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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잔 다르크 / 오를레앙의 처녀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11.17|조회수1,19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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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 오를레앙의 처녀  

[1412.1.6 ~ 1431.5.30]

 

15세기 전반에 영국의 백년전쟁 후기에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적인 소녀이다.

1429년의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도왔다.

 

 

잔 다르크의 생애

하나님의 계시

잔 다르크는 1412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신앙심이 깊은 부농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이자 마을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맡고 있던 자크 다르크, 어머니는 이자벨 로미이다. 그녀는 1424년 대천사 미카엘, 성 카타리나, 성 마거릿이 나타나 프랑스를 침략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왕세자 샤를(후에 샤를 7세)을 왕위에 올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과거 역사 인물들의 병력을 연구하는 현대 의학자들은 이 잔 다르크의 계시가 사실은 간질병으로 인한 착시 혹은 환청 현상의 일부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16살 되던 해에 잔 다르크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 백작을 찾아가 샤를 대공이 있는 시농 성으로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백작은 잔 다르크를 웃어넘겼으나 백작 휘하의 장 드 메츠와 베를랑 드 폴뤼니는 그녀의 편이 되었다. 그 둘의 도움을 받아 백작과의 두번째로 만난 잔 다르크는 열세에 몰린 프랑스군이 오를레앙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고, 보드리쿠르 백작은 잔 다르크의 열정에 감동했다.

보드리쿠르 백작의 허락을 받은 잔 다르크는 시농 성으로 가 샤를 대공을 알현했다. 반신반의하던 왕세자는 잔 다르크를 직접 만나본 후 그녀의 도덕심과 의지에 감탄했다. 전설에 따르면 대공은 과연 잔 다르크가 하느님이 보낸 사자인지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옷을 시종에게 입혀 옥좌에 앉혀놓고 자기는 변장을 한 채 가신들 속에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초라한 차림의 대공 앞으로 다가가 경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잔 다르크는 푸아티에에서 프랑스 교회의 성직자들로부터 도덕성 심사를 받은 뒤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오를레앙에 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활약

 

당시 프랑스는 발루아 왕조의 왕 샤를 6세의 아들이며 왕위계승자인 왕세자 샤를과 랭커스터가 출신의 잉글랜드 왕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격전장이었다. 헨리의 군대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선량공)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 북부의 거의 전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왕위 즉위식을 올리던 랭스가 계속 적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샤를은 부왕 샤를 6세 사후 6년이 지난 1427년말에도 정식으로 왕관을 쓰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그의 왕위주장 명분은 거의 현실성이 없게 되었다. 왕세자 즉위식을 올리지 않은 한 프랑스 왕위주장의 정당성은 언제든지 도전받을 수 있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세력과 샤를 세력의 접경에 있던 잔의 고향 동레미의 사람들은 부르고뉴의 위협 앞에 거의 자신들의 고향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잔은 1428년 5월 '음성'의 인도를 받아, 왕세자에게 충성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거점인 보쿨뢰르로 가서 그곳 사령관에게 왕세자 군대에 가담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사령관은 16세 소녀의 초월적 능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429년 1월 재차 방문한 잔의 굳은 마음과 신앙심에 설득되어 왕세자가 있던 시농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같은 해 2월 13일 잔은 남자의 복장으로 6명의 무장한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으며, 적의 영토를 가로질러 11일 뒤 시농에 도착했다. 잔은 도착 즉시 샤를이 머무르고 있는 성에 갔다. 샤를은 그녀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고 측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틀 뒤 접견을 허락했다. 샤를은 신하들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잔은 그에게 곧바로 가서 자신이 잉글랜드군과 싸우기를 원하며 랭스에게 즉위식을 올리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왕세자의 명령으로 즉시 교회당군에 의해 심문이 이루어졌다. 샤를의 친척인 알랑송 공작도 그 심문에 참석했는데 그는 잔에게 호의를 보였다. 3주 뒤에는 푸아티에에서도 저명한 신학자들의 질의문답이 있었다. 이러한 심문은 1417년 교회의 대분열이 막을 내린 뒤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이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잔은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증명할 곳은 푸아티에가 아니라 오를레앙이라고 말하고 3월 22일에는 잉글랜드군에게 보내는 도전장을 받아쓰게 했다. 성직자들은 당시 잉글랜드군에게 수개월 간 포위되어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오를레앙의 구출에 그녀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올렸고 샤를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잔은 시농으로 돌아왔고 샤를은 4월중에 투르에서 잔에게 약간의 군속을 붙여주었다. 장 돌롱이 시종으로 따랐고, 오빠 장과 피에르도 그녀를 따랐다. 그녀는 심판일의 예수를 그린 기장과 예수의 이름이 새겨진 기를 들었다. 칼은 어디에서 구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생트카트린드피에르부아 교회에 있을 것이라고 답했고 실제로 그곳에서 칼이 발견되었다.

