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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고흐 / 별이 빛나는 밤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10.24|조회수1,01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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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자화상 / 고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출생: 1853년 3월 30일

사망: 1890년 7월 30일

출신지: 네덜란드

직업: 화가

학력: 암스테르담대학교

경력: 1980년 1월 브뤼셀 그림 전시
         1879년 바스메스에서 부목사

대표작: 해바라기, 빈센트의 방, 별이 빛나는 밤, 의사 가제의 초상화

 

 

 

고흐의 생애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깊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걸작으로는 수많은 자화상과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1889)이 있다.


초기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호우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반 고흐의 활동시기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1873~85년의 첫번째 시기는 잇따른 실패와 진로의 전환이 있었던 수습기로 자신의 까다로운 기질과 씨름하면서 진정한 자기표현의 수단을 찾으려 애쓴 시기였다. 1886~90년의 2번째 시기는 그림에 몰두하면서 빠른 성장과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시기였지만, 1889년부터 정신적인 위기가 잇따랐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호우필 화랑에서 일했다. 날마다 예술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 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의 한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졌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드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878년에 브뤼셀에서 복음전도사로 단기연수를 받기 위해 이 계획을 포기했다. 정통교리의 접근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많은 작품을 창조한 10년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여 Vincent ...

그가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90년의 10년뿐이었고, 처음 4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먼저 브뤼셀 아카데미에 데생을 공부하러 갔다가 1881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했지만, 곧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좀더 경험이 많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고자 했다. 1881년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했다. 그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과 자주 만나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혔으며,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1883년에 '자연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과 농부들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모베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을 지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이때 브라반트의 뇌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뇌넨에서 보냈으며, 이 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풍경·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탄광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제르미날 Germinal〉(1885)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많은 그림, 예를 들면 〈베짜는 사람들 Weavers〉과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점차 그는 뇌넨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림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할스를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끝손질기법이 시각적 인상의 참신함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고 베로네세와 들라크루아로부터는 색채 자체가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뒤 루벤스에 열중하게 되어,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안트웨르펜으로 갑자기 떠났다.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웨르펜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웨르펜을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 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폴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당시 프랑스 회화가 이룩한 발전에 눈을 떴다. 또한 테오는 호우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카미유 피사로와 조르주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 무렵에는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몽마르트르를 그린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색상은 마침내 다채로워졌고, 시각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났으며 색조도 밝아졌다. 1888년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 및 〈탕기 영감의 초상 Portrait of Père Tanguy〉과 〈이젤 앞에 선 자화상 Self-Portrait in Front of an Easel〉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2년 뒤 고흐는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고 육체적으로도 기진맥진하여, '좀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느끼고 그리는 방식'과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해 있었고,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그후 12개월 동안(첫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ipe and Bandaged Ear〉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La Berceuse〉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Garden of the Asylum〉·〈삼나무 Cypresses〉·〈올리브 나무 Olive Trees〉·〈알피유 가족 Les Alpilles〉, 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들라크루아·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은 모두 이 시기에 그린 것들이다.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선이 색채와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지방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뒤, 호메오파시(질병의 원인이 되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치료방법)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폴 세잔의 친구인 폴 페르디낭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가셰가 사는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4년 전 뇌넨을 떠난 이후 한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그는 결혼하여 아들 1명을 낳았음)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을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6개월 뒤(1891. 1. 25) 만성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평가

 

생애의 마지막 3년 동안 제작한 작품들로 반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의 발전, 특히 수틴과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생 1점뿐이었다. 항상 가난했던 그는 그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시급히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과 형을 무조건 믿었던 테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1872년부터 테오와 친구들에게 쓴 편지들은 그의 목표와 믿음, 희망과 절망, 수시로 달라지는 건강상태와 정신상태를 생생하게 담고 있어서, 위대한 인간기록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하고 감동적인 전기자료이다.

그가 자살했을 때, 반 고흐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1888~90년에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에, 그리고 1890년 브뤼셀에서 그림 몇 점을 출품했다. 그가 죽은 뒤 1891년에는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하여 몇 점 안되는 그의 작품을 전시했을 뿐이다. 그의 개인전은 1892년에야 열렸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에 대한 비평은 단 1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20세기초부터 주로 다른 화가들에 의해 명성을 얻기 시작한 뒤 그에 대한 평가는 끝없이 높아져가고 있다.

