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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아돌프 히틀러 / 그는 누구인가

작성자靑野|작성시간09.01.08|조회수619 목록 댓글 0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 (독일어: Adolf Hitler)

 

아돌프 히틀러 (독일어: Adolf Hitler, 오스트리아,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

독일의 정치가로, 나치의 총통(대통령 겸 총리)이었다.

뛰어난 웅변술의 소유자였던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하의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상황 속에서 베르사유조약의 군사 관련 제한 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확장, 실업 극복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실업대책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슐라이허 내각에서 수립한 계획이었고, 히틀러는 그 열매를 따먹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후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및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중 그의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수용소와 같은 강제수용소와 가스실에서 학살당했으며 바로 그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외 나치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로는 집시, 장애인도 있는데, 집시들은 나치의 강제수용으로, 장애인들은 의사들과 결탁한 조직적인 안락사로 학살당했다. 이러한 나치의 범죄는 집시와 유대인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준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와 북아프리카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 포위 아래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지하 벙커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물면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 [1]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소련에 의해 독약 자살로 판단되는 등 여전히 의문거리이다. [2]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알로이스에게는 알로이스 2세라는 장남과 안젤라라는 딸이 둘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둘과 딸 한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 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생애

초기 생애

태어난 직후의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 '아디'라고 불렸으며 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우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우 우수한 학생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차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으며 그 중 특히 진학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히틀러 평전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아가 강하고 학업 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못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의 자기 중심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1904년, 린츠에서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13세 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그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달리 엄한 꾸중과 화가나면 손찌검도 마다않는 그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곤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독일어: Mein Kampf 마인 캄프[*])'에서 그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Mein Kampf)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의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3년 1월에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13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내내 펑펑 울 정도로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기게 되었다. 그는 자취나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며 주말에는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린츠의 학교에서 쫓겨나게되고 스테이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로 전학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자퇴했다. 병이 완쾌된 것을 기념하여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옆에서 누워자던 아돌프 히틀러는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깨워 겨우 일어나게 되고 이에 크게 느낀바가 있어 이후 죽을때까지 금주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받다가 1907년 사망했다.

 

청년 시절

아돌프는 그가 18세 되던 해인 1907년 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아들을 위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이어 빈의 미술학교에 두 번 지원했지만 두 번 모두 학교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교수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래서 히틀러는 건축가가 되기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가지의 도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위해선 많은 학력이 필요하였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건을 완성하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대신 아주머니로부터 약간의 돈을 물려받게되는데 이마저 곧 바닥이 나게되고 이후 그는 몇년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 상인에게 되파는 일개 그림장이 신세가 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의 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그리스도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히틀러는 정치 평론가 란츠 폰 리벤펠스나 정치가 카를 뤼거, 비엔, 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그의 정치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결국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는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 제국으로

그는 1913년에 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뮌헨으로 간지 얼마 안되어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히틀러를 찾았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간 것이다. 히틀러는 이때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지만, 히틀러는 슬라브족과 유태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에게 오스트리아는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선포되었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우연히 촬영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 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마음의 진정한 조국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일개 보병에서 총통까지

1923년의 히틀러의 초상화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패배의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에서 회복되자,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부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라는 극우 정당에 당원증 제555번을 받으며 입당했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 초,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고 있는 운동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짧게 나치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독일어 약자로 NSDAP)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민주공화제의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베르사유 조약의 타파,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국제 자본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의 로마 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수감 생활은 6개월로 끝났으나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의 재건은 쉽지 않았다.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극좌와 극우 정당들은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스는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1340만 표(36.8 %)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원래는 장군)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 %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 %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사회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라 칭하였다.

 

나치스의 집권

1934년 6월의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전권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나치 돌격대 지휘관 룀을 제거, 이후 일어난 바르톨로메오의 밤 권력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비밀을 알고있는 슐라이허 장군의 제거를 통해 오래된 청구서를 모두 해결하였다.

그후 독일국방군은 나치 당원에 융합되었고, 이러한 권력 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죽음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다. 이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의 군사조약이 있었으나 소련의 도움없이는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기자들에게 '앉은뱅이 전쟁' 이라고 불리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은 너무 늦었으며 미국은 국내 여론 때문에 고립주의를 천명하며 직접 개입을 삼가하고 있었다. 공습 및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독일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프랑스마저 항복하였다. 1940년 말까지 히틀러는 서부 유럽과 북부 유럽 전체(중립국인 에스파냐, 포르투갈, 스위스, 스웨덴은 제외)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에 우세한 공군을 쏟아 부어 폭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게는 패배하였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그리스 왕국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연합군의 마지막 보루인 영국에 공습을 퍼부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브리튼 작전이 실패했음에도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가 영국군에 항복,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항복을 하게되고 독일군은 볼고그라드에서 소련에게 패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의 끝이 났다.

1942년 6월 4일의 히틀러.

 

그러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소련의 매서운 겨울앞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나흘 후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1945년 5월 2일자 성조기 신문 위에 Hitler dead(히틀러 죽음)라고 크게 써진 신문의 일부분

 

그 후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 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 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5년 4월 30일 절망한 히틀러는 벙커에서 음독 자살하게 된다.

 

가족

주요 저서

참고 문헌

  1. ↑ Hitler's final witness. BBC News, 2002-02-04.
  2. ↑ 히틀러 평전, 요하임 페스트, 푸른 숲.

<출처: 위키백과>

 

 

 


수용소 정문에 적혀있는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라는 기만적인 문구.
지금은 아우슈비츠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면서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장소이지만
당시 수감자들은 이 글자 아래를 지나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가 12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했다..

 

 

유태인 학살의 진실

 

"일을 하는자는 자유롭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소위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 못지 않은 학살 사건이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량 학살의 대명사로 남아 있는 것은 짧은 기간 동안에 전쟁의 와중에서도 거의 모든국가기관을 총동원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였기 때문이다. 숫자는 600만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600만이 죽은 것은 아니다. 600만 중 400만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실제로 죽은 사람은 150만 ~ 200만이며, 그들 모두가 유태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숫자 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전후(戰後)의 이야기로서 숫자야 어떻든 수백만의 유태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왜 이렇게 많은 유태인을 히틀러와 NSDAP가 학살했는 지에 대해서는 단지 히틀러가 내세운 "반유태주의"때문이라고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히틀러가 반유태주의자가 된 이유에는 참 다양한 요인들이 설명된다. 프로이드의 심리학까지 동원되고, 어머니가 어느 유태인의 정부였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회자된다. 

