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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태평양전쟁 / 약사, 주요전투

작성자靑野|작성시간09.03.21|조회수516 목록 댓글 0

 

 

 

 

 

 

태평양전쟁 / 약사, 주요전투  

 

 

    


1941.12.7 - 일본군, 진주만(Pearl Harbor) 기습공격
1941년 11월 26일 오후6시. 일본 북단 미나미치시마 에토로프섬 히토카프만에서 일단의 함대가 하와이를 향해 동진하기

시작했다.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에 전투기 등 비행기 423대로 편성된 최정예

기동부대였다. 한편에선 미일 교섭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철수를 요구하며 석유 등 주요물자의 무역 봉쇄를 강행한 미국과, 기득권을 주장하는 일본

사이엔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마침내 일본 어전회의는 12월 1일 미국에 대한 개전을 결정했다. 태평양을 항해하던

기동대는 다음날 저녁 예정대로 12월 8일(일본시간) 미국 태평양함대 본거지인 진주만 공격을 결행하라는 암호를 수신했다.
호놀룰루 시간 7일 오전 6시. 오아후섬 북서 25km지점에 결집해 있던 6척의 일본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폭격기 전투기 등이

발진했다. 1시간 15분후엔 다시 167대의 비행기가 남쪽 진주만을 향했다. 오전 7시45분. 일요일 느지막한 잠에 빠져있거나

식사를 하던 미국 병사들은 요란한 폭음에 혼비백산이 됐다. 불과 2시간에 걸친 무차별 폭격으로 정박중이던 8척의 전함과

순양함 8척, 유조함 2척, 비행기 188대 등 주요 장비가 속수무책으로 파손됐다. 일본측 피해는 전투기 29대, 특수잠수정 5척,

전사자 64명에 불과했다. 여세를 몰아 일본은 10일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 최강의 전함 웨일스 오브 프린스호를 격침시키고

필리핀 루손섬, 괌을 점령했다.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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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6.5 - 미국-일본 미드웨이해전[Battle of Midway]

1942년 6월, 4척의 항공모함과 300척의 군함, 1000여대의 항공기가 동원된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목표는 하와이

북서쪽 1600km 지점에 위치한 미드웨이섬.

6월5일 이른 아침, 항모(航母)에서 발진한 일본 전투기가 미군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러나 비행장은 비어있었다. 이미

일본군의 암호망이 뚫렸기 때문이었다. 전투기들이 다음 공격을 위해 항모에서 발진을 준비하고 있던 10시20분경, 갑자기

미군 전투기 편대가 구름속에서 급강하하며 항모에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갑판에 줄지어있던 전투기들은 속수무책으로

파괴됐고 아직 치우지 못한 탄약과 연료는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항모였지만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3척이 대파되거나 두동강났다. 불과 6분 만이었다. 미 항모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며 버티던 마지막 1척도 곧 태평양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항모 4척, 순양함 1척, 항공기 332대가 파괴되고 3500명의 베테랑 군인들을 잃었지만 미군의 피해는

항모 1척, 구축함 1척, 항공기 147대와 307명의 군인 뿐이었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의 향방도 미국으로 돌아섰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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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0.5(10.15?) - 부관연락선 곤륜호[崑崙丸] 미국잠수함에 의해 격침. 544명 사망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3년 10월 15일 밤에는 下關을 출항한 7천5백톤급 곤륜환(崑崙丸,곤린마루)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고 544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이 사건 후에는 전쟁 수행상 다급한 수송이 요구되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야간운항을 줄이고 낮에만 수상기의 엄호를 받고 운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6월 30일부터 태평양전쟁으로 전세악화로

관부연락선 항로가 폐지되었다.

부산광역시 부산소개

http://www.busan.go.kr/06_intro/02_history/04_03_09.jsp 

(<조선-오늘의 역사>에는 10월 5일의 일로 나오는데 확인이 필요한 일이네요.. ^.@)  

 

 

 

 
1944.2.1 - 미군, 마샬군도 상륙

길버트 제도의 점령이 완료되고 마샬 제도 점령을 준비하던 니미츠 제독에게 마샬 제도 점령 후에는 팔라우 제도와 마리애나

제도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니미츠 제독은 부랴부랴 작전계획을 수정하여 당초 계획에서는 빠져있던 마샬 제도의 마주로 섬을 차기 작전을 위하여

점령목표에 추가한 다음 1944년 2월 1일, 마샬 제도 중앙에 있던 콰잘린 환초에 상륙함으로써 마샬 제도 점령을 위한 부싯돌

작전(Operation Flintlock)을 시작했습니다.

