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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임마누엘 칸트 / 생애, 사상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11.19|조회수2,417 목록 댓글 0

 

 
 
임마누엘 칸트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철학의 기초를 놓은 프로이센철학자이다.

종래의 경험론 및 독단론을 극복하도록 비판철학(批判哲學)을 수립하였다. 인식(認識) 및 실천(實踐)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先驗的) 형식에서 찾고, 사유(思惟)가 존재(存在)를, 방법(方法)이 대상(對象)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의 영역에서 찾고,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가지고 도덕률로 하였다.

도덕적 인격을 목표로 하면서도 자의적(恣意的)인 ‘한 사람의 의욕과 다른 사람의 의욕이 자유의 보편원칙에 따라 합치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법이라 생각하였다. 내적 자유의 실현 수단인 법은 외적 자유를 제한하는 강제를 본질로 하는 점에서 도덕과 엄격히 구별되었다. 법과 도덕의 관계에 관하여 이론적 메스를 가하여 많은 시사(示唆)를 하였다. 다른 한편 국가에 대해서는 계약설을 취했는데 국가계약을 역사적 사실같이 취급한 계몽기의 사상을 전진시켜서 이것을 국민주권을 위한 이론적 요청으로서 파악하였다. 또 영구 평화에 대한 훌륭한 논저가 있다.

 

1724년 프로이센의 상업도시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칼리닌그라드)에서 수공업자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와 어머니 안나 레기나(Anna Regi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칸트의 부모는 청교도적 생활을 하였으며, 이는 유년시절의 칸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진다. 칸트는 1732년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신학자 슐츠가 지도하던 사학교 프리데리키아눔(Collegium Fridericianum)에 입학하고 1740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에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대의 칸트전기작가들은 칸트가 대학졸업 후 수 년에 걸쳐 지방 귀족가문의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홀로 철학연구를 계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는 곧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1755년 6월 12일 박사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Princip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후 대학에서 일반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신학, 윤리학등 여러 분야의 주제로 강의했다. 1756년 크누첸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1764년 프로이센의 교육부에서 제공한 문학 교수자리를 거절할 정도로 철학교수직을 갈망했다. 18세기까지도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어 철학의 영역에 속했다. 1766년에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왕립도서관의 사서로 취직하여 1772년 까지 근무하기도 했다. 그사이 칸트는 원하던대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철학교수직를 얻게되는데, 이 때 발표한 교수취임논문(1770년)은 칸트 비판기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10여년간의 철학적 침묵기를 거친 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초판:1781년, 재판:1787년), 《실천이성비판》(1788), 그리고 《판단력비판》(1790)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그의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였다.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1786-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1796년까지 약 20여년 간에 걸쳐 칸트는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으며, 알려진 것처럼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강의와 사유에 전념했다. 다만 1792년에 논문출판과 검열을 두고 학부 관리처와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의 논문은 《인간본성에 있어서의 근본악에 관하여》(Vom radikalen Bösen in der menschlichen Natur)란 제목으로서 당시의 계몽주의사상과 종교에 관한 칸트의 솔직한 견해가 대학 관리처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커피담배를 즐겼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새벽 4시, 80세를 향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좋아(gut)"라고 전해진다.

 

칸트 철학

칸트는 18세기 철학에 있어 가장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실제로 칸트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은 굉장한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칸트가 형이상학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영역으로 주장하였고, 실제 그 타당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철학은 근대 서구 철학에 있어 데카르트, 헤겔, 피히테, 니체 등과 함께 거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칸트의 저서에는 《순수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과 같이 비판으로 끝나는 것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칸트가 과거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측면에서 스스로의 철학을 '비판철학' 이라고 불렀다.

17~18세기 철학은 인식론으로 크게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나누어졌다. 여기서 합리주의는 인간이 본래부터 지닌 선험적 이성을 중시하였고, 경험주의는 인간은 경험함으로서 얻는 귀납법을 중시하였다. 합리주의의 방식은 지식을 확장해 나가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경험주의의 방식은 귀납적인 방법을 강조한 나머지 진리의 필연성을 찾는데 한계를 드러내었다. 여기서 칸트는 이 두 사상을 통합한 선험주의를 주장하는데, 이는 칸트 철학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인식론은 감성을 통해 얻은 감각을 범주를 사용하여 오성으로 인식하고, 초경험적인 것은 이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감성은 어떤 물자체를 지각하는 능력이며, 범주는 이러한 감각을 인식하게 하는 하나의 틀이다. 따라서 감성과 오성은 인간이 지각 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요건인 셈이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데 시간과 공간 값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체적인 연장과 존재하는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인식을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감정과 같은 것은 공간 값은 없지만 시간 값만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칸트는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초경험적인 것을 이성으로 알려고 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가령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존재론적 증명 등을 비판하여 여러 형이상학적인 사상들을 배격하고자 하였다. 이 말은 형이상학의 영역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 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이 시도는 근대에 이어 현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신, 영혼들의 존재를 도덕을 다루는 과정에서 다시 요청하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칸트의 행위는 후에 모순된 행위라는 주장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칸트는 곳 마다 차이가 나는 도덕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도덕을 추구하였다. 모두가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도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덕을 도덕법칙으로 부르는데, 칸트는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선을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고, 다만 도덕법칙에 따르며 행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은 마음 속에서 충동과 도덕이 투쟁한다고 보았다. 즉, 옳고 그른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충동과 도덕심이 투쟁을 하며, 도덕이 이기면 선한 행동을 하고 충동이 이기면 그른 일을 하게 된다고 보았으며, 그렇다고 도덕이 충동을 없애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저서

  • 일반 자연사와 천체론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1755년)
  •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 1판, 1781년: 2판, 1787)

          한국어 번역본: 최재희 옮김, 박영사

          순수이성이라는 말은 칸트가 지어냈고,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의의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일방적인 주장을

          전개하는데 그쳤으며, 인용도 주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철학의 길을 연 업적으로 인정되고, 수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1]

  •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 1783년)
  •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년)
  •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년)
한국어 번역본: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2
한국어 번역본: 이석윤 옮김, 박영사
한국어 번역본: 이한구 옮김, 서광사

     칸트 전집

  • 독일 왕립학술원에서 간행한 전집 (Kant gesammelte Schriften, 편집 Königliche-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1910ff., Berlin). 흔히 "학술원판"으로 불리는 이 전집은 칸트저술 인용의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간행한 봐이셰델 편집 (Kants Werke, W. Weischedel (Hrsg.), Suhrkampff)

       </ 위키백과>

 

 

 

 

 

 임마누엘 칸트의 생애

 

1724. 4. 22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1804. 2. 12 쾨니히스베르크.

독일의 계몽주의 사상가.

 

 

 

개요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이마누엘 칸트는 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합리론과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시작된 경험론을 종합했다.
그는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다. 인식론·윤리학·미학에 걸친 종합적·체계적인 작업은 뒤에
생겨난 철학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기생애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1946년부터 소련에 속하게 되었음)에서 태어나, 전생애를
거기에서 보냈다.
칸트는 마구상인이었던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에서 이민온 사람의 자손이라고 했지만 뚜렷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
어머니는 독일인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타고난 인품과 지성으로 유명했다.
부모 모두 루터교 경건파의 독실한 신자였다. 이 교파는 검소한 내적 삶과 도덕법에 대한 복종을 가르쳤다.
이 교파 목회자의 영향으로 칸트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8세 때 담임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 학교에 들어갔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이 학교에서 8년 6개월 동안 배웠는데,
일생에 걸쳐 라틴어 고전을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 1740년에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
신학생으로 입학했다. 신학과정을 이수하면서 때때로 설교도 했지만, 주로 흥미를 느낀 것은 수학물리학이었다.
합리론 철학을 체계화시킨 크리스티안 볼프를 연구했으며, 동시에 아이작 뉴턴의 과학을 열렬히 신봉했던
어떤 젊은 교수의 도움으로 뉴턴의 저작도 읽기 시작했다. 1744년에는 최초의 책을 썼는데, 주제는 운동력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지만, 1746년 아버지가 죽고, 대학부속학교에서 조교직을 얻는 데 실패하자 그는 가정교사직을 구해서 9년 동안 일했다. 1755년에 친구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무급(無給) 대학강사가 되었다.
15년 동안의 강사 시기는 칸트가 강사와 저술가로서 점점 큰 명성을 얻게 되는 시절이다.
첫 강의는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것이었고, 과학 발전에 대한 관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관심의 수준이 아마추어 이상이었다는 것은 이때부터 몇 년 동안 인종, 바람의 본질, 지진의 원인,
천체에 대한 일반이론 등을 다룬 과학저작들을 다수 발간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시작된 강의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다. 논리학·형이상학·도덕철학 등 철학의 주요분야 및 자연지리학에 이르기까지
강의 주제가 넓어졌다. 글을 쓰는 스타일과 달리 강의는 유머와 박진감이 넘쳤으며, 영국·프랑스의 문학은 물론,
여행기와 지리학, 과학과 철학 등 광범위한 독서에서 얻은 풍부한 실례를 들어 실감 있고 생기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교수직을 얻는 데 2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교수로 데리고 가려 한 다른 대학의 제안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를린대학교는 다른 곳에 비해 많은 특권을 부여하면서까지 시학 교수로 초빙했으나 이것도 거절했다. 그는 고향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가기를 더 원했다.
이 시기에 칸트는 뉴턴 물리학의 과학적 내용과 철학적 함축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했다.
칸트는 뉴턴의 사유방법과  당시 볼프와 알렉산더 코틀리프 바움가르텐에 의해 체계화되고 대중화되어 독일대학에
널리 퍼져 있던 코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뉴턴을 지지하고 라이프니츠를
비판했지만, 1750년대에는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전제들에 관해 노골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760년대에 들어서는 라이프니츠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점점 높여갔다. 어떤 제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칸트는
라이프니츠·볼프·바움가르텐을 공격하면서, 자신을 뉴턴의 추종자로 선언했고, 장 자크 루소의 도덕철학에 큰 찬사를
표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우선 철학은 수학을 모델로 하여
자명한 전제들에 근거해서 증명된 진리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라이프니츠주의 철학의
방법적 주장을 공격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주의자의 핵심적인 이론들을 비판했다. 모순과 인과에 대한 논리주의적 입장,
존재론적 신의 증명, 공간개념 등이 주요한 비판의 쟁점이었다.
마침내 1770년 칸트는 15년간의 무급 대학강사 생활을 마감하고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서 논리학·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죽기 몇 년 전까지 그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놀랄 만큼 독창적인 저작들을 연달아 발표한다.
이미 비판철학의 중요한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던 1770년의 교수취임논문 이후 11년 동안 아무 글도 발표하지 않고
연구에 전념한 끝에 1781년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이 나오는데, 이때부터 비판철학 시기가 시작된다.

