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독일어: Albert Einstein,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제안한 것으로 유명한 유대인 이론물리학자이다.
업적
1921년 이론물리학에 대한 기여 및 광양자설을 제안한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상대성 이론은 원자력과 원자 폭탄의 기본적 이론을 제공했고, 광양자설로 광전효과 등 빛의 입자성을 효과적으로 설명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양자역학의 성립에서 주요한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가 주로 기여한 물리학의 분야는 양자역학, 통계역학과 우주론을 망라하며, 일반적으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물리학자로 기억된다.
생애
초기 생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독일 뷔르템베르크 주 울름에서 전기 공장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브리네는 매주 교회에 나가는 로마가톨릭 신자였으며, 집안에도 청동으로 만든 십자고상이 있었다. 한 살 때 아버지의 사업부진으로 대대로 살던 울름을 떠나, 뮌헨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인슈타인은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로 인해 상처받았다. 그가 다닌 초등학교는 로마가톨릭 학교였는데, 교사가 수업시간에 대못을 보여주며,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아인슈타인이 존경받는 과학자가 된 후에도 그를 괴롭혔다.
청소년 시절
그의 가족은 사업부진으로 이탈리아 밀라노에 건너갔다. 독일 뮌헨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김나지움에 진학했으나, 군국주의의 영향으로 자유가 없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신경쇠약으로 공부를 쉬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자, 17세의 아인슈타인은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라며 학교를 떠났다. 이후 독학으로 공부하여 스위스의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ETH)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을 눈여겨본 학장의 배려로 1년간 아라우에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서 결국 연방공과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물리학 연구
1900년 봄,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시민권 문제와 유대인에 대한 배척으로 취직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한 아인슈타인은 가정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베른에 있는 특허 사무소의 심사관으로 채용되었다. 특허 심사관으로 근무하던 1905년,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일련의 중요한 논문들을 다섯 편 내었다. 이 논문들에서 그는 광전 효과를 설명하고, 특수 상대성 이론을 제안하였으며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였다. 또한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이라는 논문으로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알려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유럽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상대성이론을 중력을 포함한 이론으로 확장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특허사무소를 떠나서 스위스에서 그리고 프라하의 독일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있었으며, 1912년 겨울 연방공과대학교로 돌아왔다. 1914년에는 독일로 돌아와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 자리를 얻어 베를린에 머무르게 된다. 1916년, 마침내 상대성 이론을 중력을 포함한 일반상대성이론으로 확장하는 데에 성공하여 '물리학 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Die Grundlagen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를 발표하였다.
1919년 런던 왕립학회는 기니 만에 있는 프린시페 섬에서 있었던 관측에서 그 해 5월 29일의 일식을 촬영하였는데 일반상대성 이론에서의 예측을 검증한 값들을 내었다고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아인슈타인은 뉴턴역학의 세계관을 마감한 인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21년에는 광전효과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광양자설로 양자역학의 발전에 주요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의 성공을 완전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양자역학과 거리를 두고 통일장 이론을 연구하였다.
미국생활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직전까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양심적 병역거부, 무기개발반대, 반나치운동 등을 주장하였으며,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집권자가 된 후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났다. 이미 그의 재산은 나치 독일에 의해 압류된 뒤였으며, 시집간 그의 두 딸도 독일을 벗어나 인근 국가에서 살아야 했다. 194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고, 1955년 죽을 때까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교수로 지냈다. 1923년 일본 카이조(改造)출판사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는데, 당시 인력거를 보면서 '사람이 사람을 운송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비인도적인 일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
반공주의자들의 공격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내 반공주의자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여겨졌다. 미국 하원내 반공정치인들은 아인슈타인을 "이 세상 최고의 사기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수년 전부터 공산주의자로 활약해 왔다"라느니, "지금 그가 퍼뜨리고 있는 허튼 소리는 공산당 노선의 이행일 뿐이다"라며 비난했으며, 에드거 후버 FBI 국장(1924년부터 1972년까지 FBI 국장직 역임)은 아인슈타인의 사상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아인슈타인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34개 공산주의 단체와 연관된 골수 공산주의자로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는 독일에서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1923년부터1929년까지도 아인슈타인의 집은 공산주의자들의 본거지이자 회합장소로 알려져 있었다고 했다.[2] 여기서 독일에서의 활동보고는 아인슈타인이 독일 공산당원들을 공산주의 탄압에서 보호했던 일을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념에 상관없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운 휴머니즘에 의한 것일 뿐 공산주의에 동조해서는 아니었다.
