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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작성자靑野|작성시간09.06.30|조회수1,893 목록 댓글 0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7년 3월 20일)

영국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자연철학자이자 연금술사이다.

 

소개

뉴턴은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이다.

링컨셔의 울스소프 농가에서 출생하여 그랜섬의 킹스 스쿨에서 공부할 때는 학과에 흥미가 없어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였다.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 후부터 그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유능한 수학자 발로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재학 시절에 이미 이항 정리를 발견하여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 해 런던에 발생한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문을 닫아 그도 고향에 돌아갔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즉 1665-1666년에 싹튼 것으로,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1667년 학교가 문을 열자,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 스승 발로의 뒤를 이어 모교의 수학과 교수가 되어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수학의 발견에 대해서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1675년 박막의 간섭 현상인 뉴턴 환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의 '빛의 입자설'과 네덜란드의 호이겐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의 엇갈린 주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만유 인력의 구상은 오래전부터 싹텄으나, 케플러의 혹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호이겐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물체 운동 및 만유 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다.

런던으로 이주하여 왕립 조폐국에 들어가 장관에 취임하고, 1703년에는 왕립 학회 회장이 되었는데, 모두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근대 과학 성립의 최대 공로자이다.

 

생애

아이작 뉴턴은 청교도혁명이 일어난 해인 1642년 1월 4일 영국 링컨셔(Lincolnshire)의 울즈소프 태생이다. 그의 가족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외삼촌, 형제들이 있었는데, 외삼촌은 교구에서 사목한 성공회 신부였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규모의 지주였으며 뉴턴이 태어나기전에 죽었는데, 태어날때 몸이 약해서 산파할머니들이 약을 구해서 올

정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뉴턴이 3살때 대지주인 바나바 스미스와 결혼했는데, 뉴턴은 훗날 뉘우쳤지만, 어머니와 새아버지를

매우 미워했다.

학교생활도 원만하지 못해서 할머니가 학교에 데려다주실 정도였지만, 대신 명석한 머리와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조카가 학문에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외삼촌이 뉴턴의 어머니를 설득한 덕분에, 1661년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후에 대학교 학장이자, 대학교내 성공회교회 주교가 되는 버로우 교수의 지도로 공부했다.

뉴턴은 대학생시절부터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년-1626년)과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년~1650년) 등 초창기 과학자의 저작에 주석을 달았으며, 기하학과 원자론, 화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접했다.

또한 연금술의 근본 사상이었던 헤르메티시즘을 접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뉴턴이 평생동안 연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665년, 영국에서는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어, 이 기간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시기에

뉴턴은 2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발견들을 해냈다. 그래서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기간에

대해 '발견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1656년~1742년)와 행성운동에 대해서도

토론할 정도로 그는 천문학에도 식견이 있었다.

뉴턴은 관심사가 다양하여 국회의원(1689년), 왕립 조폐국의 이사 근무(1696년) 등의 사회활동, 연금술사로서의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앙숙 관계였던 로버트 후크가 죽자, 왕립 협회 회장을 역임(1703년~1727년)하였다.

 

뉴턴에 대한 이야기

  •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뉴턴은 어느 제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나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네.”라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 뉴턴의 발명품으로 뉴턴식 망원경이 있다.
  • 뉴턴은 취미연금술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것이 노트 세 권가량 되었다고 한다.
  •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추천으로 국회위원을 역임했는데, 성격이 조용해서 국회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 그가 1년간의 국회의원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한 말이 수위에게 "문좀 닫아주시오"였다고 한다.
  • 뉴턴은 《광학》4권에서 물리학 전체를 포괄하고 자신이 선택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통일이론을 소개하려고
  • 했으나, 그가 책상에 촛불을 켜둔 채 외출했다가 그가 기르던 개인 다이아몬드가 초를 물어서 던져버리는 바람에 아직
  • 공개하지 않은 그의 연구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1]
  • 뉴턴은 손으로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공작에 재능이 있었는데, 케임브리지 대학교 다닐때에는 들고다닐 수 있는
  • 초롱불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새벽마다 의무적으로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에 참석하러 가던 학생들이 편하게
  • 대학교내 성공회 교회에 갈 수 있었다.

