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Socrate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개요
BC 5세기 후반에 활동했으며 서구문화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세 인물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가운데서 첫째 인물이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그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 즉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와 이탈리아 우주론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변에서 인간생활의 성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로 철학의 초점을 옮겼다. 그는 도덕적 가치가 침식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혼란기에 살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충고와 도덕적 용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윤리생활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소크라테스는 '학문의 파산기'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활동했다. BC 6세기초부터 과감한 우주론적 사변이 성행하면서 서로 갈등하는 사고체계들이 극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합리주의자인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참된 세계가 감각이 보여주는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학문의 토대를 제거했다. 그의 제자 제논은 수학의 공준(公準)들조차도 서로 모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능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생활을 성공적으로 영위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다. 젊은 소크라테스는 '자연과학'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고 당시의 다양한 이론체계들을 익혔다. 이를테면 지구가 평평하다는 밀레토스 학파의 우주론, 지구가 구형(球形)이라는 이탈리아 학파의 이론, '단위'에 관한 제논의 수학적 수수께끼(연속성의 문제) 등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비판적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한때 소크라테스는 '정신'(Nous)이 우주 질서의 원천이라고 보는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을 중시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모든 것은 최선의 질서를 갖추고 있다"면서 "우주가 합리적인 목적론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자, 엘레아 학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를 공부하면서 이 철학자가 그 원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으며, 이론체계의 세부내용이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자의적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실망을 겪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사실'이 아니라 논리, 즉 '사실'에 관한 '진술' 또는 '명제'를 고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방법에 따르면 특정한 주제에 관한 만족스러운 '가설' 또는 공준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 가설에서 나오는 결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결과들이 참이며, 무모순적인 것으로 밝혀지면 '가설'은 잠정적으로 확정된다. 진리에 관한 문제는 최초의 '가설'을 더욱 궁극적인 '가설'의 귀결로 연역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흔히 19세기 학자들은 이러한 형상론을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플라톤이 고안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즉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달리 보편자를 특수자로부터 분리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파이돈〉의 이론이 플라톤 이론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분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소크라테스가 '항상' 되풀이한 것을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낯설지 않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옳지 않다면 플라톤이 어떻게 형상이론이 그토록 성공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던가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플라톤이 〈향연 Symposium〉과 〈국가 Republic〉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재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저작에서 플라톤은 최고의 형상인 미의 형상 또는 선의 형상이 모든 지적 관조의 목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어떤 형식으로든 완전하게 나눌 수는 없다.
논리적 측면에서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소크라테스에게 '귀납논증'과 '보편적 정의'를 확립한 공을 돌린다(→ 논리학). '보편적 정의'는 보편적으로 의미가 있는 술어, 즉 〈파이돈〉에서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확하게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보편자). 이러한 정의는 소크라테스가 실천을 개선하기 위해 도덕적 술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분할과 정의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다. '귀납논증'은 단순하고 두드러진 구체적 사례들을 고찰함으로써 보편적 정의와 같은 정식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이때 귀납은 증명의 방법이 아니라 제안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귀납논증은 제안된 '정의'(定義)의 의미를 분명한 형태로 정신 앞에 드러낸다. 다음으로 그 정의가 정당한지는 그 정의를 채택함으로써 나오는 '귀결들'이 얼마나 만족스러운가에 달려 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영역에서 '정의'를 찾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소크라테스는 '자연' 일반이 아니라 공적이든 사적이든 '윤리적' 성격과 행위에 관심을 두었다(→ 귀납).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도 참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민중의 기호를 자극했을 뿐, '정치체제를 돌보는 의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올바름과 절제', 즉 공동체의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정치가로 불릴 만하다고 주장했다. 절대적 선에 관한 지식이 국가의 복지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임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확신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생활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소(小)소크라테스 학파로 불리는 집단에 영향을 미쳤다. 이 학파의 주요인물은 아테네의 안티스테네스와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인데, 이들의 사상은 견유학파(犬儒學派)와 메가라 학파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훗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그가 플라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
소크라테스의 명언
3번 체로 걸러라
누군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보게 소크라테스 이럴 수가 있나?
방금 내가 밖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나.
아마 자네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꺼야. 그게 말이지..."
