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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John D. 록펠러 / 석유재벌

작성자靑野|작성시간08.12.07|조회수1,350 목록 댓글 0

 

 

 

 

 

록펠러(Rockefeller, John Davison) 

 

1839. 7. 8 뉴욕 리치포드~1937. 5. 23 플로리다 오몬드비치.

미국의 실업가·자선사업가.

석유산업계를 지배하여 미국 최초의 커다란 트러스트인 스탠더드석유회사를 창설했다.
1853년 그는 가족과 함께 클리블랜드로 이주했다. 6년 후에는 자신의 최초의 기업체로서 건초, 곡물, 육류, 기타의 상품들을 취급하는 중개회사를 창설했다. 1860년대 초반 펜실베이니아 서부 지역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던 원유 생산의 상업적 잠재력을 감지하고 1863년 클리블랜드 근처에 처음으로 자신의 정유소를 세웠다. 2년 만에 이것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정유소가 되었고 그후부터 록펠러는 전적으로 석유사업에 전념했다.

1870년 록펠러와 몇몇 동료들은 오하이오의 스탠더드석유회사를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경제적 운영에 역점을 둔 록펠러 덕분에 스탠더드는 번성해서 경쟁업체들을 매입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872년에는 클리블랜드의 거의 모든 정유소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회사는 철도 당국과 협상하여 수송비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송유관과 터미널 설비들을 입수하고 다른 도시들의 경쟁 정유소들을 사들여, 미국 국내와 해외로 발판을 넓히려고 정열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1882년 무렵에는 미국 내에서 원유사업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다. 1881년 록펠러와 그의 측근들은 오하이오의 스탠더드 본사와 다른 주 지부들의 주식을 록펠러를 대표로 하는 9인 이사회의 통제 아래 두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미국 최초의 대규모 '트러스트'를 형성함으로써 다른 독점업체들에게 하나의 조직 유형을 보여주었다.
스탠더드석유회사의 공격적인 경쟁행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스탠더드사를 비롯한 독점기업들은 날로 여론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몇몇의 산업화된 주(州)들은 독점금지법을 제정했으며 미국 연방의회는 셔먼의 독점금지법(1890)을 통과시켰다. 1892년 오하이오 대법원은 스탠더드석유트러스트가 오하이오 주의 독점금지법을 위반한 독점기업이라고 판정했다. 록펠러는 트러스트를 해체시켜 그 재산권을 다른 주에 있는 회사들로 이전시켜서 동일한 9명의 겸임 중역회의가 계열사의 경영을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법원의 결정을 모면했다. 1899년 이 회사들은 뉴저지 주의 지주회사인 스탠더드석유회사로 다시 통합되었다. 이 회사는 1911년 대법원에 의해 셔먼 독점금지법을 위반한 불법 기업으로 판정받을 때까지 존속했다. 독실한 침례교도였던 그는 1890년대 동안 점차 관심을 자선사업으로 돌려 1897년 이후로는 전적으로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1892년 시카고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고, 죽을 때까지 8,000만 달러 이상을 이 학교에 기부했다. 아들인 존 D. 록펠러 2세와 함께 훗날 록펠러대학교로 이름을 바꾼 록펠러 의학 연구소를 1901년 뉴욕 시에 세웠다. 1902년에는 일반교육원을, 그리고 1913년에는 록펠러 재단과 같은 주요 자선기관들을 설립했다. 일생을 통해 그가 희사한 금액은 총 5억 달러를 넘었고, 1955년까지 아들의 희사금을 합하면 총 25억 달러가 넘었다.

권위있는 전기로 앨런 네빈스의 〈존 D. 록펠러:미국 기업의 영웅시대 John D. Rockefeller:the Heroic Age of American Business〉(2권, 1940)가 있고, 개정판으로 〈능력연구:실업가이자 박애주의자인 존 D. 록펠러 Study in Power:John D. Rockefeller, Industrialist and Philanthropist〉(2권, 1953)가 출간되었다.

 

<백과사전> 

 

 

▲ 1932년 5월 4일 촬영한 석유왕 존 록펠러(왼쪽)와

아들 존 록펠러 주니어의 모습

 

록펠러 2세(Rockefeller, John Davison, Jr) 

 

1874. 1. 29 미국 오하이오 클리블랜드~1960. 5. 11 애리조나 턱슨.

존 D. 록펠러 1세의 아들로서 미국의 자선사업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뉴욕 시에 록펠러 센터를 세웠고 국제연합(UN)을 뉴욕 시에 유치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한동안 아버지와 함께 사업에 참여했으나 1910년부터 자신의 모든 힘을 거의 전적으로 자선사업에 바쳤다.
그는 록펠러 1세와 어머니 로라 스펠만 록펠러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1897년 브라운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했다. 그가 자선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파업에 오랫동안 반대해온 아버지의 입장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록펠러 소유의 콜로라도석유철강회사에서 발생한 연좌파업 노동자들 중 40명 이상이 민병의 발포로 사망한 소위 러드로 대학살(1914. 4. 20)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후에 그의 직원들은 미국 최초로 경영진의 통제를 받는 회사노조를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주요 자선기관들을 세웠는데, 뉴욕 시에 록펠러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록펠러 의학연구소(1901), 일반교육원(1902), 록펠러 재단(1913)을 설립했다. 1930년대 그는 맨해튼에 록펠러 센터 건설을 감독했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미국의 군인과 그 가족들을 도와주는 기관인 연방봉사단을 창설하는 데 일조했다.

전쟁 후 그는 국제연합(UN)에 부지를 기증했는데 이 기증이 UN을 미국에 유치하는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8년 뉴욕 시의 예술공연을 위한 링컨 센터에 500만 달러를 기증했다. 이밖에도 그는 버지니아 주의 식민지 윌리엄스버그의 환수, 뉴욕 시 빈민지구를 위한 저렴한 임대주택의 건설,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와 현대미술박물관의 기증 등과 같은 자선사업을 벌였다.
록펠러는 2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 애비 그린 올드리치(1874~1948)와의 사이에서 1903년에 태어난 외동딸 애비와 존 D. 3세, 넬슨 A., 로란스 S., 윈스롭, 데이비드라는 5명의 아들을 두었다. 외동딸인 애비는 3번 결혼해서 밀턴·파디·모즈라는 성을 얻었다.

