보기드문 대신비가이다. 그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 신비한 은혜는 보통 사랑은 얻기

어려운 귀족적 선물인 듯이 생각하는 점에 반대하고 이것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평민적의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썬다-」는 그 자신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신비가(미스트)라는 것은 미스트(안개)를 연상케 하는 무슨 몰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신인합일의 경지에서 신을 아는 자이다. 대 성자라 할지라도 깊이에 들어 간 자는 극히 적고, 나 같은

것은 초보요 영의 어미로부터 젖을 먹고 있는 자에 불과하다. 나는 다만 영의 아이 됨에 불과하다. 신비가란 이름을 듣기를

주저한다. 나는 인도에서「스와미」(신성한 사람)라고 부르는 것을 피한다. 나는 차라리 순수한「사두-」즉, (종교가)라고

부르는 것을 원한다」하였다.

 

언젠가 영국 학자가 아래와 같이 질문하였다.「신비적 소질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혹자는 음악을 잘하는

어떤 사람은 모르고, 혹자는 그림을 잘 그리나 어떤 사람은 못하는 것과 같이 종교에 대하여도 은혜 받는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다르지 아니한가?」

 

「썬다-」는 대답하되,「종교적 성질은 예술을 감상하는 능력과는 다르다. 이것은 차라리 갈하는 것과 같다. 갈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느냐. 갈증이 사람을 물로 인도하는 것과 같이 종교적 갈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오게 한다.」

학자들이 또 질문하였다,「그러나 확실히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큰 종교적 천재가 있지 않느냐. 어거스틴, 루터,

웨슬레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선천적 소질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는 대답하되,「육체는 크고 작은 것이 다르다. 어떤 자는 두뇌가 크고 어떤 자는 작다. 그러나 영혼은 모든 사람의

수용력이 같다고 나는 믿는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그 수용력을 더 잘 잘 발달케 한 자이다. 그들은 각각 영적 향상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은 것이다.」

 

누구든자 기도와 명상에 많은 시간을 바쳐 살아 계신 주와 교통하는 생활 가운데서 살아 간다면 그는 영적 진경을 볼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현세의 미온적 기독교에 대하여 늘 이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과거의 도덕가가 아니요

살아계신 신이며, 신비적 최고의 모범이 아니라 구주시며, 각 사람의 정도에 따라 나타나시는 인격적 신인 것을 고조하며,

또 조물주와 피조물을 구별하여 동양류의 범신론을 부정한다. 이 아래의 기록을 보면 그의 사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인도는 다만 도덕적 교사로서 가르치는 선교는 필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그리스도는 최고의 신비가라 하니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물으니,『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다. 그리스도는 최고의 신비가가 아니라 신비가의 구주시다.『그리스도는 역사상의 인물일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활동하신다. 그는 성서 중에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마음 가운데 살아 계시다.』

 

그는 신비적 결합에 대하여 신인의 경계를 구분한다.『사람들이 말하기를 구원은 신 안에 결합되는 것이요 그것은 하늘에

사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의 안에 사는 것은 그가 우리 안에 사는 것이다. 철이 불가운데 들어 갈 때 철은 빨갛게 된다.

철은 불 가운데 있고 불은 철 가운데 있다. 그러나 철은 불이 아니요 불은 철이 아니다. 그와같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숨은 우리의 생명이다. 그러나 사람은 숨이 아니요 숨은 사람이 아니다. 그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호흡하나 우리가 신은 아니다. 마치 호흡으로 공기를 마시는 것같이 기도로 당신은 호흡한다. 다만 우리가 신에 가까울

아니라 그와 합체한다. 다만 결합할 뿐 아니라 생명을 받는다. 이 생명을 가지면 놀랄만한 사실을 실험한다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와 달라 더 깊은 것이 있다. 그리스도 신자는 그리스도의 한 부분으로 그리스도의 한 벗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를 통하여 호흡한다. 그리스도는 항상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언제든지

그들의 마음에 숭배의 마음이 일 때는 그의 현재를 조금 자각할 때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여

우리에게 자기의 실재를 알리려고 강박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받은 정도에 따라 감당함에 맡길 뿐이다. 결코

강제적으로 간섭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노력에 따라 인도하신다.』

 

2. 영혼의 암흑

 

신비가들의 경험에 의하면 간흑 영혼의 암흑시기가 있다. 신과의 깊은 교통에서 늘 평화를 얻고 원기가 넘치던 사람도

혹시 감웅이 막히고 캄캄하여 신과의 사이에 무슨 장벽이 선 듯이 외로움을 느끼는 때가 있다. 이것이 사람에 따라 몇주일

혹은 몇 개월 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때가『사두-』에게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어떤 때는 두 세시간 그런 때가 있으나

며칠이나 몇 주간씩 계속하는 일은 없다. 이것은 일종의 사랑의 유회다. 왜 그러냐 하면 항상 빛가운데 있는 것보다 잠시의

어둠이 도리어 기쁨을 더 크게 하며, 신과 인간의 영이 같지 아니한 것을 알게 하는 까닭이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느냐. 물론 신은 결코 그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잠깐 자기를 숨기는 것이다.』

 

그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로 이를 비유하였다.『비겁한 아이를 가진 그 아버지는 이를 교정하고 용기를 양성하기 위하여

하룻밤 산림 속 나무에 얽어매어 혼자 두었다. 아이는 맹수가 올까 겁이 나서 울며 부르짖다가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간 것이 아니요 그 뒤에 숨어 총을 가지고 맹수가 오면 쏘아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같이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도 전혀 우리를 내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혹시는 죄로 인하여 신이 그 낮을 숨기고 어떤

때는 교훈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 혹 나는 혼자 버리운 것을 느끼는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그 죄는 무엇인가, 그 때문에 평화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귀하는 그같이 영적 생애를 계속하는 데서 괴로움을 느끼는 일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하여,『인도에서는 오랜 가뭄과 더위    

끝에 처음 비가 오면 더운 아지랑이나 안개 같은 것이 일어나 도리어 찌는 듯하게 된다. 그같이 내가 처음 은혜의 소낙비를

받을 때에 좀 견디기 어려운 듯 하였으나 두 번, 세 번 받는 동안에 그런 일이 없게 되었다. 특히 금식 후에 그렇게 되고, 그

후부터 입신의 경험도 쉽게 되었다 또 육체에도 상쾌함과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 전에는 보이는 세계를 많이

감하고 영계를 조금 감하였더니 금식 후부터는 적당하게 되었다.

또 영적 압박을 는끼는 일이 없느냐 하니,『만일 내가 평화를 잃게 되는 경우에도 기도로써 곧 회복한다.』고 대답하였다.

이같이 그에게는 오래 계속하는 영적 암흑은 없다.

 

3. 활동과 봉사

 

봉사는 기독교정신을 나타내는 특색 있는 생활이다. 동양의 종교들은 은둔적 경향이 있으나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봉사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자아의 완성에 목표를 두는 것이나 하나는 신의의 완성에 목표를 두는 것이다. 『사두-』는

그 일생을 봉사의 생활에 바쳤다. 그러나 중세기의 은둔생활을 전혀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한 수도승은 그리스도의 모방과 같은 것을 쓰지 않았느냐』는 『아켐비쓰』의 이 저서에서 큰 감동을 받고 늘 이같이 그

가치를 인정하여 말하나 자기의 사명은 봉사에 있다고 믿는다.『만일 귀하에게 한 주일 밖에 남은 시간이 없다면 귀하는

기도와 명상을 하겠느냐, 활동봉사를 하겠느냐?』고 묻는 말에 그는 대답하기를,『우리가 한 주일 동안 물만 먹을 것인가,

밥만 먹을 것인가묻는다면 우리는 물과 밥을 다 요구할 것이다.』하였다. 그는 하룻동안이라도 그 시간을 전부 명상에만

보내는 일은 극히 적다. 히말라야에서 몇 주간 지날 때에도 그 기간에 숨은 촌락을 찾아서는 전도하고 있었다.

 

『제 목숨을 아끼는 자는 이것을 잃고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생명을 버리는 자는이것을 얻으리라』한 것은 일반

크리스챤의  생활표어이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들어 이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는 쉬우나 그를 위하여 살기는 어렵다. 죽는 것은 한두 시간만 괴로우면 되나 사는 것은 나날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수년 동안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와 사람에게 봉사하였다. 주께서 부르는 날이면 하늘에

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땅에 생존하여 있는 동안 활동할 의무가 있다. 이 점에 대하여는 전혀 인도의 은둔자와 생각을

달리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산야시』라고 부르지 않는다.『산야시』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악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또 나의 것이다. 만일 내가 세상을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나에게

주신바 어떤 은혜도 버릴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중의 악한 것만 버린다. 금전과 지위를 얻고자 하는 욕망은 영적 높은

생활로부터 사람을 끌어 내리기 쉽다. 그 증거로서 부자가 전도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극히 작은 일이다. 그런고로

인도의 왕후들은 종종 둔세가가 되었다. 불타도 그런 사람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 즉 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요 그것을 적당히 쓰지 않는 때에 그 결과가 나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비록 저들의 생각이 그릇되었다 하더라도 그 진리를 얻고자하여 기왕의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출가한 용기를

존경하는 자이다. 그 한 예로『우쟌왕『빠-라토리하리시짠도라의 사적을 생각한다. 나는 그의 장려한 궁전을 보았다.

그리고 수마일 격한 곳에 그가 은둔하였던 지하굴을 보았다. 이 두 곳의 현저한 대조를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영혼의

만족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을 생각하였다. 王子의 생활도 좋기는 좋았으나 그러나 그 가운데 있어서는 거룩한 영적

갈망을 채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고행하는 인도 행차들에게 늘 전도한다. 그 그릇된 관념에 붙들려 생을 값없는 고생으로 보내는 것을 볼 때 불쌍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나는 한사람의 인도『사두-』를 만나 그에게 말하였다.『그대는 제 몸을 괴롭게 하는『사두-』다.

나는 봉사전도하는『사두-』다.  나는 괴롬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절로 제 몸을 괴롭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세상 중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세상에 대한 그 태도와 가진 생각을 말하였다. 『나는 한번 히말라야의 한 동리를 지나다가

진애와 비료를 쌓아 놓은 큰 두엄무더기를 보았다. 거기서 나는 악취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며칠 후에 또 그 곳을

지났다. 그런데 아름다운 향기가 악취를 덮어 버렸으므로 놀라서 자세히 본즉 아름다운 작은 꽃들이 일면에 피어서 향기를

발하고 있다. 태양에서 오는 열과 빛이 꽃에 아름다운 빛과 향기를 준 것이다. 장소는 더럽다. 그러나 티끌 그 자신의

거름으로 말미아마 변화된 것이다. 그 같이 우리도 오예와 홍진 세상에서 살아 갈지라도 우리 마음을 의의 태양을 향하여

열면 그로부터 영적 빛과 향기를 받아 이 세상이 비료와 같이 우리의 생활을 돕는다.』생각하였다. 이것은 신이 자기의

필요로 지은 것이 아니요, 천사나 사단을 위함도 아니요, 그렇다고 금수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이것을 버릴 것인가.』

 

그는 이같이 세상의 사물을 대할 때 거기 속박되지 않고 감사와 찬미로써 영의 자양이 될 진리를 섭취한다. 누가 묻기를

『귀하의 생애는 양육할 가족이라든지 사업이라든지 얽매일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 쉬우나

다른 사람들은 부양할 가족과 일이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매,『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 심히 곤난한 일이다. 나의 곤난도 크다. 비록 그 정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사는 이상

곤난 없는 자는 없다. 그러나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다음 세상에 들어가 그 장애가 제거 될 때는 그

순간에 크고 높은 곳에 달하는 힘을 얻을수 있다. 옛 사람들은 경주를 연습하는데 무거운 쇠줄을 맨 채로 달렸다. 그래서

자유로 달릴 수 없고 힘들기는 하나 경주하는 날 그 줄을 풀어 버리면 몸이 경쾌하게 되어 평시보다 속히 달릴 수 있다.

