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1948년 제1차 중동전쟁과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중동 지역에서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로써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쟁에서의 승리는 이스라엘이 절대 아랍 주변국들에 비해서 많은 숫자의 병력과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도리어 아랍 국가들은 소련으로부터 온갖 신형 무기들을 구입하였고 심지어 미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무기를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었던 반면에 이스라엘은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구입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미국도 소련과 아랍 국가들의 눈치가 보여서 편하게 이스라엘에게 무기 공급을 해줄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습니다.
그런 탓에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탱크와 전투기들은 프랑스제에 의존하거나 구형 셔먼 탱크를 개조한 슈퍼 셔먼 시리즈를 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두번의 중동전쟁에서 보여주었 듯이 이스라엘군의 맨 파워는 아랍 어느 나라들에 비교해도 월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과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전투기 조종사들과 지상군 병력들은 가히 일당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겉 모습은 아랍 열국들의 군대에 비교해서 "다윗"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전에서 그들의 위력은 "골리앗"에 더 가까웠던 것입니다.
제3차 중동전쟁(이후 "6일 전쟁")은 1967년 6월에 발발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전쟁의 결과로써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의 지배권을 획득하여 옛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마침내 통일하였고 이집트 영토였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서 "6일 전쟁"의 결과로 바뀐 중동 지역의 지도를 한 눈에 한번 흝어보는 것이 앞으로 제글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미색 부분은 원래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그리고 1967년 "6일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새롭게 점령한 지역은 살구색 지역으로 표시됩니다.
"Golan Heights"라고 써있는 지명이 바로 시리아와의 전투 지역인 골란 고원이고
이스라엘 서쪽에 시나이 반도(Sinai Pxninsula) 입니다.
6일 전쟁의 원인
1956년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이유로 발발했던 2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에 대항하여 함께 참전한 영국-프랑스 군들의 미미한 전공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군의 강력한 군사력은 불과 몇개월 만에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에서 이집트군을 축출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압박과 국제연합의 중재로 영-프-이스라엘군 모두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해야 하였고 반도 전체가 비무장지대가 되어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게 됩니다.
당연히 드넓은 시나이 반도를 손에 넣었다가 외압에 의해서 포기해야 했던 이스라엘군은 원통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나마 성과라면 시나이 반도 남단의 이집트 요새 샬롬엘 쉐이크가 비무장 지대에 포함됨에 따라서 이스라엘은 홍해로 빠져 나가기 위한 유일한 관문인 아카바 항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1964년 아랍측에서는 요르단의 암만을 본부로 하여 훗날 이스라엘의 눈에 가시가 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결성하였는데 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및 게릴라 투쟁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과 아랍 진영의 긴장과 갈등을 부채질하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이었던 골다 메이어는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순회하며 연설하여 많은 유태인들과 이스라엘 지지 세력으로부터 전쟁 준비를 위한 자금을 모금하였고, 이스라엘의 국방 장관아었던 모셰 다얀은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선진국들로부터 무기 구입을 위한 적극적인 협의를 진행하였습니다.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1969년 공식 출범하지만 1964년부터 사실상의 대이스라엘 저항 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사진은 1969년 공식 출범식을 갖는 PLO 지도자들, 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입니다.
2004년 그는 갑작스럽게 병사를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 모사드의 독살이라는 음모론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한편 시리아는 바로 인접해있는 이스라엘과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데 특히 철저한 반유대주의와 반 서구주의를 주장하는 바아스 당이 시리아의 실권을 장학한 후에 국가수반인 아인 하페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더욱 강경정책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당시 시리아와 이스라엘 국경 지역인 골란 고원을 중심으로 양국간에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시리아와 이집트가 1966년 10월 군사 동맹까지 맺게 되자 또 다시 이스라엘을 상대로 아랍 열국들이 떼거지로 맞짱을 뜨려는 험악한 분위기에 휩쌓이게 됩니다. 제1차 중동전쟁(1948년~1949년)의 결과로 골란 고원은 양국 사이에 비무장지대로 결정되었으나 시리아는 골란 고원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들어가 농작물을 경작하겠다는 일방적인 발표를 하자 마침내 시리아의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6일 전쟁"의 시발점인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무력 충돌의 원인입니다. 일단 양국의 전투가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리아와 요르단은 "큰 형님" 이집트의 개입을 요구하였고 이미 약 10년전에 이스라엘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실각 위기까지 갔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역시 2차 중동전쟁에서 겪었던 치욕을 설욕하겠다는 마음 뿐만 아니라 이집트 역시 이스라엘이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아랍국가들과 차이가 없었으므로 이스라엘에게 "만약 시리아를 공격하면 이집트는 바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을 하게됩니다.(문제는 나세르만큼 그의 각료들이나 군 지휘관들이 강력한 전쟁의 의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이미 전쟁을 기정 사실화 하고 전쟁 준비를 서두르고 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지체없이 1967년 5월 29일에 북쪽에서는 시리아, 동쪽에서는 요르단, 남쪽에서는 이집트와 동시에 상대하는 전쟁 체제에 돌입하게 됩니다.
1967년 6월 5일 새벽 - 전쟁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승부가 갈리다!
프랑스제 전투기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공군은 공격 개시 3시간안에 아랍측 공군기지를 공습하여 무려 400대의 전투기들을 파괴하였습니다. 이중 286대가 이집트 공군의 전투기들이었고 이런 선제 공격은 덩치만 믿고있던 이집트를 순식간에 패닉에 빠뜨리는 성공적인 기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엄청난 전공을 세운 이스라엘 공군의 손실은 고작 19대였습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이스라엘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가운데 곧바로 이스라엘 지상군은 시나이 반도로 진격하여 순식간에 북진하여 10년전에 손아귀에 쥐었다가 포기했던 수에즈 운하까지 도착하게 됩니다.
(1967년 6월 5일 전쟁 개시일 아침에 시나이 지역으로 진군하는 이스라엘 지상군의 센츄리언 탱크들과 프랑스제 전폭기 Vautour II )
이런 전광석화와 같은 이스라엘의 공격은 이집트 군 시설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그 결과 2차 중동전쟁에 이어서 다시 한번 이집트군을 초반에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 발발 불과 4일 만에 이집트군은 국제연합이 제안한 정전 권고를 수락하며 치욕수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아랍 국가들의 고질적인 문제, 쉽게 뭉치지만 상호불신의 모래알 단결력
시리아는 전쟁 전까지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나라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치밀하고 신속한 공격으로 적을 제압한 반면에 시리아는 정작 군사 동맹까지 맺었던 이집트와 공고한 공조 체제를 구축하지도 못한데다가 소극적인 전투 대응으로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에게 이집트가 난타를 당하고 있던 전쟁 초기에 망연자실하고 손을 놓고 있는 바람에 시나이 반도에서의 이스라엘 작전은 성공을 거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이스라엘 주력군은 이번에는 동쪽으로 넘어와서 골란 고원에 시리아와 전투를 위해서 신속하게 이동하였고 시리아는 이스라엘 주력 부대인 기갑 부대가 골란 고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국제연합의 정전 권고를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수락하였습니다.
("6일 전쟁" 중에 이스라엘의 프랑스제 경전차 AMX-13,
이집트의 소련제 T-55에 비하면 장난감 같은 성능이었지만 신속한 기동력으로 적 기갑부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정찰 임무에 큰 효과를 보여줍니다.)
한편 동쪽에 요르단 역시 이스라엘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자 초반에 위축되어 국제연합의 정전 권고를 수락하였는데 결국 "6일 전쟁"이라고 하지만 요르단은 불과 3일만에, 이집트는 4일만에, 시리아는 5일만에 정전 권고를 수락한 셈입니다.
