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믿고 있는 거짓말
- 크리스 터먼(Christ Thurman)
목 차
제1부 / 거짓말로 가득찬 우리네 삶
1. 우리가 믿는 거짓말들의 실상
제2부 / 우리가 믿고 있는 거짓말들
2. 자기 자신에 관한 거짓말들
3. 세속적인 거짓말들
4. 결혼 생활과 관련된 거짓말들
5. 사실을 왜곡시키는 거짓말들
6. 종교적 거짓말들
제3부 / 진리와 함게 사는 삶
7. 진리에 대한 사실
8. 변화와 관련된 사실
저자 크리스 터먼(Christ Thurman)박사는 미국 텍사스주 리차드슨에 소재한 [미너스 마이어 상담실]에서 상담 치료를 하는 심리핮자이다. 그는 텍사스 대학에서 상담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스트레스 관리, 자존감, 자기 표현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 부분에서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상담가이다.
제 1 부 거짓말로 가득 찬 우리네 삶
1. 우리가 믿는 거짓말들의 실상
인생에서 우리가 당하는 거의 모든 불행들은 우리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로부터 온다
마리 스탈당(Marie Stendhal)
거짓말을 더 많이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불행하고 정서적으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불행과 정서적인 고통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거짓말들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자 이 책의 중요한 대전제입니다. 이 거짓말들의 정체를 밝혀서 거짓말 대신 진실들로 우리 마음을 채울 때까지 정서적인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녹음기와 같은 우리의 두뇌
두뇌는 녹음기와 아주 유사합니다. 즉, 우리의 두뇌는 녹음할 수도 있고 되감기도 할 수 있으며,(언제라도 작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녹음 테이프들이 소장되어 있는 개인 도서관도 들락날락 할 수 있습니다. 이 테이프들 속에는 당신이 살아오면서 녹음해 놓은 모든 신념들과 태도들과 기대들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의 두뇌 속에 있는 테이프들 가운데 일부는 진실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모든 사람들을 다 기쁘게 할 수는 없다”라든가 혹은 “인생은 힘든 여정이다”라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테이프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거짓말들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업적이 나의 가치를 나타낸다”라든가 “인생은 공평해야 한다” 등등입니다.
당신의 두뇌 속에 있는 거짓말 테이프들 가운데 상당수가 유년 시절 이후부터 계속 있어 온 것들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테이프들을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 와서 그 내용들이 거짓말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더 오래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그것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거짓말 테이프들이 심지어는 당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당신 마음속에서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의식을 하든지 못하든 지간에 이러한 테이프들은 매일매일 당신의 정서와 행동에 극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말 테이프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약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정서 상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정서 상태는 당신의 마음을 거짓말이 지배하는가 아니면 진실이 지배하는가를 직접적으로 반영합니다. 마음속에서 진실보다 거짓말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면 당신은 정서적으로 불행하고 고통을 당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만일 당신의 마음이 거짓말 테이프들보다 진실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면 당신은 불행하기보다는 오히려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의 마음이 거짓말과 진실의 영향을 비슷한 수준으로 받고 있다면 당신은 정서적으로 기복이 심한 상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과 진실이 서로 당신의 마음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하기 때문에 둘 중에 어느 것이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삶의 행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도전해야 할 것은, 우리 앞에 어떤 환경이 전개된다 할지라도 그 환경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우리 마음속에 내장되어 있는 테이프들을 가능한 한 진실된 것들로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들은 정서적 불행을 낳습니다.
진실들은 건전한 정서를 갖게 해줍니다.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제임스 알렌(James Allen)은 그의 저서 생각대로 되는 인간(As a Man Thinketh)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뿌려지거나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모든 생각의 씨앗들은 당연한 결과, 즉 좋은 생각들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생각들은 나쁜 열매들을 맺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 법칙(생각하는 대로 열매를 맺는다)은 실제로 우리에
게 개인적인 소망을 주는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그 이유는 이 법칙이, 스스로 진실을 알고 믿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행복을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그 일, 즉 진실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인식과 방법을 개발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거짓말들은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거짓말들은 실상과 맞지 않는 신념이나 태도나 기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들을 찾기 위해서는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 친구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심지어 우리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 등 다양한 출처로부터 거짓말들을 배웁니다. 그러한 거짓말들이 우리 삶을 정서적으로 불행하고 참기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는 거짓말들 중 어떤 것들은 그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추종했기 때문에 실제로 “진실”처럼 되어 버린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거짓말들이 가장 위험한 거짓말인데 그 이유는 아무도 여간해서는 그것들을 반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반박하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입니까?
진실이란 있을 법한 실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말합니다.
연습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좋아지고 더욱 건강해집니다. 자기 자신과 인생에 관한 진실을 직시하면 할수록 거짓말들이 쳐 놓았던 연막들이 사라지는 것도 더 자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기술들 중 한 가지를 개발하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당신을 지배하는 거짓말들이 어떤 것들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아래의 자기 분석을 위한 질문 항목들을 잠시 동안 완성해 보길 바랍니다. 각 문항을 주의 깊게 읽은 다음 각 문항에 동의하는 정도를 다음과 같이 점수로 환산해 보십시오.
1 2 3 4 5 6 7
전혀 그렇지 않다 그저 그렇다 정말로 그렇다
한 항목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지 마리고 당신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답하십시오. 그저 그렇다라는 대답(4)은 가능하면 피하도록 하십시오.
1. 나는 완전해야 한다.
2. 나는 모든 사람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
3. 문제에 직면하는 것보다 회피하는 것이 낫다.
4.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5. 나의 불행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이다.
6.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7. 당신의 업적이 당신의 가치를 나타낸다.
8. 인생은 편하게 살아야만 한다
9. 인생은 공평해야 한다.
10.원하는 것이 있을 땐 기다리지 말라.
11.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12.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이유는 배우자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다.
13. 만일 결혼 생활이 힘들고 어렵다면 우리 부부는 서로 맞지 않는 짝임에 틀림없다. 14. 배우자가 나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어야만 한다.
15. 나의 배우자는 내가 그를 위해서 해온 모든 수고에 대해 신세지고 있다.
16. 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나의 인격을 변화시킬 필요는 없다.
17. 배우자는 나와 비슷해야 한다.
18. 나는 허풍을 떤다.
19. 나는 가끔 어떤 일들을 주관적으로 생각한다.
20. 나에게는 모든 것들이 검지 않으면 희다.
21. 나는 가금 나무들을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
22. 과거가 장래 일을 예언해 준다.
23. 어떤 일들을 분석하는 데 사실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24.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력으로 얻어낼 수 있다.
25. 하나님은 죄와 죄인을 미워하신다.
26.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픔과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실 것이다. 27. 나의 모든 문제들은 내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28. 다른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것은 그리스도인인 나의 의무이다.
29. 분노, 우울 그리고 걱정과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믿음이 약하다는 표시이다. 30. 만일 내가 영적으로 강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 하실 수가 없다는 표시이다.
앞에서 나열한 각 항목들은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어떤 식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보며 주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각 항목에 더 강력히 동의할수록 거짓말에 더욱더 동의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답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당신이 5,6,7점을 준 각 항목들 옆에 표시를 하십시오.
그러한 문항들은 당신이 가장 쉽게 믿는 거짓말들이고 당신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많이 집중해야 할지도 모르는 항목들 입니다.
거짓말들을 간파하여 진실을 깨달으려는 시도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일을 당신 홀로 하려면 그것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말들의 정체를 깨닫고 진실에 기초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 즉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이 책이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다음 과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들, 즉 진실인 체 가장하여 우리의 결혼 생활, 믿음 생활, 일상생활을 비참하게 만드는 거짓말들의 가면을 벗길 것입니다. 그 후에는 그러한 거짓말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당신은 거짓말들의 상당 부분이 어느 정도 중복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거짓말들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한 가지를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변화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당신이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정서적으로 건전하고 온전하며, 겉으로 꾸미는 모습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 이제 당신의 머리 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녹음 테이프를 잠시 정지시켜 놓고 이 책을 읽어 나가십시오.
제 2 부 우리가 믿고 있는 거짓말들
2. 자기 자신에 관한 거짓말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사리 믿어 버리기 때문이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만사가 자기 방법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과에서 토론하게 될 거짓말들은 나의 내담자들에게 아주 큰 해를 끼친 거짓말들입니다. 성공 지향적인 이 세상에서 가장 만연해 있는 거짓말 하나를 먼저 살펴봅시다.
“나는 완전해야 한다”
대부분의 완벽주의자들은 결코 그들이 도달한 적도 없고 또 도달할 수도 없는 비현실적인 높은 수준을 설정해 놓고서 마치 그 수준이 경배의 대상인 듯이 그것에 집착합니다. 심지어 우울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자살하고픈 생각이 들 때조차도, 그들은 그들의 수준을 바꾼다는 생각을 부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결국은, 아주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그 수준들이 그들 자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지라도 열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가 말했듯이 “인간이 되는 것은, 곧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함으로써 열등감에 대처합니다.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자신을 뜯어 고쳐 완전해지려고 함으로써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내가 완전해질 수만 있다면 이런 열등감도 마침내는 잠잠해질 것이고 어렵지 않게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나 완전해지려는 모든 욕구는 그 출발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완전해지려는 욕구는 아무 승산이 없는 시나리오입니다. 설정한 목표를 성취할 경우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 놓고 보니 별것 아니었잖아. 좀더 나은 것을 했어야 했는데 이건 별로 대수롭지 않군.”
