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과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의 업적과 명언

이번 5월 초의 연휴는 ‘부처님의 은덕’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긴 연휴가 이어질 예정인데요.
주말과 어린이날, 부처님의 날(근로자의 날과 샌드위치 휴일까지 생각하면)을 포함한 총 6일의 긴 연휴 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5월 5일 어린이날이 가장 기대되는데요, 어른이 된 지금도 떠올리면 설레는 ‘어린이날!’
오늘은 ‘어린이 날’과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어린이와 어린이날
우선 ‘어린이’라는 말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린이’는 사전적 의미로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아동을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킨 이 ‘어린이’라는 단어는 1921년 소파 방정환이 공식화했습니다.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방정환의 신념이 잘 묻어나는 부분인데요.
<색동회 회원들>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날은 1923년 방정환과 색동회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어린이들이 미래 사회의 주역으로서 좋은 환경에서 씩씩하게 자라나기를 기원해 만들어진 이 날은 매년 5월 5일이며, 법정 공휴일입니다.
어린이날이 처음 시작될 때는 5월 1일이었으나,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주 월요일로 바뀌어 치르게 됐고,
1939년 어린이날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본 일제에 의해 중단된 뒤, 광복 후인 1946년 5월 5일로 정해졌으며,
1970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로 정해져 지금에 이릅니다.
국가 성립 이후에야 법제화되기는 했지만 어린이 날을 만든 방정환의 공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텐데요.
그렇다면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은 어떤 사람일까요?
소파 방정환의 업적 : 어린이날을 만들다

<이미지 출처: 재단법인 한국방정환재단>
방정환은 1899년 태어나 193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호는 소파(小波)이며, 언론인, 교육자. 문학가 등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방정환은 서울 유복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한문을 배웠지만, 7세에 신식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안이 몰락하자 그 역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천도교에 가입한 부친 덕에 방정환은 토론 연설 모임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계속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고에 입학하기도 했으나, 그의 적성에는 맞지 않아 자퇴하고
17세의 나이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 필사를 맡아 일하며 독학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방정환은 그를 눈 여겨 보던 독립운동가 권병덕의 소개로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고 원하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하던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했고,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후 석방된 방정환은 천도교 잡지인 개벽의 도교 특파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일본에서 평소 관심이 많던 아동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청강생으로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 등을 연구했습니다.
이후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에 뛰어듭니다.
방정환은 소년운동의 일환으로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 아동을 위한 최초의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습니다.
아동을 위해 활발히 운동을 진행하던 방정환은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기도 했으며, 1928년 세계 20여 개 나라에서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방정환은 아동문학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방정환은
개작과 번안은 물론 이거니와 앞서 말했던 최초의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통해 아동문학가의 발굴과 육성에 힘썼고,
어린이의 동심이 회복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방정환 명언
'나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
'어린이를 내 아들놈, 내 딸년하고 자기 물건같이 알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인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의 얼굴을 보라.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그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 고요하고 평화롭다.'
'어린이는 아래의 세 가지 세상에서 온갖 것을 미화시킨다. 이야기 세상, 노래 세상, 그림 세상.'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입니다. 어른들은 미래의 희망이요, 주인공이 될 우리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존경합시다!'
'어린이 여러분! 씩씩하고 정직한 어린이가 됩시다! 여러분들은 우리 나라를 떠받칠 기둥입니다.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어린이로 바르게 자랍시다!'
'참혹하게도 우리 아이들에겐 노래가 없어. 우리는 싸워야겠어. 이겨야겠어.
나는 우리네 아이들을 한참 쳐다보다가 눈시울을 적실 적이 많았어.
마치 그 아이들이 가시밭을 걷는 것 같아서. 윤! 동요곡 좀 하나 만들어 봐 줘.
정서가 부친 우리 아이들에게 꽃다운 선물을 보내 주지 않을테야?'
- 동요작곡가인 윤극영 선생에게 하신 말씀 -
['인간 소파상' 윤극영 (동요작곡가) 선생 글]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두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 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그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하늘의 소리입니다.
죄 없고 허물 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 나라! 그것은 우리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하늘 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사람이 모두 깨끗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 [어린이]지 창간호 첫머리 -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어린이)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습니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 1923년 5월 1일 첫번째 맞는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뿌린 전단속 내용 -
'어린 사람의 운동도 크지만 제일에 앞으로 그들을 직접 낳고 기르고
교양해 나갈 어머니들의 문제도 또한 큰 것이다.'
- [신여성]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
'이 나라 어린이를 위하여 좀더 힘쓰지 못하고 가니 미안하다.'
- 1931년 7월 23일 방정환 선생 유언 -

<소파 방정환 성생의 묘. 이미지 출처: 시사인천>
이렇게 치열하게 살던 방정환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재정적인 문제 등 극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지게 되고
1931년 7월 23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펜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방정환은 마지막 순간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끝까지 어린이들을 걱정했던 방정환 정말 치열하고도 존경스러운 삶이 아닐까요?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된 방정환.
짧은 생 ‘어린이’의 인권을 위해 이리도 치열한 삶을 살았기에 늦게나마 이런 훈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린이날을 어른이 되어 바라보는 지금, 마냥 신나는 휴일이 아니라 ‘어린이 인권’과 ‘방정환’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출처: Hai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