 

<백과사전>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

 
 
 ▲ <감자 먹는 사람들> 고흐가 농부들의 삶을 그리기 위해
 탄광촌에 들어가 살 때 광부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 받고 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고흐는 왜 귀를 잘랐을까.....
물론 그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고흐가 정작 귀를 자른 이유는어쩌면 고흐 자신조차 모르지 않을까?
흔히 잘 알려진 이유는 친구였던고갱'과의 불화 때문이라는 것.
고흐와 고갱은 그림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달랐다.
이건 분명히 '다르다'의 의미로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마음이 여리고 신경이 쇠약했던 고흐는
고갱의 충고를 자신의 그림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급기야 그 분노를 참지 못해 귀를 잘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과연 고흐가 친구의 조언 때문에
귀를 자를 만큼 심한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또 다른 이야기는 이렇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판 값으로는 물감 하나 사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오로지 동생 테오의 물질적 후원과 도움으로
생계와 작품활동을 이어나갈 형편이었다.
그런 동생에게 어느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얘길 전해 듣는다.
자신에게 쏟아왔던 테오의 희생이 이제는 모두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고흐는 조바심이 생겼다. 그 조바심이 고흐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고갱의 그림에 대한 충고는 그저 하나의 도화선이 되었을 뿐,
사실 더 중심에는 자신의 막막한 생계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불안과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응축되어 있었다.
 
실제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이 일어난 후에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무엇이 고흐를 그토록 흥분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정확한 건, 그가 이성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몇 차례의 발작이 있고 난 후 고흐는 동생 테오와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을 사랑했고 지독하게 가난했던 그,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초라한 다락방 침대 위에서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동생 테오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고갱과 심하게 다툰 후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다.

이때부터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고흐의 광기가 극에 달한 시점에도 자신을 그렸다는 것이 놀랍다.
 

▲ 고흐의 아틀리에 ('고흐의 방'으로 불림)

 

고흐가 귀를 자른 뒤 고갱이 떠나버리자

고흐는 '침해 받지 않는 휴식'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촐처: 비너스&다비드> 

 

 

 

 

 고흐의 작품 해설 

-까마귀 밀밭 위를 날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학기초의 어느날 이었다. 강의실에 조용히 앉아 대학신문을 뒤적이다가 무심코 마지막 면을 펴 보았다. 희미한 흑백 그림 한 장과 함께, 한 시인의 글이 실려 있었다. 가만히 그 시인의 글을 읽다 보니, 그 그림은 고흐가 그린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었다. 그 당시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에 관심이 있어서 고흐의 작품중에서 주제를 선택하려던 참이었기에 그 그림과 글은 내게 호기심을 끌게 만들었다. 하지만 바로 내 주제로 선택하지는 않았고, 그 그림은 신문을 접으면서 내 기억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단지 ‘죽음을 암시하는 그림’이란 매혹적인 수사만을 남긴채.

한달쯤 후, 본격적인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고흐에 대한 책을 하나 사 보았다. 그리고 고흐의 인생과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고흐가 어떤 사람이었나를 알아가게 되었다. 예전에 알고있었던 고흐의 이미지는 ‘광기어린 천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곁으로 가고자 하였던 건실한 청년의 모습을 알게 되면서 고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들고 어두운 현실을 밝혀보려던 청년 고흐는 어렸을 적부터 접하던 그림에 좀더 매혹되었고, 20대 후반에 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미술로써 세상에 빛을 던지기 위해 그는 헌신적이고 성실하게 노력을 하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노력해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과 헌신은 세상과 조금씩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그의 타고난 정신적 문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름을 철저히 거부하는 사회의 압박 때문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고흐는 점차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게 되었고, 정신적 평정을 잃어가게 된다. 결국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하다가, 한적한 오베르 지방에서 가셰박사의 치료를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열정적인 작품활동에 몰두하다가 1890년 7월 27일 자신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기고 29일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가 정신병원에서 요양하다가 마지막으로 창작활동을 하던 시기에 그려진 이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칼라 도판으로 보았을 때,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흑백의 작은 사진에서 볼수 없었던 강렬한 붓의 터치와, 암울한 암청색의 하늘, 격렬히 요동하는 밀밭의 풍경, 숨이 넘어갈 듯 가슴을 죄여오는 저 머나먼 곳으로 향하는 붉은 세 갈래 길. 그위에 유유히 무언가 죽음을 암시하며 날아가는 (혹은 날아오는) 까마귀 한 무리는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주 절실히 나에게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그림을 보면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던 나는 매우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까마귀들과 밀밭은 나에게 무었인가? 고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이 어둡고 격렬히 변하는 하늘이 내게 주는 이 느낌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이런 질문에 해답을 얻기 위해 이 그림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 보게 되었고, 결국 이 그림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왜 까마귀는 왜 밀밭위를 날아갔나?