 

뉴턴의 물리학

뉴턴이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의 출판비용지원으로 1687년 7월 5일에 출판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는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할 뿐만이

아니라 뉴턴의 운동법칙을 통해 고전 역학을 완성한 근대 과학의 명저로 꼽힌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의 창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위키백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이작 뉴턴   Newton, Issac

 

 1. 그의 위대한 일생 [1642.12.25 ~ 1727.3.20]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즈소프 출생.
수학에서의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의 뉴턴역학의 체계 확립,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의 출생전 사망, 어머니는 3세 때 재혼하느 등 불운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1661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 수학자 I. 배로의 지도를 받아 케플러의 《굴절광학(屈折光學)》,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解析幾何學)》,
월리스의 《무한의 산수》 등을 탐독하였으며, 1664년 학사학위를 얻었다.

 

 1664∼1666년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자 대학이 일시 폐쇄되어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사색과 실험으로 보냈다. 그의 사과의 일화를 포함한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1667년 재개된 대학에 돌아와 이 대학의 펠로(특별연구원)가 되고 이듬해에는 메이저펠로(전임특별연구원)가 됨과 동시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669년 I.배로의 뒤를 이어 루카스 교수직에 부임하였다.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反射式)이
수차(收差:色收差도 포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16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그 해에 《빛과 색의 신이론(新理論)》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單色)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1675년 박막(薄膜)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했다.

 

  수학에서는 1665년 이항정리(二項定理)의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無限級數)로 진전하여 1666년 유분법(流分法), 즉 플럭션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적(求積) 및 접선(接線) 문제에

응용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적분법(微積分法)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성과를 1669년에 논문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o terminorum infinitas>
으로 발표하였다.

 유분법의 전개에 대해서는 <The method of fluxions and infinite series>에 수록되어 있다.

 뉴턴의 최대 업적은 물론 역학(力學)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특히 중력(重力) 문제에 대해서 광학과 함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行星)의 운동(이것을 지배하는 케플러법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졌다고 한다.
1670년대 말로 접어들며 당시 사람들도 행성 운동중심 관련 힘이 거리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낸 유율법(流率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1687년 이 성과를 포함한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가 출판되었으며, 이로써 이론물리학의 기초가 쌓이고 뉴턴역학의 체계가 세워졌다.
3부로 된 이 라틴어 저서는 간단한 유율법의 설명에서 시작하여
역학의 원리, 인력의 법칙과 그 응용, 유체(流體)의 문제,
태양행성의 운동에서 조석(潮汐)의 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또 방정식론 등의 대수학(代數學) 분야의 여러 업적은
《Arithmetica universalis sive de compositione et resolutione arithmetica liber》
(1707)로 간행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691년 조폐국(造幣局)의 감사(監事)가 되었으며, 1696년 런던으로 이주,
16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改鑄)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神學)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였다.
이 성서 연구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징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고 그 곳에 묻혔다.

 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며,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
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2. '프린키피아'의 저술, 왕립학회장

 

   뉴턴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프린키피아」의 저술이다.
1687년 완성된 프린키피아는 기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서술하였고 라틴어로 쓰여져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그러나 이 책의 출판과 동시에 뉴턴의 명성은 전 유럽에 퍼져 나가게 되었고
여러 학자들이 그를 주목하였다.

  이전에 핼리(Edmund Halley, 1656~1742)가 뉴턴을 찾아와
"만일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을 받고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궤적을 그립니까?"
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즉시 "타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는데, 이미 그가 계산을 해보았기 때문에 금방 답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계산한 종이를 찾을 수 없었지만,
핼리와의 대화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프린키피아」이다.
이 책은 3권으로 나누어 쓰였는데,
1권에서는 진공 속에서 물체 입자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설명하고,
2권은 저항이 있는 공간에서의 물체 입자의 운동을 다루었으며,
3권은 천체 역학을 다루고 있다.
그는 수학적인 방법을 통해 케플러의 법칙들을 유도했고,
이것으로 천문학 혁명을 완성하고, 고전 역학을 정리하였다.