 

비판철학 시기

1781년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이후 9년 동안 위대하고 독창적인 저술들이 계속 나옴으로써 단기간 동안
철학 사상에서의 혁명이 일어나고 이후 철학의 나아갈 방향이 정립된다. 〈순수이성비판〉은 칸트가 10년 동안 생각하고
명상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여러 번 연기하면서 주저한 끝에 초판을 발간했다.
자기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해명을 제대로 했다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걱정은 적중했다.
그는 이 책에 대한 해석자들의 비판이 많은 오해를 범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을 바로 잡기
위해 〈학으로 성립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에 대한 입문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1783)을 썼고, 1789년에는 초판을 개정하여 재판을 발간했다.
이 두 판의 장단점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관념론적인 해석을 선호하는 독자들은 보통 초판을 더 좋아하고,
반면에 실재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재판을 선호한다. 그러나 읽고 이해하기 어렵기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 책이 난해한 이유는 칸트가 고도의 전문적 기법과 엄밀성을 추구하던 볼프나 바움가르텐의 저작을 철학 저술의 모범으로 삼고 썼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은 형이상학에 대한 저술이다. 칸트는 여기서 자기 이전의 형이상학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형이상학의 기초를 닦고자 했다. 그의 주된 공격대상은 라이프니츠주의 형이상학이었다.
라이프니츠주의 형이상학은 신, 인간의 자유, 영혼불멸 등 본성상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인간 정신이
순수사유를 통해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간 정신은 결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주의 형이상학은 다 속임수라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진정한 학으로서 형이상학이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학의 원리들이 한편으로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이것은 모든 학적 인식의 조건임) 다른 한편으로는 실재에 대한 인식을 포함해
탐구자에게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
즉 그 의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 이상을 알 수 있게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두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인식이 선험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인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연적인 경험들로부터 분리되어 선험적일 때에만 필연적일 수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주어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것을 술어가 포함하고 있으면서 종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라는 명제는 종합적이지 않고 분석적이다.
왜냐하면 연장개념이 물체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라는 명제는 종합적이다.
왜냐하면 무게는 물체 개념에 덧붙여서 물체들이 서로 관계되어 있다는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문제를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즉 어떤 조건 아래에서)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정식화했고,
이 문제를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근본 문제가 된다(→ 선험적 관념론 , 선험적 지식).
칸트에 따르면 이 문제는 수학·물리학·형이상학의 세 영역에서 제기된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의 1부 '초월적 원리론'의 세 부분이 각각 한 영역씩 다룬다.
'초월적 감성론'에서 칸트는 수학이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는 것을 논증했고,
또 시간과 공간은 둘 다 인간 감성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감관을 통해 포착되는 것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초월적 분석론'에서는 물리학이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데 그 이유는
물리학이 경험을 질서지울 때 특별한 종류의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칸트가 '범주'라고 불렀던 이 개념들은 경험을 통해 생긴 것이 아니고
오히려 경험을 해석하는 전제가 되기 때문에 선험적이며, 경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범주는 그 기원 면에서만 경험적 개념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인식에서의 역할이 전혀 다르다.
경험적 개념은 특정한 경험들을 서로 관련지어서 구체적으로 질서지워진 경험을 산출하는 반면,
범주는 이 구체적인 질서지움이 따라야 할 일반 형식을 제시하는 기능을 가진다.
달리 말하면 범주는 인식의 틀에 해당한다. 그러나 비록 범주가 객관적 인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범주가 줄 수 있는 인식은 단지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대한 것이다.
범주는 감각을 통해 시공 중에 주어지는 것을 질서지울 때만 타당하고 실질적인 인식을 줄 수 있다.
'초월적 변증론'에서는 형이상학의 선험적 종합판단들을 검토한다.
칸트에 따르면 여기서는 상황이 수학이나 물리학과는 반대이다.
형이상학은 감각경험을 초월하여 절대적 무제약자를 추구하기 때문에 감각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해버린다.
이때문에 진정한 선험적 종합판단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칸트는 형이상학이 영혼·세계·신과 같은 무제약자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분석하여, 형이상학의 시도가 이율배반에 빠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밝히려 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성취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근대 천문학을 기초한 코페르니쿠스가 겉으로 보기에 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사실은 관찰자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마음의 선험적인 원리가 대상에 적용됨을 설명함으로써 마음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마음에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가 형이상학을 비판한 것은 결코 종교와 도덕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형이상학을 '확실한 학의 길 위에' 올려놓으려 했고 이것이 비판철학의 진정한 의도였다. 이런 의도 때문에 칸트는 앞서 발간한 〈도덕형이상학기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를 체계적으로 확대하여 1788년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발간함으로써 진정한 도덕의 체계를 제시하려 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확립한 원리를 구체적인 차원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여, 1797년에 발간된 사회철학저술인 〈도덕형이상학 Die Metaphysik der Sitten〉에서는 덕의 문제를 검토하고 법과 정치의 기초를 제시한다. 비판철학을 마감하는 제3비판서인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에서는 크게 2가지 문제를 다룬다. 첫째, 미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최초의 체계적인 미학을 제시하고 있으며, 둘째, 자연에서 목적론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말년

비판철학은 곧 독일어를 쓰는 모든 중요한 대학에서 강의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철학의 성지가 된 쾨니히스베르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치 신탁을 구하듯이 칸트에게서 온갖 종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 했다. 이런 존경을 받으면서도 칸트는 자신의 규칙적인 습관을 어긴 적이 없으며 엄격한 생활을 유지했다. 5피트가 채 되지 않는 키에 기형적인 가슴을 가진 칸트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평생 엄격한 식생활을 했다. 칸트 때문에 '철학자의 산책로'라 이름붙여진 거리를 규칙적으로 산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산책을 기준으로 시간을 맞추었다. 그는 노령으로 산책이 힘들어질 때까지 루소의 〈에밀 Émile〉을 읽는 데 열중하느라 며칠 집에서 나오지 않은 때를 제외하고는 1번도 규칙적 산책을 어긴 적이 없었다.
〈판단력비판〉이 출판됨으로써 칸트의 중요한 철학 저작은 완성된 셈이다. 1790년부터 그는 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는 많은 저술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루 2~3시간 이상 저술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그가 완성한 저작들은 한편으로는 전에는 자세히 다룬 적이 없는 주제들을 정교하게 다루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과 명확한 오해들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1793년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를 출간하면서 칸트는 프로이센 당국과 종교의 믿음을 표현할 권리에 대한 논쟁에 휘말려들었다. 이 책에서 종교에 접근해가는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인 태도가 정통종교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칸트는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많은 근본 교리를 왜곡한 책임을 지고, 종교적 주제에 대한 강의나 저술활동을 금지당했다. 칸트는 일단 수긍했지만 이 금지를 왕에 대한 개인적 약속으로 여겼고, 1797년 왕이 죽자 스스로 이 금지에서 풀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1798년에는 그의 마지막 주요저서인 〈학부들의 논쟁 Der Streit der Fakultäten〉에서 금지된 주제를 다시 다루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열심히 쓴 방대한 유고는 베를린판 전집의 마지막 2권에 모아져 있는데, 내용은 주로 비판철학을 더욱 발전시키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유고들은 미완성 저작이라기보다는 어떤 저작을 준비하기 위한 단편적인 메모들이다. 그가 쓰려 한 책의 제목은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근거로부터 물리학으로의 이행 Übergang von den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zur Physik〉이었다. 이 책은 〈자연 과학의 형이상학적 근거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1786)에서 제시한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자연과학의 일반적 체제만이 아니라 상당히 자세한 부분까지도 선험적으로 구성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했던 것 같다. 남아 있는 유고들로 판단해볼 때, 비록 유고의 양이 많기는 하지만, 그 유고가 완성되었더라도 비판철학의 체계와 명성에 중요한 내용이 덧붙여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점점 쇠약해지면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1804년 2월 12일 칸트는 쾨니히스부르크에서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제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묘비에는 제2비판의 결론에서 선언한 다음 문구가 새겨져 있다. "더욱더 자주, 그리고 더욱더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내 위에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속의 도덕법칙은 더욱더 새롭고 큰 존경과 경외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준다."

 

<O. A. Bird 글>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2002)