 

<백과사전>

 

 

  

록펠러의 회심

 

록펠러는 33세에 백만 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최후 검진을 받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 주는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 "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지긋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잠시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측은 병원비가 없으면 입원이 안되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 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도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뒤 그는 98세 까지 살면서 자선사업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록펠러의 결심  

 

세계 최고의 부자요, 세계 최고의 석유왕이며 세계 최고의 자선가로 유명한 존 D.록펠러는 1839년 7월 8일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와 어머니 엘리사 데이비슨의 장남으로 뉴욕주 리치포드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10살 때까지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의 잘못으로 행복했던 가정은 어려움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도덕과 예의범절에 엄격했고 어려운 가정에서도 열성적인 신앙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잘 양육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무절제한 낭비의 결과는 무자비한 가난뿐이다."라는 근검절약의 생활 철학을 남기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부를 축적하는데 성공한 사람에겐 돈의 위력을 깨우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게 마련인데 록펠러는 일곱 살 때 야생 칠면조 둥지에서 알을 가져다가 이것을 부화시켜 한 떼의 칠면조를 갖게 되었고, 3년을 저축해서 이웃집 농부에게 50달러를 7% 이자로 빌려줄 수 있게 되었다.

 

1년 뒤 원금과 함께 3달러 50센트의 이자를 받은 어린 록펠러는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3달러 50센트는 그가 하루 열 시간씩 열흘은 감자를 캐야 받을 수 있을 만큼 거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나는 돈을 위해 일할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고백했다.

 

록펠러는 33세 때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10년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를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53세 때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억만 장자가 록펠러 혼자뿐이었으며, 일주일 수입이 1백만 달러나 되었다. 

록펠러의 재산을 현 시세로 계산하면 빌게이츠가 가진 전 재산보다 3배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리버사이드 교회 (록펠러기념 교회)

 뉴욕 허드슨강주변에 위치한 리버사이드교회.
좌석이 2,500석인 석조로된 미국의 전통적 교회로서 종탑이 21층이며 종탑맨 꼭대기위에는
자동차만한 종들(CARLLION)이 75개가 매달려서 매일 정오에 이 종들을 가지고 연주한다.

 

어머니의 유언  

 

"록펠러야! 네가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고 싶니? 세계에서 제일 멋진 교회를 하나 지어 하나님께 바쳐보아라 그러면 넌 진짜로 세계 제1의 부자가 될 것이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리버사이드교회를 건축하여 기증하였고, 평생
4982개의 교회를 지었다.


 

록펠러의 도전

아주 평범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잘 하는 것이 없었고 머리가 좋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근근히 학교공부를 따라갔습니다. 그의 가정도 부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참 좋은 어머니를 가졌습니다. 그가 비록 평범한 아이였지만 그 어머니는 그를 기독교 신앙으로 잘 양육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에게 특별히 십일조 정신을 철저히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아예 주머니를 2개 만들어 주고는 오른 쪽 주머니에는 꼭 십일조를 챙겨 넣도록 했습니다.

10센트 짜리 은화가 하나 생기면 그것을 동전으로 바꾸어서 오른 쪽의 십일조 주머니에다 1센트를 꼭 챙겨 넣도록 교육시킨 것입니다. 그는 8세 때에 자기가 받은 돈 20센트에서 2센트를 뚝 떼어서 처음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 뒤부터 그는 계속해서 십일조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반드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는 십일조뿐만 아니라 전도헌금도 드리고 구제헌금도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15세 때에 한 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고는 그 교회에서 회계로 쭉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21세 되던 해에 한 사건이 터집니다.

그 당시 그가 다니던 교회 건물에 저당이 잡혀 있었는데 갑자기 그 저당권자가 돈을 갚으라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 회계로서 교회 재정을 맡고 있어서 그랬는지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배 후에 출입문에 서서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지금 교회가 어렵습니다. 교회를 위해 뭔가 해 주십시요." 그는 이렇게 몇 달 동안 노력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적은 기부금들을 모아서 저당 잡혔던 교회를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 정말 돈이 없으면 안 되겠구나. 돈을 벌어야 하겠구나."

그는 굳게 결심하고 자기 사업에 뛰어듭니다. 그는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과 여기저기서 융통한 돈을 합쳐서 1800달러로 곡물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는 첫 사업에서 그런 대로 성공을 거둡니다. 그래서 25세 때에는 미국 클리블랜드에다 정유소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 당시는 석유사업이 막 뜨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석유사업에 전심전력하게 됩니다. 그는 자나깨나 석유만 생각했습니다. 그의 옷은 항상 석유 냄새로 진동했습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에 석유 냄새 때문에 손님들한테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정유소는 그럭저럭 잘 운영돼 나갔습니다.

그는 광산업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사기를 당해서 투자자금을 모두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서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빚 독촉에 너무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자살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어서 그 황량한 폐광에 납작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그 증거를 보여 주십시요." 그는 통곡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그는 일어나 다시 폐광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파들어 갔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검은 덩어리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바로 석유였습니다. 그는 유전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는 32세 때에 자본금 100만 달러로 오하이오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는 사세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44세 되던 1882년에 미국 석유산업의 90%를 장악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지은이 : 이채윤

출판사 : 미래사

판매가 : 정가 9,900원,

2006.3.25 발간, 초판16쇄 2007.8.30


책소개 : 록펠러는 인류가 자본주의 시대를 맞이한 이래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세계 최고의 부자다. 그가 벌어들인 돈은 현재의 가치로 따져서 빌 게이츠의 3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 책은 미국 전체 석유의 95%를 독점하면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던 록펠러(John Davidson Rockefeller, 1839~1937)의 평전이다. 특히 이 책은 기독교인으로서의 록펠러에 주목하고 있다.

1. 록펠러 어머니의 교훈

1.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친아버지보다 더 중요한 공급자는 하나님이시다.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목사님과 좋은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축복된 길이다.

3. 주일 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 충성하여야 한다.
4. 십일조는 하나님 것이므로, 먼저 구별한 후 나머지를 사용하여야 한다.
5.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일마다 장애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오늘 해야 할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모든 일에 함께하여 주실 것을 온전히 믿는 기도가 필요하다.
7.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빨리 회개하여 죄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8. 아침에는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그리고 도와 준일에 대해 절대로 나팔을 불면 안된다.
10. 예배 시간에 항상 앞에 앉아라. 예배 드리고 말씀 듣는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2. 어린시절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20-21)
록펠러의 아버지는 골드러시 바람을 타고 서부로 자주 여행을 떠나서 집안을 잘 돌보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이 냉혹하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어머니는 록펠러가 6살 때부터 십일조를 가르쳤다. 용돈을 쥐어주고 그 용돈에서 십일조를 떼서 오른쪽 주머니에 넣게 했다. 그는 일기를 쓰듯 평생 철저히 회계장부를 썼고, ‘수입의 십분의 일 헌금’이라는 원칙을 지켰다. 최고의 부자가 된 후에는 십일조 전담부서에 40명의 직원을 두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50달러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그 돈을 빌려주고 6개월 뒤 3달러 50센트의 이자를 받았다. 상한 콩을 싸게 사서 상한 콩을 골라낸 다음 비싼 값에 되팔기도 했다. 학창시절에는 교회일에 열심이어서 별명이 ‘집사님’이었다.

