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주석 일러두기와 1장 풀이
차례
일러두기 28
1.1. “예레미야의 말이라”(1:1-3) 29
1.2. “열방의 예언자로 세웠노라”(1:4-10) 35
1.3. “무엇을 보느냐?”(1:11-19) 41
일러두기
1. 이 주석은 성경이나 성경 원어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지만 성경을 스스로 공부하려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쉽게 쓴 것이다.
2. 본문 주석에서는 맨 먼저 각 단락의 본문을 개역한글판에서 옮겨 적는다. 다음으로 본문 범위를 확정한 까닭, 또 본문의 짜임새와 흐름에 대해 짧게 다룬 뒤에 본문을 본격적으로 풀이한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깨닫는 메시지를 짧게 제시한다.
3. 개역한글판으로 본문을 인용할 때, 본문은 굵은 글씨로 적고, 본문에 나오는 고유명사는 고딕체로 적는다. 또 시문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쉬투트가르트판 비평판 히브리어 성경』(Biblia Hebraica Stutttgartensia)을 따라 줄을 바꾸어 적는다.
4. 본문 풀이에서 해당 본문의 개역한글판 번역문의 일부를 인용할 때는 따옴표를 따로 쓰지 않고 그냥 굵은 글씨로 표시한다.
5. 히브리 낱말을 우리말로 소리 나는 대로 적을 때에는 < > 안에 넣되, 그 음역을 처음 쓸 때에만 한글 음역 바로 뒤에 그 낱말의 영어 음역을 대한기독교서회 주석편집위원회에서 제시한 방식을 따라 적는다.
6. ‘여호와’는 개역한글판 본문을 인용하는 경우가 아닌 한, 대한기독교서회 주석편집위원회가 정한 원칙을 따라 ‘야웨’로 적는다.
7. 개역한글판을 개역성서라고 부른다.
8. 개역한글판 본문을 인용하는 경우가 아닌 한, ‘선지자’라는 말보다는 ‘예언자’라는 말을 쓴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1장 5절 풀이를 보라.
9. 연대는 John Bright, A History of Israel에서 제시한 연대표를 따른다
10. 한 절을 둘로 나누어 다룰 때는 앞부분을 ‘전반절’, 뒷부분을 ‘후반절’이라고 부른다. 괄호 안이나 각주에서 성경장절을 줄여서 쓸 때는 각각 ‘전’과 ‘후’라고 쓴다.
11. 개역성서의 장절표시와 다른 히브리어 성경의 장절표시는 [ ] 안에 적어 넣는다.
1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2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개역성서에서는 예레미야서의 첫 석 절을 1절(“베냐민 땅 … 예레미야의 말이라”)과 2절-3절 전반절(“아몬의 아들 … 말까지 임하니라”)과 3절 후반절(“이 해 오월에 … 사로잡히니라”)의 세 부분으로 끊어 옮겼다. 그렇지만,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첫머리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말’이라는 명사구를 중심으로 석 절 전체가 하나로 죽 이어져 있다. 이리하여 1장 1-3절은 예레미야서 전체의 제목으로 볼 수 있다. 예레미야서의 본론은 4절부터 시작한다.
히브리어 본문 1-3절의 첫 낱말을 직역하면 ‘말들’이고, 둘째 낱말은 ‘예레미야의’를 뜻한다. 이 두 낱말을 개역성서에서는 1절 끝에 예레미야의 말이라로 번역했다. 히브리어 본문의 첫 낱말인 ‘말들’은 예레미야서의 성격을 규정해주고, 그 다음 낱말인 ‘예레미야’는 이 책이 누구와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려준다. 1절의 나머지 부분은 예레미야의 출신 배경을 알려준다. 곧 베냐민 땅 아나돗에서는 예레미야의 출신지를, 제사장 중에서는 출신 신분을, 힐기야의 아들에서는 아버지 이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어 본문 2-3절은 관계문인데, 흔히 그 선행사를 예레미야로 보면서 예레미야에 대해 더 설명하는 부분으로 이해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무엇보다도 야웨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고, 뒤이어 그에게 야웨의 말씀이 처음 임한 때는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 삼년이고, 계속 임한 때는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이며, 마지막으로 임한 때는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힌 때이다. 그렇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2-3절의 관계문을 선행사가 포함된 관계문으로 보아 1절 전체와 동격을 이룬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 1 … 예레미야의 말들, 2-3곧 야웨의 말씀으로 그에게 … 임한 바”라는 식으로 1-3절을 이해할 수 있다.1)
아무튼 1-3절은 예레미야서의 성격, 중심인물, 그의 출신 배경, 야웨의 말씀과 그의 관계, 그의 활동 시기를 알려 준다.
예레미야서의 제목이라 할 수 있는 1-3절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를 다른 여러 예언서의 제목과 견주어 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 성경에 들어 있는 열다섯 권의 예언서 가운데서 에스겔서와 요나서와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경우에는 책의 첫머리가 곧바로 첫 본문의 도입부가 된다. 그 밖의 예언서에서는 그 첫머리가 각 책의 제목이라는 성격을 띤다. 여기서 다시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나머지 예언서에서 첫 둘 또는 한 낱말의 형식이 서로 비슷한 것끼리 모아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해 보면 아래와 같다.
