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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니체 /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11.26|조회수1,191 목록 댓글 0

 



프리드리히 니체 [Nietzsche, Friedrich]

1844. 10. 15 프로이센 작센 뢰켄~1900. 8. 25 바이마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체 /니체(1888)

 

전통적인 서구 종교·도덕·철학에 깔려 있는 근본 동기를 밝히려 했으며, 신학자·철학자·심리학자·시인·소설가·극작가 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를 반성했다. "신은 죽었다"는 그의 주장은 20세기 유럽 지식인의 주요한 구호였다.

민주주의, 반(反)유대주의, 힘의 정치 등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뒷날 그의 이름은 그가 혐오했던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되었다.


초기생애

 

그의 집안은 루터의 경건주의를 신봉했다. 친할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교를 옹호하는 책을 썼고, 외할아버지는 시골 목사였다.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니체의 이름은 이 왕의 이름을 딴 것임)의 명으로 뢰켄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아버지는 니체가 6세가 되기 전에 죽었고, 어머니 프란치스카, 누이 엘리자베트, 할머니와 두 하녀 사이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850년 잘레 강변의 나움부르크로 옮겨 돔 김나지움을 다녔고, 1858년 프로테스탄트교 학교인 슐포르타에서 고전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재학중 두 학기는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2명의 대표적인 고전학 교수 오토 얀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 때문이었다. 그는 음악에서 안식처를 찾았고, 낭만파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의 영향이 두드러진 곡들을 작곡하기도 했다. 1865년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1867년 10월 군에 입대했으나 다음해 3월, 말을 타다가 가슴을 심하게 다쳤다.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그해 10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동안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났으며 고전문학자 에르빈 로데와 우정을 쌓았다.


바젤 시기

 

스위스 바젤에 고전문헌학 교수직이 비었을 때, 리츨의 추천으로 학위도 없이 교수로 임명되었다. 1869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시험과 논문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자 의무병을 지원했는데, 1개월도 안되어 환자를 수송하다가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렸다.
바젤에 있을 때 바그너와 사귀었고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았지만, 바그너가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그리스도교적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결별했다.
니체의 첫번째 저서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1872)은 그가 고전학의 굴레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전자는 중용·제약·조화를, 후자는 거침없는 정열을 표현함)의 결합에서 나왔으며,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낙관주의가 그리스 비극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아폴론-디오시소스 이분법).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미학사(美學史)의 고전으로 꼽힌다.
1878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을 출판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서 1879년 교수직을 사임했다. 1879~89년에는 책을 쓰는 것 외에는 삶에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중병에 시달렸고 시력도 거의 잃었으며,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고립·창조·오용의 시기
성서 이야기 형식의 문학적·철학적 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는 1883~85년에 4부로 나왔는데, 제4부는 자신의 돈으로 출판했다. 그가 쓴 대부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철학을 더욱 직접적인 산문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한 〈선악의 피안 Jenseits von Gut und Böse〉(1886)과 〈도덕 계통학 Zur Genealogie der Moral〉(1887) 역시 독자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니체의 정신이 정상적이었던 마지막 해인 1888년은 생산적인 해로, 〈바그너의 타락 Der Fall Wagner〉을 출판했고 〈우상의 황혼 Die Götzen-Dämmerung〉·〈반(反)그리스도 Der Antichrist〉·〈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등을 썼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쓰러진 뒤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1900년 8월 25일 죽었다.

니체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 및 파시즘과 연결된 것은 주로 그의 누이 때문이었다(→ 국가사회주의). 그녀는 대표적인 국수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인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했는데,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했다. 그녀는 니체의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통제했고 탐욕에 사로잡혀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모아 〈권력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1901) 등을 출판했다.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 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독재자 히틀러와 연결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니체의 철학사상

 

니체의 저서들은 뚜렷하게 3가지로 구분된다. 초기작품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과 〈시대와 맞지 않는 생각 Unzeitgemässe Betrachtungen〉(1873)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중기 작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즐거운 과학 Die fröh-liche Wissenschaft〉(1882)까지는 이성, 과학, 문학 장르의 실험 등을 찬양했고 초기 낭만주의, 바그너, 쇼펜하우어 등에게서 벗어났음을 보여주었다.
원숙기 철학은 〈즐거운 과학〉 이후에 나타난다. 원숙기 저작에서는 주로 가치의 기원과 기능을 다루었다. 생에 내재적 가치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생이 평가되고 있다면 그러한 가치평가는 평가자의 조건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서구의 철학·종교·도덕의 기본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금욕주의적 이상(理想)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고통이 궁극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니체에 따르면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고통을 신의 의도이자 죄갚음의 기회로 해석함으로써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승리는 개인의 불멸성이라는 교리와 개인의 삶과 죽음은 우주적 의의를 갖는다는 기만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통철학은 신체에 비해 영혼, 감각에 비해 정신, 욕망에 비해 의무, 현상에 비해 실재, 시간적인 것(일시적인 것)에 비해 무시간적인 것(영원한 것)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금욕주의적 이상을 표현했다. 그리스도교가 죄지은 자들에게 구원을 약속한 반면, 철학은 현자들에게 세속적인 것이긴 하지만 구원의 희망을 제시했다.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의 공통점은 존재는 설명·정당화·속죄 등을 필요로 한다는 가정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양자는 경험을 다른 세계, 이른바 '참된' 세계를 빌려 훼손한다. 양자는 몰락하는 생이나 비탄에 빠진 생의 징후로 볼 수 있다.
전통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판의 초점은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의 유형학이다. 니체는 독일어 어휘 'gut'(좋은, 선한)·'schlecht'(나쁜)·'böse'(악한) 등을 검토하면서 선악의 구별은 원래 비도덕적인 기술(記述)에 쓰인 것으로 선은 우월한 주인, 악은 열등하고 천한 노예를 가리켰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예가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배의 속성들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선과 악의 대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월함은 악덕이 되었고, 자애·겸손·복종이 경쟁·자존심·자율성으로 대체되었다. 노예도덕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노예도덕만이 참된 도덕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절대성에 대한 주장은 종교적 윤리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윤리에도 중요하다. 니체는 주인·노예 도덕의 역사적 계통학을 제시했으면서도, 이 계통학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성에 대한 비역사적 유형학이라고 주장했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최고의 가치로 정립된 것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허무주의'란 용어를 썼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수동적 허무주의 시대, 즉 19세기에 실증주의가 출현함으로써 종교적·철학적 절대성이 이미 해체되었음을 아직 모르고 있는 시대라고 보았다.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기초와 전통적인 도덕이 허물어짐으로써 이제는 무목적·무의미 등의 느낌만이 남았다. 무의미의 승리는 곧 허무주의의 승리이며, 따라서 "신은 죽었다". 그러나 니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욕주의적 이상의 쇠퇴와 존재의 본래적 무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삶에 의미를 주는 대리 절대자를 찾으리라고 보았다. 당시 등장하던 민족주의가 그러한 불길한 대리 신이고 민족국가는 초월적 가치와 목적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철학과 종교가 교의의 절대성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듯이, 절대성은 사명감과 정열을 지닌 민족국가에도 나타난다고 보았다. 경쟁자에 대한 살육과 영토의 정복은 보편적 형제애와 민주주의·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진행된다. 니체의 이러한 선견지명은 날카로운 것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저작들을 허무주의와의 투쟁으로 보았다. 종교·철학·도덕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 영원한 회귀, 초인(超人)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퍼스펙티브주의는 지식이 항상 특정한 퍼스펙티브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태도이다. 즉 순수한 지각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점없는 지식이란 특정한 관점없이 본다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이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퍼스펙티브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퍼스펙티브란 대상을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동시에 본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니체의 퍼스펙티브주의는 때로는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로 오해받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퍼스펙티브주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니체의 주장,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지배적인 가치는 금욕주의적인 이상에 따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퍼스펙티브에서만 옳은 것인가? 퍼스펙티브주의는 퍼스펙티브주의 자체가 절대적 참이라고 가정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이는 자기모순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인식론에서 유용한 작업과 풍부한 주석서가 많이 나왔다.
니체는 종종 생을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 즉 성장과 영속을 위한 본능과 동일시했다. 이러한 개념은 금욕주의적 이상을 해석하는 또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이 점은 그가 "이 의지가 '결여'된 인류의 모든 최고 가치는 쇠퇴와 '허무주의적' 가치의 징후이면서도 신성한 이름을 내걸고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서 나타난다. 따라서 전통적인 철학·종교·도덕은 불충분한 권력의지의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서구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가치들은 퇴폐의 승화된 산물이었다. 몇몇 주석가는 니체가 말하는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라는 개념을 인간의 삶만이 아니라 유기적·무기적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써 니체를 권력의지의 형이상학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지지하기 어렵다.

영원회귀의 원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본사상이다. 영원회귀란 서로 다른 삶이 무한히 반복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과 모든 순간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무한히 되풀이되는 것을 뜻한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초인일 것이고 초인과 보통사람의 거리는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다고 말하고 있다. 주석가들은 아직도 영원회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간을 규정하는 특수한 속성들이 있는가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니체의 영향

 

니체는 어떤 사람은 죽은 뒤 다시 태어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니체 없이는 20세기의 철학·신학·심리학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셸러, 카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도 마찬가지이다. 철학과 문학비평에서 일어난 실존주의와 해체주의는 그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신학자 파울 틸리히, 레프 셰스토프는 "신은 죽었다"의 신학자인 토머스 J. J. 알타이저와 마찬가지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위대한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니체가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폴란드어로 옮겼다. 니체가 자기를 그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이해했다고 말한 지크문트 프로이트, 알프레트 아들러, 카를 융 등 심리학자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앙드레 말로, 앙드레 지드, 존 가드너 등의 소설가와 조지 버나드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슈테판 게오르크,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시인·극작가도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그에 관해 글을 썼다. 분명히 니체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B. Magnus 글 | 梁雲悳 참조집필 / 백과사전

 

 

 

 

 

     철학자 니체의 삶

 

 

      서론

철학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한다. 하지만 철학자들을 이해하는 데에 수반되는

어려움이 모두 같지는 않다. 어떤 철학자들의 경우에는 에베레스트라는 높은 산을 오를 때와 같이,

그들의 사유 정상에 오르는 과정의 험난함에서 어려움이 야기된다. 이런 높은 산에 비유할 수 있는

철학자들로는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로크나 칸트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에 오르거나 오르기를 포기하거나 하듯, 이들의 사유 정상에 오르거나 오르기를 포기하거나

한다. 그러나 이해 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가령 칸트라는 산의 정상에 일단 오르면, 적어도 우리는

칸트를 이해한다고는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 등의 높은 산에 비유되는 철학자들은 원칙상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는지, 그렇지 못한지가 분명한 철학자들이다. 이렇듯 우리는 그들과 대면할 때,

우리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반면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 등을 대할 때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들은 로마처럼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고도시에 비유할 수 있는 철학자들이며, 니체라는 철학자도 여기에 속한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로마라는 고도시에 대해 아느냐는 질문을 할 경우, 우리는 쉽사리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한 번도 로마에 있어보지도, 로마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했을

경우에만 <아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위의 철학자들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경우

우리가 처하는 상황은 이와 유사하다. 그들을 과연 이해하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 우리는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고도시 같은 철학자들을 이해할 때의 어려움은 칸트라는

산을 등반할 경우에 겪는 어려움과는 다르다. 이런 어려움의 원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철학자들의

사유가 다양한 모습을 띠어서, 그것에 대한 일관성 있는 체계적인 이해를 아주 어렵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니체에게서 이 어려움은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니체 철학 이해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니체의 다양한 모습을 띤 철학 내용과 철학하는 방식에서 야기된다. 독자는 데카르트보다도

더 엄밀한 철학적 회의를 하는 니체를 발견한 다음, 곧 격정에 찬 예술가적 광기를 보이는 그를 보고

어리둥절해진다. 모든 종류의 체계에 대한 냉혹할 정도의 그의 비판을 들으면서 공감한 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는, 체계를 위한 그의 시도를 보며 기막혀한다. 진리를 부정하며 진리 없는 세상에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탄식하고 깊은 슬픔에 잠긴 니체를 보며 같이 눈물짓다가, 곧 새로운 진리를

말한다고 자만스러워 하는 그를 보면 당혹감마저 든다. 독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수많은,

서로 모순적이기까지 한 니체상을 어떻게 하나로 종합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절망스러워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니체상이 과연 니체의 진정한 모습인지에 대해 자신이 없다. 니체 철학 이해의 또다른 어려움은

그의 사유의 열정이 그의 성격과 삶에서 기인한다는 데에 있다.

 

인간 삶의 방식과 내용이 고정되지 않으며 여러 모습을 띠듯, 니체라는 철학자의 삶 또한 그러했으며,

그의 삶은 그의 철학함의 토대가 된다. 철학함은 니체에게 결코 직업이 아니었다. 그는 전 존재로

철학하지 않고 직업상 철학에 종사하는, 몇 시간 철학에 종사하고 뒤로 돌아서면 부나 명예 등을

철학보다 더 중시하는 철학자들을 경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들과는 달리 니체는

그의 전 존재로 철학하고 싶어했으며, 사유는 그에게 단지 순수한 지성의 작용만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작품을 나의 전 몸과 삶으로 쓰며, ‘순수하게 정신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니체 자신의 말은 이 점을 잘 대변해 준다.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했듯이

니체 역시 뇌만을 가지고 사유하지 않았고, 정신의 격정을 가지고 사유했다. 좀더 니체적으로 말하자면

온 몸(leib)의 격정을 가지고 사유했다. 그에게 철학은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열정이었으며,

이 열정은 그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삶의 유일한 형식이었다. 그에게 철학하는 능력이 상실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렇듯 니체의 사유의 열정은 그의 삶의 본질적 요소에 속하며, 삶의 여러 모습들

이 그의 사유의 내용을 이룬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많은 경우 니체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방법으로서 니체의 삶에 대한 연구를 들기도 하는 것이리라.) 물론 이것이 니체 이해의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그의 철학적 사유와 삶과의 연계성은 적어도 니체 이해를 위해서는 주지되어야 할 것이다.

니체를 니체적 단계에서 이해하려면 그의 사유뿐 아니라 그의 성격과 삶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출생과 학창 시절(1844-1869)

  

1844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10월 15일 뢱켄rcken의 목사였던

 카를 루드비히 니체carl ludwig nietzsche와 뢱켄의 이웃 고장 목사의 딸 프란치스카 욀러(franziska

 oehler) 사이의 첫 아들로 태어난다. 니체의 친할아버지는 루터 교구의 감독직(superintendent)을

맡고 있었으며, 친할머니는 5대조 선조부터 목사였던 목사 집안의 딸이었다. 니체는 이렇듯 전통적인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고 목사 사택에서 자란다. 카를은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도 역시 태어나고 자란

이 지방의 정치적 지배자이며, 니체와 우연히도 생일이 같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이름을 준다. 니체의 집에는 일찍 남편을 사별한 친할머니와 두 명의 고모가 같이 살고 있었다.

1846년, 여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가, 1848년에는 요셉joseph이라는 남동생이 태어난다.

1848년에 발생한 정치적 동요는 군주제를 지지하고 프로이센에 동조적이었던 아버지 칼에게 충격을

주어, 8월 말에 그의 신경과 뇌에 문제가 발생한다.

 

1849년, 한 해 전에 시작되었던 아버지 카를의 건강이 악화되며 그는 결국 뇌연화증으로 7월 30일에

사망한다. 몇 달 후에 남동생이 사망한다. 1850년,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친할머니의 결정에 따라

니체와 여동생을 데리고 나움부르크naumburg로 이주한다. 그녀는 그 곳에 많은 친지들이 살고

있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니체는 그를 평범한 소년으로 교육시키려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 소년 시민학교knaben-brgerschule에 입학하여 그와 비슷한 연령층이었던

핀더w. pinder, 크룩g. krug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니체는 곧 그만둔다.

아마도 아버지와 동생의 잇단 죽음, 먼 곳으로의 이사,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 과정 등이 빚어낸

니체의 불안한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1851년, 핀더 및 크룩과 함께 종교, 라틴어, 그리스어 강의를 행했던 칸디다텐 베버(kandidaten weber

라는 사설 교육기관에 들어간다. 크룩의 집에서 니체는 처음으로 음악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니체에게 피아노를 선물하면서, 니체는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1853년, 돔 김나지움domgymnasium에 입학하여 대단한 열성으로 학업에 임한다. 1856년, 이때 그는 이미 작시와 작곡을 시작한다.

할머니가 사망한다. 1858년, 14세 때 나움부르크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가야 하는 추어 포르테(zur pforte)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철저한 인문계 중등교육을 받는다. 그는 고전어와 독일 문학에서 비상한

재주를 보이고 작시도 하고, 음악 서클을 만들어 교회 음악을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 관심과 재능도

보인다. 1859년, 도이센p. deussen과의 친분이 맺어진다. 게르스도르프<c. v. gersdorff>가 포르테에 

들어온다. 1862년, 「운명과 역사fatum und geschichte」라는 나중의 사유에 대한 일종의 예견서

같은 역할을 하는 주목할 만한 논문을 작성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문학적 계획을 세운다.