그들은 부자유중에서 힘을 양성한 까닭이다.』

 

봉사는 신의를 받드는 생활이다. 인간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데 있다. 불교류의 자아 완성만을

목적하는 은둔생활은 신의의 한 쪽만을 알고 다른 쪽을 모르는 생활이다. 신이 부여한 모든 본능은 이것을 사용치

아니하면 위축하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일면 타인을 완성하는 동시에 다른 면으로는 자아를 완성하는 도리가 된다.

「사두-」는 그 일생을 더 의미 있게 최선의 힘을 다햐여 봉사에 바치려 했다.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불완전과

신의에 배치하는 모든 현상은 우리의 봉사를 재촉하는 것이다.

 

4. 기도와 묵상

 

크리스챤의 생애는 연속된 기도의 생애라고 오리켄은 말하였거니와「사두-」의 생애는 기도 중의 생애다.「사두-」는

기도의 의의를 기원이나 요구에 두지않고 신과 의에 둔다.「귀하의 기도에는 얼마만큼이 교통이 되고 얼마큼만이

기원이 되느냐」고 묻는 말에 아래와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회심후 2-3년간은 특별한 데 대하여 기도하였으나 지금은 주님만을 구한다.  마치 과실이 많은 나무에 대하여,

처음은 둘이나 셋을 그 주인에게 구하였으나 그 나무를 가지면 과실은 자연 다 가지는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하나님이

그의 것이 되면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 모두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저는 그대의 아버지요 모든 것은 그의 것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항상 거지와 같이 다니면서 몇 개씩 빌어먹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구하지 말고

은사를 주시는 생명의 주를 구하라. 그 때는 생명이나 기타 필요한 것이 다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기도는 무엇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신과의 교통이다. 우리가 한 고상한 친구를 얻으면 얼마나 우리의 생애가 변할

것인가. 그렇다면 만물을 초월하시고 선하신 유일의 신과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변케 할것인가 생각하여 보라.」

  

이같이「사두-」의 기도는 기원에 의하여 신의 뜻을 움직인다는 것보다 신과의 교통에서 우리 자아가 변화하여 가는 것을

말한다. 마치 달걀이 큰 닭의 품 안에서 온기를 얻음으로 인하여 큰 닭과 같은 병아리가 되는 것 같이, 우리도 기도 중에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의의 태양을 향할 때 우리 마음의 사악과 더러움이 소멸되어 신과 같이 거룩하여 가는 것을 말한다.

기도는 예기 이상의 큰 은혜를 얻는 것을 말하였다.

 

「기도는 자아의 영적 건강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멀리는 더 큰 보배를 발견한다. 어떤날 한 사람이 배가 고파서 한

집을  찾아 와서 한 조각 빵을 구하였다. 그때 주인은 그를 환영하여 식자가 준비될 동안 그를 향하여 복음의 도리를

전하였다. 객은 반 시간 동안에 회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는 한 조각의 빵을 구하다가 영혼의 구원을 얻었다.」   

 

또 대기도(중보기도)에 대하여,「나는 2-3백의 하나님의 아이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의 명부록을 마음에 가지고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은 충분한 대기도를 할 수 없지만 히말라야에 있을 때는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八년간 나는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것은 공연한 일 같이 보이지만 八년만에 그는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기도는 드디어

응답이 되었다.」

 

이 전에「사두-」는 대기도 하는 일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다.「우리 자신이 완전하기 전에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도움이

되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그러나 그는 많은 영감을 주는 자연의 질서에서 이 의문을 풀게 되었다.「나는 바닷물에서

증발하는 아지랑이가 구름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 바닷물로 된 구름에서 떨어지는 비를 손에 받아 맛보니 조금도 염분이

없고 신선하고 또 순수하였다. 해가 비칠 때 염분은 뒤에 떨어지고 증기만 높이 올라 간다. 그와 같이 의의 태양이 위에

비치고,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하늘에 오를 때 모든 악한 것을 뒤에 두고 순진한 사상의 구름은 이같은 형상을 쓰고 은혜의

비가 되어 땅 위에 나린다.」

 

기도의 필요에 대하여,「나는 한번 강가에 앉았다가 고기가 입을 벌리고 수면에 올라 와 있는 것을 보고 작은 고기를 먹고자

하는 줄 생각하였다. 후에 들으니 이것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라 한다. 신자도 이같이 일상 활동 중에서라도 신과의

밀접한 교통을 하기 위하여 사물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 일하는 사이라도 신과의 교통을 계속할 수 있다」.  

 

「사두-」는 이같이 평범한 사물 중에서라도 가장 절실한 진리를 취하여 그의 사상의 양식을 삼는다. 그에게는 삼라만상이

모두 진리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무진장한 비유가 나온다. 내가 기선을 탔을 때 유명한 학자가 나에게 물었다.

『유성이나 화성에 음신을 통한다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귀하는 흥미를 가지지 않느냐?』 나는 대답하되,『그것은 재미 있는

것이 사실이나 몇 억마일 저쪽에 있는 화성보다 그 별을 지은 조물주와 당신의 거리는 호흡보다 가깝습니다.

당신은 기도로써 그에게 통신을 보낸 일이 있습니까?』

 

기도는 하고 싶으나 겨를이 없다는 의견에 대하여,『기도는 아침밥보다 필요하다. 아침밥이 없이 견디기 어려운 것 보다도

기도가 없이 어떻게 지낼 수 있느냐. 만약 한 번 기도의 습관을 붙이면 어떻게든지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도록 필요를 느끼게

된다. 기도는 호흡과 같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결코 호흡할 시간이 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집회 때에는 다과나 오찬의 초대를 사절하고 그 시간을 기도로 보낸다. 그는 별로 신문을 안본다.『나는 인도의

자치라 하는데 대하여 큰 흥미가 없다. 나의 영원한 집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한 일도 있다.』

 

그는 기도에 종일을 보내는 때도 있고 혹은 밤새는 때도 있는데 보통은 아침 두 시간을 기도한다. 영국에 있을 때는 대개

五시부터 七시까지 기도로 보내었다. 경우에 따라 묵상이나 기도시간이 없어질 때는 하룻동안 어떤 불만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될 수 있는 대로 먼저 성경 한 장을 다 읽으면서, 특히 의미 깊은 절에 기호를 표하였다가 다시 그

절에 와서 무엇을 얻기 까지 생각을 집중한다.  이같이 十五분 혹은 그 이상 힘써 성신의 계시를 얻는다. 그에게는 기도의

일정한 형식이 없다. 앉거나 꿇고, 혹 어떤 때는 걸으면서도 기도한다. 처음은『씨쿠』족의 방식에 의하여 몸을 땅에 엎드려

기도하였으나 지금은 중지하였다.

 

기도에 말을 쓰느냐고 묻는데 대하여,『아니, 기도의 말은 말 없는 말이다. 신이 우리의 영에 말할 때는 직접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서로 말할 때, 말하기 전에 그 뜻이 벌써 알려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신은 고요한 때 그 영에게

말한다. 신의 사상은 말 없이 직접 우리 마음에 들어오고, 때로는 말로는 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일순간에 이 일로

인하여 깨닫는 것을 다른 법으로서 二十년을 허비하여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 기도에는 말을 쓰지 않지만

공회에는 필요상 말을 쓰게 된다.』

 

그는 고요한 가운데 고요히 신을 대망하는 것을 강조한다.『신은 정숙히 계신다. 그러므로 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정숙지 않으면 안 된다. 떠들고 소란한 마음 가운데는 신이 침묵하신다. 만약 우리들이 그의 축복을 받고자 하면

그리스도의 발 아래 엎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임한다. 오순절 전에 사도들은 열흘 동안

기다렸다. 성신으로 큰 은혜를 받고자 할 때는 큰 준비가 필요하다. 철학자들은 고요할 때 더 잘 사고가 되는 것을 발견

하였다. 하물며 더 깊은 영에 있어서는 더 한층 필요한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정숙한 때를 게으른

때라고 생각한다.』

 

귀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마음에 생각하며 기도하느냐? 고 묻는 말에 대하여,『나는 처음은 항상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늘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의 모습은 종종 나의 마음에 떠 온다. 바로 입신 중에서 항상 보는 그리스도의 영체 같은

것이다. 회심할 때와 같은 모양은 육안으로나 영안으로나 보지 못하나 어떤 때는 사이를 두고 비상히 강하게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낀다. 만약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이 되면 될수록 그 임재를 느끼는 것이 많게 된다. 우리가 더운 나라에 있을

때 찬바람이 불면 우리는 대단히 상쾌함을 느낀다. 그와같이 활동 중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현재는 나를 이같이

신선케 한다.』

 

그는 기도의 형식에는 불찬성이다. 형식적 혹은 기계화하지 않도록 주의한다.『기도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는 마음이요

책이 아니다. 한 사람이 죽게 되어 신부를 청하였다. 그는 기도책을 넣지 않고 왔다. 그래서 그 책을 가지러 간 동안에 그

사람은 벌써 죽었다. 그 때 거기 있는 사람들이 말하되『기도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모양이다』

하고 비웃었다.

 

기도, 묵상의 방법에 대하여,『예를 들어 말한다면 성경 요한복음 일장을 읽고 그 중 감격한 구절에 표를 하였다가 후에

속뜻을 알고자 힘쓴다. 이것이 큰 도움이 된다. 처음 믿은 후 나의 경험은 신약에서 하나, 혹은 그 이상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구절을 택하여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였다. 이같은 방법은 종이 한 곳에 확대경의 초점을 보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우리들이 영적 사물 위에 사상을 모으고 의의 태양에 마음을 향할 때 태양의 빛과 열은 인생의 모든 진애를

태우고 신의 의지에 불합당한 것을 없애버린다.』

 

나는 개심한 신자에 대하여 어떤 말에서 인도되었느냐고 물어 보니, 혹자는『무릇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十一 28) 는 구절이라 하고, 혹자는 바울의 말에서라 한다. 그런고로 사람을 따라 감응되는

구절이 다름으로 전장을 읽고 그 중에서 감응된 절을 빼어 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같은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 아니므로 남의 방법에 얽메이지 말고 각자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에 의하면 좋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그

약이 다른 것 같이 성질에 따라 그 받는 바가 다른 것이다.

 

4.  전심 전력을 다하라

 

『우리는 기도에 충분한 시간을 사용하지 아니함으로 힘을 잃는다. 한 시간 이상 기도 시간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다. 이른

아침이 가장 좋은 때다. 처음에 우리들은 주의 축복을 감하고 후에는 다만 축복 뿐 아니라 어떻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과학자는 어떤 과학적 발견에 여러 해를 사용한다. 하물며 영적 은혜의 묘경을 발견함에 아침 五분간만으로 어찌

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十분간, 三十분간 기도에 벌써 피곤하여 버린다. 이같이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영원을 보내는

때는 어떻게 할것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신과 같이 있는 습관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신을 위하여 하려면 신과 함께 있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런데 기도로라야 이것이 가능하게 된다.

바이올린에는 여러 가지 줄이 있으나 조화 있는 음을 내려면 줄을 모두 조여야 된다. 사람의 마음의 사상도 이와 같다.