㈀ 첫 두 낱말이 ‘야웨의 말씀(<다바르>, dabar)’인 경우
- “유다의 왕들인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와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야웨의 말씀”(호 1:1)
-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야웨의 말씀”(욜 1:1)
- “유다의 왕들인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그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야웨의 말씀”(미 1:1)
-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시대에 히스기야의 아들 아마랴의 아들 그다랴의 아들 구스의 아들 스바냐에게 임한 야웨의 말씀”(습 1:1)
㈁ 첫 두 낱말이 ‘아무개의 말(<다바르>)들’인 경우
- “드고아의 목자들 가운데 있었던, 유다의 왕 웃시야의 시대와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에, 지진 이전의 둘째 해에 이스라엘에 관하여 보았던, 아모스의 말들”(암 1:1)
㈂ 첫 두 낱말이 “아무개가 ‘본 것’(<하존>, hazon)” 경우
- “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유다의 왕들인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에 본,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본 것”(사 1:1)
- “오바댜가 본 것”(옵 1:1)
㈃ 첫 낱말이 ‘엄중한 말씀’(<맛사>, massa)인 경우:
- “니느웨의 엄중한 말씀, 엘고스 사람 나훔이 본 것의 책”(나 1:1)
- “예언자 하박국이 본 엄중한 말씀”(합 1:1)
- “엄중한 말씀, 말라기를 통한, 이스라엘에 대한 야웨의 말씀”(말 1:1)
아무튼 각 예언서 히브리어 본문의 첫 둘 또는 한 낱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위 ㈀의 경우에는 호세아, 요엘, 미가, 스바냐에 적힌 것이 ‘야웨의 말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야웨의 말씀’이란 표현은 예언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그리하여, 이를 꾸미는 관계문의 표현 형식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이런 형식의 제목은 근본적으로 각 책이 실제로는 호세아 예언집, 요엘 예언집, 미가 예언집, 스바냐 예언집이라는 점을 뜻한다. ㈁의 경우는 ‘말’이 복수형이고, 그 말에 걸리는 속격이 야웨가 아니라 예언자 아모스인 점에서 ㈀의 경우와 구별된다. ㈂의 경우는 어떤 예언자가 ‘본 것’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한 점에서 ㈀보다는 ㈁에 더 가깝다. ㈃의 경우 히브리 명사 <맛사>를 ‘엄중한 말씀’으로 옮긴 것은 예레미야 23장 33-40절 개역한글판의 번역을 따른 임시 방편인데, 이 낱말 뒤에 나훔에서는 ‘니느웨’라는 도시 이름이, 하박국에서는 관계문이, 말라기에서는 ‘야웨의 말씀’이 덧붙어서, ㈀과 ㈁과 ㈂보다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이 가운데서 예레미야서와 가장 가까운 경우는 ㈁이다.
예레미야 1장 1-3절은 위에 적은 다른 여러 예언서의 제목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길다. 이는 무엇보다도 예레미야에게 야웨의 말씀이 임한 때를 앞에서 말한 대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자세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예레미야의 활동 시기가 예레미야서 이해에 중요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아모스서의 경우처럼 예레미야서 히브리어 본문의 첫 낱말은 말(<다바르>)의 복수형으므로, 이는 ‘말들’(words)이라고 옮김직하다. 그런데, 이 낱말은 때때로 ‘일’, ‘사건’을 뜻하기도 한다. 또 ‘예레미야의 말들’이라고 할 때, ‘예레미야의’는 ‘예레미야가 한’을 뜻할 수도 있고, 위 ㈃에 들어 있는 나훔서의 경우처럼 ‘예레미야에 관한’을 뜻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의 <다바르>들’이라 할 때 예레미야가 한 말이나 일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에 관한 말들이나 일들을 통틀어 일컫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동번역에서 ‘<다바르>들’을 ‘일대기’로 옮긴 것은 예언서를 그저 예언자의 전기로 오해하게 할 수 있으므로 동의하기 힘들지만, Lundbom이 ‘유산’(legacy)으로 번역한 것은 괜찮아 보인다. 왜냐하면, 예언서는 단순히 한 예언자의 예언을 모아둔 것만이 아니라, 그 예언자가 말과 삶으로 선포한 내용을 중심해서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전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역성서에서 예레미야로 적은 히브리 고유 명사 <이르므야후>(yirmeyahu)가 본디 어떤 뜻을 지니는지 정확히 알기가 힘들지만, “야웨께서 일으켜 세우시기를!”이나 “야웨께서 높이시기를!”를 뜻한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예레미야의 출신지 베냐민 땅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십 리쯤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이 곳은 실로의 제사장 엘리의 후예로서 다윗 때는 법궤까지 메었던 아비아달이 다윗이 죽은 뒤에 스스로 임금이 되려고 했던 아도니야의 편을 들다가 솔로몬의 미움을 받아 유배된 고향이기도 하다(삼하 15:29; 왕상 1:7; 2:26-27). 유배 사건 이후 아비아달의 후손들은 사독의 후손을 중심한 예루살렘 제사장들과는 달리 유다 종교계의 가장자리에서 목숨을 이어가게 된다.
예레미야를 가리켜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이라 할 때, 흔히 이것이 예레미야가 바로 이 아비아달 제사장의 후예임을 암시한다고 이해한다. 그리하여 아비아달의 선조 엘리가 제사장 노릇하던 곳이 실로이고, 벧엘과 세겜 사이에 있는 이 실로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해 있었던 곳이므로, 예레미야의 뿌리는 북왕국 땅에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미 솔로몬이 아비아달을 고향 아나돗으로 내쫓으면서 야웨의 제사장 노릇을 하지 못하게 했다(왕상 2:27)고 할 때, 그 조치가 예루살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또 아나돗은 본디 레위 지파 족장들이 받은 성읍 가운데 하나였다(수 21:18)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나돗에는 아비아달과 상관없이 제사장 집안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달리는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나누어진 뒤에 북왕국의 성소 단과 벧엘의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제사장들이 일찍이 남쪽으로 넘어와 아나돗에 정착했을 수도 있고, 북왕국이 망한 뒤 남왕국으로 온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아나돗에 자리잡은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Herrmann 14-15). 아무튼 예레미야가 북왕국 전통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이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북왕국에서 활동했던 예언자 호세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레미야가 제사장 집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에스겔과 비슷하다(겔1:3). 그렇지만 예레미야가 제사장 직무를 수행했다는 보기는 어렵다. 요시야 왕은 아나돗보다 더 북쪽에 있는 게바에 이르기까지 정화 운동을 일으켜 각 성읍 산당에서 활동하던 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지 못하게 했으므로(왕하 23:8-9), 예레미야로서는 제사장직에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예언자로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여러 가지 면에서 아나돗 출신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의 주류 계층에 속하지 못한 사람으로 유다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가 요시야 시대 개혁 운동에 크게 관여했던 대제사장 힐기야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왕하 22-23장).