도대체 6일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지상 최대의 작전 - 4개국을 상대로 한 이스라엘 공군의 단 하루 동안의 기습작전
1967년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 공군 미라지 III 전투기들은 4대씩 편대를 이루어 지중해 해면을 날아 이집트 공군기지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미쳐 이스라엘의 기습을 예측하지 못한 이집트 공군은 허둥지둥 당황하였고 지상에서 제대로 이륙도 못해보고 엄청난 숫자의 소련제 신형 미그-21기들이 이스라엘 전투기의 폭격으로 허무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흣닐 군사 전문가들은 이날의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은 항공기가 전쟁에 사용된 이래 가장 완벽한 기습 작전이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엄청난 성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공격에 파괴된 이집트 미그-17 전투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은 당시에 이미 레이더 방공 시스템이 구축되어있던 이집트 공군이 어떻게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수 있었는가? 이집트 공군 기지는 한두곳이 아니었고 넓은 사막 지대에 수십 곳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공습에 대비한 레이더 감시망도 운영 중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그 당시에 이미 세계 최고 첩보기관 중에 하나라 평가되던 모사드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모사드는 아랍 주변군의 비행장 위치 및 상세 정보는 물론 심지어 적국 공군 조종사들의 가족 사항과 레이더 요원들의 근무 습관까지 완전히 분석하여 절묘한 타이밍으로 수립한 기습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통계상 아랍 공군과의 공중전에서 압도적인 격추 능력을 보여준 탁월한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들의 역량이 또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기습 작전을 200% 성공적인 결과로 마무리 짓게 합니다.
(이스라엘 공군에 의해 완파된 이집트 폭격기들)
시리아와 요드단 공군 역시 이집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스라엘 공군이 일제히 기습 공격을 한지 불과 25분만에 두 나라의 공군은 완전히 궤멸되어 버립니다. 6일 전쟁 기간 동안 아랍측 전투기가 이스라엘 본토를 공습한 것은 단 1회에 불구한데 이라크 공군에서 이스라엘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TU-16 폭격기가 이스라엘 나타냐 지역에 3~4발의 폭탄을 투하하였으나 즉시 보복 공격을 시작한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이라크가 보유한 신형 미그-21 대대를 완전히 파괴해버립니다.
("6일 전쟁" 이스라엘 공군 기습작전의 수훈갑은 단연 프랑스제 미라쥬 III 전투기였습니다.)
(미라쥬III 이스라엘 공군)
혹자는 이스라엘 공군의 이 전설적인 기습 작전을 2차대전 중에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과 비교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격은 정보의 착오로 정작 가장 중요한 공격 목표였던 미국 항공모함들은 공격 당일 진주만에 없었고 그런 탓에 애꿎은 순양함과 구축함들만 격침되었지만 실제로 진주만 공격이 미국 해군(해군에 소속된 공군력 포함) 전력에 치명타를 주었다고는 전혀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작전은 세밀한 정보 수집과 분석으로 짜여진 대규모 기습 작전 계획을 최고의 기량을 가진 이스라엘 조종사들에 의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한 결과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이라크 이렇게 6일전쟁에 참전한 4개국의 공군력을 단 하루만에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는 점에서 "기적"과 같은 성공이었던 것입니다.
(1941년 진주만 공격은 미해군의 주력 항모들을 모두 놓쳐버린 상황에서 실제 전투에서 큰 위협이 되지않는 순양함과 구축함들만 격침시킨 탓에
향후 미국과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고 할 수 없는 실패작이었습니다.
도리어 태평양 전쟁 참전을 위한 미국 국민의 일치 단결을 이루어준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작전은 다수의 표적들을 절대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파괴하여 무력화 시킨
신출귀몰한 작전이었고 기적을 일궈낸 작전이었습니다.)
("6일 전쟁" 첫날 아침에 이스라엘 공군에 의해 완파된 이집트 최신형 미그-21 전투기들,
대부분이 이륙해서 공중전도 못해보고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미라쥬 전투기의 기관포와 미사일 공격으로 박살이 나버리곤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기갑부대 - 구닥다리 탱크들로 소련제 최신형 탱크들을 전멸시키다.
1965년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들이 기습 작전을 위해 비행장을 이륙한지 얼마 안된 시간에 시나이 반도 진격을 위해 전진 배치 중이었던 이스라엘 지상군 3개 사단(6만5천명의 병력과 650대의 탱크들)에게 드디어 진격 명령이 떨어집니다. 광활한 사막에 대형을 이루고 기다리고 있던 탱크들을 선봉으로 그뒤를 따르는 지상군들은 시나이 사막 지대로 거침없이 나아가기 시작한 아침 7시 45분경에는 이미 이스라엘 전투기들의 공습으로 수십개의 공군기지들이 불바다를 이룬 다음이었습니다.
(타미야제 영국군 버전의 센츄리온 마크3 탱크 키트 박스 아트,
센츄리온 탱크도 "6일 전쟁" 기간 중에 소련 신형 T-55 탱크들을 박살내버린 주공격수로써 큰 전공을 세웁니다.
훗날 슈퍼 셔먼처럼 이 영국제 탱크에이스라엘은 105mm 주포로 화력을 강화하여 Sho't라는 이름의 개조 탱크를 개발하여 1970년부터 사용합니다.)
2차 중동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군의 진격에 이집트 지상군의 방어는 무력하게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전쟁 개시 불과 몇시간 후에 시나이 반도 중심 도시 라파가 점령되었고 이집트 군은 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작전의 성공 이유가 모사드의 치밀한 정보 수집과 분석에 따른 정교한 기습 작전 수립과 이를 수행하는 출중한 공군 조종사들의 활약 덕분이라면, 지상군의 파죽지세의 공격과 그 엄청난 성공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지상군의 공격이 시작하던 그 순간 이집트 전방 부대 사단장들 중에서 아무도 제 위치를 지키는 지휘관이 없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입니다. 그날 시리아 사령관 아메르 원수가 이집트를 방문하기로 되어있어서 주요 지휘관들은 모두 그를 영접하기 위해서 근무지를 이탈하여 발타미아에 모여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상군이 기습 공격을 가할 때 정작 지휘관이 없던 이집트의 각 부대들은 더욱 더 혼란이 가중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이집트 군의 통신 보안에 대한 방심과 안일함이 이스라엘의 승리에 한몫을 담당합니다. 단적인 예로 칸 유니스로 진격하던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이집트군이 무려 10년전에 2차 중동전쟁 당시 사용하던 무전기 채널을 그대로 사용하는 바람에 기습 공격을 받고 우왕좌옹하면서 자기들끼리 무선을 주고 받는 이집트군의 무전 내용을 진격하는 도중에 고스란히 청취하면서 이집트군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군이 역정보를 동일 무선 채널로 흘리는 바람에 이집트군은 더욱 더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슈퍼 셔먼 M51 탱크는 센츄리온과 함께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주력 전차로 활약합니다.)
칸 유니스는 2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무려 200명의 팔레스타인 난미들을 학살한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치욕을 쉽게 잊고 방만한 방어 태세의 이집트군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군에게 이곳을 점령 당하는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게 됩니다.
세번째, 2차 중동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이집트군은 훈련을 소홀히 한 탓에 소련의 최신형 무기를 공급 받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 탱크가 접근하자 이집트군들은 소련제 대전차포를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발사했습니다. 하지만 포탄은 이스라엘 탱크 위를 날아서 훨씬 뒤에 이집트 마을 한복판을 "타격"(?)하였습니다. 비싼 소련 무기들을 보유했지만 충분한 훈련이 안되어있던 이집트군은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소련제 T-55 탱크는 이스라엘이 사용했던 슈퍼 셔먼,
센츄리언, AMX-13와 비교하여 다음 세대의 탱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뛰어난 신형 탱크였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운용하는 이집트 군의 맨파워와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서 "6일 전쟁"에서는 이스라엘 탱크들에 의해 학살되었습니다.)