 

  뉴턴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은 소극적인 뉴턴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다행히 그는 대학 대표로 영국 하선의원으로 피선되어 교단을 떠났고, 하원으로 인해 런던에 머무를 때,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사귀면서 많은 시간을 토론하기도 했다.

  1696년 그의 제자가 재무장관이 되자
그는 공직의 자리를 부탁하여, 조폐국 재무국장이 되었다.
당분간 과학과 수학과의 인연을 끊은 셈이었지만,
1703년 왕립학회의 장이 되어 그는 다시 학문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그의 논적이었던 훅이 죽었고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이듬 해인 1704년 「광학」을 출판했다.
이후 당시의 최고 과학자가 평민인 것을 안 앤 여왕은
1705년 그에게 기사의 칭호를 주었다.

 

  1711년 뉴튼은 미적분에 관한 저서인 해석을 출간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미적분을 발견한 라이프니치와
누가 먼저 미적분을 발견했는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다.
뉴턴은 20대에 미적분에 대한 힌트를 얻었으나
그의 체계 전체가 발표된 것은 1736년이었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1684년 자신이 발견한 미분의 방법을 공표했다.
오늘날에는 두 사람이 미적분을 독립적으로 발견했다고 평가하지만,
그들의 논쟁은 과학사상 가장 격렬하고 장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3. 뉴턴은 갔지만, 영원히 남은 것들

 

 1727년 뉴턴은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근대 과학을 완성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그는 겸손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나 자신의 눈에 비친 나는 밝혀지지 않은 진리의 큰 바다가 눈앞에 가로

놓여있는 그 물가에서 장난을 치며 조약돌이나 조개를 줍고 좋아하는 어린아이처럼 생각된다."
뉴턴은 영국의 수많은 위인들이 묻힌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

 

  뉴턴의 수많은 업적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시작한 천문학의 혁명,
릴레이가 시작한 역학혁명을 해석하고 수학적으로 풀어낸 것들이었다. 이 두 가지의 혁명은 뉴턴의 종합으로 비로소

완결되었다.

 

<출처: 들국화>

 

 

 

 뉴턴의 명언

 

- 굳은 인내와 노력을 하지 않는 천재는 이 세상에서 있었던 적이 없다.  

 

- 나는 가설(假說)을 만들지 않는다.


- 나는 진리의 대해(大海)를 앞에 둔 바닷가에서 한 개의 조개를 주운 것에 불과하다.


-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단지 해변에서 놀고 있는 소년과 같다.

   때로 자갈이나 더 예쁜 조개껍질을 발견하고는 즐거워하는 소년이다.

   그러나 반면에 거대한 진실의 바다는, 내 앞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 펼쳐져 있다.

 

- 발명의 길은 부단한 노력이다.


- 분발하라.

   분발하면, 약한 것이 강해지고 적은 것이 풍부해질 수 있다.

   나의 소년 시절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하고 빈약하였다.

   나는 가장 건강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를 이겨보리라고 결심하고 분발한 결과 몸이 건강해졌을 뿐 아니라 학교 성적도

   상당히 올라갔다.


-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하라.

   그러면 내일에는 한 걸음 더 진보한다.


- 힘을 내면 약한 것이 강해지고 빈약한 것이 풍부해질 수 있다.

 

<출처: 현동이지식창고>

 

 

 

 

우주관의 변천- 프톨레마이오스에서 뉴턴까지

 

1. 개요

백여 년에 걸친 여러 명의 유명한 과학자-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티코 브라헤, 요한 케플러, 아이작 뉴턴-들의 천체의 운동에 대한 관측으로부터 만유인력의 법칙이 발견된다.

 

2. 프톨레마이오스

천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체계 모델로서, 9세기 경에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알마게스트》가 발견된 이후 12세기가 되서야 서양으로 도입되게 된 우주 모델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의 역행 현상을 주전원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수성과 금성의 주전원 중심이 지구와 태양을 잇는 선상에 있게 함으로써 수성과 금성의 최대이각을 설명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천동설의 완결판으로서, 중세에 아라비아를 거쳐서 유럽에 전파되어 그리스도교의 교리로서 공인받았다. 이 체계는 15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타나기까지 천문학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다.