 

이렇듯 니체의 창조적 삶은 이미 그의 소년 시절에 시작된다. 그렇지만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

치밀한 분석 능력과 인내를 요하는 고전어에 대한 재능, 그의 문학적 능력 등에도 불구하고 재주꾼

니체는 행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 소년의 눈에는 불협화음적인 그의 가정의

모습이 비쳤다. 아버지의 부재와 여성들로 이루어진 가정, 이 가정에서의 친할머니의 위압적인

중심 역할과 어머니의 불안정한 위치 및 이들의 갈등 관계, 가정 내에서의 불안정한 위치의

심적 대체물로 나타난 니체 남매에 대한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 본능 등으로 인해 니체는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니체는 아버지와 가부장적 권위, 남성성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 『이 사람을 보라』라는 장년의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니체의 아버지에 대한 평가나

자신의 운명을 아버지의 운명과 동일시하고 있는 점,) 자신의 친구인 크룩과 핀더를 소개한 글에서

보이는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강조ㆍ편중된 묘사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니체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소년 니체의 동경의 대상이 된 남성상은 그의 주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이런 동경의 좌절로 인해 니체는 고향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니체 전기 작가들 중에는 이런 좌절이

모든 권위에 대한 니체의 적대심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신에 대한 적개심 및 신의 부재를 니체에게

선언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즉 아버지에 대한 추구가 가부장적 권위의 종교적 정점인

 신에 대한 추구를 하게 만들었고, 니체에게 응답하지 않는 신은 그에 의해 결국 부정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니체의 신의 부정을 지나치게

개인적-심리적인 면으로만 환원시키는 것으로서 신의 죽음이 갖는 형이상학적ㆍ도덕적 의미를

간과하는 결점을 갖지만, 니체의 정신적인 고향의 부재, 정신적 방랑을 성장 환경을 배경으로

심리적으로 해명하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다. 심적 좌절과 함께 소년 니체는 여러 가지 육체적 고통을

겪기 시작한다. 나중에 니체를 괴롭히며, 그에게 방랑자적 생활을 하게 만들었던 병증들의 모든 징후가

이 시기에 이미 나타나며, 특히 빛에 예민한 눈과 위염에 결부된 두통에 그는 시달리기 시작한다).

1864년, 추어 포르테의 김나지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수학과 헤브라이어, 미술은 예외).

1864-1865년, 겨울 학기 본bonn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 문헌학 공부를 시작하며, 예술사 강의도

수강한다. 도이센과 함께 프랑코니아frankonia라는 서클에 가입하여 사교적이고 음악적인 삶을

살게 된다. 한 학기가 지난 후 신학 공부를 포기할 결심을 한다. 아마도 신약성서에 대한 문헌학적

방법론에 토대를 둔 비판적 시각이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학 포기 의지로 인해 어머니와의

첫 갈등을 겪은 후 저명한 문헌학자 리츨<f. w. ritschl>의 강의들을 수강한다.

 

1865-66년, 겨울 학기에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leipzig로 학교를 옮긴다. 라이프치히에서

니체는 리츨의 지도를 받은 고전 문헌학 공부와 쇼펜하우어의 발견에 힙입어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한다. 늦가을에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니체에게 철학적 사유로의 입문을 가능하게 한다. 그의 염세주의 철학에 니체는 한동안 매료되었으며,

『비극의 탄생』은 그의 자극 하에서 씌어진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에 의거한 세계 해석은

 니체에게 물자체와 현상을 구분하는 칸트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시절을 맞게 된다. 소년 시절에 나타났던 병증들이 악화되고

카타르<katarrh>와 류머티즘, 그리고 격렬한 구토에 시달린다.

그리고 매독으로 인해, 두 명의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기도 한다.

 

1866년, 로데e. rhode와 친교를 맺는다. 테오그니데아theognidea와 고대 철학사가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diogenes laertius>의 자료들에 대한 문헌학적 작업이 시작된다.

디오게네스에 대한 연구는 표창을 받고, 이 일과 리츨의 니체에 대한 높은 평가는 문헌학자로서

니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1867년, 디오게네스 논문이

「문헌학 라인 박물관rheinische museum fr philologie」(이하 rm), xxii에 게재된다.

그해 1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전통에 대한 강연을 한다. 호머와 데모크리토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칸트 철학을 피셔k. fischer의 책을 통해 접한다. 1867년, 나움부르크에서

군대 생활을 시작한다. 1868년, 여러 편의 고전 문헌학적 논평을 쓰고 호머와 헤시오드에 대한

학위 논문을 구상한다. 이런 활발한 문헌학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헌학이 자신에 맞는가에

대한 회의를 지속적으로 품는다. 이 회의는 그리스 문헌학에 관계되는 교수자격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계획하던 니체에게 때로는 칸트에 관계되는 철학박사논문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하기도 하고(주제: 칸트 이후의 유기체 개념<der begriff des organischen seit kant>,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랑에g. lange의 『유물론의 역사geschichte des materialismus』를 읽게

하기도 하며, 화학으로 전공을 바꾸겠다는 의사 표현을 하게도 한다.

 

이 다양한 계획들은 리츨이 1869년 초에 박사학위나 교수자격논문 없이도 니체가 바젤(basel) 대학의

고전 문헌학 교수직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포기된다. 3월, 말에서 떨어져 가슴에 심한 부상을

입고, 10월에 의병 제대를 한 후 라이프치히로 다시 돌아간다. 11월 8일, 동양학자인 브로크하우스

<h. brockhaus>의 집에서 바그너를 처음 만난다. 그와 함께 쇼펜하우어와 독일의 현대 철학, 그리고

오페라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바그너라는 인물은 그에게 깊게 각인된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니체의 첫번째 철학적 작품은 「목적론에 관하여zur teleologie」이다. 1869년 4월,

스물네 살의 니체는 바젤 대학에 고전어와 고전문학의 촉탁교수<außerordentlicher professor>로 위촉된다.

이 교수직은 함부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키이슬링<a. kiessling>의

후임 자리였고, 니체의 초빙은 물론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바젤 대학의 그 당시 관행으로 보면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바젤 대학의 교수 초빙은 저명한 학자의 추천과 학문적 연구 업적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니체 외에도 젊은 학자들이 교수로 초빙되었던 관례가 있었다.

리츨은 니체라는 젊은 학자의 자질에 대해 묻는 자신의 제자 키이슬링에게 니체는 자신이 만났던

가장 유능한 문헌학도이며, 독일 문헌학계를 이끌어 갈 인물이라고 적극 천거하고, 우제너 등의 다른

저명한 문헌학자들도 니체에게 우호적인 의견을 표명한다. 니체는 이렇게 해서 바젤로 간다.

그의 임무는 바젤 대학 교육학과 최고학년과 바젤 시립고등학교 1학년의 그리스어 수업이었다.

5월 28일, <호머와 고전 문헌학homer und die klassische philologie>에 대한 강연을 한다.

 

강연 전인 5월 17일, 트립센에 머물던 바그너를 방문한다. 바그너는 니체와의 첫만남에서

그를 초대했었으며, 아직 이혼하지 않았던 코시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바그너라는 거장에 대한 열광과

코시마에 대한 친애, 그리고 바그너 측의 기꺼운 응대 때문에 그는 이 시기부터 자주 트립센에 머물게

된다. 라이프치히 대학은 rm에 발표된 그의 논문과 디오게네스 라테리우스의 자료들에 대한

그의 연구를 인정하여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부르크하르트<j.burckhardt>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와 교분을 맺는다. 스위스 국적을 신청하지 않은 채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한다.

 

 

고전 문헌학자와 정치적 바그너주의자(1870-1876)

  

바젤에서 그는 바그너뿐 아니라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 신학자 오버벡f.< overbeck>, 종교사학자이자

법사학자인 바흐호펜, 동물학 교수인 뤼티마이어 등의 유능한 학자들과 개인적이고도 학적인 교류를

하게 된다. 그러나 바젤에서의 삶은 그에게 또한 여러 상처를 남긴다. 즉 바그너와의 긴장된 관계,

철학 교수직에 대한 소망의 좌절, 그의 사회적 역량에 대한 실망, 『비극의 탄생』에 대한 냉소적 시선과

쏟아지는 비난, 문헌학자로서의 명예 실추, 리츨의 실망, 건강의 악화 등은 니체를 결국 바젤을 떠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시기에 철학적 글들이 본격적으로 씌어지기 시작하며, 주요 작품으로는

「언어의 근원에 대하여vom ursprung der sprache」(1869/70),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die dionysische weltanschauung)」(1870), 「수사학rhetorik」(1874) 등을 들 수 있다.

1870년 1월과 2월, 그리스인의 악극 및 소크라테스와 비극에 대한 강연을 한다. 이 두 강연은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에 대한 미출판된 글과 함께 『비극의 탄생』의 핵심 요소가 된다.

오버벡을 알게 된다. 4월, 정교수가 된다. 7월, 독일-프랑스 전쟁에 자원 의무병으로 참가하기 위해

대학으로부터 휴가를 얻는다. 그렇지만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9월에 의병 제대하여

10월에 바젤로 돌아간다. 1871년, certamen quod dicitur homeri et hesiodi를 출판하고,

새로운 rm (1842-1869)의 색인을 작성한다. 2월, 『비극의 탄생』의 집필을 끝낸다. 그전에 니체는

바젤 대학의 철학 교수였던 타이히뮐러g. teichm-ller의 후임 자리를 신청하지만, 바젤 대학 당국은

이를 거절한다. 자신의 친구인 로데를 자신의 후임으로 바젤 대학에, 그리고 나중에는 7월과 8월에는

취리히 대학에 추천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1872년, 니체의 첫 철학적 저술인 『비극의 탄생』이

출판된다. 그리스 비극 작품의 탄생과 그 몰락에 대해서 쓰고 있는 이 작품은 독창적이고도 풍부한

사유를 저장하고 있으며, 니체 후기의 여러 사유들로 향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바그너가 <독일의 희망의 중심>이며, 독일 문화의 <센세이셔널한 전환점>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gt, 서문), 바그너는 건강하고 원시적인 힘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그의 음악에서

독일 신화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점(gt, 23쪽)등 때문에 이 책은 바그너의 기념비적인

문화 정치를 위한 프로그램적 작품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이렇게만 평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니체의 독창적이고도 철학적인 초기 사유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첫 예는 예술가-형이상학artisten-metaphysik으로, 이것은 니체가 이 시기에 바그너 영향권하의

쇼펜하우어적 염세주의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예술가-형이상학은, 하나의 병증인

실천적 염세주의를 거부하기 위해 니체가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인간의 삶을 비도덕적으로 근거짓기 위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예술적 정당화를

시도한다. 예술은 삶의 고통을 치료하는 치료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즉 인간의 예술적 능력은

인간 삶의 고통과 부정적인 면을 아름답게 만들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구체적인 내용은 3장 1-2 참조). 물론 니체는 현존재와 세계에 대한 정당화가 아닌 긍정 가능성 제시를

자신의 과제로 삼으면서, 즉 삶의 고통과 괴로움을 삶의 조건 중의 하나로 긍정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이 입장을 곧 포기해 버린다. 두번째 예는 그리스인의 예를 통한 신화의 포기 불가능성

제시이다. 그 일환으로 니체는 문화를 보호하는 신들인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을 변증법적 관계로

끌어들인다. 물론 이런 착상의 자극은 트립센에서 주어지지만,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구별은 이미 셸링schelling이 하고 있으며, 이 구분은

헤겔과 바그너에게도 전해진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지나치면 혼란과 타락이 그리고,

아폴론적인 것이 지나치면 주지주의가 득세한다고 하는 점, 이 두 신으로 표현된 미적 관계,

디오니소스적 도취 상태와 아폴론적 꿈의 세계, 음악을 하는 소크라테스라는 형상으로 표현되는

이 두 요소의 서로를 요청하는 관계, 그리스 비극이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에 의해 몰락한다는 점 등은

니체의 독창적이고도 철학적인 사유이다. 비극에 대한 니체의 이런 사유는 곧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니체의 동료 문헌학자들은 『비극의 탄생』을 두고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스승 리츨은 이 책에 대해 <재간에 찬 야단스러움>이라고 극도의 실망을 표현했고, 니체를

바젤 대학에 추천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인 우제너는 <이와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은 학문적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평을 내리고 있다. 또한 니체의 포르테 후배이자 문헌학자이며, 니체에게

우호적이었던 빌라모리츠-묄렌도르프u. v. wilamoritz-mllendorf는 니체의 완벽하지 못한 문헌학적

지식과, 역사적인 자료나 문헌들을 취급할 때의 미숙함과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발표한다.

이로써 문헌학자로서의 니체의 이름은 실추되어 버린다. 반면에 바그너와 오버벡 그리고

부르크하르트 등의 비문헌학자들은 이 작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특히 바그너는

이 작품에 대한 열광적인 편지를 니체에게 보낸다. 바젤에서의 첫해에 니체는 자신의 강의에 진지하게

임했고, 그의 수준 높은 강의는 여러 우수한 학생들에게 선호되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유고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문헌학적 문제와 문헌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전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자신의 야망이 문헌학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공적으로 말하고 있다. 『비극의 탄생』이 남긴 여파로 상처받았던 니체는

바그너의 이념을 전파시키는 데에 전념할 생각을 하며 바이로이트에서 1876년에 벌어질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휴직할 생각까지도 한다. 5월에는 실제로 바이로이트로 간다. 그 이전에 그는

1월에서 3월 사이에 5개의 강연 「우리의 교육 시설들의 미래에 대하여<uber die zukunft unserer

bildungsanstalten>」를 하는데, 이 강연의 배후에는 문헌학자가 아니라, 독일의 정치적 교육가가

되기를 원하는 니체의 소망이 놓여 있다. 그 후 니체는 철학적 방식으로 새로운 문화의 조건들에 대해

물으며, 이 조건을 찾기 위해 초기 그리스의 문화로 항상 되돌아간다. 그는 초기 그리스를 문화적

자기 창조의 전형으로, 독일의 모범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이 의도에 의해,

1873년까지의 여러 소고들과 유고들이 작성된다(예를 들면 「씌어지지 않은 다섯 권의 책을 위한

다섯 서론fnf vorreden fr die fnf ungeschribenen bcher」,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유가들에 대한

판단의 변화를 일으킨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die philosophie im tragischen zeitalter der griechen」,

그리고 바이로이트 계획에 대한 글인 「독일인에 대한 경고mahnruf an die deutschen」).

이외에도 언어와 진리에 대한 니체의 초기 철학적 사유를 결집한 아주 명료한 텍스트인

「도덕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die wahrheit und lge im aussermoralischen sinne」가

작성된다. 이 글은 게르버g. gerber의 『예술로서의 언어die sprache als kunst』의 첫 권(1871)을

읽고 그것의 영향하에 형성된 언어철학적 입장을 제시하며, 여기서 표현된 입장은,

니체의 후기 사유에까지도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 글에서 보이는 18세기 중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의 낭만주의적 언어철학과 니체와의 유사성은 게르버에게 미친 훔볼트의 영향

때문이다. 니체 자신은 훔볼트나 헤르더 혹은 하만을 직접 읽지는 않았다.

 

1873년, 다비드 슈트라우스에 대한 첫번째 『반시대적 고찰』이 발간된다. 여기서 니체는 자신을

정치 저술가 혹은 정치 교육가로서 이해하고 있으며, 지배적인 시대 정신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화의

지반을 준비하려고 한다. 원래 니체는 이 책을 위해 10개 내지 13개의 논문들을 쓸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4개의 주제들로 이 책을 구성한다. 다비드 슈트라우스에 대한 1권, 삶에 있어서 역사가 지니는

유용함과 단점에 관한 2권,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다룬 3권은 원래의 의도인 독일인들에 대한

경고에 충실하고, 바그너와의 문제를 다룬 4권에서는 바그너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행해진다. 물론

이 네번째 책에서 제시된 바그너상은 일시적인 것이다. 첫번째 글에서 니체는 자신이 비판가 역할로는

만족하고 있지 못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제 새로운 것을 창시하고 알리는 자이고 싶어한다.

여기서 슈트라우스는 니체에 의해 <교양 있는 속물bildungspfilister>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우스갯거리가 된다. 교양 있는 속물은 학문과 사회의 지속적인 진보와 인간의 선을 믿으며,

개인적 삶 안에 있는 비극적인 모순을 부정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자로

이해된다(ds, 8쪽). 철학은 진정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의 예비 절차 역할을 하며, 다양한 삶의

현상들은 문화 안에서 미적 통일을 이루는 것으로 제시된다. 문화에 대해 삶의 치장으로서가 아닌

철학적 정의를 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반년 후에 씌어진 두 번째 『반시대적 고찰』에서 이루어진다.

