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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노자 / 도덕경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12.04|조회수1,394 목록 댓글 0

 


 

 

노자(老자)

 

BC 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도가(道家)의 창시자.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또는 담(聃).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도덕경 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은 〈도덕경〉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도교가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당(唐:618~907)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생애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古縣) 여향(術鄕) 곡인리(曲仁里: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 사람으로 주(周:BC 1111경~255)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못지않게 유명한 전설은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이야기이다. 그는 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주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상편·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한 〈도덕경〉이다. 그리고 나서 노자는 그곳을 훌쩍 떠났고, "아무도 그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노자가 서쪽으로 간 사실과 〈도덕경〉을 저술한 점을 언급한 뒤에 사마천은 가끔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초(楚)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어서 책 15권을 저술하여 도가의 정신에 대해 서술한 바 있는데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주나라의 태사(太史)이며 위대한 점성술가인 담(儋)이 진(秦:BC 384~362)의 헌공(獻公)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초인(超人)의 장수를 믿었기 때문에 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매우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뒤에 생겨난 전통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로는 BC 4세기경에 활약했던 장자(莊子)가 노자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로 사마천은 그가 은군자였음을 들었다. 은군자인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속세를 떠난 은자는 늘 있어왔다. 〈도덕경〉의 저자(또는 저자들)는 생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이지만, 그같은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도덕경〉은 1명의 저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내용 가운데는 공자 시대의 것도 있지만 다른 내용은 훨씬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BC 300년경에 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의 저자가 태사 담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사기〉에 나오는 노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술이 신빙성있다고 보고 노자의 생애가 BC 4세기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자의 가계(家系)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에 이(李)라는 가문이 스스로 도교의 성현인 노자의 후예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자가 실제로 존재했었는가를 조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없다. 노자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보다 특정형태의 성인집단(聖人集團)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인으로서의 전설
〈사기〉의 노자전과 기타 오래된 문헌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기술을 제외하고도 2세기 이후부터는 노자에 대한 성인전(聖人傳)이 여러 편 저술되었다. 이같은 전기는 도교의 형성사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후한(後漢:25~220)시대에 노자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고 때로는 황제도 그를 숭배했다. 그뒤 종교계에서 성전(聖典)의 계시자이며 인류의 구세주인 노군(老君)으로 추앙되었다. 노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처의 기적적인 탄생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노자의 어머니는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노자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또다른 신화는 노자의 성(姓)이 생겨난 유래를 설명한다. 노자는 오얏나무[李木] 아래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오얏을 의미하는 이(李)가 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신화는 도교신앙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신화에 따르면 노자는 역사상 여러 명의 다른 인물이 되어 지상에 내려와 통치자들에게 도교의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된다. 2번째 신화는 노자의 서행(西行:함곡관으로 간 것) 이야기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 신화 속에서 부처는 바로 노자라고 간주된다. 3세기경 불교의 포교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같은 이야기를 조작하여 위경서(僞經書)가 씌여졌다. 〈노자화호경 老子化胡經〉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에서 불교는 도교의 아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대 정부는 빈번히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노자라는 인물은 모든 계층에게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유생들에게는 존경받는 철학자였고, 평민들에게는 성현이나 신으로, 도교 추종자들에게는 도(道)의 화신이자 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들 가운데 하나로 숭배되어왔다.


사상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도덕경〉을 통해 볼 때,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僞自然)에 있으며, 그것이 ''(道)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여기서 '무위'는 우주론적 정향을 지향하는 것, 즉 부자연스런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위자연의 구체적인 의미를 말한다면 '사실 자체의 바탕 위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자체란 다름아니라 노자에게 있어서는 자연이요, 도(道)요, 기(氣)요, 변화이다. 그리고 무위란 그 바탕 위에 서서 떠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도가와 도교

 

<백과사전 / M. Kaltenmark 글 | 李鍾麟 옮김>

 

 

 

노자의 사상

 

【사상】

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 노자의 도

  "천지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등에 지고 양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음양의 두 기가 서로 작용하여 조화로운 기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노자가 주장하고 있는 도란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우주만물의 근원과 법칙임을 알 수 있다. 도는 기(물질)이면서 리(법칙)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만물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도가 만물을 발생한다고 했을 때 도는 혼성된 물의 존재이다. 그래서 "혼돈 가운데 이루어진 무엇이 있으니 그것은 천지에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도는 만물을 떠나 있는 일종의 절대적 '리'이다. 상도(常道), 즉 영원불변하는 도라 불린다. 영원불변하는 도는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떠나 있으므로 형상이 없다. 그래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뒤섞여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도는 어떠한 성질을 가질까?

  첫째, 도는 이름이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그러한 도(常道)가 아니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는 도를 무한한 것으로 어떠한 규정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계가 있는 명칭으로 이름 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논어』에서 발견되고 있는 도란 무엇인가?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공자가 강조한 인과 예는 그들이 지어낸 도일 뿐,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도는 참된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하였다.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 큰 거짓말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오게 되었다."

  둘째, 도는 공평무사하다. 노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격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을 도로 변화시키면서 도의 성질을 객관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도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의지가 없고,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한다. "천지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狗)로 여긴다." '추구'는 풀로 만든 강아지인데, 제사 때 만들어 쓰고는 아무데나 버리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도가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담함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도는 허정(虛靜)하다. "도는 텅비어 있으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도는 공허한 것이어서 영원히 충만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도는 또한 고요히 머물러 있다." 만물은 모두 장대하게 생장하지만 최후에는 모두 그것들이 본원인 도로 돌아간다. 이것을 두고 만물이 근원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는데 결국 고요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 노자의 덕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인간도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인간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덕론이란 만물의 본성을 토론하는 것이다. 노자는 우주의 본원인 도가 만물에 깃들여 만물의 본성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만물의 본성은 곧 도의 덕성이다.  노자가 말한 '덕'은 '자연'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하다',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도, 욕망도, 행위도 없는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 노자의 윤리론

  노자는 최고의 인격을 갖춘 성인은 우주의 본원인 도의 덕성을 체현하고 무위자연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주장한 도덕 원칙은 다음과 같다.

 가. 갓난아이와 같이 유약(柔弱)하라.

   "덕성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는 자는 마치 처음 태어난 갓난아기와 같다. 갓난아이는 무지하고 무심하므로 독충도 찌르지 않고 맹수도 덤벼들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발톱을 대지 않는다. 뼈는 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꽉 움켜쥔 주먹은 단단하다. 아직 남녀의 성교도 모르는데 고추는 서 있다. 최고로 충만해 있다는 증거이다. 하루 종일 울부짖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자연과의 조화가 최고로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단단한 것으로 변한다. 초목도 자랄 때에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세고 강한 것은 죽음에 속하는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에 속하는 무리이다. 따라서 무력이 강하면 오히려 적을 이길 수 없고 , 나무도 억세면 결국 생명을 마치고 만다. 그러니 강하고 큰 것은 결국 아래에 깔리게 마련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로 오르게 마련이다."

가. 돈후하고 질박해야지 경박하거나 겉치레를 꾸며서는 안된다.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있게 되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있게 되었으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있게 되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있게 되었다. 예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엷어서 나타난 것이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재앙의 시작이다. 근거도 없이 하는 억측은 도의 겉치레에 지나지 않으니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따라서 대장부는 돈후함으로 처신하지 경박함으로 처신하지 않으며, 소박하고 진실함으로 처신하지 겉치레로 처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박함과 겉치레를 버리고 돈후함과 질박함을 취한다." 따라서 그는 성인이라면 겉으로는 비록 남루한 옷을 결쳤을망정 안으로는 아름다운 옥석을 품은 듯하다고 하였다.

 나. 겸허히 아래에 처해야지 교만하거나 우쭐대서는 안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큰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강이나 바닷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낮은 곳에 잘 처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분명하지 못한 것이며, 자기가 식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총명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를 뽐내는 것은 도리어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이며,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 사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뿌리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러니 후왕(侯王)은 스스로를 '외롭고(孤)', '부족하며(寡)', '좋지 못한(不善)' 사람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 천한 것을 뿌리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최고의 영예는 도리어 영예가 아니다. 옥같이 귀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돌같이 굳세기를 바라지 않느다." 성인은 언제나 자신을 겸손하게 아래에 처한다고 표시하여 영원히 자신의 겸허한 미덕을 유지하는 것이

 다. 사심과 욕망을 줄여야 한다.

  "욕심이 많은 것보다 죄악이 큰 것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해악이 큰 것이 없으며, 얻겠다는 탐욕보다 죄의 근심이 큰 것은 없다. 만족할 줄 알아 그치는 사람만이 영원히 만족한다." "성인은 사사로이 자신의 것을 쌓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갖게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많게 된다." 노자가 사심이 없음을 사심에 있음에 도달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한 것은 아지곧 사심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덕 원칙은 결코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는'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있는' 그런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라. 적에게도 덕을 베풀어 주라.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천하가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없다. ???적에게도 덕을 베풀어 주라. ??? 선한 사람도 그를 선하게 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나는 그를 선하게 하니, 이것은 덕이 선하기 때문이요, 신실한 사람도 내가 그를 신실케 하고, 신실치 못한 사람도 내가 그를 신실케 하니 이는 덕이 신실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악이란 '선이 결핌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이고, 도는 선과 악을 갈라서 악을 박멸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 도가사상

 

1. 도가사상 형성의 시대적 배경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노자의 생존 년대는 불확실하지마는 적어도 그에 의하여 대표되는 도가사상은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형성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 왕조의 세력이 약해져서 각 지방제후의 나라들이 서로 멋대로 다투어 무수한 나라가 생겨났다가 무수히 많은 나라들이 망해간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보려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바로잡을 경륜을 들고나와 자기의 주장을 선전하기에 힘썼다. 후세에 이들을 제자백가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는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를 비롯하여 유가·묵가·명가·법가·병가·농가·음양가 등 수많은 유파들이 있었다.
  춘추전국시대란 혼란이 극한 시기이기는 하였지만 한편 이처럼 다양한 사상가들이 나와 중국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학문의 꽃이 피어났던 것은 자기의 독특한 경륜을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출세를 해보려는 개인의 공리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여러나라의 임금들이나 권세가들이 각기 어진 사람들을 자기 밑에 끌어들여 이들을 보호해 줌으로써 자기 세력을 기르려 했었다는 데도 큰 원인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제나라 위왕같은 이는 직하에 송견·윤문·신도·전변·환연·접자 같은 사상가들을 모아놓고 자유로이 학문을 연구하며 서로 토론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귀족으로는 제나라의 재상을 지낸 맹상군이 평소에도 수천명의 식객을 집에서 먹여 길렀었고, 뒤에 그는 이들의 힘을 빌어 여러가지 큰 일을 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이처럼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왔지만 이들의 기본 경향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가 혼란하기는 하였지만 그 시대의 봉건제도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는 이들과 부정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이들이다. 유가와 묵가를 긍정적인 학파들의 대표라 한다며는 도가와 법가는 부정적인 학파들의 대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긍정이나 부정에 있어서도 그 내용이나 성격에 큰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유가가 이미 존재하여 오던 권력의 지배관계를 기초로 하는 봉건제도를 올바른 도덕으로서 다시 바로 잡아보려고 애쓴데 비하여, 묵가들은 일종의 사회계약설로서 봉건지배의 기초를 삼고 그 권력관계를 종교적인 의미의 지배로서 존재케 하려 했었다. 그리고 부정하는 쪽에 있어서도 법가는 인위적인 제도를 강화하여 강력하고 빈틈없는 권력의 지배관계를 집권적 독재정치로 승화시키려 한데 비하여, 도가는 혼란한 세상의 인위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고 무위자연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불행의 요소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자유로운 인간의 경지를 추구하려 했었다. 따라서 노자를 비롯한 이 시대 제자백가들의 사상의 발생과 전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주나라 봉건제도의 붕괴와 정치사회상의 혼란 및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의 유가와 도가는 왕조의 흥망성쇠와 사회의 치란과는 거의 표리의 관계를 유지하고 후세에까지도 발전계승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제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더욱 일체의 인위와 인간들의 가치평가를 부정하는 도가사상이란 결국 어지러운 세상에서 뜻 잃은 지식인들의 도피주의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다. <논어>만 보더라도 장저·걸익·접여 같은 수많은 은자들의 언행이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숨어 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이 심화하여, 도가사상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흔히 도가사상을 비현실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규정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조그만 자기욕구나 지나친 성취 같은데 억매이기 쉬운 인간관계를 초극하고, 거시적인 입장에서 인생과 사회와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을 그에게서 배워야 할 줄로 안다.

  

2.도론 - 도의 본체

  노자의 사상은 <도>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의 학파를 도가, 그의 학문을 도학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자도 <논어>에서 '아침에 도에 관해 들어 알게 된다면 저녁에 죽는다고 하여도 괜찮겠다.'는 등 <도>란 말을 쓰고 있지만, 유가에서 말하는 도와 도가의 도는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다. 유가에서 말하는 <도>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이 올바로 살아나가고 세상을 옳게 다스릴 수 있는 올바른 <도리> 또는 <진리> 같은 것이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도>는 우주와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또 우주와 만물이 존재하고 변화하는 섭리가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도>는 사람의 지각으로서는 인지할 수도 없고, 또 사람의 지혜로서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어떤 물건이 혼돈히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의 생성보다도 앞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형체도 없지마는 홀로 존재하여 변화하지 않고 모든 것에 두루 행하여지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모체라 할만한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라고 이름하였고, 억지로 그것을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노자>의 첫머리에서
  '<도>라고 알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절대 불변하는 참된 <도>는 아니다.'고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또
  '<도>라는 것의 성격은 황홀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이처럼 <도>란 사람의 지각으로서는 제대로 인지할 수도 없는 미묘한 것이지만, 그것은 위대하여 세상에는 그것에 포괄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또 미세하여 티끌이며 가는 티럭 속이고 그것이 들어 있지 않은 것도 없다. <한비자> 해로편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말이 <도>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도>라는 것은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요 모든 이치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만물은 제각기 이치가 다르지만 <도>는 만물의 이치의 모든 근거가 된다....'
  <도>는 우주의 본원이며 만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곧 우주 만물은 도로 말미암아 도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노자는 만물생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았다.'
  이는 마치 <역>의 생성과정과도 흡사하다. 여기의 일이 태극이라면 이는 음양, 삼은 오행과도 비슷한 것이다.
  앞에서 이미 <도>의 성격은 <황홀한 것>이라 하였는데, <황홀하다>는 것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으며, 변화하면서도 변화하기 전의 아직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언제나 <무>는 도의 묘용을 들어내보이려 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있다. 다시 '천하의 말들은 <유>에서 생겨났고, <유>는 <무>에서 생겨났다.'고도 하였다. <도>와 <무>의 관계는 미묘하다. <무> 이전에도 <도>는 존재하여 만물의 생성과정에 있어서는 <도>가 <무>를 이루고, <무>가 <유>를 낳았다는 것이다. 도가의 <무>의 철학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무>의 철학은 장자에게서 더욱 발전하여 그는 심지어 <무의 무> <무의 무의 무> 식으로 인간의 지각으로서는 추리하기 힘든 절대무의 경지까지도 추구하게 된다.
  도는 만물을 생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존재케 하고 변화시키는 법칙이 되기도 한다. 노자는
  '사람은 땅을 법도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으며,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는다.'고도 하였다. 만물은 도에 의하여 존재하고 변화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자연의 상태로서 그렇게 된다. 노자는
  '위대한 도는 장마물처럼 왼편 오른편 어디에나 퍼져있다. 만물은 이것에 의하여 생성되고 있지만 그것을 내세워 얘기하지 않으며... 만물을 입혀주고 길러주고 하면서도 그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는 안하는 일이 없이 큰 일을 하면서도 아무런 작위도 없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도>의 위대한 작용이나 존재는 의식조차도 못하기 일수이다. <도>처럼 아무런 작위도 가하지 않고 되어지는 것을 <무위>라하고, 그러한 상태를 <자연>이라 부른다. 도가의 이른바 <무위·자연>의 사상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노자가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하지 않는 일도 없다.'고 말한 것도 이것을 설명한 말이다. 도는 언제나 <무위>하고 또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고 있는 것이다.

 

  3.도론-도의 작용

  <도>는 만물을 생성하며 변화시키고 있지만 그 작용에는 도가의 사상을 특징지우는 몇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로 노자는
  '되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고 하였다. <도>는 만물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킨다. 이때 만물의 발전은 반드시 일정한 정도(곧 극점)에 이르면 다시 자연히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물 중에는 무조건 영원히 발전해나가기만 하는 것이란 있을 수가 없다. 생물들은 태어났다 자라서는 늙고 죽음으로써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러한 변화의 단계를 노자는
  '... 그것을 <도>라고 이름지었고, 억지로 그것을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대>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멀리 극도에까지 이른다. 멀리 극도에 다다르면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도>란 위대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슨 사물이든 발전하여서는 극점에 이르고, 극점에 이르러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운동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는 언제나 변화하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자는
  '만물이 아울러 생겨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그 근원으로 되돌아감을 본다. 만물이란 번성하고 있지만 제각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고도 하였다. 이것은 도가의 무위와 자연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노자가
  '근원으로 되돌아감을 고요함이라 표현한 것인데, 고요하이란 운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운명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일정한 법칙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고 설명을 덧붙인 것은 이러한 변화의 법칙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가 <무위>한 것이어서 그것을 <고요함>이라 표현한 것이며, 또 그것이 <자연>이기 때문에 그것을 <일정한 법칙>이라 표현한 것이다. <도>의 움직임은 되돌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무위>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올바른 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서는 <유>보다는 <무>가 본원적인 것이며, <유위>보다는 <무위>가 더 소중한 것이다. 모든 변화는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현상의 평가에 있어서는 <움직임>보다는 <고요함>이 중시되고,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 앞서는 것보다는 뒤서는 것, 교묘한 것보다는 졸렬한 것, 화려한 것보다는 소박한 것 등을 중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약한 것>에 대한 주장일 것이다. 노자는
  '약한 것도 도의 작용이다.'고 말하고 있다. 약한 것이란 물론 강한 것 또는 억센 것의 반대되는 것이다. 본시 도가 황홀한 혼돈상태에 있을 적에는 전혀 아무런 분별도 없었을 것이니, 자연히 강하고 약한 것의 구별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가 혼돈상태를 벗어난 뒤에는 약하고 강한 것을 비롯한 모든 상대적인 분별이 생겨난 것이다. 강하고 약한 것을 비롯하여 모든 상대적인 분별, 곧 억센 것과 부드러운 것, 긴 것과 짧은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등이 생겨난 뒤로 모든 사람들은 보통 이중의 강한 것·긴 것·좋은 것 같은 적극적인 편의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 만약 우주가 완전히 정지상태에 있다면 이러한 사람들의 평가는 옳은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와 만물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는 언제나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상대적인 분별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분별은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대적인 분별에 따른 평가란 절대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우주가 혼돈상태로부터 변화를 시작하였다면 우주는 모두 혼돈상태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혼돈상태에는 상대적인 분별이 없다. 따라서 상대적인 분별이란 변화과정 중에 들어나는 일시적인 구별일 따름이다. 언제나 강하다거나 영원히 아름다운 것 같은 것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인 분별 중에서도 강한 것·좋은 것 같은 적극적인 편의 것드은, 약한 것·나쁜 것 같은 소극적인 편의 것들보다 더 들어나고 두드러진 것들이다. 변화과정에 있어서 적극적인 편은 극점에 가까운 것들이고, 소극적인 편의 것들은 변화의 시작에 가까운 것들이다. 노자가
  '하늘의 도는 활줄을 잡아당기는거나 같은 것이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끌어올리고, 여유가 있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충해준다.'고 말한 것도 우주의 변화원칙을 설명한 것이다. 특히 이 상대적인 분별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두드러지게 들어난 것들은 더욱 쉽게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러한 사실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굳으면 깨어지고, 날카로우면 무디어진다.'
  '군대가 강하면 멸명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어진다.'
  '억센 자들은 제 명에 죽지를 못한다.'
  반대로 소숙적인 편의 약한 것·나쁜 것 같은 것은 낮고 숨기어져 있는 지위의 것들이며 언제나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극적인 편의 것들이 일시적이고 위험한 상태인데 비하여 소극적인 것들이 오히려 안정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른바
  '비뚜러진 것은 온전히 되고만다. 구부러진 것은 곧게 되고만다. 움푹한 곳은 가득 차게 되고만다. 낡은 것은 새롭게 되고만다. 적은 것은 더 보태어지고만다. 많은 것은 미혹되어 잃게 되고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강한 것 같은 적극적인 편의 것들은 결국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알고보면 그것은 소극적인 것들보다도 더욱 일시적이고 불안한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노자가 약한 것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상대적인 분별 중세서 그것이 가장 <무>나 <자연>의 상태에 가까운 것을 대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도 하였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고 역설적인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노자는 약하면서도 실제로는 강한 본보기로 물을 들기도 하였다.
  '천하에는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데 있어서도 그것을 당해내는 것은 없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상징이고, 억세고 강한 것은 죽음의 상징이라고까지 하였다.
  '사람이 살아있을 적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 만물이나 초목도 살아있을 적에는 부드럽고 갸냘프지만, 죽으면 마르고 뻣뻣해진다.'
  약한 것이야말로 생명이 있으며 발전하는 것을 뜻하지만 강한 것은 죽음과 멸망을 뜻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강약에 있어서 노자의 이상은 약한 것보다도 더 나아가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에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도의작용 곧 만물의 변화에 있어서 중시해야 할 것이 강한 것이 아닌 약한 것이라는 말이다.