 

3. 코페르니쿠스

150년경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제안되었던 천동설은 중세까지 거의 1400여 년간 태양계의 운동을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으로 존속되었다.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 중에 금성의 위상변화-금성이 보름달이나 보름달에 가까운 모양으로 보이는 현상-가 있는 데 천동설을 지지했던 학자들은 고정관념의 틀에서 계속 천동설을 옹호하다보니 학설이 계속 복잡해지는 문제점이 생겼다.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출판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태양중심설인 지동설을 제창하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창하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기존의 천동설 모델로는 점차 천체의 위치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또한 종교에서도 부활절의 시기가 점차 어긋나게 된다. 그래서당시 교황청은 달력의 수치 오차 개선을 위하여 여러 천문학자를 고용하여 잘 맞는 새 달력 제작에 나서게 되는데 코페르니쿠스도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이 오차 수정을 위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지구가 돈다고 가정하고 계산하면 달력 오차가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기를 꺼려했는데, 자신이 성직자라는 입장과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이론이 이단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임종 직전까지 책의 출판을 보류했었고, 책의 견본쇄는 그가 임종을 하던 1543년 5월 24일에 그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친구였던 오지안더는 교리에 위배되어 박해를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책에 '이 지동설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서문을 붙였다. 즉, 코페르니쿠스는, 어떤 증명을 위해서나, 자신이 직접 관측한 사실을 토대로 지동설을 제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천동설에서 나타나는 천체운동의 복잡성을 간결화시키기 위하여 지동설을 제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으로부터 가까운 순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의 행성들이 배열되어 있으며, 각 행성들은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태양주위를 원운동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이 비록 그 때까지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를 뒷받침할 관측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런 관측 자료는 덴마크의 티코 브라헤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그의 제자인 요한 케플러는 이 자료를 이용하여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것에 관하여 세 가지 법칙을 만들었다.

 

4. 티코 브라헤

1572년 카시오페이아자리에 나타난 새로운 별(초신성)에 대하여 자세한 광도관측을 하여 일약 유명해진 티코 브라헤(덴마크, 1546-1601) 는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혜성이 지구 대기의 현상이 아니라 천체임을 입증하고, 화성의 운동을 관측하여 화성이 충의 위치에 놓일 때는 태양보다 지구에 더 가깝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아주 좋은 연구 환경에서 1567년부터 1597년까지 별들의 움직임을 그 당시로서는 아주 정확하게 측정하였다.

티코 브라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대하여 ‘정말 그럴까’라는 호기심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을 가졌다. 그는 지구가 특정 궤도를 갖고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구공전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항성의 연주시차를 제시하고 실제로 측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로서는 장비가 부족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부정하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다만 지구 주위를 달과 태양이 공전하고, 행성은 다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신우주설(新宇宙說)을 제창하였으나 이를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가 행한 관측의 정밀도는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가장 훌륭한 것이었으며, 그가 남긴 방대한 관측 자료는 제자이자 조수인 케플러에게 넘겨져, 케플러가 후에 뉴턴에게 많은 영향을 준 행성운동의 세 법칙을 확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5. 케플러