그러나 히틀러는 현실적인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인이다. 1차대전 참호전의 경험은 단순한 몽상이나 이상주의보다 현실적인 생존에 대한 욕구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다. 그런 사람이 단지 어머니의 정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때문에 반유태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히틀러의 반유태주의와 극우 민족주의는 청년 시절에 실업자로 빈(Wien)을 헤메던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는 히틀러가 왜 홀로코스트를 했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히틀러와 NSDAP가 반유태주의를 내세운 것은 정당 창립때부터였다.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 반유태주의를 기치로 NSDAP는 보수적인 바이에른의 주도 뮌헨에서 시작했다. 지지자들을 긁어모으고 정권을 장악하기위해서 독일 국민들의 관심을 NSDAP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정권 장악 후에는 그 연장 선상에서 독재 정권의 기반을 든든히 다져야 했다.

흔히 히틀러의 권력 장악이 가능했던 이유로, 1차대전의 패배와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분노, 그리고 경제공황이 제시되곤 한다. 중요한 것은 히틀러가 그 충격과 굴욕감을 결집시켜 구체적인 권력으로 바꿔나갔다는것이다. 

1차대전 패배의 충격과,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노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했다. 분노를 결집하여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이루어 분노와 굴욕의 대상을 제거하자는 논리와 행동이 필요한데, 히틀러는 그것을 제시한 셈이었다(다른 대부분의 정당들은 실패했었다).

우선 먼저 필요한 것은 그런 굴욕을 왜 겪어야 했는가, 였다. 원인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된 논리가 "등 뒤의 비수"이다. 이 논리는 우익 세력이 만들어낸 신화로,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굴욕을 겪은 것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전선에서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는 군부를 배신한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연합군은 휴전 당일까지도 독일 영토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등 뒤의 비수"는 완전히 날조된 논리다. 이는 1918년 여름 이후에 루덴도르프를 위시한 군부 실세가 황제에게 휴전-사실상의 항복-을 제의한 사실은 일체 알려지지 않았고, 군부가 자진해서 독일 사회민주당(SPD)에게 권력을 내준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SPD는 군부가 휴지버리듯이 버리는 권력을 받아 휴전조약(사실상 항복이죠)에 서명하여 국내의 엄청난 반발을 사느냐, 아니면 어떻게든 권력을 잡아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호기로 삼냐는 의견 사이에서 갈등을 하던 끝에 후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이는 이후 SPD가 어쩡쩡한 행보를 하게 되고, 좌익 세력이 분열된 배경이기도 하다). SPD로서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절대 다수 일반 국민들이 아는 것은 좌익인 SPD가 베르사이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것 뿐이다. 히틀러가 진실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의 진실에는 관심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등 뒤의 비수",  즉, 후방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조약에 서명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공개된 사실이며, 많은 독일인들에게도 그랬다. 알았다고 한들, 히틀러가 그 사실을 공표할 것이라는 환상은 갖지 말자. 히틀러는 현실적인 정치가다.

히틀러가 구술하여 집필한 "나의 투쟁" 등을 살펴보면 반유태주의나 러시아 등 동유럽에서 생활권(Lebensraum) 확보에 대한 언급은 끊이지 않고 나온다. 물론 이것말고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적 태도 또한 여실히 드러난다(물론 이 책은 NSDAP정권 장악 이전에는 거의 읽혀지지 않았고, 읽은 사람들도 몽상가의 생각이라고 대부분 무시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야기들을 하나둘씩 실천에 옮겼다).

 

정권 장악을 위해 히틀러는 반유태주의보다 좌익에 대한 공격을 우선시할 것을선택한다. SPD와 KPD는 전후의 혼란 와중에서도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국회를 장악한 세력이다. 특히 SPD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거의 모든 연립정권에 참여했을 정도로 원내 제1당이기도 했다. 1923년 11월에 시도했던 뮌헨 쿠테타에서 처참한 좌절을 맛보고 합법적 절차를 통한 정권 장악을 모색하기로 한 히틀러에게 급한 문제는 반유태주의가 아니라, 국회를 공고히 장악한 좌익 세력과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NSDAP의 모든 노력은 좌익과 투쟁에 몰두한다. 그렇다고 유태인을 잊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숨기지도않았다.

좌익만을 공격하는 것으로 부족한 NSDAP는 좌익세력이 1차 타겟이라면, 2차 타겟을 유태인으로 삼게 된다. 이미 독일의 경제를 유태인 대자본가들이 장악하여 독일인 실업자들이 취직을 못하고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던 NSDAP이다. 보유 자원의 대부분을 좌익과 투쟁에 돌리면서도 반유태주의 선전은 결코 줄어들지는 않았다. 고리대금업자, 자본가, 돈으로 게르만 처녀를 사는 돼지(원조 교제의 원조 쯤이 되겠다) 등등으로 선전은 계속되었다.

빌미는 레닌이 제공했다. 레닌은 유태인이며, 러시아 혁명의 많은 지도자들이 유태인이었다. 이 점에 착안하여 히틀러는 공산주의 =유태인이라는 공식을 내세운다. 독일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도 유태인이 있는데,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때 주동자인 로자 룩셈부크르도 그러한 경우였다. 유태인은 러시아 사회에서도 엄청난 반유태주의에 시달렸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학살을 겪은바 있다. 그래서 이들이 러시아 혁명에 적극 가담한 것인데, 히틀러는 이를 유태인 = 좌익이라는 공식으로 내재화한 것이다(전쟁 중 우크라이나인들이 유태인 학살에 SS의 보조병으로 참가한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아이러니하게까지 보이는 공식이 성립된다. 유태인 =자본가, 유태인 = 좌익, 자본가 = 좌익. 지금 우리 눈으로 보기엔무지하게 이상하지만, 히틀러에게는 별 문제없는 공식이었다.그리고 그것을 가감없이 필요와 장소, 시기에 따라 적절하게 내세운다.

정권 장악 이전에는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과투쟁에 비중을 맞춘 관계로 반유태선전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것으로 보수 우익집단(융커, 군부), 몰락한 중산층, 자본가(부자,기업가), 관료, 사법세력 등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실업자들은 SA로 흡수한다. SA는 적당히 폭력을 휘두르면 월급을 주었기에 좋은 직장이었다. 백색 테러집단으로 활동하던 수많은 제대군인들도 SA와 SS로 합류하고,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잃은 청년들도 SA나 SS에 합류한다(SS는 본래 SA의 한 부서로서 1934년 룀 숙청이후 SA로부터 조직편제상으로도 완전히 독립하게 됨).


