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계사/인물

제2차 세계대전 / 노르망디 상륙작전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11.28|조회수1,594 목록 댓글 0

 

 

 제2차 세계대전 / 노르망디 상륙작전  

 

 

 

                                     <해안에 상륙하는 탱크와 병사들>

 

Operation Overlord라고도 함.

1944년 6월 6일 개시한 연합군의 북유럽 상륙작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자,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육·해·공군 합동으로 프랑스 북부해안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사상최대의 진격함대를 조직하는 일을 맡았다. 상륙작전이 성공할 경우 대규모의 연합군이 동쪽으로 진격해, 프랑스를 지나 나치 독일의 심장부까지 들어갈 예정이었다. 영국에서 미국군과 영국군 사령관들이 진격계획을 짜고 있을 때, 에르빈 로멜 독일 육군원수는 예상되는 침공의 방어책임을 맡고 독일군의 방비시설을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 해안에 수중장애물·방공호·지뢰를 설치하고 있었다.

 

영국의 프랑스 북부 공격은 처음에 정한 5월이 아닌 그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의 'D-데이' 6월 6일에 시작되었다. 함선 1,200척, 항공기 1만 대, 상륙주정(上陸舟艇) 4,126척. 수송선 804척과 수백 대의 수륙양용 특수장갑차로 편성된 대부대가 15만 6,000명의 병력(미군 7만 3,000명, 영국·캐나다 합동군 8만 3,000명)을 노르망디에 상륙시켰는데, 13만 2,500명은 배로 영국해협을 건넜고 2만 3,500명은 공중수송되었다. 오른 강 어귀에서 코탕탱 반도 남동쪽 가장자리까지의 해안이 상륙지점으로 선정되었고, 영국·캐나다 합동군은 동부해안으로 미국군은 서부해안으로 상륙했다. 영국 장군 버나드 몽고메리 경의 지휘로 선두 공격을 감행한 지상군은, H. D. G. 크리라 중장이 이끄는 캐나다 제1군, 중장 마일스 뎀시 경이 이끄는 영국 제2군 및 영국 제1·6 공수사단과, 오머 N. 브래들리 중장이 이끄는 미국 제1군 및 제82·101 공수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영국해협의 날씨가 25년 만에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에 작전이 24시간 연기된 뒤 6월 6일 동트기 전 영국기습부대가 주요교량을 점거하고 나치의 통신망을 두절시키는 동안 미국 제82·101 공수사단이 생메르에글리즈 시 근처에 야간상륙하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 연합군 공격부대가 유타·오마하·골드·주노·소드라고 암호명을 붙인 노르망디 해안의 5곳에 상륙했다. 그중 4곳은 빨리 손쉽게 점거했지만, '피의 오마하'에 상륙하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해질녘 연합군은 5개 해안지역 모두에서 상당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마하 해변).

 

연합군의 제공권 확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군이 동쪽의 센 강과 남쪽의 루아르 강에 있는 거의 모든 다리를 폭파했기 때문에 교두보에서 포위된 독일군 전위부대의 병력보강이 빨리 이루어지지 못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영국군은 상륙 첫날 을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오전 9시경 해안 수비대를 물리쳤지만 해안의 교통이 매우 복잡했고 현장의 지휘자들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탓에 오후가 될 때까지 캉을 향해 진격하지 못했다. 마침내 캉으로 진격하려고 할 때 침공지역에 있던 유일한 독일의 기갑사단이 해안에 도착, 영국군의 진격을 막았고 다음날에는 2번째 기갑사단이 도착했다. 결국 1개월 이상의 격전을 벌인 뒤에 영국군은 7월 9일 캉을 점령했다. 한편 서부 전투지구의 미국군은 코탕탱에서 독일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으나 결국 6월 26일 중요한 항구인 셰르부르 항을 점령했다.