2-3절은 예레미야를 야웨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2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라고 할 때, ‘임하다’로 옮긴 히브리 동사 <하야>(haya)는 어떤 사건이 일어남을 뜻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예언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이어서 “여호와의 말씀이 아무개에게 임했다”함은 야웨께서 아무개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말한다. 아무개에게 말씀 계시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 표현은 구약 예언서 가운데서는 에스겔서(1:3; 3:16; 6:1; 7:1; 11:14; 12:1,8,13,21,26; 13:1; 14:2,12; 15:1; 16:1; 17:1,11; 18:1; 20:2,45; 21:1,8,18; 22:1,17,23; 23:1; 24:1,15,20; 25:1; 26:1; 27:1; 28:1,11,20; 29:1,17; 30:1,20; 31:1; 32:1,17; 33:1,23; 34:1; 35:1; 36:16; 37:15; 38:1)와 예레미야서(1:2,3,4,11; 2:1; 13:3,8; 14:1; 16:1; 18:5; 24:4; 25:3; 28:12; 29:30; 30:1; 32:1; 32:6,26; 33:1,19,23; 34:8,12; 35:1; 36:1,27; 37:6; 39:15; 42:7; 43:8; 44:1; 46:1; 47:1; 49:34. 또 11:1; 18:1; 21:1; 25:1; 26:1; 27:1; 34:1; 40:1도 참고하라)와 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많은 경우에 이 표현은 유다 왕국 멸망 직전과 직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건과 관련하여 쓰이면서, 말씀 계시가 하나님의 백성이나 예언자의 삶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거의 전 생애를 통해, 또는 학개의 경우처럼 페르시아 왕 다리오 2년 6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단지 넉 달이라는 짧은 기간(학 1:1; 2:10,20) 동안이라 하더라도, 여러 번 야웨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면, 그는 예언자이다. 그리하여 야웨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일이 2절에서처럼 그 사람의 생애에 맨 처음 일어났을 때, 이는 그가 야웨의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예레미야에게 이런 사건이 처음으로 벌어진 때를 2절은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 삼년이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때가 주전 627년임을 알 수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때(주전 722/1년)로부터 거의 백 년 뒤에 북왕국 지역에서 제사장 노릇하던 집안의 후손 예레미야를 야웨께서는 이제 그 말씀의 일꾼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어 3절에서는 이 말씀 계시 사건이 또한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까지 임했다고 하면서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라고 하는데, 이는 시드기야 제 십 일년 오월에 유다가 멸망했음을 뜻한다. 이 경우 예루살렘은 유다 백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가리킨다. 이런 어법은 2장 2절을 비롯해서 예레미야서에 자주 나온다.
여호야김이 유다에서 왕 노릇한 때는 주전 609-598년이다. 유다 멸망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는 39장과 51장을 보면, 군대를 끌고 유다로 쳐들어온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시드기야 9년 10월에 예루살렘을 에워싸서(39:1; 50:4) 11년 4월 9일에 함락했다(39:2; 50:6). 그런데 1장 3절에서 시드기야 11년 5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혔다고 한 것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한 달 쯤 지난 5월 초순에 바벨론의 어전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과 왕궁과 귀족들의 집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전역을 불사르고 성벽을 헐어버린 뒤에 상류층에 속한 유다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간 때(52:12-27; 왕하 25:8-17)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시드기야 제 십 일년 말과 예루살렘이 망한 오월이 서로 조금 어긋나 보이지만, 말(末)로 옮긴 히브리 낱말이 시드기야의 통치가 끝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가 주전 587년이어서, 예레미야는 유다가 망하기 40년 전부터 유다가 망할 때까지 여호와로부터 말씀을 계시 받은 것으로 예레미야서의 제목이 일러준다.
2-3절에서 주전 640-609년에 유다를 다스렸던 요시야의 이름이 세 번이나 나옴으로써, 요시야가 남왕국 유다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크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왕하 21:24-23:30; 대하 33:25-34:26). 신하들에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 아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요시야는 유다가 남북의 강대국들이 당시 중동 세계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던 틈새를 비집고 야웨 신앙의 토대 위에서 국가 중흥의 꿈을 품고 이를 실현해보고자 애썼던 마지막 왕이었다. 이 요시야의 이름이 3절에서 두 번 나오는 데서 여호야김과 시드기야가 형제 사이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열왕기하 23장 36절과 24장 18절에 따르면, 이복형제인 이 두 사람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두 왕이지만, 이 둘이 왕위에 오른 과정에서 유다 왕국이 멸망 직전에 겪었던 비극적인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주전 609-598년에 왕 노릇했던 여호야김은, 아버지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른 배다른 형 여호아하스를 애굽으로 사로잡아간 애굽 왕이 유다 왕으로 삼은 사람이라면(왕하 23:30-34), 주전 597-587년에 유다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여호야김이 죽은 뒤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뒤에 바벨론 왕이 유다 왕으로 삼은 사람이다(왕하 24:15-17). 이리하여 요시야가 죽은 뒤부터 유다 왕국은 남북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실질적인 자주성과 독립성을 잃은 나라로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밖에 예레미야가 살던 때가 어떤 시대였는지에 대해서는 서론 ‘4.1. 예레미야의 시대’를 참고하라.
야웨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 때로 요시야 십 삼년과 여호야김 시대와 시드기야 시대를 밝히고 있는 데서는 또한 예레미야가 주로 활동한 때는 요시야 때가 아니라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때라는 암시를 받는다. 실제로, 요시야 십 삼년에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은 일단 1장 4-19절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명백하게 요시야 시대에 야웨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은 3장 6절에 나올 따름이다. 다만 여호야김에 대한 예언 가운데 들어 있는 22장 11절, 15-16절에 요시야가 언급된다. 이와는 달리,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때에 예언 활동했음을 알려주는 본문은 여럿이다(22:13-19; 25-26장; 35-36장; 45-46장). 마찬가지로 시드기야 시대와 관련된 본문도 여러 번 나온다(21장; 24장; 27-29장; 32-34장; 37-39장; 49:34-39; 51:59-64). 이처럼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해가는 위태로운 상황에 예언자로 활동해야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예레미야 1장 2-3절에서 이상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요시야에서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유다에서 왕노릇한 사람으로는 요시야와 여호야김 사이에 여호아하스가, 또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사이에 여호야긴이 있는데, 이 두 왕의 이름이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 이는 예레미야가 주로 활동했던 때가 바로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시대였고,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긴은 각각 석 달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유다를 다스렸을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왕하 23:31; 24:8). 그렇지만,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서는 여호아하스(22:11-12)와 여호야긴(22:24-30)에 관한 것도 들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예레미야서 39-44장을 보면 유다가 망한 다음에 예레미야가 겪은 일들과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나온다. 이로 보면, 아마도 1장 1-3절의 제목은 그런 부분이 덧붙기 전에 생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메시지
첫째, 예레미야서의 제목은 우선 예언서가 어떤 책인지, 어떤 관점에서 예언서를 읽어야 할지를 일러준다. 예언서는 남달리 신앙심이 깊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내용을 적어 놓은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한 대로 예언자가 말한 바, 하나님이 그 예언자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려고 한 바를 적어 놓은 책이다. 따라서, 오늘 예레미야서를 읽는 사람이 예언자 예레미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예언자라기보다는 그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를 통해 하나님이 알려주시고자 하셨던 뜻이다. 성경은 위대한 신앙인들의 전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에게 전하시고자 한 뜻을 적어 놓은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계시의 통로나 도구를 계시의 내용보다 더 중요하게 볼 수는 없다.
