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계사/인물

태평양전쟁 / 이오지마 전투

작성자靑野|작성시간09.10.18|조회수730 목록 댓글 0

 

 

태평양전쟁 / 이오지마 전투

 

이오지마 전투는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에 해당했다. 전략 요충지인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이오지마를 먼저 점령해야만 했고 이에 이오지마는 세계 2차 대전이 벌어진 첫 일본 영토가 됐다. 연합군은 마리아나 제도

(사이판)에서 매일 같이 섬에 폭격을 퍼부었다. 초기 경고 단계에서 이오지마 섬의 군대는 이 사실을 일본 본토에 알렸고 연합

폭탄병이 도착했을 때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했고 미국은 금세 전투력을 잃었다.
1945년 2월 16일, 미국은 일본군 2만 2천명이 주둔해 있던 이오지마 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미 해병대는 2월 19일

이오지마에 상륙했다. 섬의 남쪽에 위치한 가장 높은 지점인 170미터의 수라바치산을 확보하기 위해 해변에 먼저 상륙한 미

해병대 삼만 명은 수라바치산을 포위했고 뒤이어 사만 명이 추가로 섬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섬은

초토화되고 2월 23일 해병대는 수라바치산을 점령해 성조기를 꽂았다. 그 후 31일 간 미군과 일본군은 섬에 갇혀 있었다.

해병대는 공군을 장악하러 북쪽으로 옮겼고 일본은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3월 26일 전세는 일본에게 매우

불리해져 일본군 2만 2천 명 중 1,083명만이 살아남았고 미군 2만명이 부상을 입고 6,821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국기

게양대였던 마이클 스트랭크, 할론 블록, 프랭클린 소우슬리도 사망했다.
이오지마 침략 작전의 성공으로 27명이 훈장을 받아 단일 전쟁으로는 가장 많은 훈장이 수여된 것으로 기록됐으며 이는 세계

2차 대전 때 수여한 훈장의 1/4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오지마
                                     격전이 벌어진 이오지마 섬과 수리바치 산

이오지마 전투

사실 이번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어째서 이오공감이 이오지마로 불리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였습니다. 일단 이오공감과

이오지마는 이오라는 음절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바로 이오지마로 불리지는 않지요.

이오공감 2.0은 1.0과 달리 회원들에 의한 자발적 추천/신고가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논쟁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오기도 하고 때문에 핵심 논제가 생기면 관련 글들이 모두 추천되면서 이오공감이 대대적인 난상 토론의 장으로

발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키나와 이전까지 미군이 단일전투로는 최대 피해를 입었던 이오지마 전투가 이오공감

2.0에 비유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실제 이오지마 전투를 가볍게 포스팅했습니다.

1. 배경
2차 세계대전  최대의 해전이자 인류 최대의 해전이기도 했던 1944년 6월 18일의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제국 연합함대는

동원 가능한 주력전력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항모 3척-타이호, 쇼카쿠, 히요-과 급유함 2척이 격침당하고 함재기

378기를 격추당했으며, 기타 항모 4척, 전함 1척, 중순양함 1척이 각각 크고 작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로서 3일 전인 6월 15일의 사이판 상륙은 미국의 의도대로 되어갔고, 결국 7월에 사이판과 티니안 등 마리아나 제도 일대가

모두 미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일본 대본영이 설정한 절대국방권의 태평양 중심축이 단번에 붕괴되었으며 마침내 개전 3년

8개월여만에 미국은 일본 본토로 가는 출구를 활짝 열었던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4일,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국 서부에서 이륙한 B-29의 규슈

폭격 등이 있었습니다만 중국에서 발진하는 것과 도쿄 코앞에서 발진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사이판, 티니안, 괌

마리아나 제도의 모든 섬들에 비행장이 들어서고 B-29 폭격기들이 도쿄를 강타한 거죠.

그런 미군 입장에서 이오지마는 매우 골치아픈 존재였습니다. 몇 되지도 않는 일본 전투기들이 이곳에서 이륙해 사이판

등을 기습폭격하는 일이 있었던 거지요. 더군다나 도쿄 폭격을 위해 발진한 B-29 폭격기들의 이동루트 안에 들어있다는

것도 문제점이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이오지마를 미군이 점령한다면 사이판 등의 기지에 대한 일본의 위협이 완전 사라질 뿐더러, 이오지마라는

전진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공습의 와중에 피탄당한 폭격기들의 임시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오지마는, 일본제국의 본토였습니다.