 

독일군의 주요약점은 서부 유럽 해안선 4,828㎞와 이탈리아 산악국경 쪽의 네덜란드 절반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부 유럽의 독일군 59개 사단은 고정병력으로, 긴 해안선의 전투 지구에 못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절반의 병력은 야전사단이었으며 이 가운데 10개 기갑사단은 기동성이 뛰어났다. 따라서 독일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모아 연합군이 거점을 잡기 전에 바다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 사령부는 공격 예상지역과 가장 좋은 대응책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즉각적이고 강도높은 반격을 하지 못했다. 공격이 있기 전에 연합군의 상륙지점을 판단하는 데 장군들의 계산보다 히틀러의 직관이 옳았다. 상륙이 시작된 뒤부터 히틀러는 장군들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하여 독일은 전세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일부 지역에 묶여 있던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설명 : 유럽에서의 독일군과 연합군 이동(1942말~1945), 삽입지도는 노르망디 상륙(1944. 6~7)

 

<출처: / 백과사전>

 

 

 

 역사를 바꾼 장군의 기도
 

1891년 10월 14일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자 미국의 34대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그가 독실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이번 호에는 기도의 힘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 아이젠하워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기도로 시작된 지상 최대의 작전


 아이젠하워는 순전한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청년 시기에 다리의 질병이 무척 심했다. 의사는 곧 수술을 해서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기도를 한 후, 하나님께서 반드시 치료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굳혔다.
 
 그는 자신이 잠든 사이 의사가 강제로 마취를 시키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의 형제에게 방문을 지켜 줄 것을 부탁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수술로 다리를 잃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믿음이 없어 먼저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아이젠하워는 불구가 되어 훗날 세계의 역사를 뒤바꿀 만한 공헌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안이 넉넉지 못했던 그는 美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로의 입학을 선택했으며 1915년 졸업 후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맥아더 장군과 달리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했던 그는 47살이 되도록 만년 소령으로 제자리걸음을 하는 바람에 적은 군대 월급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실제로는 당시 그의 상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품성 좋은 아이젠하워가 언젠가는 큰 인물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7년씩이나 놓아주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는 5성 장군으로 도약,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맡게 됐다.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됐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수립과 집행을 1943년 지중해의 말타(Malta) 섬에서 비밀리에 준비했다. 상륙작전이 있기 며칠 전 그는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올라 작전수행을 준비하고 있는 군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이젠하워는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를 지켜보던 지휘관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친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훈련받은 것을 동원할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손에 모든 것을 맡겼으니 우리는 행동으로 들어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 밤인 1944년 6월 5일은 폭우 안개 등으로 도저히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이었다. 악천후를 고민하던 연합군 지도자들은 이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각각 기도했다고 한다. 루스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 아이젠하워 사령관도 모두 전쟁의 승리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17시간이나 기도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한편 기상 예보자인 스태그(Stag) 대령의 정확한 일기예보를 확신했던 연합군 수뇌부는 결단을 내리게 되고 역사상 가장 큰 군사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아이젠하워를 포함한 연합군 수뇌부가 1년 넘도록 전략을 수립한 이 작전은 결국 나치 독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마침내 패배를 인정한 히틀러가 1945년 4월 29일 총통관저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그 이튿날 함께 자살함으로써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난 후 알려진 사실이지만 연합군의 판단과는 달리 당시 독일군 기상장교는 6일에도 악천후가 계속될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에 독일군의 경계가 소홀해져 결과적으로 상륙작전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됐다. 상륙작전이 끝난 후 아이젠하워 장군은 스태그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메모를 보냈다고 한다. “고맙소.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출처 : 시사주간신문 <미래한국>, 2004.5.8)
  
 ================ “연합 원정군의 육해공군 장병 여러분, 여러분들은 바야흐로 위대한 십자군 원정에 나서려 하고 있다. 여러 달 동안 우리는 이 과업을 준비하기 위해 땀 흘렸다. 지금 세계의 시선은 여러분들에게 쏠려 있다. 나는 여러분들의 용기, 임무에 대한 헌신성, 그리고 전투역량에 무한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완전한 승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행운을 빈다! 그리고 이 위대하고 고귀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는 바이다.”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의 노르망디 상륙일 연설)===============

<출처: 웰컴투 미스테리월드>

 


 

제2차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1.제 2차 세계대전

2. 노르망디 상륙작전

3.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의의

 

인류의 전쟁사를 돌이켜보면 그동안 수많은 상륙작전이 있었다. 그 중 최대의 상륙작전을 꼽으라면 아마도 1944년 6월 6일 대서양 해안에서 벌어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3개 공수사단을 포함해 8개 사단 병력과 1만2000대의 항공기가 투입되는 등 병력과 장비 동원면에서 사상 최대였다. 지금부터 세계 2차대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얘기하겠다.