1. 격렬한 그러나 엄숙한

그림 1] Vincent van Gogh (1853-1890), Wheatfield with Crows, 1890, Oil on Canvas, 50.5 X 103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F 779


1.1
이 그림은 고흐의 마지막 시기에 그려졌던 풍경화 연작중 하나인데, 좀 특이한 규격(50㎝×100㎝, 실제는 51㎝×103.5㎝)으로 횡으로 장대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한가운데 가장 광활하게 황금빛 밀밭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 밀밭은 밀레의 [이삭줍기]등에서 보여지는 낭만적이고 고요한 밀밭이 아니다. 바람에 격렬히 몸을 뒤틀고 있는 장면은 거칠고 야만적인 자연의 힘을 과시한다. 밀 줄기와 줄기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들리는 듯 하다. 강한 붓 터치로 힘있게 흔들리는 밀밭은 고흐가 해바라기 연작으로부터 만들어낸 강렬한 노란색을 사용해서 한층 더 억세어 보인다. 강하면서 천하지 않고, 난폭하지만 위엄이 있는 밀밭이 탄생한 것이다.

1.2 광활한 밀밭을 가로지르는 세 갈래 길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길은 총 세 갈래인데, 두 개의 길은 오른쪽, 왼쪽 귀퉁이에서 양쪽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고, 중앙의 길은 저 편 지평선을 향해 뻗어있다. 이 세 갈래 길이 밀밭을 두 역삼각형 모양으로 나누고 있다. 길의 표면은 포도주빛으로 물들어서 마치 피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양쪽으로 향한 길들은 그 끝이 화면의 양 테두리에 의해 잘려 있어서 막히고 단절된 느낌을 주지만, 중앙의 길은 지평선과 맞닿아 있기에 무언가 그 끝에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1.3 중앙의 길을 따라 저 지평선 너머로 가다보면 우리는 밀밭을 덮고 있는 검푸른 하늘을 보게 된다. 이 하늘은 보통 하늘이 아니다. 검은색과 청색의 붓놀림은 우리에게 이 하늘이 아주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암울하고 불길한 느낌에 마치 폭풍이 오기 전의 하늘을 보는 듯 하다. 요동치는 하늘과 하늘 사이에 구름이 두 조각 떠 있는데, 구름역시 심하게 휘날리고 있으며 좀더 어두운 느낌을 준다.

1.4 격렬히 요동하는 밀밭과 어두운 하늘 사이로 한 떼의 까마귀들이 유유히 날아가고 있다. 오른쪽 위 모서리에 작은 까마귀들은 점차 왼쪽 아래로 내려오면서 커지고, 그림 중앙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 새들의 모습은 굵은 붓터치로 간단하지만 힘있게 그려지고 있다. 자세히 보이지 않기 때문에 멀리 저 하늘 너머로 날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 모호함 때문에 검은 까마귀들은 좀더 신비스런 느낌을 준다.

“어떤 화가도 빈센트만큼 그 까마귀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 버섯 색깔과 같은 검은색, 화려한 연회의 느낌을 주는 검은색, 그리고 저녁시간 사라져 가는 빛에 놀라서 날갯짓하며 떨어뜨리는 배설물과 같은 검정색을 더 잘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라고 안토닌 아르토드는 말하고 있다.

1.5 전체적으로 하늘의 검푸른 빛과 밀밭의 억센 노란 빛, 그리고 까마귀의 검정색이 힘차고 장엄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자연의 강한 힘과 권능에 죽음이나 운명 같은 위험함이 느껴지지만, 밀밭과 하늘, 그리고 심지어 까마귀의 역동적인 모습이 삶에 대한 희망을 넌지시 던지고 있다.


