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젼의 시편 22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에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렛샤할에 맞춘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이 시는 성전에서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불렀다. 예수께서 찬양의 주제가 되어 있는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아얠렛샤할"이란 단어는 아직도 그 의미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슬픈 상황에서 노래를 부를 때에 사용했던 악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난외에 적혀 있는 대로 "아침의 사슴에 대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과 탐구가 있었다. 칼멧(Calmet)은 이 시가 "아침의 사슴"이라는 악단을 감독하는 음악 감독자에게 주어졌다고 믿는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이런 제목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종종 사슴에 비유되었으며, 시편에서 사슴을 잔인하게 사냥하는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시적 상징으로 우리 주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다윗이 여기서 노래하는 "아침의 사슴"이시다.
이 시는 다른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시"이다. 예수께서 나무에 달리셨을 때, 이 시에 나오는 말들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이 시를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 보지 않은 독자들도 이것을 눈치 챌 것이다. 이 시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가 원래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끝난다고 했다. 이 시는 우리 주님의 가장 슬픈 순간들을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것과도 같다. 이 시에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하신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분의 마지막 눈물이 담겨 있으며, 사라져 가는 즐거움이 추억처럼 남아 있다. 이 시에는 다윗과 그가 받은 고난이 조금이나마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낮에는 밝은 태양빛에 별들이 가리우듯이, 이 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자들은 다윗이 이 시편에 포함되어 있든지 포함되지 않았든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이 시편에는 십자가의 어두움과 영광, 그리스도의 고난과 후에 따를 영광이 들어 있다. 아! 이 시에 가까이 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우리는 이 시를 대하면서 모세가 불이 붙은 떨기나무 아래서 신을 벗었듯이, 우리의 신을 벗고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거룩한 땅이 성경에 있다면, 바로 이 시가 그런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10절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구함.
10-21절임박한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간구함.
21-31절구원에 대한 예측.
[강 해]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5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6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께서는 골고다에서 이렇게 부르짖으셨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유대인들은 주님을 비방하고 놀렸지만, 천사들은 예수께서 이렇게 부르짖으실 때에 주님을 경배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우리 구세주는 극한 상황에 처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들을 귀가 있으니, 우리는 듣자. 보는 눈이 있으니 우리는 보자! 거룩한 두려움으로 이 모습을 보고, 칠흑처럼 어두웠던 한낮에 어두움을 가로지르는 번개를 주의해서 살피자. 첫째, 우리 주님의 믿음이 빛을 발하고 있으며, 이 믿음은 우리가 본받을 믿음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하나님을 부여잡다니! 이런 믿음을 우리가 본받을 수만 있다면! 고통을 당하시던 주님은 이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지키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그분이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la)이었으며, 이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능력"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분은 여호와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자신의 영혼을 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극한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분은 왜 자신이 버림을 받았는지 알고자 반복해서 질문을 하시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치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물으셨다. 이 슬픈 탄식에 나오는 단어를 하나 하나 자세히 보고, 그 의미를 알아보아야 한다.
"내 하나님이여." 아버지여, 배신자 유다가 나를 버리고 겁쟁이 베드로가 나를 떠나간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 나의 신실한 친구이신 당신께서 나를 떠나시다니요? 이것은 내게 일어나는 일 가운데서도 가장 슬픈 일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지옥의 형벌 중에서 가장 잔혹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어찌." 무슨 큰 일이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러한 때에 그처럼 극심한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셨던 것일까? 아들에게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왜 아들을 버리셨을까?
"나를." 나는 죄가 없고, 당신께 순종하는 아들입니다. 그러나 왜 당신은 나를 멸망케 하시나이까?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내 죄를 참회한다면,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본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가 우리와 우리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버리셨나이까." 당신께서 나를 징계하신다면, 이것을 달게 받겠나이다. 그러나 나를 온전히 버리시다니!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합니까? 하나님은 아들을 버리시겠다고 위협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실제로 아들을 버리셨다. 그래서 우리 구세주께서는 두려움을 느끼며 이렇게 질문하신 것이다. 아! 이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슬픔의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도하셨다. 사람이 중한 병에 걸렸을 때에 단지 신음 소리만 내뱉듯이, 상처받은 동물이 으르렁거리듯, 주님은 신음하는 소리를 내실 뿐이었다. 우리 주님은 진정 고난의 극한 상황에 몰리신 것이다. 주님은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셔서 마침내 목소리를 더 이상 내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사랑하고 신뢰하던 아버지께서 저 멀리 서 계시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시고, 기도도 듣지 않으시는 듯 보였다. 이것은 그분께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단지 "신음하는 소리"를 토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었다. 주님을 대속 제물로 삼아 그 안에서 안식하는 자들은 그 이유를 잘 안다.
2절.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전혀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새로운 시험이 아니다. 우리 주님도 이것을 느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내 하나님이여"라고 하나님을 부여잡는 모습을 주의해서 살펴보라. 그분은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지막 그 두려운 날 밤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온 밤을 지새우며 고통 가운데서도 기도를 그치지 않으셨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지만 기도를 쉬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눅 18:1)고 가르치셨던 말씀의 본을 손수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밝은 대낮에도, 어두운 밤에도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거나, 거절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여기에 영향을 받지 말고 간절히 간구해야 한다.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세상의 일들이 아무리 나쁘게 보여도, 하나님이여, 당신이 나쁜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느낄 때는 우리 하나님에 대해 나쁘게 말하거나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아버지께 순종하셨던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선하심을 익히 알고 계셨기에 외적인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야곱의 하나님은 불의함이 없으시다. 그분이 비난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분이 뜻하시는 대로 무엇을 행하시든지 그분은 찬양을 받으시고, 그의 택하신 백성들의 찬송 중에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신실치 못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선하고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도 응답이 지연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우리는 이것을 수수께끼처럼 남겨 두어야 하며 스스로 그 이유를 창조해 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에서 우리 주님은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 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고 버리셨는지 놀라셨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과 같다:"아버지여,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아! 왜 당신은 당신의 거룩한 자를 이처럼 극한 고통 가운데 버리신다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근거로 그분께 기도를 드릴 수는 있는 것이다.
4절.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이것은 택함받은 모든 믿음의 가족들이 따를 '삶의 법칙'이다. "의뢰하였다"는 말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그들이 확실히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았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았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았던 것은 잘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움과 비극 가운데 있을 때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불러, 그분의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주님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불렀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도움도 주시지 않는 듯했다. 믿음을 가진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지만, 그분만은 예외였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고 도와주셨다면, 다른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간증을 들을 때에 우리에게도 위로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멸망당한다고 느낄 때면, 다른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간증이 별 도움이나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와주셨던 것처럼,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분의 기도하는 삶과 기도의 논리는 우리에게 본이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 열조"라고 하며 기도하셨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그분의 백성들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 주님은 육신의 조상이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 열조"라고 부르셨다.
5절.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그분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다른 사람들은 다 구원을 얻는데, 왜 나는 이처럼 슬픔에 싸여 있는데도 구원을 베풀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와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베푸셨던 자비로운 구원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오늘 나에게도 이와 같이 자비로운 구원을 베푸시고 도와주실 것을 간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과 씨름하듯이 하는 참된 기도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법을 배우자. 구약의 성도들은 부르짖으면서도 신뢰를 잃지 않았다. 우리도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이렇게 하자.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그들이 소망하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치 않았다.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 앞에 길이 없어 보일 때에도 믿음의 기도는 길을 연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슬픔보다 훨씬 더 깊은 슬픔을 당하셨으며, 이때에도 주님은 기도하셨다.
6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이 구절은 정말 놀라운 표현이다. 영광의 주님께서 천사보다 낮아지시고, 심지어 사람보다 낮아지실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데, 어떻게 "나는 벌레요"라고 말씀하신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때,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면서 "벌레"와 같이 취급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분은 마치 자신이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처럼, 자신을 밟는 사람들의 발 아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멸시를 받되 그저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벌레와도 같다고 느끼셨던 것이다. 그분은 뼈는 없고 살로만 되어 있는 가장 연약한 피조물에 자신을 비유하셨다. 사람이 밟을 때면 몸을 뒤틀고 몸부림칠 뿐, 어떤 저항의 능력도 없이 다만 고통하는 힘만 가졌을 뿐이다.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을 때, 그분은 바로 이와 같으셨던 것이다. 사람은 그 본질상 벌레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람의 멸시를 받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하시며 자신을 사람보다 더 낮추신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동안에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누렸던 특권들과 축복들을 누릴 수 없었다. 그분은 사람들이 받는 대접마저도 받지 못하여 사람들에게서도 버림을 받으셨고,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그분을 돌아보지 않으셨다. 그분은 온전히 자신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표적이 되셨다. 그분은 폭도들의 희롱과 권세자들의 조롱을 받으셨다. 그분은 "백성"의 조롱을 받으셨다. 한때는 그분에게 면류관을 씌우려고 했던 사람들, 그들이 이제는 그분을 저주했고, 주님의 자비로 치료를 받은 자들이 그분이 저주를 받을 때에 냉소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분이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죄는 이처럼 책망을 받고 멸시를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께서도 이처럼 수치스러운 대접을 받으신 것이다.
7절.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십자가를 지신 그분이 복음을 위해 견디신 그 모든 조롱을 보라. 그분이 견뎌야 했던 조롱은 진정 잔인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조롱하는 데 하나가 되었고, 그분을 멸시하는 데 힘을 모았다. 제사장과 백성들, 유대인과 이방인들, 군인과 시민들, 이 모든 세력들이 주님께서 가장 연약해지고 죽음을 앞에 둔 때에 한 목소리로 조롱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사람의 잔혹성에 놀라야 하겠는가, 아니면 피 흘리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에 놀라야 하겠는가? 이와 같은 조롱이 세상에 어디 다시 있겠는가?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이러한 행동은 멸시를 표하는 행동이다. 숨을 헐떡이고,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머리를 흔들고, 혀를 뽑아 내고, 사람들은 모든 방법으로 주님을 조롱했다. 천사들도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는 그분께, 사람들은 감히 얼굴을 들이대고 조롱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가장 비열하게 주님을 멸시했다. 사람들은 그분의 기도로 말장난을 했으며, 그분이 견디는 고통으로 웃음거리를 삼고, 그분이 아무것도 아닌 자처럼 그분을 멸시했다. 허버트(Herbert)는 이렇게 우리 주님을 노래했다.
내 영혼을 찢는 수치
육체는 상처투성이
살을 꿰뚫는 날카로운 못
이보다 더 괴로운 것은
묶인 내게 던지는 조롱들
이보다 더한 슬픔이 있는가?