마샬 제도 점령은 타라와 환초의 교훈을 분석하여 철저히 준비한 결과, 비교적 적은 희생을 치르고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죠.

즉 약 30개에 달하는 섬들을 점령해야만 했던 부싯돌 작전 전체의 미군 전사자 수는 594명으로써 타라와 환초 전사자의 약

절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죠.

마샬 제도를 점령한 니미츠 제독은 차기 작전을 위하여 일본 연합함대의 기지인 캐롤라인 제도의 트럭 섬을 점령하고 마리애나

제도, 팔라우 제도의 순으로 점령하는 방안과 트럭 섬을 우회하여 1944년 6월 15일에 바로 마리애나 제도에 상륙하는 방안을

합동참모본부에 제시했습니다.

한편, 부싯돌 작전 기간 중인 1944년 2월 16~18일, 3일간에 걸쳐 부싯돌 작전 중의 에니웨톡 상륙을 엄호하기 위하여 미처

제독이 9척의 고속항공모함과 6척의 전함을 기간으로 하여 총 53척으로 이루어진 3개 항공모함 전단을 인솔하여 트럭 섬을

공습했습니다. (필리핀해전 2)

http://www.defence.co.kr/bbs/bbs.cgi?db=history5&mode=read&num=13362&page=31&ftype=6&fval=&backdepth=1 

 

 

 

 
1944.2.2 -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 투입 
1944년 오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이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神風]를 전장에 투입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비행기나 특수잠수정으로 연합군의 함정에 자폭했다.

가미카제는 30척 이상의 연합군 군함과 350척이 넘는 전함에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역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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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6.15 - 미국군, 사이판섬 상륙작전 개시

마리아나해전 = 제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6월 북마리아나 제도 해역에서 미국 함대와 일본 함대 사이에 벌어졌던 해전.
사이판섬 상륙작전 지원을 위한 미국 기동부대와 마리아나 수비를 위해 파견된 일본의 제1기동함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2월 이래 트럭(Truk) ·사이판 ·팔라우(Palau) 방면의 일본군 기지를 항공기로 급습하였으며, 6월

11일 마리아나 해역에 출동하여 공습을 반복한 끝에 15일에는 3개사단의 병력을 투입하여 사이판섬에 상륙을 개시하였다.

일본은 항공모함 9척, 전함 5척을 기간으로 한 제1기동대가 필리핀으로부터 출동하여 19일 스프루안스 대장 지휘하의

항공모함 15척을 기간으로 한 4군(群)의 미국 기동부대와 사이판섬 앞바다에서 2일간의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3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됨으로써 일본의 연합함대는 큰 타격을 받았고 사이판 ·티니안 ·괌 등의 섬들이 미군 점령하에 들어가

B29에 의한 일본 본토 폭격의 기지가 되었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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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6.19 - 마리아나 해전서 일본군 참패
마리아나해전 - 제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6월 북마리아나 제도 해역에서 미국 함대와 일본 함대 사이에 벌어졌던 해전.
사이판섬 상륙작전 지원을 위한 미국 기동부대와 마리아나 수비를 위해 파견된 일본의 제1기동함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2월 이래 트럭(Truk) ·사이판 ·팔라우(Palau) 방면의 일본군 기지를 항공기로 급습하였으며, 6월

11일 마리아나 해역에 출동하여 공습을 반복한 끝에 15일에는 3개사단의 병력을 투입하여 사이판섬에 상륙을 개시하였다.

일본은 항공모함 9척, 전함 5척을 기간으로 한 제1기동대가 필리핀으로부터 출동하여 19일 스프루안스 대장 지휘하의

항공모함 15척을 기간으로 한 4군(群)의 미국 기동부대와 사이판섬 앞바다에서 2일간의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3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됨으로써 일본의 연합함대는 큰 타격을 받았고 사이판 ·티니안 ·괌 등의 섬들이 미군 점령하에 들어가

B29에 의한 일본 본토 폭격의 기지가 되었다. /naver

 

 

 


1944.10.25 - 가미카제 특공대 첫 전투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의 미군이 레이테섬에 대해 총공세를 취함으로써 7일간의 레이테만(灣) 전투가 시작됐다.

레이테섬은 필리핀 중부에 위치한 섬으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군사요충지였다. 전투는 미군 상륙과 함께 레이테만의

하늘과 바다에서 치열하게 전개돼 섬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미군은 이 전투 승리로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었다.

