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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우기

드라마 "주몽"의 모순

작성자靑野|작성시간07.01.03|조회수380 목록 댓글 0

요새 MBC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주몽의 인기가 가히 하늘을 찌르고 남겠다.

요즘 세간에는 주몽 이야기가 한창 화제가 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주몽 관련 역사소설, 역사만화 책들이 대거 출판되고 있다. 더욱이 1960년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후 첫 고구려 사극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갖고 있다. 드라마 주몽이 우리에게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데 크나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 주몽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바로 역사 고증 문제이다. 제작진은 역사고증에 철저히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학도인 본인의 눈에 보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부터 필자는 드라마 주몽이 담고 있는 딜레마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1. 고조선과 한나라

 

드라마 주몽은 첫 시작 때 고조선이 한에게 멸망하고 고조선의 유민들이 한나라에 대항하는 투쟁을

벌였다고 그렸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의문이 들었다. 과연 고조선이 한나라의 침략에 멸망했을까?

물론 조선이 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멸망한 조선은 위만조선이지, 단군조선

이 아니다. 위만조선은 단군조선의 일부일 뿐이다. 윤내현 교수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조선은

만주, 한반도, 연해주, 북경 일대를 다스리는 거대제국이었고, 위만조선은 현 북경 일대에 자리잡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라 설명한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않은 한단고기 역시 위만조선이 진조선(단군

조선)의 제후국인 번조선이 위만에 의해 망해 위만조선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조선은 춘추전국시대에 자주 연나라, 제나라를 공격하여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만큼 강력한 국가였다. 하지만 드라마 주몽은 한나라는 강력하게, 그에 비해 고조선은 약하게 그리고 있다. 이는 사

실과 다르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전쟁시 위만조선이 1년동안 전쟁에서 패하지 않고 승리한 점, 그

리고 위만조선의 멸망이 한나라 군사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위만조선의 내분 때문이었다. 더욱이 위

만조선 전쟁에 참가한 한나라 장군들이 극형에 처한 점,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위만조선의 땅 4군을 나눠가졌다는 점에서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단군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망하지 않았다면 누구에게 망했을까? 한단고기, 규원사화는 조선이 자체적으로 해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22세 단군 색불루의 쿠데타로 단군의 정통성이 결여되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영향을 받아 조선 역시 거수국 들간의 다툼이 심해지는 등 단군이 가진 병권, 외교권이 약화됨으로써 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가 조선을 자체적으로 해체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조선을 부여(북부여)가 이어받았는데 이 부여의 군주가 바로 해모수라고 한다.

 

단군조선의 멸망에 관해서는 의문이 많지만, 적어도 단군조선이 한나라와 대등한 강국이었음은 주

지할 바 없는 사실이다. 드라마 주몽에서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조선에서 철기를 사용했음에도 불

구하고 청동기를 사용했다고 그리고 있다. 이는 고증을 무시한 역사왜곡이다.

 

논어 헌문에 의하면 공자가 "제나라 관중이 아니었다면 중국은 피발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피발은 종발을 뜻하며 고대 조선의 상투 트는 모양을 말한다. 이는 고조선이 춘추전국시대

때 중국보다 앞선 국력을 가진 국가였음을 뜻한다. 게다가 역사스페셜에서는 고조선이 한의 육군 5

만과 수군 7천을 상대로 1년 동안 버텼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나라 수군을 몰살시키는 등 큰 승리

를 거둔 점,  고조선이 망한 것이 한나라 군대의 공격이 아닌 고조선 내부의 분열이라는 점을 들어

고조선의 국가역량이 3-4세기의 고구려보다 앞섰다고 본다. 이로 보아 고조선은 드라마 주몽에서

그려지는 것 처럼 한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약소국이 아니라 적어도 한나라, 중국과 대등한 강국이

었음을 뜻한다.

 

2. 한나라 철기군

 

드라마 주몽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이 바로 이 한나라 철기군의 등장일 것이다. 과연 한나라가 철기군을 운용했을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NO다. 한나라는 철기군을 운용한 적도 없거니와 그들은 농경민족이라 말과 친숙하지 못하다. 오죽하면 춘추전국시대 때 조나라 무령왕이 북방민족 같이 기병 중심의 군대운용체제를 갖추자 오랑캐의 풍습을 따랐다고 했을까?