 

이 글, 즉 「삶을 위한 역사의 효용과 불이익vom nutzen und nachtheil der historie fr das leben」에서,

니체는 이제 더 이상은 바그너 사도나 비판가가 아니라, 자율적인 철학 교사로서 등장한다.

교양 있는 속물에 대한 비난은 이제 역사적 학문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지만, 그렇다고 니체가 역사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을 <망각할 수 없는 동물>로, 역사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말한다. 1872년 초에 이미 바이로이트 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있던 바그너는

이 저술에 옹호적이기는 했지만, 양자의 관계는 점차로 냉랭해지게 된다. 니체 전기 작가들은 니체와

바그너 사이에 형성된 냉각 기류의 원인을 다음처럼 말한다. 먼저 바그너 측에서 보면 바그너는

니체라는 젊은 교수를 그가 계속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재능 있고 학적인 신봉자, 자신의 일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보았고, 이런 이유로 그는 니체를 옆에 두고 싶어했다. 그렇지만

이 젊은 교수는 이런 예속 관계를 받아들여 단순한 바그너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고유한 과제를 수행하고 독립적인 위치에서 바그너라는 거장과 관계를 맺는다. 니체는

더 나아가 바그너의 민족주의적 성향, 프랑스인과 유태인에 대한 경멸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드러낸 바그너의 <파르시팔>은 그리스도교의 이념에 굴복해 버린 바그너라는

상을 그에게 각인시킨다. 여기에 더하여 니체 자신의 관심이 쇼펜하우어로부터 볼테르로 옮겨간다.)

 

바그너 서클에 의해 그의 <독일인에 대한 경고>가 거부되면서, 바이로이트 축제에 기여하고 싶었던

니체의 염원에 제동이 가해진 것 역시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 시기에 니체의 독서는 자연과학적

영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여, 그는 바젤 대학 도서관에서 물리학과 화학에 대한 수많은 책들을

빌려간다. 자연과학 이론에 대한 이 시기의 독서는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개념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육체적 고통은 강력해지고, 무엇보다도 구토를 동반한 편두통이 심해진다.

1874년, 『비극의 탄생』의 2판과 『반시대적 고찰』의 2, 3권이 출간된다.

4월에 「우정에 바치는 찬가hymnus auf die freundschaft」라는 4개의 손가락을 위한 피아노곡을

작곡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사유가에 대한 니체의 1873년의 강의를 들었던 레p. ree와의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10월에 출간된 세번째 『반시대적 고찰』인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als erzieher」에서는 니체가 바그너와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글의 중점은 니체가 다시 <문화의 재탄생>에 대한 희망을 거는 철학적 <천재>,

<영웅적인 삶의 이력>을 갖는 독특한 개인에 놓여 있으며, 바그너라는 작곡가가 아니라, 니체 자신이

염두에 두어진다. 1875년에 쓰인 네번째 『반시대적 고찰』인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in bayreuth」(1876년에 출간됨)는 겉으로는 바그너를 위대한 개인으로 형상화하지만,

그 행간에는 니체 자신의 청년기적 숭배를 그 스스로 이미 오래전에 멀리해 버린 일종의 기념물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니체는 여기서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숨기고, 위대한 일을

기획하며 많은 빛을 주는 바그너라는 거장의 뒤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그의 굉장한 칭송의 노래 안에 들어 있는 비판적인 톤은 나중에 나타나는 바그너에 대한

그의 굉장한 비난의 서곡과도 같다. 사실 니체는 네번째 반시대적 고찰을 <우리 문헌학자들>이란

제목으로 쓰려고 계획했었고, 그 스스로 바그너라는 제목이 붙은 이 4부를 출판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겼었다. 어쨌든 니체와 바그너의 냉각 관계를 염려하던 바그너 신봉자들은 이 글의 행간을 읽지

못하고 니체의 비판적 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 글을 특별한 안도감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출판된 지 한 달 후, 즉 1876년 8월 바이로이트 축제의 마지막 리허설이 이루어질 때 니체는

그 곳에 있었지만, 그는 바그너에 대한 숭배 분위기를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단지 딱 한 번 「니벨룽겐의 반지」의 리허설에 참석했을 뿐이며,

축제에는 참여도 하지 않은 채 바이로이트를 떠난다.

 

니체는 오버벡의 『옛 교회의 역사에 관한 연구studien zur geschichte der alten kirche』와

레의 『심리학적 관찰들psychologische beobachtungen』을 관심 있게 읽는다.

겨울 학기 시작 무렵에는 쾨젤리츠h.kselitz라는 젊은 음악가가 바젤로 찾아와 니체와 오버벡의

강의를 듣는다. 그는 니체의 가장 충실한 학생 중의 하나였고, 니체의 절친한 교우가 된다.

니체가 페터 가스트peter gast라는 예명을 지어 준 그는 니체 사후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함께

『힘에의 의지』라는 편집본의 편집자가 된다. 이 시기에 니체의 건강은 눈에 띄게 악화 일로를

걷게 된다. 바이로이트로 가기 전에 이미 그는 자신의 강의 시간을 줄였었고, 더 이상 강의가

불가능하게 되자 10월 초에는 1년 휴가를 얻어 레와 함께 이태리로 요양 여행을 간다. 10월,

소렌토에서 바그너 숭배자였던 모이센부르크malwida von meysenburg의 손님으로 머무르면서

그 곳에 와 있던 바그너와 코시마를 방문한다. 6월과 7월,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의 다른 잠언들을

낭독하여 페터 가스트에게 받아 적게 하고, 이것은 나중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일부가 된다.

 

 

비판가와 심리학자(1876-1882)

 

이 시기에 니체는 자신을 계몽가와 폭로 심리학자로서 이해한다. 바그너 숭배자 겸,

새로운 독일 ,문화의 예언가로부터, 가차없는 폭로를 행하는 심리학자로의 변화는

바그너와의 결별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는 이제 음악으로부터 철학으로, 예술가-형이상학으로부터 철학적 인식자로 전환한다.

니체를 괴롭히던 심한 편두통, 그의 만성적인 위장 장애, 정상적인 빛조차도 견뎌내지 못하는 그의 눈은

니체를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로 이끌고, 그의 건강은 결국 대학 교수직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된다. 그의 이런 육체적 고통은 그를,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신선한 공기와 온화한

기후를 찾아다니는 방랑자로 만든다. 그의 사회적 삶은 꼭 필요한 사교와 편지 왕래로 제한된다.

이런 고독한 방랑 생활중에 그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킨 새로운 사건은 살로메rou andreas-salom와

의 길지 않은 만남이었다. 살로메는 나중에 니체에 대한 중요한 책)을 저술하고, 문학적 작업,

심리분석적 작업, 릴케와의 친교, 빈에서의 프로이트와의 만남 등에 의해 유명해지는 인물이다.

니체는 이 재능이 뛰어나고 인습의 굴레를 벗어나 있는 16세 연하의 여성을 1882년 4월,

모이센부르크의 집에서 만나고, 곧 그녀에게 매료된다. 니체와 살로메는 타우텐부르크에서,

니체 여동생의 날카로운 감시를 받으며 정신적 긴장이 맴도는 3주 간의 공동 생활을 한다.

하루 10시간 정도 진행되던 그들 사이의 대화는, 니체에게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것

같다고 회술하게 만든다. 살로메는 니체를 어두운 면을 가진 오래된 산과 같은 인물로,

종교를 창시할지도 모르는 인물로 묘사한다. 니체는 살로메를 역시 연모하고 있던, 친구 <레>를 통해 

그녀에게 청혼을 하지만, 살로메는 니체라는 풍부한 정신의 소유자와 정신적 교류를 즐길 뿐이었다.

 

그의 여동생은 이 둘의 만남과 교제에 대해 적의 어린 시선을 보내고, 살로메라는 인물에 대해서

<완벽하게 비도덕적>이고, 니체의 철학이 <인간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비난한다.

이 둘의 관계에 적의를 품은 여동생의 계략에 의해 니체는 살로메와 레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결국 이들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11월 경, 니체는 자신의 삶이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계속 바뀌는 체류지에서 필요한 만남 이외의 일체의 사교 생활을 중단한다.

방랑과 고독 그리고 긴 투병 생활 속에서도 그는 아주 많은 작품을 남긴다.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원고가 씌어진다. 그는 이제 바그너라는 인물에 집중된

낭만적-국가적인 문화 이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자신을 계몽가로서 그리고 심리학자로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3월, 제네바에 있는 볼테르의 집을 방문하고 그의 정신을 잠언에 수록하려고 한다.

1877년, 소렌토에서의 강독 모임에서 투키디데스, 마태복음, 볼테르, 디드로 등을 읽으며, 8월까지

요양 여행을 한다. 9월, 니체는 바젤로 돌아와 강의를 다시 시작한다.

 

가스트에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내용을 받아 적게 한다. 이 텍스트는 다음해 5월까지는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12월 3일에 출판사로 보내진다. 코시마로부터 마지막 편지를 받는다.

1878년 5월, 바그너가 볼테르에게 헌정된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의 1부를 읽었을 때, 그는

니체의 변화를 명백하게 인지한다. 니체가 더 이상 자신의 신봉자가 아니고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가는 철학자임을 바그너가 받아들이게 되면서 둘 사이의 열광과 갈등 그리고 좌절로 점철되는 관계는

끝이 난다. 바그너는 니체에게 깊이 실망하여 니체라는 이름을 사적으로 언급하는 것도 꺼리고,

8월의 ≪바이로이트 블래터bayreuter bltter≫에는 니체를 은근히 공격하는 바그너의 글이 실린다.

니체는 니체대로 바그너가 서명을 하여 헌사한 악보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12월 말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2부 원고가 완결된다.

 

자유 정신으로의 이행을 시도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i, ii권에서 니체는

건설의 전 단계인 파괴의 시기로 진입한다. 영혼을 드러내는 심리학자로서 그리고 계몽가로서, 그는

새로운 가치와 더 높은 삶의 조건들을 제시하고 싶어한다. 이 과제를 위해, 전승된 가치와 덕목들에

대한 비판적 파괴와 해체 작업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작업은 그에게 그것들로부터의 결정적 이탈을

가능하게 한다. 바그너 서클에서 보유되던 독일 후기 낭만주의에 대한 공격은, 바로 편견 없는 비판을

하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독립적인 자유 정신에 의해 행해진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문체상의 변화를 보이는 작품이다. 니체는 파괴 및 해체 작업을

아포리즘적 문체를 사용하여 수행한다. 니체의 아포리즘적 문체는 쇼펜하우어에 의해 번역된 프랑스

도덕주의자들의 문체 외에도 고대의 센텐츠 문학, 쇼펜하우어의 에세이적 논문에 사용된 문체 등에서

영향받고 있다. 1879년, 강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3월 19일, 니체는 강의를

중단하고 제네바로 휴양을 떠난다. 5월에는 바젤 대학에 퇴직 희망을 밝히고 이것은 받아들여진다.

9월에 나움부르크로 오기까지 비젠wiesen과 모리츠st. moritz에 머무르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ii권 중의 한 부분인

「혼합된 의견 및 격언들vermischte meinungen und sprche」이 발간된다.

모리츠에서 보낸 여름 동안 ii권의 다른 부분인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der wanderer und sein schatten」가

집필되고 1880년에 발간된다. 1880년 1월에 니체는, 이미

『아침놀』을 위한 노트들을 만들고 있었으며, 이 시기에 특히 도덕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독서를 한다.

1873년에 출간된 오 버벡의 『우리의 현대 신학의 그리스도교 정신에 대하여uber die christlichkeit unserer heutigen theologie』를 읽는다. 가스트와 함께 3월, 베네치아로 간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

11월에 제노바로 간다. 1881년, 『아침놀』의 원고들이 가스트에 의해 옮겨 적혀져, (다른 니체의 작품

들이 그러하듯) 7월 l일에 출간된다. 7월 초에 처음으로 실스마리아sils-maria로 간다.

실스마리아에서의 한 소풍길에서 영원 회귀에 대한 구상이 떠올랐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0월 1일, 제노바로 다시 돌아가고 건강 상태와 그의 시력은 더욱 악화된다. 11월 27일, 그는

처음으로 비제의 「카르멘」을 보고 감격한다. 후에 니체는 이 작품을 바그너의 음악과 맞서는

음악의 전형으로 제시한다(『바그너의 경우』 1. 2 참조). 『아침놀』은, 신의 황혼 후에 따르는

인간의 아침놀이다. 자신의 힘을 비판적으로 시험하고 도덕적인 편견들을 던져버려 새로워진,

자신에게 향하는 힘을 의식하는 인간의 아침놀이다. 여기서 니체는 도덕 비판을 강화하며,

인간 삶의 조건으로서 힘의 느낌을 제시한다. 도덕은 비도덕적일 수도 있고(m, 97), 도덕은

동물에게도 이미 작용하고 있는 자기 동화와 자기 축소(m, 26)의 본능으로부터 탄생한다.

도덕은 인간을 노예적인 복종으로 이끌어 모든 위대한 것들을 폭압한다. 『아침놀』에서 제시되는

힘의 느낌은 나중에 구체화되는 힘에의 의지를 준비하는 단계이다.

1882년 시작 무렵에 니체는 『아침놀』의 뒤를 이을 것들을 쓰기 시작하여, 1월에 가스트에게

첫 세 부분을 보낸다. 이것들은 이후에 씌어진 4부와 함께 8월 말에

『즐거운 학문die frliche wissenschaft』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

3월 말에는 제노바를 떠나 메시나messina로, 배 여행을

하며 그 곳에서 4월 20일까지 머문다. 『메시나에서의 전원시idyllen aus messina』에 대한 소묘들은

 이 여행의 며칠 전에 구상되었다. 이것은 니체가 잠언적인 작품 외에 이때에 유일하게 발표한 시가로서

 ≪국제 월간지internationale monatsschrift≫ 5월호에 실린다. 4월 24일에 메시나를 떠나,

로마로 가고 모이센부르크의 집에서 살로메를 소개받는다. 5월 중순, 타우텐부르크에서 여동생과

살로메와 같이 보낸다. 27일에 살로메는 떠나고 니체는 나움부르크로 되돌아온다.

 

10월, 라이프치히에서 레와 살로메를 마지막으로 함께 만난 후, 11월 중순부터 제노바를 거쳐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전전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첫 부분이 이 시기에 구상되기 시작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실험적 철학함experimentales philosophierens의 분위기와 방법론을

보여준다. 인식자와 실험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모든 것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명랑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명랑성은 모든 것의 무토대성과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에 근거하며, 이 명랑성은 여기서 처음 말해지는 신의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그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에는 니체 후기 철학의 모든 주제들이 이미 들어 있다. 진리 비판이 격렬해지고,

비도덕주의가 명료하게 드러나며 힘에의 의지, 가치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 그리고

영원 회귀ewige wiederkehr des bleichen가 암시된다. 니체의 지속적인 휴양 여행,

알프스의 신선한 공기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온화한 기후도 그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한다.

 1881년에 실스마리아를 발견한 이후 그는 매년 여름 이 곳으로 되돌아오며, 겨울이 시작되면, 즉시

남부 이탈리아로 도망간다. 그의 삶은 모든 면에서 아주 절제되고 검소했다. 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둘 때

신청한 최소한의 연금은 모두 그의 작품의 출간을 위해 절약되었다.

그는 아주 제한된 사람들과의 교제를 했을 뿐이며, 이 교제 방식이 살로메와의 만남으로 인해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만, 다시 그는 고독한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차라투스트라의 철학(1883-1886)

 

고독한 삶 속에서 니체가 자신의 동반자로 삼은 것은 차라투스트라였다.

1883년 여름의 <완전히 청명한 날들의 연속>에 힘입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가

씌어진 후, 아주 빠른 속도로 3부까지 씌어진다. 1884년 1월에 니체는 4부를 완성하면서,

자신의 최고의 책을 썼다고 믿었다. 그의 건강은 비교적 좋았고, 정신적인 고조를 경험하면서

그의 사유는 정점에 올라 있었다. 그는 이 책과 함께 자신의 철학적 과제가 수행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책을 디오니소스적 창조의 힘이 행한 최상의 행위라고 여기며,

단테와 괴테 그리고 셰익스피어도 넘어섰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책의 문학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한다.

 

차라투스트라라는 페르시아 현자의 문학적 부활을 통해 니체는 자기 극복의 고통과 기쁨을 갖는,

자유 정신과 육체와의 통일이 마련하는 건강한 미래의 인간을 제시한다. 이 미래의 인간은 상승하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자신 안에 있는 모순적인 면들을 창조적으로 연결하는 이상적인 삶의

비전을 제시한다. 한편 이 시기에 여동생 및 어머니와의 화해와 다툼이 지속된다.

여동생이 반유태주의자이고 바그너 숭배자이며, 종족주의적 원칙에 따라 파라과이에 독일 식민지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던 푀르스터b. frster와 약혼을 결정하면서 잠시 회복되었던 여동생과의

불화는 다시 심화된다. 동물학자이고 프로이트의 친구였으며, 후에 프로이트에게 니체의 사유을

소개하는, 철학에 관심 깊은 파네트f.paneth를 만난다. 1885년, 5월 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의 첫 샘플을 베네치아에서 오버벡에게 보낸다.