미군이 상륙하기 하루 전인 19일 밤. 오니시 일본 사령관은 필리핀 클라크기지에서 참모들과의 밤샘 작전끝에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편성을 결정했다. 폭탄을 실은 전투기를 그대로 적함에 부딪치게 하는 옥쇄작전이었다.

‘가미카제’는 1281년 몽골(원나라)군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여ㆍ몽(麗ㆍ蒙) 연합함대를 침몰시킨 계절풍을 ‘신의 바람(神風)’

이라며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던 10월 25일 오전8시, 각각 250kg의 폭탄을 적재한 4기의 ‘제로 전투기’(영전ㆍ零戰)’가 미 항모를 향해

돌진했다. 가미카제가 세상에 모습을 처음 드러낸 순간이었다. ‘영전’은 미 항모 1척을 격침시키고 3척을 파괴하며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가미카제의 위력은 이듬해 4월부터 전개된 오키나와 전투에서 발휘됐다. 그 전투에서만 2200기나 되는

전투기가 가미카제로 나서 미군에 큰 타격을 입혔으나 성공확률이 6% 밖에 안돼 대부분의 전투기들은 목표물에 접근도

못한채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패망때까지 총 290차례 이상 출격해 2500명의 인간폭탄이 불섶으로 뛰어들었다. /조선

 

 

 


1945.1.9 - 미국군, 필리핀 루손섬 상륙
1945년 오늘,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의 루손섬에 상륙했다.

850척에 이르는 미군의 대함대가 이 섬의 중부 최북단인 랑가옌만을 통해 진군했다.

68,000여 명의 미군은 북진을 계속해 2월 17일, 마닐라를 탈환했다. /YTN

 

 

 

   

 
1945.2.5 - 미군, 2차대전 중 마닐라 진입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위하여 10월 레이테섬에 상륙하였다. 일본 해군은 전력을 다하여 레이테만의 미

함대를 격멸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전선에서도 1943∼44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八路軍) ·신사군(新四軍)에 의하여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에 ‘해방구(解放區)’가 만들어짐에 따라 일본군은 간신히

점(點:都市)과 선(線:鐵道)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1944년 11월 이래, 미군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은 격화되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하고

이오섬[硫黃島]에 상륙하였다. 4월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3개월이나 걸린 오키나와전에서는 전 도민이 동원되어

희생됨으로써(9만여 명), 닥쳐올 본토 결전의 비참한 양상을 암시하였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선언’에서 대일(對日)

처리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세계사 사전-태평양전쟁)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2&no=3448 

 

 

 

 

이오지마 전투

 

이오지마 전투는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에 해당했다. 전략 요충지인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이오지마를 먼저 점령해야만 했고 이에 이오지마는 세계 2차 대전이 벌어진 첫 일본 영토가 됐다. 연합군은 마리아나 제도

(사이판)에서 매일 같이 섬에 폭격을 퍼부었다. 초기 경고 단계에서 이오지마 섬의 군대는 이 사실을 일본 본토에 알렸고 연합

폭탄병이 도착했을 때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했고 미국은 금세 전투력을 잃었다.
1945년 2월 16일, 미국은 일본군 2만 2천명이 주둔해 있던 이오지마 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미 해병대는 2월 19일

이오지마에 상륙했다. 섬의 남쪽에 위치한 가장 높은 지점인 170미터의 수라바치산을 확보하기 위해 해변에 먼저 상륙한 미

해병대 삼만 명은 수라바치산을 포위했고 뒤이어 사만 명이 추가로 섬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섬은

초토화되고 2월 23일 해병대는 수라바치산을 점령해 성조기를 꽂았다. 그 후 31일 간 미군과 일본군은 섬에 갇혀 있었다.

해병대는 공군을 장악하러 북쪽으로 옮겼고 일본은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3월 26일 전세는 일본에게 매우

불리해져 일본군 2만 2천 명 중 1,083명만이 살아남았고 미군 2만명이 부상을 입고 6,821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국기

게양대였던 마이클 스트랭크, 할론 블록, 프랭클린 소우슬리도 사망했다.
이오지마 침략 작전의 성공으로 27명이 훈장을 받아 단일 전쟁으로는 가장 많은 훈장이 수여된 것으로 기록됐으며 이는 세계

2차 대전 때 수여한 훈장의 1/4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오지마
                                     격전이 벌어진 이오지마 섬과 수리바치 산

이오지마 전투

사실 이번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어째서 이오공감이 이오지마로 불리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였습니다. 일단 이오공감과

이오지마는 이오라는 음절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바로 이오지마로 불리지는 않지요.