3.일찍 시작한 사업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16:9)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노무직을 거부하고 곡물위탁 판매회사의 경리로 일하게 된다. 그는 월급이 많지 않았지만 6시30분에 출근해서 저녁10시까지 일했다. 그는 사장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일했고 그로 말미암아 곡물위탁판매업의 생리를 잘 익혔다.
그는 3년후 클라크라는 사람과 함께 새로운 곡물위탁 회사를 차렸다. 각각 2000달러씩 투자했는데, 그동안 받은 월급이 800달러 밖에 없어서 아버지에게 나머지 금액을 10%이자로 빌렸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몇 번 록펠러에게 고리의 이자로 돈을 빌려주곤 하였다. 록펠러는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겸손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록펠러는 직접 농장에 방문해서 좋은 물건을 싸게 구입하는 방법으로 일을 하였고, 기회다 싶을 때는 무모해 보일 만큼 과감하게 투자했다. 회사는 급성장했고, 마침 남북전쟁이 터져서 물가가 치솟고, 군수물자의 주문이 쇄도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신용 평가가 높은 회사가 되었다.
록펠러는 19살에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다. 그는 주일학교와 운영위원의 서기를 맡아보았다. 그는 교회 행정에 깊이 관여하고 많은 모금 운동에 열정적이었고, 한번 정한 목표를 위해서는 몰입해서 일했다.
당시는 석유가 발견되어 곳곳에 유전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록펠러는 정유업과 석유 유통업에 더 관심이 많아서 정유회사를 차렸다. 그때 엔드류스라는 화학을 독학한 사람과 동업하게 되었는데, 그는 정유업에 탁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석유사업의 미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의 종교적인 신성함마저 띠고 있었다.

4.일생을 바친 석유사업
록펠러는 25세경에 폐광을 사들여서 광산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속아서 산 광산이어서 석탄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파고 들어도 석탄은 나오지 않고 자금은 바닥이 나고 인부들은 폭도로 변했다.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그에게 꿈으로 계시하시고 계속 파 내려갈 것을 지시하셨다. 그는 용기를 내고 인부들을 설득해서 계속 파 들어갔더니, 그곳에서 석유가 터져 나왔다.
회사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록펠러는 벌어들인 돈을 다시 석유사업에 투자했다. 그는 저장 탱크와 철도를 장악하고 남들보다 더 견고하지만 더 싼 석유통을 제작했다. 그는 석유에 관한 모든 것을 생각해 내고 생산과 정유, 유통, 소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연구하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는 모든 사람들 보다 항상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이제 석유는 등불을 밝히는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산업계에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변모하였다.
그는 최초의 주식회사, 중역회의, 한 산업의 모든 분야를 독점하는 기업을 만들었다. 그의 경영 방식은 전세계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5. 록펠러 제국
브로드웨이 26번가는 스탠더드 오일의 본사가 이전한 곳이다. 여기서 이 회사는 세계적인 기업이 된다.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40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중 14개 기업은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석유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록펠러는 새로운 유전을 닥치는대로 사들였고, 심지어 아주 질이 낮은 유전도 사들여 정유방식을 개선해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50대에 이르자 록펠러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과로로 인해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사소한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입원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정밀 조사 결과 1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러자 언론은 과연 그 많은 재산이 어디로 갈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그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스탠더드 오일에 대해 굳게 쥐고 있던 고삐를 천천히 놓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뛰어 왔을 뿐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죽으면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건강을 돌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그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1899년 이후로 록펠러는 사업가가 아니라 자선사업가로 변모했다. 그는 55년을 쫓기면서 살았지만, 남은 인생은 행복하게 살았다. 그는 병원에서 입원비 문제로 눈물을 흘리는 소녀를 몰래 도왔다. 그는 나중에 이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고 고백했다.

사회적으로도 석유사업의 독점에 대한 압력이 강해져서 록펠러는 세계 시장을 100%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접어야 했다. 대신에 그는 자선사업에 뛰어들면서 이 사업 또한 일반 사업 못지 않게 세심한 주의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선사업을 주관할 엄청난 규모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1903년 일반교육위원회(GEB)를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서 수많은 대학과 학생들을 후원하게 되었다. 또 젊고 유능한 게이츠목사를 만나서 자선 사업의 전반적인 목적과 마스터 플랜을 구축하게 되었다. 록펠러 의학연구소, 록펠러 재단, 로라 스펠먼 록펠러 기념재단이 뒤이어 생겨났으며 록펠러가 은퇴한 다음에는 그의 아들이 이 자선사업을 이어가도록 했다.
1911년 미국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해체를 결정했다. 회사는 34개의 개별회사로 해체되었고 주주들은 각자의 지분을 배당 받았다. 그러나 해체된 계열사들의 주식 가치는 5개월만에 4배로 늘어났다. 해체 당시 록펠러의 재산은 2억 달러였는데 곧 10억 달러를 넘어서고 말았다. 오히려 이런 현상은 록펠러에게는 위기가 되었다. 게이츠 목사는 더 빠른 속도로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후손들까지 재산에 치어 죽을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록펠러는 이제 돈 버는 일이 아닌 돈 쓰는 일로 바빠진 것이다. 그는 12개의 종합대학, 12개의 단과대학, 4928개의 교회를 지어 사회에 바쳤다.
록펠러 재단은 경제공항을 이겨내도록 록펠러센터를 세웠는데, 장장 10년의 공사기간을 거쳤다. 또 뉴욕시가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감안해서 뉴욕의 수도관을 자비로 묻어주어 뉴욕 시민들에게 평생 수도요금을 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했다. 록펠러의 후손들은 지난 100년간 미국 사회의 기업경영, 자선사업 분야 뿐만 아니라 예술, 정치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록펠러는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드린게 아니었다. 그는 십일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드린 십일조가 하나님의 밭에 뿌려져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씨앗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이 복리(複利)로 불려 주신다고 표현했다.
록펠러는 씨앗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며, 아무 곳에나 뿌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풍요로운 대지인 하늘에 뿌리는 것이라는 점을 인류에게 확연히 보여준 ‘첫사람’이 되었다.
‘내가 전세계 인류의 자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엄청난 재산을 모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나는 남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기 시작한 뒤로 오히려 재산이 점점 불어나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출처: 사랑덩어리>

 

 

 

록펠러 재벌

록펠러 가문의 유래는 애매하나 프랑스에서 살다가 독일로 이주할때 록펠러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미국으로 이주했다는 설과 스페인, 포르투갈계의 유대인의 가문이라는 설이있다.(대체로 유대인의 가능성이 높은것으로 얘기된다.)