 

  4.노자의 가치관

  앞에서 노자는 상대적인 분별에 있어 약한 것 또는 부드러운 것 같은 소극적인 편의 것을 강한 것 또는 억센 것보다 높히 평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만물의 변화과정 중에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으로서 상대적인 분별이 나타날 때의 이야기에 불과하ㄷ. 노자는 원칙적으로 모든 상대적인 분별에서 오는 가치관판을 부정한다. 높고 낮은 것, 길고 짧은 것, 강하고 약한 것, 좋고 나쁜 것같은 판단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들은 모두 만물의 변화과정 중에 들어나는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사물의 참된 성질이나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높고 낮은 곳, 길고 짧은 것, 강하고 약한 것, 좋고 나쁜 것같은 판단은 모두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 추상적인 개념에는 이러한 판단을 뒷바침해줄 확실한 기준이 있을 수가 없다. 아무리 높은 것이라도 그것을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낮은 것이 될 수가 있고, 아무리 긴 것이라 하더라도 더 긴 것과 견줄 적에는 짧은 것이 된다. 모든 상대적인 판단은 때와 장소 또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입자에 따라 언제나 변화한다. 그래서 노자는
  '네 하는 대답과 어 하는 대답에 차이가 얼마나 있는가? 선한 것과 악한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가?'고 말하고 있다.
  실상 여러가지 상대적인 분별들을 자세히 따져보면 모든 사물의 상대적인 것들은 아울러 함께 존재하고 서로 상대방에 힘입어 그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높고 긴 것들은 언제나 높고 긴 한편만이 존재할 수는 없다. 반드시 다른 한편에 낮고 짧은 것이 있기 때문에 높고 긴 것들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은 서로를 이룩해주며,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 그런 형체를 만들어주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은 서로 그렇게 만들어주며, 음악과 소리는 서로 조화하여 그렇게 해주고, 앞과 뒤는 서로 위치에 따라 그러헤 보이게 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상대적인 분별은 결국 <유>와 <무>에게까지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를 중히 여기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이것이 인간들이 불행해지고 부자유스럽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행복을 추구하지만 절대적인 행복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행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 있고, 똑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화에는 복이 깃들여져 있고, 복에는 화가 숨기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모든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로 하였지만, 이 되돌아가는 만물의 변화는 결국 상대적인 것들이 서로 변화함을 뜻하기도 한다. 긴 것은 짧아지게 마련이고, 아름다운 것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들어올리는 것>이 도의 원리인 것이다. 사애ㄷ적인 분별은 어느 한편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나 반드시 그 상대적인 상태로 되돌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또한 노자는 <약한 것>을 존중하였다고 설명했지만, 약한 것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두가지편 중에서 길고 높고 좋고 강하고 아름다운 것 같은 적극적인 편보다는 짧고 낮고 나쁘고 약하고 추한 것같은 소극적인 편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것은 적극적인 편의 것일수록 소극적인 방향으로 반드시 변화해야만 하는 불안하고 일시적인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미 소극적인 편에 있는 것은 언제나 적극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적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소극적인 편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무>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 주장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분별에서 오는 가치평가에 있어 일반 사람들은 판단을 크게 그릇되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5.윤리관

  노자는 사람의 존재도 우주 속의 자연의 한가지 현상으로서 파악한다. 사람도, 봄에 돋아났다 가을에 서드는 풀이나 산에 솟아있는 바윗돌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연의 한 요소라는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사람이 나서 자란 다음 늙고 다시 죽는 것은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도의 변화>소그이 한가지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욕망과 평가를 쫓아 자연변화의 도를 어기고 자기의 행복과 안녕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가 자연의 한가지 현상에 불과하며, 자기의 욕방이나 가치판단이 모두 헛되고 그릇된 것이을 깨닫지 못한다. 여기에서 사회의 혼란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불행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자기> 또는 <아집>을 버릴 것을 주장하다.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기>의 입장에서 <아집>을 가지고 남을 대하여 사물을 본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들어내려 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노자는
  '스스로 들어내고자 하는 자는 밝게 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들어나지 않고, 스스로 뽑내는 자는 공로가 없게 되며,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약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사상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들어내어 남보다 두드러지는 자는 언제고 외부의 공격을 받아 큰 손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또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려면 남과 다투어서도 안된다. 노자는
  '성인의 도는 일을 이루기는 하되 다투지는 않는다'고도 하였다. 남과 다툰다는 것은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의 <강함>을 행사하려는 뜻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서는 그와 더불어 다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고도 하였다. 다툰다는 것은 이기게 되더라도 결국 도의 변화법칙에 따라 자기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것이 된다. 그뿐 아니라 이미 다툰다는 자체가 자연의 도를 어기는 자기를 해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남과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에 앞서려는 마음까지도 없애버려야 한다. 노자는 사람의 세가지 보배 중의 하나로서
  '감히 천하에 앞서는 입장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감히 천하에 앞서는 입장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능한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고도 설명을 붙이고 있다. 뒤에 <장자>에서도 '남들은 앞서려 들지마는 자기는 홀로 뒤서려 든다'고 하였다. 이것은 약한 것을 지키고 남보다 얕고 못하게 처신하는 것을 뜻한다. 앞서고 강하며 들어나는 것같은 것은 도의 변화원칙으로 보아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회오리바람은 하루 아핌 내내 불지를 못하고, 소낙비는 하루 종일 계속하여 내리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만드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조차도 오래가게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잇어서랴!'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하늘과 땅>이란 바로 자연을 뜻하며, 그것은 또 도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노자는 이러한 도의 변화원리를 따른 올바른 사람들의 몸가짐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므라들게 하려면 반드시 잠시 그것을 불어나게 한다. 약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잠시 그것을 강하게 한다. 피폐케 하려면 반드시 잠시 흥성케 한다. 뺏어버리려 한다면 반드시 잠시 더 보태 준다.'
  곧 자기가 잘 살고 싶다면 남과 다투지도 말고 남보다 앞서려 들지도 말며, 언제나 약하고 겸손하게 처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그래서 성인은 그의 몸을 뒤로 미루지만 자신이 앞서게 되고, 그의 몸을 소외하지만 자신이 잘 보존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사사로움이 이룩될 수가 있는

 

 

▶ 도가사상의 발전 

  

1.도가의 사상
  춘추시대(BC722-BC467)에 발생한 노자의 사상은 전국시대(BC466-BC221)에 이르러 장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와 그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이른바 도가가 형성되었다. 전국시대 말엽에 이르러 도가사상은 유가사상 다음 가는 가장 유력하고도 보편적인 한 학파로 발전한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만 보더라도 도가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삼십가가의 수많은 저술들이 재록되어 있다. 이들의 저서를 읽어보면 이들의 사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생기기도 하였으나 원칙적으로는 모두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사람의 내심의 수양을 통하여 인간의 안녕과 행복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인위적인 일체의 행위를 반대하며, 그러한 인위에 의하여 발전한 모든 문화제도를 무시한다. 이러한 문화제도는 모두가 허망한 실속없는 것들이어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두 <무위>함으로써 완전한 <자연>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이야말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상태이며, 바로 <도>의 작용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연>은 완전하고도 전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람의 힘이란 도의 변화원리만을 어길 수 있을 뿐이지 <자연>에는 도저히 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인의 몸가짐이나 일을 하는데 있어 언제나 <자연>의 방법에 따를 것을 주장한다. <자연>의 방법에 따른다는 것은 일체의 인위적인 행동을 배격하고 <무위>함을 뜻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무> 또는 <무위>와 <자연>의 개념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도가라면 원칙적으로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사상가들인 것이다.

 

  2. 도교의 발전
  그러나 한대에 이르러 노자의 영향아래 도가와는 전혀 다른 도교가 발생한다. 도교는 후한 말엽에 장도릉이란 사람에 의하여 창립되었는데, 도교의 성립에는 노자의 사상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두가지가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첫째 중국에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던 민속신앙이다. 그중에도 여러가지 무술과 점술 및 잡신들의 신앙같은 것이 그 중요한 것들이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는 전부터 전해내려오던 술수로서 천문·역보·오행·시귀·잡점·형상의 여섯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미신적인 술수들이 뒤에는 모두 도교의 영역 안으로 숨어들어오게 된다.
  둘째 신선사상과 방사이다. 신선사상은 전국시대에 생겨났다. <사기> 천관서 봉선서 및 <한서> 교사지 등을 보면 연나라와 제나라 지방(지금의 하북·북동 지방) 사람들이 발해에 생겨나는 신기루를 보고서 일종의 신선사상을 발전시켰다 한다. 그들은 발해 속에는 봉래·방장·영주라 불리우는 세개의 신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공중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신선들이 살고 있고,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선약들이 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나라 위왕과 선왕, 연나라 소왕 등이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진시황이 서복으로 하여금 동남동녀 오백명을 거느리고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동해로 나가게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전한다.
  이러한 여건 아래 직업적으로 신선과 선약을 구하는 방사들이 생겨났다. 방사들은 보통사람들보다도 신선의 성격이나 신선의 세계를 잘 알고 있어 신선을 부를 수도 있었으며, 또 여러가지 술법으로 먹으면 죽지않고 신선이 된다는 선단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하였고, 어떤 자는 신체와 마음을 단련하여 오래 살고 신선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신선을 좋아하는 여러 임금들의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진시황 대의 서복, 한무제때의 이소군, 공손경 등이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이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임금으로 하여금 신선을 구하도록 만들어, 그사이 자기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었다. 이러한 풍습은 위진남북조시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유행하여, 뒤에는 방사들이 여러가지 부록과 주술로서 귀신을 쫓기도 하고 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선사상과 방삳르의 도술이 직접 도교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노자도덕경>을 그들의 이론근거로 삼았다. 다만 여기에 더욱 현묘한 이론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일찌기 도가에서 황제를 끌어들이어 도학을 흔히 <황로지학>이라 부르기도 하였지만, 보통 도교에서는 노자를 교조로 받들어 모신다. 특히 동진때 <포박자>를 지은 갈홍이 나왔고, 북위에는 태무제의 신임을 받은 구겸지 같은 사람들이 나와 도교에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는 한편 열심히 이를 선전하여 도교는 중국에서 가장 강대한 종교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뒤에 당나라 때에는 왕실이 노자의 후손으로 자처하면서 노자를 숭상하였으므로 도교는 더욱 성행하였다.
  도교에서는 노자를 교조로 받들면서 노자를 신선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노자 아래로도 수많은 신선이 있는데, 이를 사이에는 일정한 계급과 각기 분장하는 직무가 있고 각기 맡고 잇는 지역이 따로 있다. 이것은 마치 이 세상 나라들의 정부조직과 비슷하다. 다만 이들과 노자와의 관계나 이들 신선 사이의 관계는 이야기하는 사람들마다 달라서 종잡기 어렵게 되어있다. 그것은 도교가 기독교와 같은 성실하고 경건한 신앙이 없이, 각기 개인의 이익을 기구하고 자기가 늙어 죽지 않는 신선이 되기를 바라는게 그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교의 활동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종류로 크게 분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늙어 주지 않고 오래 사는 신선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신선이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권능을 습득하는 것이다. 신선의 권능으로는 귀신들을 쫓겨나 형체를 변화시키는 등 여러가지 초인적인 능력들이 있다. 이러한 능력의 습득을 위하여는 부록·주술·무술·요술 등 여러가지 신묘한 방법을 익힌다. 그리고 신선이 되기 위하여 마음과 몸의 수양을 쌓아야만 하는데, 도교의 수양에는 내단의 수련과 외단의 수련의 두가지가 있다. 내단과 외단의 수련방법은 무척 복잡하고도 신묘하여 간단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내단의 수련이란 자기 신체 내부의 기능들을 수련하여 신선이 되는 것이고, 외단의 수련이란 자기 신체 이외의 물건의 힘을 빌어 신선이 되는 것이다. 곧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선단을 만드는 연단술이나 선약의 제조 같은 것이 외단의 방법인 것이다.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이 <도가>와 <도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들은 다같이 노자를 받들기는 하지만 도교에서는 노자를 신선으로 알기만 했지 그의 시오한 철학을 중히 여기지는 않는다. 도교에서도 <노자도덕경>을 경전으로 받들기는 하지만, 이들은 <도덕경>의 사상적인 연구는 하지 않고 도를 닦고 신선술을 구하는 이론적인 근거로 삼을 따름이다. 이러한 도가와 도교의 구별은 근래에까지도 혼동됨이 없이 중국사회에 계승되었다. 따라서 후세까지도 도교는 미신적인 일종의 민간신앙이라 할 수 있고, 도가는 중국사상의 한 유파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을 가리킨다는 구별은 변함없이 지속된 것이다.

 

 

▶ 노자의 현대적 의의 

 

노자는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따라서 그의 저서 <노자>는 후세에 와서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도가의 가장 중요한 경전의 하나이다. 그의 뒤를 이어 장자(莊子)라는 사상가가 나와 도학(道學)을 발전시켰으므로, 도학은 흔히 <노장학(老莊學)>이라고도 불리어졌고, 도가에 있어서의 노자와 장자는 마치 유가(儒家)에 있어서의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처럼 여겨지고 있다.
  유가사상이 중국의 북방(황하 유역)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라면, 노자의 도가사상은 남방(장강유역) 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다. 중국에 있어서의 북방과 남방의 차이는 기후와 자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학술·문학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두드러진 성격의 차이를 보여준다. 북방은 기후가 차고 자연조건이 거칠며 매말라 사람들은 생존(生存)을 위하여 외부조건들과 투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던데 비하여, 남방은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아무런 걱정없이 생활을 영위(營爲)할 수 있었다는데서 생겨난 성격의 차이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북방 사람들억세고 투쟁적이며 현실적인 데 비하여, 남방 사람들은 부드럽고 평화적이며 낭만적이다. <중용(中庸)>에서도 공자가 강(强)함을 설명하며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써 가르치고 무도(無道)함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인데, 군자(君子)가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다. 무기와 갑옷 위에 넘어져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북방의 강함인데 강자(强者)가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북방과 남방의 기질적인 차이는 옛부터 뚜렷했던 것같다.
  아뭏든 유가사상이 현실적이라면 노자의 도가사상은 초현실적(超現實的)이다. 공자는 어지러운 현실사회를 인의(仁義)와 같은 훌륭한 덕(德)과 올바른 예의제도(禮儀制度)로서 다스려보려고 애썼는데 비하여, 노자는 그와 정반대로 도(道)라는 절대적인 원리를 추구하면서 현실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그릇된 자기 위주의 가치판단 아래 세상을 그릇된 판단으로서 다스리려들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노자는, 공자를 비롯한 일반 사람들이 훌륭하다 또는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절대적인 훌륭한 것이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 하였다. 훌륭한 것은 나쁜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올바른 것은 그릇된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불생에 빠지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혼란과 싸움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노자의 무위(無爲)·무지(無知)·무욕(無欲) 등 무(無)의 사상과 자연(自然)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무>나 <자연>은 <도>의 현상이며, 이것은 사람들을 불행케 하는 모든 가치판단이나 사회적인 구속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뜻한다. 그것은 말을 바꾸면, 자연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인간의 인간 본연(本然)으로서의 회복 또는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의 추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있어 한대(漢代) 이후 이천 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유교(儒敎)가 그 정치와 사회의 윤리의 바탕이 되어왔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유교는 현실주의적인 학문이어서 언제나 정치적으로는 군주(君主)의 봉건전제(封建專制)를 지나치게 형식화시키고, 사회생활을 판에 박은 듯한 예교(禮敎)로서 무미건조(無味乾燥)하게 만들고 마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막바지에 이르면 언제나 초현실적인 도가사상이 끼어들어 지나친 정치의 형식화나 사회의 예교화를 막아, 정치나 사회를 조화시켜주었다. 그들은 늘 빈큼없는 예의제도를 내세우면서도 도가에서 그것이 참된 인간 본연의 것인가를 반성할 여유를 얻었던 것이다. 예술·문화도 유가의 실용적(實用的)이고 공용적(功用的)인 사상만을 따른다면 결국은 지나치게 형식화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고사(枯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도가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나 문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할 여지를 갖게 되어, 중국의 예술과 문화는 언제나 새로운 생각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역대 예술 비평가들이 즐겨 사용한 질박(質樸)이나 고박(古樸)의 표현이 그 일면인 것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올바로 살고 큰일을 해보려고 노력해도 뜻대로 안될 때, 도가사상은 그 현실을 초극(超克)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 속에 묻혀 유유히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따라서 중국 역사를 보면 각 왕조의 멸망이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처럼 혼란했던 시기에는 언제나 도가적인 사상들이 유가사상 이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가적인 경향은 중국 문화의 영향이 미쳤던 동양 여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그것은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동양사상의 일면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흔히 동양사상의 소극적(消極的)인 일면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한 가치판단 또는 인류가 지양(止揚)해야 할 동류(同類) 사이의 경쟁 또는 투쟁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말미암은 불행의 완전 해소(完全解消)를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사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논리(論理)의 필연(必然)>을 추구해온 서양의 과학문명을 흔히 위기(危機)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논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며, 더우기 자기의 가치판단을 바탕으로 한 자기 욕망 추구의 경쟁은 지금 인류를 멸망 직전으로까지 몰고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문명이나 현대적인 우리의 가치관에 대하여 냉정한 반성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우리는 와있는 것이다.
  노자의 <도>는, 이러한 현대인의 반성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경전의 하나가 될 줄로 믿는다. 인류의 행복은 <나>의 입장보다도 인간 본연의 추구를 통해서 비로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자>는 현대 세계가 혼란해질수록 더욱 인간의 예지(叡智)가 담긴 위대한 저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동양인으로서는 올바른 동양인으로서의 자아(自我)를 되찾기 위해서도 꼭 읽어보아야만 할 책이라고 믿는다.