독일 경제가 회복되어가던 중에는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NSDAP는 1929년의 대공황으로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고,히틀러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의 지지세력의 급상승을 밑바탕 삼아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권을 장악하면서 좌익은 처절하게 분쇄당한다. 너무나 빠른 속도와 행동력으로 그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절정에 달한 것은 1933년 2월에 있었던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으로 NSDAP의 자작극이라는 설이 유력한 사건이다. 마지막 마무리는 5월 1일이었다. 좌익계 노동조합을 일제히 해체하면서 새벽에 그들을 급습하며 노조 지도자들을 모조리 잡아가고 로베르트 라이를 지도자로 하는 새로운 독일노동전선의 설립을 발표한다. 이로써 독일 내부에서 좌익 세력은 정치세력으로서는 씨가 말라버리게 된다(좌익 세력들이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속도와 폭력으로 한꺼번에 도려진 것이다).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는 국회에서 의석을 갖고 있는 좌익세력을 척결해야 했던 NSDAP지만 이제 그 과정이 끝났다. 이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한다. 수립한 이후에는 새로운 희생거리가 필요했다. SA와 SS로 대표되는 NSDAP의 폭력을 독일 국민들이 언제까지나 용인해줄 것이라는 환상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더 새로운 희생양이 필요했다. 1934년, NSDAP의 내부 골치거리를 해결하여 당내에서 권위를 확립한 히틀러는 유태인에게로 독일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뉘른베르크법과 같은 악랄한 인종차별법이 등장한 것이 1935년 이후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물론 괴벨스가 주도한 NSDAP의 선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연구와 평가가 엇갈리지만). 좌익과 우익 내 반 히틀러 세력을 처리한 후에 본격적으로 유태인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워 정권을 유지한 히틀러에게 그에 대한 지지를 계속 끌어내기 위해서는 유태인의 "위협"을 강조해야했다. 약 빨이 떨어지면 지지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내세운 이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의 충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전쟁 발발 이후에 유태인 탄압이 더욱 강화되는 것도, 학살이 전쟁 중에 시작된 것도 점점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에 자연스런 귀결이라 생각된다. 자신이 내세운 논리에 대한 지지를 계속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그 논리를 확대해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끝내 최종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는법이다. 게토로 분리, 특정 지역으로 이주, 강제수용소 수감 등의 방법으로는 유태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은 그들에게 최종적으로 남은 해결책은 학살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반유태주의가 히틀러만 가진 것일까? 히틀러가 처음으로 내세운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반유태주의의 전통은 유구하다. 그 전통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왜 독일국민들과히틀러의 부하들이 겉으로 드러난 탄압과 숨겨진 학살에 동조했는지는 설명이 된다. 유럽인들의 반유태주의 전통은 세익스피어의희곡"베니스의 상인"에도 잘 표출된다. 거기서 악덕 고리대금업자로는 나오는 샤일록이 바로 유태인이다.

유럽에서 반유태주의의 전통이 생긴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먼저 언급할 것은, 종교상의 문제이다. 이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유태교와 기독교 간의 교리 상의 차이이다. 유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이 점은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태교 신자들은 유태인만이 그 신자가 되며,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고 자신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유태교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을 배신하고 개나 소나 신자로 다 받아들인 배신자이며(인종적 순수성을 따지는 것은 유태인도 히틀러 못지 않다). 유태인은 그리스도를 다만 여러 예언자 중의 하나로 밖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신으로 모신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그들의 신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한 유태인을 증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로마가 예수를 죽였다고 하지만,예수를 죽이라고 로마 총독을 부추기고 요구한 것은 바로 유태인이었다. 당시 로마 총독은 유태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을 뿐이다. 로마제국 입장에서는 예수와 다른 유태인 및 유태교 보수파 간에 갈등은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갈등일뿐이었다. 다신교이며 정복지의 신도 자신들의 신으로 편입시키는 전통을 지닌 로마로서는 예수가 신이냐, 예언자냐같은 교리 논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 만일 로마가 예수를 죽였다면 반유태주의가 아니라 반이탈리아주의가 성행했을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양 종교 간의 교리 차이 및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에 죽게한 원죄에 대한 갈등이 1차 원인이라고 할 수있다. 고작 그런 정도로 가지고 그러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해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19세기 중반까지도 진화론을 놓고 종교계와 과학계가 과학논리로 논쟁을 한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성경 말씀에 위배되느냐는 문제로 논쟁을 하던 사회가 유럽사회이다.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곳이기도 하다(이 종교재판으로 숱한 유태인이 죽기도 했다).

두번째는 생활사 관점에서 보았을때 유태인들의 폐쇄적인 생활 태도에 있다. 그들은 탈무드만을 읽으며 그들의 고유 생활방식을 지독스레 고집한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를 봐도 전쟁의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유태교를 상징하는 촛대를 항상 챙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도시에 살면서 그들만의 공간(게토)에 모여 살고 기독교와 교류보다는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며 어울리지 않았다(유명한 바르샤바 게토는 천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유태인 거주 구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은 그 의미가 바뀌었고, 의미를 바꾼 사람이 바로 히틀러임). 중세에 흑사병이 유행했을때도 유태인들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한다.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유태인들의 주변을 청결하게 하는 그들의 생활습관 덕분이라고 하는데, "위생"에 대한 개념이 없던 유럽인들에게는그런 유태인들이 두려움과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했다(화장과 향수의 유래를 생각해보라).

기독교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배타적인 공동생활. 여기에 마지막 원인이 더해진다.