2. 곳곳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징후들

2.1 길은 가장 큰 밀밭을 바로 거침없이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끈다. 이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양쪽의 길과, 관람자의 시선에서 시작해서 저 멀리 지평선으로 향하는 중앙의 길이다. 이 양쪽 길은 시작과 끝이 모호하기에 고흐가 당시 삶에서 느꼈던 인생의 지평에 대한 혼란을 의미한다. 어쩌면 불안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반면 화면 가운데어서 곧게 뻗어 나간 길은 무언가 희망을 주고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미래를 향해 뻗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길이 저 새로운 세상인 지평선과 만나는가 아니면, 닿지 못하고 결국 끊어질 것인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길의 끝은 희망의 세상이 아니라 죽음일지도 모른다. 고흐는 아마도 피해갈 길이 양쪽에 있지만, 곧게 뻗은 파멸(혹은 희망)의 가운데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림 2] Beach at Scheveningen in Stormy Weather, Oil on canvas on cardboard. 34.5 x 51.0 cm. The Hague: August, 1882. F 4, JH 187


2.2 그는 종종 폭풍이 몰아치는 하늘을 그리곤 했다. [폭풍우가 치는 쉬베닝겐의 바닷가 Beach at Scheveningen in Stormy Weather]에서와 같이 험한 하늘은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

이러한 하늘은 그에게 매우 큰 영감을 주고,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더구나 고흐는 이런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에서 암울함만 본 것이 아니라, 생명력있고 긍정적인 면도 보았다. 한 편지에서는 “항해사들은 때때로 폭풍우에 휩쓸려 조난당하는 대신에, 그것을 이용하여 길을 성공적으로 길을 찾아 나가기도 한다.”라고 쓰고 있다. ("The pilot sometimes succeeds in using a storm to make headway, instead of being wrecked by it." - letter 197)


이 밀밭 그림에서도 하늘은 폭풍우가 다가옴을 느끼게 하고, 암울하고 불길한 미래에 대한 전조로써 읽혀진다. 그러나 강렬함은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현재의 삶을 뛰어 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2.3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까마귀는 자유와 죽음의 상징이다. 과연 이 까마귀들은 단순히 죽음을 의미하는가? 대부분의 경우 까마귀는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혀진다. 까마귀는 불길하고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죽음의 상징(Schapiro, 1952)이다. Heimar(1976)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폭력적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새를 통하여, 이 그림은 익사당하는 사람처럼 굴복하여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공격당하고 죽임을 당하여 종국에는 먹어치워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직면한 사람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단순히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까마귀는 죽음을 상징하지만, 고흐는 자연에 대한 예리한 눈으로 사물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편지들에서 보면,

“나는 오늘 아침 대성당에 많은 까마귀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곧 봄이 오고, 종달새가 돌아오겠지. ‘하느님은 땅의 표면을 새로이 한다.’ 라고 씌어있다. ‘보라, 나는 모든 사물을 새로이한다.’ 그리고 신이 대지의 표면을 새롭게 하듯이, 사람의 영혼과 마음과 가슴에 힘을 불어넣고 새로이 할 수 있겠지.”
I did see a great many crows on the Great Church in the morning. Now it will soon be spring again and the larks, too, will be returning. "He reneweth the face of the earth," and it is written: "Behold, I make all things new," and much as He renews the face of the earth, so He can also renew and strengthen man's soul and heart and mind.
- letter 85


그에게 있어 까마귀는 죽음 이상의 무언가를 뜻하고 있다.

또한 까마귀를 보는데 있어서 생각해 볼 것이 또 하나 있다. 까마귀떼의 방향 문제인데.. 까마귀는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것일까? 아니면 저 하늘 너머로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죽음의 운명을 몰고 내려오는 것일 수 있고, 또는 죽은 고흐(혹은 감상자)를 저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일 수 있다.

2.4 화면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며 강한 인상을 주고 있는 밀밭은 날아가는 까마귀의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밀밭 또한 고흐가 자주 그리던 주제중 하나인데, 그에게 있어서 밀밭은 사람의 삶을 의미한다. 반 고흐는 마치 농부처럼 밀의 성장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밭에 씨를 뿌리는 자가 곡식을 거두는 것처럼, 영혼에 씨를 뿌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으리라.”, “어린 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부드러운 어떤 것을 나타내며,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과 흡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밀밭은 삶을 상징한다.