만일 당신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나는 정말 멍청한 인간이구나! 왜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해낼 수가 없는 걸까?”
사실 완벽주의자들의 문제는 정서적인 문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많은 완벽주의자들이 자살하고 싶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서 작년에 나를 찾아왔던 빈틈없는 젊은 변호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장래가 보장되어 있는 그 말쑥한 젊은이는 자신의 단점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자신이 해 놓은 훌륭한 일들은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문제가 된 완벽주의라는 거짓말을 떨쳐 버리기보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살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강력한 거짓말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완벽주의를 깨뜨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 완벽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 실수를 용납할 수 있어야 하며,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 단계 더 뛰어넘지 못한 차점자가 되는 것은 별볼일없는 일이며, 완전한 것, 즉 1등이 되는 것만이 전부라는 생각이 만연합니다.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 “제일인자”가 아니기 때문에 실패자라고 느끼는 수억의 사람들을 배출해 내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듯합니다. “최선을 다하느냐 다하지 못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끔찍할 정도로 파괴적인 메시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는 모든 사람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용납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나 자신에 관해서 좋은 느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모든 사람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 흔히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카멜레온 같은 존재가 되어서, 그들이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상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색깔을 종종 바꾸어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하고,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 또한 완벽주의와 마찬가지로 만족이 없는 시나리오입니다. 비록 오늘은 누군가의 인정을 얻는다 할지라도 내일은 또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난제가 앞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내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난제 말입니다.
이 거짓말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정서적인 안정을 믿을 만하지 못한 사람들의 손에 맡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거짓말로부터 당신을 지배할 수 있는 상당량의 권세를 부여받게 되고, 그런 사람들 중 일부가 (친구나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그 권세를 악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교묘히 속임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희생자들, 즉 남을 기쁘게 해주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더 잘 배려하지만 결국 그 마음에는 분노가 분출되지 않은 채 하나하나 쌓이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할지라도 우리나 우리가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자 만성적으로 순종만 하다가는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난제를 푸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이 거짓말에 걸려들 때마다 그 거짓말을 깨뜨려 줄 진실, 즉 당신이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으며 그러한 노력은 단지 당신의 삶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에 직면하는 것보다 회피하는 것이 낫다”
인생에서 회피자들은, 문제가 사라지거나 아니면 더 악화되어 직면해야만 할 때까지 그 문제를 무시해 버립니다. 그 문제들은 아주 다양할 수 있습니다. 환풍기의 소음, 매달 날아오는 얼마 되지 않는 신용카드 청구 금액, 결혼 생활의 자잘한 갈등들 등. 번창하고 성공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골칫거리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피자들은 변명을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문제를 피하고 맙니다. 문제는 바로 이 실패자들에게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문제들이 날마다 축적되어 가는데 그것들을 마냥 피하고만 있다면 인생이 더욱 고달파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해결되어져야만 합니다.
나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부모들이 이 거짓말에 현혹되어, 바람직하지 못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문제로부터 불필요하게 구출해 내려고 하는 데 대해서 매우 우려합니다.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를 문제로부터 구해 주는 버릇이 생기면 그 자녀는 이 거짓말을 확신하게 되고 머지 않아 이 거짓말은 깊게 뿌리 박힌 “진실”로 고착되고 맙니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서 인생이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그들을 송두리째 내리칠 때 진정으로 필요한 적절한 대처 능력들을 개발할 기회를 빼앗겨 버린 셈입니다.
당면한 고통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대개는 궁극적으로 더 많은 고통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면한 고통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들은 오히려 불필요한 많은 고통에서 자신을 구하는 셈입니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져야 한다는 거짓말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느 정도는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도취적인 삶의 방식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더욱 안 좋은 것은, 그 거짓말에 사로잡히게 되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돌아보지 않게 되어 결국 건전하고 안정된 인간 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거짓말이 미치는 가장 악한 영양을 결혼 생활 문제를 상담하면서 보게 됩니다. “나”가 너무 강한 나머지 “우리”가 들어설 자리를 내주지 못하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결혼 생활은 결국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당겨지는 두 개의 “나의 방법” 그 이상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우리가 그것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그 사실을 믿지 않을 경우엔 거듭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럴 경우,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우선은, 인생이 내 뜻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며 주장할 수 있는데 그렇다 해도 뜻대로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아니면 좀더 탄력성 있게 사는 법과 인생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것에 대처하는 법과, 누구의 방식대로 인생이 돌아가든 지간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나의 불행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이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할 때면 난 화가 난다구!”
이 책의 기본 주제들 중 하나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정서적으로 평안할 수도 혹은 불안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거짓말은 행복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내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이번 거짓말에서 한층 더 악화되어 등장합니다. 즉, 이 거짓말은 우리에게 모든 정서적인 혼란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나 자기 주위의 어떤 사건에 돌립니다. 즉, 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자신은 어떠한 책임도 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을 어떤 식으로 생각할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정서 생활을 조절해 나갈 수 있습니다. 만일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서적인 면에서 무책임하게 되고, 결국 우리의 행복에 대한 책임을 인생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수많은 사소한 사건들의 손아귀에 전가시켜 버리게 되고 맙니다.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거짓말을 물리치는 방법
당신의 삶을 인질처럼 구속하는 모든 거짓말들로부터 해방되어 회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믿고 있는 거짓말들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우선 당신이 어떤 거짓말을 믿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거짓말들의 정체를 밝혀 내야만 하고 가능한 한 상세하게 그것에 관해 알아야만 합니다. 바로 그 지점이 출발점입니다.
생활 속에 도사리고 있는 거짓말을 규명하는 최선의 접근법이 심리학자인 알버트 엘리스(Albert Ellis)에 의해 개발되었습니다. 그 방식은 “ABC 접근 방식”이라고 하는데 너무나 간단합니다. 연필 한 자루와 노트 한 권만 준비하면 됩니다.
-A는 당신에게 일어난 사건 특히 거짓말을 믿게 만드는 사건을 나타냅니다. 그 사건은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고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약속에 늦은 일에서부터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 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B는 “자신과의 대화”를 나타내는데 당신이 어떤 사건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어떤 말을 하는가를 밝히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대화는 거짓말일 수도 있고 진실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이 두 가지가 혼합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C는 “자신과의 대화”에 대한 당신의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기쁨에서부터 절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2주 동안 ABC 일기를 계속 쓰게 한 뒤에 다음 과제로 넘어갑니다. 당신도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삶에 대처하는 당신 고유의 방식에 대해 깨닫게 되면서 당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똑같은 거짓말들이 자주 튀어나오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완전해야 한다는 거짓말이나, 내가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단 알고 난 후엔 그것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기 분석이 즉시 태도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당황하지 마십시오. 태도가 변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ABC 일기를 계속 써 가는 가운데, 삶을 필요 이상으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거짓말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세속적인 거짓말들
진리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과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세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할 만큼 선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죄뢴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
모든 즐거움을 만끽하라!
제일인자가 되도록 하라!
자기 좋을 대로 하라!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인생은 당신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인생 자체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먹은 과자는 손에 남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진리에 입각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거짓말을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끝나지 않고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고 까지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위를 둘러보면 고통이나 고생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안정되어 있거나, 지적으로 뛰어나가거나, 지적으로 뛰어나거나. 외모적으로 매력이 풍부하거나 혹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우리도 한 건만 하면 그럴듯하게 사는 남들과 같이 그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자 노력한 결과 솔로몬은 모든 것을 갖게 되었지만, 그 소유를 완성시켜 주는 단 한 가지, 즉 행복은 얻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짓말의 결과는 자기 소유에 대한 불만족과 바람을 잡으려는 듯한 허탈감입니다. 많은 이들이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사고 방식에 사로잡혀, 그 남의 떡을 얻으려고 열심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막상 그 떡을 얻어 낸 사람들은 그들의 기대가 실제 모습보다 너무 컸음을 종종 깨닫습니다.