샤일록의 이미지에서 연상되듯 유태인들은 지역마다 경제를 장악해왔다. 마치 중국계 화교처럼( 화교가 경제권을 장악하지 못한 극소수 국가 중의 하나가 한국과 일본이다). 이것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일단 나라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게된 유태인 입장에서는 돈 외에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없었다. 오로지 돈만 보게 된다. 당시 열악한 경제 활동 여건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샤일록처럼 악랄하게 되가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 유럽에서는 돈을 천한 것이라 여겨 직접 손을 대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토지에 기반한 봉건제 하에서 귀족이나 사제집단은 상업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여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 상업 자체가 로마제국 시대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고, 농민은 무조건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귀족은 전투와 지배, 무력으로 질서유지를 하는 고귀한 신분이었고, 승려계급은 신에게 봉사하는 집단이었다. 시민계급이 형성되기 전에 돈을 다루는 일을 할 사람이유태인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유태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사실 이런 문화적 전통은 후대에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귀족 계급이 부르죠와에게 밀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돈을 다루는 일을 하지 않았던 귀족계급이 돈이 딸리자 부르죠와들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팔게 되거나, 부르죠와들에게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면서 신분상승을 꾀하던 부르죠와 계급과 손을 잡게 되는 것으로, 가장 손쉬운 방법이 결혼이었다).

각설하고, 중세 이후로 유태인들이 지역 상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다(물론 중세유럽의사회가 그러한 것을 허용하고 조장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물론 16~18세기에 들어와 소위 말하는 proto-capitalism이 태동하고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비유태계 부르죠와들이 성장하게 되지만, 유태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모든 유태인들이 그런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농부들이나 장인들도 많았지만(홀로코스트에 그려지는 유태인은 모두 이런 순박한 유태인들로만 그려졌다. 학살을 감행하는 독일인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게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지만, 반드시 그런 목적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마치 모든 유태인이 샤일록과 같은 자로만 머리 속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마치 모든 이슬람교도가 과격테러분자라고 주장하는 미국내 보수 우익 세력과 럼즈펠드처럼 말이다.

이 반유태주의 전통은 독일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우크라이나나 러시아에서도 독일 못지 않게 학살을 감행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거의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 크고 작은 반유태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히틀러는 본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반유태주의전통을 국가 권력 차원에서 조직하고 활용한 것이다. 2차대전 수많은 피점령민들이 NSDAP에 부역한 것에도 이 반유태주의는 무시못할 비중을차지한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우크라이나같은 경우이며, 프랑스인 수만명이 NSDAP와 운명을 같이한 것도 이 반유태주의가 큰 몫을 차지했다(피점령민들이 NSDAP에 부역한 배경은 사뭇 천차만별이다. 우크라이나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같은 발트3국은 반러시아감정때문에, 보스니아 회교도들과 크로아티아 기독교도들은 세르비아 정교회들에 대한 반감으로, 아직 볼세비키에 반감을 가진 백계 러시아인 등등)

 

<출처: 대한민국평화유지회> 

 

 

 

히틀러 자살의 진실

 

로커스 미크는 현재 생존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SS 대원으로 가장 젊은 나이에 히틀러 옆에서 근무하고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벙커를 탈출하여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던 베를린을 달리다 도시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생포된 인물이라고 합니다.

생포 직후 그의 정체를 알게된 소련의 구 KGB, KSGB 수사관들은 그로 부터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정보를 입수 하고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벙커 근처에서 정복 차림의, 페타놀에 그을린 히틀러의 시신을 찾게 됩니다.

당시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소련군의 베를린 캠페인 총사령관 마르키노브는 스탈린에게 "히틀러의 시신을 찾았다"는 보고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거꾸로 히틀러를 생포못한 그를 질책했다고 하며, 히틀러 대신 로커스를 모스코바로 잡아오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1936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을 47명 이나 사살하고 상이용사가 된 로커스는 당시 독일의 유명한 전쟁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용맹함에 관한 소식을 들은 독일군 공군참모총장 궤링은 그를 작은 아파트로 직접 부른뒤 참모에게 SS(친위대) 인터뷰를 시켰으며 궤링의 참모와 인터뷰를 하던 로커스는 갑자기 히틀러가 작은 문을 열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경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히틀러는 로커스를 보고 놀라지 말라는 말을 한 뒤 한번 같이 일을 해보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히틀러를 괴물덩어리로 알고 있던 로커스는 히틀러가 동네 아저씨 같이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종전후 1945년 모스코바로 잡혀온 로커스는 악명 높은 모스코바 B4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뒤 매일 7시간의 가장 잔혹스럽고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했으며 매일 같이 반복된 고문의 골자는 "우리는 히틀러가 살아있는것을 알고있다. 그가 지금 어디있는가"
였습니다.

유일하게 히틀러의 임종을 지켜보고 소련군에게 잡힌 로커스는 KSGB가 히틀러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더욱더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했습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바로 감옥에서 풀려난 로커스는 감옥에 찾아온 KSGB의 국장으로 부터 정중한 사과를 받았으며 KSGB의 국장은 그에게 "스탈린이 당신을 계속 고문하라고 지시했으나 이제 그가 죽었으니 당신은 자유인이다"고 말하며 그를 동독으로 보낸뒤 개인 자금을 줘 그에게 작은 꽃집을 열어줬습니다.

1953년 동독에 도착한 로커스는 당시 독일을 떠들썩
하게 만들던 유태인 대량학살소식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신문과 TV 방송국 등에 출연하여 "히틀러는 권총자살로, 그의 부인은 독약으로 죽은뒤 SS가 그 즉시 시체를 태웠다"는 증언을 계속 했습니다.

세계인들은 마지막 산증인으로 남아버린 로커스의 증언을 믿게 되었으며 그후 히틀러는 벙커
안에서 자살을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임종설이 되었습니다.

과연 히틀러는 로커스의 증언대로 1945년 베를린의 지하 벙커 안에서 자살을 함으로써 인생을 마감했던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엘리트 SS 멤버인 로커스는 어디론가 도주한 히틀러의 죽음에 관한 헛소문을 퍼뜨리기위해 일부러 소련군에게 잡혔던 것 일까요?

 

<출처: Dokdo> 

 

 

20세기를 대표하는 문제적 인간을 하나 꼽으라는 질문은 전혀 어렵지 않다.
당연히 그 대답은 1945년 오늘 사망한 '아돌프 히틀러' 이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마지막 하루 역시 그의 인생 만큼이나 특별했다.
1945년 4월 29일 밤. 히틀러는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오랜 연인이었던 에바 브라운과 비밀결혼식을 올린다.
이미 10년이상 히틀러의 그림자였던 에바는 결혼을 거부하는 히틀러 때문에 두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채였다.
초라한 결혼식이었다. 괴벨스와 보르만이 결혼입회인이 되었고,
그 결혼의 축포는 연합군이 베를린 벙커 위로 쏘아올리는 조명탄이었다.