사실 이오지마는 19세기 말엽에야 일본 영토가 된 무인도였습니다만 이후 열대작물 재배나 어업 등으로 생활하는 이주민들이

유입되면서 대전기에는 약 1,000명 내외의 일본 민간인이 거주했습니다. 행정적으로도 일본제국 도쿄도지사의

관할구역이었죠. 일본제국의 본토. 이것이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습니다. 개전 이래 최초로 미 지상군 병력이

일본제국의 본토에 상륙하는 것이었으며 일본도 본격적으로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는 선언이었으니까요.

실제 일본은 개전 이래 전쟁의 참상을 본토에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의 두리틀 폭격 이후로는 폭격받은 적도

없었지요. 본토에 대한 폭격이 재개된 건 1944년 6월 15일의 일이었고 그것도 규슈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다지 심한 수준도

아니었습니다.(정확히 말하자면 폭격이 부정확한 거였지만;;) 그런데 이제 절대국방권이 무너지고, 사이판에서 B-29가 도쿄

등을 공습하는 위기상황에 미 지상군이 일본제국 본토에 대한 강습까지 한다면?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와 상징적 이유가 겹쳐지면서 미군은 이오지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일본도 이오지마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방어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2. 이오지마 방어 준비
구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 忠道)는 개전시 27군 참모로 홍콩 공격에 참전했고, 이후 제국 육군 2사단장을 역임했습니다.

1944년 5월 27일, 그는 수상 도조 히데키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제국육군 109사단장으로 임명됩니다. 109사단은 바로

이오지마와 보닌제도 방어전을 위한 사단이었죠. 떠나기 전 천황을 알현하여 하직인사를 올리고, 천황도 명예로운 일이라며

그를 격려했습니다.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 지 매우 잘 알았던 거죠.


구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은 미군을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계획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지독하게도 현실적이었던 그는

압도적인 물량과 화력을 지닌 미국을 상대로 뭔 발악을 해봤자 이길 수 없으며, 그렇다면 차라리 전 병력이 유의미하게 싸우다

죽자는 생각을 합니다.


유의미한 죽음이란 바로 최대한 많은 미군을 저승길 동반자로 삼는 것이었죠. 기존의 일본군은 패배가 분명해지면 그 유명한

만세 돌격, 즉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기관총과 집중사격을 받고 몰살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미군에게 있어 아주 좋은

사격표적 수준이었죠. 그런데 타다미치는 자살돌격을 배제하고 이오지마 전체에 대한 요새화에 착수했습니다.


우선 이오지마의 민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개가 개시되었습니다. 애시당초 인원이 1,000명 내외라 소개 자체는 어렵지

않았죠. 이후 타다미치 중장은 이오지마 각지에 그 악명높은 땅굴을 파고 참호를 건설했으며 곳곳에 엄폐호를 만들었습니다.

땅굴로 이어진 이 거대한 요새는 왠만한 포격, 폭격에도 끄덕 없었고 일본군은 이 땅굴을 따라 후방이나 적 배후로 쉽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3. 이오지마 포격

물량의 미군도 그야발로 무지막지했습니다. 우선 지상군은 해병 제3, 4, 5사단 3개로 구성된 해병대 제5수륙양용군단이었고

군단 총병력은 70,647명에 달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미군은 수비를 맡고 있는 일본군 병력의 3배에 달했습니다.-_-;;

이들을 위해 수송선 43척, LST 63척, LSM 31척이 투입되었습니다.


지상군만 이 정도에다가 해군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전함 8척(-_-;;)과 순양함 19척, 구축함 44척이 선단 호위 및

함포지원을 위해 동행했고, 항공지원을 위한 호위항공모함도 12척에 달했습니다.


1945년 2월 16일부터, 전함 6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6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이오지마에 대한 대대적인

함포사격에 나섰습니다. 17일에 수비대 해안포대의 포격을 당해 순양함 펜서콜라가 격침당했지만 포대도 곧 제압당했죠.


4. 이오지마 상륙

2월 19일 새벽 2시. 전함의 함포사격을 신호탄으로 다시 한 번 맹렬한 함포사격이 퍼부어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포격이 섬 곳곳을 강타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진지는 잘 구축되어지고 또 지하에 있던 탓에 무사했고 포격에

노출되어 날아간 진지는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

 

 

 

8시 59분을 기해 해병 제5군단이 섬의 남쪽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구리바야시의 지침대로

상륙을 허용하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상륙해서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끝장내겠다는 전술이었고, 이

속임수를 눈치 못 챈 미군은 해군이 자기들 전공까지 다 해치웠다며 불만을 가지기도 했죠.