요점은 간단합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어 더 이상 남의 떡을 갈망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결코 종착역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얼만큼 가졌건 간에 늘 부족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많은 것을 기대하면 할수록 만족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는 거짓말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살도록 하면서 남은 인생을 값싸게 만드는, 실현 불가능하고 건전하지 못한 꿈입니다. 그 거짓말에 오염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우리 모두는 그 거짓말에 따라 살아갈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업적이 당신의 가치를 나타낸다”
우리는 성과에 집착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한 인간의 인격이나 성실성을 한 인간의 겉껍데기와 뒤섞어서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판매원은 물건을 많이 팔아야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경쟁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태도 때문에 사람들이 인간을 그 최종적 “성과”만큼만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자존감의 기초가 돼야겠습니까? 저는 그 기초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분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수직적인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업적이나 성공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수평적인 창원”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편 8:5).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편 139:14).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린도전서 6:2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아주 귀하게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존감의 바른 토대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는 것보다 이 사실대로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사람의 인격보다 그의 업적을 더 강조하는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건전한 자기 평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긍정적인 자존감을 얻고자 업적과 권력과 성공과 물질적 소유와 성적 호기심들을 갈망하며 솔로몬의 전철을 밟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발견한 것 은 대개 솔로몬이 발견했던 것과 같은 허탈감뿐이었습니다. 이 거짓말과 그것이 요구하는 피곤한 노력을 피하는 것만이 그와 같은 비참한 길로 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제외한다면 당신은 과연 누구입니까? 자신의 타고난 가치를 이해하기 위한 굳건한 기초를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만 합니다. 그런 후에 스스로 확고한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인생은 편하게 살아야만 한다”
자동 식기 세척기, 파워 핸들, 차고 문 개폐기, 냉난방 장치. 이러한 기기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현대인들은 삶은 더 용이하게 대주기 위해 고안된 기계 장치들에 너무 길들여 있습니다. 그 기계 장치들에 너무 길들여 있습니다. 그 기계 장치들을 소유하자마자 우리는 그것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능한 한 어려움 없는 삶을 살겠다는 생각 자체에는 별 잘못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좀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해 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태도가 종종 극단적인 편의주의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생각에 빠지다 보면 결국은 자신을 쾌락 욕구 본능에 내맡기게 됩니다. 이것은 고통은 최소로 줄이고 쾌락은 최대로 늘리려는 근본적인 경향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종종 현실, 즉 삶의 진짜 모습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세상은 성공할수록 불편함이 줄어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인생이란 편한 인생이고, 만일 우리 삶이 편하지 않다면 우리는 분명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에게 이 거짓말을 너무 큰 소리로 말해 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말을 몹시도 믿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 거짓말이 진실임을 확신하면서 늘 자연스럽게 동의의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편한 인생”이라는 거짓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생의 쓴맛이 눈앞에 다가오면 다른 이들보다 더 쉽게 좌절합니다. 진정한 그리스 도인이라면 걱정 없는 “꽃밭”과 같은 삶을 살기 마련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일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 그들의 신앙이 진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특별한 위로를 약속하시는 한편, 그들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우리는 삶을 쉽게 살라는 거짓말 때문에 위로의 말씀만 듣고 경고의 말씀은 듣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가 제공해 주는 멋진 약속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론 8:28)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꽃밭”과 같은 새빨간 거짓말에 대항하려면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불행이나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좋지 않은 상황을 통해서도 선을 이룰 수 있지만 그 결과적 선을 깨달을 수 있으려면 인내와 수고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은 공평해야만 한다”
편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짓말에서 파생된 이 공평한 삶에 대한 거짓말 역시 도처에 만연해 있고, 그 영향력 또한 막강합니다. 그것은 욕심에 이끌린 생각이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생각입니다. 길을 가던 젊은이가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어 숨지기도 합니다. 자기보다 실력이 못한 사람이 취직 시험에 합격하기도 합니다. 선두 주자가 바로 뒤에 오는 주자의 발에 걸려 넘어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놓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우리는 대뜸 “그것은 공평하지 않아”라는 대꾸부터 합니다. 마치 그렇게 말하면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솔로몬은 인생이 얼마나 공평하지 않은지를 이해하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전 8:14).
정말이지 공평하지 않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엄청난 부자가 된 마약 밀매상들, 교묘히 법망을 피하는 살인자들, 바른말 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독재 정부 등, 이 모든 것들이 전혀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인생이 공평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인생이 항상 불공평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 또한 큰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거룩한 성품은 종종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정정당당히 행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바로 문제입니다. 이 거짓말에 속아서 수십 년 동안 분노를 품어 온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타당한 사실에 바로 서기 위해 현재에 균형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과거사에 대해 두 번의 대가(한 번은 과거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또 한 번은 그 과거로 다시 현재의 삶을 침몰케 할 때)를 치르지 않기 위해 불공평함을 적절히 다루는 일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기다리지 말라”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짓말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당장 행하라는 거짓말도 이와 같은 맥락의 거짓말입니다. 그 둘은 같은 충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데 왜 망설이는가? 왜 “지금 당장”구입하지 않는가? 신용카드를 원하는 대로 쓰라,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거든 참지 말고 맞서 싸우라.
기다리지 말라는 거짓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신과 의사가 자신들의 삶을 고통에서 즉시 구해 줄 마술적인 말들을 해줄 것으로 생각하고서 도움을 구하러 옵니다. 그러나 일단 자신의 문제를 치료하는 것이 길고도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이들은 그 후로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를 통해 즉시 변화를 받기 위해서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더 오래 살고 있지만, 오히려 더 바빠진 느낌이 듭니다.
시간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짧아진 것 같습니다. 아무도 기다리는 것을 멋진 인생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1달러를 벌면 단지 2센트만을 저축한다고 합니다(전례 없이 낮은 저축률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평균 한 사람이 자신이 번 돈의 단지 1/50만을 저축이라고 하는 “후일의 만족”을 위한 장치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의 중요성이 성경의 거의 모든 장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기 위해 이 세상에서 잠시 쾌락을 보류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이런 견해가 확실히 더 기분 좋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악한 쪽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세 가지 중요한 근거들도 있습니다.
첫째 / 인간 상호간의 관계
인간 관계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인류 역사는 자기 희생, 사랑, 평화보다는 오히려 욕심, 증오, 갈등 그리고 살인으로 점철된 경향을 보입니다. 숱한 종교 전쟁들과 스페인이 벌인 이단자에 대한 종교 재판(1478 - 1834)은 선을 가장한 악의 전형적인 사례들입니다. 금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대량 학살과 핵전쟁의 위협은 이런 견해를 지지하기에 충분합니다.
둘째 / 인간의 내면
우리 자신을 살펴볼 때 인간성은 자기 성장만큼이나 자기 파괴의 경향을 보이는 듯합니다. 육체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분히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균형 잡힌 식사를 하지도 않습니다. 정서적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혼란을 겪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만큼 심각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삶의 전반적인 사실들을 잘못된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영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며, 그렇다고 해서 상당한 일관성이나 깊이를 가지고 인생의 의미를 추구해 나가지도 않습니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나 타당한 명분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셋째 / 성경의 증거
나는 인간이 죄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타락했으며, 그 성품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놓여지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19 - 21).
사람은 완전히 선하다가 혹은 전적으로 부패했다거나 하는 철저한 신념들은 똑같이 파괴적입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온전한 접근을 하는 것, 즉 사람들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악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는 환자들에게 제시합니다. 내게는 그것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균형 잡힌 접근 방법입니다.
거짓말을 물리치는 방법
이제까지 당신이 일기장에 ABC 접근 방식으로 사건들을 적어 왔다면 이제는 그 거짓말들을 수정할 때입니다. 거짓말들을 물리치기 위해 해야 할 다음 단계에는 친숙해진 ABC 접근 방식을 확장함으로써 그 거짓말들에 도전하는 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두 단계, 즉 D와 E단계를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A는 당신의 감정에 방아쇠를 당긴 어떤 상황을 상징합니다. B는 당신이 그 사건을 해석할 방편이 되는 거짓말이나 거짓말과 진실이 혼합된 “자신과의 대화”였습니다. C는 당신의 감정적인 반응을 상징합니다. 이제 추가될 새로운 단계들은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D-이것은 진실한 대화입니다. 의식적으로 당신은 이런 종류의 자신과의 대화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당신이 B에서 자신에게 했던 거짓말을 반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이것은 A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좀더 적절한 감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A-발생한 사건: 당신이 슈퍼에서 계산대에 줄을 서 있는데 앞에 있는 한 여자가 시간을 오래 끌고 있어서 당신은 조바심이 나고 실망하고 화가 났습니다. 당신이 B에서 당신 자신에게 했던 거짓말들은 이런 것들이지요.
“이 줄이 빨리빨리 줄지 않으면 나는 기분이 나빠.”
“저 여자는 저런 행동을 하면 안 돼.”
“저 여자가 시간을 저렇게 잡아먹고 있으니 내가 화가 안 날수가 없지.”
이러한 거짓말들은 진실에 부딪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D-진실한 대화: 그러한 거짓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면 됩니다.
“나는 일이 내 방식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어.”
“사람들은 별 수 없는 인간일 뿐이야. 사람들은 종종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화를 잔뜩 내 봤자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야.”
“나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여자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거야.”
“일이 빨리빨리 진행되지 않는 것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잖아.‘
그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머리 속에서 당신 자신에게 이런 사실들을 되풀이해서 말해보고 그로 인해 감정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건이 얼마나 진정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십시오.