 

 

▶ 노자[책]의 전래와 그 연구

 

<노자>란 책은 이미 전국시대부터 상당히 세상에 알려졌었다. <순자><여씨춘추>에 이미 노자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보이고, <한비자>에는 해로편 유로편 같은 <노자도덕경>의 중요한 내용을 강설한 부분이 있다. 같은 <한비자> 현학편에서 '세상의 두드러진 학파는 유가와 묵가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가의 세력이 유가나 묵가만은 못했던 것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유가와 묵가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며는 세상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곧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비하여, 도가들은 일체의 사람들의 의식적인 작위를 부정하고 물러나 자신을 세상에 들어내지 않으려고 했던 학파이므로, 자연히 유가나 묵가처럼 세상에 두들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이미 전국시대에 유가나 묵가 못지 않은 중대한 영향을 세상에 미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한비자>는 황제와 노자의 학문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그 밖에 양주·신도·전변·접자·환연 등이 노자의 사상에 직접 간접으로 양향받고 있고, 심지어 병가인 <손자>에까지도 그의 영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리고 노자와 함께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알려진 장자의 저서 <장자>를 보면 여러 군데에 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천하편에서는 노자를 중요한 학파의 하나로 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장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노자>의 사상을 부연 발전시킨 것이다. 근인 임어당이 영역한 <노자>를 보면 매 장마다 그 아래 <장자>에 보이는 같은 성질의 문장을 참고로 인용하고 있어 <노자>와 <장자>의 관계를 알아보기에 편하다. 이 책에 의하면 <노자>의 거의 모든 장 아래 같은 성질의 <장자>의 말이 인용되고 있어, <노자>의 각 장에 보이는 사상은 거의 모두 <장자>에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대로 들어와서는 초기에는 황제나 황후 및 고관들 중에 노자의 술법을 좋아하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 고조 때에는 조참이 황노의 술법으로 제나라를 다스리어 명성을 크게 떨친 뒤, 다시 한나라의 상국으로서도 훌륭한 정치를 했었다. 그리고 황제 중에서는 문제와 경제가 도학을 좋아했고, 경제의 어미니 두태후는 열렬한 도학의 옹호자였다. 따라서 한나라 초기 경제시대에 도학은 극성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노자>의 권위도 이 무렵에는 대단히 높아졌을 것이다. 청대의 초횡도 <초씨필승> 권삼에서 '<노자>는 본시 자서였는데 한나라 경제 때에 비로서 경으로 바뀌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근거로 한 것이 삼국시대 오나라 학자의 말이어서 확실한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사실은 역사적인 여건들로서 볼 때 틀림없는 얘기일 것같다. 고조와 혜제시대에는 조참 이외에도 진평과 육가, 문제와 경제시대에는 등장·왕생·전숙·직불의·사마담, 무제때에는 급암과 정당시 등이 모두 도학을 좋아했었다. 따라서 무제 이후로는 유학이 한대정치의 이론적 근거로 확립되었다고 하지마는, 실상 음으로는 도학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였고, 유학 자체도 형이상학적인 이론과 사유에 있어 도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지금 전하는 하상공본 <노자>는 한나라 문제때의 하상에 숨어살던 이가 주를 단 책이라 한다. 그러나 근래, 모두 이것은 유조시대에 씌어진 책이어서 왕필본보다도 오히려 뒤늦게 나온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다만 전한 초기에 <노자>의 연구가들이 이미 나왔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후한으로 들어와 환제 같은 노자의 존숭자가 나왔던 것도 전한의 앞에서 얘기한 기풍이 은연 중 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제는 노자를 고현의 사당에 모셨고, 변소라는 학자에게 명하여 노자를 칭송하는 비명까지 짓게 하였다.
  후한의 정치가 어지러워지면서 도학을 좋아하는 경향은 지식인들 간에 더욱 심하여졌고,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송명청으로 이어지기까지 황실중에서도 노자를 떠받드는 습속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사대부들을 비롯한 일반사회에는 더욱 그 학문이 유행했었다. 중국사회는 겉으로는 유교가 그 윤리의 바탕이 되어 왔지만 사회 생활 속 깊숙한 곳에는 도가의 사상이 크게 퍼졌던 것이다. 그중에도 전한때의 사마담의 도학 존숭을 비롯하여, 한말 오두미도를 내세웠던 장로가 그의 전 신도들에게 <노자> 오천문을 외우게 했던 일, 진나라 시대 죽림칠현이 나와 도가의 사상을 받들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살았던 일 같은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사건들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위나라 왕필에 의하여 지금 전해지는 판본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주석이 씌어졌었다. 그리고 앞에 얘기한 것같은 도학의 성행으로 말미암아 그 뒤로는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노자>의 주석서들이 나왔다. 근인 마서륜의 <노자핵고>같은 것은 이 방면 연구의 좋은 참고서라 할 것이다. 마서륜을 비롯한 근래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노자>에는 수많은 판본들이 있지마는 그중의 근본적인 이본은 크게 다음과 같은 네가지라고 할 수 있다.
  1.왕필 <노자도덕경주>
  2.하상공<도덕진경주>
  3.부혁 <교정고본노자>
  4.당 현종 <도덕경주>
  이중 왕필본과 하상공본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설명을 하였다. 특히 하상공본은 한나라 문제때의 은사인 하상공이 쓴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왕필본보다도 늦은 육조무렵의 작품인 듯 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돈황에서 나온 당초본들과 일본에 전해진 고초본들 및 당대의 <도덕경> 경비와 경당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이들을 종합해 볼 때 하상공본의 체재가 왕필본보다는 고형인 것으로 생각된다. 세째 부혁본은 당나라 초기의 도사 부혁이 왕필본과 하상공본을 비롯한 몇가지 다른 판본의 <도덕경>을 비교하여 심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맨 끝의 당나라 현종주본은 임금 스스로가 <노자도덕경>의 원문에 많은 이동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통일하고 또 그때 왕필본과 하상공본의 두가지 판본에 대한 우열의 문제가 시끄러웠으므로 이것을 귀일시키기 위하여 개원이십년 임금 자신이 쓴 것이라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왕필본과 하상공본을 기초로 한 주석서이다. 그리고 직례의 역주에는 개원 이십육년 시월에 세운 <개원어주도덕경비>와 <개원어주도덕경당>이 있고, 같은 직례 형대에는 그 다음 해인 개원 이십칠년에 세운 <개원어주도덕경비>와 <개원어주도덕경당>이 전한다. 이미 위진남북조시대부터 당송원명청에 이르는 각 시대마다 수많은 <노자>의 주해서들이 쏟아져 나왔었지만 모두 크게는 이 네가지 주해서의 기본적인 입장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청대에 고증학이 크게 성행한 뒤로 노자의 생애와 그의 저서인 <노자도덕경>에 대한 고증학적 연구업적이 두드러지게 나왔다는 것도 특기할 일이다. 그중에도 명대 초횡의 <노자익>과 <노자고이>를 비롯해 청대의 위원의 <노자본의>, 손이양의 <노자찰이>, 왕념손의 <노자잡지>, 혜동의 <노자집해>, 필원의 <노자고이>, 유월의 <노자평의>, 노문소의 <노자음의고증>, 유사배의 <노자핵고>, 마기창의 <노자고>, 우성오의 <노자신증>, 나진옥의 <노자고이>, 고형의 <노자정고> 및 그 <보정>, 양수달의 <노자고의>, 전목의 <노자변>, 양가락의 <선진노학문헌고>·<노자년보>·<노자서목>·<의로문헌변정> 등의 저서와 함께 후외려의 <중국고대사회여노자>, 양가락의 <선진노학문헌급노자서전본원류신설>, 장백잠의 <노자인물고 및 노자저술고>, 호적의 <노자기인기서적년대문제> 등이 두들어진 연구 업적들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일본학자들의 노자 번역과 노자연구논문들이 있고, 유럽 여러나라에 소도 우수한 번역서와 연구업적이 나와 있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으로는 고 김경탁교수의 <노자>(한국자유교육협회 간행)가 가장 우수한 번역서라 할 것이다.

 

 

▶ 노자와 공자 일화

 

  노자는 주나라 수도 낙읍에서 몰락해가는 주왕실 서고를 지키는 기록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남아있는 주대의 귀중한 책들을 밤낮으로 접할 수 있었다. 노자는 공자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공자가 익히 알고 있는 예의 규범에 관해서도 노자가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의(葬儀) 때 일식(日食)에 부딫치면 어떻게 하는가? 자식이 죽었을 때 묘소를 가까이 할 것인가 멀리할 것인가? 나라에 상사(喪事)가 있을 때 전쟁을 피할 것이냐 어찌할 것이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죽은 국왕의 위패를 딴 곳으로 옮길 것이냐 그만둘 것이냐? 등등의 문의에 노자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명확하게 답을 주었다.

  공자는 낙양에 수일 동안 머물다가 귀로에 올랐다. 노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전송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듣자하니 사람들이 전송을 할 때,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주고, 돈이 없는 사람은 충고나 격려의 말을 남긴다고 합니다. 나는 돈도 없는 데다 잠시나마 도덕과 학문이 있는 척하고 있으니, 당신께 몇 마디 남기고자 합니다. 첫째, 그대가 옛 성현이라고 우러러보던 이들은 이미 육체와 뼈마저 썩어 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남긴 헛소리분이외다. 그러니 옛 것을 익히되 새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어 언뜻 봐선 점포가 빈 것 같고 군자는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고 했소. 그러니 제발 그 교만과 욕심 그리고 잘난 체하는 병과 잡념을 내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외다."

  면박을 당한 공자는 노나라에 돌아와 제자들에게 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새가 잘 날고 물고기가 헤험을 잘 치며 짐승이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달리는 놈이라면 그믈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험치는 놈이라면 낚싯줄로 낚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은 화살로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라면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내가 오늘 만나 본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인물이다."

 

<자료: 천솔교>

 

 

 

  노자

 

 

노자(老子)의 인간관계(人間關係)의 5계명(五誡命)

 

좋은 인간 관계는 인생의 윤활유 노자(老子)는 주나라의 궁정 도서실의 기록 계장(도서 관리인)이었다가 후에 궁중 생활이 싫어 유랑의 길을 떠났다 노자의 행적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자의 '도덕경'에 나타난 사상에서 인간관계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째, 진실함이 없는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지 말라.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사람을 추켜세우거나 머지않아 밝혀질 사실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회유하면서 재주로 인생을 살아가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언젠가는 신뢰받지 못하여 사람 위에 설 수 없게 된다.

둘째, 말 많음을 삼가라. 말이 없는 편이 좋다 말없이 성의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신뢰를 갖게 한다 말보다 태도로서 나타내 보여야 한다.

셋째, 아는 체하지 말라.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너무 아는 체하기보다는 잠자코 있는 편이 낫다. 지혜 있는 자는 지식이 있더라도 이를 남에게 나타내려 하지 않는 법이다.

넷째, 돈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돈은 인생의 윤활유로서는 필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돈에 집착한 채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다섯째, 다투지 말라. 남과 다툰다는 것은 손해다 어떠한 일에나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자기의 주장을 밀고 나가려는 사람은 이익보다 손해를 많이 본다 다투어서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어도 인간관계가 좋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도 많다 좋은 인간관계는 인생의 윤활이자 처세의 기본이기도 하다

- 노자 -

 

 

도덕경(道德經)

노자(老)

 

T'ang Yin, "Lofty Scholars

 

 

 
老子 제1장 -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라 말할 수 있는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요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언제나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처음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는 것으로 미묘한 본체를 살피고
 항상 욕심이 있는 것으로 그 순환하는 현상을 살핀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을 달리하며 둘다 현묘한 것이라고 한다.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모든 미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老子 제2장 - 스스로 공을 자처하지 않는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니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추악한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고,
선하다고 하니 선한 줄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가 낳는 것이고,
어렵고 쉬운 것이 서로가 이루고,
길고 짧은 것은 형태를 드러내어 서로 비교되기 때문이며,
높고 낮은 것이 서로 기울어지고,
음과 성은 서로가 있어야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앞이 있어야 뒤가 따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작위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한다.
 
천지 자연은 만물을 활동하게 하고도 노고를 사양하지 아니하며,
만물을 생육하게 하고도 소유하지 않는다.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공을 이루어도 자기의 공로를 자처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공은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는다.
 
 
老子 제3장 - 현능함을 높이지 않으면 다툼이 없다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현능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고 경쟁하는 일이 없게 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둑질하는 일이 없게 되고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야욕을 보여 주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은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의 마음에 아무런 욕심이 없게 하고
배를 든든하게 채워 주며 밖으로 향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약하게 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골격을 튼튼하게 한다.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앎도 없고 욕심도 없게 하며
 아는 자로 하여금 감히 작위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의 다스림으로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없다.
 
 
老子 제4장 - 도는 우주보다 먼저 존재했다
 
道, 沖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좌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
 
도는 비어 있으나 아무리 사용해도 늘 가득 차 있고 넘치지 않는다.
깊고 넓어서 만물의 근본인 것 같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복잡한 것을 풀며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에도 뒤섞이건만
맑고 고요함이 늘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우주를 주재하는 상제보다도 먼저 있었던 것 같다.
 
 
老子 제5장 - 말이 많으면 막히게 된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탁약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천지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추구로 여긴다.
성인도 어질지 않아서 백성들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와 같이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비어 있으나 힘이 끝이 없고 움직일 수록 힘이 더욱 커진다.
말이 많으면 이치에 곤궁하게 되니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
 
 
老子 제6장 - 도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도는 텅 빈 산골짜기의 신과 같고 그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현빈이라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근본이라 한다.
그 뿌리는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같고 천지만물이 아무리 써도 지쳐 없어지지 않는다.
 
 
老子 제7장 - 사심을 버림으로 존재하게 된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오래다.
천지가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살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영원히 살 수 있다.
 성인은 자신을 뒤에 머물게 함으로 앞서고 자신의 이익을 떠나 잊으므로
실은 자신이 거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사로운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심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老子 제8장 -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거의 가까운 것이다.
사는 곳으로는 땅 위가 좋고, 마음은 못처럼 깊은 것이 좋고,
벗은 어진 사람이 좋고, 말은 믿음이 있어야 좋고,
정치나 법률은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것이 좋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능숙한 것이 좋고,
행동은 적당한 시기를 아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물은 이에 제일 가깝다.
 
 
老子 제9장 -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
 
持而盈之, 不如其已. 취而銳之, 不可長保. 
金玉萬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무리해서 계속 유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들겨 날카롭게 만든 칼은 오래가지 못하고
금은 보화를 집안에 가득 쌓아둔다고 해서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는 없다.
부귀하여 교만하게 되면 스스로 화를 부르게 될 것이다.
일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천도의 이치이다.
 
 
老子 제10장 - 낳고 기르되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孀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
 
천지의 만물을 만들어 내고 또 길러 내고 만들어 내면서도
 그 공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작용하게 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만물을 기르면서도 이를 지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현묘한 성인의 덕이다. ..
 
 

 


老子 제11장 - 비어 있음으로 쓰임이 있다.
 
十輻共一곡. 當其無, 有車之用.
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爽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서른개의 바큇살이 바퀴통에 모여 있으나, 바퀴통 복판이 비어 있음으로 쓸모가 있고,
찰흙을 이겨 옹기그릇을 만드나, 그 한가운데가 비어 있어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만들어 방을 만드나, 안이 비어 있기 때문에 방으로 쓸모가 있다.
그러므로 모양이 있는 것이 쓸모가 있는 것은 모양이 없는 것이 그 뒷받침을 하기 때문이다.
 
 
老子 제12장 - 배를 채울 뿐 겉치레는 하지 않는다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田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妨,
是以聖人 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오색의 찬란한 빛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의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오미의 좋은 맛은 사람의 입을 버려 놓는다.
말을 타고 짐승을 사냥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어려운 재물은 사람의 행실을 나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배를 채울 뿐 겉치레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고 한다.
 
 
老子 제13장 - 괴로움이 다 하면 즐거움이 온다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辱若驚.
寵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何謂貴大患若身.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
 
은총도 굴욕도 깜짝 놀랄 일을 당하는 것과 같이하고
큰 근심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제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과 같이 하라.
 
 은총도 굴욕도 깜짝 놀랠 일을 당하는 것과 같이 하라 하는 것은
사랑 받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행하여지므로 얻어도 잃어도 조심하며 놀랍게 여기라는 것이니
 이래서 은총과 굴욕은 깜짝 놀랄 일을 당하는 것과 같다 하는 것이다.
 
큰 근심을 피하려 하지 말고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과 같이하라 하는 것은
 나에게 큰 근심이 있음은 나의 몸이 있기 때문이니 내 몸이 없으면 내게 어찌 근심이 있겠는가?
내 몸을 소중히 여기듯이 천하를 소중히 여긴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고
내 몸을 사랑하듯이 천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부탁할 수 있다.
 
 
老子 제14장 - 도는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것이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교,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恍惚.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눈을 크게 뜨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빛이 없다고 한다.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 해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기 때문에 소리가 없다고 한다.
손으로 쳐보고 만져보아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기 때문에 형체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말로는 도의 정체를 제대로 규정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말을 섞어 하나로 한 존재인 것이다.
 
그 위 부분은 분명하지가 못하고 그 아랫 부분은 어둡지가 않다.
휑하여 이름 붙일 수가 없고 물질 세계를 초월한 곳으로 되돌아가 있다.
이 것을 모양 없는 모양, 물질의 차원을 초월한 형상이라 한다.
어렴풋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앞에서 본다고 그 머리가 보일 리 없고 뒤에서 본다고 그 꼬리가 보일 리 없다.
태고 때부터 진리를 꼭 잡고 삼라만상을 주재하고 있다.
역사와 시간의 첫 근원을 알 수 있는 것, 그 것을 도의 본질이라 한다.
老子 제15장 - 참된 사람은 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客,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動之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而新成
.
 
예로부터 도를 닦은 훌륭한 선비는 미묘하고 심원하여 그 깊이를 헤아려 알 수가 없다.
깊이를 헤아려 알 수 없기에 모습을 억지로 묘사해 보면
그 신중한 모습은 추운 겨울에 찬 냇물을 건너가는 것과 같고
조심하는 모습은 주위를 둘러싼 적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숙해서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은 손님의 당당한 모습과 같고
부드럽게 막힘이 없는 것은 봄바람에 녹는 어름과 같다.
꾸밈이 없는 것은 마치 산에서 갓 베어낸 통나무와 같고
 구애되지 않는 마음은, 텅 비어 있는 골짜기와 같으며
세상과 한데 섞여 있는 모습은, 마치 흐려진 물과도 같다.
 
흐린 물을 흐린 채 그대로 두어 서서히 가라앉아 맑아지게 하는
 그런 무위의 일을 그 누가 하겠는가?
산골짜기처럼 조용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 풀과 나무가 서서히 자라고 있듯이,
그런 무위의 것을 누가 하겠는가?
이 무위의 도를 몸에 품고 있는 사람은 보름달처럼 꽉 차 있는 것을 바라는 일이 없다.
그렇게 차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옷이 낡으면 새 것을 만들어 입듯이 변화 속에 다함이 없다.
 
 
老子 제16장 - 자신 본래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라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마음이 텅 빈 극치에 이르고 참답게 무위의 고요함을 지키게 되면
만상의 온갖 움직임이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만상이 갖가지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저마다 자신의 뿌리고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뿌리고 돌아가 있는 것을 고요, 무위의 고요함이라 말하고 고요한 것을
명, 각자 본래의 참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고 한다.
명에 돌아가 있는 것을 떳떳함, 영원불멸이라 말하며 떳떳함 본연의 모습에 눈뜨는 것을
밝음, 절대의 지혜라 한다.
 
떳떳한 모습을 깨닫지 못하면 경거망동해서 불길하다.
떳떳한 것을 깨달으면 누구에게 대해서나 너그럽게 되고 너그럽게 되면 공평무사하며,
왕자의 덕을 갖추게 되고 왕자의 덕을 갖추면 하늘과 같이 광대해지며
 하늘처럼 넓고 커지면 무위의 도와 하나가 되고 무위의 도와 하나가 되면 영원불멸이 된다.
몸을 마칠 때까지 편안히 살게 되는 것이다.
 
 
老子 제17장 - 최상의 다스림은 존재만을 알게 하는 것이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而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
 
최상의 군주는 백성들이 다만 임금이 있다는 것을 알 뿐인 군주이다.
백성들이 다정함을 느끼고 칭송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지배자를 두려워하는 정치는 그 아래이며 백성들이 업신여기게끔 되면 가장 낮은 지배자다.
지배자에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실함이 부족하면 백성들로부터 신용을 얻지 못한다.
최선의 군주는 무위의 정치를 하기 때문에 공을 이루어도 백성들에게 자랑하지 아니하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老子 제18장 - 지혜가 있으므로 속임이 있게 되었다
 
大道廢, 有仁義, 智慧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
 
큰 도가 행해지지 않게 되자 인이니 의니 하는 것이 강조되게 되었고,
지혜가 발달하니 거짓이 있게 되었다.
집안 사람끼리 불화가 생기게 되니 효니 자애니 논란이 생기게 되고,
나라의 질서가 문란해지면 충신이란 것이 만들어지게 된다.
 