이오공감 2.0은 1.0과 달리 회원들에 의한 자발적 추천/신고가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논쟁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오기도 하고 때문에 핵심 논제가 생기면 관련 글들이 모두 추천되면서 이오공감이 대대적인 난상 토론의 장으로

발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키나와 이전까지 미군이 단일전투로는 최대 피해를 입었던 이오지마 전투가 이오공감

2.0에 비유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실제 이오지마 전투를 가볍게 포스팅했습니다.

1. 배경
2차 세계대전  최대의 해전이자 인류 최대의 해전이기도 했던 1944년 6월 18일의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제국 연합함대는

동원 가능한 주력전력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항모 3척-타이호, 쇼카쿠, 히요-과 급유함 2척이 격침당하고 함재기

378기를 격추당했으며, 기타 항모 4척, 전함 1척, 중순양함 1척이 각각 크고 작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로서 3일 전인 6월 15일의 사이판 상륙은 미국의 의도대로 되어갔고, 결국 7월에 사이판과 티니안 등 마리아나 제도 일대가

모두 미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일본 대본영이 설정한 절대국방권의 태평양 중심축이 단번에 붕괴되었으며 마침내 개전 3년

8개월여만에 미국은 일본 본토로 가는 출구를 활짝 열었던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4일,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국 서부에서 이륙한 B-29의 규슈

폭격 등이 있었습니다만 중국에서 발진하는 것과 도쿄 코앞에서 발진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사이판, 티니안, 괌

마리아나 제도의 모든 섬들에 비행장이 들어서고 B-29 폭격기들이 도쿄를 강타한 거죠.

그런 미군 입장에서 이오지마는 매우 골치아픈 존재였습니다. 몇 되지도 않는 일본 전투기들이 이곳에서 이륙해 사이판

등을 기습폭격하는 일이 있었던 거지요. 더군다나 도쿄 폭격을 위해 발진한 B-29 폭격기들의 이동루트 안에 들어있다는

것도 문제점이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이오지마를 미군이 점령한다면 사이판 등의 기지에 대한 일본의 위협이 완전 사라질 뿐더러, 이오지마라는

전진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공습의 와중에 피탄당한 폭격기들의 임시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오지마는, 일본제국의 본토였습니다.

사실 이오지마는 19세기 말엽에야 일본 영토가 된 무인도였습니다만 이후 열대작물 재배나 어업 등으로 생활하는 이주민들이

유입되면서 대전기에는 약 1,000명 내외의 일본 민간인이 거주했습니다. 행정적으로도 일본제국 도쿄도지사의

관할구역이었죠. 일본제국의 본토. 이것이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습니다. 개전 이래 최초로 미 지상군 병력이

일본제국의 본토에 상륙하는 것이었으며 일본도 본격적으로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는 선언이었으니까요.

실제 일본은 개전 이래 전쟁의 참상을 본토에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의 두리틀 폭격 이후로는 폭격받은 적도

없었지요. 본토에 대한 폭격이 재개된 건 1944년 6월 15일의 일이었고 그것도 규슈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다지 심한 수준도

아니었습니다.(정확히 말하자면 폭격이 부정확한 거였지만;;) 그런데 이제 절대국방권이 무너지고, 사이판에서 B-29가 도쿄

등을 공습하는 위기상황에 미 지상군이 일본제국 본토에 대한 강습까지 한다면?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와 상징적 이유가 겹쳐지면서 미군은 이오지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일본도 이오지마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방어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2. 이오지마 방어 준비
구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 忠道)는 개전시 27군 참모로 홍콩 공격에 참전했고, 이후 제국 육군 2사단장을 역임했습니다.

1944년 5월 27일, 그는 수상 도조 히데키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제국육군 109사단장으로 임명됩니다. 109사단은 바로

이오지마와 보닌제도 방어전을 위한 사단이었죠. 떠나기 전 천황을 알현하여 하직인사를 올리고, 천황도 명예로운 일이라며

그를 격려했습니다.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 지 매우 잘 알았던 거죠.


구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은 미군을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계획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지독하게도 현실적이었던 그는

압도적인 물량과 화력을 지닌 미국을 상대로 뭔 발악을 해봤자 이길 수 없으며, 그렇다면 차라리 전 병력이 유의미하게 싸우다

죽자는 생각을 합니다.


유의미한 죽음이란 바로 최대한 많은 미군을 저승길 동반자로 삼는 것이었죠. 기존의 일본군은 패배가 분명해지면 그 유명한

만세 돌격, 즉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기관총과 집중사격을 받고 몰살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미군에게 있어 아주 좋은

사격표적 수준이었죠. 그런데 타다미치는 자살돌격을 배제하고 이오지마 전체에 대한 요새화에 착수했습니다.