 

1. 제 2차 세계대전

  

  1) 전쟁의 시작

 

1939년 9월 1일 독일은 대군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세계 2차 대전은 막이 올랐다. 소련은 동부를 공격하여 독일과 분할하여 점령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보름만에 폴란드를 점령하고 노르웨이에 진군하는 동시에 4월 9일에는 덴마크를 점령하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통하여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너무 빠른 독일의 움직임에 영국과 프랑스는 대응하지 못하고 1940년 6월에 파리를 점령 당하게된다. 이에 이탈리아는 형세를 살피다가 독일의 우세함을 보자 영국과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게되고 프랑스는 항복하고 드골 장군은 런던으로 피신하여 1940년 6월 22일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국경 주변의 좁은 지역을 점령하는 조건으로 휴전협정이 6월 24일에 조인되었다.  1940년 6월 10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물자를 폭력과 맞서 싸우는 세력에 제공하겠다고 선언하고 영국 을 도왔다.

1941년 6월 독일은 막강한 힘을 영국과 미국에 과시하여 미국이 유럽에 개입하는 것을 단념시키기고 또 공산주의에 뿌리깊은 반감(反感)과 스탈린을 의심하여 소련 점령 작전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독일군은 300만명에 150개 사단, 기갑사단도 19개, 탱크 3,000여 대, 야포 7,000문, 항공기 2,500대,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최강의 침략군이었다. 독일은 맞설 태세를 갖추지 못한 소련을 일방적으로 쳐부수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롬멜 휘하의 기계화 정예 부대를 아프리카에 파견하고,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여 발칸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1941년 전반기에 히틀러는 소련을 제외한 유럽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2) 연합군의 반격

 

1942년 초여름부터 전세는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아프리카전선에서는 몽고메리 장국이 지휘하는 부대가 롬멜의 전차부대에 큰 손상을 입혔고, 마침내 43년 5월 롬멜 부대의 항복을 받았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전쟁에 참여하게 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수뇌들은 1943년 전쟁의 목적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이후 1943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가 테헤란에서 회담을 갖고 제 2전선의 형성과 전후의 국제안전보장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그리고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2. 노르망디 상륙작전

   

   1)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개요

 

        ○ 연합군의 모습

 

 1944년 6월6일, 미국 아이젠하워 대장의 총지휘 아래 미국 제1군, 영국 제2군, 캐나다 제1군을 주축으로 삼은 연합군이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은 당초 네덜란드 해안, 브라타니 해안, 파드칼레 해안, 노르망디 해안 등 4곳이 상륙지점으로 거론됐다. 네덜란드 해안은 지휘본부격인 영국의 항구에서 너무 멀다는 단점이 있었다. 브라타니 해안은 적국인 독일로부터 지나치게 멀었다. 그런가 하면 파드칼레 해안은 독일군의 최대 방어가 예상되는 곳으로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연합군은 결국 노르망디 해안을 상륙지점으로 정했다. 그것은 노르망디가 정박시설이 없는 약점이 있으나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곳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 날 수송기 2,316대와 수많은 글라이더로 공수부대를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프랑스 내륙에 거점을 확보한 연합군은, 그와 거의 동시에 항공기 총 1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해 노르망디 해안을 초토화하면서 7개 사단을 상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상 최대의 작전’이나‘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영화에는 상륙 첫날의 피흘림이 참혹하게 묘사돼 있다. 이 날부터 7월2일까지 연합국측은 인원 약 100만명, 물자 약 57만톤, 각종차량 17만 량을 프랑스에 상륙시켰다. 상륙 이후 첫 3주 동안 연합군의 손실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1,796명에 이르렀고, 작전 수행 과정에서 독일군 약 41,000명을 사로잡았다. 전쟁 초기 서부 전선에서 순식간에 패배해 유럽 대륙으로부터 퇴각한 연합국측은 이 작전을 통해 비로소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41년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급습한 이래 독일군의 주력부대를 맞아 힘겨운 싸움을 감당하던 소련은 개전 초기부터 영국과 미국 양측에 대해서 북프랑스에 제2전선을 구축해줄 것을 되풀이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측의 신중론에 미국이 동조하면서 작전의 실행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1943년 11월 말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 등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들은 테헤란에서 회담을 갖었을때 1944년 5월1일 이전에 북프랑스에서 상륙 작전을 실행할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이 작전이 시작된 것은 그 최종 시한을 한 달 남짓 넘긴 6월 6일이었다.