<위키백과>
아인슈타인명언
"Try not to become a man of success, but rather a man of value."
-성공한 인간이 아니라 가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I never think of the future-it comes soon enough."
-나는 결코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도 빨리 다가온다.
"Great spirits have always encountered violent opposition from mediocre minds."
-위인들은 언제나 범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왔다.
"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
for knowledge is limited while imagination embraces the entire world."
-상상은 지식보다 더욱 중요하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끌어안기 때문이다.
"Only two things are infinite, the universe and human stupidity,
and Im not sure about the former."
-우주와 인간의 어리석음, 오직 이 두 가지만이 무한한데,
사실 우주가 무한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직 인간의 어리석음만이 끝이 없다.)
"Learn from yesterday, live for today, hope for tomorrow.
The import!ant thing is not to stop questioning."
-과거에서 배우되, 현재를 살며, 미래에 희망을 가져라.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The more I learn, the more I realize I dont know.
The more I realize I dont know, the more I want to learn."
-더 배울수록,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더욱 더 깨닫는다.
또 그렇게 깨달을수록, 더욱 더 배우고 싶다.
쓰고 단것은 외부에서 생기고 어려운 것은 내부에서 자기자신의 노력으로부터 생긴다
훌륭하고 영감있는 모든 것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 의해서 창조된다.
교사의 임무는 독창적인 표현과 지식의 희열을 불러 일으켜주는 일이다.
보고 이해하는 기쁨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분노는 바보들의 가슴속에서만 살아간다.
오직 남들을 위하여 산 인생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나는 간소하면서 아무 허세도 없는 생활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최상의 것육체를 위해서나 정신을 위해서나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 사람이 국가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형성에 있다. 교육의 목적은 기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인간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또한 교육의 비결은 상호존중의 묘미를 알게 하는데 있다. 일정한 틀에 짜여진 교육은 유익하지 못하다. 창조적인 표현과 지식에 대한 기쁨을 깨우쳐주는 것이 교육자 최고의 기술이다.
교육의 정상적인 지름길은 모범이 되는 것이다. 만일 선생이 학생의 모범이 아니라면 그것은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나의 길을 밝혀 주고, 항상 인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친절과 미(美), 그리고 진리였다.
동시대인들의 약점과 우행(愚行)을 보고서도 오염되지 않을 만큼 충분한 독립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몇 명 되지 않는 독립된 사람들도 인간의 냉혹함에 부딪치게 되면, 세상일을 올바르게 하겠다는 열성을 금방 잃어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오로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미묘한 유머와 우아한 재치로서 동시대인들을 매혹시키며, 예술이라는 매개체로소 그들에게 거울을 디밀어 주는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가능한 한 간단하게 만들어져야 하지만, 지나치게 간단해선 안 된다.
모든 것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때까지 단순화해야 한다.
모든 과학의 위대한 목표는 많은 경험에서 얻은 사실을 아주 적은 가설이나 원리에서 인용한 논리적 해석에 의해 거론하는 것이다.
모든 중대한 문제는 현명이나 민첩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과 상호 신뢰의 공명 정대한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해결된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그 문제가 발생했을 때와 동일한 이해력 수준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미합중국은 문명을 한번도 지녀보지 못하고 직접 미개시대에서 퇴폐기로 이행한 나라이다.
법으로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아무런 제재없이 표현할 수 있게 되려면 누구에게나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복리(複利)는 이 세상의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다.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게 현명하고 똑같이 어리석다.