8절.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고통을 당하시는 그분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보이자 사람들은 그분을 잔인하게 조롱한다. 선한 사람은 믿음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데, 이것을 공격하는 것은 그의 눈동자를 해치는 것과도 같다. 그들은 사탄에게서 이런 술수를 배운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이전에는 이처럼 능수능란하게 사람을 조롱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27:39-44에는 구세주를 향한 다섯 가지 조롱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조롱이 가장 쓰라린 조롱이기에 이 시편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조롱에는 신랄하고 냉소적인 풍자가 들어 있어서 독살스러움을 느낄 정도이다. 이 조롱은 새 살을 갉아 내는 것처럼 '슬픔의 사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은 조롱을 받는다면, 죄인들의 조롱을 이처럼 참으신 그분을 생각하고 위로를 받자.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예언인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던 모습과 너무나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비웃으며 하는 말 가운데 들어 있는 진리를 결코 잊지 말자. 그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증거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멸망을 당했을까? 여호와께서는 죄인도 구원하셨는데, 왜 이분은 버림을 당하셨을까? 아! 그들이 그 대답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주님을 조롱하며 "저를 기뻐하시니"라고 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기뻐하셨다. 아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을 때에도 그분은 아들을 사랑하셨다. 여호와의 행하심에는 두 가지 상반된 요소가 있다. 그분은 아들을 기뻐하시면서도 아들에게 상처를 입히시고, 사랑하시면서도 죽이신 것이다.
9절.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사람의 탄생에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섭리가 늘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며, 마리아의 육체를 통해 탄생하실 때에 특별한 보호를 받으셨다.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과 친구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아이를 순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 아이가 이제는 자라서 인생의 가장 큰 싸움을 벌이는 동안, 그의 출생시에 함께했던 자비를 근거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는 어느 곳에서나 기도의 무기를 찾아낸다. 믿으려 하는 자는 믿어야 하는 이유를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처럼 갓난 아이 때부터 하나님을 믿었던가? 어린아이와 젖먹이 때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말인가?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우리를 택하신다면, 이것은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고난을 받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간구를 올릴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신실하신 그분은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결코 우리를 버리실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나를 안전히 지키셔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나이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특별하신 섭리의 손길로 우리 주님의 어린 시절에 헤롯의 분노에서 구하시고, 여행의 위험과 가난에서 보존하셨다.
10절.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아이가 출생하면 사랑하는 부모의 팔에 안기듯이, 주님께서 태어나셨을 때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안기셨다. 이것은 감미로운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탄생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돌보시고, 이후에도 돌보신다. 우리를 자비롭고 선하신 무릎 위에 두시고 돌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요람을 감싸고, 우리가 처음 걸음마를 할 때에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이 인도하는 것이다.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이 시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라는 부르짖음으로 시작되었다. 이 구절에서도 "내 하나님"이라는 말이 반복되며, 주님은 그분이 이 세상에 나오는 그때부터 "내 하나님"이 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룩한 간구이며, 믿음의 인내를 본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출생하는 그 순간은 우리가 가장 연약하여 생존의 기로와도 같은 시간이다. 이러한 시기에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셨다면, 지금도 그분의 선하심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가 어머니를 떠날 때에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던 그분은, 우리가 또한 어머니와도 같은 흙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고, 지옥의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지키실 것이다.
11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12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13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9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다윗의 아들은 계속해서 부르짖으며 기도하신다. 우리가 이 시를 읽는 동안 그분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 구세주께서 겪으신 고난을 분명히 알게 되기를 바란다.
11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주님께서 여러 가지로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분이 겪은 가장 슬픈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고난의 시기에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기를 기도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더욱 강력하게 한다. 첫째, 환난이 가깝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것은 우리 하늘의 아버지를 움직이고, 그분의 도우시는 손길을 부른다. 우리가 고난에 처했을 때에 그분이 도움이 되신다는 것은 그분의 영광이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그분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고난을 느끼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둘째, 도울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 주님의 경우에는 어느 누구도 도와드릴 수 없었고, 또 도와드릴 자도 없었다. 오직 그분 혼자만이 이 일을 겪으셔야 했다. 그러나 그분의 모든 제자들이 그분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마저도 그분을 멀리한다는 것은 슬픔을 더하게 했다. 친구가 아무도 없고, 절대 고독을 참아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혼자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절.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희생자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강한 원수들의 모습을 눈물을 머금고 둘러보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권세자들, 그리고 군인들이 바산의 초원에서 살찐 야생 소들이 힘과 분노에 넘쳐서 부르짖는 것처럼 십자가를 둘러싸고 외치는 것이다. 그들은 죄가 없으신 그분을 뿔로 찔러서 잔인하게 죽이고자 입에 거품을 물고서 그분 주위에서 발을 구르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으로 분노한 야생 황소들 가운데 던져졌다고 생각해 보라. 실제로 그 사람들은 황소처럼 잔인하고, 그 수가 많고 강했으며, 버림받은 우리 주님은 결박당하고 나무 위에 벌거벗긴 채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처한 이런 상황을 보면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가 더욱 절실하고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13절.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배가 잔뜩 고픈 식인종들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입을 열고 미워하던 그 사람을 삼키고자 했다. 그들은 평상시의 입으로는 분노를 다 토해 낼 수 없는 듯, 입을 찢어질 듯이 크게 벌렸던 것이다. 부르짖는 사자처럼 그들은 분노를 토했으며, 야수가 사냥물을 찢듯이 구세주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자 했다. 우리 주님이 그들의 손에 버리움을 당했을 때, 주님의 믿음은 큰 시련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기도로 승리하셨다. 그분이 위험에 처했을 때에 그분은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14절. 이제 원수들을 묘사하는 것을 그치고,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기 시작하신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 구절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그분은 기진맥진하여 마치 땅에 쏟아진 물처럼 지쳐 버렸다. 그분의 심장도 마지막 남은 기력을 소진하고, 마치 흐르는 물처럼 약해졌다. 그리고 그분은 제물이 되어 마치 여호와 앞에서 쏟아붓는 포도주처럼 되셨다. 그분은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셨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의 심장은 땀을 흘렸고, 십자가에서는 피를 토하셨다. 그분은 모든 힘을 다 소진하여 지극히 연약해지셨다.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그분은 마치 고문대에서 사지를 잡아 비튼 것처럼 뼈가 어그러졌다. 그분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아 고정시키고 이 십자가를 땅에 세우고 묻을 때에 생긴 충격으로 뼈가 어그러졌을 수도 있다. 만일 이 구절이 이처럼 문자적인 해석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이 표현은 그분이 지극히 쇠약해져서 근육들이 풀어지고 뼈와 장기들이 여기 저기 따로 노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극한 고통을 겪으시면서, 마치 몸이 뜨거운 열로 인해 초가 녹아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셨다. 전능하신 분의 진노의 불은 우리의 영혼을 지옥에서 영원히 녹아 내리게 하실 수 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주님이 이 진노의 불을 견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그리스도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노에 녹았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에 누구의 마음이 견딜 수 있겠는가?"
15절.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이 표현은 그분이 철저하게 쇠약해진 모습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깨어진 "질그릇 조각"에 비유한다. 이 질그릇은 진흙을 불에 구워 물기를 하나도 없이 말린 것이다. 진흙이 불에 구워지듯이, 우리 주님의 육체도 고열로 고통을 받으셨다. 유월절 어린양을 불에 굽듯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불 앞에서 주님은 모든 힘을 말려 버리신 것이다.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십자가 위에서 겪는 갈증과 열로 인해 그분의 혀가 잇틀에 들러붙었다. 입은 말라붙고 찐득찐득한 액이 들러붙어서 주님은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그분의 육체는 철저하게 고통을 당하여 마치 온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이 세포 하나 하나에는 주님의 슬픔과 비극이 가득한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고통을 당하시며 우리 구속을 위한 대가를 치르셨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사망 앞에서 몸부림을 치시다가 마침내 무덤 속 진토에 떨어지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보여주시는 겸손이 드러나 있다. 영광의 주님께서 허리를 굽히시고 사망의 진토로 내려가셨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의 유골을 두는 곳에 거하려고 내려가셨다!
맨트 주교는 14, 15절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내 육체는 물같이 쏟아졌네
내 뼈는 어그러지기 시작하네
불 앞의 양초처럼
내 마음은 내 안에서 녹아 내리네
말라 버린 힘줄이 뒤틀리고
질그릇 조각처럼 말라 죽어 버렸네
내 불타는 혀는 턱에 들러붙고
사망의 진토가 내 침대가 되었네.
16절. 주 예수께서 이렇게 슬픈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분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주님은 야비한 군중들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잔혹한 지도자들보다는 강하지 못하지만, 그 맹렬함이 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길게 소리를 내고 짖어 대는 개들과도 같았다. 사냥꾼들은 가끔 사냥물을 둘러싸고 사냥개들과 함께 그 포위망을 점점 좁혀 간다. 주님은 바로 이런 모습을 묘사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헐떡이는 사슴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며 기진하신 분이 있다. 분노한 군중들, 긍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맹렬한 개들처럼 그분을 둘러싸고 죽음으로 몰아 가는 것이다. 그분은 마치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아침의 사슴"과도 같다. 이 시는 피에 굶주린 사냥개들, 피에 목마른 자들이 그분을 잡아 먹고자 하는 모습을 노래하는 것이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의인의 회중이 되어야 했을 자들이 악한 무리가 되었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칭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탄의 회가 되어서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핍박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역사상 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 구절은 결코 다윗이나 다른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될 수 없다. 오직 나사렛 예수, 한때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이제는 높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만을 가리킨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기서 잠시 멈추어 서라. 당신의 구세주가 받으신 상처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라.
17절.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는 자주 금식하시고 또 고통을 받으셔서 수척해지셨다. 그래서 자신의 뼈를 모두 셀 수 있다고 하셨다. 그분은 뼈를 세고 또 셀 수가 있었다. 혼 주교는 십자가에서 몸이 늘어져 뼈가 보일 정도가 되셨고, 그래서 그 뼈의 수를 셀 수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그분을 삼켜 버린 것이다. 좋은 군사처럼, 그분은 어려움을 견디셨다. 아! 우리도 아버지의 일을 위해서 우리 육체의 즐거움과 안일을 포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영혼을 수척하게 하는 것보다는 뼈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육체를 수척하게 하는 것이 더 낫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사람들은 구세주의 벌거벗은 몸을 거룩하지 못한 눈으로 조롱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분의 거룩하신 영혼은 이 모습을 보고서 충격을 받으셨다. 고통을 당하는 육체는 군중들에게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자아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잔인한 눈으로 그분의 비극을 바라보며 야만인처럼 즐거워했다. 야수와 같은 사람의 인성에 우리는 모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해야 하겠다. 그리고 구세주께서 받으신 그 수치에 대해 통곡해야 하겠다. 첫 아담은 우리 모두를 벌거벗게 했다. 그러므로 둘째 아담은 우리의 벌거벗은 영혼에 옷을 입히기 위해 자신은 벌거벗으셔야 했다.
1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는 사람들의 옷은 대부분 처형하는 군인들의 부수입이 되었다. 이 시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옷은 로마의 군병들이 나누어 가졌다. 다윗은 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바라보고서 이 시를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나사렛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피를 주신 그분은 또한 우리의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기 위해 옷을 주셨다. 예수께서 슬픔을 당하시는 그 모든 사건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 말씀의 보고 안에 그대로 기록되었고, 아름다운 노래로 불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과 관계된 모든 것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보자. 군인들은 구세주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동안, 그 아래에서는 피 뿌림을 받으면서도 제비를 뽑고 있었다. 그들은 희생자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도무지 없었다.