 

  2) 독일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대응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 승리의 원동력은 전격전, 즉 빛과 같은 공격을 바탕으로 한 전쟁 형태였다. 전쟁의 후반부로 갈수록 독일은 어제 이룩했던 승리의 원동력을 망각하고 수세적인 방어에 집착하였다. 대표적으로 노르망디 방어선이었다. 독일은 구태의연한 방어선으로 연합국의 상륙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노선이 침묵했듯이 히틀러가 장담했던 대서양 장벽, 노르망디 방어선도 쓸모가 없었다. 독일 본토 방어선이었던 지그프리트선도 무의미했다. 롬멜장군이 노르망디에서는 해안에 상륙부대를 묶어놓고서 기갑부대로 타격을 가하는 작전이 제안하였으나 무시되었다. 기갑부대는 연합군을 내륙으로 유인하여 공격하려는 계획으로 후방 깊숙히 위치해 있었으며 제공권 확보를 위한 공군도 즉각적인 공격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로 상륙하였을 땐 제공권을 잃어 버려 기갑부대의 활동에 제한을 받았으며 기갑부대가 도착하였을 땐 이미 연합군은 해안에 교두보를 구축하여 반격은 좌절되었고 프랑스 주둔 독일군은 후퇴를 하는 가운데 연합군의 공군력에 괴멸되어 갔다.

 

노르망디해변으로 향하는 미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던 날, 히틀러는 수면제를 복용하여 잠을 자고 있었으나 전선이 긴급한 상황임에도 히틀러를 깨우려는 노력은 무시되어 시간을 낭비했다. 그리고 서부전선 지휘관이었던 롬멜장군도 부인의 생일로 베를린에 있었으므로 전선에서 기민한 지휘를 내릴 수가 없었다. 시간을 낭비하는 가운데 전선의 붕괴는 지속되었다. 또한 독일은 연합군 상륙지점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상륙을 위한 연합군의 기만작전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상륙이 실시되는 가운데에서도 독일군은 노르망디로 주력부대를 이동시키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독일군은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였다. 해안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던 독일군은 상륙부대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롬멜이 설치해 놓은 각종 방어기구에 이점을 얻기도 하였으나 지원부대의 부재와 제공권의 상실 그리고 대규모 함대의 함포사격에 노르망디 방어선은 무너져 버렸다.

또한 독일은 프랑스에서 마지노선의 환상에 사로잡혀 기동전의 위력을 잃어 버렸다. 이러한 판단의 오류는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방어를 위해서는 적의 상륙 예상 지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강력한 방어진지와 즉각적인 반격을 위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여야 했으나 독일은 방어선과 주력부대를 분리 시켰다. 그리고 빈약한 공군도 보완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여전히 영국폭격을 위하여 폭격기 생산에 주력하였고 본토방어를 위한 전투기의 생산을 늘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륙 당일 10,000대가 넘는 연합군의 폭격기와 전폭기에 대항할 공군이 없었다. 연합군은 독일 기갑부대의 반격을 두려워하였으나 해안에는 전차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또한 독일은 연합군의 본토 폭격으로 군수물자의 생산에 타격을 입었으며 동부전선의 과다출혈로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있었다. 독일군은 기동전을 수행할 만한 힘을 1944년에는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으로 롬멜장군을 포함한 유능한 장군들이 숙청되어 히틀러의 독단을 견제할만한 장군들이 부족하였다. 그저 지시에 복종만을 하는 지휘관들만이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군에게는 기동작전을 충분히 수행할 전차들이 부족했다. 그리고 제공권의 상실은 마지막 남은 전차들의 활동을 제한 시켰다. 1944년 제공권이 없는 상태에서 스탈린이 동부전선에서 공격을 주저한다는 것을 눈치챈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부대들을 빼내 1944년 아르덴느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크리스마스에 마지막 힘을 짜낸 최후이며 두 번째인 아르덴느 대공세(발지대전투)는 독일이 주도적으로 기갑부대를 운용한 마지막 전투였다. 그러나 30만명의 병력을 상실하였고 종전을 5개월 정도 앞당긴 전투로 끝나 버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아르덴느 대공세까지 독일군은 과거의 기동전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프랑스와 폴란드가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는 것으로 종전을 맞이했다.