신은 우주만물과 주사위던지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神秘)이다. 참된 예술과 참된 과학의 요람은 바로 이 기본 감정이다. 그 누구라 하더라도 이 점을 모른다든지, 또 신비스럽게 느끼지 못하거나 경탄할 줄 모른다든지, 또 신비스럽게 느끼지 못하거나 경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 없으며, 그의 눈은 어두운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초라한 옷차림과 엉터리 가구들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그보다는 초라한 생각과 엉터리 철학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를 고귀한 사고와 행동으로 이끌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위대하고 순결한 개인의 모범뿐이다. 돈이란 이기주의에만 호소하고, 어쩔 수 없이 남용을 초래한다. 어느 누구라도 모세나 예수, 혹은 간디가 카네기의 돈주머니로 무장하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교육에 있어서 흔히 실질적이고 사실적인 것만 지향하고 순수한 지적 태도만 강조하는 것은, 윤리적 가치의 손상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술의 진보가 직접 인류와 대면하는 위험이라기보다는 인간 관계에 설상처럼 덮여 있는 사실적인 사고방식이 인간의 상호 애정을 질식시킨다는 점입니다. 도덕·윤리의 충만은 과학보다는 예술이 전념해야 할 목표입니다. 우리의 동포를 이해한다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이해심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동정심이 함께 했을 때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중요한 도덕 활동의 원천을 배양한다는 것은 오로지 미신의 요소를 탈피한 종교의 과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중요한 교육의 일부를 형성하는데, 교육 부면에서 종교는 별다른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도 충분히 조직적이지 못한 형편입니다. 세계 정치 정세의 놀라운 딜레마는 우리의 문명에서 종교 교육을 탈락시킨 죄와 관련된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윤리 문화'가 없이는 인류에 대한 구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이 우리 이웃들의 행복한 미소에 의거해 있다.
우주 공간의 신비를 알면 알수록 신의 존재가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도 바이올린에서 신의 음성과 비슷한 무엇을 찾고 싶어하기 때문이지요.
육체적인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만족스런 생활에 불가결한 선행 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족스런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사람은 자기의 독자적 특징이나 능력에 맞는 정도로 자기의 지능 및 예술적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또한 가져야만 한다.
이 집은 결코 성자의 유골을 보러 오는 순례 장소가 되지 않게 하겠다.
인간은 고독한 동물이면서도 사회적인 동물이다. 고독한 동물로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생명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며, 자기 개인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자기의 본질적 능력을 개발하고자 시도한다. 반면에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동포로부터 인정과 애정을 얻고 동포들의 즐거움을 나누어 가지며, 그들이 슬플 때 위안을 주고 또한 그들의 생활 조건을 개량하려고 노력한다. 개인에게 음식·의복·가정·도구·언어·사고의 형성, 그리고 대부분의 사고 내용을 마련해 주는 것은 이 '사회'이며, 그의 삶이 가능한 이유는 '사회'라는 낱말 뒤에 숨어 있는 현재 및 과거의 수백만 사람들의 노동과 업적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인형같이 되어 버린다.
인간의 참된 가치는 그가 어느 정도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될 수 있으며, 또 그가 자기 자신에게서 얻은 그 해방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
일하는 사람은, 연구하는 사람은 사상을 품은 사람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 않으며 입을 다물고 실력을 기르는 학습에만 치중한다.
자기의 인생과 남들의 인생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인생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아니한 사람이다.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인이다.
종교를 만드는 것은 신비의 경험이다. 우리가 침투해 들어갈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 오로지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서만 우리의 의식세계에 스며드는 가장 심오하고도 찬란한 미를 감지한다는 것, 바로 이러한 지식과 감정이 참된 종교를 구성하는 것인 바, 이런 의미로서만 나는 깊은 종교인이다.
진짜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것은 절대로 물리학이나 윤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플루토늄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 나쁜 정신을 제거하는 것보다는 쉬운 것이다.
집단 제도 가운데 최악의 것이 군대다. 나는 그것을 증오한다. 만일 음악에 발맞춰 행진하는 데서 어떤 기쁨을 느끼는 인간이 있다면, 나는 그 인간을 경멸한다.
평화는 폭력에 의해서 유지될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이해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가 있다.
하느님은 마술사가 아니라 과학자다.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과의 혈족의식(血族意識)이 없이는, 그리고 예술과 과학 분야에 있어서 영원토록 다함이 없는 것, 즉 이 객관세계에 대한 애착이 없다면 인생이란 나에게 허무한 것 같다. 인간 노력의 진부한 대상, 즉 재산이나 겉보기만의 성공이나 사치는 나에게는 언제나 경멸의 대상이었다.
-나는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오래 생각할 뿐이 다.
-실수를 하지 않은 사람은 새로운 것을 전혀 시도하지 않은 사람이다.