케플러가 튀빙겐 대학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할 때 스승인 미카엘 메스틀린에게서 처음으로 지동설을 배웠고, 그때부터 지동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체계를 증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우주의 조화를 회복시켰다는 이유만으로도 케플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케플러는 속도가 줄어드는 순서에 따라 행성들을 배열했는데, 약 1백 일마다 궤도를 한 바퀴씩 도는 수성이 맨 앞을 차지하고, 주기가 약 30년인 토성이 배열의 마지막을 차지했다. 케플러 역시 전적인 태양 숭배자였다. 그는 추한 지구보다는 오히려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자리하는 것이 훨씬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태양이 중심이 되는 우주와 삼위일체 사이에는 어떤 신비스런 조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하느님 자리에는 태양, 아들 예수 자리에는 천구, 그리고 성신(聖神)의 자리에는 일중의 수증기 같은 것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주에는 왜 행성이 여섯 개만 존재하는가? 왜 그 행성들은 이 궤도를 따르고, 다른 것들은 따르지 않는가? 케플러는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이 계획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조자는 수학자가 우주를 만들게 될 것이라 구상했고, 그래서 모든 궤도는 반드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지 못하고 아우트리슈에 있는 그라츠 대학에서 수학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이 후 케플러는 당시 천체 관측의 최고 권위자인 티코 브라헤에게 자신과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했고, 티코 브라헤는 이를 받아들였다. 코페르니쿠스와 의견이 다르던 티코 브라헤는 고정된 지구 주위를 운동하는 태양 주위를 행성들이 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티코 브라헤는 화성의 운동을 세심하게 연구하여, 그 당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인정받던 자신의 관측 자료를 이용해서 그 체계의 논리적 타당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학 재능이 뛰어난 케플러가 필요했던 것이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가 죽고 난 후 티코 브라헤가 30여 년에 걸쳐 얻은 관측 자료를 모두 넘겨받아,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8년이 지난 1609년, 그는 《신(新)천문학》이란 책에서 케플러 법칙이라고 알려진 세 개의 법칙 중 두 개를 발표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원을 그리며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케플러는 자료의 해석을 통하여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다는 점으로부터 지구는 태양 주위를 타원을 그리면서 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 또 태양과의 거리가 변하면서 그 거리가 멀수록 지구의 속력이 점점 느려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제2법칙인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 즉, 태양까지 거리가 멀어질수록 지구의 공전속도는 느려지고, 반대로 태양까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빨라진다. 이로써 불규칙한 계절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즉, 지구는 겨울에 태양에 가장 가까이 있고 여름에 가장 멀리 있기 때문에 지구의 공전 속도는 여름보다 겨울에 더 빠르다. 그 결과 겨울이 여름보다 짧은 것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세 가지 계율에 갇혀 있던 빗장이 열렸고,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든 체계도 밝혀졌다.

그리고 행성의 속도와 궤도의 크기 사이에는 수학적인 관련성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었다. 즉, 행성의 공전 주기와 궤도 장반경의 관계를 조사하여 공전 주기의 제곱이 궤도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도 알아냈다(케플러의 제 3법칙인 조화의 법칙). 이 세 가지 결과를 오늘날 케플러의 법칙이라고 한다.

1618년 케플러는《우주의 조화》를 출판하고 기쁨에 넘쳐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한 거룩한 곳을 만들기 위해, 황금 꽃병처럼 찬란한 이집트인들의 학문을 훔쳤다. (중략) 이것이 내가 주사위를 던져, 나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혹은 후세 사람들을 위해 책을 쓴 이유이다. 이 책은 나와는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 책은 1백 년 후의 독자를 기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은 자신을 증거하는 자를 위해 6천 년을 족히 기다리지 않았는가."

 

6. 갈릴레이

1609년, 이탈리아 파도바의 기사이자 수학자인 갈릴레이는 자신이 공들여 개량한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했다. 그 결과 그는 목성이 네 개의 위성을 거느린다는 중요한 사실과, 달 표면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1610년, 금성이 보름달에 가까운 위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갈릴레이는 1632년 출간된 그의 저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대우주체계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행성이 초승달 형태로만 나타나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금성이 보름달에 가까운 위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케플러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이는 그는 행성들의 공전궤도가 타원이라는 케플러의 견해보다는 원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믿었고, 특히 목성은 자신의 둘레를 원운동하는 4개의 위성을 거느리고 태양 주위를 원운동한다고 보았다.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