 

문헌상으로 동아시아에 철기가 등장하는 건 고구려이다. 철기군의 시초는 고구려를 비롯한 동이계 국가임에도 주몽은 엉뚱하게 한나라가 철기군을 운용했다고 한다.

 

 

3. 한사군의 위치

 

현재까지 논란이 많은게 바로 이 한사군이다. 조선이 망한 후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군현이 바로 이

한사군이다. 현재 한사군은 그 위치, 그리고 과연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이 세운 군현인가에 대해 논

란이 많다. 필자는 여기서 한사군 논쟁을 하기보다는 한사군의 위치를 고찰하고자 한다.

 

중국 한대의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당시 한의 수도였던 뤄양(洛陽·허난

성 서쪽의 도시) 동북쪽으로 5000리에 낙랑군이, 4000리에 현도군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한

서(漢書)’의 무릉서(茂陵書)에는 장안(뤄양보다 더 서쪽에 있는 현재의 시안·西安)에서 6138리에 임

둔군이, 7640리에 진번군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리는 당대(唐代) 이후 0.393km로 고정된다. 그러나 한나라 시절, 1리가 얼마인가에는 논란이 있지

 위나라 기록에 등장하는 뤄양 및 장안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도시들의 거리를 비교해 한대의 1리가 현재 거리의 75% 미만일 것으로 보여진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또 한대의 기록과 현재 지도상의 거리 비교를 통해 한사군의 위치를 추정해보면 지금까지 평양지역

으로 추정돼 온 낙랑군의 경우 중간에 산악지대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랴오닝 성 서부 진

저우(錦州)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또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알려진 현도군은 허베이 성 동쪽과

랴오닝 성 서부를, 황해도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진번군은 압록강 서북쪽을 넘어설 수 없

다.

 

게다가 한대의 도로 굴곡지수를 감안할 경우 한반도에서 가장 멀었던 현도군은 현재 베이징(北京)

동북쪽 지역,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웠던 진번군은 랴오닝 성 서부 다링허(大凌河) 유역이었을 것이

라고 보여진다. 이는 1990년대 초반 랴오닝 성 진저우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는 직인이

찍힌 봉니(封泥·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가 발굴된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일치한다.

 

게다가 중국 고지도와 고 문헌에 따르면 낙랑군의 위치가 오늘날 갈석산 수성현 일대라는 점, 중국 요서지방인 요녕성 진시시(錦西市) 소왕대에서 임둔 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니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미루어볼 때 한사군은 요서지방에 있었으며 현도군 역시 주몽에서 그려진대로 동가강 유역이 아닌 요서지방에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4. 다물군 대장 해모수?

 

주몽에서 극 중 해모수 역할인 허준호씨의 명연기로 해모수에 대한 관심 역시 뜨거워졌다.

해모수는 과연 누구일까? 드라마 주몽에서는 고조선 유민을 이끈 다물군 대장 이라고 그렸다.

과연 그럴까?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금와왕의 아버지인 해부루의 아버지, 그러니까 금와왕의 할아

버지라고 그리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북부여를 세운 임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극 중에서는 해모수와 금와를 친구 사이로 설정했다. 아무리 재미를 위한 것이라지만, 역사문헌에

기록된 사실을 바꾸면서까지 드라마를 만들어야 했을까? 해모수는 북부여를 세운 제왕이다. 한단고

기 북부여기에 의하면 해모수는 기원전 239년 웅심산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개국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는 금와왕과는 무려 150년의 차이가 나는 인물이다.

 

즉 사서에 기록된 대로 해모수는 다물군 대장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를 세운 제왕이었다. 한가지 더 말하자면 북부여기에는 주몽의 아버지를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의 손자 불리지(고모수)라고 한다.

 

여기서 해모수의 의미에 대해 재미있는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윤내현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해모수(解慕漱)의 '해'는 '하늘에 떠 있는 해'를 그대로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모수'는 '머슴아'란 뜻이라고 한다.'머슴아'란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바로 사내, 남자, 아들이란 말이

다. 경상도에서는 지금도 '머슴아'란 말을 쓰지요. 그럼 결론적으로 '해모수'란 말의 뜻은 뭐냐?

'태양의 아들'이란 뜻을 가진 일반명사인 것이다. 사람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예전에 황제를 '천자(天子)'로 불렀듯이 바로 그 뜻을 표현한 말이다.

 

5. 현도군 태수의 말에 우리의 옛 국가들의 군장들이 벌벌 떨었다?