  칸트가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이라는 표제 아래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86쪽)>고 말했을 때, 이 한 문장 속에서 그야말로 윤리의 법칙과 이성의 원칙을 발견했다고 믿는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주관적 준칙과 객관적 혹은 보편적 법칙 사이에는 머나먼 간극이 벌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리감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상호 보충적인 친밀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두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체계 전체의 건물의 마룻돌을 이룬다는 자유 개념조차 우리의 사변 이성이라 불리는 감성에게 도덕 법칙을 개시해 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경험주의와 선험성(아프리오리)의 갈등, 개연성과 순수성의 마찰 등이 이율배반이라는 형식으로 알레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만 칸트가 말하는 실천이성비판의 작은 조각이나마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서 다시 하는 독서가 아닌 처음 읽던 책을 잠시 접어 두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는 것이 이 책에 대해 말하려는 경우에는 상당한 오류를 초래할 소지가 다분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예컨대 칸트가 오늘 밤하늘의 半月을 일별하고 저것이 달의 모양이라고 단정하는 것이야말로 사변 이성의 일면적인 인상이라 할 때, 이러한 일례는 그대로 이 책의 독서에도 해당된다 하겠다. 그러하기에 앞으로 자의적으로 잘라내어 인용될 텍스트들은 그것이 절개되었다는 것만으로 조각난 인식의 질료일 것이다. 하여 그것은 칸트가 잘 일러 주듯이 바로 나 자신의 그릇된 실천이성에 수렴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유는 <그 가능성을, 통찰함이 없이도, 선험적으로 아는 유일한 것(37쪽)>이다. 우리는 그 선험성을 말 그대로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독서에 대한 감상을 적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럼에도 먼저 문제제기가 되어야 할 것은 머리말에서 칸트가 적고 있듯 이 책은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아니라 실천 이성 비판이라는 것이다. 물론 칸트는 <순수 실천 이성이 있다는 것만을 밝히고, 이 의도에서 그것의 전 실천적 능력을 비판한다(35쪽)>고 명시하고 있는데 칸트가 말하는 순수 실천 이성이라는 것이 그다지 명확한 형상으로 머리 속에 그려지지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칸트의 순수 실천 이성은 ‘그것은 엄연히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있는 방식이 경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선험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보편적인 형식으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전체의 이념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로부터 그 모든 부분들을 상호관계 속에서, 저 전체의 개념으로부터 그 부분들을 도출해 냄으로써, 하나의 순수한 이성 능력을 포착(48-49쪽)>함으로서 가능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각개의 부분들을 상호포착하기 위한 능력, 그 부분들을 다시 쪼개내는 능력이 순수 실천 이성을 발견하는 방법임을 알 때, 그리하여 순수 실천 이성 있다는 것을 확인, 확언 할 수 있을 때, 실은 이 방법 자체가 경험적인 경로를 통한 것임을 의심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우리의 경험적 판단 그 자체가 선험적으로 내재된 것이라고 알 게 되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순수한 이성 능력을 포착하는 방식이 당장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자유 개념을 경유한다는 것을 가정할 때, 이것이 객관적 법칙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것은 엄연히 있다’는 주문을 외우는 방식으로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단지 그것(순수 실천 이성)이 있다고 전제하는 방식으로는 그것 안에서 인간이 규정된 한계를 넘어서는 월권에 제재를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우리가 칸트가 단지 순수 실천 이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넘어가려 할 때, 그것이 단지 있다는 것에 신용을 줄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된다. 나아가 현상 배후에 있는 물자체를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현실적 영역에서의 순수 실천 이성은 분명, 물자체의 영역에 속하며 이 물자체가 인식 불가능한 방식, 즉 물자체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식 불가능한 상태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가정된, 선험적으로 오류추리를 내재한 관념이며 이 관념을 통해서 우리는 칸트의 말대로 실재를 끌어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우리를 실천 이성으로 돌려세운다. 마치 카프카의 『城』의 K가 성실하고 순수한 각고의 노력 끝에도 성의 주인을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만약 애당초 순수 이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순수 이성은 아무런 비판도 필요하지 않다. 순수 이성이란 그 자신이 그 모든 사용의 비판을 위한 먹줄을 함유하고 있는 그런 것이다(58쪽)> 하고 칸트의 말을 들으면 지금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순수 이성의 존재 여부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결국 고스란히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의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의지란 표상들에 대응하는 대상들을 산출하거나 이런 대상들을 낳도록 ([그 자신의] 자연적 능력이 충분하든 그렇지 못하든) 자기 자신을, 다시 말해 자기의 원인성을 규정하는 능력이다(57쪽)> 즉 칸트가 말하는 의지는 전적으로 외부로 향하는, 그러한 대상을 가지는 능력이 아니라 그 외부와 대상을 인식하고 추리하는 자기의 원인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능력의 한계는 대상을 인식하고 추리하는 경험적 조건을 전제한(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데도)다는 것에 있다. 왜냐. 주관적 경험은 순수 이성 영역을 넘어서는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 불과 할 뿐이므로. 따라서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순수 이성은 그것이 파악 불가능한 방식으로 있는데, 그것에 법칙을 부여하고 우리의 경험을 헐값에 처분한 그 응분의 대가가 바로 보편적 법적 수립이라니. 그리고 <이성의 법칙 수립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이성이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전제하는 것이 필요하다(65쪽)>니.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칸트의 정립에 반정립를 끊임없이 주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칸트의 정언명령(너는 순수 실천 이성을 발견해야 한다.)이 우리의 내면에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 실천 이성은 태양의 흑점처럼 인간 존재의 핵이 된다. 이 핵이 존재함을 안다는 것. 그것은 너는 해야 한다는 소리도, 언어도 아니다. <이성은 실천 법칙 안에서 직접적으로 의지를 규정하는바, 그 사이에 등장하는 쾌와 불쾌의 감정에 의거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이 법칙의 도움을 빌려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73쪽)> 하여, 순수 실천 이성은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감정의 기복, 인과응보, 권선징악 등의 경험으로 반복된 강박으로부터 초재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가 초월된 상태, 초월하려는 대상이 아니라 초월 그 자체로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여전히 고민되는 것은 그것을 발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있다는 것이 상상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읽게 되는 <바로 그 질료적 규정 근거는 주관에 의해 오로지 경험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과제를 법칙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칙이란 객관적인 것으로서 모든 경우에 대해서 의지의 동일한 규정 근거를 가져야 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74쪽)>라는 칸트의 주장에 오면 이 순수 실천 이성과 실천 이성의 비판 문제에 있어 지금까지 논의한 일체가 뭐 그리 대단한 문제였나 하고 만다. 왜냐하면 칸트는 줄곧 순수 실천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의 일체를 법칙으로, 그것도 객관구성을 재차 강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무조건적으로-실천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자유에서 출발하는 것인가 실천 법칙에서 출발하는 것인가를 묻는다. 그런데 그것은 자유로부터 출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유의 최초 개념은 소극[부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가 없고, 또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현상들의 법칙만을, 그러니까 자유와는 정반대되는 자연의 기계성만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를 추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83쪽)> 결국 서두에서 우리가 받침대 삼아온 자유 개념은 이제 소극적인 것이 되었고 <이 개념과 함께 그리고 이 개념을 통하여 존립하고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37쪽)>던 자유는 단박에 인식불가능한 것으로 던져졌다. 따라서 우리는 칸트의 권고를 따라 우리의 경험을 과감히 버리고 자유를 얻을 것인가. 아님 실천 이성의 월권을 역시 과감히 주장하며 칸트에 맞설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가정, 순수한 믿음의 의지, 감성의 형식, 오성의 결여 등이 소급해야 할 것은 결국 순수 실천 이성이던, 실천 이성 비판이던 그래서 우리는 윤리적인, 도덕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탐색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우리가 윤리, 도덕이 엄연히 있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의 문제이다.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칸트의 비판철학

 

칸트의 비판철학  

 

일반적으로 <순수 이성 비판>을 강조하고 <실천 이성 비판>이나 <판단력 비판>을 간략하게 언급하는데 그치는 기존의 Kant 철학 개론서와는 달리 이 작은 책은 삼비판서를 대등하게 배열했으며, 이 세 비판이 갖는 의의를 이성의 최고 목적인 인간을 다루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성(본성)의 실현이 곧 역사이고 문화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해석에 따르면, Kant의 선험적 방법(methode transendentale)은 인간의 내재적 원리이자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지식, 도덕, 감정의 표출 방식을 넘어서서(transcendant) 인간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가능성은 이성이 고등한 양식들(감성, 오성, 이성을 통한 새로운 법제화)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성(Raison)은 인간이 인간다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자 수단이며 또한 이성의 자기 실현의 목적(fin)이 된다. 이 실현은 도구적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서 실천적 도덕의 근거를 마련해 주며, 영혼의 자기 확장을 정당화해 준다.


이렇게 해석된 Kant의 비판 철학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철학적 직관에 의해 쓰여진 것이리라. 베르그송은 "철학이 조합(un assemblage)보다 유기화(organisme)을 닮았고, 조합(composition)이라기 보다 진화(evolution)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PM, 122)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스피노자나 버클리를 예로 언급했으나, 들뢰즈의 해석에 따르면 Kant를 예로 언급해도 괜찮을 것 같다. 왜냐하면 Kant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도덕 위에 형이상학을 정초하고자 했기 때문에 지성의 형이상학은 한계를 갖지만, 인간의 자기 실현을 갈망하는 능력으로서 실천 이성에 기반한 자유 개념의 법제화는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덕 형이상학이 표상을 넘어서 이념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초월적 대상 혹은 형상적 형이상학으로 해석되어 왔으나, 들뢰즈에 의하면 좁은 의미의 이성에서 확장된 의미의 이성으로 교체되면서, 즉 인식 능력(la faculte de connaitre)에서 욕구 능력(la faculte de desir)으로, 사변적 관심에서 실천적 관심으로, 감성적인 것에서 고등 감성적인 것으로 이행하면서 전자가 후자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이런 이행이 곧 진화적 의미와 닮았다고 볼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판단력 비판>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Rousseau(1712-1778)에 의해 가치를 평가받은 감정이 전면에 등장한다(물론 도덕을 감정 위에 기초지운 Hume(1711-1776)과의 연관성을 잊지 말자). 느낌 능력(la faculte de sentir)는 앞선 두 능력과 달리 무관심성(desinteressee)을 가질 때 고차원적일 수 있으며, 보편에서 보다 특수한 것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상에 대해 법제화하지 못하는 무능을 자기에 대한 법제화, 즉 heautonome라고 부른다. 느낌 능력에서 나온 두 개의 판단이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승화(sublime: 숭고미)에 대한 판단이다. 미적 판단에는 상상과 오성이 개입하나 이성은 개입하지 않으며, 승화는 이성에 의해 감각적 세계의 거대함을 결합시킨다. 이러한 승화에서 상상과 이성 사이에 불일치가 보이며, 무한의 현상은 부정적이나 영혼을 확장하게 하며, 그래서 이 불일치에서 승화의 감정이 자기 운동으로서 어떤 발생(즉, 문화)를 이루어 나간다. 이런 발생(genese)이 유동적 질료(대양 l'oceans) 깊숙히 우연적 일치를 이루는 이성의 세 번째 관심(사변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 다음으로)인 자연적 성향이 드러난다. 이제 감각적 세계의 거대함을 결합하는 이성의 이념과 다른 살아있는 영혼이 숨쉬는 또 하나의 이성의 이념이 자연의 상징화에서 드러난다. 이 상징화를 이루는 능력이 천재성(genie)이다. Kant는 감성적 자연의 현현(presentation)을 다음의 네 가지로 보았다. 그것은 승화(장엄미, 자연미), 자연의 상징화(예술미), 예술적 재능(인공미), 그리고 목적론에서 신학으로의 이행이다. 이 현현에 대한 판단은 이론적 판단과 실천적 판단과 달리, '자유롭고 비결정적 일치'를 표현하는 반성적 판단이다. 이 판단에 미적 판단과 목적론적 판단이 있다면, '반성적 판단 일반'이 사변 능력에서 욕구 능력으로 이행을 가능하게 하듯이, 목적성은 자연에서 자유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고, 자연(본성) 속에서 자유의 실현을 준비하게 한다고 한다. 


