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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 선교의 아버지

작성자靑野|작성시간10.10.09|조회수827 목록 댓글 0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1761년 8월 17일-1834년 6월 9일

영국태생의 침례교선교사이다. 인도에서 활동했다.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는 개신교에서 근대 해외 선교의 아버지로 널리 인정되는 사람이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things for God !!!)

 

평범한 그러나 꾸준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암 캐리는 위대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 라고 불린다.

그는 세계 복음화에 대한 강한 도전과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선교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었다.

그는 40년의 선교 사역중 수 없이 많은 난관에 부딪쳤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나는 꾸준히 걸어 나갔을 뿐입니다.

나는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품은 선교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제외하고는 그는 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캐리는 1761년 영국 노스햄프톤(northamp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직조공으로이었다.

캐리의 가정도 수수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16세에 구둣방의 도제로 들어가 28세가 될 때까지 계속 했다. 그는 10대에 회심했는데 비국교인 침례교에 들어가 열심히 활동했으며 여가 시간은 성경을 공부하고 평신도 목회에 주력하였다.

그는 점점 신자라면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결국에는 1783년 10월 5일, 23세의 나이에 침례교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음으로써 목사안수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1781년 20회 생일을 맞기 직전에 캐리는 주인의 처제와 결혼하였다. 아내 도로시(Dorothy)는 그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글을 읽거나 쓸 수 없었다.

처음부터 약간 삐끗했던 결혼은 캐리의 학식이 넓어져 감에 따라 날이 갈수록 그 간격이 벌어지기만 했다.

신혼 초 그들의 결혼 생활은 빈곤과 비참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한동안 캐리는 아내와 자식들뿐 아니라 전 주인의 미망인과 4명의 아이들까지 부양해야만 했다.

 

목회자에서 선교사로 경제적으로 쪼들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공부와 목회를 계속해 나갔다.

1785년에는 조그만 침례교회의 목사직을 맡았는데 나중에 레스터(Leicester) 에 있는 큰 교회에 부임해 갈 때까지 그곳에서 봉사하였다.

목회하는 동안 선교의 비전이 구체화 되었는데, 특히 쿡 선장의 항해기 (Captain Cook's Voyages)가 큰 자극이 되었다.

캐리는 또한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도 읽었고, 이어 미국 인디언들 가운데 존 엘리엇과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작품도 자세히 탐독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큰 세계지도를 만들어 몰튼의 자신의 집 벽에 걸어두고 입수 가능한 대로 각국의 최근의 종교, 정치에 대한 통계자료들을 적어 두었다.

이렇게 그는 선교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개발해 나가기 시작했고, 곧 해외선교는 교회가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로서 캐리의 생각은 과히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18세기 영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지상명령은 오로지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다고 믿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또 이들은 당시 해외 세계의 회심은 식민지 사업과 관계가 없는 한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웨슬레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 자신이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결합해서 이 문제에 대처해 나갔다.

어떤 목사들의 모임에서 캐리가 해외선교에 대한 그의 원대한 계획을 펼쳐 보이자 그 중 한 사람이 "젊은이,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하신다면 자네나 우리의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걸세"라고 했다.

 

그러나 캐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792년 봄 그는 87페이지짜리 책을 발간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봄"(An Enquire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이라는 책에서 그는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아주 설득력 설명했다.

이 책을 펴낸 후 노팅검(Nottingham)에서 개최된 침례교 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 54 : 2-3을 설교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그 다음날 감동을 받은 목사들이 새로운 선교회를 만들기로 합의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였다. 캐리의 계획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했던 앤드류 풀러가 선교회의 초대 총무가 되었다.

비록 오랫동안 캐리가 선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아내조차도 반대를 하자 의기소침해졌다.

프랑스가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까지 한 마당에, 어린아이들과 5개월이나 걸리는 위험한 항해를 하겠다는데 도로시가 반대를 한 것은 당연했다.

도로시는 필사적으로 선교사로서 떠나는 것을 반대하였다.

캐리는 아내의 반대로 좌절을 느끼긴 했지만 혼자서라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며 여덟살난 아들 펠릭스(Felix)의 표까지 예약해 놓았다.

선교회를 구성하기에 수 개월 간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1793년 3월 캐리와 토마스는 선교회의 환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행은 영국의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갑자기 중단되었다.

토마스가 돈 관리를 잘못해 재정상태가 악화되었으며, 여행허가증을 얻는데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출발이 지연되자 선교사들은 초조해하였지만 뜻밖에도 좋은 소식이 있었다.