우선 이오지마의 민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개가 개시되었습니다. 애시당초 인원이 1,000명 내외라 소개 자체는 어렵지

않았죠. 이후 타다미치 중장은 이오지마 각지에 그 악명높은 땅굴을 파고 참호를 건설했으며 곳곳에 엄폐호를 만들었습니다.

땅굴로 이어진 이 거대한 요새는 왠만한 포격, 폭격에도 끄덕 없었고 일본군은 이 땅굴을 따라 후방이나 적 배후로 쉽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3. 이오지마 포격

물량의 미군도 그야발로 무지막지했습니다. 우선 지상군은 해병 제3, 4, 5사단 3개로 구성된 해병대 제5수륙양용군단이었고

군단 총병력은 70,647명에 달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미군은 수비를 맡고 있는 일본군 병력의 3배에 달했습니다.-_-;;

이들을 위해 수송선 43척, LST 63척, LSM 31척이 투입되었습니다.


지상군만 이 정도에다가 해군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전함 8척(-_-;;)과 순양함 19척, 구축함 44척이 선단 호위 및

함포지원을 위해 동행했고, 항공지원을 위한 호위항공모함도 12척에 달했습니다.


1945년 2월 16일부터, 전함 6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6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이오지마에 대한 대대적인

함포사격에 나섰습니다. 17일에 수비대 해안포대의 포격을 당해 순양함 펜서콜라가 격침당했지만 포대도 곧 제압당했죠.


4. 이오지마 상륙

2월 19일 새벽 2시. 전함의 함포사격을 신호탄으로 다시 한 번 맹렬한 함포사격이 퍼부어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포격이 섬 곳곳을 강타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진지는 잘 구축되어지고 또 지하에 있던 탓에 무사했고 포격에

노출되어 날아간 진지는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

 

 

 

8시 59분을 기해 해병 제5군단이 섬의 남쪽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구리바야시의 지침대로

상륙을 허용하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상륙해서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끝장내겠다는 전술이었고, 이

속임수를 눈치 못 챈 미군은 해군이 자기들 전공까지 다 해치웠다며 불만을 가지기도 했죠.


그리고 그들이 어느정도 전진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의 집중 사격이 쏟아졌습니다. 잘 엄폐된 기관총 진지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일본군 포병들도 동시에 포격을 개시했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해병 5군단의 선두부대는 그야말로

경악할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위기에서 미군을 구해준 건 공군이나 해군이 아니라 바로 전차였습니다. 유럽 전선에선 티이거 만나면 바로 깨갱거리며

"공군!! 공군 어디있어!!" 하는 M4 셔먼 전차였습니다만 태평양 전선에선 입장이 전혀 달라져서 말도 안 되는 캐사기 킹왕짱

먼치킨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돌진해오는 전차들을 대전차지뢰와 대전차포 등으로 3~4대를 격파했습니다만 그게 전부였고,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포탄을 쏴제껴도 끄덕 없는 셔먼 전차에 놀라 패닉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유럽 전선에선 아마 독일군 대전차포 맞고 바로 뻗었을텐데;;)


결국 대전차포 중대장이 몸에 폭탄을 두르고 전차에 달려들어 자폭-_-;;;까지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먼 전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로를 개척했고, 해병대는 가장 큰 위기를 넘기며 눈앞에 있던 진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루동안 5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 버렸지요;;


5. 수리바치 산 공략

상륙한 미 해병대의 당면 목표는 섬에서 가장 높은 고지이자 최남단에 위치한 수리바치 산을 공략하는 거였습니다. 수리바치

산의 일본군 수비대는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었음에도 산 곳곳의 바위들을 교묘히 이용하며 결사적인 방어전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도 한 덕에 해병대의 공격도 매우 치열했죠.


수리바치 산은 특히 바다에 접해 있어 해군 함포사격의 직격이 가능했다는 점은 일본군에게 불행이었습니다. 함포사격은

일본군의 수리바치 산 방어에 어려움을 주었고, 육로로는 미 해병대가 화염방사기로 진지를 태우고, TNT로 바위를 통채로

무너트리며 진지 내의 일본군을 압사시키는 단순무식한 효과적인 방식으로 차근차근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방어가

어려워지자 일본군 생존자들은 전원 미군의 포위망을 은밀히 뚫고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철수했습니다.