1429년 4월 27일 블루아에서 수백 명의 군대가 소집되어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오를레앙은 1428년 10월 12일 이래로 잉글랜드 요새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4월 29일 잔과 프랑스군 사령관 라 이르가 보급품을 가지고 갔을 때 잔은 증원군이 올 때까지 행동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월 4일 저녁 잔은 쉬고 있다가 영감을 받은 듯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잉글랜드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무장을 갖춘 뒤 도시의 동쪽에 있는 잉글랜드군 요새로 서둘러 향했다. 당시 그곳에는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잔의 도착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마침내 프랑스군은 요새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잔은 또다른 도전장을 잉글랜드군에게 보냈다. 5월 6일 아침 그녀는 강의 남쪽 둑으로 건너가 다른 요새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그 근방의 더 강력한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철수했다. 그러나 잔과 라 이르는 잉글랜드군을 공격해 그 요새마저 삽시간에 빼앗았다. 5월 7일 새벽 프랑스군은 레투렐 요새로 진군했다. 잔은 부상을 입었지만 곧바로 전투에 복귀했고, 그녀의 이러한 본보기에 자극되어 프랑스 지휘관들은 쉬지 않는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잉글랜드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날 잉글랜드군은 퇴각하려는 듯 보였지만 일요일이기 때문에 잔은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5월 9일 잔은 오를레앙을 떠나 투르에서 샤를을 만났다. 그녀는 왕세자에게 랭스로 서둘러 가서 대관식을 올릴 것을 촉구했다. 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한 샤를의 참모 몇몇은 이와는 달리 노르망디의 정복을 조언했다. 샤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잔의 끈질긴 요구에 기울었다. 그러나 우선 루아르 강변의 여러 마을에 있는 잉글랜드군을 소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잔은 프랑스군 중장인 그녀의 친구 알랑송 공작을 만났고, 함께 이동해 도시 하나와 중요한 다리 하나를 손에 넣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보장시를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공격을 받고 성 안으로 후퇴했다. 이어 잔은 샤를 및 그 측근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의 반대와, 알랑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궁정에서 의심을 받고 있던 프랑스 사령관 리슈몽을 받아들였다. 잔은 충성서약을 하게 한 뒤 그의 도움을 받았으며 얼마 후 프랑스군은 보장시 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1429년 6월 18일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은 파테에서 전투를 벌였다. 잔은 병사들에게 샤를이 그날 최대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약속했다. 잔의 말 그대로 완벽한 승리가 이루어졌다. 잉글랜드군은 패주했고 무적이라는 명성이 프랑스군에게 뒤따랐다. 잔과 사령관들은 여세를 몰아 대담한 파리 공격에 착수하는 대신 당시 라 트레무아유와 함께 쉴리쉬르루아르에 있던 샤를과 합류하기 위해 되돌아갔다. 잔은 다시 한번 샤를에게 랭스로 신속하게 진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했다. 루아르 강을 따라 여러 도시를 지나는 동안 잔은 샤를을 수행하면서 시간을 끌 것을 주장하는 측근들의 조언과 그의 주저함을 물리치고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랭스 공격의 위험과 어려움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돌렸고, 마침내 샤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군대가 집결하기 시작한 지앵에서 잔은 편지 2통을 썼는데, 하나는 샤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있던 투르네 주민에게 보내는 권고이고, 다른 하나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6월 29일 그녀는 샤를과 함께 랭스로 출발했다. 