3주전에 해산한 도로시가, 만약 누이동생 키티를 동행시켜 준다면 같이 가겠다고 한 것이다.

마침내 1793년 6월 13일 인도로 향하는 덴마크 배에 올랐고 마침내 11월 19일 인도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침내 인도에 이르러

그 당시 인도는 선교사역을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실권을 가지고 있던 동인도회사가 선교사역에 대한 심한 적대감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혹시 선교사역때문에 상업적 이익에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였다.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캐리는 가족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그곳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도로시와 큰아이들 2명이 심한 병에 걸리게 되어 캐리는 이들을 간호하는데 정신을 쏟아야 했다.

이상적으로 멋있게 선교를 해보려 했던 그의 꿈은 시들어 갔다.

후에 캐리는 450km 정도 북쪽에 있는 말다로 가서 한 농장의 지배인 자리를 얻었다.말다에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캐리는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말을 배우고 전도할 수도 있어 좋아하였지만 다른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로시의 건강과 정신병은 깊어지기만 하였다. 그러던 중 1794년 총명한 눈을 가졌던 5살 짜리 피터가 죽게 되자 슬픔으로 그녀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녀는 정신병에서 끝내 회복되지 못하였다.

아내가 동역자 아닌 "제일의 방해자"가 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가정적으로 어려움도 많았고 농장 일도 바빴지만 캐리는 자신이 왜 인도에 왔는지 그 이유를 결코 잊어버리진 않았다.

그는 날마다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설교도 하고 학교도 세웠다.

 

1795년에 드디어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날이 갈수록 벵갈 원주민들이 교회에 많이 나오게 되자 캐리는 자신있게 "이제 이근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열매가 없었다. 벵갈에서 7년 가까이 땀을 흘렸지만 단 한 명의 인도인 개종자도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선교사가 도착하자 동인도회사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캘커타 가까이 있는 덴마크령 세람포(Serampore)로 옮겼다.

세람포는 곧 인도에서의 침례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캐리는 남은 생애 3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캐리와 그의 동역자인 죠수아 마쉬맨, 윌리암 워드는 세람포의 3인(Serampo Trio)이라고 불린다.

선교기지는 10명의 선교사와 9명의 아이들을 수용하였는데 마치 가정집과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사도행전에 나온 초대교회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였다.

능력에 따라 일을 분담하였으므로 선교사역은 원만하게 진행되어 갔다.

 

세람포의 삼인

세람포에서의 선교사역의 큰 성공은 캐리의 높은 인격이 첫째로 작용한 결과였다.

물질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선교의 임무 수행을 위해 모든 것들을 희생하는 그의 태도가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감싸주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

선교비를 유용하여 피해를 끼친 토마스에 대해서도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린 아무런 문제없이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세람포는 성공적인 선교팀의 모범이었으며 그 결과가 이를 대변해 주었다.

학교가 설립되고 큰 인쇄시설이 설립된데다가 번역사업이 꾸준히 진행 되었다.

세람포에서 캐리는 3개 언어(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디어)로 성경을 완역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언어로 성경이 완역되는 것을 도와주었고 다른 많은 언어와 방언들로 신약성경과 쪽복음을 번역하였다.

계속해서 힌두어, 마하라스티아어, 오리아어, 텔링가어 등 인도 방언들과 보탄어, 버마어, 중국어, 말레이어 등 총 44여개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아쉬운 것은 양보다 질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다시 번역작업을 하였다.

전도사업도 세람포의 중요한 사역이었다.

세람포에 선교회가 세워진 지 1년도 채 안되어 첫 번째 개종자가 생겨 모두를 기뻐했다.

계속 개종자가 생겨났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인도에 침례교 선교를 시작한지 25년이 지난 1818년 무렵에는 약 600명의 침례받은 사람들과 수천 명의 교인이 예배에 참석하였다.

번역과 복음사역에도 바빴지만 항상 캐리는 더 할 일이 없는가 찾았다.

그의 큰 업적중의 하나는 교회 지도자들과 복음 전파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1819년 세람포 대학(Serampore College)을 세운 것이었다.

이 학교는 37명의 인도인 학생으로 개교하였는데 그중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교육 부분에서 이룬 또 하나의 업적은 세속 교육에 있었다.

그는 세람포에 온 직후 캘커타에 있는 포트 윌리알 대학의 동양어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결과적으로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선교사업비를 충당하였으며 동인도회사에 대해서도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면서 자신의 언어 실력도 향상되었다.