 
老子 제19장 - 순박한 마음으로 욕망을 버려라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者 以爲文不足.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정치하는 사람이 재주와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행복과 이익은 백 배가 되고
정치하는 사람이 인과 의를 버리면 백성은 본래의 사랑과 효도로 돌아가게 된다.
 정치하는 사람이 제도와 도구를 버리면 세상에 도둑과 범죄는 생기는 일이 없다.
위의 세 얘기로도 무위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다음의 말을 덧붙인다.
본 바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켜 사사로운 정을 억누르고
 나를 위한 욕심을 적게 하라.
 
 
老子 제20장 -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何若. 人之所畏, 不可不畏.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亨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如孀兒之未孩. 내래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요兮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我獨異於人而貴食母
.
 
학문을 그만두면 근심이 없다.
 '네'나 '응'이나 대답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막막해서 끝이 없다.
사람은 그저 마음이 들떠서 잘 차린 상을 받은 손님 같고,
봄날 높은 대에 오른 구경꾼 같다.
 
그러나 나만은 조용히 마음이 움직이는 기색마저 없고,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이와 같다.
초라하니 풀이 죽은 주인 없는 나그네 같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는데 나만은 늘 가난하다.
내 마음은 바보의 마음, 그저 멍청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활발한데, 나만은 흐리멍덩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상세하고 분명한데, 나만은 우물쭈물 결단을 못 내린다.
바다처럼 흔들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정처 없다.
사람들은 다 유능한데, 나만은 우둔하고 촌스럽다.
나만이 남다른 사람이라 먹이고 길러준 어머니의 도를 소중히 하고 있다.
 
..
老子 제21장 - 도는 심오하고 그윽하다
 
孔德之容, 惟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큰 덕을 지닌 사람의 모습은 오로지 도만을 따르고 있다.
도라는 것은 그저 어두워 잘 분간할 수 없고
 분간할 수 없는 어두움 속에도 무엇인가 모양이 있으며
어두워 분간할 수 없는 속에도 무엇인가가 실재하고 있다.
심오하고 그윽한 속에 영묘한 정기가 들어 있고 그 정기는 다시없이 참된 것으로
그 속에 창조자로서의 뚜렷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이 도라 불리고 있어 수많은 족장들을 거느리는 총령과 같다. 족장들의 실상을 내가 아는 것은 총령의 도에 의해서이다.
 
 
老子 제22장 - 굽은 나무는 베어지지 않는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폐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 抱一爲天下式, 不自見故明,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
夫惟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굽은 나무는 수명을 온전히 마치게 되고, 자벌레는 몸을 굽힘으로써 뻗을 수도 있게 된다.
 물은 우묵한 웅덩이로 흘러 모이게 되고, 옷은 낡아 해어져야만 다시 새 것을 입게 된다.
욕심이 적으면 마음의 만족을 얻을 수 있고, 지식이 많으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위 자연의 성인은 하나인 도를 지켜 천하의 법이 되는 것이다.
무위 자연의 성인은 자기를 내세우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뚜렷해지고,
자신을 옳다 하지 않기에 그 좋은 것이 세상에 나타난다.
 자기의 공을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이 자기의 것이 되고,
자신의 우쭐댐을 버리기에 언제까지고 존경을 받게 된다.
성인은 절대로 남과 다투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그를 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없다.
 
옛 사람이 말하거늘 굽은 나무는 제 수명을 다한다고 했는데,
참으로 인생의 진리를 제대로 말한 것이다.
참으로 굽은 나무가 되어 내 몸을 온전히 하고, 온전한 몸을 대자연에 되돌려 주는 것이다.
 
 
老子 제23장 - 퍼붓는 소나기로는 하루종일 내릴 수 없다
 
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故從事於道者, 道者同於道, 德者同於德, 失者同於失.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들어도 들리지 않는 말은 유구한 무위의 자연이다.
시끄러운 회오리바람으로는 아침 내내 계속 불지 못하고
퍼붓는 소나기로는 온종일 내리지는 못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지가 하는 일이다.
천지가 비바람을 계속되게 하지 못한다면 사람으로야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무위자연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도일 경우에는 그 도와 하나가 되고 덕일 경우에는 그 덕과 하나가 되며
실덕일 경우는 그 실덕과 하나가 된다.
도와 하나 되면, 도 또한 그를 얻어 기뻐하고 덕과 하나 되면, 덕 또한 그를 얻어 기뻐하며
 실덕과 하나 되면, 실덕도 그를 얻어 기뻐한다.
무위자연의 명백한 증명이 결여된 말은 누구로부터도 신용을 얻지 못한다.
 
 
老子 제24장 - 발돋움으로는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其在道也, 曰餘食贅行.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
 
발돋움하는 자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큰 걸음으로 급히 걷는 사람은 멀리 걸어가지 못한다.
나를 내세워 자랑하면 뚜렷하게 나타내어지지 않고
나를 옳다고 하면 그 착한 것도 드러나지 않게 된다.
내 공을 자랑하면 그 공도 소용없게 되고 혼자 우쭐거리면 곧 그 앞이 막히게 된다.
이와 같은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무위의 도에 있어서는 먹다 남은 밥, 소용없는 행동이라 부른다.
누구나 늘 싫어하며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에 도 있는 사람은 그 곳에 몸을 두지 않는다.
 
 
老子 제25장 - 도의 본 모습은 자연이다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혼돈하여 하나가 된 그 무엇이 천지가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해 있었다.
그것은 고요하여 소리도 없고, 아득하여 모양도 없고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느 것으로도 변하지 않으며 삼라만상에 두루 나타나 잠시도 쉬는 일이 없다.
그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실상 그 이름마저 알 수 없다.
임시로 이름 지어 도라 하고, 억지로 이름 붙여 크다 하자.
 이 큰 것은 크기 때문에 흘러 움직이고
 흘러 움직이면 끝이 안 보이는 넓이를 갖게 되고
멀고 먼 넓이를 가지면 또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이리하여 도는 큰 것이라 불리지만 큰 것으로는,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제왕도 또한 크다.
이 세상에는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제왕이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제왕은 인류의 지배자로서 땅의 참모습을 본받고
 땅은 하늘의 참모습을 본받으며 하늘은 다시 도의 참모습을 본받는다.
그리고 도의 본 모습은 자연이기 때문에 도는 다만 자연을 본받아 자유자재 한다.
 
 
老子 제26장 - 조급하면 지위를 잃게 된다
 
重爲輕根, 靜爲躁君.
是以聖人. 終日行, 不離輜重, 雖有榮觀, 燕處超然.
柰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근본이 되고 고요한 것은 시끄럽고 조급한 것의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무위의 성인은 종일 길을 가도 짐을 몸에서 버리지 않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에도 초연하다.
어찌 제왕이 된 자가 세상에 대해 몸을 가볍게 움직이겠는가?
경솔하게 행동하면 자신의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하면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老子 제27장 - 잘 가는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善行, 無轍迹, 善言, 無瑕謫, 善數, 不用籌策.
善閉, 無關楗而不可開, 善結, 無繩約而不可解,
是以聖人, 常善求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是謂要妙.
 
잘 가는 사람은 지나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에 흠이 없으며
계산을 잘하는 사람은 계산기 따위를 쓰지 않는다.
문을 잘 닫는 사람은 빗장을 걸지 않아도 열리지 않게 하고
 잘 묶는 사람은 매듭을 짓지 않아도 풀어지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무위의 성인은 사람을 구하여 잘 살려 나가며
어떤 사람도 버리는 일이 없고 항상 물건을 잘 다스려 쓰되 어떤 물건도 버리는 일이 없다.
이것을 밝은 지혜를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한다.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이 본받는 스승이 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반성에 도움이 된다.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고 내 몸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알 바를 전혀 모르게 된다.
이 것을 신비한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老子 제28장 - 통나무가 쪼개지면 그릇이 될 뿐이다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孀兒.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 , 復歸於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
 
수컷의 성질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암컷의 유연함을 지키어 나가면
 천하의 모든 것이 흘러드는 골짜기가 되고
 천하가 모여드는 큰 골짜기가 되면 영원불변의 덕이 깃 들어
순수한 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밝고 명확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어둡고 아득함을 지켜 나가면
온 천하가 본받는 사표가 되고 온 천하가 본받는 사표가 되면
영구불변의 덕에 어긋남이 없이 한없는 도의 세계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속세의 영화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욕된 생활을 참고 견뎌 내면
 온 세상이 돌아오는 큰 골짜기가 되고 온 천하가 돌아오는 큰 골짜기가 되면
영구불변의 무위의 덕으로 가득 차 있어 손대지 않은 통나무의 소박함으로 뒤돌아가게 된다.
통나무를 쪼개어 그릇을 만들 수 있듯이 소박함을 끊어 인재를 만들 수 있지만
성인이 그들을 쓸 때는 고작 한 분야의 우두머리로 쓸 뿐이다.
그러므로 크게 쓸 때에는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고 통나무의 소박함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老子 제29장 - 세상은 신비로운 그릇과 같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故物, 或行或隨, 或허或吹, 或强或羸, 或挫或휴,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세상을 장악하여 다스려 보려 하여도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세상은 신비로운 것이어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잘 해보려고 해도 실패하게 되고 잡으려고 하면 놓치게 되고
 스스로 앞서가는 것도 있고 뒤만 따라가는 것도 있다.
숨을 내쉬기도 하고 들이쉬기도 하며 강한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으며
위에 얹히는 것도 있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지나친 것을 버리고 사치를 버리고 교만함과 태만함을 버린다.
 
 
老子 제30장 - 전쟁은 전쟁을 불러온다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善者果而已. 不敢以取强.
果而勿矜, 果而勿伐, 果而勿驕, 果而不得已, 果而勿强.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무위자연의 도로 임금을 보좌하는 사람은 무력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 하지 않는다.
무력은 무력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군대가 주둔한 곳에는 가시나무가 자라고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들게 된다.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이루어 놓은 결과 이상의 것을 취하려 하지 않고
자랑하는 태도를 갖지 않고, 공을 내세워 교만하지 않으며
어찌할 수 없는 필연의 도리에 따라가되 그 이상 강대해지려 하지 않는다.
만물은 장성하면 반드시 쇠퇴하기 마련이니 강성한 것에 집착하는 것은 도에 벗어나는 것이다.
도에 벗어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
 
老子 제31장 - 도를 아는 사람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夫佳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
吉事尙左, 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言以喪禮處之, 殺人之衆, 以哀悲泣之. 戰勝以喪禮處之
.
 
무기는 모두 불길한 것으로 누구나 항상 싫어하는 것이니
도를 아는 사람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군자가 자연에 따라 일할 때는 왼쪽을 귀히 여기고,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할 때면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무기라는 것은 불길한 것이므로 군자가 사용하는 수단이 아니다.
군자가 어쩔 수 없이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욕심 없이 담담한 것을 제일로 삼고
 승리를 거두어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승리를 아름답게 여기는 자는 사람 죽이는 짓을 즐기는 자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좋은 일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흉한 일에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직접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은 왼쪽에 자리하고 전군을 통솔하는 장군은 오른쪽에 자리한다.
 이는 장례의 예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기 때문에 슬픈 마음으로 전쟁에 임하고
승리를 하였다 하여도 장례식과 같이 예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老子 제32장 - 도는 한결같고 이름을 초월한다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天地相合以降甘露, 民莫之令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可以不殆.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
 
도는 한결 같고 이름이 없으며 이름을 초월한 것이다.
도는 손대지 않은 통나무처럼 그대로인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천하도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 군왕이 만일 이러한 도를 따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장차 저절로 보배가 될 것이고
천지가 서로 화합하여 단비를 내리고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자연히 평등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통나무가 잘리고 쪼개져 많은 기구들이 생기듯 이것저것 분별하는
이름을 가진 제도가 생겨나면 이름을 가진 것의 한계를 알게 된다.
변하는 이름에 붙들려 있지 말고 변함없는 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위태로울 것이 없다.
도 있는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산골짜기의 개울이 시내가 되어
자연히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다.
 
 
老子 제33장 -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참으로 강한 사람이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밝은 사람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고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넉넉함을 아는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사람이다.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은 그 지위를 오래 지속하고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영원토록 사는 것이다.
 
 
老子 제34장 -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크게 된다
 
大道氾兮, 其可左右. 萬物恃之而生而不辭, 功成不名有.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
 
큰 도는 넉넉하여 한 곳에 못 박혀 있지 않아 좌우로 없는 곳 없이 자유자재 한다.
만물은 도에 의해 생겨나지만 한 마디 자랑도 하지 않고 만물을 이루어 낸 공이 있지만
그 공을 내 것으로 하지 않으며 만물을 길러 내면서 그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항상 욕심이 없고 아무 것도 갖지 않으므로 작다고도 볼 수도 있으나
세상 만물이 그 품에 돌아와 안기어도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으므로 크다고도 말할 수 있다.
 도는 자신을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기에 그 큰 것이 참으로 큰 것이 되는 것이다.
 
 
老子 제35장 - 진리는 평범하다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太.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
 
도를 지켜 살아가면 세상 어디를 가도 방해하는 것이 없어
항상 마음이 편안하고 화평하고 태평하다.
즐거운 음악과 좋은 음식이 있는 곳에서는 지나가던 나그네도 걸음을 멈추지만
무위의 진리는 그것을 입밖에 내더라도 담담하여 세속적인 맛이 없다.
눈 여겨 바라보아도 볼 수가 없고 귀 기울여 들어보아도 들을 수가 없고
그것은 써도 끝이 없는 무한한 기능이 있다.
 
 
老子 제36장 - 얻으려면 먼저 주어라
 
將欲흡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장차 움츠리게 하려면 잠시 펴지게 해준다.
장차 약하게 하려면 잠시 강하게 해준다.
장차 없애버릴 생각이면 잠시 흥하게 해준다. 이것을 미명이라 한다.
모든 유약한 것은 모든 강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가 연못 밖으로 나오면 살 수 없듯이 국가를 다스리는 이기는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老子 제37장 - 자연에 맡기면 저절로 바르게 된다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도는 항상 하는 것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도 없다.
만일 군주가 자연의 도를 따라 지켜 나가면, 만물은 저절로 생성하고 발전할 것이다.
저절로 생성하고 발전하게 만물에 맡기지 않고 인간들이 조작하려고 하면
 나는 그러한 짓을 못하게 자연의 덕으로 진정시키리라.
 
자연의 덕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고요하고, 욕심이 없어 고요하면 천하는 저절로 바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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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 제38장 - 도가 사라지니 인위적인 도덕이 나타난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上仁爲之而有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잉之.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是以大丈夫, 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
 
최상의 덕은 덕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덕이 있는 것이고
정도가 낮은 덕은 덕에 얽매이기 때문에 덕이 없다.
최상의 덕은 무위이며 자연스럽고 정도가 낮은 덕은 유위이며 부자연스럽다.
 
최상의 인은 유위이며 자연스럽고 최상의 의는 유위이며 부자연스럽다.
최상의 예는 유위이고 그 예에 반응이 없으면 팔을 걷어 붙이고라도 예로 이끈다.
무위자연의 도가 사라지면 무위자연의 덕이 나타나고
무위자연의 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인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고
인위적인 인의 도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고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예의 도덕이 나타나게 된다.
 
예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참다운 마음이 엷어진 것이며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시초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일을 미리 내어보는 지식이란 것은 도의 알맹이 없는 겉치레와 같은 것이며
세상을 어리석고 못나게 만드는 시초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사람은 두터운 쪽에 머물러 있고 엷은 곳에 머무르지 않으며
알맹이 있는 곳에 머물고 겉치레 쪽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와 지를 버리고 도를 택하는 것이다.
 
 
老子 제39장 - 높은 것은 낮은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一也. 天無以淸, 將恐裂.
地無以寧, 將恐發. 神無以靈, 將恐歇.
谷無以盈, 將恐竭, 萬物無以生, 將恐滅.
侯王無以貴高, 將恐蹶,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是以後王, 自謂孤寡不穀.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故致數譽無譽. 不欲록록如玉, 珞珞如石.
 
태초에 하나를 받아 얻은 것이 있으니
 하늘이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 맑고
땅이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 편안하며
신은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 신령하고
 골짜기는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 가득 차며
만물이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 생겨나고
임금은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 천하를 곧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게 만든 것이 곧 그 하나이다.
 
하늘이 맑지 못하다면 아마도 찢어질 것이고 땅이 편안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꺼질 것이며
신이 영험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신의 기능이 끝날 것이고
 골짜기가 가득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세상이 메마를 것이며
 만물이 생겨나지 못한다면 아마 아무 것도 없을 것이고
 만일 임금이 곧게 하지 못하고 높은 것만을 귀하게 여긴다면 아마도 그 나라는 파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낮은 것을 귀하게 하여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밑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임금은 스스로 외롭다 덕이 부족하다 선하지 못하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칭송 받는 명예를 원하게 되면 도리어 명예는 없어지게 되나니
찬란하게 빛나는 옥같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대굴대굴 돌처럼 구르는 것이다.
 
 
老子 제40장 -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도의 작용이다.
세상의 만물은 천지음양의 기운인 유에서 나오고 유는 형체가 없는 도인 무에서 나온다.

 


老子 제41장 - 큰 그릇은 더디 이루어진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
進道若退, 夷道若, 上德若谷, 太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참으로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그것을 실천하는데
중간 정도의 사람은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취하고
 아주 정도가 낮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숫제 같잖다는 듯이 크게 웃고 만다.
그들에게 비웃음을 살 정도가 아니면 참다운 진리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격언이 있다.
참으로 밝은 길은 얼른 보기에 어두운 것 같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얼른 보기에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며
펀펀한 길은 얼른 보기에 울퉁불퉁한 것처럼 보인다.
최상의 덕은 골짜기처럼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참으로 희고 깨끗한 것은 얼른 보기에 우중충해 보이며
참으로 넓고 큰 덕은 얼른 보기에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확고부동한 덕은 얼른 보기에 구차스러워 보이고
 참으로 진실한 덕은 얼른 보기에 절조가 없는 것처럼 보이며
 다시없이 큰 네모 난 것은 그 구석을 가지지 않는다.
참으로 위대한 인물은 보통 사람보다 그 성취가 늦고
다시없이 큰 소리는 도리어 그 소리가 귀에 잘 들리지 않으며
더없이 큰 형체를 가진 것은 도리어 그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도는 숨어서 모양이 보이지 않고
 사람의 말로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도란 것은 만물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고 그러면서 그 존재를 온전히 해준다.
 
 
老子 제42장 - 힘만 믿고 설치는 자는 제 명대로 살지 못한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 寡, 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 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 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
 
도가 하나의 기운을 낳고 하나의 기운이 나뉘어 음과 양 두 기운을 낳고
음과 양 두 기운이 합하여 제 삼의 기운이 되었고 그 세 기운이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의 기운을 등에 지고 양의 기운을 앞에 안아
충화의 기운에 의해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부덕하며 선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지만
임금은 스스로 외롭고 부덕하며 불선함을 숨기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은 손해가 이익이 되기도 하고 이익이 손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는 것을 나 또한 교훈으로 삼고 싶다.
힘을 믿고 앞세우는 자는 제 명대로 살지 못한다.
나는 이것을 가르침의 교훈으로 삼으려 한다.
 