E-올바른 감정적 반응: 아마도 좀더 침착한 반응일 것입니다. 당신은 스스로가 강렬한 감정을 촉발시키고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일어난 상황에 대해 진실을 스스로에게 이야기함으로써 더욱 건전한 수준으로 당신을 진정시킬 수 이을 것입니다.
E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ABC 상황에서 D와 E단계를 추가해 보는 것이 주는 도전은 진실을 취하여 그것을 거짓말에 대항할 무기로 삼는 것입니다. 처음 얼마 동안 노력을 했으나 당신의 태도나 감정에 어떤 즉각적인 발전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거짓말에 아주 오랫동안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변화시키기란 어렵기 마련입니다.
당신이 믿는 거짓말을 모국어라고 간주하고, 그에 반해 진실은 종종 발음하기도 어렵고 잘 외워지지도 않는 외국어라고 생각해 봅시다. 충분한 노력과 연습을 해야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진실을 유창하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인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방법입니다. 진실은 겉으로 요란을 떨지는 않지만, 만일 당신이 시간을 들이고 인내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정서적인 균형과 안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4. 결혼 생활과 관련된 거짓말들
결혼 관계의 실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혼 관계의 허상들을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윌리엄 레더러와 돈 잭슨(Wiliam Lederer and Don Jackson)
결혼이란 정말로 힘든 작업입니다. 그러나 눈먼 연애 감정들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사실을 무시합니다. 많은 부부들이 마음에 상처를 주는 고통과 불행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나와 상담했던 대부분의 부부들은 일종의 거짓말들에서 비롯된 생각들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들이 그들의 결혼 생활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 과에서 다루게 될 거짓말들은 결혼한 부부들 대부분이 의식적으로 믿고 있다고 여기는 거짓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거짓말들은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결혼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그 거짓말들을 정면으로 대할 수 없게 만듭니다.
“모두가 당신 탓이야”
부부들이 가장 빈번하게 속고 있는 거짓말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거짓말들의 일종으로서, 비난의 손가락을 배우자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나쁜 쪽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배우자의 행동 때문이며 결혼 생활을 망치는 유일한 원인도 배우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결혼의 불행은 모두 상대방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이 거짓말은 주장합니다.
남편이 보일 법한 반응 세 가지
첫째/ 대화를 단절시키는 반응
“옷에 1,000달러를 썼다는 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어?”
“그런 짓은 꼭 당신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당신은 당신 자신 밖에는 모르나? 요즘 우리 형편이 어떤지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는군. 그렇게 돈을 쓰다가는 머지 않아 쪽박 차기 딱 알맞겠어. 당신같이 이기적인 여자는 처음 봤어!”라고 그는 소리를 지르며 말을 계속합니다.
그러면 부인은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자신의 행동을 방어하는 말을 하고는 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둘째/ 평화를 유지하려는 반응
“음... 그 옷 참 멋지군.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게 돼서 나도 기쁘군.”
남편은 부엌의 조리대를 관절이 상할 만큼 세게 붙든 채로 이렇게 얼버무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아내의 반응은,
"당신은 참 멋있는 남자야. 나 내일 다시 나가서 오늘 봐 두었던 다른 옷들을 더 사올 게요" 라는 식이 십상입니다.
셋째/ 사랑으로 사실을 이야기하는 반응
“당신이 좋아하는 옷을 찾았다니 기쁘군.”
존즈 씨는 가방을 내려놓고 아내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할 얘기가 있는데 내 생각에 1,000달러라는 돈은 우리 가계 예산에 비추어 봤을 때 너무 큰 지출인 것 같소. 어디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봅시다.”
이럴 경우 존즈 부인의 반응은 어떻겠는가? 만일 그가 남편의 그런 합리적인 반응에 익숙해 있다면 그녀는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당신과 이런 일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뻐요. 나도 나름대로 예산을 세워 구입했지만 당신 보기에 무리하게 보였을지 모르지요. 당신 생각을 말해 보세요."
분명히 세 번째 반응이 가장 건전한 반응입니다. 이럴 경우엔 부부가 서로 비난을 주고받지 않고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다소 이상적인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만일 부부들이 노력만 한다면 이와 같은 의사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심한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패티는 알콜중독에 걸린 남편 때문에 고통을 당했는데, 남편은 언어 폭행을 일삼으며 아내에게 감정적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패티는 자신의 결혼 문제는 모두 남편의 잘못 때문임을 확신하고 있었고, 사실 그는 대부분의 문제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자존감도 느끼지 못했고, 친구들 앞에 서기도 창피했으며, 자녀들도 아버지의 알콜중독 문제 때문에 어찌할 아버지가 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모두 남편 잘못 때문이요”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남편이 알콜중독과 그로 인한 잘못된 행동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한편, 그녀 또한 남편의 행동 때문에 자신의 삶을 망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부인은 스스로 자신을 삶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믿고 있는 그 “진리”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남편이 술을 끊지 않는 한 나는 행복해질 수 없어요”라고 그녀는 화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남편의 알콜중독에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남편의 알콜중독이 큰 문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행불행이 알콜중독에 좌지우지되도록 방치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군요."
그녀는 화가 난 표정으로, “글쎄요, 언어 폭행을 일삼는 알콜중독자와 결혼한 이상, 행복하길 바란다는 것이 제게는 무리인 것 같군요”라고 말했습니다.
패티는 내가 그녀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불행한 원인 중 일부는, 그녀가 그런 남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결코 통제할 수 없다는 거짓말을 믿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나도 당신이 처한 처지가 삶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처지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결정타가 된다는 생각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꼭 그래야만 할까요?"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말을 계속하지 못했습니다.“
"패티, 당신은 나쁜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 점은 의심할 바가 없어요. 당신에겐 선택권이 있어요. 그렇지만 남편의 행동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결정인 요인이 되어야만 할까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래를 쳐다보다가 마침내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그러나 남편이 술을 끊고 나와 자녀들을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우리는 불행할 거예요. 남편은 늘 우리가 그를 숨막히게 하면서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고 말해요.”
"서로를 숨막히게 하고 있군요?"
“아마 그럴지도 몰라요. 때로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요”라고 그녀는 중얼거렸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행불행의 책임을 자신에게 맡기고, 어떤 식으로든지 삶을 즐기기로 마음먹어야 합니다. 잠시 생각을 해보세요.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 나서, “저는 요...옛날부터 그와 헤어질 것을 생각해 왔어요...잠시 동안만이라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그렇게 하면 마음은 아프겠지만 남편이 정신을 차릴지도 몰라요. 나도 잘은 모르겠어요. 모든 일이 배웠던 것과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어요. 가끔은 정말 지독한 사건들이 벌어지곤 해요...”
"당신이 좀더 많은 만족을 얻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일들은 없을까요?"라고 내가 덧붙였습니다.
“글쎄요, 그 동안 내 문제로 쩔쩔매느라 친구 관계도 제대로 유지할 수가 없었어요. 때때로 너무 큰 외로움을 느끼지요. 한때는 바느질하는 일을 좋아했어요. 같이 수예를 배우던 친구들도 이제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해요. 그리고 교회 나가는 것도 완전히 그만두었는데 창피해서 교인들을 대할 낯이 없었기 때이죠.”
"사람들을 대하기가 거북하다는 것말고도 그런 교제를 다시 시작하지 못하도록 막는 요인이 또 있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녀는 약간 웃으면서 말을 했고 나는 그녀의 눈에서 다소 활력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만족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의 위대한 목표입니다. 실천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쉽다구요? 그러나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대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자신의 행동과 반응에 대해서는 마땅히 통제를 해야만 합니다.
힘이 닿는 부부들이 자신의 결점에 대해 솔직하고 주변 사람들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의 결점을 고치려고 애쓸 것을 가르치는 성경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자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지적하기 전에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마 7:3 참조). 배우자의 눈 속에 있는 티 때문에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자꾸만 더 키우고 그 때문에 스스로를 눈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결혼한 사람들 모두가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때 결혼 생활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이유는 배우자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과에서는 줄곧 결혼 생활은 힘이 드는 생활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결혼 생활은 힘이 듭니다. 엄청나게 힘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감하게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 사실을 당신의 손바닥에 써서 늘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결혼에 관계된 첫 번째 규칙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해 왔다 하더라도 그 저번에는 힘든 노고의 시간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게 되면 이내 부부들은, “우리가 제대로 짝을 만남 것인가?” 하고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은 또다른 거짓말, 즉 이 세상 어딘가에 나와 언제나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는 다른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서 연유하는 듯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결혼 생활이 힘들다면 그것은 짝을 제대로 만났다는 증거입니다(물론 예외가 있기는 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통해서 종종 자신의 인격 중 어떤 부분에 결함이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잘못된 행동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맺어 주셨다”고 느끼는데, 한편 그런 생각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행복할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이런 생각은 결혼 생활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성경의 교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지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7:28)
결혼 생활은 매우 힘이 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우리가 놓여 있는 결혼 생활에서 도피하기 위한 구실로 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고 또 채워 줘야 마땅하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 관계라 해도 어느 한 사람이 상대방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필요는 건전하고도 적절한 여러 돌파구들을 통할 때 더욱 잘 충족될 수 있습니다. 이 거짓말에 스스로 속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건전한 돌파구들, 즉 친한 친구들, 취미 활동, 적성에 맞는 일, 혹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등을 갖고 있지 못한 셈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관계의 결핍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채, “여기 내 인생이 있으니 당신은 내 모든 필요를 채워야 한다”는 식으로 요구합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하고 부족함 없이 꾸려 나가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잘못되기 쉬운 방법입니다.