결혼식이 끝난 그 밤에 히틀러는 2통의 유서를 (어쩌면 그 보다 많은) 썼다.
다음날 아침 히틀러는 부하를 시켜 특별하게 사랑한 애견 블론디를 독살시킨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히틀러는 자신을 끝까지 지켜준 심복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에바 브라운과 함께 들어간 방에선 잠시 후, 총성이 들렸다.
친위대 대령이었던 균수와 비서 링게가 들어갔을때 이미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은 죽어있었다.

그들의 시신은 히틀러의 유언대로 가솔린으로 태워졌고, 포탄구멍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3일 후. 베를린의 지하벙커를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둘의 시신은 발견되어졌다.
불에 심하게 타서 신원을 확인 할 수 없던 그 시신은 결국 히틀러의 치과주치의였던 브라슈케 박사에 의해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라는 확인을 받았다.

이렇게 20세기를 대표하는 문제적 인간 아돌프 히틀러는 생을 마감했다.
물론 아직 이 히틀러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와 논란은 유효하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이 주검이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아닐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를 가지고자 했던 이 사내가 마지막으로 소유했던 것은 초라한 지하벙커일 뿐이었다.
미개한 인류를 개량하겠다는 그의 주장은
사랑하는 애견,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신을 죽임으로 종결되었다.

즉, 고작 30시간 뿐이었던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결혼생활은
사랑의 시간이 아닌 죽음을 향해 걸어간 시간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하루는
행복이 아닌, 파멸을 추구했던 인물 '아돌프 히틀러' 라는 한 인생의 축소판일 것이다.

[출처] 히틀러와 에바의 마지막 하루.|작성자 조현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Ludwig Beck and 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은 1944년 7월 20일, 아돌프 히틀러에 반대하는 반나치 인사들이 일으킨 쿠데타 시도였다. 7.20 쿠데타 등으로도 불린다.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사용했으나 히틀러는 살아났고, 오히려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어 많은 장성과 정치인들이 숙청당했다. ... /위키백과

 

독일 7월암살음모사건[July Plot]

1944년 7월 20일 독일 육군 중령 클라우스 필리프 셴크와 그라폰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국 진영으로부터 보다 유리한 평화조건을 끌어내기 위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고 히틀러가 군 수뇌부와 회동하고 있던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의 볼프스샨체 야전사령부 회의실에 폭탄을 넣은 서류가방을 놓고 나왔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오후 12시 42분 폭발을 목격하고 히틀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최고사령부를 장악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지만,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만을 입은 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게슈타포가 공모자를 찾아나섰다. 즉시 총살된 주모자를 제외한 약 180~200여 명의 공모자가 교수형 또는 총살형을 당하거나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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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7.21 -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모자 슈타우펜베르크(Stauffenberg) 처형 

슈타우펜베르크 [Stauffenberg, Claus Schenk Graf von, 1907.11.15∼1944.7.21]

A.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 1944년 7월 20일 독일 육군 상층부를 중심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는데 그때 그는 예비군최고사령관부 참모장으로 육군 대령이었다. 뷔르템베르크와 바이에른 왕실에 봉사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 군주주의적 보수주의와 가톨릭의 환경에서 자랐으나, 반(反)히틀러 운동에 참가한 토지귀족 출신자들 가운데 가장 개화된 사람으로, 사회주의자 조직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암살에 실패한 뒤 사형 선고를 받고 사살되었다. /yahoo

 

Claus Philipp Maria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15 November 1907 – 21 July 1944) was a German army officer and Catholic aristocrat who reached the rank of colonel and one of the leading officers of the failed July 20 plot of 1944 to kill German dictator Adolf Hitler and seize power in Germany.

http://en.wikipedia.org/wiki/Claus_Schenk_von_Stauffenberg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44.7.20 - 독일의 군인 베크 [Beck, Ludwig, 1880.6.29~1944.7.20] 자살

베크 [Beck, Ludwig, 1880.6.29~1944.7.20] 

독일의 군인. 제1차 세계대전에는 참모장교로서 참전하였고, 1933년 국방부 군무국장이 되었으며, 1935년 독일육군참모본부가 재건되자 그 초대총장이 되었다. 고결한 인격자이며 이성적 군인으로서 육군의 확대강화에 힘쓰는 한편 특히 히틀러의 무모한 전쟁계획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1938년 8월에 면직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변함없었으며, 그뒤 육군장교단을 이끌고 반나치스 저항운동을 지도하다가 1944년 7월 20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성공하면 그가 독일의 국가원수인 ‘섭정’이 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나 이에 실패하자 자살하였다. /naver

 

 

1944.7.20 - 히틀러 암살미수사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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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은 1944년 7월 20일, 아돌프 히틀러에 반대하는 반나치 인사들이 일으킨 쿠데타 시도였다. 7.20 쿠데타 등으로도 불린다.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사용했으나 히틀러는 살아났고, 오히려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어 많은 장성과 정치인들이 숙청당했다.

 

배경

1933년 나치당 1당 독재 체제를 굳힌 히틀러는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정계, 관료, 경찰 등 모든 분야에서 그의 심복들 또는 심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치들을 심었다. 오직 국방군, 그 중에서도 육군의 일부 장교단은 나치에 반발하며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형성했다(민간인 저항 세력은 제외한다). 공군은 헤르만 괴링이 창설하여 이끌었으니 문제될 게 없었고, 3군 중에서 가장 미약했던 해군은 처음부터 정치와 선을 그어 놓고 있었고, 히틀러에게 군인으로서의 충성만을 다바쳤다.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전공을 세워 온 보수적인 경향의 육군을 히틀러는 두려워했고, 그 언젠가 히틀러는 측근에게, "그들은 길들이기 어려운 투견."이라고까지 말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국방군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치는 유언비어로 국방군 장성들의 군복을 벗겼다. 우선 국방장관으로 있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의 재혼녀가 창녀라는 소문을 퍼트려 쫓아내고 이어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취가 동성애자라며 그를 쫓아낸다. 그 후 히틀러는 국방군 총사령관으로 빌헬름 카이텔이 임명되고, 이어 알프레드 요들 상급대장이 국방군 작전부장이라는 요직에 앉게 되면서 마침내 나치는 국방부까지 손에 넣는다.