“나는 밀과 사람이 같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다. 사람이 땅에 심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결국 맷돌에 갈려 빵이 되어 버릴 것을. 불행과 행복의 차이라! 둘다 죽음이나 소멸같이 유용하고 필요한 것이지... 매우 상대적이다. 그리고 삶또한 똑같다.” ("I feel so strongly that it is the same with people as it is with wheat, if you are not sown in the earth to germinate there, what does it matter?--in the end you are ground between the millstones to become bread.
The difference between happiness and unhappiness! Both are necessary and useful, as well as death or disappearance . . . it is so relative--and life is the same. “ -letter 607)


이러한 삶을 상징하는 밀밭이 길에 의해 조각나 있고, 어두운 하늘에 깔려 있으며, 바람에 요동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삶이 순탄치 않고 위태롭다는 것을느끼게 된다. 물론 하늘이나 까마귀에서처럼 격렬히 요동하는 모습이 또 다른 삶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3. 죽음을 몰고 오는 그림

이 그림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그의 자살과 연관지어 일종의 유서(suicide note)의 역할을 한다는 해석이다. 과연 그럴까?

3.1 이 그림이 자살을 직접적으로 의미한다는 것은 통상 이 그림이 그의 마지막 작품 - 유작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통념 때문에 더 극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시기의 작품인 것은 확실하지만, 죽음 직전에 그려졌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편지에서 언급한 대로 마지막 3작품에 이 [까마귀가 나는 밀밭 Wheat Field with Crows]가 포함되는지 조차 모호하다.

“그것들은 혼란스러운 하늘아래 광활히 펼쳐진 대지에 대한 것이다. 나는 극도의 슬픔과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나는 네가 이 그림들을 곧 봤으면 한다. 내가 말로 못하는 것을을 이 그림들이 네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기에 될 수 있는 대로 파리에 가서 네게 이 그림들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여기 온 이레 생각하고있던 ”다우비니의 정원 Daubigny's garden"이 세 번째 그림이다.“
(“They are vast fields of wheat under troubled skies, and I did not need to go out of my way to try to express sadness and extreme loneliness. I hope you will see them soon--for I hope to bring them to you in Paris as soon as possible, since I almost think that these canvases will tell you what I cannot say in words, the health and restorative forces that I see in the country. Now the third canvas is Daubigny's garden, a picture I have been thinking about since I came here.” - letter 649)


고흐의 편지에 전문가인 Jan Hulsker박사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구름낀 하늘과 밀밭 Wheat Field under Clouded Sky]이 고흐가 말한 세 작품중 둘이 아니라, [밀밭 The Fields]와 [오베르의 들판 Wheat Fields at Auvers under Clouded Sky]이 그 세 작품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 네 작품 모두 고흐가 말한 ‘혼란스러운 하늘 troubled skies'를 그리고 있다. 고흐가 편지에 어떻게 썼느냐를 두고 논란이 많지만, 고흐 전문가 Ronald Pickvance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사건이 일어나기 거의 3주 전인 7월 7일에서 10일 사이에 그려졌다고 주장했다.

이 시간 간격 때문에, 이 그림이 그의 마지막 유작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유서의 느낌이 난다는 해석은 조금 무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대중적인 서술이나 묘사(특히 영화나 소설)에서 이 작품이 유작 - 혹은 유서 - 로써 등장하는 것은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림 3] The Fields, Oil on canvas, 50.0 x 65.0 cm. Auvers-sur-Oise: July, 1890. F 761, JH 2120


그림 4] Wheat Field Under Clouded Sky, Oil on canvas. 50.0 x 100.5 cm. Auvers-sur-Oise: July, 1890. F 778, JH 2097


그림 5] Wheat Fields at Auvers Under Clouded Sky, Oil on canvas, 73.0 x 92.0 cm. Auvers-sur-Oise: July, 1890. F 781, JH 2102


그림 6] Daubigny's Garden, Oil on canvas, 53.0 x 103.0 cm. Auvers-sur-Oise: July, 1890. F 776, JH 2104


3.2 죽음 직전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긴 하지만, 이 그림은 강하게 죽음 - 자살 -을 암시하고 있다. 이 그림이 첫눈에 보기에도 불안하고 뭔가 위험한 느낌을 가져온다. 무엇이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이유는 가장 가까이 보이는 밀밭과 세 갈래 길에 있다. Shapiro(1952)는 ‘밀밭은 세 갈래 갈림길에 의해 전경으로부터 밖으로 열려있다. 선들은 흐르는 냇물처럼, 수평선에서 앞쪽으로 흐른다. 마치 공간이 초점을 잃고 모든 것이 관람객을 향하여 돌아선 것처럼... 인간의 길과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까마귀들의 불길한 날개짓의 움직임을 보라. 마치 (작가가) 불길한 운명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던 것처럼. 화가와 관객은 객체가 된다’고 말했다.