또한 내가 건전하고 적절한 돌파구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오늘날 결혼한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를 불건전하고도 부도덕한 방법들로 충족시키려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정한 방법들을 어떤 면으로 보나 결혼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자신의 필요가 적절히 충족되지 못하는 쪽의 배우자가 “주고 받기”라는 평등의 방정식이 균형을 잃었다고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손해를 보는” 배우자가 결함이 많은 배우자를 심하게 비난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해서 우리가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당신이 배우자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정직하게 검토해 보십시오.
둘째,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의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수 있고 또 그럴 용의가 있는지 정직하게 검토해 보십시오.
셋째, 여러 방법들을 통하여 그러한 필요가 적절하게 충족되게 하든지, 아니면 그 필요가 부적절한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포기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아무도 나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배우자에게 그런 기대를 품고 있다면 그런 “필요 공복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신은 내게 신세지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가까워지면 은근히 경멸하는 마음이 생겨서인지, 데이트하던 시절(그때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배우자를 위해 여러 일들을 했습니다)에서 “서로에게 매여 버리는” 결혼 생활로 옮겨 가면서부터는 모든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내게 신세지고 있다”는 식의 결혼 생활은 파괴적일 뿐 아니라, 사람들 특별히 배우자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대가를 돌려줘야 한다는 거짓말에 깊이 뿌리 박고 있습니다.
멜리사와 버트는 이러한 거짓말에 속은 대표적인 부부입니다. 그들을 계속적으로 마음속에 레이다 장치를 켜 놓고서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신세진 것을 주시했으며, 그들이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보다 보상이 덜 되었다고 느끼면 이내 서로에게 적대감을 품기까지 했습니다. 상태는 너무 심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한시도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차례 상담을 하면서, “당신은 내게 신세지고 있다”는 이 거짓말을 계속해서 다루었습니다.
결혼에 대해 이제까지 가졌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배우자를 위해 온갖 일을 다 해줬을지라도 배우자는 당신에게 아무런 신세도 진 것이 아니라는 관점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결혼 생활에서 한 모든 일은 당신이 그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려고 선택을 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당신이 하기로 선택한 일을 한 것뿐, 아무도 당신에게 신세를 진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봅시다. 만일 배우자가 당신의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또한 배우자가 당신에게 해주는 모든 일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대신 감사히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즉,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대신, 당신의 필요를 여러 방법으로 충족시킨다면 결혼 생활을 훨씬 더 원만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배우자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배우자에게 아무것도 원하거나 바라지 말라는 말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내 아내가 사랑스럽고, 신실하고, 가정 안팎에서 나를 돕고, 가정 경제를 잘 꾸려 나가기를 원합니다. 단지 내가 주장하는 것은 내가 아내의 기대들을 다 만족시켜 준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아내가 내게 신세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혼하면 마치 그러한 “권리”가 당연히 주어지는 것처럼 내가 아내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거짓말에 속아 아내의 고마움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부정적인 방법으로는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배우자를 위축되게 하거나 품위를 떨어뜨리는 처신을 하거나 배우자에게 겁을 주어 억지로 당신의 요구에 응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원하던 것을 얻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부부간에 악감정이 생기고 사랑이 없어지며 마찰이 잦아지기 때문에 당장은 부부 싸움에서 이길지라도 장기적으로 패배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건전한 방법들을 생각해 본다면 배우자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재고해 보도록 요청하거나, 요구 정도를 약간 낮추거나, 아예 기대를 버리거나,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말고 당신이 직접 그것(당신이 바라는 바)을 감당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바꿔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에게 아무 신세도 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배우자 각자가 상대방에게 신세를 지거나 신세진 것을 다시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상대방에게 무엇인가 해줄 권리가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베풀며 사는 부부야말로 가장 건강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변화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러한 말 속에 담겨진 실체는 거짓말입니다. 즉, 그것은 제대로 된 부부라면 서로를 위해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변화시킬 필요도 없고 변화시켜서도 안 된다는 거짓말입니다. 어떤 여자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의 배우자들과 더욱 조화를 잘 이루기 위해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조율하고 수리해야 할 인격적인 결함들이 있습니다. 결혼 생활은 “내 모습 그대로 용납하라”는 깃발 속에 자신을 포장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들을 개선하는 작업입니다.
물론 나는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단지 배우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배우자의 성향에 맞추는 것은 반대합니다. 그러나 나의 약점이 아내의 장점일 경우, 장점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물론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갖게 될 때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더욱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나처럼 되어야 한다”
이 거짓말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최고”의 방식이고 따라서 그 배우자도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만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거짓말에 빠지는 사람들은 세상을 “흙과 백”, “옳고 그름”, “전부가 아니면 무”라는 관점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배우자가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미리 단정지어 버립니다.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이런 사람들은,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동반자보다는 일종의 로봇을 원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단지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취향을 포기하라고 제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는 뜻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취향이 싸움으로 확대될 만큼 중요한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 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거거나 포기할 만큼 충분히 융통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독특한 존재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때로는 갈등을 일으킨다 해도 다르다는 것은 유익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성숙한 태도로 잘 다루기만 한다면 자신의 개성을 좀더 분명히 알 수 있을 뿐더러 인간이 각기 얼마나 차이가 있는 존재인지를 더욱 잘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 생활에 관계된 거짓말들은 흔히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는 거짓말들이고, 밖으로 드러났을 때조차도 당신이 정말 그것을 믿고 있는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무의식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마음속에 결혼 생활에 관계된 여러 거짓말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 관계된 상담 치료가 적절히 이뤄질 경우, 우리는 이러한 잠재된 거짓말들을 의식할 수 있으며 거짓말의 자리에 진실을 대체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료 행위들은 당신 스스로도 시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거짓말을 물리치는 방법
자 이제 아주 색다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합리적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상상법” 이것은 인식 개조 치료법의 선두적 지지자인 맥시 몰츠키(Maxie Maultsky) 박사에 의해서 개발된 일종의 정신 치료 게임으로, 경기에 임하는 운동선수들에게 수년 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부딪치는 여러 중요한 상황들은 다루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해 보고자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하거나 당혹스럽게 만드는 상황을 마음속으로 상상해 보고, 그 상황이 불러일으킬 감정들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합리적 사고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 사건에 대해 비교적 진정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화가 나 있기는 하지만 그 화를 통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또한 양복 때문에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고 있지만 상대방을 존중해 주고 상대방이 듣기를 싫어하지 않을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아내를 비난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그 문제는 접어 두고 내일 입을 양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내 자신을 상상해 봅니다(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방법이 매우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배우자가 잘못했을 때에는 화를 내고 호통을 쳐 놓아야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고, 그래야 다음부터 제대로 일 처리를 할 것 아니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악순환을 낳을 뿐이고 함부로 거짓 경고를 남발하는 상황을 만들뿐입니다.
너무 자주 화를 내고 호통을 쳐 놓으면 배우자는 그것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고, 오히려 당신의 의도를 무시해 버리게 됩니다.
또한 당신이 화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노력을 쉬지 않고 계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자에게 알리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만일 그런 악순환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오랜 습관을 깨기 위해서 이러한 상상 방법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이러한 상상 기법을 통해 당신은 당연히 날 상황에 부딪쳤을 때 마음속으로 그 상황들을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방법들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들을 잘 다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눈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당신은 이 기법을 통해서 당신의 뇌 속에 일련의 필름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속에서 당신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취하기 오래 전에 혹은 잘못 행동하고 난 뒤에 앞으로는 더욱 잘할 수 있도록 “행동 장면”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 기법은 갖가지 상황에서 당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거짓말들을 물리치는 데 유용합니다. 이 방법은 취업 면접 시험을 준비할 때나, 친구들과의 마찰을 해결할 때, 비현실적인 요구를 거절할 때, 자녀들의 말썽을 다룰 때 혹은 피곤한 하루 일과를 잘 처리하고자 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모든 다른 기법들과 마찬가지로 한 번 해보았는데 잘 안 된다고 해서 낙담하지 마십시오. 연습하다 보면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진실을 파악하는 데 익숙해질 것이고 그 진실을 힘입어 지혜롭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5. 사실을 왜곡시키는 거짓말들
세상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수록 우리 마음은 거짓과 오해와 착각들로 어리둥절해지고, 또한 마땅히 행할 바를 결정하거니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능력들도 저하되기 마련이다.
스코트 펙(Scott Peck)
당신이 대수롭지도 않은 사소한 일을 부풀려서 이야기했던 때가 최근 언제였습니까?