나치의 이런 행동에 제1차 세계 대전 부터 독일을 위해 싸워왔던 노장들은 앙심을 품고 반나치를 결성한다. 그 중심엔 독일 육군 장성 중에서 가장 존망받는 육군참모총장 루드비히 베크장군이 있었다. 이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한다. 그러나 작전을 실행하기도 전에 전쟁이 시작되어 폴란드가 점령되고, 이어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결국 반나치들은 때를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기회가 온다. 1941년, 바바로사 작전이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면서 장기전으로 비화되고, 이어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6 군이 항복하면서 독일이 엄청난 피해를 입자 히틀러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반나치들은 그들의 세력을 은밀히 키워나가면서 히틀러를 암살할 기회를 찾는다. 7.20 사건이 있기 전부터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기도가 자주 있었지만 히틀러는 그 때마다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이들이 기다려 온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발키리 작전

발키리 작전은 간단히 설명해서 독일 내 외국인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국내의 예비군을 비롯한 보충군이 이들을 진압한다는 내용의 독일 군부의 보안령이었다. 반나치 인사들은 이 작전을 자신들이 이용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이 작전의 발동권을 가지고 있는 예비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의 부관이 바로 반나치의 일원이자 히틀러를 폭사시킬 폭탄을 가지고 가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1944년 7월 15일, 외국인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명목하에 병력을 동원하려고 했지만, 날짜를 연기해 1944년 7월 20일에 작전을 개시하기로 한다.

작전 내용은 이랬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동프러시아에 있는 히틀러의 볼프산체에 들어가 히틀러를 폭사시키면 프롬 장군이(그는 아직 반나치에 들어가는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발키리 작전을 발동, 예비군을 동원해 나치를 전부 체포하고, 이어 베크 원수를 독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연합군과 협상해가며 소련을 막는다는 계획이었다.

폭탄은 국방군 정보부(Abwehr)의 사령관인 칼 카나리스제독이 연합군이 레지스탕스에게 전해주기 위해 공수할 때 은밀히 구한 것이었다. 이 폭탄은 파편에 의한 살상이 아닌 화력에 의해서만 살상을 일으키는 폭탄인데 폭탄에 부속된 캡슐을 깨트리면 캡슐의 액체가 신관을 녹이고, 이어 뇌관을 건드리면서 폭발하는 폭탄이었다. 이런 폭탄을 사용한 이유는 볼프산체의 경계가 워낙 철통 같아서 호신용 권총은 물론 결혼 반지까지 전부 내놓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도저히 금속 폭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당시 폭탄에 피격당해 오른팔과 왼손가락 3개를 절단하고, 눈 하나를 잃어버린 장애인이었다. 군부에서는 그에게 제대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거부하고 대신 예비군 참모가 된 것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 힘든 몸으로 매우 정교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매일 이 캡슐을 깨는 훈련을 해야 했다.

 

경과

- 볼프산체

1944년 7월 20일 오전 10시, 예비군 부사령관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이 베크에게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요?"라고 전화를 걸었다.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한편 오전 7시,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미 그의 부관인 베르너 폰 헤프텐과 함께 랑스도르프의 비행장에서 동프러시아 라스텐부르크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오전 10시 15분, 라스텐부르크에 도착한 일행은 20분 뒤, 볼프산체에 도착했다. 볼프산체에는 3개의 검문소가 있었지만, 슈타우펜베르크는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한다. 오전 11시,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총통 본영의 참모 멜렌도르프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정오 무렵에 대기실에서 카이텔을 만나 프롬 장군의 국민척탄병 보고서를 가져왔다고 보고했다. 카이텔은 총통이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이 있기 때문에 일찍 회의를 끝내야 하며 장소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원래는 지하 벙커의 회의실에서 회의를 했었으나 이 날 마침 재공사를 해야 해서 위층의 개방된 회의실에서 회의를 했던 것이다. 카이텔과 회의실로 가던 슈타우펜베르크는 가는 길에 볼프산체의 통신감인 에리히 펠기벨을 만났다. 벨기벨은 슈타우펜베르크에게 "모든 일이 잘되기를 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의 뜻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 두 사람 뿐이었다.

회의실로 거의 다 가던 슈타우펜베르크는 갑자기 모자와 벨트를 안가지고 왔다며 다시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가방 속의 폭탄 캡슐을 꺼내고 조심스럽게 캡슐을 깼다. 시간은 오후 12시 32분이었다. 폭탄은 예정대로라면 10분 뒤에 터질 예정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대기실에서 나오자 카이텔은 지각을 했다고 호통을 쳤고, 슈타우펜베르크는 그에게 사과했다.

오후 12시 36분, 회의실로 들어가기 직전,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올 것이기 때문에 오는 즉시 알려 주라고 통신 교환수에게 말했다. 이것은 카이텔이 일부러 이 말을 듣게 해서 빠져나갈 길을 미리 만들려는 계책이었다. 당시 회의실 내에는 히틀러를 비롯, 몇몇 장성과 그들의 부관, 타이피스트 2 명까지 해서 총 25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마침 육군 참모총장 호이징거가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 상황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등장에 잠시 회의장은 조용해졌으나 금방 무시 당하고 회의는 속행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이징거의 부관 하인츠 브란트 대령과 공군 참모총장 코르텐 사이에 서 있다가 몰래 가방을 히틀러 옆에 테이블 기둥 옆으로 옮겨 놨다. 그리고는 아무도 몰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폭파까지 이제 5분 남았다. 그런데 아무도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나가고 나서 바로 브란트가 지도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테이블 기둥 옆에 있던 슈타우펜베르크의 서류가방을 발로 건드렸다. 브란트는 가방 때문에 히틀러가 거추장스러워 할 것이라고 여기고 폭탄을 자기 쪽, 즉 테이블 바깥쪽으로 폭탄을 끌어당겼다. 카이텔은 호이징거 다음이 슈타우펜베르크였기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바라봤지만 그는 없었다. 당황한 카이텔은 순간, 회의실로 들어오기 전에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으로부터 전화가 올 것이라고 한 말이 떠올라 밖으로 나갔지만, 그곳에도 슈타우펜베르크는 없었고, 결국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후 12시 42분, 호이징거의 브리핑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소련군은 막강한 병력으로 주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선봉은 이미 주나부르크 남서 지구에 도달했으며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 시키지 않으면, 파국이..." 이 말과 동시에 폭탄이 터졌고, 순식간에 회의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카이텔은 회의실 문 앞까지 왔을 때 갑작스런 폭발에 놀라 뛰어 들어갔다. 회의실 내에는 폭탄의 화염이 가득 퍼졌고, 지붕은 거대한 구멍이 났으며 창문은 모두 깨져버렸다.