 
老子 제43장 -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세상에서 제일 무르고 연한 물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단단한 쇠며 돌을 마음대로 다루고
 자신의 일정한 모양을 갖지 않는 물은 틈이 없는 곳으로도 마음대로 스며든다.
물의 예로 나는 부드럽고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삶 무위의 처세의 유익함을 아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는 가르침과 무위의 삶의 유익함의 예로 이 세상에서 물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老子 제44장 - 때를 알아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
 
명예와 생명 중 어느 것이 절실한가.
생명과 재산 중 어느 것이 소중한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괴로운가.
지나치게 바깥 것에 집착을 하면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너무 많이 재물을 쌓아 두면 결국은 그 만큼 잃게 된다.
 만족할 줄 알면 부끄러운 변을 당하는 일이 없고
적당히 그칠 줄 알면 위험한 꼴을 당하지 않아 오래도록 편안히 있을 수 있다.
 
 
老子 제45장 - 완전한 것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참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은 어딘가 잘못 되어진 것처럼 보이나,
아무리 써도 못 쓰게 되는 일이 없으며,
 참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언뜻 비어 있는 듯 보이나 쓰고 또 써도 부족함이 없다.
참으로 곧은 것은 도리어 굽은 것처럼 보이고,
참으로 잘하는 것은 어딘가 서툴러 보이며,
참으로 잘 하는 말은 어눌한 것처럼 들린다.
분주하게 움직이면 추위를 이길 수 있고,
고요히 있으면 더위가 물러가게 된다.
그러므로 맑고 고요하면 천하의 기준이 된다.
 
 
老子 제46장 - 만족 할 줄 알면 부족함이 없다
 
天下有道, 却走馬以糞,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故知足之足, 常足矣.
 
천하에 도가 있으면, 병마는 거름 내는 농마로 바뀌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농마도 징발되어 병마가 된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환난은 없고 얻으려고만 하는 욕심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를 만족할 줄 알면 언제나 부족함이란 없다.
 
 
老子 제47장 - 참 지식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不出戶, 知天下, 不窺爽,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집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세상을 알며, 창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하늘의 이치 알게 된다.
밖으로 알아보려고 나가면 나갈수록 참 지식은 작아져 아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돌아다니지 않아도 참다운 것을 알고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며 힘쓰지 않아도 절로 이루게 된다.
 
 
老子 제48장 - 하지 않아도 하지 못함이 없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 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학문을 하면 지식이 나날이 늘어 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욕심이 줄어든다.
줄이고 또 줄이면 무위에 이른다.
무위에 이르면 하지 않아도 못함이 없다.
세상은 언제나 무위로써만 얻게 된다.
일을 꾸미면 천하를 얻을 수 없다.
 
 
老子 제49장 - 성인은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聖人在天下, 흡흡爲天下渾其心. 聖人皆孩之
.
 
성인은 변하지 않는 고정된 마음이 없고 모든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한다.
성인은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선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성인의 덕이 참으로 선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람도 진실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진실하지 못한 사람도 진실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성인의 덕이 참다운 진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자기 개인의 주의와 주견을 세우지 않고
다만 온 백성의 마음을 모아 자기의 마음을 삼는다.
그래서 백성은 모두 성인의 이목을 주시하지만
성인은 모든 백성을 무지 무욕의 어린아이 같게 한다.
 
 
老子 제50장 - 삶에 집착하지 않으면 죽음도 없다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 動之死地, 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蓋聞善攝生者, 陸行不遇시虎, 入軍不被甲兵,
시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用其刃. 夫何故, 以其無死地
.
 
사람들은 삶에서 나와 죽음으로 들어간다.
오래 사는 사람이 열 명중에 세 명쯤 있고,
일찍 죽는 사람도 열 명중에 세 명쯤 있다.
또한, 오래 살 수 있는데도 공연히 움직여 죽음으로 가는 사람도 열 명중에 세 명쯤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너무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삶을 잘 지켜 길러나가는 자는 육지를 여행해도 외뿔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을 입지 않는다.
외뿔소도 그 뿔을 들이밀 틈이 없고, 호랑이도 발톱을 들이댈 틈이 없으며.
 병사도 칼날을 쓸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

老子 제51장 - 생육하고도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 是以萬物, 莫不存道而貴德.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 亭之毒之, 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元德.
 
만물은 도에서 나오고 덕이 그들을 기르고 물체마다 형체가 있게 하며
환경에 따라 그들을 성장시킨다.
만물은 도를 존경하지 않는 것이 없고 그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없다.
도를 존경하는 것과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에서 태어나고 덕이 그를 기르고 생장시키고 육성시키며
형태와 질을 주어 기르고 돌봐 준다.
도는 만물을 낳지만 소유하려 하지 않고
 만들었지만 자랑하지 않고 길러내면서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 한다.
 
 
老子 제52장 - 욕망을 막으면 근심이 없다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復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세상에는 처음이 있으니 그것을 천하의 어머니라 한다.
이미 모체를 알았으니 돌이켜 그 자식을 알 수 있다.
이미 자식을 알고 돌이켜 그 어머니를 지키면 몸이 다할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욕망의 구멍을 막고 문을 잠그면 몸이 다할 때까지 근심이 없을 것이고
욕망의 구멍을 열고 번거로움을 더하면 몸이 다하도록 고난을 벗어나지 못한다.
작은 것을 잘 보는 것을 밝다고 하고 부드러움을 지켜 나가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그 빛을 이용하여 밝음으로 돌아간다면 몸에 재앙이 닥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떳떳한 도를 지키는 것이라 한다.
 
 
老子 제53장 - 얕은 지혜가 생기니 위험한 지름길을 찾는다
 
使我介然有知, 行於大道, 唯施是畏,
大道甚夷, 而民好徑,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服文綵, 帶利劍, 厭飮食, 財貨有餘, 是謂盜과, 非道也哉
.
 
나에게 약간의 지혜가 있다면 무위의 큰길을 거닐며
 오직 사도에 잘 못 빠질까 두려워 할 것이다.
대도는 평탄한데 사람들은 위험한 지름길을 좋아한다.
조정은 깨끗한데 농촌은 황폐하고 창고는 텅 비어 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허리엔 날카로운 칼을 찾으며
맛있는 음식을 싫도록 먹고 재물은 남아돈다.
이러한 것을 도둑의 사치라 한다.
어찌 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老子 제54장 - 도의 효능은 넓고도 커서 끝이 없다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修之於身, 其德乃眞, 修之於家, 其德乃餘, 修之於鄕, 其德乃長,
修之於國, 其德乃豊,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확고히 세운 것은 쉽게 뽑히지 않고 제대로 안은 것은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도를 지키어 나가면 자손의 제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도로 몸을 다스리면 그 덕은 참된 것이 되고
 도로 가정을 다스리면 그 덕은 여유가 있게 되고
도로 고을을 다스리면 그 덕은 오래도록 이어지고
도로 나라를 다스리면 그 덕은 나라를 풍족히 하고
도로 천하를 다스리면 그 덕은 천하에 두루 미친다.
 
그러므로 몸으로 몸을 보고 가정으로 가정을 보고 고을로 고을을 보고
나라로 나라를 보고 도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본다.
 
무엇으로 세상이 그리되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도의 광대무변한 효능에 의해 알 수 있다.
자연의 도가 아닌 것은 곧 막힌다.
 
 
老子 제55장 - 덕이 깊음은 어린아이와 같다.
 
含德之厚, 比於赤子, 蜂채훼蛇不석, 猛獸不據, 攫鳥不搏.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全作, 精之至也.
終日號而不사, 和之至也. 知和曰常, 知常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덕을 두터이 품은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 벌도 전갈도 뱀도 쏘거나 물지 않고
맹수도 덤비지 않고 사나운 새도 덮치지 않는다.
뼈는 약하고 근육은 부드럽지만 쥐는 힘은 강하다.
 암수의 교합에 대해 아직 모르지만,
생식기가 저절로 일어서는 것은, 정기가 극치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종일을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가 극치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변함이 없는 도라 하고, 변함없는 도를 아는 것을 밝은 지혜라 한다.
무리하여 연명하는 것을 좋지 못한 징조라 하고, 마음으로 기를 다스려 쓰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만물의 기세가 너무 왕성하면 곧 쇠퇴하는 것을, 일컬어 영원히 변치 않는 도가 아니라 한다.
자연의 도가 아닌 것은 금방 그치고 만다.
 
 
老子 제56장 - 아는 사람은 말이 많지 않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疎,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참으로 알지 못한다.
감각의 구멍을 막고 욕망의 문을 닫으며 예리함은 무디게 하고
복잡함은 풀어 없애며 앎의 빛을 흐리게 하여 혼탁한 먼지와 동화된다.
이것을 도와의 현묘한 합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묘한 합일을 이룬 사람은 얻어 친근히 여기지 않고,
소홀히 여기지도 않으며 얻어서 이롭다 여기지 않고,
해롭다 여기지도 않으며 얻어서 귀히 여기지 않고, 천히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에 더할 수 없는 가치가 된다.
 
 
老子 제57장 - 법령이 많을수록 도둑은 는다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吾何以知其然哉, 以此, 天下多忌諱, 而民彌貧, 民多利器, 國家滋昏,
人多伎巧, 奇物滋起, 法令滋彰, 盜賊多有,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나라는 정의로 다스려야 하고 전쟁은 기이한 계교로 한다.
 하지만 천하는 행하지 않음으로 얻을 수 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것에 의해서다.
세상에 규제하는 것이 많을수록 백성들은 가난해 지고
백성에게 문명의 이기가 많을수록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이 기교를 많이 부릴수록 기이한 물건이 많이 나오고
법령이 많이 정비되면 될 수록 도둑은 더 많이 늘게 된다.
 
성인이 말하기를, 내가 무위로 대하면 백성들은 감화되고
내가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하면 백성이 바르게 되고
 내가 무위무사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풍족해 지고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통나무처럼 순박해진다.
 
 
老子 제58장 -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
 
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日固久,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귀, 直而不肆, 光而不燿
.
 
정치가 대범하면 백성들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분명하면 백성들이 다투게 된다.
화는 복이 의지하는 곳이고 복은 화가 숨는 곳이다.
누가 그 궁극을 아는가. 절대적인 올바름이란 없다.
바른 것이 기이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이 요사한 것으로 변한다.
사람들이 상대성을 깨닫지 못한지 오래다.
그래서 성인은 반듯하지만 남에게 그리 되라 하지 않고
자신이 청렴하다고 남 또한 그렇게 만들려 하지 않고
자신이 바르다고 그대로 밀고 나가려 하지 않고 영지의 빛을 간직하고도 내 비치지 않는다.
 
 
老子 제59장 - 검소함은 도를 따르는 것이다
 
治人事天, 莫若嗇, 夫唯嗇, 是以早服,
早服, 謂之重積德, 重積德, 則無不克,
無不克, 則莫知其極, 莫知其極, 可以有國,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저, 長生久視之道.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검소함이다.
오직 검소한 것을 일찍 도를 따른다 하고 일찍 도를 따르는 것을 덕을 쌓는다고 한다.
덕을 많이 쌓으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고
 극복 못할 것이 없으면 아무도 그 끝을 알지 못한다.
무한한 기능을 가지게 되면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
나라의 어머니인 검소함이 나라를 오래 보존한다.
이것을 뿌리를 깊게 하고 근본을 굳게 하여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도라 한다.
 
 
老子 제60장 - 도로 세상을 다스려라
 
治大國, 若烹小鮮, 以道리天下, 其鬼不神,
非其鬼不神, 其神不傷人,
非其神不傷人, 聖人亦不傷人, 夫兩不相傷, 故德交歸焉.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물고기를 삶는 것과 같다.
도로 세상을 다스리면 귀신도 신령한 힘을 잃는다.
귀신이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귀신의 힘이 사람을 해치지 않을 뿐더러 성인도 역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귀신과 성인이 서로 해치지 않으므로 그 덕이 어울려 백성에게 돌아간다.

..
老子 제61장 -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손해야 한다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其所欲, 大者宜爲下
.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아서 세상의 모든 흐름이 만나는 곳이고
또한 천하가 사모하는 암컷이기도 하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항상 아래에 있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자신을 낮추면 작은 나라를 얻게 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자신을 낮추면 큰 나라가 그를 받아들인다.
어떤 것은 낮은 자세로서 남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낮은 자세로써 남에게 받아 들여 진다.
큰 나라가 바라는 것은 아울러 기르려는 것뿐이고, 작은 나라는 속하여 보호를 받고자 할 뿐이다.
 만약 양쪽이 각기 바라는 대로하고 싶다면 마땅히 큰 쪽이 아래가 되어야 한다.
 
 
老子 제62장 - 선하지 않은 사람도 도를 간직하고는 있다
 
道者, 萬物之奧,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
美言可以市尊, 行可以加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故立天下, 置三公, 雖有拱壁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古之所以貴此道者何, 不曰以求得, 有罪以免邪, 故爲天下貴.
 
도는 세상 만물의 근원이다.
선한 사람이 보물로 삼는 것이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간직하고는 있다.
아름다운 말로 높은 지위를 얻게 되고 선한 행동으로 남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
선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버릴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라가 서고 정승이 임명되었을 때
구슬을 받들어 사두마차로 나아가 바치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서 도로 나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옛부터 이러한 도를 소중히 해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구하지 않아도 얻고 죄가 있어도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다.
 
 
老子 제63장 - 큰 일은 사소한 데서 시작된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 終不爲大, 故能成其大.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
 
무위를 생활태도로 하고, 일없는 것을 일로 하며 맛없는 것을 맛으로 한다.
작은 것은 크게 하고, 적은 것은 많게 하며 원한은 덕으로 갚는다.
어려운 일은 어려워지기 전에 손을 쓰고 큰일은 커지기 전에 해결한다.
세상의 어려운 일은 언제나 쉬운 데서 일어나고 큰일은 언제나 작은 데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무위의 성인은 결코 큰일을 하려 하지 않으며 이리하여 큰 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대체로 쉽게 하는 승낙은 믿기가 어렵고 쉽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므로 무위의 성인은 쉬운 일도 조심하여 다루고
이리하여 조금도 어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老子 제64장 - 무리하게 만들어 더하지 않는다.
 
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合포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天理之行, 始於足下.
爲者敗之, 執者失之. 是以聖人, 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愼終如始則無敗事.
是以聖人, 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而不敢爲.
 
안정된 것은 유지하기 쉽고, 일이 시작되기 전에는 손쓰기 쉽다.
굳어 있지 않은 것은 풀기가 쉽고 드러나지 않는 작은 것은 흩어지기 쉽다.
일이 생기기 전에 잘 처리를 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아름드리 큰 나무도 털끝 만한 싹에서부터 자라고 아홉 층의 높은 대도 터닦기에서 시작되며
천리 길을 가는 것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성공하려 애쓰는 자는 실패를 하고 쥐고 놓지 않으려는 자는 놓치게 된다.
 
그러므로 무위의 성인은 무리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가 없고
잡고 늘어지지 않기 때문에 놓치지 않는다.
사람이 일을 함에 있어 언제나 다 되어가고 있을 때 실수를 하게 된다.
마지막 손질을 처음처럼 한다면 실패는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욕심이 없음을 욕심으로 삼고 얻기 어려운 보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널리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움으로 하고 사람들의 지나친 행동을 본래로 되돌리고
만물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하여 무리하게 스스로 만들어 더하지 않는다.
 
 
老子 제65장 - 순리로 나라를 다스려라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知此兩者亦稽式, 常知稽式, 是謂元德,
元德深矣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옛날에 무위의 도를 잘 닦은 사람은 백성들을 총명하게 하지 않고
백성들을 순박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 영특한 지혜가 많았기 때문이다.
옛부터 나라를 지혜로 다스리면 나라에 해롭고 지혜로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에 복이 있다고 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정치의 법칙임을 알아야 한다.
항상 이 법칙을 아는 것을 현덕이라 한다.
현덕은 심오하고 멀어 세속과는 반대 이나 세속을 부정한 뒤 크나큰 순리에 이르게 된다.
 
 
老子 제66장 - 남의 위에 서려거든 자신을 낮추어라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是以欲上民, 必以言下之, 欲先民, 必以身後之,
是以聖人處上而民不重, 處前而民不害,
是以天下樂推而不厭,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
 
강과 바다가 계곡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 위에 있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겸손한 말로 자신을 낮추고
 백성의 앞에 서고자 한다면 반드시 몸을 남의 뒤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들이 짐스러워 하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방해된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받들면서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다투려 않기 때문에 누구도 그와 다툴 수가 없는 것이다.
 
 
老子 제67장 - 자비심을 가지고, 검약하며, 앞서려 하지 마라
 
天下皆謂我道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久矣, 其細也夫,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慈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의 도는 크기는 하지만 도답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크기 때문에 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만일 도처럼 보였다면 오래 전에 보잘 것 없이 되었을 것이다.
내게 세가지 보물이 있어 간직하여 소중히 여기니
 그 첫째가 자비심이고, 둘째는 검약이고 셋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자비심이 있으므로 용감할 수 있고 검약하기 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고
남의 앞에 서지 않기 때문에 기량 있는 자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비심을 버리고 용감하려 하고 검소함을 버리고 풍족하기만을 바라며
 뒤에 따르지 않으면서 앞장서려고 하는데 그것은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자비심을 가지고 싸우면 승리할 수 있고 자비심으로 지키면 견고하게 지켜진다.
하늘이 그를 구해주려 하며 자비심을 가지고 보호하는 것이다.
 
 
老子 제68장 - 사람을 잘 쓰려면 자신의 몸을 낮춘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之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古之極.
 
훌륭한 선비는 무력을 쓰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자는 화내어 흥분하지 않으며
적을 잘 이기는 자는 적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사람을 가장 잘 쓰는 자는 그들 앞에서 몸을 낮춘다.
이것을 다투지 않는 덕이라 하고 이것을 남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라 하며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오래된 지극한 도이다.
 
 
老子 제69장 - 싸움을 슬피 여기는 쪽이 이긴다
 
用兵有言, 吾不敢爲主而爲客, 不敢進寸而退尺,
是謂行無行, 攘無臂, 執無兵, 집無敵,
禍莫大於輕敵, 輕敵幾喪吾寶, 故抗兵相加, 哀者勝矣.
 
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공격에 주동이 되려 말고 피동이 되어 한치의 나아감 보다 오히려 한자씩 물러나라.
 이것을 가리켜 걸음 없는 걸음을 걷고 팔이 없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무기 없는 무기를 잡고 적이 없는 적을 공격한다 라고 한다.
화중에 적을 경시하는 것보다 더 큰 재난은 없어
 적을 가볍게 보게 되면 나의 모든 보물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서로 결전하게 될 때에는 싸움을 슬피 여기는 쪽이 승리하게 된다.
 
 
老子 제70장 - 말에는 근원이 있다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知我者希, 則我者貴, 是以聖人被褐懷玉
.
 
내 말은 쉽고 따라 행하기도 쉬운데 사람들 중에 아는 자도 행하는 자도 없다.
말에는 근원이 있고 사물에는 주재자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를 모르는 것이다.
 나를 아는 자는 드물고 나를 따르려는 자도 귀하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남루한 베옷을 입은 속에 구슬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

老子 제71장 - 병을 병으로 알면 병이 되지 않는다
 
知, 不知, 上, 不知, 知, 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알고도 모르는 듯 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모르면서 모두 아는 척 하는 것은 병이다.
병을 병으로 안다면 병이 되지 않는다.
성인이 병이 없는 것은 자기의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이 되지 않는다.
 
 
老子 제72장 - 위엄을 버리고 무위를 택하라
 
民不畏威, 則大威至,
無押其所居, 無厭其所生, 夫唯不厭, 是以不厭,
是以聖人自知不自見, 自愛不自貴, 故去彼取此.
 
백성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면 큰 위엄을 갖게 된다.
백성들이 사는 곳을 억압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싫어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것이 없게 되어 싫어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을 알지만 나타내려 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지만 귀하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위엄을 버리고 무위를 택하는 것이다.
 
 
老子 제73장 -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뜨리지 않는다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此兩者或利或害,
天之所惡, 孰知其故, 是以聖人猶難之,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천然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
.
 