6월 5일 점심때가 되어서 이미 시나이 반도의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점령된 상황에서 아직도 명확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이집트군은 효과적인 대응은 커녕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오후에 간신히 전열을 갖춘 이집트 기갑부대는 진격해오는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제대로 된 교전을 시작하지만 최신형 T-55 탱크를 비롯한 소련제 탱크들로 구성된 이집트 최정예 기갑 사단 조차 2차대전때 사용된 미국 M4 셔먼 전차를 개조한 M50/51과 프랑스제 AMX-13 경전차로 구성된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탱크를 가지고 있어도 조종하는 기갑병들의 능력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는 탓에 기본적으로 포격 명중률이 터무니 없이 떨어지는 이집트 탱크는 강도 높은 사격 훈련으로 단련된 이스라엘 탱크의 포격에 순식간에 불덩어리로 변했습니다.
통상 적 탱크를 발견한 시점에서 900~1,200미터 이내에 초탄을 발사해야 하는 것이 그당시 전차전 교전 원칙이었는데 이스라엘 탱크는 이렇게 발사한 초탄 또는 제2탄이 예외없이 이집트 탱크를 명중시킨 반면에 이집트 탱크는 근거리까지 이스라엘 탱크가 접근해도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하는 부실한 사격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근거리에 사격하려고 숨어있던 이집트 탱크들은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 공군에게 발각되어 기관포 세례를 받곤 하였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전차전의 승리의 한 예
전쟁 개시일 아침에 발진했던 이스라엘 전차 부대들 중에 예비역으로 구성된 요페 사단 소속 기갑 여단이 36마일의 험로를 달려서 빌라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을 때입니다. 밤 10시에 어둠 속에서 최신형 소련 T-55 탱크로 구성된 이집트 기갑 1개 여단이 자신들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군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이스라엘군이 보유하고 있는 AMX-13과 M51 탱크들은 야간 적외선 조준장치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그런 장치가 장착된 적의 소련제 탱크들과 야간에 교전을 한다는 것은 눈가리개를 하고 눈 뜬 복서와 권투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이집트 탱크들이 어둠 속에서 적외선 조준으로 정확하게 포격을 가한다면 1개 여단의 이스라엘 탱크들은 전멸도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어처구니 없는 행운이 이스라엘군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이집트 탱크들은 아직 이스라엘 탱크를 발견 못한 상황에서 언덕을 넘어오고 있었는데 밤하늘 달빛에 언덕 위에 나타난 이집트 탱크들은 비교적 선명하게 식별이 가능했으므로 선봉에 탱크들을 향해 이스라엘 탱크는 정확히 포격을 가했습니다. 몇분도 안되는 최초의 기습 포격으로 언덕 위에 T-55 이집트 탱크 7대가 파괴가 되었고 뒤 따라오던 이집트 탱크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뜻밖에 포를 난사하면서 후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외선 조준장치로 차분하게 조준하여 포격을 가했다면 달빛에 의지하는 열악한 상황에 이스라엘 탱크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겠지만 난사하는 포탄들은 이스라엘 탱크들을 전혀 명중시키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이집트 기갑부대는 허둥지둥 사막에 형성된 와디(물이 말라버린 강바닥)를 따라서 도주하다가 무거운 탱크 무게를 이기지 못한 와디의 지면에 파뭍혀서 발이 묶여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 탱크들은 아무리 적외선 조준장치가 없다고 해도 강바닥에 쳐박힌 이집트 탱크들을 향해 집중 포격을 쏟아부어 궤멸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날이 밝자 야간에 어림 짐작으로 쏟아부은 포격이 대부분 명중을 하여 무려 50대의 신형 T-55 탱크들이 완파된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차라리 이런 무능한 이집트 기갑 부대보다는 시나이 사막 요소 오소에 매설해둔 이집트군의 지뢰밭과 시나이 반도의 험난한 지형이 이스라엘 군에게는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이집트보다 더 무서운 적 - 팔레스타인 게릴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가혹 행위는 이미 이스라엘 건국 훨씬 이전부터 영국의 괴뢰 경찰 조직으로 활동하던 하가나와 그 이전 유태인 무장 조직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 식민 통치하에서 똑같이 지배를 받는 입장이었던 유태인과 아랍인들은 식민 정부에 대한 접근이 전혀 달랐습니다. 유태인들은 영국 정부와 협조하여 마치 일본 강점기에 조선인을 가장 괴롭혔던 인간들이 같은 조선인 고등계 형사였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피식민지인인 처지에 영국이 식민 통치를 하기에 훨씬 편리하도록 아랍인들을 통제하는 경찰 조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정부의 국방 장관인 모셰 다얀도 당시에는 하가나 조직에 지도자 중에 한사람이었고 제2차 중동전쟁(1956년)에 시나이 반도 진격의 과정으로 가자 지구와 시나이 지역에서 자행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학살 행위는 과연 2차대전 나치 독일의 유태인 말살 정책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1967년 6월 7일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완전 진압한 이스라엘 보병 여단)
바로 이런 배경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과 원한은 이집트와는 비교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쫒겨난 난민들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20사단은 이집트군보다 더 집요하고 철저하게 가자 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을 공격하였는데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 부대로써 그들의 공격은 이스라엘군에게 가장 힘든 상대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군은 최정예 예후다 보병 여단을 가자 지구에 급파하여 60명 전사에 200명 부상의 피해를 감수하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6월 6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팔레스타인 20사단을 무력화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전쟁 개시 후 2일째(1967년 6월 6일) 아침 - 그 전날 하루 동안 아랍 4개국의 공군이 지상에서 사라지다.
앞에 글에서 설명했듯이 6월 5일 하루 동안 이스라엘 공군은 아랍 상대국들의 공군력을 거의 궤멸시켜버리는 성공적인 전공을 거둡니다. 성공 원인에는 모사드의 정밀한 정보 수집과 분석, 그리고 아랍 어느 국가의 공군 조종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과 철저한 훈련으로 최고 수준의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습니다. 동시에 "당나라" 군대 수준의 무능력한 아랍 국가들의 방공망과 공군력도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하루가 지나간 후에 전쟁 개시일에 전개된 이스라엘 공군 기습작전 (작전명 "Focus")의 결과를 흝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기종별 피해
1.전투기 피해
1) 미그 21 (당시 최신형 소련제 전투기) 148대 (이집트: 104대, 시리아:32대, 이라크:12대)
2) 미그 19 29대 (전부 이집트 공군 소속)
3) 미그 17 112대 (이집트:94대, 시리아:16대, 이라크:2대)
4) 수호이 Su-7 14대 (전부 이집트 공군 소속)
5) 호커 헌터 27대 (요르단:21대, 이라크:5대, 레바논:1대)
(호커 헌터 전투기 - 아랍 전투기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국제입니다.)
2.폭격기 피해
1)투폴레프 Tu-16 31대 (이집트: 30대, 이라크: 1대)
2)일류신 Il-28 31대 (이집트 : 27대, 시리아 : 2대, 이라크:2대)
3.수송기 피해
1)일류신 Il-14 32대 (이집트:30대, 시리아:2대)
2)안트노프 An-12 8대 (전부 이집트 공군 소속)
3)C-27 4대 (이집트: 2대, 시리아: 2대)
4.헬리콥터 피해
1)밀 Mi-6 10대 (이집트: 8대, 시리아: 2대)
2)밀 Mi-4 6대 (이집트: 2대, 시리아: 4대)
B.국가별 피해
1.이집트 :338대
2.시리아: 61대
3.요르단: 29대
4.이라크: 23대
5.레바논: 1대
참고로 대한민국 공군의 전투기만 400대(그중 절반 이상이 구형 F4 팬텀과 F5 타이거)입니다. 이집트에서만 하루동안 200대가 훨씬 넘는 숫자의 전투기가 완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전투기들이 남겨졌는지 몰라도 이집트 공군은 거의 100% 전력이 깔끔하게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결국 단 하루 동안의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작전의 결과로....
총 452대의 아랍 주변국들의 공군 항공기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는데 반면 이스라엘은......