2월 23일, 이 사실을 확인한 미군은 즉시 수리바치 산 정상을 확보했습니다. (10시 20분)

 


6. 이오지마 북부
그러나 정작 전투는 지금부터였습니다. 이오지마 남단은 미군이 무사히 확보했습니다만 일본군의 주 방어선은 섬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고, 이오지마를 완전히 보하기 위해서 미군은 섬 북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구리바야시 중장의 지휘하에 철저하게 준비해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미 미군은 수리바치 산이라는 교과서를 배워 왔습니다. 일본군은 매우 튼튼한 동굴진지로 도배를 하며 미군에

만만찮은 피해를 강요했습니다만 구리바야시 중장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군은 진지를 골치아프게 하나하나

점령하는 대신, 발견하는 진지 입구마다 TNT 폭약을 설치, 폭파시켜 입구를 무너트리고 진지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역시 화염방사기. 보이는 입구마다 화염방사기를 맨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최대출력으로 화염을 내뿜었죠.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일본군은 통구이가 됩니다.(...) 그걸로 부족해 수류탄을 집어넣고 다시 TNT를 터트리고 하니 일본군

방어선은  빠르게 무너졌죠.


그러나 여전히 미 해병대 입장에서는 매우 지지부진한 진격이었습니다. 섬 북부 전역을 관측할 수 있는 382 고지 전투에서

미군은 계속 패퇴하다가 마지막에야 간신히 함락할 수 있었죠. 그래도 미군은 3월 9일, 일부 병력이 북부 해안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본군은 섬의 최북단 일부로 패퇴해 그 은신처가 매우 좁혀졌습니다. 미군은 늘 하던대로 화염방사기,

수류탄, TNT를 있는 대로 쏟아부으며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죠.


결국 일본군은 3월 26일 잔존병력 전원이 매우 제국군스럽게 반자이 어택을 감행했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이 이때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최후의 반자이 어택 참가자 전원이 죽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반자이 어택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7. 이오지마 전투 이후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섬에서 무려 6,821명의 전사자와 19,189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최일선에 섰던 소부대들 중에는

대대적인 재편성이 필요한 부대들이 속출했지요. 일본은 제국육군 109사단이 말 그대로 전멸했습니다.


미군으로선 이전까지 가장 끔직했던 1943년의 타라와 전투를 가볍게 능가하는 대규모 인명피해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오키나와에서 똑같은 일을 당하고 지독한 일본놈들이라고 혀를 내둘렀지요. 실제 이오지마 전투 당시

구리바야시 중장의 방어계획은 오키나와나 일본 본토에서도 고스란히 채택됩니다.


그러나 이오지마 전투는 충분히 그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B-29의 발진기지인 사이판은 더 이상 공격받지 않았습니다.

커티르 르메이에 의한 일본 본토 대공습이 본격화되면서 그 가치는 더더욱 커졌는데 공습 도중 피탄당한 기체들이 이오지마의

비상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면서 상당한 수의 B-29 폭격기들과 승무원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절대국방권 붕괴에 뒤이어 제국 본토가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에 전율했습니다. 이제 일본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본토대결전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출처: 블로그 Ladenijoa>

 

 

                    퓰리처상을 수상한 조 로젠탈의 사진

사진작가 로젠탈 [Rosenthal, Joe, 1911.10.9~2006.8.20]
퓰리처상을 수상한 조 로젠탈의 사진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가 찍은 사진은 우표, 포스터, 수많은 잡지와 신문을

장식했고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위치한 해병대 전쟁기념관 추모비로도 제작됐다.
로젠탈은 징병 시 신체검사에서 나쁜 시력 탓에 면제를 받았다가 재검을 받아 징병 유예로 분류됐다. 당시 타임매거진은

걸작을 남긴 로젠탈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의 여지는 또 있다. 사진이 신문에 실려

미국 전역으로 퍼진 뒤, 한 리포터가 로젠탈에게 사진은 연출된 것이냐고 물었고 로젠탈은 해군들이 성조기를 꽂으며 포즈를

취했냐는 뜻으로 알아듣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진에 찍힌 성조기가 그날 두 번째로 치러진 게양 의식이었다는 것도 혼란을

가중시켰고 그 후 50년 동안 로젠탈은 사진을 조작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인터뷰와 취재 문의가 쇄도하자 AP 통신은 아예

‘로젠탈 데스크’를 따로 만들었다. 로젠탈은 대통령을 만났고, AP 통신으로부터 1년 치에 해당하는 월급을 보너스로 받았으며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사진 속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2006년 8월 94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뉴욕 타임즈 부고란에 리처드 골드스타인은 그의 걸작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 사진은 일본 영토의 일부를 미국이 처음 점령했을 때의 승리감을 포착했다. 이를 통해 미국 내에선 커다란 공감대가