이것을 모두 그리스도에 죄여 맬 때 기도의 활이 놀랄만한 음을 내게 한다. 우리가 만약 이 새로운 생활과 광명을 아직

얻지 못하였다면 힘써야 될 것이요 만일 이것을 얻었으면 신의 영광을 위하여 쓰게 하라. 만일 이것을 쓰지 아니하면

잃어 버린다. 동물학자의 말과 같이 타조는 처음엔  날개를 가지고 나왔으나 쓰지 아니하는 중에 퇴화하여 버렸다.』

 

「사두-」는 자기 희생이 없으면 기도도 가치가 적은 것이라고 한다. 마치 소금이 그 형체를 녹여 잃어 버릴 때 맛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5. 설교

 

「선다-」와 친한「파-커」부인은 설교자로서의 그를 칭찬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사두- 썬다싱」는 좋은 설교자다.

그는 수사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는 솔직하고 똑똑하고 감동있게 말한다. 경건하고 성실하게 말한다. 그가 말하는

목적에 대하여 한 사람도 의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그의 연설에는 중단이 없고 그 표현에는 흐린 것이 없다. 그는 신에게 

받은 사명이 없으면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명료하고 알기 쉬운 소리는 멀리 있는 청중의 귀에 까지 들리고, 청중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그의 설교에 얼마나 강동하고 있는가는 듣는 사람들이 깊이 침묵하고 긴장과

주의로써 보고 있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두 손길을 합하고 그 사이에 인도말 성경을 들고 선 그의 고요하고,

겸손하고, 숭고한 태도는 그 강연의 열정적인 말과 힘에 대하여 좋은 대조다. 부주의하는 군중이 사방을 보거나 염중을 내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의 설교는 계시에 의하여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암시하였다."

 

「나는 설교를 기초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도 중에서 본문과 제목 인증까지 얻는다. 설교자는 신으로부터 전할 음신을

받아야 한다. 만약 그들이 서책에서 받는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복음이 아니요 타인의 복음이다. 그들은 남의 위에 앉아 깐

후에 제것이라 하는 자다.」

 

그는 공회의 설교 전에는 오래 기도하고 묵상한 후 그 집회를 위하여 특별히 택한 성구와 재료를 가지고 나선다.

설교의 내용은 그 청중의 성질과 요구에 응하여 나아간다.「청중의 영적 요구에 대하여 무엇인가 나에게 본능적으로

알려지는 바가 있다. 마치 개가 학자보다 냄새를 더 잘 맡는 것같이」.

만약 그다지 사상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여간 잘 준비한 설교가 아니면 사람의 주의를 끌기 어려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하여,「다만 신의 택함을 입은 자라야 설교자로서 이 봉사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아무리 지식이

없더라도 신은 사명을 주신다.」

 

한 소제부가 일찍 신자가 되어 그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그는 주 안에서 평안을 얻고 구원되어 그 증거를 세우게

되었다. 사람들이「저 사람의 마음에는 우리에게 없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왜 사람들은 저런 소제인부에게 감심하여 경청하는가」물었다. 그때 소제부는 대답하되,「주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 사람들은 옷을 가지고 와서 길에 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발 아래 펴지 않고 나귀 발아래 폈다.

무슨 까닭이냐. 왕의 왕이신 주께서 나귀 위에 타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가 내리신 뒤는 아무도 나귀를 돌아 보지 않았다.

그 나귀가 왕의 왕을 태우고 있는 동안은 존귀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임재하시고 성신이 그의 입을 열 때 비록 무식한 사람을 통하여서라도 신은 큰 일을 하신다.

신학생의 훈련에 대하여 무슨 주의를 줄 일이 없느냐고 물으니,『더 실제의 전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강사 자신이

생도와 함께 2-3개월 동안은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6. 전도와 섭리

 

사람은 약한 자아를 믿고 살아 갈 때는 늘 실패하기 쉽고 낙심하기 쉽다. 그러나 신앙하는 사람은 쳐다 보는 생활을 하는

자다. 자기를 보지 않고 만능의 주를 믿고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 『너는 강하고

담대하며 두려워 말고 떨지 말라. 네가 가는 곳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 강하고 담대하란 말은

너를 보지 말고 나를 보라는 말이요 믿으라는 말이다.

 

사두-는 이에 대하여 절실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었다.『만약 우리들이 자기 자신을 그에게 바친다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활동할 수 있다. 나를 그의 손에 위탁하면 그는 우리를 쓰신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그는 큰일을 하신다. 우리는

전도하다가 간흑 사람들이 무관심하여 조금도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때 낙심하기 쉽다. 나도 간혹 낙심하였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이 전도하면 성신이 그들의 마음에 활동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약하다고 낙심치 말라. 태양도 혹점이 있으나 그 때문에 빛을 끊지 아니한다.』

 

우리는 주의 빛을 받아 빛을 낸다. 그는 우리의 결점을 씻어 버리고 완전케 하시리라. 우리의 의무는 빛이 되는 것이다.

반딧불은 작은 벌레다. 그러나 반짝이는 작은 빛으로 행객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인간 자신은 영적 지각이 없어 알지

못하나 주께서는 우리가 믿기 전부터 우리 배후에서 우리를 섭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래와 같은 예증을 들어 이야기

하였다.『

 

나는 한 청년을 만나『군은 구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느냐?』하였다. 그는『구주는 내가 그를 위하여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될 무엇을 하였느냐?』하였다. 나는 『그는 군을 위하여 피를 흘리고 그 생명까지 내어주지 않았느냐』하니, 그는

『아니, 그것은 다만 나만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냐. 내가 그를 위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될만한

무슨 특별한 일을 나에게 하였느나?』고 하면서 믿지 않았다. 몇달 후 그는 중한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다.

 

그때 그는 한 환상을 보았다 그의 방안은 그의 일생동안 지낸 여러 가지 사실을 그린 그림으로 덮였다. 그 중 하나는 그가 아이

때 二층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바로 땅에 떨어지려할 때 어떤 사람이 손에 받아서 가만히 땅에 놓았다. 그 손에는

못자국이 있었다.  또 하나는 그가 바위에서 미끄러 떨어져 거의 죽게 되는 그림이었다 그 때는 죽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급히 와서 그를 받았다. 그 손에는 못자국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그가 한 독사를 밟았는데 그 독사가 몰려 할 때 또

한 사람이 나타나 구원하였다. 그 손에는 못자국이 있었다.』

 

그는 이같은 환상을 본 후 주가 그의 곁에 나타나서,『내가 이 모든 일을 너를 위하여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너는 언제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너는 지금 죽게 되었다. 만약 네가 이대로 죽으면 영원히 지옥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너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살린다. 이제 내가 너에게 한 이 큰 일을 모든 사람에게

선전하라.』

 

이로부터 이상하게 병이 전쾌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내가 다시 그를 만날 때 그는 심히 비통한 어조로

말하였다.『내가 미련하기 때문에 주는 나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여 준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그러한 죽음에서

면하게 될 때마다 나의 부모나, 아니면 나는 운이 좋았거나, 혹은 우연히 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주의 보호에 의하여 구원된 줄 알았다.』

 

7. 금전결혼

 

그는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아니한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사람들이 권하여 억지로 가지게 한 일이 있었으나 곧 회사하여

버리고 한푼 없이 다닌다.『나는 호주머니를 믿지 않고 신께 의지하기를 즐겨한다. 코트는 구멍도 뚫어질 것이요 도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신께 신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우리는 그의 안에 내가 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있는 줄 안다.

만일 내가 부자가 되어 그 소유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제한이 있다. 그러나 만약 주 신이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인 이상

전 세계는 나의 것이다.』

 

그는 종교의 사역자는 마음과 영을 위하여 사는 자요 보수의 금전을 바라고 살 것이 아니라 하였다.『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다. 삯군 같이 삯전을 목적할 것이 아니요, 영적 사랑으로서 하여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인 까닭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월급를 받으면서 임무적으로 일하고 있느냐?

어떤 자는 일을 하지 않고 급료만 받고 있다. 그들의 종말은 멸망이다.』

 

결혼에 대하여. 어느날 저녁 집회에서 돌아 온『사두-』에게 향하여 아래와 같이 물었다. "선생은 언제 결혼할 터입니까?"

"나는 벌써 결혼하였습니다."  "무엇! 결혼 하였다고요?"  "예! 나는 벌써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때 말하기를   

"내가 입신 중에 맛보는 그 신비하고 오묘하고 즐거움은 도저히 인간 세상의 즐거움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진심생활에 장애될까 하여 결혼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이,『선다-』는 그 전심을 바치는

『사두-』적 생활 중에 있는 자기의 결혼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결혼한 종교가도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가 된다고 하여, 사역에 의심을 품은 어떤 결혼 종교가에게 단언 하였다. 이같이 결혼생활과 종교생활은 모순되는

듯이 생각하기 쉬운 인도교회에 『사두-』는 건전한 태도로 지도하였다

 

8. 성서와 자연의 서

 

『선다-』는 자연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그 중에 씌어 있는 진리를 맛 봤다. 거기는 한 없는 비유와 지혜의 보고가 숨겨 있다.

서나 그림이 마음의 상징인 것 같이 우주에 충만한 모든 만상은 다 창조신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모든 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 내고 궁창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인다』고 한 것 같이 그 중에 나타나 있는 신의 영광과 교훈과 사랑을 느낄 

때 『사두-』는 한없는 기쁨과 찬미에 취하여 들어간다.

 

『스트리-다』박사는『성자와 천재는 사람들이 왜 명확한 사물을 보지 못하는가를 의심한다. 그 같이『사두-』는 항상

위안과 영감을 발견하는 자연의 서를 부단히 읽는 사람이 극히 적은 것을 탄식한다. 그는『자연의 서』를 읽는

결과로 교훈의 대부분이 비유에 충만하고 있다.』

 

사두-는『자연의 서』를 읽는 법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다른 서적을 읽을 때는 애써 그 가운데 써 있는 말을

알지 못하면 안된다. 그러나 『자연의 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순하고 누구라도 알기 쉬운 말로 씌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라. 그 때 『자연의 서』는 군에게 대하여 명료하게 될 것이다』

 

동서 고금을 물론하고 성자와 철인은 다 자연을 즐겼다. 꽃과 풀빛은 도를 나타내는 글이요 새소리 벌레소리는 모두

마음을 전하는 비결이라. 마음이 밝고 가슴이 맑은 사람은 만물을 대할 때 깨닫는 바가 있다. 채근담의 격언이나,

'고요히 만물을 보니 자득함이 있어 사시의 가홍이 사람과 같다'는 정명도의 시는 다 자연 속에 씌어 있는 진리를

음미한 표현이다. 다만『사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라 하였다. 그러면 그 중에서 완전한 의의와 참 기쁨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

 

마음이 긴장한 후 피로를 고칠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을 때,『자연의 서를 몇 페이지를 읽으면 된다.』고 대답하였다.   

영국해협을 건너 파리로 갈 때 그는 또『자연의 서』를 읽을 새 기회를 얻었다. 그는 갑판에 서서 푸른 바다를 취한 듯이

보더니 만면에 기쁨을 띠며, 성서와『자연의 서』를 비교하여』말하였다. 『성서와『자연의 서』는 모두 성신에 의하여

영의 말로 씌어 있다. 성신은 생명의 작자(作者)이다. 전 영계와 자연과 생명도 다 성신의 화현이므로 그 중에 씌어 있는

말은 영적 말이다. 거듭난 자는 성신이 그 안에 거하여 있는 고로, 성서의 구절이나 자연이나 다 모국어이므로 그에게는  

 심히 자연스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사와『자연의 서』의 다른 점은 여기 있다.『성서의 말하는 바는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곧은 길이다.

그러나『자연의 서』에서는 주의하여 문자와 문자를 연합하지 아니 하면 뜻을 알기 함든다. 귀하가『자연의 서』를 보는

것과 인도교인이『자연의 서』에서 배우는 것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인도교의 예언자 시인 폐타교의 찬가도

『자연의 서』의 페이지를 읽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 그들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에서 신을 잃었다.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는 자연에서 신을 찾아 낸다.