만사가 너무 주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항상”이나 “절대로”라는 단어들을 얼마나 자주 사용합니까?
생각보다 감정이 앞서지는 않습니까?
솔직하게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위에 열거한 질문들에 대해 어떤 대답이 나오겠습니까?
위에 열거한 각 질문은 사실의 왜곡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종종 실상을 왜곡합니다. 그러한 습관이 우리가 믿는 대부분의 거짓말들에 대한 토대가 됩니다. 왜곡된 생각들은 매우 관련이 있으며, 또한 유사한 거짓 생각들을 자꾸만 배양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왜곡된 생각들과 부채질하는 거짓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과장 - 작은 일을 침소봉대하여 말하는 것
주관화 -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
양극화 - 흑백논리로 보는 것
선택적 추출법 - 나무만 보고 숲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
지나친 일반화 - “역사는 항상 반복된다”는 투
감정적인 추론 -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
나는 위의 열거한 대로 여러 왜곡된 생각들을 계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사실적인 바탕에서 일어난 여러 일상적 사건들과 대화들을 곡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저마다 그런 경향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왜곡된 생각들을 너무 당연히 여겨 마치 그것들이 정상적인 생각의 일부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 데는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각각의 왜곡된 생각들이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을 믿도록 부추기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잘못된 부분들이 들추어내야 합니다. 자 이제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작은 일을 침소봉대하는 것
“과장”이라고 하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으면 어떤 사건을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크게 확대해서 보게 됩니다. 사건을 실제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비약함으로써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과음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일을 확대시키려는 경향은 사실을 왜곡하는 아주 흔한 방법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종종 지극히 미미한 가치밖에 없는 사건들을 매우 큰 값어치가 있는 사건인 것처럼 여겨 쓸데없이 감정을 낭비하곤 합니다(이러한 과장의 이면에는 또한 어떤 사건을 실제보다도 훨씬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경향도 있는데 이것 또한 똑같이 건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감정의 낭비는 실제 현실에 걸맞지 않은 것입니다. 사건을 과장하면 할수록 감정적인 낭비는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
이런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으면 사건을 자신과 지나치게 연결 지어 평가해 버립니다.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평가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다소 시큰둥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거나 당신이 말하고 있는데 불쑥 끼여들거나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하면 우리는 종종 그 행동이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멸시하려는 고의적인 의도에서 나왔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부들에게도 이렇게 사건을 주관화시키려는 경향이 매우 짙습니다. 남편이 더러운 양말을 방 한가운데 벗어 놓는다거나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거나 대화를 안 하려고 하면 아내는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또 아내가 늘 밤마다 모임들에 참석한다거나 남편이 심각하게 말하는데 귀담아 듣지 않는다거나 남편이 아주 좋아하는 향수를 아내가 사용하지 않을 때면 남편도 그런 사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자의 행동에 무관심하게 반응해야 한다거나 혹은 배우자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상대방인 나를 의식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건을 자신의 입장에서 주관화시켜 버리면 별것도 아닌 일에 과민 반응을 보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남게 되고 도리어 쓸데없는 분노와 분개와 쓰라린 감정만이 쌓이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억울한 대우를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그 일이 내 가치를 100% 반영하는 사건인 것처럼 여길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문구를 하나 인용해 볼까요?
“20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한다. 40세가 되면 우리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60세가 되면 우리는 남들이 나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에서 끼어 들기를 한다거나 전화를 해 주기로 하고 안 한다거나 신문을 보고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 둔다거나 하는 일이 다시 생기면, 일반적으로 타인의 행동은 당신보다도 행위자 자신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그런 사건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하느냐는 것은 당신의 실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흑백논리로 보는 것
양극화된 사고가 좀더 심각하게 고착화된 유형 중 하나는 “속물/성인”식 사고입니다. 나를 찾는 환자들 중에는 자신을 지독한 속물로 보거나 완전한 성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고, 때로는 사실과 관련해서 최근에 왔다갔다 하는 현상을 보입니다.
사람들은 결코 속물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결코 성인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말 역시 거짓말일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 대부분은 때때로 두 가지 모습을 다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나 남들에게서 단지 극단적인 면만을 본다면 그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처사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속물” 혹은 “성인”과 같은 꼬리표를 붙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속물이다”라는 생각이 내적으로 고착되면 낮은 자존감과 우울증이 나타나고 “나는 성인이다”라는 생각은 교만과 “너보다 내가 낫다”라는 우월감을 갖게 합니다. 자신처럼 착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독단 뒤에 숨어 있는 교만을 깨닫게 하는 일은 대게 엄청나게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교만은 당신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합니다.
자신을 속물로 여기든지 성인으로 여기든지 간에 두 가지 거짓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특별한 장점이나 혹은 못된 점에 대해 잘못되고 왜곡된 신념을 갖게 하는데, 그 어느 것도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또한 양극화된 사고에 익숙한 사람은 인생의 모든 사건들을 흑백논리에 끼워 맞추려고 합니다. 그 사건들이 흑백논리에 맞을 때에는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일들이 회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게 되거나 감정의 상처를 받게 되고 맙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어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흰 것은 흰 것으로 보고 검은 것은 검은 것으로 보고, 그 사이에 있는 회색 지대는 그때마다 알맞은 명암의 회색으로 해석할 만큼 충분히 “명암의 정도‘에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판단력을 사용하여, 상황들이 갖는 ’명암의 정도”를 좀더 정확하게 식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무만 보고 숲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
양극화라는 거짓말에서 파생한 또다른 거짓말은 “선택적 추출법”이라고 하는 거짓말로서 나무만 보고 숲 전체를 보지 못하는 사고의 왜곡 현상입니다. 당신은 다른 모든 문제들은 제쳐놓고 사소한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모임에서 아주 어리석은 말을 한마디 해 놓고는 집에 돌아와서 밤새도록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걱정해 본 적은 없습니까?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 중에는 제대로 잘 된 일보다는 자신과 관련된 잘못된 일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 때문에 병을 얻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결핍된 것”만 주목하는 안경을 끼고 있는 듯합니다. 잘못된 일에만 주목할 때 우울증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게 됩니다.
이렇게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들만 보는 사고 방식은 우리 자신의 인격이나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엄청나게 낭비하게 만듭니다.
“역사는 항상 반복된다”는 투래리는 체중 문제 때문에 상담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먹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분이 안 좋으면 마구 먹어댔는데, 먹고 나서는 절망감을 느끼고 그 절망감 때문에 또 먹고 하다 보니 결국 비만증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일종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런 습관을 「결코」 뿌리 뽑을 수가 없을 거예요. 앞으로도 「항상」 뚱뚱한 상태로 살아야 될 거예요. 이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라고 그는 자포자기하며 말했습니다.
그가 한 말에서 두 개의 핵심 단어를 찾으셨습니까? 바로 “결코”라는 말고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두 단어가 바로 “지나친 일반화”라고 하는 일종의 왜곡된 사고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이 왜곡된 사고에 걸려들게 되면, 시험에 떨어졌다거나 부부 싸움을 했다거나 하는 사건이나 행동을 겪을 경우 앞으로도 똑같이 그런 일이 불가피하게 반복될 것이라는 거짓된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 생각 속에는 역사는 항상 반복된다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들 사이에서도 “지나친 일반화”라는 사고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우리 부부는 앞으로도 결코 원만하지 못할 거예요”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를 비난하고 시시한 일을 가지고 골머리를 앓는 과거와 똑같은 행동 양식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그러한 행동이 실제로 그들의 부정적인 확신을 더 부추기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왜곡된 예측이 들어맞게 되면 그 부부들은, “거봐요. 나는 우리가 결코 원만하게 살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요!”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런 부부들이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투쟁과도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행복해지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상황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는 자신의 사고 방식과 불행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
감정적 추론이란 “내가 그것을 사실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이다”라는 식의 왜곡된 사고입니다. 대개, 우리는 이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거짓말들 속에 숨어서 우리로 하여금 마치 그 거짓말들 이 사실인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감정적인 추론은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왜곡시킵니다. 그러나 감정은 어디까지나 감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정이란 매우 변화가 심하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종종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고 방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감정들이 종종 “사실”을 잘못 평가하기도 한다는 것을 당신도 아마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문화는 감정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하고 싶다고 느끼면 그렇게 하라.”