결단력이 강하면 죄인을 죽이고 결단력이 약하면 죄인을 살린다.
두 가지 행동에는 이로움도 있고 해로움도 있으니
하늘이 미워하는 그 사람을 어느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성인조차 오히려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하늘의 도는 싸우지 않고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천연히 있으면서도 잘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뜨리지 않는다.
 
 
老子 제74장 - 죽임 따위로 백성을 두려워하게 할 수 없다
 
民不畏死, 奈何以死懼之,
若使民常畏死而爲奇者, 吾得執而殺之, 孰敢,
常有司殺者殺, 夫代司殺者殺,
是謂代大匠착, 夫代大匠착者, 希有不傷其手矣
.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죽임 따위로 백성을 두려워하게 할 수 없다.
만약 백성들이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게 해 놓고
죄를 지은 자를 내가 잡아서 죽인다면 어느 누가 감히 죄를 짓겠는가.
그러나 항상 죽이는 일을 맡은 자는 따로 있다.
 죽이는 일을 맡은 자를 대신해서 죽이는 것은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자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목수를 대신하여 나무를 자르는 자중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가 드물다.
 
 
老子 제75장 - 삶에 집착이 없는 자가 현명하다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거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지배자의 간섭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지배자가 자신의 삶만을 지나치게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삶에 집착이 없는 사람이 삶을 소중히 여기는 자 보다 현명한 자이다.
 
 
老子 제76장 - 부드러움이 강함보다 위에 있다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共, 强大處下, 柔弱處上.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은 사람의 몸은 굳고 단단하다.
살아 있는 만물과 초목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은 모든 것은 말라 딱딱하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은 것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산 것이다.
군대가 강하면 승리하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강하면 부러지고 만다.
굳고 강한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있다.
 
 
老子 제77장 -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곳에 더한다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하늘의 도는 활 메우는 것과 같아서
 높은 곳은 눌러 주고 낮은 곳은 올려 주며 남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곳에는 더해 준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부족한 곳에 주는데
 인간의 도는 그 같지 않아서 부족한 것에서 덜어내 남는 쪽에 바친다.
누가 여유 있는 것으로 천하에 봉사할 것인가?
오로지 하늘의 도를 따르는 자 밖에는 없다.
성인은 일을 하되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그 곳에 머물지 않으며,
남보다 현명함을 나타내지 않는다.
 
 
老子 제78장 -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天下莫柔弱於水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是以聖人云, 受國之垢是謂社稷主, 受國不祥是謂天下王. 正言若反.
 
세상에 물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는 데 물보다 더 나은 것도 없다.
무엇도 그 본성을 바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억센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을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실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성인의 말씀에 나라의 욕됨을 떠맡는 사람은 나라의 주인이고
천하의 불행을 떠맡는 사람을 천하의 왕이라 했다.
참으로 바른 말은 진실과 반대인 것처럼 들린다.
 
 
老子 제79장 - 하늘은 항상 선한 사람 편에 선다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是以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 有德司契, 無德司徹,
天道無親, 常與善人
.
 
큰 원한은 풀어도 앙금이 남으니 큰 원한을 푼다고 어찌 선이 되겠는가.
성인은 빚 문서를 지니고 있을 뿐 빚 독촉을 하지 않는다.
덕이 있으면 빚은 저절로 갚아지고, 덕이 없으면 빚을 억지로 받아 낸다.
하늘의 도에는 사사로움이 없고, 언제나 선한 사람 편에 선다.
 
 
老子 제80장 -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 살아 수많은 도구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게 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여 먼 곳으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면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일이 없을 것이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그것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새끼줄을 묶어서 약속의 표시로 사용하게 하고 음식을 달게 여겨 먹게 하고,
의복을 아름답게 여겨 입게 하고 사는 곳을 안식처로 여기게 하고,
그 풍속을 즐기게 하면 바로 앞에 이웃나라가 있고
닭과 개의 소리 서로 들리는 곳에 있을 지라도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老子 제81장 - 진실한 말은 아름답게 꾸미지 않는다.
 
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不博, 博者不知. 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
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
 
진실한 말은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아름답게 꾸민 말에는 진실이 없다.
참다운 사람은 변명을 하지 않고 변명을 잘하는 사람은 참다운 사람이 아니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고 많이 아는 사람은 참으로 알고 있지 못하다.
 
성인은 자신을 위해 쌓아두는 일이 없이 남을 위함으로 더욱 있게 되고
남에게 무었이든 다 주지만 그로 인하여 더욱 넉넉해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하지만 해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일을 행하여 다투지 않는다

 

................................................<< 도덕경(道德經) >>...........................................

  

중국의 고대 철학서.

〈도덕경〉이라는 이름은 한대(漢代:BC 206~AD 220)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그때까지는 이 책의 저자로 여겨지는 노자(老子)의 이름을 따서 〈노자〉라고 했다. 중국 최초의 위대한 역사가인 사마천(史馬遷)은 노자가 BC 6세기에 주(周)나라 조정에서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士官)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노자는 도가의 창시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가는 도(道)를 강조한 여러 학파들 중에서 유일하게 '도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노자는 오랫동안 〈도덕경〉의 저자로 알려져왔지만, 이러한 믿음은 19세기에 들어와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일부 학자들은 이 철학자의 실존 여부를 의심했다. 〈도덕경〉을 누가 썼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도덕경〉에는 이 책이 씌어진 연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될 만한 다른 저서나 인물, 사건이나 장소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저술 연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BC 8~3세기에 걸쳐 폭넓게 퍼져 있다.

 

 〈도덕경〉은 온통 혼란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나라에 다시 화합과 평안을 가져오기 위한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는 지배층의 무절제한 낭비를 비판하고, 유교윤리의 특징인 추상적 도덕주의와 형식적인 예의에 바탕을 둔 사회적 행동주의를 경멸했다. 〈도덕경〉에서 말하고 있는 '도'는 이해하기 어렵고 신비주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왔으며, 철학과 종교의 기본개념이 되어왔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본질적으로 도는 '무위'(無爲)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위는 자연스러움, 즉 모든 일이 본성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불간섭('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면 도가 도전받지도 않고 도전하지도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기 때문에, 혼란은 끝나고 싸움도 끝나며 독선적인 불화도 사라진다. 도는 하늘이나 땅보다 먼저 존재했고 무궁무진하고 인위적이지 않으며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나 도로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온다. 백성에게 '도'의 원리를 가르치면, 통치자는 모든 불평불만의 원인을 제거하여 나라를 지극히 평온하게 다스릴 수 있다.

〈도덕경〉의 인기는 엄청나게 많은 주석서가 잘 나타내주고 있다. 중국어로 씌어진 주석서는 350권이 넘고 일본어로 씌어진 것도 약 250권이나 된다. 1900년부터 지금까지 40권이 넘는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출처 블로그 > 흐르는 강물처럼
원본 http://blog.naver.com/mybin99/20015184596

 

 

 

 

 

도덕경 해설

 

제6장 - 도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도는 텅 빈 산골짜기의 신과 같고 그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현빈이라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근본이라 한다.

그 뿌리는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같고 천지만물이 아무리 써도 지쳐 없어지지 않는다.

 

아래글은 "김기태의 경전 다시읽기"에서 발췌 http://www.be1.co.kr/

 

곡신(谷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玄妙)한 암컷이라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면면히 이어져 있는 듯하니,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 뜻풀이 >
   

    이 장(章)의 제목을 나는 '진리에 이르는 문(門)'이라고 붙여 보았다. 진리에 이르는 문이라……햐! 이런 말만 들어도 내 가슴은 벌써 이렇게도 뛰누나! 문(門)이란,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방이나 혹은 집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반드시 그 문을 통해 어떤 방이나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듯이, 우리가 진리에 이르는 데에도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길[道]이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장(章)은 바로 그 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 진리에 이르는 문은 분명코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바로 그 문 앞에 서 있다. 삶의 어느 한 순간 문득 그 진리의 문이 열려, 언제나 어느 때나 나누고 분별(分別)하고 구별짓고 간택(揀擇)하던 이제까지의 그 모오든 몸짓들이 멈추고,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이 숨막히도록 역동적인 삶을, 그 어느 것도 거부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온전히 '삶'과 하나 되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아아,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 것도 되지 않아도, 단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슴 벅차 오르고 행복할 수 있을텐데……!

    자, 그렇다면 이제 그 문을 두드려 보자.
    谷神不死 是謂玄牝(곡신谷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이라 한다)……'골짜기'와 '암컷'은 노자가 도(道)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썼다. 골짜기는 '텅 비어 있음'을, 암컷은 '여성적 수동성'을 각각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둘 다가 '신비롭고' 또한 '현묘(玄妙)하다'고 한다. 신비롭고 또한 현묘하다……?

    '텅 비어 있음'에 대해서는 도덕경 4장에서 '道沖(도는 텅 비어 있다)'을 얘기할 때, 색즉시공(色卽是空)의 '空'을 언급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본다. 텅 비어 있음의 신비로움……사실이 그러하다. '나'가 텅 비어 있으면 '삶'이 텅 비게 되고, 동시에 세상과 우주가 텅 비게 된다. 일체 모든 것이 '空'하게 되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 텅 비어 있음은 또한 얼마나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그 텅 비어 있는 세계(世界)와 '나'와 '삶'은 또한 너무도 평범한 것이지만, 그러나 얼마나 신비롭고 오묘한지! 故常無欲以觀其妙!(그러므로 언제나 텅 비어 있으면 그 오묘함을 보게 된다…도덕경 1장) 그리하여 언제나 새롭고, 항상적이며, 끊임없이 샘솟듯 하는 존재의 이 무한한 생명력이여[谷神不死]―!

    그런데 노자는 다시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玄牝)'이라고 말한다. '암컷'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여성적 수동성'을 의미한다. 왜 '암컷'이며, 그리하여 왜 '여성적'인가? 우리가 보통 '남성적'이라고 하면 으레 '적극적', '능동적', '진취적', '힘[力]', '動', '자기 개선의 강한 의지' 등등을 연상하게 되는 반면, '여성적'이라고 하면 '소극적', '수동적', '부드러움', '弱', '靜', '순종적 받아들임' 등등을 떠올리게 된다. 동시에 '남성적'인 여러 속성들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거나, 삶에 있어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자세들이라고 여기는 반면, '여성성' 혹은 '여성적'인 속성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부시켜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극복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의 노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커녕 삶은 오히려 '여성적'일 때 진정 꽃필 수 있으며, 그때에야 비로소 삶이 지닌 그 모오든 에너지와 생명력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게 되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바로 그때 우리는 '참된 것'이랄까, '영원한 것', 혹은 '진리'라고 말해질 수 있는 무언가를 맛볼 수 있다.) 그렇다. 삶에 있어서의 '여성성' 혹은 '여성적 수동성'은 우리를 진리에로 인도하는 문(門)이다. 그런데 이때, '수동성'이란 '소극성' 혹은 '소극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오히려 '수동성'은 삶에 대한 가장 깊고도 완전한 '적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수동성'이란 뭘까? 무엇을 의미할까?

    '수동성(受動性)'은, 사전적 의미로는, '다른 것으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성질'을 말하며, 이에 반대되는 능동성(能動性)은 '스스로(제 힘으로) 다른 것에 작용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수동성'은 제 스스로 나서서 무언가를 <변형>시키거나 <개선>하거나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여성적 수동성[玄牝]'이란 다름 아닌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무위(無爲)'를 뜻함이 아닌가!

    벌써 두어 해 전의 일이다. 대구에 계신 어떤 선생님 한 분이 인터넷을 통해 연락이 와서는 한 번 만나고 싶다며 찾아오셨다. 그리곤 대뜸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하면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신지 좀 더 설명을 해달라고 했더니, 자신은 삶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여러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어떤 경우에도 진정 자신답지 않고 무언가 항상 떠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대할 때에도 자신은 진정 교사다운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지, 또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이것저것 애써보지만 이게 과연 아버지다운 모습인지, 뿐만 아니라 남편으로서, 가장(家長)으로서, 자식으로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역할에 있어서도 자신은 항상 아직 그 무엇에도 닿아있지 않은 듯하고 턱없이 부족한 듯하여 그때마다 늘상 입술이 타는 듯한데, 언제까지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이젠 그야말로 하루 하루가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그분은 '불안'이라고 표현했는데, 단 한 순간만이라도 불안하지 않고 자신답게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애틋한 마음으로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다시는 불안하지 않고 당당하게, 또한 언제나 자신답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은 진정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좋습니다. 진정 불안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싶으시다면, 불안하지 않고 당당한 사람이 되려는 그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으십시오. 그냥 불안하라는 말입니다. 불안을 떨쳐버리고 당당한 사람이 되려는 일체의 노력과 마음들을 정지하고, 그냥 지금 선생님에게 찾아온 그 불안을 사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진실로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면, 다시는 선생님의 삶 속에서 '불안'이라는 것을 목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성적 수동성'으로써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라는 말이다.
    햐! 그런데 어찌 이 말을 믿을 수 있나? 불안을 못 견뎌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 함에 더 나은 방법을 찾고 더욱 더한 열심을 내어도 부족할 판에, 아니, 그 마음을 버리라니! 그냥 불안하라니! 그러면 차라리 죽으라는 말인가? 그렇다. 죽으라는 말이다.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는 말이다.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無爲]! 불안이 오면 불안을 살고 짜증이 오면 짜증을 살며 분노가 오면 그냥 그 분노를 사는 것, 그러한 '지금' '여기'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비교>나 <분별(分別)>로써 간택(揀擇)하지 않고 다만 그대로를 사는 것, 끊임없이 나서서 그러한 것들을 <변형>시키고 <개선>하려는 그 마음의 작용이 정지해 버리는 것, 그리하여 진정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바로 '나'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①

    ① 이 대목에서 꼭 하고 싶은 성경 얘기가 있다. 성경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한 10계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가운데 제1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는, 일반적으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더 잘 기억되고 회자(膾炙)되는, 아아 너무나 많은 오해와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이 말! 성경 자체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말씀 또한 너무나 일방적으로 종교적인 의미로만 이해되고 해석되기를 강요받아 왔다. 그러나 이제 조금 다른 각도로 이 말씀을 들여다보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이 말은 곧 '지금' '여기'에서의 매 순간순간의 삶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문득 불안이 밀려오면 그냥 불안할 뿐 그것을 불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지 말며(불안 이외의 다른 신 ― 곧 당당함이나 여유로움 등 ― 을 섬기지 말며), 문득 짜증이 찾아오면 그 짜증을 살고(짜증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하지 말고), 분노가 오면 그냥 분노할 뿐이며 무기력해지면 그냥 무기력할 뿐, 그리하여 오직 매 순간순간의 '현재'를 살라는 말이다. 그 '현재'를 '불완전'이니 '부족'이니 하고 <판단>하거나 <분별>하여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극복하려는, 그리하여 미래의 '완전'을 위하여 '현재'를 저당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기, <분별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것 속에 있지, 미래의 보다 완전하고 완벽한 어떤 모습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계신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불안과 짜증과 분노와 무기력이 곧 하나님이요 진리 ―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요 색(色)이 곧 공(空) ― 이다! 그러니, 매 순간순간의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나 가톨릭에서 말하는, 여호와나 예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작은> 책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나의 그런 말에 몹시 의아해 하며, "아니, 이 불안한 마음을, 언제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안절부절못하는 이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정말이지 타는 듯한 마음으로 말씀을 드린 건데, 그냥 불안하라니오? 더구나 불안을 벗어나려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니오!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으라니오! 그럼, 저보고 죽으라는 말입니까?"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그런 말에 무어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 같은 것을 그 선생님은 느끼셨던 모양이다. 그것은 아마 그분 자신이 그동안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자각과 함께 어떤 절망감 같은 것이 내면 깊이 이미 와있었기 때문에 나의 그런 말들이 가슴으로 들려왔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곤 마치 무언가에 한 방 얻어맞은 듯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는데,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말하자면, 끝없는 '갈증'과 '메마름'과 '추구'의 옛 사람은 죽고, 자유롭고 행복하며 진실로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새 사람이 된 것인데, 아아 그분이 대구 도덕경 모임에 나오셔서 들려주고 보여주신 '변화된 삶'의 얘기들은 얼마나 주옥같고 눈부시던지!

    '변화' 이전(以前)에는 하루 하루가 지겹고,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한없이 힘겨웠으며, 더욱이 어느 날엔가는 문득 터럭만큼의 변화도 없는 자신의 매일 매일의 일과(日課) ―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똑같고, 일어나서 용변보고 세수하고 밥먹고 하는 순서와 소요시간이 똑같으며, 출근길이 똑같고, 만나는 아이들이 똑같고, 해야 할 일들이 똑같고, 퇴근시간과 그 이후의 일들마저 똑같은데, 아아 그 똑같은 일들을 내일도, 모레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계속해야 한다는 ― 를 자각하고는 숨마저 막혀오는 고통으로 괴로워했었는데, '변화' 이후(以後)에는 매일 매일의 삶은 전과 다름없이 똑같건만, 희한하게도 그 똑같은 일상(日常) 속에서 전혀 새롭고도 신명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먹고 출근할 때까지의 시간과 순서와 가는 길은 똑같은데, '이전(以前)'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며, "또 가야 하나……이 긴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야 하나……?"라고 했다면, '이후(以後)'에는 "아,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내가 이렇게 잠을 자고, 이 아침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가! 잠이라는 건 또 얼마나 신비로우며, 이 하루 동안에 또 무슨 일이 내 앞에 펼쳐질까?"라며, 눈뜰 때부터 감동하며 설레는 기대로써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세수하다 말고 문득 대야에 담긴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 이 물! 이 빛깔과 이 차가움과 이 질감(質感)! 이런 것이 여기 이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가?"라며 스스로 전율하는가 하면, 어제와 똑같은 출근길이 그렇게도 새롭고, 마치 처음인 듯 눈부시기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무회의 등에서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당당하고 분명하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기도 하며 ― 이전에는 끊임없이 다른 선생님들을 의식하며 그렇게도 주눅들고 자신없어 하던 그 시간이었는데! ― 또 어느 날엔가부터는 그렇게도 버겁던 아이들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게만 보여, "아니, 내가 이렇게도 학생들을 사랑했던가……?"라며 스스로 북받쳐 오르는 감동에 젖기도 했단다. 그러니 얼마나 '살 맛'이 나겠는가? 얼마나 하루 하루가 재미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살아있음의 모든 기쁨과 환희가, 그분이 그렇게나 벗어나고 싶어하던 '불안'과의 단 한 번의 진정한 맞닥뜨림으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다. 그 한 번의 진정한 맞닥뜨림 혹은 받아들임 ― 이것이 곧 무위(無爲)이며, 또한 '여성적 수동성[玄牝]'이다 ― 이 그렇게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정말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불안'이라는 번뇌가 곧 보리(菩提)이기 때문이다.

    玄牝之門 是謂天地根(현묘한 암컷의 문,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그렇게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될 때[無爲], 그리하여 그 '여성적 수동성[玄牝之門]' 속에서 오직 매 순간 순간의 '현재'만 있게 될 때,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늘 우리와 함께 했으되,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우리의 '마음'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아아 온갖 생명력으로 가득찬 <새로운> 세계가 그때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나'의 안과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긍정됨으로써 비롯되는 엄청난 환희와 평화의 세계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이사야 65:17∼18) 아멘!

    綿綿若存 用之不勤(면면히 이어져 있는 듯 하니,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이때 면면약존(綿綿若存)이라 하면 우리는 대뜸 '아주 오랜 옛적부터'나 '태초'를 연상하게 되지만, 그래서 도(道)라는 것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아니, 도는 그렇게 '시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다. 도의 시점(時點)은 언제나 '현재'이다. 그래서 이 면면약존(綿綿若存)을 그렇게 이해하지 말고, 우리의 이 '오늘'의 삶을 생각해 보자.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나아가 꿈속에서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과 느낌들이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오는가! 그런데 그 하나 하나가 분별(分別)하지 않고 간택(揀擇)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면 다 보리(菩提)요 도(道)이니, 그러므로 아무리 그것을 써도 피곤치 않고 다함도 없다는 것이다(用之不勤). (이렇게 읽으니 이 문장이 얼마나 우리 가까이 다가오는가!)