결론에서 목적에 대해 3가지로 구분한다. 자연적 목적(fin naturelle), 최종 목적(fin derniere) 그리고 존재의 최종 목표(but final)가 그것이다. 이 최종 목표가 '신의 이념'을 실현하는 신학과 같다. 결국 감각적 세계보다 우등한 감각 세계의 실현이 곧 역사인 셈이다. 이 역사 속에서 자유의 개념(공화정의 자유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을 실현하는 것이 곧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고, 이러한 실현은 인간이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이행에 우등 감성의 간교(ruse)와 본성(Nature)의 간교가 있다고 했는데, 이를 Hegel이 본받았던가? 


덧붙여서, 들뢰즈는 이 책을 그 당시 소르본느 대학 교수였던 알끼에(Ferdinand Alquie) 교수에게 헌정했다. 알끼에 교수는 칸트의 실천 이성 비판 혹은 칸트 도덕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합리론을 공언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재화해는 경험과 분리된 경험을 묘사하거나 설명하거나 변형하는데 만족해서는 성취될 수 없고, 경험이 선천적(a priori) 조건을 발견하는 사유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또 한 가지, 이 책은 1984년 영어판으로 나왔다(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Kant's Critical Phiosophy, Athlone Press, 1984,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이 영역본 서문에는 "칸트 철학을 요약할 수 있는 4 가지 시적 공식에 관하여"를 썼다. 첫 번째는 햄릿의 "시간은 이음새가 풀려있다."라는 정식이다. 이것이 칸트 철학의 첫 번째 위대한 반전(reversal)이다. 둘째 랭보(Rimbaud)의 "자아는 곧 타자다."라는 선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천 이성 비판>은 작용하는 자아와 속성적 자아를 구분했다는 점이다. 셋째, 카프카의 "최선은 법(권리)가 말하는 것이다."에서 따온 것으로 <실천 이성 비판>의 최종 심급은 "최고선"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넷째, "모든 감각의 무질서"라는 랭보의 정식을 빌어서 <판단력 비판>에서 자유로우면서 비결정적인 승인(libre et indetermine)이 이질자들(les autres)과의 일종의 조화가능성을 시사했다. 여기서 낭만주의의 기초를 본다. 결국 이 서문은 사물의 나열과 계기로서 운동을 설명하는 경험론과 독단론의 운동으로부터 시간을 추론해 내고 있지만, 칸트는 그것을 뒤바꾸어 시간에서 운동으로 보는 관점을 마련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칸트는 운동에서 시간을 보았고 베르그송은 시간에서 운동을 보았다. 

 

<출처: 천의고원, 프랑스어로 읽자> 

 

 

 

 

 

                                               <칸트의 식사 풍경 / 이동희>

 

칸트의 명언  

 

  • 결혼으로 여자는 자유로워지고, 결혼으로 남자는 자유를 잃는다. -칸트

  • 교육을 받았다는 여자도,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활용하듯 책을 접한다. 그런 여자는 단지 자신도 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남에게 시계를 차고 다닌다. 시계가 멈추어 있는지, 정확한지 따위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칸트

  •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새로운 감탄과 함께 마음을 가득 차게 하는 기쁨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요,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이 두 가지를 삶의 지침으로 삼고 나아갈 때, 막힘이 없을 것이다. 항상 하늘과 도덕률에 비추어 자신을 점검하자. 그리하여 매번 잘못된 점을 찾아 반성하는 사람이 되자. -칸트

  • 나는 심장과 허파가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좁고 편편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 지난달 삶에 대한 혐오로까지 발전하였던 우울증에 빠지기 십상인 체질을 가지고 있다. -칸트

  • 나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철학하는 것을 가르칠 뿐이다. -칸트

  • 나는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다. -칸트

  • '나처럼 행동하라'하고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칸트

  • 남아메리카인들은 감각이 둔하다. -칸트

  •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 이것이 자유의 법칙이다. -칸트

  • 남자의 절약은 미래의 투자이며, 여자의 절약은 궁상이다. -칸트

  • 네덜란드는 세련된 생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칸트

  • 노동 뒤의 휴식이야말로 가장 편안하고 순수한 기쁨이다. -칸트

  • 도덕은 종교에서 독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도덕은 종교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도덕이란 언제나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지 새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칸트

  • 매우 세련된 예술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도덕적 이상을 담아내지 못하면 그것은 기껏 오락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예술은 삶에 지친 사람들이 일시적인 기분전환을 할 때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칸트

  • 머리 위에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 내 마음에는 도덕률. -칸트

  • 모든 종교는 도덕을 그 전제로 한다. -칸트

  • 상대방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 이것이 자유의 법칙이다. -칸트

  • 상비군(常備軍, 상시 전투를 할 수 있는 국방병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 폐지되어야 한다. -칸트

  • 선행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칸트

  • 술은 입을 경쾌하게 한다. 술은 마음을 털어놓게 한다. 이리하여 술은 하나의 도덕적 성질, 즉 마음의 솔직함을 운반하는 물질이다. -칸트

  • 신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했다. 인간은 그 자신의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

  • 신을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믿음에 입각하여 이성으로 믿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에 입각하여 정신적으로 믿는 것이다. 이성으로 믿으려 할 때 그 믿음은 부서지기 쉬우며 실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신을 정신적으로 믿으려면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한다. 이런 믿음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초월한다. -칸트

  •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선천적으로 객쩍은 한담이나 즐기는 재능만을 부여받은 듯하다. 그들 세계에서 무척이나 중요시 여겨지는 물신숭배는 너무도 보잘것없는 우상에 대한 숭배처럼 보여, 인간의 속성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새의 깃털, 소의 뿔, 조개 껍질 등과 같은 것이 몇 마디 말로 신성화되는 순간부터, 그런 것들은 설교에서 틀림없이 언급되어야 하는 숭배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칸트

  • 여자는 까다롭고, 남자는 감상적이다. -칸트

  • 여자는 거부하고, 남자는 요구한다. -칸트

  • 여자는 오직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했을 때 억지로 덕스러워 보일 뿐이다. 그런 여자는 성격대로 좀더 많은 놀이 공간과 좀더 많은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기꺼이 남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데 조금도 꺼려하지 않는다. -칸트

  • 여자는 참을성이 있어야만 하며, 남자는 너그러워야만 한다. -칸트

  • 열렬하게 사랑에 빠진 남자는 사랑하는 상대의 결점을 보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맹인이 되어 버린다. 일반적으로 그런 증세는 결혼 후 1주일간 계속된다. -칸트

  • 오직 거룩하고 깨끗하게 생활하는 사람만이 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남들의 눈에 띄게 겉으로만 신을 충실하게 섬기는 사람은 옳지 못하고 자신을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며 나아가 큰 거짓을 행하는 것이고 신에게 그릇 봉사하는 것이다. -칸트

  • 웃음은 남성적인 것이고, 눈물은 여성적인 것이다. -칸트

  • 의무를 다하는 것과 그것을 함으로써 얻는 기쁨은 서로 별개이다. 비록 우리 자신의 의무를 기쁨과 한데 섞으려 한다하더라도 의무는 의무 나름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각기 분리될 것이다. -칸트

  • 의심할 나위 없는 순수한 환희의 하나는 노동 후의 휴식이다. -칸트

  • 이탈리아, 장엄함으로 둘러싸인 나라. -칸트

  • 인간은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다. -칸트

  • 자기와 남의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칸트

  • 자식을 기르는 부모야말로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한다. 자식들이 조금씩 나아짐으로써 인류와 이 세계의 미래는 조금씩 진보하기 때문이다. -칸트

  • 자유는 스스로 자신을 자유의 몸으로 이끌어 나아갈 만한 사람에게 깃든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라면, 자유는 일생토록 반려자가 되어 준다. -칸트

  • 재물은 생활을 위한 방편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칸트

  • 종교는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철학이며, 철학은 또한 종교를 증명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무런 증명도 요구하지 않는 다음의 기초적인 명제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착한 생활 이외에 있어서 인간이 신께 적응함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상의 큰 실책인 것이며, 또한 신께 대한 거짓 봉사란 그 점이다. -칸트

  •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남자는 여인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졸렬하며 애교도 부리지 못한다. -칸트

  • 청년들이여,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을 차라리 거절하라. 그렇다고 모든 욕망의 만족을 부정하는 스토아학파처럼 하라는 것은 아니다. 모든 욕망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인생의 관능적인 반면을 제거할 힘을 가지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오락의 자리에서 즐겨 노는 것을 절제하라. 향락을 절제하면 그대는 그만큼 풍부해질 것이다. -칸트

  • 프랑스인은 뛰어난 말솜씨로 인해 다른 민족에 비해서 두드러져 보인다. ... (상식이란 말 대신에) 심적 원리로서의 정신, 하찮고 경박한 것, 여자에게 환심을 사려는 행동, 잘난 체하는 멋쟁이 남자, 아양을 떨며 교태를 부리는 여자, 덤벙거리고 되통스런 행동, 명예에 관한 일, 품위가 있음 등과 같이, 프랑스에서는 한 단어로 표현되는 것들을 다른 언어로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너무도 어렵다. -칸트

  •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

  • 한 가지 뜻을 세우고, 그 길로 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라. 반드시 빛이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칸트

  •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세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칸트

  • 흑인들은 무척이나 허영심이 많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흑인식이다. 그들은 너무 수다스럽기 때문에 몽둥이질로 쫓아 버려야 한다.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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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기경영플러스 (Selfplus)>

     

     

     

     

     

     

    칸트의 경험론과 합리론

     

    현실의 존재와 인식의 원천에 대한 대립된 견해에 의하여 구분되는 근대 철학의 두 가지 경향, 곧 합리론과 경험론은 그것들이 등장한 이래로 서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인식되었다.
    합리론자들은 보편적으로 고정된 개념과 법칙으로부터 진리에 접근할 수 있으며, 경험론자들은 경험이 우리의 전체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생각 되었다.
    합리론자들은 그와 같은 출발점으로부터 그들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론자들의 독단적인 성격과 차이, 그리고 다양한 모순은 합리론적 결과의 타당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고 말았다.
    경험론도 마찬가지여서 흄이 객관적 타당성을 부정한 이후로 객관적인 세계에의 인식을 포기하게 되었으므로 이러한 인식의 기초를 통해 객관적이고 타당한 지식을 정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 났다.
    이들의 문제점은 일면성에 있었다. 이러한 일면성은 인식의 형성에서 함께 작용하는 요인의 관계에 대한 통찰의 결여에서 유발되었다.
    숙련되고 우리들 안에 놓여있는 인식을 객관화한 합리론은 이성 인식의 타당성을 과대 평가하고, 경험의 의미를 잘못 판단하였다.
    이에 반하여 경험론은 모든 인식을 경험에만 기초하려 함으로써 인식을 위한 보편 타당한 이성의 법칙을 무시하였다.
    철학적 인식이 확실한 기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두 경향의 전제들이 상세히 검토되어 하나의 새로운 종합적인 통일적 파악 방식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이것이 칸트가 비판주의를 통해 성취한 업적이다.