19절.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주님은 불굴의 믿음으로 다시 기도하시기 시작한다. 그분은 이전에 드렸던 기도를 다시 간절히 간구한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낮아진 상황에서도 다만 그분의 하나님을 원할 뿐이다. 그분은 편안함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기만 한다면, 이것으로 만족하신다. 이처럼 겸손한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속히 이른다.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경우에는 때에 맞는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긴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속히 도와주실 것을 간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자신의 뜻을 따라서는 안 된다. 주님은 가장 연약해진 시기에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고 부르셨다. 그분의 본을 받아 우리도 이와 같이 노래할 수 있다:"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20절.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칼"은 그분이 사람으로서 두려워하는 '온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칼"에서 건져 달라는 기도는 완전히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하신 것이다. 또는 원수들이 그분에게는 날카롭고 치명적인 칼과도 같았기에, 이 원수들에게서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는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슥 13:7)고 하셨다. 그리고 목자는 공의가 만족되는 대로 그 칼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내 유일한 것"이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분의 영혼, 생명을 말한다. 내 영혼은 오직 하나뿐이므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이처럼 소중하고 유일한 것으로 알고 행동한다면!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거리의 진흙처럼 소홀히 취급한다. "개"는 사탄을 말하거나, 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들을 모두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 원수들은 수가 많았지만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마치 한 마리의 개와도 같았고,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갈기갈기 찢고자 했다. 예수께서 지옥의 개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욱 간구해야 하겠는가? 개를 주의하라. 그의 권세는 크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개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와서 꼬리를 흔들고 아첨한다고 해서, 우리를 그의 손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그가 우리를 향해 짖어 댈 때면, 하나님께서 개의 목에 걸린 줄을 쥐고 계심을 기억하라.
21절.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들소처럼 강한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은 주님은 사망에서도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신다. 이 사망은 사자처럼 맹렬하고 힘이 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어둠은 사라져 갔다. 이처럼 우리가 원수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엎드러진다 해도 믿음은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의 머리 되신 주님께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분의 지체인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들소를 이겼고, 사자를 이길 것이며, 들소와 사자에게서 면류관을 빼앗을 것이다.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7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28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29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이제 이 시는 전혀 다른 국면에 이르렀다. 두려운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이제는 고요한 평화가 이르렀다. 갈보리의 어두움은 마침내 이 세상에서, 그리고 구세주의 영혼에서 사라졌다. 그분은 승리의 빛을 보고, 그 결과를 내다보며 미소를 지으신다. 우리는 고난을 받으시는 그분을 지켜보았다. 이제 빛을 받으시는 그분을 바라보자. 이 구절들을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마음속으로 하신 독백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22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주님의 기쁨은 항상 교회와 함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모든 고통을 겪으신 후에 항상 하시던 대로 그분의 형제들을 생각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새롭게 생각하신다. 그분은 사랑하는 자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 중에 "내 형제들에게 가라"(요 20:17)고 하신 말씀이 들어 있다. 시편의 이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며 누릴 행복을 바라보셨다. 그분은 형제들의 선생님과 사역자가 되기를 바라고, 그분이 선포할 주제를 마음속으로 정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을 선포하실 것을 다짐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이 주님의 복음을 통해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만한 것이 그분 안에 육체로 거하시는 것을 바라볼 것이고, 그들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신 그분 안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거하는 것을 보고서 크게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얼마나 귀한 주제인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아들이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결심으로부터 교훈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는 그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이는 우리 형제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슬픔을 곧잘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왜 우리는 구원을 선포하는 데는 그렇게도 게으른가?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우리 주님은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인 사람들에게만 아버지의 사랑을 선포하시려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모인 큰 회중에서,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모인 곳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려 하신다. 주님은 그분의 대변인,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자들을 통해 이 일을 계속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분의 대변인들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메아리처럼 우리에게 전해 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 구절은 그 목적을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분을 높인다. 예수께서는 이 노래를 인도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 앞서 노래를 부르는 분이시며, 또한 우리를 가르치는 분이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시간은 우리에게 즐거운 시간이다. 이런 때면 우리는 당연히 즐거운 찬양을 드린다.
23절.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이 구절은 구세주께서 성도들의 회중 가운데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분은 충성스러운 성도들에게 감사함으로 하나가 되라고 권고하신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이라는 구절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며,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표현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의 시작이며, 은혜의 표이다.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욘 1:9)라고 하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하나님을 겸손히 경외하는 것은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경외"와 "두려움"은 성도들이 누리는 즐거움과 함께하는 것이며, 율법적인 것에 얽매이는 두려움과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율법적인 얽매임으로 인해 생기는 두려움은 우리 주의 온전한 사랑이 내어쫓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항상 거룩한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노래는 거룩한 입술만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복음의 진수는 찬양이다. 복음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며,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높이는 데 열심을 품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목소리를 합하여 노래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침묵해서는 안 되며, 냉랭한 마음으로 지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영적 이스라엘은 이 일을 한다. 우리는 혈육을 따라 이스라엘이 된 자들도 이 일에 동참할 것을 소망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찬양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분을 경외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경외심이 더 깊을수록 우리의 노래는 더욱 감미로워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매우 귀하게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모든 성도들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릴 것을 명하신 것이다.
24절.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동기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체험하셨는가를 아는 자는, 은혜의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게 된다. 우리의 구세주처럼 고난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다. 그분은 몸과 영혼이, 친구과 원수들에게서, 하늘과 지옥에서, 삶과 죽음에서 고난을 받으셨다. 그분은 어느 누구보다도 고난을 많이 받으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을 멸시하고 싫어해서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리스도로 하여금 짐을 지게 하셨고, 그래서 아들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죄짐을 지셨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항상 아들을 사랑하셨고, 사랑 가운데서 죄짐을 아들에게 지우셨으며, 이것은 아들이 궁극적으로 영광을 거두고 아들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고난을 당하는 동안, 아버지는 아들을 내내 사랑하셨다.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여호와께서는 아들에게서 자신을 숨기셨으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영원히 아들을 버리신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께서는 아들에게 곧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예수께서는 경외하심으로 들으신 바 되었다. 그분은 심히 통곡하며 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의 간구를 속히 들어 주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백성들에게 명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이 슬픔의 사람이 전하는 간증을 듣고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예수께서 증거하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실된 것이다. 누구든지 가난하고 고난을 당하는 중에서도 여호와께서 계시는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들어 주신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그가 들어오도록 자비의 문을 막지 않으신다. 누구나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자
누구도 불성실하고 불친절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네.
25절.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우리 주님께서 부르시는 노래의 주제는 오직 여호와 그분뿐이다. 우리 주님을 따라 여호와를 찬양하는 성도들은 오직 여호와 그분만을 찬송해야 한다. 이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찬송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고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하나님께 성별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사람들이 듣기에 아름답고 화음이 잘 맞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목사님은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립시다"라고 할지라도, 찬양대는 종종 자신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아!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찬양을 순결한 예물처럼 드릴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찬양드리는 것을 좋아하시고, 큰 무리로 모여 경배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이 구절에서 유의해 보라. 두세 사람이 모여서 찬송하는 것을 경멸한다면 이는 사악한 일이다. 반면에 작은 그룹으로 모이는 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집회를 순수하지 못하다고 경멸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드려 고난 중에 드렸던 서원을 갚으려 하신다. 그분은 무엇을 서원하셨을까?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셨을 때, 이미 영광을 얻은 구속받은 성도들 중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선포하셨는가? 이것이 그분이 하신 서원인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우리 주님께서 하신 언약을 이루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메시아께서는 여호와를 위해 영적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서원하셨다. 그분은 이 약속을 분명 지키실 것이다.
26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사랑하는 그분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그분의 죽음으로 이루게 될 결과를 바라보며 자신을 위로하시는 모습을 유의해 보라. 영적으로 가난한 자는 예수 안에서 즐거움을 찾고, 그분을 먹고 마음이 배부를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성도들에게 주시기까지는, 그들은 영적 기근을 겪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미로 배가 부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배부를 것을 생각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가운데서도 즐거워하셨다. 그분이 겪은 고난으로 축복을 받는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유의해 보라. 이들은 "겸손한 자"이다. 주여, 우리를 겸손한 자로 만드소서. 또한 복음의 능력을 유의해 보라. 그들은 "먹고," 그 결과 분명히 "배부를 것"이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잠시 동안 그들은 배고플 수도 있다. 그러나 먹을 것이 풍족한 추수감사절은 분명히 곧 이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당신이 고난을 당하지만, 영혼이 소진하거나 슬픔으로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영영히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마음이 곤고하여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분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이처럼 확신을 주는 말씀을 하셨다면, 영원히 살아 계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얻을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먹는 자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는 것이다:"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8).
27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이 구절을 읽는 자는 메시아께서 선교에 열정을 품으신 것을 보고서 놀라게 된다. 그분이 다스리시는 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알 것이라는 사실에 그분은 큰 위로를 받는다. 오늘날 교회로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땅의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들도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부끄러워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고,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참된 화목을 이루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거짓 종교는 끝이 나고 열방이 여호와를 섬기게 될 것이다:"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오! 오직 여호와만이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바라보는 소망은 그분의 싸움을 싸우는 자에게 참된 격려가 된다.
이 구절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과정을 유의해 보라. 그들은 먼저 "기억"한다. 이것은 탕자가 제정신을 차리고서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그들은 여호와께 "돌아온다." 이것은 므낫세가 우상을 버렸던 것처럼 회개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그들은 "경배"한다. 이것은 바울이 전에는 미워했던 그리스도를 경배했던 것처럼 거룩한 봉사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28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순종하는 아들처럼 죽음을 맞이하시던 우리 구세주께서는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왕성하게 확장될 것을 바라셨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라는 노래가 그분의 노래이며, 또한 우리의 노래이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은혜의 나라를 세우셨다. 이 나라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확장될 것이고,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현재는 이 세상이 소란스럽고 재난이 끊이지 않지만, 그래도 여호와께서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이 다스리시는 평화의 날이 오면 그분의 통치로 인한 아름다운 열매가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다. 큰 목자이신 주인이시여, 당신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소서.
29절.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 오늘날 부자들과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 중에 은혜를 많이 베푸신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이르면, 부유하고 강한 자들도 "먹고 경배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와 죽음으로써 베푸신 사랑을 맛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처럼 풍성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경배"하게 될 것이다. 내적 부유함으로 살찐 자들은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리고, 열심을 다해 여호와를 경배할 것이다.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KJV에는 "진토에 내려가는 자도 그 앞에 경배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리라"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지극히 비천한 자들에게도 위로를 베푸시며 높여 주신다.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위로와 구원이 된다:"그 앞에 절하리로다." 사망의 진토에 처했을 경우에도 기도는 소망의 불을 밝혀 준다. 누구든지 예수께 오는 자는 이처럼 복을 받는다.
그러나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그분을 멸시하는 자는 축복을 받을 소망이 없다.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전하는 복음의 또 다른 면이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구원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선물로 영생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영원히 죽음을 당할 것이다. 이 가르침은 매우 복음적이다. 이 복음은 이 세상 곳곳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이 복음은 강력한 망치처럼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태도를 산산이 부술 것이다.