5월 22일에 행해진 여동생의 결혼식에 니체는 참석하지 않는다. 6월 7일부터 9월까지

실스마리아에서 보내고, 그 후 나움부르크, 뮌헨, 플로렌스를 경유하여 11월 11일, 니차로 온다.

실스마리아에서 보내는 여름 동안 『힘에의 의지』라는 책을 쓸 것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저술 제목으로서 <힘에의 의지>는 1885년 8월의 노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후에 따르는 노트들에는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으로 체계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을 서술하겠다는

계획들이 등장한다. 이 계획은 여러 번의 변동을 거쳐서 니체 자신에 의해 1888년 8월에 결국 포기된다.

 

 1886년, 『선악의 저편』이 『차라투스트라』 4부가 그랬듯 역시 자비로 8월 초에 출판된다.

늙은 페르시아 현자의 입을 통한 문학적 예언은 이책과 함께 끝을 맺고, 니체는 다시 개념적 사유로

돌아온다. 그의 관심은 이전의 작품들을 다시 발간하는 것에 집중되고, 그는 이전의 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서문을 쓰기 시작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서문, 『비극의 탄생』을 위한

「자기 비판의 시도versuch einer selbstkritik」라는 서문, 『아침놀』과 『즐거운 학문』의 서문들이

작성된다. 이 작업으로, 그는 자신의 과거를 다시 불러와 확대된 사유 지평을 통해 구제하고 싶어한다.

그가 불러온 과거는 새로운 창조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 창조적 분위기에서 씌어지는 유고들에서는

유럽 허무주의의 도래를 가능케 하는 가치 전도의 과정, 허무주의의 극복 수단으로서의

영원 회귀 사유와 도덕 비판, 기존의 인식론에 대한 비판 및 그 대안으로서의 관점주의적 인식

이론perspektivismus, 실체 및 형이상학의 발생 근원에 대한 심리적 분석과 그 대안으로서 생기 존재론

geschehensontologie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비극의 탄생』의 새로운 서문과 이 서문들의 스케치에서 밝혀지듯 비극의 탄생의 주제들도

청년기의 예술가-형이상학적 경향을 넘어서서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양태를 갖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색채를 부여받기 시작한다. 『선악의 저편』은 다시 아포리즘 양식을 사용하여 씌어지고,

니체는 자신을 자유 정신으로 재등장시킨다. 이 저술에서 니체는 삶의 충동력이 <자기 보존>이나

<자기 향유> 충동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내부로부터 나오는 힘의 강화를 원하는 충동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유태인에 대한 독일인의 원한 감정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유태인에 대한 야유가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유태인의 업적과 지성에 대한 인정과 그들에 대한

공정한 판결을 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런 노력은 그의 유고에서도 수없이 발견된다.

 

니체를 반유태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이 무리수를 두는 것이라는 점은 이런 여러 증거들 외에도

그의 개인적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의 여동생이 반유태주의자와 결혼했을 때, 니체의 반응은

가까스로 회복한 여동생과의 관계를 단절해 버릴 정도로 격노에 가까왔다.

정치적으로 정형된 반유태주의자들을 독일에서 <가장 뻔뻔스럽고 멍청한 집단>)으로 니체는 평가한다.

『선악의 저편』은 이외에도 니체의 후기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들의 열쇠 역할을 한다.

즉 힘에의 의지의 생성하는, 그리고 평가하는 성격뿐 아니라, 『차라투스트라』에서 말해진

위버멘쉬와 영원 회귀를 이해하는 도입구 역할을 한다.

 

  

비극적 종말(1887-1900)

 

이 시기는 절망적인 투병 생활 속에서 지속된 그의 지적 실존의 마지막 시기이다.

1887년 초에 악화된 그의 건강 상태는, 6월에 살로메의 결혼 소식을 접하면서 우울증이 겁쳐

심각해진다. 이런 상태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심할수록 의식은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노라고

그 스스로 말할 정도로 그의 의식은 명료했다. 이제 그의 사유가적 의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로는 잘 조직되고 정합적인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싶어한다. 니체의 이런 사유가적 의지는

부정과 파괴가 아니라, 긍정과 건설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한 철학자의 지적 실존을 규정한다.

이 철학자는 이제 변화하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모든 면을 유의미한 것으로 그리고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기를 원한다. 1887년 6월, 『아침놀』과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재판이 출판된다. 니체는 로데가 그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하이네에 대해 불경스런 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와의 우정 파기를 선언한다.

6월 12일 이후 실스마리아에서 『도덕의 계보』를 집필하여 11월에 자비 출판한다.

몇 주 동안의 베네치아 생활에서 니차로 돌아와 문학자이며 코펜하겐의 대학 교수인

브란데스g. brandes의 첫 편지를 받는다(11월 26일). 브란데스는 그의 니체 강의가 아주 성황을

이루었으며, 강의실은 참석자들의 진지한 열정으로 가득 찼었다고 전한다.

 

니체는 브란데스가 차라투스트라를 새로운 정신의 대변자로, 자신의 철학을 <귀족적 급진주의>로

이해한다는 점과 자신에 대한 대중적 관심에 대해 아주 만족스러워했으며, 자신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888년 4월 2일에 떠나기 전까지 니체는

니차에서 <모든 가치의 전도>에 대한 책을 구상한다. 이 책의 일부가 『안티 크리스트』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 7월에는 『바그너의 경우』가 출판사로 보내진다. 6월에 투린을 떠나 실스마리아에서

『우상의 황혼』을 쓴다. 투린으로 다시 돌아가 『이 사람을 보라』를 11월 4일에 끝내고

12월에 출판사로 보낸다. 그 사이 『바그너의 경우』가 출판된다. 『디오니소스 송가』를 포함해

이 시기에 씌어진 모든 것을 인쇄를 위해 보낸다. 니체가 자신의 성숙한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려는

의도로 계획했던 『힘에의 의지』는 1888년 8월 이전까지 계속 준비되었지만, 자신이 허비해 버린

여름날에 대한 니체의 탄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결국 포기되어 버린다. 

이제 그는 <가치의 전도>라는 새로운 제목 하에 그의 주저를 다시 구상한다.

 

1888년 9월 3일, <가치의 전도>에 대한 서문을 쓴다. 이것의 1부를 별다른 고민 없이 출판하려 한다는

 의사를 밝힌 후, 『안티 크리스트』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게 한다. 사실 <가치의 전도>에 대한 구상은

내용 면에서는 『힘에의 의지』 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가치의 전도> 구상으로부터

니체는 『안티 크리스트』 뿐 아니라 『우상의 황혼』도 완성시켜 출판시킨다. 그 나머지는 그냥

유고로 남겨둔다. 이 사실은 『힘에의 의지』라는 책의 저술이 포기된다는 점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그의 여동생과 가스트가 임의적 추출과 고의적 삭제를 통해 편집한

편집본인 『힘에의 의지』를 니체의 철학적 주저라고 볼 수 없다.) 니체의 성숙한 철학은, 오히려

1885년부터 1888년 사이의 유고와 이 시기에 출판된 출판작 전체에 퍼져 있다.) 이 시기 동안

『바그너의 경우』에 대한 부분적으로는 아주 비판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아주 동조적인 반향이 일고,

이 반향에 니체는 『니체 대 바그너』를 가지고 응답한다. 여기서 바그너와 니체는 삶이라는 척도에

의해 대척자antipode로 묘사된다. 바그너의 음악은 <삶의 약화>로 괴로워하는 자들의 생산물이며,

도취와 마비로 도망가는 데카당스의 산물이다. 이에 반해 니체는 삶의 충만에서 고통받는 자로서,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원하고 그래서 삶에 대한 비극적인 통찰과 전망을 원하는 자로 묘사된다.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바그너는 예술로 도망가서, 예술이라는 가상을 통해 삶으로부터 구제받기를

원하는 반면, 니체는 고통스러운 삶도 그 자체로 긍정하며, 그것의 영원 회귀를 바랄 정도로 가치 있게

 여긴다. 이것은 니체의 후기 사유를 지배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상태를 바그너와 대립시켜 다시

한번 표명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서전적 작품인 『이 사람을 보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그의 삶과 고통의 표현으로 읽어주기를 바란다는 니체의 소망을 담고 있다. 그 자신이 유럽 정신의

예외적 현상이었으며, 동시대인들이 철학적 의미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니체에게 자신을

해명하는 글을 쓰게 했으리라. 1887-1888년이라는 그의 지적 실존의 마지막 시기에도, 니체는

여전히 자신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강한 저술적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파괴와 건설 작업에서 사용했었던 모든 도구들이 더 이상은 쓸모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개념이나 말들에 지쳐버려 사유가의 추상성을 벗어버리고 싶어한다. 그가 남겨둔 유고에는

그가 철학자의 가치를 철학자의 작업보다는 성격에서 찾으려고 하는 점, 철학자의 서열이나 사유력을

 영양 섭취의 뛰어남에 의해 규정하려 하는 점, 이성적 사유보다는 생리적 지혜를 더욱 높게 본다는 점,

 인도의 마누 법전에 대한 야콜릿의 책을 읽고 감명받아 신비적 색채를 띠기도 한다는 점 등의 내용이

보인다. 그의 이런 견해들은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니체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새로운 착상을 얻고

싶어했는지를 직ㆍ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이 사이 사유의 아나키즘과 육체적 고통이 그를 지배한다.

결국 그는 새로운 개념과 착상을 얻는 데 실패한 채로 그가 이미 정식화했던 서술, 비판, 도식, 계획들을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고 반복하며 점차로 지쳐간다. 창조력의 결핍 및 사유의 아나키즘이 지배하는

이 시기에 니체를 계속 집필하게 했던 힘은 그의 저술가적-사유가적 의지였다. 그렇지만

그의 지쳐버림과 그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었던 기본 개념들의 포기, 새로운 착상과

대체 수단의 결여들이 체계적 작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의 주저에 대한 계획과 포기 과정은

이 사실을 잘 증명해 준다. 그렇지만 그를 비극적 종말로 끌어가는 정신 착란이 느껴지는

병리적인 텍스트는 몇 예를 제외하고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전달은 이전처럼 여전히 명료하다.

 

그렇지만 1888년 말부터 현실적인 자기 평가가 점점 사라지는 징후가, 그의 자아 정체성이 점점

흔들리는 징후가 보인다. 그래서 그는 예를 들어 , 등으로 서명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모든 글에서 이미 정신 착란적 증세를 감지해 낼 수 있다는 뫼비우스 j. mbius라는 의사의

소견과는 달리, 그를 평생 동안 철학하게 했던 사유가적 의지가 육체적ㆍ정신적 절망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를 쓰러지지 않게 한다. 1889년 1월 3일(혹은 1월 7일),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piazza carlo

alberto에서의 기절 사건이 발생한 후 니체는 심각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신경질적인 편지를 친구들과 공적인 인물들에게 보내고, 이 편지를 받은 부르크하르트는 오버벡에게

걱정에 차서 알려준다. 1월 8일, 투린으로 온 오버벡은, 니체를 바젤로 데리고 가서, 정신 병원에

입원시킨다. 1월 17일, 어머니는 그를 예나jena 대학 정신 병원으로 옮긴다. 『우상의 황혼』,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가 출판된다.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니체는, 놀랍게도

분별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1889년 11월에 예술사가인 랑벤j. langbehn이 그에게 와서

후견인 역할을 하고 싶어할 때, 그의 사심을 알아차리고 거절했을 정도였다. 1890년 3월 24일,

니체는 병원을 떠나 어머니 옆에 머무르다가, 5월 13일, 나움부르크로 돌아간다.

 

12월 16일, 파라과이에서 여동생이 돌아온다. 그녀의 남편 푀르스터는 독일 식민지 건설이라는

계획이 실패하자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자살한다. 1891년부터 97년까지 니체의 건강 상태는 계속

악화되어 1892년부터 그를 방문하는 친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는 종종 증오심을

폭발시키고, 그 정도가 아주 심해 가스트는 니체 어머니의 생명을 걱정할 정도였다. 1893년부터

집을 떠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경직이 등에 일어나 집 안에서도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했다.

1894년,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1897년 4월 20일, 어머니가 7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여동생이 바이마르에서 니체를 맞이한다. 1892년, 가스트는 니체 전집의 편찬에 들어가고,

같은 해 가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에서 4부까지가 처음으로 한 권으로 출판된다.

1894년 초에 여동생은 가스트에게 전집 편찬을 중지할 것을 종용하고, 니체 전집의 편찬을 담당할

니체 문서보관소nietzsche archiv를 설립한다. 1900년 8월 25일, 정오경에 니체는 사망한다.

니체의 말년과 사후에는 그에 대한 여러 신화들이 등장한다.

 

그 중 대중적인 신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니체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니체의 명성이 점차 커져간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오빠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할 줄도

몰랐던 인물이다. 그녀가 만들어낸 신화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니체를 위한 신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그녀 자신의 사회적 신분 사승과 대외적 위치의 공고화라는 목적에 의한 것이

었다. 이때에 니체는 유럽 문학의 상징적 형상으로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비극적인 병증은

그의 유명세에 더욱 불을 붙였으며, 여기에 여동생이 만들어낸 신화도 어쨌든 한몫을 한다.

니체를 진단했던 의사의 니체의 발병에 대한 소견은,(니체의 발병 원인은 오늘날까지도 확실치 않다)

오랫동안 잠재하고 있던, 매독균에 의한 점진적 뇌연화증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학교 시절부터

그를 괴롭히던 편두통을 동반한 고통은 이 감염과는 무관하며, 니체가 정신 분열적 증세를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도 1889년에 발생하는 뇌연화증과는 관계가 없다.

<출처: 관상성형>

 

 

 

 

니체 [Nietzsche, Friedrich] 의 명언




독일의 철학자·시인(1844~1900)
 

간단히 말해서,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며, 피곤한 삶이며, 유배당한 삶이기도 하다. -니체

강한 신앙을 동경하는 것은 강한 신앙의 증거가 아니라 그 반대이다.
사람이 강한 신앙을 지닌다면 그 사람은 회의론의 사치에 빠질 수 있다. -니체

개성을 가진 인간은 언제나 되풀이되는 전형적인 체험을 갖는다. -니체

겉모습이란 진실인 척하는 것이다. -니체

결혼, 그것은 하나를 만들려고 하는 두 사람의 의지다.
단지 그 하나를 이루려는 것은 두 개 이상의 것이다.
이와 같은 의지를 의지하는 자로써, 서로의 곤경을 같이 치러주는 것을 나는 결혼이라 부른다. -니체

결혼 생활은 긴 대화이다. -니체

결혼하기 전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
즉 나는 이 여자와 늙어서도 여전히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니체

곤충은 결코 나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살아야 한다는 본능 때문에 사람의 살을 찌르는 것이다.
그것은 평론가도 마찬가지다.
평론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살 속에 있는 피이고 따라서
그들에게 우리의 괴로움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 -니체

공동 재산, 스스로 모순되는 낱말이다. 공동의 것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니체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중에서...