    그러니 보라, 그렇게 '한 마음' 내려놓고 살아가게 된 이 '나'와 '삶'은 얼마나 충만한 생명력으로 가득한지!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의, 이 너무나 평범한 일상(日常)들이 얼마나 새롭고 눈부신지! 살아 있음이 얼마나 신비롭고 오묘한지! 배고프면 밥 먹고 자고 싶으면 잠을 자는 이 낱낱의 움직임이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지! 때로 짜증내고 때로 미워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살포시 미소짓기도 하다가 때로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는, 아아 아뜩할 만큼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온갖 감정들로 가득한 이 '나'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대견한지! 뿐만 아니라 저 숨이 컥 막힐 것 같은, 그래서 문득 울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하늘은 또 어떻고! 시시로 때때로 뜰 앞에 내려와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쪼아먹고는 무슨 급한 일이 생각난 듯 후두둑 날아가 버리는 저 이쁜디 이쁜 참새들은 또 어떻고! 저 산은! 저 강은! 저 바람은! 온갖 생명들로 가득한 이 땅은!

    아아, 도(道)가 어디에 있느냐고? 진리(眞理)가 어디에 있느냐고……?

 

 

 

제8장 -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
상선약수.수선이만물이부쟁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처중인지소악
고기어도

居善地, 心善淵,
거선지
심선연

與善仁, 言善信,
여선인 언선신,
政善治, 事善能, 動善時.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夫唯不爭, 故無尤.
부유부쟁, 고무우. .

若―같을 약, 만약 약, 반야 야, 爭―다툴 쟁, 衆―무리 중, 많을 중,
惡―싫어할 오, 미워할 오, 나쁠 악, 幾―거의 기, 가까울 기, 몇 기,
居―거할 거, 살 거, 淵―못 연, 깊을 연, 與―줄 여, 더불 여, 및 여,
夫―대저(발어사) 부, 남편 부, 사내 부, 唯―오직 유, 尤―허물 우, 더욱 우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萬物)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거하는 곳마다 거기가 곧 좋은 땅인 줄을 알며,
    마음은 깊은 연못과도 같이 고요하고,
    줄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말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말하며,
    최선의 다스림을 베풀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움직일 때는 최선의 때를 따라 움직인다.
    대저 오직 다투지 않기에,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 뜻풀이 >

 

   이 장(章)은 앞장을 이어받아, '不自生'을 통해 道와 하나가 되고,
'무분별(無分別)의 현재(現在)'에 눈 뜬 사람과 삶의 모습을 물이라는
상징(象徵)을 통해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우선, "處衆人之所惡(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라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얘기를 시작해 보자.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 그것은 어떤 곳일까?
아마도 그것은 낮은 곳, 더러운 곳, 추한 곳, 좁고 길이 협착한 곳 등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곳을 싫어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반면에 높은 곳,
깨끗한 곳, 넓고 길이 평탄한 곳 등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러한 자리에 자신을 두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은 그와 같은 우리들의
관심과 노력과는 반대로 언제나 낮은 곳에 자신을 두기를 즐겨 한다.
그리고 그런 물을 두고 우리의 노자는 "道에 가깝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處衆人之所惡"를 우리의 내면의 얘기로 바꿔보면 어떨까? 사람들이 처하기
싫어하는 곳은 밖(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內)에도 많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불안이나 의심, 회의, 부족함, 미움, 성냄, 밴댕이 등등,
이를 달리 말하면,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무지(無知), 중생(衆生) 등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을 싫어하고 못견뎌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반면에 당당함, 확신에 찬 모습, 완전함, 사랑, 자유, 자애로움,
넉넉함 등등, 이를 또한 달리 말하면, 보리(菩提), 지혜, 깨달음, 부처(覺者)
등등일진데, 사람들은 언제나 이러한 것을 좋게 여겨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이 되려 한다.
    그러나, 보라! 물은 언제나 낮은 곳 ― 우리가 결코 처하고 싶어하지
않는 바로 그 곳에 자신을 둔다. "그러므로 道에 가깝다(故幾於道)!"

    정말 그러하다. 진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道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고 외면하는 바로 그 곳, 그 낮은 곳 ― 아아,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속에, 중생(衆生) 속에,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 속에 있다.
그것은 결단코 수많은 노력과 수고와 수행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미래'의 완전한 곳,
높은 곳, 넓고 평탄한 곳 속에 있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끝없이 끊임없이 낮은 곳을 버리고 높은 곳으로, '현재'를 버리고
'미래'로, 번뇌를 버리고 보리(菩提)를, 중생(衆生)을 버리고 부처[깨달음]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버리고 미래의 '완전한 나'를 구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곧 진리를 버리고 진리를 찾으며, 道를 버리고 道를
구하는 격이 아닌가? 이 무슨 어리석음인가! 그러고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철석같이 믿고서 달려나가고 있으니, 아아 이를 어찌 하리오?

    자, 그렇게 바삐 길을 떠나지만 말고 잠시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보자. 만약 내가
지금 진리를 구하려 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직 내게는 진리가 없으며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내가 지금 진리를
알거나 깨달아 있다면 나는 그것을 구하려는 어떠한 몸짓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지금 그 모두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 그리도 쉽게 ― 모르면서도! ―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는 진리도,
깨달음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으며, 그것을 또한 그리도 쉽게 '미래'에다 몽땅
투영해 놓을 수 있는가? 아니, "현재에는 없고, 열심히 수행하고 노력하다 보면
미래에는 있을 수 있다"라는 그 앎, 그 모호하고도 맹목적인 믿음 ― 그리하여 나를
줄곧 깨달음과 '완전'을 향해 달려나가게 만드는 ― 은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그것은 정녕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바로
그것이, 아니, 바로 그것만이 허구(虛構)다!

    그러니, 이제 눈을 떠라! '현재(現在)' 혹은 '현재의 나'는 '부족'이니 '완전'
이니 하는 것으로,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으로,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들 또한 번뇌(煩惱)니 보리(菩提)니 하는 것으로 규정되거나 정의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러한 모든 '구별'은 전적으로 우리의 무지(無知)와 분별심
(分別心)이 만들어낸 허구다! 그러한 것은 있·지·도·않·다! 그냥 다만 모든
것은 ― '나'를 포함하여 ―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일 뿐이며, 그 낱낱의 것은
우리가 만든 그 어떠한 분별(分別)로부터도 떠나 있다.
    그러니, 그냥 살라. 우리의 생각과 관념 속에만 있지 실재(實在)하지 않는 현재의
'부족'을 메우려 하지도 말고, 그것에 저항하지도 말며, 또한 있지도 않은 미래의
'완전'이나 깨달음을 추구하지도 말라. 그냥 다만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살라. 그렇게, 다만 무분별(無分別)의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 ―
이를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러니 따로이 해야 할 일이 있는가? 그냥,
주어지는 현실을 열심히 살 뿐[無事人]이다.

    그렇게 '무분별(無分別)의 현재(現在)'에 눈 뜬 사람은 이제 물과도 같다.
그에게는 '나'니 '너'니 하는 나눔도 없고, '부족'이니 '완전'이니 하는 구별도
없다. '앞'이니 '뒤'니 하는 것도 그에게는 없기에, 앞서거나 높아지려는 모든
몸짓과 마음의 작용도 정지한다. 아, 이제 그에게는 그 모오든 '다툼(爭)'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축복이어라! 그 모든 '다툼'들이 사라져 버린 자리에는 이제 무엇이 남을까?
거기에는 우리가 그토록 애틋하게 갈구하던 영혼의 쉼과 안식이, 꿈에도 그리던 영원한
평화와 자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은혜와 진리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있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진정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水善利萬物而不爭]! '너'와 구별되고 분리된 '나'라는 것이 없기에, 너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 되고 너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아아 이제 그는 저절로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렇다! 자타불이(自他不二)니, 대자대비(大慈大悲)니, 이타(利他)
니 하는 것은 공허한 이론이나 율법 혹은 계명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니, 눈
한 번 뜨면 오직 그것만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은 저절로 내 안에서
흘러나오고―!

    우리의 노자는 계속해서, 그렇게 모든 '다툼(爭)' ―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미망(迷妄)과 무명(無明)으로 인한 내·외적 갈등과 긴장 ― 이 끝난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그리고 있다.

    居善地(거하는 곳마다 거기가 곧 좋은 땅인 줄을 알며)……물은 장소를 가려가며
흐르지 않는다. 그냥 흐를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좋은 땅'이라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노자는 '善地'라 했다. 왜일까? '善地'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물에게는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등의 분별(分別)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그냥 흐를 뿐인 것이다. 그 '무분별(無分別)의 마음'을 이름하여 '善地'라 한다.
따라서 '居善地'를 '무분별의 마음에 거하고'라고 풀이해도 좋으리라. 그렇게
무분별의 마음으로 담담히 흘러가는 물의 모습을 노자는 '居善地'라 했다.

    자, 이를 다시 우리의 내면의 얘기로 바꿔보자. 우리 안(內)에도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라는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마음의 흐름을 경험하는가! 그것들이 그냥
그렇게 물처럼 흐르도록 내어버려 두라. 그것들을 구별하여 또다시 취(取)하거나
버리려(捨) 하지 말라. 그러한 분별(分別)만 내려지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랑스런 '나'요, '좋은 것'이다! 居善地! 그리하여, 수처작주
(隨處作主)요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어딜 가나 거기가 내 자리요, 내가 선
자리마다 진리로고!)

    心善淵(마음은 깊은 연못과도 같이 고요하고)……
그렇다. 그렇게 무분별의 '善地'에 거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어느 때나
깊고도 고요하다. 커다란 연못의 표면이 아무리 격렬하게 파도친다 하더라도 그 깊은
내면에서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저 고요할 뿐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고요하다'
라고 하는 것은 결코 어떤 '모양'에 있지 않다[無相]. 다시 말하면, 그것은 격렬한
파도처럼 잠시도 가만 있질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리거나 요동하는 모양과 구별되고
대비된 의미의 '고요'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때의 '고요함'이란, 정확히 말하면
'격렬한 파도 그 자체가 되는 것', '흔들리고 요동침 그 자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아, 이를 어떻게 하면 보다더 섬세하게, 그 민감한 부분까지를 함께 느끼고 나눌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을까?
    이를 혜능(慧能)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於六塵中에
不離不染하야 來去自由가 卽是般若三昧며 自在解脫이니……육진(六塵)을 떠나있지도
않고 그것에 물들지도 않아 육진이 오고 감에 자유함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라고. 여기에서 육진(六塵)이란, '격렬한 파도' 혹은
'흔들리고 요동치는' 온갖 번뇌와 망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하루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온갖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감정과 느낌과
생각들을 말한다. 그 속에는 '불안'도 있을 수 있고, 미움, 짜증, 성냄, 기쁨, 의심,
회의 등등 온갖 것들이 있을 수 있는 바, 그것들을 떠나있지도 않고[不離] 또한
물들지도 않아[不染] 그것들이 오고 감에 자유함 ― 그 모든 것들이 그냥 그렇게
물처럼 흐르도록 내어버려 둠 ― 이 바로 진정한 '고요함'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요동치는' 번뇌를 버리고 따로이 보리(菩提)라는 '고요함'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

    與善仁(줄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다)……물을 보라.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끝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기만 할 뿐이다. 거기
어디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주목이나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가? 물은 언제나
그·냥·그·렇·게·할·뿐·이·다! 아아, 그것은 바로 '나 없음[無我]'이
아닌가! 그 '나 없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與善仁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 무아(無我)와 무한한 사랑이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우리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아아,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토록 아름다운 본래 모습을 망각한 채 안타깝게도 유리(遊離)하는
백성이 되어 있구나!

    言善信(말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말하며)……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이를테면,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혹은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 그리고 인 것은 이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한가? 진리 혹은 진실은 이토록
단순한 것이다! 아아,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
되어버렸는가?
    예수도 말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복음 5:37)
    공자도 논어(論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앎이니라."(爲政篇 第二)

    政善治(최선의 다스림을 베풀고)……무엇이 '최선의 다스림'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잘 다스리는 것일까? 그것은 다·스·리·려·하·지·않·는것이다!
내 안(內)을 '다스리려' 하지 말라. 그냥 두라. '완전함'과 '깨달음'이 좋다 하여
끝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채근하여 자신 안의 온갖 다양한 생명들을 주눅들게 하지
말라. 그 하나의 '좋아보이는 것'을 위하여 현재(現在)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닦달하고 통제하고 조절하지 말라. 아아, 그렇게 자신을 억압하지 말라! 이제 그만
하라. 진리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단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현재'를
살라. 다만 그것이면 족(足)하다! 道常無爲而無不爲……도(道)는 언제나 함이
없으되 되어지지 아니하는 바가 없구나!(도덕경 37장)

    事善能(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최선(最善)'이라는 것도 내 밖(外)에
따로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無相]. 언제나 어느 때나 모두가
본받아야 할 '최선'이란 우리의 관념과 생각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허구(虛構)다. 그렇다면 '事善能'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모든 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내 밖(外)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매일 매일의 일과나 사람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내 안(內)의 일들 곧 하룻동안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온갖 다양한 느낌과 감정과 생각 등등의 마음의 작용과 흐름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事善能)'는 것은
내면의 그 어떤 것도 거부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또한 왜곡하거나 미화(美化)하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올올이 살아낸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곧 '
무분별(無分別)의 현재(現在)'를 산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냥 사는>
모습이다. 진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動善時(움직일 때는 최선의 때를 따라 움직인다)……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의
'최선의 때'란, '최선의 때'라는 것을 따로이 두거나 따로이 가리는 바로 그러한
분별(分別)만 내려지면 모든 때가, 모든 순간 순간이, 아아 우리네 삶 그 전체가
온통 '최선의 때'임을 알리라! 얼마나 가슴 벅찬 우리네 '삶'인가!

    夫唯不爭, 故無尤……대저 오직 다투지 않기에 허물이 없다. 다시 더
무엇을 말하리오!
                      

[김기태 경읽기 폄]

 

 


제12장 ― 그러나 결국 '마음'인 것을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전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令―하여금 령, 가령 령, 영 령, 盲―눈멀 맹, 어두울 맹, 聾―귀먹을 롱,
味―맛 미, 爽―상할 상, 어그러질 상, 馳―달릴 치, 騁―달릴 빙, 전―사냥할 전,
밭갈 전, 獵―사냥할 렵, 狂―미칠 광, 難―어려울 난, 貨―재화 화, 妨―방해할 방,
거리낄 방, 腹―배 복, 去―버릴 거, 갈 거, 彼―저 피, 此―이 차

    오색(五色)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五音)은 사람의 귀를 먹게 하며,
    오미(五味)는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말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발광(發狂)케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財貨)는 사람의 행실을 으그러지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배(腹)를 위하고 눈(目)을 위하지 않으며,
    따라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뜻풀이 >


    오늘은 성경 얘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성경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行路)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相從)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
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
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요한복음 4:3∼29)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행로(行路)에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은 예수와 그때 마침 그곳에 물 길러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장면인데, 처음엔 그냥 단지 목이 말라 물 좀 달라 하는 예수의
말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 얘기로 이어지고,
마침내 그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외치기 시작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여기에서, 참 뜻밖이기도 하고 엉뚱하기까지 한 대화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라는 예수의 말에, 여자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때 예수는 난데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아니, 이게 무슨 말일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하는 여인에게 예수는
왜 느닷없이 여인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한 것일까? '생수'와 '남편'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여자가 "주여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남편'은
무엇일까?

    '남편'이라……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혹여 이것이 진정으로
내 영혼을 채워주고 만족(滿足)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일까, 혹은 저것이 나를 진실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일까 하여 끊임없이 찾고 추구하는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 오늘날 그 '남편'은 사람에 따라서는 '돈'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으며, '학벌'이나 '출세' 혹은 '권력'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칭찬'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깨달음을
향한 '명상'과 '수행'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남편'이 도덕경(道德經)의
이 장(章)에서는 '오색(五色)'이니 '오음(五音)'이니 '오미(五味)'니 혹은 '치빙전렵
(馳騁전獵)'이니 '난득지화(難得之貨)'니 하는 것들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이러한 것들을 추구해 왔고 또한 추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마치 그러한 것들을 더 많이 가지고 누릴수록 더 큰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던가? 인류의 그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과 오늘날의 이 물질만능의 풍요로움 속에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그리고
분명히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니다!"라고.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그것은 다만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令人目盲], 귀를 먹게 하며[令人耳聾], 입을
상하게 하고[令人口爽], 사람의 마음을 발광케 하며[令人心發狂], 행실을 그르치게
할 뿐이라[令人行妨]……"

    '진정한 행복'이랄까 '참된 자유', 혹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이
바깥(外)으로부터나 혹은 어떤 노력을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충분히
그리고 완벽하게 내 안에 있다.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속에 말이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내가 <이미> 그것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 하는 그 마음만 쉬어라! '남편'을 구하는
그 마음만 내려놓으면 내가 곧 '남편'임을 알게 될 것을―!

    보라, 오색(五色)이니 오음(五音)이니 오미(五味)니 치빙전렵(馳騁전獵)이니
난득지화(難得之貨)니 하는 것들은 우리의 탐(貪)의 대상으로서 객관적으로 실재
(實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탐착(貪着)하는 우리의 마음이 '좋고 탐나는
것'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탐(貪)하는 마음이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은 '탐나는 대상'이 아니라 그냥 '그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분별(分別)'과 '구별'과 '비교'는 실재(實在)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虛構)요 '환(幻)'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것들이
<진정으로> 우리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 '환(幻)'을 좇고 있구나!

    그러므로 오오, 보라! 탐착(貪着)하는 마음으로 바라본 오색(五色), 오음(五音),
오미(五味), 치빙전렵(馳騁전獵), 난득지화(難得之貨)는 결국엔 다만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하며 입을 상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발광케 하고 행실을 그르치게
할 뿐이지만, 탐착하는 마음 없이 누리는 오색(五色), 오음(五音), 오미(五味),
치빙전렵(馳騁전獵), 난득지화(難得之貨)는 오히려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것들이구나! 그러므로 보라! '마음'에 있는가, '대상[사물]'에 있는가?
'한 마음'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내려지니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하며 입을 상하게 하던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관음(觀音)이요 묘향(妙香)이 아닌가!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요, 색(色)이 곧 공(空)이 아닌가! 중생(衆生)이 곧 부처요,
사바세계(娑婆世界)가 곧 불국토(佛國土)가 아닌가!

    그러므로 보라, 번뇌(煩惱)니 보리(菩提)니, 색(色)이니 공(空)이니, 중생(衆生)
이니 부처니, 사바세계(娑婆世界)니 불국토(佛國土)니 하는 것들이 어디에 있는가?
다만 분별하는 마음 안에 있을 뿐이라! 눈 한 번 뜨고 보니 번뇌도 없고 보리도 없으며,
색도 없고 공도 없고,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고, 아아 다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일
뿐이로다!

    道在當人眼睫裡거늘
    西來面目只如今고
    渴飮饑손常顯露를
    何用區區向外尋이리오.

    도(道)가 그대 눈썹 안에 있거늘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지금도 묻고 있는가?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데서 한결같이 환하게 드러나는데
    어찌하여 구구히 밖을 향해 찾을까?

 [김기태 경읽기 폄]

 

 

 

제16장 - 자신 본래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라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귀근왈정, 시위복명. 복명왈상, 지상왈명. 불지상, 망작흉.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지상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 도내구. 몰신불태.


 

마음이 텅 빈 극치에 이르고 참답게 무위의 고요함을 지키게 되면
만상의 온갖 움직임이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만상이 갖가지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저마다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뿌리로 돌아가 있는 것을 고요, 무위의 고요함이라 말하고
고요한 것을 명, 각자 본래의 참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고 한다.
명에 돌아가 있는 것을 떳떳함, 영원불멸이라 말하며
떳떳함 본연의 모습에 눈뜨는 것을 밝음, 절대의 지혜라 한다.

 

떳떳한 모습을 깨닫지 못하면 경거망동해서 불길하다.