록펠러 가문의 대부는 '윌리암 록펠러'로부터인데 그는 원래 무면허 의사로 떠돌며 다니다가 석유산업에 관계한다. 아들 John.D.록펠러는 석유사업의 생산,운송,정유의 3가지 산업중 정유산업에 눈독을 들여 Standard Oil 회사를 시작한다. 그는 경쟁회사를 합병하려고 뇌물과 첩자들을 매수하여 장악해갔다. 그래서 1890년대 까지만해도 미국원유의 90%를 점유하고 외국으로 까지 확대해갔다.- 마침내 미국 석유시장의 95%,유럽 석유시장의 75%를 지배하게 되었다.

1911년 너무지나친 독점체제 때문에 스탠다드 석유는 38개 기업으로 해체되었는데, 록펠러 일족은 38개 전사의 총 주식수50%이상을 소유하여 현재까지 실권을 장악하고있다. 예로, 세계 대기업 2위인 엑슨,4위인 모비르, 9위인 셰브론,13위인 인디애나 스탠다드등 그외에 캘리포니아 스탠다드(소카르),소피오 필립스66,마라톤 등의 기업도 록펠러 일족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하여튼 1863년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120년간 석유산업을 장악하여 100여국 이상에서 석유를 팔며 석유왕국을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록펠러는 또 하나의 석유회사를 키웠으니 그것은 Exxon사로 잘 알려졌고 유류공급선만도 155척이나 된다.

그외에 대 주주로 지배를 굳히고 있는 대기업은 AT&T,GE,이스트먼 코닥, 제네럴 후드 등 저명한 다국적 기업을 필두로 미국 주요 대기업 50사를 소유하고 있다. 특히 금융면에서는 미국 제1위(세계 8위)인 시티뱅크, 미국 제2위(세계28위)인 체이스 맨허탄의 지배권을 굳히고 있다.(87년 현재, 체이스 맨허턴 은행은 대비드 록펠러가 회장임) 또 생명보험회사도 장악하여 가장 큰 Mereopolitan life, Equituble life,New York life를 소유하고있다. 그래서 미국 50대 은행의 25%, 50대 보험회사의 30%가 록펠러가 소유하고있다. 그밖에 석유, 철강, 항공업체 등에 대출, 융자, 주식투자로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회사는 미국 100대기업에서 37개, 20대 운송업체에서 9개이다.

그리고 1901년 [의료연구 재단]으로 록펠러 재단이 설립되었는데 한 영향권 안에 있는 카네기 재단과 포드재단과 함께 자기들의 기금으로 미국 교육 연합회(NEA)와 결탁하여 사회주의적 교육의식을 고취했고 막시즘의 영향을 받은 John Dewey를 적극 지원하여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을 장려하였다. 또 록펠러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를 운영하여 수많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목사를 배출하였고, 또 연방교회 협의회(FCC)를 지원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급진주의 기독단체인 NCC가 되었다.

그 외에도 록펠러 재벌은 CFR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으며 그 CFR을 통해 미국의 매스컴들을 조정하고 있다. 즉 미국 라디오 방송기관인 RCA와 그 부속기관인 NBC방송 CBS역시 조종하고, ABC의 주식을 체이스 맨허탄 은행에서 67%나 차지하고 있어 그 영향권 아래에 있게 만들었다.

 

<자료: 크리스틴>

 

 

 

 

 

록펠러(1839~1937), 그는 누구인가 ?

 

록펠러 - 미국의 실업가·자선사업가

석유산업계를 지배하여 미국 최초의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창설한 사람으로 독실한 침례교도였던 그는  1897년 이후로는 전적으로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1892년 시카고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죽을 때까지 8,000만 달러 이상을 이 학교사업에 기부했다.


아들인 존 D. 록펠러 2세는  록펠러 의학 연구소를 1901년 뉴욕 시에 세웠고 1902년에는 일반교육원을 그리고 1913년에는 록펠러 재단과 같은 주요 자선기관들을 설립했다. 일생을 통해 그가 희사한 금액은 총 5억 달러를 넘었으며 1955년까지 아들의 희사금을 합하면 총 25억 달러가 넘었다. 록펠러라 하면 미국 역사상 최고의 갑부이며 엄청난 십일조, 철저한 신앙생활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미국인이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신명기 23:1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록펠러를 말하려면 그 이면에  숨겨져있는 그의 불법과 악행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어야 한다 .

록펠러,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뉴욕주() 리치퍼드 출생. 1859년 친구와 함께 상사회사(商事會社)를 설립하고, 1863년 부업으로 클리블랜드에 정유소(精油所)를 설립한 것이 번창, 1870년 자본금 100만 달러의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어 오하이오스탠더드석유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에 록펠러가 사장으로 취임, 타회사의 흡수 ·운임할려계약(運賃割戾契約) 등의 방법으로 급속히 사업을 확대하여 나갔다.

 

1882년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를 조직하였다. 1899년 오하이오의 주재판소로부터 셔먼독점금지법(반트러스트법) 위반의 판결을 받고도 이 회사는 지주회사(持株會社)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뉴저지주()에 지주회사 뉴저지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설립하여 실질적으로 석유업계의 지배를 계속하여, 미국 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유전과 정유소를 소유한 거대한 회사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11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반()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해체되었다. 그 후 록펠러는 재계에서 물러나 자선사업에 몰두하였다. 1890~1892년 시카고대학 설립을 위해 6,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그 후에도 3억 5,0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록펠러재단 ·일반교육재단 ·록펠러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하였다.

 

그는 정유회사를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경쟁자 죽이기"를 했다는 점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의 사업 확장을 위해 불의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미국전체 정유물량 90%를 독점했으며 경쟁업체 직원매수, 영업방해, 경쟁사의 전화 주문 갈취, 노동자를 협박, 경쟁사 경영진까지 매수를 했다.


더욱이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 일은 1913년 '러드로의 학살'이다. 록펠러가 인수한 콜로라도 석탄, 철강에서 노동쟁의를 진압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는데 당시 노동자들은 일당 1달러 68센트의 형편없는 임금을 받았고 그나마 회사상점에서만 쓸 수 있는 교환권 형태로 임금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회사 오두막에서 살다 해고통지가 오면 사흘 안에 비워야했고, 매년 2만 달러를 쓰며 프락치 등을 고용 노조설립을 막았다.


노동쟁의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40명이 숨지고 지하실에서 여자2명, 어린아이11명의 시체가 발견되자 더욱 커져 사태진압을 위해 연방군까지 동원해야만했다. 그때의 록펠러는 전혀 크리스천으로서 철저한 십일조를 하는 신앙으로 교육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노동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경영자들이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어떤 강력한 수단을 쓰는 것도 정당하다"고 록펠러는 말했다.