30절.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후손들은 조상이 하던 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계속하여 경배할 것이다. 진리의 왕국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한 세대가 떠나가면, 또 다른 세대가 일어나 그분을 경배한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단절은 있을 수 없다.
31절. "와서." 은혜를 베푸시는 주권자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피로 사신 자들을 부르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생명으로, 믿음으로, 죄 사함으로, 그리고 천국으로 온다. 죽음을 맛보신 우리 구세주께서는 여기에서 만족을 누리신다. 열심히 일하는 여호와의 종들아,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결코 좌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즐거워하라.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십자가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온 자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할 수 없다. 그들은 여호와의 의로움을 전파하여 후세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 데 이르도록 한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가르치고, 자녀들은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이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그들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들은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주께서 "다 이루셨다"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영광스러운 사역이 완성된 것이다. 이 땅에는 평화가 있고,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 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숨을 거두시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 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믿음으로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성된 것을 바라보자!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아얠렛샤할." 시 22편의 머리말에는 "아얠렛샤할"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아침의 사슴'이란 뜻이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 외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는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다거나, 속옷을 제비 뽑는다는 것 등이다. 그분은 새벽에 사냥꾼들이 쫓기 시작한 사슴으로서, 친절하고 온유하며 아름다운 사슴으로 묘사되었다. 헤롯은 그분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그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가난과 사람들의 증오와 사탄의 시험이 그분을 추적하는 데 한몫을 했다. 언제나 그분 주위에는 "개"나 "황소"나 "들소"가 있어서, 어느 때고 그분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분이 첫번째 설교를 하고 난 후에 사냥꾼들이 그분 주위에 몰려들었으나, 그분은 이들을 피하셨다. 교회는 메시아를 산에 있는 사슴으로 묘사했다:"내가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아 2:8).
아침부터 사슴을 사냥하듯, 주님을 추적한 사냥꾼들은 오후에는 갈보리 산으로 몰아갔다. 이 산은 바위가 많고 울퉁불퉁하며 험한 낭떠러지도 있었다. 사냥꾼들은 그분을 낭떠러지로 몰아 넣었고, 맹렬한 야수들이 숲을 이루어 그분을 둘러쌌다. "들소"와 "바산의 황소"들이 그분을 뿔로 찌르고, 맹렬한 "사자"들이 그분을 향해 부르짖었다. "개"들이 그분께 달려들어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그분은 이런 야수들을 저지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시간이 이르자 그분은 고개를 숙이고 영혼이 떠나가셨다. 그분은 새 무덤에 장사되었고, 원수들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분이 "아침의 사슴"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그분의 시간이 이르자 그분은 새벽에 사냥꾼의 덫을 벗어나 살아나셨으며, 결코 다시 죽지 않으신다. 그분은 동산에서 마리아와 함께하시며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셨다. 순간 그분은 다시 엠마오에 나타나셔서 당혹한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이후에도 그분은 갈릴리에서도, 감람 산에서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영광을 입으셨다. -크리스마스 에반스(Christmas Evans, 1766-1838).
머리말. 이 시에서 의롭고 고난받는 사람을 사슴으로 비유를 하는 것은 매우 적합한 일이다······악한 박해자들을 개와 사자와 황소와 같은 야수들에 비유를 했으므로, 사슴은 무고히 고난을 받는 자들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헹스텐버그(E. W. Hengstenberg).
머리말. "사슴." 고대의 저자들은 사슴으로 여러 가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자연의 역사에 대한 흥미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에 의하면 사슴과 뱀은 철천지 원수였다고 한다. 사슴은 뱀을 먹어 치우기 위해 따뜻한 숨결을 굴에 불어넣어서 뱀을 굴에서 나오게 했다. 사슴의 뿔을 조금만 불에 태워도 모든 뱀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뱀은 사슴의 숨결을 견디지 못하고 굴에서 나온 뒤에 더욱 그 독기가 심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슴이 수줍음을 타는 이유는 그 심장이 크기 때문이고, 이 심장에는 십자가 모양의 뼈가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C. H. S.(우드<Wood>의 Bible Animals를 요약한 것).
시 22편 전체. 이 시는 시편의 모든 시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하고 훌륭한 시에 속한다. 이 시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겪었던 심오하고 숭고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들어 있으며, 이것은 사람의 생각과 이해를 넘어선다. 어떤 시편도 이보다 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경건한 자들은 이 시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당하실 때, 지옥의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서 토해 내셨던 한숨과 탄식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과 영적 투쟁을 겪었던 사람들이 이 시를 가장 귀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 -마르틴 루터.
시 22편 전체. 이 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그분의 세 가지 주요한 직무도 보여준다. 그분이 받은 고난이 이 시의 시작부터 22절까지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선지자로서의 직무는 22절에서 25절까지 나타나 있다. 25절에 나타나는 서원은 그분의 제사장 직무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26절 이하의 나머지 부분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윌리엄 구지(A Commentary on the Whole Epistle to the Hebrews, 1575-1653).
시 22편 전체. 이 시는 예언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인다.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시 22편 전체. 이 시는 한 단어 한 단어를 모두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해석해야 한다. 영해를 하거나 비유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델리취(Delitzsch, D.D., 히브리서 2:12에 대한 바키우스<Bakius>의 글을 인용함).
시 22편 전체.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방인을 부르심에 대한 예언. -유세비우스(Eusebius,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이 시를 요한복음의 구절과 대조해 볼 수 있다:"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다윗이 한 말이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같지 않다는 것은 진실된 성도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왜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 시편의 기록과 다른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현재의 비극에 대한 느낌과 하나님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은 별개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다면 우리는 무척 슬플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대문 밖으로만 나가도 영원히 떠나 버리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처럼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하면서 우리와 모든 면에서 같은 분이심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고난 중에 기도할 것을 본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을 가지신 그분은 하나님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어느 때고 그분은 홀로 계신 적이 없으시고, 아버지께서 항상 그와 함께하신다. -윌리엄 스트리트(The Dividing of the Hoof, 1654).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전승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이 시부터 암송하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시편 31:5에 이르러서 영혼이 떠나셨다고 한다:"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 31:5). 이 전승이 어찌되었든 간에 이 시의 첫 구절을 말씀하심으로 이 시가 주님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확증하신 것이다. -루돌프(Ludolph, Neale's Commentary).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그리스도의 영혼은 무겁고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고통 가운데서는 양처럼 침묵하시던 분이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시면서는 사자처럼 부르짖으셨다:"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이렇게 사자처럼 부르짖었기에, 사람의 소리라기보다는 야수가 부르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분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듯하다:"오, 나의 하나님, 내가 겪는 이 고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 고통을 부르짖을 따름입니다. 나는 깊은 소리로 신음하며, 사자처럼 부르짖나이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짖으셔야 했다면, 이는 작은 고통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를 버리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한 가지 위로를, 아니 여러 가지 위로를 준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두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첫째,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버림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며, 둘째, 우리가 현재 슬픔을 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1) 그리스도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버림을 받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분이 잠시 동안 버림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영원토록 버림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보잘것없는 자들이 영원토록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가 잠시 동안이라도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증해 주시는 안전,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누리며 안식할 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비천한 우리가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때에 또한 위로를 준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버리셨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능하신 손으로 그분을 붙들고 계셨다.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에게서 숨기웠지만, 전능하신 팔이 그분을 안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셨지만, 아버지의 붙드심은 아들과 함께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성도들과도 함께하실 것이다. 당신의 하나님은 얼굴을 숨기실 수도 있지만, 그분의 손을 거두시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고난 중에 있던 베인스(Baines)에게 어떻게 느끼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하나님의 평안은 느끼지 못하지만, 그분이 붙드시는 것은 느낍니다." 우리가 아버지로서 고집스럽고 반역적인 아들을 엄하게 대하듯이, 우리 아버지도 때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대하신다. 아버지가 고집스런 아들을 밖으로 내쫓으며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말하면, 아들은 울며 탄식한다. 그가 더욱 겸손해지도록 아버지는 그를 집으로 금방 들여 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인을 시켜서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한다. 우리가 자식에게 즐거운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버리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이 시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2-3절). 당신도 그리스도처럼 행하지는 않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고난을 명하신다고 해도, 당신은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신실하시며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지만, 나를 악하게 대하시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당하는 이 엄청난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은 결코 조금도 불의가 없는 분이시다. 그분은 나를 심판하셨지만, 나는 그분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리라. 이렇게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은 자의 태도일 것이다. -존 플라벨.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이렇게 반복하는 것은 뜨거운 열망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내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부르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하셨다. 1, 2절 사이에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난다. -아이작 윌리엄스(디오니시우스의 글을 인용함).
1절. "내 하나님."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을 아셨다. 또한 자신의 감정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에도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감정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또는 그분의 진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존 로(John Row, Emmanuel, 1680).
1절. "내 하나님."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이 합하여 그 의미를 찾는다 해도 다 찾지 못할 것이다. -알렉산더 웨더번(Alexander Wedderburn, 1701).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에는 특별한 힘과 의미와 감정이 있다. 전도자들은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말하며 그 강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난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이처럼 "엘리 엘리"라고 반복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마르틴 루터.
1절. "어찌." 이렇게 묻는 것은 조급하거나 절망 가운데 묻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책망에 반항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묻는 말도 아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왜 그를 떠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울면서 하는 말이며,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보기를 원하는 자의 소원을 나타내는 말이다. -스튜어트 퍼론(J. J. Stewart Perowne).
1절. "내 신음하는 소리." "솨에그"(gav)는 사자의 부르짖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지성이 있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낼 때면 이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나타내는 말이다(시 38:9; 33:3 욥 3:24). 이처럼 고난받는 메시아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망을 올렸다(히 5:7). -존 모리슨.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말했던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분열이 일어났다거나, 아버지의 사랑을 상실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 주님께 속한 인성으로 무서운 고통을 겪도록 하셨으며,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하려고만 했다면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 구원하실 수도 있었다. 또한 그분이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는 것은 무지나 조급한 마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분은 왜 고통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니고, 고통을 벗어 버리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이렇게 부르짖는 것은 그분의 극한 고통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통을 받는 모든 과정에서 그분은 탄식하지도 않았고 신음 소리를 내지도 않고서 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그래서 어떤 신적인 힘이 그분을 붙잡아 그분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분이 진정한 사람이며 자신이 당한 고통도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버림을 받고 고통을 겪었으며, 그 비통함과 아픔을 깊이 느끼고 계셨다. -로베르토 F. R.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e, 1542-1621).