인도의 신비가는 신과 자연과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는 창조물을 지으신 조물주가 있는 것을 안다.』

고 대답하였다. 그는 산천 초목 금수동 자연의 만상뿐 아니라 인생과 세상에서 예를 취한다.

 

『사두-』는 성서를『영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했다. 그는 제 손으로 성경을 불놓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진리를

탐구하여 마지아니할 때『네게 평안을 주리라』는 구절을 보고 그의 마음은 눈을 떴다. 그가 회개하고 봉사의 생애에 들어

간 후 성서는 그에게 대하여 더 없는 생명이었다. 성경 한 권은 항상 그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성경 중 어디가 가장

으냐고 물으매,『성경은 사탕덩이 같다. 나는 성경의 어디를 맛보든지 달다.』

 

그가 말할 때는 대개 신약전서에서 인용하고 간혹 구약에서도 인용한다. 그 때는 대개 시편에서 나온다. 묵시록에서

특별한 흥미를 얻느냐고 할때,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요한복음은 그가 가장 많이 읽고 가장 많이 인증하는

성경이었다. 누가 왜 요한복음에서 많이 인증하느냐 물으니,『그것은 단순하고 가장 심각하므로, 또 이것은 사랑 받은

제자의 저서로 그리스도의 성격에 대한 놀랄만한 통찰력을 가진 까닭이다』고 대답하였다.

 

요한은 제자 중 가장 완전히 주를 이해한 사람이다. 그는 삼년 간 주와 함께 있으며 듣고 본 바에 의하여 권위 있게

증거하였다.『사두-』의 한가지 소원은 언제든지 그 자신의 방식으로, 예를 들면 요한전을 주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요한전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성경의 한 구절이 사람의 귀한 영혼에 양식이 된다는 사실을 아래의 사실로 증거하였다.『내가 중부지방을 여행하고 있을

때 이교도에게 전도한 일이 있다. 말을 마치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많이 알고자 성경을 읽고 싶은 사람은

없는가?』고물었다. 그 때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요한복음 한권을 들고 2-3절 읽더니 곧 찢어 버렸다. 그 곳은

철로의 가름길이었다

 

그런데 일년 후 나는 놀랄만한 말을 들었다. 이 사람이 요한복음을 찢어버린 그 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철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찢어진 복음서의 한 쪽을 얻어 읽어 보았다. 거기『영원의 생명』이란 구절이 씌어있었다. 인도인은 사후에

윤희환생설을 확실히 믿고 있다. 그러나 영원의 생명이란 것을 보고, 그는 감동되어 또 다른 한 쪽을 들어 보니

『생명의 양식』이란 문자가 있다.

 

그는 그 종이조각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며 이것은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그것은 예수책이다. 그대는 그런

것을 읽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대를 더럽힌다. 그런 것은 보지말아라』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약전서 한 책을 구하여 읽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 구주를 발견하였다. 그는 지금 중부지방에서 복음설교자로 활동하고 있다. 찢어진

요한복음이 참으로 생명양식의 한 조각인 것을 증거하였다. 그는 다만 지적 대상으로 성경을 본다든지 고등비평 같은

해석에 대하여는 이것을『영적감기』라 하며 배척한다. 그는 영감을 중심으로 하고 성경을 본다.

 

『내가 인도 어떤 친구의 집에 있을 때 한 종교서를 보다가 모르는 데가 있었다. 집 주인은 신학박사라 나에게 그것을

설명하여 주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그 후 책 지은 저자를 만나 그 참뜻의 설명을 들으니 박사의 가르치던 말과는

크게 다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성경해석에도 많은 오해가 불가불 있을 것을 알았다. 우리가 참뜻을 알고자 하면

저자를 찾아야 하겠다. 즉 우리는 성신의 계시함을 받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성신은 성경의 저자다. 그러나 히브리 말이나 헬라어가 다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마치 내 의복이 내 자신이

아닌 것 같이 말은 다만 인간의 말이다. 영감을 받은 것이 말이 아니요 속 뜻이다. 성서 저자가 소용한 말은 보통 생활에 쓰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전혀 정신상의 사실을 표현하기에는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말을 통하여 실제의 의미에

까지 도달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저자와의 교통에 있는 사람, 즉 성신과 함께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의 말한 것은 영이요 생명이다』말한 것은 그 의미를 가르친 것이요 글자는 아니다. 성신이 사람에게 말할 때에 인간의

말로 아니하고 마음의 말로 한다. 그것은 영계에서 쓰는 말 없는 말이다. 이것은 나의 입신 중에서 들은 말이다 .내가 입신

중에서 천사나 성도와 말할 때에는 이 세상의 말을 쓰지 않고 전혀 자연적으로 감전되는 그 영적 언어를 사용한다. 내가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입술도 놀리지 않는 중에 나간다. 이와 같은 말로서 성서의 저자들에게 진리가 감전 된다. 후에 그들은

그 받은 계시를 발표할만한 말을 발견하고자 애썼다. 혹시는 이것을 표현하기를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표현코자한 의미는 영감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충분히 의미를 표현하기 곤란한 것을 느끼고 고통

하였으나 필경은『없는 것 보다 아무 것이나 좋다. 우리의 사명은 다 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여 전력을 다하여 이것을 기록한

듯 하다.

 

그는 과거를 회고하며 성서에서 느낀 바를 아래 같이 말하였다.『나는 성경을 읽으면 언제든지 서늘한 바람이 더운 낮에

불어 오는 듯한 감을 얻었다. 나는 성경을 찢어 버렸지만 그 능력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 같이 감동되므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성경의 매력에 끌려 기독신자가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개 성경을 읽기 시작한

사람은  기독신자가 되었다.  읽지 말라고 이같이 반대하는 자도 그 성경의 힘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성서를 통하여 구주를 알았다. 성경은 구주를 나에게 소개하였다. 그가 묵시로 내 마음에 자기를 나타낼 때

나는 회심하여 땅 위에 있으면서도 하늘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복음의 목적은 다만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 출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썬다싱의 명상의 글  

101. 성령을 받는 일이 없이는 제아무리 전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랐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위대함과 신성은 이해할 수

없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3년 간을 생활했다.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파했으나 그리스도가 죽자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자 엄청난 힘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다. 지금 시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그의 능력과 신성을 경험하지 못한 신자가 많다. 이는 회개와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102. 교만하게 되면 절로 자기도 의식치 못하는 사이에 멸망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남보다 진보하였다

할지라도 다이아몬드가 석탄과 같은 원소로부터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값비싸다 해도 석탄과

같이 완전히 타버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들 서로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103. 우리가 절벽 위에서 밑을 볼 때는 현기증을 느끼지만 하늘을 쳐다볼 때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위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밑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발견하고

마음이 안온하지만 얼굴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릴 때는 실재로부터 떨어져 내려가 산산이 부서질 위험이 있다.

104. 참된 시간 즉 실재와의 관계에 있는 시간 그것은 영원이다. 세상의 시간은 참된 시간이 지나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모두가 현재이기 때문이다. 지혜에 있어서 무한하신 실재자 앞에는 과거나

미래가 함께 그 앞에 서있다. 그러나 우리 감각에 있어서 현재는 존재치 않고 그저 미래에서 과거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모든 순간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미래에서 과거로 옮아간다. (실재자는 변화를 모르나 피조물은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 


우리는 현재에 산다고 하나 사실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지나가는 정점인 현재는 우리에게 잡히지 않으므로 인식되지 않고

과거나 미래도 또한 우리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범위에 있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제에 있어서는

실재가 아니다. 우리가 잠에서 깨었을 때에 잠 속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으나 실제로는 오랜 시간을 지낸 것처럼

느껴지며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에도 슬픔과 고통 중에는 하루는 1년과 같이 여겨지며 기쁨 속에서는 1년은 하루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면 시간은 이처럼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재가 아니다. 실재에 있어서는 모든 경우가 참된 현실이다. 우리는

영원한 실재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시간에 대한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실재는 시간이나 거리가 아니고 상태의 변화일

뿐이다.

105. 시간은 공간에서 생긴 일이나 사물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이것을 공간 속에 내어놓을 때 생기는

상태의 변화가 시간을 만들어낸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것이 실재다. 변화가 끝났을 때 그것은 과거다. 변화가

일어나려고 할 때 그것은 미래다. 사물이 변화할 때에 시간도 또한 그것과 더불어 미래나 과거 속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실재는 그 자신에 있어서나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영원에 있어서도 변화하는 일이 없다. 시간은 변화하고 망각 속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 속에서 행한 일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 속에 흘러들어 간다.

106. 그리스도의 능력과 임재는 이 세상의 철학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참된 기독자의 생활과 경험에 의해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 신에 의해 만들어진 자며 그 자녀이지만 양쪽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쪽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며 이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으로서 그의 모습을

닮아 동화되고 생명과 영원의 축복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불신자는 무지한 까닭에 진리의 암영 속을 걸으며 자기의 의지가

요구하는 것만 좇아 참된 것으로부터 떨어져 방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을 끊고 산다.

107.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그 종교적 성정의 요구를 채우기까지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심이 깨이기

시작하면 아무리 진정하려고 하여도 그 평안을 얻으려는 강력한 욕구를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마음의 요구를 죽이며 내적인 소리를 침묵케 한 자는 어느 정도 평안한 듯 하나 그것은 죽은 평화이다. 평화를 구하는

영혼의 욕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만족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108. 선다싱은 예수를 알기 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어느 날 주 예수께서 일순간에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으며 불안한 영혼에 참된 평화를 주시어 많은 사람이 자기 몸을 괴롭게 하면서 까지 얻으려 하다가 실패한 그 평안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세상의 논리를 초월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혜이다. 인간이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여 고행으로 육체의 요구를 억제하려는 것은 그 마음은 가상하나 그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필요한

때는 은혜로 얻은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육신을 훈련시키는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다.

109. 인도의 영적 지도자인 ‘간디’ 조차도 고백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는 실패하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오직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실 뿐이기에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알 수 있는

분이다. 간디는 아직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러나 그를 구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자신이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그의 끊임없는 고민이라고 어느 날 고백하였다.

110. 어느 구도자는 동굴에 영원히 유폐하여 산다. 그는 말하기를 “제가 이렇게 사는 동기는 무엇을 얻고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제 모든 요구를 오히려 버리기 위해서 입니다. 즉 괴로움이든 평화이든 그 모든 것의

느낌과 요구의 멸절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이 종말이

올 줄 모르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제 부족함 곧 미완성의 부분은 재생할 때 전해져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요구와 감각의 기능을 가지고 출생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런 요구들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것을 없이하는 것이 신의 뜻이었다면 그는 그런 것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구를 죽이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자살이다. 하나님은 선의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괴로움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대신 평화를 얻기를 원하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화를 얻으려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화가 없는 상태로 우리 스스로가 처해진 상황일 뿐이다.

또 만약 요구를 버리려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요구를 죽이려는 자체가 벌써 하나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좋은 요구는

말살시키는 것보다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이 참으로 나에게 참된 기쁨을 주는 요구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111. 어느 기독교 단체에 속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그들 중에는 다름 사람보다 훨씬

큰 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보통 신자가 갈 수 없는 곳에 더욱 그러하다. 요한도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는 것을 보고 자기네들을 따르지 않기에 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라고 하셨다.