트루아에 도착하기 전에 잔은 그 도시 주민에게 투항하면 용서해주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그들은 잔을 탐색하기 위해 설교사인 수도승 리샤르를 보냈다. 그가 그녀의 사명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왔지만 도시 주민들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 편에 계속 남기로 결정했다. 샤를은 회의를 열었고 잔은 공격을 제의했다. 다음날 아침 잔은 공격을 개시했고 트루아는 곧바로 강화를 요구했다. 이어 샤를의 군대는 샬롱으로 진군했다. 샬롱의 주민들은 저항을 결의했지만 주교백작은 성문열쇠를 샤를에게 넘겨주었다. 7월 16일 프랑스군은 랭스에 도착했고, 랭스는 성문을 열었다. 1429년 7월 17일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잔은 제단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를 들고 서서 행사를 참관했다. 식이 끝난 뒤 그녀는 샤를 앞에 무릎을 끓고 처음으로 자신의 주군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 날 그녀는 부르고뉴 공작 앞으로 강화와 국왕요새로부터의 철수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1429년 7월 20일 국왕 샤를 7세에 즉위한 왕세자는 랭스를 떠났고, 군대는 1개월 동안 샹파뉴와 일 드 프랑스 전역에서 행진을 벌였다. 8월 2일 왕은 프로뱅에서 루아르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러한 결정은 파리공격 계획의 전면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적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국왕편의 도시들은 다소 놀람을 표시했다. 잔은 샤를의 결정에 반대하면서 8월 5일 랭스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서한을 썼다. 그녀는 그 편지를 통해, 당시 파리를 점령하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과 2주일간의 화약을 맺었으며, 그 기간이 지나면 그가 파리를 국왕에게 넘겨 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8월 6일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브레이에서 센 강을 건너는 것을 막았는데, 샤를의 파리 공격을 원했던 잔과 사령관들에게는 매우 기쁜 일이었다. 잔은 프랑스 어느 곳에서든 환호를 받았다. 15세기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당시 잔은 프랑스인들의 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이 완수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8월 14일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은 상리스 근처에서 다시 한번 대치했다. 이번에는 소규모 접전만 몇 차례 일어났을 뿐이었다. 잔이 잉글랜드군의 참호 앞에 나가 공공연히 도전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어느 편도 전투를 시작하려 하지 않았다. 한편 콩피에뉴·보베·상리스 등 파리 북쪽에 있는 도시들이 프랑스 왕에게 항복했다. 그 직후인 8월 28일에는 센 강 이북의 전역을 대상으로 4개월의 휴전 기간을 갖자는 데 부르고뉴와 합의했다. 그러나 잔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녀에게는 파리 함락이 매우 중요했다. 8월 26일 잔이 알랑송과 함께 파리 북쪽 교외 생드니로 접근하자 파리 시민들은 방어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9월 7일 샤를이 도착했고 9월 8일 생오노레와 생드니 중간지점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잔은 공격군 맨 앞에 서서 파리 주민들에게 파리를 '프랑스의 국왕'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잔은 군사들을 계속 독려했지만, 결국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다음날 그녀는 알랑송과 함께 공격을 재개했지만 왕실회의에서는 퇴각을 명령했다.