그 여자는 아름답고 영리하다. 그러나 유감스럽도다!
그 여자가 아름답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영리할 수 있었을 텐데. -니체

근시의 남녀가 사랑을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간 도수높은 안경을 주면 낫는 경우가 있다. -니체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 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니체

창조는 괴로움의 구원인 동시에 삶의 위로인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괴로움이 따르면서 많은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니체

철학은 대중들에게 종교를 대신하도록 함으로써 높게 평가된다. -니체

초인이란 필요한 일을 견디어 나아갈 뿐 아니라 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니체

친구된 자는 마땅히 추찰(推察)과 침묵에 숙달해야 한다. -니체

침묵을 당하는 모든 진실은 독이 된다. -니체

풍파가 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이 뛴다. -니체

필연적인 것은 단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더구나 그것을 감싸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니체

하루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즉 눈을 떴을 때 오늘 단 한 사람에게라도 좋으니 그가 기뻐할 만한 무슨 일을 할 수 없을까, 생각하라. -니체

혼혈아들은 어쩔 수 없이 뒤섞인 도덕심을 만들어가게 된다.
일반적으로 혼혈아들은 순수한 우리들에 비해서 더 심술궂고, 더 잔인하고, 정서적으로 더 불안하다. -니체

훌륭한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하찮은 사람의 진실보다도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니체

훌륭한 친구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아내를 얻을 것이다.
훌륭한 결혼이라는 것은 우의(友誼)의 재능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

나는 운명이다. -니체

남성과 여성이 정치 권력을 함께 담당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저없이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남자가 여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니체

남자는 여자란 땅 덩어리, 꼭꼭 감추어 두어야 할 재산,
즉 예속 당하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일 뿐 아니라 예속을 통해서 완성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니체

남자의 문제인 동시에 여자의 문제인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 주는 본질적인 대립성과 팽팽한 긴장의 필연성을 부인하면서
평등한 권리와 동등한 교육, 그리고 평등한 특권 및 의무를 꿈꾸는 행위.
이런 행위야말로 여자의 지적인 단순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증거이다. -니체

내가 보기에, 철학은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시무시한 폭탄이다. -니체

내가 항상 그렇게 들어 왔고, 지금까지 그렇게 행해 왔듯이,
철학을 한다는 것은 얼음 덮인 산꼭대기 위에서 기꺼이 살아가는 것이다. -니체

내연 관계는 결혼 제도 때문에 타락된 개념이 되고 말았다. -니체

너는 안이하게 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항상 군중 속에 머물러 있으라.
그리고 군중에 섞여 너 자신을 잃어버려라. -니체

너의 양심은 무엇을 알리고 있는가. 본래의 너 자신이 되라. -니체

더 이상 자신있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당당하게 죽음을 택하라. -니체

도덕에 대한 복종은 노예적이며 허영이며 이기적이며 체념이며
음울한 광기이며 사상을 버리는 것이며 절망적인 행위이다. -니체

도덕적인 경멸이야말로 인간의 품성을 손상시키는 그 어떤 종류의 범죄보다도 훨씬 더 혹독한 모욕이다. -니체

동정은 최고의 모욕이다. -니체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 -니체

만일 성욕이라는 것이 이토록 맹목적이고 조심성 없고 경솔하여
사려가 없는 성질을 갖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사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원래 성욕의 만족은 전혀 종족의 번식과는 결부되어 있지 않다.
성교시에 번식의 의도가 수반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고 극히 드문 일이다. -니체

만일 음악이라는 여신이 소리 대신 말로 하였다면 사람들은 귀를 막았을 것이다. -니체

모든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큰 진리의 위험한 적이다. -니체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超人이 살게 되길 바란다. -니체

문화국가라는 것은 근대적 관념에 불과하다.
이편은 저편을 먹고 살며, 저편은 이편을 희생시켜 번영한다. 문화상의 모든 위대한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몰락의 시기이다. -니체

물론 여자는 남자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친구관계를 튼튼하게 지켜 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생리적 반감이 이를 돕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

복수와 사랑에서 여자는 보다 야만적이다. -니체

부부 생활은 길고 긴 대화 같은 것이다.
결혼 생활에서는 다른 모든 것은 변화해 가지만, 함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대화에 속하는 것이다. -니체

분개한 사람만큼 거짓말 잘하는 사람은 없다. -니체

분노라고 하는 격정만큼 남성을 빨리 소모시키는 것도 없다. -니체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니체

사람은 잠자코 있어서는 안될 경우에만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극복해 온 일들만을 말해야 한다. 다른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

사람은 쾌락이라 하면 정욕을 생각한다.
감각이라 하면서 육감성을 생각한다. 육체라고 하면서 아랫배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가지 좋은 것 때문에 명예를 빼앗기고 만다. -니체

사람의 가치는 타인과의 관계로서만 측정될 수 있다. -니체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흐를 때,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며, 복종이나 덕이 따를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을 해낸다. -니체

사랑에는 항상 약간의 광기가 섞여 있다. 그러나 또한 그 속에서도 항상 약간의 제정신도 있는 것이다. -니체

사랑을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다른 어떤 때보다도 훨씬 더 잘 견디어 낸다.
즉,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니체

사랑이 두려운 것은 사랑이 깨지는 것보다도 사랑이 변하는 것이다. -니체

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 의지는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생존하려는 의지이다. -니체

선에도 강하고 악에도 강한 것이 가장 강력한 힘이다. -니체

세상에는 우리의 침울한 두 눈으로 발견 할 수 있는 이상의 행복이 있는 법이다. -니체

순결을 지키기 힘든 자에게는 순결을 버리게 하라.
억지로 순결을 지키게 함으로써 그 순결이 지옥의 길을 향하게 하고,
영혼의 진흙과 음욕의 길로 변하고 마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편이 낫다. -니체

쓰잘데 없는 것, 독일적인 것. -니체

신은 죽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믿음이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되었다는 최근의 사건이 이미 그 최초의 그림자를 유럽 위에 던지기 시작했다. -니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해不可解하다. 그리고 또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니체

심지어 우리들 중에서 가장 용기있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정말로 알고 있는 용기가 뭔지 알지 못한다. -니체

아무 것도 버릴 수 없는 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니체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은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기쁨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라. -니체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니체

어느 정도 깊이 괴로워 하느냐 하는 것이 거의 인간의 위치를 결정한다. -니체

언젠가 날기를 배우려는 사람은 우선 서고, 걷고, 달리고, 오르고, 춤추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곧 바로 날 수는 없다. -니체

얼마만큼 깊이 고뇌할 수 있는가가 인간의 위치를 결정짓는다. -니체

여러가지의 탄식, 어떤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가 유혹당한 것을 한탄하는 반면에
대다수의 남편들은 아무도 자기의 아내를 유혹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는 것이다. -니체

여성은 남성보다 아이들을 더 많이 이해하지만, 남성은 여성보다도 더 어린 아이 같다. -니체

여자가 벌집의 말벌처럼 거의 어디에서나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여자가 교활하다는 증거이다. -니체

여자는 깊이 있는 척하는 껍데기이다. -니체

여자는 사랑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렇다고 여기는 대로 되어 간다. -니체

여자는 앙심을 품고 잊지 않는다.
이런 속성은 타인의 불행에 동정심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나약함에서 오는 것이다. -니체

여자들이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때, 그것도 질병의 징후이다.
그것을 모르는 의사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진정 여자다운 여자는 손과 발을 동원하며 그런 온갖 '권리들'을 거부한다. 자연의 법칙,
그리고 끝없는 성(性)의 전쟁은 진정 여자다운 여자에게 최고의 승리를 안겨다 줄 것이다. -니체

여자를 만든 것이 신의 두 번째 실수였다. -니체

여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명은 자식을 세상에 낳는 것이다. -니체

연애에서 맺어지는 소위 연애 결혼은 오류를 그 아버지로 하고 욕망을 그 어머니로 한다. -니체

오늘 가장 좋게 웃는 자는 역시 최후에도 웃을 것이다. -니체

오직 창조한 사람들만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니체

온건파(穩健派, 온당하고 건전함)로 치닫지 않는 생각이 세상을 주도한다. -니체

용기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더욱 강하게 만든다. -니체

우리는 소에게서 배워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즉 그것은 반추(反芻, 되새김)하는 것이다. -니체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아직 그것의 본성을 배우기 전부터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구사한다.
우리의 오늘의 규칙을 폐기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이다. -니체

우리의 육체에서 가장 천한 부분은 성기이다.
또한 인간이 스스로를 신이라 생각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성기이다. -니체

우리 중 가장 용기 있는 사람마저도 자신이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는 용기는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니체

운명아! 비켜라. 용기있게 내가 간다. -니체

웃음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니체

위대한 것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니체

위대한 인간이란 역경을 극복할 줄 아는 동시에 그 역경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니체

위대함은 과연 어디서 오는가. 어떤 사람이 위대한가.
사람들이 어째서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가. 무엇이 그를 위대하게 보이게 하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함을 그가 일생동안 변함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으며, 위대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니체

육체적 욕망은 사랑보다 더 빨리 커지는 것이다. -니체

이 세상에서 가장 손상받기 쉬운 반면 정복되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허영심이다.
아니, 인간의 허영심은 손상 받았을 때 오히려 힘이 커져서 어이없을 정도로 크게 부푸는 것이다. -니체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깊이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웃음을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우울한 동물이 당연히 가장 쾌활한 동물인 것이다. -니체

인간은 똑바로 판자를 만들 수 없을 만큼 옹이가 많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니체

인간은 수목과도 같다.
나무는 높게 밝은 곳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뿌리는 점점 강하게 땅속 아래로,
어두운 쪽으로, 나쁜 쪽으로 향한다. -니체

인간은 오직 사랑 속에서만, 사랑의 환상의 그늘에 숨어서만 창조된다. -니체

인간이 신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아니면 신이 인간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니체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추었던 때를 상상해 보라. 참으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지 않은가? -니체

인생의 군인 학교에서 나를 죽이지 않을 정도의 것이라면 나를 한층 강하게 한다. -니체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밑에는 언덕이 있고 냇물도 있고 진흙도 있다.
걷기 평탄한 길만 있는 게 아니다. 먼 곳을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만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니체

자기 책임을 방기하려 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려 하지도 않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니체

자랑스럽게 사는 것이 그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니체

자유란 자기 책임에 대한 의지를 갖는 것이다. -니체

재능이 한가지 많은 것이 재능이 한가지 적은 것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 -니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어느 누구라도 용기가 치솟게 된다. -니체

지배하고 억압하며 성질도 고약하다는 점에서 여자와 병 만한 것도 없다. -니체

지상에서 원한에 사무친 열정보다 사람을 더 빨리 소모시키는 것은 없다. -니체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에 의해서 멸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가지는 것이다. -니체

진보의 크기는 그것이 요구하는 희생의 크기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다. -니체

진실을 사랑하게 되면 천국에서는 물론이고 이 땅에서도 보답을 받게 된다. -니체

한낮 빛이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 -니체 

 

 

 

 


 

 니체의 실존주의 인간에 대한 연구

 - 성결대학교 신학부 부교수 윤동철

 

 

 1. 서 론


 "모든 언어는 편견이다". 정신의 자유에 있어서 언어의 위험을 언급하면서 니체가 한 말이다. 편견을 벗어나서 사물과 사유를 접하려는 자유정신은 니체를 따라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우리의 자유정신은 편견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니체의 자유정신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살펴보자. 그의 자유로운 정신이라는 것은 주체도 아니고 신의 창조물도 아니고 단지 육체에 넘쳐 분출되는 쾌락의 과도함과 즐거움을 따라 거침없이 질문을 던져보자.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이성의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 더구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형이상학적 언어에 불과한 것인가?  인간이란 단어로 표현되면서 하나의 개념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이상학적 존재로 개념을 획득하게 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란 하나의 본질을 규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한 실존체 안에 나타나는 복합성과 다양성이 내재하는 삶의 과정을 칭하는 것인가?
 사물이 그 의미를 드러내는 현상이란 무엇인가? 본질은 어떻게 드러나고 해석되는가? 힘들은 단순히 힘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힘의 투쟁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힘의 의지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살려는 의지인가?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니체는 힘(신)을 동일시하며 초극하는 힘을 신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가?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원숭이에서 초인을 향하여 줄타기를 하는 변화의 과정에 있는가? 자연은 인간을 진화시키는 토양으로 신적 자격을 취하고 있는가? 인간은 계보학적으로 그 안에 여러 진화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 사물을 표현하는 힘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은 어떤 힘에 의해 점유되어지고,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현상은 힘의 출현이며 다른 힘과 관계하면서 나타난다. 현상은 실재하는 힘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호이며 징후인 것이다.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점령하는 힘들의 연속이며 그 점령을 위해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과 정복의 과정이다. 역사는 이 힘들의 투쟁을 통한 현상과 의미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복합적이고 복수성을 띠게 된다. 다수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사건이나 현상, 단어 또는 사고는 없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점령한 힘들에 의존하면서 이것이 되기도 하고 저것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복합적인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사물은 여러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계보학을 통하여 하나의 사물이 지니는 복합성과 다원성이 파악된다. 사물의 복합성과 다원성은 사물을 점령하고 있는 힘에 의해 가리워지게 된다. 해석은 바로 하나의 힘, 하나의 표면적 현상에 의해 가리워진 사물 자체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니체의 힘의 개념은 다른 힘에 관계되는 힘의 개념이며, 의지는 힘의 변별적인 요소이다. 의지는 다른 의지 위에 행사하며 나타난다.  니체에게서 한 힘이 다른 힘과 갖는 본질적인 관계는 절대로 본질 속에 있는 부정적 요소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게 되는 힘은 그 다른 것 또는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며, 이러한 차이를 즐긴다. 이러한 현상과 힘의 의지는 존재의 가치를 뒤로하고 변화하는 사물의 본능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게 된다. 삶의 본능을 드러내는 현상과 그 힘의 의지를 떠나서 아무 것도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과도한 쾌락"이나 "넘치는 힘"을 대신할 수 없다. 이 자연 가운데 있는 삶의 본능을 떠나서 묘사되거나 규정되는 모든 개념은 허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神) 또한 사물의 힘을 떠나서는 죽은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계몽기의 실패를 일찍 목도하였던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다. 그에게 지성이란 태초부터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통하여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투쟁과 경쟁에 있어서의 도구이며 기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엄청난 선천적 가치를 가진 지성을 소유한 자는 그 지성으로 인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진화론과 칸트의 이론이 결합된 결과 우리로 하여금 생존할 수 있게끔 처신하게 하며 작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진리요, 그렇지 못한 것은 진리가 안 된다는 실용주의적 진리관이 발전되어 나오게 된 것이다.
 형이상학적 개념을 해체시키고 진화론의 "편견"을 가지고, 디오니소스적 향락을 추구하며 삶의 본능에 과도한 쾌락이 넘쳐나기를 원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치히(Leipzig) 근처인 프로시아(Prusia)의 작센(Sachsen)주 뢰켄(L tzen)에서 루터파 교회 목사인 칼 루드비히 니체(Karl Nietzsch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4세 되던 해에 아버지는 뇌연화증으로 사망하고 다음 해에 니체 일가는 자아레(Saale) 강변의 나움부르크(Naumburg)로 이사하였다. 니체는 14세에 포르타(Pforta)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때부터 문학과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864년, 21세에 그는 본(Bonn) 대학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그리스어, 라틴어를 언어학적 입장에서 연구하는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였다. 이때에 그는 슈트라우스(Strauss)의 예수의 생애(Leben Jesu)를 읽고 그 뒤에 신양성서의 원문을 공부하면서 원전비판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해 고전문헌학의 교수인 리츨(Friedrich Willhelm Ritschl) 교수가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으로 옮겨가자, 니체도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니체가 라이프치히를 졸업하게 되었을 때 리츨르 교수의 추천으로 1867년 24세의 나이로 스위스 바젤(Basel) 대학의 객원교수가 되었고 다음해에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바그너와 만남은 그가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이루어졌고 이때 니체는 24세, 바그너는 55세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기독교인으로 신앙이 깊어지자 니체는 격노하여 바그너와 헤어지고 그 후 바그너의 비판자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1882년 [즐거운 지식]를 집필하였는데 이 글을 통하여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였다.
 니체는 1876년 5월과 6월에 제네바 호반에 머물면서 화란 여성 마틸데 트람페다하(Mathilde Trampedach)에게 구혼을 하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장군의 딸 21세의 지성적인 여자, 루 살로메(Lou Salome)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을 신청하였으나 또 거절당하였고, 그로 인하여 실연의 괴로움으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사건이후 니체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면서 이성을 상실한 그의 광기는 그 정도를 정해갔고, 결국 1889년 1월 발광하여 그의 누이의 손에 자신을 의탁하다가 1900년 8월 25일에 바이마르에서 기구한 생애의 막을 내렸다.
 