또한, 일반적인 원근법에 의하면 밀밭은 멀어질수록 작은 부분들로 나뉘어 지고 점차 희미해 져야 한다. ([오베르의 들판]에서 보듯이) 그러나 작가가 고의적으로 이 규칙을 어겼는지, 아니면 극도의 혼란상태에서 그려진 그림이라 그런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역삼각형 모양의 밀밭은 상당한 불안감과 공포를 관객에게 주고 있다. 고의적인 원근법의 파괴가 아니더라도, 고흐의 무의식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불안이 이러한 구도를 그리게 했을 것이다.

“... 그러나 길과 맞물려 안정되고 친근한 땅은 원근에 저항하는 듯이 보인다. 작가의 의지는 뒤죽박죽 되었다. 세상은 그를 향해 오나, 그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마치 그가 완전히 차단되었으나, 음울한 운명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고통받고 나뉘어 졌으며....” (Shapiro, 1983)


또한 두 개의 역삼각형 모양은 어머니의 가슴을 상징한다. 어머니는 포옹하고 감싸고 사랑을 베풀어 준다. 이것은 땅(가이아(Gaia)나 데메테르(Demeter))의 의미와도 통한다. 어머니 - 땅은 두가지 모순된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삶과 죽음이다. 땅은 생산하며, 생명을 창출해 낸다. 또한 모든 생물은 죽어서 땅으로 돌아간다. 어머니도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지만, 또한 어머니 품에 안기는 것은 영원한 안식 -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서의 예수를 안는 마리아 - 피에타 -를 생각해 보자.)

하지만, 어머니의 포옹은 위협적인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고, 어머니의 자궁은 무덤이 된다. “La Berceuse"의 부드럽고 온화한 가슴 대신에 ”두개의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강조된 날카로운 가슴이 화가와 관객을 공격하고 살해하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 Heiman, 1976


그림 7] The Pieta(after Delacroix), Oil on canvas, 73.0 x 60.5 cm. Saint-R?y: May, 1890. F 630, JH 1775


3.3
밀밭과 더불어 어두운 하늘 역시 암울한 분위기로 죽음의 예감을 강화하고 있다.


‘하늘은 매우 낮고 상처를 입었으며, 빛의 낮은 가장자리처럼 바이올렛 색채를 띄고 있다. 섬광이 있은 후에 솟아오르는 허공의 가장자리에는 이상한 그림자가 감돈다.’ - 안토닌 아르토드


어두운 하늘은 폭풍이 몰아쳐 올 것을 예고하고 있으며, 폭풍은 또다른 죽음의 상징이다.

3.4 그런데.. 이렇게 모든 소재에서 보이는 죽음의 징후는 어떤 죽음에 대한 예감인가? 단순한 죽음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고흐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젊은시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목사 - 혹은 전도사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다. 또한 동생 테오와 교환한 서신에서 볼 수 있듯이, 계속해서 하느님 - 종교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직자적인 삶의 태도는 중요한 것이고, 직접 낮은 곳으로 임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그림을 그림으로써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유사한 행위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가 정신적 문제와, 갈등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날이 올 것을 예감한 순간 무엇을 갈망했을까?

그림에 가득찬 불길한 절망의 분위기는 예수의 ‘십자가 매달리심’에 대한 이미지와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밀밭을 가로지르는 길들은 십자가에 대한 표상이며, 어두운 하늘은 예수가 십자가위에서 죽음을 맞이한 후에 하늘에 어둠이 덮혔다는 성서의 기술을 상징한다.

“낮 열 두 시가 되자 온 땅이 어둠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 마르코복음 15장 33절-34절.