    먼저, 칸트는 모든 인간의 인식은 경험에서 시작되며 또 거기에서 끝난다는 경험론자들의 견해를 취했다. '순수 이성 비판'의 서두에는 강한 경험주의적 진술이 서술되어 있다. "모든 사유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궁극적으로는 직관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감각에 관계 지워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에게 객관이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칸트는 경험론자들은 경험 역시 경험적인 소재를 조직하는 수단과 양식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러한 조직 원리들이 진정한 인간 정신의 소산으로서 경험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이성의 독립과 자유를 구제하게 될 것이다. 경험 자체가 이성의 소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경험이 감각이나 인상의 무질서한 다양성이 아니라 감각과 인상의 포괄적인 조직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간정신에 경험(감각으로 파악된)으로 주어진 상황을 조직하는 포괄적인 '형식'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이 직관의 형식 (공간과 시간)과 오성의 12가지 범주이다.
    이들을 통해 정신은 감각의 다양성에 질서를 부여하며 이것들을 조직하는 제 형식들은 그것에(경험되어진 감각) 대해 선험적이다.
    경험은 인간 정신의 선험적인 활동에 의해서만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질서를 나타낸 것이며 이러한 인간 정신은 모든 사물과 사건을 공간과 시간의 형식을 통하여 인지하고 오성의 범주를 통해 그것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에 대한 형식과 범주들은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 것으로서 그 까닭은 흄에 의해서 지적된 바와 같이 그것에 상응하는 어떠한 인상이나 감각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은 조직된 연속체로서 그것들 속에서 발생한다. 그 형식과 범주들은 인간 정신의 구조 자체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 타당성과 적용 가능성을 가진다. 객관의 세계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질서로서 주관에 의하여 산출되는 것이다. 직관과 오성은 경험 그 자체의 조건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합리론적인 전제인 것이다.

    위와 같은 논리의 전개로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통합하였다. 이제 다시 한번 칸트의 이론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칸트의 철학은 우선 인간의 인식의 타당성, 한계 및 원천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가진 인식론이며 본질적으로 탁월한 그의 철학적인 의미는 여기에 있다.
    칸트의 탐구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인간의 인격의 본질과 세계에 대한 인격의 관계가 밝혀진다.
    전술된 바와 같은 두 가지 인식론의 일면성에 대한 모순에 관하여 칸트는 모든 인식은 2가지 종류의 요인들, 즉 경험적 요인과 합리적 요인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아무런 외계도, 그리고 아무런 경험도 없다면 인식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직관과 오성의 범주에 관하여, 오성의 범주를 직관 형식(물론 시간과 공간)에 적용하면 오성은 선천적인 종합 판단을 형성한다. 이 선천적인 종합 판단은 가능한 대상의 형식, 대상의 상호 관계 및 대상의 존재 조건을 표현하게 된다. 이러한 형식은 순수 오성의 원칙, 즉 순수 자연의 법칙이다.
    인식의 가치는 다음과 같이 형성된다.
    우리들의 사유는 단지 경험적인 직관에 의존한다. 직관은 분명한 자아를 지님으로 우리는 결코 물자체를 경험할 수 없고 사물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대로만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 物自體의 은폐성에 인식의 한계가 놓여 있다.
    질서 지어진 현상의 영역은 자연이다. 그러나 오성이 현상을 대상으로 사유하며 현상 상호간의 관계를 맺어 줌으로서 오성은 이와 같은 질서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성이 자연으로부터 경험을 초월한 보편 법칙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보편 법칙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철학을 코페르니쿠스의 그것과 비교하게 된다. 코페르니쿠스가 감각을 기초로 하는 천동설을 뒤집은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똑같이 외적 가상을 근거로 하는 자연에 대한 인간 의식의 관계에 대한 일상적인 견해를 뒤집어 놓았다. 이제 이성은 그 자체로서 자연에 뛰어 들게 된 것이다.

    '실천 이성 비판', '순수 이성 비판'에서 칸트는 인간의 형식과 한계가 이성 자체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것을 밝혔다. 이성은 자신 안에 놓여 있는 선천적인 원리에 따라 이성의 형식과 한계를 형성하며 따라서 인식의 형성에 있어서 자발적이다. 그러나 이성의 활동은 외부에서 유래하는 자료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칸트에 의하면 의욕에 관해서도 인간 영혼의 자발적인 원리가 받아들여 진다. 그것은 자발적인 의지이다. 그러나 의지에 관계되는 대상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이것은 그의 자유가 정언명법에 의하여 오로지 선을 행할 때만 (곧 마땅히 해야 한다면 선택할 수 있다) 자유를 실천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것으로 실천 이성의 상대적인 우위를 주장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칸트는 근대 인식론의 초기의 가장 큰 두 가지 철학 사조인 경험론과 합리론을 비판하여 종합하였다. 두 가지 인식론은 그 일면성 때문에 자체적인 모순에 빠져있었으며 칸트는 선험적인 직관과 오성의 범주를 통하여 감각적으로 경험되어지는 현상 세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의 통합을 제시하였다. 이것을 근간으로 그의 '순수 이성 비판'이라든지,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등이 서술되었다.
    종합적으로 그에 의한 인식의 과정은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첫째, 사물은 감성을 촉발시킨다. 따라서 감각의 혼돈이 부여된다.
    둘째, 감각은 순수 감성에 의하여 공간 시간적으로 정리된다.
    셋째, 경험적, 공간 시간적으로 질서 지어진 직관은 포괄적인 판단력에 의하여 인식의 범주에 포함된다. 곧 범주적으로 정리된다.
    넷째, 인식은 따라서 지각된, 공간 시간적으로 질서 지어진, 범주적으로 구성된 경험이다.

    위의 과정을 통하여 종합하여 본다면, 합리론의 선험적인 인식의 면과 경험론의 후천적인 감각적 경험이 어울려서 하나의 인식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종합한 새로운 인식론인 것이다.

    <합리론에서의 이성>
    합리론의 근본사상은 본유관념의 직관적 파악과 거기서부터의 수학적, 연역적 추리에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신적인 인식능력인 이성이 본유관념을 직관적으로 파악해 내고 거기서부터 논리학상의 근본원리에 따라서 논리적으로 추리해 나가는 것은 모두 참이다.(p.66)

    이 때 감각적인 경험은 그것이 우리를 기만할 수 있을 뿐더러 원래 개별적, 우연적이기 때문에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실지로 진리를 위해서는 감각을 완전히 무시할 것을 권한다. 감각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사유만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 여기에는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깔려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보다도 앞선 신뢰로서 서양철학의 옛날부터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성이 인간의 선천적인 인식기능이라고 할 때, 이 선천적(先天的, a priori)이라는 말은 원래 경험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뜻, 즉 경험에 의해서 후천적(後天的, a posterior)으로 습득된 것이 아닌, 따라서 인간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기능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동시에 신으로부터 부여된 신적인 능력이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데카르트는 17세기 전반기의 사람이다. 10여세기 동안 계속해 온 중세의 신(神) 중심 사상에 대해서 인간의 권위와 권리를 되찾으려는 문예부흥기의 뒤를 이어 인간 이성의 자율을 확립해 가는 때가 17세기였다. 그것은 이성의 세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이성은 저렇게 신의 후광을 업고 있는 인간이성임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합리론은 이성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논리의 법칙에 따라서 그러니까 문자그대로 합리적으로 사유(추리)해 나가기만 하면 그것은 모두 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성의 사유는 순수 논리적이므로 필연적이요 또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타당하다.(66-67)

    <보편타당성>
    보편타당적이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과 그리고 개인적 주관을 초월해서 타당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합리론에서의 지식의 원천은 이성의 순수사유에만 있다. 데카르트는 진위를 식별하는 능력인 양식(良識), 즉 이성(理性)이 모든 사람에게 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성이 선천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미 개인적 주관을 넘어선 타당성을 띠고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진리는 필연적 보편타당성을 그 생명으로 한다. 합리론은 선천적인 이성의 논리적 사유에 의해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67)

    <사고(思考)만으로는 공허(空虛)하다>
    그러나 합리론은 신적(神的)인 이성을 너무도 믿는다. 그 사유는 경험의 제약이 없으므로 이른바 창공을 나는 비둘기와 같이 한없이 뻗어 간다. 다만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연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는 것은 진리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 조건이다. 그러나 이 조건만 갖추면 모두 진리라는 것은 속단이다. ‘모난 동그라미’라든가 ‘둥근 사각형’은 논리적으로 모순이요, 따라서 그런 개념은 허용될 수 없다. 이런 것이 진리가 아님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그러나 황금이 산을 이루고 있다는 것, 즉 황금이라는 개념은 산이라는 개념과 결합하는 데는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날개와 말(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즉 ‘황금의 산’이나 ‘날개 돋친 말(馬)’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색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황금의 산이나 날개 돋친 말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생각할 수는 있지만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할 수 없다.

    합리론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고는 그대로 진리라고 한다. 그것은 이성을 믿는 나머지 사고와 존재의 일치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는 것(무모순성(無矛盾性))이 그대로 실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논리적(論理的) 무모순성(無矛盾性)은 진리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그 충분조건은 못된다. 진리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으로 실재와 부합해야 즉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논리성만으로는 내용이 없고 따라서 공허(空虛)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는 한때 합리론에 몸을 담았지만 저렇게 현실계를 떠나서 사유(思惟)의 날개를 마음대로 펼치기만 하는 합리론자들을 ‘독단적’ 형이상학자로 불렀다. 이성의 능력이나 그 한계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경험적 지식은 객관적>
    진리는 첫째로, 필연적, 보편타당적이어야 하며 이것은 선천적인 이성의 순수사유에 의해서 충분히 확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칸트는 합리론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성의 사유가 합리론의 주장대로라면 공허하며 독단적임을 면할 길이 없음을 깨닫는다. 칸트를 이 ‘독단(獨斷)의 꿈’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영국의 경험론이었다.