은퇴 후부터 자선사업을 시작 하지만 대통령 루즈벨트가 록펠러를 향해 "그 부를 갖고 얼마나 선행을 하든 상관 없지만 그 부를 쌓으려 저지른 악행을 보상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록펠러家의 사람들

 

록펠러   

1998년 8월 발행된 포브스지는 미국 역사상 최고 부자로 록펠러 1세를 꼽았다. 록펠러 등장은 초강대국 미국의 등장과 시대를 함께 했다. 록펠러 가문이 2대와 3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은 냉전 전략을 수립했고 제트기를 개발했다. 록펠러는 그야말로 미국의 모든 일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석유왕 록펠러'에게서 시작된 록펠러가의 드라마는 그 자체로 미국 현대사였다. 드라마는 한 가문의 사사로운 역사가 아닌, 한 왕조의 역사였던 것이다.

 

밴더빌트와 제이피 모건, 듀폰, 구겐하임, 멜런, 카네기 등 남북전쟁을 전후해 등장한 이후 세계 경제질서를 자신들을 위한 체계로 구축한 여러 재벌들 가운데에서도 록펠러라는 이름은 단연 첫머리에 오른다. 록펠러는 이후 100년 넘게 미국을 지배하는 하나의 축인 '록펠러가'를 만들어냈다. 책은 가히 '왕조'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았던 이 신화적 재벌가문의 4대에 걸친 흥망성쇠 이야기다.

 

록펠러(1839~1937)는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가문 록펠러가를 일으킨 사람으로 '더러운 자본가' '자선가' 라는 극단적 평가를 들었던 인물이었다. 100년 가까이 살면서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빌 게이츠의 3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록펠러가의 사람들'은 이 천문학적 돈을 바탕으로 록펠러란 한 가문이 어떻게 흥성하고 쇠락하는가를 보여준다. 동시에 사회의 중핵에 포함된 소수 동질집단을 통해 미국 근현대사를 조명하며 이 때의 기간은 4대, 1970년대까지이다.

 

록펠러는 석유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이에 비견되는 인물로 철강의 카네기, 자동차의 포드를 들 수 있다. 살아 생전 그의 재산에는 '더러운 돈'이란 명패가 붙어다녔다.  록펠러는 어려서부터 일기 대신 회계장부를 기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곡물위탁판매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 주급 4달러. 석유산업의 발흥은 셈과 관리에 능한 그에게 도약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의 전성기에는 그가 건설한 거대한 스탠더드 트러스트는 피스크, 굴드, 밴더빌트 등의 집단처럼 무차별적인 야심과 탐욕에 지배되어 그는 주식시장의 아귀다툼과 , 위탁재산, 담보물을 날로  먹어치웠다.

 

석유산업에 투신한 뒤 현장에 밀착해 원가절감 요소를 찾아 경비를 줄이면서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최적지점으로 모든 경영요소를 수렴했다.  그는 그 경쟁력을 바탕으로 당시 물류를 담당하는 핵심수단인 철도를 장악했으며 경쟁자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모든 '더러운' 수단을 동원해서 록펠러는 '스탠더드 트러스트'를 탄생시킨다. 미국 석유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한 독점기업체였다. 1911년 미 연방 대법원이 분할명령을 내리기까지 그는 엄청난 '검은 돈'을 모았다. 또한 반트러스트 법인 셔먼법에 의해 '스탠더드 트러스트'가 33개 소규모 석유회사로 나뉜 뒤에도 계속 치부할 수 있었다.

 

인류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무자비한 경제 시스템의 상징적 존재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그들이 아는  록펠러는 비즈니스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새로운 형태의 경제권력, 즉 기업 '트러스트'를 발명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휘두르는 권력은 사회 규범을 악용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록펠러 1세의 외아들 존 D. 록펠러 2세(John D. Rockefeller, Jr.)는 어려서부터 가업을 이을 "황태자"로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지만, 심약한 성격으로 평생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  주식 투자 실패와 각종 구설수로 인해 본의 아니게 가문의 이름에 먹칠만 더한다. 사람들에게 욕먹기 쉬운 경영 일선에서 일찌감치 물러나 자선 사업에만 전념하지만, 러드로우에서 일어난 파업 노동자 학살 사건을 무마하려다가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켜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가 곤욕을 치렀다.

 

이후 발 빠른 행보로 경제계 및 문화계에서 유력 인사로 자리 잡고, 사람들에게 록펠러 가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 주력하려고 막대한 재산을 동원하여 록펠러 센터를 비롯한 각종 기관들을 설립하고, 각 부문 전문가로 구성된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정치 경제 문화계에 걸친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록펠러 가문을 바야흐로 "왕조"의 수준에 올려놓게 되었다.

 

록펠러가는 3대째에 접어들며 그 폭이 더욱 넓어진 대신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동생에게 장남의 권리를 빼앗긴 록펠러 3세는 아시아 문제 전문가이자 록펠러가의 양심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둘째 넬슨 록펠러는 뉴욕주 주지사 4선에다 부통령을 역임했다.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3번이나 나갈 정도로 백악관을 향한 끝없는 욕망을 불태웠다.

 

넬슨은 부통령 인증 청문회에서 그때까지 비밀로 해왔던 가문의 재정관계와 비리를 낱낱이 공개했다. 1세와 2세가 평생을 바친 가문의 신화가 개인적 야망 때문에 무너졌다. 이후 4대의 록펠러가 사람들은 '개도 싫고 정승도 싫다'며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록펠러라는 성을 버리고 숨어 사는 사람이 나타났다. 모든 록펠러가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던 선ㆍ악의 공존을 본다.  

 

Noblesse oblige
"노블리스 오블리제"  말 그대로 고귀한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과연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윤리적 책임을 조금이라도 솔선수범하여 이행했을까? 그는  믿는자의 신앙은 별도로 하더라도 믿지 않는 자들의 기본윤리조차 지키지 않았다 
 

냉혹한 사람 록펠러  

대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기에  경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닥치는대로 다른사람의  기업들을 집어삼켰을까 ? 그는 철도 회사와 리베이트 계약을 맺어, 자사의 석유를 수송하게 해주는 대신, 다른 회사의 석유를 수송할 때는 높은 요금을 물리도록 했다. 또 경쟁사 스물 여섯 개 가운데 스물 두 개를 헐값에 인수해 정유 산업을 평정했다. 그 과정에는 협박과 압력이 동원되었다. 정치권 매수, 경쟁업체 협박, 문어발식 확장, 중소기업 기술 빼앗기, 주가 조작 등 악덕기업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비판을 한꺼번에 받은 록펠러이다.

 

그런 그가 말년에 행하였던  사회적 환원 (록펠러 재단, 록펠러 센터, 록펠러 의학연구소, 록펠러 대학(시카고 대학)... )  기여도에 의하여 그 모든 악행이 씻어졌다고 볼수 있을까? 부를 축적한 결과와 성공만을 얘기해서는 안된다 . 부를 축적하는 방법과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선하고 정직하게 번돈인가 ,악으로 축적한 재물인가에 따라 평가를 달리해야한다.