112. 세상에는 드러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비록 대중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을 하지

않으나 자신들끼리는 고백을 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게 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은밀히 해야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몸을 보면 각 기관들이 있어 서로 한 몸을 위해 각자가 맡은 일이 다르다. 크리스천은 모두 소금과 누룩이어서 소리 없이

다른 것에 맛을 내고 불게 만든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라 부르셨다. 어부는 그물을 던질 때에 소리나지

않게 해야 고기가 도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주님의 일을 위해 소리 없이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113. 두 설교자가 설교하러 시장에 나아갔다. 먼저 설교한 자는 현명하고 웅변도 좋았다. 그가 말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사람이 질문하였다. 설교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대로 대답하였으나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자연히 사람들은 옆의 다른

설교자에게 눈길을 돌려 그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다른 설교자가 일어서 대답을 하려하자 그 질문자가 막으며 정중한

경의를 표하며 군중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나는 이 분에게는 질문할 것이 없다. 그것은 내가 그의 생활을 알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을 보고 그를 통해 구원의 도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설교자에게서는 이러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입으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난 그

웅변가는 조용히 돌아가 회개하여 그 후 참되게 하나님을 믿고 전하는 자가 되었다.

114. 구하는 자는 찾아내며 찾아낸 자는 다시 그 이상을 구하는 법이다. 파스칼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를 찾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을 이미 찾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임재에 대한 지각을 이미 주셨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사람이 찾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계시지만 그를 붙잡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주의하여

하나님께 연결이 되어야 한다. 공중에 전파가 아무리 많이 날아다닐지라도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115. 우리는 주님을 왜 믿는가. 우리가 헤어날 수 없는 곤경에 빠져있을 때 우리를 그곳에서 건져주었기 때문인가 아니 이보다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주님은 참된 우리의 구주시며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가.

116.

117.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기 전에 새로운 피조물로 고쳐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죄에 더럽혀지고 타락한 낡은

인생은 그를 알 능력을 갖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그를 알기 전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성질이 우리의

것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그를 참된 하나님으로 알게된다.

118. 인간은 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했을 뿐 아니라 또한 죽은 것이다. 마치 공기를 보지 못하듯 그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죽은 자는 공기 속에 누워 있으면서도 호흡도 하지 않고 감각도 없듯이 죄로 죽은 자도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지 못하고 기도의 호흡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담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을 때 그는 생령이 되었으나

죄로 그 생명은 죽었기에 주님이 다시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셔야 할 필요가 생겼다.

119. 우리가 태양을 보려면 태양 자체에서 나온 빛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보는데도 그냥은 볼 수

없고 주님에게서 비쳐지는 영적 빛의 조명을 받아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보려면 영적인 시력이 열려야

한다. 부엉이와 박쥐가 눈은 있어도 낮에 비추이는 태양으로부터 도움을 얻지 않아 볼 수 없듯이 장님과 영의 눈먼 자도

보려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120.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 영적인 지식은 이 세상의 지식과 다르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과는 다르게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직관으로 더욱 환하게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상이나 지식은 때때로 어리석은 이야기가 되어 내적인 소리를 침묵케 하고

거기에 기교를 섞어 오히려 사람들을 어리석게 한다.

121.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만의 경험을 많이 해야한다. 또 참된 영적 지식은 오직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만

온다. 하나님은 마음의 은밀한 골방에서만 사람과 이야기하시며 우리는 거기서 조용하고 잔잔한 소리를 듣는다. 이런 때 그의

자녀에게는 숨기지 않고 계시하신다. 이 세상 지식은 귀납법에 의하여 얻을 수 있고 영적 지식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직관

(논리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에 의하여 얻는다.

122. 해는 그 빛과 열로 수목의 성장을 돕지만 만약 나무에 병이나 결함이 있으면 같은 빛과 열은 오히려 그 나무를 죽인다.

이것은 태양의 잘못이 아니고 나무 자체의 상태에 따른 것이다. 그처럼 사랑의 하나님이요 생명의 빛 되시는 주님도 인간의

영적 발달을 위해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인간 자신의 성질에 따라 생명 주는 빛을 변하게 하여 자신의 멸망을

초래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과 같게 만든 인간을 상하게 할 자는 인간 자신밖에 없다.

123. 하나님 없이 인간이 생활한다는 것은 벌써 그의 영적 지각과 감각이 둔해지도록 자신을 손상시켰다는 말이요 이 때부터

남도 손상시킨다. 내 영적 감각이 죽으면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124. 우리의 내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사물이나 장소는 이 세상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 욕구는 육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과 그 욕구를 만드신 자에게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재산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왕궁에 살지라도 행복이 없으며 그리스도인이 비록 빈곤과 곤란과 고뇌 속에서 가지는 것만큼의 행복과 평화를

가지지 못한다.

125. 물질의 특별한 용도는 우리의 영혼의 집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만큼 정당하게 쓰이는데 있다. 만약 그 용법에 적당한

용도를 넘어서면 영혼을 제 2의 위치에 놓고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된다.

126. 많은 사람들이 그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있으나 모두가 좋아서 지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어서 짊어지고

있는 것이며 이는 구레네 시몬이 진 것과 별로 다른 바가 없다. 이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127.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승천할 때는 자기 있는 곳에 모든 사람을 이끌 것이라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은 마치

자석과 같이 속에 끌리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들인다. 주님의 요구는 그가 있는 곳에 그를 섬기는 자도 있게

하는 것이다. 세상 전체가 골고다 주님의 좌우에 선 강도들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한 편은 주님을 시인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천국에 들어가지만 다른 편은 회개하지 않고 도움도 구하지 않아 멸망으로 간다. 이 강도들의

모습이 바로 세상의 양편으로 갈라진 사람들의 운명이다.

128. 물이 가득 있는 통 속에 컵이 담겨져 있고 그 컵 속에 또 물이 담겨있다면 물과 컵 중 어떤 편이 어떤 편 속에 있는 것인가.

이 관계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이다. 컵은 엎드려져도 자빠져도 통 속의 물 안에만 있다면 컵 속의 물은 쏟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 안에 살며 주님도 우리 안에 사신다. 또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129.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지만 은총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게 될 수 있다. 구원도 우리가 현재 온전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얻은 후 그 토대에 서서 드디어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육체,

무능력한 허약의 육체, 이미 죄에 의해 썩을 대로 썩은 육체 속에 유폐되어 있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체에는 매일

많은 먼지가 끼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일 목욕을 하면 그것은 우리를 손상치 못한다.

우리에게 부족함과 약점이 무수할지라도 생명의 생명이요 영의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

이를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해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완전을 위한 싹을 가지고

있으며 장차의 완전은 이 위에 근거를 가지기 때문이다. 자녀로서의 모습으로까지 우리를 끌어올리신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때에 이르러 우리를 더욱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130. 위험은 항상 창조자에게 받쳐야할 마음을 피조물에 두기 때문에 생긴다.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사물 속에서 창조주의

뜻을 찾고 그에 모두를 맡기고 신뢰할 때 평화가 오고 이를 어길 때 불안이 생긴다. 불안은 신과 무엇인가 어긋났다는 표시이고

평화는 신과 조화한다는 표시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치 물과 같아 인간이 그 물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또한 그 물

속에 빠져도 죽게 된다. 이처럼 은총으로 주어지는 물과 같이 삶의 주류로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이지만 이것들에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욱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은 오히려 독으로 변해 우리를 죽인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불안의 끝이 보이고 평화가 온다. 이 하나님은 예수의 삶으로 표현되었다 자기를

사랑하기보다는 남을 사랑하고 내어주며 희생을 기쁨으로 여기며 낮아지고 겸손하며... 그분의 생애는 이와 같았다. 그분은

이러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은 존경받고 사랑 받고 자기를 높이며 모든 것을 가짐으로

평화를 누리려 한다.

131. 우리가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보이는 세계 속에 살기에 그들을 필요로 할지라도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진정한 목적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 가운데 배가 있을지라도 그 목적은 물을 싣는데 있지 않고 배를

물 가운데 띄운 자의 의중에 있는 것과 같다. 어찌하여 인생은 보이는 것만 그 마음에 퍼담는지 어리석기 짝이 없다.

132.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위에 표현하셨다. 그리하여 산이 있고 바다 꽃과 나무 이름 모를 새 여러

생물 하늘 구름 인간 등 보이는 것과 이 모두를 보호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셨다.

그리고 생기를 넣어 그 모든 것이 실제 살아나도록 하셨다. 이중에 인간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고 지켜줄 수

있도록 더한 뛰어난 색채와 부드러움으로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돌보고 섬기는 자의 위치에서 빼앗고 누리는 자의 위치로

자신을 스스로 올려놓았고 모든 것의 혀가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때 그의 혀는 침묵의 혀가 되었다.

133.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나타난다 면 자신도 바울처럼 변하리라 생각하지 말라.

인간의 속을 아시는 분은 인간 자신도 아니고 그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단지 인간 개개인의 여러 조건에 알맞게 그의 상태와 필요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신다.

134. 때때로 우리의 염원과 요구의 밑바닥에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난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사는 자만이 이 소리를 용이하게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의 종의 생애를 통해

세상에 빛나듯 성령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그릇으로 성화된 생명을 쓰시듯 인간의 영혼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두뇌처럼

아주 미묘한 기계를 쓴다.

135. 그리스도의 종은 달처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그것을 간접적으로 세상에 비춰준다. 또 달은 때로 세상과 태양

사이에 와서 일식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이처럼 주의 종이면서 옳은 삶을 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빛을

가리는 원인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 하는 자는 개인적으로 그 빛을 인식하고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다.

136. 어느 추운 겨울 날 한 장님이 점자로 된 성경을 읽으려 손을 움직였으나 손가락 끝이 얼어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화로 있는 데로 가서 손을 녹인 후에야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느끼고 알기 전에 이미 죽은 우리의 내적

감각이 새로운 생명으로 각성될 필요가 있다. 기도와 명상 중에 하나님의 불인 성령께서 우리의 얼어붙은 내적 감각을 따뜻이

한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듣고 볼 수 있다.

13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지식이나 말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지식이나 말은 외부적인 것이나 영의

말씀은 내부를 여는 것으로 이는 마치 어린이들이 쉽게 모국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다. 영적인 사람은 진리를

말이나 지식의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소경이고 귀머거리며 벙어리인 헬렌켈러는 인간은 인간의 지식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 전에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어디서 온

것인가?

138. 이 세상에는 밤이 불과 몇 시간 밖에 없는 곳과 몇 달 계속되는 곳이 있다. 그처럼 우리 생애에는 슬픈 때와 기쁜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필연코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생애에 있어서 십자가를 진 사람은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살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나무가 겨울에 잎사귀를 잃고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 잎이 피어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박해를 받고 자신을 낮출 때면 죽은 자처럼 보이나 그 후 몇 번이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고통 속에 있음에도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기워 있는 것이다.

139.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곤란 속에 허우적거려 쓰러지기를 수 없이 하여도 결코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통 속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 고통은 그대로인데도 불구하고 가냘픈 것처럼 보이는 기쁨이 솟아나며

그 엄청난 고통을 이기게 된다. 이는 고통이 끝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지난 다음에 기쁨이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도 아니다.

거기에는 이 세상의 이치로는 측량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이 세상의 기쁨과 같은 성질이라면 누가 그 기쁨을 흉내내보기도 하련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은 신비로워 세상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주신 짐은 그 외적인 모습이 너무나 엄청나고 혹독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참모습은 가벼우며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을 증거 하였다. 참된 평화가 오는 것은 그들의 어깨에 그리스도의 무거운

짐이 올려져 있을 때이지 그 짐이 벗겨졌을 때가 아니다. 세상은 이 놀랄만한 기적을 경험하지도 못하니 믿을 수도 없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술에 취해서 슬픔을 잊으려 하며 또 잠깐 사이의 흥분과 기쁨을 취하려 한다. 물론 그것도 기쁨임에는

틀림없으나 모든 사물을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 찾는 기쁨은 그보다 훨씬 우월하고 오래 계속되리라는 점에는 충분한 음미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기쁨을 한 번이라도 맛본다면 다시는 귀중한 시간을 피조물 가운데 있는 잠시동안의 기교적인 쾌락을

찾기 위해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140.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일한 한 신자가 병에 걸려 불구자가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그러한 상태에

있으면서 남을 돕던 자신이 오히려 남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어 있는 것과 더 이상 주님을 향하여 봉사할 수 없음을 슬프게

여기며 기도로 하루 하루를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자각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삶은 그가 건강할 때보다 더 많은 감화를

사람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는 불구의 몸으로 자리에서 감미로운 향기를 내뿜는 꽃처럼 누워있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의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맑고 아름다운 생의 환한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갔다.