외웠는가? 그렇다면 따라할 수 있을 것이다외우지 않았는가?그렇다면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사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다.한가지는 그 무엇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받아들이는 것이고,다른 한가지는 모든 것이기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인격신을 상상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신은 우리의 불충분한 감각으로 세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경외심을 품게 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이곳 지구에서 우리는 입장이 묘하다.우리 각자는 이곳에 잠시 들를 뿐이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신성한 목적을 지닌 채 이곳을 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일상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기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는 사람들의 웃음과 안녕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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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1905년 스위스 베른의 젊은 특허국 직원이었던 26세의 무명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새로운 관점, 즉 상대성이론을 제창해서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모습을 출현시켰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19세기를 통해서 부상되었던 고전 역학과 고전 전자기학 사이에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19세기 후반기에 성장한 전자기학 분야에서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전자기 방정식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현재 우리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할 때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의 형태를 바꾸지 않고 적용하고 있으나, 19세기에는 맥스웰 방정식은 다양한 전자기 방정식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전 전자기 법칙들은 고전 역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던 갈릴레오 변환에 대해서 불변이 아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즉 당시의 전자기 법칙들은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서로 불변으로 유지되지 않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19세기 전자기학과 상대성 이론의 맹아
아인슈타인의 성장 과정
특수 상대성이론의 기원
특수 상대성이론의 형성과 그 수용과정
<출처: 우주와생명과창조주>
아인슈타인 일화
1). 가족들은 이 아이가 말없이 혼자 놀기만 해 걱정이 많았다. 그를 가르친 교사들의 평가는 한결같이 나빴다. 학교에서는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고 계산하는 시간이 길었으며 그나마 틀린 답을 내놓기 일쑤였다. 라틴어는 '양', 그리스어는 '가'를 받았고 결국 학교를 중퇴할 때 그리스어 교사는 다음과 같이 퇴학 권고 사유를 밝혔다. '너의 존재가 내 학급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한다.' 이 소년의 이름은 아인슈타인이었다.
2). 한 소녀가 산수숙제를 하다가 그 마을에 머리 좋은 영감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다. 그 영감은 친절하고 너무나 잘 가르쳐줬다. 그 아이는 엄마에게 그 일을 말했고, 그 아이의 엄마는 그 영감이 아인슈타인이란 걸 알고 뒤늦게 찾아가 사과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의 대답은 "내가 아이에게서 배운 것이 더 많습니다"
3). S = X + Y + Z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그 많은 학문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는 손끝에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바다에 비하자면 나의 학문은 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제자들이 다시 물었다. "그럼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학문에 성공하셨습니까?" 그는 종이에 'S = X + Y + Z' 라고 쓰면서 설명했다. S는 성공, X는 말을 많이 하지 말 것, Y는 생활을 즐길 것, Z는 한가한 시간을 가지라는 뜻이었다.
4). 한 남자가 예쁜 여자와 한 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 있으면 그 한 시간은 1분으로 생각되겠죠. 그러나 그가 뜨거운 난로 옆에 1분 동안 앉아있으면 그 1분은 한 시간이나 되게 느껴질 거요. 그게 바로 상대성이론이오!
5). 아인슈타인의 어머니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1879년 다뉴브 강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4세까지도 말을 제대로 못하는 늦둥이였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도 심부름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할 정도로 둔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어려서부터 질문하는 데는 명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것을 대견하게 생각하여 그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6). 건망증 아인슈타인이 기차에서 기차표를 잃어버렸다. 차표를 찾는 그를 보고 역무원이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차표는 안 내셔도 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차표를 찾는데 열중했다. 역무원이 계속 괜찮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차표를 찾아야 내가 어디에 가려는지 알 수 있단 말이오."
아인슈타인 [Einstein, Albert, 1879.3.14~1955.4.18]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름에서 태어났다. 스위스국립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베른 특허국의 관리 자리를 얻어 5년간 근무하였다. 광양자설, 브라운운동의 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 이를 1905년 발표하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으며, 철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몇 가지 뜻밖의 이론, 특히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等價性)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예언한 것이었다.