2. 인간과 신의 죽음


 니체는 신이란 연약한 인간이 만든 허구의 존재이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신의 존재는 삶의 본능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본능 가운데 드러나는 것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개념화된 신, 이 세계가 아닌 피안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외치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을 말했을 때,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인간이 삶의 본능에 충실한  인간의 모습을 찾기를 원했다. 그는 신을 형이상학적 존재로 보았고, 자신 자신의 초극을 위하여 투쟁할 힘이 없는 연약한 인간의 피난처로 보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통하여 힘에의 의지를 지닌 자로 표명하였고 모든 사물은 힘을 통하여 투쟁을 하고 드러나는 것이 자연이며 실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향하여 "힘있는 자는 부탁하지 말라! 울부짖지 말라! 탈취하라, 부디 탈취하라!"고 격려하면서,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그것을 가르쳐 주리라 .... 우리들이 신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대들과 내가 ..... 신은 죽었다 .... 신을 죽인 것은 우리들이다! 우리가 모두 신의 살해자인 것이다!"라고 외친다. 즉 연약한 우리의 자신이 의지하던 방패를 벗어나 초극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서 신의 그림자에서조차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신을 죽일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바다를 마셔 버릴 수 있었던가?" 그것은 계몽기의 기획에 놓여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인간 이성을 주체로 만들었고 신을 대상으로 삼았고, 계몽기를 접어들면서 인간 이성은 진리의 척도가 되었다. 인간의 주체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만들고 인간을 사고의 중심으로 세웠을 때 모든 것은 인간의 사유 속에 잠식되었다. 인간은 세계를, 바다를 그의 사유 가운데 모두 삼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신은 주체가 아니가 객체가 되었고 죽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참된 신이 가상의 틀에, 인간의 이데올로기적 교리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고, 이제 형이상학적 틀로 영원성을 부여받았던 것으로 여겨졌던 신이 니체의 시대에서 그 틀이 벗겨짐으로 생리학적 세계 가운데 몰락하며,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을 매장하는, 묘 파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아직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가? 신이 썩는 냄새가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는가? --신도 역시 썩는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다! 그것은 우리가 신을 죽였던 것이다. ... 세계가 이제까지 소유했던 가장 신성한 것, 가장 강력한 것, 그것이 우리의 칼로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던 것이다."
 니체의 신의 죽음은 신의 부재를 말하기보다는 신의 생성, 성장, 소멸을 의미한다. 신은 존재했고, 죽었고, 살아날 것이다. 신은 어떻게 이렇게 투쟁 가운데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가? 그것은 반동적 인간은 신의 연민이나 신의 관용을 참지 못한다. 반동적 인간은 무에의 의지를 통해서 신의 죽음을 말하고 관 뚜껑 위에 주저앉아 버린다. 이러한 반항적이며 광기어린 외침은 그의 욕동(慾動)을 따라 분출되는 대지의 과도함이 대지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신, 도덕, 이성)에 대한 구토의 증세로 표현된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신이란 디오니소스였다. "디오니소스적이란 무엇인가?--이 책 속에 그에 관한 하나의 해답이 있다. 여기서 대답하고 있는 사람은 그 길의 정통자, 신의 비의를 이어받은 사도인 것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사실 이 책의 전체는, 생성하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 있는 예술가적인 감각과 잠재 감각밖에 모른다. 원한다면 그것을 신(神)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러나 이 신은 무슨 일이 있어서도 결코 주저할 줄 모르는 비도덕적인 예술가로서의 신인 것이다. 이 책 전체는 이런 종류의 예술의 신만을 인지할 뿐이다. 파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건설에 있어서도, 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선에 있어서도 자기의 변함없는 쾌락과 독재를 고수하려고 하는 신이며, 여러 가지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충실과 과잉의 고뇌로부터, 자기 속에서 솟구치는 모순의 고뇌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려는 예술가로서의 신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문화를 동경하였다.  그곳에는 주신(酒神) 바커스의 향연을 통해서 드러나는, 즉 과도한 쾌락과 욕망으로 솟구치는 디오니소스적 요소가 풍족하였다. 니체는 그리스 문화의 한 복판에서 소크라테스의 합리성이 주도하는 이성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아폴론적 요소가 강조됨으로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적 문화가 퇴락을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도덕은 삶의 본능을 드러내지 못하고 퇴보되어야할 나약한 자들의 생존을 돕는다. 종교는 나약한 자들에게 현실에서의 도피를 돕는 "신의 나라"를 말하고 자신들을 괴롭히는 강한 자들을 처벌하는 심판의 교리를 말하는 종교를 대항하였다. 

 

3. 인간과 형이상학적 철학


 니체는 세 가지 형태의 형이상학적 체계, 즉 도덕, 철학, 종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었다.  첫 째는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본능과는 반대되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내걸었으며, 논리와 낙관주의를 통하여 그리스의 젊은이들을 압도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신화적인 상징 속에서 그 표현을 얻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상징들을 개념화시킨다.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문화의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다루면서 소크라테스를 비판한다. 비극이란 두 개의 다른 삶의 형식의 융합이 형체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고전적 그리스를 찬양함과 동시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려고 이 글을 썼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삶은 본질적으로 디오니소스적이다. 디오니소스적 힘에는 공포와 황홀감과 도취가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디오니소스적 향연/문화/예술의 반대자로 예술의 마력적 본능을 와해시켰고, 그가 내세운 도덕, 변증법, 만족은 삶의 피로의 한 형식으로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으로부터 하나의 폭군을 만들어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크라테스처럼 이성을 폭군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어떤 다른 것도 덩달아 폭군 노릇을 할 위험이 적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합리성이 그 당시에는 구세주로 여겨졌었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거니와 그의 환자들도 자기를 마음대로 자유롭게 합리적이 되고 안되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예의상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리스의 사고 자체가 합리성에 경도할 때에 보여주는 열광은 하나의 위급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고 한 가지 선택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멸망하든가--터무니없이 이성적이라든가 … 플라톤 이후의 그리스 철학자들의  도덕주의는 병리학적인 조건 속에 있었다. 그들의 변증법 존중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미덕=행복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소크라테스를 모방하여 영원한 햇빛--이성의 햇빛을 창출해 내어 어둠의 욕망과 맞서야 한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 신중하고, 명철하고, 총명해야 한다는 것. 본능과 무의식에 굴복하는 것은 모두 타락의 길을 걷게 될 터이니까……"
 니체는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다룬 것은 개념의 미이라들이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의 손에서 현실의 그 어느 것도 살아서 빠져나간 예가 없다. 그들은 현실을 죽이고 개념에 틀에 박제한다. 철학자들, 개념의 우상숭배자들은 현존하는 모든 것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위험한 존재로 변한다. 소크라테스의 감정이나 욕망을 벗어난 이성적인 삶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 플라톤을 통하여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육체를 영혼의 무덤으로 보고 형이상학적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함으로 현실을 떠난 신념에 철학을 구축한 것이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것을 믿는 사람만 기만할 수 있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허구적이며, 거짓으로 보았다. 개념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역동적 힘을 통하여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느끼는 것은 감각이다. "감각은 거짓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우리가 감각의 증거로부터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감각에 최초로 허위를 도입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단일성의 허위, 구체성의 허위, 본체의 지속성의 허위 등등을 …… <이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감각의 증거를 곡해하는 원인이다. 감각이 생성, 쇠퇴, 변천을 보여 주는 한, 그것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존재는 공허한 허구라고 생각한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점에서 영원히 옳으리라. <감각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인 것이다. <실재의> 세계란 날조되어 온 것에 불과하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당시의 그리스 젊은이들에게 발휘했던 매력, 그를 비극에 처해 있는 이들로부터 의사처럼 또는 구세주처럼 보이게 했던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니체는 "데카당스"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였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고귀한 정신에 대한 타락한 육체의 의미에서 사용되었다면 니체에게서는 자연 가운데 실존하는 육체적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을 다룸으로 육체가 지니고 있는 힘에의 의지를 타락시키는 기만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데카당스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이나 도덕가들의 오해이며 자기기만이라는 것이다. "가장 엄격한 일광, 모든 것에 우선시 되는 합리성, 밝고, 냉정하고, 신중하고, 의식적이며 본능이 없이 본능에 적대되는 삶은 그 자체가 일종의 병, 또 하나의 병에 지나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데카당스는 인간 본능의 타락이다. 니체에 따르면, "어떤 형태로든 힘에의 의지가 쇠퇴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생리학적인 퇴행, 즉 데카당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합리성을 근거로 인간의 본능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동물이, 하나의 종(種)이, 한 개체가 자신의 본능을 상실하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선호할 때 나는 그것을 타락했다고 부른다. ... 나는 삶 자체가 바로 성장과, 존속과, 힘의 축적과, 힘을 향한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힘에의 의지가 결여된 곳에는 쇠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의지가 인류의 모든 최고 가치들 가운데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며--쇠퇴의 가치들이 허무주의적 가치들이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규정하는 인간은 이성이나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닌 자신의 본능과 싸워야 한다. 삶이 상승하고 있는 한, 니체에게 행복이란 본능과 한 가지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합리성의 추구는 데카당스의 공식이 된다. 그는 "형이상학이라든가, 신학, 심리학, 인식론 등. 또는 논리학, 응용 논리학 수학과 같은 공식의 과학, 기호학 등, 그것들을 통해서는 현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논리학을 구성하고 있는 인습적인 기호 체계가 도대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니체가 관찰할 때, "소크라테스적" 문화 가운데 있는 인간은 허구적 토대 위에 세워진 지식을 사랑함으로써 존재가 지니고 있는 비극, 영속적인 부상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미망에 묶여있는 것이다. 비극이 실존이며 삶이고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인간의 내부에 있는 동물적 본능, 힘에의 의지를 빼앗아가려는 또 하나의 시도가 종교적 피안의 세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의 두 번째 공격대상은 종교를 향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서구 철학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진실을 감추어 온 기독교에 대하여 맹공을 하였다. 그는 [반(反) 그리스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미화시키거나 치장시켜 주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이러한 드높은 인간형을 반대하여 결사적인 싸움을 벌여왔으며, 이러한 인간형의 근본 충동들을 깡그리 추방해 버렸고, 그같은 충동을 증류하여 악과 악인을 만들어내고--강한 인간은 비난받을 유형으로서, <버림받는 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또 무력하고, 비천하고, 약질인 모든 것의 편을 들어왔으며, 강한 삶의 보존 본능에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이상을 내세웠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이지의 최고 가치를 죄 되는 것으로, 그릇 인도하는 것으로, 유혹하는 것으로 느끼도록 가르침으로써 심지어는 가장 강한 이지적 본성을 가진 인간들의 이성까지도 타락시켰다. 파스칼은 자신의 이성이 기독교 때문에 타락했을 뿐인 데도 원죄 때문에 타락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드높은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니체의 드높은 인간 또는 강한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동물적 본능을 지속적으로 초극하여 진화로 나아가는 존재를 일컫고 있다.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니체의 의식 가운데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 있다고 본 것이다. 정신은 육체의 산물이지 육체가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고 있든 것이다. 육체의 진화과정에서 방출된 정신은 형이상학적 위안 가운데 안주하게 될 때에 진화가 멈추어지고 자신을 초극하기 위해 줄타기를 하는 힘에의 의지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초극되어야할 그 무엇이다. 자연의 모든 과도함이 쾌락으로 고통과 인식 속에 동시에 드러나게 될 때에, "과도"(過度)가 진리로서 폭로되었던 것이다. 진리란 과도함으로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서 가는 것, 또는 초극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묶고 있는 모든 것이 니체에게는 적이며, 공격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기독교는 시초부터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서 느끼는 구토요, 권태감이었다. 이러한 구토와 권태감은 <다른> 혹은 <보다 좋은> 삶에 대한 신앙 아래 가장(假裝)되고 은폐(隱蔽)되고 치장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세>에 대한 증오, 정념(情念)에 대한 저주, 미와 관능으로부터의 도피, 차안을 보다 더 잘 비방하기 위해 생각해낸 피안, 궁극적으로는 허무에, 종말에, 휴식에, <안식일 속의 안식일>에 도달하려는 욕구--이들 모든 것이 나에게는 도덕적인 모든 가치만을 인정하려는 기독교의 절대적인 의지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몰락에의 의지>의 모든 가능한 형식 가운데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가증스러운 형식처럼 생각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진화론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연민의 종교라고 규정하면서, 연민은 생명감의 원기를 북돋아주는 고무적 정서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진화의 과정에서 가장 병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민을 판단함에 있어 그것이 으레 초래하는 반응들의 가치로 그것을 판단한다면 그것이 갖는 치명적으로 위험한 성격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체로 연민은 도태의 법칙인 진화의 법칙을 방해한다. 그것은 파멸이 가까워 온 어떤 것을 보존하고, 삶의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의 삶의 죄인으로 단절된 자를 변호한다. 그리고 그것은 각양각색의 병골(病骨)들을 삶 속에 엄청나게 많이 살려둠으로써 삶 자체에 암울하고 의문스러운 면모를 부여한다. 사람들은 용감하게도 연민을 하나의 미덕이라고 불러왔다. ... 연민은 허무를 설득시킨다. ... 직접 <허무>라고는 말하지 않고 <너머>라고 말한다. 혹은 <신>, 혹은 <참된 삶>, 혹은 열반, 구원, 행복 등에 대해서 말이다. ... 거기에는 삶을 적대하는 경향이 있다. ... 우리의 현대성 가운데서 그 어느 것도 기독교의 연민 이상으로 병든 것은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니체가 얼마나 진화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인간을 유물론적 사상에서 전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종교와 더불어 도덕을 거부한다. 종교가 피안의 세계를 통하여 인간의 진화를,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다면 도덕은 겸손의 미덕 가운데 인간의 삶의 본능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하나의 원리를 정식화한다. 도덕상의 모든 자연주의, 즉 모든 건강한 도덕은, 삶의 본능에 의해 지배받는다고--삶의 어떤 명령은 <해야 한다>와 <해서는 안 된다>는 특정한 규범을 통해 완성되며, 삶의 노정에 놓인 어떤 장애나 적대적 요소는 이로써 제거된다. 반자연적 도덕, 즉 이제까지 가르쳐져 오고, 숭앙되어 오고, 설파되어 온 사실상의 모든 도덕은 그것과는 반대로 삶의 본능을 정면으로 적대한다--그것은 그 본능들에 대한 은밀한, 혹은 공공연하고도 뻔뻔스러운 단죄이다. 그것은 [신이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신다]고 말함으로써 삶의 가장 깊고 가장 드높은 욕구들을 부정하고 신을 삶의 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 삶은 <신의 왕국>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니체는 칸트의 도덕이성을 거부하였다. "늙은 칸트에 있어서 조차도 그렇다. 그의 정언명령에는 잔인한 냄새가 난다." 니체는 칸트의 정언명령이 삶의 진정한 본능을 억제하고 구속한다는 의미에서 보았다. 삶의 동물적 본능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이러한 도덕은 삶의 본능을 긍정하기보다는 부정하는 원리로 파악되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은 <삶의 부정에의 의지>이며 은밀한 파괴 본능이며 퇴폐의, 비소화(卑小化)의, 비방의 원리이며, 종말의 발단이 아닐까? 따라서 위험한 것 중에서도 위험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 나의 본능은 삶을 변호하는 본능으로, 이 문제성을 내포한 책을 가지고 도덕에도 도전하였던 것이다." 그는 도덕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삶, 순전히 예술적이고도 반(反)기독교적인 것을 디오니소스적이라고 칭하였다.
 니체의 입장에서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삶의 본능을 약화시키는 도덕은 퇴폐적인 것이었다. 유기체로서의 인간, 진화의 과정에 있는 인간은 유기체의 전체의 본질적인 성장이 있을 때마다, 개개인의 기관의 일부가 소멸하던가, 그 수가 줄던가 ... 하는 것이 유기체의 증대하는 함과 완전성의 표시일 수 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부분적 무용화도, 위축과 퇴화도, 의미와 합목적성의 상실도, 요컨대 죽음도, 현실의 진보의 조건에 속한다는 것, 즉 현실의 진보는 항상 보다 큰 힘에의 의지와 행로라는 형식에서 나타나며, 또한 항시 다수의 약한 힘을 희생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어떤 <진보>의 크기는 그 때문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모든 것의 양 여하에 따라 측정된다.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개개의 뛰어난 억센 인종의 번영을 위해서 희생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진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개개의 뛰어난 억센 인종의 번영을 위해서 희생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란 창조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줄타기를 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란 결코 창조의 정점이 아니다. 모든 창조물이 인간과 나란히 인간과 동일한 단계에서 완전을 향해 서 있는 것이다. ... 인간이란, 상대적으로 말해서, 가장 성공하지 못한 동물, 가장 병약한 동물, 자신의 본능으로부터 가장 위험하게 벗어난 동물이다." 병약하고 본능으로 벗어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본능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두고 길들이고 기계화시킨 데 있다. "동물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데카르트는, 존경할 만한 대담성을 가지고, 동물을 기계라고 생각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우리의 모든 생리학은 그 명제를 증명하려는 데 전념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논리상으로도 데카르트처럼 기계라고 알고 있을 정도로 진짜 지식이 되어 있다. 이전에는 인간에게 한층 높은 질서로부터의 선물로서 <자유의지>라는 것이 주어졌었다. 오늘날 우리은 인간으로부터 의지까지도 빼앗아버렸다. 의지가 이제는 더 이상 하나의 능력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뜻에서이다."
 니체는 외향성을 향한 인간의 야수적 본능이 이제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된 것이 양심의 가책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에, 자기 자신다운 것에 괴로워하는 법이다. 이것은 인간이 야수적인 과거에서 억지로 떼어버린 것의 결과, 말하자면 새로운 상태와 새로운 생존조건 속에 뛰어들었던 것의 결과, 이제까지 그의 힘과 즐거움과 공포의 근거였던 오랜 본능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한 결과였다. ... 폭력에 의해서 잠재적인 것이 되어버린 자유의 본능 ... 되밀어내지고 뒷걸음질치고 마음 속에 유폐되어 마침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폭팔하게끔 된 이 자유의 본능, 오직 이것이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시작인 것이다."
 니체의 인간은 도덕으로 인해 나약해지고, 본성이 도덕으로 인하여 감금되고 자신 자신을 학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성에 의해 광기가 제거되고 감정이 억압당하고 본능이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기독교의 신과 신의 나라는 나약하고 도태되어야 할 인간들에게, 나약한 인간을 괴롭히는 강한 본능을 지닌 우수한 인간들을 약한 자를 위하여 보상적 심판을 집행하며, 그들을 위한 피안의 세계와 도피처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는 바로 선조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강압적 의무로부터 발생했으며,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거룩한 신성의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체계는 거짓되고 허무한 <정신>과 <신>을 강조함으로 <대지>와 <본능>을 데카당스로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영원하지 않고 목적도 아니고 아직 존재도 아닌 진화론의 과정에 있는 삶의 형태라면, 원숭이에서 초인으로 향하는 진화론의 줄기 위에 재주를 부리는 위험한 실체라면 거기에 어떤 희망이나 가치는 사라지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적 계보]에 실린 제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지" (Was bedeuten asketische Ideale?>에서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를 필요로 한다. 이 의지는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한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4. 허무주의와 초인


