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2편
Ⅰ.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 42:1-5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이 바로 신앙의 생명이자 정수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사랑에 대한 몇 가지 표현들을 대하게 된다.
1. 목말라하는 거룩한 사랑(1,2)
이 사랑은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거룩한 열망 속에서 고양되는 사랑이다(1,2절).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1) 다윗은 하나님을 섬기는 외적인 기회들을 박탈당했을 때 곧 그가 하나님의 집의 궁정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요단 땅으로 추방되었을 때, 하나님을 향한 그의 갈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때때로 하나님은 자비의 손길을 거두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비에 가치를 깨닫게 하시며 은혜의 수단들을 막으심으로써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촉구하신다는 점을 주의하라. 그는 이제 슬퍼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갈망하였다.
(2) 그의 갈망의 대상은 무엇이며 그가 그렇게 찾기에 갈급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하며 하나님을 갈망한다. 즉 종교적 의식 그 자체를 갈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식의 대상인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영혼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취할 수가 없다. 그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옵기를' 간절히 바란다. 즉 그는 자신의 순전함을 알고 계시는 분으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알리기를 바라고, 주인 앞에 나오는 종처럼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위선자에게는 두려움이 되는 것만큼 의로운 자에게는 염원이 된다.
(3) 이 갈망의 정도 : 그가 베들레헴 우물의 물을 바란 것도 이 갈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본래 몸이 뜨겁고 목을 말라하는 '사슴' 특별히 쫓기는 수사슴이 '시내물을 찾기에' 갈급해 하는 것에 비교한다. 은혜를 받은 영혼은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절히 열망한다.
2.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것을 슬퍼하는 거룩한 사랑(3)
하나님의 집에서 강제로 쫓겨나 있는 동안에 그의 눈물은 주야로 그의 음식이 되었다. 왕이자 선지자였던 다윗도 하나님의 집의 위로가 없을 때는 우는 선지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물은 그의 음식과 뒤섞였다. 아니, 그의 눈물이 주야로 그의 음식이 되었다. 그는 눈물을 먹었고 눈물로 잔치를 베풀었다. 그의 원수들은 그를 조롱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라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3절). 그가 하나님의 임재의 증표인 언약궤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그의 하나님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에게서 성경과 목사와 엄숙한 집회를 빼앗아가면 우리에게서 우리의 하나님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것들에 묶어두셨을지라도 하나님 자신은 그것들에 묶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 또한 그 언약궤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어디에서 그를 찾을 수 있는지를 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하늘로 난 길은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즉시 나타나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점에서도 역시 속았다. 성도들이 그들이 모든 친구들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들의 하나님도 잃어버렸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 대한 이같이 비천한 생각 때문에 고통받는 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마음먹은 바였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신뢰를 흔들어 버리려고 하는 것만큼 은혜받은 영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없다. 다윗은 '옛날'을 기억하고 '그의 마음이 상하였다.' 그의 마음은 녹아내렸고 그 생각은 그의 심정을 쥐어짰다. 그는 깊이 슬픔에 빠져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지금 그가 쫓겨나 있는 궁정에서의 즐거운 기억이나 자기 집에서 베풀었던 주연에 대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전에 그가 자유롭게 하나님의 집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는 비록 그 당시에는 장막에 불과한 것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집에 올라갔었다.' 그가 사울에게 핍박하고 있던 때에 언약궤는 한 개인의 집에 있었다(삼하 6:3). 그러나 그 장소의 비천함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한 상징물에 대한 그의 평가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와 동행하여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무리의 선두에 선다고 해서 자신의 위엄이 실추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아니, 그가 우리와 동행하였다는 이 사실은 그에게 기쁨을 더해 주었다. 그래서 그 사실은 그가 이제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크게 슬퍼한 점으로서 두 번씩이나 언급되었다. 그는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즉 내심으로 기쁨과 찬송을 발할 뿐만 아니라 겉으로도 그것을 표현하며 '올라갔었다.' 그는 거룩한 날을 지키기 위해서, 즉 웃음과 오락으로 헛되이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건한 예배로 지키기 위해서 올라갔다.