둘째, 예레미야서의 제목에 따르면, 예언자는 야웨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다. 개신교 전통에서 오늘의 예언자는 특별히 말씀 선포의 직무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고 전문 훈련을 받은 사람인 교역자이다(행 6:4 참고).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 말씀의 일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말씀의 일꾼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로잡아 당신의 뜻을 계시해주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어떤 사람이 자신의 뜻을 따라 열심히 추구한다고 해서 말씀의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이처럼 예레미야의 출신 배경과 활동 시기를 알려주는 예레미야 1장 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인간 역사 한 가운데서 인격을 지닌 사람을 통해서 계시되고 선포됨을 깨닫는다. 본문의 경우 예레미야는 서너 세대 전에 망해버린 북왕국의 전통에 서서 이제 남왕국이 망하기 전 40여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로 나타난다. 이처럼 오늘 말씀의 일꾼된 교역자들과 평신도들과 각자의 출신 배경과 처한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소홀히 여길 수 없다.
넷째, 특히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망해가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이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비주류에 속하는 예레미야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고 전하게 하셨듯이, 오늘도 교회 공동체와 민족 공동체와 세계 공동체가 망해가는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은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당신의 일꾼들을 세워 당신의 뜻을 알리려 하실 수 있다.
다섯째, 여러 왕의 시대에 걸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듯이, 교역자이든 평신도이든 오늘 말씀의 일꾼들도 삶의 터전에서 시대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늘 새롭게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을 수 있어야, 말씀의 일꾼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다.
4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8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4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는 예레미야서의 본론이 시작됨을 알려주는데, 말씀 계시 사건을 알려주는 이 어구가 11절에 다시 나옴으로써, 4절에서 시작한 단락은 일단 10절로 끝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야웨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중심 내용이므로 이를 예레미야의 소명 보도문이라고도 부른다. 그렇지만, 보통은 뒤이어 마찬가지로 일인칭 보도문 형식으로 두 환상에 대해 다루는 부분까지 한데 묶어 4-19절을 소명 보도문이라 하는 수가 많다. 이는 몇몇 다른 예언자의 소명 과정에도 환상이 들어 있을(사 6:1; 겔 1장; 암 7:1-9; 8:1-3; 9:1-4 등) 뿐만 아니라, 12절의 ‘내 말’이 9절의 ‘내 말’과 이어지고, 이미 앞서 7-8절에 나왔던 선포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17-19절에서 다시 한 번 다루되 앞에서보다 더 자세히 다룬다는 점에 잘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단 4-19절을 편의상 4-10절과 11-19절의 둘로 나누어 차례로 살펴보고, 19절까지 다 다룬 뒤에 4-19절 전체에 대해 정리해 보기로 한다.
4-10절은 도입부(4절),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세우신다는 야웨의 말씀(5절),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물러서는 예레미야의 대꾸(6절), 예레미야의 뜻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가서 말하라 명령하며 함께 하리라는 약속으로 격려하시는 야웨의 말씀(7-8절), 말씀을 맡기신다는 상징적인 행동을 하시면서 예레미야를 세우신 뜻을 다시 분명히 하시는 야웨의 말씀(9-10절)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말씀 계시 사건을 표현하는 첫머리 4절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는 야웨께서 예레미야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인 5절뿐만 아니라, 7-8절과 9절 하반절-10절에서 야웨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 심지어는 야웨의 말씀에 대해 예레미야가 6절에서 대꾸한 것까지 포함하여 5-10절에서 묘사하는 전체 사건을 염두에 둔 도입부로 이해할 수 있다.
5절 전반절에서 야웨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자신이 일찍이 그를 예언자로 삼았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라고 하심은 야웨께서 예레미야를 그의 어머니 뱃속에서 만드시기도 전에, 또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그를 야웨의 일꾼으로 뽑으시고 정하셨음을 뜻한다(갈 1:5 참고). 이 구절에서 개역성서가 ‘알다’로 번역한 히브리 동사 <야다으>(yada‘)가 에스겔서(86번) 다음으로는 예레미야서(72번)에 가장 많이 나오는데, 이 낱말은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구체적인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창세기 18장 19절의 경우처럼 야웨께서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어떤 사람을 뽑으신다는 뜻을 지닌다. ‘구별하다’라는 우리말로 옮긴 히브리 낱말은 본디 ‘거룩하게 하다’는 뜻을 띠므로, 개역개정판을 따라 ‘성별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아무튼 구약성경에서 ‘거룩하다’ 함은 사람이나 물건이 나날의 쓰임새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쓰시는 것으로 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제 야웨께서는 예레미야를 야웨의 것으로 쓰시기로 하신 것이다. 그 근거는 쓰임을 받는 사람의 어떠한 품성이나 기질이나 신앙에 있다기보다는, 오로지 그저 스스로 좋으신 대로 아무개를 뽑아 쓰시는 야웨 하나님께 있다.
예레미야서에 처음으로 나오는 야웨의 말씀인 이 5절 전반절에 여성 이미지를 품고 있는 대표적인 낱말인 ‘태’와 ‘배’가 쓰이고 있다는 점을 지나쳐볼 수 없다.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삼으신 야웨와 예레미야의 내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곳은 다른 데가 아니라 여성만이 지니고 있는 기관인 태, 곧 자궁이었음을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다(Bauer 14).