1절.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죽어 가면서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시는 것은 우리로 믿음 안에서 살게 하려는 것이다. 다윗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 의인의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며, 감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리처드 캐플.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통을 생각한다면 우리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 고난을 당했다면, 그분은 우리를 위해 더 극한 고통을 받으셨다. 우리는 심판을 받아 아픔을 겪었으나, 그분은 더 쓴 잔을 마셔야 했다. 하나님은 진노하사 우리의 영혼으로 메마르게 하셨으나, 소멸하는 불과 같은 그분은 불타는 듯한 진노로 그리스도를 대하셨다.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 위에서 극한 고통을 겪으셨다. 아버지의 버림을 받으셨고,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떠나갔으며, 원수들은 그분을 조롱했다. 우리를 위해 그분은 온갖 저주를 받으셨다. 그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겪으신 것이다. 해는 빛을 잃었고, 분노하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주님은 기쁘게 죽음을 당하셨다. 아들을 향해 항상 미소를 지으시던 하나님은 그 얼굴을 아들에게서 숨기셨다. 그리고 그 아들은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두려움과 어둠을 느끼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이 고통을 온전히 겪으신 것이다.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히 겪어야 할 그 모든 고통을 주님은 다 감당하셨다. 그 시간, 하나님은 그 모든 은혜를 주님에게서 거두어 가셔서 주님은 그 은혜의 힘을 다 누리지 못하셨다. 그분은 가장 위로를 많이 받았어야 할 시간에 하늘에서나 천사들이나 친구들에게서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셨다. 절망하지는 않았으나, 숲속에서 상처받은 사자처럼 주님은 부르짖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버리셨을 때에도, 그분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소망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부르짖으셨다:"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티모시 로저스(Timothy Rogers).
1절.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는 이 구절에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셨으나, 주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리스도도 이와 같았다.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늘 느끼던 성도들도 때로는 그분의 사랑과 위로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주님의 경우를 생각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 위로를 거두어 가시는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이다. 당신은 가끔 "내가 위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라고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의심하고 회의하는 성도들이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순종하셨으나,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하셨다. 이처럼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오기도 한다. 주님께서도 이것을 체험하신 것이다. -존 로.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 당신은 버림을 받으셨기에 버림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아십니다. 당신도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오 주님, 이때에도 하나님은 주님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속에 늘 충만하던 기쁨을 잃으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영광 중에 거하십니다. 벌레와 같이 절망에 처해서 탄식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모하나이다. 주여, 당신은 나를 위해 희생을 감당하셨사오나, 나에게 선을 베푸소서. -조셉 사이먼즈(Joseph Symonds, 1658).
1절.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구절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특별한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고통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진노하신 것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일랜드.
2절.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부르짖는 이 말은 마치 세상에서 아이가 아빠를 향해 하는 말과도 같다!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은 둘 사이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나 나를 잠잠케 하기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아니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는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이 아침이 되도록 하나님께 절규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나이다. 오, 나의 하나님. 그러나 당신은 내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잠잠치 아니하나이다. 당신이 내게 응답하시기까지 쉬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효성스러운 태도로 간구하셨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분이 이렇게 강청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그분이 침묵하지 않고 이렇게 부르짖는 것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소망하는 것을 주실 능력과 의지가 있으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마음을 담아 드리는 간구이다. 이것은 또한 성경적인 간구이기도 하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존 스티븐슨(John Stevenson, Christ on the Cross, 1842).
2절.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70인역에는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 부르짖으나 당신은 듣지 않으십니다. 또한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나를 어리석은 자로 생각지 마옵소서"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아무리 부르짖어도 귀를 닫으시고 듣지 않으시는 분에게 계속해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실한 자의 이 어리석음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보다 더 지혜롭다.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때가 되면 여호와는 우리가 고난 중에 피할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시 9:9). -토머스 플레이피어.
2, 3절. 2절의 말씀은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했으나 하나님은 구원하시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불평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이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옳다고 인정하시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주님께서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 것에서 무슨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아니하실 때도 있겠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의 표시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분이 응답지 않으시는 것은 당신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당신의 친구가 당신에게 와서 돈을 빌리려고 할 때, 이것이 좋은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절할 때에도 당신이 그를 친구로서 사랑하지 않거나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이렇게 오해하지 않도록, 당신은 마음속의 우정과 사랑을 표하면서 정중히 거절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도 때로는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거절하신다. -윌리엄 거놀(William Gurnall).
2, 3절. 당신의 집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수원지가 다 메말랐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수도관이 파손되었거나 막혔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온전하고, 또한 구하는 것을 받을 준비가 다 되었다면, 그분은 우리의 간구하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다. -존 트랩.
3절.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믿음의 승리를 발견할 수 있다. 구세주께서는 유혹의 바다에서 바위처럼 우뚝 서 계시는 것이다. 파도가 높이 일어난 만큼, 믿음도 산호섬처럼 더욱 강하게 자라나서 우리의 파선당한 영혼을 위해 구원의 섬을 이루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큰 문제가 아니다. 폭풍이 나를 향해 몰아치고, 사람들이 나를 멸시하며, 마귀가 유혹을 하고, 곤고한 형편에 처하며,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다고 해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 안에는 불의가 전혀 없다." -존 스티븐슨.
3절.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어두움과 슬픔에 잠긴 영혼이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분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라고 부르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은 또한 그분이 택하신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는 말씀을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다음의 성경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시 89:16-19; 99:5-9; 호 11:8, 9 사 41:14; 47:4. -스튜어트 퍼론.
4, 5절. 이 시가 주로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시라고 해석하는 자들은 이 두 구절을 특별히 아름다운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야곱이 고난 중에 천사들과 씨름하여 축복을 받았던 바로 그곳에서 다윗이 이 시를 지었다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상들의 신앙과 관련된 곳에서 조상들의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조상들이 느꼈던 감정을 느끼고, 조상들의 신앙을 본받게 되는 것이다. -존 모리슨, Morning Meditations.
6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어부가 고기를 낚을 때, 낚시 바늘에 아무것도 달지 않고서는 결코 낚시를 강에 드리우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는 고기가 결코 낚시를 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낚시 바늘에 벌레를 꿰거나 다른 미끼를 달아서 바늘을 숨긴다. 그러면 물고기가 벌레를 물다가 낚시 바늘에 걸리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역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신성을 벌레와 같은 사람의 인성으로 숨기셨다. 마귀는 벌레와 같은 그분의 인성을 삼키려 하다가 신성이라는 그분의 낚시 바늘에 걸린 것이다. 마귀는 낚시 바늘에 턱이 꿰여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다가 그는 자신의 왕국에 파멸을 불러왔고, 자신의 능력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랜슬롯 앤드루즈.
6절. "나는 벌레요." 그리스도는 자신을 "벌레"라고 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분을 붙잡고 마음대로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벌레처럼 생각하고 벌레를 대하듯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면서 혐오감을 느끼고, 그분을 증오했다. 사람들이 벌레를 밟듯이, 사람마다 그분을 짓밟았다······갈대아 역본에서는 이 구절을 "약한 벌레"라고 표현했다. 비록 그리스도는 강한 하나님이셨으나, 그분의 인성에는 연약함이 내재해 있어서 그로 인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고후 13:4). 어떤 사람들은 "톨라아트"(t[lwt)라는 말이 진홍색 벌레 또는 곡식 안에 있는 진홍색 벌레를 말한다고 한다. 우리 주님은 조롱을 당하고 진홍색 옷을 입으셨을 때, 특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진홍 같은 죄를 눈처럼 희게 하기 위해 흘리신 붉은 피로 몸이 덮이셨을 때, 이처럼 진홍색 벌레와도 같으셨다. -존 길.
6절. "나는 벌레요." 겸손한 영혼은 자신을 대단한 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베르나르는 겸손이란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평가하는 것보다도 자신에 대해 더 낮게 평가한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자신을 "벌레"로 보았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브래드퍼드는 순교자였지만, 자신을 죄인이라고 했다. 욥도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욥 10:15). 제비꽃이 아름답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듯이, 겸손한 자들은 고개를 숙인다. -토머스 왓슨.
6절. "벌레." 사람들의 발에 밟히우고, 모욕을 당하고, 학대와 조롱과 고문을 당하신 그분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벌레와 같았다. 영광의 주님께서 얼마나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셨던가! 그분이 고난을 받으심은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우리로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도들이여, 주님이 고난당하시던 모습을 끊임없이 마음에 새겨 보라. -아이작 윌리엄스(디오니시우스의 글을 요약한 것).
7절.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이 참혹한 장면을 상상해 보라. 잡동사니 같은 군중들 중에는 부자도 있었고 가난한 자들도 있었으며, 유대인도, 그리고 이방인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데 모여서 바라보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편히 누워서 노려보는 자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서 즐거워하며 어쩔 줄 모르고 돌아다녔다. 누구나 이 모습을 보고서 만족스러워했다. 어느 누구도 조용히 침묵하지 않았다. 로마의 군병들도 조용히 있지 않았다. 피 흘리는 일이 끝나고, 이제 간식을 먹을 차례가 되었다. 그들이 항상 하던 대로 물과 신 포도주를 마셨다. 군병들은 주님을 희롱하면서 포도주를 내어밀었다(눅 23:36). 그들은 주님이 심한 갈증을 느끼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병들은 예수께서 갈증으로 더 심한 고통을 느끼도록 마시는 것으로 희롱한 것이다. 진정 잔인한 로마 병정들이다. 유대인은 어떠한가! 죽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가? 죽음에 조롱과 멸시를 더해야 하겠는가? 이 슬픈 날, 너희들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가 되었구나! 영광의 주를 멸시하기 위해 조롱과 살인을 하는 데 공범자가 되다니! -존 스티븐슨.
7절.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우리가 사는 세대에서도 잔혹하게 죄를 범하는 범죄자가 있다면, 군중들은 그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범죄자도 사형을 선고받아 죽음 앞에 섰을 때는,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죽음의 순간에는 그를 조롱하거나 모욕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고 죽어 가실 때, 그분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비웃고 입술을 비쭉이며 머리를 흔들었다고 했다. 그들은 주님을 철저하게 비웃고, 주님이 품고 있는 소망도 비웃었던 것이다. -존 뉴턴(John Newton).
7절. "입술을 비쭉이고." 동양에서는 아랫입술을 밖으로 내미는 것이 심한 멸시를 나타낸다. 자기보다 손아랫사람에게나 입술을 내밀 수 있다. -Illustrated Commentary.
7-9절. 나를 보는 자는 모두 나를 비웃으며, 입술로 나를 조롱하고 나를 향해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하나이다:"이 촌놈이 여호와를 빙자해서 말을 하다니. 그가 여호와를 사랑한다니 여호와께서 그를 구하시게 내버려두어라." 그러나 당신은 내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나를 인도하시고, 나의 피난처가 되셨나이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오자 당신은 나를 무릎 위에 두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휘트처치(E. Whitchurche, The Psalter of David, 라틴어로 된 Devout Psalms의 번역서, 1547).
8절.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이 시에는 우리 주님을 핍박하던 자들의 조롱과 비방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기 수백 년 전에 기록된 이 시에 주님이 받으실 고난을 정확히 표현한 글이 들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존 스티븐슨.
9, 10절.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며 함께하시는 것을 증거해 주시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 강건해진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시면서 믿음을 잃지 않았다:"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시 71:5, 6). 하나님께서는 고대로부터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여러 가지 증거를 주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 우리가 유혹을 받아 의심이 들 때에도, 이런 증거들을 붙잡고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된다. 이런 증거들은 집을 받쳐 주는 기둥과 같이 우리 믿음을 지탱해 주는 것이다. -윌리엄 구지.