샤를 7세는 루아르로 물러났고 잔도 그를 따라갔다. 9월 22일 프랑스군은 지앵에 도착한 뒤 해체되었고, 알랑송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귀향했다. 이제 왕의 곁에는 잔만 남았다. 후에 알랑송은 노르망디 공격을 계획하고 왕에게 잔의 합류를 요청했지만, 라 트레무아유를 비롯한 신하들은 알랑송을 만류했다. 잔은 왕과 함께 부르주로 갔다. 거기서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과 온정을 베풀었는데 이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10월에 그녀는 생피에르르무티에로 갔다. 거기서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이끌고 용감한 공격을 감행해 그 도시를 점령했다. 그 다음에는 라샤리테쉬르루아르를 포위했다. 도중에 탄약이 떨어져 이웃의 여러 도시에 원조를 요청했지만 물자가 너무 늦게 도착해 1개월 뒤 철수해야 했다.

이어 잔은 루아르 강변의 여러 도시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왕과 재회했다. 1429년 12월말 국왕 샤를은 잔과 그녀의 부모·오빠를 귀족에 임명하는 특허장을 내렸다. 1430년초 부르고뉴 공작은 브리와 샹파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랭스의 주민들은 불안해했으나 잔은 3월에 그 도시에 대한 왕의 관심과, 자신이 그곳의 방어를 맡겠다는 약속을 제시함으로써 안심시켰다. 부르고뉴 공작이 콩피에뉴 공격에 착수하자 주민들은 도시의 수호를 결의했다. 3월말에서 4월초경에 잔은 왕을 떠나 오빠 피에르, 시종인 장 돌롱, 그리고 무장병사 몇 명만을 대동하고 콩피에뉴 원조길에 올랐다. 4월 중순 그녀는 믈룅에 도착했고, 그 도시 주민들은 그녀의 출현에 힘입어 샤를 7세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1430년 5월 14일 잔은 콩피에뉴에 도착하여 랭스 대주교 르노 드 샤르트르와, 왕의 친척인 방돔 백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을 만났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수아송으로 갔으나 그곳 주민들은 입성을 저지했다. 르노와 방돔은 마른 강과 센 강의 남쪽으로 되돌아가기로 했지만 잔은 그들과 함께 가기를 거부하고, 콩피에뉴의 '좋은 친구들'에게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재판

1430년 5월 23일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에서 요새를 방어하다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부르고뉴 공작 필립은 프랑스 정부에 몸값을 제시했으나 샤를 7세는 이를 방관했다. 잔 다르크는 여러 번 도주하려 했으며, 한 번은 약 230m 높이의 탑에서 해자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프랑스 정부에서 아무 대응이 없자 부르고뉴 공작은 마침내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에 잉글랜드군에 넘겼다. 그녀는 당시 잉글랜드령이었던 노르망디 지방의 루앙으로 압송되어 이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피에르 코숑 주교가 재판을 지휘했다.

 

잉글랜드의 베드포드 공작은 조카인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위에 올릴 심산이었으므로, 샤를 7세의 즉위를 도운 잔 다르크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코숑 주교는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강행했다. 후에 법정 서기들은 상부의 강압에 못 이겨 재판 기록을 잔 다르크에게 불리하도록 일부 날조했다고 고백했다. 잔 다르크에게는 자문관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재판엔 그녀를 도울 증인조차 나오지 않았다. 코숑 주교는 잔 다르크가 교황에게 항소할 기회마저 막아버렸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자문관을 구성했다. 교회법에 따르면 이단 재판의 피고인 잔 다르크는 마땅히 여자 간수들이 지키는 수녀원에 수감되어야 했으나, 잉글랜드 정부는 그녀를 병사들이 감시하는 감옥에 수감했다. 재판에 드는 모든 비용은 잉글랜드 정부가 부담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잔 다르크는 홀로 자신을 변호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농가 출신의 18살 된 소녀가 연륜있는 주교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심판관들과 그들의 끈질긴 유도 심문에 맞서 펼친 변론은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심판관들은 읽고 쓸 줄도 모르는 그녀의 유려한 변론에 여러 번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코숑 주교는 마지막에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당시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종교적인 죄였다. 잔 다르크는 남장은 남성들이 많은 군대에서 제대로 근무할 수 있기 위해, 또한 유사시에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며 반박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후에 그녀는 법정의 명령에 따라 여자 옷을 입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감옥을 찾아온 한 영국 영주가 그녀를 강간하려 한 후 다시 남자 차림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로 잔 다르크는 사형을 당할 때까지 머리를 자르고 남자 복장을 했다.