그리고 그들이 어느정도 전진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의 집중 사격이 쏟아졌습니다. 잘 엄폐된 기관총 진지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일본군 포병들도 동시에 포격을 개시했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해병 5군단의 선두부대는 그야말로

경악할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위기에서 미군을 구해준 건 공군이나 해군이 아니라 바로 전차였습니다. 유럽 전선에선 티이거 만나면 바로 깨갱거리며

"공군!! 공군 어디있어!!" 하는 M4 셔먼 전차였습니다만 태평양 전선에선 입장이 전혀 달라져서 말도 안 되는 캐사기 킹왕짱

먼치킨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돌진해오는 전차들을 대전차지뢰와 대전차포 등으로 3~4대를 격파했습니다만 그게 전부였고,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포탄을 쏴제껴도 끄덕 없는 셔먼 전차에 놀라 패닉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유럽 전선에선 아마 독일군 대전차포 맞고 바로 뻗었을텐데;;)


결국 대전차포 중대장이 몸에 폭탄을 두르고 전차에 달려들어 자폭-_-;;;까지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먼 전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로를 개척했고, 해병대는 가장 큰 위기를 넘기며 눈앞에 있던 진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루동안 5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 버렸지요;;


5. 수리바치 산 공략

상륙한 미 해병대의 당면 목표는 섬에서 가장 높은 고지이자 최남단에 위치한 수리바치 산을 공략하는 거였습니다. 수리바치

산의 일본군 수비대는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었음에도 산 곳곳의 바위들을 교묘히 이용하며 결사적인 방어전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도 한 덕에 해병대의 공격도 매우 치열했죠.


수리바치 산은 특히 바다에 접해 있어 해군 함포사격의 직격이 가능했다는 점은 일본군에게 불행이었습니다. 함포사격은

일본군의 수리바치 산 방어에 어려움을 주었고, 육로로는 미 해병대가 화염방사기로 진지를 태우고, TNT로 바위를 통채로

무너트리며 진지 내의 일본군을 압사시키는 단순무식한 효과적인 방식으로 차근차근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방어가

어려워지자 일본군 생존자들은 전원 미군의 포위망을 은밀히 뚫고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철수했습니다.


2월 23일, 이 사실을 확인한 미군은 즉시 수리바치 산 정상을 확보했습니다. (10시 20분)

 


6. 이오지마 북부
그러나 정작 전투는 지금부터였습니다. 이오지마 남단은 미군이 무사히 확보했습니다만 일본군의 주 방어선은 섬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고, 이오지마를 완전히 보하기 위해서 미군은 섬 북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구리바야시 중장의 지휘하에 철저하게 준비해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미 미군은 수리바치 산이라는 교과서를 배워 왔습니다. 일본군은 매우 튼튼한 동굴진지로 도배를 하며 미군에

만만찮은 피해를 강요했습니다만 구리바야시 중장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군은 진지를 골치아프게 하나하나

점령하는 대신, 발견하는 진지 입구마다 TNT 폭약을 설치, 폭파시켜 입구를 무너트리고 진지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역시 화염방사기. 보이는 입구마다 화염방사기를 맨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최대출력으로 화염을 내뿜었죠.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일본군은 통구이가 됩니다.(...) 그걸로 부족해 수류탄을 집어넣고 다시 TNT를 터트리고 하니 일본군

방어선은  빠르게 무너졌죠.


그러나 여전히 미 해병대 입장에서는 매우 지지부진한 진격이었습니다. 섬 북부 전역을 관측할 수 있는 382 고지 전투에서

미군은 계속 패퇴하다가 마지막에야 간신히 함락할 수 있었죠. 그래도 미군은 3월 9일, 일부 병력이 북부 해안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본군은 섬의 최북단 일부로 패퇴해 그 은신처가 매우 좁혀졌습니다. 미군은 늘 하던대로 화염방사기,

수류탄, TNT를 있는 대로 쏟아부으며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죠.


결국 일본군은 3월 26일 잔존병력 전원이 매우 제국군스럽게 반자이 어택을 감행했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이 이때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최후의 반자이 어택 참가자 전원이 죽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반자이 어택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7. 이오지마 전투 이후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섬에서 무려 6,821명의 전사자와 19,189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최일선에 섰던 소부대들 중에는

대대적인 재편성이 필요한 부대들이 속출했지요. 일본은 제국육군 109사단이 말 그대로 전멸했습니다.