9, 10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가 태어나던 시절부터 그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를 기억했다. 이러한 모든 기억들이 그에게는 항상 새로웠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을 것들을 기억하면서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유아기, 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의 일들을 생각해 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런 일들은 다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기억을 새롭게 했다.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라는 말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다윗이 이 시를 지은 때는 60년이란 세월이 더 지났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 시절에 대해 기억해 내기조차 힘들었고,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지 알아볼 수도 없었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상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을 신앙의 모범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성숙한 후에도 상기하고 감사를 드려야 한다. -토머스 호턴(Thomas Horton).
9, 10절. 이제 고난은 줄어들기 시작하고, 소망하던 승리를 얻기 시작한다. 그렇게 간절히 구하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제 찾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받은 고난은 다른 사람들이 받은 고난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 놀라운 은총을 조상들에게는 베푸셨지만, 그는 이런 은총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놀라운 일을 베푸셨다는 것을 깨닫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 대해 선하신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
9, 10절.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원수들이 우리 주님을 공격하고 조롱했으나 이것은 그분으로 아버지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게 했다······주님의 간구가 이 구절에 나타나 있다. 이 간구는 특별한 간구이다. 이 구절에 나타난 논리는 힘이 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논리이다. 이 논리를 풀어쓴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제 나는 극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하나이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생존하는 그때부터 그분은 나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비를 생각하거나 그분께 이것을 간구하기도 전에, 그분은 내게 이것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내게 선을 베푸사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면, 그분은 내가 세상을 떠나는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비방을 당하는 중에서도, 나는 오직 당신께 간구할 것입니다. 내 원수들은 당신이 나를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나이다. 그들은 내가 당신을 의지하지도 않고 의지할 필요도 없다고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그들은 당신이 나를 아들로 간주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존 스티븐슨.
10절.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유세비우스는 우리 주님의 탄생과 고난을 연결하여 글을 썼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자신의 탄생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으실 수 있었다. "그분의 육체는 다른 어떤 사람의 육체보다 상처를 받았지만, 그분의 탄생을 위해서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오셔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녀를 덮고 잉태되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분의 육체가 찢어지고 상했지만, 그분의 탄생이 이렇게 영광스러웠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실 것이다. 또한 영원히 쇠하지 않을 육체를 얻으셨기에 마지막까지 그분의 신실한 백성들을 붙들어 주실 것이다. -닐.
10절.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나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와도 같았습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진 바 되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아버지도 없고, 또 어머니는 가난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매튜 풀.
11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당신께서 나를 도우셔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논리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논리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바로 이런 논리로 기도하는 것이다. -존 트랩.
12절.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도도하고 거만하며 맹렬한 모습으로 큰 힘을 쓰는 것이 황소의 특징이다. 우리 주님을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이 이런 동물과 같았다. 세상 사람들과 영적 원수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들이었다. 이 원수들은 모두 도도하고 거만하고 맹렬하게 우리 주님을 공격했다. -존 스티븐슨.
12, 13절. "바산"은 비옥한 땅이었고(민 32:3, 4), 이곳에서 자란 가축들은 살이 찌고 튼튼했다(신 32:14). 그들처럼 유대인들도 좋은 땅에서 자라 살이 쪘고 발로 찼으며, 교만하여져서 반역했다. 마침내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찼다"(신 32:15). -조지 혼.
13절.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맹렬한 황소와 배고픈 사자들에 둘러싸인 가련한 갓난아이와 아무런 방어도 할 수 없는 양은, 피흘리기를 좋아하고 희롱하는 박해자들에게 둘러싸인 우리 주님을 잘 나타내 준다. -토머스 스코트(Thomas Scott, 1747-1881).
14절.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그분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런 번민과 미약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물같이 쏟아졌으며"라는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쏟아진 물이 그분의 상태를 잘 나타내 준다. 땅에 쏟아지는 물을 보라. 그 물은 방울방울 떨어져 모두 흩어지고 만다. 이것은 쏟아지면서 땅에 떨어지기까지 더욱 빠른 속도로 떨어진다. 한번 쏟아지면 중간에 멈출 수도 없고, 또 돌아갈 수도 없다. 이것은 정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바로 이러한 심정이었다. 그분은 연약함으로 기절하기까지 이르셨다. 사람이 기절하기 전에 느끼는 감정은 정말 특별하다. 마치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연약함 바로 그것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뼈들이 다 풀어지고 어그러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뼈에는 아무런 힘도 없고, 관절도 느슨해지며, 근육에 있는 힘은 모두 소진돼 버린 것을 느낀다. 현기증이 우리를 엄습해 온다. 이것을 견디고 몸을 지탱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낙담하고, 우리의 힘은 촛밀이 녹는 것처럼 녹아 내리고 없어진다. 다니엘은 환상을 보고서 이와 같은 현상을 체험했다:"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단 10:8). 그러나 우리 주님의 체험은 이와 같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기절해 정신을 잃지 않으셨다. 의식을 잃게 되면 모든 고통은 그 순간 그쳐 버린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두려운 일을 겪으시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으셨다. 그리고 기절하기까지 지속되는 상당한 시간을 잠잠히 견디셨다. -존 스티븐슨.
14절.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원수들은 그분이 온전히 멸망을 당하신 것으로 알았다.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삼하 14:14). 베르나르는 이렇게 말했다:"신랑 되신 그분은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쏟아진 물과 같이 되었거늘, 그분의 이름이 쏟아진 향기처럼 향기롭게 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닐.
14절.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물은 한번 땅에 쏟아지면 다시 모을 수 없다. 이처럼 나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 -존 트랩.
14절.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고문대는 사람에게 심한 고통을 가하기 위한 도구이며, 공포감을 주기 위한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뼈가 어그러질 때까지 사람을 붙잡아매는 고문대이다. 세 시간 동안 팔을 붙들어 매고서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믿을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손과 발에 못을 박고(손과 발에는 힘줄이 가장 많이 있어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있는다는 것은 그 고통을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통을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십자가에 못박힐 사람이 끌려오면 병사들은 그에게 환영한다는 뜻으로 신 포도주와 쓴 담즙을 섞은 것을 주었다. 여기에는 의미가 있었다. 쓴 담즙은 이 고통스런 죽음에 따르는 고통이 쓰다는 것을 나타내고, 신 포도주는 그 고통이 찌르듯이 날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랜슬롯 앤드루즈.
14절.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사람의 육체가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은 뼈가 어그러지거나 관절이 탈골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셨을 때, 뼈들이 어그러지기 시작했으며, 그 뼈들이 서로 각각 놀기 시작하여 그 모든 뼈를 셀 수 있게 되었다(17절).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온 몸으로 가장 격렬한 아픔을 겪으셨다. 우리 주님께서 이 모든 고통을 겪는 동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자 했던 원수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자축하는 듯이 기쁨에 넘쳤다. -토메 드 제수(Fra Thome de Jesu).
15절.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못박혀 상처가 난 곳에서 염증이 생기기 시작하고, 곧 찢어진 부분 등이 부어올랐을 것이며, 이어서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피가 상처를 통해서 다 빠져나가고 육체의 모든 수분이 말라 버리게 된다. 타는 듯한 태양은 피부를 태우듯 내리쬐고, 십자가 위에 달린 사람은 어떤 수분도 공급받지 못한다. 손과 발을 통해 피가 흘러나가 탈수 현상이 곧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라고 했다. 몸의 열기는 그에게 조금 남아 있는 마지막 힘마저 빼앗아 갈 것이고 갈증은 참기 어려울 것이다. 그분은 이 갈증으로 자신의 몸이 토기장이의 화로에서 구워진 "질그릇 조각"과 같이 되었다고 했다. 주님께는 어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이 죽어 가면서 일어나는 첫번째 현상으로서 입에서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존 스티븐슨.
15절. "내 힘이 말라." 주님이 느끼신 극심한 갈증에 대해 말하면서 금이나 은을 연단하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고 화로에서 굽는 "질그릇 조각"과 같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겸손한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아이작 윌리엄스.
15절. "질그릇 조각." "헤레스"(crj)는 질그릇을 말하며, 흔히 깨어진 조각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는 피부가 거칠어진 것을 표현하기 위해 쓰였으며, 온 몸의 수액이 다 빠져나간 사람의 모습을 가리키는 듯하다. -존 모리슨.
16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우리 주님을 대적하던 자들이 보였던 악행은 너무 다양하여 맹렬한 야수 중에서 황소와 사자를 들어 표현했지만 이것들로도 원수들을 묘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또 다른 상징적인 동물을 등장시켰다. 악한 자들의 무리를 "개들"로 비유한 것이다. 개들은 도시 여기 저기에 출몰하고, 이 구석 저 구석을 돌아다니며 썩은 고기를 보게 되면 으르렁거리며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개들은 사냥감을 끝까지 추적하고, 냄새를 맡는 데는 추호도 틀림이 없으며, 열심히 주위를 살피다가 결심하고 사냥감을 쫓아가서 죽기까지 물고 늘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것은 지극히 잔혹한 일이다. 사냥 지역을 먼 곳에서부터 포위하고, 앞에 있는 동물들을 안으로 몰아 포위망을 좁혀 들어간다. 이렇게 사냥감을 포로로 잡아 두고서 사냥꾼들은 자기 편할 대로 살륙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원수들도 이와 같았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오래 전부터 그들은 주님을 죽이기 위해서 가장 잔혹한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존 스티븐슨.
16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사자를 사냥할 때는 그 구역의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어 4-5마일의 둘레로 원을 형성하여 포위망을 구축한다. 그 크기는 사냥하는 사람들의 수와 사냥 지역의 지형에 따라 결정된다. 사냥을 시작하면 도보로 사냥하는 사람이 먼저 창을 들고서 추적에 나서며 개들을 풀고 숲속으로 쫓아간다. 말을 탄 자들은 숲속에서 맨 먼저 튀어나오는 사냥감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서 조금 뒤에 거리를 두고 따라간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원을 좁혀 가며 사람들이 모두 원의 중심에 모일 때까지, 또는 새로운 사냥감을 쫓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앞을 향해 사냥감을 몰며 나아간다. -쇼(Shaw, Paxton's Illustrations of Scripture에서 인용함).
16절.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수족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마 27:35 요 20:25). 하나님의 아들이 묶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매를 맞는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여기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잔혹하고 저주받은 죽음이지만, 그분은 이것도 거절치 않으셨다. 여기에서 십자가가 증언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존 트랩.
16절.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 중에서도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무서운 형벌이다. 수족을 찌른다고 해도 인체의 중요한 장기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니다. 손과 발은 감각이 예민한 곳이며, 이곳에 상당한 크기의 못이 박힌다. 손과 발의 민감한 조직을 뚫어 내고, 수많은 신경을 잡아찢으며, 혈관을 터뜨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손과 발의 신경은 팔과 다리를 통해 온 몸의 신경 조직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신경 조직을 찢어 내는 것은 온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어느 신경 조직 하나만 건드려도 온 몸이 아픈 것을 생각해 보라. 얼굴에는 경련이 일어나고, 이를 악물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 손과 발에 못이 박혔을 때, 온 몸에 얼마나 고통을 느끼셨을까? 팔과 다리가 찢겨 십자가에 매달리신 채, 우리 주님은 여섯 시간 동안의 고문을 견디신 것이다. -존 스티븐슨.