 

드라마 주몽을 보면 한나라의 한 군현인 현도군 태수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현도군 태수의 말 한마

디에 우리나라 옛 국가들의 임금들이 현도군 치소로 모이고 그의 한 마디에 벌벌떠는 설정은 가관

이 아닐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일개 군 태수 따위가 한 나라를 지배하는 임금들을 오라

가라 하며, 그들에게 호통을 칠 수 있을까? 이는 우리 역사가 식민지 역사에서 출발했다는 식민사관을 드라마 주몽 작가와 고증팀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6. 주몽은 나약한 인물?

 

 

드라마 주몽에서는 주몽을 나약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나약한 주몽이 차츰 성장하면서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는 설정인 것이다. 물론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극 중 재미를 부여하기 위해 작가들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사실을 초등학생들이 믿을까 우려된다.

 

사서에 의하면 주몽은 7세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활 쏘기는 일종의 무예였다.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은 주몽의 무예가 보통 사람을 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몽이 강건한 인물이었음을 뜻한다. 하지만 드라마 주몽에서는 주몽을 나약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주몽의 본 이름은 추모이다. 이는 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주몽이라 불리운 이유는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다.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 한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드라마 주몽에서는 주몽이 태어나자 이름을 주몽이라 지었다고 한다. 주몽의 본래 이름은 추모이고, 주몽은 추모의 별칭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7. 추모성왕과 동명성왕

 

 

우리는 고구려의 시조를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 중 하나인 삼국사기

에 고구려의 시조를 동명성왕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과 동명왕은 다른 인물이다.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왕(鄒牟王)으로, 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후대 사가들이 쓴 기록과

고구려인이 남긴 기록중 어느게 더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알릴까? 바로 고구려인들이 남긴 기록 즉

광개토태왕릉비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왕은 부여의 건국시조이다.

이제부터 왜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이 동명성왕으로 둔갑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아닌 부여의 시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

로 알려진 것과 달리 추모왕과 동명왕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인데 어느 시점부터 고구려 사람들에 의

해 한 명의 영웅이 된 것이다. 서기 60년경 쓰여진 후한 시대 왕충의 『논형』< 길험편>에는 우리

에게 낯익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북쪽 이민족의 탁리국에 왕을 모시는 여자 시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

시종은 계란 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 돼지

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놓고는 말에 밟

혀 죽도록 했으나 말들 역시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아마 하늘 신의 자식

일 것이라 생각하여 그의 모친에게 노비로 거두어 기르게 했으며, 동명(東明)이라 부르며 소나 말을

치게 하였다. 동명의 활솜씨가 뛰어나자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했

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적하던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그는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에 부여국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후한서』의 부여국 기록을 보면 부여를 건국한 시조 설화가 논형과 비슷하다.

 

"색리국(索離國) 왕이 출타했을 때 그의 시녀가 임신하자 죽이려다가 계란만한 기(氣)가 들어와 임

신했다 하여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 우리, 마굿

간에 버렸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죽지 않자 어머니에게 주어 기르도록 하니 이가 바로 동명(東明)

이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자 왕이 그 용맹함을 꺼리어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도망하는데 고

기와 자라들이 엄체수를 건너게 도와주어 무사히 건넌 후 부여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고주몽) 이야기와 거의 모든 것이 같다. 그러나 이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국의 건국 신화이다. 그리고 추모왕이 아닌 동명왕의 이야기이다.

 

구 분 동명왕설화 추모왕 설화
출생지 탁리국 고리국 부여국
어머니 탁리국왕의 시종 유화부인
임신경위 하늘에서 내려온 달걀같은 기운 유화부인을 쫓아온 햇빛
탄생상황 일반아이와 같은 태생 난생(큰 알을 낳음)
시기상대 탁리국왕 부여의 왕자
도망간방향 남쪽으로 도망 동남으로 도망
건넌 강 엄체수,시엄수,엄수,엄표수 보술수,엄체수,엄호수,엄리대수
건국한 국가 부여 고구려
기록된 책 논형,위략,수신기,양서,수서,북사,범원주림 등 광개토대왕비문,삼국사기,위서,동명왕편,삼국유사,주서, 통전 등
상호공통점 짐승의 보호를 받음, 활을 잘쏘고 말을 기름 자라와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가 같음

 