 

하나님은 창기의 번돈이나 개같은 자의  더러운 소득은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 하셨다. 과연 하나님이 록펠러의 그 더러운 소득으로 드린 십일조를  기뻐 받으셨을까?  절대 그럴리가 없으시다. 성경말씀대로 그러한 불법적이고 더러운 소득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될 뿐이다

 

그런 돈들은 받으실리도 없고  또한  복 내리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악한기업인으로서 더불어 불법으로 성공한 사례일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숨기면서  오로지 그가 습관처럼 해왔던 하나님과  뇌물로 거래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십일조행위만을 드러내놓고, 본받지 않아야할 인물을  설교예화로 드는 목사들은 대단히 부끄러워 하여야 할 것이다.

 
독과점, 그리고 자신의 부와  사업이권을 위하여  정당한 방법인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경쟁사를 헐값에 사들이며 벌인  협박과 폭력의 추한 모습들로 가득 채워진 리베이트와 온갖 뇌물 증여  갖가지 편법을 동원하여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돈벌기에 혈안이 되었던 그는 결국 악행의 댓가인 그의 모든 사업이 미연방 최고재판소로부터 반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해체되었다. 그후 말년에 사회자선사업에 많은 돈을 환원하려 노력하였지만 돈과 함께 얻었던 그 악명과 불명예를 얼마나 회복하였는지는 모른다. 또한  추앙받아야할 십일조의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악덕기업주의 표상이라 할 것이다

 

록펠러!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한번 그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지 않았다. 착취당한 눈물의 노동자들이 그의 이웃이었으며 불법에 무너진 경쟁자들이 그의 이웃이었다. 또한 이웃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소비자들에게도 독과점으로  피해를 입히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말씀을 도외시했다.

  

록펠러의 십계명은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겼던 유언이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해라.

4. 누구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5. 예배드릴 때에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라.

6. 항상 아침에는 그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려라.

7.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해라.

8.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9. 주일 예배는 꼭 본 교회에 가서 드려라.

10. 아침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어머니가 말씀하신 10계명은 록펠러에게 교회생활에는 모범적이지만 사업생활과 분리해서 생각했던것이 문제인 것이다. 목사들은 설교시 예화를 들때 어머니의 교훈 10계명만 들것이 아니라 그 이면도 분명히 말해야 옳다는 것이다. 진짜로 개같이 번돈은 하나님이 정말로 싫어하신다고 말해야 하고 그리고 그 어떤 연보라도 그들로부터는 받지 말아야 한다. 

 

<출처: 고동엽 교회개혁공간 / 바른교회 이야기>

 

 


▣ 석유왕 록펠러와 강철왕 카네기가 부를 구축한 비결과 그들의 삶

근대 역사에서 부자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인물인 록펠러와 카네기는 각각 석유 산업과 강철 산업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그들은 원래 재산도 인맥도 없는 가난한 시골 소년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부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부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그들에게서 끓어 넘쳤기 때문이었다.

록펠러가 일곱 살 때였다. 어느 날 농장 덤불에 칠면조 암컷이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록펠러는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칠면조를 알과 함께 헛간으로 가져왔다. 알이 부화하자 가을에 새끼들을 팔았고, 이듬해 봄에 칠면조 암컷을 몇 마리 더 사서 그 다음해에는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카네기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지어 준 사육장에서 토끼와 비둘기를 길렀는데, 동물들이 먹을 풀을 조달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 친구들에게, 풀을 뜯어 오면 토끼들에게 풀을 뜯어 온 사람의 이름을 붙여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런 식으로 토끼풀을 풍부하게 제공받을 수 있었다. 장차 대부호가 될 록펠러와 카네기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석유로 부를 이룩한 록펠러의 재산은 미국 경제의 1.53퍼센트에 달했고, 철도 교량 건설을 하다가 철강 산업에 투자해 부를 쌓은 카네기의 재산은 미국 경제의 0.60퍼센트에 달했다. 특히 록펠러의 재산은 연방 정부의 1년 예산을 상회할 정도였다. 어린 시절 이들은 머리가 특별히 좋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리력만큼은 뛰어났다. 그리고 돈을 벌겠다는 욕망으로 불타올랐다.

 

록펠러는 가난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지만, 언젠가는 좋은 옷을 사 입을 수 있을 만큼 돈을 많이 벌겠다고 친구들에게 늘 장담했다. “십만 달러를 벌고 싶어. 꼭 벌고 말 거야.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꼭 큰 인물이 되고 말겠어.” 카네기는 힘든 공장일을 하면서도 ‘나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뭔가 변화가 올 것이다’라고 기대했고,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과 각오를 굳게 가졌다.



■ John Davison Rockefeller

“기회가 찾아오지 않음을 원망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무능력을 시인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행운이란 진실로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절실함이 더욱 애절할수록 성공 가능성도 높습니다. 따라서 지금 현 상황이 절실한 사람은 앞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또한 인내만큼 성공에 필수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그것은 거의 모든 것, 심지어 천성까지도 극복하게 만듭니다.”



■ Andrew Carnegie

“성공하는 사람은 해당 부서의 범위를 넘어선, 예외적인 어떤 일을 해야만 합니다. 관심을 끌어야만 합니다. 만일 선박 회사의 직원이라면, 자신과 상관없지만 관련 직원이 간과한 송장(送狀)의 잘못된 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능하고 자발적인 젊은이가 자신이 성실하고 유능하다는 것과 성공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가졌음을 증명하지 못할 정도로 하찮고 단순한 일자리는 없습니다.”




■ 다시 시골로 내려갈 수는 없다

록펠러의 부모는 매우 엄격했다. 록펠러가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손을 뻗어 아들을 잡아 주는 척하다가 손을 놓아 버려서 록펠러는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심지어 아버지인 나도 전적으로 믿지는 말아라.”

 

또 아들을 번잡한 도회지로 데려가 그에게 반짝이는 가죽 신발을 사 주면서 부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다.

 

어머니는 항상 “낭비는 재난을 부른다”라고 말하곤 했다. 록펠러의 부모는 어린 록펠러에게 검약과 신용의 중요성을 심어 주었고, 이는 사업가로 성장하는 록펠러에게 물려 준 유일한 유산이었다.

 

카네기가 어렸을 때, 카네기 가족은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번은 숙부 호건이 찾아와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카네기가 부둣가에서 행상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때 뜨개질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두 손을 흔들면서, “뭐라구요! 내 자식을 행상꾼으로 만들어 부둣가의 중간상을 시키란 말입니까? 그것보다는 차라리 하천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라고 크게 외치며 현관을 손으로 가리켰다.