브라운운동에 관한 기체론적 연구는 분자물리학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플랑크의 복사법칙을 검토하여 광양자설에 도달, 그 예로서 광전효과를 설명하였다. 1913년 베를린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나, 그 동안 자신의 특수상대성이론을 중력(重力)이론이 포함된 이론으로 확대하고자,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 이 이론에서 유도되는 하나의 결론으로서 강한 중력장(重力場) 속에서는 빛은 구부러진다는 현상을 예언하였다. 이것이 영국의 일식관측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광전효과 연구와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업적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그 후 중력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중력장과 전자장의 이론으로서의 통일장이론으로 확대할 것을 시도하였다. 유대인 출신인 그는 유대민족주의·시오니즘운동의 지지자, 평화주의자로서 활약하였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 추방이 시작되자, 1933년 독일을 떠나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로 취임, 통일장이론 개척에 힘을 기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원자폭탄 연구에 몰두하자, 미국의 과학자와 망명한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을 가질 필요성을 통감하여 당시 대통령 F.D.루스벨트에게 그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미국에서의 원자폭탄 연구, 맨해튼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그는 통일장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기에 힘썼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리만기하학을 이용한 것으로서, 그것은 2차 대칭하는 텐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만년에 생각해낸 통일장이론은 2차 대칭이 아닌 텐서에 의거한 이론이다. 이것을 아인슈타인 최후의 통일장이론이라고도 한다. 미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아인슈타인상(賞)을 마련하고 해마다 2명의 과학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naver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매우 작은 소립자들 세계와 전체 우주의 모든 물리현상들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상대성이론을 완성한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1905년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맥스웰의 전자기이론과 뉴턴의 갈릴리안 상대성이론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1916년에는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같다는 등가원리와 휘어진 공간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중력이론을 일반화한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또한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질량과 에너지 등가원리를 내세운 질량-에너지 관계식을 밝히는 등 현대물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한 그는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 금지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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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4.18 -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사망 미국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1955년 4월 18일 미국 프린스턴 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 독일의 울름에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스위스 취리히 이공 대학을 마치고 연구에 몰두하여 1905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그 뒤 프라하 대학 교수와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됐다. 1916년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여 물리학자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1922년에 광양자 이론의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49.12.26 - 아인슈타인, '통일자장이론' 발표
1940.12.12 - 아인슈타인 박사, 미국에 귀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집권자가 된 후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났다. 뒤에 그는 프린스턴대학교 고등연구소 수학과정 기초임원이라는 정식자리를 받아들였다. 그결과 나치주의자들은 그가 애용하는 베를린 근처에 있는 여름 별장을 수색하고 그의 배를 압수했다. 그는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유럽 자유세계가 방위력을 보충하고 무장하도록 촉구했다.
1939.10.11 - 아인슈타인 등 미국에 원폭개발 촉구 원자탄 개발 역사에서 오펜하이머(Oppenheimer, Franz, 1864~1943)와 함께 개운치 않은 존재를 드러내는 또 한 사람의 천재는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1879~1955)이다. 미국이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45년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폭이 떨어지기 6년 전이었다. 1939년 10월 11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받아 본 아인슈타인의 편지 한 통이 미국 정부에 핵 개발을 '진언'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1931.1.16 - 아인슈타인 미국 천문대 방문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준엄하게 말했다. 여기서 신이란 자연 혹은 물리법칙이고, 주사위 놀이란 확률을 의미한다. 그런데 보어는 감히 아인슈타인에게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든 말든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신이 왜 주사위놀이를 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충고했다.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후배들에게 점잖게 충고하려고 했던 아인슈타인으로서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흠을 찾아내 이 보라며 후배들에게 말했다. “아침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제를 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면 보어는 어김없이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아인슈타인은 계속 문제를 냈고, 보어는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그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아인슈타인이 안고 있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했다.” 이러한 논쟁은 솔베이회의가 열린 6일 동안 계속됐다고 하이젠베르크는 회고했다. 물론 이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후 30여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승리자는 보어와 양자역학을 지지하는 수많은 다윗들이었다. 과학사학자들은 이때의 논쟁을 두고 아인슈타인이 스스로 쇠락의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만남은 참으로 운명적이었다. 1922년 보어는 원자구조에 관한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날 아인슈타인도 함께 상을 받았다. 1921년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됐던 아인슈타인에 대한 시상식이 1년 늦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고보면 양자역학 발전에 기여한 선후배였다. (Chollian.com) /Google