    근세 경험론은 경험만이 지식의 원천(근원, 시작되는 곳)이라고 한다. 여기서 경험이란 외적 감각과 내적 반성을 통한 경험이었다. 반성은 그 재료를 외적 감각에서 얻지 않을 수 없으므로 지식의 원천은 결국은 감각적 경험에 귀착(도달하는 것)된다. 감각은 신체가 있어야 하므로 당연히 후천적이다. 경험론에서의 지식은 이 후천적인 감각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보통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하나는 어떤 개인적 주관에만 타당한 것(옳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주관에도 타당하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대상, 사실의 세계에 부합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뜻의 혼동을 막기 위해서 전자를 특히 상호주관적(相互主觀的, intersubjective)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자를 ‘실질적(實質的)’이라고 하는 수도 있다. 우리가 여기서 경험적 지식을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후자의 뜻에서이다.

    감각적 경험은 감각함이라는 외계와의 접촉에 의해서 비로소 얻을 수 있으므로 그 지식이 사실계(事實界)와 연관(聯關, 관련을 맺는 것)을 맺고 있으며 또 거기에 부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그것은 객관적이며 실질적이다. … 사실과의 부합이라는 의미에서의 객관성, 이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진리의 필수적인 구비조건이다. 합리론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합리론은 지식의 실질적인 면, 객관적인 면을 전혀 고려에 넣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사막 위에 피어 오르는 신기루나 다름없다. 지식이 참된 지식이려면 대지(大地) 위에 발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감각만이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지식, 감각적 지식이라면 모두 다 진리인가? 그렇지는 않다.(68)

    <경험적 지식은 개연적(蓋然的)>
    자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면 그것은 필연성을 기할 수 없다. 인과(因果)에 관한 흄의 분석은 이것을 아주 명백히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 동일한 경험적 사실이 아무리 많이 되풀이 되어도 즉 아무리 많이 경험된다고 해도 미래에 있어서도 ‘반드시’ 과거의 모든 경우와 꼭 같은 경험이 되풀이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필연성은 나올 수 없다.

    이에 관해 러셀(B. Russell)이 그의 [철학의 제문제 The Problems of Philosophy, 1912]에서 재미있는 예를 든다. 닭장 속의 닭들은 일정한 때에 주인이 나타나 먹이를 준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주인이나 주인 비슷한 사람이 나타나면 먹이를 연상하며 모여든다. 즉 주인이라는 관념의 출현이 모이라는 관념의 출현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주인이 나타났으되 모이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찬거리를 장만하려고 나타났다. 여기서 닭들은 자기들 중의 한 마리를 잡으러 온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이러한 닭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그냥 웃어 넘길 수만은 없다.

    경험론의 근본주장을 철저히 관철해 가는 흄은 경험적 지식이 필연성을 띠지 못하고 기껏해야 개연성(蓋然性)밖에 띠지 못함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일깨워준다. … 그 뿐만 아니라 감각은 어디까지나 대상의 모사(模寫, 그대로 베껴낸 것, 복사한 것)가 아니라 개인적 느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개인적이며 주관적임을 면할 수가 없다. 이리하여 경험적 지식은 보편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이리하여 경험적 지식은 보편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지식의 객관성, 실질성은 지식에 내용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진리의 필수조건이기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충분조건은 못된다. 진리는 객관성 이외에 또 필연적 보편타당성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출처 : [기타] 용지니용님글 인용>

     

     

     

     

     

     

    도덕의 신학  / 임마누엘 칸트  

     

    계몽주의로부터의 탈피는 칸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칸트는 종교의 적합한 영역으로서 삶의 실천적 영역으로서, 즉 도덕적 영역을 제시했다. 그는 지적인 면에서 계몽주의에 가깝게 있었다는 것은 삶의 윤리적 차원을 종교의 중심적 관심사로 높이는 점에서 이해된다. 그것은 이성의 시대인 계몽주의 윤리의 핵심에 가까운 이해였다. 그러나 그는 도덕 지향적 종교의 확립 방법은 계몽주의와는 완전히 달랐다.
     칸트는 이성을 인간의 앎(인식론)의 중심부로 끌어올렸다. 칸트는 실제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성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론화했다. 이것은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
     칸트의 인식론은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에서부터 시작한다. 경험주의에서 인식의 과정을 이해하는 중심 사상에는 소위 '수동적 지성'이라는 것이 있다.  존 로크(1632-1704)는 그의 "인간 지성론"(1689)에서 데카르트 철학의 중심 주제를 부인하면서 주장하기를 인간의 지성을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본디 타고난 관념이 전무한 하나의 백지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 과정은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오관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전해져 오는 '인상들'을 수용한 다음 그 동안 수집한 인상들로부터 관념들을 형성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감각 속에 없었던 것은 오성에도 없다]고 말한다. 태어났을 때에는 마음이 백지이고 감각적 경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종이 위에 글씨를 써서 마침내 감각으로부터 기억이 생기고 기억으로부터 관념이 생긴다. 이 이론은 오직 물질적 사물만이 우리들의 감각에 작용하므로 우리는 오직 물질을 알 수 있을 뿐이고 유물론적 철학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으로 향하게 된다. 만일 감각이 사고의 재료라면 물질은 정신의 원료가 아닐 수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론적 사고에 죠지 버클리(1684-1753)는 반론을 제시했다. 로크의 인식분석은 오히려 물질은 정신의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로크에 따르면 인식은 사물에 대한 감각이고 이 감각으로부터 생긴 관념이다. 사물은 분류되고 해석된 감각의 묶음이다. 조반은 우선 시각과 후각과 촉각, 다음에는 미각, 다음에는 체내의 만족감과 온기의 집적에 지나지 않는다. 망치의 실재성은 물질성이 아니라 손가락을 통해 느끼는 감각에 있다. 감각이 없다면 망치는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물질은 정신적 상태이고 우리가 직접 알 수 있는 유일한 실재는 정신이다.
     여기에 데이빗 흄(1711-76)은 매우 이단적인 <인성론>으로 전 기독교계에 충격을 주었다. 버클리에 반대해서 흄은 우리가 결코 정신이라는 실체를 지각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개별적 관념, 기억, 감정 등을 지각할 뿐이라고 말한다. 정신은 하나의 실체, 관념을 갖고 있는 하나의 기관이 아니며, 일련의 관념들에 대한 추상적인 명칭일 뿐이다. (여기에 화이트헤드가 흄을 높이 평가한다.) 지각, 기억, 감정이 정신이다.  사고 과정의 배후에 알아볼 만한 [영혼]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결코 인과 관계나 법칙을 지각하지 못하고 사건과 그 연속을 지각할 뿐이고 여기에서 인과 관계와 필연성을 [추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흄은 말한다. 그러므로 법칙은 여러 가지 사건이 복종하는 영원하고 필연적인 섭리가 아니라 우리의 만화경적 경험의 정신적 총괄이고 집약적 표현일 뿐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사건의 연속이 미래의 경험에서도 변함없이 재현된다는 보증은 없다. 법칙은 사건의 연속 속에서 관찰된 관습이고 [관습]에는 [필연성]이 있을 수 없다. (듀란트, 235-36)
     경험론 철학의 인식론은 결국 인간 인식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 준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흄에 의하면, 경험주의의 방법은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실재의 어떤 양상들, 곧 가장 중요한 예들을 들어본다면, 인과 관계라든지 실체 등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각일 뿐이라고 흄은 천명했다. 이러한 지각들은 우리 나름대로 추론해 보지만 실제로는 경험하지 못하는 인과 관계에 근거한, 일련의 사건들의 우연의 일치 같은 것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련의 여러 가지 인상들(크기, 색깔 등)을 경험하기는 하지만 정작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들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그러한 인상들이 그 물체들 안에 들어 있는 속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흄에 따르면, 우리는 실체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로 인식하는 실제적 인식을 할 수 없다. 사실, 인과 관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외적 물체들의 정체가 '거기에 있는 대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정체를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지성의 습관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렌즈 35)
     흄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종교적 신념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것은 이신론, 즉 경험주의라는 구조물 위에 세워진 종교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자연 종교의 합리성을 주창하는 논증들이 그 주창자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만약 인과 관계라는 것이 경험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한 예로서 우주론적 존재 증명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실체라는 개념을 인정치 않는다면 영혼 불멸의 교리도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불의와 악을 보면서는 창조주의 선하심에 기초한 응보적 정의라는 미래적 사실을 당당하게 주장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형이상학의 기반을 공고히 다지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에서 그는 하나의 대담한 가설을 제시했다. 즉 지성은 인식 과정에서 '능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은 감각 경험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감각은 단지 원자료를 공급하는 것이고, 실제로 인식의 과정이 진행될 때는 지성이 원료의 상태로 주어진 그것을 체계화한다. 이와 같이 감지된 내용들을 조직화하는 데는 이성 안에 내재된 어떤 형식적 개념들이 인식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로서 일종의 여과판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지식으로서 성립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여러 가지 형식적 개념들 가운데 두 가지가 기본적이다. 공간과 시간이 그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은 물질 자체에 내재되어 있지 않은 속성들이다. 오히려 이 두(감성의) 형식은 다른 형식적 구조들과 마찬가지로, 지성이 마주 대하게 되는 이 세계에 부과하는 질서 체계의 한 부분이다. 실제로는 사물들이 시공간적으로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기본 개념들이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는 오관적 경험의 대상이 되는 외부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렌즈 36)
     칸트는 인식 과정에서 지성이 능동적이라고 하는 가설은 인간 인식자의 경험 속에 존재하는 대상들(현상계, phenomena)과 경험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대상들(가상적인 것, noumena)을 구분하도록 만들었다. 칸트에 의하면, '가상적인 것'은 어떤 인식의 주체와 아무런 관계없이 존재하는 대상(물자체, the thing-in-itself)이거나, 또는 우리에게 단지 그것을 탐지하는 데 필요한 장치가 부족할 뿐인 어떤 대상이다. 이 '가상적인 것'이라는 개념 때문에 칸트에게는 원인과 결과를 초월하는 어떤 영역이 열리게 되었고 그 안에서 그의 능동적인 도덕적 행위자인 인간에게 자유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흄의 이론과 같이 칸트의 인식 이론은 사고하는 자가 감각 경험을 가지고는 신이라든지, 불멸하는 영혼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같은 초월적 실재를 논증하기에는 커다란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전개한 입장은, 과학은 감각 경험에 기초한 것이므로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실재들에 대해서는 과학적 작업을 통해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순수' 혹은 사변적 이성은 기껏해야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경험적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어떤 것과도 모순되지 않으므로 있을 법하다고 진술하는데 그칠 뿐이다.
     여기서 칸트의 의도는 흄의 종교적 회의주의를 증명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좀더 확고한 입장에서 형이상학적 가정들에 접근하려 했다. 그는 후에 [판단력 비판]에서 신이라는 실재가 감각에 기초한 경험의 논증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다면 신을 도덕적 범주들 가운데 놓고 보 것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순수 이성 비판] 제2판에서 "나는 신앙에 여지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인식을 부인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신앙'은 인간 이성의 또 다른 영역, 곧 '실천적' 측면에서의 이성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이성을 인간 실존의 도덕적 측면과의 관계성 안에 놓고 보았다. (그렌즈 37)
     