한 예로 이런 말이 우리의 감정을 의사결정의 궁극적인 기준처럼 만들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감정에 따라서만 처신한다면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감정대로 행동한다면 나는 눈으로 봐서 맘에 드는 것은 모두 사고, 고속도로에서 내 앞에 끼여드는 사람들에겐 총을 쏴 대고서는 바하마(미국 플로리다 반도 남동쪽에 있는 군도, 독립국 - 편집자 주)로 도주를 할지도 모릅니다. 감정에 기초한 인생은 고작해야 혼돈뿐입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감정은 생활에 많은 풍요로움과 양념을 제공하고, 감정 역시 의사결정의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감정이 유일한 고려 사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어떻게 합니까? 그 결정들이 그 순간 당신의 감정에 지배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사실과 감정이 제대로 조화된 결정을 내립니까? 감정에 기초한 결정들이 사실에 입각한 결전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내 생각으로는 어떤 일이 중요하든지 사소하든지 간에 당신의 머리와 당신의 가슴 둘 다에 기초한 의사결정이 훨씬 더 안전하리라고 봅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상담할 때면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면밀히 살핍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들이 갈등을 적절히 해결하고 있는가? 그들이 많은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는가? 그들이 결혼함으로써 영적인 삶이 더 강건해질 것인가? 만일 그들이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은 원치 않는다면 이런관찰을 통해 얻어지는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사실들이 그들의 감정을 인도하는 안내자로 삼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감정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도움을 얻기가 훨씬 더 힘이 듭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감정은 단순히 감정으로 끝나도록 해야 합니다. 감정을 불변의 사실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당신의 현재 모습과 미래 모습을 사실에 입각해서 다시 정립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자아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을 고려하는 동안 감정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이 거짓말들의 감옥의 갇혀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물리치는 방법
첫번째 방법 / 인식 가능한 왜곡된 사고 방식 규명법
예를 들어 당신이 더 크고 긍정적인 상황들을 계속해서 부정적인 사실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제는 썩어 가는 몇몇 나무들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숲 전체를 보라는 내용과 관련된 자신과의 대화를 써 나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 방법 / 정반대 사고
이 방법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거짓말들은 사실과 정반대 되는 경우가 자주 있으므로 거짓말과 정반대 되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의외로 쉽게 실제적 사실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엔 정반대 사고가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깝습니다. 정반대 사고는 인생의 여러 사건을 좀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사고를 재조정해 줍니다. 우리가 믿는 거짓말과 정반대로 생각을 해도 진실과 맞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사소한 일인 줄 알았던 것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일지라도 정반대로 사고하는 습관을 사건을 제대로 된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즉, 거짓말에 지배당하지 않고 당신이 직접 상황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6. 종교적 거짓말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고 방식에 깊게 물들어 있다.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는 것은 그런 습관을 깨뜨리고 성경적 가치관과 사고 방식을 따르는 전혀 다른 습관을 만들어 내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도우그 무(Doug Moo)-
다이안은 당신과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이안이 어렸을 때 부모님은 주일마다 그녀를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녀는 주일학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녀는 주일학교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점차 교회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그저 의무감만 더해 갔습니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구원을 받았는 지조차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다이안이 상담을 하러 왔을 때 그녀는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져요”라고 그녀는 우리가 두번째 만났을 때 말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봐요."
“글쎄요. 죄를 지을 때면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어요”라고 말하며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는 근거가 당신의 행동에 있다는 말입니까?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죄를 안 지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매우 사랑하신다고 느껴지니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미워하신다고 느껴질 때면 어떻게 하나요?"
그녀는 잠시 아무 대답이 없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숨어 버립니다”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이제까지 신앙 생활을 해 오면서 마음에 기쁨이나 위안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녀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안도하는 듯이, “아니요,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이안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들 중에서도 가장 재생력이 강한 일종의 종교적 거짓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앙 교육을 받아 오던 어느 틈엔가 하나님에 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었고 그 인식이 그녀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마침내는 행동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이런 고통이 다른 이들에게도 흔히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여 결국에 가서는 종교적인 거짓말들을 믿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왜 이러한 종교적인 거짓말들이 우리가 믿는 모든 거짓말들 가운데서도 가장 재생력이 강할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종교적인 거짓말들은 대개 가정에서나 교회 안에서 신뢰받는 사람들이 신학적인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기 때문이다. 나는 폐해가 심한 거짓말들 중 상당수가 “설교단”에서부터 흘러 나온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거짓말들은 어린 시절부터 수차례 반복해서 듣기 때문에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되고 따라서 제거하기도 그만큼 어렵습니다.
둘째, 이런 거짓말들은 마치 그것들이 하나님의 생각들인 양 가르쳐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들을 물리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거짓말들을 물리치려는 것이 마치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행위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서 그 거짓말을 믿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함정에 빠져 있는 셈입니다.
종교적 거짓말들(실제로 그들은 그것을 진리로 여기는데)을 계속 믿게 되면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평안하지 못한 상태에 있게 되고, 그렇다고 그 거짓말을 거부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편치 않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만족 없이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내디뎌야 할 첫걸음은 먼저(언제나 그렇듯이)이 거짓말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나의 환자들이 겪고 있는 가장 흔한 종교적 거짓말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노력해서 얻어내야만 한다”
다이안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하실지 혹은 미워하실지 여부에 대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그릇된 신앙의 함정에 빠져 버렸습니다. 자신이 더 나쁜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은 그녀를 더 미워하실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고 방식이 그리스도인의 완벽주의를 부채질 합니다. 이런 완벽주의는 신자에게 죄 안 짓는 삶을 살도록 강요합니다. 그러나 죄 안 짓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다이안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속 화가 나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텍사스 대학에 다닐 무렵 나도 바로 그와 같은 거짓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행동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으로 여겨졌습니다. 나는 결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안정을 얻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어떤 형태로든지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날은 하루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나는 완벽주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다가 탈진했고, 결국은 정서적인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 기독교의 의례적인 행위들, 즉 교회 출석과 성경 공부와 기도에서 점차 멀어졌습니다. 완전주의의 굴레 속에 있으면서 계속적으로 실망하게 될 경우 사람들이 찾는 유일한 도피 방법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약 1년 뒤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경건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만 내가 무슨 일을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력해서 얻어 내야만 한다는 거짓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요? 다이안의 경우가 그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부모님도 인간인지라(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녀들에게 조건적으로 그들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얻어낼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해서 그들을 기쁘게 해드림으로써 이런 상황에 대처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의 요구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상황에 대처합니다. 또다른 아이들은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기도 합니다.
그런 후 성장해서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지는 신적인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부모님인 거처럼 부모에게 느껴 왔던 감정들을 하나님께로 그대로 적용해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 잘 듣는 편”이든지 아니면 “반항하는 쪽”이든지 혹은 이 둘을 병행하는 쪽에 서서, 부모님께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반응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고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거짓말과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선적으로 명심할 것은, 감정이 아니라 근거하여 그 거짓말에 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2: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노력해야 얻어내야 한다는 거짓말과 상충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심사숙고하는 것이야말로 그 거짓말이 진실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죄인을 미워하신다”
간통 중에 붙잡힌 한 여성에 대한 복음서 기사는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 가를 훌륭하게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그 여자는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음을 당했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도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으려는 궤계가 숨어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물론 몇몇 바리새인들은 돌을 던지고 싶었겠지만 아무도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요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비난하거나 죽임으로써는 죄인들을 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그것이 초래하는 자연스런 결과들을 볼 때 대개 그 자체가 형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위에 자기 증오라는 개인적인 벌칙을 더 쌓는 것은 불합리하고 분명히 비성경적입니다. 비록 많은 종교인들이 그런 태도가 신자로서의 마땅한 태도인 것처럼 말하곤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내 동료 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삔 발목을 쇠몽둥이로 계속 내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방법 사이에서 실제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한 상처를 치유하며, 마침내는 그 죄에서 멀어지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성장을 돕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들은 바대로 기쁨 평화 만족 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마치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문제나 고통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오해해 버립니다. 직업을 잃는다든지 질병으로 고생한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사고를 당한다든지 하는 일은 우리의 전능하신 보디가드께서 미리 막아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실 그렇게 믿고 싶어하며 따라서 그렇게 믿습니다. 이 거짓말이 어쩌면 기독교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교활한 거짓말일지도 모릅니다. 날마다 시간마다 사람들이 이 거짓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진실을 설명해야 할까요? 앞서도 이미 살펴보았지만 인생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은 일시적 구출을 통해 문제들을 해결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한 원천을 제공해 줌으로써 어려움을 덜어줍니다.
내가 믿기로는 자유 의지가 일상 생활과 고통의 중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도식화하는 듯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우리가 그 의지를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 늘상 개입하시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스런 결과들을 초래할 좋지 못한 선택을 하려고 할 때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내가 시속 160km로 차를 몰 때 그렇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런 일에 반드시 개입하셔서 내가 죽지 않도록 막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들만 자유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역시 자유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 의지를 좋지 못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 또한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선물이 있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간에 개입하여 막아 주거나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인생을 조금 더 편안하게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않느냐구요? 우리가 그런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을 좀더 쉽게 살아가기 위해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핵심을 완전히 벗어난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해 죽을 것”을 요청하는 삶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2 : 20 / 5 : 24).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의 희생, 봉사,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라” 혹은 “당신이 제일인자이다”라는 말이 빈번한 현대 문화 속에서 이런 식의 행동과 마음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고통과 괴로움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다”라는 거짓말과 상반된 위대한 진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고통이 없는 배움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마음에 고통을 안겨 줄 경험들은 자동적으로 멀리하든지 아니면 그 경험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교실입니다. 하나임은 교사이십니다. 상처 나고 멍든 자아는 배우기 위해 치러야 할 마땅한 대가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들은 내 죄 떄문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설명하기를 좋아합니다. 삼라만상에 대해 서로서로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미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싶어합니다. 그 이유만 알면 미래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원인을 밝힐 수 있다는 신념은 속기 쉬운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우리가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선을 행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항상 선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이 거짓말을 믿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생활을 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상관없이 닥쳐오는 고통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시고자 착한 사람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우리를 좀더 성숙한 자로 빚으시기 위해서 그런 일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자유 의지 때문에 고통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붙들 만한 유일한 진실은 하나님께서는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과제는 주어진 문제의 뿌리를 정직하게 검토해 보는 것입니다. 만일 그 뿌리가 개인적인 죄에 드리워져 있다며 문제 해결에 앞서 먼저 죄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문제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일어났던지 혹은 자신의 죄와는 전혀 무관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책감의 갈고리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서 우리 삶을 낭비하게 되고 맙니다.