 

두 아들에게 행상을 시킬 바에야 차라리 한 손에 하나씩 끌어안고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카네기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낮은 곳으로 내려 놓지 않는 품격을 배웠다.

 

장차 대부호가 될 록펠러와 카네기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록펠러 가족은 도시 외곽 지역 여기저기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한번은 록펠러가 십대의 한 하녀에게 청혼했는데, 그 하녀의 부모는 록펠러 같은 시골뜨기에게는 딸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록펠러는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고등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카네기 역시 형편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느끼며, 빨리 어른이 되어 가족들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고 싶어했다. 카네기는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그는 어린 시절 잠시 학교에 다니기도 했으나,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더 이상 교육은 받지 못한다.

 

가난한 시골 소년이었던 이들은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꼭 붙들었다. 록펠러는 돈을 벌기 위해 열 여섯 살에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아버지는 록펠러를 시골로 내려보내겠다고 했다.

 

다시 시골로 내려가는 것은 그로서는 꿈을 땅에 파묻는 것과 같았다. 다음날 아침 록펠러는 비장한 각오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전에 몇 번이나 거절당했던 회사를 찾아가, 일자리를 달라고 다시 한 번 청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카네기는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잡일을 하다가, 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기회를 맞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전신국 지배인이 숙부에게, 전보를 배달할 적당한 꼬마가 있느냐고 물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카네기는 그 일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함께 전신국으로 갔다. 그리고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라고 확실히 못을 박았다.

 

록펠러와 카네기는 상황에 따라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은 존재였다. 암울한 상황은 그들을 바닥으로 내몰고 있었지만, 그들은 기회의 끈을 어떻게든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인정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비상을 꿈꾼다. 록펠러는 직장 생활 5년 만인 스무 살에, 카네기는 철도 회사에 다닌 지 9년이 지난 스물 일곱 살에 사업을 시작한다.



■ 미국의 석유 산업과 철강 산업을 장악하다

록펠러와 카네기는 각각 석유왕과 강철왕으로 불린다. 당시 석유 산업과 강철 제강 산업이 막 시작되는 단계에 있었는데, 이 산업에 각각 뛰어들어 엄청나게 성장시키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록펠러는 월급이 너무 적은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친구와 함께 돈을 모아 회사를 차렸다. 얼마 후 유전이 개발되어, 골드 러시를 방불케 하는 오일 러시가 벌어졌다. 그러자 스물 네 살의 록펠러는 두 명의 동업자를 끌어들여 정유 회사를 설립했다.

 

록펠러가 석유왕으로 불리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산업에 관련된 모든 사업을 수직·수평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도 회사와 리베이트 계약을 맺어, 자사의 석유를 수송하게 해주는 대신, 다른 회사의 석유를 수송할 때는 높은 요금을 물리도록 했다. 또 경쟁사 스물 여섯 개 가운데 스물 두 개를 헐값에 인수해 정유 산업을 평정했다. 그 과정에는 협박과 압력이 동원되었다. 록펠러는 석유 정제에 만족하지 않고 원유의 생산과 석유의 소매 판매도 장악했다. 원유 산출, 정제, 판매의 일체 과정을 통제하게 된 것이다.

카네기는 철도 회사에 근무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다리를 나무로 가설하곤 했는데, 카네기는 그런 다리는 영구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에 철교의 필요성을 깊이 느껴 철교 제조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의 철강 산업은 제철에 화학 재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용광로 기술자들은 용광로의 상태를 경험이나 감각으로 진단하는 비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 때 카네기는 제품의 품질 향상을 위해, 화학 물질을 이용한 과학적인 방법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그의 회사는 저가의 원료를 사용하여 고품질의 강철을 생산하게 됨으로써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다른 동업자들이 사용할 수 없다고 돌보지 않는 산에서 채석된 광물을 사들여 많은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1892년에는 카네기철강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당시 세계 최대의 철강 트러스트로서 미국 철강 생산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록펠러에게는 타고난 사업 감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록펠러는 사탕을 많이 사다가 형이나 누나들에게 조금씩 팔아서 이익을 남겼고,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얹어서 받기도 했다. 사업 초창기에는 상한 콩을 무더기로 싸게 사다가 그 중에 상한 콩만 골라내고 남은 싱싱한 콩을 더 비싸게 팔아치우기도 했다.

 

오일 러시가 일었을 때는, 가격이 불안정한 오일을 찾아 나서지 않고, 그 오일을 정유할 공장을 세워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장악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았다. 동업자가 헤어지자고 하면 자신이 회사를 인수하여 이끌어 나갔다. 그가 계획을 세우면 동료들이 실행했다. 그는 지휘하는 장군이자 전술가였으며, 계획을 세우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늘 “성공하려면 귀는 열고 입은 닫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전보 배달 소년으로 출발한 카네기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어 기회를 포착하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는 다른 전보 배달 소년들과 매일 아침 기술실을 청소해야 했는데, 다른 소년들과 달리 전신 기계를 이리저리 만져 보곤 했다. 어느 날 빈 사무실에서 전신기가 울리자, 카네기가 전신기를 들어 전보를 받아서 전달해 주었다.

 

이를 기회로 카네기는 전신 기술자로 발령을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 근무할 때는, 열차 선로에 중대한 사고가 벌어지자, 자리를 비운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이 일을 처리했고, 그 이후에는 열차를 움직이는 일이 카네기에게 일임되었다. 카네기는 뛰어난 업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고 철도 회사의 관리국장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 록펠러와 카네기의 성공 요인 네 가지

 

이들의 성공 요인은 크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은 돈을 따라 기웃거리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사업을 하기 전에는 직장에서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일했다. 록펠러는 첫 직장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밤 11시까지 일에 매진했고, 카네기는 철도 회사에서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해가며 인정을 받았다. 돈이나 인맥이 없을 때 그들은 현재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둘째, 한 분야를 파고들어 일인자가 되었다.

록펠러는 석유 사업을 하면서 오직 석유만 생각했다. 옷에서는 항상 석유 악취로 가득했으며, 집에 돌아와서도 사업 구상으로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카네기는 여러 곳의 철도 건설에 투자하고 있었으나 그 사업에서 차례차례 손을 떼어, ‘좋은 알을 하나의 광주리에 담아두고 그 광주리를 소중하게 지킨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셋째, 사람 관리에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록펠러는 경쟁사에 대해서는 잔혹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대했지만, 자사 직원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스탠더드 오일 초기 시절만 해도 입사를 지원한 사람을 모두 면담했고, 이름을 기억했다. 그의 말이 법이나 다름없었던 임원 회의에서 그는 반드시 상석이 아니라 테이블 중간에 앉았다. 카네기는 자신이 남보다 재능이 뛰어나기보다는, 뛰어난 사람을 발굴하는 데 소질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나는 증기 기관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훨씬 복잡한 기계인 인간을 알려고 노력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넷째,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록펠러는 유전을 보면서, 원유를 생산하기보다는 그것을 정제하고 또 저렴하게 수송하면 큰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네기는 나무로 지어진 다리들을 보면서, 앞으로는 모든 다리가 철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떠오르는 산업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그들이 20세기 말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인터넷으로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을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그저 가난한 시골 소년에 불과했고, 다른 소년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부자가 되는 길을 일러 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어코 큰 부자가 되고 말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면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했다. 직장에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사업의 기회가 왔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도전적으로 뛰어들었다.