    [실천 이성]
     형이상학적 가설의 모든 이론적 증명들이 가지는 오류를 보여 줌으로써 칸트가 처음 제시한 비판은 '순수' 또는 사변 이성의 한계를 밝혔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수단들을 이용하여 그러한 가설들을 확증하는 작업만 남았다. 신, 불멸성 그리고 자유 등의 개념들을 확립하는 작업은 칸트의 도덕적 논저들, 특히 그의 [도덕 형이상학의 근본 원리, Fundamental principles of the Metaphysics of Morals, 1785], [실천 이성 비판,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1788],그리고 [도덕 형이상학, Metaphysic of Morals, 1797]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칸트의 주장의 기초에는 인간이란 감각 경험의 존재일 뿐 아니라 도덕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논지가 있다. 그는 우리와 이 세상의 관계는 과학적 지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오히려 이 세상에는 인간들이 활동하는 하나의 무대이며 도덕적 가치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른바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적 경험, 즉 도덕적으로 조건지어져 있음에 대한 이해, 혹은 도덕적 '당위성'이라는 것에 호소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도덕적 성격에 대하여 입증했다. 인간들은 도덕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력(지상명령)' 같은 것을 느낀다고 그는 천명했다.
     칸트는 이러한 인간 실존의 실천적이며 도덕적인 측면은 인간 실존의 이론적 차원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이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모든 이론적 혹은 감각에 기초한 인식의 근저에 다른 이성적 원리들이 있듯이, 모든 타당한 도덕적 판단도 어떤 이성적인 원리들에 의하여 통제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결국, 인간적 삶의 도덕적 차원의 목표는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되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이성적 도덕적 삶의 방식을 말할 때 '의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칸트에게 의무의 길은 도덕성의 최고의 원리인 그의 유명한 정언 명법(categorical imperative)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의 말을 빌리면, "당신의 행동의 준칙이 당신의 의지에 의하여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된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가 가르키는 바와 같이, 정언 명법은 구체적인 행동 하나 하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 유발 요인의 고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천적 요청들]
     칸트가 형이상학을 재정립하는데 근본이 된 것은, 도덕적 조건성이라는 보편적 경험에 의하여 증명된 인간 존재의 도덕적 성격이다. 삶에 이러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는 이론적 이성으로 입증할 수 없었던 세 가지 초월적 가설의 확실성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있었다. 이 세계의 도덕적 성격이 그러한 요청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실천적 요청들'은 반드시 가정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처음의 두 가지 요청인 신과 영혼 불멸은 칸트의 최고선(summum bonum)에 대한 이해로부터 발단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를 위한 최고선은 덕과 행복이 연결되는 곳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생의 삶 속에서 덕이 항상 보답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칸트의 결론은, 덕을 끼치는 삶이 적합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미래적 삶이 있어야 하며, 신은 그곳에서 완전한 정의가 정말 유효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이로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자유에 대한 요청은 특히 폭넓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는 인간이 능동적인 도덕적 행위자라는 인간 보편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상적 차원에서 인간은 물리적 존재로서 자연의 법칙에 예속되어 있으므로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덕적 의무는 자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인간 개인을 두 영역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자로 보았다. 그러므로 각 개인인 양 측면, 즉 도덕적인 측면(자유로운 행위자로서)과 과학적인 측면에서(물리적인 인과 법칙 아래 놓인 존재로서)이해되어야 한다.


     [합리적 종교]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 1793)에서 칸트는 도덕으로부터의 종교를 소개했다. 왜냐하면 종교는 도덕을 위한 궁극적인 목표를 제공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인간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는 '권능의 도덕 입법자'에 대하여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계몽주의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단절을 보여 주었다. 그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뿌리뽑을 수 없는 악한 성향이 우리 안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근본악'(radical evil)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토론에서 칸트는 이성의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원죄의 교리를 다시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계몽주의와 완전히 결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몽주의의 낙관론을 유지했다. 인간에게서 근본적인 악이 발견되지만 "그의 행위는 자유로우므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던 것이다.
     이렇게 두 명제를 동시에 붙잡기 위해 그는 우리의 실제적인 의지(actual will)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던 악의 원리와, 우리의 본질적인 의지(essential will)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그가 스스로 천명했던 정언 명법을 구분지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칸트는 마이클슨이 이야기했던 "종교개혁의 타락에 대한 강조와 계몽주의의 자유에 대한 강조를 불안정하게 융합"시켰다.
     종교를 본질적으로 윤리적이라고 보았던 칸트는 그의 기독론도 그러한 관점에서 보았다. 그의 창조의 목적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류를 만드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러한 목표는 우리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의 독생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에 충실한 칸트는, 이러한 관념은 우리의 이성 속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관념'의 원형으로서 '경험적인 본보기'가 우리에게 필요하지는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기독교적 전통을 신중하게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러한 이상의 한 역사적 모범으로서 예수--또는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이 세상의 최고선을 위하여' 고난에 직면한 예수의 모습--가 있다고 덧붙였다.
     계몽주의에 의한 변화들은 그가 종교적 권위를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성경이 교회 안에서의 유일한 규범임을 인정하지만, 칸트는 '순수한 이성의 종교'만이-진정한 것이며 보편 타당한 것이므로-성경의 해석 원리라고 선언했다. 그는 성경의 이야기들 이면에 놓여 있는 진정한 의미는 도덕적 차원(즉, '거룩을 향하는 분투하는 덕')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이야기의 이면에 놓여 있는 영원한 신앙의 진리를 추구했다.

    진정으로 도덕적인 원리들을 자기 자신의 성품에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외에는 인간에게 다른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도덕적 원리들의 수용에 역행하는 것은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는 육적 본성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불러일으킨 사악(邪惡)이었고 . . . 그것은 일찍이 인류가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바이다.

     마지막으로 칸트는 은혜라는 범주를 재해석한다. "진정한 종교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미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나 고려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칸트는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던 은혜와 행함의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 "정도(正道)는 은혜로부터 시작해서 덕행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덕행으로부터 사죄의 은혜로 진행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렌즈 41)

     

     [도덕에 기초한 신학]
     칸트는 몇 가지 중심적인 종교적 교리, 신의 실재, 영혼의 불멸 그리고 인간 개인의 자유 등의 교리들을 추론해 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계시로부터 신 존재의 속성들을 논증하던 고전적 신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사상에만 기초하여 그의 사상 체계를 수립한 칸트는 데카르트와 다름이 없었다. 즉 그의 방법은 계시로부터 이성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부터 계시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칸트는 계몽주의의 프로그램인 순수하게 이성적인 신앙을 설명하는 작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혁신이 칸트를 이성의 시대로부터 구별해 내게 한다. 그의 선배들과 달리 그의 제안의 특징을 이루었던 것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이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의 근본이란 인간 존재의 어떤 특정한 차원, 즉 이성의 실제적인 양상과 연관되어 있는 도덕적 조건성의 경험(the experience of moral conditionedness)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칸트는 인간의 존재의 차원(즉 신, 영혼의 불멸 그리고 자유와 같은)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던 형이상학적 요청들만을 긍정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의 연장으로 그는 도덕적 보증자로서 필요한 속성들만을 신의 본성에 포함시켰다. 그러므로 칸트는 그러한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는 신의 본성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고전적인 기독교 사상처럼 신학을 기초로 해서 도덕을 세운 것이 아니라 도덕을 기초로하여 신학을 세운 것이다.
     신학사의 맥락에서 칸트의 작업은 계몽주의 시대의 이신론의 최종적 사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성의 시대는 자연종교의 원리들을 견고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칸트는 이신론의 핵심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들은--신의 존재, 영혼의 불멸 그리고 인간의 자유--사변 이성에 의하여 논증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의 종교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해서 신학의 종말이 온 것은 아니었다. 칸트는 도덕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의 강조점을 채택하여 그것을 좀더 확고한 기초 위에 올려 놓았다. 종교는 실천적 이성, 즉 인간 존재의 윤리적 차원과 그에 상응하는 이성의 도덕성에 기초하여 수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도덕적 차원은 종교의 적절한 영역이었다. 거기서 종교는 과학의 발견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고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칸트는 철학과 신학 양자와 관련하여 토론의 무대를 설정해 주었다. 그것은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한 진보들을 융합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계몽 사상에 대한 하나의 명징(明澄)한 답변이었다. 그래나 그도 그 시대의 몇 가지 파괴적 사상적 경향들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종교란 초월적 입법자에 대한 경배로서 그 입법자의 뜻이 인류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칸트의 방법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학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그 자신이 그렇게 애써 거부하려고 했던 신의 내재성을 어쩔 수 없이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보면 자율적인 인간의 이성이--계몽주의에서 말하는 순수 이성이든, 칸트의 실천 이성이든--보편적으로 듣게 되는 '신의 음성'은 인간 자신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인 것이다. 그것은 저 초월적인 '저편'(beyond)으로부터 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제안을 보면, 초월적 신은 인간의 '실천적 이성'의 심연 어딘가에서 발견되는 정언 명법의 음성 속으로 쉽게 묻혀 버린다. 또한 성경의 해석도 이성의 한계 내에 국한되어서 결국 이성이 성경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출처: 행복충전소>

     

     

     

     

     

     

     

    칸트의 철학적 업적과 정신적 유산

                     / 양 갑 현

     

     

     […중략…] 이 글은 『윤리』교과서 4단원 서양 윤리 사상 중 칸트(I. Kant, 1724∼1804) 철학을 중심으로 그의 철학적 업적과 전승된 정신적 유산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데 있다. 시간 관계상 교실에서 못 다한 수업을 보충한다는 의미도 여기에 있다 […중략…].   