형성됐고 그의 사진은 미국 문화에 다양성을 더했다.’
로젠탈은 어느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사진이 나오기까지 제가 기울인 노력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군들이 섬에서, 바다에서, 공중에서 목숨을

바쳤기에 깃발을 산에 꽂을 수 있었던 겁니다. 누가 사진을 찍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셔터는 제가 눌렀지만 이오지마를

점령한 건 미군이었습니다.’
(MSN 영화 movie.msn.co.kr)

 

 

 

    

-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1945.2.23 - 미 해병대, 이오섬[硫黃島] 스리바치산[摺鉢山] 점령

미 해병대가 1945년 2월 23일 일본 도쿄 남쪽 1,000km에 위치한 유황도의 주요거점인 스리바치산을 함락했다. 2월 19일 이

섬에 상륙한 이래 4일 만이었다. 해럴드 샤이어 소위가 인솔한 미군 40명은 산 꼭대기에 대대기를 꽂고 환호했다. 이 날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날로, 그야말로 피로물든 하루였다.

미군은 이 산을 점령하기 위해 이 날 하루동안만 무려 6천8백21명의 희생자를 내야했다. 당시 신문에 따르면 해안에 겹겹이

쌓여 있는 시체는 길이가 약 6km에 달했다고 한다. 고립무원에 빠진 일본군 수비대는 주요거점이 함락되었음에도 섬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응전했으나 힘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수비대장 율림충도 중장은 참모 2명과 함께 3월 17일 일본군 대본영에

마지막 무전을 친 후 자결했다.

유황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2만3천명은 포로가 된 210여명 이외에 전원이 전사했다. 미군도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쳐

약 2만 6천명이 전사했다. /조선

 

 

 

    

  

1945.3.9 - 미군기, 도쿄 대공습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패망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 1945년 3월 9일, 동경의 상공에 수백 대의 미 공군 B29기가 나타나더니

일제히 폭탄을 퍼부었다.
그동안에는 주로 군사시설 또는 비행기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에만 집중 폭격했던 것인데 이날은 그렇지 않았다. 도심, 주택가

가릴 것 없이, 그것도 야간이 아닌 대낮의 대 공습이었다. 그것도 이날부터서는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매일같이 나타나서

“이래도냐! 이래도냐!”식으로 졸라매는 식의 대 공습이다. 이 같은 폭격을 일본인들은 ‘무차별 융단폭격’이라고 했다.
이같이 매일 나타나는 B29기는 5월 25일까지 동경의 약 40%를 태워버렸다. 무려 102회에 걸친 대형 폭탄을 퍼부었으니

초토로 변한 것이다. 더구나 B29기 외에도 함재기까지도 나타나서 재공사격을 함으로 시민들은 공포의 나날이었다. 230만호의

가옥이 소실되고 사상자는 66만 6천명이었다.
이러한 B29기의 폭격은 비단 동경만이 아니었다. 요코하마, 오사카, 나고야 등등 전국 98개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도시

학생들은 ‘소개’라 하여 시골의 친척을 찾았다.
그러자 이해 8월 6일에는 히로시마(廣島), 9일에는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다. 일본은 더 버티지 못하고 8월

15일엔 연합국의 ‘포스담 선언’을 수락, 무조건 항복했다. /Google

 

 

 

 

도쿄 대공습(東京大空襲, Bombing of Tokyo in World War II)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 10일 살상을

일삼던 일본을 무력화시키고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하여 미군이 추축국인 일본의 수도인 도쿄와 그 주변 일대에 대량의

소이탄을 투하한 사건을 말한다.

미군은 10일 새벽 약 344기의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를 이용해 대당 7톤, 총 2천 4백여 톤(약 백만 발)에 달하는 대량의

폭탄을 도쿄 상공에서 투하하였다. 3시간이 채 안되는 이 공습으로 도쿄와 그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고 이 날 하루만 10만

여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미군은 일본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 도쿄 대공습은 어느때보다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철저한 준비 속에

이루어져 폭격의 성과는 더욱 컸다.

폭격에 사용했던 소이탄은 글리세린과 오일등을 혼합하여 만들었고 엄청난 열을 발생시켰다. 열로 인해 대부분의 피해는

화염으로 인해 발생했을 정도이다. 당시 일본의 가옥은 목재 가옥이었으므로 대다수의 가옥이 전소되었으며, 근처 화재의

열기로 인해 화기에 직접 닿지 않아도 몸에 불이 붙을 정도였다. 또한 소이탄에 들어있는 오일은 물에서도 타기때문에, 강과

바다에서도 화염이 가시지 않았다.