이 때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아직 말하지 말고 잠깐만 기다리게
자네가 지금 급하게 전해주려는 소식을
체로 세 번 걸렀는가?"
그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체로 세 번 걸렀냐니?
무슨 체를 말하는 건가?"
'첫 번째 체는 진실이네.
지금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라고 확신한 수 있나?"
"아니 그냥 거리에서 주어 들었네."
"두 번째 체로 걸러야겠군.
그럼 자네가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선의에서 나온 말인가?"
그러나 그 사람은 우물쭈물하며 아니라고 답했다.
"그럼 세 번째 체로 걸러야겠군.
자네를 그렇게 흥분하게 만든 소식이
아주 중요한 내용인가?"
"글쎄..."
"자네가 나에게 전해 주려는
소식이 사실도 아니고,
게다가 선의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전해주려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중요한 내용도 아니라면
나에게 말할 필요가 없네.
이런 말은 우리의 마음만 어지럽힐 뿐이네."
<나홀로산행>
소크라테스와 그의 아내 크산티페
소크라테스는 50대에 결혼을 했고 세 아들이 있었다. 그가 70세로 사형될 당시 큰
아들은 18세였다. 결혼 후에도 그는 시민들을 깨우치는 사명을 위해 무료로
가르치는 일만 했을 뿐 전혀 가사를 돌보지 않고 외면했다. 그래서 더욱 가난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고, 그의 아내 크산티페로부터 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어떤 이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사모님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어 내십니까?"
그러자, 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것이 없지"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부자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예상대로 그의 아내인
크산티페가 투덜거렸다.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그러자,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염려 말아요. 그들이 이치를 아는 사나이들이라면 그걸 참아 줄 것이고, 만일
시시한 친구들이라면 그런 녀석들에게는 그렇게 신경 쓸 필요조차도 없으니까"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강론을 계속하자, 그녀는 큰소리로
욕을 해대며 그에게 구정물 세례를 퍼부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스레 말했다.
"천둥이 친 다음에 소나기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시는 이유가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는 건, 기수가 준마를 좋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기수는 그 녀석을 잘 길들이고 나면 그
다음은 누워서 떡먹기거든. 내가 내가 크산티페를 잘 길들이게 되면 내가 제어하지
못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하고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니까".
한 제자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그러자, 그가 답변했다.
"결혼하게나!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소크라테스의 재판>
누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는가
- 플라톤의 <변명>을 중심으로
《누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는가? 이 물음에 대해 소크라테스(기원전 469∼기원전 399)의 제자인 플라톤은 서슴없이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말한다. 세계사에서 아주 유명한 재판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는 28세의 플라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한 변론 내용을 기록한 ‘변명’과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제자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쓴 ‘크리톤’과 ‘파이돈’을 통해서 이 재판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저작물 속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실제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의 제자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서 내세운 인물이다.
물론 초기의 작품 중에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들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묘사 가운데 어디부터가 소크라테스 자신의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플라톤의 생각인지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많은 학자는 플라톤이 자신의 저작에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키고 그의 입을 빌려 사실상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은 멜레토스라는 사람이었지만 사실상 그 뒤에는 당시 권력자들이었던 ‘아니토스 일파’가 있었다.
아니토스는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았던 30인 참주 정치에 맞서 아테네 민주정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몰수당했던 ‘민주투사’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자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시민들의 화해’를 위해서 자신들을 괴롭힌 자들에게 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아니토스 일파’가 일흔이 다 된 가난한(소크라테스는 경제적으로 무능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악처’ 크산티페로부터 끊임없는 ‘바가지’에 시달렸다.) 철학자를 법정에 고발하고, 사형까지 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소크라테스 재판이 있었던 시기의 아테네의 사회적 분위기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테네는 원래 상당히 아량 있고 관용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전쟁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많은 피가 흐른 데다 전쟁이 끝나자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은 30인 참주정이 세워지면서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였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리기 2년 전, 30인 참주 독재의 끔찍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테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이 쿠데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반역의 주역들은 모두 소크라테스와 가까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를 배신했던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정의 지도자였고 쿠데타의 주범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모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부유한 귀족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장통에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청년들은 민주주의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엘리트인 자신들과 똑같이 대접받는 민주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플라톤이 보기에, 청년들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친 소크라테스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항한 투사’였다.