이렇게 예레미야를 일찍이 뽑아 쓰시기로 하신 야웨께서 5절에서 내가 …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면서 예레미야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신다. 야웨께서는 예레미야가 선지자(先知者)로 일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여기 쓰인 히브리 낱말 <나비>(nabi’)의 어원을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부르다’를 뜻하는 악카드 말에서 이 히브리 낱말이 비롯된 것으로 보면서 <나비>가 ‘부름받은 자’를 뜻하리라는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나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315번 나오는데, 예레미야서에 95번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 이는 예언자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레미야의 시대에 중요한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였음을 암시한다.2) 아무튼 이 <나비>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나비>를 ‘선지자’로 옮기는 것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선지자’라 하면 그냥 앞일을 미리 아는 사람, 그리하여 무슨 일이 앞으로 일어날지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만 이해하기 쉬운데, 구약성경의 <나비>는 앞날의 일 뿐만 아니라, 지금과 지난날의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지니신 뜻을 하나님으로부터 깨우침 받아 알고 전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비>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말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 때 그 때 이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선지자’라고 하기보다는 ‘예언자’로 부르는 것이 더 낫고, 그것도 미리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는 ‘예언자(豫言者)’보다는 말씀을 맡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예언자(預言者)’라고 옮김이 더 좋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셨다 함이 언뜻 듣기에 이상하다. 구약성경에서 열방이란 보통 야웨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뺀 나머지 민족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러 나라’를 뜻하는 한잣말 열방(列邦)은 히브리 낱말 <고이>(goy)의 복수형이고, 그 단수형 <고이>가 이스라엘에도 쓰인다(출 19:6; 신 26:5; 렘 5:9 등). 또 글의 흐름으로 보더라도, 예레미야 1장 5절의 <고임>은 남왕국 유다를 포함하여 모든 민족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함이 좋다. 개역성서에서도 예레미야 18장 7절과 9절에서는 <고이>를 ‘민족’으로 번역했고, 그밖에 5장 9절과 15절 등에서도 이 낱말을 ‘민족’으로 이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야웨께서는 예레미야를 자기 백성을 포함하여 그 당시의 온 누리에 대해서 야웨의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으로 세우셨다. 사실 예레미야서에는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 대한 예언들도 곳곳에 나온다. 특히 25장과 46-51장에 열방에 대한 여러 가지 말씀들이 모아두었고, 그 밖에도 여기저기서(9:25-26; 12:14-17; 43:8-13) 열방이 언급된다. 다른 예언서에서도 열방에 대한 예언을 찾아볼 수 있다(사 13-21; 23; 겔 25-32; 암1:1-2:3; 욜4; 미4-5; 7; 습2; 학2; 슥2;9; 11-12; 14 등)(Huwyler 2-3). 이는 하나님 백성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운명이 다른 여러 나라의 움직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던 점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는 온 누리의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 백성의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하나님 좋으신 대로 다스리신다는 점도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만, 어떤 예언자를 열방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은 예레미야의 경우밖에 없다. 이는 아마도, 하나님 백성의 운명을 세계 역사를 움직여나가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일찍이 열방의 예언자로 삼으셨다는 야웨의 말씀을 듣고 6절에서 예레미야는 당황한다. 6절 첫머리에서 슬프도소이다라고 옮긴 히브리 낱말 <아하흐>(’ahah)는 어떤 좋지 못한 일이나 상황을 당하여 놀라고 당황하여 탄식하여 내뱉는 외마디소리이다. 개역성서 에스겔 4장 14절에서는 이 낱말을 ‘오호라’라고 옮겼다.
주 여호와에서 주에 해당하는 히브리 낱말 <아도나이>(’adonay)는 ‘내 주’로 직역할 수 있지만, 이 낱말이 호칭으로 쓰일 때는 그저 ‘주님!’으로 옮겨야 우리 말투에 어울린다. 이 낱말의 기본꼴인 <아돈>(’adon)은 본디 ‘주인’, ‘명령권자’를 뜻하는 말로, 구약 성경에서는 야웨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쓴다. 이 <아도나이>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야웨와 나란히 쓰이는 경우는 에스겔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데(217번), 에스겔서에서 ‘주 여호와’는 주로 예언자가 야웨의 말씀을 선포할 때 맨 먼저 앞세우는 어구인 “이같이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도다”(2:4을 비롯하여 122번, 이 어구에 대해서는 아래 렘 2:2 풀이를 보라)나 예레미야 1장 8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말’(<느움 아도나이>, ne’um ’adonay)의 확장 형태 가운데 하나인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5:11을 비롯하여 81번)에 들어 있고, 더러는 예언자가 “오호라(<아하흐>) 주 여호와여”라고 탄식하면서 야웨를 부를 때 쓰인다(4:14; 9:8; 11:13; 20:49[히브리 성경의 21:5])3). 이 마지막 경우가 히브리어로는 예레미야 1장 6절의 경우와 같은데, 예레미야서에는 세 번(4:10; 14:13; 32:17) 더 나온다. 그 밖에는 여호수아가 야웨께 아뢸 때(수 7:7)와 기드온이 야웨의 사자에게 말할 때(삿 6:22) 이 표현을 썼다. 자기를 열방의 예언자로 야웨께서 세우셨다는 말을 들은 예레미야의 입에서 맨 먼저 “오호라 주 여호와여”라는 말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예언자가 된다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슬프고 탄식할 만한 일로 생각하고 있음을 뜻한다.
뒤이서 예레미야는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고 아룀으로써 예언자 직책이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다고 대꾸한다. 보소서로 옮긴 히브리 낱말 <힌네>(hinne)는 보통 ‘보라’(1:9,18; 3:5; 4:13 등)로 번역하지만, 이는 동사 ‘보다’의 명령형이 아니라, 어떤 문장의 맨 앞에 나와서 바로 뒤의 명사나 문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든지, 아니면 명사나 대명사나 지각동사 앞뒤에 와서 그 앞뒤의 낱말이나 문장에 대해 듣는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기를 요청하는 불변사인데, 구약 성경에서는 예레미야서에 가장 많이 나온다(전체 1057번 중에 138번). 1장 6절의 경우에는 이 낱말이 특히 나는 … 알지 못하나이다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 경우 ‘알다’는 앞 5절의 경우와는 달리,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춤을 뜻한다. 우리말에서도 ‘알다’가 그런 뜻으로 쓰이는 수가 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예레미야가 대꾸한 것을 보면, 예레미야는 예언자란 말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여기서 아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나이의 사람을 가리키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으나, 이 때 예레미야가 아직 청소년기에 있었으리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7절에서 야웨께서는 이렇게 대꾸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 하시면서 물리치신다. 아직 어린 아이이므로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은 예언자가 될 수 없는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는 점을 깨우쳐 주신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고 명령하시면서, 예언자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똑똑히 일러주신다. 곧 예언자는 야웨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누구에게든지 가서, 야웨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그저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신다.