도쿄 대공습에 의한 사상자는 약 15만명으로 추정되며, 이 사상자 중에는 다수의 재일동포가 포함되어 있다. /위키백과  

 

 

   

  

    

1945.3.10 - 미군 B-29기 도쿄 대공습

도쿄[東京] 대공습은 1945년 3월10일 새벽 0시를 지나자마자 시작됐다. 사이판에서 뜬 미군 B29 폭격기 약 300대가 약 두

시간반에 걸쳐 도쿄를 초토화했다. 미군기는 특히 도쿄 동부 스미다가와강 주변의 아사쿠사와 후카가와 등 목조주택

밀집지역에 소이탄을 무차별로 쏟아부어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투하된 소이탄은 약 1700t으로, 때마침 북서풍이 불어

불길이 드세게 번져나갔다. 불에 타 숨지거나 불을 피해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하는 등 이날 사망한 사람이 8만3천여명이며,

행방불명자와 부상자 등 100만여명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미군은 일본의 목조주택을 효과적으로 불태우기 위해 글리세린과 가솔린을 혼합해 만든 고성능 소이탄을 개발해

사용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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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 Atomic Bomb


1945.8.6
-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미국에서 개발한 원자폭탄이 일본 혼슈[本州] 남단의 히로시마[廣島]에 떨어졌다.

1943년 9월 8일 무솔리니 정권 몰락 후 이탈리아가 공식적으로 항복한 데 이어 1945년 5월 독일까지 항복함으로써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일본은 필리핀 전투에서 연합군과 교전하는 등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에 미국군은 일본 본토로 진격하기 위해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의 작은 화산섬 이오지마

[硫黃島]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미국군은 섬의 탈환에 성공했으며, 이후 일본 본토에 대한 공중폭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마침내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폭발지점 일대가 초토화되면서 7만 명 이상이 죽고 7만 명 이상이

다쳤다. 일본 정부는 그때까지도 원자폭탄의 위력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8월 9일 다시 나가사키[長崎]에 2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져 3만 5,000~4만 명이 죽고 비슷한 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1주일 뒤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막을 내렸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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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 Atomic Bomb
 

1945.8.9 - 미국,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원폭 투하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독일 사이에는 총성 없는 또하나의 전쟁이 있었다. 핵무기 개발 경쟁이다. 처음엔 독일이 앞섰다.

1938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중성자를 이용해 우라늄 235를 연쇄 핵분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단순히 물질 구조를 연구하던 핵물리학이 거대한 핵에너지 개발 이론과 기술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서 독일·영국·미국 등 강대국들에서는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전이 시작됐다.

미국 물리학은 독일보다 뒤졌다. 개발에서 앞선 것은 경제력 덕분이었다. 천연우라늄 속에 극히 조금씩 들어있는 우라늄 235를

뽑아 농축하는 과정에서는 천문학적 돈과 시설이 필요했다. 인종 탄압을 피해 유럽에서 건너온 과학자들의 합류도 핵무기

개발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대표적인 경우다.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 핵무기 개발의 총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시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불린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종전을 앞두고 1945년에 열매를 맺는다. 7월에 미국 로스앨러모스 인근

사막에서 최초의 핵실험이 있었다. 이어 8월6일 아침 8시15분 히로시마[廣島] 상공에 우라늄 235로 제조한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됐다. 리틀보이는 히로시마 상공 580미터 지점에서 폭발했고, 일순간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14만명이

숨졌다. 8월9일 나카사키[長崎]에 또 한 발의 원자탄이 떨어졌다. 플루토늄 239를 이용해 만든 원자폭탄 ‘팻맨’이었다.

7만여명이 숨졌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9일로 꼭 62년이 됐다. 냉전이 끝나 핵무기 경쟁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상에는 2만7천여기의 핵탄두가 남아있다. 정남기 논설위원  /한겨레[유레카] 20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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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14 - 트루먼 미 대통령, 일본의 무조건 항복 수락

1945년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선언’에서 대일() 처리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이르러 일본 군부도 항복을 결의하고 10일 밤 포츠담선언 수락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주전파의 ‘국체수호()’

고집으로 진통을 겪다가 일본왕의 결단으로 14일 가까스로 수락을 통고하고, 15일 일본왕은 이것을 국민에게 방송하였다.

30일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면서 태평양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naver 

 

  

<출처: 블로그 필라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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