하루 동안의 작전 수행 중에 단 19대의 전투기를 잃었습니다!
어쨌든 기적과 같았던 포커스 작전 이야기는 그만 하고, 지상군 전투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투는 크게,
1.이스라엘 서쪽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 군과의 교전
2.이스라엘 동쪽 요르단 군과의 교전
3.이스라엘 북쪽 골란 고원에서 시리아군과의 교전
지금부터는 이상의 3개 교전 지역을 넘나들면서 입체적인 전투 상황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설명을 위해 보여지는 지도들에 대해서 눈여겨 보면서 글을 읽길 바랍니다.
시나이 반도 침공 상황
6월 5일~6일 (개전 이틀 동안 상황)
(6월 5일~6일, 전쟁 개시 이틀 동안 시나이 반도(이스라엘의 서쪽)로 진격해들어온 이스라엘군의 진행 경로)
이집트군이 제1차 방어선으로 설정한 칸 유니스, 엘 아리쉬, 아부 아게일라(위치 感을 잡도록 위에 지도에 이 3곳을 표시해놨습니다.)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은 파죽지세로 수에즈 운하를 향해서 서쪽으로 진격을 해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2차대전때 노르망디에 상륙했던 연합군이 마켓 가든 작전 싯점에 겪었던 고충과 똑같은 문제였습니다. 즉, 단 하루만에 무섭게 진격해가다보니 선두 기갑부대와 후방 간에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버려서 연료,탄약,식량의 보급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버린 것입니다.
끔찍한 더위에 사막 지대에서 사우나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인 탱크 속에서 제대로 물도 못먹는 상황이 지속되자 기갑병들에게 손실된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 정제 소금이 보급되었지만 이나마 6월 6일(둘째 날)부터는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실제로 여단장급 지휘관도 6월 7일(세째날)까지 몇잔의 쥬스 정도를 마시며 배고픔과 갈증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헬리콥터로 공중 보급되는 물량의 대부분도 식량이나 식수보다 탄약과 연료가 우선이었고 병사들은 기갑병들이나 그 뒤를 쫓아오는 지상군 병사들 모두 이런 상태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태인들이 얼마나 지독한 인간들인가는 인간의 한계에 다다를 정도의 끔찍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군 병사들의 사기는 전혀 꺾이지 않았고 아부 아게일리 남서쪽에 위치한 제벨리브니와 쿠세이마와 같은 이집트군의 제2차 방어선도 위협을 할 정도로 투혼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때 이집트 지상군이 전열을 재빨리 정비하고 반격을 가했다면 전세는 역전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지휘부는 공군력은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지상군 지휘부조처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통신 시설은 이스라엘 공군의 공습으로 거의 대부분 두절된 상황이었고 그나마 연결되어 호출을 하면 이미 그곳을 점령한 이스라엘 병사들의 히브리어 조롱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지휘부와 나세르 정부는 자칫 이런 어처구니없는 패배의 소식이 국민들에게 전해질까봐 국영 방송국에서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이집트 공군이 용맹하게 이스라엘군에게 타격을 가하고 있다고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반복해서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송 청취는 국민들만 듣는 것이 아니고 패퇴하는 이집트군도 듣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런 거짓 방송으로 인해서 현재 상황에 대해서 더욱 더 혼란스러워 하게 되었습니다. 불쌍하게도 이런 방송 내용을 믿었던 병사들은 효과적인 철수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진격해온 이스라엘군들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거나 부상자가 되어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6월 7일~8일 (개전 3일~4일째)
개전 3일째인 6월 7일 밤에 이스라엘 기갑 부대중에 샤드미 여단 소속 바르암 기갑대대가 겪은 사건은 보급선의 두절로 연료 문제가 얼마나 최악이었는가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집트군이 얼마나 멍청하게 대응하고 역전의 기회를 놓쳤는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바르암 기갑대대 소속 9대의 탱크는 미트라를 위해서 진격을 하던 중에 마침내 연료가 바닥나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보급선은 너무 멀어져서 언제 연료를 추가로 공급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결국 9대의 탱크에 남은 연료들을 모두 모아 5대의 탱크에 채워넣고 나머지 4대의 탱크들을 기동이 가능한 탱크 뒤에 케이블로 연결하여 견인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후방에서 접근해오는 이집트군의 대규모 기갑부대들의 탱크들이 그들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9대의 탱크는 이제 이집트 군 탱크들에 포위되어 집중 포격으로 전멸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집트 탱크(T-55와 JS-III)들과 그뒤를 따르는 장갑차량들은 이스라엘 탱크들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집트군들은 바르암 기갑대대의 탱크들의 이스라엘 마크를 미쳐 못 보고 자신들과 같은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4대의 탱크들이 연료도 없어서 견인되어가는 모습이 도저히 노도와 같이 밀려들어온 이스라엘 침공군이라고 상상도 못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야간 이동 원칙을 무시하고 이집트 기갑부대들은 훤하게 라이트를 켜놓은 상태로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서 비행중이던 이스라엘 공군의 후거 전투기 편대가 이 여단급의 거대한 대형으로 이동하는 이집트 기갑부대를 발견하였고 즉시 하강하여 맹폭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문제는 후거(Fouga Magister) 전투기는 사실상 연습기로 더 잘 알려진 정말 보잘 것 없는 기종으로
이집트 기갑 여단을 공격한 이스라엘 후거 편대는 가껏해야 2정의 75mm 기관총과 로켓탄 정도로
공격을 했을 것이고 만약 보다 강력한 무장이 되었다고 가정해도 대전차 미사일 SS-11 정도로 무장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전투기의 폭격에 혼비백산한 이집트군의 무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바르암 대대 탱크들도 이기회를 놓치지 않고 근거리에서 자신들을 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이집트 탱크들에게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숫적으로 상대가 안되는 이스라엘 탱크에게 포격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하늘에서 이스라엘 폭격기의 공격을 당하다 보니 이집트군 탱크들은 귀중한 최신형 T-55 탱크가 10여대가 파괴되어 사막 모래밭에 쳐박히도록 상황 파악을 못하고 허둥지둥하였습니다. 뒤늦게 상황이 파악되었을 때는 이미 반격을 가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서둘러 미트라 쪽으로 퇴각을 하였습니다.
삼십육계 줄행랑의 이집트 군
(지도 하단에 샤룸 앨 셰이크라는 해안 요새에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샤룸 앨 세이크라는 해안 도시는 이집트군이 아카바 만을 봉쇄하는 포대가 설치된 거대한 요새가 있는 곳입니다. 1956년 2차 중동전쟁때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던 이스라엘군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이집트군과의 교전으로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치뤘던 곳입니다. 이번에도 이곳이 다른 어느 곳보다 점령이 어려운 곳일 것이라 생각한 이스라엘 군은 철저하게 사전의 공군의 폭격과 함대의 함포 사격으로 사전에 강력한 공격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어서 공수부대 강하 작전까지 수립해놓았으나 그에 앞서서 해군 함대는 이곳이 이미 텅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유는 2차 중동전쟁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이스라엘에게 함락된 경험을 기억한 이집트군은 어차피 방어하겠다고 버텨봐야 함락될 것이다라고 지레 겁을 먹고 이스라엘 지상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일찌감치 퇴각해버린 것입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임했던 연합군 공수부대원들 못지 않게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수송기에 탑승했던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은 아예 낙하산도 펴보지 못하고 다시 기지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비르 기프가파 최후의 결정 : 슈퍼 셔먼 VS T-55
지도에서 시나이 반도를 보면 횡으로나 종으로 결코 좁지 않은 지역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면적과 비교하면 얼추 눈짐작으로도 남한 면적에 약 70% 정도 되어 보입니다. 아무리 이곳에 대부분이 평평한 사막 지대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단 3~4일내에 이스라엘군에게 거의 완전히 점령되었다는 것은 이해가 안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사건들을 보면 이집트군들이 기본적으로 제대로 싸워보겠다는 의욕도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 개시 3일째~4일째 시나이 반도 전투 상황 - 이미 대부분의 반도가 이스라엘군에 의해서 점령되었습니다.)