 니체의 허무주의는 지금까지 최고의 가치들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무가치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모든 존재자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최고의 가치들, 신, 종교, 도덕, 철학이 무가치하게 될 경우 그것들에 근거하는 존재자들도 무가치하게 되는 것이다. 가치의 상실감, 모든 것이 공허하게 되었다고 느낄 때 일어나는 심리적 박탈감, 자신의 삶의 목표가 무너지고 가치를 잃게 되었을 때 느끼는 허무한 심리적 상태에서 니힐리즘은 대두된다.
 우리는 이러한 무의미함에 대한 승인을 니힐리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니체도 지적하듯이 니힐리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첫째로 니체가 세계의 무의미함이 제공해 주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니힐리즘이 하나 있다. 이것을 소극적 허무주의 혹은 염세주의적인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소극적 허무주의는 현실에서의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허무주의를 피해서 피안을 세계를 마련하는 자들을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이며, 종교가들이며, 도덕가들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니힐리즘은 능동적이면서도 미학적이다. 니체는 이 니힐리즘을 현대화 탈현대의 존재를 위한 올바른 태도로 진단한다. 허무로부터 물러나는 대신에 그들은 주어진 현실을 삶의 본능을 위해 주어진 최선의 장으로 생각하고 그 위에서 춤춘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존재에 맞는 세계가 없다고 무의미나 무가치의 실망에 젖어 한탄하는 대신, 그러한 세계를 창조하려고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연적 제약과 한계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주어진 환경을 초극함으로 자기 자신이 존재의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니체가 "미래의 신화", 즉 서구문명에 드리워져 있는 니힐리즘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신화를 도입하는 것은 [짜라투스트라]에서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니체가 기독교의 사복음서와 비교하여 제5복음서라고 말했고, 기독교 교의에 대한 풍자로서 새로운 디오니소스적 철학을 주신찬가(酒神讚歌)식으로 고지(告知)하였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커다란 고양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초인이 되었다고 여겼다. 1884년 2월 그의 친구 로오데에게 보내는 서신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이 짜라투스트라로서 독일어를 그 완성에 이르게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것은 루터와 괴에테 뒤에 더욱 일보를 나아가게 한 셈이다. --생각애 보려므나, 오랜 동안의 마음의 벗이여, 박력과 유창함과 화음의 세 박자가 이렇게 어울려 있었던 일이 일찍이 독일어에 있었던가 없었던가를." 프렌쩰은 [니이체의 생애와 사상]에서 그가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자기신격화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경에 예수가 황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사실에 대하여, 니체는 신의 죽음이라는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을 자각했으며,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도덕의 파괴자라는 면모를 갖는다. 한편 짜라투스트라는 도덕의 파괴자에 그치지 않고 [도덕의 자기 초극], [성실로 말미암은 도덕의 자기 초극]을 실험하는 인물이다. [성실로 말미암은 도덕의 자기 초극]은 니체가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을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근본적 주제의 하나다.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와 역사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있으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종래의 도덕을 대표하는데, 종래의 도덕, 곧 기독교적 도덕 자체가 그 성실성을 고도로 발달시켜, 이 성실성이 도덕 자체를 부정하고 도덕을 넘어선 경지에 이르는 것이 [도덕의 자기 초극]이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을 키워 온 여러 힘 중에는 성실성이 있었다. 이 성실성이 드디어 도덕에 반항하고 그 목적론, 그 타산적 고찰을 폭로한다.]
 그러면 도덕의 자기 초극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니체가 말하는 성실은 진리와의 합치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이다. 곧 도덕의 자기 초극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다. ... 곧 종래의 도덕이 완전한 자기 상실이었던데 비해 도덕의 자기 초극은 인간이 현재의 자기를 초극하여 본래의 가기 자신을 회복하는 것, 곧 참된 자유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 책 제1부 [세 가지 변화]에 나오는 낙타, 사자, 어린애의 3단계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진 낙타는 의무와 금욕을 상징으로 [그대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타율적 도덕에 복종한다. 도덕을 지키는 자들은 병약한 자들이며, 니체에 따르면, "병들어 죽어 가는 자들이야말로 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천상적인 것과 구원의 핏방울(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 또는 성찬식의 포도주)을 발명해 낸 자들이다."  낙타는 사막에 가서 [사자]로 변하는데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고독을 견뎌 내며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한다. 곧 가혹한 자기 부정에 철저한 자유 정신, 비판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사자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확보한 데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새로운 창조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자기 긍정을 하는 어린애의 단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며, 이 단계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가 달성되는 것이다. 어린애는 각성자이며, 잘 아는 자로서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육체이며, 육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에 속하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반 그리스도에서, "우리는 더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점에서 더 겸손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정신>이라든가, <신성>이라든가 하는 것 속에서 인간의 근원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 가장 교활하다는 이유로 가장 강한 동물로 간주한다. 그의 정신성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여기서도 드러나려고 하는 허영심, 즉 인간이 동물 진화의 비밀스런 위대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허영심을 갖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조심해야한다"고 말하였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의지하여, 인간은 육체이고 대지이며 초월한 짐승이라고 보았다. 도덕에 관하여 그는 말하기를 "초월한 짐승--우리 내면의 야수는 기만당하기를 바라고 있다. 도덕이란 그 야수에게 잡아 찢기지 않으려는 방편적인 거짓말이다. 도덕의 가정에 오류가 없었다면 인간은 짐승에서 머물렀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고상한 어떤 것으로 여겨서 엄격한 규율을 스스로에게 짐지웠다. 그것 때문에 인간은 짐승 가까운 곳에서 그치고 만 단계를 증오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노예를 비인간으로서, 물건으로서 경멸했던 과거를 설명할 수 있다."
 니체는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어떤 것이로다. 그대들은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였던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초인이란 대지의 뜻이로다. 그대들의 의지는, 초인이란 대지의 뜻이라야 한다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부디 원하노니, 나의 형제여, 대지에 어디까지나 충실하라, 그리하여 그대들에게 초지상적인 희망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부디 믿지 마려므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해독자로다. 그들의 삶의 경멸자이며, 거의 시들어버린 자이며, 스스로 독을 머금은 자로다. 그와 같은 무리들에게 대지는 지쳐버렸노라. 그러므로 그들은 죽어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로다! 일찍이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 최대의 모독이었노라, 그러나 신은 죽었노라.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들의 모독자도 죽어버렸던 것이로다. 대지에 대한 모독이 이제는 가장 무서운 것이로다. 그리고 대지의 뜻보다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의 내장은 훨씬 더 존중하는 것도 역시! 일찍이는 영혼이 육체를 경멸하며 내려다보았노라. 그리고 그 때에 있어서는 이 경멸이 최고의 것이었노라. -- 영혼은 육체가 더욱 더욱 메마르고 처량하게 되어, 아사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로다. 그리하여 영혼은 육체와 대지로부터 벗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노라."
 니체는 여기서 인간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인간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극복한다는 것은 인간 가치의 변환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란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의 죽음이 없이는 인간은 가치 변환을 추구할 수 없다. 초인은 신의 죽음을 말하고 더 높은 인간을 향하여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신이 부여하였던 인간의 가치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측정될 때에만 인간은 가치 변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니체는 가치변환을 이루는 새로운 방식을 취하기 위하여 종교, 철학, 도덕을 향한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그리고 가치평가의 전환을 통하여 고차원적 인간의 이론이 취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치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허무주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영겁회귀의 길을 걷는 것이다. 허무주의를 통해 긍정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영겁회귀하는 것이다. 초인은 영겁회귀한다. 회귀하는 것들은 반동적인 힘들에 의존하다. 인간의 본질은 힘들의 반동적 생성이며 보편적인 생성으로서의 생성이다. 인간의 본질과 인간에 의해 점유되는 세계의 본질은 모든 힘들의 반동적 생성, 니힐리즘일 뿐이다.
 니체는 보다 높은 인간과 초인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초인은 자신을 반동적인 힘에 의지하며 니힐리즘을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한다. 그러나 고차적 인간이란 가치를 뒤집고 반동적 행위를 능동적 행위로 바꾸는 것에 그친다. 단지 현재의 인간보다 높은 이상으로 만족한다. 초인은 끊임없는 가치를 무로 돌리고 니힐리즘의 영겁회귀와 더불어 부정을 긍정함으로 다시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 긍정은 부정을 능가하지만 더 이상 이룰 것이 없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초인은 거기서 다시 니힐리즘을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하고 끊임없는 반동적 생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거기에 삶의 약동과 생명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초인은 겨울의 죽음 같은 곳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대지인 것이다.
 
5. 결론


 "모든 언어는 편견이다." 그는 글을 쓸 때마다 편견에 젖어 있었다는 말을 거부할 수 없다. 심리학과 예술, 가치에 대하여 논할 때 그 모든 것은 아마도 이전에 사고가 합리적 형이상학이었다면, 니체의 사상은 심미적(Gestalt) 형이상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심미적 형이상학은 진화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니체의 인간은 진화론 가운데 있고 삶의 본능은 대지의 깊이에서 솟아오른다. 그리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신은 육체로부터 분출되어 나온 것이지 고등한 기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니체가 생각할 때에,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가식적인 것을 벗어버려야 하는데 그것은 합리적 이성의 형이상학, 도덕, 그리고 종교였다. 진화란 결국 더 야수적 삶의 본능으로 복귀이고, 형이상학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 그리고 선을 추구하는 것은 존재의 나약함, 의무에 사로잡힘, 그리고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의 허구적 틀을 부수고 그런 것들의 가치를 무가치로 받아들이고 반항적 힘들을 표출함으로 초극하는 것이다. 결국 니체의 초인이란 삶의 본능의 근원적 힘의 의지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 모든 무가치를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하는 과도한 쾌락과 정열만이 끊임없이 긍정을 허무로 대함으로 긍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초극하는 초인이 되는 것이라면, 초극을 이끌어 가는 인식의 주체는 없는 것인가? 긍정을 비판하는 정신은 대지에서 오는 것일까? 대지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 놓은 긍정을 스스로 부정할 수 있는가? 인식의 출현이 육체적 본능의 퇴폐, 데카당스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국 진화하는 초인은 야수적 본성은 인식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성이 없는 광기가 창출하는 예술은 어떤 것이며, 그 초인은 어떤 존재인가?
 니체는 존재자 자체를 가치로 해석하였다. 결국 심미적 상태에서 지니는 가치는 존재자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니체에게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변환되는 가치에 있는 것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 그리고 초인으로 가는 줄타기를 하는 무엇으로서의 가치이다.  결국 심리적 형태의 니힐리즘은 현대적 형이상학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너희 자신도 또한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심리학은 권력에의 의지가 갖는 제(諸)형태와 제(諸)단계들에 대한 설이다. 이미 데카르트의 인식은 심리학의 일부였다. 단지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자신이 새로운 신을 가르치려고 하였고, 실로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려고 하였다. 예수를 죽음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신의 탄생을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짜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말하고 자신을 초극하는 자로서 신적 가치의 존재이다. 즉 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하여 다음 단계의 목적에 이르는 힘, 힘에의 의지는 니체에게 있어서 신(神)인 것이다. 이 디오니소스적 신은 허무주의를 통하여 반항적 힘을 통하여 자신을 초극하는 초인인 것이다. 이러한 신은 강해야 하며 자신을 초극해야하기에 늘 긍정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을 보호하거나 병약한 자들을 남겨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 진화의 과정을 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도덕을 폐기하고 성실하게 살아감으로서 도덕을 극복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도덕을 폐기하고 용기를 가지고 투쟁하고 야수성을 드러낼 때에 인간은 점점 더 강해지고 더 드높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광기에 차고 무질서하며 정신의 귀중한 소산을 상실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끌어가던 양심의 도덕을 버림으로 짐승이 되는 것이다. 니체는 결국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양심을 깨문다는 것은 개가 돌을 깨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니체가 순수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순수한 정신은 대상이 없이 홀로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대상을 파악하는 힘이라면 주체인 것이다. 주체는 대상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히 변천하는 과정의 가치가 아니라 존재이며 목적이다. 타자를 대상화하는 지력(知力)은 주체의 의식이다. 이것은 그 기원이 물질 또는 대지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精神)의 소산인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구조의 구성체인 개념의 세계를 배격하였으나 개념의 세계는 역동적 삶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 지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경험과 함께 혹은 인식과 함께 연동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개념은 허구의 틀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언어가 편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읽고 해석하는 해석자의 경험이 의미생성에 역동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모든 인식구조가 그렇다. 인식구조는 인식자의 경험과 더불어 이해된다. 허구적 틀이 틀로서만 이해된다면, 인식구조의 형태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이 역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진행과정에서 생겨난 정신이라면 그 정신은 야수성에 젖어 있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정신은 보이지 않는 생각의 공간에 정형의 틀 또는 역동적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나아갈 정향성을 설정한다. 그 정향성의 목적지에 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 근원에 신의 손길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 신의 참여가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증명이 없이 왜 필자는 신의 손길(창조), 참여(사역), 의지(구속)가 있다고 말하는가? 신(神)은 내 삶의 기원이기에, 인간은 신을 느끼고 참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의 신이든, 허무주의의 신이든, 아니면 기독교의 신이 되었든 그는 "잠자는 신"의 부정을 통해서 "활동하는 신"을 찾는 것이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신의 죽음을 말하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과도함 쾌락 그리고 힘에로의 의지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그가 비판한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의 스토아학파들과 논쟁을 하며 소개한 바로 그 신이다. 바울은 "그(神)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전하였다.
 니체가 겪었던 19세기의 기독교에 있어서 자유주의는 참된 하나님을 이성의 사유에 가두거나 지나치게 현실을 외면함으로서 니체나 칼 막스(Karl Mark)를 낳았던 것이다. 니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종교를 거부하였다. "무신론자로 그의 궁극적 관심이 그에게 신(神)"이라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평가는 아마도 니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는 결국 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신을 만들려는 기획을 하였던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와 그 이후에 저작들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그는 말년에 이성을 상실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행복충전소> 

 

 

 

 

 니체,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흔히 알려진 니체의 유일한 자서전이다. 1888년에 쓰여진 글들이다. 그 해 12월 6일에 그는 편집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이 글을 완성하였다.

 
왜 그 출간 시기를 언급했을까?
그 시절 니체는 대단히 반짝거리는 활동을 했다. 눈부시도록. 그는 매일 밤 깨어 있었으며, 시간에 구애없이 언제든 깨어 있는 시간에 마음에 느끼는 것들을 기록했다. (참고로 니체의 삶의 시간은, 1844-1900이다)
 
자, 한마디 인용해 보자.
"그 당시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그너와의 결별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내 본능이 전체적으로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 대한 초조감 때문에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그때가 바로 나 자신으로 돌아와 성찰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낭비되었던가., 문헌학자라는 나의 존재가 얼마나 을씨년스러운 것이었던가 하는 점들이 무섭도록 명료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내 지식 가운데는 현실적인 것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상적인 것'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이 나를 엄습하였다. 나는 그때부터 생리학과 의학, 자연 과학 말고는 아무 것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 결국 니체는 이것을 말한다.
"그대들이 이상적인 사물을 발견하는 곳에서 나는 본다. 인간적인 것을. 아아,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21세기의 현재에도 때로 우리는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는 이를 본다. 그들은 자신의 발길에 걸리는 돌을 제거하고 스스로가 걸어가는 삶을 단념하지 않는다. 돌은 그에게 존재하는 삶의 위기이고, 스스로 넘치는 풍요를 갖고 있지 못하면 그것은 무서운 고독이다. 그런데 진실로 그 순간 그는 스스로 일심동체에 도달한다.
 
니체가 이 책에서 표현한 대로,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한 사람의 보잘 것 없는 생애'의 어떤 이상 혹은 목표 그리고 고백들이 혼재하는 삶을 소신공양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소외를 경험했다. 절친한 벗들로부터.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이성으로 극복했다. 결국 그것은 그 자신이 삶에서 추구했던 이상이었다. 뫼비우스 띠 같은.
 
인간은 언제나 본질적 존재의 고독을 깨우칠 시기가 있다. 근원적으로 그것을 깨닫는 이도 있겠지만,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니체는 결국 지성을 선택했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들에게로 내려오기 위해 산에서의 은둔 생활을 그만둔다. 전도된 예언자이자 메시아인, 그는 위버멘쉬도 인간의 구원도 (산을 내려오기 전까지는) 알리지 않았다.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사자가 되는지, 마침내 사자가 어떻게 아이가 되는지를.