1915.11.25 -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일반상대성이론)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 광양자가설, 브라운운동가설 등 3편의 논문을 발표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덕분에 궁색했던 그의 생활도 폈다. 1902년 스위스 베른의 연방특허국에 들어갈 때만 해도 3급 견습에다 연봉은 3천8백 프랑에 불과했다. 그런데 1906년 그는 2급 전문관으로 승진했고 연봉도 4천5백 프랑으로 올랐다. 더욱 아인슈타인을 기쁘게 했던 것은 그토록 바라던 대학에 자리가 생긴 것이다. 1908년 독일 물리학계의 거물이었던 막스 플랑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베를린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했으며, 1909년에는 특허국 생활을 청산하고 취리히공과대학 교수가 됐다. 이후 세계적인 과학자의 자격으로 1911년에는 제1회 솔베이회의에 참석했다. 1913년에는 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으며, 같은 해 베를린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의 마음엔 늘 꺼림칙한 문제 하나가 있었다. 그가 1905년에 제시한 3편의 논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특수상대성이론이다. 사람들은 특수상대성이론이라고 하면 시간여행을 상상하곤 한다. 운동하는 물체의 시간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달리는 기차의 길이는 짧아진다. 예를 들어 1백m 길이의 고속열차가 시속 3백km로 달리면 1조분의 4m 가량 열차의 길이가 준다. 이러한 지식들은 사람들에게 상식처럼 돼 있다. 또 여기서 유도된 질량에너지등가공식(E=mc2)은 물리학과 천문학, 그리고 에너지 개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특수상대성이론은 말 그대로 특수한 경우, 즉 등속직선운동을 하는 관성계에서만 성립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가속운동을 하는 좌표계나 회전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맞지 않는 얘기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특수상대성이론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10년 동안 끙끙거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11월 25일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하고, 이듬해 3월 20일 ‘물리학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이 광속도일정의 법칙을 기준으로 만든 것이라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과 가속도가 같다는 등가원리에서 출발된 이론이다. 따라서 일반상대성이론을 따르면 중력에 의해 휘어진 공간을 통과하는 것은 질량을 가진 물체든 질량이 없는 빛이든 모두 휘어진다. 그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뉴턴의 중력이론이 질량을 가진 물질들의 운동만 설명하는 한계를 일반상대성이론이 뛰어넘은 것이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가속도와 같다는 생각을 끄집어낸 것은 행운이었다고 회고했다. /Google
1905.9.27 - 아인슈타인, E=mc²라는 질량-에너지 등가성에 대한 논문을 출판 100주년 맞은 '상대성 이론' <앵커 멘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핵심 공식이 소개된지 오늘로 100년이 됐습니다. 정지주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물체의 고유한 에너지는 질량에 비례한다는 공식. (E=mc² !) 특수 상대성 이론의 핵심 내용은 100년 전 오늘 태어났습니다. <녹취>아인슈타인 육성 : "에너지는 물체의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입니다." 질량 1kg의 물질이 천만 인구가 9달동안 쓸 수 있는 에너지로 변환된다는 이 공식은 발표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인터뷰>김제완 : "같은 핸드폰도 이렇게 보면 납작하게 보이듯 물질과 에너지는 사실은 같은 것이라는 말!" 당시 26살의 청년 과학도 아인슈타인이 쓴 3쪽짜리 짧은 논문으로 뉴턴과 갈릴레이가 세운 고전 물리학의 아성은 무너졌고 기존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 개념은 모두 수정됐습니다. 특수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아인슈타인의 이 공식은 원자력 발전과 핵폭탄 기술 개발에 출발점이 됐습니다. 생전에는 한국에 오지 못했던 아인슈타인! 1955년 그가 숨을 거둔 후 미국 프린스턴 대에서 보관돼 오던 뇌의 일부가 상대성 이론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평균치보다도 작은 뇌에서 시작됐지만 그의 이론은 현대 과학에서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KBS 2005-09-27
1905.6.30 -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 출판 1905년 6월 30일 스위스 베른에서 약관 26세의 특허국 심사관이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이 물리학 분야에서 20세기 최대의 업적으로 된 논문을 완성했다. 이른바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친구의 소개로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연이어 논문을 발표했다. 3월에는 광양자(光量子)에 관한 논문, 5월에는 브라운운동에 관한 논문, 게다가 이날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해서`라는 제목의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것이다. 이 논문이 9월에 물리학연보지에 발표되자 일부 전문가들은 격찬했지만 대부분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불평을 샀다. 1915년 이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발전했고 그 실용성은 40년 후에 원자에너지로 현실화됐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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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I do not foresee that atomic energy is to be a great boon