6월 7일 시나이 반도 북쪽 내륙에 위치한 비르 기프가파에서 이집트 기갑부대가 무려 1,090대의 T-55 탱크를 아예 땅을 파서 후퇴를 못하게 하고 (일종의 배수의 진) 최후의 결전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결사항전의 의욕을 보였지만 무모한 전략이 되버립니다. 특히 가장 강력한 주포를 갖고있는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M51 슈퍼 셔먼은 뛰어난 기갑병들의 사격 실력으로 무려 3,000미터 거리에서 T-55 탱크의 진형과 평행하게 횡대를 이루어 천천히 이동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적의 탱크들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여기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이집트군 지상군들은 시나이 반도를 전부 포기하고 이집트 국경 너머로 도주해버리게 됩니다. 결국 전쟁 개시 4일째인 6월 8일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국제연합이 중재를 나선 정전 협정에 서둘러 싸인을 하고 사실상 항복을 해버립니다.
나세르는 침통한 표정으로 이집트의 전력 80퍼센트가 상실되었음을 국민들 앞에 공식발표를 했고 이집트의 발표에 따르면 전사 12,000명 포로 5,500여명의 손실을 입은데 반해서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 전투에서 전사 275명, 부상 800명에 불과했습니다.(대 이집트전의 피해만) 또 이스라엘이 총 61대의 전차를 상실하는 데 비해 이집트군은 900대이상의 전차가 파괴되거나 나포되었고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900대의 전차 중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신품이 태반이었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전 지역을 뒤져 가며 이집트군이 버리고 간 말짱한 상태의 탱크와 군용 차량들을 전부 회수해 갔습니다. (왠지 삼국지 적벽대전 중에 제갈공명이 조조진영으로 안개 속에 짚더미를 뒤집어 쓴 선박들을 몰고 가서 엄청난 화살을 얻어가지고 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군요.)
이렇게 노획하게 된 T-54/55를 개조하여 이스라엘군이 운용한 탱크가 바로 Ti 67(Tiran)이고 이 탱크들로만 구성한 독립 여단을 조직하게 됩니다. 그리고도 남은 T-54/55는 심지어 수출을 하여 외화 획득에 기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래저래 이집트에서 빼앗아간 무기의 규모는 약 25억 달러의 무상 군사 원조를 받은 효과였습니다.
(이렇게해서 난데없이 T-54 개조 탱크 Tiran 탱크가 이스라엘 탱크 라인 업에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
한편 이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게 된 시나이 반도는 태반이 사막 지대인 탓에 별로 쓸모는 없지만 최소한 이집트가 이스라엘 본토에 바짝 탱크를 들이댈 수 없는 중간 지대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한 시나이 반도의 이스라엘 점령으로 강제적으로 이스라엘 국민이 되버린 많은 숫자의 아랍인들은 시나이에 위치한 가자 지구에 거주하게 되면서 이후 이스라엘 내부적인 골치거리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1956년 2차 중동전쟁 당시에는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완전히 점령하고도 미국과 소련의 입김으로 철수했던 이스라엘 군이 이번 전쟁에서는 시나이 반도 점령에 성공하였고 어떠한 외세의 압력에도 지난 번과 같은 철수는 절대 안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즉시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 영토임을 공식 선언해버립니다.
(요르단 군이 운용하던 미국제 M-48 패튼 탱크.
6일 전쟁 당시 대부분의 아랍국가들이 애용했던 탱크는 당시 소련의 최신 탱크 T-54/55 였지만
요르단군은 특이하게 미국제 M-48이나 영국제 센츄리언 탱크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6일 전쟁 시작 후 나흘만에 이집트를 굴복시키고 시나이 반도를 삼켜버린 이스라엘군의 활약상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북쪽에서 사실상 6일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나라 시리아, 그리고 요르단과 이라크를 상대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전쟁을 전개해나갔고 불과 며칠만에 이들을 동시에 어떻게 격퇴시켰는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요르단과의 전쟁
6일 전쟁 첫날인 6월 5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날 아침 시나이 반도로 침공을 시작한 이스라엘 군은 동시에 동쪽에 위치한 요르단과도 전쟁을 시작합니다. 자! 우선 오늘 이야기의 중심이 될 지역에 대하여 지도로 한번 들여다보고 시작하도록 하지요!
(이스라엘 동쪽과 북쪽 지역을 붉은 색 원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원 안에 북쪽으로 골란 고원이 보이고, 동쪽으로 웨스트 뱅크라는 지명이 보일 것입니다.
골란 고원 위쪽에는 레바논과 시리아가 위치해있고, 웨스트 뱅크 동쪽은 요르단이 위치해있습니다.)
요르단이라는 나라는 이집트와는 외교 노선이 좀 틀린 미국과 영국등 민주주의 국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오는 온건파 아랍 국가였습니다. 미국,영국,프랑스가 소련의 시선을 의식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후견인과 같은 국가들이었던 탓에 그들과 친밀히고 서구적인 감각을 가진 후세인 국왕이 통치하는 요르단에 대해서 이스라엘도 애초 시리아나 이집트와 같은 강경파 국가들과는 달리 덜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랍의 두 맹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좌측)과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우측),
후세인 국왕은 1952년에서 1999년까지 45년간 재위하면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중재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6일 전쟁에서는 웨스트 뱅크(요르단 서안)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게 빼앗기는 치욕을 겪습니다.)
실제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당시에 여-프-이스라엘군과 이집트 간에 수에즈 운하를 놓고 벌인 쟁탈전에서 요르단은 전혀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관망했었기에 이스라엘은 내심 이번 전쟁에서도 요르단은 마찬가지의 태도를 견지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집트와 북쪽에 시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요르단까지 건드려서 전쟁을 해야 한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너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을 방문하여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을 만난 후세인 국왕(좌측)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친미 외교로 유연하고 온건한 외교 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영국 왕립군사학교에서 유학을 하여 서구 문명에 개방적인 아랍 국가의 국왕이었습니다.)
실제로 요르단의 군사력은 이나라가 미국과 영국측으로부터 수입한 M-48 패튼과 센츄리언 탱크로 무장하고 있어서 군사력 면에서도 소련 최신 T-54/55로 무장한 이집트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없는 강력한 상대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을 통해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요르단과는 전쟁을 할 의사가 없음을 전달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어차피 "초록은 동색"이란 말이 있듯이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요르단이 같은 아랍 국가들을 위해서 전쟁을 불사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그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었지만....)
하지만 눈 딱 감고 요르단과 전쟁을 하여 승리만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요르단의 영토 중에서 가장 비옥한 웨스트 뱅크 (요르단 강 서안지구)지역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위에 지도를 한번 다시 보면 "웨스트 뱅크"라는 지역은 6일 전쟁 직전에 이스라엘의 국경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모두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예루살렘의 일부가 당시 요르단 영토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정말 껄끄러운 상대이긴 하지만 요르단과의 전쟁을 한번 눈 딱 감고 저질러서 승리만 할 수 있다면 비옥한 웨스트 뱅크 지역은 물론 예루살렘이 드디어 온전히 이스라엘의 영토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유대 왕국에 솔로몬 왕(BC 970년~931년 재위)은 "솔로몬의 지혜"의 일화로 비기독교인들조차 그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인 다윗 왕에 이어 즉위한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아름다운 성전을 건설하였습니다.
유태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그들의 나라에 중심의 도시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침공을 결심할 때도 3개 기갑여단, 6개 보병여단, 그리고 2개의 독립 기갑 부대의 적지 않은 규모의 병력을 요르단과의 전쟁을 위해 예비해두고 있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요르단의 참전이 이스라엘 지휘부가 예측했던 "시나리오"보다 훨씬 빨랐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전쟁 첫날 요르단은 망설였으나....