“다른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것은 그리스도인인 나의 의무다”
내 친구이자 목사인 로버트는 사람들을 매우 좋아하는 영리하고 분명하며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내 사무실에 들렀는데 웬일인지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 그가 병적으로 우울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습니다. 안색도 안 좋았고 지쳐 있는 기색이 완연했습니다.
로버트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가 그는 심한 감정적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목회 활동을 계속해 나가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당신은 이 역설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결국은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거짓말은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아니요」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거짓말로도 불립니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우리는 매일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제한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소진시키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곧잘 잊어버리곤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28 - 30).
이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기독교가 마치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결코 살고 싶어하지 않을 힘들고 무거운 삶의 양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오인합니다.
예수님을 극진히 모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마르다는 귀한 손님을 어떻게 하면 잘 대접할 수 있을까 하여 동분서주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조용히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즐겼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마르다들(그 중에는 나도 속해 있을 것입니다)이 산더미같이 쌓은 일거리들 앞에서 걱정스런 한숨을 내쉬며 세월을 보내고 있노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망, 분노, 쓰라림, 탈진 들을 겪게 될 일순위 후보자인 세상의 마리아들은 평안과 의미 있는 생을 맛볼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도록 요청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부분을 감당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분노나 걱정 혹은 우울증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느낌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버릇은 종종 감정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놓는 결과를 낳습니다. 감정을 꾹꾹 눌러 놓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느낌을 억제하거나 감추어서 자기 스스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감정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감정들은 우리의 경계가 느슨해질 때를 기다리며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감정들은 꾹꾹 눌러 놓으면 봉쇄되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뒤죽박죽 분출하게 되는데 대개는 가장 부적당한 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화를 내거나 우울증을 느껴선 안 된다”는 거짓말 테이프가 너무 오래 돌아가다 보면 결국은 그런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 녹음되어 있는 특별한 테이프를 습관처럼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항상 기억하고 계셔 그러니까 우울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돼.”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야. 그러니까 모든 일이 잘 될거야.”
“만일 너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해.” 이런 말들이 사실입니까?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쁜 느낌들만 허락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에서부터 고통에 이르는 감정의 전영역을 체험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다양한 느낌들을 주셨는데 어찌 그분이 우리가 긍정적인 느낌들만 경험하길 원하시겠습니까?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마음이 아프면 마음껏 아파해. 슬픔을 참으려 하지 말고 우울하면 우울해 하는 것도 괜찮아. 감정을 다 털어 내고 솔직해져. 그래야 그 감정을 남은 인생 동안 끌고 다닐 필요가 없어지잖아 끝까지 슬퍼해! 그리고 나서 그 다음 것을 생각하자.”
예수께서도 그렇게 강렬한 감정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분노, 걱정 그리고 우울함과 같은 감정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분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주기도 합니다. 이런 점이 바로 내가 앞에서 언급한 “제한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이 두 경우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당신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슬픔(분노, 걱정)을 느낍니까?
-그 감정의 강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이런 감정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습니까? 한 달 정도입니까, 아니면 1년, 아니면 5년이나 되었습니까?
첫째 / 감정의 발생 빈도
격렬한 감정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우리의 상태를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에 관계없이 늘 걱정을 달고 다니는데 그런 만성적인 염려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부족함을 말해 줍니다.
둘째 / 감정의 강도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들 또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만일 직장을 잃은 후에,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아주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믿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삶이 죽는 일과 같은 사건들은 억제하기 힘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일시적으로 감정 조절을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나의 아내나 자녀들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고,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기능은 한동안 마비될 것입니다.
셋째 / 감정의 지속 정도
오래 지속되는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감정들도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한 사건에 대해 앞으로 30년 동안 계속 걱정하고 우울해 하고 화를 낸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믿지 못하고 있는 표시일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건 때문에 평생 동안 화를 내며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들과 상담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연약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한 말로 일러주신 용서를 할 수도 없었고 그 사건들을 잊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필요가 있는 동시에, 그 감정이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에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검토해 볼 만큼 정직하기도 해야 합니다. 감정을 무조건 억제하거나 함부로 발산하는 것은 대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바를 적절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감정을 표현하되 우리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영적으로 강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용하실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설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영적으로 강하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기만 하면 어느 때든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통해서 무슨 일이라도 다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사람이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내가 반드시 영적인 거장이 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자신의 연약함과 갈등에 대해 솔직해질수록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더욱 건전하고 현실적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가 거짓말들을 버리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병들어” 있는 자들이고 그리스도라는 의사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이 땅에 발붙이고 살면서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동안은 기독교를 완전한 모습으로 대표해 주기보다는 늘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완전한 체하는 것이 오히려 해롭고 건전하지 못합니다. 앞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갈등의 현실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거짓말 테이프들에 붙잡혀 있지 않도록 해주는 것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더 큰 배려는 없습니다.
거짓말을 물리치는 방법
첫째 방법 / 사고 정지
진실한 “자신과의 대화”를 아무리 많이 반복한다 할지라도 거짓말들과 그것들이 일으키는 감정적 상처들이 사라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사고 정지 방법”이 매우 유용합니다. 어떤 문제나 고민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사람일수록 이 방법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먼저, 걱정(혹은 분노 혹은 우울 혹은 죄책감)을 일으키는 바로 그 생각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15 - 30초 뒤에 “그만!”이라고 외치든지 아니면 큰 소리를 한번 질러 보십시오. 아마도 초시계가 하나 필요할 겁니다. 이런 행동이 당신의 생각과 그것과 관련된 감정들을 교란시킵니다. 이렇게 여러번 하고 나면 소리의 강도를 줄이거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당신이 그 생각을 그만하게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사고 정지 방법은 마음속에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사고를 방해함으로써 도움을 줍니다. 또한 그 방법은 비합리적인 생각들이나 거짓말들이 제거되어질 때(진리로 거짓말들을 공박하든지 아니면 그 생각을 완전히 정지시킴으로써 그렇게 하든지 간에) 우리가 감정적으로 더욱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러한 접근 방법 자체가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거짓말들을 제거시켜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한동안 거짓된 생각들을 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데 도움을 주고, 그 결과 당신의 감정적인 손상과 상처를 줄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 방법 / 성경 암송과 묵상
그리스도인이 (종교적이든 아니면 다른 내용이든지 관계없이) 거짓말들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은 (익히 알고 있기는 하지만 종종 잘못 상용하는 것으로서) 다름 아닌 성경 암송과 묵상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거짓말과 싸울 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최고의 방법입니다. 사단을 “거짓말들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요한복음 8:44 참조). 당신이 처함 상황을 다음과 같이 그려 보십시오, 하나님과 사단이 당신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서로 엄청난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무기를 진리이고 사단의 무기는 거짓말입니다. 전투는 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거짓말 테이프들을 듣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진리를 선택할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적절히 반응할 것이고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빌 4:7 참조). 반면 거짓말을 택할 경우에는 우리는 그 정도에 비례하여 감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진리와 거짓말들을 복합적으로 선택하게 되면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이 혼란스러운 감정적, 영적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경 암송과 묵상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합니까?
한 구절을 택한 후 그 구절을 날마다 마음속으로 계속 반복 암송하여 마침내 그 구절이 생각의 일부가 되게 하고, 그 구절이 당신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도록, 또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여유를 갖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묵상하고 그것을 자신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거짓말들이 암약하고 있는 우리 마음 가장 깊숙한 곳으로 진리를 침투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 방법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들어 쓰시사 우리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거짓말들의 실상을 꿰뚫어 보도록 해주십니다.
모든 위대한 신앙인들은 예외 없이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머리로 알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영적 성정은 반드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성경에서 배운 것을 적용하고, 성경 구절들을 그 내용으로만 알 뿐만 아니라 그 구절들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이 한 가지 노력을 경주해 나갈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거짓말의 아버지” 인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무기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이제 이 방법에 대해 생각만 하지 말고 실제로 실천해 보십시오. 비록 한 달에 한 구절밖에 묵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많은 거짓말들을 덮고 있었던 검은 구름을 이 방법을 통해 얼마나 많이 제거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출처: 창골산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