 

오랜 재판 끝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잔 다르크는 곧바로 처형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녀는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1431년 5월 29일 법정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을 언도했다.

 

<백과사전> 




 

 

백년 전쟁

 

1.원인

 

영국은 영국 섬 말고도 노르망디 공에게 정벌당하면서 노르만 왕조가 세워졌을때 노르망디 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또 영국의 여왕과 프랑스 노르망디 남쪽의 앙주의 귀족과 결혼이 성사되면서
앙주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또한 영국왕과 프랑스 왕비가 눈이 맞아 왕비와 왕이 이혼하고 프랑스
왕비와 영국왕이 결혼하게되면서 프랑스 남부의 거대한 영토를 집어삼키게 되었다.
때문에 프랑스 왕보다 영국왕이 프랑스안에있는 땅을 더 많이 소유하고있었다.
프랑스 왕은 그 땅을 노리다 영국왕이 형식적으로 프랑스의 신하라는것을 알고 영국의 '존'왕을
파리로 호출한다. 하지만 존왕이 거부하자 프랑스는 영국내의 땅을 다 집어삼킨다. 오랜 세월이
지난후, 영국은 그때 그 사건을 핑계로 프랑스를 침략한다.
2.발전 및 의의

①프랑스의 승리- 대부분의영토 회복

②양 국가의 봉건 영주 몰락,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 민족 의식 성장

3.결과
프랑스와 영국은 앙숙이되고, 영국은 그나마 있던 땅도 모두 빼앗긴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왕
가들은 혈연상 관계가 있었으나 남남이된다.
 
 
본문
백년전쟁의 경과 지도 /

프랑스를 전장()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영국은 1066년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게 되었다.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옌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적인 소녀.

잔 다르크 는 프랑스의 동레미라퓌셀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1429년의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城)에 있는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방문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북반부를 영국군 및 영국에 협력하는 부르고뉴파(派)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도 1420년의 트루아의 조약에 따라 샤를 6세 사후에는 영국왕 헨리 5세가, 또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어, 황태자 샤를은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그 해 5월 상순,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완전히 패퇴하였다.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에 샤를 7세는 영국의 헨리 6세에 앞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잔 다르크에 대한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잔 다르크는 더욱 충성을 하였다.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1431년,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 찍혀, 이단(異端)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판결을 파기(1456), 명예를 회복시켰고, 가톨릭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오를레앙전투>

출생지인 로렌의 동레미(현재의 보주州 동레미 라 퓌셀)를 떠나서 1429년 2월 초, 황태자 샤를이 본진을 둔 시농성시(城市)에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잔 다르크의 동정은 불분명한 점이 많다. 부근의 성시 보쿨뢰르의 수비대장 로베르는 파리의 왕정부로부터 샹파뉴의 쇼몽대관직을 수여받은 숙부의 대리를 맡아 동레미마을의 재판영주로 있었다. 잔다르크의 아버지 자크는 마을의 소송대리인으로서 로베르법정에 나온 적도 있는 마을의 유력자였으며 잔 다르크는 로베르를 따르고 있었다. 로베르는 형식상으로는 황태자 샤를과 대적하고 있는 파리의 왕정부(영국과 프랑스 왕을 칭하는 어린 왕 헨리 6세의 섭정 베드퍼드의 정부)의 관리였지만 사실은 샤를의 편이었다. 전국(戰局)의 초점은 1429년 루아르강 중류의 오를레앙시 공방(攻防)에 있었다. 영국은 이곳을 함락하면 점령지 노르망디와 귀엔을 연결시킬 수가 있었다.