 

  3) 기상예보의 승리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히틀러에게 치명타를 날린 명승부 중 하나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다. 연합군측이 이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을 누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효과적인 날씨정보의 활용이었다. 당시 독일군은 연합군 상륙 날짜인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의 날씨가 악천후가 전개될 것으로 예상했다. 해안 경비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연합군은 이 날이 상륙작전을 펴기에는 최적의 날씨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당시 작전 기획팀은 기상예보장교에게 이 상륙작전에 가장 적합한 날씨와 조수의 때가 언제인가를 물었다. 기후통계를 분석한 기상예보장교는 6월이 가장 좋고, 조수를 고려하면 5일과 18일이 가장 적합하다고 건의한다. 이에 아이젠 하워장군은 6월5일을 'D데이'로 결정한다. 그러나 6월3일 기상장교 스태그대령은 연속된 3개의 저기압이 도버해협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보고한다. 날씨는 나빠지기 시작했고 이미 출항했던 함정들도 악천후로 인해 귀항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우세는 제공권에 달려 있었기에 만약 날씨가 나쁘면 설령 노르망디에 상륙한다고 하더라도 승산의 보장이 없었다. 군 수뇌부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다음날 스태그대령은 전선이 예상보다 빨리 이동하여 5일 오후부터 6일 낮까지는 일시적으로 좋은 날씨가 될 것이라고 보고한다. 'D데이'는 6일로 연기되었지만 6일 새벽이 되어도 날씨는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날씨는 좋아집니다'라는 기상예보자의 확신에 찬 조언에 수뇌부는 "OK, GO!" 결단을 내리게 되고, 그 결단은 역사가 되었다. 연합군의 판단과는 달리 독일군 기상장교는 6일에도 악천후가 계속될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에 독일군의 경계는 소홀해져 결과적으로 상륙작전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작전 예비일 이었던 18일경에 20년만의 강한 폭풍이 노르망디 해안을 강타하였다는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2차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50여년 전의 열악한 기상자료를 가지고 최선을 다한 기상예보자와 이를 신뢰하고 작전을 개시한 수뇌부의 결단력이 가져 온 승리였다. 당시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날씨 정보를 제공한 기상학자가 바로 기상업체인 미국 플래널라이틱스를 창업한 어빙 P. 크릭이다.

 

3.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의의

  

  1) 전쟁의 잔환점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제 2차 세계대전에 끼친 영향은 아주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앞에서 말했듯이 전쟁 발발후 독일의 계속되던 우세를 한풀 꺽어 놓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나아가 연합군이 전쟁의 우위를 점칠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계속되던 서부전선의 패배로 침체되어 있던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기로 독일을 다시 프랑스 남부로 밀어내고 서부전선에 기점을 잡게 되었고 서부전선을 지키게 위해 독일군은 8개 기갑사단을 앞세우고 연합군을 기습하였다. 연합군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간 부대는 퇴로를 차단 당할 위기에 놓였고 선봉 부대는 1945년 1월 8-16일에 퇴각하였다. 이 공격은 연합군에게 작전 차질과 많은 피해를 주었고 독일은 이 공격에 너무 많은 힘을 탕진하여 항전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벌지 전투에서 독일은 12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국 사상자수는 7만 5,000명에 이르렀다. 그 후 서부전선의 연합군과 동부전선의 러시아에게 포위 당한 독일은 히틀러의 자살 후 히틀러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조인된 항복문서로 전쟁은 5월 2일 막을 내리고 전체 독일군을 포함하는 항복문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좀더 엄숙하게 격식을 갖추어 1945년 5월 8일 자정을 기해 유럽에서의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을 맺어 유럽의 제 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참고

http://plaza1.snu.ac.kr/~whistory/cyberhistory/index.html

http://kweather.co.kr/kcompany/knews7/knews101.html

1999/06/24자 국방일보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http://my.netian.com/~instorysong/4-3-1page.htm  