1807년 51세의 나이로 도로시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세람포에 요양와 있던 데마크 왕족 출신의 살로테 루머(Charlotte Rumohr)와 친분을 맺고 있었다.

원래 불신자였던 그녀는 회심하여 1803년에 캐리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후 그녀는 시간과 재산을 선교사역에 아낌없이 바쳤다.

1808년 캐리는 살로테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평온했던 선교팀 내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지만 결혼은 성사되었다.

살로테와의 13년 결혼 생활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난생 처음 캐리는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언어에 탁월하여 번역사업에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이전에 받아보지 못한 깊은 사랑을 주었다.

휴식없는 캐의 사역중 가장 큰 불행은 1812년 화재로 귀중한 원고가 소실된 것이다.

다국어 사전, 문법책과 완역한 성경등이 타버렸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내어 그 일을 계속해 나갔다. 세람포에서의 처음 15년은 좋은 팀웍으로 일했다.

그러나 새로운 선교사들이 많아지고, 선교회도 변화를 겪으면서 불협화음이 생겨났다.

 

신선교사들은 독립적인 생활과 사역을 희망하였고, 선교본부는 사역에 직접 간섭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인해 잠시 캐리는 선교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단절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는 곧 심각한 재정적인 문제를 초래했다.

결국 캐리는 선교회의 요구를 수용함으로 관계를 회복하고, 의료사역도 재개하였다.

캐리는 1834년에 세상을 떠나 세람포에 잠들었다.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적 업적, 교육적인 공로, 목회사역뿐 아니라 과부의 화형이나 유아살해 같은 인도의 나쁜 관습을 폐지하고 좋은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는데 까지 미쳤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도 국외적으로도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가 창설되어 오늘날 선교의 기틀이 되게 한 중요한 업적이 있다.

 

<자료: 성경벌레들>

 

 

 

윌리엄 케리의 불굴의 믿음

 

 

성경: 고후4: 7- 9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제화공이었던 윌리엄 케리 (Willia Carey 1761~1834)는 인도 선교의 꿈을 가지고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공부한 후 영국 침례교로부터 파송을 받아 인도로 갔습니다. 그는 인도어를 공부하여 영인사전을 편찬하고 인도어로 성경을 번역한 후 출판하기 위해 영국에서 인쇄기를 도입하고 기술자들을 불러 조판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케리가 지방 순회전도를 나간 사이 불이 나서 인쇄기와 원고가 몽땅 불에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케리는 낙망하지 않고 잿더미 위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믿음과 인내와 용기를 구했습니다. 드디어 1801년 뱅골어 성경을 비롯하여 24종의 인도 방언으로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실패와 성공은 그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믿는 자의 위대함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들을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큰 기도를 한 사람 '윌리엄 케리'

 

 

'윌리엄 케리'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꿈과 소망 없이 살아가던 윌리엄 케리는

예수님을 믿고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 가게 자기 자리 앞에다

세계 지도와 세 가지 표어를 적은 종이를 붙여놓고는

자신의 인생을 하루하루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 큰 비전을 가지라 ( Great Vision )
- 큰 기도를 하라 ( Great Pray  )
- 큰 기대를 걸라 ( Great Expect)

 

남의 구두 수선 가게에서 수선이나 하는 사람이

꿈을 품어봤자 수선 가게 하나 정도 차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윌리엄 케리의 꿈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세계 지도를 품에 넣고

그 당시 아무도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후원자도 없었습니다.

아내까지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도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선교의 아버지,

선교의 원조 '윌리엄 케리'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인도선교와 윌리엄 케리

1. 구두 수선공이 위대한 Vision의 선교사로

1761년 햇볕이 따사로운 8월의 어느날
영국의 노스햄프턴셔의 작은 마을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렸습니다.
'응 애!!' 그것은 윌리암 캐리가 하나님 나라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울음소리였습니다.

캐리는 어려서 꽃과 나무와 새 그리고 곤충을 벗하며 자라난
전형적인 촌사람 아니 촌놈이었습니다.
그의 주특기는 나무타기였습니다.