     한때 칸트의 제자였고 그의 강의를 들었던 독일의 가장 위대하고 열정적이었던 작가 헤르더(J. G. Herder, 1744∼1803)는 칸트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정말 운 좋게도 한 철학자를 직접 대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나의 선생님이었다. 물론 그는 젊은 시절에도 젊은이다운 명랑성과 고양된 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그러한 정신을 노년기까지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사고하도록 만들어진 듯한 그의 넓은 이마엔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평정과 기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풍부한 사상이 흘러나왔고, 농담과 기지, 그리고 멋진 유머가 그가 마음먹은 대로 요리되었다. 그의 강의와 가르침은 너무나 매혹적인 즐거움이었다. 라이프니쯔, 볼프, 바움가르텐, 쿠로시우스, 그리고 흄을 검토할 때의 정신으로, 또 물리학자 케풀러와 뉴톤에 의해 발견된 자연법칙을 분석할 때도 바로 그런 정신으로 그는 루소의 최근의 저술들―『에밀』―을 평가했다. 마치 새로 접하게 된 자연과학을 평가할 때처럼 그는 그것들의 진가를 들추어내었고 언제나 그렇듯 자연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 가치에 대하여 편견 없는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인간과 역사, 자연과 자연과학 … 그리고 그 자신의 경험은 그의 강의와 일상생활에서 활력을 불어넣는 샘물이었다. 그는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심히 넘기는 법이 없었다. 어떤 이익도, 어떤 당파적 이해관계도, 어떤 우월한 지위도, 어떠한 명예욕도 진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추구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에는 그 힘이 너무나도 무력했다. 독재는 그의 천성과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이 사람은 내가 가장 깊은 감사와 존경심을 가지고 이름을 대거니와 바로 칸트이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모습을 회상한다."  

     

    서양철학의 근대적 발전은 단적으로 칸트를 기점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는 발자취를 더듬어 봄으로써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쯔)과 영국의 경험론주의 철학(베이컨, 로크, 흄)아 안고 있는 두 개의 사상적 근간인 이성과 경험에 대한 편향된 선입관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중세 이후 17C까지의 철학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이른바 비판적 방법에 의한 새로운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칸트가 죽은지 200년이 가까워 오는 현재에 있어서도 그가 남긴 철학적 유산은 여전히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그때마다 새로운 흠모의 대상이 되었고, 또 인생과 세계에 대한 사유와 지식을 끊임없이 키워 나가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심원한 사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여기서 그와 같은 위대한 철학적 업적과 생동하는 정신적 유산이 우리에게 철학과 사상에 대한 향수와 자부를 느끼게 해주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지나가버린 과거의 유물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영원의 상을 지닌 철학"으로서의 위치를 서양 문화와 그 세계 전체 속에 확고하게 각인시켜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래 전통적으로 서양의 사상 무대를 점유하다시피 했던 형이상학(Metaphysik)의 과제는, 사물의 본질 혹은 존재 그 자체의 근원을 캐묻는 일이었지만, 스스로의 현실적 사유 능력이 무궁한 심연으로까지 미칠 수 있다고 본 근세의 합리적 형이상학이 자아낸 '독단의 잠'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한 것은 바로 칸트였다. 나아가 오직 실험과 관찰을 통해 측정가능한 대상만을 지식탐구의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현대 자연과학의 일정한 한계성을 자각하여 그로 하여 사물본질의 탐색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 것도 역시 칸트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에 속한다. 이렇게 볼 때, 칸트가『순수이성비판』서문에서 지적한 바, 인간의 인식 능력 한계를 설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아울러 지식의 한계를 명시했다는 것은 그의 모든 철학적 노력을 집중케 했던 중심과제였다고도 하겠다.

     

    칸트의 학문적 생애는 흔히 전후의 두 시기, 곧 '비판철학 이전 시기'와 '비판철학 시기'로 양분되지만, 이 같은 전·후기를 통틀어 그가 주안점으로 하고 있던 문제는 역시 어떻게 하면 고대 그리스적 형이상학의 전통적 기반과 경험적 법칙성에 의거한 근세 초기의 자연과학이론을 둘러싼 지식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내적인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양자간의 매개와 융화를 이룰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방향에서 치밀한 논리적 탐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거대한 철학사적 신기원을 이룩한『순수이성비판』이야말로 그 밖의 비판서인『실천이성비판』과『판단력비판』보다 월등하게 우리의 관심과 연구를 기울여야할 철학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근세 초기의 합리론자들은 만약 우리가 오성적 사유능력에 의하여 이미 그 스스로의 개념 속에 담겨진 사태를 분석하기만 하면 능히 우리는 지식의 세계에서 다뤄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파악하고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는가 하면, 반면 경험론자들은 이성의 힘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진리의 발견이란 도저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경험 내용을 일반화하여 이를 이미 획득한 전체적인 경험의 소재들과 통합함으로써만 참다운 지식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경험론자들에게는 모든 형이상학적 개념이란 단지 경험적 지식이 추상화된 것으로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칸트가 처음으로 발굴한 획기적인 착안점은, 경험적 지각 작용을 하는데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왔던 감성도 선험적 직관능력을 소유한다고 생각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런 기본적 입장이 있음으로 해서『순수이성비판』속의 선험적 감성론과 선험적 변증론이라는 두 부분에서 시도된 감성과 이성의 한계설정도 가능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내용이 없는 사상은 공허한 것이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일 뿐이다."(B 75)라는 그의 유명한 말과 같이, 인간의 기본적 인식 행위는 어디까지나 감성과 오성의 빈틈없는 상호연관성 속에서 이뤄져야만 하므로 결국 칸트는 우리의 인식 대상은 물자체(Ding an sich)가 아니라 공간과 시간 속에 주어진 직관의 대상으로서의 현상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곧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분명히 구획지으려 했던 그의 원래의 비판적 의도와 합치됨은 물론 또 다른 면에서 순수이성이 지닌 이율배반적 성격을 드러내 주는 사유의 본질적 자기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존재자로서 우리 인간은 분명히 이념의 세계와 구별되어야 할 현상 속의 세계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현실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선험적 변증론의 논리를 추구하는 의식일반의 추동력은 자발적인 자기활동을 계속함으로써 급기야는 '신', '자유', '영혼'이라는 세 가지의 근원적 이성의 욕구를 도저히 가라앉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1793년 자기 친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철학의 과제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네 가지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여기서 첫 번째는 형이상학, 두 번째는 도덕론, 세 번째는 종교론이고, 마지막 물음은 인간학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가 시도했던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 설정이라는 문제는 그 문제 자체 속에 이미 내재하는 자기의 본래적 한계성과 취약점을 안고 있는 까닭에 결국 의식의 철학으로서는 이원론적 내지는 불가지론적 경향을 벗어날 수 없었는가 하면, 또한 도덕 윤리 종교론 등은 근본적인 형이상학의 재건에 오히려 배치되는 듯한 결과마져 낳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칸트 인식론이 인간 이성의 한계를 올바로 규정했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칸트의 이 같은 인식론을 기초로 한 독자적 형이상학의 재건도 결국 존재론적 측면으로부터의 문제 접근 태도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인식의 한계를 발견한 그로서도 인간 존재의 근원적 유한성이라는 궁극 문제를 추구하지는 못했으며, 이것으로부터 다시 오늘에 이르도록 더 깊은 하나의 과제를 우리에게 안겨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바로 이와 같은 통시적 명제로서의 인식과 존재의 문제에 관해 깊이 있는 논구를 가한 바도 있지만, 어쨌든 칸트의 유업이 근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온 인류에게 우주와 세계를 대하는 자연과학적 위치를 깨우치게 해주었다는데 대에선 하등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 존재의 실존적 기초를 음미하고 검토함으로써만 가능할 수 있는 영원의 수수께끼, 곧 인간의 실상을 존재론적으로 올바르게 규명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흠을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토대가 되어 오늘날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이 궁극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인간 문제의 영원성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칸트 철학으로부터 전승된 미해결의 장 속에서 새로운 사상적 요소를 발굴해 낸 사람들은 피히테(Hichte), 쉘링(Schelling), 그리고 헤겔(Hegel)로 이어지는 이른바 독일 관념론 철학자 들이었다. 칸트의 제일비판서인『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의 자가당착을 체험한 인간의식은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 우리 마음 속에는 도덕률"을 거울 삼아서 도덕과 윤리를 향한 행동규범으로서의 실천이성이 명하는 바를 찾아 나서게 된다고 하였듯, 이것이 피히테에 와서는 '절대 자아'(das absolute Ich)의 실천적 명제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로를 거치면서 18C말을 전후하여 독일 관념론 철학이 발흥하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사상적 대단원을 장식하기까지 하였다. 여기서부터 바로 그때마다 다채롭고도 심원한 역사와 이념의 세계를 수놓아 온 현대사상과 철학의 백미라고도 할 독일 관념론과 여기에 뒤 이은 변증법을 둘러싼 모색과 갈등의 한 세기가 펼쳐지기에 이르렀다. 특히 헤겔의 천재적인 투시력과 엄격한 논리적 정의가 가해진 변증법적 이론은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혼미 속에서 면면하게 그 의미와 문제성을 우리에게 명시해 주고 있다.

     

    이제 칸트에 의하여 창시된 위대한 인간의 관념적 활동 능력과 웅장한 논리적 체계성에 바탕을 둔 이성의 철학으로서의 독일 관념론 사상을 아울러 되새기면서 우리는 새삼 온 인류의 문화와 정신에 무한한 감흥력과 자기 제약성의 통찰을 끈질기게 채찍질해준 칸트의 불멸의 위업과 가르침을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아로새기는 일만이 남아 있는 듯하다.

     

     * 졸고는「송원」제13집(1991.2)에 실렸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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