 

<행복충전소 / 황 진 욱>

 

 

 

 

상륙작전 개요

 

작전은 북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을 5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별로 연합군이 상륙하는 것이었다. 셀부르 항에서 가장 가까운 서쪽으로부터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소오드 해변이라 명명되었다(이런 이름의 해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암호명으로 붙여진 것이다). 각 해변 별로 담당 부대는 다음과 같다.

 

 

 

                [사진설명] 상륙작전前 영국에서 실탄을 사용하여 실시한 상륙훈련장면

 

연합군의 공격 계획

 

상륙할 해안의 지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1944년 5월 6일 제31 사진정찰 비행대대 소속 비무장 P-38 라이트닝을 이용해 10m상공으로 비행하는 초저도 비행을 통해 해안의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이 노르망디 해안 풍경이 담긴 그림엽서와 나폴레옹 시대의 오래된 자료들을 제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BIGOT 지도이다.

상륙에 맞서 타이거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 작전은 모의상륙훈련으로서 1944년 4월에 있었다. 슬랩튼 샌즈에서 실시된 이 작전에는 300여척의 함선과 3만여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4월 27일의 훈련은 절정에 달했는데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다. 상륙정이 상륙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수륙양용 탱크들이 바다속으로 침몰했다. 또한 공군이 보병을 엄호하는 것에 실패했다. 게다가 4월 28일 새벽 2시 독일군의 고속 어뢰정인 슈넬부트 9척이 LST 여덟 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공격하여 LST-531이 침몰하고 LST-289는 선미가 뚫렸다. LST-507은 연료탱크가 폭발해 불탔다. 이 사건으로 749명이 전사했다.

 

독일군의 방어 계획

B집단군 사령관 겸, 대서양 방벽의 책임자인 에르빈 롬멜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1943년말, 서부전선에 부임하면서 연합군 상륙부대를 저지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대규모의 지뢰지대와 해안 장애물, 벙커, 포진지 및 공수부대의 강하와 공수를 방해하는 장비들을 설치했다.

B집단군 공병사령관 마이제 장군의 1944년 3월 17일자 편지에서 프랑스 해안 등지에 설치하게 될 지뢰는 약 2천 만개 정도가 될 것이며, 프랑스 내 여러 방어선을 구축하며서 매설할 양이 2억개가 넘는다는 내용을 적었다. B집단군 전사일지에 기록된 지뢰 매설 현황을 살펴보면, 1944년 5월 20일까지 해안에 설치한 지뢰의 수가 4,193,167개 이며, 이중 2,672,000개가 롬멜의 지휘하에 매설되었다. 이외에도 일부 지뢰는 공수부대를 우려해 후방에 매설했다.

해안 장애물의 목적은 연합군상륙주정들을 파괴시키는 목적이며, 썰물시에는 상륙하는 적의 전차를 저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해물들 중에는 기뢰나 폭탄이 장착되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설치하기도 했다. 마이제 장군의 편지는 계속되어, 해안 장애물의 설치는 모두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4개 구역 중 2개 구역만 상륙개시일까지 완료되었고, 나머지 공사중이던 구간도 상륙 당일날 상륙부대보다 앞서 출발한 코만도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B집단군 전사일지에는 5월 13일까지 총 517,000개의 수중 장애물이 프랑스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그 중 31,000개의 기뢰를 부설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외에도 공수부대를 막을 목적으로 롬멜은 공수부대의 글라이더가 착지할 만한 지점에 30m간격으로 높이 3m의 말뚝을 세웠다. 그러나 말뚝만으로 글러이더에 타격을 줄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말뚝과 말뚝에 전기가 통하는 선을 설치해 글라이더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게 했다. 또한 말뚝 위에 달아놓아 글라이더를 폭파시킬 포탄 100만 개를 준비했지만, 정작 상륙 당일까지 말뚝 설치가 완료된 곳은 거의 드물었다.