1616년 5월 5일의 교령이 나온 며칠 후 로마 교황은 그 교령 안에 전혀 이름이 언급된 바 없는 갈릴레이를 접견했다.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하고 보완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은 로마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 교황은 그 일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갈릴레이가 그것을 절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바라지 않던 바를 갈릴레이는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증명도 하지 않은 채 주장해 버렸다. 1633년의 재판은 그 때문에 열렸던 것이다. 그때의 재판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갈릴레이는 공정하고도 적절한 처우를 받았는데, 종종 인용되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그리고 기록을 보아도 분명하지만, 갈릴레이는 애당초 압력을 받기 전에 먼저 주장을 철회했다. 갈릴레이가 유죄가 된 것은 불복종이라는 죄목에 따른 것이지 이단이라는 죄목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갈릴레이는 앞으로 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우주의 현실이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금지당하기는 했으나, 천문학적, 수학적 작업 가설로 주장, 논의, 부연하는 것까지 금지당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연구를 더 진척시킬 수 있는 길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열려 있었다고 교회사가인 발터 브란트뮐러는 쓰고 있다('갈릴레이와 교회. 오류의 권리', 레겐스부르크, 1982). 갈릴레이가 재판 기간 중에 감옥에 있었고 고문을 받았다는 따위의 말은 다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확실히 갈릴레이는 재판받는 동안 이단 심문소의 수인 처지였으나 독방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법정은 갈릴레이에게 형식적인 금고형을 선고했지만 갈릴레이는 실제로 감옥에 들어갈 필요 없이 재판이 끝나자마자 로마를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만년의 몇 년 동안은 피렌체 근교에 살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곳에서 집필한 최후의 저작이 '두 개의 과학에 관한 대화'이다.

 

7. 결어

아이작 뉴턴(1642-1727)은 경험적 사실에 바탕을 둔 케플러의 법칙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1687년에 발표하면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후 과학자들은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용하여 우리 주위에서 접하는 여러 가지 운동과 현상, 나아가서는 우주에 있는 거대한 은하들의 구조와 운동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8. 생각해 볼 문제

만유인력의 법칙이 발견되는 과정을 통하여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생각해 봅시다.

 

<출처 : EBS / 오늘은 슬프지만 내일은 다를꺼야>

 

 

 

 

 

아이작 뉴턴

 


“만약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입니다.” 편지에 이런 글을 썼던 사람 자신도 과학의 거인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편지를 쓰던 당시에 이미 거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작 뉴턴은 1642년 크리스마스 날 영국 링컨셔의 울스롭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세 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어머니가 목사와 재혼했기 때문이다. 뉴턴이 열 살 되던 해 의붓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뉴턴의 이복 형제 셋을 데리고 울스롭으로 돌아왔다. 뉴턴은 의붓 아버지에게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훗날 그는 자기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적으면서 “새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들과 집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한 적이 있음을 고백했다.


뉴턴의 어머니는 아들이 농부가 되기를 원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농장으로 불러 허드렛일을 시킬 정도로 교육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뉴턴은 외삼촌의 도움으로 1661년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뉴턴이 공부하는 것을 여전히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남편의 재산을 물려받아 부유했음에도 어머니는 아들의 학비를 아까워 했다. 그래서 뉴턴은 학교의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근로 학생 자격으로 공부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 되어 전국적으로 흑사병이 돌아 대학이 문을 닫았다. 뉴턴은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이 이번에는 어머니도 아들에게 굳이 농장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뉴턴이 고향에서 생활한 1665년과 1666년을 사람들은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이 두 해는 뉴턴의 창조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때였다. 훗날 뉴턴이 이룬 위대한 업적들 중 많은 부분이 이 시기에 싹텄다.


 

 

사과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1666년 과수원의 사과나무 아래서 졸고 있던 뉴턴의 머리 위로 사과가 떨어졌다. 잠에서 깬 뉴턴은 사과가 왜 아래로 똑바로 떨어지는 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데에는 어떤 힘, 즉 중력이 작용하며 그 힘은 행성을 포함해 우주의 모든 만물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일화는 정말로 사실일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말년에 뉴턴 자신은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적어도 네 번은 주장했다.

 

‘기적의 해’는 이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고작’ 중력 따위의 문제로 과부하가 걸리기에는 너무도 뛰어났다. 그는 이 시기에 스물 두 개나 되는 문제들을 동시에 연구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자신이 유율법이라고 부른 계산법 즉 오늘날의 미적분도 만들어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빛의 성질도 연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빛은 흰색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빛이 원래는 여러 색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프리즘을 써서 증명했다. ‘기적의 해’ 동안 그를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뉴턴이 캠브리지에 남아 있었다면 이런 엄청난 일들을 해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의 나이 스물 네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흑사병이 잠잠해지자 대학의 문도 다시 열렸고, 뉴턴도 캠브리지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특별 연구원 자격으로 급여를 받아가며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연구에만 몰두했다. 교수 식당에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당시의 유행처럼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도 없었다. 1669년 수학 교수인 아이작 배로가 루카스 석좌 교수직을 사임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뉴턴에게 물려주었다. 보수도 많아졌고, 강의는 일주일에 단 한번만 해도 될 정도로 의무도 줄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연구에만 몰두했다. 강의에도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 시절 그는 먹는 시간이나 자는 시간까지도 아까와 했다.