무거운 짐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지배하려는 참을성있고 강인한 정신에 대해. 그러한 정신은 짊어져야할 무거운 짐이 아주 많다.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 가장 무거운 짐을 지려고한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강건한 정신은 이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서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그것은 자신의 오만함을 상처주기 위해 굴복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순간에 그러한 결과를 저버리는 그러한 것이 아닌가? 혹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유령이 우리를 두렵게하려 할  때 그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그러한 것인가? 강인한 정신은 모든 무거운 짐들을 짊어진다. 그리고는 짐을 지자마자 사막으로 급히가는 낙타처럼, 그 역시 자신의 사막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가장 외로운 사막 깊숙한 곳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정신은 사자가 되어,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며, 자기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그는 그가 그 자신의 마지막 신의 적이었던 것처럼, 이 주인의 적이고자 한다. 그는 거대한 용을 이기기 위하여 싸우고자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신이라고, 주인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지않는 그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한다> 그것이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사자라도 그것은 아직 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위한 자유의 쟁취. -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 할 수 있다......


정신도 오래전에 <너는 해야한다>를 가장 신성한 자신의 선으로 사랑했었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사랑의 댓가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가장 신성한 자신의 선속에서조차, 환영과 자의를 찾아야만 한다. 이러한 유괴를 위해 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말해보라,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지를?......


아이는 순진무고요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며,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성스런 긍정이다.

그렇다. 창조의 성스런 놀이를 위해, 오 나의 형제들이여 성스런 긍정이 필요한 것이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한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기 자신의 세계를 얻길 원한다.


시간은 더 이상 인간을 넘어서는 현실세계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알 수 없는 도약이 아니다.  <신은 죽었다>:이런 단언은 복잡한 논증에 근거하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말할때에 그러한 언명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단언은 그것을 긍정하는 나의 청자에게서는 그 의미화를 끌어낼 수 있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사실상, 그것을 긍정하는 사실에 의해, 내가 나 자신의 가치의 창조자임을 내가 결정 할 때에야 의미를 갖는다. 이로서 자동적인 초월속으로 들어간다. 나를 벗어나는 사물들의 질서에 따르는 인간에 의해, 나는 창조에 있어서 가치의 완벽한 긍정인 위버멘쉬에 가까워진다.


이로서 < 차라투스트라는 가축떼들의 양치기나 개가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온 것은 가축떼들 중 많은 길 잃은 양들을 없애기 위해 온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비웃는 군중들에 의해 거부당한,  차라투스트라는 외딴 곳에서 머문다.

<나는 창조하는 자, 추수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벗하리라. 그들에게 무지개를, 그리고 위버멘쉬에 이르는 층계 하나하나를 보여주겠다.> 잠언은 인간을 넘어서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담화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의미는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일 수 없다. 그들은 자기자신의 해석에 따라 의미를 세울것이다.


강건한 정신은 낙타처럼 짊어지기에, 가능한 무게의 짐을 실어 나르면서 자신의 강건함을 입증하려고 한다. 이러한 금욕과 자기 희생의 논리는 본질적인 역설에 근거하는 금욕주의적 이상의 논리이다. 그 자체로 금욕은 흥분, 자기 안위의 고통,명예의 믿음에 이르게 한다. 자신의 논리의 반대 논리로 이르게 하는 이러한 과정의 변증법적인 과정은 여기서는 겉치레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치와 유산의 무게에 대한 순종은 가벼운 무게도 아니고 짊어지기에 쉬운 멍에가 아니다. 그것(낙타와 같은 정신)은 자기 자신에 의해 그 반대로 이끌리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뒤엎어야한다. 정신이 그런 낙타적인 정신 안에서 가치들을 실어 나른다면, 정신은 가치의 창조자일 수 없고, 정신은 그러한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없이도 있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니다. 원한다는 것은 생산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하고 싶다>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대로 될 것임을 내가 원한다는 것이다.>

의무의 복종속에서(너는 해야한다) 행해지는 의지는 반대의 형태를 갖는다. <그것이 네가 하고자 하는 것처럼 되도록 나는 원한다>  의무는 사실 신의 죽음을 긍정한 후에도 존속하는 마지막 용이다.


사자의 형상은 이로서 모든 초월의 형태를 거부하는 이러한 의지를 나타낸다. 사자의 활동은 그러나 제한되어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사자 조차도 그것은 아직 할 수 없다.>  사자의 작업은 사실 가치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에 한정된다. 그런데 부정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부정하는 것이 오랫동안 존속할때에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부정은 따라서 창조와 완전한 긍정을 나타낼 수 없다. 허무주의의 모든 형태에 고착되어있는 유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자는 아이가 되어야만 한다.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다. 아이는 자신의 무지에 의해, 선악을 넘어서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가득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이런상황은 실제적으로 자유로운, 자발적인 긍정을 할 수 있는 유일무구한 상태이다. 아이는 <자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어린 아이는 역사의 짐에 의해 짓눌리지 않는다. 기억도 없고, 과거도 없다면 후회도 없고, 향수도 없다. 아이는 두려움없이 앞으로 닥칠 후회들을 긍정한다. 아이는 그것의 결과를 기초로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지 않는다. 아이는 역사로부터 얻어야할 교훈들을 규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는 그가 한번 원했던 것을 여전히 원할 것이다. 아이는 이처럼 자유롭고 가볍다. 아이는 자신의 고유한 의지만을 원할 수 있고, 그가 주인일 수 없는 범위가 정해진 대상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출처: 방송대>

 

  

 

 '니체 철학, 무엇이 문제인가'

 - 형이상학과 허무주의 이후의 철학


> 전통적 세계해석 : 형이상학적-목적론적-도덕적인 해석의 결합체

 → 인간과 세계, 인식과 실재, 존재와 당위와의 긴장관계 형성. 인간의 현실적 삶을 부정하고 인간에게 허무적 경험을 하게 하는 해석

 →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

> 니체의 과제 : ① 정신적․현실적 아나키즘 극복, ② 근본적인 긍정(디오니소스적 긍정)

 → 긍정하는 파토스 - 영원 회귀 사유 - 힘에의 의지 - 생기 존재론 - 몸/위버멘쉬

 (위버멘쉬)  몸으로서의 인간. 창조와 해석활동을 하면서 자기의 현 상태를 극복하는 인간

 (인식)  종결되지 않는 힘과 삶의 의지의 수행 현상. 자기극복과 위버멘쉬적 삶이 그 목적

⇒ 완전한 허무주의자로서의 니체는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이성 비판가


※ 살로메의 니체 철학 3단계 발전 도식

(1) 니체 철학의 낭만적 시기(~1876년 여름)

; 염세주의적 의지의 철학으로부터 영향받은 예술가-형이상학적 사유  ~ 나중에 포기

(2) 실증주의적 시기(~1882년 여름)

; 자유 정신적 존재로서 기존의 것을 파괴.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경향

(3) 후기(~1889년 초)

; 위버멘쉬, 신의 죽음, 영원 회귀, 힘에의 의지, 허무주의 극복,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 본질적인 단절이나 완전한 반동을 말할 수는 없다     ~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전통적 세계해석을 탈피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자신의 세계 안에서의 위치를 정립시킬 수 있는가


1.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

1-1. 생성의 무죄와 형이상학적 이원론

생성의 철학 : 모든 것이 지속적인 생성, 실제란 항상 생성과 변화를 겪는 실제

 → 생성의 무죄 입증 - 생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 - 디오니소스적 지혜

(생성의 무죄)  전통 형이상학의 특징인 존재/생성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도전

(이분법의 발생원인)  생성에 대한 인간의 불신과 평가 절하

 ①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들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발생원인을 가지며, 그 발생원인은 불변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존재에 있다는 형이상학의 믿음  → 존재/생성은 본질적․가치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② 인간의 행복 추구는 심적인 엉터리 발상을 촉발시켰다  →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 고통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 고통의 무의미함

 ⇒ 존재는 존재해야만 하는 것으로 요청되고, 존재의 있음은 도덕적 당위에 근거를 둔다  ~ 과도한 순진함. 이성의 자기 과대평가

   →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제 자체에 대한 직접적 파악 능력이 없다

   → 이성의 한계 설정. 인간 이성은 해석 행위의 주체일 뿐 그 인식이 실제 자체는 아님


1-2. 예술가-형이상학

현존재에 대한 예술적 정당화 : 실천적 염세주의 거부. 삶을 비도덕적으로 근거짓고자 함. ~ 예술적 능력은 인간을 삶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기쁨을 느끼게 한다

예술적 정당화 프로그램 포기 : 예술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실재에 관한 어떤 한 가지 해석을 제시하려는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어떤 마지막 근거로 상정되는 것. 가상적 구제

   → 생성으로서의 실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 가능성 제시 노력


1-3. 가치의 전도와 허무주의

가치의 전도 : 삶에 부정적인 가치체계로부터 삶에 긍정적인 가치체계로의 전도

(허무주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아무런 답변을 얻지 못하는 상태. 무Nihil를 의욕하게 함. 진리란 없다는 것, 사물의 절대적 성질이란 없다는 것, 물자체란 없다는 것

(허무주의의 원인)  허무주의의 도래는 역사적 필연성을 띤다

 ① 전통적 해석은 자신의 관점적-실용적 진리성을 절대적 진리성으로 혼동

 ② 전통적 해석이 자신의 관점적-실용적 진리성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함

 → 전통 해석은 진정한 치료제가 아닌 가상적 수단

 → 최고 가치로서 평가되던 가치의 탈가치화 초래. 다른 가치판단의 근거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병리적 중간 상태(불완전한 허무주의, 소극적 허무주의) 경험

(적극적 형식의 허무주의)  허무주의의 완성 형태. 부정하려는 의지를 실제에 대한 긍정으로, 긍정하는 생성에 대한 절대적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의지로 인간 의식의 전환!

(위버멘쉬)  해석 주체. 자신의 한계에 대한 적극적 긍정. 절대성의 포기와 상대적 진리의 유의미성 확보. 인간이 자신을 위버멘쉬로 긍정하는 데서 허무주의 극복 과정 시작


1-4. 비도덕주의

도덕 공격 : 도덕 판단의 절대성과 무조건성에 대한 공격.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에게 체화된 가치평가의 총체  → 비도덕주의. 전도된 도덕 필요

(위버멘쉬의 도덕)  자신의 극복과 자신의 발전을 위해 인간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힘에 의한 도덕, 이 힘의 지속적인 활동을 위한 도덕, 즉 인간에 내재하며 항상 활동하는 힘에의 의지를 위한 도덕


1-5. 힘에의 의지와 위버멘쉬

생기 존재론 : 존재는 자신 안에 운동의 목적과 원인을 갖는, 항상 운동하고 작용하는 힘에의 의지라는 유일 실재. 생성에 대한 절대적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

힘에의 의지 : 유일한 실재, 본질.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생성의 과정에 있을 수 있는가

 ① 항상 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 많은 힘을 얻고자 하는,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들에 내재하는 본성(자체 내에 운동의 원인을 갖는다)

 ②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지의 힘으로 충만되어 있고, 의지는 항상 작용하는 동적인 것

 ③ 한 의지에 저항하는 반대 의지들이 있어야 한다(의지의 다수성)

 ④ 생기는 끝없는 진행과정 속에 있다(명령하고-저항하는 복종) ~ 자기 극복과 상승

 ⑤ 의지의 목적은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함이다

 ⑥ 의지는 매 순간 자신의 힘의 극대화를 꾀하며 또 실제로 도달한다

 ⇒ 매 순간마다의 필연성(비이성적 필연성)

 ⇒ 생성의 과정은 끝이 없다. 힘에의 의지는 힘을 추구하는 관계적 과정 형성

~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생기의 실현이며, 힘에의 의지는 보편성을 띠는 존재론적 원리


1-6. 같은 것의 영원 회귀

영원 회귀 사유 : ‘사유 중의 사유’  

 ~ 관점적 세계 경험, 위버멘쉬, 허무주의, 힘에의 의지의 사유 복합체

 ① 생기존재론의 완성 : 영원 회귀 사유는 힘에의 의지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확보하여 생기 존재론을 보증된 존재론으로 완성시킨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자 생성이다. 힘에의 의지는 영원히 회귀한다(힘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라는 자신의 본성으로 영원히 되돌아온다)

 ② 허무주의의 극복 가능성 제시 : 영원 회귀 사유는 인간이 힘에의 의지의 한 예인 위버멘쉬적 존재임을 긍정하도록 촉발시킨다.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고 해석하는 위버멘쉬적 존재로 자각하고, 그렇게 살기를 의지하는 실존적 결단을 통해서 허무주의는 극복된다. 무(무의미)가 영원하다.

 ③ 모든 순간의 필연성과 유의미성 보장 : 모든 순간의 필연성의 의미를 모든 순간의 영원성에 대한 것으로 설명. 영원 회귀의 영원성은 바로 순간으로부터만 파악될 수 있다.

⇒ 생성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절대적 긍정(디오니소스적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


1-7. 관점적 세계 경험(관점주의)과 이성 비판

인간 이성의 사용과 근원 및 한계에 대한 비판 : 형이상학적 이분법에서 존재 뒤에는 생기의 실재성이 숨겨져 있다. 이 생기의 실재성은 곧 힘에의 의지 작용을 의미하고, 이간의 이성 범주로는 모두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관점적 세계 해석(관점주의) : 관점성(삶 또는 생을 위한)은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한, 즉 자기 극복을 통한 자기 상승을 목적으로 하는 의지 작용의 조건. 생성하는 모든 것은 관점성을 가지고 있으며, 관점성은 힘에의 의지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속성이다.

(해석으로서의 인식)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의지가 미리 앞서서 기능한다. 관점을 설정하는 의지의 힘. 인식의 해석 각인적, 해석의 가치 각인적 성격(생기하는 세계는 해석에 의하지 않고는 인식될 수 없다. 인식 주체의 관점성 전제). 오류성과 관점성-실용성을 특징으로 한다.  →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한계로서 인정해야 한다

⇒ ① 인식 활동은 이제 삶의 실천 차원에서 이해된다

   ② 인간 인식의 다원성과 역사성에 대한 강조

   ③ 겸손한 이성 요구


1-8. 디오니소스적 긍정과 운명애

디오니소스적 긍정 : 세계와 인간 존재를 힘에의 의지의 생기 현상으로 규정하여, 그것의 필연성과 유의미성 도출. 디오니소스적 세계/인간은 거대한 모순의 집합체로, 이런 것들을 조건 없이 긍정하는 것이 디오니소스적 긍정. 고통에 대한 긍정

(운명애)  창조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며, 이렇게 결정된 우리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


2. 철학사적 위치와 평가

(1) 생기 존재론은 존재자에 대한 해명을 과제로 삼는 한, 제1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 (하이데거)  니체는 위버멘쉬라는 완성된 주체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체성의 형이상학을 완성시키며, 허무주의의 정점을 제시한다

(2) 이성의 자기 한계를 명시한다

(3) 니체 철학은 딜타이가 제기하는 삶의 철학이나 야스퍼스류의 실존철학 이상의 내용을 포함한다

(4) 니체 철학은 비가시적, 비형식적 체계를 갖는 철학이다

 ≠ (데리다)  니체 텍스트들을 체계화시키고 통일화하는 것은 하나의 해석학적 오류에 불과하다

 ⇒ 니체 철학에서 제시하는 무진리의 진리는 하나의 절대적 진리는 없지만 인간중심적-실용적 진리ㅡ 시간 제약적 진리가 있음을 제시한다

(5) 니체의 현대성 담론이 포스트모던적 사유로의 전환점을 형성한다

 → (하버마스)  이성의 타자, 반계몽적 태도 ~ 낭만주의적 메시아주의

 ⇒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 이성을 포기하지는 않는다(힘에의 의지를 이성의 타자로 상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니체 철학이 갖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 우연성 속의 필연성이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이해하고 있는가

 

 <출처; 신지식>

 

 

 

니체,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반기독교 철학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집안은 2대가 목회자 집안이었으므로 비록 니체가 4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신학공부를 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신은 죽었다." 고 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신을 죽여야 한다." 고까지 말을 했다.

여기에서 니체가 말하는 신은 1차적으로는 니체가 살던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숭앙하는 신을 가리킨다.

동시에 <사람들이 자기 머리로 만들어 낸 가짜 신><우상>도 포함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을 했을 때 <신은 더 이상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이것은 니체가 그 당시에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서 생각하기에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필요에 따라 신을 만들어 내고

 그 신을 이용하는 자들에 불과하다.>   

 

니체가 살던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신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신을 만들어냄으로써 진정한 신을 왜곡하여 우상으로 전락시켰으며

기독교의 신앙을 미신화 시켰다는 의미라고 이해되어진다.  

 

이렇게 생각을 굳힌 니체는

성경을 통해 계시된 진정한 신은 더 이상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살아있지 않으므로

신은 죽었다.(사신론)>고 말하였다.

 

그리고 니체가 살던 당시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성경을 통해 계시된 신이 아닌 가짜)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살신론)  

 

니체가 기독교인들이 숭앙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니체는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알았던 신에게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열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사신론과 살신론 사상을 비롯하여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초인사상이 있는데 나찌즘의 모태가 되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종교다원주의 사상)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니체의 가르침을 그 당시 사람이나 그 이후의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처: 엔 크리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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