한편 황태자로서는 이곳을 빼앗기면 루아르강 유역으로부터 훨씬 남쪽으로 후퇴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존망의 위기에 선 황태자 앞에, 그를 구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소녀가 나타났다. 황태자는 잔 다르크의 뜻을 받아들여 오를레앙수비대에 참가시켰다. 신앙의 열정이 넘치고 관행에 얽매임 없이 전투를 지휘하는 잔 다르크는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잔 다르크가 이끄는 창소대(槍小隊)는 날이 저물어도 전투를 계속하여 마침내 영국군의 요새 하나를 함락시켰다. 이것이 전세를 크게 바꾸어 그 해 5월초,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물러갔다. 오를레앙전투가 끝난 뒤에 잔 다르크는 랭스에서 거행된 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북프랑스의 모든 도시를 차례로 방문하는 <왕의 순행>에, 발루아왕가의 <신의 증인>으로서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동행하였다.

<이단의 성녀>

1430년 5월, 잔 다르크는 당시 영국에 협력하고 있던 북프랑스의 콩피에뉴교의 부르고뉴파(派) 군대에게 사로잡혀 영국왕이 몸값을 지불, 노르망디 루앙성에 유치되었다. 샤를은 침묵을 지켰다. 파리대학 신학과는 잔 다르크가 이단이라는 혐의를 걸어 프랑스왕국 종교재판관에 의한 종교재판을 요청했고 영국왕가측도 이에 동의하여 법정에 신병을 인도하였다. 재판은 31년 2월 21일을 첫날로 해서 14회의 심리를 거듭했다. 이단혐의의 근거는 교회 성직자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신적 존재와 접촉했다고 주장한 일에 있었다. 종교재판관의 심문은 잔 다르크의 주장이 매일 보던 신적 존재의 화상(畵像)에서 촉발된 심리적 착각에서 나온 것임을 논증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만약 잔 다르크가 이를 인정한다면 그녀의 죄는 성상숭경(聖像崇敬)이라고 하는 단순한 신앙의 미혹에 지나지 않고, 이단으로서의 의심도 없어지는 것이었다. 법정은 잔 다르크를 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소녀의 단순하고 순수한 신앙심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28일 아침, 잔 다르크는 이단으로 선고받아 루앙광장에서 영국왕가의 루앙대관에게 신병이 인도되었고, 대관은 이단에 대한 관행대로 그녀를 화형에 처하였다. 로마교황청은 이 루앙의 판결을 아직도 취소하지 않은 가운데 1920년 잔 다르크를 성녀로 추서함으로써 잔 다르크는 이단으로서 성녀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위 계승 다툼입니다.

프랑스의 카페 왕조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발루아 백작 필립 6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발루아 왕조가 형성됩니다. 이 때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필립 4세의 외손자였는데) 자신의 왕위 계승권이 더 높다며 반발합니다.

필립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 가지고 있던 봉토인 아키텐 공작령을 몰수하겠다고 선포하고, 에드워드 3세 역시 왕위 계승의 정당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하여 전쟁을 준비합니다.

 

1339년 북부 프랑스와 플랑드르에서 소규모 충돌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하여 1340년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됩니다.

1340년 영국 함대는 라인강 하구의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 1345년에는 에드워드 3세와 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함께 노르망드에 상륙합니다.

1346년 크레시에서 숫적으로 압도적인 프랑스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1347년에는 칼레를 점령, 그 후 잠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1350년 프랑스의 필립 6세가 죽고 쟝 2세가 즉위하게 되며,  1355년 흑태자의 지휘하에 다시 전쟁이 시작됩니다. 1356년 푸아티에에서 흑태자는 다시 한 번 숫적으로 우세한 프랑스 군을 격파, 국왕 쟝 2세를 포로로 잡습니다. 쟝 2세는 몸값으로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내고 풀려나면서, 아키텐과 칼레를 영국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브레티니 조약을 채결하고 일시적으로 전쟁을 중단합니다.

 

크레시와 푸아티에, 그리고 이후의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크게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습니다.

그 첫번째는 영국군의 높은 군율입니다. 영국군의 주력은 독립적 자영농민- 즉 평민 출신 병사인 궁병들이었습니다. 궁병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고용되었는데, 우선 그들의 공격력이 우수했고, 두 번째로 그들의 급료가 기병의 반밖에 안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사나 그 휘하의 기병들에 비해 통솔이 잘 되었으며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영국 궁수들이 사용한 신무기 -  영국 장궁English Longbow 는 160m 거리에서 두께 5cm의 참나무판을 관통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 있었으며, 강철촉 화살을 사용한다면 갑옷을 관통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더군다나, 1분에 10~16발을 쏠 수 있는 엄청난 연사속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크레시/푸아티에/아쟁쿠르에서는 영국군의 화살은 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사의 갑옷을 뚫기는 어려웠습니다.)