 

 

1672년 그는 기존의 굴절 망원경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반사 망원경을 발명해 왕립 학회에 보냈다. 학회는 즉시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왕립학회 회원들과 불화를 겪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학회에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이 도용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다 광학에 관한 뉴턴의 논문이 처음으로 왕립 학회의 회보에 실렸을 때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로버트 훅이라는 학자가 장문의 비판 글을 쓴 것이다. 뉴턴도 훅의 비판에 답하는 글을 썼고, 서로 반박 글이 오고 갔다.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다툼은 훅이 죽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처음 비판을 받은 지 무려 31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 일은 과학계 전체로 볼 때 큰 손실이기도 했다. 뉴턴은 자신의 광학 연구 성과물을 훅이 죽고 난 다음에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미적분과 관련해서도 일어났다. 오늘날 ‘미적분 우선권 논쟁’이라고 불리는 이 일의 상대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라는 독일 학자였다. 1675년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미적분법을 발표했다. 하지만 뉴턴은 미적분은 자신이 먼저 고안해 낸 것이고, 라이프니츠가 그것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사실 뉴턴은 이미 기적의 해에 미적분법을 생각해 냈었고 그것을 원고로 작성해 1669년에 스승 아이작 배로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뉴턴이 먼저 고안한 것은 맞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분명 라이프니츠가 먼저였다. 그러니 두 사람이 영예를 나누어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뉴턴은 “두 번째 발명자는 중요하지 않다”며 논쟁의 해결을 왕립학회에 요청했다. 그리고 수학 역사상 가장 큰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뉴턴은 왕립학회의 회장이었고 논쟁은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이 추잡한 다툼 역시 1716년 라이프니츠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끝이 났다.

 

 


1687년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을 발표했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일에 인색했던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데는 에드먼드 핼리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뉴턴이 책을 쓰도록 설득했으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했다. 1686년 4월 28일 책의 1권에 해당하는 내용을 왕립 학회에 발표하게 한 것도 그였다. 그리고 총 세 권의 책을 발행하는데 들어간 인쇄 비용까지도 자신이 부담했다. 이 기념비적인 책은 뉴턴의 세 가지 법칙 즉 ‘관성의 법칙’, ‘운동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만유인력, 천체의 운동에 관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걸작으로 칭송 받았다. 그리고 철학자 존 로크 같은 이는 뉴턴을 신처럼 여기기까지 했다.

 

1727년 3월 20일, 뉴턴은 여든 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뉴턴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 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거인이었다. 그리고 훗날 또 다른 과학자들이 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더 먼 곳을 보았다.

 

 

아이작 뉴턴의 생애와 그의 업적을 개괄하는데 유용한 책으로는 <프린키피아의 천재>(리처드 웨스트폴/ 사이언스북스)와 <만유인력과 뉴턴>(게일 크리스니안슨/바다출판사) 등이 있다. 뉴턴과 다툼을 벌인 과학자는 앞에서 소개한 훅이나 라이프니츠 말고도 여럿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호되게 당한 이는 왕실 천문학자였던 존 플램스티드일 것이다. <독재자 뉴턴>(데이비드 클라크, 스티븐 클라크/ 몸과마음)은 권력을 가진 뉴턴이 그에게 어떤 모진 짓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프린키피아의 천재만유인력과 뉴턴독재자 뉴턴

 

뉴턴은 역학뿐만 아니라 광학에도 대단한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눈에 압력이 가해질 때 시각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뾰족한 물건으로 자기 눈을 찔러 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광학과 관련된 뉴턴의 실험에 관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로버트 P 크리즈/지호)의 넷째 장 ‘뉴턴의 프리즘 빛 분해’를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출처: 행운의 보금자리 / 장석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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