그는 공부에 대한 욕구도 강했습니다.
당시 문맹률이 매우 높던 시절, 그는 끈질긴 도전정신으로 글을 깨우쳤습니다.
더 나아가 외국어인 라틴어와 헬라어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 후 캐리는 아버지의 압력으로 구두수선공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두 발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구두수선은 유망직종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평생 신발만 어루만지다 죽을 팔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의 팔자를 고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779년 캐리가 19살 때 한 기도모임에서
히브리서 13장 13절 말씀을 심령으로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는 이 한 말씀을 통해 그동안의 세상과 타협하여 살던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능욕을 받고자하는 분명한 결단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는 전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후 그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 성경공부에 전념하 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구두공장 공장장에서 예수님의 선전부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당시 영국은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가 이끄는
영적 부흥운동이 전 영국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세계선교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비레인 교회에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던 캐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캐리가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 라는 책을 읽고있을 때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인생을 바꾸어 놓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쿡선장은 미지의 세계를 항해하며 태평양의 알려지지 않은 섬들과
원주민들의 원시적인 삶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놓았습니다.
문명의혜택을 못받아 옷도 없이 코난과 포비처럼 살아가는 부족,
사람을 맛있게 먹는 풍습을 지닌 부족등...
그리고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명예도 유익도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책을 읽고 있던 청년 캐리의 가슴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맥박은 힘차게 고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냐인의 끈질긴 외침을 들었습니다.
그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내가 여기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결단했습니다.

그때부터 캐리는 세계지도에 이미 알려진 나라의 인구,종교등을 표시하며
선교지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도는 그의 기도목록이었습니다.
그는 세계지도를 꼭 껴안고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교회는 캘빈주의의 영향으로 선교운동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선교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사명으로 국한시켰습니다.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 된 캐리는 교회안의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야겠다고 방향 잡았습니다.

어느날 목사들의 모임에서 캐리는 해외선교에 대한
그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러자 한 원로목사가 일어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그만 열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걸세.'
이것은 그의 선교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캐리안에 불붙은 세계선교에 대한 vision과
성령의 불은 더욱 크게 타올랐습니다.
캐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유언적 명령이
곧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1792년 봄 그는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챤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책을 통해 세계선교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할 의무임을 역설하였습니다.

이책은 루터의 95조항과 함께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세계선교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후 캐리는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서 54:2,3

 

'네 장막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것임니라'

말씀을 전하며, 간절한 기도가운데
여러목사들에게 하나님의 비젼을 심었습니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things for God !!!'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통해
위대한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실 때인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시도하라했습니다.
그의 비젼이 넘치는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목사들이
당장에 그 다음날로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7년동안 아무도 그를 이해하거나 도와주지 않고 배척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으로
현실에 절망치 않고 끈질기게 도전하였을 때
18세기의 타락한 영국을 구원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하였습니다.



Ⅱ.위대한 시도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러자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 였습니다.
아버지는 캐리의 말을 듣고 딱 한마디 했습니다. '미친 녀석'.

둘째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의 아내도 촌사람 곧 촌녀 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공주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는 아기자기한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엉엉엉'.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때,
갈대와 같은 남자의 마음은 얼마나 흔들리기가 쉽습니까?

그러나 캐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이제 돌이킬 수가 없소.'
캐리는 사랑하는 가족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캐리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그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힌두과부들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함께 불에 타야했고,
갠지스 강가에 Gunga mai kai jai (갠지스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또, 당시 인도는 동인도회사의 점령 아래 있었고,
선교를 절대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캐리는 추방을 면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말라리아가 창궐한 곳이었습니다.

아내 도로시와 큰 아이 2명은 이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습니다.

캐리는 멋지게 선교를 하려던 이상적인 꿈이,
산산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때, 나의 모든 근심을 내어맡길수 있었습니다.
내가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에게 이 고귀한 사명이 맡겨진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습니다.'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결코 본국의 선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취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캐리는 충분한 선교비를 벌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어 정복에 온힘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1년후부터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캐리는 성경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벵갈에서 7년간 땀흘렸지만 단 한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습니다.
큰 아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인도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르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했습니다.
그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세람포르 역사가 흥왕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심동역에 있었습니다.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들은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불리웠는데,
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교제로 힘을 얻으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대형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하여 완역한 성경원고와
두권의 문법책,다국어 사전들이 소실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캐리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총사는 팀웍을 새로이 갖추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캐리는 편지에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 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캐리는1834년 73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땅에 묻혔습니다.

윌리암캐리는 그의 그칠줄 모르는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18세기 침체된 영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댕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근대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황금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그 자신이 인도의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 근대 선교의 문을 활짝 연 근대선교의 아버지였습니다.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

 

<자료: 창골산볼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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