이 순간, 슈타우펜베르크는 펠기벨의 사무실에 있다가 폭발음을 듣고 펠기벨과 악수한 뒤, 헤프텐과 함께 볼프산체을 떠났다. 검문소를 모두 속이고 마지막 검문소에서 '44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통과.'라는 기록을 남긴 채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도망쳤다. 중간에 길가에서 헤프텐은 폭탄이 터지지 않을 경우 쓰려고 했던 제 2의 폭탄을 분해해 길가에 버렸다. 볼프산체의 펠기벨도 통신선을 절단해 볼프산체을 고립시킨다. 오후 12시 55분, 라스텐베르크의 비행장에 도착한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출발한다.

한편, 폭탄이 터진 회의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폭탄을 자기 쪽으로 끌어놨던 브란트와 타이피스트 베르거, 공군 참모장 코르텐, 히틀러 수석 부관 슈문트 등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히틀러도 얼굴이 새까맣게 탔고, 다리에 약간의 화상과 고막 파열, 그리고 팔에 나무 파편이 박혀 이후 팔에 가끔씩 마비 증상이 발생한다. 기절한 히틀러를 회의장 밖에 있던 카이텔이 뛰쳐들어와 불길을 헤치며 히틀러를 끌고 나온다. 결국 히틀러는 이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난다.

오후 1시 15분, 펠기벨은 예비군 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올브리히트에게 히틀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보고했다. 올브리히트는 당황했지만, 아직 베크와 슈타우펜베르크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기다리자고 했다. 이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이무렵, 볼프산체에서는 SS사령관 겸 경찰 총장인 하인리히 히믈러가 사건 현장에 도착해 사건 파악을 위해 베를린에 있는 제국사법경찰 사령관인 아르투르 네베에게 전화를 거나 네베는 사건 조사를 거부한다. 그 사이 펠기벨은 아무도 몰래 볼프산체의 통신선을 절단하고, 볼프산체은 몇 시간 동안이나 외부와 고립된다. 히틀러는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처음엔 아무도 슈타우펜베르크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 폭발이 연합군의 정밀 폭격이나 이미 오래 전부터 폭탄이 비밀리에 설치된 걸로 여겼으며, 모두 그가 죽은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환수와 카이텔이 슈타우펜베르크가 사라졌다고 했고, 검문소에서도 폭파 직후 슈타우펜베르크가 볼프산체을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러나 통신선이 절단되었기 때문에 복구될 때까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오후 4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자신이 테러를 당한 회의장을 공개했고, 현재 전황이 이처럼 위험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살아남은 것처럼 결국엔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이에대해 감동을 받고 이 사건이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결국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오후 5시, 무솔리니와의 회담 중에 통신선이 복구되며, 사방에서 반란 소식이 보고되었다. 히틀러는 1934년 SA대장 에른스트 룀의 사건 때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복수를 할 것이며, 애, 어른 할 것없이 모조리 다 죽여버릴 것이라며 분노했다.

- 베를린

오후 3시 45분, 베를린에서는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이 랑스도르프 비행장에 도착했고, 급히 발키리 작전이 개시되었다. 오후 4시, 베를린 방어 사령관 파울 폰 하세 장군을 비롯한 반나치들은 친위대 사령부를 봉쇄했고, 올브리히트는 프롬 장군을 찾아가 예비군 동원을 요구했다. 아직까지도 결정을 못하던 프롬은 총통이 죽었는지 증거를 대보라고 했고, 마침 "볼프산체"과 통신선이 복구되어 프롬은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전화를 받은 카이텔은 히틀러가 살아있다고 말했고, 프롬은 반란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 먹는다. 올브리히트는 일단 도망쳤고, 그 무렵 베크가 베를린에 도착한다.

오후 4시 30분, 베크,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는 행동을 개시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파리의 사촌 동생 폰 호파커에게 파리에서 행동을 개시하라고 했다. 이들은 프롬을 만나 혁명을 같이 할 것을 종용했지만 프롬은 거부하고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려고 하나 대세에 밀려 오히려 그가 체포되어 감금된다.

오후 5시,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러 온 친위대 장교와 병사들이 체포되고, 반나치들이 행동을 개시해 베를린의 나치들을 체포한다. 오후 6시, 반란군이 부대를 이동해 친위대와 보안국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오후 6시 28분, 히틀러가 라디오 방송에 나왔다. 히틀러는 방송에서 자신이 살아있으며 반드시 음모자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라고 연설했고, 이 방송이 나온 이후 음모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오토 에른스트 레머는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체포하기 위해 선전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상관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레머는 괴벨스가 히틀러와 전화 연결을 시켜 주자 마음이 변했다. 올브리히트도 크람프니츠 사관학교장인 글레제머 대령을 찾아가나 학교장은 이를 거부한다. 이미 올브리히트에 앞서 오토 스코르체니가 찾아와 그에게 충성에 대해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올브리히트는 그를 감금하고 전차부대를 출동시키나 학교장은 탈출에 성공해 전차대가 티어가르텐 승리의 탑까지 진격했을 때 그들을 제지하고 학교로 복귀시킨다.

레머는 반란에서 손을 떼고 반란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하세 장군은 동조자를 찾았지만 히틀러가 살아있음이 확인되면서 더이상 반란에 손을드는 사람은 없었다. 헤프텐은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암살기도와 관련된 문서를 소각하기 시작한다. 오후 10시, 반란군에 속했던 장교 10여 명이 갑자기 배신을 하고 반란의 주동자들을 체포한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도주하다가 남아 있던 왼팔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끌려갔다. 감금되어 있던 프롬도 구출되었고, 친위대와 보안국을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의 헤르푸르트 장군은 히틀러에게 전화해 지금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다고 말하며 배신한다.

7월 21일 자정, 이미 반란군과 접선한 것을 덮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프롬은 재빨리 군법회의를 열였다.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에게 사형이 내려지고 베크는 자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베트는 두 번의 자살 기도가 모두 실패했고, 결국 사살당한다. 사형수들은 뜰로 끌려나와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가운데 사살당한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우리의 신성한 독일 만세!"를 외치며 최후를 맞이했다. 프롬은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 또한 죽이고자 했으나 워낙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죽이지는 못했다.