미군으로선 이전까지 가장 끔직했던 1943년의 타라와 전투를 가볍게 능가하는 대규모 인명피해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오키나와에서 똑같은 일을 당하고 지독한 일본놈들이라고 혀를 내둘렀지요. 실제 이오지마 전투 당시

구리바야시 중장의 방어계획은 오키나와나 일본 본토에서도 고스란히 채택됩니다.


그러나 이오지마 전투는 충분히 그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B-29의 발진기지인 사이판은 더 이상 공격받지 않았습니다.

커티르 르메이에 의한 일본 본토 대공습이 본격화되면서 그 가치는 더더욱 커졌는데 공습 도중 피탄당한 기체들이 이오지마의

비상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면서 상당한 수의 B-29 폭격기들과 승무원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절대국방권 붕괴에 뒤이어 제국 본토가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에 전율했습니다. 이제 일본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본토대결전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출처: 블로그 Ladenijoa>

 

 

                    퓰리처상을 수상한 조 로젠탈의 사진

사진작가 로젠탈 [Rosenthal, Joe, 1911.10.9~2006.8.20]
퓰리처상을 수상한 조 로젠탈의 사진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가 찍은 사진은 우표, 포스터, 수많은 잡지와 신문을

장식했고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위치한 해병대 전쟁기념관 추모비로도 제작됐다.
로젠탈은 징병 시 신체검사에서 나쁜 시력 탓에 면제를 받았다가 재검을 받아 징병 유예로 분류됐다. 당시 타임매거진은

걸작을 남긴 로젠탈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의 여지는 또 있다. 사진이 신문에 실려

미국 전역으로 퍼진 뒤, 한 리포터가 로젠탈에게 사진은 연출된 것이냐고 물었고 로젠탈은 해군들이 성조기를 꽂으며 포즈를

취했냐는 뜻으로 알아듣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진에 찍힌 성조기가 그날 두 번째로 치러진 게양 의식이었다는 것도 혼란을

가중시켰고 그 후 50년 동안 로젠탈은 사진을 조작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인터뷰와 취재 문의가 쇄도하자 AP 통신은 아예

‘로젠탈 데스크’를 따로 만들었다. 로젠탈은 대통령을 만났고, AP 통신으로부터 1년 치에 해당하는 월급을 보너스로 받았으며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사진 속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2006년 8월 94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뉴욕 타임즈 부고란에 리처드 골드스타인은 그의 걸작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 사진은 일본 영토의 일부를 미국이 처음 점령했을 때의 승리감을 포착했다. 이를 통해 미국 내에선 커다란 공감대가

형성됐고 그의 사진은 미국 문화에 다양성을 더했다.’
로젠탈은 어느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사진이 나오기까지 제가 기울인 노력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군들이 섬에서, 바다에서, 공중에서 목숨을

바쳤기에 깃발을 산에 꽂을 수 있었던 겁니다. 누가 사진을 찍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셔터는 제가 눌렀지만 이오지마를

점령한 건 미군이었습니다.’
(MSN 영화 movie.msn.co.kr)

 

 

 

    

-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1945.2.23 - 미 해병대, 이오섬[硫黃島] 스리바치산[摺鉢山] 점령

미 해병대가 1945년 2월 23일 일본 도쿄 남쪽 1,000km에 위치한 유황도의 주요거점인 스리바치산을 함락했다. 2월 19일 이

섬에 상륙한 이래 4일 만이었다. 해럴드 샤이어 소위가 인솔한 미군 40명은 산 꼭대기에 대대기를 꽂고 환호했다. 이 날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날로, 그야말로 피로물든 하루였다.

미군은 이 산을 점령하기 위해 이 날 하루동안만 무려 6천8백21명의 희생자를 내야했다. 당시 신문에 따르면 해안에 겹겹이

쌓여 있는 시체는 길이가 약 6km에 달했다고 한다. 고립무원에 빠진 일본군 수비대는 주요거점이 함락되었음에도 섬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응전했으나 힘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수비대장 율림충도 중장은 참모 2명과 함께 3월 17일 일본군 대본영에

마지막 무전을 친 후 자결했다.

유황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2만3천명은 포로가 된 210여명 이외에 전원이 전사했다. 미군도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쳐

약 2만 6천명이 전사했다. /조선

 

 

<자료출처: 블로그 '필라테리아'>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