"원자 에너지는 잠시동안 큰 축복이 되리라고 예상할 수 없는 이상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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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상상력에 의거하여 충분히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예술가이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은 제한되어 있지만, 상상력은 세계를 포괄한다. "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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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의 생애 최대 업적은 1915년에 독일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완성한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측자들에게 물리 법칙이 불변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개념인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논의를 확장시켜 가속도의 경우도 다룰 수 있는 이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등속도를 가속도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상대성 이론은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을 통합시키는 이론에서 중력에 관한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을 얻어내려는 아인슈타인의 의도는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무척 오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상대성 이론의 괴팅겐식 전개과정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 1826∼1866)은 1853년에 행한 교수자격 강연에서 나중에 리만 기하학으로 알려지게 되는 내용을 다루었다. 이 논문은 리만의 사후인 1867년 출판되었는데, 1916년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런 관심을 반영하듯 이 논문은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인 1919년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1885∼1955)에 의해서 재 출판되게 된다. 하지만 괴팅겐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인 불변이론으로 간주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했다. 이것은 물리적 추론을 우선으로 했던 아인슈타인의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일반 상대성이론의 검증과 수용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이론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세 가지 예들, 즉 수성의 근일점이 1세기에 43" 만큼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 빛의 중력장 속에서 휜다는 것, 중력장 속에서의 빛의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했다. 수성의 근일점이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천문학자 르베리에(Urbain Jean Joseph Leverrier, 1811∼1877)가 관측했었고,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이 르베리에의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생기는 빛의 적색 편이와 굴절 현상은 아직 관측되고 있지 않았다. KPS 한국물리학회 /Google
[아침햇발] 사회주의자 아인슈타인 / 정남기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헬렌 켈러의 공통점은?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공통점이 많다. 일단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헬렌 켈러는 1880년생이다. 이들은 똑같이 20세기 초반 격동의 세기를 살았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이다.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자였다? 많이 소개되진 않았지만 꽤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본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언어의 의미를 깨닫고 감격해하는 순간은 그에게 새로운 생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1909년 사회당에 입당해 평생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라는 공개서한을 통해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반전파업을 주도하고 뉴욕 한복판에서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자본주의를 혐오했다. 그는 1949년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쓴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무질서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주장했다. 빈부격차를 키우고, 호황과 불황의 경기변동을 만들어내며, 심각한 실업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미국 정부와 의회가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메카시 선풍을 일으켰을 때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기간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감시 대상 1순위였다. 두 사람을 사회주의자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사회적 여건 때문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의 실상은 참혹했다. 독점기업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동안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빈곤해졌다. 상위 1%가 전체 국민소득의 20% 가량을 차지했다. 기업들은 임금을 줄이고자 어린 10대 노동자들까지 동원했다. 그뿐 아니다. 사회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터진 대공황은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몰아갔다. 유럽도 비슷했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시대를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흘렀다. 그동안 안정세를 보이던 자본주의 체제가 다시 한번 거대한 소용돌이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거대 금융자본이 국가간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으며, 거기서 발생한 거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위태롭다. 빈부격차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사회적 대립과 갈등도 커지고 있다. 마치 20세기 초반의 위기 상황과 비슷하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지난 27일 스위스에서 폐막된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수십년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론이 다시 등장했다. 가장 충격적인 발언은 조지 소로스한테서 나왔다. “세계는 60년 만의 최대 위기를 겪게 될 것”이란 경고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말로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시장 시스템을 역설했다. 우주의 신비를 풀어낸 아인슈타인도 사회 변화를 제대로 예측하지는 못했다. 그의 생각과 달리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다. 빈부격차를 줄이면서 중산층을 육성하고, 사회복지 체제를 갖추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냉전 종식 이후 세계화의 물결이 다시 한번 과거의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다. 빈부격차와 사회적 갈등 해소 없이 자본주의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없다는 교훈을.
정남기/논설위원 jnamki@hani.co.kr 한겨레 2008-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