Lebin은

“[까마귀]그림은 임박한 운명을 경고하듯 우울하다. 그러나 십자가형으로써 빈센트가 간절히 바라던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환생하여 기쁘게 신의 천국으로 승천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고통스러우면서 동시에 희망적인 이 사건의 초점은, 십자가 위의 순교자의 죽음과 그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기쁨 사이에 놓여 있다. 까마귀들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러 내려오지만, 그들은 천국의 문까지 그를 인도해 줄 것이다.”


고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그림에서 암시하는 죽음은 단지 사라짐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닌, 십자가 부활로써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로의 부활을 의미한다. 고흐는 더 이상 세상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없음을 느꼈지만,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나은 생명을 얻기 위해 다른 세상으로 향하고 싶었던 것이리다. 죽음 - 재생 - 환생의 진행은, 땅에 씨가 뿌려져 싹을 맺고 자라나는 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죽음과 생명의 모순적인 상징은 새로운 삶을 위한 - 현세의 삶은 아닐지라도.. -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4. 까마귀가 나는 밀밭

그림으로써 세상에 빛을 비추고자 했던 고흐의 삶은 당시에는 실패로 보였을지 모른다. 또한 고흐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의 종결이 인류에 있어서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예수 부활의 의미를 이 그림에 남겨 놓은 것으로 읽혀 질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절망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고흐는 죽었지만, 그의 작품은 계속해서 세상에 빛을 뿌리게 될 것이다.


5. 후기

이 작품에 대한 감상 - 혹은 분석 - 의 글을 쓰기 위해 여러 가지 책을 보고, 도판을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칼라 도판의 그림에서 색채의 변동이 심했다. 한 책의 밀밭은 화려한 노란색인 반면, 다른 책의 사진에서는 칙칙한 노란색이었고, 어떤 책에서는 심지어 하늘 부분에 라이트(사진 찍을 때 켰을 법한)의 반사광이 보이기까지 하였다. 고흐는 그의 작품들중 특히 해바라기 연작을 통해서 특유의 강하고 화려한 노란색들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이 작품에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칼라 도판의 색체가 그의 빛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도판을 보면서 느낀 감정은 얼마나 사실을 반영한 것일까? 특히, 컴퓨터로 이 그림을 인쇄해 보면서 작은 색채의 변화가 그림의 분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실제 작품의 크기보다 작은 축소판의 그림들만 봤기 때문에 정말 이 그림이 어떤 감흥을 일으키는지 짐작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작품에 대한 정확한 인상을 얻기 위해서는 진품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진품을 칭송하고, 집착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리라.

이 작품을 주제로 결정하고 나서 이 그림을 거의 매일같이 보고 살았다. 인쇄해서 방안에 한 장 붙여놓고, 한 장은 들고다니고, 컴퓨터 모니터의 바탕화면으로도 설정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광대하고 무언가 마음이 움직이는 느낌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림을 쳐다볼수록, 여러 사람의 그림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같이 생각할수록 그림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냥 그림을 바라보고 첫인상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곁에 두고 대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알게 되었다.

유흥준씨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림을 보는데 있어서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림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는다고 그림이 입을 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면, 그림은 그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줄 것이고,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느낀 것처럼, 내게도 뜨거운 감동과 따뜻한 평온함을 선사해 줄 것이다.

 

<출처: 고흐 - 까마귀가 밀반위를 날다|peter71>

 

 

 

 영혼의 편지

- 반 고흐, 신성림 역, 예담출판사    

 

고흐의 그림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여러매체를 통해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소개된 몇몇 작품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과 함께 한 그의 생을 죽음의 순간까지 들여다 보니 그역시 삶과 사랑, 죽음과 인생에 고뇌하는 한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그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확실히 화가의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과 생각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한 듯하다.

그에게 그림은 기쁨이었지만 가난이라는 고통을 그에게 안겨줄 수 밖에 없었다. 고흐는 자기가 있는 이곳을 예술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을 빼앗아가는 냉혹한 행성이라고 표현했다. 정말로 그 시대 화가들은 예술에 대한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초라하며 힘든 생활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흐 역시 이 삶에 점차 지쳐갔고, " 다시 태어 난다면 지금 보다는 나은 삶을 살수있기를 " 바랬었다.