이런 노력도 노력이지만, 실상 독일군 방어 계획의 핵심은 해안에 적군이 상륙하면 후방에 대기하던 기갑부대로 다시 바다로 쓸어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다로 쓸어버린다는 개념만 공감대를 형성했지 실제 배치문제에서 독일군 수뇌부들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OKW알프레드 요들, 서부전역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서부기갑집단게이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 B 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의 견해가 모두 달랐거나, 애매했다. 이중에서 특히 갈등이 심했던 것은 슈베펜부르크와 롬멜이었다. 이전부터 롬멜을 경원시했던 슈베펜부르크를 비롯한 정통파 참모장교 출신들은 롬멜을 경원시하고 있었고, 그의 기갑부대 배치 전략에 반대하고 있었다. 거기에 롬멜의 B 집단군 예하인 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 또한 롬멜의 견해에 반대 입장이어서 문제는 복잡했다.

롬멜은 안치오 상륙작전디에프 기습의 예를 들어 기갑부대를 가능한 한 해안가 가까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베펜부르크도 살레르노 전투의 예를 들어 연합군의 공수사단, 항공력, 그리고 해군의 함포 사격에 기갑부대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괴멸할 것이라면서 롬멜의 주장을 반박했다. 두 주장 모두 실제 전투 사례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어느 쪽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이 상황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정권자는 히틀러와 룬트슈테트였지만 두 사람 모두 명확한 입장을 갖지 못했다. 이 상황은 당시 서부 전선 독일군의 이상한 지휘체계에 기인한 탓도 있었다.

결국 타협책이 나왔지만, 이 타협책은 미봉책에 가까웠고, 5월에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지만, 정작 상륙 당일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파 드 깔레로 상륙할 것을 예상한 어쩡쩡한 배치와 반년 가까이 계속된 상급 지휘관들 사이의 반목으로 인한 지휘 체계의 혼란 탓에 신속한 투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작전 개시

 

“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이다.” -- 미국 1 보병사단 16연대장 조지 테일러 대령이 오마하 해변의 상황을 보고 남긴 말.

연합군은 1942년부터 프랑스에 상륙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 몇 달간의 구상 끝에 1943년에 마침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병력을 수송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작전을 위해 연합군은 독일군을 속일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이것을 포티튜드 작전이라 명명했다. 이 작전을 위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에 취임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연합군 장성들이 오버로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작전명)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1944년 6월 5일로 결정된 작전은 그 전날, 갑작스럽게 도버 해협에 태풍이 불면서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다. 그러나 6월 5일,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결단으로 상륙 작전이 강행되었고, 마침내 연합군은 6월 6일 새벽에 먼저 공수부대가 노르망디 일대에 공수 및 강하해 주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으로 오버로드 작전을 개시했다.

이어 6월 6일 새벽, 작전이 개시되었다. 소드 해변, 주노 해변, 골드 해변의 영국군은 밀물때인 오전 7시에, 오마하 해변유타 해변의 미군은 아직 썰물인 오전 6시에 상륙했다. 두 나라의 상륙 시간이 다른 것은 밀물과 썰물에 대한 양국 지휘관들의 서로 다른 생각때문이었고, 장단점이 있었다. 독일은 상륙주정의 접안을 막고자 바다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한 상태였다. 미군은 이 장애물들이 드러나는 썰물때에 상륙하여 상륙 주정의 피해를 막아 최대한 백사장에 많은 병력을 올리고자 했다. 그리고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불도저 부대를 상륙시켜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으나 불도저는 기초적인 장갑조차 없어서 대다수의 불도저는 파괴되어 임무수행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불도저 운전수가 총 혹은 파편에 맞아 사망하게 되어 임무수행이 불가능하게 된 경우가 더 많았다. 썰물 때 작전을 개시하게 된 것은 필연적으로 상륙한 보병들이 달려야 하는 거리가 길어져 벙커와 참호로부터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보병들이 벙커까지 달려야 했던 거리는 약 450M였다. 이에 반해 영국은 상륙주정들이 장애물에 걸려 뒤집히는 경우가 발생해도 최대한 해안 가까이에 접안하여 보병들이 달리는 거리를 줄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두 방법 중에 어떤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결국 영국군과 미군은 상륙 작전 개시 시간이 1시간 차이나게 되었다.