이어서 8절에서 야웨께서는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하신다. 앞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까닭이 말할 줄 모르는 데에만 있지 않았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예언자 노릇하자면 예언자를 거스르고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예레미야도 잘 알고 있었고, 그 사람들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예레미야에게도 있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다. 다만 한 가지, 여기 갑자기 나온 ‘그들’이 누구인지 얼른 알 수 없다. 1장을 죽 읽어 가면 맨 뒤 16-19절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우상을 섬기는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이 이 그들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야웨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대상으로는 아브람(창 15:1), 이삭(창 26:24), 야곱(창 46:3), 모세(민 21:34; 신 3:2), 여호수아 (수 8:1; 10:8; 11:6), 기드온(삿 6:23), 유다 왕 히스기야(사 19:6=사37:6), 아하스(사 7:4), 에스겔(겔 2:6; 3;9), 다니엘(10:12), 이스라엘 또는 유다 백성(신 7:18; 20:1; 사 10:24; 40:10,13; 43:1,5)이 있다. 예레미야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야웨께서는 예레미야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근거로서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고 약속하신다. 구원하리라는 말은, 야웨께서 함께 하셔서 예언자가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겠다는 점을 뜻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창세기 26장 24절에서 야웨께서 이삭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이사야 41장 10절과 43장 5절에서 야웨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또 예레미야 30장 10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11절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리라”고 하신다.
1장 8절 마지막의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표현은 <느움 아도나이>, ne’um ’adonay)로서 그 안에 ‘나’라는 말은 없다. 개역성서에는 글의 흐름을 따라 하나님을 가리키는 ‘나’를 넣어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느움 아도나이>를 개역성서에서는 그 위치와 문맥에 따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19; 2:3 등), “여호와의 말씀에”(9:22; 23:33 등), “여호와가 말하노라”(3:1; 31:31 등), “여호와께서 가라사대”(4:1; 13:25 등),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5:22; 6:12 등),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1:15; 2:29 등),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5:9; 18:6 등),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2:22)의 여러 가지로 번역한다. 그렇지만, 이는 보통 ‘여호와의 말씀’이라 번역하는 <드바르 아도나이>(debar ’adonay)와 그 뜻이 비슷하면서도 그 첫 낱말이 다른 명사구이므로, ‘여호와의 발언’ 정도로 번역함직 하다. <느움 아도나이>는 구약의 예언서 가운데에서 예레미야서에 가장 자주 쓰이는데(175번), 때로는 한 단락이나(2:3; 3:10,13 등) 절의 끝에서(1:8; 2:12; 3:1 등), 때로는 중간 곧 전반절의 끝에서(1:15; 2:9; 5:9 등), 심지어는 한 절의 시작부분인 전반절의 낱말 사이나(3:12; 4:9 등) 후반절의 낱말 사이에서(1:19; 16:5 등)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이 야웨의 말씀임을 상기시키면서 강조한다.
9절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삼으셨음을 말로만 알리시지 않고 행동으로 확실히 하심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예레미야에게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하신 말씀하신다. 이는 신명기 18장 18절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실 예언자의 입에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두리라 하신 바를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라’는 말을 앞세워 뒤이어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킨 뒤에, 야웨 몸소 당신의 여러 말씀을 예언자의 입에 두셨다고 하신다. 야웨의 이런 상징행위와 그 뜻을 알려주는 말씀에서, 예언자란 야웨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
10절은 앞서 예레미야를 열방의 예언자로 세우셨다 함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조금 더 잘 밝혀준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에서 보라는 ‘보다’를 뜻하는 히브리 동사의 명령형을 번역한 것이므로, 앞 6절의 보소서나 9절의 보라와는 다르다. 그렇지만, 그 기능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보소서 …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라는 말씀은 앞 5절에서 내가 …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신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5절의 ‘세우다’는 본디 ‘주다’를 뜻하고, 10절의 ‘세우다’는 ‘임명하다’는 뜻을 지닌다.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는 예레미야가 선포해야 할 재난 예언과 관계있고, 건설하며 심게는 예언자가 선포할 구원 예언과 관련시켜 볼 수 있다. 예언자는 야웨께서 시키시는 대로 열방 만국에 재난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구원을 선포하기도 한다. 재난을 뜻하는 이 네 가지 동사와 구원을 뜻하는 두 가지 동사는 예레미야서에서 부분적으로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여러 번 나타난다(12:14-17; 18:7,10; 24:6; 31:28; 42:10; 45:4).
더러는 이 10절을 예레미야서 전체의 짜임새를 이해하게 하는 틀로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브루거만(W.Brueggemann)의 예레미야서를 두 권으로 나누어 주석하면서, 1-25장을 주석하는 제1권의 제목을 “뽑으며 파괴하려고”(To Pluck Up, to Tear Down)로, 26-52장을 주석하는 제2권의 제목을 “건설하며 심으려고”(To Build, to Plant)로 붙였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재난과 구원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복합적으로 얽혀 나오는 예레미야서의 구조를 이렇게 단선적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메시지
구약의 예언자는 한 마디로 ‘말씀의 일꾼’(눅 1:2 참고)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의 일꾼은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보내심을 받아 되는 것이지,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말씀 선포의 직책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대로, 시키시는 대로 말하는 직책이지, 사람의 어떤 자질이나 능력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말씀의 일꾼에게는 두려워할 만한 반대자들과 박해자들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그를 말씀의 일꾼으로 삼아 당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보내시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구원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그에게 들려주신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을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을 다스리시므로, 선포해야 할 말씀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선포할 말씀의 내용에는 재난과 구원의 두 가지가 있다. 오늘의 선포자들이 주로 구원에 대해서만 말하고 재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면, 예언의 두 가지 중요한 전통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다.
11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14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15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16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17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18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에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19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1절 첫머리의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는 새 단락이 시작됨을 알려준다. 같은 어구가 13절에도 나오므로, 11-12절이 하나의 독립 단락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13절에서 시작된 새 단락이 개역성서에서는 14절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15절 첫머리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표현(<느움 아도나이>, 이에 대해서는 위 8절 풀이를 보라)은 15절 전반절 끝에 삽입되어 있을 따름이고, 내용으로 보더라도 15절 이하는 13-14절의 계속인 것이 분명하고, 그 흐름은 1장 마지막 19절까지 이어진다. 이리하여, 11-12절과 13-19절은 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두 단락이 모두 예언자가 본 ‘무엇’에 대해서 야웨께서 물으시는 것으로 시작하여 앞에서는 예언자를 격려하시고, 뒤에서는 예언자가 전해야 할 말씀의 내용을 일러주시면서 다시 한 번 그를 격려하는 말씀으로 끝나는 점에서, 서로 긴밀히 이어진다. 이리하여 11-19절을 한데 묶어 다루기로 한다.