 

p64

이따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도 내 안에는 평온함, 순수한 조화, 그리고 음악이 존재한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는 평온함, 순수한 조화, 그리고 음악이 존해한다. 나는 이것을 가장 가난한 초가의 가장 지저분한 구석에서 발견한다. 그러면 마음이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런 분위기에 도달한다. 다른것은 점점 내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럴수록 회화적인 것에 더 빨리 눈을 뜨게 된다. 예술은 끈질긴 작업,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작업, 지속적인 관찰을 필요로 한다. '끈질기다'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쉬없는 노동을 뜻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고, 그는 노력하는 화가였다. 그의 좌절을 이겨내고 생기를 되찾게 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흐의 그림에는 유난히 노랑색이 많다. 이것은 단지 눈으로 보여지는 그대로의 자연의 갈색 빛 대지와 황토색이나 노란빛의 자연의 수확물들을 아니었었다. 고흐가 노랑색을 즐겨쓰게 된 이유는 시신경 손상에 따른 황시증(黃視症)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압생트'라는 술이 유행했는데, 압생트에 매혹됐던 고흐는 그림이 뜻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면 취하도록 압생트를 마셨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고 해바라기 꽃을 보면 그 황금빛이 불타는 듯이 보이며 영롱하고 찬란한 빛으로 변해갔다고....고흐는 과음 후에 환시(幻視)로 나타나곤 하는 노란빛에 매혹됐고, 그 빛깔을 캔버스에 표현하기 위해 더욱 압생트를 마시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p239

그들은 내가 담배 피고 술을 마신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이냐? 결국 그들의 절제는 내게 새로운 비참함을 부를 뿐인데.

 

p185

피사로는 색채가 조화를 이루거나 부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내는 효과를 대담하게 과장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정말 옳은 말이다. 그건 데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와 똑같이 그리고 색칠하는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설령 현실을 거울로 비추는 것처럼 색이나 다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 가능할지라도, 그렇게 만들어낸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문학도 예술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의 편지에서의 문체는 한구절 한구절 가슴에 와닿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모든 예술은 하나로 통하는 것일까? 그는 어쩜 화가이기에 앞서 시인이 아니었었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1890년 7월, 서른일곱의 나이
고흐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마지막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렇게 테오의 품에 안긴 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긴채 생을 마감했다.
테오를 위해 영혼까지 주겠다고 말했던 반고흐.
그는 비록 떠났지만, 그의 그림은 영원히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그토록 동경했던 저 별에 그가 가있기를......
.......................................................................................................................................
 
p95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 모든 것을 잃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살다보면 촛불을 끌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미리 소화기를 들이 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p98

인물을 잘 표현하는 일은 얼굴 생김새를 닮게 그리는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느낌을 전해주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p100

나는 내 그림을 제각기 다른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걸 모두 합칠 때 하나의 작품이 된다고 생각한다.

 

p105

여기에 있으면 수백 점의 걸작품이 있는 전시회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날 무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겠니? 그저 대충 틀만 잡은 스케치 몇점이지.
그러나 그것 말고도 또 있다.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조용한 기쁨이다.

 

p118

훌륭하고 유용한 일을 해내려는 사람은 대중의 승인이나 평가를 기대하거나 추구해서는 안되며,
열정적인 가슴을 가진 몇 안되는 사람들의 공감과 동참만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p134

사람들은 기술을 형식의 문제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부적절하고 공허한 용어를 마음대로 지껄인다.
그냥 내버려두자.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p185

예술은 예술가들에게! 이건 위대한 혁명이다. 그게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면 할 수 없지.
인생은 너무 짧고 너무 빨리 지나간다. 화가라면 그래도 그림을 그려야 겠지.

 

p189

시인, 음악가, 화가....... 그 모든 예술가들이 불우하게 살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네가 최근에 모파상에 대해 했던 말도 그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냐.
이건 영원히 되풀이되는 물음을 다시 묻게 한다.
우리는 삶 전체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삶의 귀퉁이밖에 알 수 없는 것일까?
죽어서 묻혀버린 화가들은 그 뒷세대에 자신의 작품으로 말을 건다.

 

p236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부터 약속해 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것이다. 나중에는 하나의 연작으로 보여야 할 그림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 그림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p248

삶은 공정하지 않았다.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나는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충분히 생각할 수 없었다. ........
그림을 그리느라 너에게 너무 신세를 졌다는 채무감과 무력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이런 감정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편할까.

 

<자료글: '소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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