3.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바라봄(5)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그의 슬픔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마땅한 한계를 넘어서도 안되고 그의 영혼이 낙망하도록 심해져서도 안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슬픔을 덜기 위해 자신의 마음과 이야기를 나눈다. "네가 당황과 혼란 속에서 불안해하는데 어째서 그러느냐?" 많은 경우에 우리의 불안은 그 근거와 이유를 자세히 조사하게 되면 사라져버리곤 한다. "어찌하여 내가 낙망하는가? 그럴만한 이유, 실제적인 이유가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도 그렇게 법석을 떨지는 않지 않은가? 동시에 우리에게는 격려받을 만한 이유도 있지 않은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영혼의 의기소침과 불안을 치료하는 뛰어난 해독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의기소침을 꾸짖을 때는 하나님을 바라도록 우리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때 영혼은 가라앉은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붙잡는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내가 오히려 찬송히리로다. "나는 내 영혼 속에서 그와 같은 변화를 경험할 것이고 그래서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것이라." 우리는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그의 은총을 인하여, 즉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얻는 원조와 그 은총 안에서 얻는 만족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 것이다.
Ⅱ. 불평과 위로 42:6-11
여기서는, 자연의 운행에서 낮과 밤이 교차되듯이 불평과 위로가 교차되어 나온다.
(1) 그는 자기 영혼이 낙담하는 것을 불평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한다(6절). 그의 영혼은 낙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서 그 사실을 말씀드린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그는 종종 하나님을 기억하므로 위로받곤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도 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박해자의 격노를 피해 때로는 '요단땅'으로 도망가기도 하고 때로는 '헤르몬땅'으로 혹은 '미살'이라고 불리는 산으로 도망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나안땅 맨 가장자리에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그는 어디로 가든지 항시 신앙을 지니고 다녔다. 그는 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며 그와 은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거리와 시간 때문에 그가 그렇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고 마음으로 가까이 느끼고 있는 것을 잊을 수는 없었다.
(2) 그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의 표시들을 탄식하면서도 때가 되면 그의 은총이 돌아올 것을 기대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한다.
1) 그는 그의 근심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오는 것임을 보았고 그로 인해 낙담하였다(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즉 한 가지 고통 뒤에는 마치 급히 따라오라고 재촉이라도 받은 것처럼 또 다른 고통이 속히 뒤따랐으며 또한 주의 폭포 소리는 전쟁의 신호와 소리와 경보를 발하였던 것이다. 파도와 물결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많은 시험을 당할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바를 아시며 또 그 시험들이 이내 끝나리라는 것도 알고 계시다.
2)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오는 그의 구원을 기대하였다(8절). "그럴지라도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리라." 폭풍 뒤에는 평온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가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를 때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그가 찾는 모든 좋은 것의 원천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을 '명령하신다'(command)라고 되어 있다(한글 개역에는 '베푸신다'라고 되어 있다-역주). 이 말은 은총이 값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주권적인 방법으로 수여되는 것이다. 즉 그가 왕으로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인자함을 명령하심으로써 파도와 물결에 명령을 내리신다. 그러면 그것들은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는 이 일을 '낮에'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함은 아무 때라도 영혼 속에 낮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자함을 명령하신다면 그는 그 인자함을 열렬한 애정과 신앙으로써 환영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기뻐할 것이다.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거동하는 우리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위로의 장본인이시고 수여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기도로써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하는 것이다.
(3) 그는 그의 원수들의 무례함을 원망하면서도 그의 친구이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위로한다(9-11절). 그는 무례한 자처럼 갑자기 성을 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조용히 울면서 자신의 슬픔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그를 나무랄 수 없다. 진정으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마치 조국의 원수인 것처럼 핍박받게 된다면 그로 인해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다윗은 그 사실로부터 하나님이 자기를 잊으셨고 또한 내어버리셨다고 결론지어서는 안되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우리가 하나님께 하소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10절).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소망을 꺾고자 의도적으로 한 비난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반석이시라는, 즉 의지할 수 있는 반석이며 그리고 피할 수 있는 반석이시라는 사실이(9절) 그가 받은 위로이다. 그는 그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그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앞에서 한 말을(5절) 반복하여 말함으로써 끝맺는다(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러나 여기서 마침내 그의 신앙이 승리하여 그의 원수들로 하여금 전장에서 물라가도록 만들었다. 그는 앞에서 한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즉 앞에서처럼 그의 의기소침과 불안에 대해 자신을 꾸짖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의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자신을 격려함으로써 이러한 승리를 거둔다. 우리의 좋은 생각들을 되풀이하여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크게 유익할 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처음에 그러한 생각들로 효과를 얻지 못한다면 아마도 두 번째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바른 신학 바른 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