16절.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 49:16). 그분의 손에 못이 박혔을 때 그분의 손바닥에는 우리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아닌가? 주님의 손에 남긴 못자국은 부활하신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주님은 부활의 증거로서 이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못자국이 영광을 입으신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서 재림하실 때에도 이 손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한다:"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요 19:37). 이 예언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손과 가슴에는 그분의 택하신 자들이 보배로운 보석처럼 새겨져 있다. -토머스 애덤즈.
17절.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 달리면서 그분의 피부와 살이 늘어났다. 얇아진 피부를 통해 뼈가 드러났고, 그 수를 셀 수도 있었다. -조지 혼.
17절.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구세주께서는 수치스러운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 밑에서는 군중들이 그를 조롱하듯 쳐다보았고, 우리 주님은 그들이 주목하여 바라보는 시선에 상처를 받으셨다. 그들은 건방진 시선으로 주님을 바라보았다. 더 자세히 보고자 걷던 걸음을 멈추어 서서 주목하여 보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모여 모욕을 하기도 했고, 그분이 하셨던 일들을 비방하거나 그 모습을 조롱하기도 했다. 벌거벗고 떠는 몸을 조롱하면서 그들은 주님을 주목하며 살펴보았다. -존 스티븐슨.
17절.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아!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갈보리를 바라본다면, 그 시선이 얼마나 다를 것인가!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본다면 그분이 죄인을 위해 고통을 받으시고 피를 흘리시며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멸망으로 떨어지는 자들에게 이 얼마나 과분하고 감사한 일인가! 저주받은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사람들을 부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구원을 얻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 -존 모리슨.
1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자는 옷을 벗기우고, 그를 처형했던 자들이 그의 옷을 나누어 가진다. 그분의 허리 둘레를 옷으로 가리웠다는 기록은 어느 곳에도 없다. 그 옷들은 로마 군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겉옷은 이은 자리를 따라 네 개로 나누었을 것이다. 로마의 법을 따라서 네 명이 파수를 섰던 것이다.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어서 나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 누가 가질 것인가를 결정했다. -랑게(J. P. Lange, D.D., 마태복음 27:35에 대한 글).
1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벌거벗고서 죽음을 당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1) 모든 육체는 죄를 지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와 같이 되었다(출 32:25 대하 28:19).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시는 분이 벌거벗은 채로 고난을 당하셨다. (2) 그분은 죄인들의 죄 값을 온전히 치르고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포로로 대적들에게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죄수들이 정복자들에게서 당하듯이, 그분도 벌거벗은 채로 채찍질을 당하셨다. (3) 이렇게 벌거벗고 고통을 당하신 것은 우리가 의복을 사치스럽게 입고 다니는 벌을 받으시고, 우리가 마땅히 입어야 할 의복을 입을 자유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4) 벌거벗고 고난을 받으심으로 그분께 피하는 사람들에게 의와 영광의 옷으로 입히고, 그분과 함께 흰옷을 입고 영원토록 함께 동행하기 위함이다(고후 5:2, 3). 또한 그분의 의로 옷을 입지 않는 자는 영광의 옷을 입지 못할 것을 가르친다. (5) 그분을 따르는 자는 그분과 같이 벌거벗은 채로 따를 것을 결심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요일 4:17 롬 8:35 히 11:3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화려한 의상을 사랑하고 여기에 많은 재물을 쏟아서는 안 된다. -조지 허치슨(George Hutcheson, 1657).
18절.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주님의 속옷을 취하려고 제비를 뽑는 것이 사소한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교훈이 담겨 있다. 이 통으로 짠 속옷이 귀한 것이었으며, 군인들은 이 속옷을 소유했던 주님보다도 속옷을 더 귀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았던 것과 같은 행동이다. 또한 제비를 뽑았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주님을 지극히 멸시하고 귀하게 생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존 스티븐슨.
20절. "내 유일한 것." 이 구절은 "나의 외로운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그분은 자신의 영혼이 외롭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셨다. 어느 누구도 그분을 친구로 생각하고 돌아보거나 위로를 하는 자가 없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시 142:4). 외로움이란 그 자체가 십자가이며, 이처럼 극한 고통을 당할 때는 더욱 그렇다. 어떤 동행자도 없이 이런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이 슬픈 일이다. 하지만 어떤 고통은, 특히 죽음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 25:16). -마르틴 루터.
20절. "개." 개들이 마을과 도시의 거리를 쏘다니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다. 이런 모습에 익숙한 자들에게야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 마을에 오는 이방인들은 개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며 위협을 느낄 것이다. 집에서 기르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개들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그들은 집에서 기른 개처럼 잘 훈련되지도 않았으며, 사람을 좋아하고 따르는 것도 아니다······그들은 성질이 난폭하고 교활하며, 피를 좋아하고 폭식을 한다. 그들의 외모도 험상궂다. 개들은 쌀쌀하고 야만적으로 생겼으며, 늑대의 눈을 닮았고 귀는 축 늘어졌으며, 꼬리는 쭉 뻗었고 몸은 호리호리하게 말랐으며, 배는 쑥 들어가 야비하게 보인다······사람들이 이런 난폭한 동물을 싫어하고, 무용지물로 생각하며 더럽다고 하여 돌보지 않고 피하기 때문에 개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살아간다······이런 개들은 주로 떼를 지어 다니며, 천성적으로 난폭하고 또 공격할 힘도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때로는 낯선 이방인을 공격하여 사람을 먹어 치우기도 한다. 이 개들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공격해서 먹어 치운다. 땅에 떨어진 더러운 것도 가리지 않고 먹으며, 특별히 사람 고기를 좋아한다. 동양에서는 살인자나 반역자들을 죽이게 되면, 땅에 장사도 지내 주지 않고 거리에 내던지는데, 이것을 개들이 먹어 치우는 것이다. -조지 팩스턴(George Paxton, D.D., Illustrations of Scripture, 로버트 제이미슨<Robert Jamieson>이 개정한 것, 1843).
21절.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사탄을 사자라고 부르는데 이는 적합한 표현이다. 사탄은 사자의 특성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자처럼 용감하고, 강하며, 난폭하고, 사자의 부르짖음처럼 무섭다. 그러나 사탄은 사자보다 더 심하다. 사자는 교활하지만 사탄은 사자보다 더 교활하다. 사자는 굴복한 자를 살려 주기도 하지만 사탄은 아무도 살려 두지 않는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공격하지 않지만, 사탄은 배가 불러도 공격한다. 사탄은 무엇이나 공격한다. 가난한 자여, 사탄이 내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존귀한 자도 그가 감히 내 일에 끼어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부자도 그가 나와 겨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사탄은 누구나 공격해서 먹어 치운다. 사탄은 우리의 공동의 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툼을 그치고 힘을 합하여 사탄을 대적하자. -토머스 애덤즈.
21절. "들소뿔." 히브리어로 "레엠"(!ar)을 "들소"라고 번역한 것은 옳은 번역이다. 현대의 박물학자들은 구약에 나오는 "레엠"은 들소과의 일종으로서 지금은 사라진 오록스를 가리킬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우드(J. G. Wood, M.A., F.L.S., Bible Animals, 1869).
22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어두움에서 구원을 얻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즐거움과 빛을 받은 후에, 구세주께서는 또 다시 이것을 전해 줄 형제들을 생각하신다. 구원 얻은 그분의 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신다. -존 스티븐슨.
22절. "형제."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또한 사람을 높인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의 형제가 된다는 것은 아들께서 자신을 지극히 낮추신 것이다. 또한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형제가 된다는 것은 크게 높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제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늘의 후계자들이요, 땅의 왕이 아니라 하늘의 왕과도 같은 존재이며, 일시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가 된 것이다······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는 자들에게 이 사실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윌리엄 구지.
24절.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복음의 은혜 안에서 즐거워하고자 하는 자들은 가난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라고 했는데,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숨기지 아니하시고······들으셨도다"라고 덧붙였다. 주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을 행동이다. 마치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너희들은 나를 바라보고, 내 본을 따르라. 나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수치스럽게 되었고, 악인들 중에 하나로 취급을 받았다. 내가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배척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나를 가장 귀하게 받아 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나를 본받으라."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권고를 받아야 한다.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낮아졌을 때에 절망하지 말라. 이는 십자가를 진 후에 구원을 받기 위함이다. -마르틴 루터.
25절.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주님은 기쁨과 감사에 넘쳐서 여호와를 찬송한다. 그분은 아버지가 가까이 계심을 실감하고, 찬송을 드리신 것이다. 그분이 감사를 드리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찬양을 드릴 것을 결심한 것이다. -존 스티븐슨.
26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교회에는 겸손한 자,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를 위한 축제가 준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위한 희생이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배부르게 된다. 그들은 여호와를 찾는 동안 또한 그분을 찬양한다. 그리고 그들은 영생을 누린다. -Practical Illustrations of the Book of Psalms, 1836.
26절. "겸손한 자."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아름다운 글을 그의 공부방에 새겨 두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아! 이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과 이마에 모두 새기기를 바랍니다! -찰스 브래드버리.
26절. "너희 마음." 이것은 당신의 겉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숨어 있는 속사람을 말하는 것이다(겔 36:26). 이 속사람은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이며, 영원히 살 사람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속사람으로 살아 움직이게 한다. -존 스티븐슨.
27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이 구절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에 대한 예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흥미있는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참된 회개의 특성, 그리고 메시아의 통치 아래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께 돌아올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1) 참된 회개의 특성. 이것은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주의 앞에 경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명백하고 단순한 과정이다. 아마, 우리가 마음으로 하는 첫번째 종교적 행위는 묵상일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망각의 상태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망각해 버렸다. 죄인들은 그분의 영광과 권위와 자비와 심판을 잊어버리고,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회개를 하게 되면,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런 변화는 탕자의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회개하기 시작했을 때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호와께 돌아온다." 이것은 우리가 섬기던 우상이 무엇이든지 그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진실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와 회개한 자들은 그분을 경배한다. 경배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신하로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2) 메시아의 통치 아래 하나님께 돌아오는 나라.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이방인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한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이다. 이 일은 사도들의 시대에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되고 더욱 확장되어 "땅의 모든 끝"과 "열방의 모든 족속"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기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회개는 "개인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부르신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시온으로 향하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는 복음이 이 세상의 한정된 부분에서만 전해졌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열방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이 이를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품는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을 소홀히 하지는 말자. 온 세상이 구원을 얻는다고 해도 우리 영혼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의 글을 요약한 것).
27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이것은 정말 놀라운 표현이다. 이것은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말한다. 지나간 모든 세대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나라들은 지난 날에 잃어버렸던 것을 기억해 낸다. 또한 현재 그들이 수행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도 안다. -존 스티븐슨.
27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그들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왜 기억하는가? 그들은 여호와께 돌아와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이 정하신 규례를 따라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을 기억한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구절이 설명하는 말이다:"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시 86편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타난다:"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시 86:9). 이제 열방은 주께 나아와서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글을 쓰고 기억하며 여호와의 영광을 말한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다:"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윌리엄 스트롱(Saints' Communion with God, 1656).