오전 12시 30분, 처형장소에 갑자기 오토 스코르체니 소령이 들이닥친다. 그는 상황을 보고 현재 남아 있는 자들만으로도 뭔가 얻을 수 있을거라 여기고 남아 있던 프롬, 회프너,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등을 현장에서 연행한다. 오전 1시, 히틀러는 라디오 방송에서 매우 분노한 목소리로 반드시 배신자들을 응징하겠다고 하며 베를린에서의 반란은 실패한다.

-파리

파리 시에서도 음모 가담자들이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히틀러가 죽었다고 믿었고, 즉시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게슈타포, 친위대, SD 요원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특히 프랑스 주둔 게슈타포 총책임자였던 카를 오베르크를 체포하는데 안이 된다. 오후 6시, 서부전선 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는 반란자들의 발키리 작전을 보고 받는다. 클루게는 베크에게 전화를 걸어 총통의 생사 여부를 물었고, 당연히 베크는 그에게 히틀러가 죽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클루게는 의심을 품었고, 오후 8시에는 라 로슈 기용의 사령부로 발키리 작전을 수행하라는 지령이 내려지나 거부한다. 이에 반란을 일으키자는 권터 블루멘트리와 한스 슈파이델은 클루게와 심한 논쟁을 벌였다. 이 때, 호파커 등 반란자들이 도착해 이미 게슈타포를 비롯한 나치 일당을 체포했다면서 같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클루게는 거절했다. 클루게가 반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반란의 실패를 의미했다. 클루게를 비롯한 반란자들은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클루게는 이 자리에서 도망칠 것을 권유하나 이들은 거부한다.

오후 11시 30분, 반란군은 1,200여 명에 달하는 게슈타포, 친위대, 보안대 등의 나치 일파를 체포해 형무소에 수감시킨다. 또한 오베르크와 1940년부터 프랑스에 게슈타포를 뿌리박히게 했고, 실질적인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헬무트 크노헨은 파리 콘티넨탈 호텔에 감금된다. 그러나 21일 오전 1시, 베를린에서의 반란이 실패했다는 히틀러의 성명이 발표되자 반란이 크게 흔들린다. 이후 오전 1시 30분, 독일 서부 전선 해군 사령관 크란케 제독이, 체포된 나치 일원을 석방하지 않으면 해군 육전대 1천 명을 투입해 반란을 진압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오전 2시, 블루멘트리는 파리 군정 사령관 칼 하인리히 폰 스�프나겔대장에게 그의 해직을 알린다. 크란케는 계속해서 해군 병력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이 때 파리 주재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가 중재에 나서며 교전을 막고자 노력한다. 오전 3시, 아베츠 대사는 오베르크와 스�프나겔을 중재해 나치 일원의 일제 석방과 반란군의 안전을 원칙으로 한다는 협의 하에 파리에서의 반란도 종료된다. 협상 이후 반란군과 친위대 장교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서로를 위로했다.

결과

히틀러는 "배신자"들을 남김 없이 죽여 버릴 것을 명령했고, 나치는 롤란트 프라이슬러 판사를 재판장으로 하는 재판을 열었다. 반란자들 대부분은 이미 혹독한 고문을 당했었고, 재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형이 언도된다. 약 7,000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약 5,000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사형이 언도되었고, 거의 대부분이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히틀러는 그 모습이 '푸줏간의 돼지' 같다고 묘사했다.

먼저 재판에 선 비츨레벤, 펠기벨, 회프너, 하세, 히틀러에게 폭탄을 가지고 간 슈타우펜베르크의 사촌 동생들인 호파커, 헬도르프, 베르톨트 폰 슈타우펜베르크 등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 중 베르톨트는 벨트 없는 누더기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행동했고, 그들을 비난하는 재판장을 반대로 비난하며 그의 엉터리 심문을 반박한다. 네베는 사건 당일 도망치나 결국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배신자 헤르푸르트와 프롬도 처형당한다.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갈고리 형이 아닌 총살형을 당했다. 프롬은 자신이 처형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럴리 없다."며 배신을 후회했다.

맹목적인 복종으로 배신을 한 레머는 대령으로 승진하나 종전 후,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체포되어 독일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파리에서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던 클루게는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고, 총통 본영으로 소환되던 중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한다. 블루멘트리는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해 아르덴느 공세에 참가하기도 한다. 슈파이델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지만 연합군이 수용소를 점령하면서 간신히 살아난다. 그는 종전 후 재건된 독일군에서 복무하면서 반나치 이야기를 펴낸 후 사망한다. 파리에서의 반란에 핵심 임무를 맡던 스�프나겔은 게슈타포들과 함께 베를린으로 자진 출두하던 중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싸웠던 베르�에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두 눈만 잃고 치료 받은 후에 처형된다.

이 때, 직,간접적으로나마 암살 시도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고, 암살 기도와 무관하면서도 한꺼번에 엮인 사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에르빈 롬멜이 있는데 롬멜은 클루게와 마찬가지로 히틀러에 의해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한다. 반나치 인사 중에서 민간인으로 가장 유명했던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도 이 때 체포된다. 반란자들에게 폭탄을 제공했던 정보국 국장 카나리스 제독과 부국장인 오스터 장군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쿠테타 성공 후 수상 자리에 올라 연합군과 협상 할 때 민간인 대표로 나서려 했던 라이프치히 시장이었던 괴르델러는 반란이 실패하자 도망치나 술집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추천으로 부수상에 오르려 했던 율리우스 레버는 사회주의자로 반란 전에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가 혐의가 드러나 처형당했다.

나치에 반대했던 정치 세력 중의 하나였던 크라이자우 서클의 회장인 몰트게 백작은 반란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체포, 처형되었는 데, 그중에서도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은 히틀러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슈타우펜베르크'라는 성씨를 쓰는 사람은 모두 처형하라."고 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가문이 거의 멸족될 위기에 빠질 정도였다. /위키백과

 

 

 

 

히틀러의 사진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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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히틀러를 비롯한 당시 생생한 기록 사진을 올린다.
일부는 그간 알려진 부분의 사진과 미공개 포토를 더불어 올리는 것은 2차 대전의 주범이며
전 세계 무고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포악했던 나치의 지난날, 생생한 모습을 전하기 위함이다.

 

<출처: 중년의 삶 /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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