11-12절은 도입부에 이어 야웨께서 예레미야에게 그가 무엇을 보는지 물으시고, 예언자가 살구나무 가지를 본다고 답하자, 그 뜻을 야웨께서 풀이해주시는 식으로 되어 있다. 13-16절의 짜임새도 이와 비슷하다. 13절 첫머리 도입부에 이어 야웨께서 예레미야에게 그가 무엇을 보는지 물으시고, 예레미야가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본다고 답하자, 14-16절에서는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야웨께서 알려주신다. 그 다음 17절의 전반절에서 예레미야는 다시 한 번 야웨로부터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데, 그 내용이 앞 7절 후반절과 비슷하다. 17절 후반절-19절은 내용으로 보아 8절을 확대한 것처럼 보인다.
앞 4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1절과 13절에서 예레미야에게 임한 야웨의 말씀은 각각 11-12절과 13-19절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10절, 11-12절, 13-19절에서 묘사하는 계시의 사건이 한꺼번에 잇달아 일어났는지, 어느 정도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세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1절에서 야웨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고 물으신다. 뒤이어 예레미야가 대답하고, 12절에서 다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개역성서의 난외주(欄外註)에서 밝히고 있듯이, 살구나무와 ‘지키다’를 뜻하는 히브리말의 발음이 비슷함을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그 가지를 보았다고 대답할 때, 살구나무라고 옮긴 히브리 명사 <샤켓>(shaqed)은 이스라엘 땅에서 자라는 나무 가운데 가장 일찍 꽃을 피우는 ‘감복숭아 나무’(공동번역)를 가리킨다. 그 다음에 나오는 야웨의 말씀에서 지켜로 옮긴 분사형 히브리 동사는 <쇼켓>(shoqed)이다. 이처럼 발음이 비슷한 두 낱말을 나란히 써서, 중요한 뜻을 전달하고 있는 점을 한글 번역에서는 도저히 살려낼 수가 없다.
이리하여, 11-12절에서는 이 두 낱말을 한데 씀으로써, 살구나무가 한 해 이른 때 꽃피우기 위해 깨어 있듯이 야웨께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깨어 살피실 것이므로, 예언자 된 사람이 그에 대해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곧 야웨 스스로, 그 맡기신 말씀의 성취를 보증하신다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흔히 예레미야가 환상 가운데 살구나무를 보고 있었다고들 보지만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예레미야가 어느 날 그냥 살구나무를 보고 있는 순간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언서에서 환상을 본 사건에 대해서 말할 때는 예레미야 24장 2절이나 아모스 7장 1절 같은 데서처럼 “주께서 내게 … 을 보이셨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1장을 통틀어 볼 때, 예레미야에게 세 번째로 임한 야웨의 말씀 또한 두 번째의 경우처럼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고 야웨께서 13절에서 예레미야에게 물으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번에 예레미야가 보고 있던 것은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이다. 여기서 ‘가마’는 ‘솥’(공동번역, 표준새번역)으로 옮길 수도 있다. 이 경우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가마나 솥을 반드시 환상 중에 보고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마 예레미야는 길을 가다가 어떤 집 앞의 아궁이에 걸려 있는 솥의 모습이 그러한 것을 보았을 것이다. 바로 그 때에 야웨께서 이 모습이 뜻하는 바를 일러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야웨께서는 이것이 재앙이 북방에서 … 임하리라는 사실을 뜻한다고 14절에서 알려주신다. 재앙이 북방에서를 히브리어 본문의 어순을 통한 강조법을 살려 다시 번역한다면, ‘북방에서 재앙이’로 해야 한다. 이처럼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북방에서를 강조하고 있다. 그 재앙의 내용을 15절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곧, 야웨께서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불러들이셔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유다 모든 성읍을 치게 하시리라는 것이다. 예레미야서 앞부분, 특히 4-6장에서 북방에서부터 닥치는 적에 대한 내용이 여러 번 나올 정도로 이것이 중요한 주제가 된다. 북방에서 밀어닥칠 나라가 바벨론이라는 것은 나중에, 20장 5절 이후에서 밝혀진다. 그렇지만, 1장 15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북방 나라 족속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서 그런 재앙을 불러들이시겠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이라고 아주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북쪽’(<차폰>, tsapon)이라는 낱말은 모두 152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25번이 예레미야서에 들어 있다. 이는 이 낱말이 46번 나오는 에스겔서 다음으로 자주 쓰이는 경우인데, 그만큼 예레미야서에서 이 낱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북쪽’이 예레미야서에도 여러 가지 경우에 쓰이지만, 무엇보다도 유다를 치러 오던 적군들의 출발지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이는 경우가 가장 중요하다(4:6: 6:1,22 등)4).
야웨께서 이런 재앙을 일으키시려는 까닭이 16절에 적혀 있다. 무리가 나를, 곧 야웨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긴 모든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무리, 곧 앞에서 말한 것처럼, 히브리어 본문의 그들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 다만, 글의 흐름으로 볼 때 15절에서 말한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에 사는 사람들, 곧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고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뒤에 나오는 17-18절을 보면, 유다 백성 가운데서도 특히 정치 종교 민간 지도자들을 가리켜 그들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야웨의 백성이 야웨를 버렸다는 표현은 예레미야서에 여러 번 나온다(2:13,17,19; 5:7,19; 16:11; 19:4). 다른 신들에게 분향한다는 말은 19장 4절과 44장 5절과 8절(또 왕하 22:17; 대하 28:25; 34:25)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바알에게(렘 7:9; 11:13,17), 또는 하늘 여신에게(44:17,19) 분향한다는 표현도 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을 가리킨다. 여기서, 또 다른 데(13:10; 16:11; 22:9)서도 ‘절하다’로 옮긴 히브리 동사는 본디 몸을 깊숙이 숙여 절하는 모습을 말하지만, 흔히 종교적인 숭앙의 대상을 예배하다는 뜻을 지닌다. 개역성서에서는 ‘경배하다’(7:2; 8:2; 26:2)나 ‘숭배하다’(25:6)로 옮기기도 했다. 또, 유다의 죄악과 이들에게 닥칠 재앙은 히브리어로 같은 낱말 <라아>(ra‘ah)의 번역이다. 이 낱말은 ‘나쁜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유다가 저지른 ‘나쁜 것’ 때문에 야웨께서 유다에 ‘나쁜 것’이 닥치게 하시려 한다는 식으로 이 둘을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유다 백성의 죄에 대해서는 2장부터 본격적으로 다룬다.