 

떳떳한 것을 깨달으면 누구에게 대해서나 너그럽게 되고
너그럽게 되면 공평무사하며, 왕자의 덕을 갖추게 되고
왕자의 덕을 갖추면 하늘과 같이 광대해지며
하늘처럼 넓고 커지면 무위의 도와 하나가 되고
무위의 도와 하나가 되면 영원불멸이 된다.

 

몸을 마칠 때까지 편안히 살게 되는 것이다.
 
 

아래 해석글은 뿌리깊은 나무 http://cafe.daum.net/suming56 의메뉴 한문학,명구에서 발췌

 

    致―이를 치, 맡길 치, 극진할 치, 極―지극할 극, 다할 극, 靜―조용할 정, 篤―도타울 독, 중할 독, 竝―아우를 병, 觀―볼 관, 復―회복할 복, 돌이킬 복, 다시 부, 夫―발어사 부, 사내 부, 남편 부, 芸―성할 운, 많을 운, 김맬 운, 妄―망령될 망, 허망할 망, 凶―흉할 흉, 乃―곧 내, 이에 내, 久―오랠 구, 沒―다할 몰, 빠질 몰, 죽을 몰, 殆―위태할 태

    텅 빔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히 하면
    만물이 무성하게 일어나지만 나는 그 돌아감을 보노라.
    대저 만물은 많고도 성(盛)하지만, 제각각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감을 가로되 고요함[靜]이라 하고
    이를 일컬어 본성(本性)을 회복한다고 한다.
    본성을 회복함을 '상(常)' ― 참된 것, 영원한 것, 변치않는 것 ― 이라 하고
    이 '상(常)'을 아는 것을 밝다[明] 한다.
    상(常)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사(凶事)를 짓게 되나니,
    상(常)을 알면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게 되면 공평하게 되며,
    공평하게 되면 자기 자신과 삶의 진정한 주인[王]이 된다.
    이 '주인됨'이 곧 하늘이며,
    하늘은 곧 도(道)요,
    도(道)는 영원하나니,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다.

    < 뜻풀이 >


    텅 빔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히 하면(致虛極 守靜篤)……다시 말하면, '허정(虛靜)하면', 곧 '우리의 마음이 텅 비고 고요하면'이라는 말이다. 이는 또한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이 내려지면'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만물(萬物)이 무성하게 일어나지만 ― 이때의 '만물'은 우리 안의 만물을 가리킨다. 곧 시시로 때때로 일어나 우리 자신을 금세 사로잡아버리는 짜증, 분노, 미움, 게으름, 불안, 막막함, 슬픔, 기쁨 등등의 온갖 번뇌(煩惱)와 오욕칠정(五慾七情)을 가리킨다 ― 나는 그 돌아감을 보노라(萬物竝作 吾以觀復)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노자는 다시 이 부분을 환기(喚起)하는 듯한 말을 한다. '대저 만물은 많고도 성(盛)하지만, 제각각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라고.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오해하고 있거나 착각하게 되는 표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근원으로 돌아간다(復歸其根)'라는 말이다. '근원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대뜸 정말 돌아갈 '근원'이라는 것이 따로 있거나, 근원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사실>을 사실로서 다 담아낼 수 없는 언어(言語)의 한계에서 비롯된 우리의 오해이자 착각이며, 우리의 사고(思考)가 만들어낸 허구적인 분별(分別)일 뿐이다.

    사고(思考) ― 혹은 이를 마음[心]이라 해도 좋다 ― 는 그 속성상 언제나 모든 것을 둘로 나눈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와 '미래의 저기'를 나누고,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나누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를 나누고, '중생(衆生)'과 '부처'를 따로 둔다. 또한 마찬가지로,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속(俗)'과 '성(聖)'을 나누고, '부족'과 '완전'을 나누며, '나타남'과 '돌아갈 근원(根源)'을 나눈다. 그리곤 이 세계(世界)가 실제로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자세히 캐묻지도 않고, 또한 그럴 틈도 주지 않으면서, 이번엔 그 둘 중 하나만을 간택(揀擇)하도록 사고는 끊임없이 우리를 내몬다. 다른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아니, 사실 사고(思考)에는 다른 여지가 없다. 일단 둘로 나누면 그 중 하나만을 택하려고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언제나 안달하는 것이 또한 사고의 속성인 것이다.

    아, 그런데 우리가 그 사고(思考) 안에서 살고 있으니, 그리고 그 사고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요 사실인 양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가 끊임없이 그 양편 모두에 끄달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고가 보여주는 것은 실재(實在)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실재 같은 허구다.

    노자가 이 장(章)에서 '제각각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各復歸其根)'라는 말을 통하여 '귀근(歸根)'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돌아가야 할 '근원'도, 근원으로의 '돌아감'이라는 것도 없다. 그러한 것들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다만 우리의 사고(思考) ― 곧 분별심(分別心) ― 가 만들어낸 '환(幻)'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미 '근원(根源)'의 자리에 있으며, '지금 여기'가 또한 이미 '근원'이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그 '근원'의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이를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①를 통하여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① '불확정성의 원리'는 양자역학(量子力學)의 기본원리로서, 입자(粒子)-파동(波動)의 이중성을 이해하기 위해 1927년 하이젠베르크(W.K.Heisenberg)가 도입한 원리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입자(粒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확정된 값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입자는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가지는데,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하면 '운동량'의 측정이 부정확하게 되고, 반대로 입자의 '운동량'을 정확하게 알고자 하면 입자의 '위치'는 완전히 불확실하고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인해 19세기 초 뉴턴(Newton) 역학을 바탕으로 한 결정론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물리세계에서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고 단지 통계적으로만 기술할 수 있다는 비결정론적인 새로운 세계관이 대두되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물리학(物理學)의 세계를 잘 모른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나는 '물리' 혹은 '생물'과목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띵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게, 도대체가 그 내용들이 내겐 그저 어렵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도덕경(道德經)의 이 장(章)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물리학의 이론들을 들먹이는 것은, 나는 오직 '삶'과 '인생(人生)'과 '인간'과 '자아(自我)' 등에 관하여 관심이 많은데, 우연히 어떤 책을 읽다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의 그 짤막한 명제(命題)와 그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접하는 순간 문득 그것이 나에게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삶과 영혼의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너무나 절묘한 방편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바탕하여 여기에서의 노자의 '귀근(歸根)'을 설명하고 싶은 것인데, 그러나 그때의 내 가슴을 울린 진동만큼이나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하나의 입자(粒子)는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치'라는 관점에서 볼라치면 '운동량'의 측정이 불확실해지고, 반대로 '운동량'의 관점에서 보면 '위치'가 불분명해져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인데, 이를 그대로 우리 자신과 삶에 적용해 보면,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과 삶 그 자체에도 분명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운동량'이라는 측면에서만 자기 자신과 삶을 들여다보고 '위치'라는 관점을 놓쳐버리기에,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에건 자기답지 못하고, '자신다움'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부초(浮草)처럼 떠다니게 되는 것이다.

    여기 한 점(點) ― 우리 '존재'와 '삶'이 현재 점하고 있는 어떤 위치 ― 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우리는 살아오면서 언제나 그것을 다른 점(點)들과의 비교선상에서만 바라보도록 오랫동안 조건지어져 왔으며 또한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그래서 이젠 아예 그 점(點)을 그 점 자체로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려② 어떤 것이든 다만 비교선상의 한 점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나아가 삶과 세계(世界)가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다고 믿어버리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비교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비교선상에서만 자기 자신과 삶을 보아왔고, 또한 그런 측면에서만 인간과 '관계(關係)'들을 이해해 왔기에 단 한 순간도 진정으로 '자기 자신'과 '삶'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언제나 두리번거리며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운동량'에 주목하면 '위치'가 불분명해져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꼭같다.

    ②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아직 이 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을 남과의 비교선상에 두지도 않으며,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과거나 미래의 그것과 비교하지도 않는다. 어린 아이들은 매 순간순간 다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뿐이며, 오직 '현재'를 살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자유롭고 행복한 것이다. 예수도 말하지 않았던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3) 라고.

    그러나 하나의 입자(粒子)가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닌 것처럼, 우리네 '삶'과 '존재'도 다만 비교선상에서만 바라볼 수 없는 어떤 '절대(絶對)의 창(窓)'을 지금 이 순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언제나 '비교선상의' 자신만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우리 대부분에게 있어서 잊혀져버린 이 창(窓) ― '비교'가 끝이 난, 그래서 다만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서 바라보고, 과거나 미래와의 비교 속에서가 아니라 '현재'를 다만 '현재'로서 바라보는 ― 이 삶의 어느 순간 다시 열리기만 하면③ 그 순간 우리 안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이 뜨여져, 그토록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던 그 모오든 '갈증'이 끝이 나고,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삶에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③ 그러나 사실 이 창(窓)은 닫힌 적이 없다. 언제나 열려 있다. 그렇듯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미 '절대(絶對)'의 자리에 와있다. 그런데도 우리 눈 앞을 가리는 한 가닥 분별심(分別心) 때문에 이를 깨닫지 못하고, '지금' '여기'는 아직 아니라 하며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으니, 이 안타까움을 어찌할꼬! 성경에도 다음과 같은 절묘한 구절이 보인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요한계시록 3:7~8)

    내가 교직(敎職)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5교시 수업을 할 때였는데, 나른한 봄날 오후였기에 수업을 하다 보면 여기 저기서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다 못해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몇 있다. 그러면 대개는 수업을 하다 말고 창문을 열게 하거나 간단한 몸풀기를 통해 잠들을 깨우는 경우가 많은데, 어느 날엔가는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들어 나름대로 실험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창가에 앉아 따뜻한 봄햇살을 맞으며 곤히(?) 잠들어 있는 어떤 학생을 깨우며 내가 말했다.
    "얘야, 너는 생긴 것도 장미꽃처럼 생겼더니, 자는 모습도 어쩜 그렇게 장미꽃을 닮았니?"
    그랬더니, 조금 전까지 부스스 하고 미안해 하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면서 하는 말이,
    "어머나,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사람 볼 줄 아시네요! 어쩜!" 하는 것이었다. 하하하…….
    그래서 다음 날에는 다른 반의 5교시 수업을 들어가 또 어제처럼 심히 졸고 있는 어떤 학생을 깨우며, 이번엔 이렇게 말해 보았다.
    "얘야, 너는 생긴 것도 호박꽃처럼 생겼더니, 자는 모습도 어쩜 그렇게 호박꽃을 닮았니?"
    그랬더니, 이 여학생은 갑자기 잠이 확 깬다는 듯, 그리고 심히 짜증섞인 어투로,
    "선생님! 왜 그러세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수업시간 중에 졸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문책하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의 좀 거친 항변에 나도 깜짝 놀랐지만, 어쨌든 우리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이렇게 깊게 물들어 있는 것이다. 정말 장미꽃은 예쁘고, 호박꽃은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장미꽃은 장미꽃이고, 호박꽃은 호박꽃일 뿐이다. 거기 어디에도 '우열(優劣)'은 없다. 그 둘은 서로 다를 뿐 비교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은 비단 장미꽃과 호박꽃의 경우에만 해당되는가? 자연의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말이 아닌가? 결국 '우열(優劣)'이란 사물에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는 인간의 마음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이 만들어낸 허구(虛構)가 아닌가?

    자,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지금 이 순간의 '나', 지금 여기에서의 '나'는 '부족'하거나 혹은 '잘난' 존재인가? 아니다! 나는 단지 나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I am who I am). <비교>하면 '부족'과 '잘남'이 나타나지만, 그리하여 그 허구에 스스로 끌려다니며 한없이 주눅들기도 하고 또한 허망히 우쭐거리게도 되지만, 그냥 '나'를 '나'로서, '현재'를 '현재'로서,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서 바라보는 눈이 내 안에서 뜨이면 '나'는, '현재'는, 그리고 하나 하나의 사물은 모두가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절대자(絶對者)들이요 절대(絶對)한 순간들 뿐④ 그 어느 것 하나 그 어느 한 순간도 높이거나 경홀히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자각 속에서 진정한 '자기로부터의 해방(解放)'이 찾아온다.

    ④ 이것은 마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위치'에 주목하면 '운동량'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꼭같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문득 앞에서 말한 원효(元曉) 대사의 시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心生故種種法生하고 心滅故龕墳不二라 又三界唯心이요 萬法唯識이로다 心外無法하니 胡用別求리오 /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니 온갖 종류의 법(法) ― '더럽다'-'깨끗하다', '아름답다(美)'-'추하다(醜)', '잘났다'-'못났다', '부족'-'완전', '번뇌(煩惱)'-'보리(菩提)', '중생'-'부처' 등등 ― 이 일어나고, 그 마음이 사라지니 감실(龕室)과 무덤이 둘 아니구나! 그렇듯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이 오직 식(識)이로다. 마음 바깥에 법 없으니 어찌 따로이 구하겠는가!

    그러니 보라! '깨달음'이란, 그리고 우리네 '삶과 영혼의 자유'란 달리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과 삶을 바라보는 눈 하나가 달라지면 '비교선상의' 그 자리가 바로 절대(絶對)의 자리인 것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미 이 자리에 와 있다! 아니, 우리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다! 단지 우리가 그 <사실>을 몰랐을 뿐! 아아, 우리는 이미 더할 나위 없는 풍요의 자리에 와 있다! 우리는 이미 '근원(根源)'이다!

    근원으로 돌아감을 가로되 고요함이라 하고(歸根曰靜)……진실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진실로 '지금' '여기'가 근원임을 알게 되면 그땐 고요함이 찾아온다. 내 영혼에는 비로소 쉼이 오고, 마음에는 한없는 평화가 깃든다. 아아, 나는 비로소 나 자신[眞我]이 된 것이다![是謂復命]

    자기 자신[眞我]을 앎을 상(常) ― 참된 것, 영원한 것, 변치않는 것 ― 이라 하고, 이 상(常)을 아는 것을 밝다 한다(復命曰常, 知常曰明)……그렇다. 자기 자신을 알면 모든 것을 안다. 내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아니, 내가 곧 그것이다!(I am That)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사(凶事)를 짓게 되나니(不知常, 妄作凶)……이때의 '흉사(凶事)'는 흉사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절대(絶對)의 자리를 떠나 '귀근(歸根)'하려는 일체의 몸짓들이 다 흉사다. 그것은 마치 이미 이 자리에 있으면서 이 자리로 돌아오려는 어리석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상(常)을 알면 포용하게 되고(知常容)……그렇다. 상(常)을 알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리하여 비교에서 오는 모든 간택(揀擇)이 사라지고(容乃公), 이는 곧 자기 자신과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됨을 의미하며(公乃王), 이 '주인됨' 그것이 곧 하늘이요 도(道)이다[王乃天, 天乃道].

    도는 영원하나니(道乃久)……이때의 '영원'은 곧 '지금 이 순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는 '영원'이라는 관념은 허구다. 영원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다만 '현재'를 살라. '현재'는 언제나 새로우며,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 '현재' 속에 올올이 다 녹아들어 있다. 아아, 그리하여 우리가 이 '현재'에 눈뜰 때, 그때 우리의 온 존재와 온 생명도 함께 깨어나 삶과 더불어 넘실넘실 지복(至福)의 춤을 추게 되리라![沒身不殆]

 

( 김 기태 경 읽기 펌)

 

 

제41장 - 큰 그릇은 더디 이루어진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상사문도, 근이행지, 중사문도, 약존약망, 하사문도,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
대소지, 불소, 부족이위도, 고건언유지, 명도약,
 
進道若退, 夷道若, 上德若谷, 太白若辱, 廣德若不足,
진도약퇴, 이도약, 상덕약곡, 태백약욕, 광덕약부족,

建德若偸, 質眞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건덕약투, 질진약,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대상무형, 도은무명, 부유도선대차성.


 

참으로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그것을 실천하는데

중간 정도의 사람은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취하고
아주 정도가 낮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숫제 같잖다는 듯이 크게 웃고 만다.
그들에게 비웃음을 살 정도가 아니면 참다운 진리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격언이 있다.
참으로 밝은 길은 얼른 보기에 어두운 것 같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얼른 보기에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며
펀펀한 길은 얼른 보기에 울퉁불퉁한 것처럼 보인다.

 

최상의 덕은 골짜기처럼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참으로 희고 깨끗한 것은 얼른 보기에 우중충해 보이며
참으로 넓고 큰 덕은 얼른 보기에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확고부동한 덕은 얼른 보기에 구차스러워 보이고
참으로 진실한 덕은 얼른 보기에 절조가 없는 것처럼 보이며
다시없이 큰 네모 난 것은 그 구석을 가지지 않는다.

 

참으로 위대한 인물은 보통 사람보다 그 성취가 늦고
다시없이 큰 소리는 도리어 그 소리가 귀에 잘 들리지 않으며
더없이 큰 형체를 가진 것은 도리어 그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도는 숨어서 모양이 보이지 않고 사람의 말로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도란 것은 만물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고 그러면서 그 존재를 온전히 해준다.
 

 (다른 해석)

 

최고의 뜻을 가진 사람은 도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해서 결코 중단하는 일이 없다. 중간 정도의 보통 사람은 도에 관한 얘기를 들어도 참인 듯 거짓인 듯 있는 듯 없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저속한 뜻을 가진 사람은 도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오히려 크게 웃고 마니 만약 웃지 않는다면 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밝은 도는 오히려 어두운 듯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도는 오히려 물러나는 듯하고, 평탄한 도는 오히려 울퉁불퉁한 듯하다'고 얘기한다.

마찬가지로 최상의 덕은 오히려 아래에 처해 있는 골짜기와 같고, 최상의 청렴함은 오히려 더러운 듯하고, 광대한 덕은 오히려 부족한 듯하고, 강건한 덕은 오히려 태만한 듯하고, 순박한 덕은 오히려 쉽게 변하는 듯하니 그 이치가 여기에 뿌리를 두지 않는 것이 없다.

광대한 공간은 가리킬 만한 구석이 없고, 가장 큰 그릇은 뒤늦게 만들어지며, 가장 큰 음성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고, 가장 큰 형상은 볼 만한 모습이 없다. 대도는 너무나 은밀해서 이름 붙일 수도 없다. 하지만 대도만이 훌륭히 베풀면서 만물을 생성한다.

<林語堂 풀이>

 

<성대한 덕은 모자란 듯하다..>
양자거는 노자를 만나려고 남쪽 패 지방에 갔는데 그 때 노자는 서쪽 진나라로 갔다. 그래서 양자거는 교외로 나가 양(梁) 땅에서 노자를 만났다.
노자는 그와 함께 길을 가다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탄식했다.

"처음에는 널 가르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구나!"

양자거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윽고 여관에 이르자, 양자거는 세숫대야며 양칫물이며 수건이나 빗을 노자에게 바치고 문밖에서 신을 벗고는 무릎 걸음으로 노자 앞에 가서 말했다.

"아까 선생님께 여쭙고 싶었지만, 선생님께서 길을 가는 도중이라 감히 여쭙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한가하신 듯하니,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을 묻고 싶습니다."

"그대는 눈을 치껴뜨고 있는 것이 거만해 보인다. 그러니 누가 감히 그대와 함께 하려고 하겠는가? 최상의 청렴함은 오히려 더러운 듯하고, 성대한 덕은 오히려 부족한 듯하다."

깜짝 놀란 양자거는 낯빛을 고치면서 말했다.

"공경히 그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처음 양자거가 여관에 갔을 때 함께 묵은 손님들도 그를 맞이했고, 여관집 주인은 자리를 깔아주고, 그의 아내는 수건과 빗을 바치고, 같이 묵은 사람들은 동석하길 피하고, 불을 쬐던 사람도 부엌에서 달아났다. 그러나 노자의 가르침을 듣고 돌아온 이후로는 여관에 묵는 사람들이 그와 앉는 자리를 다툴 정도였다.

<장자 잡편 제27장 우언(寓言)>

 

< 출처 :쓸쓸히 채워져 있고 따뜻이 비워진 숲 원문보기 글쓴이 : 들이끼속의 烏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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