27, 28절.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아들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추구하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오셨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기쁨으로 넘치겠는가?······아버지께서 모든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서, 아들은 자신이 받은 슬픔을 다 잊어버리실 것이다······온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공중의 새, 들의 짐승, 바다의 물고기, 언덕과 산, 삼림의 나무, 골짜기의 물,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보고서 그분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칠 것이다. 피조물을 저주에서 구원하시고, 이것들을 창조하던 때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사람들은 거듭나고 새롭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고, 그들을 구속하기 위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드리는 감사의 합창과 할렐루야를 외치며 드리는 찬송이 아버지께 향기로운 제물처럼 드려지지 않겠는가! 우리 주님은 이것을 보고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고, 모든 눈이 그분의 영광을 볼 것이다. 사람들은 열심히 그분의 명을 수행할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분을 섬기며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때 고난을 당하셨던 주님께서 받으실 상급이다. -굿하트(C. J. Goodhart, M.A., Bloomsbury Lent Lectures, 1848).
29절.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KJV에서는 "진토에 내려가는 자······절하리로다"를 "진토에 내려가는 자도 그 앞에 경배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리라"라고 번역했다-역자 주.) 악한 죄를 지어 악명이 높은 자들, 구원이나 생명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는 자들도 잔치에 참여하여 먹고, 하나님께 돌아서서 그분을 경배하며 섬길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사망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함을 받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리라"라는 번역은 히브리어 성경과 맞지 않으며, 의미를 혼잡스럽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이 살지 못할 자"라고 번역하는 자들도 있다. 이 해석은 먹을 것이 많은 부자뿐만 아니라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생명을 보존하지 못할 자도 이 잔치에 참여하여 먹고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라는 뜻이다. 에인즈워스는 "진토에 내려가는 자"를 영적으로 비참하고 악한 자를 말한다고 해석했다. 바실도 "풍비한 자"를 믿음과 은혜에 풍부한 자를 말한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라는 표현에서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진토에 내려가는 자"라는 구절과 대조되는 표현이다. 이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라면 가장 부유한 자와 가장 가난한 자들도 모두 위로를 받을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먹이실 것이다. -존 메이어(John Mayer).
29절. "풍비한 자······진토에 내려가는 자." "진토에 내려가는 자"는 죽음을 맞이해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에 떨고 있는 자를 말하거나, 지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사는 자를 말한다. "풍비한 자"는 세상에서 부유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므로 "진토에 내려가는 자"가 자신이 필요한 것도 스스로 채우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데에 아무 무리가 없다. 그러나 여러 훌륭한 학자들이 "진토"를 "무덤"으로 보는데, 이렇게 해석하면 이 구절은 죽어 가는 수많은 죄인들이 여호와를 경배하게 될 것이고,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자들도 속죄소를 찾아 피난처를 얻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혼 주교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 이 땅의 진토에서 잠들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일어날 수 없으나, 인자께서 부르시면 살아 일어나 왕이신 메시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할 것이다." -존 모리슨.
29절.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KJV에서는 "진토에 내려가는 자······절하리로다"를 "진토에 내려가는 자도 그 앞에 경배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리라"라고 번역했다-역자 주.) 진토에 내려간다는 구절은 무슨 뜻인가? 첫째, 이 구절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성경은 죽음을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9). 이 말은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도 주를 찬송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그의 생명이 끝이 난다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없다고 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둘째, 진토에 내려간다는 구절은 가난하고 비천한 상태에 있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 즉 강하고 부유한 자는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천하고 가난한 자들도 "그 앞에 절하리로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바는 부자나 가난한 자, 높은 자나 낮은 자, 왕이나 거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리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것을 "죽은 자", "티끌에 거하는 자"로 묘사했다(사 26:19). 이것은 유대인들이 지극히 비천한 처지에 있어서, 오직 죽은 자를 살려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들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셉 캐릴.
29절.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KJV에는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리라"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의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없을 때에 느꼈던 깊은 절망감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시간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므로 이런 영적 문제들이 사라졌고, 우리는 만족을 누린다. 하나님의 영이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내 영혼은 '산 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리라." 내 마음도 이것을 인정한다. 내가 내 영혼을 살리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영혼을 '살아 있게' 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일이다. 영혼이 죽지 않고 살아난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 영혼이 배불리 먹고 인도함을 받고 가르침을 받으며 충만한 삶을 누려야 한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출생시키면 그것으로 어머니의 임무를 다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후,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돌보며 삶을 누리도록 보살핀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의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간절히 간구하오니 나를 버려두지 마소서. 당신의 손으로 하신 일을 이제 버려두지 마옵소서. 나는 당신 안에 있을 때에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먹이시고, 당신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주의 일을 할 때에도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돌아선 목적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방도를 생각하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계속해서 누리도록 하자. 이렇게 영혼을 보살피는 것은 굶은 아이를 먹인다거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는 것처럼 눈에 확실히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자.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자. 사람들이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육체는 잘 먹어 건강하지만, 시들어 가고, 굶주리고, 기진해 가는 영혼은 어떻게 해 주어야 하겠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기진한 영혼의 슬픔을 숨기고 살아간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며 사람들을 살리자. 사람의 영혼은 위로부터 내리는 영적 음식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 "생명의 물"이 사람들에게 흘러내리게 하는 도구가 되자. 아무도 자기 스스로 자신을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메리 덩컨(Mary B. M. Duncan, Bible Hours, 1866).
29절.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KJV에서는 "진토에 내려가는 자······절하리로다"를 "진토에 내려가는 자도 그 앞에 경배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리라"라고 번역했다-역자 주.) 27, 28절에서는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의 영광과 광대함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감해 보았다면, 이 구절에서는 그 나라에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어날 특정한 일을 묘사한다. 마치 우리가 이미 이루어진 역사를 조감해 보듯이 주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역사를 묘사한다. 미래를 전반적으로 조감해 본 다음에 특정한 일,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조명하고 묘사하는 것이 적합한 순서이다. 세세한 부분에 대한 아름다움과 진리를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주님께서는 전반적인 아름다움이 어떠할 것인가를 설명하신다. -존 스티븐슨.
30절.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이 은유적인 표현은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백성을 나타낸다. 이 구절은 농부가 수확을 마치고 다음 해의 파종을 위해 씨앗을 남기는 것을 보고서 표현한 말로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들을 지칭하는 데 적합한 표현이다. 비록 씨앗의 양은 적다 할지라도 다음 해의 가을에 그 씨앗으로 추수하게 될 예상 수확량을 바라보며 이 씨앗을 귀하게 생각하게 된다. 농부는 씨앗의 양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씨앗의 질에도 관심을 둔다. 농부는 가장 좋은 것을 씨앗으로 남긴다. 씨앗을 고르다가 나쁜 것이 나오면 이것을 버리고 더 좋은 것을 택한다. 그는 적은 양이라도 최상의 씨앗을 남기고, 이것을 조심스럽게 보존하여, 가장 좋은 땅에 이 씨앗을 뿌린다. 이 구절은 이런 일을 염두에 두고서 든 비유이다. -존 스티븐슨.
31절.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씨앗이 하는 일은 "선포"하는 일이다. 그들은 삶의 체험을 통해, 그리고 그들이 얻은 지식과 확신을 통해 그들이 배운 교훈을 선포한다······그들은 성령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그분이 책망하는 죄와 양심의 가책을 말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버리실 것과 회개하는 성도들과는 함께 거하실 것을 가르친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그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 그리고 이로 인해 여호와를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한다. -존 스티븐슨.
31절. "장차 날 백성."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 나지 않은 백성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사람들의 율법과 문화와 습관을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는 진정한 의를 얻을 수 없다. 이것은 의를 흉내내는 사람들을 만들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모세의 율법으로도 유대인들을 의롭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물과 성령으로 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
[설교힌트]
시 22편 전체. 스티븐슨 목사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Christ on the Cross)라는 제목으로 각 구절에 대해 설교를 했다. 다음은 그 설교 제목들이다. 1절:부르짖음. 2절:불평. 3절:인정. 4-6절:대조. 6절:책망. 7절:놀림. 8절:비방. 9, 10절:항의. 11절:간구. 12, 13절:공격. 14절:기절. 15절:기진함. 16절:찌름. 17절:쇠약함. 17절:조롱하는 눈초리. 18절:옷을 찢고 제비를 뽑음. 19-21절:간구. 21절:구원. 22절:감사. 23절:초청. 24절:증거. 25절:서원. 26절:온유한 자의 만족, 여호와를 찾는 자의 찬송, 영생. 27절:세상의 회심. 28절:즉위. 29절: 믿음의 주. 30절:씨앗. 31절:우리의 영원한 사명, 믿음의 결과.
1절. 구세주의 부르짖음.
2절. 응답받지 못한 기도. 그 이유를 찾고, 소망을 품게 하며, 지속적으로 간구하게 하라.
3절.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든지 그분은 거룩하시고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4절. 과거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기도함.
4, 5절. 고대의 성도들. (1) 그들의 삶-"의뢰함." (2) 그들의 행동-"부르짖음." (3) 그들의 체험-"수치를 당치 아니함." (4)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6-18절. 주님의 고통에 대한 표현들.
11절.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에 근거한 기도.
20절. "내 유일한 것." 사람의 영혼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
21절 상반절. 사자의 입. 사람의 잔인성. 마귀. 죄. 죽음. 지옥.
22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제, 말씀의 선포자, 찬송 인도자.
22절. 감미로운 주제, 영광스러운 설교자, 사랑하는 관계, 하늘나라에서 행할 일의 예행 연습.
23절. 삼중 의무:한 분 하나님을 "찬송함", "영광을 돌림", "경외함." 삼중 성격:"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 "야곱의 모든 자손", "이스라엘 모든 자손."
23절.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
24절. 모든 사람의 체험이 증언하는 역사가 주는 위로.
24절 상반절. 두려움을 쫓음.
25절. 회중의 찬양. (1) 즐거운 찬양. (2) 개인적인 준비-"나의 찬송." (3) 찬양의 대상-"주." (4) 찬양의 근원-"주께로서 온 것." (5) 적합한 장소-"대회 중에서."
25절 하반절. 서원. 무엇을 서원할 것인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서원을 할 것인가? 서원을 이행하는 것의 중요성.
26절. 영적 잔치. 손님, 음식, 주인, 그리고 만족감.
26절 중반절. 여호와를 찾는 자는 찬송을 한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언제 할 것인가? 그들이 이런 것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7절 하반절. 영원한 삶. 무엇이 사는가? 영원한 삶의 근원은 무엇인가? 삶의 태도. 왜 영원히 사는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위로는 무엇인가?
27절. 참된 회심의 특성. 메시아의 통치 아래 이 일이 어느 범위까지 일어날 것인가? -앤드류 풀러.
27절. 기독교의 세계적 승리.
27절. 회심의 순서. 강해를 참조하라.
28절. 왕 중 왕의 제국, 현재의 상태와 미래.
29절 하반절. 자기 확신의 헛됨.
30절. 교회의 영원성.
31절 하반절. 교회사-세계사의 진수.
31절. 교회의 미래상. (1) 확실한 회심. (2) 약속된 설교자. (3) 후손이 받을 축복. (4) 복음의 전파. (5)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심.
<출처:예수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