이 조용한 감화력이 주위에 퍼져 많은 불신자들이 그의 삶 속에는 어떤 깊고 진한 진실이 있을 것이라 여겨 그에 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결과 그들도 점차 그의 신앙의 진실을 발견하고 감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설교와 철학적인 논증과

이론을 들었으나 그의 삶 속에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생애를 보고 배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감화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건강이 필요했다면 건강을 주었을 것이나 현재와 같은 정도의 영향은 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연약한

가운데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봉사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누워있는 자리는 슬픔과 절망의 자리가 아니고 많은 사람을

향하여 지고있는 십자가의 자리인 것이다.

141. 선다싱은 보통 시크족이라 불리 우는 집에 태어나 인도교의 가르침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를 신봉하는 산 모범이요 충실한 대표자였다. 어머니는 매일 일어나 목욕한 후 ‘바가밧트 기타’와 다른 인도

경전을 읽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그 순결한 생활과 교훈에 감동되었다. 아침에 행할 제 일의 의무는 먼저

영적인 양식과 축복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야 비로소 조반을 먹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마음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때로 이를 어길 때는 어머니는 사랑으로 또는 벌을 주면서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그 뒤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을 마음에

새겨 주었다. 그 시절에는 그가 아직 어려서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으나 그 뒤 깨닫게 되었다. 그가 그 일을 생각할 때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심어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품속은 가장 좋은

신학교였다.

후에 그의 어머니는 그를 한 인도 철학가와 시크족의 사두에게 맡기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그는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참된 평안을 얻지 못해 이에 대한 갈구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영혼이 허덕이며 구하는

진리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야 어찌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그는 한 밤중까지 경전을 읽을 때가 보통이었다. 영혼의

평화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는 그를 즐겁게 할만한 많은 것들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의 고민은 새롭고 이상한 것이다. 그 고통은 그가 좀더 성장하여 영적 생활에 대해 보다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으면 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충고를 그는 들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기를 어린이가 당장 빵이 없어 굶주리거나 물이 없어 고통 할 때 커서야 비로소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어린이에게 무슨 도움이 있을까 반문하였다. 그들은 또 이 같은 영적인 깊은 진리는 하루아침에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성급히 굴지 말라고 권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어린 그가 아는 작은 지식이 그만큼의 갈증과 욕구를

일으키는데 커서 그 지식을 알수록 점점 그의 갈증과 욕구는 더하게 만들 것이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고 영혼의

갈증과 굶주림을 해소할 영적인 물과 빵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사두는 그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경전을 통해서 이제껏 네가

지닌 것이 불완전한 유한의 지식 때문이며 계속 정진하여 완전한 지식을 얻는다면 그때 이 욕구라든가 염원이 단순한 미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네 자신이 신의 일부분이므로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무런 욕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만약 신이거나 신의 일부라면 그에게는 당연 어떠한 미망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미망이 있다면 그는 이미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신이 미망에 종속되고 미망이 신보다 강하여 미망이 실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는 인생의 심한 비애를 느끼고 어느 날 새벽 세시에 일어나 만약 하나님이(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님) 계시다면 자신에

나타나 구원의 길을 나타내 주기를 기도하고 이 응답이 없다면 날이 밝기 전에 철길에 나가 자살하려 하였다. 기도 중 그는

인도의 여러 신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였으나 그들 중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나의 빛이 실내에 비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문을 열고 그 빛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살펴보려 했으나 밖은 어디나 어두웠다. 안을 바라보니 빛은 더욱 밝아지며 아주

강하게 지상에 임하여 둥근 모양을 이루었으며 그 빛 가운데 나타난 것은 그가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였으며 그는 자신이 죽은 자로 알고 있던 분이었다. 그때의 그 모습은 그가 죽게 된다해도 그 영광과 사랑이 가득 찬

얼굴과 말씀하신 몇 마디의 말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는가 보라 나는 너를 위해 또 전 세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이다” 이 말씀은 영광처럼 그의 마음을

불태웠으며 그는 주님 앞에 쓰러졌다 그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였으며 전 생애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가족과 친족에 의해 죽음에 임박할 정도의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그 박해는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을 때에 가졌던 서글픈 불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42. 기독 신자가 아니면서 진리를 탐구하려고 하는 자들은 고행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견디고 있으나 실제 기독인들은 주를

위해 그들처럼 고난을 겪으려 하지 않고 그들의 사랑이 참된 것이 아니라고 비난하기만 한다 이 점에 있어 기독인들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143. 그리스도를 알고 또 그의 구주로 믿기 전에 주님은 마치 눈 속의 안약처럼 역사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몰랐다. 눈은

그 속에 있는 안약으로 밝아지게 되므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으나 그것을 볼 수는 없다. 그의 불안한 영혼은 그를 찾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가까이 계셨으나 그의 눈의 시야에는 숨어 계셨으며 그를 이끌어 오게끔 시도하셨다.

그는 마치 어린이가 뜰의 나무 그늘에 숨었을 때처럼 이 세상의 화원 속에 있었던 것이다. 어린 아이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으며 정원 가꾸는 사람이 달려와 과일을 주며 그를 달래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과일은 아랑 곳 없이 엄마를 찾아

울기만 했다. 드디어 어머니는 나무 사이로부터 나와 애를 들어 올려 입을 맞추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평안해진 어린애는 그가 요구하던 것을 찾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우주적인 어머니는 때때로 그 모습을 이 세상의 동산에서 숨기는 때가 있다. 이 어린 아이처럼 어머니의 사랑

외에 아무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자에게는 어머니도 그를 지켜보고 그를 안아주며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143.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을 때에는 희망이 없고 미래 생활에 대해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앞에

있으며 주님은 공포를 사랑으로 바꾸셨다. 공포는 잠깐이며 사랑은 영원하다. 신앙과 사랑은 영혼의 넝쿨이 되어 태양이신

하나님의 빛과 열을 받으면서 사랑의 주님께 매달려 하늘을 향하여 성장한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지 않을 때는 절망과 암흑

가운데 시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144. 주님은 양쪽 세계에 거하신다. 주님은 이전에 육의 세계에 계시면서 동시에 영계에 계셨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섰을 때에는 창조자의 음성으로 나사로여 나오라고 말하였으며 그의 친구의 영을 육체로부터도 아니고 영계로부터 불러내신

것이다. 따라서 이 명령을 듣자마자 영은 영계로부터 무덤에 또 육체에 돌아온 것이다.

145. 그는 배고픔과 추위로 지치고 고통스러울 때 오히려 그의 마음은 놀랄만한 평화와 기쁨으로 차 있으며 유혹을 이기고

한밤중이 되도록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는 가정을 가지고 안락하게 지낼 때 이 놀랄만한 평화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화를 찾아냈다. 그것은 세상이 주거나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46. 하나님의 약속이 채워지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약속을 등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에 결함이 있거나

주님이 그들을 위하여 더 좋은 일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147. 우리 속에 굶주림이나 갈증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물과 물이 있다는 증거다. 이 세상의 길고 긴

세월 속에서 단순히 상상만으로 주림과 갈증을 만족시켰다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직 영의 기갈을 창조하신 자 안에서만

영구히 누릴 수 있다.

148.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배의 형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교파가 생겨나고 있는데 그것들의 하나 하나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참다운 요구는 새로운 형식을 채용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수가 신자 속에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산맥 속에서는 물이 절로 길을 만들며 흘러가기에 운하를 만들 필요가 없지만 계곡을 흐르는 물이 평원에

이르면 사람들은 물이 흐르도록 운하를 판다. 이처럼 물이 여러 종족 사이를 흐를 때 여러 개의 운하를 만들 듯 여러 형태의

교회를 만든다. 그러나 때가 되면 교파는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149. 칭찬은 영적 진보를 방해하나 비평은 이런 위험이 없다. 참됨은 지나친 칭찬 속에도 또 지나친 욕설 속에도 없고 그

중간에 있다. 성자와 평범한 자와 다른 점은 성자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이는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자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다.

150. 만약 속의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 눈동자가 병들면 눈 속에 어두움이 생길 뿐 아니라 온 누리가

캄캄하여진다. 잠수부는 물 속에서는 호흡을 멈추고 죽어있는 상태가 된다. 또 숨을 쉬기 위해서는 공기 관을 통해 공기를

호흡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 또

기도의 관을 통해 성령을 호흡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으면 물을 벗어난 고기와 같고 물 속에 들어간 새와 같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사랑의 대양 속에 있게 되고 이 세상에 있지만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이다.

151.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보이지 않고 숨겨진 실재다. 외부에 나타나는 생명은 생명의 활동이며 그 한 부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생명의 본질을 이해 못하고 그저 물질에 귀착시켜 버린다. 생명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근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누구도 피조물은 참된 내적 생명을 자연적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다. 이유는 생명이 그 물체 자체의 부분적인

표현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진상은 물질계에서는 표현하기가 불충분하고 영계에서만 가능하다.

152. 우리는 동물을 알아도 외적으로만 알뿐이고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다. 짐승은 온도와 운동과 성장 그리고

생명의 외면 현상을 가지고 있으나 이는 외부에 나타난 표시에 불과하다. 그것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저 밖에서 보고만

있다.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우리의 필요와 수용에 따라 그 피조물의 정체를 알게 된다. 하나님을 앎으로 그

모양에 닮게 만들어진 우리 자신과 그 성질을 알게 된다.

153. 모든 만물을 하나님을 벗어나 자신에 고정시킬 때 이는 실재를 알게 되는 것을 방해한다. 신과 그를 경험하는 깊은 부분은

설명하기 참으로 곤란한 일이지만 그것을 즐기며 행위 속에 넣을 수는 있다. 명상과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면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이 세상에서도 하늘 나라의 큰 기쁨의 광맥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를 경험한 사람도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기에 세상은 이를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다.

154. 그는 하늘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바랐으나 육체는 병들어 영과 육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영은 가는 것을 요구하고 육체는 뒤로 끌어 다녔다. 그러나 영으로 육을 이겼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 속에 무슨 큰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처럼 그는 말로는 그 무엇을 설명할 수 없었으나 몸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알려줄 수 있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바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한 의미이다.

155. 곤충이 그들의 안테나를 가지고 주위의 것을 느끼며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구별하듯 영적인 사람은 그들의 내적인

감각을 가지고 판단한다. 영혼이 그 자신에게 돌아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으로

거꾸로 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많건 적건 간에 내적인 수용력이 있어 진리를 지각할 수 있으나 그들은 이것을 모르고 오히려

이를 어떤 특수한 사람들의 일로 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것은 논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직관을 필요로 한다. 알게

하는 이로 말미암아 그냥 터득하는 것이 직관이다.

156. 살고자 하는 의지는 생명을 완전한 상태로 촉진시키려는 하나의 충동이며 그 목적을 위해 합당한 상태로 만들어 간다.

그 의지를 통해 생명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 때 그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 이른다. 하나님 안에 있지

못한 자에게 생활은 무거운 짐이 된다.