6월 5일 드디어 시나이 반도 침공으로 불과 하루 사이에 이집트의 공군력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지상군들은 이스라엘의 파죽지세에 밀려가고 있을 때 시나이 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만 전해들은 요르단 국왕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온건한 합리주의자인 요르단 후세인 국왕일지라도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으로부터 범 아랍인의 단결과 유태인 격멸에 동참해달라는 요구를 뿌리칠 수 있는 명분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개전 첫날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연전연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공영방송에서 이집트군이 이스라엘 침략군을 격파하고 있다는 거짓말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던 주변 국가들은 전황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의지할 수 있는 소스가 바로 해당 국가의 방송 뿐이었습니다.
요르단 국왕조차 이런 황당한 방송을 진짜로 믿고 어쩌면 이번 기회야말로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세력을 축소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르단 입장에서 이스라엘에게 둘러쌓여있는 웨스트 뱅크 지역이 항상 불안했으므로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이스라엘을 격파한다면 항상 불안했던 이지역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6월 5일 개전 첫날 이스라엘 기갑부대 포격에 파괴된 이집트 T-55 탱크,
이런 상황에서도 이집트 공영 라디오 방송은 이집트군의 일방적인 승리라고 거짓 방송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전쟁 개시일 6월 5일 낮 12시 40분에 요르단군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 제일 먼저 미국제 M2 장거리포들에서 일제히 포격이 시작됩니다. 요르단의 선제 공격은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 모셰 다얀(당시 참모총장) 입장에서는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이었습니다. 요르단에 대해서 먼저 공격을 한다는 것이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내부적으로도 요르단과의 전쟁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들이 많았던 탓에 강경파의 리더였던 다얀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의 요르단 공격 소식에 쾌재를 부르게 됩니다.
(시나이 반도 침공 작전에 투입된 이스라엘군 M48 패튼 탱크)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절반씩 통치하던 예루살렘 역시 요르단의 선제 공격에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공격한 쪽은 요르단이지만 곧바로 이스라엘 예루살렘 주둔 보병 여단의 공격으로 전세는 역전되버립니다. 도리어 예루살렘에 요르단 통치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격렬한 예루살렘의 시가전이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애서 벌어진 혈전
이집트가 장비는 우수하면서도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당나라 군대"였다면 요르단군은 현대화된 장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훈련으로 정예화된 군대였으므로 이스라엘군으로써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되는 상대였습니다. 유태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어떤 의미인가는 앞에 글들에서 충분히 설명드렸고 그러기에 시나이 반도 전체를 얻는 것보다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문제는 아랍 맹주인 요르단의 군인들 역시 예루살렘은 종교적인 성지로써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도시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빈손으로 예루살렘에 투입된 이스라엘 공수부대
요르단의 전쟁 개시 당일의 선제 공격은 이스라엘이 아무리 요르단의 참전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뜻밖에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방어와 요르단 지역 공격을 위해 급히 투입된 이스라엘 최정예 공수부대 제55여단의 상황만 봐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계획된 작전이 아니라 요르단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 서둘러 투입되다보니 공수부대이면서도 수송기에 탑승해서 낙하산으로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급히 징발한 비무장 일반 버스에 탑승하여 예루살렘 전투 지역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중 대부분은 놀랍게도 개인화기조차 소지하지 못한 빈손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시가전에 투입된 제55 공수여단)
그 이유는 애초에 이 정예 공수부대는 시나이 공격을 위한 지상군에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즉 6월 5일 당일 지상군 공격이 개시된 후 몇시간 후에 시나이 반도 지역에 낙하산 강하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탓에 그 전날 그들의 개인 화기 및 중화기의 대부분을 그들이 탑승한 수송기가 있는 공군 기지에 미리 운반해놓은 후였습니다. 그런데 요르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들은 급히 예루살렘 공격 작전에 투입되었고 그들 손에 있어야 하는 무기들은 여전히 공군 기지 창고에 쌓여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6월 5일 밤 9시에 공격 명령을 받았지만 무기가 없어서 제55여단은 이튿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여기 저기에서 끌어온 총기와 탄약을 지급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자! 그들이 지금부터 공격해야 할 목표는 예루살렘에 요르단측 지역이었는데 그곳에서 전투를 하는 병사들은 기관단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현대 병사들이었지만 그들이 전투를 하는 예루살렘은 수천년전 건설된 고대 도시였습니다. 복잡한 미로처럼 만들어진 고대 건축물들은 요르단쪽이 좀더 높은 지대인탓에 자연스럽게 천혜의 요새로써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맞아 요르단 군들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시가전을 표현한 그림,
이렇게 좁은 골목의 미로 속에서 공격해야했던 이스라엘군은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의외로 많은 희생을 치루게 됩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요르단군은 저지대에서 접근하는 이스라엘군들에게 집중 사격을 가했고 용맹한 이스라엘 공수부대지만 순식간에 수많은 병사들이 총격에 쓰러지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어쩌면 앞에서 굴러 떨어지는 전우들의 시체들을 보면서 뒤따라 진격해 올라가는 병사들도 자신이 똑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예루살렘 점령은 그들 각자에게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먼 조상들까지 꿈속에서 바라마지 않던 소망이었기 때문에 요르단 군의 비오듯 쏫아지는 총탄 세례에 맞서서 사격을 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해외 블로그에 올라온 6일 전쟁 당시 예루살렘 시가전에서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던 이스라엘 제55 공수여단 병사의 비넷,
병사가 들고 있는 우지 경기관단총은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한 무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체 개발하여 1954년부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명작입니다. )
최초의 장애물인 바리케이드와 지뢰 매설 지점을 통과하는데 무려 2시간이 소요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마침내 표현 그대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서" 요르단군의 진지에 도착하게 된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은 상황을 역전시켜 버립니다.
(예루살렘 시가전에서 이스라엘 공수부대에게 포로가 된 요르단 병사들)
여기서 1차/2차대전 당시에 진격해온 공격군이 마침내 방어군의 참호로 뛰어드는 순간 곧바로 양쪽이 사용하는 소총에 착검을 한 상태로 총검 육박전이 벌어지던 것이 과거의 전투 형태였다면 1967년 현대에서 방어군의 참호로 뛰어든 공격군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은 짧은 총신의 우지 기관단총으로 눈에 보이는대로 요르단군들을 향해 난사를 했고 좁은 참호 속에서 요르단 군이 소지하고 있던 미국제 M1 소총보다는 손쉽게 무차별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스라엘군의 기관단총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좁은 구시가지 내리막길 돌길로 이스라엘군의 기관단총 세례에 쓰러진 요르단군 병사 시체들의 몸에서 콸콜 뿜어져 나온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당시 참전했던 이스라엘 공수부대원의 증언)
이당시 치열한 전투에서 요르단군 측에 부대는 이스라엘 제55 공수여단 못지않게 요르단 군에서 최고의 정예 부대로 명성을 얻었던 제1 왕신 근위사단이었습니다. 양국의 최정예 부대가 만나서 벌인 끔찍한 혈전의 결과는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55여단이 확보한 기동로를 통해서 이스라엘 구시가지 골목길을 올라온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M50 슈퍼 셔먼 탱크들이 잔존 방어 병력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포격을 가하자 결국 예루살렘 요르단 지역은 이스라엘 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6월 6일 아침 9시에 예루살렘 요르단 지역이었던 요르단 경찰학교 연병장에서 이스라엘군이 실시한 피해 상황을 확인하면서 상당수의 M50 탱크 전차장들이 전사를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유는 대부분의 다른 나라 기갑부대의 경우 전투 중에 적의 저격을 두려워하여 전차장들이 포탑 밖으로 머리를 잘 드러내지 않는 반면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최대의 시야를 확보하고져 전투 중에도 상반신을 포탑 밖으로 드러내고 주위를 보면서 포격 지시를 내리는 탓에 요르단군의 보병들의 소총 사격으로 사살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군의 슈퍼 셔먼 탱크들(M-50 & 51)
분명히 이집트의 최신형 소련제T-55나 55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구형 탱크였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기갑병들의 뛰어난 기량과 정신력이 이집트 기갑 부대들을 초토화시켜 버렸고,
요르단 기갑부대 역시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패배를 거듭하였습니다.)