플라톤의 저작 ‘변명’의 주제도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묘사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평소 대화에서 민주주의를 어리석은 자들의 통치(중우(衆愚)정치)로 깎아내리곤 했다. 그는 민주정이 당파 간의 끝없는 대립과 투쟁을 야기하며, 인기에 영합해 선출된 정치가들의 무지와 무능함이 아테네를 망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플라톤은 민주정에서는 어리석은 대중의 선택에 의해 통치자들이 선출되기 때문에 통치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무능함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민주주의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플라톤의 저작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가란 병든 아이를 설득하는 요리사와 같다’고 말하고 병든 아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병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이다. 그런데 의사는 맛있는 음식을 주지도 않고 때로는 굶기거나 괴로운 절제 수술을 하기도 한다. 요리사는 맛난 음식과 사탕을 준다. 분별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의사를 싫어하고 요리사를 택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점에서 군중 주도의 민주주의란 이처럼 바보 같은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민주주의란 뛰어난 사람이나 덜떨어진 사람이나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이상한 제도라는 것이다.더욱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스파르타의 일사불란함과 질서를 은근히 찬양하기까지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자연히 참주정을 세우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도 체계적인 교육으로 절제와 금욕을 익힌 시민을 길러내는 스파르타를 ‘개혁의 모범 답안’으로 보게 된다.
플라톤의 중심 생각은 다수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따르는 민주주의보다는 현명하고 정의로운 탁월한 통치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더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가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계급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 모델로 제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다시 소크라테스의 재판으로 돌아가 보자. 이제 새롭게 꽃피우게 된 민주정의 실력자들이 볼 때 민주정을 비판하고 다니는 소크라테스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이 늙은 철학자의 입을 막고 싶어 했고, 그가 입만 다물어 준다면 그의 생명을 빼앗을 의도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소크라테스를 재판한 아테네 시민 법정의 재판관들은 시민 다수가 판결에 참여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필요성 때문에 제비뽑기로 추첨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명백히 법 전문가가 아니었을 뿐더러 일부는 참가 수당 때문에 이 직책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하여튼 추첨된 501명의 시민 재판관들은 280 대 221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형량에 관한 두 번째 표결에서는 더욱 압도적인 표차인 360 대 140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플라톤이 보기에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의 요람이라고 찬사를 받는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것이다. 즉, 아테네의 우매한 지도자들이 다수결의 원칙을 이용하여 스승 소크라테스와 같은 위대한 현자를 살해한 것이다. 플라톤의 이 같은 비판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미리 꿰뚫어 보는 듯해 위대한 철학자의 깊이를 더욱 느끼게 한다.
왜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가?
내전-독재 거친뒤 어렵게 되찾은 민주주의
소크라테스가 공공연히 비판… 시민 미움 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뒤 등장한 아테네의 독재자들은 시민사회를 대량 살해와 암살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수백 년의 민주주의 전통을 지닌 아테네에서 독재정권이 성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정권은 몇 달 안 되어 붕괴되었고,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회복되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회복되면서 특별 사면령이 내려진다. 사면령은 경범죄를 제외하고는 과두정치와 내전 중에 있었던 정치적 행동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명령을 반대하는 연설이 계속되었지만 시민령은 효력을 발휘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꾹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정을 공공연하게 비판해온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을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는 쉽게 조성되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신성모독’과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한 것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이용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양심수?
-혐의 인정않고 억울한 죽음 선택 / 조국의 악법 역설적으로 입증
만일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면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더라면 사형선고는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이 무죄라고 당당하게 끝까지 주장함으로써 시민 재판관들의 화를 돋우었다. 또 소크라테스는 사형이 아닌 국외추방령을 택할 수도 있었으나 이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지인들의 탈출 권유와 확실한 탈출 기회를 저버리고 독배를 마신다.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나에게 철학을 포기할 것을 명령할지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의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에 배치되는 입장이다. 소크라테스는 감형과 탈출 가능성을 모두 뿌리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확신범으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당시 아테네의 법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악법’임을 입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양심수인 셈이다.
<조은정 /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