157. 고생과 근심 때문에 피곤한 삶을 보내는 자가 ‘살려고 하는 의지’를 억제하여 자살할 수는 있다해도 그는 ‘믿으려고 하는

의지’로부터 놓여날 수는 없다. 그들은 영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것이라 믿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 우리는 우리가 확실하지 못하다는 것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인간의 불확실성을 고백한다. 내적

생활이나 사람의 인격은 너무도 확실한 것으로 이는 장소를 옮기거나 죽는다 해도 변하게 할 수 없다. 오직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음으로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으로만 변하게 할 수 있다.

방황하는 자들은 그들의 내적 요구를 창조자 가운데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삐뚤어진 방법으로 채운 결과 행복과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불쌍한 존재가 된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행복에 대한 수용량 까지 잃고 죽게된다. 만약 그가 범죄의 감각을 잃어

양심이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영적인 자살을 행한 자이다. 그는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죽였을 뿐 아니라 가능성을

가진 영혼마저 죽인다.

158. 참된 기쁨과 만족이 물질에 있다면 세상의 모든 부자는 행복하고 만족해하며 살았을 것이다. 또 불타와 마하비라 등의

귀족은 그들의 왕국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참되고 영원한 것은 우리가 새롭게 거듭날 때 마음 속에 모셔진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축복에 찬 생활의 비밀과 사실은 그 속에서 받고 살며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 누가 지식에 의해서만 이를 이해하려 한다면 죽기까지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이 나라이다. 한 과학자가 새를 붙잡아

그 속 어디에 생명이 있는 가를 알려고 새를 해부했으나 허사였다. 이처럼 내적인 것을 단순히 지식만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분석의 결과 있던 생명까지 꺼져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 해부 당한 새는 죽어버린 것이다.

159. 이 큰 세계에 비하여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그처럼 큰데도 작은 인간의 마음 하나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에서 눈을 돌려 언제까지나 성장해 가는 영혼과 그 수용량을 위해 무한하신

하나님께로 달려가야 평화를 얻는다. 물질적인 육체는 영혼과 영구히 함께 있을 수 없으며 어느 기간 동안 세상의 일을 위하여

영혼의 그릇으로 그 목적을 다한 후 육체는 그 연약함과 노쇠 때문에 쇠태 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는 영혼과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한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을 수는 없다해도 함께 있던 기간 동안 이룬 업적은 영원히 남는다. 이 일을 주의하여 육체로 거하는

동안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자유는 인간이 그 마음으로 선과 악 어느 것이든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에 악에 끌려가는 것은 그것의 노예가 됨을 뜻하고 결과 자유와 생명을 잃어버린다

죄를 버리고 진리를 추구할 때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맛본다.

160. 주안에서 죽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은 죽는 자의 주님이 아니고 산 자의 주님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 또한 주님의 일 가운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를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다.

161. 선한 생애와 악한 생애는 금강석과 석탄과 같은 상이점이 있다. 그들은 동질인 탄소로 되어있지만 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금강석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햇빛을 반사하지만 석탄은 햇빛 속에서도 칙칙하고 어두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같이 의의 태양은 선인이나 악인 어디든지 빛을 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반사하는 것이다.

162. 인간의 상태는 지구와 같다. 우리는 해가 저물어 우리로부터 사라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지구가 움직여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만약 지구가 태양에 의해 끌리지 않는다면 지구는 공간 속에 잃어졌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도 또한 그 사랑의 인력으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끌고 계신 것이다.

163. 몸 안에 있는 한 지체가 아플 때 전신이 그것을 고치려고 분주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는 신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의 죄와 상처를 고치고 영적 건강의 기쁨으로 우리를 충만케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받은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는 고난과 유혹으로부터 해방을 받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은 이 생명을 받음으로

이제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벗어난 것뿐이지 이전보다 더 많은 싸움과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전에는

그 고난이 고통으로 느껴졌으나 지금은 그것이 축복이요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 싸움은 우리의 숨은 능력과 상태의 진보와 완성을 위하여 필요하다. 주님은 이 거룩한 싸움에서 우리가 이기도록 도울

것이며 세상과 사탄과 죽음을 이김으로 그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사물의 큰 것은 작은 것의 연속이고 그

집합체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 되야 이미 그 작은 것의 승리 속에 큰 것에의 승리도 놓여있는 것이다.

164. 이 세상에서는 외적인 생활과 내적인 생활의 차이가 근소한 것 밖에 보이지 않으나 이에 답답해 하지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때 얼마 후에는 내외의 생활이 영구히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가 올 것이다. 외부는 바르게 내부에

응하며 내부는 바르게 외부에 적합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될 것이다.

165. 1921년 히말라야 산 중에 큰 산불이 일어났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와중에 물건을 꺼내기 바빴으나 몇몇 사람은 우두커니

서서 나무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리의 새가 아주 괴로워하며 둥지 위를 분주히 떠돌고 있었다 몇 초 후에 불은 더욱 번져

새 둥지에 옮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미 새는 그때까지도 날아가지 않고 오히려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덮고 있었다 한

순간이 지난 다음 불쌍한 새들은 불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사랑이었다.

사실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그의 사랑이 보이는 것이다. 그 어미 새의 사랑은 하나님께 있던 그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 놀라운 사랑을 하찮은 새에게까지 부어주셨다. 이 무한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게 하고 우리를 구원키 위해 우리의 죄 속에서 생명을 내어 죽게 한 것이다.

166. 어느 나이 어린 소녀가 불교 노승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했다. 그러나 노승은 그가 어리기 때문에 그 믿음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소녀는 이에 아랑 곳 없이 말하였다. “나는 나의 부모를 알기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도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내 밖에 살아 계시나 그리스도는 내 속에 살아 계십니다. 부모는

내 외적인 것을 기쁘게 하여주지만 그리스도는 내 속을 기쁘게 하여줍니다. 참된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노승은 그 어린 소녀로 24시간 동안 고난을 겪게 한 후 다시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 소녀는 마음 속으로 일어나는 참된 평화

속에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조금도 피로하거나 미움과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노승이 소녀에게

고백하였다. “너는 나의 선생이다 나는 늙었고 너는 13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너의 제자이다. 너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소녀는 설교는 할 수 없었으나 노승이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다.

167. 어느 추운 겨울 날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밤새도록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지샐 때 사단은 따스한 집과 그리운 가족

생각으로 그를 유혹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였으며 기도 중에 깨어 기도하라는 영음을 들은 후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평화와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동굴에서 나와 한 나무에서 약간의 잎새를 뜯어먹었다. 그 잎은 딱딱하고 맛도 없는

것이었으나 실제 느끼기에는 아주 맛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였다는 증거다. 그는 사단에게

그리스도는 항상 내 안에 계셔 나와 함께 하신다고 체험적으로 확신 있게 외쳤다.

168. 그는 가정에서 편한 환경 속에 있을 때는 결코 편안하지 못했으나 이제 주님을 알고 주님을 따라 고난 중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해 보임을 그의 아버지는 이상히 여겼다. 그것은 이전에 모르던 주님과 그 나라를 보고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알기를 원하면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알려하는 자는 기도를 해야한다. 많은 무신론자들과 이교도들도 성경을 읽으나 기도

없이 지식으로만 깨달으려 하기에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 진리(지식)은 필요하나 이 문을 여는 것은 기도이다. 잃어버린

우리의 구주를 찾는 것이 인생의 급선무이다. 그를 찾아 당신만이 지금과 과거와 미래에 나의 구주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한다.

169. 많은 사람들이 천부에게 이런 저런 일을 구한다.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건만 우리는 그와 달리 기도하여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한다. 또 우리는 혓바닥을 통해서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만 실제 우리의 마음과 행한 일은 그 반대를 기고하고 있던 것이 우리의 마음의 깊숙한

본질이었다고 마음의 위장을 증거 한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금방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입장이시다.

170. 어떤 이가 죽으면서 말을 남겼다. ‘내 일생은 외적으로 보면 고난과 괴로움의 연속이었으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감사한다. 긴 세월 동안 고난 속에서도 나는 놀랄만한 행복을 지속해왔다. 이 기쁨은 왕이 그의 화려한 궁전

속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아주 쇠약해 보였으나 그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고 그 눈에는 하늘 나라가

비치어 나왔다. ‘아마 잠시 후면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죽은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참된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을...’

171. 날 때부터 앞 못보는 장님이 추운 겨울 날 양지에 앉았다. 그는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을 받고는 그 열은 자신의 상상의

결과 몸 속에서 열이 순환하기에 생기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동안 그 따스함의 정체에 대해 알려

주어도 그는 태양을 본 적이 없어 불덩이가 허공 중에 걸려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신자들이 맛보는 기쁨과 희열은 마치

이와 같아 그것을 겪은 자 외에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경이로움을 알 자가 없다.

172. 어느 사람이 문둥병자를 위문하였다 ‘참 안되었습니다.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사뭇 아픕니다’ 그런데

그 문둥병자의 대답이 이러했다. ‘당신이 내게 대해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신 마음이 선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하지만 세상은 신비로워 저와 같이 몹쓸 병을 얻은 자가 반드시 괴로움 속에서만 일생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놀랄만한 평화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문둥병이 오히려 내게 친근하고 삶의 기쁨이 이 속에 있다면

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만약 내가 건강해 있다면 나는 살인을 했거나 도둑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문둥병으로

인해 영혼의 문둥병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이 육체의 병이 낫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는 내 영적인 문둥병이 고침을 받아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이 다른 모든 고통과 슬픔을 오히려 감사로 바꾸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저를 위로하러 오지만 저보다 더 큰 즐거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173. 이전에 사막을 여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피곤하고 갈증을 느끼다 서편 먼 곳에 호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척

기뻐했다. 그는 희망을 걸고 그곳을 향해 장시간 걸었으나 그는 호수를 찾을 수 없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신기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실제 아무 것도 없었는데 태양 빛의 반사에 의해 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영혼도 만족을 위해

세상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다닌다. 그러나 신기루와 같이 보이는 샘물이 있어 사력을 다해 그것을 움켜쥐어 보면 그것에는

영혼의 갈증을 풀어 줄만한 참된 샘물은 아니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이곳 어디에도 그의 갈증을 풀어줄 한 방울의 물도 얻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갈증으로 죽으려 하였을 때

그의 영안이 열려 생명수가 샘을 이루며 주님의 옆구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제 이 세상이라는 사막을 지날

때 이 물을 마시고는 결코 목마르지 않는 자가 되었다. 이 주님과 함께 있다면 감옥도 지옥도 그 어느 고통스러운 곳도 우울한

곳도 다 하늘로 변하여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174. 벙어리가 과자의 단 맛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구원을 받은 자라도 그 입으로 주님이 계시다는 존귀한 사실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 이 천적평화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말이 아니고 하늘의 말뿐이다. 바다 물이 아무리 짜다해도 그

속에 사는 고기의 살맛까지 짜지는 않는다. 이는 그에게 생명이 있는 것 때문이다. 만일 그 고기가 짠맛이 난다면 그것은 죽어

짠기가 배어있음에 틀림없다. 세상은 죄와 악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살아있다면 영혼이 그 가운데 빠져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한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아도 세상 것이 아니고 이 세상과 하늘나라에서 어느 곳이든지

우리는 늘 주님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175. 그리스도 신자가 이 존귀한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성경과 두뇌 속에서만 살아있고 그 마음 속에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 마음을 주님께 받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은 왕의 왕인 주님의

보좌이다. 하늘의 주부는 주님이 통치하시는 마음인 것이다 그의 사랑을 얻으면 세상을 향한 사랑이 쫒겨난다.