두 번째 원인은 프랑스 군의 어리석음입니다. 프랑스 군은 단단한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는 영국군을 향해 무모하게 돌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앞에 있는 아군 궁수나 보병을 짓밟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기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을 잘 듣지 않고 멋대로 돌격하는가 하면 후퇴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어려워짐은 물론 개별 전투까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거듭되는 패배로 인해 사기가 떨어지고, 영국군의 약탈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게 됩니다.

이후 쟝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한 후 샤를 5세가 아키텐 공작령의 소귀족들을 선동하여 전쟁이 재개되는 등 소규모 전투가 일어나고 그치기를 반복합니다.

1377년, 에드워드 3세가 서거하고 리쳐드 2세가 즉위합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부왕의 사망 이전에 죽게 됩니다. ㅠ_ㅠ) 1380년에는 프랑스의 샤를 5세가 서거함으로서 샤를 6세가 즉위....

두 왕이 모두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왕위계승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정신병을 앓고 있던 샤를 6세를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뉘어 정치적 싸움이 이어졌고, 영국에서는 왕위를 두고 전쟁이 일어나 1399년 랭커스터 가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헨리 4세가 즉위하기까지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두 나라간의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습니다.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프랑스 정복 전쟁을 재개하게 됩니다. 헨리 5세의 군대는 재정적으로 큰 압박을 받고 있어서 프랑스 군보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쟁쿠르에서 역시 종래의 장궁병을 이용한 방어진을 이용하여 압승을 거두고 북프랑스의 많은 땅을 점령합니다. 이를 기회삼아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을 맺고 샤를 6세의 딸 카트리느와 결혼하여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기정사실화 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샤를 6세의 반대파는 황태자 샤를(후의 샤를 7세)를 지지하면서 이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422년 영국왕 헨리 5세와 프랑스왕 샤를 6세가 잇달아 사망합니다.

영국왕위에 오른 헨리 6세는 자신이 영국 왕이며 프랑스 왕이라고 선포하지만, 왕태자 샤를과 그 지지파는 이를 거부함으로서 전쟁이 다시 시작됩니다.

1428년 영국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진군, 오를레앙을 포위함으로서 왕태자 샤를을 궁지에 몰아넣지만, 이 시기에 유명한 잔 다르크가 등장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킴으로서 왕태자 샤를이 샤를 7세로 프랑스 왕위에 등극합니다.

이후 잔의 활약으로 프랑스 군은 승승장구하지만, 1430년에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어 종교재판에 회부, 마녀혐의로 화형당합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이미 전황은 프랑스 군에게로 기울어 있었고, 1450년에 이르러 프랑스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데 성공합니다.

거듭되는 패전으로 왕권에 타격을 받은 영국에서는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 간의 왕권다툼 - 장미전쟁-이 벌어지게 되고, 이 혼란을 기회로 프랑스 군은 더욱 더 진격하여 1453년에는 영국군의 최고 거점이었던 보르도를 함락시킵니다.

이후 몇 차례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다가 1475년에 강화를 체결함으로서 전쟁이 끝납니다.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영국군에게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 봉건 영주의 군대를 비상시에 소집하는 체계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상비군 제도가 생김으로서 군사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영국군의 약탈 등으로 인하여 프랑스 인들 사이에 '국민의식'이라 할만한 것이 생겨나게 됩니다.

 

한편, 영국은 전쟁 중 거듭되는 왕권다툼을 벌이게 됨으로서 왕권이 약화됨은 물론, 기존에 프랑스 내에 가지고 있던 봉토들마저 대부분 상실하게 됩니다.

 

</ 중국어회화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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