1장 17절 전반절에서 야웨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명령의 상대가 누구인지 이미 히브리 동사의 명령형에서 알 수 있는데도 따로 인칭대명사 ‘너’를 써서 강조하고 있다. 유다 백성은 야웨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죄악을 저질러 야웨의 심판을 받게 되었더라도 야웨께서 열방의 예언자로 삼으신 예레미야 ‘너만큼은’ 야웨께서 시키시는 대로 나서서 야웨께서 명령하신 바를 빠짐없이 유다 백성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는 앞 7절 후반절의 내용과 거의 같다. 뒤이어 후반절에서 야웨께서는 예언자에게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우리말로는 8절의 첫 말씀과 같지만, 히브리어로는 여기서 두려워 말라는 것은 겁먹지 말라, 무서워 떨지 말라는 뜻으로 8절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그뿐만 아니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는 말씀이 덧붙어 있는 점에서도 8절과 다르다. 예언자가 정말 겁먹고 무서워하며 떨 상대는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를 예언자로 삼으셔서 그들에게로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야웨 하나님이신데도, 예언자가 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면 야웨 스스로 예언자로 하여금 그들 앞에서 떨게 만들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의 실체는 18절에 나오는 야웨의 말씀,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에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그들은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이다. 여기서 ‘족장들’로 옮긴 히브리 낱말은 ‘고관들’(공동번역)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 아무튼 왕들과 족장들은 정치 지도자들을, 제사장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뜻한다. 그 땅 백성,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암 하아레츠>(‘am ha’arets)는 예수님 시대와는 달리 옛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 어느 정도 재산도 지니고 보통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서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민간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결국 정치, 종교, 민간 지도자들 모두, 야웨께서 세우신 예언자와 맞서리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미 앞에서 말한 바처럼, 15절에 비추어 유다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16절의 그들의 범위가 17-18절에서는 유다 백성의 지도층으로 좁혀지고 구체화된다.
이처럼 유다의 정치 종교 민간 지도자들이 예레미야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그가 겁먹고 떨 수 있겠지만, 야웨께서는 그들 앞에서 예언자가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셨다고 하신다. 이런 낱말은 전쟁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그들과 예레미야의 대결은 전쟁과 같은 것인데, 그들이 아무리 무섭게 공격해도 예레미야가 넉넉히 견뎌낼 수 있게 야웨께서 해 주시리라는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내가와 동사 사이에 보라가 들어 있어서, 그 어순을 고려하여 18절 첫머리를 다시 번역하면, “내가 - 보라 - 너로 오늘날 … 되게 하였노라”가 된다. 이 경우에 보라는 동사의 주어인 내가를 강조한다(HAL). 이리하여 싸움은 궁극적으로 그들과 야웨의 싸움이고, 예레미야는 야웨를 대신하여, 야웨를 등에 엎고 그들과 맞서게 되는 것이므로, 그들이 예언자를 결코 이길 수 없다.
바로 이 점을 야웨께서는 19절 전반절에서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라고 분명히 밝히신다. 여기서 ‘치다’로 옮긴 히브리 동사는 ‘전쟁을 벌이다’를 뜻한다. 이는 앞 18절에 나온 여러 표현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하고 잘 어울린다. 마치 전쟁터에서 잘 방비된 성읍을 점령하려고 무섭게 공격해 보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 자들에 비기어 예언자를 괴롭힐 자들의 운명을 표현하고 있다. 후반절의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는 실제로 8절에 나온 표현과 히브리어로는 같다. 개역성서의 19절 끝에 나오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느움 아도나이>)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앞에 끼어 들어가 있다. 이리하여 4절에서 시작하여 세 단계로 이루어진 소명 보도문은 야웨께서 예언자와 함께 하셔서 그를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을 마무리된다.
4-19절을 통틀어 보면, 자신을 일방적으로 열방의 예언자로 뽑으셨다는 야웨의 말씀을 들은 예레미야가 그 말씀에 기꺼이 응답하기보다는 피하고자 사양하지만, 야웨께서는 예언자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우치시면서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에 두시는 상징행동과 아울러, 예언자와 함께 하여 그를 구원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한번 부르신 바를 부르심 받은 자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셨다.
예레미야 1장 4-19절을 이사야 6장과 견주어 보면, 본문의 경우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가 중심을 이루는 것과는 달리, 이사야 6장에서는 이사야가 이른바 하늘 회의를 본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사양하는 예레미야의 모습과 기꺼이 응답하는 이사야의 모습이 대조된다. 그렇지만 부르심 받는 사람의 입에 어떠한 행동이 취해지는 점은 공통된다. 또, 예레미야의 경우에도 두 번씩이나 무엇을 본다.
흔히들 하늘 회의를 보았다는 점이 드러나는 이사야서 6장과 비슷한 본문으로 열왕기상 22장 19-23절을 드는가 하면, 부르심과 사양함과 그 사양함을 상징적인 행동이나 표적으로 물리치셔서 마침내 부르심 받은 사람을 보내시는 식으로 소명 장면이 묘사되는 경우로는 예레미야 1장 말고도 출애굽기 3-4장의 모세, 사사기 6장의 기드온, 사무엘상 10장의 사울의 경우 등을 든다. 이 두 종류가 한데 어우러진 경우는 에스겔 1-3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5).
이런 저런 차이가 있지만, 이런 여러 소명 보도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개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압도당하여 그 일꾼이 되고 만다는 점이다.
메시지
하나님은 말씀의 일꾼에게 초자연적인 환상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경험 가운데서도 귀중한 뜻을 알려주신다. 하나님은 말씀의 일꾼에게 다른 사람들은 예사로 보고 넘기는 현상을 통해서 깊은 뜻을 깨우쳐주시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귀를 주신다.
또,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신 사람을 통해 선포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스스로 지켜보시며 조치를 취하신다. 그런 만큼 말씀의 일꾼된 사람은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너무 초조해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일꾼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주인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기만 하면 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일꾼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더 강하다고 해서 겁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말씀의 일꾼과 함께 하셔서, 반대자들의 박해를 넉넉히 견뎌낼 수 있게 만드시고, 이들이 말씀의 일꾼을 절대로 이기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저버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몸소 재앙을 불러들이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은혜에 응답하여 살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저버린 하나님 백성을 벌하실 때, 하나님은 이방 백성을 심판의 도구로 쓰시기도 한다.
<성경과의 만남 신학과의 만남>