176. 그가 히말라야의 한 고산에서 길을 잃어 방황할 때 적의를 가진 사람들이 그에게 고의로 위험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방황하다가 강을 만났을 때 밤은 오고 사방에 맹수는 들끓어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그때에 강 건너에 한 사람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고 있다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구해 줄테니 걱정 마시오’ 그 사람은 아무 두려움도 없이 강을 건너와

그를 등에 업어 날랐다. 강을 다 건너 그가 감사하려 하니 그는 그곳에 없었고 모닥불도 흔적조차 없었다. 아아! 이는

주님이시다. 그는 어제도 오늘도 변함 없는 사랑으로 그를 지키고 계셨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변하는 것이다.

177. 주님의 십자가에서 사람들은 죄의 용서만을 바라보고 이를 구원이라 여긴다. 죄가 용서된 후에도 우리는 자신의 죄에

의해서 죽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죄가 용서된 후에도 그들의 죄 가운데 죽어간다 구원은 단순히 죄의 용서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용서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빌어 죄를 씻는 것만이 구원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의 피를 믿노라 하면서 자꾸 죄를 범한다면 그 죄 가운데 죽게 될 것이다.

범한 죄의 사함 받음이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된 성질이 고침을 받는 것이 주께서 주시려는 구원인 것이다. 이를 위해

성령이 오셨다.

하나님은 우리 죄의 용서라는 한 사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의 참된 본질 여하에 따라서 이에 맞는 삶을 하늘에서

보내도록 하신다. 죄의 성질이 고쳐지지 않은 상태는 저곳에서도 변하여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형성된 영혼의 아름다움의

상태에 따라 그 영혼의 본질 그대로의 삶이 위에서도 계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바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곳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의미이다.

178.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번뇌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크다. 그것이 죄의 결과라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며 준비된 내적 평화를 주실 계기를 마련하신다. 고통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적 생활과

진보와의 사이에 본질적이며 필수적인 요소이다. 참된 신자라면 그 길을 반드시 가야한다는 뜻이다. 고통과 번뇌가 피조물

누구에게든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없애버렸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정도가 지나치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자가 세상에 없다. 지금의 고통이라 보이는 것이 먼 후일의 참된 축복의 전조였던

것을 유한한 인간은 미리 계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알의 종자가 성장하여 햇빛을 받고 아름답게 자라기 전에 한 참을

어두운 곳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 정해진 시기에 싹을 나게 하고 열매를 맺는다.

179. 하늘나라는 미래의 나라가 아니며 이 지상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하나의 죄라도 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다. 작은 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마치 작은 세균이 병을 일으켜 덩치큰 사람을 죽게 하는 것과 같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균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고 있듯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죄 때문에 화를 입고 있다.

우리가 평화를 경험하는 것은 죄 가운데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때이다. 만일 그러하지 못하고 늘 긴장과 불안 속에

산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내 편에 영혼의 고장난 부분이 있다는 경고이다. 구원의 증거는 과자를 먹으면 단 맛을 느끼듯 내적인

신비로운 평화를 지니며 산다는 것이다. 열대에 사는 사람들이 겨울에 내리는 눈을 알지 못하여 눈이나 얼음에 상하여 동상에

걸린다는 사실을 모르듯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죄가 고통의 근원이라 생각지 못한다.

180. 전도를 위하여 여러 마을을 돌 때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은 신비하게도 고통이라기보다 기쁨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지옥

속에 있지 않고 천국 속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의문을 남길 수 없는 명백한 방법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기 전에는 모든 것이 고통이었고 지옥의 느낌 속에 살았으나 회개한 후부터는 고통은 여전히 역사

하였으나 그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지상의 천국 속에 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181. 1914년 7월 7일 험한 여행으로 지치고 극도의 굶주림과 강풍 속에 언덕길을 오를 때 무서운 돌풍이 불어 그를 언덕 밑의

한 동굴 속으로 처박아 넣었다. 그는 그 높은 곳으로부터 떨어졌는데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 동굴은 하나님의 애무로

변하였다 그곳에 상처 따위가 있을 수 없는 낙원이었다. 돌풍은 사랑의 큰 여울이 되었고 폭우는 은혜의 비로 변하였으며

기갈은 만족으로 피곤은 평화로 변하였다. 또 십자가를 진 예수의 여러 모습이 환상으로 그 앞에 나타났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는 모습과 굶주리고 목말라 하시는 모습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이 씌워져 피를

흘리시는 모습 그리고 그런 고난에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골고다 길에서 넘어지시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오! 이에 비하면

자신의 십자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은 오히려 감춘 만나였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는 그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십자가는 고통이 가득 찬 곳에서 평화의 물결 속으로 인도해 가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자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182. 그는 투옥되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그의 그리스도는 그를 감옥 속으로부터 해방하지 않지만 죄와 사탄으로부터 놓여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라도 또 감옥 속에서도 자유로웠다. 비록 그의 발에 족쇠가 걸리었다해도 그는 자유였다.

183. 한 수렵가가 사냥을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나무에 꿀 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총을 밑에 두고 올라가 꿀을 핥기

시작했다. 꿀의 단 맛 때문에 그곳에 위험이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호랑이가 다가왔다. 이제야 그는

자기가 위험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조금 있으면 호랑이가 가버리겠지 하며 또 호랑이가 덤비면 옆의 강으로 뛰어내리면

되겠지 생각하며 계속 꿀을 핥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강에는 악어가 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궁지에 빠진 것을

인식할 때 구원의 길이라고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위험은 곧 닥쳐왔다. 내려다보니 들짐승들이 나무 뿌리를

갉아먹어 이윽고 그 나무는 옆으로 쓰러졌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입장이다.

184.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행위가 생명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으로 우리는 저

세상에서도 살게 된다. 착한 생명은 천국에서 악한 생명은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게 된다. 인도교에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만사가 잘된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우리가 먼저 착한 사람이 되어야 착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착한 일을 할 수 있다.

185. 자연을 넓게 보면 자연의 몸짓거리와 그의 얼굴이 보이고 그의 소리가 들리고 그의 기쁨과 신음을 느끼고 그가 하나의

커다란 몸체를 가진 진정한 모습인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 인생을 너무 작게 보기에 밤낮으로 되풀이되는 세계 속에 답답함과

지루함이 인간을 아주 작게 만든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너무도 크게 만들었다.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면 그는 하나의 거대한

형체이고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자연과 육체 속에 한없이 작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고 자연보다 넓고 큰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너무 작은 세계에서 산다 마음을 열면 큰 세계가 보인다. 자연과 세상의 사건은 비록 그 몸체가 커다랗게

보일지라도 어린 아이와 같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 영적 힘으로 자신들을 돌보아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186. 어느 날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에게 그는 저항 없이 온 몸을 맡기자 그는 오히려 그에게 감화되어 그를 돕는 자로

변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는 의미이다.

187. 어떤 날 기도와 명상 가운데 그리스도가 임재한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의 마음은 하늘에 오를 듯한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 찬 세상에도 큰 기쁨이 숨겨진 무진장한 광맥을 보았다.

188. 주님이 이제까지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주님의 계시를 받을만한 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을 그가 모르고 있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 영으로 인간의 마음에 찾아오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보인 외적인 나타남보다 더 근본적이다.

189. 이제 주님을 만난 자는 보트를 타고 홍수로 휘몰아치는 물결 위를 떠가는 것과 같다. 이런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잃지

않는다면 누가 빼앗을 수 없다. 보라!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190. 만약 사람이 자신을 안다면 하나님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주의나 이론, 학문이나 지식은 내적인 소리와 감각을 말살시키며

기교적인 딴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참된 지식은 기도와 명상에 의한다. 이 세상의 지식은 교수에 의하여 얻어지며 영적인

지식은 하나님의 빛에 의하여 직관으로 얻어진다. 영적 지식과 내적 감각과 영혼의 힘은 죄로 인해 죽어버렸다. 빛은 이를 다시

살려준다.

191. 어느 한 소경이 점자로 성경을 읽으려 하였으나 추위 때문에 손가락이 얼어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 옆에 가서

손을 녹인 후에야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도와 명상에 의하여 의의 태양의 빛과 성령의 불이 마음에 힘을 주고 눈을 뜨게

하여야 비로소 우리는 하늘 나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192. 중생을 한 후에 성령은 이 세상의 말로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아도 직접적으로 영적 생명의 숨은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하신다. 영에 의하여 거듭날 때에 영적인 말이 우리의 모국어가 되고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말을 자연히 배우는

것처럼 주님의 생각과 뜻을 힘들이지 않고 배우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말은 그저 외적인 뜻을 전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의 사람은 그런 말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이 영적인 말은 육체의 귀에 들리지 않고 마음의 귀에 들리는 것이다.

해를 그 자체의 빛에 의하여서만 볼 수 있듯이 의의 태양도 오직 그 자체의 빛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적인

시각을 필요로 한다. 이는 소경은 보아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아는 것은 참된 뜻에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미 그 속에 죄가 깊고 타락하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로 인해 공기처럼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죽은 사람이 그 주위에 충만한 공기를 느끼지 못하고 호흡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93. 죄로 죽은 자는 하나님을 모르고 기도의 호흡도 기쁘게 여기지 않으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으나 생령이 죄에 의해 죽었기에 주님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사람에게

불어넣는 것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원의 생명이다.

194. 하나님을 찾기 위해 제 자신과 모든 욕망을 버리는 자는 하나님을 찾고 요구하는 것도 얻지만 자기를 버리지 않는 자는

스스로 영적 자살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하게 하는 자는 탕자와 같이 제 자신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이 남까지도 해치게 되나 이것도 모른다. 이 같은 연유로 살아있다는 것은 남을 위해 선과 자비를 베푸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195. 인간의 영혼은 육체보다 훨씬 뛰어나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데 기계 역할을 하는 두뇌를 통하여 스스로 일할 수 있다.

이처럼 중생한 영혼이 주의 뜻을 따라 남에게 봉사하려 할 때 성령은 그들의 생명을 통하여 역사하며 자신을 나타내신다.

196. 의의 태양도 인격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달이 태양으로부터 빌어온 빛의 반사로 어둠을 비추는 것이지만

어떤 때에는 태양과 지구와의 사이에 있어 어둠을 끼치는 것처럼 주의 종들도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있다.

197.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바다 속에 잠입하여 잠시동안 숨을 멈추고 있지만 맑은 공기와 연결되어 있는 관을 통하여 물 위의

공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이 세상 가운데 있어도 세상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성령을 호흡함으로 영원한 세상을 지금 살 수 있다.

198. 눈에 보이는 푸른 나무 잎들을 보라 이는 하나님의 계시의 책장들이다 강, 개울, 샘, 산과 들, 과일, 꽃 등은 완고한 마음도

녹이며 그들의 귀도 열리게 한다. 피조물 전체는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인 피조물도 웃음과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긴 혀가 주어진 인간은 묶긴 채로 침묵만 계속하고 있다.

이 존귀한 자연의 책이 그 저자를 그(선다싱)에게 소개한지 25년이 되지만 그동안 그는 언제나 자신의 구주는 이 책 속에

소개된 그분과 꼭 같다는 것을 누구에게 배우지는 않았으나 영적인 감각으로 알고 있었다. 자연은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말할 줄 모르고 표현하지도 못하지만 이로 인해 조금도 그 진리는 감추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을 주는데

영향을 방해받지 않았다. 그것은 이 자연의 영적 언어들이 주님의 말씀같이 영이요 생명인 까닭이다.

199.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려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독사가 가까이 와도 도망할 수 없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드디어 그것에 물려 죽었다. 그리스도인도 생명은 있으나 자신을 구원하는데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로부터

도망할 수 있도록 풍부한 생명을 주셨다. 이 생명의 공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200.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에 죽은 사람의 마음을 살린다. 이 세상에서 영원의 생명을 가지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소망은 없다. 주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천국의 영생과 같은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참신자의 마음을 낙원으로

만든다. 우리의 이런 마음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된다.

<출처: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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