위와 같이 동명왕과 추모왕은 차이가 있다. 기록상으로 본다면 동명왕계 기록이 원형이고, 추모왕

의 이야기는 동명왕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수정한 것에 불과하다.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가 부여와 건국신화를 공유할 수 있을만큼 동일한 문화적 전통

을 가졌다는 것과 또 동명과 추모왕이 알과 관련있는 난생설화를 통해 범 동이족의 공통정서(부여

의 동명왕, 고구려의 추모왕, 중국 동해안에 살던 서이족의 서언왕, 가야의 김수로왕, 신라의 박혁

거세가 전부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다)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에 의해 사라진 부여의 시조 동명왕

 

부여의 건국영웅인 동명왕은 건국신화를 제외한 일반 역사서에는 그 실체가 누구인지 나타나있지

않는다. 해모수나 해부루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동명왕은 부여족이 숭배한 뛰어난 영웅이었음은 분명하다. 고구려에서 그의 건국신화를 채용해야

할 만큼 그가 부여족에서 차지한 위상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출신지마저 다른 동명왕과 추모왕의 이야기가 언제 어떻게 혼합되어 우리가 한 사람의 이

야기로 알게 되었을까?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무신왕 5년(22년) 부여 공격을 기점

으로 부여를 능가하는 강대국이 된다. 서기 3세기에 이르러 부여는 선비족의 공격에 밀려 겨우 명백

을 유지하는 약소국이 되고, 고구려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의 즉위를 통해 왕실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게 되면서 왕실의 역사를

재정립하게 된다. 이 무렵, 계루부는 그들의 시조인 추모왕의 건국을 신화로써 미화하기 시작한 것

같다. 391년에 등극한 광개토호태왕 시절에는 추모왕의 건국신화가 확립되어 일반 백성들도 건국신

화를 전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추모왕을 미화하기 위하여 부여의 건국영웅인 동명왕의 건국

신화가 그대로 채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정리되어 대내외에 과시되자 430년경 고구려를 방문한 북위 사신의 견문을 듣

고 적은 『위서』에서 비로소 중국인들도 추모왕의 건국신화를 고구려전에 수록하게 된 것으로 보

인다. 아울러 삼국사기, 동명왕편, 삼국유사 등 고려에서 만들어진 역사서에서도 고구려에서 전해

지는 건국신화를 그대로 전하게 되었다. 특히 삼국사기는 추모왕을 곧 동명성왕이라 못받고 있어

두 사람 간의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므로 동명왕의 건국신화는

거의 사라질 뻔하고 대신 추모왕의 건국신화가 우리에게 더 많이 전해졌던 것이다.

 

 

동명왕은 북부여 5세 고두막한 단제?

 

한단고기 북부여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계유 13년 한의 유철(무제)이 평나를 노략질항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

수니 그 지방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호응하면서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쳤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시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 곳에 도읍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라고 하니 단제(고우루)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고두막한)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君臣)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에 국상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 

 -『북부여기』 제4세 고우루 단제 조 -

 

위 기록은 동명(고두막한)이 한나라 군대를 쳐부수어, 군을 장악하자, 당시 부여의 임금이었던 고우루를 핍박하여 해부루를 동쪽으로 내쫓고 자신이 북부여의 임금이 되는 것을 말한다. 북부여기를 보면 동명이 부여 왕에 오르게 된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유 원년(기원전 108)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帝:동명=고두막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고조선 마지막 단군)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중략)  을미 23년(기원전 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동명)가 이를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 『북부여기』 제5세 단군 고두막 조 -

 

북부여기에 의하면 동명은 바로 부여 5세 단군이자, 북부여의 시조인 고두막한이다. 현재 한단고기는 위서 취급을 받지만, 그 내용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더욱이 한국 고대 사서가 부족한 우리에게 있어 한단고기는 조선상고사와 함께, 베일에 가려진 한국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하겠다. 그러니 무조건 배척하기 보다는 일단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검토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단고기 북부여기의 내용이 맞다면 동명은 북부여의 개국조 고두막한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은 고두막한의 아들인 부여 6세 임금 고무서의 사위가 되어, 고무서가 죽자 그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한다.

 

고구려의 존속년도가 700년이 아닌 900년이라는 얘기가 많은데 북부여기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구려의 존속년도의 해답은 자연히 풀린다. 부여의 역년 + 부여를 계승한 고주몽이 개국한 고구려의 역년을 합하면 자연스레 고구려 900년 역사라는 실마리가 풀린다.

 

 

올린이: 21세기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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