여기서 6월 6일 아침에 예루살렘 점령에 제55 공수여단과 함께 큰 공헌을 한 기갑부대(벤 아리 기갑여단)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하겠습니다.
M4 셔먼과 M48 패튼의 대결
앞서 소개했듯이 이스라엘 주력 탱크 슈퍼 셔먼은 2차대전 미육군 주력 탱크 M4 셔먼을 개조한 M50과 M51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2차대전 미육군의 주력 탱크를 개조한 M50/51이 같은 미국에서 생산된 당시로서는 차세대 탱크라 할 수 있는 요르단군의 M48 패튼과 마주치는 희귀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집트나 요르단이 보유한 최신형 소련제 탱크들에 비하면 높이도 훨씬 높고(따라서 그만큼 피탄가능성도 높고)
야간 전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적외선 조준 장치도 전무한 그야말로 "골동품"이었지만
아랍의 기갑 부대들은 이 골동품 탱크들에게 철저하게 궤멸 당했습니다.)
6월 6일 새벽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벤 아리 기갑여단은 요르단군 소속 기갑부대와 마주치게 됩니다. 영국제 센츄리언과 M50/51로 구성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신형 M48 패튼 20대로 구성된 요르단 기갑부대는 즉각 전투에 돌입하게 됩니다. 여기서 성능적으로 월등히 앞서는 최신 기종인 패튼 탱크는 분명히 한세대 전에 활약한 노장 셔먼 탱크들이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기갑병들의 포격의 정확도는 요르단 기갑부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이 운용한 M48 탱크
6일 전쟁 기간 중에 요르단이 포획한 이스라엘군의 M48 탱크,
6일 전쟁 중에 이스라엘 군도 미제 M48 최신형 탱크를 운용하기는 했지만 절대적으로 숫자가 부족하여
한세대 이전 탱크들인AMX-13이나 슈퍼 셔먼 탱크들이 상당수 주력으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지 않은 숫자의 이스라엘 M48 탱크는 이집트군의 T-55 탱크들을 상대로 뛰어난 전과를 올리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요르단군의 주력탱크였던 M48 탱크들은 이스라엘 구형 탱크들과의 전투에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열세를 면치 못합니다.
과연 탱크의 성능보다 우선하는 것이 누가 조종하느냐인 것 같습니다.
20대의 요르단 패튼 탱크 중에서 무려 17대의 탱크가 완파되었고 나머지 3대는 허둥지둥 퇴각해버렸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기갑부대측은 탱크의 손실은 한대도 없었고 3대의 M3 하프트랙 장갑차만 파괴되었을 뿐입니다. 탱크 성능의 우세보다는 기갑병의 기량의 차이가 더 중요한 승리의 요인임을 증명해준 사례입니다.
비록 첫 교전에서는 단 한대의 탱크의 손실도 없이 적을 격퇴한 이스라엘 기갑부대였지만 이어서 몇시간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크고 작은 요르단 기갑부대와 지상군들과 교전에서 적지 않은 숫자의 탱크들이 파괴되었고 요르단군이 미리 만들어놓은 장애물과 대전차호를 통과하면서 캐터필더가 잘라지거나 서스펜션 축이 부러지는 비전투 손실로 탱크가 멈춰버리는 일도 발생합니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기갑부대들은 그동안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도 요르단 지상군들의 방어선을 거의 뚫어버린 공수부대원들에게 뜨거운 환호를 받게 되었고 곧바로 공수부대원들의 안내를 따라 올라간 이스라엘군의 M50/51 탱크들은 감격스러운 예루살렘 탈환의 쾌거를 이룩하게 됩니다.
통곡의 벽
예루살렘 공격에 합세한 기갑 여단은 2개 기갑 중대를 55공수여단에 지원해주고 곧바로 웨스트 뱅크의 라밀라로 이동합니다.
(웨스트 뱅크를 보면 6일 전쟁 이전 이스라엘 영토에 깊숙히 밀고 들어와 있는 요르단 영토였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곳이 무척 탐이 났을 것은 위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완전한 점령을 위해서 남겨진 공수여단과 2개 기갑 중대는 구시가지를 향해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런 와중에 한 병사가 시내 요르단 상점들을 수색하던 중에 나팔을 한아름 들고 돌아왔는데 이 물건들은 얼마 후에 구약 성경에 한 사건을 재현하는데 긴요하게 사용되게 됩니다.
이제 공수여단은 자신들을 지원해주는 탱크들을 앞세워 구시가지 공격을 개시하는데 여기서 또 한번 이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시가지의 수천년 동안 있어온 수많은 좁은 골목길들이 엉켜있었고 이스라엘 보병들은 이곳 지리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M50 탱크가 주종을 이루는 2개 기갑중대는 어둠 속을 달려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서 여리고 쪽으로 접어드는 도로로 들어서는 바람에 공수부대와 떨어지게 됩니다. 자신들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기갑 중대는 서둘러 돌아섰지만 그때는 이미 기갑 지원 없이 요르단 군을 만나게 된 공수부대가 치열한 교전을 시작한 후였습니다. 심지어 잃어버린 기갑 중대를 찾아 나섰던 공수부대 일행은 어둠 속에서 요르단 군의 기습을 받고 전멸하게 됩니다.
이런 뜻밖에 혼란 속에서 공수여단은 현재 교전 장소를 향해 요르단 기갑부대가 40여대의 M-48을 끌고 접근 중이라는 비보를 듣게 됩니다. 현재 연락이 두절된 2개 기갑 중대가 다행히 돌아와준다고 해도 신형 M-48 탱크 40대와 맞닥뜨린다면 그 열세는 명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다행히 전쟁 개시와 함께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수여단의 지원 요청을 받자 이스라엘 공군의 푸가 매지스터 연습기에 장착된 로켓탄 공격으로 요르단 M-48 탱크들은 치명타를 입고 허둥지둥 여리고 쪽으로 퇴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푸가 CM-170 매지스터 연습기로 구성된 공격 편대,
연습기 용도로 개발된 이 기종을 가지고 요르단의 최신형 M-48 탱크들에게 위협을 줄 정도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조종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는가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입니다.)
(1967년 6일 전쟁 발발 당시에 탱크 파괴 임무에 혁혁한 공을 세운 푸가 매지스터 연습기,
이스라엘 공군에게는 이 허접한 훈련용 항공기가 적 탱크 파괴와 같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가까스로 좁은 골목길 하나 하나를 뒤지면서 요르단 저격병들을 사살하며 진격했던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은 6월 7일 오전 10시경에 드디어 예루살렘 구시가지 중심부 "통곡의 벽" 앞에 도착하게 됩니다. 2,000년 전에 로마 제국에 의해서 유태 왕국이 멸망한 이후로 유태인들에게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 재입성은 이렇게 이루어졌고 병사들은 모두 철모와 탄띠를 벗어 던지고 성벽에 머리를 기대고 통곡을 했습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점령 순간 "통곡의 벽"에 기대어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는 이스라엘 병사들)
(이스라엘 출신 사진작가 데이빗 루빈저에게 명성을 안겨준 유명한 사진
- 예루살렘 탈환 직후에 통곡의 벽 앞에서 3명의 공수부대원을 촬영한 이 사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뒤 이어 남쪽 웨스트 뱅크에서 이스라엘 기갑 부대와 보병들의 주요 거점 점령들이 이어지자 요르단 후세인 국왕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믿었던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단 하루만에 공군을 전멸당하고, 단 이틀 만에 거의 대부분의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 지상군에게 빼앗긴 상황에서 넋이 빠져 버렸고 요르단을 지원한다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이라크 역시 이스라엘과 교전국 입장은 마찬가지여서 요르단을 지원해줄 여력이 없었습니다.