공군과 해군의 강력한 엄호 아래 오마하 해변을 제외한 모든 상륙 지점의 상륙부대는 순조롭게 상륙에 성공하고, 오마하 해변의 상륙부대도 이후 상륙에 성공한다.

 

함대 지원

해안으로부터 1Km 떨어진 곳에는 구축함이 자리잡아 보병들을 엄호했다. 일부는 5.5-7km 떨어진 해상에서 120mm포로 지원사격을 했다. 5.5-11km 구간에는 사거리가 20km정도인 350mm포를 장착한 전함들이 정박하여 해안을 향해 연신 포격을 퍼보었다. 상륙 직전 30분간 집중포격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포격은 상륙하는 병력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4일과 5일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제대로된 포격을 실시하지 못했고 6일에는 안개로 인해 해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함대는 아군 병력이 자신들의 포에 희생될 것을 우려해 목표지점보다 더 먼 거리로 포탄을 발사하여 독일군의 피해는 매우 미미했다. 특히 '피의 오마하'라 불리는 오마하 해변의 병력들은 자신들이 상륙할 때까지 함대 포격이 '해변의 모래를 두 번 뒤엎어 놓았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폭스 그린과 이지 레드 구역에 상륙한 이들은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사진설명]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오마하해변 

<출처: 백과사전>

 

 

 

 

오마하 해변 전투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행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전기를 마련한 '지상 최대의 작전'이었다. 5곳의 해변에서 동시에 전개됐으며 연합군은 이날 하루에만 항공기 1만3000대, 함정 6000척을 동원해 7개 사단 병력을 프랑스 북서부 해안인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러나 이 작전이 결과만큼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오마하' 해변 전투에서 미군은 상륙 당일에만 24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상륙 후 첫 3주 동안 연합군의 손실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8975명, 부상자는 5만여 명에 이르렀다. 상륙 후 모두 76일간 이어진 노르망디 전투에서 연합군은 21만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 중 3만7000명은 전사했다.

 

독일 나치군의 기관포 사격이 빗발치는 가운데 연합군 병력을 태운 상륙정 LCI-85가

오마하 해안으로 접근하고 있는 모습.

모두 4척의 연합군 소속 LCI-85 가운데 하나인 사진 속 LCI-85는 사진 촬영 직후 침몰했다


상륙전에 독일군의 공격으로 죽은 병사들이 많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중 가장 치열했던 오마하 해변 전투 미해병대가 상륙하자

독일의 기관포 공격은 쉬지 않고 계속 날라왔으며,

첫 미해병대 상륙한 부대는 모두 전멸 되고 계속해서 미해병은 계속 해서 상륙을 시도했다. 

함포 공격으로 다시 오마하 해변을 폭격하고 반복해 계속 상륙을 시도하고 결국에 상륙에 성공하게 된다.





 







<출처 :NavyField [十夜 ] clan>

 

 

 

 

'노르망디' 사진 자료

 

 

                       (상륙작전 후, 아직 수습되지 않은 미군 전사자)

 

 

 

                                (오마하.... 멀고도 긴 해변....)

 

 

 

                   (큰 고비는 지난 듯한 시기에 상륙을 준비중인 미군)

 

 

 

             (그 유명한 파커 형님이신가 그 분이 건진 몇 장의 사진 중 하나...)

 

 

 

                                     (많이 알려진 사진 중 하나)

 

 

 

                     (영국에서 함정으로 향하는 미군 상륙군들)

 

 

 

                            (초반 상륙이 끝난 뒤의 사진인 듯)

 

 

 

             (이곳이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레인저 5대대가 상륙하고 오른  Pointe du Hoe )

 

 

 

( Pointe du Hoe 를 이런 방식으로 오르고 결국 우회하여

하나의 큰 포대와 독일군 거점을 공격하여 성공한다.....)  

 

<사진자료: 잇빨중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