 

‘부를 구축하고 말리라’는 가슴 깊이 타는 뜨거운 열망이야말로 그들이 부의 제국을 건설하는 든든한 초석이었던 것이다.

 

글_조원기(wk@successpartner.co.kr)

 

참고 도서 : 카네기 자서전(앤드류 카네기 지음 / 선영사 펴냄), 세계 최고의 부자, 록펠러(그랜드 시걸 지음 / 베다니출판사 펴냄)

 

 

Rockefeller Center  (뉴욕 시 맨해튼 중심가에 있는 복합건물)

 

면적 5㏊에 석회석 건물 14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헨리 호프마이스터와 H.W. 코벗, 레이먼드 훗을 중심으로 하는 건축가 팀이 설계했고 1929~40년에 지어졌다. 계획하고 시공하는 과정에서 미장합판·벽화·모자이크·조각·금속세공 등 여러 관련 예술들이 건축과 통합되었다. 처음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도시개발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節電型電球 3만개로 새해正初까지 不夜城이뤄
매년 크리스마스가 임박하면 뉴욕 시민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록펠러센터 크리스마스트리접등식이 열려 무게 8t, 높이 25.2m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節電型電球 3만개의 불을 밝혔다. 節電型電球 3만개가 點燈되어 거리를 대낮같이 밝히자 라디오시티 로케츠’ 무용단이 축하 공연을 펼쳤다. 록펠러센터크리스마스트리는 새해 1월 7일까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며 聖誕과 新年의 祝日을 지새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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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펠러 저택

   


위에 적어진 영어 그대로 록펠러 저택의 대문이다. 라는 말은 네델란드 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 망루라는 뜻이다. 원래 뉴욕은 뉴 암스텔담으로 불렸던 것에 알 수 있듯이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모헤건 인디안들의 터전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록펠러 저택이 있는 Pocantico는  뉴욕 주의 Tarrytown근처 허드슨강 상류의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도 강의 가장 넓은 지점을 바라볼 수 있어 예전에 인디언들이 연기 신호를 보내던 언덕인 Tappan Zee에 자리 잡고 있다.정확한 위치가 궁금하면 구글의 위성 지도를 보면 될 것이다.

록펠러가는 이 저택에서 4대째 살았었다. 즉, 1893년 John D. Rockefeller가  여기 토지 를 구입하여 집을 지은 이래로 1979년 포드 대통령 때 부통령을 지낸 적이 있는 Nelson Rockefeller가 사망할 때까지 각각의 가족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이어져 왔었다. 그러다가 1991년 4대째인 David Rockefeller가  이 저택이 내셔날 트러스트의 재산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공표하였다.


1902년 화재로 원래 나무로 건축되어 졌던 집은 불타 없어지고, John D. Rockefeller의 아들이 더 큰 대저택으로 건축할 수 있는 기회를 움켜 잡았다. 그는 에서 수학하고 뉴욕에서 건축가로 활동 중이었던 Delano와 Aldrich를 고용하여 1908년 빅토리안 양식의 3층 저택으로 완성하였고 그 후, Laura Rockefeller(Jr의 부인)의 요구에 의해 죠지안 양식의 4층 저택으로 탈 바꿈하였다. 그리고 이 대대적 공사는 1913년에 마침내 완성되었다.  


또한 John D. Rockefeller, Jr.는 대부분  세밀한 수 작업을 요하는 인테리어 장식을 하였다. 위의 이미지는 응접실의 한 벽면으로 John D. Rockefeller, Sr.의 부인 Abby Aldrich Rockefeller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아래 사진은  부통령을 지낸 Nelson Rockefeller이다. 초상화 옆의 조명기구는 나폴레옹 시절 즉, 신고전주의 때 것을 개량한 것으로 재스퍼(벽옥)와 금가루가 입혀져 있다. 아름다운 문양으로 상감된  반월 형태의 코모드는 영국 제품이고 그 위에 있는 낙타는 당 나라  것이고 그 옆에 우물 모형은 한 나라  것이다. 


서재로 아브라함 링컨과 죠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걸려 있다. 이 방에는 중국 도자기와 죠지안 스타일의 가구들로 꾸며져 있다.



저택 내에 있는 사무실로 벤자민 프랭클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벽난로  양 옆의 램프는 청나라 도자기로 만들어졌으며 그 옆에 사진들은 John D. Rockefeller, Sr의 사진이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도자기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청자들이다.


사무실 한편에 있는 18세기에 만들어진 책상으로 가족 사진들을 진열해 놓았다. 책상 위에는 17, 18세기에 만들어진 프랑스 print들이다. 책상 위에 진열된 화병 역시 청 나라 것이다.



록펠러가는 수많은 예술품들을 수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두 개의 이미지 중 위의 것은 음악실로 죠지안 스타일과 신 고전주의 양식의 가구들과 장식품들로 꾸몄고 특히 John D. Rockefeller, Jr는 중국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고 꽤 많이 수집하였다. 이 방에 깔린 러그 역시 18세기에 비단으로 만든 청 나라 제품이다. 반면 Nelson Rockefeller는 현대 미술에 관심을 보여 지하(아래 이미지)에 갤러리를 만들어 놓았다. 위의 이미지의 소파 위에 있는 것은 미로 작품인데 이 방에 현재 걸려 있는 것은 복사품이다. 



록펠러의 저택은 집안 내부 보다도 훨씬 근사한 정원을 가지고 있다. 이 정원내에는 일본 정원을 포함하고 있는 데, 도쿄 황실에서 교육 받은 정원건축가 다카하시와  우에다를 고용하여 꾸몄다. 위의 일본 집은 16세기의 일본 별장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그리고 록펠러가는 각 세대 별로 그때그때 유명한 정원사를 고용하여 정원을 가꾸고 유지하였다. 



이미지가 잘못 포스팅된 것이 아니고 분수 자체가 이렇게 되어 있다. 예상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런한 분수 장식은 이태리 조각가와 분수 전문가를 고용하여 정원 여기 저기에 꾸몄다.



저택의 2층에서 내려다 본 침상원(Sunken Garden)으로 정원 건축가 Bosworth가 디자인하였다. 조각품들은 Aristide Maillol의 작품들이다.

 

<출처: 황금의 초생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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