나블루스 함락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웨스트 뱅크 한가운데 위치한 나블루스까지 진격한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경험한 일은 요르단이 얼마나 혼란 상황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부터 남쪽으로 진격하여 나블루스 근방에 도착한 AMX-13 경전차로 구성된 이스라엘 기갑여단의 선발대는 먼저 나블루스 시내로 진입하면서 요르단 군과의 격렬한 전투를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가지에 탱크들이 진입하자 시민들이 모두 쏟아져나와 그들을 환영하였고 이스라엘 장교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군중들 중에 일부 총기를 소지한 자들이 발견되어 일단 무장 해제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스라엘 장교의 말을 못알아들었고 장교는 병사들을 시켜서 그들의 총기를 빼앗은 후에 공중을 향해 발사하면서 지시에 따를 것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순간 환영의 분위기는 공포로 바뀌어 시민들은 앞다투어 도망을 가버렸는데.....
나중에 상황을 파악한 결과 시민들은 이스라엘 군이 그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자신들 눈앞에 나타난 탱크들이 우방인 이라크 군의 탱크들이라 성급하게 판단한 후에 환영을 하러 뛰어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군이 각오했던 요르단 군들은 이미 퇴각한 후였고 웨스트뱅크 주요 거점인 나블루스는 이렇게 어이없게 함락되었습니다. 함락된 후에 요르단 군의 40여대의 M-48 탱크들이 접근해왔지만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성능적으로도 크게 열세인 AMX-13 경전차들의 신출귀몰한 포위망과 정교한 포격을 구사하여 요르단 기갑부대들을 물리쳤습니다.
(푸가 매지스터 연습기로 구성된 이스라엘 공군의 편대가 이집트와 요르단 탱크들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성공했던 것만큼이나 미스데리한 사건은
이집트의 프랑스제 경전차 AMX-13을 가지고 최신형 M-48 탱크로 구성된 요르단 기갑부대를 물리쳤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이스라엘 기갑병들의 기량과 투철한 정신력을 이유로 들더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기적과 같은 승리였습니다.)
여리고 城의 나팔소리
구약성경을 보면 이집트를 떠난 후에 여호수아가 이끄는 유대민족들의 정복 전쟁 중에 가나안 족속의 난공불락의 여리고 城을 함락시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으로 하여금 6일동안 여리고 성 주위를 돌게 한 후에 7일째 되는 날 성 주위를 일곱번 돌고나서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 지르니 여리고 城벽이 무너져 내리고 성안에 가나안 족속들은 유대 군사들에 의해서 몰살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에 여리고 城이 무너지는 장면)
하나님이 유대민족들의 정복 전쟁에서 보여주신 커다란 기적이었던 이 이야기의 재현이 6일 전쟁 중에 이스라엘 군에 의해서 재현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치루었던 이스라엘군은 이제는 힘없이 퇴각해버리는 요르단군을 추격하며 예루살렘 구시가 지역을 뚫고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을 함락시킨 후에 헤브론과 다히리아를 거쳐 엣사무에 도착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군이 요르단 서안, 즉 웨스트 뱅크라 불리는 지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셈입니다. 하지만 이지역 전투의 클라이맥스는 벤 아리 대령이 지휘하는 기갑부대에 의해서 연출됩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랬고 현대에 와서도 전략적인 거점이었던 여리고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기갑여단은 여리고 입구에 바나나 농장에 진흙 구덩이에 쳐박혀있는 16대의 M47/M48 요르단 탱크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집트 군에 비해서는 훨씬 제대로 훈련되어있던 요르단 기갑병들은 이미 전세가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나타난 이스라엘 탱크들을 향해서 포격을 가했지만 앞에서 벌어졌던 요르단 M48 탱크들의 운명과 동일하게 침착하지만 정확하게 조준하여 포격을 가하는 이스라엘의 구형 탱크들에게 요르단 신형 탱크들은 순식간에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오래 시간을 지체할 수 없던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불타는 요르단 탱크들을 지나쳐서 여리고市 중심부로 진격해들어갔습니다. 시내에서 요르단 보병들의 소총 사격과 곡사포 포격으로 인해서 선봉에 섰던 몇대의 이스라엘 AMX-13 경전차와 슈퍼 셔먼 탱크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집스럽게 포탑 큐폴라 밖으로 상반신을 내놓고있던 전차장들은 상당수 요르단군의 소총 사격에 희생물이 되었고 곡사포의 포격으로 멈춰버린 탱크들이 시내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버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2차대전 중에 루프트바페의 공포의 급강하 전폭기 슈투카의 별명이 "여리고의 나팔"이었습니다.
급강하 폭격시에 들리는 공포스러운 굉음 탓이긴 하였지만....)
하지만 그들의 조상이 그러했듯이 다시 한번 여리고를 점령하게 된다는 기대감에 이스라엘 군들의 대부분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예루살렘 시가에 악기 상점에서 이스라엘군이 노획한 나팔들을 불자 갑자기 요르단 군의 사격이 멈췄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진 것처럼 요르단 군의 사격이 멈춘지 얼마 안되어 여리고 시의 중앙 광장에서 요르단군들의 항복을 의미하는 백기가 올려졌습니다.
요르단의 사실상 항복
여리고를 점령한 후 이스라엘의 주력부대는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불과 40km 앞에 까지 파죽지세로 접근하였고 요르단 왕 후세인은 부랴 부랴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에게 지원 요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는 이미 이스라엘군에 의해서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 당한 상황이었고 공군력의 거의 100%가 궤멸당한 상황에서 요르단을 지원해줄 수 있는 능력이 전무했습니다.
나세르는 기껏해야 방송에 나와서 "엄청난 병력의 미군이 이스라엘군으로 위장하여 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요르단 국왕은 믿었던 이집트가 이미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라는 제대로 된 정보를 뒤늦게 입수하고는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고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후세인 국왕은 마침 국제연합 UN이 고맙게도 때 맞추어 제의한 휴전 조건에 서둘러 동의하고 전군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립니다. 이상이 이스라엘이 애초에 갖고 있던 영토에 비하면 엄청나게 넓고 비옥한 땅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 뱅크(요르단 강 서안)를 전쟁 개시 후 약 50시간 만에 자국 영토로 만들어버린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얻은 대신에 이곳에서 요르단과 벌어진 전투로 희생된 이스라엘군은 299명 전사, 1,457명 부상으로 같은 기간에 이집트를 상대로 시나이 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의 피해에 약 3배에 해당하는 결과였습니다. 한편 요르단군의 경우 방어하는 입장에서 예루살렘과 웨스트 뱅크 주요 거점에서 무너진 후에 힘없이 퇴각을 거듭한 결과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피해는 예상보다는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로 오래 전에 건설된 구시가지의 좁고 미로와 같은 골목들에서 벌어진 시가전은 이집트군이 주력 선봉으로 내세운 탱크들에게 효과적인 장애물이 되주었고 비록 이스라엘 지상군들의 용맹한 공격으로 무너지더라도 방어하는 입장에서 신속하게 철수할 수 있는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공격하기에는 아주 불편한 이런 환경들이 일단 무너진 후에 도망치기에는 아주 편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요르단군은 전쟁 후에 무려 15,000명의 손실을 발표했는데 실제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가 파악한 요르단 군의 손실은 그 1/10 수준밖에 안된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손실은 줄이고, 전과는 뻥 튀기를 하는 것이 통상의 행태라면 요르단의 경우 주변 아랍국가들에게 공분을 끌어내고 훗날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손실을 뻥 튀기는 웃지못할 해프닝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500명도 전사자의 숫자가 아니라 사상자를 의미하므로 결국 이스라엘군의 피해와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수준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 모사드측 추축입니다.)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지상군들은 속전속결의 전설을 만들어냈지만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출처: 행복한 박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